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산
- 감독
- 정진아
- 제작년도
- 2024
- 출연
- 전선우
정리에 관한 의문. 목록을 따라가다가 < 연화 >에 이르면 이 영화는 <연화>와 < 연화(속) > 두 편으로 나뉘어 분류되어 있다. 물론 한 편의 영화를 두 편으로 나누는 것은 신기한 일은 아니다. 클로드 란츠만의 < 쇼아 >는 전체 10시간 13분 상영시간을 각각의 토픽에 따라 네 편으로 나누었으며, 왕빙의 < 철서구 >는 9시간 11분에 각각 제목을 다시 달고 세 편으로 나누었다. 고다르는 좀 더 섬세하게 나누었다. <영화사(들)>은 4시간 24분을 네 개로 나눈 다음 다시 각 분류 안에서 장(chapitre)을 A와 B로 나누었다. 구태여 예를 떠올린다면 미조구치 겐지가 1941년에 만든 <겐로쿠 추신구라(元祿 忠信藏)>일 것이다. 4시간 1분에 이르는 이야기를 겐지는 그냥 간단하게 ‘第 一篇’과 ‘第 二篇’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이 두 편은 경우가 다르다. 분류와 달리 <蓮花>라는 제목으로 1975년 3월 8일 국제극장에서 개봉하였고, 그때 신문광고전단에 따르면 ‘邦畵史上 初有의 3時間 40分 上映!’이라고 되어있다. 그 아래 ‘第 1部 離別篇’ ‘第 2部 復讐篇’으로 친절하게 이 영화가 두 편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되어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필름에는 두 편을 나누는 그 어떤 간(間)자막(inter_title)이나 별다른 표시가 없다. 또한 두 편 사이는 16년을 건너뛰고 이야기가 진행되기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第 2部 復讐篇’이 시작될 때 별다른 자막이나 소개가 없으며 앞의 이야기에 대한 간단하게 요약된 줄거리의 소개도 없다. 무엇보다 어디에도 <연화 (속)>이라는 제목을 찾아볼 수가 없다. 또한 상영시간을 고려해볼 때 그 당시 상영된 할리우드 영화들,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나 < 벤허 >, < 아라비아의 로렌스 >에서 볼 수 있었던 휴식시간(intermission)도 없다. 만일 <연화>가 신문 전단처럼 두 편으로 나누지 않고 상영회차를 하나의 단위로 하여 한 번에 전체를 상영했다면 임권택 의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긴 상영시간을 가진 영화일 것이다. 민태호 대감 선혜 옹주 정실 부인 연파 스님 이윤재 연화 이 두 편 혹은 한 편을 둘로 나눈 영화 < 연화 >는 1973년 9월 23일에 첫 방영을 한 다음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이듬해 5월 3일에 종영한 동명의 텔레비전 드라마를 영화로 옮긴 것이다. <연화>가 텔레비전 드라마를 영화로 옮긴 임권택 의 첫 번째 영화는 아니다. 나는 이미 방송 드라마 <불청객>을 영화로 옮긴 < 신세 좀 지자구요 >를 다루었다. 또한 텔레비전 드라마를 영화로 옮긴 첫 번째 감독도 아니다. 종종 영화관객과 시청자를 사이에 놓고 영화와 텔레비전의 적대적 관계를 설명하는 미디어 경제학자들의 일반론과 달리 1970년대에 한국영화는 텔레비전과 가까이 있었다. 이 영화가 상영시간이 길긴 하지만 이야기가 복잡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로 신분을 속이거나 혹은 상대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관계 속에 놓이기 때문에 인물 사이의 관계가 다소 장황하다. 그러니 우선 다소 어수선한 줄거리를 감상할 것. 조선시대. 권세를 차지하기 위해 정적들을 차례로 암살하던 민태호 대감은 선화옹주와 부마인 이윤재 가족을 몰살한다. 그러나 이윤재는 상처를 입고 빠져나오고 선혜옹주는 출산직전의 몸을 끌고 회암사로 흘러들어온다. 마침 민태호의 정실부인이 임신을 기원하는 백일기도를 드리던 마지막 날이었다. 주지인 연파스님은 선혜옹주에게는 출산한 딸을 숨기며 사산했다고 말한 다음 민태호의 정실부인에게는 절로 흘러들어온 여인이 아이를 낳은 다음 사라졌다고 말하면서 이것이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이니 딸로 들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다. 정실부인은 기뻐하면서 민태호 대감에게 이르니 간절히 자식을 바라던 그도 기꺼이 승낙한다. 그런 다음 연파스님은 정실부인에게 지금 양반 댁에서 막 씨받이로 아이를 낳고 빼앗기자 실망한 나머지 절을 찾아온 여인이 있으니 그녀를 젖 물리는 유모로 쓰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 다음 선혜옹주를 추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등장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선혜옹주는 자기를 죽이려던 민태호 대감댁에 양주댁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하고 유모로 들어가 자기 딸에게 젖을 물리면서 목숨을 구한다. 다만 옹주는 그 어린 아이가 아직은 자기 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온갖 우여곡절. 그러는 중에 민태호 대감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옹주를 강제로 겁탈하려 든다. 이에 거의 자포자기한 옹주가 자결을 하려들자 연파스님은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들려준다. 그러는 동안 이윤재는 복수를 하기 위해 민태호 대감댁에 나타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훗날을 도모하며 떠난다. 이때 옹주는 남편인 이윤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 부 끝) 16년이 흘러 어느 덧 연화는 규수가 된다. 혼처가 사방에서 날아들고 그 중에 민태호 대감의 측근이자 이윤재와 선혜옹주의 원수중의 하나인 김초선 대감댁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 이 사실을 알자 이윤재는 뜻을 함께 하는 동지들과 이 결혼을 저지하기로 계획을 세운다. 이윤재가 보낸 자객은 함지기가 함을 들고 가던 길에서 기다리다가 차례로 활로 쏘아 쓰러트리고 그 과정에서 민태호 대감은 양주댁이 선혜옹주이고 연화가 이윤재의 딸이며 이 모든 것이 연파 스님의 계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연화도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위기에 몰렸다고 생각한 민태호 대감은 이들을 모두 감옥에 가둔 다음 참수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이윤재와 마주선 민태호 대감 앞에서 정실부인은 모두를 살리는 것이 부처님의 뜻이라면서 이윤재에게 기회를 준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은 민태호 대감을 유배 보내고 부마 이윤재와 선혜옹주는 복권한 다음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연화는 원래 부모의 손으로 되돌아간다. (이 부 끝) 아마 줄거리만을 쫓아왔다면 < 연화 >가 당연히 출애굽기의 예언자 모세의 성장담의 변주라는 것을 알 것이다. 죽어야 할 아이.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적의 손에서 자라나 훌륭하게 크는 그 아이. 유모가 된 어머니. 그렇지만 그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모든 것을 비밀로 감추어야 한다. 아들이 딸이 되었고 기독교는 불교로 바뀌었고 이집트는 조선이 되었지만 기적을 행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둘 사이의 유사성은 거기까지이다. 그런 다음 먼저 내가 두 개의 텍스트 사이에서 할 수 없는 불가능에 대한 전제. 가능하면 원작 드라마의 배우들을 그대로 옮겨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방송과 영화의 차이는 연화 역할이 김창숙 에서 이효춘 으로 바뀌었으며, 연화의 아버지 이윤재 역할이 김동훈 에서 윤양하 로 바뀌었다. 나는 원작 방송 드라마를 보지 못했고, 또한 방송으로부터 영화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일부 배역의 교체의 속사정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배역에 대한 연기자의 변화 사이에서 오는 차이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로이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인물의 성격에 대한 변화나 연기의 새로운 각색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 게다가 텔레비전 드라마가 영화처럼 어린 연화와 선혜옹주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일 편과 시집갈 무렵이 된 성장한 연화와 그녀를 둘러싼 이들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이 편으로 구성한 영화처럼 거의 절반의 비중으로 나누어져 있는지 아니면 전혀 다른 드라마의 균형을 갖추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또한 텔레비전 연속극을 연출한 김재형에서 영화를 연출한 임권택 으로 옮겨오면서 아마도 있을(수밖에 없는) 둘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도 비교해볼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영화 <연화>에 의지해서만 말할 것이며 거기서 가끔 건드리는 연속극 드라마와의 비교는 추론이다. 물론 이것은 매우 불편한 상황이다. 왜냐하면 영화 <연화>는 연속극 <연화>의 성공에 기대어 만들어진 영화이며, 그러므로 이미 텔레비전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이 관객으로 이행될 때 영화는 연속극의 기대의 지평 안에서만 펼쳐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한된 지평. 성공의 전제가 안겨준 감옥. 겉보기에 단순하게 여겨지는 이 질문은 생각보다 기괴한 역설을 담고 있다. 이미 인물들의 운명은 결정되었으며, 영화는 그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연화는 매번 물어볼 것이다. 전 어떻게 하면 되나요. 대답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한 걸 그대로 반복하렴. 그런 다음 거슬러 올라가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어주기 바란다. <연화>는 인물들 사이의 역할 놀이이며 구조 안에서 벌어지는 술래잡기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긴장은 누가 술래인지를 알아내는 게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건 시작할 때 이야기 바깥에 있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 핵심은 우리만이 알고 있는 그 지식을 언제 이야기 속의 누군가가 함께 공유하느냐는 것이다. 선혜옹주는 언제 자기가 젖을 물리고 있는 어린 연화가 자기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인가. 그때 민태호 대감이 먼저 알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사이에서 정실마님은 언제 그 지식을 얻게 될 것인가. 왜 매번 이윤재는 사태를 망쳐놓는가. 연화는 언제 자기를 낳은 엄마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인가. 민태호 대감이 연화가 자기 딸이 아니라 이윤재와 선혜옹주의 딸이라는 것을 언제 알게 될 것인가. 그런 다음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먼저 알게 될 것인가. 서로가 서로에게 대상이 되면서 벌어지는 이 지식의 경주는 연파스님이 쳐놓은 덫이지만 동시에 그 또한 구조 안에 있기 때문에 매번 결정의 순간을 정해야한다. 그리고 그 결정의 시간은 동시에 그 자신의 기회를 그만큼 잃어버리는 반비례의 역학을 작동시킨다. 말 그대로 누구도 예외 없는 구조의 노예들. 무엇이 앞설 것인가. 그 뒤에 따라오던 것이 만일 앞지르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여기서 영화의 곤궁.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이미 모두 본 것이며 게다가 충분히 즐긴 다음이다. 취소되어버린 효과. 이미 연속극에서 했던 동작을 구조 안에서 고스란히 반복해야 할 때 시청자들이 관객이 되어 거기서 다시 한 번 보는 고통스러운 눈물은 이미 예고된 것이다. 난 이미 잘 알고 있어, 지금은 저렇게 눈물을 흘리지만 곧 이런저런 사건이 벌어지면서 상황은 이렇게 잘 해결될 거야, 그러니 울지 마세요. 그때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동작은 이미 해본 것을 다시 한 번 재현하는 기계적인 일련의 숙련된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여기서 시청자(이자) 관객이라는 이 이상한 자리는 언제나 이야기를 앞서 간다. 그러면서 돌아보는 자리. 항상 돌아보는 자리. 아무리 이야기가 달려가도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돌아보는 자리. 서로 뒤집힌 위상 관계는 단지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드라마를 영화관의 스크린에서 반복하는 단순한 관계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자리에서 다시 바라볼 때 모든 것은 원래의 모습에로 되돌아오는 내내 순수한 겉치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라진 위기. 그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들이 차지하는 지위는 매우 보잘 것 없는 것이며 인물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사건이 나온다기보다는 사건을 위해서 인물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거기 머물기 시작한다. 이때 임권택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후렴구처럼 반복하는 말. 곤궁에 처한 영화. < 연화 >에서 영화가 밀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텔레비전 드라마가 해낸 그 나머지가 아니라 이미 해낸 것 안에서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몇 가지 외형적인 차이가 있다. (그 당시의 텔레비전 모델에 따라) 모니터 4대 3 비율의 화면을 2.35 사이즈의 시네마스코프로 찍었으며, 흑백 화면을 칼라 스크린으로 옮겼다. 하지만 난처한 약점은 칠 개월에 걸쳐 매주 방영되었던 드라마를 제 일 편은 1시간 46분, 제 이 편은 1시간 49분으로 압축시켜야 하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임권택 (과 신봉승 )은 종종 영화 <연화>의 관객을 이미 드라마 <연화>를 본 시청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단지 요령 있게 압축하거나 일부를 잘라내는 대신 이야기를 단순하게 만든 다음 어리둥절할 정도로 건너뛴다. 그래서 주변의 인물들 중의 일부는 때로 사라지고 한참 뒤에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나오기도 한다. 마치 벌거벗은 것과 같은 상태의 이야기. 임권택은 그 이야기를 영화의 경제학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이 기나긴 이야기는 고작해야 민태호 대감의 99칸 저택(으로 설정된 한옥 가옥) 안의 민태호 대감의 방과 선혜옹주가 유모로 머무는 방, 그리고 정원, 이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감댁 안의 감옥, 그런 다음 회암사의 불당과 그 곁에 자리한 작은 쪽방, 그리고 잠깐 등장하는 이윤재와 그 무리들이 머무는 누추하기 짝이 없는 산채(라고 설정된 외부와 간단하게 지은 세트에서 찍은 내부)가 전부이다. 물론 중간에 오가는 길이 등장하지만 숲속 길로 설정되어 있어서 별다른 엑스트라를 오가게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이 설정을 무심코 지나갈지 모른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를 상상해보라. 이 영화는 사극이며 아무리 적은 숫자의 보조 출연자도 조선시대의 의상을 입어야 한다. 게다가 일단 도읍 안으로 들어오면 수십 명의 등장인물이 동시에 움직여야 생활공간이 만들어진다. 영화는 그런 예술이다. 아직 디지털 기술은 등장하지 않았으며 거기 사람이 필요하면 하여튼 거기 있어야 한다. 물론 이 설정은 무리한 축소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우리가 그걸 눈치 채지 못하게 항상 가옥 바깥으로 나오면 마치 두 개의 장소, 두 개의 시퀀스를 연결하기 위해서만(bridge shot) 그 쇼트가 필요하다는 듯이 스쳐지나가면서(insert shot) 정보 단위의 기능만을 부여한다. 그런 다음 재빨리 다시 가옥 구조로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회암사 로 이동한다. 물론 여기서도 중심을 이루는 장소, 대부분의 쇼트가 진행되는 공간은 민태호 대감의 저택이다. 이야기는 이 집이 모든 인물들을 자석으로 끌어당기듯이 진행되고 그래서 마치 모두에게 주어진 운명처럼 차례로 이 집으로 모여든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연화가 아니라 이 집이다, 라고 이야기 전체를 다시 쓰고 싶을 정도이다. 이때 임권택은 민태호 대감댁 안을 이리저리 오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면서도 이야기만을 오가고 동선을 최소로 연결시키면서 두 개의 방 이외의 어떤 방도 사용하지 않으며, 또한 감옥을 오갈 때에도 모든 쇼트는 감옥 내부에서만 진행되기 때문에 대감 댁의 안채에서 감옥까지 연결하는 동선의 어떤 물리적 장소의 쇼트를 더하지 않고 그냥 건너뛰어 감옥 실내로 들어온다. 물론 여기서 임권택이 한옥 가옥 안으로 들어갔을 때 고작 삼년 후에 보여주게 될 < 족보 >에서와 같은 우아한 동선은 어디에도 없다. <연화>에는 오로지 이야기 안에서 경제적인 방법으로 설계된 동선과 쇼트의 실용적인 사용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권택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화>에서 어떤 장면들은 양반 저택 가옥 구조 안에서 마치 폐쇄공간처럼 이루어진 희박한 공기들과 그 안에서 매우 제한적인 동선만으로 이루어진 작은 세계를 만들어낸 < 씨받이 >의 어떤 순간들과 공명한다. 혹은 선혜옹주와 이윤재가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면서(flash_back) 두 사람이 운우지정을 나누듯이 가을 낙엽 위를 뒹굴 때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춘향뎐>에서 이몽룡과 춘향의 동일한 조건의 장소에서의 동일한 제스처를 생각나게 만든다. 나는 단지 같은 장면 혹은 같은 분위기의 반복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요점은 그것이 다시 나타날 때 그 안에는 되돌아오는 같은 자리에 대해 임권택이 이미 해본 것으로부터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그런 다음 거기서 자기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재현의 요소를 (임권택의 표현을 빌리면) “의심하면서” 반복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의 사유를 확보하려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권택의 이미지들은 그것이 반복될 때마다 매번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이야기와 표현 사이에서 어떤 거리를 확보해나간다는 인상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재현의 이미지들 사이에 점점 더 일사불란한 통일성을 만들어나갔지만 동시에 때로 기괴할 정도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정투쟁을 벌였다. 여기에는 단순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헤겔이 말하는) 불행한 의식이라고 부를만한 유령이 어른거린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 대신 < 연화 >는 처음부터 무언가를 포기한 것처럼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멈춰 서서 하나의 씬을 매우 긴 시간 동안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래서 여기에는 임권택 의 영화에서 마주치는 인물에 대한 탐구나 이야기 속의 삶 따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가끔, 아주 가끔 그 어느 순간의 디테일에서 종종 이야기 안의 이질적인 요소에로 이끌려 완전히 다른 공기의 장면이 연출되는 당혹스러운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이 디테일이 다른 전체와의 조화를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연화>를 보는 당신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지 모른다. 물론 임권택이 여기서 처음 그런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다. 이미 첫 번째 영화 < 두만강아 잘 있거라 >에서 갑자기 나타나 스키를 타고 달려 내려온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의 전투를 다룬 전멸의 마지막 시퀀스는 마치 영화 바깥으로 빠져나온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또한 ‘원숙한’ 임권택의 영화에서도 갑자기 그런 순간이 나타난다. 그걸 가장 미학적으로 활용한 시퀀스는 물론 < 달빛 길어올리기 >의 마지막 월곡 마을에서 한지를 제작하는 대목이다. 심지어 이 시퀀스는 영화 전체를 구원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연화>에서는 이런 장면들과는 다르다. 그저 인상적으로 말하는 것을 허락해준다면 다른 장면들의 디테일이 보여주는 위험할 정도의 확장은 종종 임권택이 그 무언가에 매혹되어 마치 그 힘에 기쁘게 굴복하듯이 거기에 이끌렸다는 흔적을 남기는 반면 여기서는 이야기로부터 영화를 방어하기 위해서 어느 순간을 잡아채듯이 붙잡은 다음 거기서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머물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애처롭게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표현. 영화를 방어하려는 안간힘. 임권택은 여기서 텔레비전에로 이끌리는 이야기를 어디선가에서 멈춰 세우기 위해 그 장소를 찾으려고 마치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탑골댁 이윤재 두 개의 장소 중의 첫 번째 장소. < 연화 >는 피비린내는 정적의 암살에서 영화가 시작한다. 민태호 대감이 살생부에 적힌 이름들을 붉은 색 먹으로 지우면 다음 장면은 자객들이 무자비하게 암살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조선시대라는 배경 이외에는 어떤 설명도 없는 이 도입부는 거기서 더 반복되지는 않는다. 마치 선혜옹주와 이윤재 부마의 암살이 그 최종 목표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더 이상 새로운 희생자가 나오지는 않는다. 아직 그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민태호 대감으로서는 아쉽게도 이 한 번의 실패가 그 자신의 운명을 뒤바꾸는 계기가 되고 (이미 말한 것처럼) 마치 연화는 모세처럼 민태호 대감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존재가 된다. 이때 민태호 대감은 무자비하고 교활하며 음모와 술수에 능한 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도입부가 끝나고 이야기가 시작되면 그는 마치 잠시 동안 자신의 역할을 잊은 것처럼 정실부인의 말에 귀 기울이며 (이런 표현이 몹시 어색하지만 그만큼 영화 안에서 어색하게 표현된 그대로) 피비린내 나는 당파싸움으로부터 후퇴해서 가정적인 인물로 축소된다. 이따금 그가 이윤재와 선혜옹주의 행방을 궁금하게 생각하지만 그 둘을 혈안이 되어 추적하지는 않는다. 이때 민태호 대감은 궁궐로부터 그의 저택으로 행동반경의 중심을 옮기면서 그의 관심은 권력에 관한 정치적인 영역에서 욕망이 이끄는 성적인 대상에로 옮겨간다. 물론 좀 따분해지기는 하겠지만 푸코에 의지해서 그 둘이 서로 얼마나 가까이 있으며 심지어 그 둘은 동일한 내용의 서로 다른 판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임권택 은 민태호 대감이라는 주체가 권력과 리비도 사이에서 어떻게 기호에로 옮겨가는 지를 다루지 않는다. 또한 연화가 어떻게 그 사이에서 교환관계의 네트워크 속으로 들어가는지에 대해서 이야기가 그것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섬세하게 다루지 않는다. 혹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임권택은 그걸 하려고만 결심했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임권택은 정념의 예술가이다. 때로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때조차 있다. 그건 처음부터 그러했다. 그의 영화 속의 인물들은 시대와 장르를 불문하고 일단 정념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신체가 파괴될 때까지 막다른 골목에 간다. 그것이 그렇게 임권택의 영화에서 자주 신체훼손의 장면이 반복되는 이유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혹은 원작과의 약속이 그것을 가로 막는다. 만일 정말 그 안으로 들어갔다면 영화는 무시무시할 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코드들의 활동이 몹시 음란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청자 관객들은 이제까지 자신들이 즐긴 텔레비전 드라마의 이면 앞에서 그 기쁨의 정체를 마주보며 당황했을 것이다. 여기서 민태호 대감을 이끄는 대상은 양주댁으로 분한 다음 (자신의 딸인지 아직은 알지 못하는) 연화의 유모로 별채에 들어간 선혜옹주이다. 정실부인은 아직 얻지 못한 아들을 잉태하기 위한 백일기도를 드리기 위해 회암사에 가느라 종종 집을 비우고 그 순간은 민태호 대감의 기회이자 선혜옹주의 위기가 된다. 나는 (어쩌면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 당신에게 좀 더 많은 연상 작용을 끌어내고 싶다. 유모는 배고픈 아이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서 들여놓은 여인이다. 그녀는 아이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 매번 자기의 옷고름을 풀고 여민 저고리를 풀어헤쳐 (자기가 낳은 아이에게 물리지 못한 채 차오르기 시작해서) 지금 젖으로 가득 찬 유방의 유두를 아이의 입에 물려야 할 것이다. 아이가 우는 것은 젖을 달라는 신호이다. 이때 이 소리를 안채에서 몸이 달아오른 민태호 대감도 들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이 신호를 받자마자 여기서 아이를 괄호 치고 양주댁의 몸을 떠올리기 시작할 것이다. 환상의 공식은 몸의 부분이 욕망의 대상이라는 자리에 등록하자마자 성적인 가장자리로부터 금방 중심을 탈환할 것이다. 이제 민태호 대감은 양주댁의 유두의 대상이 된다. 이 말을 잘 읽어주기 바란다. 나는 목적어를 반대로 쓴 것이 아니다. 이때 임권택은 재빨리 민태호 대감의 환상에 몰두하는 대신 그가 다가가려는 대상에 대해서 행하는 위계적 부분에 집중하면서 영화의 지위를 되찾으려고 한다. 구조는 좀 더 복잡하고 이야기는 음란해진다. 여기서 임권택은 신호의 응답을 위해 다른 장면을 더한다. 민태호 대감에게는 자식을 얻기 위한 구실로 그의 잠자리를 위한 내당마님인 둘째 부인 탑골댁이라는 젊은 여인이 있다. 그래서 잠자리가 필요할 때마다 민태호 대감은 그녀를 찾는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다소 파격적인 잠자리 장면을 포함시켜 놓았다. 그런 다음 민태호 대감은 두 번 다시 그녀와의 잠자리를 찾지 않는다. 거의 모든 설정을 예상할 수 있는 드라마의 컨벤션 안에서 진행되는 이 이야기에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순간은 탑골댁이 정실부인 흉내를 내면서 회암사에 자식을 갖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러 왔을 때 신분을 숨기고 잠시 거기에 몸을 의탁하러 온 이윤재를 보고 한 눈에 빠져드는 설정이다. 여기서 탑골댁이 이윤재를 탐하는 태도는 민태호 대감이 선혜옹주에 이끌리는 것과 정확하게 동일한 판본이다. 하지만 차이는 단지 그 둘 사이의 전도된 성별만이 아니다. 하나는 여기가 지금 조선시대라는 것이며 유교를 바탕으로 세워진 신분사회라는 조건이다. 탑골댁이 이윤재에게 욕망의 시선을 던질 때 그녀는 단지 도덕적인 금기를 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민태호 대감의 자리에서 권력의 네트워크를 펼치는 것이다. 이때 선혜옹주와 이윤재가 동일한 고난에 놓인 것처럼 보이지만 임권택(과 신봉승 )은 변주를 가미한다. 이윤재는 탑골댁이 민태호 대감의 내당마님이라는 사실을 알자 복수를 위해서 그 곁으로 다가갈 기회를 만들기 위해 자발적으로 그 유혹에 응답한다. 그의 목적에 따라 이윤재의 행동이 정당하게 보이지만 그러나 수단으로 놓인 탑골댁의 자리에서 그녀는 마치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한 것에 대한 벌을 받는 것처럼 진행된다. 하지만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거기에 있지 않다. 임권택은 선혜옹주와 이윤재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교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목표는 그 둘의 사연을 우리에게 모두 알려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차라리 그건 부차적인 자리에 머문다. 어쩌면 이것은 임권택의 의도 바깥으로 벗어난 그 어떤 힘이 마치 오작동을 일으키기라도 한 듯 작용하는 것이기도 한데 선혜옹주가 고난을 겪는 동안 마치 이윤재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여기서 가정을 해보고 싶어진다. 만일 선혜옹주가 이 상황을 단지 모면하기 위해서라는 알리바이를 내세우고 민태호 대감의 유혹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섹스를 즐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그런다고 해서 이 상황에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전히 선혜옹주는 자신이 양주댁이라는 사실을 숨겨야 할 것이며 민태호 대감은 섹스를 했다고 할지라도 양주댁이 선혜옹주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살려둘 리가 없다. 또한 선혜옹주가 침묵을 지킨다면 이윤재는 이 사실을 알 수 없다. 여기엔 단지 하느냐, 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는 < 티켓 >에서 몸을 파는 막내가 대학생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티켓을 끊고’ 손님과 하룻밤을 마지못해 보낼 때 섹스를 즐기는 장면을 알고 있다. < 창, 노는 계집 >에서 영은은 사창가에서 도망치지만 그녀를 잡으러 온 ‘사냥꾼’에게 붙잡힌 다음 섹스를 할 때 그 행위를 즐긴다. 임권택 의 여자들은 순결을 지켜야한다고 생각하지만 몸의 부름에 대해서 욕망이 거절하는 행위를 취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 그녀들에게 섹스를 하는 것과 사랑을 하는 것은 종종 별개의 행위이다. 하지만 < 연화 >에서 선혜옹주는 사실상 목숨을 걸고 거절을 한다. 이때 이 장면을 임권택은 거의 멈추듯이 세운 다음 갑자기 디테일의 주름에 집중한다. 민태호 대감은 정실부인이 집을 비우고 밤이 되자 탑골댁 자택에 가는 대신 별채에 어린 연화와 기거하는 양주댁으로 위장한 선혜옹주의 방을 찾는다. 말하자면 그는 공개적으로,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도덕적으로 허락된 간편한 잠자리를 포기하고 힘겨운 과정을 거쳐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양주댁에로 향한다. 별채에 들어서면서 민태호 대감은 자신이 여기에 온 것은 딸 연화를 보기 위함이니 야심한 밤에 찾았다 할지라도 이상한 일도 아니며 잘못된 것도 아니라는 설명을 한다. 물론 그건 거짓말이며 그는 연화에게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선혜옹주에게는 이 방문을 거절할 명분이 없다. 이 집은 민태호 대감의 집이며, 이 방은 연화를 위한 방이며, 민태호 대감은 연화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얼룩은 민태호 대감이 아니라 선혜옹주이다. 상황은 탐정소설에서 말하는 밀실공간의 탈출에 관한 퍼즐 게임이다. 민태호 대감이 선혜옹주가 연화와 함께 머무는 별채에 들어서자 이제까지 둔하게 움직이던 이 영화의 기호들이 갑자기 예민하게 활동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민태호 대감이 왜 이 방에 들어섰는지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목표로 하는 행위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이때 선혜옹주가 그 행위의 전략을 차단하고 진행을 방해한 다음 다시 그를 내보낼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찾을 지가 이 시퀀스의 구경거리이다. 구경거리? 어쩌면 이 표현이 다소 잔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임권택 이 여기서 이 작은 형태들이라고 할 디테일을 전체의 구도 안으로 가져올 방법을 찾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다.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하면 즉각적으로 관객 시청자는 예상치 않은 배신을 당할 것이며 아마도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워 질 것이다. 이때 임권택 은 자신의 곤궁 안에서 최소의 디테일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민태호 대감은 방 안에 들어선 다음 먼저 시선으로 선혜옹주의 몸을 더듬거린다. 이때 하필이면 아기 연화는 한밤중에 울면서 젖을 달라고 보챈다. 그때 민태호 대감은 연화의 신호에 슬그머니 자기의 메시지를 더하면서 빨리 젖을 물리라고 재촉한다. 선혜옹주가 젖을 물리려면 저고리를 풀고 옷소매를 헤쳐야 한다. 자발적인 탈의. 이때 민태호 대감은 선혜옹주의 몸 한끝에 자신의 몸 한끝을 접촉하기 위해 그 좁은 방에서 미처 일어서지도 못한 채 앉아서 이리저리 방향을 틀면서 접근한다. 그의 자리에서 갖추는 최소의 예절. 어쩌면 당신은 여기서 크게 웃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까지 민태호 대감이 자신의 목표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무자비하며 단호한지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선혜옹주는 지금 이 방까지 (연파스님의 표현을 빌리면) “등잔 밑이 어둡다는 계산으로” 피신해 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민태호 대감이 취하는 행동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소심하며 예의바른 태도를 취한다. 당신은 즉각적으로 내게 맞받아칠 것이다. 아니 정말 모른단 말이에요, 이건 섹스에 관한 장면이라구요. 물론 나도 알고 있다. 핵심은 임권택이 여기서 디테일의 긴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선택한 모델이 행위와 목적 사이에 놓인 불연속성의 통사적 종합을 이루는 정념의 위선이라는 것이다. 물론 선혜옹주는 이 위선을 이미 한 눈에 간파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놓여있는 정념의 정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소 공허한 비대칭의 간극이 놓여있다. 민태호 대감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지만 선혜옹주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럼으로써 선혜옹주는 민태호 대감의 접촉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섹스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 여기서 그녀가 지켜야하는 것은 정조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이다. 우리를 다소 따분하게 만드는 것은 이 둘 사이에 선택이 없다는 것이다. 그녀가 정조를 포기했을 때 거기에는 단지 섹스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며 정체의 비밀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반면 정체의 비밀을 포기했을 때 선혜옹주는 생명을 잃을 뿐만 아니라 지금 바로 곁에 있는, 하지만 아직은 미처 알지 못하는, 딸 연화도 포기하는 것이 된다. 만일 여기서 민태호 대감이 자신의 양녀 연화가 바로 눈 앞에 있는 선혜옹주의 딸이라는 비밀을 알고 있으며 그 지식을 동원해서 만일 섹스를 요구했다면 시청자 관객이 겪게 되는 긴장은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때 민태호 대감의 제안은 간단하다. 당신이 나와의 섹스를 즐겨준다면 당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당신의 딸(이자 자신의 양녀) 연화의 목숨도 살려 줄 것을 약속하겠노라. 첨언. 그 약속을 지킬 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보다 더 시청자 관객을 괴롭히는 상황은 약속을 지키면서 반복해서 약속의 이행을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시청자 관객을 가장 괴롭히는 방법은 반복해서 약속을 지키면서 선혜옹주가 조금씩 민태호 대감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만일 이 역할을 이순재에서 최무룡, 혹은 김진규로 바꾼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임권택은 이 위험한 게임의 거의 근처까지 가본 적이 있다. 나는 이미 < 티켓 > 혹은 < 씨받이 >로 이어지는 주인공과 반대의 가해자 사이에서 성립된 실패한 관계의 이면에 맴돌고 있는 정념의 예를 설명했다. 하지만 여기서 임권택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까지 물러난다. 그래서 민태호 대감이 마치 자기 신분의 본본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은 제스처가 등장한 것이다. 두 개의 장소 중의 두 번째 장소. (편의상 나눈 것처럼 보이는) < 연화 (속) >은 광고에서 소개하는 것과 달리 ‘第 2部 復讐篇’이라기보다 차라리 ‘第 2部 受難篇’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이야기는 갑자기 16년을 건너 뛴 다음 여전히 민태호 대감의 집에서 진행된다. 그 긴 세월 동안 변한 것이라곤 연화가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는 것 밖에 없다. 선혜옹주는 여전히 유모로 남아 연화를 키우고 있다. 구태여 한 가지 더 지적해야 한다면 이윤재가 산채를 짓고 그의 뜻을 따르는 동료들과 모여 복권의 날을 준비하고 있(지만 임권택 은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세월을 건너뛰어서 연화가 세상 이치를 알 나이가 되었을 때 긴장의 중심에는 이제 그녀가 언제 어떻게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그녀가 어떤 과정을 거쳐 스스로 이 드라마 안에서 주체로 거듭날 것인가, 라는 데 있을 것이라고 나는 어림짐작했다. 왜냐하면 전편에서 갓난아기 연화는 마치 맥거핀처럼, 혹은 알리바이처럼, 때로 메시지처럼, 비유적으로 (에드가 알랜 포우의) 떠돌아다니는 편지처럼, 그렇게 네트워크 사이를 부유하는 기표처럼 보였다. 물론 이 아기는 그때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하지만 열여섯 살이 된 연화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틀렸다. 임권택은 시작하자마자 무언가를 서두르듯이 설명해나갔으며 응답은 앞질러 왔다.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된 다음 고작 23분이 지났을 때 연화는 편지를 받고 모든 비밀을 다 안 다음 그 사실을 유모(이자 친모인) 양주댁(으로 위장한 선혜옹주)와 공유한다. 이제 연화가 이윤재와 선혜옹주의 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민태호 대감과 그 아내 밖에 없다. 하지만 민태호 대감은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사실을 떠올린 다음 연화의 출생의 비밀뿐만 아니라 선혜옹주의 비밀까지도 알아낸다. 여기에 별다른 긴장이나 위기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다소 짜증스러울 정도로 이윤재는 사태를 점점 악화시키면서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태를 해결해나간다. 말하자면 이윤재는 사실을 알지는 못하지만 의미를 아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임권택 은 그들 사이의 비밀을 사이에 둔 게임에서 머뭇거리는 대신 이야기를 민태호 대감 댁의 감옥으로 옮겨온다. 모든 비밀을 알게 된 민태호 대감은 연화와 선혜옹주, 그리고 연파 스님을 각각 다른 옥에 가둔다. 연화는 자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며, 선혜옹주는 비로소 양주댁이라는 거짓된 위장을 버리고 자기의 본래 자리를 되찾은 셈이며, 연파 스님은 이제 자신이 누구의 편인지 분명하게 한다. 여기서 더 남은 게 있을까. 임권택은 갑자기 여기에 속편 이야기의 진수가 담겨있는 것처럼 감옥에서 이야기를 진행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작은 옥사로 무대를 옮기면 이제 더 이상 야외에서 진행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때 실내는 기후 조건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무대는 연출의 일정에 따라 자유자재로 운영될 수 있어진다. 둘째, 감옥은 다른 공간과 달리 사람을 감금시키는 곳이기 때문에 원하는 등장인물들을 한 자리에 모은 다음 이야기를 고정시킬 수 있다. 말하자면 장소의 경제학. 임권택은 여기가 단지 경제적인 이유때문만이 아니라 감정의 충돌이라는 액션을 보여주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생각한 것 같다. 감옥 입구를 기준으로 연화를 왼쪽 윗방에 가두고 선혜옹주를 그 옆방에 가둔다. 그래서 그 둘은 서로 옆에 있기는 하지만 볼 수가 없다. 그런 다음 연화의 맞은 편 감옥에 연파 스님을 가둔다. 이 배치가 효과적인 이유는 선혜옹주에게 다가가 창살 앞에서 이야기를 할 때 (가로가 긴 테크니스코프에서) 항상 그 사람의 뒤편에 연파스님이 보이기 때문에 두 사람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일종의 후광효과와 같은 미장센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감옥 효과에 대해 설명을 하는 사람은 연파스님이다. 그는 갇힌 다음 민태호 대감의 호위 무사들에게 말한다. “지금 옥에 갇힌 사람이 나인가, 자네들인가” 물론 그들웰엽?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세 사람을 가둔 다음 차례로 각자의 방법으로 다른 등장인물들이 그들 앞에 나타나는데 여기서 < 연화 >의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그건 우리 생각과 달리 선혜옹주나 이윤재, 혹은 연화가 아니다. 임권택이 처음부터 그 인물을 여러 차례 등장시켰지만 거의 마지막 자리까지 진정한 임무를 미루어 두었다가 여기서 그 결정적인 마지막 선택의 기회를 넘기는 사람은 민태호 대감의 정경부인이다. 약간의 복기. 정경부인은 아이를 낳지 못해 민태호 대감의 후대를 잇지 못하자 한편으로는 첩을 두는 것에 대해서 받아들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회암사에 백일기도를 드리러 갔다가 예기치 않은 연으로 선혜옹주와 이윤재의 딸 연화를 양녀로 입양시키고 선혜옹주를 유모로 집에 들인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잘 설명되지 않지만 민태호 대감은 주변의 모든 인물들에게 포악스러우며 무자비한 암살 지시도 망설인 적이 없지만 언제나 정경부인의 뜻을 존중하고 그녀에게 예의를 갖춰 대한다. 그는 다른 이에게 정경부인을 평하면서 “저 사람은 부처님 같은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감옥에서 정경부인의 등장은 세 번에 걸쳐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정경부인이 감옥에 갇힌 선혜옹주를 찾아올 때이다. 그녀는 먼저 연화와 이야기를 나눈 다음 선혜옹주 앞에 섰을 때 갑자기 큰 절을 드리면서 마치 민태호 대감의 잘못을 자신이 사과하기라도 하듯이 최대한 예를 갖춘다. 이 장면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정경부인이 지금 자신이 가진 모든 우월한 자리를 포기한 데서 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자신을 그녀의 아랫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정경부인은 지금 감옥 바깥에 있으며, 언제든지 남편을 움직여서 선혜옹주를 제거한 다음 연화의 유일한 모친이 될 수도 있으며, 어쩌면 이제까지 자신을 속인 과정에 대해서 분노를 느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경부인은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기괴할 정도로 여기서 인간적인 모든 반응을 버리고 오로지 제도의 오작동에 대해 사과한 다음 그것이 원래대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선혜옹주 앞에서 미리 항복을 선언한다. 그것은 누구도 그녀에게 그것을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녀 자신의 믿음에 따른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교환도 없다. 단지 이것은 정경부인의 호의에 따른 행동이다. 이때 내가 보는 것은 이 드라마의 다소 무시무시할 정도로 흠결을 지워나가는 보수주의적인 태도이며, 그런 다음 거기서 어떤 감흥을 끌어내는 임권택 의 완전한 동의이다. 원래대로, 라는 이 무시무시한 말. 두 번째 정경부인의 방문은 임금의 행차를 위장하고 민태호 대감댁에 이윤재와 그의 동료들이 쳐들어와 감옥에서 민태호 대감과 서로 겨룰 때이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이윤재가 민태호 대감을 인질로 붙잡고 그의 목에 칼을 대고 모두를 풀어주라고 외칠 때 민태호 대감의 호위 무사들은 연화와 선혜옹주, 연파스님의 목에 칼을 대고 서로 버티는 중이다. 이때 민태호 대감은 자신의 안위에 신경 쓰지 말고 그들을 모두 참하라고 명한다. 말하자면 파국 일보직전. 모두가 행동을 멈추어선 순간. 여기에 갑자기 정경부인이 나타난다. 그런 다음 “제가 한 가지 스님께 따질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연파스님 앞에 다가간다. 연파스님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오랏줄에 묶인 채로 그녀를 맞이한다. 민태호 대감은 맞은편에서 이윤재의 칼에 목이 겨냥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자기 부인이 이 살풍경한 순간에 왜 나타났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이제까지 당당한 모습과 달리, 적어도 이 시퀀스에서는 처음으로 불안한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여기 동일한 장면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개의 시선이 있다. 하나는 민태호 대감의 시선이다. 그는 자기 아내가 연파 스님에게 다가가 칼을 꺼내들 때 그를 해하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말린다. 다른 하나는 연파 스님의 시선이다. 그는 정경부인이 칼을 꺼내들어 자신의 오랏줄을 끊어줄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태연자약하게 기다리다가 정말 그것을 행하자마자 곁의 무사로부터 (자신의 무기인) 죽장을 재빨리 빼앗아 든 다음 그들을 모두 물리친다. 주관적인 두 개의 시선의 교차. 이때 나는 질문의 방향을 정경부인이 올바른 행동을 한 것인가, 라고 물어보는 대신 반대로 그 두 사람에게 돌려놓고 싶다. 객관적인 상황에 대한 각자의 주관적인 착각. 이때 연파스님은 정경부인에 대한 어떤 배려도 없이 오로지 자기를 중심에 놓고 그녀의 행동을 시스템의 신념 안에서만 판단한다. 그때 정경부인에게는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어진다. 반대로 민태호 대감은 자신이 위기에 처해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경부인의 행동을 말리려고 할 때 그것은 자기를 지키기 위한 미끼가 사라져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아내가 자신과 달리 손에 피를 묻혀서는 안 된다는 보호에서 온 호소이다. 이때 정경부인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있다. 하나는 이미 본 것처럼 스스로 파멸을 선택하고 정의라는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 선택하면 이제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다른 하나는 민태호 대감의 호소에 따라 행위를 중단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상황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한치 앞을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 중단에 대해서 누구도 정경부인을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녀는 자신을 속이고 그로 인해 남편을 현재의 상황으로 몰고 갔을 뿐만 아니라 양녀인 연화를 원래의 부모에게로 다시 빼앗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연파 스님의 계획적인 속임수에 대해서 최소한 용서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계산은 그녀가 이 행동을 중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파스님에게 그의 마지막 계산을 좌절시킴으로써 빚을 갚는 방법이 있다. 물론 당신은 하나가 더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것은 민태호 대감의 걱정대로 정경부인이 연파스님을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두 번째 선택과 별 차이가 없다. 마찬가지로 다시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가서 계속될 뿐이다. 다만 정경부인과 민태호 대감을 분명하게 한 편으로 묶어낼 뿐이다. 그러나 정경부인이 민태호 대감의 편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던가. 나는 세 번째의 선택은 셈에 포함시키지 않을 생각이다. 여기서 우리를 잠시동안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순간은 정경부인의 선택이 아니라 그 선택에 대해서 민태호 대감은 지켜본 다음 조금도 노여워하거나 혹은 정경부인의 행동을 꾸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정경부인의 행위에 대해서 침묵으로 대답한다. 말하자면 민태호 대감은 그 행동을 추호도 자신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심지어 민태호 대감은 연파스님이나 이윤재, 혹은 선혜옹주보다 더 정경부인의 행위를 잘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 짧은 순간은 임권택 이 < 연화 >의 이야기 전체를 조롱하는 결단이다. 연파스님과 이윤재, 선혜옹주, (그리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연화는 자신들이 정의를 되찾았다고 생각하면서 원래의 시스템에로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기뻐하겠지만 진정으로 이 장면에서 부부의 사랑을 확인하는 정념의 몫은 민태호 대감과 정경부인의 믿음이다. 정경부인은 그런 다음 민태호 대감 앞에 가서 큰 절을 올린다. 민태호 대감은 그 순간 정경부인의 행위가 바로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를 위한 결단이라는 것을 본다. 게다가 그것이 목숨을 건 행위라는 것을 거의 즉각적으로 안다. S#_1 S#_2 S#_3 S#_4 S#_5 S#_6 S#_7 S#_8 S#_9 S#_10 이 설명이 어리둥절하다면 정경부인의 세 번째 방문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무리할 정도로 긴 이 영화에서 정경부인이 감옥에 갇힌 민태호 대감을 찾아오는 이 장면은 < 연화 >에서 가장 중요할 뿐만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씬이다. 이윤재와 선혜옹주는 복권을 하고 연화는 부모의 품으로 돌아간다. 임권택 은 이 장면에 별 관심이 없다. 단지 이야기가 요구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런 다음 다시 감옥으로 되돌아간다. 그때 감옥은 민태호 대감이 외로이 갇혀 있으며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로 주변에 아무도 없다. 감옥으로 되돌아 올 때(master_shot), 그러니까 정경부인이 민태호 대감을 면회하기 위해 이 옥사에 들어설 때, 그녀의 방문을 연파 스님이 갇혔던 감옥 안에서 보여주기 때문에, 두 개의 프레임이 만들어지면서(frame_in_frame) 이중 삼중으로 감옥 안의 감옥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런 다음 정경부인과 민태호 대감을 서로 번갈아(shot_reverse shot) 보여준다. 이때 한쪽에서 다른 한쪽을 바라보면서 찍었기 때문에(over_shoulder_shot) 모든 쇼트는 어느 쪽에 있건 창살 때문에 감옥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정경부인은 민테호 대감 앞에 예의를 다해 앉으며 “대감, 용서하십시오, 소인이 평생 처음으로 대감의 뜻을 거역하였습니다” 라고 말한다. ( S#_1) 민태호 대감은 그녀를 가엾게 바라보면서 “내 죄가 많소, 날 용서해주시오” 라고 대답한다. ( S#_2) 정경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용서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옵니다. 세상 사람이 모두 대감에게 돌을 던진다 하더라도 소인만은 대감의 뒤를 따를 것이옵니다” 라고 하자( S#_3) 민태호 대감은 “대역 죄인은 삼족을 멸하는 법이니 부인 또한 살아남기 어렵게 되었소이다”라고 말한다. ( S#_4) 그런 다음 갑자기 더 가까이 들어가서 민태호 대감을 찍는다. ( S#_5) 이때 단지 가까이 다가갔다는 것이 요점이 아니다. 이 가까운 거리는 앞의 쇼트와 완전히 다른 장면을 만든다. 민태호 대감과 카메라 사이에 감옥의 철창이 사라진 것이다. 민태호 대감은 그런 다음 덧붙인다. “부디 정경부인의 체통을 잃지 말기 바라오” 이때의 맞은 편 정경부인을 보여줄 때는 여전히 감옥의 창살이 민태호 대감의 시선을 가로 막고 있다. ( S#_6) 정경부인은 크게 흐느끼며 “명심하오리다”라고 대답한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을 민태호 대감의 감옥 안쪽에서 좀 더 뒤로 물러나서 함께(full_two_shot) 보여준다. ( S#_7) 그리고 다시 한 번 앞서 보여준 장면의 (카메라와 인물 사이의) 거리를 반복하면서 철창 없이 민태호 대감을 보여준다. ( S#_8) 민태호 대감은 탄식하듯이 덧붙인다. “고맙소, 부인” 그러자 정경부인은 작별을 아쉬워하듯이 철창 사이로 민태호 대감의 손을 보듬듯이 잡는다. ( S#_9) 그런 다음 떠나가는 정경부인을 바라보는 민태호 대감을 창살 너머에서 바라본다. ( S#_10) 여기서 두 개의 쇼트, 철창 안에서, 그러니까 철창 없이, 찍은 장면은 정경부인이 바라보는(point_of_view) 쇼트가 아니라는 뜻이다. 좀 더 용기를 내서 말한다면 임권택의 방점이다. 잃지 말아야 할 체통.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만든 행위보다도 더 소중한 한 마디, 명심에 대해서 민태호 대감은 고맙소, 라는 말로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왜 이 두 개의 쇼트가 중요해진 것일까. 임권택 은 < 연화 >의 이야기가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드라마에 관여할 생각이 없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조선시대뿐이다. 조선이라는 기이한 공동체. 임권택은 여기서 조선 사대부 가문의 무시무시한 체통과 법도를 보려고 한다. 거기서 그가 선인지 악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선이라고 그것을 반드시 지키는 것이 아니며 악이라고 그것을 버리는 것이 아닌 세계의 질서. 이때 민태호 대감의 정경부인에 대한 이해의 바탕에는 그 무거운 사대부 양반 가문의 전통이 그 위에 내려앉는다. 여기에는 조선이라는 전근대 사회의 윤리가 한편으로는 그들이 마주해야하는 실재를 회피하게 만들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들을 둘러싼다. 그때 그들은 언제든지 운명까지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것이 그들의 의도와 아무 상관없이 정의가 제대로 작동되도록 이끈다. <연화>에서 가장 수상쩍은 대목은 사실상 이윤재와 선혜옹주가 그들의 정의를 회복할 수 있도록 제대로 한 일이 단 한 가지도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진정으로 작동한 것은 우리들의 시대와 절대적으로 좁혀지지 않는 조선이라는 시간과의 간극 사이에 머물고 있는 윤리의 기호들이다. 여기에 빠진 것은 무엇일까. 그것으로 무엇을 승화시킬 것인가, 라는 대답이다. <연화>는 그 간극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 처음 볼 때는 이 영화가 임권택 영화에서 지니고 있는 난처한 의미가 잘 보이지 않는다. 왜 그것이 아직은 난처했던 것일까. 임권택은 여기서 참조해야 할 틀을 아직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참조가 잘못되면 순식간에 이 모든 기호들이 잘못된 주인의 윤리 아래서 길들여질 지도 모른다. 그것은 위험한 내기이다. 하지만 <연화>가 가진 가장 중요한 의미는 임권택은 여기서 자신만의 안티고네를 찾았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 자신만의 안티고네가 어떤 실천을 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그 앞에 놓여있게 되었다. 이때 윤리의 기호들은 그의 주인공들을 길들이는 도구가 될 것인지, 혹은 공동체 안에서의 공존이라는 이름으로 항복할 것인지, 그도 아니면 마침내 자신을 사랑하는 기술을 익히는 방법이 될 것인지, 라는 자리에서 질문이 되었다. 물론 임권택은 손쉽게 종료하는 길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임권택을 곁에서 바라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임권택에게 유일한 방어의 기술이 있다면 그것은 의심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의심의 윤리학에 관한 체계를 설명하는 것이 내 임무 중의 하나라고 믿는다. 하지만 어떻게? (계속) 1974년 106분/109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제일영화주식회사 각본 한유림 / 신봉승 촬영 손현채 조명 박태수 편집 김희수 음악 한상기 고은아 이순재 박병호 강부자 이효춘 >> <연화> 고화질 VOD 보러가기 << >> <연화(속)> 고화질 VOD 보러가기 <<
(... 전편을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은 돌아가서 인터뷰를 먼저 읽기 바란다. < 몽녀 >에 관한 글은 전편과 후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글은 후편에 해당한다. 나는 같은 설명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다음 이어서) 1968년 임권택 은 입체영화 <몽녀>를 찍었다. 나는 만들었다거나, 연출했다거나, 라고 말하는 대신 찍었다, 라고 썼다. 물론 이 말 사이에 어떤 위계 질서를 세우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무언가 기술적인 측면에 방점을 찍고 싶다. 무엇보다 먼저 영화를 보기 전에 관객의 절차를 차례로 밟아 볼 생각이다. 먼저 신문광고를 보았다. 그때는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얻는 첫 번째 순서는 신문 하단에 실려 있는 개봉 광고를 보는 것이었다. 거기 영화제목 <夢女>만큼 큰 글자로 ‘立體映畵’라는 카피가 자리 잡고 있다. 내 눈길을 끈 것은 <몽녀>의 마케팅 포인트가 ‘입체 영상’이 아니라 ‘입체 음향’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그 아래 ‘한국 최초로 시도되는 4본 츄럭 입체음향’ (물론 ‘츄럭’은 ‘트랙’의 당시 표기이다)이라고 ‘기술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문구는 영화광고 지면의 맨 위에도 다른 서체로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 이재웅 녹음기사의 이름으로 “관객에게 피로를 주지 않는 선명한 영상에 완벽한 입체화면, 입체 음향. 등골이 오싹하는 장면들이 많은 본격적인 입체음향, 4본 튜럭을 겸한 완전 입체영화이오니 임신부나 심약한 분은 동반하시길...” 이라고 충고하는 카피를 덧붙였다. (아래는 ‘츄럭’이라고 쓰고 바로 위에는 ‘튜럭’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두 가지 이상한 점. 이재웅 녹음기사는 지금이나 그때나 영화 현장에 있는 스텝들 이외에는 거의 아는 사람이 없는 이름이다. 하긴 그건 다른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은 < 설국열차 > 혹은 < 올드 보이 >, < 밀양 >, < 피에타 >,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의 녹음 기사 이름을 들어는 보았는가. 그런데도 <몽녀>는 주연 배우나 감독의 이름 대신 녹음 기사를 내세워서 광고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경우는 (내가 알고 있는 한) 말 그대로 ‘前無後無’한 일이다. 두 번째, 만일 카피에 내건 이름이 무언가를 보증하는 것이라면 이 문구에는 연출(과 촬영)의 영역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도 그냥 녹음 기사의 이름으로 “오싹하는 장면들과 선명한 영상”을 보증하고 있다. 카피의 목표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대중들에게 어떤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 카피를 전적으로 믿는다면 <몽녀>는 사운드로 연출된 영화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 우리는 지금 <몽녀>를 ‘4본 츄럭 (혹은 튜럭)’으로 감상할 수 없다. 현재 보존하고 있는 네가의 손실에 사운드트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판스코프와 장석준 촬영감독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두 번째 ‘입체영화’를 찍은 임권택 에게 돌아오고 싶다. 1968년에 임권택은 네 편의 영화를 완성했다. 그런 다음 이듬해에는 6편을, 그리고 70년에는 8편을, 71년에는 7편을 찍었다. 그 자신은 “완성한 영화들이 개봉이 밀려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4년간 25편을 찍은 건 사실이다. 임권택은 창작에 대한 아이디어와 열정에 넘쳐나서 (그의 전 작품 중에) 사분의 일에 해당하는 영화를 이 시기에 찍은 것이 아니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피로에 지친 상태였다. 몸의 피로. 시간의 피로. 지쳐버린 이미지. 무시무시한 속도. 아이디어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도. 막다른 골목. 이어지는 현장. 임권택은 지나간 것에서 나와야했지만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건 그저 그때 그의 영화를 보고 하는 말이다. 그 안에 있으면서 임권택은 영화가 무언가에 침범당하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새로운 테크놀로지들. 영화는 테크놀로지가 변하면 문법이 바뀐다. 한국영화는 새로운 스펙터클을 찾고 있었다. 기술의 진보. 기존의 기계를 낡은 것으로 만들어버릴 때 영화는 미래주의의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다.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이동. 그 와중에 놓인 해. 1968년에 만든 영화들 사이에는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단 한 가지. 그건 그 이전과 다른 것을 만드는 것이다. < 요화 장희빈 >은 이미 임권택이 만들어온 사극이지만 이 영화는 그의 첫 번째 칼라영화이다. 물론 그 새로운 이것임, 이 기술에만 놓여있던 것은 아니다. < 바람 같은 사나이 >는 반공영화지만 희미하게 구원이라는 테마가 종교의 말씀에 이끌리고 있다. < 돌아온 왼손잡이 >는 임권택의 세 번째 ‘다찌마와리’영화지만 여기서 그의 영화 전체를 뒤덮다시피 하는 신체훼손의 테마가 불려 나온다. 만일 이 또 다른 새로운 이것임, 에 대한 새로운 짝이 없었다면 < 잡초 >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위험한 가설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화 안에서 느껴지는 영화 자체의 감각에 대한 불안이다. 새로운 시스템. 잘 작동되지 않기 시작하는 영화의 지각 장치들. 그 사이를 에워싼 다음 무언가 닫혀버린 듯한 장치들. 자기 앞에 놓인 영화의 구역이 자기에게 친숙함 속에서 낯설어지는 경험. 임권택은 그것을 익혀야만 했다. 무언가 그가 여기서 새로운 것을 해냈다기보다는 어쩐지 이 영화들에는 배움의 태도가 느껴진다. 그리고 3D 영화 < 몽녀 >가 있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나는 아직도 3D 영화에 대해서 적대적이다. < 아바타 >에 대해서 일제히 흥분했을 때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단지 영화가 너무 시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이 영화가 보여준 3D에서 어떤 영화적 흥분도 느낄 수 없었다. 물론 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공격처럼 느껴질 것이다. 천만의 말씀. 나는 논쟁을 하기 위해 지금 이 말을 꺼내든 것이 아니다. 그 대신 반문하고 싶다. 3D는 영화에 무엇을 부여하였는가? 생명? 글쎄. 상상? 천만에. 거기엔 정반대의 대답이 기다리고 있다. 그건 당신도 알고 있다. 사유? 어쩌면. 그렇다면 어떤 사유? 여기엔 다시 어떤 관념이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무엇인가를 말하는 대신 무언가를 보여주려들 때 나타나는 그저 물리적 운동들, 드러난 흔적선, 거기서 나는 단지 프레임의 변주를 느낄 뿐이었다. 그리고 대신 어디에선가 쇼트가 중단되었음을 느꼈다. 아니,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이 너무 섣부른 것이라면 적어도 영화라는 시간의 멈춤, 거기서 비롯된 모종의 고통, (그렇다) 무언가 멈춰버린 답답한 쇼트 안에서 다소의 피로를 경험하였다. 나는 여전히 3D를 볼 때마다 두리번거린다. 좌표체계들의 질서로 다시 배치된 프레임. 새로운 조건, 이때 내가 여기서 보는 질서는 동시에 (재난이라는 의미에서의) 카오스이다. 새로운 질서에서 나는 매번 새로운 창조를 보는 대신 무언가 떠오르다가 사방으로 흩어져버리는 어떤 실패를 본다. 나는 아직 이 실패를 설명할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그때 무엇이 어른거리는가. 새로운 이미지? 아, 이미지. 그런데 어떤 이미지? 공간의 새로운 경험. 그렇게 다시 경험이라는 말이 영화에서 우리들의 중심에 들어섰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기술의 경험이라는 문제는 영화에서 까다로운 질문이다. 만일 누군가 3D 효과의 가장 훌륭한 예를 요구한다면 (3D기술로 찍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힛치콕의 < 현기증 >에서의 줌 인 트랙 아웃을 선택할 것이다. 역사적 전환기에서 현재의 생산조건이 예술에서 실현가능한 발전경향을 보여주는 것은 종종 미학적 가치의 기준과 시장의 교환가치 사이에서 모호한 협상을 벌이기도 한다. 존재하지 않았던 모든 가능성의 잠재성. 어쩌면 내게 당신은 그 잠재성과의 거리에서 가능성의 상상이라는 능력을 다시 조절하는데 실패했다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 몽녀 >를 말하기 위해서 나는 다소 우회하고 싶다. 잠시 멈춰 세운 1968년. 모두가 물어보았다. 21세기 영화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3D는 오래 전에 시작되었지만 < 아바타 > ‘이후’ 만큼 전세계적인 (자본과 그에 얽혀든 노골적인) 구경거리가 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점점 더 자기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를테면 2013년, 할리우드로부터 (겉으로는) 영화 예술을 방어하기위해 예술가들을 위한 파티처럼 ‘골치 아픈 작가’들의 영화를 모아놓는 칸 영화제가 3D 영화 < 위대한 개츠비 >를 개막작으로 초대하였고, 경쟁하듯이 이어지는 베니스영화제가 역시 3D 영화 < 그래비티 >를 마찬가지로 개막작으로 발표하였다. 3D영화에는 한 가지 신화가 있는데 그건 지금 막 발표한 ‘아무도 보지 못한’ 새 영화가 이제까지의 어떤 3D 영화도 기술적인 이유로 구현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미지를 경험하게 해줄 것이라는 소문이다. 물론 그건 빈 상자이다. 마치 진짜 선물을 감춰놓은 최후의 상자처럼 사람들은 지치지 않고 열고 또 열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같은 행동을 반복할 것이다. 차라리 이미지의 경험이라는 문제를 놓고 이야기해야 한다면 나는 IMAX에 대해서 아주 관심이 많다. 그건 시네마스코프만큼 생각해볼만한 영화적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연설명을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당신은 내게 냉소적으로 반문할지 모른다. 한국에서는 IMAX를 볼 수 있는 스크린이 없잖아요. 나도 알고 있다. 유감스럽지만 당신의 지적은 사실이다. 게다가 이 화면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자리에서 IMAX 스크린으로 고정시킨 것이며,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영화 전체를 IMAX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IMAX 체험이라는 말에는 어딘지 모르게 영화적 체험이라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서 극장이라는 공간의 물신적 체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지도 모른다는 다소 짓궂은 담론의 교란이 음산하게 떠돈다. 잘못 잡아당긴 재앙의 실. 그때 테크놀로지는 비판적 거리를 단숨에 집어삼킬 것처럼 거대한 가치와 이윤율의 회전 사이 안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예술에서 기능이라는 문제.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영화에서 우리를 새로운 환경, 낯선 속도, 무언가 시선이 얽히고설킨 가운데로 데려다 놓는 것처럼 보일 때 거의 동시에 어떤 영화적 능력이 마비되고 있음을 동시에 느껴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하나의 기능이 속도를 갖기 시작하면 다른 능력은 감속하기 시작한다. 나쁜 경우는 그 능력이 제로가 될 것이다. 문제는 21세기 영화에서 오로지 산업적인 이유로 두 가지 테크놀로지가 배급 구조에 따른 (제한된 자본 순환구조 안에서 일반적 이윤율의 하락을 상쇄하는 새로운 제 요소 중의 하나로 강제적으로 결합시키려는) 극장 라인의 요구에 따라 기형적으로 결합하면서 오히려 영화의 모든 잠재성은 하나의 감각으로 수렴되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는 자본의 운동. 3D 영화는 초과잉여가치의 발생인가, 아니면 (관객의 자리를 일시적으로 제한된 시간 동안 제공하는 자리를 바탕으로 한) 임대업의 상승인가. 그 자리를 차지한 시각적 스펙터클. 말하자면 영화의 입장에서 IMAX 3D는 일종의 스펙터클한 괴물이다. 나는 이것을 벤야민의 말을 빌려 와해된 시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와해된 시장에서는 오락만이 자리를 잡을 수 있을 뿐이다. 기 드보르는 여기에 좀 더 구체적으로 덧붙인다. 스펙터클이란 고도로 축적되어 이미지가 되어버린 자본이다. 자본은 미학이 될 수 있을까. 물론 마틴 스콜세지의 < 휴고 >를 보았다. 멜리에스의 환상적인 타블로 안에서 재현된 3D. 베르너 헤어초크의 < 잊혀진 꿈의 동굴 >을 보았다. 프랑스 남부 아르데스 협곡 안에 자리 잡은 쇼베 동굴 안에 자리 잡은 3만 2천 년 전의 동굴 벽화들. 그 사이를 외롭게 떠도는 3D 카메라(들). 빔 벤더스의 < 피나 >를 보았다. 피나 바우쉬의 제자들의 기억과 재현. 종종 무용수들은 2차원을 벗어나듯이 도약한 다음 중력이 잡아당기는 무게에 따라 원래의 화면으로 돌아갔다. 픽사의 < 토이 스토리 3 >를 보았다. 나는 단지 효과라는 점만 고려한다면 3D는 애니메이션에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에서 보는 새로운 차원에 대해서 금방 호기심을 잃어버렸다. 3D 영화는 실재의 감각을 가져야만 한다는 명제를 여기서 확인한다. 프란시스 포드 콧폴라의 <트윅스트>를 보았다. 이 야심적인 뱀파이어 영화는 다만 부분적으로만 3D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명백히 이 영화는 장 엡스탱의 < 어셔가의 몰락 >을 다시 끌어들이고 있다. 엡스탱의 포토제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질서. 그 속에서 창조된 시간. 영화와 물리학은 정말 만날 수 있을까. 이미지의 부피와 표면, 길이와 지속. 그러나 콧폴라는 그렇게 멀리 가는 대신 몇몇 시퀀스에서 꿈을 바라보며 멈추었다. 스필버그의 <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 >을 보았다. 무언가 스필버그는 이 새로운 효과에 대해서 망설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 쥬라기 공원 >의 3D 트랜스퍼 버전을 보지 않았다) 물론 여기서 3D 효과에 심취한 팀 버튼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와 흑백 3D < 프랑켄위니 >. 하지만 나는 팀 버튼이 여기서 정확하게 무얼 하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르겠다. 리안의 < 라이프 오브 파이 >를 보았다. 아, 리안. 영리한 리안. 매번 시퀀스마다 새롭게 다시 정의되는 3D의 (프레임 속의) 이미지들. 그는 극장을 마치 갤러리처럼 활용하였다. 연출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큐레이팅이라고 부르고 싶은 배치들. 나는 의자에 앉아있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는 내내 배회를 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떠도는 배에 실려 함께 부유하는 스크린의 프레임들. 리안은 거의 영화를 멈추기 직전까지 끌고 간 다음 관(람)객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순간 재빨리 멈추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이 영화는 아름답다. 그러나 그걸 영화적으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수상쩍게 쳐다보고 있다. 서극의 < 용문비갑 >을 보았다. 이미지 속의 (이미지 속의 (이미지 속의)) 유희들. 과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운동들. 과도할 정도로 배치된 특수한 순간들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동선. 비검(飛劍)의 선. 능공허보(凌空虛步)의 선. 마치 공장에 들어온 것 같은 톱니바퀴들의 향연. 하지만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3D 영화들이 만들어지면 (그 원래의 의도에 따라) 2D로 볼 수 있는 기회가 함께 제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3D로 ‘하여튼’ 본다. 물론 그건 그 영화에 대한 전적인 내 예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즐기기 위해서 극장에 간다. 물론이다. 거기서 무엇을 즐길 것인가. 흥미로운 것들. 영화 안에 있는 영화적인 것들. 우리는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질문은 더 이상 투명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투명하지 않았다. 3D 효과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 거기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단지 덧붙여진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당신은 영화의 이야기 진행에서 사실상 모든 것이 처음부터 그렇다고 맞받아치고 싶을 것이다. 물론 미메시스의 관점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보여주어야 할 때 영화에는 이상하게도 미메시스로부터 독립적인 그 무엇이 거기에 머물기 시작한다. 거기서 무엇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이미지들의 수수께끼. 바로크적인 재현들. 영화의 테크놀로지는 종종 재현의 디테일과 만날 때 새로운 경로들과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이 때로 영화의 매너리즘을 재촉할 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이 논의를 좀 더 밀고 나가고 싶다. 3D 영화를 볼 때 이 효과가 영화의 일부라기보다는 이상하게 3D 라는 효과가 영화에 침입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처음에는 단지 이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영화 안에 강제적으로 이 효과를 삽입하면서 벌어지는 기계적인 외설적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차례차례로 만나게 된 3D 영화들. 새로운 효과들, 기발한 상황들. 낯선 미장센. 그 안에서 물건들의 이상한 이동. 때로는 동선. 기괴한 카메라의 위치. 이 질문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3D 효과는 영화에 근본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 효과는 이차원의 착시를 이용한 이제까지의 영화 문법에 대해서 외설적일 뿐만 아니라 난폭한 부름에 우리를 지속적으로 깨어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종종 장르적인 외피 때문에 3D 효과가 환상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효과는 정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단지 이것은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것을 방해하는 외부적인 공간 감각의 재현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이미지가 우리들에게 감각의 방어선을 찢고 외상적 실재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3D 영화를 볼 때 보는 자세를 조금만 흐트러트리면 곧장 쓰고 있는 안경과 스크린의 이미지 사이의 시차적 초점이 맞지 않아 화면이 이중으로 보이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안다. 3D 영화를 볼 때 (감상을 포기하지 않는 한) 당신은 꼼짝도 하면 안 된다. 고정된 시선만이 당신의 감각을 입체적인 화면 안에 집어던져 넣을 것이다. 그때 당신이 견뎌야하는 자세와 맞바꾸는 것은 < 아바타 >의 제이크 설리처럼 마음껏 화면을 뛰어다닐 수 있는 환상적인 착시의 자유가 아니라 반대로 화면 사이에서 부딪칠지도 모르는 미장센들 사이의 모서리와 추락할 지도 모르는 가장자리들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시뮬레이션의 감각들이다. 점점 더 영화와 나 사이의 동일화는 단지 상상적 자아에 호소하기보다 실재적 감각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질문하고 싶다. 작품과 나 사이의 거리가 지워질 때 우리는 작품으로부터 심미적인 감흥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물론 이 질문이 고전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낙천적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영화와 당신 사이의 거리를 최소화 하려고 동분서주하였다. 내가 망연자실해진 것은 올해 여름이다. 지금 무심코 지나가고 있지만 2013년은 어떤 표지판을 갖게 될 것이다. 미학적 논쟁은 프랑스 남쪽 니스 근처의 해안가 칸에서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LA의 영화제작자들은 그런데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거의 눈부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3D 영화들. 무엇보다도 두 편의 영화. JJ 에이브럼스의 < 스타 트렉 다크니스 >와 길레르모 델 토로의 < 퍼시픽 림 >은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 그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인상을 불러 일으켰다. 이전까지 그저 공간의 깊이와 대상의 근접이라는 문제에 머물렀던 영화들에서 이 영화들은 쇼트의 기형화와 리듬의 왜곡이라는 새로운 영역 안으로 침입하기 시작했다. 명백히 이 영화들은 여전히 부분적으로 클리셰들이 머물고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엔 < 맨 오브 스틸 >처럼 끔찍하리만큼 유치한 영화도 포함되어 있다. 반대로 두 편의 실패작을 말할 차례이다. < 7광구 >와 (한국영화 사상 첫 번째 풀 3D라는) < 미스터 고 >는 영화로서 뿐만 아니라 3D 효과라는 면에서도 재난에 가깝다. 나는 이 말을 하면서도 망설여진다. 영화와 영화의 효과. 그 둘을 분리해서 말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물론 그들은 기술적으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 하이테크한 기술의 완성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효과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다. 왜 그들은 원하는 효과를 얻지 못한 것일까. 누군가는 마케팅 전략에 책임을 떠넘길 것이다. 물론 그럴 지도 모른다. 지난 봄부터 바보 같은 영화들이 차례로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므로 <미스터 고>는 실패할 이유가 없을 지도 모른다. 미안하지만 나는 박스오피스에 관심이 없다. 내가 말하는 실패는 그 효과가 왜 대중들의 구경 안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냐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걸 누가 대답할 수 있겠는가) 말 그대로 왜 그 효과들이 영화 화면의 좌표 안에서 선별된 변수들 바깥으로 빠져나와 종종 물리적이거나 단지 역학적인 기능 이외에 달리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영화는 프레임의 집합 안에 머물지 않으면 곧장 영화 자체를 부수기 시작한다. 제임스 캐머론은 < 아바타 >에서 (종종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시각적 영역을 서사의 범주 안에 종속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가 지닌 스크린과 관객 사이에서 일종의 방어선 같은 것이 되었다. 물론 종종 바보 같은 영화들이 그걸 뛰어넘어서 화면 바깥 어딘가에서 어른거리고 싶어 했다. 혹은 손에 잡힐듯 한 그 무언가를 신기루처럼 허공에 멈춰 세웠다. 허공에 떠 있는 건 자막만으로 충분하다. 3D 영화들은 프레임으로부터 이미지의 일부를 바깥으로 내 보내는 대신 어디서 멈춰 세워야 할지를 탐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영화에서 새로운 영토이자 구역이 되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new Zone’이라고 다시 정의하였다. 새로운 개념의 발명. 이때 핵심은 3D 영화는 스스로에게 어떤 한계를 설정할 것인가, 라는 그 경계의 설정이 미학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악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내가 던진 돌이 거기서 멈출 것입니다, 라는 태도. 혹은 당신을 향해서 던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라는 결정. 처음 3D 영화가 나왔을 때 모두들 결국 이 테크놀로지는 스포츠 중계와 포르노로 귀결될 것이다, 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적어도 아직은)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당신은 3D 모니터가 대중화 되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라고 반문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떤 경고가 담겨있다. 모두들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두 장르가 둘 다 3D 영화를 이끌지 않은 것은 영화와 관객 사이의 방어선처럼 놓여 있는 둘 사이의 간극을 넘어서는 순간 대중들의 상상은 중단되고 신기루와 같은 효과를 채우는 그 기능이 마비되어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D 효과도 사실상 시각적 착시 효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만일 이 착시를 보충하는 상상을 포기하게 되면 반대로 감각은 그것을 확인하려 들 것이다. 영화에서 결국 터치(touch)라는 문제가 불려나오게 되었다. 이제 3D 영화는 바로 그 거리를 어떻게 미학적으로 다시 결정하느냐는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Etant donnes : 1. la chute d’eau, 2. le gaz d’eclairage Two Home Homes [Top: ‘Two Home Homes’ - split-level entrances, 1966; Bottom: ‘Two Home Homes’ ground-level entrances, 1966] 단지 질문만을 붙들고 늘어진다면 우리들의 논의는 왠지 영화와 미술 사이의 친밀성에로 되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는 이제 제법 많은 목록을 갖게 되었다. 만일 3D IMAX를 떠받치고 있는 자본의 토대를 무시하고 그저 순진하게 말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나는 이 테크놀로지가 오히려 인스톨레이션에서 훨씬 더 창조적인 역능을 가졌을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몇 가지 예. 마르셀 뒤샹이 20년 동안 남몰래 제작해 온 <주어진; 1 폭포, 2 점등된 가스등>에서 마치 핍 쇼 공간처럼 옮겨놓은 광경은 우리들에게 뚫린 구멍 너머의 (시각의) 원뿔을 제시하고 있다. 카메라 옵스큐라와도 같은 자리에 불려간 관객. 문 너머의 스펙터클. 그 안에서 뒤샹은 르네상스 원근법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구멍 너머에 있는 광경 안의 대상을 우리에게 던져놓은 다음 다시 한 번 시선이라는 원근법의 기하학을 미술관에서 재구성하고 있다. 이때 나의 관심은 새롭게 정의 내려진 미술관이라는 공간의 개념이다. 차라리 우리는 이 작품을 3D 로 보는 편이 더 뒤샹의 시선 안에 손쉽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두 번째 예. 1966년 댄 그레이엄의 사진 작업 중 <미국을 위한 집; 스콜릿 레벨과 그라운드 레벨, 두 개의 집이 있는 집>을 보고 있으면 이 두 장의 사진은 (뉴저지에서 레디 메이드한 미니멀리즘의 코드를 드러내려는 의도와 상관없이) 얼핏 유사해 보이는 둘 사이에서 서로 겹쳐지지 않는 차이를 통해 단지 건축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상호간의 매우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지표 사이의 상호작용을 읽어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여기서 두 개의 사진을 3D 화면으로 올려놓고 싶은 충동을 참기 힘든 것은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세 번째 예. 빌 비올라의 비디오 프로젝션은 영화를 빌려온 다음 고스란히 영화에 수 없이 많은 영감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1996년 작품인 <교차>. (나는 의도적으로 백남준의 예를 들지 않았다) 비올라의 작품에 대해서는 수많은 다른 이론을 전개할 수도 있다. 명백히 마샬 맥루한의 이론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온 다음 비올라는 빛과 프로젝션 사이에서 보는 자리를 다시 배치하였다. 물론 비올라는 자신의 작업이 매체에 지나치게 다가가는 것을 경계했다. 여기서 미술 비평가들이 끌어낸 개념은 외상적 숭고란 칸트적 개념이었다. 숭고.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 이미 라캉이 물 자체라고 정의 내렸던 그 경험 안으로 지각이 방문할 때 3D 스크린은 우리를 환상과 실재 사이에서 게임을 제안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Bill Viola - the Crossing 너무 멀리 온 것일까. 하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 몽녀 >를 바라볼 생각이다. 3D 효과의 가능성이라는 질문. 아직 질문이 잠재적인 가능성으로만 남아있었을 때 임권택 의 선택. 산업 안에서의 선택. 장르 속에서의 선택. 판스코프 촬영으로 찍은 첫 번째 입체영화 < 천하장사 임꺽정 >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두 영화 사이에서 입체 기술의 효과가 보여주는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 혹은 거기서 얼마나 더 나아갔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걸 보지 못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임권택도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럴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입체영화는 특수(라고 해야 장난감 안경 수준에 양쪽에 서로 다른 레드와 블루 셀룰로이드를 프레임에 붙인) 안경을 착용해야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만일 개봉당시에 보지 못했다면 관람의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3D 영화에 대한 별다른 경험을 갖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3D 영화의 전문가들은 3D 효과는 기술적인 문제이지만 동시에 경험에 대한 데이터의 문제라고 조언한다. 아마도 임권택이 <몽녀>를 만들었을 때 장석준 의 조언은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그때 장석준은 임권택에게 영화에서 이미지의 입체라는 효과에 대해서 무슨 조언을 했을까. 내 질문은 단순하다. 그 말에 따라 임권택이 가정한 효과의 연출이라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 가짜 박인호 인숙 (이하의 글은 스포일러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지금 리뷰를 쓰는 것이 아니다) < 몽녀 >는 광고 문구에서 자기 장르를 ‘推理 怪奇 映畵’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다소 장황한 줄거리. 자수성가한 재계의 거물 정 사장은 카바레 라스베가스의 사장이자 밀파간첩인 리나에게 가짜 유언을 녹음하도록 협박을 당한 후 살해당한다. 목소리만 남은 아버지. 그런데 그 목소리에 담긴 가짜 증언.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장례식 날 정 사장이 평소에 아끼던 박민호가 일본에서 급히 귀국하지만 중간에 속임수에 빠져 호텔로 유인당한 후 가짜 박민호에게 역시 살해당한다. 가짜 상속자. 결혼을 위임받은 가짜 사위. 하지만 이 두 개의 씬은 연달아 붙어있고, 어떤 인과관계로 엮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무언가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영화를 본 다음 가장 이상한 것은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 말고 정 사장은 더 이상 영화에 어떤 존재로서 뿐만 아니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이 영화가 추리일 뿐만 아니라 괴기영화라는 것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아버지의 존재뿐만 아니라 이름으로서도(name-of-the father) 사라졌을 때 유령의 존재는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몽녀>는 <햄릿>이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제대로 매장되지 않았을 때 억압은 어디서 귀환해야 하는 것일까. 혹은 유령은 어디서 출현해야 하는 것일까. 실망스럽겠지만 이 영화는 초자연적 현상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다. 그때 3D(와 입체음향) 효과는 어디에 개입할 수 있을까. 그 효과들은 영화 안에서 어떻게 시청각적 기호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 임권택 과 장석준 은 귀신을 버린 대신 무엇을 얻은 것일까, 혹은 얻으려는 것일까. 악당들의 목표이자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있는 정 사장의 금괴. 가짜 박민호는 장례식에 참석한 후 가짜 유언에 따라 사업을 물려받고 정 사장의 딸 인숙과 결혼을 준비한다. 가짜 박민호는 인숙의 호의를 사면서 집에 입주하마자마 한편으로 매일 밤 (정 사장이) 금괴를 숨겨놓은 지하실을 뒤진다. 아, 지하실. 언제나 지하실. < 사이코 > 이후에 언제나 비밀은 그곳에 있다.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경계선으로서의 계단. 이때 이 거대한 저택에서 지하실은 이상하게도 마치 오랫동안 아무도 드나들지 않은 장소처럼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 차 있고 종종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이 상황은 장르적인 약속이다. 박찬욱의 < 스토커 >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넓은 일층. 그 자체로 완전하리만큼 충족된 장소.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지나치게 좁고 작은 인디아 스토커의 방에 도착한다. 상자들로 가득 찬 그녀만의 세계. 그리고 마치 다른 집에 온 것만 같은 온통 먼지에 가득 찬 채 전깃불도 제한적으로 들어오는 이상한 지하실. 영화에서 지하실이라는 공간의 역사. 가짜 박민호는 지하실에 금괴를 숨겨놓았다고 확신하고 매일 밤 지하실로 내려간다. 물론 우리도 같이 내려가야 한다. 유감스럽지만 나는 현재의 (탈색현상으로 이미지의 정보 손실이 크고, 사운드 코팅이 벗겨져 심지어 대사조차 불분명하며, 일부 쇼트가 사라졌고, 권수가 뒤바뀐) 프린트 판본으로는 지하실의 미장센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지하실에 내려갔을 때 가짜 박민호가 마주치는 장르의 두 가지 컨벤션은 말해야겠다. 하나는 고양이이고, 다른 한 명은 이 저택의 식모이다. 아마도 도둑고양이. 인숙은 고양이를 기르지 않는다. 그 집 주인이 기르지 않는 동물을 누가 그 저택에서 기를 수 있을까. 마치 금괴를 지키기 위해 지하실에 머무는 듯한 고양이. 거의 말이 없는 여주댁. 그녀는 밤늦은 시간 불도 켜지지 않는 지하실에 왜 내려온 것일까. 가짜 박민호는 이 집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야만 했다. 지금 이 게임은 이상하게 진행되고 있다. 겉보기에는 가짜 박민호와 리나가 음모를 꾸미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들은 금괴라는 유혹에 이끌려 ‘지나치게 많은 것을 볼 수 없는’ 이상한 집에 끌려 들어온 것이다. 잉여지식으로서의 지하실. 그때 우리는 원근법을 잃게 될 것이다. 잃어버린 원근법. 새롭게 세워져야 할 타블로. 임권택 (과 장석준 )이 3D 효과를 전시하기 위해서 지하실로 내려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지하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때 임권택(과 장석준)은 지하실 세트를 설계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하나는 지하실이 과도하리만큼 직선으로 이어진 수직선의 공간이며 이 선을 따라 카메라는 트랙 위에 올려져서 안정적으로 후진하거나 전진한다. 이동이라는 깊이. 인물은 그 선을 따라 동선을 연결하고, 카메라의 렌즈는 인물과 소실점 사이에서 이동할 것이다. 이 직선을 따라서 여러 개의 방이 양쪽 좌우로 늘어서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런 지하실은 불가능하다. 이때 이 설계가 소실점을 가정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점과 선으로 이어진 공간. 이 공간을 찢고 등장하는 고양이의 무규칙한 동선과 지하실로 내려오는 계단이 놓인 문이 몇 개나 되는지 가늠할 수 없는 여주댁의 예상치 않은 방향에서의 출몰. 누가 누구를 홀리는 중일까. 임권택의 쇼트는 여기서 이상하리만큼 길어지고 있다. 아니, 감각적으로 늘어지고 있다. 나는 이 늘어짐, 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마치 카메라의 이동이 요청하는 것에 대한 응답이라도 하듯이 늘어지고 있는 중이다. \ 성우와 인숙 물론 이야기가 계속 지하실에서 진행될 수는 없다. 가짜 박민호가 지하실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밤사이에 잠깐 뿐이다. 인숙은 자꾸만 지하실로 내려가는 가짜 박민호을 의심한다. 물론 이 의심의 외설적 판본은 명백하다. 왜 당신은 이렇게 예쁜 나를 내버려두고 밤마다 지하실에 내려가는 것인가요? < 몽녀 >에서 임무와 욕망 사이의 교차는 이상하게 서로 뒤엉키고 있다. 가짜 박민호는 리나가 인숙을 없애버리자고 제안할 때 망설이면서 두 번이나 전혀 예상치 않은 답변을 한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지, 불쌍하더군, 그 애만은...” 임권택 은 이 감정을 더 발전시키지 않지만 그 감정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도 설명하지 않는다. 인숙은 처음부터 가짜 박민호에게 호의를 갖지 않았으며, 계속 의심하고, 그런 다음 집에 들어오자 아버지의 비서였던 성우의 품에 안기면서 “무서워요, 절 좀 지켜주세요, 그 사람을 집안에 끌어들인 것도 실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알기 위해서였어요. 성우씨”라고 간절하게 고백한다. 이때 이상할 정도로 3D 효과는 완전히 작동이 멈춘 것처럼 보인다. 임권택(과 장석준 )은 3D 효과가 감정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할뿐더러 심지어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물론 이건 지금도 3D 영화들의 고민이다. 이야기의 진행 때문에 할 수 없이 3D 효과를 멈춰야하는 순간과 마주칠 때 3D 영화들은 단지 이미지뿐만 아니라 리듬 자체의 변주를 경험하게 된다. 베르너 헤어조크와 빔 벤더스는 소재의 힘을 빌려 이 순간을 피하고 있다. 마틴 스콜세지는 영화를 불균형하게 만들었다. < 위대한 갯츠비 >는 그런 의미에서 거의 효과의 재난에 가깝다. < 몽녀 >가 기괴해지는 것은 그 다음부터이다.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이상한 법칙들의 적용. 한쪽이 기울기 시작한 진행. 균형을 잃을 때 보게 되뇩오鵑贊?위치의 시선. 낯선 반응. 영화는 환상에 이끌리는 것도 아니면서 자꾸만 정신을 잃는다. 그 다음의 진행. 인숙이 의심을 품자 가짜 박민호와 리나는 그녀를 정신병자로 몰아가면서 한편으로 정신병을 유발하는 약을 먹여 최면 상태에 빠져서 금괴를 숨겨놓은 곳을 자백하도록 유도한다. 그때 리나는 정 사장의 목소리를 가짜랜옇링榕底?인숙에게 전화한다. 전화로 정 사장은 인숙에게 “나다, 아버지야, 애비 소릴 몰라, 감춰둔 금괴 말이다, 나쁜 놈들이 그걸 노리구 있어, 그걸 빼앗기면 안 된다, 아무래도 그 장소는 마음에 걸리거든, 장소를 옮겨서 다른 곳에 숨겨두라구, 알았지” 라고 말한다. 다소 우스꽝스럽지만 뒤집힌 햄릿의 버전. 죽은 아버지가 돌아와서 인숙에게 말해준다. 나쁜 놈들이 금괴를 노리고 있으며, 그들이 네 곁에 있다는 사실. 가짜 박민호와 리나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실상 아버지의 진짜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중이다. 인숙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그들이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이 인숙을 속이기 위해서 사용한 아버지의 목소리를 경유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알려주고 더 나아가 목표마저 고백하고 있는 중이다. 죽음에 머물지 않고 돌아온 아버지(의 목소리). 딸이 염려되어서 돌아온 아버지. 그때 음모를 진행하던 리나는 이상한 대사를 한다. “프로이드 정신분석이 없었다면 이런 약을 만들 생각조차 못했을 거야” 나는 거기서 멈춰 섰다. 물론 나도 안다. 이때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진지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인숙에게 사용된 것은 일종의 최면술이다. 프로이드는 장 마르탱 샤르코의 최면술에서 영감을 받긴 했지만 곧 버리고 자유연상법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가짜 박민호는 이때 인숙에게 착각을 심어주기 위해서 정 사장이 살아생전 아끼던 꽃병이 놓인 책상 다리를 미리 자른 다음 인숙이 지나가자마자 쓰러져 깨지게 만들고 인삼차를 타려는 그녀보다 앞서 부엌에 들어가서 설탕과 소금을 바꿔친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녀는 인삼차에 소금을 탄 다음 자기의 실수를 발견하자 흐느끼면서 “이러다 미친 여자가 되고 말 거예요, 광인이 돼버릴 거란 말이에요”라고 말한다. 마치 리나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인숙은 자신의 증세를 스스로 진단을 내린 다음 그 증세 안으로 자기를 밀어 넣기 시작한다. 텔레파시와도 같은 조응. 여기서 이상하게도 나는 임권택 이 영화에서 3D 효과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이건 단지 눈속임이 아니다. 이미지의 새로운 유형.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임권택은 그걸 영화의 정신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이미지의 알리바이. 하지만 임권택은 그런 다음 두 번 다시 입체영화, 혹은 3D 영화를 찍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이 가정을 더 밀고 나갈 수 없다. \ 만일 < 몽녀 >가 복원된다면 나는 오로지 그 다음 장면, 그러니까 인숙이 대낮에 마치 홀린 듯이 길거리로 나간 다음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걸어가는 시퀀스 때문에 (불편한 입체 안경을 무릅쓰고)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다. 이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시적으로 찍혔다. 한산한 초여름의 서울 시내. 넋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인숙. 초점 없는 산책. 육교 위를 수평으로 걸어갈 때 다소 기울어진 수직으로 보이는 차선. 수평의 동선과 수직의 운동. 인숙이 걸어가는 방향과 반대방향에서 다가와 스쳐 지나가는 무심한 동선들. 서로 다른 속도가 하나의 화면 안에서 공존할 때 만들어지는 화음. 그녀가 한적한 길로 접어들자 뒤쫓아 오던 리나가 그녀 곁에 차를 대고 “아니, 인숙씨 아니세요, 타세요, 어디까지 가시는지 모셔다 드릴께요” 라고 호의를 베푼다. 서울 외곽으로 이어지는 풍경들. 1968년 서울의 3D 풍경. 리나는 인숙에게 친절한 척 가장하며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신경쇠약이라고 들었는데 하루 속히 고쳐야죠, 잘못하면 정신이상이 될 수도 있어요, 무서운 병이죠” 인숙은 그저 앞만 바라보면서 대답한다. “고치지 않겠어요. 고칠 수가 없어요” 리나는 인숙을 끌고 부평 기찻길까지 데려간 다음 인숙에게 말한다. “기적소리를 들으면 이상한 충동을 느끼곤 하죠. 가령 기차를 향해 뛰어들고 싶다든가” 그러자 인숙이 터널을 바라보면서 대답한다. “그렇군요, 죽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함께 기찻길을 따라서 걸어가던 리니는 갑자기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기차에 인숙을 밀어 넣는다. 인숙의 죽음. 이때 인숙은 두 번 몽녀가 된다. 한번은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할 수 없는 아버지의 유령에 시달리면서 빠져들 때이고 (꿈꾸는 여자), 두 번째는 그녀 자신이 죽은 다음 가짜 박민호 앞에 잠옷을 입고 나타날 때이다. (꿈으로서의 여자) 인숙이 죽은 다음 유령이 되어 다시 찾아올 때 그녀를 보는 것은 그녀를 살해한 리나가 아니라 그녀를 “죽일 필요까진 없다”고 설득하던 가짜 박민호이다. 심지어 고양이가 달려들 때 가짜 박민호는 해골을 본다. 만일 < 몽녀 >에서 의학적으로 정신이상에 빠진 인물이 있다면 그건 가짜 박민호이다. 이 이상한 증후의 인과관계. 물론 죽은 (흉내를 내고 있는) 인숙은 리나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리나 송, 내 목을, 내 목을, 리나 송, 내 목을”이라고 반복해서 읊조린다. 두려움에 질린 리나는 가짜 박민호에게 말한다. “우린 신경쇠약에 걸렸나 봐” 리나는 인숙에게 뒤집어씌우려던 증세가 자신들을 덮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자 가짜 박민호는 이상하게 대답한다. “일 년 육 개월의 남반부 생활이 그렇게 만든 거야” 가짜 박민호는 신경쇠약이라는 진단을 재빨리 인정한 다음 그 원인을 남반부 생활에 돌린다. 나는 약간 웃음을 참아가며 이 대사를 따져들고 싶다. 그들의 신경쇠약은 자신들이 살해한 정 사장이나 혹은 그의 딸 인숙때문이 아니다. 또는 제한된 일정 안에 찾아서 북에서 온 공작원에게 넘겨야 했던 금괴 때문이 아니다. 같은 말이지만 그들의 임무 때문이 아니다. 자신들의 신분을 숨겨야하는 긴장에서 온 것도 아니다. (마지막 시퀀스까지 그들의 정체를 간첩과 연결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대공수사본부의 감시와 평행 편집될 뿐이다) 그들은 북한에서는 (적어도 신경질환이라는 관점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들을 억압하는 건 ‘남반부의 생활’이다. 휴전선 이남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들 신경증 환자이다. 그러므로 환자들의 일상 안에서 사는 건 가짜 박민호와 리나에게는 그들의 임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령을 마주하게 할 만큼 고통스러운 삶이다. 아, 가련한 남반부의 삶이여. 물론 그 다음은 예정된 수순을 따라간다. 리나를 인숙의 유령으로 착각한 가짜 박민호는 그녀를 살해한 다음 혼자 빠져나와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과 접선한다. 하지만 이미 대공수사본부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고 가짜 박민호는 급히 차를 몰고 달아나다 그만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 죽는다. 간단한 에필로그. 인숙과 성우는 정보계장을 만난다. 두 사람에게 정보계장이 그들의 공고를 치하하자 성우는 “모든 것이 인숙씨의 기지로 성공 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정보계장은 인숙에게 “아닌 게 아니라 어제 밤 유령노릇 하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라고 덧붙인다. 인숙은 “반납하겠어요, 이십세기 유령”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정보계장에게 청첩장을 주고 함께 떠난다. 끝. 임권택 은 여기서 어떤 교훈을 얻은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교훈? 물론 임권택이 영화에서 새로운 기술적 환경에 대해 적대적이 된 것은 아니다. 그로부터 5년 뒤에 < 증언 >에서는 한강 철교 폭파를 일본 스텝진의 도움으로 미니어처 촬영을 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1970년대 한국영화에서 특수촬영의 교과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 춘향뎐 >과 < 취화선 >에서 사용된 CG 효과. 끝내 미루기는 했지만 101번째 영화 < 달빛 길어 올리기 >를 디지털로 촬영했다. 영화에서 테크놀로지는 까다로운 문제이다. 새로운 기술들은 가까스로 만들어진 미학적 규칙 안에서 어떤 훼손들 사이의 긴장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종종 진화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때로 미학적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다. 임권택은 여기서 3D 효과라는 것이 영화 안의 형식적 용법들을 거의 중단시킬 뿐만 아니라 이야기 안에서 인물들이 효과의 감옥에 갇히는 것을 보았다. 물론 나는 현장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 몽녀 >를 보고 있으면 어떤 순간에는 필요 이상으로 효과 앞에서 연출의 방법이 평면화되거나 때로 제한적으로 멈추는 것을 보게 된다. 영화에서 지나치게 테크놀로지가 압도하게 될 때 이상하게도 이미지에서 아방가르드적인 측면이 나타난다. 나는 이미 장 엡스탱의 포토제니를 말했다. 나는 이 말이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이미지의 영혼을 거기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혼의 이미지라는 반대 방향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때 이미지는 테크놀로지로 영혼을 물화시키고 더 나아가 종종 우스꽝스러운 형식의 기형으로 말미암아 영화의 감각 전체가 마비되기 시작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임권택은 거기서 잠재적인 가능성 대신 위기를 본 것 같다. 혹은 무언가를 판단하기에 1968년은 너무 이른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몽녀>는 자문자답하고 있다. 영화에서 새로운 기술적 진화는 무엇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가. 임권택의 대답. (어떤 영화적) 효과가 멈추었을 때 (이미지의 어떤) 효과가 시작될 것이다. 그때 갑자기 영화를 기능이 지배하기 시작한다. 차라리 이런 표현을 쓰고 싶다. 영화는 이미지의 도구가 된다. 그때 영화의 윤곽이 부서질 지 새로운 구성이 시작될 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어쩌면 두 가지는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영화들은 새로운 문턱을 넘어섰고 대부분의 영화들은 절망적으로 부서져버렸다. 그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가. 나는 영화에서 3D 효과에 대한 질문이 올바른지에 대해서 의심한다. 과도할 정도로 많은 질문들이 3D 효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던져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3D 효과가 무엇을 하는 지 아는 것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몽녀>는 거기서 멈추었다. 좀 더 공평하게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몽녀>에서 더 나아간 것은 촬영감독이었던 장석준 이 직접 연출하고 김상희 가 촬영한 < 지지하루의 태양 >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는 현재 프린트가 남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몽녀>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다. 그런 다음 다시 3D 영화가 진행 중인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할 필요를 느낀다. 아마도 알폰소 쿠아론의 < 그래비티 > 이후의 3D 영화들은 이제까지의 많은 논의들에 대해서 다시 수정을 요구할 것이다. 게다가 <아바타 2>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나는 현재진행중인 질문을 그냥 여기서 잠시 멈춘 다음 그대로 남겨 놓을 것이다. 그 대신 예상치 않은 소식을 들었다. 고다르가 첫 번째 3D 영화 <아듀, 언어에게 작별인사>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직 보지 못한 이 영화에 대해서 나는 예고편 으로 대신할 생각이다. 이 이야기는 계속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도 계속 질문할 것이다. (계속) 1968년 85분 컬러 3D 2.35 감독 임권택 제작 제일영화사 각본 신봉승 촬영 장석준 , 유영길 조명 김진도 편집 김희수 음악 전정근 사운드(입체 특수음향) 이재웅 남정임 인숙 박노식 (가짜)박민호 김지미 리나 이순재 성우
몇 년 전, 아동 일시 보호소에 여러 날 머문 적이 있었다. 아동 일시 보호소는 부모로부터 버려지거나 맡겨진 아이들이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간 지내다 부모가 찾아오지 않을 경우 고아원이나 입양기관으로 인계되는 곳이다. 그 곳에서의 첫날, 한 젊은 남자와 그의 손을 잡고 온 6살짜리 여자 아이를 보았다. 담당직원과 이야기를 나눈 남자는, 아이에게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곧 데리러 오겠다고 말한 뒤 자리를 떴다. 나중에 직원에게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그가 아이의 아빠였고 다시 아이를 찾으러 오겠다는 기약 같은 건 남기지 않았다고 했다. 무슨 사정인지 알 순 없었으나, 어쨌건 아이는 아빠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아이는 하루 종일 아빠를 기다렸다. 날이 저물고, 저녁식사 시간이 끝나는 순간까지 아빠가 나타나지 않자, 그제야 아이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들이 아이를 달래보았지만 쉽게 그쳐질 울음이 아니었다. 그 날 밤. 복도를 걷다 우연히 보게 된 그 아이의 모습이 잊혀 지지 않는다. 자정이 넘은 시각의 커다란 방 안. 잠든 여러 아이들 사이에 홀로 일어나 앉은 아이는 방 안 어둠 속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더 이상 울고 있지도 않았고, 그 어느 곳에도 시선을 두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멍한 눈빛을 한 채 미동 없이 앉아있기만 했다. 그 때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분명, ‘다시 데리러 오겠다’는 아빠의 말이 아이에겐 더 잔인하고 가혹한 희망의 끈이 될 것이었다. 영화 < 나무 없는 산 >를 보며 유독 마음이 아팠던 건, 그 때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진’과 ‘빈’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 자매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엄마에 의해 고모 집에 맡겨진다. 아빠를 찾아 다시 오겠다는 엄마는, 어린 자매에게 돼지 저금통 하나를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고모 말 잘 듣고 있으면, 고모가 동전 하나씩 줄 거야. 여기다가 동전을 넣고, 동전이 가득차면 엄마 그 때 올게, 알았지?” 그 약속을 신앙처럼 간직한 아이들은, 동전을 모으며 엄마와 다시 만나게 될 날만을 기다린다. 기다림의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아이들의 그리움은 커져가지만, 결국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다. 버림받았음을 즉각적으로 알게 되는 상황에 놓이는 것과, 자신들이 버려졌다는 것을 오랜 시간 천천히 깨닫게 되는 것. 어느 쪽이 아이들에게 덜 잔인한 일이었을까. 자꾸만 가늘어져 결국엔 끊어질 것 같은 엄마라는 끈을 어떻게든 붙잡으려는 아이들의 몸짓은 그래서 더욱 아프다. 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점은, 아이들의 연기에 있었다. 그 존재만으로 화면을 꽉 채우는 아이들의 얼굴은 관객으로 하여금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 않는 대신, 먹먹한 감정들이 조금씩 마음 안에 쌓이도록 만든다. 그 표정들과 그것을 포착해내는 카메라는 어느 순간 경이롭게 다가오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 영화의 또 다른 빛나는 점은, 보통의 영화들이라면 지나칠 법한 여백의 순간들을 포착해내는 세밀한 시선에 있다. 유리문에 기대 눈물 흘리던 진의 뒤통수에 서려있던 하얀 수증기. 무얼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동그란 눈동자와 오물거리는 작은 입술들은 이 영화의 보석과도 같은 장면들이다. 자매를 버리고 떠났던 엄마는 결국 돌아오지 않지만, 영화는 결코 비극적 신파로 끝을 맺지 않는다. 아이들은 도시에서 지방 소도시로, 그리고 결국엔 조부모가 사는 시골로 떠밀리듯 보내지지만, 그 공간의 이동과 더불어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시골에서의 생활이 나오는 후반부는 마치 자연의 생명력을 이어 받은 아이들이 점차 회복되어 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아이들은 조금씩 자연을 닮아간다. 스스로의 힘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그 바탕 위에서 조금씩 성장해가는 자연의 모습처럼, 아이들도 그렇게 자연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 나무 없는 산 >을 보노라면, 일시 아동 보호소에서 봤던 그 아이가 떠오른다. 한 밤 중 홀로 깨어나 멍한 눈빛으로 어둠을 응시하던 아이. 지금은 중학생이 되었을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가을 들녘을 걸으며 노래를 부르던 영화 속 진과 빈의 씩씩한 모습을 애써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