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들
- 감독
- 연송하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박재철, 윤정일, 연송하, 김원정, 김범석, 윤종구
<축제> 중 (사진: 영화방) 박광수 감독의 < 칠수와 만수 >(1988)의 후반부에는 안성기 배우와 박중훈 배우가 연기한 두 주인공이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우뚝 솟은 거대한 광고판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는 광고판 도색 작업을 해야 했지만, 두 사람은 작은 저항의 의미로 그곳에 올라 소주를 마시며 도시를 내려다본다. 도색 작업을 하며 우연히 만난 이 두 남자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좌절감과 굴욕감만은 서로에게 숨겨왔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회로부터 외면받았으며, 안정적인 삶을 구축할 공정한 기회조차 거부당한 처지였다. 그러나 광고판 꼭대기에 올라서서야 칠수(박중훈)는 처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이며, 지금까지 했던 모든 자랑이 거짓이었음을 만수(안성기)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라고 말한다. 칠수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안성기의 얼굴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턱은 굳게 다물어지고 눈빛은 무언가에 집중한 듯 강렬해지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더라도 그 표면 아래에서 감정의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동료를 향한 연민과, 사회적 불평등을 견디며 오랫동안 참아온 분노를 동시에 포착해내는 연기를 이토록 훌륭히 해낼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잠시 후, 그는 일어서서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외친다.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 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이 장면은 198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매우 상징적인 순간이다. 만수와 칠수는 대중적인 주류 영화에서 대개 주목받지 못하는, 억압받고 소외된 인물들을 대변한다. 그들은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자신들의 좌절과 분노를 외침으로써,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고’ 자신들의 관점을 드러내며 말할 권리를 주장한다. 유사하게, 1980~90년 세대의 영화인들은 주류 사회가 망각 또는 묵살해버리는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열망에 이끌려 창작에 돌입하곤 했다. 안성기는 만수 역을 맡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그는 인물 특유의 단단하면서도 씁쓸한 결연함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한편, 그 내면에 자리한 부드럽고 연민 어린 면모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사실 안성기는 그 시기 한국영화에 등장한 여러 명의 주인공을 맡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그는 특정한 유형의 인물만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었고, 전형적인 “무비스타(movie-star)”로서의 외모나 뚜렷하게 고정된 스크린 이미지를 지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연기한 배역 속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게 만드는 데 어떤 배우들보다 탁월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과 두려움, 야망, 나약함, 그리고 미덕을 스크린 위에 충실히 구현해냈다.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의 능수능란한 사기꾼,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의 수줍은 대학생, < 투캅스 >(강우석, 1993)의 부패한 경찰에 이르기까지, 그는 각 인물을 공감 가능한 생생한 존재로 그려냈다. 1950~60년대에는 배우 최은희 가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연결되었는데, 한 세대의 여성들은 그녀가 연기한 다양한 역할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며 성장했다. 1980~90년대에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 배우는 단연 안성기였다. 세월이 흐르며 영화계 안에서 그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중요성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야기에 즉각적으로 무게감을 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 배우에게서도 최상의 연기를 끌어내도록 했기에, 감독들은 그와의 작업을 고대했다. 조연부터 주연까지 폭넓은 역할을 소화했으며, 대형 블록버스터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업에 참여했다. 신인 감독이나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와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 생활 전반에 걸쳐 수많은 감독과 생산적인 협업 관계를 맺었다. 그중 단 25명의 이름만 꼽아보더라도 김기영 , 임권택 , 배창호 , 이장호 , 이두용 , 유현목 , 이원세 , 정지영 , 강우석 , 이명세 , 박광수 , 박종원 , 장선우 , 이현승 , 류승완 , 김성수 , 오승욱 , 이정향 , 이준익 , 김지훈 , 신연식 , 장률 , 김주환 , 박흥식 , 그리고 김한민 의 영화에 출연했다(여기에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분께 양해를 구한다).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양기주) 그는 영화계 내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스크린쿼터 제도 수호에 앞장섰고, 부산국제영화제 부위원장 및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도 했다. 영화계 내에서의 이러한 위상과 배우로서 이룬 독보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를 직접 대면한 이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그의 겸손함과 너그러움이었다. 그는 스타로서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결코 유명 스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행동하며 스포트라이트를 찾아나서지 않았음에도, 그는 영화계의 기둥이자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는 리더였다. 영화계의 여러 행사에서 그가 지녔던 존재감은 동료 영화인들에게 깊은 그리움을 자아내겠지만, 다행히 한국영화 속 그의 연기는 여전히 누구나 접하고 즐길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상징적인 역할 중 몇 가지만 고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중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정한 일부 목록을 아래에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그의 경력이 시작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에서 보여준 아역 연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보다 전에 김기영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 10대의 반항 >(1959)은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안성기는 이 작품으로 소년 특별연기상을 받았지만, 작품의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 그는 1960년대에 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주로 작은 역할들을 맡아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성인 배우로서의 도약은 1980년대 초에 이뤄졌는데, 이장호의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 이원세의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1981), 임권택의 < 만다라 >(1981), 배창호의 < 꼬방동네 사람들 >(1982)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각 감독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주요 작품들이다. 특히 배창호 감독과 함께하며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는데, 따뜻한 마음을 가진 노숙인을 연기한 < 고래사냥 >(1984),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깊고 푸른 밤>(1985), 그리고 청춘의 성장과 관계를 다룬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이 대표적이다. 이후 20여 년간 국제적인 명성을 쌓게 된 임권택 감독 역시 < 안개마을 >(1982)부터 < 태백산맥 >(1994), < 축제 >(1996), < 취화선 >(2002), 그리고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 화장 >(2014)에 이르기까지 그와 지속적으로 작업했다. (상) <하녀>, <바람불어 좋은 날> / (하) <안개마을>, <화장> (사진: 한국일보, 백영호)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데뷔한 사회의식 있는 감독들,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로 불리는 창작자들 역시 안성기와 작업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앞서 언급한 <칠수와 만수>와 박광수 감독의 또 다른 주요작인 < 그 섬에 가고싶다 >(1993) 외에도, 자본주의를 풍자한 장선우의 < 성공시대 >(1988), 이명세의 파격적인 데뷔작 < 개그맨 >(1988), 그리고 날카로운 정치적 통찰을 보여준 정지영의 < 남부군 >(1990)과 < 하얀전쟁 >(1992)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강우석의 메가 히트작 < 투캅스 >(1993)를 통해 자신의 코믹 연기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감독들은 그를 신뢰했기에, 때로 이례적이거나 의외의 역할에 캐스팅하기도 했다. 이정향의 로맨틱 코미디 < 미술관 옆 동물원 >(1998)에서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습이나, 이명세의 < 인정사정 볼것 없다 >(1999) 속 잔인한 살인마로의 등장, 전만배 감독의 < 피아노 치는 대통령 >(2002)에서의 대통령 연기가 그 예다. 또한 오랜 동료인 박중훈과 호흡을 맞춘 가슴 따뜻한 음악 드라마 < 라디오스타 >(2006), 정지영의 법정 드라마 장르인 < 부러진 화살 >(2011)에서의 강렬한 변신, 그리고 한국영화사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인 강우석의 < 실미도 >(2003)에서 보여준 군 지휘관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경력의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도 그의 독특한 목소리는 대규모 흥행작인 < 타워 >(2012), < 한산: 용의 출현 >(2022)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인 < 필름시대사랑 >(2015), < 아들의 이름으로 >(2020), < 카시오페아 >(2022) 등 영화계 전반에 걸쳐 친숙하게 자리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담하고 창의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안성기는 영화라는 예술을 사랑했다. 그가 여러 번 직접 언급해서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그의 행보가 한국영화를 향한 깊은 헌신을 분명히 보여줬기에 알 수 있다. 그가 별세하면서 한국영화계는 길을 밝혀주던 등불 하나를 잃었으며, 그가 없는 이곳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성공시대> 중 (사진: 정기성) 달시 파켓(Darcy Paquet / 영화평론가·번역가) l 영화평론가이자 강연자, 번역가, 그리고 영화제 컨설턴트로서 25년 넘게 한국영화를 지켜봐 왔다. 저서로는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가 있다. * 위 원고는 필자가 영문으로 작성한 아래 원고의 국문 번역본입니다. Remembering Ahn Sung-ki There is a moment towards the end of Park Kwang-su’s 1988 film Chilsu and Mansu when the two lead characters – played by Ahn Sung-ki and Park Joong-hoon – are sitting on the top of a giant billboard at the Express Bus Terminal in Gangnam. They are supposed to be painting the billboard, but in a small act of defiance, they have instead gone up to drink soju and look out over the city. These two men, who met by chance on painting jobs, have become work partners, but nonetheless they have hidden their most painful frustrations and humiliations from each other. Each of them for various reasons have been shunned by society, and denied a fair shot at building a stable life for themselves. But atop the billboard, Chilsu (played by Park Joong-hoon) starts to speak honestly from his heart for the first time. He confesses to Mansu that he’s a failure, that the bragging he has been doing up to now has been lies. “I’m a hopeless guy(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 he says. As Chilsu is speaking, a slow transformation takes place on Ahn Sung-ki’s face. His jaw locks, his eyes take on a focused intensity, and although he doesn’t say a word, we can see a storm brewing just beneath the surface. Not many actors could have done this so well, capturing both the compassion he feels for his colleague and his long-suffering outrage at society’s inequities. A moment later, he stands up and shouts to the city below: “All you upper-class, educated, well-off bastards of Seoul, listen to me now! I'm going to speak out too, from this high place here!”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This is an iconic and deeply symbolic scene for 1980s-era Korean cinema. Mansu and Chilsu represent the kind of downtrodden, disenfranchised characters that are usually overlooked by popular mainstream cinema. By shouting their frustrations and complaints to the city below, they are quite literally “finding their voices,” expressing their point of view and insisting on their right to speak. In a similar way, a whole generation of filmmakers in the 1980s and 1990s were motivated by the desire to give a voice to the sort of characters that mainstream society forgets or simply ignores.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su. He convincingly portrays the hard, bitter determination of his character while giving hints of a softer, compassionate side underneath. But actually,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y of the protagonists of that decade’s cinema. He wasn’t known for playing one particular character type. He didn’t have movie-star looks, or a clearly-defined screen image. But what he did better than anyone else was to make audiences see themselves in the roles he played. He took the dreams, fears, ambitions, weaknesses and virtues of ordinary people, and represented them faithfully on the screen. Whether it was the smooth-talking grifter moving to California and pursuing the American Dream in Deep Blue Night , the shy university student in Our Sweet Days of Youth , or the corrupt policeman in Two Cops , he portrayed each character in a manner that made them vivid and relatable. In the 1950s and 1960s, it was the actress Choi Eun-hee who connected with audiences in this way: a generation of women grew up seeing themselves and their experiences in the many different roles that she played. But in the 1980s and 1990s, the actor who did this best of all was Ahn Sung-ki. As he grew older, his position within the film industry changed, but not his importance. Directors loved to work with him, since his presence in a film immediately gave the story more weight, and he could bring out the best in his co-stars as well. He took on a wide variety of roles, from supporting to leading characters, and worked on everything from major blockbusters to low-budget independent films. He didn’t shy away from working with new directors or less prestigious projects.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he formed productive working relationships with a huge number of directors. To choose just 25 names, he appeared in films by Kim Ki-young, Im Kwon-taek, Bae Chang-ho, Lee Jang-ho, Lee Doo-yong, Yu Hyun-mok, Lee Won-se, Chung Ji-young, Kang Woo-suk, Lee Myung-Se, Park Kwang-su, Park Jong-won, Jang Sun-woo, Lee Hyun-seung, Ryoo Seung-wan, Kim Sung-soo, Oh Seung-wook, Lee Jeong-hyang, Lee Joon-ik, Kim Ji-hoon, Shin Young-sik, Zhang Lu, Kim Ju-hwan, Park Heung-sik, and Kim Han-min(with apologies to the many other names I’ve excluded). He also played important roles in the film community, serving as chairman of the Korean Film Actors Association, advocating for the Screen Quota system, serving as Deputy Director of the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as Festival Director of the Asiana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And yet despite his stature in the industry and his unmatched accomplishments as an actor, the quality that most impressed people who met him in person was his modesty and generosity of spirit. He didn’t behave like a famous star, even though he possessed a star-quality charisma. Soft-spoken and never seeking the spotlight, he was nonetheless a pillar of the film community, looked up to as a leader. His presence at film events will be sorely missed by fellow filmmakers, but thankfully his performances in Korean films can still be accessed and enjoyed by anyone. Making a list of his most iconic roles is difficult, because there are so many of them to choose from. But I will attempt to make a partial, highly subjective list below. Of course, going back all the way to start of his career, we have his performance as a child actor in one of the most famous Korean films of all time, Kim Ki-young’s The Housemaid (1960). It’s truly regrettable that a copy no longer exists of his previous collaboration with Kim Ki-young, Defiance of a Teenager (1959), which screened at the San Francisc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where Ahn Sung-ki won a special award for his acting. He would go on to act in more than 50 films in the 1960s, often in small roles, but his breakthrough as an adult came at the start of the 1980s in works such as Lee Jang-ho’s Fine Windy Day (1980), Lee Won-se’s A Dwarf Launches a Little Ball (1981), Im Kwon-taek’s Mandala (1981), and Bae Chang-ho’s People in a Slum (1982) – all major films that helped to establish the reputation of their directors. It was with Bae Chang-ho that he would enjoy some of his biggest commercial successes, especially in Whale Hunting (1984) where he played a kind-hearted beggar; the smash hit Deep Blue Night (1985) and the coming-of-age relationship story Our Sweet Days of Youth (1987). Director Im Kwon-taek, who became internationally recognized over the next two decades, often worked with Ahn Sung-ki as well, from films like Village of Haze (1982) to The Taebaek Mountains (1994), Festival (1996), Chihwaseon (2002) and the director’s final film Revivre (2014). The group of more socially-minded directors who debuted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 often referred to as the Korean New Wave – were just as eager to work with Ahn Sung-ki. Aside from the aforementioned Chilsu and Mansu and another important work by Park Kwang-su, To The Starry Island (1994), there was Jang Sun-woo’s capitalist satire Age of Success (1988), Lee Myung-Se’s groundbreaking debut film Gagman (1989), and Chung Ji-young’s politically incisive North Korean Partisans in South Korea (1990) and White Badge (1992). At the same time, Ahn showcased his comic abilities in Kang Woo-suk’s smash hit Two Cops (1993). Directors trusted Ahn Sung-ki enough to cast him in somewhat unusual or surprising roles, such as his whimsical appearance in Lee Jeong-hyang’s romantic comedy Art Museum by the Zoo (1998), his turn as a vicious killer in Lee Myung-Se’s Nowhere to Hide (1999), playing the nation’s president in director Jeon Man-bae’s Romantic President (2002), his role opposite longtime collaborator Park Joong-hoon in the heartwarming music drama Radio Star (2006), his powerful turn in Chung Ji-young’s court drama Unbowed (2011) and his unforgettable role as a military commander in Kang Woo-suk’s Silmido (2003), the first Korean film to sell 10 million tickets. Even to the later stages of his career, his distinctive voice was a familiar presence in big-budget hit films such as Tower (2012) or Hansan: Rising Dragon (2022), to low-budget indie features like Love and… (2015), In the Name of the Son (2020) and Cassiopeia (2022), and everything in between. He was daring and creative in choosing films up to the very end. Ahn Sung-ki loved the art of cinema. We know this not because he said it in so many words, but because over decades, his actions demonstrated his deep commitment to Korean cinema. With his passing, the film industry has lost one its guiding lights, and it will not be the same without him. Darcy Paquet(film critic/translator) l As a film critic, lecturer, translator and film festival consultant, I have been following Korean cinema for over 25 years. Author of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60년을 이어온 공간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아카데미극장의 대표이자 소유주였던 정운학은 황해도 해주 태생으로 해방 전까지 해주극장을 비롯해 신주, 안악, 겸이포, 개성 등지에서 당시에는 희귀했던 영사기사로 활약한 이력이 있다. 아카데미극장의 전신인 시민극장을 운영하면서 원주시와 인연을 맺은 정운학은 과거 C도로라 불렸던 원주 평원로에 1956년 원주극장, 1962년 시공관, 1963년 아카데미극장, 1967년 문화극장을 순차적으로 열었다. 그와 별개로 한국전쟁 동안 동부전선 전투를 담당한 육군 1군 총괄사령부가 원주에 주둔하면서 1956년 1월 개관한 군인극장이 있었다. 민간인의 극장 출입도 허용된 곳이었기에 상업극장과 다르지 않게 운영됐다. 이렇게 원주시 원도심에는 5개의 단관 극장이 성업했다. 극장마다 특성이 달라 극장마다 다른 장르의 영화가 상영됐다. 영화뿐 아니라 공연, 연극, 웅변대회 등 지역행사와 다양한 공연이 열려 복합문화공간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정운학은 자신과 같은 이북 출신 이주민들을 극장에 취직시키거나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었고, 극장 폐관 이후에도 사무실은 이북5도민회에게 내주는 등 이주민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지역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극장 내부의 이북5도민회 사무실 2005년 원주시에 멀티플렉스가 개관하면서 2006년 4개의 단관 극장이 일제히 문을 닫았다. 아카데미극장도 철거 위기에 놓였지만 지역사회 시민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극장을 지키기 위한 운동에 나섰다. 2016년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아카데미극장 보존방안’ 시민 포럼을 시작으로 상영회, 다큐멘터리 제작, 포럼, 타 지역 재생 사례 연구 등이 이어졌다. 2021년 2월 철거 위기에 맞서기 위해 ‘원주 아카데미극장 보존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1인당 100만원씩 기부하는 시민운동 ‘100인 100석 프로젝트’를 통해 3주 만에 1억 원의 모금을 달성하기도 했다. 전국 54개 영화문화단체 및 원주시 주민자치협의체 등에서 지지성명이 이어졌다. 이러한 활동과 노력에 2021년 5월 원주시는 사유재산인 아카데미극장을 매입하여 시민 커뮤니티 공간으로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문화유산 국민신탁과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꼭 지켜야 할 문화유산으로 아카데미극장을 선정하며 ‘문화재청장상’을 전달했다. 전임 시장 때 극장 건물과 토지 매입에 32억 원을 집행하고 리모델링을 앞두고 있었으나 글을 쓰는 현재 민선 8기 원주시장직 인수위원회가 들어서면서 아카데미극장 복원사업 중단을 권고한 상황이다. 단관극장의 원형을 가장 오랫동안 보존하고 있는 극장 아카데미극장은 강원도 원주시 중앙동에 자리 잡고 있다. 중앙동은 우산동, 태장동 등 주변 일대와 함께 원도심 권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원도심 일대에는 상지대학교,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한국폴리텍대학 등 3개 대학교가 있으며, 원주종합운동장 등 체육시설과 원주시민문화센터, 원주역사박물관 등 주요 문화시설이 자리한 곳이다. 원주는 혁신도시와 기업도시 설치, 규제 자유 특구 지정 등 도시의 변화로 인구 유입이 증가하고 있지만, 원도심의 경우 핵심 인프라의 이전과 도심 외곽의 팽창으로 40대 미만의 인구 비율이 적고 60대, 50대, 70대 순으로 전체적으로 고령화되어 있다. 아카데미극장은 단관 극장의 원형을 가장 오랫동안 보존하고 있는 극장으로 외관을 온전히 유지한 채 보존된 근대극장으로서 희소가치가 높다. 극장이 소유주의 살림집과 연결된 독특한 구조로 인해 산업화 시기의 건축적 특징도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전쟁의 폐허를 극복한 전쟁 복구기의 사회·경제 성장의 역사를 도시의 중심에서 증거하는 중요한 근대 건축 자산이기도 하다. 상영관 내부 전경 "아카데미극장은 단관극장의 원형을 가장 오랫동안 보존하고 있는 극장 중 하나다" 더불어 아카데미극장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원주 시민의 영상문화 수요를 충족해 주고 만남과 소통의 공간으로 복합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 현재 상업극장으로서 활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지역사회 도시재생의 중심적 입지에 위치해 있다. 이에 아카데미극장을 기억하는 원주 시민들이 참여해 기억을 공유하고 문화를 나누며 기성세대의 기억과 경험을 후속세대와 함께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가 기획되고 있다. 원도심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아카데미극장은 원도심의 상권, 문화예술, 복지 인프라 등의 자원과 결합이 쉽고 중앙동의 도시재생사업 등 기존 사업과의 연계 가능성이 큰 공간이기도 하다. 아카데미극장 매입 및 활용계획을 수립할 당시 원주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이에 따르면 ‘아카데미극장을 원주시가 매입해 보전’하는 문제에 관해 응답자 중 435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보였고, 시민 문화 향유 및 추억 공간과 근현대 건축유산의 가치 보전을 그 이유로 꼽았다. 아카데미극장에 보존되어 있는 입장권 수입 장부 공간개요 ■위치: 강원도 원주시 평원로 20 ■설립일: 1963.09.23(개관일) ■규모: 1,237m²(374.4평) ■건물구조 1층 - 상영관(1관, 662석), 매표소, 매점(2006년 폐관 이후 이북5도민회 사무실로 사용됨), 사무실, 정원 2층 - 살림집(거실, 부엌, 화장실, 방 3개로 구성), 영사실, 창고 인터뷰: 변해원 센터장(원주영상미디어센터, 원주아카데미극장보존추진위원회) 변해원 센터장 김수영 _과거 원주에는 다섯 개의 단관극장이 있었습니다. 이후 원주 아카데미극장만 남기까지 간략하게 역사를 설명해주세요. 변해원 _(한국)전쟁 기간 원주는 폭격으로 초토화가 됐어요. 남아있는 건물이 거의 없던 상태고, 1군 지사(지원사령부)가 같이 있었기 때문에 민군이 같이 도시를 재건하는 형태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정치, 사회가 좀 안정되면서 산업도 발전하게 되고 그런 연장선으로 극장들이 하나둘 생기게 됐고요. 원주극장, 시공관, 아카데미극장, 문화극장이 순서대로 만들어졌고 전국 유일한 상설극장인 군인극장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총 다섯 개의 단관극장이 있었고 1990년대 전후가 되면서 멀티플렉스들이 만들어지면서 하나둘 극장이 팔리기도 하고 철거도 되면서 2016년에는 아카데미극장만 남게 된 거죠. 김수영 _아카데미극장의 공간은 현재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요. 변해원 _1층, 2층 전형적인 단관 극장 형태로 662석이 갖춰져 있고요. 극장을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소유주가 살았던 가정집이 있습니다. 소유주가 영사기사 출신이어서 가정집에서 영사실로 바로 갈 수 있는 구조로 디자인을 했습니다. 극장 왼편 발코니 공간에는 예전에 공연할 때 사용한 흔적이 있는데요. 배우 대기실이 무대와 연결되어 있어요. 지금은 창고로 쓰는 공간에 80년대 영화 포스터들이나 극장에 띠지 같은 것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극장 공간에 있었던 전 소유주 정운학 님의 사택 공간 내부 김수영 _이곳이 한국전쟁 후에는 이북5도민의 연락사무소로도 활용되었다고요. 변해원 _원주에는 생각 외로 이북5도민분들이 많으세요. 극장 소유주인 정운학 옹이 황해도 해주 출신입니다. 전쟁 전에는 해주에서 영사기사를 하시다가 전쟁 후에 넘어오셨고, 극장을 유지하시다 보니 재력도 좀 풍부했고 이북5도민의 초대 회장도 맡으셨어요. 그분들끼리의 단합된 활동도 하고 북한에 대한 소식들도 같이 공유하고 연을 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경제적 공동체로 만들어가려고 노력하셨습니다. 극장에 이북 분들이 취업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김수영 _아카데미극장은 극장을 넘어 지역의 커뮤니티센터처럼 느껴지는데요. 원주 지역에서 이곳은 어떤 역할을 해왔나요. 변해원 _이곳에서 새마을대회도 열리고 신용협동조합의 총회도 열리고, 대부분의 초중고등학교의 졸업식이 여기서 많이 열렸어요. 그래서 영화를 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지역에서 시민들이 모이고 또 원주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커뮤니티 공간으로 작용해왔던 거죠. 그런데 그 역할들이 계속 분화되면서 영화관으로만 남게 되었고,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폐관까지 이르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극장성이라는 게 무대와 영화만을 뜻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 지역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문화를 접하는 공간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게 지금의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수영 _극장이 다시 열린 데에는 시민들의 애정과 적극적인 응원이 크게 작용했는데요. 그에 걸맞게 보존추진위원회에서도 '시민 한마디'나 '영사기 조립반' 등 다양한 교육과 전시행사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새롭게 발견하게 된 점이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변해원 _단순하게는 아카데미 정원 만들기를 통해 정원을 정리해 보니까 극장 안에 연못이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뭔가를 아카이브 해 가다 보면 새로운 모습들을 모르던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것이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라 시민들과 같이 발견하고 만들어간다는 데 제일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원주시에서 매입했기 때문에 극장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재생이라든지 지역의 콘텐츠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 수준이 굉장히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지역의 콘텐츠와 이런 자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활용해 가야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같이 해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주 아카데미 극장 내부의 정원 김수영 _극장 보존과 관련된 이슈들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설명해주세요. 변해원 _저희가 보존 활동을 할 때는 극장주였던 정운학 옹 일가가 극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1~2년 뒤 사적 거래로 다른 분께 극장이 넘어가게 되죠. 새로운 소유주와도 만나서 재정사업에 관해 논의하고 관계를 이어왔었습니다. 철거 위기가 있었지만 시민들이 상징적인 모금 운동을 해보자고 나서주셨고, 한 사람, 한 단체에서 1백만원씩 기부를 해서 1억원을 모아보자고 했던 게 3주 만에 달성되었습니다. 전국에 있는 영화문화단체 42개에서도 지지 성명에 동참해 주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작년(2021년) 5월에 원주시가 매입을 하겠다는 발표가 있었고 올해(2022년) 1월에 행정적으로 매입이 완료된 거죠. 그러면서 안전진단도 거치고 활용 방안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구상이 나왔는데 민선 8기 원주시장직 인수위원회가 들어서면서 입장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보전 문제를 재논의하자는 말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상영관 입구와 극장 로비 김수영 _현재 보존추준위원회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변해원 _보존추진위원회는 보존에 대한 문제들이 완전히 해결되면 해산됩니다. 원래 시와 시민들로 구성된 민관협의체를 만들려고 했었어요. 그래서 민관협의체에서 아카데미극장의 재생 방향을 같이 정해가는 게 애초의 계획이었고 지금도 계획 중인 부분입니다. 극장 자체의 가치도 있지만 시민들이 힘을 모아서 보존했다는 것도 아카데미극장의 굉장히 중요한 가치인 것 같아요. 그렇게 극장이 보존 재생되고 난 이후 어떻게 시민들이 그 구조에 접근하고 사업의 의견을 낼 수 있는가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걸 구조적으로 만들고 싶은 거죠. 그래서 원주시와 저희가 민간협의체를 구성해서 재생의 방향을 정하자고 기본구상을 해왔던 거고요. 내년이라도 민관협의체를 만들어내는 게 목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수영 _마지막으로 원주 아카데미극장을 향한 관심과 당부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변해원 _원주 아카데미극장이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으로도 활발하게 소식을 전하고 있으니 SNS 계정을 팔로우해주셨으면 좋겠고요. 그래서 계속 소식을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원주 사람들은 아카데미극장이 원주만의 것처럼 느껴져서 그 가치에 관해 가끔 잊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오히려 외부에서 찾아 주고 언급해 주는 데에서도 힘을 얻고 있습니다. 원주 안팎의 관객들이 ‘이 극장이 이만큼 괜찮은 곳이구나’ 느끼고 공유할 수 있는 교류와 연대를 많이 해갔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신동화 시민활동가(<아카데미극장> 인터뷰집 제작) 신동화 활동가 김수영 _원주 아카데미극장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신동화 _아카데미극장은 원주 사는 분이라면 대부분 다 아실 거예요. 여기 원도심의 제일 중앙을 거쳐 가는 버스 정류소가 바로 앞에 있어서 오며 가며 ‘저 낡은 건물은 뭘까’ ‘극장이라고 하는데 멋있네, 한번 안에 들어가고 싶다’ 그런 생각을 계속해 왔어요. 지역에서 책방을 운영하다 보니까 지역의 문화 자산에 관심을 좀 더 가지게 된 것도 있어요. 그렇게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안녕, 아카데미’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됐어요. 그 행사를 통해서 처음 아카데미극장에 들어와 봤거든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지더라고요. 1960년대에 개관을 했으니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갔고, 여기서 웃기도 했었고 울기도 했었고, 그런 묘한 기운들이 이 공간에서 느껴졌고 되게 좋았어요. 그때 이 극장이 진짜 사라지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멀리서 본 아카데미극장 건물 전경 김수영 _'안녕, 아카데미'라는 프로그램을 소개해주세요. 신동화 _‘안녕, 아카데미’는 2020년에 있었던 극장 재생 시범 사업이에요. 극장이 2006년도 이후 계속 문이 닫혀 있던 상황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안에 엄청난 먼지도 쌓였을 텐데 시민들이 그걸 일일이 닦고, 다시 극장을 오픈하기 위해 시민들이 처음부터 투입됐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그림책 워크숍도 하고 저 같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북토크도 하고 연극도 하고 앨범도 녹음했다고 하더라고요. 극장이 열리는 날 오프닝 쇼로 ‘아폴로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미디어 파사드 행사가 있었어요. 원주에서 활동하시는 미디어 아트 창작자들과 일렉트로닉 음악 하시는 분이 협업해서 극장 외관에 프로젝트 매핑 작업을 한 거였는데 무척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라이브 드로잉도 한 적 있거든요. 다양한 콘텐츠를 극장이라는 공간에 녹여냈던 기억이 많이 나요. 이걸 계기로 원주 시민들이 낡고 허름한 원도심의 어떤 건물이 아니라 이 안에서 어떤 가능성을 볼 수 있겠구나 느끼게 했던 사업이었던 것 같아요. 저도 그런 생각에 동의해서 활동을 시작하게 됐고요. 극장 입구 로비에 전시되어 있는 < 백 투더 퓨처 > 간판 김수영 _오오극장 주변은 동성로 번화가에 비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역사가 유구한 곳입니다. 신동화 _저는 원주의 토박이는 아니에요. 원주에 9년을 살면서 원주가 어떤 상징성을 가질 수 있을까, 그게 뭘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문화예술 관련 일을 하다 보니 어떤 활동 거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러던 중에 ‘안녕, 아카데미’를 접하게 된 거죠. 이런 것들이 일반 시민들에게는 원주가 이런 비전을 꿈꿀 수 있다든지 낡은 공간들을 활용해서 과거와 현재 가치의 접점을 만들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공간이 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이 되어주는 것 같아요. 김수영 _시민 모금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신동화 _우선 ‘100인 100석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100만원을 기부하면 극장 의자 뒤에 이름을 새겨주는 프로젝트였어요. 그 다음에 더 많은 시민을 대상으로 ‘아카데미 3650’ 모금 프로젝트가 시작됐어요. 3650명이 적은 금액으로도 모금할 수 있도록 한 프로젝트인데요. 여기에 참여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누구나 말할 수 있고 누구나 찾아갈 수 있는데 이렇게 경제적인 지원을 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라고요. 3650명이 다 모이기도 전에 목표로 한 금액이 다 차서 마감되었어요. 한두 명의 사람이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적인 또 시간적인 에너지를 더해서 참여했다는 것 자체가 극장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과 의지를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상영관 출구 쪽. 오른쪽 벽에 "아카데미극장 보존활동 시민 연대기" 설명판이 있다 김수영 _어떤 마음으로 시민 활동을 계속하고 계신가요. 신동화 _저는 시장 옆에서 자랐어요. 서울에서 자라긴 했는데 굉장히 낡은 동네였어요. 그때 그 동네의 감수성이 저한테 남아있는 것 같아요. 오래된 건물들이 제게는 익숙해요. 오래된 것들이 그냥 사라져 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은 이 공간을 주차장 정도로밖에 안 볼 수도 있겠지만 여기 담긴 가치를 보는 눈을 저는 더 많은 사람들이 가졌으면 좋겠어요. 저는 제 아이가 그런 가치를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이 보존운동을 나름대로 열렬히 지지하고 응원하는 까닭은 제 아이까지 이 극장을 향유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극장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열심히 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아카데미극장이 사라지지 않도록 시민의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계속 지지하고 싶어요. 필자: 김수영(씨네21) 사진촬영: 손홍주(씨네21) 인터뷰 일자: 2022년 10월 17일
앞선 여성코미디언 약사 1에서는 박옥초와 백금녀의 영화에서의 활약을 살펴보았다. 악극단의 스타였던 박옥초가 영화로 무대를 옮기고 난 뒤 70여 편의 영화에서 개성 있는 조연과 단역을 맡아 신 스틸러가 되었다면, 백금녀는 확실한 자신만의 코미디 콘텐츠를 가지고 주연과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았던 경우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여성 코미디언들은 영화보다는 라디오, TV 등 여타의 매체에서 더 돋보이는 활약을 하였거나, TV에서의 스타성을 가지고 영화로 영역을 넓힌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코미디영화 전성기에 남성 코미디언들이 주인공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는 동안, 백금녀를 제외한 대부분의 여성 코미디언들은 조연이나 단역 이상의 역할을 맡지 못했다. 이들은 악극단의 전성기와 라디오 시대를 거치며 눈부신 활약을 했으나 흥행 시장이 영화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주변화 되었거나 영화를 건너뛴 채 쇼 무대에서 TV로 이동하여 스타덤을 이어갔다. 물론, 코미디의 영역 자체에서 여성들은 대체로 남성들에 비해 좁은 입지를 가져왔던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가부장제 하의 젠더 규범에서 여성성은 “겸손함과 어여쁨”으로 규정되어 왔기 때문에 “광대짓 하기나 바보짓 하기”는 여성들의 행동으로 부적절하게 여겨져 왔다. 즉, 여성이 코미디 발화의 주체가 되는 것은 “문화적으로 결정된, 이상적인 여성 행위에 대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1) 우리나라뿐 아니라 영미권이나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로 코미디 산업의 모든 영역에서 오랫동안 남성들이 지배적인 것이 일반적 2) 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코미디 산업에서 남성의 우세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살펴본다 하더라도, 한국 코미디영화와 여성코미디언의 관계는 여전히 문제적인 측면들을 내포하고 있다. 첫 번째,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한 해에 평균 10편 이상의 코미디영화가 제작되었고 이 기간 동안 코미디언을 주인공으로 하는 코미디언코미디가 50여 편 가까이 제작되었던 상황에서, 여성 코미디언이 주연배우로 출연하는 영화는 매우 드물었다. 단편적인 무대 코미디나 만담, 쇼 등에서는 동등하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여성 코미디언들은 거의 대부분의 코미디영화에서 조연이나 단역에 머물렀다. 두 번째, 코미디영화 속 여성 재현의 문제이다. 프로이트는 두 남성 사이의 농담에서 여성의 역할이 “적대적이고 성적인 공격의 대상” 3) 이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1950-1970년대 한국의 코미디영화 속 여성들 역시 대체로 프로이트적 규정 안에서 유형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남자식모>, <남자와 기생>, <남자미용사> 등을 떠올려보면 이 영화들이 매우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시선으로 여성 캐릭터들을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른바 ‘남자 시리즈’ 속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교화’되어야 할 대상이자 남성 주인공의 사회적 성취와 더불어 주어지는 ‘성적 보상’으로 객체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코미디영화의 여성 주인공은 대부분 미모가 두드러지는 젊은 여성 배우들이었고, 여성 코미디언들은 외모로 웃음을 담당하는 조연이나 단역으로 역할이 한정되었다. 이런 점에서 백금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코미디영화의 존재는 매우 이채로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의 코미디영화 안에서의 여성 코미디언들의 문제적 위치와 재현 양상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코미디 배우들의 존재는 영화에 활기를 불어 넣어주었고 제한된 영역 안에서나마 다양한 웃음의 코드들을 만들어내었다는 점에서 기억되어야 한다. 이들은 박옥초와 백금녀 만큼의 존재감을 드러낸 영화 스타였다고 할 수는 없어도, 무대에서 혹은 TV에서 매우 강렬한 웃음을 만들어 내었던, 우리 시대의 코미디언들이었다. 가장 먼저 언급할 사람은 고춘자(1922-1995)이다. 고춘자는 장소팔과 함께 콤비를 이루어 1950-60년대 만담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고춘자와 장소팔의 활약은 e-영상역사관에 남아 있는 몇 편의 문화영화, <내고향 좋을시고>와 <민요잔치> 등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고춘자는 활동 초기에는 장소팔, 후기에는 김영운과 짝을 이루어 대화만담과 민요만담 등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했다. 영화 출연은 콤비였던 장소팔에 비해서도 훨씬 뒤늦은 편이었다. 장소팔은 <여성 코미디언 약사> 1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처가>(김수용, 1958)에서 백금녀와 함께 주연을 맡아 출연한 기록이 있는데, 고춘자의 경우에는 196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단 한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김화랑 감독의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1965)가 그것인데, 여기서 고춘자는 장소팔과 함께 실명 그대로의 만담가로 단역 출연했다. (그림1)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김화랑, 1965) 포스터. 포스터 가운데 컬러사진으로 실린 인물은 안경쓴 서영춘과 김희갑, 그 밑이 구봉서. '쥐’라는 글자 바로 왼쪽이 황정순, 황정순 왼쪽으로 두 번째가 고춘자이다. 다음으로는 백금녀를 벤치마킹하여 등장했던 여성 코미디언들이 있다. 가장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던 것은 오천평(1943- )이었는데, 오천평의 본명은 장정숙으로 오천평이라는 예명 자체가 그의 캐릭터를 대변해주었다. 박영한 작가의 『머나먼 쏭바강』의 한 대목을 보면,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사들을 위문하러 갔던 위문 공연단의 공연을 보면서 한 병사가 저 기막히게 잘 하는 여자가 누구냐고 질문하자, 바로 오천평이라고 대답하면서 ‘자네는 TV도 안 보나’라고 반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천평은 1970년대 TV에서 ‘기막히게 잘하는’, 누구나 알 수밖에 없는 유명 연예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영화에서 오천평은 그 존재감이 TV에서만큼은 크지 않았다. 오천평이 출연했던 첫 영화는 이규웅 감독의 코미디 <치마바람>(1967)이었는데, 여기서 오천평은 주인공 김지미와 계원들이 놀러간 바닷가에서 마주친 여성으로, 서영춘과 함께 ‘역할전도’ 코미디를 선보였다. “밴드! Love Portion Number 9!”이라고 소리치며 무리 안으로 뛰어든 오천평은 서영춘과 말싸움을 하다가 서영춘을 어깨에 둘러메고 바닷물에 내팽개친다. 바닷물에서 정신을 잃은 서영춘을 다시 어깨에 메고 모래사장으로 돌아온 오천평은 서영춘의 배를 누르고, 서영춘의 배에서는 물과 함께 물고기들이 튀어나온다. 만화적 상상력을 보여주며 폭소를 유발하는 이 장면은 백금녀-서영춘 콤비 코미디를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오천평은 이 영화에서 백금녀의 역할을 이어 받아 서영춘과 대구를 이루는 코미디를 보여주었다. (그림2) <치마바람>(이규웅, 1967)의 한장면. 가운데 하얀 가운 차림의 김지미, 그 오른편 뒤쪽으로 오천평과 서영춘, 그 앞쪽으로 김지미에게 오른팔을 두른 사람이 도금봉이다. 오천평의 영화 속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스틸 사진은 임권택 감독의 1969년 코미디영화 <신세 좀 지자구요>에서인데, 이 스틸사진에 찍힌 오천평의 모습은 실제 영화 속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림3) <신세 좀 지자구요>(임권택, 1969)의 오천평 정면 스틸 사진. 그러나 이 영화에서 오천평 등장하는 장면을 실제 존재하지 않으며, 아마도 편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오천평이 등장했던 영화로는 <공주님의 짝사랑>(최은희, 1967), <가요반세기>(김광수, 1968), <남정임 여군에 가다>(김화랑, 1968), <타잔 한국에 오다>(김화랑, 1971), <삼일천하>(신상옥, 1973), <청춘25시>(이기영, 1973), <나의 인생고백 제2탄>(심우섭, 1975), <관광대행진>(이명식) 등이 있는데, <공주님의 짝사랑>에서는 철없는 공주 남정임 때문에 골탕을 먹는 정상궁 역을, <남정임 여군에 가다>에서는 남정임과 함께 입대하여 훈련을 받는 계모임의 일원 역을, <타잔 한국에 오다>에서는 배삼룡을 사랑하는 뚱순이 역을 맡아 웃음을 유발했다. 오천평의 출연작 중 가장 이질적인 작품은 <삼일천하>였는데, 이 영화에서 오천평은 궁녀 혁명가 ‘고대수’로 열연하여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등장한 고대수(오천평)는 괴력을 가진 여성으로 등장하여, 굶주린 평민 남성들을 상대로 거친 액션신을 벌이고 이어 등장한 변수(박노식)에 의해 각성한 뒤 개화당을 도와 혁명을 이끄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이어지는 고문과 탈주, 그 뒤 거리에서 백성들의 돌에 맞아 비장한 최후를 맞게 되는 고대수 역은 오천평의 뛰어난 연기력과 색다른 연기의 지평을 보여줄 수 있는 주요작이다. (그림4) <삼일천하>(신상옥, 1973)의 한장면. 굶주린 평민 남성들이 궁중에서 나온 음식들을 버리려는 궁녀 고대수(오천평)에게 덤벼들자 이들을 제압하는 장면. 이후 고대수는 각성하고 혁명에 동참한다. 오천평의 뒤를 잇는 ‘뚱순이’ 캐릭터로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를 써 나갔던 배우 중 한 사람은 최용순(1946-2000)이었다. 최용순 역시 영화보다 TV에서 더 존재감을 드러냈던 배우였다. 1969년 KBS 탤런트 공채로 시작하여 각종 TV 코미디에서 인기를 모은 최용순은, 이후 브라운관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에 진출한 경우였다. 영화에 많이 출연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최용순은 탄탄한 연기력과 귀염성 있는 외모로, 결혼과 연애 서사 코미디에서 주, 조연을 맡곤 했다. (그림5) <나의 인생고백 제2탄>(심우섭, 1975)의 한 장면. 결혼 후 본가에 온 최용순과 그의 부모. 오천평은 이 영화에서 최용순은 엄마로 등장했다. 사진 중간이 오천평, 오른쪽 최용순 현재 한국영상자료원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최용순은 <산에 가야 범을 잡지>(이형표, 1969)를 시작으로, <팔도 며느리>(심우섭,1970), <나의 인생고백 제2탄>(심우섭, 1975), <너는 여자 나는 남자>(김응천, 1979), <서울은 여자를 좋아해>(남기남, 1987)까지 총 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림6) <팔도며느리>(심우섭, 1970)의 한 장면. 최용순은 김지미, 사미자, 여운계 등과 함께 김희갑의 팔도며느리 중 한 사람으로 등장했다. 맨 왼쪽부터 최용순, 사미자, 김지미 (그림7) <잘했군 좋았군>(고승호) 포스터. 가운데 부분 왼쪽 원안에 파란색 치마 한복을 입은 여성이 최용순이다. 그 중 <나의 인생고백 제2탄>은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배삼룡을 주인공으로, 최용순이 상대역을 맡았다. 배삼룡과 최용순을 투 톱으로 내세운 이 영화는 35세의 노총각 배삼룡이 최용순과 결혼한 뒤 벌어지는 여러 가지 소동을 그렸다. 순진한 노총각 배삼룡은 최용순을 만나기 전에 이미 그의 부모와 섣부른 약속을 한 터라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된다. 신혼 첫 날 밤부터 왕성한 식욕과 성욕을 과다 노출하는 최용순의 캐릭터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여성이며, 또한 이를 통해 자신의 코미디를 연출한다. 예컨대, 끝없이 음식을 먹는 장면이나 배삼룡에게 억지로 섹스를 강요하는 장면은 웃음을 유발한다. 최용순이 출산으로 인해 집을 비웠던 사이에 배삼룡은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오해를 받게 되는데, 모든 문제가 갑자기 해결되는 순간에 아기를 안고 등장한 최용순은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면서 앞으로는 ‘좋은 아내’가 되겠다는 다짐을 늘어놓는다. (그림8) <나의 인생고백 2탄>(심우섭, 1975)의 한 장면. 신혼여행 첫 날 밤의 배삼룡과 최용순. <나의 인생고백>에 등장하는 최용순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지만, 과다한 식욕과 성욕의 소유자로 단순화되고 대상화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 영화 자체가 남성주인공의 시점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또한, 신체적 우위를 내세운 최용순의 욕망은 항상 즉각적으로 충족되는 듯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일방향적이고 일시적인 충족에 불과하다. 배삼룡이 끊임없이 새로운 여성을 욕망하고 최용순을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배삼룡이 진심으로 가정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는 것과 동시에 최용순은 ‘좋은 아내’가 되기를 약속한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여전히 그들 사이의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아이까지 업은 배삼룡과 군것질을 하면서 지나가는 최용순의 대조적인 모습이 엔딩씬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림9) <나의 인생고백 2탄>(심우섭, 1975)의 한 장면. 신혼 첫날밤부터 식욕과 성욕을 과다노출하는 최용순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장면 중 하나이다. 1970년대 초에 만들어진 <나의 인생 고백 2탄>은 최용순이라는 인기 TV 코미디언과 당대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배삼룡을 스크린으로 불러 왔지만, 최용순의 연기력이나 매력을 전혀 끌어내지 못했다. 그런가하면, 배삼룡은 항상적 우울증을 가진 사람처럼 무기력하고 고독한 캐릭터로 그려졌다. 다소 엉뚱하고 바보스러운 ‘비실이’ 캐릭터를 전혀 반영하지 못했고 그에 따라 이 영화의 매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영화는 건장한 신체를 가진 여성 코미디언을 활용하는 가장 손쉽운 방식을 택하여, 스테레오 타입을 강화시켰다. 한국 영화 산업 자체의 위기를 겪게 되는 1970년대를 거치며 코미디영화들은 1960년대 코미디들이 주었던 동일시의 위안이나 전복의 쾌감을 줄 수 없는, 기묘한 웃음의 코드들만 남긴 채 사라져갔다. 그밖에 김희자(1934~ )는 1950년대 후반 HLKZ-TV 코미디 프로그램의 유일한 여성 고정출연자였는데, 서영춘과 함께 무대에 올라 빠르게 주고받는 코미디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입담을 자랑했다. 그 역시 1950년대 악극단에서 데뷔하였고 TV코미디로 큰 인기를 누렸다. 김희자는 세 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기록이 있다. <선화공주>(최성관, 1957), <우리강산 차차차>(박구, 1971), <관광대행진>(이명식, 제작년도 미상)인데, 세 편 모두에서 주요 배역을 담당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 중 김희갑과 함께 출연했던 <선화공주>, <관광대행진>의 경우, 현재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해서는 김희자가 어떤 역을 맡았는지 확인이 불가능하며, <우리강산 차차차>의 경우에는 단역으로 출연한 김희자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림10) <우리강산 차차차>(박구, 1971) 맨 오른쪽 김희갑 옆에서 춤추는 이가 김희자, 김희자 옆에는 백금녀가 보인다 . 이순주(1942~ )는 쇼 무대와 라디오의 전문 여성 MC로 활약했으며 주로 TV 코미디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순주는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 <생활의 명랑화>, <팔도노랭이>, <당나귀 무법자>, <타잔 한국에 오다> 등 5편의 영화에 출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중 <팔도노랭이>는 <팔도강산>의 아류작 중 하나로, 김희갑과 박옥초가 부부로 등장하여 결혼한 일곱 딸들을 방문하는 이야기가 전반적인 구성이다. 이순주는 코미디 콤비인 송해와 함께 넷째 딸 부부로 등장하여 비교적 비중 있는 역할을 소화했다. <당나귀 무법자>에서는 서영춘과 사랑을 나누는 술집 여성인 단역을 맡았다. (그림11) <팔도노랭이> 포스터. 가운데 김희갑을 중심으로 왼편 위에서부터 세 번째, 구봉서, 서영춘 다음이 이순주, 그 밑이 안인숙. 오른쪽 맨 밑이 백금녀이다. 김희자와 이순주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상대역 여성들이 박옥초와 고춘자에서 김희자와 이순주로, 거의 20살 차이가 나는 젊은 세대로 바뀌는 동안에도 여전히 남성 코미디언들은 취직과 결혼이 지상과제인 ‘청춘’ 주인공의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 초에 주로 활동했던 여성 코미디언들은 주로 단역을 맡으며 영화에서 큰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1970년대 초를 마지막으로, 한국영화사에서 코미디영화 제작은 더 이상 호황이 아니었다. 매우 드물게, 이전 작품들의 리메이크가 만들어졌고 심우섭, 이형표 등의 감독들만이 1년에 한 작품 정도로 코미디영화 제작의 맥을 이어가는 형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여성 코미디 배우들의 입지는 또 다시 변화한다. 배연정과 권귀옥이 등장하면서 여성 코미디언에 대한 코미디 의존도가 높아졌다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다시 한 번 여성 코미디언들의 존재를 영화 속에 각인시켰다고 볼 수 있다. 배연정(1952- )은 1969년 가수로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다가 1971년 MBC 공채 코미디언 1기로 정식 데뷔하였다. 당시 MBC의 간판 코미디 프로그램이었던 <웃으면 복이와요>에 김희자의 대타로 출연하였다가 스타덤에 오르기 시작했으며, 1973년 TBC로 옮기면서 배일집과 함께 ‘고전유머극장’을 통해 스타가 되었다. 이들은 ‘코미디계의 신성일, 엄앵란’으로 불리며 1970-80년대 TV 코미디의 전성기를 누렸다. 4) 배연정 역시 TV에서의 인기를 업고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1970년대 말부터 약 10년간 총 7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는 주지하다시피 한국영화의 침체기였고, 특히 코미디영화의 암흑기였다. 이 시기 배연정이 출연했던 영화들은 1960년대 코미디영화의 대표적인 감독이었던 심우섭, 이형표가 자신들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들에서 배연정은 코미디영화의 주연배우 혹은 비중 있는 조연배우로 등장했다. 출연작은 <마음 약해서>(심우섭, 1979), <난 모르겠네>(심우섭, 1980), <형님먼저 아우먼저>(심우섭, 1980), <청춘을 뜨겁게>(심우섭, 1981), <얼굴이 아니고 마음입니다>(이형표, 1983), <여자가 더 좋아>(심우섭, 1983), <전설철인 키매랑>(은희복, 1989) 등의 7편이다. 이 중에서 배연정을 주연으로 한 <난 모르겠네>는 태권도 유단자인 말괄량이 배연정의 연애와 결혼을 다룬 로맨틱 코미디였다. 미모와 연기력을 겸비했던 TV 스타 배연정은 여성 코미디언으로는 처음으로 ‘청춘 코미디’, 즉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을 맡을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배연정의 매력을 바탕으로 한 일인 쇼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동양재벌 사장 딸이지만 태권도와 유도 유단자인 동자(배연정)는 아버지가 정해준 신랑감 후보들을 모두 물리치고 쥐포장수로 변장하고 있었던 병태(장고웅)와 사랑하게 된다. 설정부터 결말까지,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한국 버전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림12) <난 모르겠네>(심우섭, 1980) 포스터. 위편 왼쪽에서 태권도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바지 입은 여성이 배연정. 이후의 출연작에서 배연정은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하여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다음 작품이었던 <마음 약해서> 역시 서영춘, 구봉서, 배삼룡, 이기동, 임희춘 등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TV 코미디의 남성 스타들과 배연정, 권귀옥 등의 여성 코미디 스타들을 총 출동시켜 얽히고 설킨 연애담을 보여주는 청춘 코미디였다. 배연정은 까다로운 ‘올드 미스’로, 권귀옥은 결혼상담소 소장 서영춘의 딸이자 ‘조사부장’으로 등장했다. (그림13) <마음약해서>(심우섭, 1973) 포스터 가운데 안경 쓴 구봉서의 얼굴 왼쪽이 임희춘이고, 그 옆에 임희춘과 결혼하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배연정이다. 구봉서와 임희춘 바로 밑이 이기동과 권귀옥이다. 마지막으로, <여자가 더 좋아>는 김기풍 감독의 동명의 영화(1965년)의 리메이크로, 원작은 여장남자 코미디의 열풍을 불러왔던 서영춘의 출세작이었다. 이 전설적인 영화의 리메이크작이었던 1983년 <여자가 더 좋아>에서 배연정은 여장남자 식모인 장고웅으로 인해 곤란을 겪는 주인집 며느리 역할을 맡았다. (그림 14) 1965년의 전설적인 코미디영화 <여자가 더 좋아>의 리메이크 작인 1983년 <여자가 더 좋아>에서 배연정은 여장남자 식모 장고웅의 잔소리, 장고웅에게 반한 남편 주병진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 며느리 역을 맡았다. 권귀옥(1950~ )은 MBC 탤런트 공채2기로 1970년 데뷔한 이후 코미디언으로 전향하여, 1973년부터 <웃으면 복이 와요>에 출연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이기동과 함께 ‘땅딸이와 늘씬 미녀’로 활약했던 권귀옥 역시 TV 코미디로 전국적 인지도를 올리고 난 뒤 영화로 진출한 경우였다. 그가 출연했던 영화는 총 4편으로 <나에게 조건은 없다>(강대선, 1971), <시집갈래요>(이상언, 1974), <마음약해서>(심우섭, 1979), <아리송해>(심우섭, 1979) 등이었다. 이 중 코미디언으로 전향하기 전에 출연했던 <나에게 조건은 없다> 한 편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편은 코미디영화들인데, 권귀옥은 <아리송해>의 주연을 맡아 이기동과의 콤비 연기를 영화로 옮겨 보여주었다. (그림15) <아리송해>(심우섭, 1979) 포스터. 포스터 가운데 권귀옥. 권귀옥의 트레이드 마크인 표정 연기와 ‘늘씬 미녀’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몸매를 부각시킨 포스터이다. 이 영화는 <초우>(정진우, 1964)의 설정을 빌어와 가정부 정옥(권귀옥)과 운전사 두만(이기동)의 가짜 연애, 그리고 가수로 성공하는 정옥의 성장담을 담았는데 무엇보다 권귀옥의 매력에 기댄 영화였다. 주인집 가족들과 대등한 관계를 맺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당당한 ‘식모’ 역할은 당시 영화 속에서 하층계급 여성을 그리는 방식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으며, 권귀옥 코미디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는 장치로 활용되었다. 이 영화를 끝으로, 권귀옥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1980년 결혼과 함께 배우 생활을 그만두었다. 지금까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활발하게 활약했던 여성 코미디언들의 영화에서의 활약상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고춘자, 박옥초와 같은 조연급 출연자들부터 백금녀, 오천평, 최용순과 같이 건장한 신체를 가진 코미디언들이 맡았던 역할들, 이순주, 배연정, 권귀옥 등 미모를 앞세운 코미디언들이 보여줄 수 있었던 코미디의 스타일은 매우 다른 것이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개성을 코미디의 원천으로 삼아 확실한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했고, 그 결과 다양한 스펙트럼의 코미디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여성들의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한국영화 코미디사에서 이들이 구축했던 캐릭터와 웃음의 방식들은 시대적 한계와 함께 다시 한 번 더 논의되고, 좀 더 기억되어야 한다. 1) Kott hoff, Helga, “Gender and Humor: The State of the Art”, Journal of Pragmatics 38(1), Elsevier B.V, 2006, p.12. 2) Inger-Lise Kalviknes Bore, “(Un)funny Women: TV Comedy Audiences and the Gendering of Humour”, European Journal of Cultural Studies, no.13(2), Sage Publications, 2010. 3) 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로이트 전집 6.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임인주 옮김, 열린책들, 2007(4쇄), 129쪽. 4) “[문화] 오랜만입니다. 배연정씨가 걸어온 길”, 『문화일보』, 2012. 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