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소시즘: 죽음의 소리
- 감독
- 마커스 니스펠
- 제작년도
- 2015
- 출연
- 스테판 랭, 케빈 채프만, Kelly Blatz, Brittany Curran, 브렛 디어, Gage Golightly, Nick Nicotera, Nick Nordella, 마이클 옴스비
20대의 청년 다르덴 형제는 매우 급진적이고 야심적이었다. 그들이 몰두하고 있는 담론 역시 거대했다. 역사와 혁명, 계급과 투쟁, 영화적 실천과 리얼리즘 등. 그들은 이제 막 자신들의 손에 쥐어진 카메라를 통해 어떻게든 역사적 현실과 계급투쟁에 복무하고 싶어 했고 치열하게 고민했다. 1979년 지역 공동체 채널을 통해 처음으로 방영되고 세상에 소개됐던 다르덴 형제의 < 레옹 M의 보트가 처음으로 뫼즈 강의 내려갈 때 >는 급진적 실천주의자로 살고자 했던 두 청년 감독의 치기와 천재성, 역사인식을 적나라하게 선언하는 작품이었다. 27살의 장 피에르 다르덴과 24살의 뤽 다르덴은 처음부터 영화작업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그 출발은 그들의 유년기를 휩쓸고 지나갔던 1960년 벨기에 총파업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이었다. 1978년에 발표한 첫 번째 영화이자 다큐멘터리인 <로시뇰의 노래>에 이어 두 번째로 만들어진 이 작품, 그리고 1년 후에 다시금 발표하게 되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벽은 무너져야 한다>(1980)는 모두 1960년 벨기에 총파업을 현재화하고자 하는 그들의 좌파적 실천의지의 결과였다. 1960년 12월. 벨기에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감행한다. 유럽을 흔들었던 반자본주의 투쟁이었던 68혁명의 전조라고도 해석되는 이 투쟁은 소위 복지국가로 대변되는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첫 번째 전면적 저항이자 혁명이었다. 오랫동안 콩고를 식민지화하고 있었던 벨기에는 콩고 해방 이후 발생한 재정위기의 어려움을 노동자들에 대한 공세(공공과 의료 복지 부분 등의 재정삭감)로 풀어나가려 하였고, 이에 노동자들은 즉각적으로 정부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이 싸움이 더 흥미로운 점은 총파업의 주체가 특정 정치조직이나 노조 지도부가 아니라, 말 그래도 자발적인 노동자들의 움직임으로 불꽃처럼 퍼져나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노조 지도부는 정부에 타협했고, 노동자들은 노조를 불신임하며 자발적으로 파업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강경 진압으로 사망자들이 발생했고, 결국 지도부의 배신과 정부의 공세로 인해 이 장렬한 싸움은 패배했다. 다르덴 형제는 이 싸움의 도화선이 되었던 벨기에 리에주(철강산업지역) 출신이었다. 1950년대 생으로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했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60년 총파업은 강렬했다. 1978년, 이들이 처음으로 카메라로 세상을 기록할 수 있게 된 그 순간부터 오랫동안 그들은 이 좌절한 혁명을 다시금 현재화하려는 시도로 분투했다. 그들의 두 번째 다큐멘터리인 < 레옹 M의 보트가 처음으로 뫼즈 강의 내려갈 때 >는 거의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60년 총파업을 ‘역사적으로 상기’하는 작품이다. 영화는 리에주 지역의 노동자 레옹 마시가 오랜 시간을 들여 자신의 배를 직접 제작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 60년 총파업에 참여하기도 했던 레옹 마시의 배가 처음으로 뫼즈강에 진수되는 날, 마시의 첫 항해에 다르덴의 카메라가 함께하게 된다. 이 작품은 두 가지 면에서 흥미롭다. 첫째는 이후 다르덴 형제의 작품세계를 결정하게 된 좌파적 인식론의 가장 직접적이고 선동적인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레옹 마시의 배 공정과정과 첫 항해에 부여한 의미는 ‘혁명적 미래로 항해하기 위한 과거로의 회기’였다. 그들은 60년 혁명이 오늘날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혁명의 이미지들(당시의 기록화면, 방송화면)이 역사적 노스탤지어로 소비되는 것에 반대하며, 과거를 되새기는 것이 역사적 강박관념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엑소시즘으로 전락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들의 항해는 과거로부터, 현재 사그라진 계급 혁명의 불씨를 다시금 되살리겠다는 의지이며 역사적 순환의 은유이다. 그래서 영화의 초반부 레옹 마시가 배를 만드는 노동행위(망치질, 용접 등 지난한 노동과정)들은 매우 상징적으로 60년 혁명 장면들과 몽타주 되면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계급과 노동임을 피력한다. 다르덴 형제의 초창기 다큐에서 흥미로운 두 번째 지점은 바로 여기, 즉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를 몽타주 편집으로 연결짓고자 하는 그들의 미학적 방법론이다. < 로제타 >나 < 아들 >과 같은 작품으로만 다르덴을 이해하고 있다면 다르덴의 초창기 다큐멘터리들은 당혹스러우리만치 급진적이고 형식적이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브레히트와 고다르의 방법론에 고무되어 있었고(왜 아니겠는가!), 특히 < 레옹 M의 보트가 처음으로 뫼즈 강의 내려갈 때 >에서는 지가 베르토프의 <키노 프라우다> 시리즈에서 배워온 쇼트와 몽타주가 실험되고 있었다. 현재적 이미지와 과거의 이미지가 병렬적으로 교차하고 사운드는 그들의 당위성을 선언하듯 인공적으로 조형되었다. 60년 총파업에 대한 이들의 의지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80년에 선보인 <전쟁을 끝내기 위해 벽은 무너져야 한다> 역시 60년 당시, 노동자들이 직접 발행했던 좌파 신문의 핵심 인물(그는 여전히 리에주 지역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을 찾아가 그의 현재적 공간에서 과거를 상기하고, 재구성하는 실험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이러한 작품들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나 다르덴이 ‘영화’라는 매체를 인식하는 방법과 사유였다. 그들은 초창기 작품에서부터 카메라가 역사적 현장 속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어야만 하는지, 역사적 책무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질문한다. 이 질문들은 때론 작품 속에서 당혹스러우리만치 노골적으로 관객에게 던져지기도 하고, 그들 스스로에 의해 반성 되고 회의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후 극 영화로 전환된 다르덴의 작품들은 다큐멘터리적 실험과 결별이 아닌 새로운 모색처럼 보인다. 고다르나 브레히트적인 노골적 형식 실험으로부터 벗어나 그들의 카메라는 인물과 세계, 그리고 카메라가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 하나의 방법론을 성취한다. 영화 속 인물은 사적인 동시에 역사적이고 계급적 인물이라는 점은 다르덴의 주요한 키워드다.(이 점에서 다르덴은 네오-리얼리즘의 현재적 계승자로도 해석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showing)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보게 하도록(seeing)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인물과 상황들은 불투명한 리얼리티의 그림자 속에 남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담고자 하는 진실과 삶 그 자체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남긴 그들의 이 말은 초창기 다큐멘터리와 현재의 극영화 모두를 관통하는 그들의 주요한 방법론이다. ps. 이 영화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순간은 영화가 시작될 때 등장한다. 독립 다큐멘터리 중 수작을 선정해 방영하는 벨기에의 방송 프로그램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이 작품은 방송 프로그램의 특성상 영화를 보여주기 전에 감독들이 직접 나와 자신들의 작품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르덴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의 이미 거장이 된 이후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진으로 보아온 다르덴 형제는 언제나 노인이었다. 그러나 1979년, 고작 27, 24살의 다르덴이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아! 저들도 한?는 청년이었지라는 탄식을 뱉어내게 된다. 히피처럼 길게 기른 머리와 심지어 미소년의 용모까지 선보이는 뤽 다르덴. 이제 막 영화를 시작하여 처음 세상에 내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수줍지만 야심적이고 천재적인 젊은 형제 감독들의 모습 그 자체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었다. 18년이나 한국사회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자가 여자를 끼고 놀던 저녁 술판, 그것도 자신의 최측근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엄청난 정치적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신독재는 더욱 잔인한 군사독재로 이어졌고, 암울한 시대는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신화로 기억하길 바랐다. 그로부터 2005년, 임상수 가 처음으로 이 사건을 영화화했다. 26년 만의 일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개봉도 하기 전부터 논쟁에 휘말렸다. 보수언론은 이 영화를 보기도 전부터 역사적 불경과 왜곡을 부르짖었고, 박지만은 이 영화에 명예훼손 등의 문제를 걸어 법정싸움으로 몰아갔다. 결과는 영화의 시작과 끝 부분에 삽입된 다큐멘터리 영상 4분여를 삭제하라는 법원 명령으로 이어졌다. 결국 영화는 훼손된 채 대중과 만나게 되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영화계에는 표현의 자유 논쟁이 벌어졌으며, 또한 영화와 실재가 맺는 관계성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작 이상한 것은 이 영화가 개봉된 다음에 벌어졌다. 이 영화는 좌파와 우파, 어느 편에서도 환영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보수언론을 내세운 우파들은 이 영화에 대해 살의에 가까운 적개심을 내보였고, 진보주의적인 관점을 가진 평자들 상당수도 이 영화의 역사관에 대해 불편해했다. 이 불편함의 한 가운데는 승자와 패자를 막론하는 역사적 엄숙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이 영화는 왜 그때 도착했으며,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고증하는 영화가 아니라, “그날 그들이 죽었다.”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것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제가 아니라, 그것을 철저하게 몰아내는 엑소시즘으로서의 영화이다. 박정희는 죽은 자이고 유령이다. < 그때 그 사람들 >은 그 유령의 절대적 죽음을 재촉한다. 이를 보다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슬라보예 지젝의 ‘두 번의 죽음’이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라캉에게서 가져온 이 개념은 존재의 죽음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물리적 죽음으로 이것은 유한한 인간 육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상징적 죽음으로 상징계(Symbolic) 내에서 의미가 소멸하거나 부정되는 순간인 것이다. 물리적 소멸과 상징적 종말이 이루어졌을 때야 비로소 절대적 죽음이라는 개념에 다다른다. 슬라보예 지젝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여기, 첫 번째 죽음이 발생한 이후, 두 번째 죽음까지의 차이 공간이다. 두 개의 죽음 사이에서 죽은 자를 둘러싼 산 자들의 환상이 결합되기 때문이다. 이 환상 속에서 죽은 자는 성자가 되기도 하고 괴물이 되기도 한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박정희를 떠올려야 한다. 그는 1979년 10월 26일 살해당했다. 그날 그때 물리적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사회의 상징계에서 그는 여전히 성스러운 존재이다. 박정희 신화는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한국사회의 경제적 위기는 가부장제와 남성성에 대한 위기로부터 부활하였다. 우파와 대중의 환상이 그를 신화로 불러낸 것이다. 현실에 대한 우울은 과거의 영광스러운 시대(오인된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했고, 박근혜가 정치적 실세로 등장하였다. 임상수 의 < 그때 그 사람들 >은 바로 그러한 시기에 도착한 영화였다. 경제악화와 함께 노골화된 박정희 신드롬의 절정 속에서, 임상수는 영화를 통해 박정희를 다시 한번 살해한다. 그러나 영화적 소환과 살인은 실제 살인처럼 현실에서 격렬하게 부딪쳤고 법정으로 비화되었다. 조선일보의 리뷰는 그러한 반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0·26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미친놈들의 미친 짓’이라 말하는 건 지식인적 니힐리즘이 아니라, 무책임과 회피다. 이 맹목적 시니컬리즘은 나름의 존재적 이유로 충만했던 박정희와 김재규라는 두 인물의 진심을 어느 쪽도 설명하지 못한 채 그저 역사를 모독할 뿐이다. 이런 금기의 소재를 미진한 블랙코미디로 낭비해버린 건, 영화역사에 대한 실례다. 이 영화의 최대 악덕은 민감한 내용을 강하게 다뤘다는 게 아니라, 역사를 버릇없고 무책임하게 다뤘다는 점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영화에 대한 불편함은 비단 보수언론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이 영화는 당시 거의 아무에게도 지지받지 못하였다. 한국의 많은 평자들이 지적하기에 이 영화는 하루 동안의 정치적 스캔들만 존재할 뿐 원인과 결과가 사라진 영화이다. 사건은 묘사되지만 역사적 해석과 입장은 배제된 것처럼 보인다. 감정이입과 동일시를 배제하는 카메라 워크는 관객들의 심리적 정박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영화는 스스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관객 대다수가 스스로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통념들을 부정한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 그때 그 사람들 >은 정말이지 임상수 의 영화가 아니라 박정희의 영화가 되었고, 임상수는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역사가가 되어 버렸다. 허문영은 < 그때 그 사람들 > 개봉 당시, 이 영화를 풍속화에 비유했다. 이것은 적절해 보인다. 풍속화라는 개념은 비천하고 남루한 서민들의 일상을 그 자체로 드러내는 묘사였다. 10.26 사건은 위에 인용한 보수지 기자가 썼듯이 금기의 사건이었고 성스러운 영역이었다. 누구나 알고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알고 있는 것은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보수 언론이 운운하는 그들의 진심, 존재론적 정당성은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때 그 사람들>이 풍속화로 비쳤다면, 그것은 그 살 떨리는 순간에,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평범하고 비천한 욕망과 공포가, 마치 성상을 덮고 있던 검은 천(제의적 기능)을 벗겨 내듯 적나라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에 대한 불경’, 심지어 ‘영화역사에 대한 실례’라고 주장하는 자 역시, 그날의 역사가 어떠했으며, 실은 역사란 무엇인지, 더더구나 영화역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 그때 그 사람들 >에서 임상수 의 태도는 애당초 분명해 보인다. 그는 그때 그 사람들의 진심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임상수에게 중요한 것은 그날 그들이 죽었다는 사실과 그날 죽은 자들이, 사실은 그런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지배자들이란 TV 사극에서 묘사되듯 근엄하고 엄숙하며, 숭고한 것이 아니라, 군사쿠데타를 통한 집권자들과 그의 수하들은 사실 저열한 남근 주의자들이며 저잣거리의 불량배 패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임상수 의 < 그때 그 사람들 >에서 또한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가 상업영화의 가장 기본적 서사 전략인 심리적 동일시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임상수는 이러한 불한당들의 세계에 관객의 심리적 연루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윤리적인 선택이고, 정치적인 전략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 개의 쇼트는 영화의 초반과 살해 사건 이후에 나온다. 영화의 초반, 주 과장은 정보부 고문실을 산보 자처럼 거닐고 있다. 이때 카메라는 수평으로 트래킹하며, 전경화된 세트를 통해 70년대의 시대상황을 함축한다. 두 번째 쇼트는 살해사건이 벌어지고, 주과장이 현장을 돌며 바닥에 피를 흘리며 널브러진 시체들을 돌아보는 장면이다. 공중 부감쇼트로 찍혀진 이 장면은, 가장 미학적인 야심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대한 가장 명백한 ‘알레고리 형상’이다. 다시 말해 임상수가 바라보는 그 사람들의 현대사의 형상이란 바닥에 시뻘건 피를 쏟아내며 죽어간 시체들의 이미지이다. 이 그림을 그려내기 위해 임상수는 감정이입의 주인공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목격자를 만들어낸다. 주 과장이 그날의 첫 번째 목격자라면, 관객은 그날 그가 죽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게 되는 진정한 목격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 법원의 삭제명령으로 잘려나간 후반부 다큐멘터리에는 박근혜가 소복을 입고 태극기에 덮인 관 앞에 서 있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대규모 장례행렬과, 신성에 가까웠던 박정희를 ‘인간’ 박정희라고 부르며 조사를 행하는 김수환 추기경과, 오열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오래전 필자와 했던 인터뷰에서 임상수 는 이 얼굴들을 시대의 거울 이미지로 해석했다. 저 당시 가장 핍박받던 사람들이 가장 슬픈 얼굴로 오열하는 모습과 지금까지 지속되는 그에 대한 환상들.. < 그때 그 사람들 >은 그 죽음을 재촉하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