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사랑 유리에
- 감독
- 고은기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강희, 고다미, 김준배, 양영조, 구혜령, 윤은혜, 박나은, 변유정, 김예민, 김다인, 서현식, 서현수, 이관형, 한기은, 황석정, 황석정
한국영화의 '퀴어함'이 장르나 소재, 영화사적 순간 등에 반영되는 양상을 분석합니다. * 해당 칼럼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알바트로스라는 바닷새가 있다. 3미터가 넘는 거대한 날개를 가진 알바트로스는 날 수 있는 조류 중 제일 큰 새로 꼽힌다. 알바트로스는 날개짓을 하기 보단 상승과 하강기류를 활용해 바람을 타며 이동하기 때문에 하루에 천 킬로미터도 거뜬히 난다고 한다. 그러나 유려한 비상과 활강을 가능하게 하는 큰 날개는 땅에서는 균형감을 잃고 걷기 힘들게 한다. 이 때문에 땅 위에서 날개를 꾸깃꾸깃 우겨넣고 뒤뚱뒤뚱 걷거나 엎어지며 슬랩스틱을 보여주는 알바트로스의 모습은 < 딱따구리(The Woody Woodpecker Show) >(1957) 같은 고전 애니메이션에서 희화화되기도 했다. < 번지점프를 하다 >(김대승, 2001)의 주인공들은 알바트로스와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에게 죽음을 불사한 사랑은 가능하지만 땅에 발을 붙이고 함께 살아가는 일상은 심각하게 거추장스럽거나 불가능한 것이 된다. 심지어 그들의 살아있음은 응당 그래야 하는 것처럼 모욕과 혐오로 점철되고 죽음은 필연이 된다. 사랑은 죽음을 통해 증명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이고 오프닝과 엔딩을 통해 수미상관을 이루는, 카메라가 활강하는 씬은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사랑과 불가능한 세속적인 삶을 은유한다. 오프닝 장면은 구불구불한 협곡을 따라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유영하는 카메라의 시점을 보여준다. 특정 인물의 모습이나 목소리가 등장하진 않지만 꽤 긴 시간 동안 지속되고 협곡을 따르는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그것이 단순히 멋진 자연풍경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관찰자적 시점이 아닌 실제로 공중에서 활강하고 있는 누군가의 신체적 움직임이자 주관적 시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가(그들이) 누구인지의 궁금증은 엔딩에 가서야 해소된다. 영화는 촬영기법을 통해 주인공들의 운명을 오프닝에 예정하면서도 엔딩에서야 명확한 답을 주며 관객을 몰입시키는 완성도 높은 장르영화를 구현한다. <번지 점프를 하다>(이하 <번지>)는 2001년 개봉한 영화로, 당시 한국영화는 < 접속 >(장윤현, 1997), < 미술관 옆 동물원 >(이정향, 1998), < 정사 >(이재용, 1998) 등 격정적 감정에 호소하는 ‘신파’를 덜어내고 세련된 영상미와 독특한 관계성을 가진 로맨스 영화들이 부상하던 때였다. <번지> 역시 그러한 영화 중 하나로 평가 받았다. <번지>는 앞에서 기술한 오프닝과 엔딩의 유려한 헬기 씬,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적재적소의 음악사용, 해변의 저녁노을을 이용한 그림자 연출 뿐 아니라 운명적인 필멸의 사랑을 설득해 내기 위해 환생이라는 소재를 사용하고 두 파트로 서사를 나눠 미스터리적 구조를 취하며 관객들이 마지막까지 호기심을 잃지 않도록 했다. 영화는 1983년의 1부와 2000년의 2부로 나눠진다. 82학번 국문과인 인우( 이병헌 )는 같은 학번 조소학과인 태희( 이은주 )를 ‘우연히’ 마주치고 첫 눈에 반한다. 비오는 날, 우산이 없는 태희가 인우의 우산 아래로 뛰어들어 버스 정류장까지 바라다 달라고 하고 인우는 태희를 사랑하게 된다. 이 장면은 이후 다른 정보들이 추가되며 재해석된다. 관객들은 태희와 같은 과 친구의 대화에서 비오는 날 태희가 먼저 인우에게 호감을 갖고 우산이 없는 척하며 다가갔다는 진실을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영화는 한 사건을 두고도 여러 각본을 상상해볼 수 있도록 한다. 1부가 인우의 입영일에 발생한 교통사고로 인해 태희가 죽으면서 급작스럽게 끝나고, 2부는 17년이 지난 2000년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국어교사가 된 인우는 고2 담임을 맡고 있다. 그는 자신의 학생 중 하나인 현빈( 여현수 )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18세 남자 아이임에도 현빈은 태희를 연상시킨다. 무언가를 들 때 새끼손가락을 펼치는 버릇, “젓가락은 시옷 받침인데 왜 숟가락은 디귿 받침이냐”는 질문, 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을 좋아하는 것, 심지어 태희가 인우에게 선물로 줬던 라이터를 갖고 있는 것까지 태희와 같다. 영화는 1부의 태희와 2부의 현빈을 비교해볼 수 있는 작은 실마리들을 흩뿌려 놓으며 관객들이 인우와 마찬가지로 그들 사이의 연관성을 찾도록 유도한다. 인우의 현빈을 향한 감정은 모두가 알아차릴 정도로 커져가고 결국 인우는 동성애자라 비난받으며 학교에서 쫓겨난다. 이후 전생이라 할 수 있는 태희의 기억을 떠올린 현빈이 인우를 찾고 둘은 1983년 약속했던 번지점프를 하러 뉴질랜드로 떠난다. 그리고 줄 없이 뛰어내린다. 인우와 태희, 현빈과 인우 로맨스 장르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들 간의 사랑을 방해하는 대상이다. 사적 사랑을 억압하고 방해하는 것들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사랑은 더 강해지고 진정성을 얻으며 영원한 운명이 된다. 그렇기에 방해하는 대상은 대부분 개인의 힘으로 바꾸거나 해결할 수 없는, 매우 견고한 것이 된다. 1부가 그러한 방해물을 죽음으로 두었다면, 2부는 동성애와 학생-교사 간 로맨스를 배치한다. 죽음은 유한한 인간인 이상 극복할 수 없는 것이기에 로맨스 영화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방해 대상이다. 매우 규범적인, 반대할 여지가 없는 대학생 간의 이성애 연애가 방해를 받을 정도가 되려면 죽음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한편 2부의 동성애와 학생-교사 간 로맨스는 사회적 변화에 따른 선택으로 보인다. 1990년대 중반부터 성소수자들이 텔레비전을 비롯한 대중매체에 가시화되었을 뿐 아니라 성소수자 운동은 시민권 운동의 하나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배우 하리수 가 2001년 도도 화장품 CF 모델로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트랜스젠더임을 밝혔고, 배우 홍석천 은 2000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 했다. 성소수자의 가시화는 대중적 인지를 가져오고 그에 따른 혐오와 차별도 두드러졌다. 특히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김태용, 민규동, 1999), 다큐멘터리 < Out: 이반검열 두 번째 이야기 >(이영, 2007) 같은 영화들은 학교에서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차별을 그려내며 당대의 변화를 포착했다. <번지>는 이러한 변화들 속에서 2부에서 동성애를 사랑의 방해물로 그린다. 학생과 교사, 미성년과 성년이라는 강력한 방해대상이 있지만 이보다 더 크게 부각되는 금기는 단연 동성애다. 로맨스에선 개인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대상 그 자체만큼이나 개인들이 그 억압적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도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번지>의 주인공들은 동성애자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사회가 아닌, 동성애 자체를 부정적 방해물이자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취급한다. 인우와 현빈 모두 자신이 실제로는 동성애자가 아님을 적극적으로 증명하려 애쓴다. 영화는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를 지나칠 정도로 많이 반복한다. 인우는 정신병원에서 성적 정체성과 관련된 검사를 받고 자신이 이성애자라는 의사의 (의문스러운) 진단을 받을 뿐 아니라 수차례에 걸쳐 자신의 아내와 강제로 성관계를 가지려 한다. 현빈은 인우를 만나기 전만 해도 또래 여학생을 좋아하고 성적 호기심이 왕성한 평범한 이성애자 십대 남자 아이라는 것이 강조된다. 현빈은 호감을 갖고 있던 혜주( 홍수현 )에게 의도적으로 속옷이나 누드화를 선물하며 성희롱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 즉 인우와 현빈 모두 성적 정체성에 있어 ‘문제없는’ 이들이었음이 강조된다. 혜주와 현빈 이 에피소드들은 두 가지 면에서 문제적인데 하나는 이성애자임을 증명하기 위한 행동이 대부분 성적 폭력에 기반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정한 사랑보다 동성애 부인에 무게 중심이 간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계속 강조하는 건 인우가 현빈을 태희로 느끼고 운명적 사랑을 재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우와 태희는 어떤 성별로 태어나도 서로를 알아볼 것이며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대화를 나눈 바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트랜스젠더 서사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따라서 인우와 현빈이 어떤 성적 정체성을 갖든 어떤 성별로 전환하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1부의 태도와 달리 2부는 모든 것을 뛰어 넘는, 즉 사회적 차별과 억압을 넘어선 사랑보다 이성애자라는 정체성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분명 둘은 죽음을 넘어서까지, 즉 태희가 환생해서까지 재회하고 서로의 사랑을 재확인한다. 이것은 완벽한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죽음도 뛰어 넘은 둘은, 동성애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둘은 뉴질랜드로 가서 줄 없이 번지점프를 한다. 그리고 땅에 떨어지는 장면 없이 주변 사람들의 비명 소리 이후 오프닝의 활강 씬이 반복된다. 인우는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을 읊조린다. “인생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대도 그 아래는 끝이 아닐 거라고 당신이 말했었습니다. 다시 만나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내레이션에 따르면 그들은 사회가 용인하고 당사자들이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는 규범적인 이성애 커플로 당첨될 때까지 땅에 발을 딛지 못한 채 계속 죽고 환생해야 한다. 확률 게임처럼 말이다. 엔딩 카메라의 “끝이 없는 활강(반복된 죽음과 환생)”은 착륙지로 내정된 이성애 사랑을 위해 죽어야 하는 동성애자들의 운명이 된다. 이 카메라의 활강은 그 자체로 당대 퀴어 스크린의 일면이 된다.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2024) 등 공동 집필.
멜로영화의 정수는 '키스'가 아니라 '달리기' TV에서는 핑클이 캠핑을 다녔다. 유튜브에서는 1990년대의 <SBS 인기가요>가 24시간 스트리밍됐다. <핑클클럽>과 <SBS 인기가요> 모두 그때의 기억을 소환시켰다. 논산 연무대에서 출발해 부대로 향하는 기차 속에서 처음 들었던 핑클의 ‘영원한 사랑’이 떠올랐고, 과거 <SBS 인기가요>에서 노래를 소개하며 ‘네~!’를 유행어로 만든 장정진 성우도 기억났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고 역시 1990년대를 그린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서도 같은 기대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1994년부터 2005년까지, IMF를 지나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다룬 이 영화가 소환한 건, 잊혀진 기억이 아니라 잠시 잊고 있던 감정이었다. 언뜻 < 유열의 음악앨범 >( 정지우 , 2019)은 < 건축학개론 >( 이용주 , 2011)과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와 다를 게 없어보이는 영화다. 과거의 사랑방식을 재현하면서 그때의 대중음악으로 기억을 증폭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건축학개론>이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응답하라> 시리즈가 HOT와 서태지를 활용했던 것처럼 <유열의 음악앨범>도 그때의 유행가들을 곳곳에 배치한다. 모자이크의 <자유시대>, 핑클의 <영원한 사랑>, 윤상이 부르고 토이 앨범에 수록했던 <우리는 어쩌면 만약에>, 신승훈의 <오늘 같은 창밖이 좋아> 등등. 그때 이 음악을 들었던 관객들이라면, 반가워할 수밖에 없는 노래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열의 음악앨범>에는 그들과 달리 ‘그땐 그랬지’란 그리움의 시선이 없다. 예를 들어 PC통신을 통해 소통하는 장면은 <응답하라 1997>에 나왔고, <건축학개론>에는 하드 용량 1기가의 펜티엄 컴퓨터가 나온다. 이 작품들에서 그때의 컴퓨터와 PC통신은 어디까지나 그때를 재현하는 소품이다. 하지만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주인공 미수가 PC통신을 이용해 현우에게 메일을 쓰는 상황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그리운 사람과 그렇게 소통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그 자체다. 여러 장면에서 소환되는 음악들이 일으키는 효과도 현재형으로 쓰인다. 음악들은 인물들이 직접 좋아하는 노래들로 나타나지 않고, 인물들이 영화 속 현재에서 느끼는 감정을 실어내보내는 역할을 맡는다. 드디어 다시 소통하게 된 미수와 현우의 감정을 ‘영원한 사랑’으로 표현한 연출이 대표적이다. 설렘을 증폭시키기에는 아쉬움이 없었다. <유열의 음악앨범>에는 ‘그땐 그랬지’란 태도도 없지만, ‘그때가 좋았지’란 입장도 없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인생에서 20대를 보낸 그때는 가장 아프고 추웠던 시절이다. 현우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에 죄책감을 갖고 있고,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괴로워 한다. 미수는 자신의 인생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이들이 위치해 있는 공간에도 애써 로맨틱하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낡고 허름한 빵집은 그 자체로 따뜻한 공기를 뿜지만 이후 현우와 미수가 사는 공간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현우는 컨테이너로 가득한 곳에서 무거운 짐들을 옮기며 살고, 미수는 제본공장 바로 옆에 붙은 사무실에서 소음을 견디며 일한다. 녹슨 철제 컨테이너와 기계, 소음으로 가득한 이 풍경들은 이 영화가 그 시대를 현재로 사는 인물들의 이야기라는 점을 강하게 드러낸다.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하지 않는 <유열의 음악앨범>이 그럼에도 1990년대의 시간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가 필요로 한 건, 쉽게 소통할 수 없어서 우연에 기댈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더 절실해질 수 밖에 없는 시대다. 이야기는 두 남녀가 만났다가 멀어지고, 또 우연히 다시 만나고, 또 다시 멀어지는 걸 반복하지만 이런 흐름이 긴장감을 일으키는 이유도 시대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현우가 차를 타고 가버리는 미수를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뛰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감정의 밀도가 높다. 지금 놓치면 또 언제 진심을 전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 <유열의 음악앨범>은 이 달리기가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핸드폰도 없고, 당연히 스마트폰도 없고, 그래서 소셜미디어도 없는 시대의 남녀는 서로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헤매고 뛰어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멜로영화의 정수는, 키스보다 달리기에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달릴 필요가 없는 시대. <유열의 음악앨범>의 감정적 울림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방송 출신 독립PD들의 스크린 진출의 신호탄이었던 < 워낭소리 >는 상당한 잠재력을 가진 산업으로서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고 이에 따라 방송 출신 독립PD들의 작업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기존 한국의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자들과 달리 극장 개봉 등을 통한 대중과의 만남에 적극적이던 이들 독립PD들은 각종 해외 영화제 초청 및 피칭 프로젝트 참여 등을 통해 영화를 홍보하고 해외자본을 끌어오는 노하우를 일찌감치 터득했을 뿐 아니라, 대중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도 뛰어난 감각을 발휘했다. 이것은 확실히 기존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의 방식과 태도와는 상당히 다른 것으로, 초기에는 제작 배경이 다른 이러한 다큐멘터리에 대한 불편한 감정들이 여과 없이 표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규 , 박봉남 , 이승준 감독 등 독립PD들의 작품이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이들의 지속적인 시장 개척 노력은 꾸준히 힘을 축적해 가고 있었고, 이러한 노력은 결국 5백만 관객 동원이라는 한국 다양성 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게 된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로 이어진다. < 춘희막이 >는 < 워낭소리 >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와 유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들은 제작방식의 유사성뿐 아니라 내러티브 측면에서도 소위 ‘시장에서 통하는 이야기’로서의 유사한 패턴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영화들은 현대의 대도시, 자본주의적 관계망에서 벗어난 깊은 산골이나 농촌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수십 년에 걸쳐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노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이 세상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한계 상황은 내러티브를 경제적으로 조직하고 영화의 정서적 밀도를 높이는 데 효과적인 장치로 사용된다. < 워낭소리 >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 < 춘희막이 > ‘노년’ ‘동행’ ‘운명’ ‘죽음까지 초월한 사랑’ 혹은 ‘우정’ 등 지극히 낭만적인 수사로 점철된 영화의 홍보 문구는 이 영화들의 정서적 소구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를테면 < Old Partner >라는 영문 제목이 붙은 < 워낭소리 >는 죽음을 눈앞에 둔 늙은 소와 역시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할아버지의 오랜 동반자적 관계를 묘사하고 있으며,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는 오직 죽음에 의해서만 이별하는 시골 노부부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다룬다. < 춘희막이 >는 한 남자의 본처와 씨받이로 만난 두 여성이 할아버지가 사망한 뒤에도 오랫동안 모녀처럼, 자매처럼 혹은 친구처럼 의지하며 살아가는 기이한 동거 혹은 우정을 다루고 있다.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법한 인물들의 오랜 관계를 보여주는 이 영화들은 이들의 관계를 운명마저 초월한 낭만적 동반자의 관계로 거듭해서 묘사한다. 물론 이러한 요소는 많은 관객들을 사로잡은 정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의 유대감이 깨지고 가족은 해체되었으며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삶은 자본주의적 소외를 벗어난 삶이 존재할 수 있다는 위무감을 줄 뿐 아니라, 나 역시 원한다면 그러한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일종의 소망충족 혹은 대리만족 판타지로 기능한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들이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이다. 이 영화들이 다큐멘터리로 호명되고 소비되는 과정은 이러한 판타지의 작동에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이런 일이 실제로 존재한다니!’라는 감탄과 기쁨. 이런 점에서 ‘다큐멘터리’는 때로 현실을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감추는 데 더 효과적인 장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허구가 아닌 현실’이라는 관객의 믿음에 의지해 허구보다 더 능란하게 판타지를 펼쳐 보일 수도 있는 것이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린 민하는 다큐멘터리가 “광적으로 조작적인 픽션”이라 했을 것이다. 실제로 관객들이 이 영화들에서 보고 싶어 한 것은 다큐적인(현실적인) 삶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반대로 현실에 부재한 것 혹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제작자들은 철저하게 비자본주의적, 전근대적 시공간에 놓인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했다. 그러한 사람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와 판타지의 생산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삶은 현대 자본주의적 삶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 워낭소리 >나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 < 춘희막이 >의 등장인물들처럼 외딴 시골에서 살아가는 노인들에게도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은 이미 깊숙이 침투해 있다. 그것을 이 영화의 제작자들이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혹은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들은 영화가 의도한 효과를 위해 등장인물들의 삶 속에 들어와 있는 자본주의적 흔적을 철저하게 지우고 배제하는 전략을 취한다. 관객이 원한 것은 비릿한 실제 삶의 풍경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는 부재하는 헌신과 낭만, 영원한 사랑 따위의 ‘상실된 가치’이기 때문이다. 판타지의 작동을 위해서 영화에 등장하는 사회적 배우로서의 노인들은 철저하게 현실의 때를 지우고 순수한 존재로 탈색되어야 한다. 이 영화들은 본질적으로 향수영화이다. 이 영화들은 자본주의적 질서와 가치로부터 탈주하고 싶은 관객들의 욕망을 투사하는 공간으로 노인을 호명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노인의 삶을 타자화한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일상의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노인들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구태여 시골 오지에 사는 노인들을 찾아내 카메라 앞에 세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원한 것은 현실이 아닌 판타지, 향수였기 때문에 이 영화들은 철저하게 노인들의 현실적인 삶의 한 측면을 감추고 낭만화, 미화되어야 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노인의 타자화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여기서 노인의 타자화란 노인의 낭만화와 같은 맥락에 있다. 타자화는 등장인물들의 삶에 스며든 자본주의적 관계의 흔적을 지우고 ‘순수한’ 삶의 껍질만 남겨놓은 ‘낭만화’의 최종 결과이다.) 여하튼 ‘노년의 낭만화’라는 영화적 전략은 이 영화들이 죽음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세속적, 자본주의적 관계의 흔적을 제거한 순수화, 낭만화의 최종 국면에 이르러 죽음은 이제 사회학적 사건이 아닌 신화적 세계의 사건으로 수용된다. 세속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한 등장인물들의 지고지순한 사랑과 상호 헌신은 죽음으로써만이 종결될 수 있는 이들의 운명적 동반자 관계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에는 비극적 숭고미가 부과된다. < 춘희막이 >는 < 워낭소리 >와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에서 반복되는 죽음의 미학을 반복하는 듯하면서 다른 길을 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춘희막이>에도 물론 죽음은 등장한다. 친하게 지내던 이웃 노인이 죽었을 때 막이 할머니는 상여 행렬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구슬피 울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영화는 이웃 노인의 죽음을 통해서 이제 90세를 넘긴 막이 할머니를 비롯한 영화의 주인공들에게도 죽음은 곧 닥칠 사건이라는 점을 충분히 암시한다. 그러나 전작들과 달리 <춘희막이>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인공의 죽음을 서사 안으로 끌고 들어오지 않는다. 영화는 죽음이라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끝이 나고 결과적으로 죽음의 비극성보다는 ‘동행’의 느낌이 부각된다. 그것은 매우 신중한 선택이다. 사실 이 영화가 노인들을 소재로 영화를 찍겠다고 결정했을 때 어쩌면 제작자들의 구성안에는 이미 주인공의 죽음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그 자체로 불온하다. 비극적 숭고미는 죽음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소재의 선택은 필히 죽음으로 종결되는 내러티브 결말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좀 더 흡입력 있고 감동적인 서사를 위해 누군가의 죽음을 애타게 기다린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것은 결국 다큐멘터리 윤리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이제 90세가 된 노인을 카메라에 담기로 결심하고 2년간 촬영을 했을 때 <춘희막이> 제작진이 어디까지 이 영화를 기록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본 영화는 그러한 죽음의 포르노그라피의 유혹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엔딩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 ‘기대되는 죽음의 부재’는 결과적으로 이 영화의 흥행에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은 이 영화가 포르노그라피적 천박함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리고 두 주인공의 일상에 우리가 더욱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서사가 멈춘 뒤에도 계속될 주인공들의 삶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해주었다. 처음부터 예정된 길을 뻔뻔스럽게 가는 이야기에는 궁금증이 일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가 그 직전에 멈춰 서기로 결심한 순간 그러한 선택은 결말이 아닌 과정 자체에 집중하게 만든다. 나는 그러한 선택의 이유가 무엇이었든 앞으로도 한 방향을 바라보는 춘희, 막이 할머니의 얼굴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