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씨구~ 좋다! 설연휴 가족 나들이
- 제작년도
- 2010
올해는 `평상심(平常心)이 곧 보리(菩提)`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단번에 깨친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지향한 선승(禪僧) 성철스님이 탄생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주말에는 가족들과 함께 새로운 카메라 정보도 구할 겸 용산의 전자상가를 들렀다가 처제가 3년 전 100여만 원에 구입한 디지털카메라 니콘 D-70이 30만 원 정도의 중고가격으로 거래된다는 정보를 접했다. 필자는 10년 전 디지털기기의 등장으로 필름시대가 곧 끝날 것으로 예상하여 아껴오던 니콘 F3 필름카메라를 구입가의 50% 가격으로 쓰라린 심정을 삭히며 중고매장에서 처리 했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빠른 디지털시대의 흐름을 예견한 슬프지만 나름대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2011년 10월 5일(음성인식이 가능한 아이폰4S 발표 다음날) 애플의 영원한 정신적 지주인 CEO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불과 3년 전인 2009년 2월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게임산업의 선망업체로 지목했던 닌텐도는 지난 1월 26일 1981년 이후 30년 만에 처음으로 영업적자를 기록하면서 이와타 사토루 닌텐도 사장은 기자회견장에서 머리 숙인 인사로 그 처절함을 대변하였다. 또한 코닥은 132년간 필름시장을 주도하고, 1975년 디지털카메라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필름시장에만 안주하는 오판과 실수로 2012년 1월 19일 파산보호신청을 했다. 그리고 곧바로 비용을 줄이기 위해 디지털카메라, 포켓캠코더, 전자액자 사업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디지털시대에 디지털카메라의 원조가 망하다니 웃지 못 할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슬픈 사연 뒤편에는 거푸집 안쪽 형상에서 느껴지는 ‘일루전’과 같은 상호간 묘한 역학관계가 공존하고 있다. 애플은 MP3라는 장난감 같은 음악기기로 출발하여 휴대전화와 영상기기, 카메라의 진화를 거쳐 ‘앱스토어’라는 숨은 복병을 마련하였고, 이제 모바일게임분야까지 잠식하며 닌텐도의 아성을 결국 잠재우게 하였다. 그러나 출시 첫날 기대에 못 미친 아이폰4S로 ‘애플 4.5% 주가하락’, 이에 ‘삼성은 얼씨구’가 되었다가 하루 뒤 스티브 잡스의 사망으로 ‘유작구입 응원쇄도’에 극적 반전을 이루면서 긴장감 넘치는 한편의 기업드라마를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코닥의 경우, 기존 주력제품이던 필름시장이 잠식당할 것을 우려해 상대적으로 디지털카메라의 개발과 마케팅에 적극 나서지 않음으로서 결국 파산신청의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을 맞게 되었다. 파산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1984년 LA올림픽 공식후원사로 선정된 일본 후지필름이 값싼 필름으로 미국시장에 뛰어들었고, 2000년대부터는 캐논, 소니 등으로부터 카메라시장의 공격을 받으면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이후 급속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되면서 132년 긴 아성의 세월이 20년이라는 실로 짧은 시간에 무너진 것이다. 반면에 후지는 이미 필름이 사라질 미래에 대비해 필름과 디지털 광학기술을 활용한 사업구조조정을 모색해왔다. 특히 고부가가치산업분야인 의료기기분야를 비롯하여 검사장비와 제약·화장품 그리고 복사기, 액정표시장치(LCD) 패널소재 등으로 새로운 사업영역을 넓혀나갔다. 이렇게 코닥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 환경에 대응하지 못해 고배를 마신 글로벌 기업들이 이외에도 여럿 있다. 전 세계 휴대폰시장의 맹주였던 핀란드의 노키아가 대표적이다. 노키아는 한때 세계 휴대폰시장 점유율이 40%까지 육박하는 선도기업이었지만 스마트폰 트렌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애플과 삼성에 밀려 났다. 미국 2위 서점 그룹으로 지난 40년간 명맥을 이어왔던 보더스 또한 2011년 2월 경영난으로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보더스의 퇴장은 `제2서점의 40년 역사 마감, 399개 체인점 폐업, 직원 1만 700명 실직`이라는 헤드라인 그 이상을 의미한다. 경쟁사인 반스&노블스나 아마존닷컴과 달리 전자책으로 전향한 소비자 구미에 적절히 대응치 못한 것이 보더스의 패인으로 풀이된다. 한편, 반스&노블스는 자사 전용 전자책 단말기인 `누크(Nook)`와 스마트패드를 이용한 대대적인 프로모션 광고로 사람들의 서점 방문을 유도하고 있다. 오프라인 서점 역시 흔들림 없을 것 같았던 음반 코너를 과감히 걷어내고 장난감이나 캐릭터 상품을 판매하는 매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100년 역사를 자랑하던 미국 최대 대형마트였던 K마트도 창립 40주년이던 2002년 법정관리를 통해 파산했다. 월마트가 상시할인정책(EDLP)과 효율적인 물류시스템 개선을 통해 고객 신뢰를 확보한 반면 K마트는 기존의 고품질 브랜드 상품 전략을 고수하다 경쟁에서 밀려났다. 성공과 실패의 관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같이 묘한 상황으로 상호 공존하는 아즈텍 개미 쌍생아의 이율배반적 생태 서열과도 유사하다. 그렇다면 최근 성공가도를 달리는 기업들의 반대급부 상황을 살펴보자. 애플은 지난해 388억 달러(약 44조 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전 세계 휴대폰시장의 영업이익 중 80%를 한 회사가 장악함으로서 하드웨어사업을 넘어 소프트웨어와 콘텐츠업계를 지배한 것이다. 세계 최대 인터넷업체 구글은 최근 구글 브랜드를 장착한 음악재생 시스템을 내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2011년에는 모토로라를 인수하면서 스마트폰 제조에 뛰어들었고, 구글 플러스를 통해 페이스북이 장악한 SNS 영역에도 첫발을 디뎠다. 그리고 세계 최대의 인맥관리서비스(SNS)회사 페이스북은 2011년 음악·영화 콘텐츠 유통에 이어 최근 전용 스마트폰 개발에 들어갔다. 한편 인터넷 도서·음악 유통사 아마존도 2월 17일 현재 199달러(약 23만원/아이패드2는 499달러; 약 58만원)의 저가보급형 태블릿PC `킨들 파이어`를 389만대 판매하는 선풍적인 인기에 힘입어 `킨들 폰` 개발로 스마트폰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다. 국내에서도 이에 질세라 전자책 제작업체 아이리버가 신제품 ‘스토리K’를 99,000원이라는 초저가의 가격을 내세워 ‘20일 만에 8,000대 판매’라는 기록을 세웠다. 성공으로 대표되던 대기업들의 줄 이은 도산은 예측불허 디지털시대에 ‘성공으로 인한 실패’라는 역설적 교훈을 남긴다. 필름을 대표했던 코닥과 게임을 대표하던 일본의 닌텐도를 역사적 경험으로, 급변하는 미래를 예측하는 혜안을 가지고 다각화, 다면화, 다중화에 대한 논리 구축과 통찰력 있는 대응이 필요한 변곡점의 시대이다. 그리고 이미 32년 전에 출판된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에서도 예견한 정보화혁명 속의 ‘프로슈머’와 21년 전 출판된 <권력이동>에서의 ‘지식 권력’에 대한 담론과 더불어 ‘감성서비스, 이북(전자책), 초고속 클라우딩 시스템, 커넥티드와 IPS,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실감영상, U헬스와 의료영상, 뎁스볼륨렌더링, 홀로그램’ 등 미래융합형 문화예술콘텐츠 키워드를 화두로 국가 발전을 위해 이종 학문·산업간 치열하게 토론·연구·개발·상품화·산업화에 열정을 쏟아야 할 때이다. 요컨대, 우리 같은 문화예술인들이라면 태생적으로 로알드 달(Roald Dahl)의 어린이 책 주인공 <꼬마 친구 마틸다>처럼 해맑고 따뜻한 가슴과 아름답고 순수하고 정의로운 머리를 지녀야 함에 의심할 나위 없어야 하고, 반칙을 횡횡하면서 허영의 천막을 둘러치는 우리나라 일부 정치인들의 파퓰리즘이나 정책과 예산을 거머쥔 기득권의 헤게모니에 육보시로 예술과 학문의 순수성을 오염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처럼 예리한 결단력과 동물적 직관을 가지고 새로운 ‘창조’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또한 르네 마그리트의 <골콘다>처럼 해묵은 안주의 소파에 기대지 말고 김연아, 박지성과 같이 재능과 자만의 한계를 넘어서는 부단한 노력의 ‘끈기’로 건곤일척(乾坤一擲) 세계로 도약하여야 한다. 더불어 권투선수에서 세계적 건축가로 거듭난 안도 타다오(安藤忠雄)나 브라질 패션브랜드 ‘콜린스’로 거듭난 이원규 사장의 성공비결 ‘천 번의 생각보다는 한 번의 실행이 더욱 중요하다’는 산 경험들을 가슴에 새기면서, 빠르게 진화하는 현대 디지털시대의 패러닥시컬 패러다임에 발맞추어 씁쓸하고 떨떠름한 고통을 ‘히로나카 헤이스케((?中平祐)’ 수학선생(先生)처럼 오히려 인생의 기쁨으로 즐기면서 부지런히 걷고 뛰어야 할 것이다.
내가 후라이보이 를 처음 만났던 것은 1969년경이었다. 초등학교 어린 시절부터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다. 배우가 되고 싶어서 중학교 3학년 때 아동극단 시험 보러갔다가 떨어지고 고등학교 때 연극부를 학교에 만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말하는 억양이 이상하다고 너는 배우가 안 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심지어는 빳다를 치는 선배도 있었다. 배우가 안되더라도 이바닥(?)을 떠날 수 없었다. 대학교는 연극과에 입학하여 전공을 연출로 바꾸었다-연출전공자에겐 억양을 가지고 시비하지 않는다- 그래도 배우 꿈은 못버리고 학교를 다니면서 탈렌트 시험을 보러 다녔다. 4번이나 떨어졌다. 챙피해서 죽고 싶었다.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탈렌트 시험에 턱턱 붙는 거다. 내가 연출할 때 정말 재능 없어 보이던 아해들까지 탈렌트가 되어 여기저기 엑스트라로 나오는데 정말 미치지 않은 게 세계평화를 위해서 다행이었을 거다. 방송국 불지르고 싶었으니까! 뭐야 갑자기 이런 얘기는?????????????????/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TV에 출연하는 길은 탈렌트. 가수, 코미디언이다. 지금은 리포터까지 합해서 한 가지 더 늘었지만!!! 탈렌트는 각 방송국마다 돌아가며 떨어졌으니 텄고 가수도 노래를 못하니 텄다. 한 가지 남은 게 코미디언이었다. 중학교 때 알고 지내던 여학생이 졸업 즈음해서 돌린 사인지에 나에게 부쳐주고 싶은 별명이 있다면에 ' 후라이보이 2세'라는 별명을 부쳐주고 싶었단다. 그래 결심했어! 후라이보이를 찾아가는 거야! 후라이보이는 지금도 쇼의 대명사가 되어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는 동양방송의 간판프로그램 ''쇼 쇼 쇼''의 명사회자, 대사회자였다. 그 사람을 어떻게 만나는가? 동양방송의 ''쇼 쇼 쇼''는 그 당시 지금의 운형궁이 되어버린 자리에 운현궁스튜디오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녹화를 했었다. 지금도 방송국 출입하는 게 일반인들에겐 어려운 일이지만 그때는 더 했던 것 같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고 아무튼 경비와 말다툼도 여러 번했던 거 같은데 경비의 이름이나 혈액형, 출신학교를 물어본다면 하나도 모르겠다. 하여튼 후라이보이 가 녹화하는 운현궁스튜디오에 가보니 김상희, 최희준 , 패티김 , 윤복희 등등을 구경하게 되었고 그 가수들을 가까이에서 본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꿈결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후라이보이에게 말을 걸 수는 없었다. 주위에 워낙 사람들도 많았고 대기실에선 포카 같은걸 하고 계셨다. 포카를 안하고 있은들 내가 어떻게 말을 걸 수 있었겠는가? 녹화날만 되면 찾아가기를 일고 여덟 번!!!!!!!!!! 화장실을 가시는 거다. 소변보시러. 나는 무작정 따라가서 옆에 섰다. 볼일도 없으면서 볼일보는 척하면서 나의 첫 대사가 시작되었다. '선생님 코미디 원고는 누가 쓰세요?' 볼일보시다 말고 그자세대로 나를 쳐다본다. 아무말도 없으시다.'제가 써올께요'하고 대답도 안 듣고 바로 화장실을 나왔다. 아흐! 후라이보이 곽규석 선생님 처음뵙을때의 얼굴이 생각나네요!!! ''쇼쇼쇼''는 ''쇼쇼쇼'' 주제가가 나오면서 무용단의 무용이 시작되고 멀리서 뛰어나오는 후라이보이 가 카메라 앞에 와서 멈춰 서면서 골프스윙을 맨손으로 한 번하시면서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후라이보이 곽규석입니다'로 오프닝을 시작하고 봄이면 봄에 관해 어쩌구 저쩌구 다음에 가수의 노래! 노래 중간중간에 꽁트가 3~4개 나온다. 나오는 사람은 후라이보이 곽규석에 장고웅 , 양영일, 세 사람이 꽁트를 한다. 주로 세태풍자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가끔 특집일 땐 후라이보이 혼자 마임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꽁트 대본을 내가 써가지고 간 거다. 잔머리 머리 굴려서 20여 개를 써가지고 갖다 바쳤다. 경비가 '어디가?'하고 물으면 '후라이보이 원고가지고 왔어요' 하면 무사통과다. 기다렸다. 어떤 반응이 나올까? 내가 써준 원고를 어떻게 하는가를 집에서 토요일 ''쇼쇼쇼'' 시간에 하는가 안하는가를 숨죽이고 기다렸다. 얼씨구 !절씨구! 내가 써다드린 원고를 가지고 꽁트를 하는 거다(물론 더 재미있게 고쳐서!)그러나 내가 써준 원고에 나온 대사 몇 마디는 오리지널 그대로 하시는 거다. 지화자! 좋네 !풍년이 왔네! 조바심이 생겼지만 이삼 주인가를 안갔다! . 왜? 그냥 쑥스럽기도 하고 날 못 알아보면 어떻하나하는 두려움도 있었고! 얼마 만엔가 ''쇼쇼쇼'' 녹화장을 갔다. 쭈빗거리고 복도에 있는데 '야!임마! 왜 안왔어' 하시는 게 아닌가? 날 알아보다니! 풍년이 또 왔네!!!! 인연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아흐! 짠돌이 이시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선생님 !!! 그 당시 택시비 기본 요금이 90원이었다. 같이 택시를 타고 내리면서 백원을 내고 내리신다. 택시비는 기본요금 90원이 나왔다. 백원을 내시고 방송국 안으로 사라지시면 나는 잔돈 10원을 받아 들고 후라이보이 뮤직프로덕션이 있던 정동사무실로 간다. 바쁘시니까 매일 만나지는 못하지만 사무실엔 출근해서 여러 가지 잡다하게 할 일이 많았다. 어느 날 갑자기 '야 10원줘!' 하시는거다. '10원이요? 왜요?' '야 임마 3주 전에 택시비 90원 나왔을 때 내가 100원내고 내렸잖아! 잔돈 안 받았어?' '받았는데요!' '그럼 내놔!' 하시는 분이다. 아주 오래된 일인데도 10원을 기억하시고 달라시던 분! 정동사무실에서 남산KBS까지 시간 남으면 자가용이 있는데도 걸어가시던 분! 다방에서 약속 안하고 꼭 중국집에서 약속하시면서 커피값에 조금 보태면 한 끼 먹을 수 있는데 다방에서 커피는 왜 마시냐고 핀잔주시던 분! 가끔 점심식사로 샌드위치를 싸와서 정동사무실에서 드셨는데 -그때만 해도 샌드위치로 식사를 한다는 게 너무나도 서양스러운 일이라 멋있고 앞서 나가시는 분이구나 하며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봤다 - ' 야! 너도 좀 먹어' 아이고 황송해라 이걸 어떤 방법으로 먹어야하나? 고민하던 시절! 어느 날은 ' 유성이 점심 안 먹었지? 빵 사다 먹을까?' '네' 하고 달려나가 빵을 사오면 맛있게 드시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선생님- 빵은 간식이지 식사대용이 아니었다. 나는 - 얼마가 지나 월급날이었다. 월급에 꼬리표가 붙었다. 지금은 월급이 생각 안나지만 예를 들어 만원이라면 만7백원을 주시는 거다. '선생님 7백원이 뭐예요?' '응 얼마 전에 니가 나가서 니돈으로 빵 사왔잖어! 빵 값이야' 그걸 기억하시고 챙겨주시던 후선생님! 이렇게 짠돌이셨지만 후라이보이 곽선생님의 기사는 내게 자랑하는 말이 있었다. '연예인 기사중에는 내가 월급이 제일 많아!' 아흐! 가까이하기엔 너무 어려웠던 곽선생님! 외국오케스트라 지휘도 하셨고 외국의 유명연예인이 오면 국적불문하고 사회를 도맡아 하셨던 5개 국어를 하신 명사회자 ! 총소리, 대포소리, 기차소리 못내는 소리가 없었던 원맨쇼의 개척자!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종합광고대행사를 차렸다가 징그럽게 운영이 안 돼어 부도나서 일본으로 도망가셨다가 다시 돌아오신 곽선생님! 다시 돌아오자 채무자들이 용서해줘서 놀랐던 일! 어느 날 목사님이 되었다는 소문과 함께 진짜 목사님이 되어 나타나신 선생님! 우리나라에 전자라이터가 처음 나왔을 때 그 전자라이터를 처음 수입하신 분의 아버지 환갑잔치에 사회 보러 갔다가 출연료 외에 보너스로 전자라이터를 선물로 받았다. 아버지가 달라고 해도 안 주던 전자라이터였다. 스위치를 누르면 타타닥! 하고 불꽃이 튕겨져 나와 가스에 불이 붙던 지금은 흔해 빠져서 담배 피우는 고등학생들도 가지고 다니는 전자라이터가 그 당시에는 너무너무 신기한 물건이었다. 누구나 그 라이터를 보면 탐내고 켜보고 뺏어 볼려고 하던 전자라이터였다. 어느 날 녹화장에 가지고 갔더니 장고웅 선배가 라이터에 눈독을 들인다. '안돼요! 아버지꺼라!!'일단 고비는 넘겼다. 다음 관문은 후라이보이 곽규석 선생님차례다. 타타닥! 불붙는 게 신기해 보였던지 던힐 라이터주시면서 바꾸자고 하신 곽선생님! 역시 아버지를 팔아서 안된다고 했는데 그 라이터를 집에서 뒷주머니에 넣고 갔다가 재래식화장실에 빠트렸다. 얼른 건져내어 씻고 또 씻고 또 씻어 말려서 그 다음날 자진해서 곽선생님에게 바쳤다. -이 사실은 처음으로 밝히는 나만의 비밀이다-지금은 금연운동이 한참이라 상상도 못하지만 전자라이터로 불을 타타닥 부치면서 ''쇼 쇼 쇼'' 마지막을 장식하시던 선생님! 대신 당신이 사용하시던 던힐 라이터를 나에게 주셨다. ( 그 비싼 던힐 라이터를 장고웅에게 빼았겼음) 언젠가 꽁트 원고를 갖다드리니까 원고를 읽어보시고 구봉서 선생님께 갖다주라는 겁니다. 왜 그러셨는지 이유를 몰랐지요! 나중에 물으시는 겁니다. 구봉서선생님이 하는 그 원고의 코미디를 봤냐는 겁니다. 물론 저는 봤다고 대답했지요! 봤으니까! 우리팀이 했으면 그만큼 재미있게 못했을 꺼야! 하시던 후선생님! 아흐흐! 곽규석 선생님 뵙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만지고 싶어요. 미국가실 때 제가 쓴 원고를 다시 한번 읽으셨대요! 감격했지요! 한 마디 하시더군요! '유성이 니가 쓴 원고를 보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돈이 없어서 생긴 일만 썼냐?'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 울립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돈이 없었던 시절이니 렇뭬티? 생기는 일은 상상이 안 되었던 거지요! ' 전유성 이가 내 마지막 제자야' 하시던 말씀! 원맨쇼도 못하고 외국어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고 억양도 이상한데 ! 마지막 제자라니요! 황공무지하지요. 한국에 가끔 나오시면 찾아가면 잘 있니? 예수 믿어라 널 위해 기도 많이 한다. 그 기도 덕분에 아직도 버티고(?)있습니다. 지금도 사회자들이 가수나 누구를 소개할 때 누구 씨하면 씨자를 도르를 말아 이름보다 씨자를 더 크고 높게 발음할 때면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 보고 싶습니다. 대본 중에는 곽선생님이 '야 백 원짜리 한 개 가지고와' 전유성 '네'라고 써놓고 녹화 들어가서 '야 백 원짜리 한 개 가지고 와' 하시면 '저... 오십원짜리 두 개로 가지고 와도 되지요?'했다가 녹화 끝나고 장고웅 형한테 대본으로 뒤통수 맞던일! '야 임마! 한 마디라도 더하면 낫냐?' 하시면 죄송합니다 대답하면서 속으론 '그럼 자식아 한 마디 더하면 낫지!!!' 뒤통수 맞는 거 보시며 '유성이 한 마디 더하게 해줘라'하시던 곽 선생님 보고 싶어요 만지고 싶어요 한번 안겨 울고 싶어요 !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신 곽규석 선생님! 전유성 (개그맨) / 2003년 <프로필> 1928년 11월 22일 경기도 안성 출생 1999년 8월 31일 타계 1951년 공군군악대창설로 데뷔 희극인으로 사회자, 악극, 영화 등 다방면으로 활동 <주요 작품> 후라이보이 박사 소동 , 후라이보이 무전여행기 , 식모 삼형제 , 남자미용사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