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리쇼
- 감독
- 홍석화
- 제작년도
- 2006
- 출연
- 이철용, 아이작 더스트, 리사 켈리, 에비도쿠 에리
우리나라에서 처음 극장이 만들어진 시기는 18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에 살던 일본인들이 위안과 집회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극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인부좌(仁富座)라 지었다. 1892년 인부좌에서 이루어진 자선연예회 공연이 당시 인천에서 발행된 일본어 신문 《조선신보》에 게재되었다. 자선연예회와 관련한 이 신문기사는 조선에 설립된 극장에 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랜 기록이다. 인부좌에서 열린 자선연예회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1892년 4월 5일 인천과 부산을 오가던 일본상선 이즈모마루(出雲丸)가 전라남도 소안도 인근에서 침몰해 5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부산에서 공연을 마치고 인천으로 들어와 인부좌에서 공연을 준비하던 자그라 소이치(ジヤグラー操一)는 이즈모마루 침몰 사건이 일어나자 사상자 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인천에서 조난자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한 자선연예회를 개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재난이 닥치면 피해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구제할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선연예회를 개최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었다. 자그라의 생각에 인천 거주 일본인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새로 지어진 인부좌에서 자선연예회가 열렸다. 참고로 이 ‘이즈모마루 침몰 의연 자선연예회’를 주최한 자그라 조이치는 본명이 아다치 하치사부로(安達八三郞)[필자 주: 아다치 하치사부로를 ‘安達八三郞’이외에 ‘安達初三郎’로 쓰기도 한다.]이며 “자그라”라는 예명에서 알 수 있듯이 저글링으로 유명한 마술사였다. 자선연예회는 1892년 5월 28일 오후 2시 반 시작되었다. 오후 4시 경에는 8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극장 안을 메워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3~400명의 관객들이 극장에 입장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인천에 살던 많은 일본인들이 자선연예회에 관객으로 참여했으며 그들 중 몇몇은 스스로 무대에 서기까지 했다. 프로그램 중에는 자그라 조이치의 마술뿐만 아니라 무용, 조루리(淨瑠璃), 수용(手踊) 및 연극 등 다채로운 볼거리들이 흥미를 돋았다. 이 자선연예회가 개최된 인부좌는 인천 일본영사관 뒤편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선회 당일 극장 안팎의 모습을 살펴보면, 극장 밖에는 나뭇잎으로 장식한 문을 만들고 그곳에 일본 국기를 비롯하여 자수로 ‘자선회’라 적힌 큰 현판을 걸었으며, 조선신보사로부터 기증받은 ‘자선연회’라고 쓰인 큰 깃발을 세웠다. 입구의 우측에는 자그라 조이치가 디자인하여 만든 목조 ‘자선회비(慈善會碑)’를 두었고, 좌측에는 인부좌의 극장주로부터 기부받은 목조비를 두었는데 여기에는 ‘이즈모마루 침몰 조난자 위혼비’이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또한 극장 안 한 쪽을 각국의 국기와 신호기들로 장식했으며, 밤이 되면 극장 밖에 산(山) 자 형태로 높게 홍등을 켰다. 이후 인부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건, 인부좌에 관한 기록이 등장하는 1890년대부터 조선에서 극장이 만들어져 운영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들 극장은 일본 거류민들 문화의 일종이었지만, 빠른 속도로 조선의 관객들에게 전해졌음이 분명하다. 이는 1895년 정치국(丁致國)이 인천에 만들었다는 조선인 연극장 협률사(協律舍)[필자 주: 1902년 황실에서 설립한 희대(협률사,協律社)와는 다른 곳이다.]에 관한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인천협률사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고일(高逸)이 쓴 『인천석금(仁川昔今)』(경기문화사, 1955)이다. 고일은 정치국이 인천 용동에 창고 같은 벽돌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극장 협률사라고 기록했다. 최성연(崔聖淵) 역시 『개항과 양관 역정』(경기문화사, 1959)에서 인천의 부호 정치국이 운영하던 협률사를 애관(愛館)의 전신으로 추정하면서 청일전쟁 중 지은 창고를 연극장으로 전용했다고 전했다. 이러한 기록은 인부좌가 들어선 인천에 조선인 연극장도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쉽게도 신문이나 잡지처럼 시기를 명확히 밝혀주는 자료들이 남아 있지 않아 인천 협률사의 존재 여부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위의 기록들은 19세기말 개항장에 조선인 극장이 들어섰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간접 증거로서 의미가 있다. 청일전쟁 이후 인천에는 인부좌가 사라지고 인천좌라는 다른 이름의 극장이 들어섰다. 인천좌가 들어선 시기는 1897년 이전으로 추정되는데, 『인천부사(仁川府史)』의 기록을 보면 일본인 거류민을 위해 화도(花道)[필자 주: 일본식 극장에 존재하던 무대와 연결된 장소로 주로 배우의 등·퇴장에 이용된다. 주요 배우의 연기가 펼쳐지기도 한다. ]를 갖춘 100석 규모의 극장이 일본영사관 서측인 중정(仲町) 1정목에 자리하고 있었고 이것이 1897년 산수정(山手町) 2정목으로 이전, 후에 인천좌(仁川座)라 불렸다고 한다. 물론 객석의 숫자 등 기재상 세부적인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은 인부좌가 자리를 옮긴 후 이름을 인천좌로 바꿨으리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인천부사』에 실린 기록을 더 살피면, 인천좌에서는 만자이(漫才), 고단(講談), 가쿄쿠(歌曲) 등 일본 전통 연희물을 상연했으며 인천가부키좌 건립 후에 충남 대전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인부좌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에서 극장 설립은 개항장의 일본인 거류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다만 지방의 극장사(劇場史) 연구가 현재 걸음마 단계이기 때문에 부산, 인천 등 개항장에 언제 어떻게 극장이 만들어졌는지 그 전모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몇몇 연구들이 부산, 인천 등 개항장의 일본인 극장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사진2. 인천가부키좌 앞에서 단원들의 모습 (『경성부지권(京城府之卷)』)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 인천 빈정(濱町)에 부지 300평, 건평 160평 규모의 2층 건물이 들어서서 이름을 가부키좌(歌舞技座)라 불렀다. 이름처럼 전형적인 가부키 전용극장이었으며 입장정원도 999명이나 되는 대형극장이었다. 이 건물은 재인천일본인상업회의소회두(在仁川日本人商業會議所會頭) 가라이 에이타로(加來榮太郞)가 세웠는데 건축비 1만 4천원, 도구 및 의상비 6천원으로 총 2만원의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1915년 당시 인천가부키좌의 주요 프로그램은 신파극이 총 흥행일수의 3분의 2를 차지했고, 그 밖에 구극 상연, 활동사진 상영, 각종 연예회 등이 열렸다. 사진3. 부산좌의 외관(『부산요람(釜山要覽)』, 부산상업회의소, 1912) 1903년 당시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에는 행좌(幸座)와 송정좌(松井座)라는 극장이 있었다. 행좌는 일본인 거류 1세대인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가 1903년 이전에 남빈정(南濱町) 끝자락(지금의 중구 광복동)에 세워 운영한 극장이었다. 하자마 후사타로는 1880년 이오이(五百井)상점 부산지점에 부임한 후 무역과 부동산업으로 큰 부를 쌓고, 거류민단 의원을 역임하는 등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상공인으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행좌의 주요 프로그램은 일본연극, 일본씨름, 마술, 비파, 조루리 등과 활동사진이었다. 1915년 행좌는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재건축되면서 행관(幸館)으로 이름을 바꿨다. 행좌 부근에 있던 송정좌는, 개항 직후 부산으로 건너온 마쓰이 고지로(松井幸次郞)가 세운 극장이다. 1903년 이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1911년경에 폐관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에는 부귀좌(富貴座, 1905~?), 부산좌(釜山座, 1907~1923), 동양좌(東洋座, 1912?~?), 변천좌(辨天座, 1912~1916), 질자좌(蛭子座, 1912~1918), 욱관(旭館, 1912~1916) 등이 세워졌다. 1897년 개항된 목포에는, 1904년 지금의 복만동에 목포좌(木浦座)가 생겨났으나 운영되지는 못했고 1908년 문을 닫았다. 목포좌가 없어진 1908년 상락동에 상반좌(常盤座)가 문을 열었다. 상반좌는 1914년 138평 규모의 2층 건물로 증축되었으며, 1929년 9월 30일 폐관되었다. 1899년 개항된 마산에서는, 마산 최초의 극장 희락좌(喜樂座)가 1906년 늦은 여름 경정(京町)의 고이즈미 시게조(小泉繁藏) 오복점 뒤편에 만들어졌다. 희락좌는 건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07년 2월 1일 실화로 소실되었다. 이 직후인 1907년 늦은 봄, 신마산의 유정(柳町)에 환서좌(丸西座)가 세워졌다. 환서좌는 가부키 극장으로 회전 무대를 갖췄고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으며, 경영자는 나카무라 초(中村肇)였다. 가부키, 나니와부시를 비롯한 일본 전통 연희물이 상연됐으며 활동사진도 상영했다. 그 외 원산, 군산 등의 개항장에도 1910년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극장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어떤 극장이 있었는지는 현재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의 극장이 일본의 극장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극장의 구조, 흥행방식, 용어 등이 일본식이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 본문은 필자의 『조선영화의 탄생』((주)박이정, 2018) 23~33쪽의 내용을 발췌,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 사진1(글 상단). 《조선신보》에 실린 인부좌 관련 기사(《朝鮮新報》 1892년 6월 5일자.) [자료] 「자선연예회 - 인천 개항 이래의 구경거리」(《조선신보》 1892년 6월 5일자), 발췌 번역 이즈모마루 침몰 조난자 유족을 위로하는 의연금을 구하기 위해 아다치 하치사부로(安達八三郞=자그라 소이치)가 발기, 오타니 마사나리(大谷正誠) 씨가 위원장, 고리 긴자부로(郡金三郞), 미쿠라 마사히로(三倉正寬), 모토하시 세이지로(本橋淸二郞), 이와다 가에몬(岩田嘉右衛門), 아사오카 도시키치(淺岡利吉), 스이쓰 세이조(水津淸三) 제씨가 위원, 노세 다쓰고로(能勢辰五郞), 니시와키 초타로(西脇長太郞), 사다케 진소(佐竹甚三), 헤이세이 데쓰사부로(平生欽三郞), 무코야마 시게히라(向山茂平), 우에다 호사쿠(上田豊作), 구마모토 에이치로(隈本榮一郞) 제씨가 찬성자가 되고, 기타 여러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다하여 5월 28일 오후 2시 반부터 야마노테(山手)[필자 주: 인천의 일본인 조계지에서 만국공원이 있는 언덕 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인천 송학동으로 불리는 산수정(山手町)과 꼭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다.] 지역의 신극장 인부좌에서 ‘이즈모마루 침몰 의연 자선연예회’가 열렸다. 자선회가 열린 것은 인천 개항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상류 사회의 사람들이 많이 주선했다고 하는데, 특히 이 자선회는 인천 거류민들과 아주 관계가 깊은 이즈모마루 침몰 조난자 유족을 위로한다는 면에서 개회 수일 전부터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당일 방문한 사람들은 무려 800여 명에 달하며, 회장이 꽉 차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4시경 이후로는 회장을 찾아와 허무하게 출입구에서 거절당해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는데, 3~4백 명은 될 것이다. 회장 문밖에는 상록수로 커다란 녹문을 만들어 국기를 매달고, 또 털실 세공으로 ‘자선회’라고 적은 큰 액자를 걸었으며, 본사가 기증한 ‘자선연예회’라고 크게 쓴 대형 기도 매달아 세웠다. 입구의 우측에는 자그라 소이치가 디자인한 자선회비(慈善會碑, 목조)를, 좌측에는 극장주가 기부한 길이가 1조(一丈)[필자 주: 약 3m이다.]에 가까운 목조비에 ‘이즈모마루 침몰 조난자 위혼비’라고 크게 적어 세웠다. 장내 한 쪽에는 각국의 국기 혹은 신호기로 찬란하게 장식하여 넋을 빼앗았다. 밤이 되면 회장 밖에 山 자 모양으로 높게 홍등을 켜서 특별한 미관을 더했다. 만사에 주의하여 꼼꼼하게 이리저리 장식하고 배치를 완전하게 한 데는 주선한 유지들 모두의 연일의 노고가 담겨있다. 이 자선회의 특색이라면 2층과 아래층 두 곳에 귀부인 따님들이 음식물 매점을 열어서 자선바자회를 모방했다는 것이다. 연예는 오후 3시경부터 시작했는데, 십 수 가지의 연예가 있었다. 이중에서 가장 관람객들의 갈채를 받았던 것을 들자면......
‘어느 순간엔가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피칭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 문장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피칭은 영화를 제작하는 행위에서 무수히 이뤄지는 과정이다. 프로듀서나 감독이 투자자를 만나고, 배우를 만나고, 스텝을 만나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커뮤니케이션으로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피칭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 글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피칭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이 아니라, 피칭행위가 영화제라는 공적인 ‘장’에서 일종의 ‘제도’로서 자리를 잡게 되는 과정에 느꼈던 일종의 불편한 느낌을 이야기하고 싶어 첫 문장을 썼다. ‘피칭’이라는 것은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영화를 드러내고, 투자 혹은 제작지원을 받는 일이다. 모 영화제에서 피칭을 처음 시작 할 때 주변의 다큐 만드는 감독들이 웅성웅성 거렸다. 그 이유는 피칭이라는 것 자체가 불특정 다수관객과 심사위원들 앞에서 자신과 자신의 영화를 드러내야 하는 것 - 낯선 경험을 감내해야 하는 것, 자신을 전시해야 한다는 일종의 당혹감의 발로였으리라. 하지만, 이런 감정은 제작지원이라도 받아서라도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제작자나 감독들이 찬밥 더운밥을 가려 먹을 처지는 아닌지라, 나 또한 감독을 독려해서 ‘이 정도는 우리가 해야 하지 않냐’고 설득했다. 어느새 당연히 치러야 할 과정으로 받아들여지는 추세다. 그러다 보니, 영화제 제작지원 말고도 기관에서 진행하는 제작지원에도 피칭을 해야 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불편함 혹은 불편한 어떤 감정이 남아 있다. 올해 초『콰이어트』(수전 케인. 알에이치코리아)라는 책을 접하게 되면서, 외향성을 강조하는 사회 - 결국 자기 계발로 귀착되는 거짓 멘토/힐링사회 - 에 대한 불편한 진실들에 대해 내 경험으로 비춰보기 시작했다. 영화제 개막식이나 무슨 밤에 초대되어 가야 하는 날은 영화 일을 가진 나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누군가와 만나서 ‘교류’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머리를 아프게 하고, 나를 ‘전시’해야 한다는 사실과 누군가와 비교되는 것 - 외향적인 성격을 가지 이들에게 느끼는 열등의식에 시달리는 중이다. 낯선 이들이 가득한 경쟁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성격의 특정 부분들을 이용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따라서 피칭이라는 것은 결국 외향성이라는 성격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 일종의 우리 시대의 강박증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어느 순간 자리 잡게 된 피칭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못할 것이다. (여기서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겠다) 하지만, 누군가는 자신을 전시하는 일과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들은 이런 감정적 소비가 엄청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다큐를 만드는 사람들, 특히 홀로 작업을 하는 사람들 같은 경우는 피칭이 피곤함을 넘어서 불편하다. 누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피칭의 장점이 있다고. 피칭의 장점 중에 거론되는 자신의 기획을 객관화시켜볼 수 있고, 멘토들의 도움으로 좀 더 나은 기획으로 영화가 성장할 수 있다고 한다. 일면 타당하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가능하다. 굳이 자신의 기획을 객관화라는 이름으로 난도질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멘토들에게 받는 뜬금없는 지적으로 열등감에 시달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점이다. 그런 시간에 좀 더 자신의 기획에 집중하고 사색하고,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을까. 영화제 피칭은 영화제 컨벤션한 과정에서 나름 스펙타클하게 보여주기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는 영화제의 욕망이다. 좋은 영화를 만나고 싶다면 감독을 핀 조명 아래에 세워놓고 누가 누가 잘하나 식의 단순한 전시 혹은 쇼잉은 지양되어야 한다. 천편일률적인 영화제 피칭행사보다는 좀 더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방식으로 형식의 변화를 우선해야 되고(객석과 발표자 간의 거리를 없애는 라운드 테이블 방식 혹은 각 프로젝트별 소규모 릴레이 토크 등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질적으로는 특정방식을 강요하지 않고 참여자 주체적으로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유동적이고 다층적으로 형식이 조율되기를 기대해본다. * 사진설명: DocMontevideo의 2013년 다큐멘터리 피칭 현장 사진
독은기 (獨銀麒, 1910 ~ ? )는 출연작의 수에 비하여 전기적인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배우다. 일제의 영화인 등록 당시 본명은 ‘김영식(金永植)’으로 1941년 현재 31세라고 밝힌 일이 있으나, 중학 시절 한 방에서 뒹굴던 친구 김성칠(1913~1951)은 그의 본명이 ‘김춘득(金春得)’이라고 적고 있다.(?역사 앞에서?, 창작과비평사, 1993) 대구 출신인 독은기는 1930년대 전반기 대구를 거점으로 했던 이규환의 영화 제작을 돕다가 < 그 후의 이도령 >(1936)을 통해 연기자로 데뷔했다. 이규환 은 < 바다야 말하라 >(1935)를 기획할 때 사재를 털어 제작비를 댔던 ‘김영식 소년’에게 토지 문서를 다시 찾아주고자 <그 후의 이도령>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김영식 소년’이 독은기와 동일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김영식 소년’이 독은기 든 아니든, 독은기의 영화 인생에서 이규환 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독은기의 출세작 역시 이규환이 연출한 < 나그네 >다. 이규환의 대표작이자 1930년대 후반 조선영화의 가작인 이 영화에서 그는 ‘복룡’(왕평 분) 가족을 비극으로 몰고 가는 ‘삼수’로 출연했다. 선 굵은 외모와 신인답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로 “성격적인 역에 꼭 맞는 타입”(남궁옥, ?조선영화의 최고봉 <나그네>를 보고?, ?매일신보?, 1937. 4. 25.)이라는 평을 들으며 토키 시대 주목할 만한 배우가 된 그는 성봉영화원의 두 번째 작품인 < 군용열차 >(1938)에도 출연한다. 독은기는 군용열차 기관사 ‘점용’(왕평 분)의 친구 ‘원진’을 맡았다. 기생인 애인의 몸값을 구하기 위해 스파이에게 군용열차의 정보를 누설하고, 그 죄책감 때문에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는 ‘원진’의 서사는 이 영화를 끌어가는 중요한 축이었다. 이후 성봉영화원을 흡수한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제작한 < 새 출발 >(1939)과 협동예술영화사가 제작한 < 창공(‘돌쇠’) >(1941)까지, 이규환과 독은기의 인연은 이어졌다. 그러나 1942년 민간영화사들을 통폐합한 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출범하면서 그들의 영화적 교유는 일단 중단된다. 법인 조영에 가입하지 않았던 이규환 은 만주영화협회에 조선영화부를 설립하려다 좌절하고 귀국 후 연극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비행장에서 징용 생활을 했다. 반면, 법인 조영(朝映)의 연기부에 입사했던 독은기 는 < 젊은 모습 >(1943), < 조선해협 >(1943), < 병정님 >(1944), < 사랑과 맹세 >(1945) 등 여러 편의 선전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그가 맡았던 <젊은 모습>의 ‘금의환향한 지원병’, <사랑과 맹세>의 ‘전사한 지원병’은 늠름한 자태로 식민지 조선의 ‘아우’들에게 전쟁에 나가라고 부추기는 역할이었다. 또 평범한 농촌 출신 지원병 야스모토 에이치(康本瑛一)로 분한 <병정님>에서는 가장 계몽적인 발화자로서 ‘병영은 군인의 가정’이니, 걱정 말고 입대하라고 권유했다. 법인 조영 시대 독은기는 배우로서 가장 활력적인 시기를 보냈지만, 그가 맡았던 배역들은 식민지 청년들이 왜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되어야 하는지 추호의 의심도 허용하지 않는 ‘건강하고, 명랑한’, 평면적인 인물들이었다. 법인 조영에서의 활동은 해방 후 독은기 의 삶에 족쇄가 되었다. < 자유만세 >(1946)에서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 경찰의 사찰주임이 된 ‘남부’로 출연했던 것처럼, 일제의 선전영화 속 긍정적인 인물은 한 순간에 ‘매국노’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조선의 ‘아우’들이 우러르는 ‘형’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해방 후의 격동 속에서 그는 좌익 계열 영화인들의 조선영화동맹에 참여했다가 전향했지만, 남한에서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한국전쟁 중 월북하기까지 그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가난과 병마에 시달린 것은 물론, 식민지 말기의 ‘친일’과 해방 직후 ‘좌익’ 경력으로 남한에서의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한편, 그를 영화로 이끌었던 이규환 은 해방 후 조선영화동맹에 대항해 조선영화감독구락부를 결성했고, < 민족의 새벽 >(1947), < 갈매기 >(1948) 등을 연출하면서 다음 세대 감독들을 길러냈다. 독은기는 그와 함께 할 수 없었다. 재기를 꿈꾸었던 <하얀 쪽배>가 전쟁으로 중단되고, 국군의 서울 수복을 앞두고 있었던 1950년 9월 26일 늦은 오후, 독은기 는 커다란 보따리를 짊어지고 역사학자 김성칠의 집을 마지막으로 찾았다. ‘친일’에서 ‘좌익’으로, ‘전향자’에서 ‘월북자’로, 불운한 시대 전향을 거듭해야 했던 배우 독은기의 뒷모습을 옛친구는 몇 줄의 일기로 남겼다. “나는 오늘 저녁 한 사람의 양심적인 예술가를 또 북으로 떠나보냄에 있어 그가 이 몇 해 동안 병고와 생활난과 고문의 위협에 허덕이었음을 생각하고 이 땅의 문화 정책이 너무 빈약함을 통탄하여 마지않는다.” / 글: 이화진 (한국영화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