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연인
- 감독
- 이성수
- 제작년도
- 1994
- 출연
- 이경영, 우희진, 김성옥, 윤승원, 박주미, 전무송, 이광수, 이유진, 김영석, 이남희, 방은희, 추귀정, 신철진, 이인영, 조성권, 송승필, 이만용, 김연수, 박미애, 이대희, 문기성, 김윤석, 신진영, 강선화
“봄이 왔다. 봄날과 함께 그도 왔다. 아직 소녀는 오지 않았다.” 봄은 이미 왔지만 겨울 끝자락의 신작로 오솔길.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외롭게 걷고 있는 남자. 그리고 아무도 없는 기차역 벤치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 그 남자가 기다리는 소녀는 한 마리 나비처럼 훨훨 날아서 올 것이다. 쓸쓸한 통기타 선율에 흘러내리는 허밍. 잎이 떨어진 마른 가로수. 텅 빈 기차역. 벤치가 풍겨내는 서정은 기이하게 등장하는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농부의 모습마저 낭만으로 채색해 버리는 마력을 발휘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 나비소녀 >는 이제는 우리가 레테의 강으로 흘려보냈다고 생각하는 그 옛날의 낭만과 순수를 추억하게 한다. 그렇게 어린 연인들의 슬픈 러브스토리가 촉촉하게 감겨오는 것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978년에 개봉된 < 나비소녀 >는 송영수 감독의 데뷔작이다. 이 영화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 >, <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 등과 스타일이 전혀 다른 영화라 그다지 중요한 필모로 언급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의외로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무엇보다 70년대 중반 인기를 끌었던 하이틴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아류작으로만 끝나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할 만 하다. 1977년 초 < 고교얄개 >의 흥행 성공은 ‘얄개’라는 아이콘을 탄생시키면서 고교물 혹은 하이틴 영화라고 불리게 되는 일종의 장르를 만들어 낸다. 이 영화들은 남고를 배경으로 철없는 주인공이 어떠한 계기로 인해 교훈을 얻고 성장한다는 스토리를 코믹하게 다루고 있다. 하지만 남자 고등학생의 이야기가 히트하기 이전에 이미 임예진을 주인공으로 한 순정 하이틴물이 있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진짜 진짜’ 시리즈로 불리는 세 편의 영화는 낭만적 혹은 비극적 사랑의 판타지를 전면화하면서 소녀의 순정, 만화적 감수성을 자극했다. 이후 2년 동안 하이틴 영화는 이러한 두 개의 소재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우후죽순 아류작들이 속출하게 된다. 결국 < 나비소녀 >는 하이틴 영화의 끝자락에 개봉되어 안타깝게도 아류작의 외피를 쓴 채 관객들의 외면을 받고 만다. 두 주인공이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만나 사랑을 시작한다는 설정은 이 영화가 하이틴 영화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직접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더군다나 이 영화 속에는 얄개 이승현 과 김정훈 이 카메오로 출연하고 있다! 송영수 감독은 < 나비소녀 >에서 기존의 얄개영화가 강조했던 모범과 건전한 이미지를 양창수( 강태기 )에게 할애한다. 그리고 임예진의 이미지는 이선희( 명현숙 )에게로 이입하고 있다. 이와 같이 기존의 하이틴 영화와 같은 선에서 출발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나비소녀>는 하이틴 영화의 장점만을 취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전체적으로 명현숙 중심의 스토리라인을 통해 소녀 취향의 낭만적 사랑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강태기를 중심으로 한 친구 관계를 통해 좀 더 다양한 사회현상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하이틴 영화가 강조했던 모범과 건전은, 실은 기성세대의 질서를 그대로 청소년들이 수용해줄 것을 강요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하이틴 영화가 당시 학생들의 고민을 제대로 장면화하지 못하는 한계로 작용했다. 하지만 송영수 감독은 두 주인공 창수와 선희를 고등학생에서 바로 대학생으로 만들면서 기존의 하이틴 영화가 잔소리처럼 강요했던 청소년에 대한 모범과 건전에 대한 강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다. 주인공들이 성인이 되는 순간 그들의 시각과 발언권은 좀 더 확장되었고, 당대의 사회적 경향을 스토리에 반영할 수 있었던 셈이다. 창수의 친구 기훈( 이계인 )의 에피소드를 통해 경제개발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 있던 시절, 노동하는 부모의 무관심으로 괴로워하는 학생의 모습을. 캐나다로 이민 가는 친구를 통해 선진기술 습득을 통한 나라발전이라는 사명감을. 창수의 낙도 봉사활동을 통한 농촌계몽 등 당시 사회의 모습과 가치관을 좀 더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창수에게 주어졌던 농촌계몽이라는 대의가 선희와의 사랑을 지속시키지 못하고 결국 그리워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간다. 당시 잘 살아보세 혹은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대의에 개인의 삶이라는 것이 분명히 희생되고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는 장치로 읽어도 무방하다고 본다. 봄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마치 쓸쓸한 가을 같은 영화. 아니면 소녀 취향의 신파멜로드라마로 치부해 버려도 상관없을 것 같은 이 영화가 재미있어지는 지점은 또 있다. 바로 송영수 감독의 < 나비소녀 >에는 70년대 중요한 영화인물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먼저 이 영화의 원작은 < 별들의 고향 >의 이장호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유현목 감독과 영상시대 출신의 변인식 영화평론가는 배우로서 참여하고 있다. 시나리오의 송길한 . 귀에 착착 감기는 영화음악을 선사한 뚜아에모아 출신의 이필원 의 음악까지. 알고 보면 이 영화는 70년대 새로운 한국영화를 주창했던 이들의 그림자가 구석구석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면면만 보고 영화를 걸작이라고 우길 생각은 없다. 신인감독의 패기는 느껴지지만 분명 과잉과 거칢이 있는 영화다. 하지만 외적인 요인을 다 떠나 이 영화는 낭만과 순수의 서정이 있어서 좋다. 그것이 이 영화의 전부이기도 하고 말이다. 강태기 명현숙 감독 송영수 각본 송길한 촬영 김영대 1977년 100분 칼라 판매원 비젼비디오프로덕션 영상도서관 배가번호 1376
어떤 영화는 한 장면으로부터 기억된다. 서사가 집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영화가 지닌 과잉성이 서사의 한계까지 침범해 서사를 붕괴 직전으로 몰고 가는 위태로운 장면. 내가 알고 있는 위대한 장면은 대체로 그러하다. < 길소뜸 >이 훌륭한 영화라면 그것이 모든 면에서 뛰어나기 때문이라기보다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을 내 기억에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그 장면은 이렇게 등장한다. 어린 연인이었던 동진( 신성일 )과 화영( 김지미 )은 한국 전쟁으로 헤어진 지 30여 년 만인 1983년,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통해 다시 만나 그들의 잃어버린 아들 석철( 한지일 )을 찾아 춘천에 간다. 폐물 더미 옆의 더러운 판잣집에서 야비한 짐승처럼 살고 있는 아들과, 그 비천한 모습에 마음이 열리지 않는 부모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하룻밤. 동진이 방 안으로 들어간 뒤, 화영은 집 옆에 세워둔 차에서 자겠다며 운전석에 말없이 앉아 있고, 석철은 평상에서 소주병을 들이킨다. 이 장면은 차 안에 있는 화영의 시점으로 촬영되었다. 평상에서 석철이 소주를 들이붓는 모습이 보인다. 석철의 아내가 석철에게 다가와 그만 마시라며 만류하자 석철은 아내를 강제로 평상에 누이며 옷을 벗기려 한다. 화영의 시선을 눈치챈듯한 석철의 아내는 석철의 손길을 뿌리치며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머쓱해진 석철은 벌떡 일어서더니 화영의 차 쪽으로 서서히 몸을 돌린다. 그러자 화영은 차를 빼 다른 곳으로 간다. 이 장면이 충격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의 외설성 때문이다. 임권택 의 영화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관심을 가진 적이 거의 없다. 더구나 이 영화는 이산가족이라는 한국현대사의 비극적 소재를 다루고 있다. 혈연을 향한 본능과 의무, 그것을 무화하는 삶의 냉기가 경합하는 서사에 난데없이 리비도가 최악의 형상으로 등장한 것이다. 자신의 자궁으로부터 생산되었으나 30여 년 만에 처음 조우한 핏줄이 지금 발기한 성기의 형상으로 여인 앞에 서 있다. 이것은 과도한 해석이 아니다. 석철은 거의 사회화되지 않은 존재이다. 돈을 벌기 위해 사람이 물에 빠져도 죽은 다음에야 건져 올린다고 말할 때, 그는 단순히 비윤리적 인간이 아니라 아버지의 율법을 내면화한 적이 없는 인간이다. 차에 치여 피 흘리며 죽어가는 개를 먹겠다며 끌고 와 화영을 소스라치게 만들었던 이 사내는 전술한 장면 직전의 식사 장면에서 친부모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을 어머니라고 생각하며 쏴 죽였으며 그래도 어머니가 자꾸 되살아나더라.”고 태연하게 술회한다. 그리곤 언제 죽을지 모르니 “자식이나 실컷 싸질러놔야겠다는 생각으로 (베트남여인들에게 정액을) 마구 갈겨댔다.”고 덧붙인다. 이 원시적 남성의 언어에서 총알-정액과 계열과 베트콩-어머니-베트남여인의 계열이 각각 동일화되고 있음은 분석의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양자는 고스란히 성 충동과 성적 대상의 관계이다. 그렇지 않다면 석철이 부모나 아버지를 원망한 게 아니라, 어머니를 떠올리며 총을 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더구나 이 영화에서 화영은 남성들의 유일한 성적 대상이다. 화영의 남편은 회상 장면에서 이미 중년이 된 화영에게 능청스럽게 구애하며, 초로의 동진은 화영을 여전히 욕망의 눈길로 바라본다. 만취한 상태로 아내를 범하려다 실패한 석철이 화영에게 몸을 돌릴 때, 그것은 명백한 성적 위협의 순간으로 드러난다. 이 순간은 아찔하다. 그가 만일 차의 문을 열고 생모에게 달려들었다면 이 서사는 완전히 파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만일 그가 생모의 곁에 앉아 온순하고 동정적인 모습으로 돌변했다면 이 서사는 불만족스러운 진부한 결말에 이끌렸을 것이다. 임권택 의 선택은 화영이 그 자리를 피하는 것, 그럼으로써 표현되지 않은 위태로운 리비도를 끝내 괄호 안에 묶어두는 것이었다. 가족과 혈연에 연관된 주류 담론과 지배적 감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 길소뜸 >은 역사, 계급, 성의 단일 담론으로는 결코 온전히 해명되지 않은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영화이며, 임권택 의 민족적 리얼리즘이 자연주의에로 확장되면서 빚어낸 걸작이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지 몇 년 뒤에 시작된 소위 한국 뉴웨이브가 이 영화로부터 더 많이 배웠어야 했다고 나는 여전히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