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더리 콘서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감독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필자는 공공 복합문화기관에서 일하다 보니, 여러 문화 장르를 편견없이 수용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영화에 대한 선입견이 타 장르에 비해 상당히 강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종종 깨닫게 된다. 이러한 영화적 선입견은 사업계획을 세울 때부터 그 조짐이 보이더니, 규모와 예산을 확보해야 하는 단계에 들어서면 으레 ‘이건 영화진흥위원회에서 할 일이다.’, ‘영상자료원이 하고 있지 않냐?’, ‘여기는 부산이 아니다.’ 등의 정책 논리와 결합된다. 어떻게든 한고비 넘기고 나면, ‘크게 벌이지 말고 재밌는 영화 몇 편 골라서 상영해라’, ‘정치적 내용을 피해라’, ‘관객은 많이 들어올 수 있겠냐’ 등의 직접적인 압력으로 구체화된다. 이쯤 되면 결국 할 수 있는 것이란 타 전시 주제와의 연계 상영이나 계절에 어울리는 영화 상영과 같은 구색 맞추기 이벤트가 가장 안정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미술 영역에서는 크고 작은 지역마다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고, 저마다의 연구, 수집과 교육 행사 그리고 작품지원 프로그램까지 운영되고 있지만, 영화는 유독 공공의 영역보다는 멀티플렉스 형태의 민간 소비 영역에 과도하게 치우쳐져 있다. 국공립문화기관에서조차도 영화에 대한 공적 운영과 지원은 특정 기관의 역할로만 축소하면서 산업과 문화예술을 분리하는 이원적 태도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곳에서 몇 년 동안 적응하며 일해오고 있는 필자가 제도적 문제를 지적할 입장은 아니지만, 다른 장르와 비교할 때 예술장르로서의 영화가 지닌 불균형과 그에 대한 선입견은 영화 관련 사업들을 추진할 때마다 늘 장벽이자 한계로 작용한다. 필자는 이러한 과정들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두 가지 임무를 부여했다. 첫 번째는 한국의 예술운동 흐름에서 함께 논의될 수 있는 영화들을 수집하고 기록화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과거의 기록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작은 전시나 상영의 형태로라도 기념하는 것이다. 본 고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고전’이라는 의미가 ‘오래되었음에도 시대를 관통하는 미학적 성취’를 내포하는 것이라면, 결국 필자에게 있어서 ‘고전’은 현재 나의 관심이 작동되게끔 하는 일종의 근원이자, 과거의 기록들을 갱신하고 확장해나감으로써 정전이 아닌, 언제나 재구축이 가능한 살아있는 계보들로 존재한다. 기록 이전의 기록 필자가 지금 직장에서 처음 맡은 일은 아시아 문화예술 자료들을 연구하고 수집하는 작업이었다. 당시의 우리 팀은 아시아 문화에서 가장 큰 변곡점이 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예술 흐름을 주제별로 나누고 각 주제들 간의 관계 속에서 시각화할 수 있는 자원들을 모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필자는 그 안에서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를 맡았고, 현재 미술 안에서 ‘무빙이미지’로 묶이는 두 영역이 아시아 각 지역에서 어떻게 출발하고 조우하게 되었는지를 주요 작가들의 작품들과 자료들을 찾아 조사했다. 특히 실험영화 아카이빙 프로젝트는 전통적인 예술 안에서 영화의 유산을 찾기 위해 전략적으로 선택한 작업이었다, 상업영화 제작방식과는 다른 개인작업 또는 문화운동의 일환 또는 콜렉티브 형태를 취하고 있는 실험영화는 하나의 자료를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그 자료에서 파생되는 정보들은 매우 다양했다. 실험영화 아카이빙 프로젝트는 크게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로 나누어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한국 실험영화 자료들을 모으는 일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어렵고 더딘 작업이었다. 현재는 독립영화의 범주 안에서 실험영화, 실험다큐멘터리까지 다양한 비평작업들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1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영화 담론의 대부분은 상업영화 중심이었기 때문에 실험영화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는 단서들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는 당위성을 부여했고, 수집 이후 보존과 전시로 이어지는 다른 아카이빙 프로젝트와 달리 배급 시스템 보급까지 계획하면서 실험영화 초창기인 70년대 전후와 그 이후의 작품들로 외연을 확장하고자 했다. 또한 그럼으로써 관련 작업을 하고자 하는 창작자와 이용자를 지속적으로 연결하는 공공 상영과 배급 모델을 구상했었다. 각 나라마다 고전영화 베스트 안에는 그 나라의 아방가르드(혹은 언더그라운드) 전통을 계승한 작품들이 섞여 있다.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통해 더욱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었던 일본의 경우, 유럽의 아방가르드 영화부터 미국의 실험영화까지 그 맥을 같이 하며 그 안에서 1인 영화제작 시스템인 자주(自主)영화, 퍼포먼스, 음악 등과 결합한 인터미디어(Inter-media), 자국의 전통적인 언더그라운드, 비디오아트와 결합한 매체실험 등 다양한 분파들을 통해 하나의 일본 실험영화 지형도를 만들고 있었다. 어떠한 실험이든지 간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어렵다. 실험은 기존 영화의 미학적 탈구로부터 시작한다. 영화가 만들어지게 된 전후의 맥락,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적 맥락에서 비틀림이 시작된다. 예술에서의 실험은 이러한 맥락적 탐구가 필요하며, 그 안에 실험의 미학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미학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어 왔는지를 파악해가면서 실험영화의 계보를 추론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당시의 비틀린 영화, 비틀린 경향의 발견을 가져다준 영화, 즉 상업적 고전영화가 아닌, 마치 플럭서스처럼 커다란 한국실험예술운동의 맥락에서 출연한 영화적 실험은 어떤 것이었을까. 필자는 우선 한국에서 ‘실험영화’라는 용어가 등장한 시기를 기점으로 영화의 미학적 연구를 시도했던 동인회의 멤버와 자료들를 모으는 데서 출발했다. 구체적으로, 1960년대 ‘시네포엠’과 실험미술을 지칭하며 다양한 매체실험을 시도한 ‘제4집단’, 1970년대 ‘영상연구회’와 ‘카이두 클럽’, 독일과 프랑스문화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서영화연구회’와 ‘씨네클럽’, 그리고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의 ‘실험영화연구소(전신 ’뉴이미지그룹‘)’를 중심으로 활동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동인회에서 제작했던 작품들의 수집이 가장 중요했는데, 이는 대부분 개인소장이었고 필자의 소속기관은 개관 전이었기 때문에 감독들의 신뢰가 전적으로 필요했다. 운이 좋게도 필자는 카이두클럽의 한옥희 감독이 영화제 집행위원이었을 당시 프로그래머로 일한 경험이 있었고, 임창재 감독의 연출부로 잠시나마 있었던 인연으로 한국 실험영화 흐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두 감독의 작품들을 시작으로 순조롭게 수집 과정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이전에도 실험영화에 관심이 많았고, 관련된 박사논문을 쓰기도 했지만, 실제 실험영화의 고전과도 같은 작품들의 원본 필름을 직접 내 손으로 가지고 오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임창재 감독에게는 실험영화연구소에서 활동 당시 제작한 < 오그 >(1994), < 오버 미 >(1996)부터 < 눈물 >(1998), < 아쿠아 레퀴엠 >(1999)의 16mm 필름 원본과 콘티, 당시의 활동자료 그리고 이후의 디지털 작품들을 받았다. 특히 필자가 대학생 때 가장 좋아했던 책 중 하나였던 <뉴미디어 영상미학>의 저자이자 실험영화연구소 대표였던 권병순(필명 권중운)의 사진 몇 장이 섞여 있던 활동자료를 보면서 한국영화사 기록에 여전히 담기지 못한 역사들이 너무 많고, 그 안에서 실험영화 기술의 공백이 너무 크다는 것을 절감했다. 박사논문을 쓰는 동안 공동지도교수였던 최민 교수님이 “권병순이 지금 살아있다면 네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줬을거다”고 아쉬워했던 기억과 함께 아카이빙 작업에서 사진 몇 장, 메모 한 줄이 담긴 기록이 또 다른 기록으로 이어지는 즐거움이 공존했다. 임창재 감독에게 건네받은 자료들이 아카이빙 과정의 동기부여가 되었다면 한옥희 감독의 자료들은 아카이빙 이후의 동력과도 같았다. 한옥희 감독의 필름들을 받기 전까지 ‘카이두 클럽’의 작품을 본 것은, 한옥희 감독이 보여준 < 구멍 >(1973)의 디지털 파일과 초기 독립영화들을 담은 DVD ‘매혹의 기억, 독립영화 Vol.1 70-80년대’에 수록된 < 색동 >(1976) 두 편이었다. 감독님께 <구멍>을 포함한 < 중복 >(1974), < 2분 40초 >(1975), < 무제 77-A >(1977)의 16mm 필름 원본을 받았고 이듬해 디지털화 작업을 진행했다. 현재 필자에게 한국 고전영화 안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무제 77-A>라고 말할 것이다. 지가 베르토프의 < 카메라를 든 사나이 >처럼 16mm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세상을 향해 장전할 태세를 갖춘 한 여성은 인파가 모여있는 시내 한복판에 자신을 기이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을 포착한다. 그리고 암실로 들어가 그 필름들을 몸에 휘감으며 행복해하는 듯 하지만 마지막엔 갈기갈기 오려버린다. 엔딩크래딧에 한옥희 감독이 직접 등장하며 가위를 들고 카메라를 향해 “컷!”을 외치는 짧고도 강렬한 순간은 최고의 마지막 장면이다. 왜 이 필름이 여태까지 감독의 방 안에 있었을까. 이 귀한 필름들을 통해 전해오는 울림은 이것을 또 어떻게 공유해야 할지가 무거운 과제로 동시에 다가왔다. 13개 주제의 아시아 예술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통해 동시대 예술담론을 생산해내는 플랫폼이 되고자 했던 우리팀의 포부는 안타깝게도 기관의 개관과 함께 수장이 바뀌면서 중단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는 필름앤비디오 아카이브로 묶여 간헐적으로나마 현재까지 수집이 이어지고 있다. 한옥희(카이두 클럽)의 <무제 77-A> 스틸이미지 기록 이후의 기록 필자가 아카이빙 프로젝트에 잠시 휴식기를 갖는 동안, 영화 프로그래밍 업무를 주로 맡게 되었다. 관객이 찾지 않는 프로그램만 기획한다는 잦은 지적으로 소심해졌을 당시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마이너한 것과 전투적인 것은 다르다”는 말을 필자에게 건네주었다. 그의 말은 필자가 하고 싶지만 망설였던 몇 가지 기획을 실행할 동력을 실어주었다. 과거의 작품들이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기술되면 ‘고전’이라 불리게 된다. 아주 멀지 않은 과거더라도 가치 있는 작품은 모던 클래식, 즉 ‘현대 고전’이 되기도 한다. 2019년 한국영화100주년에 앞서 여기저기서 이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들을 준비하고 있었고 필자도 조그맣게나마 이에 동참하고 싶었다.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 한국영화는 세기의 걸작을 배출하고, 국내영화의 높은 관객점유율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필자는 한국영화사 안에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검열 내지는 삭제당해야만 했던 작품들을 나열해보고 싶었고, 어찌보면 이 작품들이야말로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고전이라고 생각했다. 필자는 한국영화사에 도전적 작품으로 살아남은 혹은 사라진 영화들을 소환하여 10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 나쁜영화 100년>을 기획해보고자 했다. 문화적 관습과 제도에 타협한 영화들을 그 시대의 ‘착한’ 영화들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불러모으고자 하는 영화들은 그야말로 ‘나쁜’ 영화들이다. 모은영, 신은실 평론가가 함께 기획하고 인디포럼과 한국영상자료원 그리고 광주독립영화관과 광주극장이 협력한 이 행사는 나름 성공적으로 진행됐고, 행사에 초대된 감독들도 ‘나쁜’ 영화 감독들로 소개되는 역설적 상황을 기꺼이 만끽했다. 특히 100주년 기념 모든 행사를 고사하면서도 유일하게 이 행사에는 얼굴을 비친 장선우 감독의 깜짝 등장은 영화제의 화룡점정이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나쁜영화 한두 편을 고른다는 것은 너무 힘들었고, 고심 끝에 < 서울예수 >(1986), < 나쁜영화 >(1997), 그리고 < 거짓말 >(2000) 세 편을 선정하였다. 개막작 역시 매우 중요했는데, 우리다운 행사에 포문을 열어줄 수 상징적인 작품이 필요했고, 신은실 평론가는 < 상계동 올림픽 >(1988)을 제안했다. 이는 지금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기록되어 있는 사실들을 재조명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지만 이미 기록된 것들에 빈틈을 메꾸고 정보들을 두텁게 만드는 작업은 필자가 보람을 느끼는 일 중의 하나다. 아카이빙 작업에 전적으로 시간을 들일 수는 없었지만, 상영이나 전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취득하는 정보와 자료들이 있다. 노동자뉴스제작단(노뉴단)의 30주년을 기념한 <내가 뉴스다!> 행사를 기획하면서 전시를 위해 필요했던 그동안의 노뉴단의 영상들과 비디오 표지들, 그리고 얄라셩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유운성 평론가와 기획한 <여럿 그리고 하나-얄라셩에서 서울영화집단까지>를 준비하면서 만나볼 수 있었던 김홍준, 박광수, 문원립 감독의 구술자료부터 당시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활동자료들은 한국영화사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안적 영화문화의 중요한 기록들이다. 비록 더디긴 하지만 이 자료들은 현재 정리작업 중이며, 완성될 즈음에는 출판물을 비롯하여 풍성한 기념행사와 함께 한국 독립영화 연구에 지속적인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좌> 노동자뉴스제작단 30주년 기념전시 포스터 이미지 , <우> 얄라셩 40주년 기념 온라인 전시 메인페이지 이미지 수집된 작품과 자료들을 정리하는 후속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의미있는 소식들이 조금씩 들려오고 있다. 한옥희 감독의 필름들을 디지털화한 후 해외영화제와 미술관 등에 조금씩 소개하면서 국내외 평론가, 연구자, 큐레이터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2018년 오버하우젠국제단편영화제 ‘아카이브’ 섹션에 한옥희 감독의 작품이 초청되었고, 당시에 아시아 실험영화의 고전들을 소개하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필자는 한국 작품으로 김구림의 <24분의 1초의 의미>와 한옥희의 <구멍>을 대표작으로 선정하여 상영했다. 이미 미술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김구림 작가의 작품도 주목을 받았지만, 해외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한옥희와 카이두 클럽의 이름은 작품 공개와 함께 관심이 집중됐다. 이후 같은 해 토론토국제영화제 ‘파장’ 섹션에 또 다른 작품 <2분 40초>가 초청되었고. 캐나다 영화잡지 ‘시네마스코프’에는 특집기사가 실렸다. 이후 싱가포르 내셔널 갤러리, 바르샤바현대미술관, 독일 HKW 등의 주요한 미술관과 영화제를 넘나들며 한국영화 회고전, 세계여성예술가 특별전 등에 대표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다. 해외의 연구자들이 논문을 쓰기 위해 자료들의 요청이 늘어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약 5년 사이에 일어난 이와 같은 변화는 카이두 클럽의 활동과 한옥희 감독의 작품이 가지는 미학적 가치는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봉준호, 박찬욱이 이룬 성과의 동력에 대한 호기심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국의 영화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계보와 동력을 찾고 있다. 개인들마다 ‘고전’의 기준은 다 다르겠지만 결국 필자에게 있어 고전이란 ‘고전적’ 관습을 탈피하고자 했던 선구적 작업이다. 수집된 자료들은 정리를 마치고 나면 완성된 기록으로 남는 것이 아닌 수시로 살을 붙여가면서 어느 순간 자료들끼리 자연스러운 지형도가 그려지는 상상을 해본다. 이러한 작업은 이미 미술사 안에서는 끊임없이 이루어지면서 다양한 자료수집과 비평, 전시들을 통해 정전화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비대중적인 것을 대중화하고, 비제도적인 것들을 제도화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예술의 스펙트럼을 넓혀주고 있다. 영화도 포스트시네마의 시대로 전환해가면서 혼종 장르로 변모해가고 있다. 어느 때보다 미술과의 접점이 가까운 이때, 좀 더 다양한 실험적, 운동적 영화의 역사들이 경계를 넘어 상호 접합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필자 역시 한국 실험영화와 실험미술 운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또 다른 새로운 자료들을 찾아가고자 한다.
쿠팡플레이가 야심차게 제작한 < 안나 >(이주영, 2022)는 공개되자마자 호평을 받았다. 빠른 호흡의 서사 전개, 단독 주연으로 조용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배수지의 강렬한 연기, 계급성을 드러내는 미술과 의상은 구독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갑작스럽게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 상실한 사람들의 시점을 밀도 있게 그려낸 데뷔작 < 싱글라이더 >(2017)의 이주영 감독을 연출로 선택한 것이 적중한 듯 했다. 그러나 공개된 지 얼마 안 돼 감독을 비롯한 주요 창작자들이 <안나> 6부작(러닝타임 304분)의 크레디트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빼달라는 이례적인 요구를 했다. 감독은 쿠팡플레이가 최종 편집권을 약탈해 갔다고 주장했다. 쿠팡플레이는 감독의 8부작 판본(러닝타임 429분)에 불만이 있었고 100분에 가까운 분량을 감독의 동의 없이 편집해 공개했다. 이주영 감독은 <씨네21>(배동미, 2022.8.11)에서 “(쿠팡 플레이는) 뭐든 돈으로 사면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인터뷰했다. 2021년 서비스를 시작한 쿠팡플레이는 국내 OTT 중에서도 후발주자이다. 모회사인 쿠팡과 쿠팡플레이의 관계는 아마존과 아마존 프라임이 갖는 사업전략과 유사하다. 영화 스튜디오나 비디오 유통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다른 플랫폼과 차이가 있다. 쿠팡은 아마존처럼 온갖 소비재를 판매하는 인터넷 유통 플랫폼이고, 콘텐츠 구독권과 쇼핑 회원멤버십을 결합한 상품을 제공하고 있다. 오리지널 콘텐츠가 충분치 않고 주로 스포츠 중계와 예능 콘텐츠에 집중하던 쿠팡플레이는 <안나> 같은 서사와 영상미학 모두에 있어 완성도 있는 화제작을 제공해 기존 OTT의 영상문법에 익숙한 구독자를 확보하겠다는 전략을 세운 것 같다. 그러나 쿠팡플레이는 자신들이 투자하고 배급하기 때문에 창작의 최종 권한을 살 수 있다고 믿었고, 이는 돈과 사회적 지위가 서로를 판단하는 유일한 근거가 된 동시대 한국 사회를 비판한 <안나>의 메시지에 완전히 반하는 일이었다. 이 사건은 영상창작물을 포함해 성격이 다른 모든 것들이 하나의 플랫폼에서 ‘상품’으로서 경계 없이 유통되고 판매되는 시대에 창작권을 질문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영상연출의 역할을 고민하게 한다. 결국 협상이 이뤄지고 <안나> 감독판이 함께 공개되었다. 그리고 구독자들은 <안나>의 두 가지 판본, 쿠팡플레이의 6부작과 감독의 8부작을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안나>는 정밀아 소설가의 <친밀한 이방인>(2017)을 각색한 작품이기에 비교할 대상, 즉 콘텐츠가 늘어나는 현상이 발생한다. 언론은 추가된 2부작이 만든 차이를 논평하기 시작했다. 일부 언론은 두 버전이 “대동소이”하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한경> 김지원, 2022.8.14). 서사의 줄기는 크게 다르지 않고 어차피 이유미를 연기한 배수지의 스타성에 기댄 시리즈이기 때문에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다는 논리였다. 쿠팡 플레이의 6부작이 빠른 전개로 몰입을 높여준 반면, 감독의 8부작은 장황한 인물 배경 및 심리 묘사로 늘어진다는 논평도 있었다. 짧은 시간 내에 서로 다른 두 판본이 공개되면서 벌어진 논란들은 OTT 플랫폼에서의 관람 경험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고 그럼에도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를 준다. 플랫폼에서 유통되는 시리즈는 한 번에 몰아보기를 유도하거나 구독유지를 독려하기 위해 첫 화에서 자극적이고 속도감 있고 선명하게 캐릭터와 서사를 설명하는 것을 선호한다. 다시 말하면, 복잡하고 모호한 심리 묘사나 정보성 서사와 상관없이 뉘앙스를 만들어 주는 장면들은 특히 시리즈 초반에서는 자제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안나> 감독판과 쿠팡플레이 판본의 차이도 비슷한 곳에서 발생한다. 유미의 선택과 욕망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좀 더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장면들, 그리고 출신대학, 사회적 지위, 경제적 자산 등에 따라 나눠진 계층사회와 허위의식에 대한 비판적 묘사들이 많이 삭제되었다. 초반 에피소드에 배치되어 있던 유미의 열망과 파국을 암시하는 ‘라 에스메랄다’의 발레 무대, 고등학생 시절 어린 유미의 감정을 이용하고 배신한 남교사의 비겁한 행태,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시작했던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과정, 자신의 거짓말로 모든 것을 잃고 열심히 살려고 하는 와중에 일어나는 폭력(고시원 총무의 성추행)과 차별(현주 가족의 무시)의 장면 등이 삭제되었다. 유미의 ‘허영’은 어떤가? 분명 유미는 자기 욕망을 드러내고 충족하고자 하는 의지에 있어 남다르다. 피아노, 발레, 그림 등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유미는 부모의 경제력을 볼 때 지나친 욕심으로 보인다. 하지만 왜 어떤 아이의 꿈은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성이 되는 반면, 다른 아이의 꿈은 자기 분수를 모르는 허영이 되는가. 욕망과 허영 사이의 선은 그렇게 분명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특히 허영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최대 악행으로 그려진 역사를 고려해볼 때 더욱 그 선은 분명치 않다. 감독판과 달리 쿠팡플레이 6부작에서는 이 모호한 경계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 남교사와의 연애도 마찬가지다. 쿠팡플레이 6부작만 보면 유미는 교사와 연애한다는 것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허영심에 가득 찬 아이로만 묘사된다. 그러나 감독판에서는 유미의 감정이 어설프긴 하지만 진심이었을 수 있고 오히려 그 진심을 남교사가 이용한 것이었음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남교사는 유미와의 관계에 대해 거짓말을 하며 자신에게 유리하게 서사를 구성한다. 상호적이라고 믿었던 그녀의 어설픈 사랑의 감정은 여자아이의 간교한 유혹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유미는 과잉처벌로 학교에서 쫓겨난다. 첫 시작에서 유미는 타인의 거짓말로 뿌리 뽑히고 낙인찍힌다. 삭제된 장면 중 갤러리에서 일하던 유미가 인격적 모멸을 느끼고 갤러리 창밖에 내리는 눈을 공허하게 바라보는 장면은 감독판과 쿠팡플레이 판본의 차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서사적 정보와는 상관없다. 계급적 취향을 전시하는 하얗고 깔끔한 갤러리 실내,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에도 휴가를 받지 못하는 유미의 현실, 갤러리 오너인 현주(정은채) 가족이 남긴 와인을 마시며 즐거워하는 동료 직원들에게 느끼는 혐오감, 큰 유리창 밖으로 아름답게 떨어지는 눈은 아이러니를 만든다. 이 장면은 대사 한 줄 없이 현주의 여권과 증빙서류를 훔쳐 도망치려는 유미의 결심을 충분히 이해하게 만든다. 부당함과 기만에도 묵묵히 일해 온 유미는 자신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게으르고 부도덕한 인간’으로 취급하는 현주 가족의 공격에 자기 정체성과 존재가 텅 비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유미는 더 이상 자신을 알 수 없게 되며 자기 정체성을 계속 유지할 힘과 의지가 사라진다. 이 장면은 시청각적인 연출을 통해 관람자들이 유미의 복잡한 심정과 존재의 상태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결정적 장면이다. 또한 영상연출을 하는 감독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증명한 장면이기도 하다. 쿠팡플레이 판본에서 정작 감독과 원작이 의도한 질문은 사라진다. 사실 유미뿐 아니라 대다수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금수저로 태어난 현주, 정치인 남편, 선배 교수와 학장들은 거짓말을 하거나 타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인생이다. 거짓말을 한다 해도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체계 내에서 그것을 진실처럼 믿게 만들 수 있다. 그들은 자기의 속물적이고 악랄한 속성을 뻔뻔하게 드러내도 피해가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눈치를 보지 않는다. 반면 감독판에서 묘사된 유미는 대학 불합격이라는 한번의 ‘실패’를 겪은 후 계속 눈치를 봐야 하는 삶을 산다. 그에게 두 번째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선을 넘을 수 없다. 오히려 안나의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유미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성찰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유미가 안나로 살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사기를 칠 때 정말로 노력하고 좋은 성과를 냈다는 것이다. 유미가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유학을 잘 보내고 대학원에서 좋은 강의를 했다는 것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학위, 명문대, 명품 의상이다. 어쩌면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 사회가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학력과 입고 있는 옷, 머릿결 같은 외양에 집착하는 것일 수도 있다. 원작인 <친밀한 이방인>의 정한아 작가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질서를 연기하는 한, 진짜 삶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짜 삶은 어디 있는가.” 드라마는 원작보다 유미의 회복능력과 주체성을 강조한다. 유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용기가 있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속죄하려 시도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사실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결말에서 유미는 자신의 거짓말로 죽음에 이른 현주의 아이를 거둔다. 추운 캐나다 어딘가에서 유미는 이름 없는 사람으로 그래도 살아남으며 그제야 자신을 되찾는다. 6부작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지우며 창작권을 되찾아 온 이주영 감독과 제잔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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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그저 보는 것만으로 경이로움을 안기는 체험이 있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았을 때 시간이 빨려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아직 사진으로밖에 접하지 못했지만 핀란드의 청록색 오로라나 남태평양 어딘가의 투명한 바다를 접한다면 그때와 같은 황홀경에 빠질 것이란 막연한 기대를 품고 산다. 압도적인 이미지는 때론 그것만으로 세계를 완성한다. 미카엘 두독 데 비트의 < 붉은 거북 >은 아마도 그와 유사한 체험을 지향하는 애니메이션일 것이다. 우리는 대개 영화를 통해 이야기를 즐긴다. 반면 숫자가 많진 않지만 움직임과 이미지라는 본질에 좀 더 몰두하는 작품들도 있다. 시적이고 서정적인 움직임에 집중하는 애니메이터 중 한 사람인 미카엘 두독 데 비트는 이미 여러 차례 대사 없는 단편을 선보이며 평단을 놀라게 한 바 있다. 대표적으로 2000년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아버지와 딸>은 한 편의 영상시라 할 만하다. 이 작품은 충분한 여백과 온화한 조형미, 움직임의 마술을 통해 언어가 미처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을 매우 구체적인 형태로 ‘그려’나간다. 미카엘 감독의 스타일은 단순 명확하다. 목소리와 대사를 지우고 확보된 여백을 관객의 상상력과 공감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미지로 표현한다’는 애니메이션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영상시인 마이클 두독 데 비트의 첫 번째 장편 < 붉은 거북 >은 지브리 스튜디오와의 협업으로 사람들의 기대를 한껏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과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평단의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지만 단편의 성취엔 미치지 못했고 흥행 면에서는 참패했다. 이유야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대사 없이 진행되는 만큼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단편의 뛰어난 영상미학과 시적인 운율도 8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진행되면 상황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홍보에 지브리 스튜디오의 이름을 끌어들인 것도 패착 중 하나인데 명백한 미카엘 두독 데 비트의 연장에 있는 작품임에도 지브리라는 거대한 기대치가 도리어 이질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실제로 타카하타 이사오가 프로듀서를 맡은 걸 제외하면 대부분 프랑스 애니메이터들이 작업을 했으며 수채화 풍이라곤 하지만 CG를 적극 활용한 만큼 지브리의 색감, 질감과는 거리가 있다. < 붉은 거북 >은 놀랄만한 역작이라고 말하기엔 분명 약점이 꽤 많은 작품이다. 미카엘 두독 데 비트의 시적인 감각이 장편의 호흡으로 거듭나는 걸 기대했지만 새로운 영감보다는 늘어지는 쪽에 가깝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을 적극적으로 변명하고 옹호하고 싶다. 단지 미카엘 감독이 추구하는 애니메이션의 방향성, 움직임 조형, 압축과 상징을 통한 표현에 찬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극장을 나선 이후로도 가슴 속에 꽤 오래 남는 어떤 것을 확실하게 전달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 남자가 무인도에 표류하고 번번이 탈출에 실패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섬에 나타난 신비한 여인을 만나 변화를 겪게 되는 이야기 자체는 별다를 것 없다. 아마도 누군가 이 작품의 교훈과 메시지를 묻는다면 거대한 자연 속에서 순환하는 삶의 흐름, 고요함 가운데 빛바래지 않는 삶의 의지 등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에 맞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남자의 모습과 그런 남자를 아랑곳하지 않는 듯 펼쳐져는 섬의 영롱한 풍광은 둘 다 아름답다. 대사 한마디 없이 남자의 행동을 원경으로 잡아낸 화면들은 이 작품의 주인공이 자연과 인간, 양쪽 모두라는 점을 새삼 상기시킨다. 사실 이와 같은 이야기나 주제의식은 이미 익숙하고 식상하다. 중요한 건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표현하는가’인데, 말로 설명되지 않는 순간의 감흥을 그려내는 빼어난 이미지와 음악이야말로 < 붉은 거북 >의 핵심이자 모든 것이다. < 붉은 거북 >은 단 한 장면으로 마음을 뺏기는 순간들로 충만하다. 대나무 숲의 푸른 빛깔, 수면 아래까지 맑게 비치는 드넓은 바닷속 풍경, 해 질 무렵의 구름떼, 적막한 밤하늘 등등 어느 순간 어떤 화면에 마음을 빼앗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건 나의 부족한 어휘력이 안타까울 만큼 마음을 흔드는 순간과 이미지들로 빼곡하다는 것이다. 시간이 멈춘 듯, 아니 멈춘 채 계속 머물고 싶은 풍광들. 때론 아름다운 건 그저 아름다운 거로 충분하다. 물론 장편의 이야기와 호흡을 생각하면 마이클 두독 데 비트의 시도가 실패로 기록될 수도 있다. 하지만 80분간 어떤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 들어간 극장에서 이야기를 넘어선 이미지를 접했을 때 당신은 또 다른 가능성의 목격자가 될 것이다. <붉은 거북>이 아쉬운 실패가 아닌 의미 있는 도전으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