어린소녀들
- 감독
- 김모리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안조아, 한예지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에는 작년 영화들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는 파리가 아니며, 런던이 아니며, 뉴욕이 아니며, 동경이 아니다. 서울에서 영화를 보는 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우리들은 언제나 한발 늦게 그 영화를 보아야 한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더 곤란한 건 그렇게 볼 수 있는 영화들조차 서울 시내에서 그 영화를 보려면 그 시간에 맞춰 한참을 떨어진 극장에 보러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영화를 하루에 단 한 번 밤 12시 40분에 상영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텅 빈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건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새벽 2시 반에 극장 문을 나선 다음 한적한 거리에서 택시를 잡아타기 위해 망연자실하게 두리번거릴 때는 약간 처량해지기까지 한다. 시네필은 보헤미안들이 아니다. 아직 올해가 끝난 건 아니지만 지난 열 달간 본 영화 중 지금 내 두뇌의 스크린에서 가장 맹렬하게 상영되고 있는 영화는 유셴수의 < 인조공간 >이다. 도시의 명멸하는 이미지들. 이미지들의 반복되는 기호. 기호 안에 자리 잡은 시간. 시간 안에서 활동하는 모호한 세계, 세계라는 수수께끼의 이미지. 그 이미지 안에 이따금 바람이 불 때 갑자기 이미지에 구멍을 만들어내고 세계가 침입한다는 기묘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세계의 기기묘묘한 질서를 영화는 붙잡을 수 있을까. 어쩌면 지가 베르토프의 < 카메라를 든 사나이 >와 요리스 이벤스의 <비>의 중간 어디쯤에 자리 잡고 있을 이 영화는 수없이 본 이미지들을 불현듯 새롭게 반짝거리게 만든다. 여기에는 영화가 원래 갖고 있었을 힘을 잡아당기면서(attraction) 그 자리에로 우리를 되돌려 보낸다. 우리들이 처한 이 신기한 영화‘歷’사의 자리. 정확하게 그런 의미에서 지금 가장 흥미로운 이름(중의 한 명)은 라브 디아즈이다. 처음 본 라브 디아즈의 영화는 < 필리핀 가족의 진화 >였다. 10시간 43분에 이른 이 영화를 본 다음 좀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영화를 보는 우리들의 경험이 시간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시간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의 방법을 밀고 나아갔다. (내가 본) 두 번째 영화 < 엘칸토에서의 죽음 >은 다시 한 번 9시간 동안 계속 된다. 태풍이 지나가고 난 다음 고통스러운 고백의 여정이 이어진다. 그러고 나서 < 멜랑콜리아 >를 보았다. 7시간 30분이라는 상영시간은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내가 라브 디아즈를 처음 만난 것은 이 무렵이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에 없는)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 첫 회의 심사위원으로 기꺼이 마닐라에서 서울까지 먼 초청에 응했다. 라브 디아즈는 쾌활하고 자기 의견을 말하는데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때 그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의 영화가 그렇게 긴 상영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은 없나요?”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뇨, 그런 것 따위는 걱정할 겨를이 없어요. 나는 영화를 볼 때 닥쳐올 시간만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영화를 볼 거라고 믿습니다. 그 믿음에 대답하는 사람들이 제 영화를 보러 올 것입니다” 영화에서 닥쳐올 시간, 이라는 말. 나는 영화의 시간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처음 만났다. 그런 의미에서 라브 디아즈는 내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이다. 그런 다음 그는 계속해서 걸작을 찍었다. < 북쪽, 역사의 끝 >은 비교적 짧은 상영시간이지만(이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4시간 10분이다) 이 영화는 라브 디아즈가 새로운 경지로 들어서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올해 로카르노에서 (이 이상한 제목을 <아프리오리>로 번역한다고 유운성 씨가 내게 일러주었다)로 작품상인 황금 표범상을 받았다. (그런데 나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 대신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라브 디아즈가 현재 진행 중인 < 폭풍의 아이들, 제1권 >을 볼 수 있었다. (이하 <폭풍의 아이들>) 라브 디아즈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같은 제목 아래 세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게 될 예정이라고 했다. 더 좋은 일은 이 영화 상영을 마치고 난 다음 라브 디아즈와 관객과의 대화를 내가 진행하게 되었다. <폭풍의 아이들>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사건은 2013년 11월 필리핀을 강타한 태풍 욜란다 ‘이후’의 풍경이다. 뉴스에 따르면 욜란다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태풍이었다고 한다. 라브 디아즈의 설명에 따르면 매년 필리핀은 평균 28개의 태풍을 맞이하고 그중 몇 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다고 한다. 하지만 욜란다는 이제까지의 태풍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로 찾아왔다. 재해가 지나가면서 6,293명이 사망했고, 1,061명이 실종됐고, 28,689명이 심각한 부상을 당했으며, 1,140,332채의 건물이 부서졌고, 1,300만 그루의 나무가 뽑히거나 부러졌다. 라브 디아즈도 태풍이 지나가는 동안에는 규모가 너무 심각해서 미처 촬영을 시작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교통이 두절되어서 이동할 수 없었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영화의 첫 장면은 한밤중에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치 칠흑 같은 밤. 아마도 그건 이 영화를 흑백으로 찍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엔 별다른 설명도 없이 그렇게 비가 내리는 장면이 전부이다. 아니, 그 말은 정확하지 않다. 여기엔 비가 내리는 소리가 우리를 압도한다. 저 멀리 도시의 불빛이 어른거리고 그 화면을 지워버릴 것처럼 그렇게 비가 내린다. 그렇게 아침이 밝아오면 강가로 수없이 많은 재해의 흔적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흘러내려 간다. 이미 도심은 물에 잠겼고, 사람들은 거의 무릎까지 물이 차오른 도로 위로 자전거의 페달을 열심히 밟으면서 힘겹게 이동하고, 마치 허우적거리듯이 삶의 리듬이 다시 시작한다. 라브 디아즈의 카메라가 멈춘 곳은 다리 위에서 강물 위로 쏜살같이 흘러내려 가는 재해의 흔적들을 건지는 아이들이다. 거기서 이제는 주인을 알 수 없게 된 물건들이 흘러내려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무언가 쓸 만한 것이 있을까, 그렇게 지켜보며 안간힘을 써서 건지는 중이다. 하지만 라브 디아즈는 이 아이들에게 말을 걸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의 카메라는 말을 걸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아이들은 자기 일에 바빠서 라브 디아즈의 카메라에 관심을 쓸 겨를이 없다.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닥쳐온 것일까, 그리고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닥쳐올까. 닥쳐올 시간. 그걸 바라보는 영화의 시간. 라브 디아즈의 카메라는 그 시간의 사이 안으로 들어간다. 오늘날의 영화에서 지아장커, 아핏차퐁 위라세타쿨, 차이밍량에 이어 라브 디아즈가 앙드레 바쟁의 계보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 거기 영화가 있어야 한다. 이 절대적인 호소. 그 안에 놓여진 시간. 거기 버티고 있는 세상.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21세기 아시아 영화들이 디지털을 선택하면서 일제히 바쟁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라브 디아즈는 마치 그 강물에 떠밀리듯 바다까지 흘러온다. 그리고 거기서 태풍에 밀려온 거대한 선박이 마을을 덮친 다음 그냥 거기 괴물처럼 놓여있는 모습을 바라본다. 이제 태풍은 지나갔지만 그 흔적이 남겨놓은 삶은 피폐하기 짝이 없다. 거의 쓰러져가는 집들. 그렇다고 해서 라브 디아즈가 그들의 사연에 귀 기울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아주 가끔 그들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그들이 라브 디아즈에게 말하기도 하지만 구구절절한 사연을 담는 것이 그의 목표는 아니다. 그의 카메라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서, 혹은 가끔 지나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서, 살아남은 자들을 바라본다. 여기서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내가 여기에 있다, 는 도착이다. 그게 아니라면 영화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때 이 영화는 손으로 들고 찍은 쇼트와 고정시켜 놓고 찍은 쇼트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두 종류의 촬영이라는 노동 사이를 오간다. 대부분의 촬영은 라브 디아즈 혼자서 소니 알파 NEX 알파 3로 진행했다. 작고 기동성이 있으며 동시에 노출에 대한 보정력도 뛰어나지만 결정적으로 장시간 촬영의 경우 배터리 충전이라는 문제와 부딪치게 되는 이 카메라를 들고 다큐멘터리를 혼자서 찍는 것은 좀 특별한 결정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장면들은 롱 테이크로 찍혔다. 전적으로 운에 맡긴 장면들. 게다가 단 한 장면도 예외 없이 야외장면이고 여기는 거의 전력 공급이 중단된 어촌 마을이다. 말하자면 충전이라는 절대적인 요구와 그 불가능성. 여기서 내가 보는 것은 라브 디아즈가 카메라에 주어진 생명의 시간을 고스란히 존중하고 싶다는 결정이다. 점점 영화에서 카메라는 하나의 결정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에게 무엇이 닥쳐올까. 죽음은 우리의 소재가 아니다. 거기 카메라가 있을 때 몸은 시간을 위해 살아낼 것이다. 거기서 우리의 사건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영화. 그걸 선택할 때 그건 그 카메라에게 주어진 생명을 받아들이겠다는 하나의 태도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동안 그 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한다. 라브 디아즈는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 내내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 양,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그저 거기에 자신은 단지 카메라를 가져갔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거기에 카메라를 가지고 갔을 때 누구나 그렇게 찍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그걸 알겠다. 그렇게 욜란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 살아남은 아이들을 영화가 바라볼 때 그건 하나의 선언이다. 어떤 선언?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제부터 살아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들은 신 나게 (당신이 알고 있는 바로 그 노래) ‘Let it go’를 부른다. 소년은 담담하게 지난 태풍이 오던 날 밤에 아버지가 휩쓸려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을 하면서 아이는 아무 원망도 담지 않은 채 바다를 바라본다. 라브 디아즈는 이 소년을 한참을 바라본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자신들을 덮친 괴물 같은 배에 아이들이 기어 올라가 마치 휴가를 즐기기라도 하듯이 다이빙을 하기 위해 뛰어내린다. 이 순간은 그저 아이들의 여름방학처럼 보일 만큼 아름답게 찍혔다. 운동하는 이미지의 슬로우 모션. 삶의 슬로우 모션. 라브 디아즈는 그렇게 지금 생명을 찍는 중이다. 나는 어서 빨리 라브 디아즈의 다음 영화가 보고 싶다. 그는 우리가 이 힘겨운 세기를 함께 건너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이름(중의 한 명)이다. 올해가 막 지나가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1980년대의 한국영화는 < 바람 불어 좋은 날 >(1980)과 < 꼬방동네 사람들 >(1982)로 시작해 < 우묵배미의 사랑 >(1990)으로 끝난다. 1980년대는 민중의 삶이 대중영화 안에 존재했던 마지막 시기였다. 민중이 제기했던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 없이 1990년대는 시작됐고, 급조된 사회 변화가 한국영화에 시답잖은 영향을 끼친 결과였다. 그나마 1980년대를 낭만적으로 회고하던 대중문화가 섣불리 1990년대로 돌아선 지금, 나는 1980년대의 영화를 꼼꼼하게 되돌아볼 필요성을 느낀다. 거기에는 버리지 말아야 했으나 버려버린 시간의 흔적이 생각보다 차지게 배어 있다. 하나하나 꺼내볼 때면 남다른 기분을 주는 1980년대 한국영화 가운데 이장호 의 < 과부춤 >이 있다. 흥행에 실패해 변두리 상영관에서 동시상영의 운명을 맞던 즈음, <과부춤>과 나는 만났다. 영사실에서 실수를 했는지 의심했을 정도로 괴상한 영화였다. 첫 기억은 그랬다. < 과부춤 >은 이동철의 원작소설 <오과부>를 각색한 작품이다. 당시 이장호 는 이동철의 < 어둠의 자식들 >을 3부작으로 만들기로 화천공사와 계약한 상태였는데, 복잡한 시대상황 탓에 영화 작업 또한 어지럽게 진행되던 터였다. <어둠의 자식들>의 1부(1981)는 흥행에 성공했으나, 검열기관은 <어둠의 자식들>의 2부를 애초부터 허용하지 않았다. 속편 격인 내용을 자유롭게 바꾸어 나온 영화가 < 바보선언 >(1983)인데, 문제는 흥행 실패를 우려한 영화사에 의해 <바보선언>의 필름이 1년 넘게 창고에서 썩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형편에 <바보선언>보다 뒤에 만들어진 <과부춤>이 극장에 먼저 걸렸다. 그러나 1984년 설 연휴에 개봉된 이 영화는 흥행에 참패하고 만다. 1970년대 흥행감독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장호 는 1980년대 들어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 바람 불어 좋은 날 >로 근사하게 출발했으나, 관객은 그의 영화를 사랑했던 만큼 어떨 때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대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장호가 슬럼프의 시기에 발표해 상업적으로 실패한 작품 중 몇 편은 이후 그의 걸작으로 남게 된다. 흥미로운 점이 아닐 수 없다. < 과부춤 >과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1987)가 그런 작품이고, 나중에 개봉돼 흥행에 성공했으나 한동안 버려졌던 < 바보선언 >도 마찬가지의 경우다. 이장호의 실험정신이 깊이 반영된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세 작품은 하나로 묶인다. 요즘 영화와 비교해 실험이라 부르기에 부족한 부분이 많고, 형식과 내용이 적절하게 섞이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최소한 세 영화가 시대를 앞서 갔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 과부춤 >은 몇 장의 사진과 현실의 이미지를 교차하며 시작한다. ‘한국에서 개최된 1980년 미스 유니버스, 스포츠 경기에 몰린 관중들, 외국인 관광객, 강남 아파트의 청사진’과 ‘산동네를 오르는 여인, 거리의 손수레 상인, 집 없는 아이들, 노동 중인 일용직 근로자’를 앞뒤로 배치한 도입부는 이장호 의 선명한 선언에 다름 아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민중의 삶에 관심을 가지다 깨달음을 얻었던 이장호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찍고 싶었다. 그 시작이 < 바람 불어 좋은 날 >이었으며, <과부춤>은 < 어둠의 자식들 >과 < 바보선언 >을 절충한 영화에 해당한다. 밑바닥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어둠의 자식들>에서, 전례에 드문 과감한 형식은 <바보선언>에서 각기 따왔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거침없는 형식미다. 자질구레한 설명을 요하는 장면이나 일상을 담은 장면은 저속촬영을 통해 자유자재의 속도로 내달렸고, 필름의 속도와 별개로 인물의 음성을 재잘대는 하이 톤으로 변조했다. 흡사 이야기를 압축한 듯이 빠른 속도감을 느끼도록 만든 것인데, 단연 두드러진 효과는 무성영화에서나 봄 직한 슬랩스틱의 맛이다.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튀어나오는 슬랩스틱은 상식에서 벗어난 코믹한 상황이 현실의 비극과 만나 빚는 아이러니를 표현하는 데 그만이며, 리얼리즘 영화를 추구한다던 이장호 가 난데없이 구사한 형식미는 그 순간에 답을 구한다.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지는 않으나 < 과부춤 >은 3개의 부분으로 구성된 영화다. 말숙이 주인공인 1부, 말숙의 올케가 등장하는 2부, 에필로그로서의 3부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하지만 이장호 는 세 부분의 이야기를 구속해 통일감을 기하기보다 각각 개성 넘치는 성격을 부여해 헐거운 느낌을 살렸다. 일례로, 말숙이 재일교포 미망인으로 거듭 태어나는 장면은 일본풍의 음악과 단순한 실내를 배경으로 모던하게 표현됐다. 현실과 유리된 분위기에서 조작된 허상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밖에 올케의 집에 세 든 조씨가 창을 한다는 점을 착안해 짧은 판소리 장면을 두 번 삽입했고, 말숙의 오빠가 교통사고로 죽는 장면과 올케의 흑백 악몽 장면을 오가며 극의 긴장감을 더했다. 민중을 주인공으로 삼은 1980년대 영화의 한 아이콘인 김영동의 음악은 영화의 여러 형식 사이로 넘나든다. 그의 장기인 모던한 국악은 물론, 국악과 재즈를 결합한 실험적 사운드는 일품이다. 실험적인 양식이 먼저 눈에 띄는 영화지만, < 과부춤 >의 주제는 1980년대의 시대정신에 있다. <과부춤>의 진정한 가치는, 절박한 1980년대의 중심에서 뽑아낸 표정이 오롯이 살아 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한방살림을 하는 가정에서 중년의 남편과 아내가 아들과 딸 몰래 힘겹게 몸을 섞는 장면은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끌어낸다. 미래를 낙관하지 못하는 청년은 실의에 빠져 지내고, 어린 소녀들은 살림에 보태려고 공장에서 야근도 마다치 않고 일한다. 그런가 하면 하층민을 등쳐먹는 사기꾼들이 도처에 널려 있고, 여공이 재봉틀을 돌리는 시간에 술집과 나이트클럽은 손님으로 넘쳐난다. 1980년을 끝으로 스크린에서 사라진 풍경 중 가장 소중한 것은 ‘노동의 시간’이다. 심각한 착취 구조 아래에서도, 민중은 육체적 노동을 통해 삶을 지탱했다. 같은 현장에서 일하지 않더라도 몸을 부려 밥벌이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연대의 의식이 존재했다. 그것은 또한, <과부춤> 같은 영화가 1980년대를 끝으로 스크린에서 사라진 이유이기도 하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부의 축적은 소수의 계층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1980년대가 도래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부동산과 주식 시장의 폭발은 저마다 눈에 불을 켜고 부를 축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사회에서 1억은 도달하기 힘든 부를 뜻하는 심리적 경계였다. 그런데 1990년대가 열리기 전부터 부동산시장과 주식시장은 가파른 속도로 성장했고, 개인이 억을 향유하는 게 가능해졌다. 집 한 채 장만하는 게 꿈이었던 서민들은 어느새 부동산 거래로 거금을 쉽게 벌어들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으며, 19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주식 거래에 관심조차 없었던 보통사람들이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 1980년대의 신군부 정권이 개인의 의식에 물들인 천박함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자기 잇속을 차리기에 급급한 자의 머릿속에는, 함께 노동하는 자들의 연대의식 같은 게 끼어들 틈이 없다. 이제 우리는 사라지고 나만 소중하게 여기는 시대가 성큼 닥쳐온 것이다. 민중의 개념이 다수의 중산층 의식에 자리를 내주고만 현재, < 과부춤 >이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 타자의 이야기로 추락하는 건 필연이다. < 바람 불어 좋은 날 >을 보고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는 장선우는 < 우묵배미의 사랑 >에서 자신의 본령을 분명히 밝힌다. <우묵배미의 사랑>의 한 장면은 1980년대의 끝자락을 예리하게 집어낸다. 주인공 배일도 부부는 허름한 용달차에 몸과 짐을 싣고 이사를 떠나는데, 용달차는 하필 강남을 통과한다. 거대한 아파트촌, 확 트인 대로, 코엑스 건물과 올림픽대교가 위용을 뽐내지만, 서울 변두리에서 경기도 촌동네로 이사 가는 그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꿈에서도 누릴 수 없는 완벽하게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장면은, 우리의 시대와 우리의 세계가 1980년대와 함께 종말을 고했다고 말한다. 이동철이 쓴 <오과부>는 따로 살면서도 연대의 의식 아래 공동체를 꾸리는 다섯 과부에 관한 이야기다. 누가 썼는지 알 수 없으나, <오과부>라는 제목 밑으로 ‘우리 이웃들의 삶을 솔직하게 기록함으로써 부끄러움을 진솔한 감동으로 바꿔놓은 이야기’라는 해제가 붙어 있다. 영화 < 과부춤 >의 클라이맥스는, 이장호 가 해제 중 ‘우리’라는 말에 주목한 끝에 획득한 보물이다. 에필로그의 뒷부분, 골목에 쓰러진 임산부가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한다. 행복한 얼굴의 사람들은 자기 삶을 꾸리느라 그녀를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한다. 실의에 빠져 아이를 업고 오던 말숙이 마침내 그녀를 발견하고 일으켜 세운다. 내가 사랑하는 장면은 그 다음이다. 여인은 과부들의 도움으로 아이를 출산하고, 과부들이 그녀 곁에서 각자의 표정을 짓는다. 행복함과 아름다움의 결정체인 이 장면은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는 동방박사의 방문을 기억하게 한다. 도시빈민 선교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동철도 그 중 한 명이었다)을 만나면서 이장호는 많은 종교적 위안을 받았으면서도, 정작 그의 영화에서 현실 기독교의 모습은 아름답게 그려지지 않았다. 이장호가 기독교에 대해 품었던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표출된 게 <과부춤>의 출산 장면이 아닌가 싶다. < 과부춤 >은 산동네를 찬찬히 돌아보면서 끝을 맺는다. 눈이 내리고, 산동네는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다. 한쪽 끝에는 포크레인이 개발을 재촉하며 섰지만, 끝없이 펼쳐진 산동네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안다, 가난한 자들이 연대했던 그 자리에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섰음을. <과부춤>은 다가올 시대가 어떻게 미쳐 돌아갈지 정확하게 간파한 작품이다.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세상이 걸어갈 것을 아는 젊은 작가 이장호 는, 말숙에게 건네는 사기꾼 과부의 말을 빌려 세상에 경고했다. “앞만 봐, 세상을 보란 듯이 속여 보자구” 그러나 세상은 경고를 충고로 받아들였다.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았으며, 세상에는 속여서라도 잘 살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과부춤>을 다시 보며 쓰라림을 느꼈다. <과부춤>은 뜨거운 영화다. 반대로 요즘 한국영화들은 차갑다. 작금의 젊은 작가들에게 뜨거운 마음이 없다고 탓할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