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착
- 감독
- 강선영
- 제작년도
- 2008
- 출연
- 이새봄, 최현
" 발성영화 ", 《조선일보》, 1930. 1. 28., 5면. (조선극장 <네날개> 상영 홍보)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세계영화사에서 발성영화(talkie)의 탄생은 중요한 변곡점으로 손꼽힌다. ‘무성의 양식’으로 출발했던 영화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1927년에야 비로소 사운드를 내장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다만 발성영화의 발생론적 조건인 사운드 기술은 그 자체로 혁신적인 ‘신기술’이라 보기엔 어려움이 있다. 이미 영화가 탄생하기 이전에 축음기가 개발되었고, 녹음과 재생 기술 또한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외려 문제는 넓은 공간을 충만하게 채울 만한 사운드 증폭 기술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 문제도 진공관이 개발된 1910년대부터는 해결될 수 있었지만, 소리 없이도 산업적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던 영화계가 굳이 새로운 기술을 접맥해 가며 모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고 했던가? 연이은 흥행 실패로 고초를 겪고 있던 워너브라더스는 이 새로운 양식에 회사의 명운을 걸어 보기로 결정한다. 축음기 회사인 바이타그라프를 인수한 것은 그 첫걸음이었다. 이후 워너브라더스는 영화에 소리를 입히기 위해 부단히 애썼고, 몇 번의 실패를 맛본 끝에 오늘날 최초의 발성영화로 손꼽히는 < 재즈 싱어 >(앨런 크로슬랜드, 1927)를 내놓았다. 결과적으로 워너브라더스의 승부수는 맞아떨어졌고, 할리우드는 본격적으로 발성영화 생산에 돌입하며 영화의 기술적 표준을 바꿔 나가기 시작했다. <재즈 싱어> 중 한 장면과 촬영 현장 (사진: “The Jazz Singer( 1 , 2 )”, IMDb / © 1927 - Warner Bros) 시각적 양식으로만 인식되어 왔던 영화에 새로운 감각(청각)이 더해진다는 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변화였지만, 발성영화가 영화산업 전반에 미친 영향은 훨씬 지대했다. 무성영화에 비해 배 이상의 제작비가 필요했던 발성영화는 필연적으로 영화산업의 자본집중적 성격을 강화시켰다.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군소 영화사들의 몰락이 가속화되었고, 적극적인 인수 합병을 통해 활로를 모색하려는 영화사들도 생겨났다. 유럽 영화계와 양분해 왔던 전 세계 영화산업의 패권을 할리우드가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 종사자들 역시 변화의 물결에 휩쓸렸다. 미셸 하자나비시우스 감독의 < 아티스트 >(2011)는 그 전환기의 풍경들을 세밀하게 포착해 내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남성 주인공 ‘조지 발렌타인’은 무성영화의 대스타였지만 발성영화의 등장과 함께 몰락하게 되며, 반대로 여성 주인공 ‘패피 밀러’는 새로운 시대의 스타로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조지’가 대사 연기에 극도로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것처럼 적지 않은 무성영화의 스타들이 “말하는 영화(더 정확히 말해 ‘들리는 영화’)”에 연착륙하지 못했다. 한편, 대사의 비중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발성영화기에 접어들면서 시나리오는 문학의 주요 하위 갈래 중 하나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는데, <아티스트>는 시나리오 작가의 위상 변화 또한 ‘깨알같이’ 묘사해 놓았다. 무성영화 촬영 현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시나리오 라이터’의 의자가 발성영화 촬영장에서는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티스트> 중 (사진: “The Artist( 1 , 2 )”, IMDb / © 2011 - The Weinstein Co.) 한편, 발성영화가 불러일으킨 변화의 파고는 대양 너머에 자리한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도 직감할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더군다나 서양발 수입영화가 극장 프로그램에서 차지하던 비중이 압도적이었음을 고려한다면, 발성영화로의 전환 문제는 단순히 먼 나라의 신기한 이야기로 치부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그것은 실질적인 위협을 환기할 만큼 중대한 변수로 인식되었다. 즉각적으로 야기된 문제는 신작영화의 수입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점이었다. 서양발 수입영화의 대부분이 발성영화로 제작되기 시작하자 조선인 극장들의 선택지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필름 대여료가 크게 인상되었던 점은 일차적인 난관이었다. 발성영화가 제작비 폭등을 불러오자 필름 판매비용 인상은 필연적 귀결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필름 대여료야 어찌어찌 마련할 수 있다 해도, 발성영화를 상영하려면 영사기 자체를 교체해야 했다. 비단 영사기뿐만이 아니다. 원활한 발성영화 상영을 위해서는 ‘입력-제어-녹음-재생-증폭’의 전 과정, 즉 ‘시그널 플로우’가 확립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극장은 발성영사기의 교체뿐 아니라 콘솔과 앰프, 라우드스피커에 이르는 사운드 장비 일체를 새로 장만해야 했던 바, 막대한 초기비용을 감수하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결국 1929년을 즈음하여 조선인 극장들은 과거 상영된 무성영화를 염가에 재상영하며 대응했다. 조선극장 의 경우에는 자체 레뷰단을 조직하여 공연 프로그램의 비중을 늘리기도 했다. 그러나 관객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재상영 정책은 ‘저열한 흥행수단’이라는 비난에 직면했고, 레뷰는 반나체로 등장한 여성 무용수의 육체적 스펙타클을 내세워 관객들을 끌어모으기도 했지만 그 인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극장 프로그램에서 ‘신작영화’를 제외한 채 미봉책으로만 버틸 수 있는 데드라인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셈이다. 조선극장 레뷰단(15세 이상의 여자) 모집 공고 (《조극주보》, 1929. 9. 17., 2면) 조선인 극장들이 공격적인 투자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때마침 닥쳐온 경영난 때문이기도 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식민지 조선 극장업은 호황기에 접어든다. 그러나 물 들어올 때 노를 너무 열심히 저어서였을까? 대표적인 조선인 극장으로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단성사 와 조선극장은 서양 대작 영화 유치를 위해 출혈경쟁을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 자금난을 겪게 된다. 이와는 정반대로 질이 낮은 필름을 들여와 ‘저가 정책’을 펼친 우미관은 경쟁에서 한발 물러서 있던 극장이었지만, 나중에는 이익금을 종업원에게 분배할 정도로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1929년 9월에 열린 조선박람회는 위기에 봉착한 단성사와 조선극장에게 한줄기 빛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박람회를 구경하기 위해 지방의 관광객들이 대거 경성에 모여들었고, 극장가도 덩달아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문화적 인프라가 열악했던 지방에서 올라온 관객들은 경성 관객들과 달리 재탕 상영에도 큰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다만 조선박람회로 인한 호황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었기에,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던 조선인 극장들은 즉각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박람회 기간 동안 얼마간의 종잣돈을 모으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낙후된 극장 시설을 전면적으로 개축하기엔 무리인 상황이었다. 서양발 발성영화 신작이 연일 발표되던 시점에서 대작 무성영화를 다시 수입하는 것도 별반 실효성이 없는 방안이었다. 결국 단성사와 조선극장은 발성영화를 수입하기로 결정하게 되었으며,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상영 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에 이른다. 1930년 1월의 일이었다. 사실 식민지 조선에 영화의 신기술을 소개하겠다는 명목으로 진행된 발성영화 시사회의 사례는 1920년대에도 간혹 찾아볼 수 있다. 스크린의 영상에 축음기의 소리를 끼워맞추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발성영화의 상영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사건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30년 1월에 진행된 수입 발성영화 상영은 기사를 통해 예고되고 정규 프로그램 광고를 거쳐 본격적 선전이 진행되었던 만큼 실험적 시사회와는 엄연히 다른 위상을 가진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식민지 조선에 당도한 ‘발성영화’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었을까? ㉮ 말하는 사진! 이것만으로도 어떠한 충동을 느끼었다. 서양에서 떠들고 일본에서 떠든다고 조선에서도 떠들어야 할 이유는 없겠지만 움직이는 사진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우리에게는 한번 보아두어야 할 필요로 첫날 단성사에서 토키를 보았다. 제일 재미있는 것은 서양의 선화(線畵)의 예술적 감흥이다. 이것은 발성을 빼어놓고 그대로 보고라도 누구든지 웃지 않을 수 업다. 그리고 “도란몬드” 대위는 발성영화로 감상하는 것보다 그대로 무성영화의 재미있는 “스토리”를 감상하는 편이 낫겠다. 다만 싸운드로써 발성영화의 원리를 뵈어줄 뿐이다. 순회극단의 맨 끝막에서 비로소 발견하고 광희하였다. 군중의 떠드는 소리, 분노에 타는 “세리프” 요염한 여자의 음성 참으로 신기한 생각을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어서 우리 조선말로 된 “토-키”가 나오기를 바란다. - 어의동 K생, “ 순회극단을 보고 ”, 《동아일보》, 1930. 1. 30.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 한국영상자료원, 2019, 193쪽. ㉯ 발성영화 야구시대를 조선극장에서 보았다. 완연히 실연을 보는 것 같다. 영화의 스토리는 무성영화에서 흔히 보던 것과 방사하지만 다만 신기한 것이 “간쓰메” 통을 떼는 소리까지 완연히 들린다. 영어를 잘 모르는 나로서도 가끔 가다가 한마디 두마디 주워 듣는 것이 “타이틀” 읽은 그것보다는 새로운 흥치를 느끼었다. 영어를 충분히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성음과 표정을 종합하여 귀와 눈을 한꺼번에 활동시키는 것은 연극 볼 때나 다름없다. - 어의동 K생, “야구시대를 보고”, 《동아일보》, 1930. 1. 30.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한국영상자료원, 2019, 193쪽. ㉰ 조선에 발성영화가 수입된 것은 기쁜 일이라 하겠으나 첫 시험으로 지난번에 상영한 발성영화로서는 그렇게 크게 기대한 보람이 있었느냐 하는 데 의문이었다. 우리가 보고자 한 발성영화는 과학적 안목으로 보아서이었고 영화에 나타나는 미국이면 미국인의 생활이라든가를 본다는 것은 둘째 문제이었다. 왜 그러냐 하면 첫째로 그들의 말에 통할 수 없는 우리로서(만약 조선의 발성영화라면 모르되) 이해하기 어려운 데다가 우리들이 배운 영어와 다른 사투리라든가 곁말 같은 것을 알 수 업는고로 다만 사진에서 음향이 나오고 그 음향이 실물체에서 울려오는 그 음향과 근사함에 여기에 호기심을 갖게 됨에 있다. 그런데 이번 조선극장에서 상영 중인 이 『례뷰-시대』라는 것은 미국의 환락경 『브로드웨이』를 배경으로 하고 초기 발성영화에 있어서의 일반 『팬』들이 알기 쉽도록 음악 같은 것을 많이 넣어 외국 발성영화로서도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 외에 그 스토리를 말한다면 우리와 거리가 먼 『브로드웨이』의 방종한 남녀들의 애욕 투쟁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는고로 우리들은 이것을 힘써 알려고 할 필요는 없다. - KO生, “ 인상기 - 레뷰-시대를 보고서 ”, 《조선일보》, 1930. 2. 9.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한국영상자료원, 2019, 268~269쪽. ㉮ 는 단성사에서 상영되었던 발성영화들(<순회극단>, <도라몬드 대위>), ㉯ 는 같은 날 조선극장에서 상영되었던 발성영화 <야구시대>에 대한 감상기이다. 그리고 ㉰ 는 열흘 뒤인 1930년 2월 7일부터 조선극장에서 상영된 <레뷰-시대>에 대한 촌평이다. 무엇보다 관객들이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발성영화의 기술적 신기성 이었다. 즉, 당대의 관객들은 화면 속에서 소리가 들린다는 점 자체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소요하는 군중의 소리, 분노의 감정을 전달하는 육성, 요염한 목소리의 매력은 “신기한 생각”을 느끼게 해 주었으며, 통조림통을 따는 음향효과 또한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발성영화만의 특징이라 여겨졌다. 이처럼 발성영화의 소구력은 무엇보다도 “실물체에서 울려오는 그 음향”이 영화 속에서 근사치로 재현된다는 점 자체에 있었다. 그러나 스토리의 차원에서 본다면 무성영화와의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다는 의견도 제기되었으며, 브로드웨이가 배경인 <레뷰-시대>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방종한 남녀들의 애욕 투쟁”을 다루었을 뿐이라 비판받기도 했다. <레뷰-시대(원제 “브로드웨이 베이비스”)>(1929) 중 (사진: “Broadway Babies( 1 , 2 )”, IMDb) 더 나아가 수입 발성영화가 언어장벽 문제 를 본격화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무성영화의 경우에는 외국어로 작성된 간자막의 분량이 상대적으로 적고, 변사 해설이 동반되었기에 수입영화 감상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외국어 발화의 비중이 크게 늘어난 발성영화는 원활하게 감상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심지어 지식계층에 속한 관객이라 해도 발성영화의 외국어 발화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해도 모국어 화자가 아닌 이상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나 ‘곁말(은어)’도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음성연기로 전달된 감정의 생동감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영어를 충분히 못하는 것”에 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성영화기의 상영관습인 변사 연행은 발성영화에 내장된 사운드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지만, 언어장벽 문제를 해소하려면 불가피하게 공존해야 했다. 결국 변사들은 발성영화의 볼륨을 낮춘 상태에서 해설을 이어나갔는데, 당대의 영화비평가 서광제 는 이러한 사운드의 충돌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콩버무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관객들에게 ‘두통’을 야기할 뿐이라 조소하기도 했다. [1] 그래서일까? ‘조선 최초’를 부르짖던 야심 찬 포부와는 달리 단성사와 조선극장 모두 본격적인 발성영화 전환에 대해서는 굉장히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발성영화 상영은 1930년 1월에 시작되었지만, 결과적으로 1930년에 식민지 조선에서 상영된 발성영화의 수는 손에 꼽힐 정도에 불과했다. 앞서 이야기한 언어장벽 문제도 있었거니와 초창기 발성영화들은 사운드의 녹음과 재생에 있어 “발성이 명조치 못한” 기술적 결함도 안고 있었다. [2] 아마도 극장업자들은 발성영화의 시장가치를 확신하기도 전에 전면적인 프로그램 전환에 나서기엔 무리라고 생각했을 공산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극장업자들은 본격적인 초기비용을 투자하기 전에 먼저 일종의 ‘간보기’ 절차에 돌입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토-키! 토-키! 영화팬들 사이에 한참 떠들던 토-키가 경성에서 그 첫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동시에 단성사, 조선극장 사이에는 피차간 하로라도 몬저 상영을 하야 영화팬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으려고 갖은 고심을 다하여 왔던 것도 사실이다. 동양영화사에서 토-키를 가지러 가던 이튿날 아침 파라마운트 지사에서도 뒤를 이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토-키를 가저오려면 사진뿐만으로는 되지를 않는다. 기계가 두 대나 잇서야 하며 책임 있는 기사가 따로 두 사람이 있어야 한다. 동양영화사와 파라마운트 두 배급소에서는 단성사, 조선극장 두 상설관을 배경하고 어쨌든 가슴을 졸이고 한시라도 먼저 가저오기를 도모하게 된 것이다. 동양영화사에는 이십륙일 아침에 기사 두 명 기계 두 대 사진까지 아울러 단성사에 도착이 되었다. 조선극장에도 반드시 뒤를 이어 토-키 일습이 도착할 것은 명백한 사실, 단지 시간문제에 걸려있을 뿐이다. - 관악산인, “토-키 만담”, 《중외일보》, 1930. 1. 27.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한국영상자료원, 2019, 193쪽. 관악산인( 이서구 )의 글은 1930년 1월에 단성사와 조선극장이 어떻게 발성영화 상영을 준비했는지 추정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실제적인 실무를 담당한 것은 배급업자들이었는데, 단성사는 동양영화사와, 조선극장은 파라마운트 지사와 팀을 이루어 ‘조선 최초’라는 타이틀을 놓고 2 대 2 태그매치를 벌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 건너간 배급업자들이 영화 필름만이 아니라 기계(상영기)와 영사기사까지 함께 묶어 대여해 왔다는 점이다. 이는 1930년 1월의 발성영화 상영이 발성영사기를 구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시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즉, 단성사와 조선극장은 발성영사기 구입을 차후 과제로 미뤄둔 상태에서 몇 차례의 테스트를 통해 시장의 추이를 면밀히 관찰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경성의 주요 조선인 극장(단성사, 조선극장, 우미관)들이 발성영사기를 전격적으로 장비하게 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발성영화 전환에 조금 더 적극적이었던 것은 조선극장이었다. 1931년 7월에 설립된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직영관으로 참여하게 된 조선극장은 보다 안정적인 자본 지원에 힘입어 발성영사기 구매에 나설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듬해인 1932년에는 단성사와 우미관도 발성영사기를 장만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추동한 원동력은 무성영화를 시대착오적인 구시대의 유물로 여기는 인식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는 점에 있었다.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 감독의 영화 < 모로코 >(1930)를 필두로 일본어 자막을 이용한 상영방식이 보편화되면서 보다 안정적인 상영환경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이왕 초기비용을 통 크게 투자한 이상 극장 프로그램에서 발성영화의 지분이 늘어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식민지 조선에 흘러들었던 발성영화는 그렇게 서서히 극장가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 [1] 서광제, “최근의 조선영화계(4)”, 《동아일보》, 1932. 2. 3. [2] 김연수, “1930년 조선연예계(4)”, 《매일신보》, 1931. 1. 8.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1. 영화에 대한 논의는 항상 ‘보는 이’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가진다. 영화적 경험에서 보는 이는 존재하는 이와 동일하다. 그리고 본다는 행위는 앎과 감정, 행위를 매개하며 이를 통해 발생하는 심리적, 감정적 긴장은 영화가 제공하는 쾌락과 미적 경험뿐 아니라 미학적, 정치적 역사기술로서의 영화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된다. 이는 광학-카메라가 내포하는 소위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과 명백한 인과율 그리고 그 세계에서 구성되는 통일적 주체라는 허구가 아니라, 사건(이미지)들의 발생과 연쇄를 즉각적으로 대면하고 반응하는 ‘끊임없는 변화 속의 주체(관람자)’ 경험을 통해 파악된다. 요컨대, 영화가 수행할 수 있는 고유한 미학적 역사기술은 속박되지 않는 이미지, 그리고 안전한 관찰자의 자리를 박탈당하는 ‘보는 이’라는 이미지-시각 동학의 재구성이라는 방법론을 가질 때 비로소 권력의 시선에서 제공되는 연대기와 인과율을 벗어나 대항-역사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치로 게라의 < 뱀의 포옹 >은 영화-역사-정치가 절합(articulation)되는 흥미로운 양상을 보여주는 텍스트다. 영화는 신비한 효능을 가진 전설의 약초 야크루나(yakruna)를 찾는 독일 탐험가 테오와 그의 원주민 안내자인 만두카, 그리고 이들을 야크루나로 안내하게 될 젊은 무속인 카라마카테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카라마카테는 자기 종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폭압의 대상인 서구인 테오를 돕기 거부하고 서구적 관습을 흡수한 종족의 정보제공자(native informer) 만두카를 경멸하지만, 살아남은 종족의 생존을 돕겠다는 테오의 제안에 마지못해 두 사람과 함께 여정을 시작한다. 이어서 영화는 40여 년을 뛰어넘어 노인이 된 카라마카테와 야크루나를 찾으려는 미국인 에반스의 또 다른 만남을 보여주면서, 두 명의 서구인 탐험가가 떠나는 상이한 시간의 여정을 카라마카테의 존재를 통해 느슨하게 병치시킨다. 경이에 가까운 아름다움과 날것의 이미지가 자아내는 공포가 공존하는 아마존의 풍경은 그러나 서서히 원주민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 식민권력의 폭력적 현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화의 여행자들은 천연고무 착취를 위한 원주민 학대나 원주민 아동들을 교화시키는 가톨릭 신부의 포악한 이면 등 서구 식민권력의 경제적, 문화적 폭력을 재현하는 장면들과 조우한다. 이 잔인한 식민지배/피지배의 무대에서 영화의 여행자들은 갈등하고 충돌하고 협상하는 과정을 이어가면서 야크루나라는 목적을 향한 여정을 지속한다. 테오도르 코흐-그룬베르크, 리차드 에반스 슐츠 2. 실제로 19세기 독일인 탐험가 테오도르 코흐-그룬베르크(Theodore Koch-Grunberg)와 20세기 미국인 식물학자 리차드 에반스 슐츠(Richard Evans Schultes)라는 실존인물들의 저서에서 영감을 받은 < 뱀의 포옹 >은 식민문학의 대표적 양식인 여행기(travelogue) 서사와 긴밀한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고 있다. 프론티어리즘에 입각한 서구적 영웅 서사와 기독교적 훈육제도, 공간이동 및 자연착취의 영역을 확대시킨 과학기술과 박물학, 휴머니즘과 이국애증, 제국주의적 욕망과 부르주아적 개인성에 바탕을 둔 여행기 양식은 유럽 식민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노골적인 얼굴이다. 그러나 여행기는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의 정치경제적 권력과 착취에 기반한 지배/피지배라는 적대적 이분법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그보다 여행기 양식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질적인 문화와 언어, 전통과 가치를 끊임없이 접촉하면서 기술자가 경험하는 긴장의 양태들인데, 이는 종종 기존의 제국주의 서사의 관습과 충돌하는 반-정복(anti-conquest) 서사와 연결된다. 그러나 반-정복 서사는 제국주의적 정복 서사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헤게모니를 강력히 지지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자신들의 결백을 지켜내고 싶었던 유럽의 부르주아 주체들이 활용한 재현 전략”(메리 루이즈 플랫)이다. < 뱀의 포옹 >이 서구 여행기 양식과 관련되는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여행기 양식의 반-정복 서사가 유럽 제국주의와 맺고 있는 공모관계의 폭로라는 것이다. 영화는 테오/에반스와 카라마카테, 그리고 원주민들로 형상화되는 식민지배/피지배, 여행자/여행되는 자(travelees)라는 단순한 대립을 넘어 상이한 신념과 언어, 지식과 감정이 만나는 접촉 지대(contact zone)에서 발생하는 훨씬 복잡한 동학을 제시한다. 영화 중반의 고무나무밭 장면은 서구 자본과 (서구화된 콜롬비아인으로 제시되는) 서구 제국의 내적 주체(domestic subject), 그리고 그들에게 착취당하는 원주민의 현실을 보여준다. 아마존 깊숙한 곳에서 고무 채취와 노동 착취가 이루어지고 있음에 분노한 마카테가 채취된 고무액을 땅에 버리고, 이를 알게 된 원주민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를 이끄는 것은 폭압에 시달린 원주민의 팔 잘린 신체가 전달하는 강렬한 폭력의 이미지,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테오의 유럽 휴머니즘의 정서다. 아마도 롤랑 조페의 <미션> 같은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해왔던 유럽 휴머니즘의 감정은 결국 마카테가 원주민을 자비롭게(!) 사살함으로써 설 자리를 잃은 채 훼손된다. 테오의 유럽/휴머니스트/부르주아 여행자의 정체성은 그의 여정 내내 계속하여 의문시된다. 평화로운 원주민 마을의 환대를 받으며 하룻밤을 보낸 테오는 호혜라는 관습과 가치를 평화롭게 습득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가 자고 있는 사이에 한 원주민 아이가 그의 나침반을 가져가자 테오는 사유재산이자 (유럽의) 테크놀로지/지식을 위협/강탈한 원주민에게 적대와 폭력의 민낯을 드러낸다. 상심에 빠진 테오에게 카라마카테는 ‘지식을 독점하려는’ 백인의 태도를 꼬집고 타자(유럽)의 지식을 접촉하려는 자기(원주민)의 욕망을 변호한다. 결국 테오는 결코 ‘결백하지’ 않은 것이다. 도전받는 것은 기독교/가톨릭이라는 서구 종교의 가치도 마찬가지다. 원주민 아이들을 콜롬비아 자본가 세력이나 원시적 폭력에서 보호하고 훈육하는 가톨릭 신부의 종교적 자비는 원주민 언어를 사용한 아동에 대한 가혹한 채찍 형벌이라는 폭력의 얼굴을 숨기고 있다. 한편 에반스의 여정에서 등장하는 사이비 교주의 커뮤니티는 메시아라는 일원신과 교회의 제도가 원주민들에 의해 ‘번역되는’ 또 다른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제시한다. 결국 제국주의적 정복서사나 여행기 양식의 반-정복 서사 모두로부터 거리를 두거나 이를 전유하는 < 뱀의 포옹 >의 궁극적인 전략은 유럽 중심의 다위니즘적 역사관에서 벗어나 로컬의 경험을 역사화할 수 있는 대안적인 ‘자가 기술 민족지(autoethnography)’의 의지를 담고 있다. 영화는 단순히 유럽중심의 시각에 반하는 원시 아마존의 전통을 로컬 역사의 대안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서구적 이성을 대변하는 테오/에반스와 원시 아마존의 철학을 들려주는 카라마카테의 부단한 대화라는 접촉지대,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낯섦과 몰이해 사이의 긴장에 주목한다. 영화는 결국 신비한 약초 야크루나로 향하는 목적론적 세계를 부인하고 파괴한다. 그리고 바로 그 마지막 순간 등장하는 (다소 당혹스러울 수 있는) 우주적 이미지는 근대의 시간을 부정하고 고대의 시원을 복원한다는 신화적 상징이라기보다, 서구 중심적 관점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로컬의 탈 식민적 역사기술을 시각화하는 창조적 카오스의 이미지 같다. 3. 플랫은 여행서사가 유행했던 근대 유럽의 소위 ‘지구적 차원의 의식’이 근거했던 과학 담론, 특히 박물학과 분류학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여행기 양식이 제공하는 가장 커다란 매혹은 낯선 공간과 이질적 문화라는 대상이다. 여행기는 이 낯선 사물들을 박물관마냥 채집한다. 어떤 사물의 이질성과 낯섦을 규정짓는 것은 그것의 낯선 배치, 즉 무질서다. 여행기는 이 사물의 무질서에 대한 보는 이의 매혹과 동시에 이를 다시 질서화하려는 어떤 욕망, 즉 분류학자의 의지를 가진다. 19세기 독일의 탐험가 테오는 전형적인 채집가이자 분류학자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면서도 그가 결코 버리지 않는 것은 나비 채집본과 기록, 그리고 원주민들의 사진이다. 채집가인 테오에게 사진은 기억의 담지물, 탐사의 증거다. 테오가 카라타마테에게 사진을 보여주자 그는 사진은 속이 텅 빈 채 마치 유령처럼 세상을 떠도는 또 다른 나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출라차키)일 뿐이라고 답한다. 카라마카테의 사진을 유럽인들에게 보여줘도 된다는 허락을 받자 테오는 그에게 목걸이로 보답하지만 그는 거부한다. 이 장면은 이미지-기억의 가치에 대한 상이한 개념과 감각이 만나는 접촉지대 그 자체를 보여준다.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에반스가 버리지 못하는 축음기 역시 마찬가지다. 테오/에반스와 카라카마테의 대화들에서 기억저장소인 복제-이미지와 그 채집은 다르게 해석되거나 혹은 부인된다. 무엇보다 테오의 여행기는 영화 안에서 완성되지 못하며 심지어 사실 에반스는 가짜 탐사가/채집가이다. 실패한 여행가/채집가로서의 테오/에반스가 서사적 차원에서 유럽 민족지 담론에서 벗어나는 전략이라면, < 뱀의 포옹 >이 담아내는 경이로운 아마존의 풍경은 ‘이미지-보는 이’라는 영화적 차원에서 타자를 대상화하는 시각적 민족지이길 거부한다. 6년이 넘는 제작기간을 거쳐 영화는 콜롬비아 아마존의 원주민 문화를 꼼꼼하게 담아내는 동시에(실제로 치로 게라는 5개 이상의 원주민 언어를 이용하여 시나리오를 완성했으며 카라마카테를 비롯한 원주민 캐릭터는 실제 원주민을 캐스팅했다) 아마존의 풍경을 경이로운 흑백 파노라마 화면으로 ‘채집한다’. 무한한 지평선을 그리는 강,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만이 존재하는 원시의 고원, 헬리캠으로 촬영된 대지는 근대 인간의 개입이 차단된 자연 그대로의 이미지, 칸트적 숭고의 이미지다. 그러나 테오/에반스는 결코 영화 안에서 이 이미지들을 포획하는 시선의 담지자로 구성되지 않는다. 쇼트-역쇼트의 구성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아마존의 풍경과 원주민의 이미지들은 테오/에반스의 시점쇼트에 대한 수동적 대상으로 제시되지 않으며, 자연과 테오/에반스, 카라마카테, 원주민들은 하나의 공간(프레임) 안에 배치된다. 나아가 이 숭고한 자연-이미지들은 광학적/디지털 복제물로서의 스스로의 본성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테오/에반스에게 포획되기도 분류되기도 거부하는 이 이미지들은 스크린-이미지를 ‘보는 이’인 우리에게도 포획되거나 분류되길 거부한다. 오히려 영화의 응시는 클로즈업으로 화면을 바라보는 표범이나 뱀의 눈처럼 비-인간의 시선을 통해 구성되며 무질서로서의 자연-이미지는 기존의 분류/질서에 따른 풍경화(landscape)이길 거부한다. 이런 방식으로 < 뱀의 포옹 >은 흑백-파노라마라는 광학 이미지에 각인된 지배적 질서와 가치(원시로서의 아마존과 헐벗은 신체, 기억저장장치로서의 카메라/축음기, 채집된 증거로서의 복제 이미지)로부터 보는 이인 우리를 해방시키고 이미지-관람자 사이의 자유로운 접촉을 촉구하면서 서구 민족지 기술을 해체하는 정치적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