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드름
- 감독
- 박정현, 이주연
- 제작년도
- 2011
1989년, 나는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다. 동급생 누군가가 요즘 제일 잘 나가는 비디오테이프를 공수해왔다면서 방과 후에 또 다른 누군가의 집으로 모이라고 했다. 그 영화는 에밀 아돌리노의 1987년 작 <더티 댄싱>이었다.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그냥 보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하던 좁은 방 안에서 영화를 본 그 100분의 시간이 굉장히 많은 것을 바꿔놓았던 것 같다. 열네 살의 나는 <더티 댄싱> 속 열일곱 살 프랜시스(‘베이비’라고 더 자주 불리는)와 다를 바 없었다. 그때까지 내가 TV ‘주말의 명화’에서, 혹은 부모님이 가끔 극장에서 보여주었던 ‘감동 대작’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격렬한 에너지와 성적 흥분을 처음으로, 지직거리는 화질의 비디오테이프로부터 느꼈던 것 같다. 그 감정이 너무 낯설고 격렬해서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댄스 영화에서 그때에 비견할 충격을 느낀 건 이후 고등학교 때 피카디리 극장에서 봤던 바즈 루어만의 <댄싱 히어로>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1963년 여름, 베이비는 가족들과 함께 호화로운 산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낸다. 나이 많은 어른들 위주의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에 억지로 참여하다가, 우연히 밤중에 외딴 별채에서 펼쳐지는 댄스파티를 목격하고 그에 매료된다. 산장에서 일하는 청춘남녀가 모여든 이 파티장의 주인공은, 리조트의 춤 선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댄서 자니와 페니 듀오다. 베이비는 페니가 여름 방학 동안 산장에서 일하던 예일대 학생 로비와의 관계 때문에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고, 낙태 수술 비용 때문에 난감해한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베이비는 의사인 아빠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하며 돈을 빌려 페니에게 건네고, 그가 수술을 무사히 마칠 때까지 자니의 댄스 파트너 역을 대신 하기로 한다. 춤을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던 순진한 소녀 베이비가 자니와 함께 하루 종일 춤 연습을 하면서 사랑에 빠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성인이 되어서, <더티 댄싱>을 몇 번 더 봤다(가장 최근의 시청 경험은 영화가 왓챠에 올라왔을 때다). 어린 시절에는 순전히 ‘나쁜 소년’과의 로맨스를 꿈꾸는 하이틴 로맨스 영화처럼 받았들였지만, 좀더 성장하고 시대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쌓였을 때 다시 본 <더티 댄싱>은 또 달랐다. 일단 산장 주인은 아르바이트생을 두 종류로 나눠서 고용했다. 예일대 및 하버드대 학생들은 접객 웨이터로 일하고, 여름에 이곳을 찾는 부유한 가족들에게 ‘미래의 예비 사위’처럼 선보이면서 그 가족의 ‘딸들’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임무가 제시된다. 반대로 나머지 오락 담당 직원들(자니는 이쪽에 속했다)은 그 ‘딸들’에게 절대로 손가락 하나도 터치하면 안 된다고 금지당한다. 넘보지 못할 나무라는 것이다. 섹스에도, 심지어 휴가 기분을 내기 위한 가벼운 수작질에도 계급의 공고한 벽은 일상적으로 작동한다. 과연 이곳에 놀러온 사람들과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 사이의 교류가 가능할까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라인딩이라든가 더티 댄싱은 하층 계급이 지하실에서 추고, 위층의 부유층은 가족들과 폭스트롯을 추지요.”(<무비: 우리가 사랑한 영화들> 중 ‘더티 댄싱’ 편)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화학 작용이 일어난다. 얌전한 ‘아빠딸’ 베이비가 직원들 중 최고의 인기남인 자니에게 매혹되면서 그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자니의 육체의 압도적 매력 때문에, 베이비는 지금껏 이런 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욕망의 세계로 곧장 이끌려 들어가버린 것이다. 책으로도, 그리고 가족들이 속한 안온한 세계 인근에서도 접한 적 없던 색정적인 에너지. 물론 그 에너지가 가슴 아픈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더티 댄싱>이 1987년 미국에서 개봉했을 당시 ‘낙태’라는 주요 설정 때문에 광고주였던 여드름 연고 회사 측에서 난색을 표했던 것처럼, 원치 않는 임신을 수술로 중단하려 한다는 설정이 비교적 가까운 과거인 1980년대에조차 ‘대중’ 영화에서 등장하긴 쉽지 않았다(하물며 <더티 댄싱>의 배경은 1963년 1) 이다). 하지만 각본가 엘리노어 버그스틴은 그 설정을 삭제하거나 돌려 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중적인 영화일수록 도덕에 관련된 문제를 겁내지 않고 다뤄야 한다고 봐요. 그 영화가 관객의 생각을 바꿀 수 있으니까요.”(<무비: 우리가 사랑한 영화들> 중 ‘더티 댄싱’ 편) <더티 댄싱>은 춤을 못 추던 소녀가 사랑의 힘으로 춤을 매우 잘 추게 되는 이야기, 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상주의자였던 소녀가 현실에서 어떤 한계선들을 맞닥뜨리고 자기 방식대로 그것에 맞서며 넘어서는 이야기기도 하다. 극 중에서 가장 슬픈 대사 중의 하나는 베이비가 “아빠를 실망시켜서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아빠도 저를 실망시켰어요”라고 울면서 선언하는 장면이다. 이는 페니의 임신과 낙태에 관여하게 된 베이비가 그로 인해 다정한 가부장이었던 아버지의 편견과 맞닥뜨렸고, 가부장의 세계에 머물 것인지 자니의 세계를 변호할 것인지의 갈림길에서 가부장의 규범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공개적인 선택을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에서 언급되는 또 다른 한계선은 베이비 자신의 편견에서 비롯된다. 베이비의 언니 리사는 외모 치장에 신경을 많이 쓰고 부모님이 정해주는 결혼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다. 아빠가 산장 주인에게 베이비를 두고 “세상을 바꿀 아이”라고 소개하는 초반 장면에서, 베이비는 정치에 관심 많은 책벌레인 자신에 대해, 언니 같은 또래 여자들과는 다른 자신에 대해 살짝 자부심을 갖고 있음을 숨기지 못한다(아빠의 소개말을 들은 산장 주인이 리사를 향해 “아가씨는 뭘 할 거지?”라고 묻자 베이비는 “언니는 세상을 장식할 거예요”라고 대꾸하고 그 순간 리사의 얼굴은 살짝 굳는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자니의 세계에 들어서고, 지금까지 접한 적 없던 이들과 교류하고, 가끔은 거짓말과 불법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몸에 대한, 삶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면서 베이비의 시각은 크게 달라진다. 언니 리사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은연중에 자신보다 어리석다고 생각하던 리사의 성정을 다정한 공감과 따뜻한 연민으로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언니가 건네는 위로를 거절하지 않고 그 어깨에 기대는 변화를 보인다. 넷플릭스에서 <무비: 우리가 사랑한 영화들> 시즌 1이 공개됐을 때 주저없이 ‘더티댄싱’ 편부터 시청했다. 두 명의 여성, 각본가와 프로듀서가 의기투합하여 (멱살 잡고) 완성시킨 이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잔뼈 굵은 거물로부터 “돈 낭비 하지 말고 필름 태워버리쇼”라는 평을 받았지만, 일반 관객 1000명을 대상으로 연 시사회에서 “모두가 발을 구르며 환호를 질러대는 격렬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개봉 직후부터 무려 “19주 동안 박스오피스를 지배했고, 그때까지 나왔던 미국 독립영화 중 최대의 흥행 수익을 만든 영화”가 되었다. 제작 과정에서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과 음악과 사랑과 성장에 대한 “백만불짜리 제목”의 이 영화에 대한 애정과 믿음만으로, 초저예산의 한계를 뚫고 완성해낸 제작진 모두 그 유명한 주제가처럼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I've Had) The Time Of My Life)을 만끽했음을 알려준다. <더티 댄싱>을 본 이들이라면, 이 50분가량의 다큐멘터리도 꼭 관람하시길 간곡하게 권한다. 대중영화가 성취하는 멋진 지점,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닐지라도 대중들이 원하는 어떤 간지러운 지점과 딱 맞아떨어졌을 때 폭발하는 시대정신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다. *** 1) 여기서 아니 에르노의 짧은 책 <사건>(윤석헌 옮김, 민음사 펴냄)이 떠오른다. 1963년 여름 미국에서 베이비가 산장에 도착하고 페니가 원치 않는 임신 때문에 괴로워할 때, 불과 몇 달 뒤인 10월 프랑스에선 대학생 아니 에르노가 불법인 임신 중절 수술을 받기 위해 울음을 참으면서 여기저기 수소문하는 굴욕적인 기억이 세세하게 펼쳐진다.
남자들로 구성된 한국의 특수 집단, 학교와 군대. 폭력과 권력으로 대변되는 주류 남성성은 이 폐쇄적 남성공간을 통해 획득되고 구성된다. 말하자면 남자 고등학교는 ‘예비 남성’인 소년들의 병영체험소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곳은 의리와 우정으로 대변되는 남성 결합의 공동체인 동시에 숭배, 질투, 분노의 감정이 오가는 잔인한 결투의 장이다. 왕성한 발육에 미치지 못하는 아이들의 의식상태는 잔혹한 공격성향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른바 왕따(집단따돌림) 현상은 그러한 정념의 발화일 것이다. 차이에 대한 이질감과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또는 그저 재미있으므로 강자는 약자를 괴롭힌다. 이 풋내기 수컷 문화로 점철된 남고에 마선과 마택이 있다. 무슨 연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우팅 당한 마선은 급우들 사이에서 ‘호모새끼’로 낙인 찍혀 집단 괴롭힘을 당한다. 같은 반의 마택은 그에게 안쓰러운 감정을 느끼지만 주변의 시선으로 인해 선듯 마선의 편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얼굴 가득 여드름 꽃이 핀 두 인물은 배우가 아닌 실제 고등학생이다. 반의 아이들은 마선을 향해 “호모새끼”, “더러워, 역겨워”, “진짜 저 새끼 너 애인이야?” 등 주인공을 궁지로 몰아넣기 위한 마초적 대사들을 시종일관 쏟아내는데, 그것이 뻔한 설정으로 다가오기보다는 자연스러운 그 또래의 문화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등장인물들이 또래의 비전문 배우로 캐스팅했기 때문이리라. 한편, 둘에게는 공통된 관심사가 있었으니 바로 음악이다. 마선은 드럼, 마택은 베이스를 연주한다. 출중한 연주실력을 지닌 두 사람은 나란히 교내 밴드부에 합격하게 되고, 밤새 연습을 하면서 미묘한 감정을 쌓아간다. 둘은 말이 아닌 음악의 언어로 교감하기 시작한다. 밴드 음악에서 전체적인 리듬을 형성하고 받혀주는 드럼과 베이스의 긴밀한 관계만큼이나 이 둘의 합주는 찹쌀떡 궁합을 보여준다.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 이들의 관계를 못마땅하게 여긴 동물 왕국의 아이들은 둘을 연인으로 간주하여 공개재판을 연다. 마택은 자신마저 따돌림을 당할 상황에 놓이자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마선에게 배반의 장미를 던진다. “김마선, 니 애인한테 가서 똥구멍이나 핥아!” 영화는 학교 내 남성 동성애자의 현실을 다루기는 하지만, 성적지향에 따른 차이보다는 집단 괴롭힘 문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호모포비아라는 특정한 소재를 토대로 누구나 겪을 수 있을 법한 왕따 현상을 다루고 있다. 말하자면 마택이 왕따를 당하는 이유를 가난, 외모, 장애, 성적 등으로 치환하여도 무리 없이 볼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다. 차이가 있다면 다른 이유들은 급우들에게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될 여지가 있겠지만, 동성애자란 정체성은 혐오와 경멸만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일 듯이다. 이같은 경계의 불확실성은 둘의 관계와 정체성도 해당된다. 우리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마선이 동성애자인지 아니면 단순 루머에 의한 따돌림의 피해자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스스로 긍정도 부정도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선을 향한 마택의 감정이 약자에 대한 연민인지, 혹은 음악적 연대감을 나누는 우정인지 모호하다. 심지어 마택 역시 클로짓 게이로서 마선을 향한 묘한 애정을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가 마선을 특별히 신경 쓴다는 것 외에는 무엇도 확신할 수가 없다. 이런 감정의 모호성은 영화의 단점이기보다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흔히 우리가 확연하게 선을 긋는 사랑과 우정의 경계란 것이 실상 불명확하고, 또한 남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동성애자에 대한 특수한 차별과 폭력의 문화를 보편적인 따돌림 현상으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보자면 자칫 영화가 평범하게 설명되는 듯하다. 분명 < Bomb! Bomb! Bomb! >은 관습적인 내러티브를 거부한 채 실험적인 영화를 제작해온 쌍둥이 감독 김곡 , 김선 의 이전 영화와는 달리 친절한 내러티브를 구사한다. 그러나 비타협창작집단 곡사의 인장은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드러난다.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동물원’의 제물이 된 마선은 홀로 책상에 앉아 수치심에 고개를 들지 못한다. 소위 ‘동물원’이라 불리는 이 놀이는 교실에 왕따 한명을 가둬넣고 동물 취급을 하는 집단따돌림의 한 종류이다. 이 잔혹한 놀이는 광기에 사로잡힌 수컷집단에 의한 희생양의 정신적 화형식이다. 창문을 두드리며 광분하는 아이들을 비집고 이내 마택이 나타난다. 그는 아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교실문을 열고 마선에게 다가간다. 동물원의 동물로 만난 마선과 마택. 이때 침묵을 지키던 마선이 말한다. "마택아, 쟤들 다 죽여버릴까?" 그리고 정말 음악과 함께 모두를 죽여 버린다. 내가 이 영화를 특별히 사랑하는 이유는 마지막 두 주인공이 선사하는 전복의 쾌감을 발휘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동물원 제의를 보며 분노에 휩싸여 스크린을 찢고 들어가 교실을 폭파 시키고 싶은 기분에 휩싸일 때, 카운트다운하듯 영화의 타이틀이 등장(Bomb! Bomb! Bomb!)하며 안과 밖은 역전된다. 광분하던 창밖의 아이들은 마선과 마택의 연주에 열광하는 군중으로 변하고, 우리의 분노와 슬픔은 흥분과 전율로 뒤바뀐다. 윗옷을 벗은 채 그들만의 상상적 공간 속에서 발광하듯 합주하는 마선과 마택의 모습은 그 어떤 영화에서보다 폭발력있는 오르가즘을 발휘한다.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한 세계의 전복. 모든 아름다운 영화가 그렇하듯 < Bomb! Bomb! Bomb! >은 보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영화적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PS: < Bomb! Bomb! Bomb! >은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시선 시리즈 중 < 세 번째 시선 >(2006)에 포함된 작품이다. 시선 시리즈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옴니버스 영화로, 2003년 < 여섯 개의 시선 >에서 시작돼 박찬욱 , 류승완 , 임순례 , 장진 , 김태용 등 총 52명의 쟁쟁한 한국 영화감독들이 참여했다. 알려진 바로는 2015년 정지우 감독의 < 4등 >을 끝으로 제작비를 구하지 못하여 잠정적 중단 되었다고 한다. 이 훌륭한 기획이 올해는 부활할 수 있길 바라본다.
“내 몸에 지퍼가 있는 것 같아. 지퍼를 내리면 그 속에 전혀 다른 몸이 있는 것 같아. 이런 내가 괴물 같아?”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한 소녀의 절박한 외침. 스웨덴 영화 < 걸스 로스트 >는 성장의 문턱에서 ‘길을 잃은’ 한 소녀의 외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로 한, 아주 과감한 영화다. 고민과 망설임의 내면을 따라가는 대신 이 영화가 택한 방식은, 소녀가 그렇게 갑갑해 하던 외피에 메스를 가해, 감추어져 있던 성 정체성을 해부하는 일이다. 바로 몸이 ‘트랜스’되는 마법에 기반을 둔 독특한 판타지물로의 진입이다. < 걸스 로스트 >의 소녀 킴과 벨라, 모모 셋은 소위 말해서 학교의 왕따다. 남학생들로부터 “제 젖꼭지 좀 봐! 젖통” 같은 폭언을 듣고, 폭행으로 인해 입은 체육복이 찢겨 나가도 미약한 힘의 소녀들은 차마 대항하기 힘들다. 도움의 손길 역시 요원해 보인다. 엄마는 상관없는 일에 대해 잔소리나 할 뿐이고, 가까이서 도움을 주어야 할 선생조차 “너도 이제 14살이나 되었으니, 남자아이들처럼 강해져야 한다”는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늘어놓을 뿐이다. 레즈비언이라 놀림을 당하는 킴은 친구인 벨라와 모모가 겪는 부당함에 분개하지만 별다른 해결책 없이 하루하루를 보낸다. 세 친구가 쉴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는 집에 있는 온실이다. 학교가 끝나면 소녀들은 폭언과 폭행,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비밀스런 회합의 장으로 모여들어 씨앗을 심고, 미래를 꿈꾼다. 구원의 손길 역시 이곳에 도착한 정체 모를 ‘씨앗’으로부터 시작된다. 불과 하룻밤 사이에 마법의 씨앗은 세포 분열을 거쳐 발아하고 꽃을 틔우게 된다. 마치 금단의 열매를 따 먹듯, 소녀들은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꽃에서 나온 진액을 마셔보기로 한다. 꽃들에 둘러싸인 따뜻한 온실, 그들만이 정한 규칙, 그리고 빈티지한 찻잔에 받아 나누어 먹은 우정의 결의. 여성이 남성이 되는 트랜스젠더의 의식은 그렇게 마법처럼 실행된다. 더스틴 호프만(< 투씨 >)이나 멜 깁슨(< 왓 위민 원트 >)이 여성의 인권을 소재로 한 대중 장르 영화의 틀 안에서 여성의 옷을 입었을 때, 몸을 죄어오는 꽉 끼는 의상과 걸음을 뒤뚱거리게 만드는 하이힐의 시도는 ‘불편’함의 다른 말이었고, 결국 그 부대낌은 큰 웃음이 되어 돌아왔었다. < 걸스 로스트 >에서 여성의 남성으로서의 치환은 정반대다. 이들이 남성성을 획득하는 것은 불편함이 아닌, 오히려 무기가 된다. 하룻밤 사이에 남자가 돼 버린 소녀들은 매끈했던 뺨에 우둘투둘 난 여드름과 팬티 속 거추장스러운 고추를 보고 당황하지만, 이내 환호한다. 소녀를 구속하던 꽉 맞는 지퍼를 내리는 순간, 그녀들의(아니 그 남자들의) 움츠렸던 어깨는 펴지고, 보폭은 당당해진다. 선생의 조언처럼 그들은 ‘남자아이들처럼’ 강한 근육을 가지게 되었고,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안하무인의 영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제 더 이상 그녀들이 차별의 시선 속에서 숨죽여 살지 않아도 되었다는 말이다. 소녀들이 이렇게 힘을 획득하는 걸 지켜보는 과정 속에는, 앞서 남성이 여성으로 젠더를 바꿀 때 일어나는 웃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바로 < 걸스 로스트 >에서 성장통을 겪는 소녀들을 지배하는 것은 다른 성을 향한 ‘호기심’보다, 힘을 가지지 못한 데 대한 공포와 절박함이 더 크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혼란의 시간을, 킴의 파괴적인 선택을 통해서 보여준다. 한번 남성의 힘을 체험한 킴은 다시는 나약한 여성으로 되돌아가기를 거부한다. 그에게 마법의 진액은 이제 다른 삶을 위한 절대적인 것으로, 곧 중독의 것이 된다. 더군다나 남자가 된 킴은 남학생들 사이에서 일인자를 자처하며 거칠기로 소문 난 비행소년 토니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도둑질을 일삼는 토니를 도와주고, 그의 연애를 질투하고, 그의 구타를 감내하기까지 한다. 토니를 향한 킴의 집착을 눈치챈 친구는 그에게 묻는다. “개랑 사랑에 빠진 거야, 아니면 개처럼 되고 싶은 거야?” 과연 킴은 그 질문의 답을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 토니를 향한 킴의 사랑을 비난할 수 있을까? 마법의 진액을 마시기 위한 킴의 집착을 나무랄 수 있을까? 결국 그는 갑갑하다고 외치던 그 지퍼를 올리고 소녀로 다시 돌아갔을까? 알렉산드라-테레세 카이닝 감독은 스웨덴의 영 어덜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성장 판타지 < 걸스 로스트 >를 통해 성차별의 구조 속에서 소녀들의 딜레마에 대해 쉽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킴의 욕망 안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문제를 꼬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특히 그간의 작품을 통해 꾸준하게 성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개해 온 감독이기도 하다. <걸스 로스트>가 성장기에 그들을 구속하고 있는 억압의 구조를 표현해 낸 것이라면, 전작 < 키스 미 >(2011)를 통해서는 사랑에 빠진 30대 레즈비언 여성이 주변 인물들과 겪는 갈등을 보여 주었다. 또 텅 빈 아파트로 날아 들어온 비둘기와 그 비둘기를 좇으려 하지만 힘을 못 쓰는 여성이 겪는 난처한 상황을 그리는 단편 <엘레지아>(2011)를 통해서 힘의 무게에서 오는 성차별적인 이 사회의 문제점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가면을 쓴 소녀들의 비밀의식 장면, 몽환적인 음악이 주는 미스터리한 분위기 등 < 걸스 로스트 >가 구축한 판타지의 영역은 소박하지만 눈길을 끄는 지점이 많다. 남녀 더블캐스팅으로 자고 나면 소년이 된 소녀들의 이미지를 구현하는데, 각각의 남녀 배우들이 상당히 닮아 있다. 영화의 시작 ‘다르다는 걸 외면하는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는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바란다’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영화는 결국 이 문구가 명령조라기보다는 절박한 외침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단단한 설득력을 획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