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
- 감독
- 홍기선
임원식 감독의 대표작은 일제감정기에 순교한 주기철 목사에 관한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일 것이다. 임원식 감독이 연출, 제작한 작품 중 두 편이 상영중지를 당했는데 그 중 한 편이 이 작품이다. 이 영화는 명보극장 개봉 당일 중앙정보부의 지시로 간판이 내려졌는데 당시 옥중에 있던 사회운동가 문익환 목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그는 이에 항의해 중앙정보부 남산 대공분실에 갇히기도 했다. (사진1) 임원식 감독이 대표작으로 뽑은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포스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개봉 전 문공부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제작사인 합동영화사는 포상으로 외화수입쿼터를 받았다. 임원식 감독은 그 전해에 새마을정신을 구현한 영화 <어머니>(1976)를 연출해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다. 황해도 월남민 출신인 그는 남한에 대한 첫 인상으로 ‘육탄 10용사’의 용맹함을 꼽을 정도로 애국심 투철한 인물이었음에도 당시 정부의 강박증적인 검열 관행은 피할 수 없었다. 해방정국과 월남, 한국전쟁을 거치며 성장했고 한국영화의 황금기에 감독으로 데뷔해, 70,80년대 검열로 위기를 겪고 파산해서 재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은 줄곧 아이러니하고 우연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사건들은 때로는 예기치 않은 실패로, 때로는 뜻밖의 행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임원식 감독은 1932년 생으로 황해도 평산군 세곡면 누천리에서 태어났다. 구한말 의병 출신인 부친 슬하의 3남 2녀 중 막내로 자랐고, 곡창지대의 부농이었던 집안 덕에 일제 강점기는 큰 고통 없이 보낸다. 하지만 해방 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그의 가족은 월남을 결심한다. 먼저 월남한 서북청년단 특공대장인 큰 형님의 도움으로 1946년 12월 24일 38선을 넘어 서울 회현동 적산가옥에 자리 잡는다. 서울에 정착하기 위해 그는 얼마간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의약품을 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거리에서 장사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도왔고 경제적 안정을 찾을 무렵 서울 성도중학교에 입학한다. (사진2) 1948년 경 서울 성도중학교(현재 용문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임원식 감독 (사진3) 임원식 감독은 서울 성도중학교 시절 학도호국단 간부로 지냈다. 학도호국단 제복을 입고 있고 찍은 사진 중 오른쪽이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4) 학도호국단 제복을 입고 야외훈련 중인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전쟁 초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 잔류하게 된다. 징집연령이었던 그는 집에서 숨어 지내다 배고픔 때문에 결국 인민의용군에 입대한다. 하지만 전선으로 배치되기 직전 탈출해 누나와 함께 전주로 피난한다. 9.28 수복 직후 피난지 전주에서 임호 라는 예명으로 학도의용군에 지원한다. (사진5) 1950년 학도의용군 서북지구대가 전주에 주둔하던 당시 단체사진이다. 아래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6) 1950년 학도의용군 특공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찍은 것으로 오른쪽이 당시 특공위원회 특공대장으로 있던 임원식 감독이다. 그리고 학도의용군과 함께 대구로 이동한 후 전선에 배치되기를 기다리다, 대구에서 홀로 국민방위군에 입대한다. (사진7, 8) 1950년 19살의 앳된 나이에 국민방위군 즉 자신보다 나이 많은 민간인으로 구성된 대원 2천명을 인솔해 도보로 경남 사천에서 한산섬으로 이동시키는 임무를 맡았을 때이다. 완장을 차고 있는 이가 임원식 감독이다. 국민방위군에서 그는 대원 2천명을 경남 사천에서 한산도로 도보로 이동시키는 임무를 맡았고 다시 대구에서 벨기에 부대의 보급부대로 종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240명의 부대원과 240개의 지게를 기차에 싣고 대구를 출발, 고랑포에 도착해 벨기에 부대에 합류한다. (사진9) 1951년 임원식 감독이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 18중대 CTC부대 중대장으로써 함께 종군했던 29영국 여단 벨기에 부대의 군복으로 환복해 입은 모습이다. 이제 그는 국민방위군 18중대 CTC부대 중대장으로 벨기에 부대와 함께 전방에서 종군한다. 그는 고지에서 전투 중인 벨기에군에게 총탄을 조달하기 위해 지게에 총탄을 싣고 고지를 오르내리는 민간인 보급부대를 이끌었다. (사진10) 1951년 한국전쟁기 벨기에 부대 군복에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10대 후반의 앳된 얼굴이다. (사진11) 벨기에 부대와 배구를 하던 네트 너머로 천막으로 된 막사가 보인다. 오른쪽이 임원식 감독이고 왼쪽은 함께 종군한 국민방위군 18중대 취사병이다. 국민방위군은 벨기에군이 제공하는 부식과 벨기에 군인들이 주는 팁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전쟁은 길어지고 전투도 생활이 되어가자 국민방위군은 주둔지 주변의 주저 않은 집터를 뒤져 주인 잃은 쓸 만한 물건들을 내다 팔고 때로는 피난민들이 버리고 간 농작물을 거두어 팔아가며 생존을 이어갔다. 위험을 무릅쓰고 군인으로 위장한 뒤 외인부대가 있는 전방까지 들어온 양공주들 또한 그가 목격한 전쟁의 참혹한 일상이다. 전방에서 목숨을 걸고 외인부대와 함께 종군하는 국민방위군 부대원들은 적절한 대우와 보수가 주어지지 않자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원들의 불만에 공감한 중대장 임원식은 대구로 내려와 국민방위군 본부, 육군본부를 다니며 국민방위군의 권리와 보상에 대해 묻고 따졌지만 어느 하나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다. 소득 없이 부대로 복귀하기 직전 우연히 대구의 우체국에서 연락이 두절되었던 아버지를 만나 가족의 소재를 알게 된다. 그는 10대 후반의 어린나이에 겪은 전쟁을 통해 성장해갔다.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다양한 생존의 형태들을 목격하며, 요령 있게 살아 나가는 방법을 배우며 성숙해갔다. 그리고 감악산 전투 등 치열한 고지전을 치르고 난 뒤 국민방위군이 해체되는 시기에 가족들이 피난 중이던 제주도로 내려간다. 제주도로 내려온 그는 오현고등학교에 입학해 평범한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간다. (사진12) 1952년 제주도 피난 시기, 오현고등학교 재학 중 교복을 입고 제주도의 돌담위에 올라가 있는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13) 제주도 피난 시기, 오현고등학교 재학 중 부산으로 수학여행 가 찍은 사진으로 평범한 고등학생의 생활을 보여준다. (사진14) 제주도 오현고등학교에서도 임원식 감독은 자연스럽게 학도호국단 간부로 활동했다. 학도호국단 대대장 복장을 한 임원식 감독으로 배경으로 보이는 초가지붕들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때 그는 제주도 육군훈련소 군예대로 내려와 있던 문화예술인들이 주체가 되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벌인 연극경연대회에 참여하며 연극에 눈을 뜨게 된다. (사진15, 16) 한국전쟁기 제주도에 주둔했던 군예대가 주최한 학생연극경연대회에서 남자 학교에 배당되었던 <붉은 기 땅에 떨어지다>라는 연극의 한 장면이다. 임원식 감독은 제주도의 오현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상경해 고등학교 시절의 연극경험을 살려 서라벌예술대학 2학년으로 편입한다. (사진17) 1954년 남산 후암동 교사 시절 서라벌예술대학 본관 앞에서 찍은 연극영화과 학생들의 단체사진이다. 두 번째 줄에 서 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임원식 감독이고, 앉아있는 인물 중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연출가 김규대, 두 번째 줄에 서 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세 번째가 무용가 은방초, 앉아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첫 번째가 촬영감독 전조명이다. (사진18) 8.15 해방 기념 시가행진에 참여한 서라벌예술대학 사진으로 임원식 감독은 이때도 서라벌예대 학도호국단 대대장이었다. 서라벌예술대학 시절에는 대학연극경연대회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연출가 김규대 선생을 필두로 학생들과 함께 실험극단 창조극회, 원방각, 청협을 만들어 활동했다. (사진19, 20)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재학 시절 대학연극경연대회 참여 작 유치진의 <통곡>에 출연한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사진21) 1960년 극단 원방각의 연극 입센의 <유령> 공연모습이다. (사진22) 학생들이 주축이었던 젊은 극단인 창조극회의 멤버들이다. 아랫줄 왼쪽부터 임원식 감독, 황용하 감독, 성우 남성우, 연극배우 조광일, 윗줄 왼쪽부터 촬영감독 전조명, 연극배우 김광도, 연극연출가 장순환, 사진에는 없는 배우 김보애까지 더해져 창조극회가 탄생했다. 그러나 창조극회를 기성극단 청협으로 만들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서라벌예대 재학시절 제주도 출신 여성과 이미 결혼했던 임원식 감독은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HLKY 기독교방송에서 성우와 연출자로 활동했고 이광래 선생의 추천으로 육군본부 정훈감실로 옮겨가 대북방송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 극단과 방송에서는 임무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국방부 정훈국에서 제작한 김수용 감독의 군영화인 <윤 일등병>(1957)에 출연하기도 했다. (사진23) 김수용 감독의 <윤 일등병>(1957)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임원식 감독(미개봉 추정) 영화계로의 진출을 꾀하던 그는 일본 교포 출신인 유진식 감독의 <불멸의 성좌>(1959)와 <대원군과 민비>(1959)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하게 된다. 유진식 감독이 일본으로 돌아가자 그는 김수용 감독의 조감독으로 <연애전선>(1960), <부부독본>(1961)의 작품에 참여했다. 그리고 신필름에서 제작하는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의 조감독으로 참여하게 된다. <돌아온 사나이>에는 4.19 당시의 거리 장면이 등장하는데, 실제 신상옥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서 시위하는 군중을 촬영한 장면을 영화에 사용한 것이다. (사진24)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 촬영 당시, 4.19로 인해 촬영이 중단됐을 때 신필름이 있던 광화문 동아빌딩 옥상에서 스태프들이 시위현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장면이다. 오른쪽부터 편집기사 오성환, 그 옆이 임원식 감독, 왼쪽 첫 번째가 배우 정동일이다. <돌아온 사나이>의 조감독이었던 그가 스웨덴 대사의 집에서 촬영한 가든파티 장면 준비를 탁월하게 해내자 신상옥 감독은 그를 스카웃한다. 신필름에 입사하게 된 그는 신상옥 감독을 도와 신필름이 다작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데 일조한다. 신필름에서 여러 번의 감독 데뷔 기회가 있었으나 1965년 개봉한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나봉한)가 그의 데뷔작이 된다. (사진25)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나봉한, 1960)의 촬영장소였던 경복궁에서 민비를 연기한 최은희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실 임원식 감독의 초기 연출작 중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품은 <숙부인>(1966)이다. (사진26) <숙부인>(임원식, 1966) 포스터 당시 신필름의 제휴극장이었던 명보극장에 걸기로 한 영화에 문제가 생겨, 신필름에서는 열하루 만에 누군가가 작품을 완성해야 했다. 이때 임원식 감독이 <숙부인>을 9일 만에 완성시켜 검열을 받고 무사히 개봉 한 것이다. 신필름은 당시 전속 감독의 월급이 15만원이었는데 <숙부인>을 단시간에 무사히 완성하자 보너스로 15만원을 더 받았다고 한다. (사진27) <숙부인> 촬영현장의 임원식 감독 이후 그는 쇼브라더스와 신필름의 합작영화 <대폭군>(1966)의 연출을 위해 홍콩으로 건너간다. <대폭군>의 로케이션 촬영은 한국에서, 세트촬영은 중국에서 이뤄졌다. (사진28) 1966년 <대폭군>의 촬영을 위해 홍콩에 갔던 시기 쇼브라더스가 초대한 식사 자리이다. 서있는 왼쪽 끝 남자는 쇼브라더스의 엄준 감독이고 그 아래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엄준 감독의 부인이자 주연 배우인 리리화이다. 가운데는 묘장왕 역을 한 김승호가 앉아있고 서 있는 남자들은 오른쪽부터 장군역을 맡은 배우 성소민, 임원식 감독, 최경옥 감독이다. 앉아있는 오른쪽 끝 여자는 배우 고선애이다. 나머지는 쇼브라더스의 여배우들이다. (사진29) <대폭군>(1966)의 홍콩 촬영장의 모습으로 감독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뒤편에 안경을 쓴 이가 홍콩 측 프로듀서 미스터 주이다. 그 옆으로 미첼카메라를 잡고 있는 홍콩촬영감독과 조수가 보인다. 연출자가 신상옥 감독이 아니라는 이유로 홍콩 스태프들의 파업이 있었지만 신상옥 감독이 홍콩에 들려 무마시키고 임원식 감독이 스태프들과의 갈등을 극복하며 <대폭군>을 완성한다. (사진30) <대폭군>(1966)의 홍콩 촬영장에서 홍콩 여배우 리리화와 세트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의 배경에 있는 다리모형은 세트로, 한국의 팔당에서 찍은 강 장면에 이 다리를 합성하기 위해 무척 정교하게 촬영해야만 했다. 촬영현장에서의 갈등도 극복해야 하고, 대규모 촬영에 특수촬영까지 해야 하는 부담 속에서도 비자 갱신을 위해 들른 대만에서 <나는 매국노>(1966)까지 연출한다. 1년여를 홍콩의 쇼브라더스에서 머물며 대규모 합작영화를 연출한 것보다 그에게 의미 있는 것은 쇼브라더스의 라이브러리와 편집실에서 당시 유행하던 일본의 검객 영화들을 보며 연구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에 돌아와 <풍랑객>(1968), <영>(1968), <맹수>(1969) 등을 연출하며 검술액션영화의 유행을 이끌게 된다. 독고성을 주인공으로 한 검객 영화 <영>은 사무라이액션과 <장고>(세르지오 코부치, 1966)같은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를 참고해 만든 작품으로 평단에서는 비현실적이고 만화 같다는 혹평을 받았지만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사진31) <영>(1968)에서 요동 실향민 마을에 등장한 주인공 영(독고성)의 모습이다. (사진32) <영>(1968)에서 마적단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이다. (사진33, 34) <영>(1968)에서 독고성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그는 후속작으로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남정임을 협객으로 출연시킨 <풍랑객>을 직접 제작하려고 했으나 신상옥 감독의 설득으로 제작을 양보하게 된다. (사진35) <풍랑객>(1968)에서 남정임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모습인데 그는 남정임에게 액션시범을 보이다 다리가 부러져 보름간 촬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충무로에서 액션을 바탕으로 한 장르영화의 연출력을 인정받은 임원식 감독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는 신필름 파견 감독으로 대양영화사와 세기상사에서 여러 작품을 연출한다. 제작자 한갑진의 요청으로 대양영화사에서 액션영화 <심야의 대결>(1969)과 액션사극 <의적 홍길동>(1969)을 연출했고 세기상사에서는 오수미 주연의 멜로드라마 <벌거벗은 태양>(1970)을 시작으로 검술액션사극 <민비와 마검>(1970), 공포영화 <춘색한녀>(1971), <설야의 여곡성>(1972), 에로틱사극 <대감신랑>(1971), 액션영화 <분노의 세얼굴>(1972) 등을 연출한다. (사진36) <설야의 여곡성>(1972)의 촬영현장으로 분장을 한 신인 여주인공 윤세희의 모습이 보인다. 윤세희는 당시 유명한 워커힐 카지노 딜러 출신으로 세기상사의 국쾌남 사장이 발굴한 배우이다. 1970년대 중반 임원식 감독은 신필름에서 충무로로 나와 프리랜서 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하는데, 그가 선택한 첫 작품은 삼영필름의 우수영화인 <아리랑>(임원식, 1974)이다. (사진37) <아리랑>(1974)의 촬영현장으로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이가 임원식 감독이다. 제작비 절감을 위해 테크니스코프로 촬영되었다. 그는 나운규 감독의 원작을 동아일보 해직기자인 장윤환과 시나리오 작가 장천호 형제가 야심차게 각색한 각본을 보고 반해 이 작품을 선택했다. 참의원 출신 부호의 아들 영진이 영화 <아리랑>을 보고 감화되어 광화문에서 만세운동을 벌이자 일본 경찰이 그를 박해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원작을 왜곡했고 선동적이라는 이유로 문공부 시나리오 사전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제작기간이 늘어지자 제작사는 원작대로 각본을 수정하도록 권했고 제작비가 들지 않는 방향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길 바랬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임원식 감독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못한데다 테크니스코프로 촬영되어 그에게 아쉬운 작품으로 남게 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삼영필름은 외화수입쿼터를 받게 된다. 임원식 감독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한국교구에서 안수를 받은 장로였다. 어느날 이사례 여사가 찾아와 이기풍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순교보>라는 영화의 연출을 그에게 의뢰한다. 그러나 그는 유신 초기, 사회운동을 활발하게 벌이던 기독교계를 예의주시하는 정부의 분위기를 고려해 교회전도용 영화로 만들자 설득해 이 작품을 16미리로 연출한다. 이 영화는 후에 그가 종교영화로 재기하는데 교두보가 된다. 1975년에는 몇몇 영화계 인사들과 함께 새마을연수원 지도자교육을 받는다. 이신명, 변장호, 최하원, 고영남, 임권택 감독 등이 임원식 감독과 함께 새마을연수원에 입소했다. 연수원에서 교육받는 동안은 술, 담배를 끊어야 했기에 고영남과 임권택 감독은 금단현상 때문에 퇴소한다. 새마을연수원의 교육내용에 감동받은 임원식 감독은 정부에서 영화계에 의뢰한 새마을영화의 연출자로 선택된다. 이때 받은 교육을 바탕으로 상이군인에게 시집온 여성이 아이를 키우며 자주적으로 마을을 재건한다는 내용의 영화 <어머니>(1976)를 감독협회 기획, 합동영화 제작으로 연출하게 된다. (사진38) 새마을영화 <어머니>(1976)의 한 장면이다. 상이군인(이순재)에게 시집 온 여성(윤연경)이 아이를 키우며 자주적으로 마을을 재건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관객수 10만이 넘으면 홈런이라고 여기던 시절 16만이 넘는 관객이 들어 흥행에도 성공하고 15회 대종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포함해 3개 부문의 상을 수상한다. 그 후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를 합동영화사에서 연출한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다룬 종교영화로 이 작품은 문화공보부의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합동영화사는 외화수입쿼터를 받는다. 그러나 개봉 당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상영중지가 내려진다. 상영중지에 항의하는 임원식 감독은 남산 정보부에 갇히는 고초를 겪었지만,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유신시대에 탄압받고 있던 종교지도자를 떠올려 민심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중앙정보부의 설득에 그는 결국 상영중지를 받아들인다. (사진39) 주기철 목사의 순교를 다룬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의 촬영 현장이다. 977년 상영중지를 당했으나 1981년 재개봉되어 그해 한국영화 관객동원 3위를 기록한 작품이다. 1981년 이 작품의 해금이 풀려 재개봉되자 20만 1천명의 관객이 들어 그해 한국영화 관객동원 3위를 차지한다. 그 덕에 1982년에 그는 영화인협회에서 흥행영화 감독들에게 주는 할리우드 연수여행 포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77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개봉이 중지되고 고초를 겪다보니 그의 작품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합동영화사에 들어가 전무이사 겸 기획실장으로 5편의 작품을 기획했고, 2년 뒤에는 화풍흥업의 기획실장으로 4편의 작품을 기획하며 영화계활동을 이어갔다. 1980년에는 김태수 대표의 제안으로 태창흥업의 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외화는 김태수 대표가 맡고 한국영화는 임원식 감독이 책임지는 구조였다. 중견영화사인 태창흥업의 사장으로 처음 제작한 영화는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조용필을 주인공으로 한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0)이다. (사진40) 임원식 감독이 태창흥업 사장으로 취임한 뒤 처음으로 제작한 작품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0)의 포스터이다. 일류 배우의 개런티가 2백만 원이던 시절 그는 조용필에게 5백만 원의 출연료와 추가로 2백만 원의 작곡료를 주고 캐스팅해 화제가 되었다. 그는 과도한 개런티로 영화인들의 빈축을 사 영화인협회에서 제명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작 전에 이미 제작비의 두 배가 넘는 지방 투자자들의 투자금이 몰려들었고 완성 후 흥행에도 성공해 큰 수익을 가져다 준 작품이다. 두 번째 제작 작품은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이다. 첫 제작 작품의 상업적 성공 이후 인권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그는 『기름밥』이라는 논픽션 단편에서 영감을 받아 버스안내양의 실상에 대한 각본을 작가 김승옥에게 맡긴다. 무사히 잘 완성되고 문공부 우수영화로 선정되었으나 이 작품은 개봉 후 위기를 맞게 된다. (사진41) 임원식 감독이 태창흥업에서 두 번째로 제작한 작품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의 한 장면이다. 자동차노조와 한국노총의 상영중지 요청이 제기된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삥땅검사, 알몸수색, 운전기사와 안내양의 부적절한 관계, 노조를 어용화해 묘사한 점 등이 운수노동자들의 인격을 모독했다는 이유였다. 결국 이 작품은 상영 7일 만에 자진해서 간판을 내리게 된다. 영화계에는 이 사건에 대해 노동부와 문공부가 노동자들의 상영중지 여론을 종용했다는 의혹이 떠돌았고 영화인들은 소재선택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4군데 장면을 자르고 1군데 장면을 재촬영해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을 다시 받은 후 1982년 6월에 재개봉을 했지만 흥행은 요원했다. 결국 임원식 감독은 지방 흥행사들의 이어진 손해배상 소송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고 재기불능 상태로 제주도로 낙향하게 된다. 제주도에서 영화계와는 거리를 두고 지내던 중, 그는 교계에서 만든 종교영화제작소로부터 선교영화 연출을 제안 받는다. 그가 연출한 선교영화는 곧 교인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게 되고 그 즈음 비디오문화가 확산되어 그가 제작한 종교영화 비디오테이프 판매 또한 급증했다. 1990년대 중반 케이블텔레비전이 등장하던 때에는, 기독교방송국의 초대 전무이사 겸 방송본부장을 역임하게 된다. 그리고 방송국을 퇴직하고 난 뒤 1999년부터 8년 동안 20대, 21대 영화감독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춘사영화제를 재개하고 스크린쿼터 투쟁을 벌이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고 이러한 활동을 인정받아 2001년에는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사진42) 1999년부터 8년간 한국영화감독협회 제20, 21대 회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의 임원식 감독 모습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제주도에서 지내며 제주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을 지냈고 제주 4.3항쟁에 관한 현기영의 소설을 영화화 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임원식 감독의 구술은 어린시절 고향인 사리원의 풍경, 청소년기 월남민으로 한국사회에 적응해갔던 경험, 한국전쟁기 국민방위군으로 종군한 경험, 학창시절 학도호국단 활동 등 한국현대사의 다양한 면을 살필 수 있는 경험들로 가득하다. 또한 영화계에 입문한 뒤에는 거대 영화 기업 신필름의 체계와 쇠락, 한홍합작영화 경험, 유신시기 영화검열의 폐해 등에 관해 의미 있는 증언이 확인할 수 있다.
정광석은 1962년 데뷔해 2006년까지 170편의 한국영화를 촬영한 베테랑 촬영감독으로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 <땡볕>(하명중, 1984), <깊고 푸른 밤>(배창호, 1985),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 1999) 등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했다. 특히 그는 1980년대 주목받던 신진 감독들의 데뷔작에 단골 촬영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는데, 당시 그는 신인감독이 야기할 수 있는 위험부담을 줄이고자 하는 제작자들의 신뢰를 얻을 만큼 빠르고 노련한 촬영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1950년대 중반 <장화홍련전>(정창화, 1956)의 조명부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장화홍련전>에는 조명감독인 함완섭의 조수로 참여했는데 이때 임권택 감독은 이 작품의 제작부 막내 스태프로 소품을 맡고 있었다. (사진1) 1956년 4월 15일 <장화홍련전>의 촬영장 사진을 보면 가운데 한복을 입고 여장을 한 인물이 임권택 감독이다. 테스트 촬영을 위해 장난처럼 여장을 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오른쪽이 서병수 조명감독, 왼쪽이 정광석 촬영감독이다. 후에 임권택 감독과는 <왕과 상노>(1965)에서 감독과 촬영자로 다시 만났지만 촬영감독으로서의 자의식과 자존심은 임권택 감독에게 뷰파인더를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둘은 작품에 대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중간에 결별한 뒤 단 한 작품도 함께 하지 않았다. 정광석은 일본 유학파 출신 김영순 촬영감독의 권유로 촬영부 조수로 옮겨간다. (사진2) 1959년 <부부>(곽건, 1960)의 촬영 현장이다. 카메라를 잡은 이가 김영순 촬영감독이고 왼쪽에서 장갑을 끼고 렌즈의 포커스링을 만지는 이가 당시 촬영 제1조수 정광석이다. 삼각대 옆에는 여성 스크립터가 앉아서 기록을 위해 초시계를 잡고 있다. 당시 제1조수는 노출과 포커스를 책임졌고 흑백필름용 현상통을 가지고 다니며 촬영현장에서 테스트현상을 해야 했다. 2조수는 트래킹 쇼트 촬영에서 이동차 밀기, 제3조수는 촬영기자재 운반을 맡았다. 그나마 카메라 같은 고가장비는 제2조수가 운반했다고 한다. 이후 <비련의 섬>(정창화, 1958), <햇빛 쏟아지는 벌판>(정창화, 1960) 등의 작품에서 김영순, 이성휘를 비롯한 여러 촬영감독의 조수로 14편의 작품에 참여했다. 그리고 1962년 정광석은 이봉래 감독의 권유로 <새댁>을 통해 촬영감독으로 데뷔한다. <새댁>은 김영수 작가의 KBS 인기 라디오 연속극을 영화화한 것이다. 당시 신문에는 <새댁>의 원작료를 30만원으로 밝히고 있는데, 정광석은 이때 촬영감독을 포함한 촬영부 전원의 인건비로 8만원을, 즉 천자 분량의 필름 세통 값과 비슷한 비용을 받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3년 12월 14일자 기사를 보면 당시 영화제작비 평균 중 총 촬영료는 20~30만원으로 여기에는 촬영기자재비용 12만원이 포함되어 있다 하니 그의 기억과 대체로 일치하는 금액이다. 이 조차도 주로 어음으로 받아 몇 달을 수입없이 기다리거나 급할 때는 많은 수수료를 떼고서라도 현금화시켜야 했기에 당시 많은 스태프들은 늘 빚을 지고 사는 형편이었다. (사진3) <새댁>(이봉래, 1962)은 흑백 시네마스코프 작품으로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아리플렉스 카메라에, 공보부에서 비공식으로 빌린 250미리 줌렌즈를 장착해서 촬영했다. 당시 초점길이가 긴 줌렌즈는 신필름과 정부 홍보영화를 제작했던 공보부 국립영화제작소 밖에 없었기에 충무로 촬영감독들은 공보부에서 몰래 빌려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촬영 데뷔작인 <새댁>은 “물에 올라온 고기처럼 화면마다 생동이 퍼덕거리지만 시종 재미있다.”는 경향신문의 영화평처럼 3대의 대가족이 벌이는 에피소드들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새댁>은 종로의 세운상가 3~5층에 위치했던 아세아극장의 개관작으로 1962년 12월 23일 개봉했다. 1965년에 그는 <성난 독수리>(김기, 1965)를 촬영한다. 이호영 공군 대령의 수기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가 대성공을 거둔 후에 만들어진 공군 전투영화이다. <빨간 마후라>는 비행장면 촬영을 위해 카메라를 전투기 동체에 부착시켜 촬영했으나 제작비와 지원규모가 그에 못 미쳤던 <성난 독수리>는 정광석 촬영감독이 전투기 뒷좌석에 탑승해 비행장면을 모두 촬영했다. (사진4) <성난 독수리>(김기, 1965) 포스터 (사진5) <성난 독수리>(김기, 1965)는 원작자인 이호영 대령의 도움을 받아 대구 비행장에서 촬영되었는데, 실제 한국전쟁 때 사용한 전투기 T33이 이용되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정광석 촬영감독은 전투복에 헬멧을 착용한 뒤 아리플렉스 ⅡC카메라에 필름이 담긴 200자 매거진 세 개를 여분으로 가지고 T33 뒷좌석에 탑승해, 핸드 헬드로만 항공촬영 전 분량을 촬영했다. 이 촬영으로 정광석 촬영감독은 25시간이 넘는 비행기록을 갖게 된다. 촬영감독은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감독과 함께 화면의 비율을 결정해야 한다. 1968년에 개봉한 <황혼의 부르스>(장일호)는 정광석 촬영감독의 주장으로 스탠다드 화면으로 촬영된 작품이다. <황혼의 부르스>는 일본을 배경으로 몰락한 일본귀족과 북한 간첩, 남한의 비밀요원이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여인을 둘러싸고 벌이는 첩보 액션영화이다. 1960년대 영화계는 TV와의 경쟁을 와이드 스크린으로 극복하고자 가로의 비율이 넓은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탠다드 사이즈로 이 영화를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화려한 컬러의 색감을 보여주고 다양한 렌즈를 이용한 역동적인 화면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당시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아나모픽 렌즈를 마스터 렌즈에 덧대어 구현했는데, 1960년대 후반 노후된 아나모픽 렌즈는 화면의 색감이나 선명도를 보장할 수 없었고 아나모픽 렌즈의 왜곡 때문에 사용 가능한 마스터렌즈의 구경이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파독광부 출신으로 독일에서 아리플렉스ⅡC 카메라를 구입해 온 신영필름 김태우 사장이 마침 정광석 촬영감독의 조수로 들어왔던 시기라 최신 카메라로 선명하고 깨끗한 화면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의도 또한 더 해졌을 것이다. (사진6) 의사로 위장한 가네야마(오지명)기 여자주인공 시즈코(윤정희)를 도와 몰락한 일본 귀족인 가다키리 남작(박암)의 저택에서 도망치려는 장면이다. 망원렌즈로 인물들을 촬영해 전경의 배경을 흐리는 방식으로 인물에 집중하게 하는 것은 물론 윤정희의 심리적인 불안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했다. (사진7) 이 영화에서 박암은 몰락한 일본 귀족임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 내내 제대로 여미지 않은 유카타를 입고 있다. (사진8) 호텔 객실에서 윤정희는 원하지 않는 청혼을, 원치 않는 방식으로 받고 있다. 윤정희는 이유를 모른 채 남자들에게 결혼을 강요당하고 살인사건에 연류 되고 협박받는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부친이 막대한 재산을 딸의 남편에게 주기로 했기 때문인데, 물론 그녀는 아버지의 존재도 모르고 있다. 오로지 ‘황혼의 블루스’라는 노래가 들리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뿐이다. 컬러영화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60년대 후반의 컬러 작품에는 화려한 색감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언제나 세 가지 색으로 구성된 꽃꽂이가 탁자 위에 놓여있다. 이 작품에도 회사, 병원 등의 책상과 탁자 위에는 어김없이 삼색 꽃꽂이가 놓여있다. (사진9) 말끔한 양복에 뿔테 안경을 쓴 신사 오지명은 안경을 벗는 순간 북한간첩이 되어 윤정희 가족을 북송선에 태우려 한다. 심지어 오지명의 날카로운 두 눈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보여줘 긴장감을 갖게 했다. (사진10, 11, 12, 13) 이 작품은 액션영화이다. 오지명의 정체가 드러나자 북한간첩단과 몰락한 일본 귀족의 하수인들이 총격을 벌이고 남한에서 온 공작원 장동휘와 오지명의 화려한 결투장면이 등장한다. 한 간첩단이 윤정희를 찾으러 온 귀족의 하수인들에게 총질을 해대는 장면은 피격당하는 인물들의 화려한 리액션이 다소 단순한 동선을 무마해준다. 심지어 오른쪽 인물은 총에 맞아 엎어져 있다가 다시 총을 맞고는 일어나 휘청거리는 연기를 보여준다. 발포할 때마다 총구에서 나오는 하얀 연기는 90년대 <투캅스>(강우석, 1993)까지 등장한다. 장동휘와 오지명의 화려한 액션장면 중 장동휘의 공격에 오지명이 360도 회전하며 쓰러지는 장면은 설정 상 어두운 실내에서 촬영되어 아쉬움을 남긴다. 1968년부터 정광석은 매년 10편 내외의 작품을 촬영했다. 현재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작품수인데 그는 두 가지의 이유에서 다작 촬영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첫째는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 따라가기. 신성일, 김지미, 남정임 등 당시 인기 있는 주연들의 작품을 촬영하면 두, 세 작품을 동시에 가케모치 즉 겹치기 촬영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제작자 또한 그런 겹치기 일정을 고려해서 주요 스태프를 고용했다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후시녹음으로 진행했기에 촬영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후시 녹음이 미완의 영화를 어떻게 완성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성우 고은정, 오승환의 구술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1970년대에도 이러한 다작의 흐름을 이어갔다. 1971년에 개봉한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는 만주를 배경으로 한 액션영화이다. 물론 영화는 전편 다 국내에서 촬영되었다. (사진14) 이 영화의 주인공들인 애국지사와 갱 그리고 밀정이 처음 만나는 황량한 만주의 술집은 워커힐 호텔이 보이는 한강 상류의 모래밭 위에 세운 오픈세트이다. (사진15) 주인공들이 스키를 타고 일본군을 유인하는 만주의 눈밭은 강원도 횡계에서 촬영했다. 아찔하게 따라오는 일본군 스키부대원들을 찍기 위해 사각으로 기울기를 조정해서 촬영했다. (사진16) 위 장면을 찍기 위해 바닥에 바짝 붙인 카메라를 틀어 앙각으로 촬영하고 있다. 바닥에 누워 카메라를 잡고 있는 이가 정광석 촬영감독이고 그 바로 뒤에서 사진 밖 피사체를 응시하고 있는 이가 이만희 감독이다. 이만희 감독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영화인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정광석 촬영감독 또한 영화에 대한 감각이 아주 뛰어났다고 평가한다. “앞뒤가 이러니까 이런 사이즈로 간다. 이게 아니라 한번 쭉 시켜본 다음에 그냥 나눠서 가니까.” (사진17) 장동휘가 촬영 중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사고로 구르게 되자 이만희 감독은 즉흥적으로 커트를 나눠 촬영해 사고로 NG가 난 장면을 살렸다고 한다. 콘티나 모니터 없이 즉석에서 머릿속으로 편집이 가능한 감독이었던 것이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라면 기세가 등등한 배우들도 어려운 액션장면을 군말 없이 직접 연기했다. 물론 배우들도 인물을 줌렌즈로 당겨 찍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배우 황해가 한 겨울에 한강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 장동휘가 오토바이에서 넘어지는 정도의 위험은 그리 과한 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과거 그가 촬영조수로 참여한 <햇빛 쏟아지는 벌판>에서는 정창화 감독이 총격장면에서 실탄을 사용했고 이만희 감독 또한 대단한 사격실력으로 때로 배우 근처까지 직접 총을 쏘며 촬영을 진행 했다는 무용담 같은 증언을 종종 들을 수 있다. 리얼한 장면에 대한 욕심과 부족한 안전장치로 인해 배우와 스태프들이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아찔한 시기였다. 그가 촬영한 전쟁영화인 <전우가 남긴 한마디>(이원세, 1979)에서도 군용보트를 타고 도강하는 장면에서 강 밑에 묻어놓은 TNT폭탄 위로 배우 장혁이 탄 보트가 지나가며 폭파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다행이 아무도 다치지 않아 며칠 쉬다 촬영을 재개했다고 한다. 정광석은 1960,70년대를 거치며 전광석화처럼 빠른 시간에 탁월하게 촬영을 끝낼 수 있는 노련한 촬영감독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다보니 1980, 90년대 신인감독들의 데뷔작에서 그의 이름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곽지균 감독의 데뷔작 <겨울나그네>(1986), 박종원 감독의 <구로아리랑>(1989), 이현승 감독의 <그대안의 블루>(1992), 김성수 감독의 <런 어웨이>(1995),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1998)등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감독들의 데뷔작에는 늘 그의 이름이 있었다. 특히 198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의 선두주자였던 배창호 감독과의 콤비로 유명한데 배창호 감독과는 <꼬방동네 사람들>(1982)부터 시작해 모두 8편의 작품에서 함께했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판자촌의 모습을 리얼하게 담아 호평을 받았는데, 그는 성공적인 헌팅이 빛을 발한 작품으로 평가한다. 꼬방동네는 고척동 그러니까 당시 영등포에서 시흥으로 가는 길의 좌측 둑 너머 외딴 고지대에 있던 판자촌이다. 벌판 쪽에 우뚝 솟은 철탑, 저수지 같은 분위기를 내는 뚝방 등 그 동네 전부가 이 작품에 적절하게 맞아 떨어져 세트 없이 영화 전편을 그 곳에서 촬영했다. 스태프들은 인근 여관에 숙소를 잡고 2개월간 머물며, 동네 주먹들의 방해가 있으면 술값을 줘가며 밤낮으로 촬영했다. (사진18) 주석(안성기)이 검은 장갑(김보연)을 따라가며 꼬방동네의 좁은 골목길을 유려하게 훑는 장면은 스테디캠 처럼 느껴지지만 정광석 촬영감독이 광각렌즈를 사용해 핸드헬드로 촬영한 장면이다. (사진19, 20) 꼬방동네에서 열린 환갑잔치에서 공옥진 여사가 춤을 추는 장면이다. 이 장면 또한 사진처럼 정광석 촬영감독이 핸드헬드로 촬영했음에도 유려하고 안정적이다. 사진20번에 카메라를 든 이가 정광석이고 사진의 왼쪽 끝 안경을 쓴 이가 배창호 감독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이 배창호 감독과 한 작품 중에서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작품은 <적도의 꽃>(배창호, 1983)이다. 아파트에 혼자 살며 이웃들을 망원렌즈로 훔쳐보는 미스터M(안성기)은 맞은편 아파트에 이사 온 오선영(장미희)에게 반해 그녀를 스토킹 한다. 미스터M이 아파트를 훔쳐보는 도입부는 히치콕의 <이창>(1954)처럼 촬영되었다. (사진21,22,23,24) 미스터M(안성기)의 시점쇼트로 표현하기 위해 팬으로 앞 동 아파트 두어 가구를 훔쳐 보다 아래에 이사 오는 오선영(장미희)에게 시선이 닿는 흐름으로 이어지는데, 현장에서는 이 모두를 한 컷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세트에서 촬영된 <이창>과 달리 <적도의 꽃>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여러 가구의 협조를 구하며 어렵게 촬영이 이루어졌다. 미스터M은 타락한 오선영을 구원하고자 그녀를 강으로 끌고 가 물에 빠트린다. 비정한 내용만큼이나 촬영 환경 역시 좋지 않았다. 구파발 근교의 일영에서 촬영이 이뤄졌는데 장마철에 물이 불어 있는 강에서 빗줄기가 잘 보이도록 역광으로 조명을 쳐야했다. 결국 조명 설치를 위해 10키로 조명기를 매고 강을 건너던 조명조수가 물에 휩쓸려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희생 속에서 만들어진 장면이자 작품이었다. <고래사냥>(배창호, 1984)은 2,3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1983년 11월에 촬영이 시작되었다. 삼영필름 명의로 제작자 황기성이 대명 제작한 작품이다. 병태 역할에 적합한 배우가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안성기가 김수철을 단성사 2층 다방으로 불렀다. 황기성 대표, 최인호 작가, 배창호 감독, 정광석 촬영감독 모두 그 자리에서 김수철을 병태로 캐스팅했다. 로드무비인 이 작품은 서울역 앞 사창가에서 시작해 과거의 창경원을 거쳐 대관령 너머 임계, 강릉 변두리 시장 등지에서 촬영되었다. 영하 20도 날씨에 염소차에서 내려 걷는 곳이 임계 읍내였고 춘자(이미숙)가 어머니에게 줄 안경을 훔치고 민우(안성기)가 이를 구출하는 곳은 강릉 변두리 시장이었다. (사진25,26) <고래사냥>의 강릉 변두리 시장 장면은 엑스트라 하나 없이 시장 사람들 그대로 촬영했다. 사진25의 오른쪽 하단 동그라미 친 부분에 안성기와 이미숙이 있다. (사진27,28) 춘자(이미숙)가 안경을 훔쳐 소동이 벌어지는 장면도 시장에서 엑스트라 없이 자연스럽게 촬영되었다. 주인공들이 포주일당에게 쫓겨 석탄차에 기어 올라가 기차를 타고 도망가는 장면은 카메라 한 대로 촬영이 이뤄졌다. 석탄차를 대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유를 두고 여러 커트로 나눠서 촬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사진29) <고래사냥>에서 석탄차를 타고 도주하는 시퀀스는 한 대의 카메라로 줌렌즈를 이용해 원경에서 접사까지 한 커트로 촬영을 끝내고 편집과정에서 여러 커트로 나눠서 사용했다. 물론 석탄차 위에서 안성기가 “잘 있거라 나는 간다.”포주들을 놀리는 장면도 접사에서 원경까지 한 커트로 촬영해 나눠서 사용했다. 과거 충무로 촬영감독이 갖춰야할 덕목 중 하나는 제작자의 입장에 서서 효율 좋게 촬영해 예산을 줄여주는 것이었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의미 있는 장면으로 꼽는 것이 <땡볕>(하명중, 1984)의 한 컷이다. 시카고국제영화제에서 촬영상을 수상한 <땡볕>(하명중, 1984)은 일제강점기의 민족수난사를 다루고 있다. 무기력한 남성과 수탈당하는 여성의 신체가 수난의 알레고리로 영화 전편을 메우는데, 주인공 춘호가 죽어가는 순이를 지게에 지고 물길을 거슬러 가는 장면은 인물들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배치되어 잔인한 운명에 얼마나 무력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장면은 임계의 산중턱에서 오후 4시쯤 촬영을 끝내고 철수 하는 중에 정광석 촬영감독이 우연히 바라본 풍경에 영감을 받아, 하명중 감독에게 제안하여 만들어 낸 장면이었다. 이 작품으로 국내에서는 23회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했다. 다음해도 연이어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하는데 그 작품이 바로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이다. 미서부에서 단시일 안에 올로케로 촬영했고 흥행에서도 성공한 작품이다. 모든 화면이 감각적이고 할리우드 작품 같다는 평을 받았는데 배창호 감독 또한 미국 수준의 기술력만 받쳐준다면 할리우드 만큼의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작품이라 말했을 정도로 촬영기술과 감각을 강조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제작비와 물량을 들이지는 않았다. 열다섯 명의 인원이 필름 4만 5천자로 라스베가스, 그랜드캐년, 데스밸리, 자브리스키 포인트, 산타모니카, 말리부에서 로케하며 40일 만에 촬영과 현상을 모두 끝내고 귀국한 작품이었다. 한때 배창호 감독의 전매특허였던 현기증 나는 360도 트래킹 쇼트도 할리우드에서 완성된다. (사진30) 호빈(안성기)과 제인(장미희)의 말리부 해변 키스씬을 360도 트래킹 쇼트로 촬영하기 위해 준비하는 현장이다. “그때만 해도 원형이동차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어요. 제일기공사라고 청계천에서 반원형 그니까 160도, 180도 돌아가는 이동차를 쓰는 경우가 있었고. 360도가 꼭 필요하다고 감독이 생각하고 찍으려하면 다 핸드헬드로 찍는 수밖에 없었다고. 정밀하게 원형이동차로 돌아가는 차가 없었어요. 근데 막상 미국 가서 기재를 다 렌트해서 썼거든. 카메라를 BL2를 썼고 거기서 원형이동차 360도 돌아가는 걸 갖다 찍을 때 아주 정밀하게 제작이 돼 있더라고. <깊고 푸른 밤> 보면은 서울에 와이프한테 영주권을 땄다고 전화하는 장면을 원형으로 이동을 갖다가 360도 두 번은 돌아갔을 거야. 마구 빙빙빙. 업 되는 감정으로 전화하는 상태거든, 안성기가. 그거를 원형으로 돌아주니까, 찍는 나부터도 감정이 올라가더라고. 그리고 말리부 해변가에서 둘이 키스하는 장면을 원형으로 360도 원형으로 쓴 게, 저렇게 원형이 되는 구나하는 걸 처음 느꼈을 거야, 아마.” 1990년 작품인 <꿈>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겨울에 촬영이 이뤄졌다. 낙산사 대웅전 촬영을 위해 강릉에서 양양으로 가는 길에 폭설에 갇혀 눈으로 허기를 채우며 20시간이나 걸려 촬영장소로 갔다. 폭설예보가 있었지만 스케쥴 미룰 경우 추가 경비가 발생하기 때문에 촬영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기 위해 인내와 순발력이 필요했다. 강릉과 낙산사 사이 삼팔선 경계가 있는 곳에 마치 해금강을 떠올릴 것 같은 해변에 조신의 판자집을 오픈세트로 만들었다. 2, 3일 동안 눈이 오기를 기다린 뒤 동트기 직전 약 한 시간 십분 사이에 여덟 컷을 찍어야 했다. (사진31) 조신(안성기)을 찾아온 모례아손(정보석)에게 조신이 용서를 비는 장면으로 동 트기 직전, 순발력있게 촬영한 장면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이 처음으로 전 편을 동시녹음으로 촬영한 작품은 <베를린 리포트>(박광수, 1991)이다. 신철이 기획을 했고 오정완이 제작부로 파리 촬영에 동참했다. 사실 촬영진이 모두 파리에 도착한 뒤에도 시나리오는 완성되지 않아 파리 현지에서 스태프들은 열흘 넘게 박광수 감독이 시나리오를 탈고하도록 초조하게 기다렸다. 촬영현장에 미리 가 시나리오를 토대로 최적의 동선을 파악하는게 몸에 배어있는 정광석 촬영감독과는 작업방식이 잘 맞지 않았다. 스테디캠 장면은 독일 현지의 스테디캠 오퍼레이터를 고용해 촬영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은 <구로 아리랑>(1989) 이후 박종원 감독과의 두 번째 작품이다. 대동흥업의 도동환 대표가 제작했고 대부분 강원도 정선에서 촬영이 진행되었다. 영화의 절반을 정선의 국민학교에서 찍었는데 오픈세트로 진행된 엄석대(홍경인)의 아지트는 미술팀을 정선으로 데려오는 비용을 절감하고자 스태프들이 공간을 채워 만들었다. 기차가 달려오는 교각의 철로에서 오래 버티기 내기를 하는 인물들을 촬영하는 장면은 아찔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기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박진감 있게 잡기 위해서는 광각렌즈로 촬영해야만 했다. 누워있는 인물들의 시선에서 찍기 위해 교각으로 들어가 달려오는 기차를 핸드헬드로 촬영하는데 광각렌즈 특성상 피사체와의 거리감이 길어 보이니 기차가 바로 앞으로 올 때까지 버티며 촬영해야 했다. 그래서 달리는 기차에 옷깃을 스치는 긴박한 상황도 겪었다. (사진32,33,34) 달려오는 기차 앞에서 오래 버티는 내기를 하고 있는 엄석대(홍경인). 사진32와 33이 광각렌즈로 촬영한 커트이다. 1973년 정창화 감독의 <흑야괴객>촬영 현장에서 자동차 추격 장면을 가까이에서 촬영하다 질주하는 자동차에 부딪힌 삼각대에 머리를 맞고 결국 현장에서 숨을 거두고 만 최호진 촬영감독을 떠올릴 만하다. 1993년에 촬영한 <투캅스>(강우석, 1993)는 1990년대 코메디 영화의 부흥을 알린 신호탄이 된 작품이다. 제작은 이화예술필름이 시작해 어음으로 계약금을 받았으나 중간에 이화예술의 임상돈 사장이 제작을 포기한다. 그러다보니 제작경험이 있고 지방장사들과 안면이 있던 강우석 감독이 직접 제작을 진두지휘 하게 된다. 강우석 감독이 발행한 새로운 어음으로 계약을 진행하며 제작이 시작되었다. 이 작품의 촬영에 있어서 인상적인 장면은 악당과 투캅스가 싸우는 영화의 마지막 총격전이다. 몹씬이라 많은 엑스트라와 자동차, 경찰까지 동원되었고 TNT를 묻고 총기를 테스트 하는 등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장면이었다. 강우석 감독이 워낙 일을 빨리 하다 보니 하루에 120커트를 촬영하는 불가능한 일정으로 계획은 세웠으나 다음날로 촬영은 이어졌고 마침 폐공장인 촬영장소에 눈이 쌓이게 된다. 개봉날짜가 잡혀있고 촬영을 미루면 비용이 발생하고 어쩔 수 없이 모든 스태프가 눈을 쓸고 흙으로 묻어 촬영을 재개시켜 이틀간 총격씬 120커트의 촬영을 마쳤다. “왜 군에서는 무엇이든지 안 되는 게 없다고 하더니 영화인들도 마찬가지라고. 안 되는 게 없어들.” (사진35,36) 강형사(박중훈)와 조형사(안성기)가 악당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장면 중 일부로 눈이 쌓인 현장을 스태프들이 모두 치우고 촬영한 장면이다. 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촬영감독 정광석은 1962년 데뷔해 열악한 기자재와 제작환경 속에서도 저비용으로 순발력 있게 다양한 장르의 영화 한편을 촬영해내는 능력을 길렀다. 1980, 90년대에는 새롭게 대두하는 젊은 감독들이 믿고 작품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2000년대에는 당시 한국영화계에서 생소했던 DP시스템을 시도한 원로 촬영감독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의 촬영담은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그가 촬영한 무수히 많은 작품들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사진37) 정광석 촬영감독이 아리플렉스 필름카메라를 잡고 있다.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 인터뷰 첫 번째 이야기: “그때는 내가 쓰면 최고의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시나리오는 영화에서 애매한 위치에 멈춰 서 있다. 아무도 연극에서 희곡에 해당하는 지위를 영화에서 시나리오에 부여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영화에서는 <햄릿>이나 <벚꽃 동산>처럼 반복해서 (그것도 원작을 존중해가며 단지 해석만을 덧붙이면서) 만들어지는 시나리오란 없다. 시나리오는 오직 그 영화의 완성만을 위해서 쓰고 그 영화가 만들어지고 난 다음 거기서 더 이상의 활동을 멈춘다. 아주 예외적으로 리메이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그건 이미 완성된 영화의 그림자 아래 놓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단지 소재나 인물이 흥미로웠을 지도 모른다. 영화가 어디서 시작되는 지는 영화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그저 이미지라고 말했다. 다른 누군가는 사건이라고 대답했다. 약간 신중하게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사람에 대한 흥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설명을 시작할 때도 있다. 저마다 다른 시작. 영화에서 아이디어는 사유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나는 종종 영화에서 사유는 어디에 머무는가, 라고 물어보고 싶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먼저 찾아내야 할 것이다. 시작이라는 장소. 서로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온 아이디어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서 가장 먼저 문자에서 멈춘다. 왜 영화는 문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을까. 단지 기능적인 이유로? 그럴 지도 모른다. 이때 누군가는 이 과정이 영화를 산문적으로 만든다고 비판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문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떠도는 아이디어를 멈출 수 있을까. 시나리오는 정확하게 그 자리에 있다. 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쓰여진 시나리오를 보았다. 일부러 읽었다, 라고 하지 않고 보았다, 라고 썼다. 에이젠쉬테인의 < 이반 대제 >의 시나리오. 완전히 반대로 쓴 타르코프스키의 <향수>의 시나리오. 장 르누아르의 < 게임의 규칙 >의 시나리오, 누가 이걸 읽은 다음 영화를 떠올릴 수 있을까. 브레송의 <무쉐뜨>의 시나리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지문들. 누구라도 금방 쓸 것만 같은 오즈의 < 동경 이야기 >의 시나리오. 거의 메모(의 콜라주)에 가까운 고다르의 <수난; 노동과 사랑>의 시나리오. 차라리 책에 가까운 에릭 로메의 시나리오. 종종 비평가들은 여기서 잘못을 저지른다. 혹은 여기서 금방 영화에로 옮겨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시나리오는 감독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단 쓰면 배우들의 독해라는 문제가 뒤따라온다. 그(녀)들은 감독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읽어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말하자면 시나리오는 그들에게 주어진 세계이다. 여기에 수정이란 없다. 단지 그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문제와 만나야만 한다. 대사에 불어넣어야 할 인격. 배우는 하여튼 그 말을 해야 한다. 그런 다음 무엇보다도 그 말을 믿게 만들어야 한다. 삶의 조건이라는 시나리오의 상황. 주어진 운명. 그 틈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똑같은 의미로 제작자는 이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돈의 문제와 만난다. 영화가 요구하는 자본. 자본이 요구하는 영화. 그 둘 사이에서 힘겨운 투쟁. 노동은 교환되어야 할 것이다. 가치의 이동. 그 안에서 예술적 가치란 어디에 있을까. 이때 시나리오는 자본의 도면도와도 같은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똑같은 시나리오를 읽어도 파올로 브랑코와 하비 와인스타인은 완전히 다른 전표를 만들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냉소적으로 대답할 것이다. 아마 그러기도 전에 두 사람 중 한 쪽이 완전히 매혹된 시나리오를 다른 한 쪽은 그냥 찢어버릴 것이에요. 그럴 것이다. 이때 영화는 어디에 살 것인가, 라는 질문과 만난다. 임권택 은 오래 전, 1983년에 (당시 영화진흥공사에서 발간되던) <월간 영화>에 ‘저질 시나리오와 좋은 영화’라는 글을 썼다. 그때는 < 만다라 >를 찍고 난 다음, 그리고 < 안개마을 >을 만들고 난 다음, < 불의 딸 >을 준비할 때이다. 다소 길게 인용할 생각이다. 여기에는 시나리오에 대한 임권택의 입장이랄까, 약간 과장한다면 기대의 지평이랄 만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다. “(...) 흔히들 영화 예술은 감독의 것이라 한다. 그러나 좋은 시나리오를 감독이 망쳤다는 말은 자주 들었어도 저질 시나리오로 좋은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성공담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 영화를 생의 전부로 알고 살고 있던 영화인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어려운 생계를 위해 부업을 갖는 이조차 드문 것을 보면 자명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저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방향 감각을 잃고 구원의 손길이 외부로 와 닿길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이런저런 구실에다 책임을 떠맡기고 저질연탄을 찍어내는 기능공정도에서 안주하고 있지나 않는지 모를 일이다. 내가 살고 있는 때와 장소에 대해서 전혀 방향감각을 알 수 없는 영화, 그런 영화를 만든다는 것도 싫거니와 그런 인생을 사는 건 더더욱 이나 싫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자신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함에 있어서 단 한 마디의 대사도 수정을 불허한다는 단서를 붙이고서야 작품을 내주셨던 분도 계셨다. 그까짓 단서를 붙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느 경망스러운 감독이 한 지문인들 고치려 덤볐겠는가. 그 분의 작품은 모두 진실인 것을...” (<월간 영화> 7/8월호)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임권택 은 송길한 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국영화사에서 송길한이 차지하는 위치는 임권택을 떼어놓고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아마도 한국영화사에서 시나리오 작가가 가장 빛나던 시절은 1960년대 영화였을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그 당시에는 연출과 시나리오가 분리되어 있었다. 물론 이해할 수는 있다. 처음에는 시나리오가 돌아다녔다. 제작자는 감독을 구하고 그런 다음 재빨리 배우를 정했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자신이 시나리오를 연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배우들은 너무 많은 영화에 동시 출연을 했기 때문에 하루에도 두 세 개의 현장을 가야만 했다. 그들이 시나리오를 읽을 시간은 서로 다른 현장을 이동하는 차 안에서 였겠지만 아마도 대부분 피로에 지친 그들은 그저 잠을 잤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한국영화는 동시녹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그 대사를 성우가 녹음실에서 알아서 해결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를 단순하게 비난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영화의 서로 다른 전통에 속하는 문제이다. 이를테면 네오리얼리즘 이후에도 이탈리아 영화들은 거의 동시녹음을 하지 않아서 그 소란스러운 오페라 아리아와도 같은 대사들의 목소리와 배우의 입은 거의 맞지 않는다. 반대로 프랑스영화들은 신경질적일 정도로 일치시키려고 애를 쓴다. 홍콩영화는 처음부터 북경 표준어와 광동어 사이에서 교체 가능하게 녹음한다. 말하자면 시스템의 체제 안에서의 역량의 통제에 관한 문제, 혹은 복잡한 인과관계 안의 중층적 결정으로서의 목소리의 위치. 자,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송길한은 (트뤼포가 공격적으로 정의내린 샤를 스파크와 앙리 장승, 자크 프레베르의 지문과 대사의 방법으로 이루어진) ‘좋은 시나리오’의 그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작가이다. 그는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 흑조 (黑潮)>라는 작품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첫 번째 작품이 영화 제작을 목표로 한 시나리오가 아니라는 말은 송길한이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한국 영화현장의 조건을 잘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아마도 이 시나리오 원작은 1970년 한국영화와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시나리오를 높이 평가하여 당선작으로 결정되었지만 영화로 옮겨지기까지 3년이나 걸렸다. 송길한은 나쁜 시간에 도착했다. 그해 6월 김지하는 <오적>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고 계간 사상계는 폐간되었다. 경부 고속도로가 7월에 개통되었지만 11월 13일 전태일이 청계천 6가 평화시장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친 다음 분신자살했다. 그래도 이듬해 4월 박정희는 다시 제 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였다. 정치의 겨울이 시작되었다. 영화는 숨 죽였고,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었을 때 한국영화는 무자비한 검열과 무조건적인 항복 아래 정책홍보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그저 시시한 구경꺼리가 되었다. 막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었다. 송길한은 쓸 이야기가 많았지만 시간을 잘못 선택했다. 하지만 그는 충무로에 남았다. 어쩌면 그 자신이 물러날 데가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모른다. 여기에 관한 그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저 그 자신은 “그냥 그게 내 운명인 거요”라는 대답만을 되풀이했다. 그의 첫 시나리오인 <흑조>가 이상언 감독에 의해 원래의 작품과 다르게 다시 각색되어 영화화가 된 다음 1974년부터 충무로에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송길한은 거의 모든 장르의 시나리오를 썼다. 하이틴 영화인 < 여고 얄개 >, < 우리들의 고교시대 >, 애니메이션인 <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 ( 민병권 과 공동 각본), 전쟁영화인 < 도솔산의 최후 >, < 제 3공작 >( 윤삼육 과 공동 각본), 에로물인 < 독신녀 >, 무국적 무술영화인 < 낭화비권 >, (그리고 좀 놀랍게도 성룡이 출연한) < 금강혈인 >. 이 목록은 다소 참혹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1940년생 작가의 빛나는 30대에 보여줄 수 있는 재능의 시간을 어쩔 수 없는 세월 속에서 그렇게 낭비하듯이 보내버렸을 때 그건 그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역사를 기록하는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운명에 대해서, 운명의 책임에 대해서, 존재의 물음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영화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불러 일깨운다. < 짝코 >(1980) (작품 연보에 따르면) 송길한 은 15편을 쓰고 난 다음, 그러니까 첫 번째 시나리오를 쓰고 난 다음 11년이 지나던 해, 1980년에 처음 임권택 을 만났다. 그때 임권택은 < 족보 >를 막 끝내고 난 다음이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영화 < 낙동강은 흐르는가 >를 만들고 난 다음이다. 누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문제. 말하자면 사건. 누군가는 너무 일찍 만났기 때문에 서로의 인연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며, 누군가는 너무 늦게 만났기 때문에 탄식을 할 지 모른다. 아마 임권택과 송길한은 몇 차례이고 충무로에서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충무로라는 경기장. 벤허다방에서의 전설적인 일화들. 베어가든, 혹은 퇴계로에서 을지로에로 이어지는 생선구이 대포집들. 두 사람은 충무로라는 좁은 골목길에서 11년을 서로 모르는 체 지냈다. 어떻게 서로를 모를 수 있을까. 어쩌면 서로 각자의 방식으로 둘 사이를 묶어내는 인연을 기다렸을 지도 모른다. 그 둘을 처음 묶어준 영화는 < 짝코 >이다. 지리산 태백산맥 어귀에서 만난 두 남자. 그 사이에 끼어든 한국전쟁이라는 시간. 빨치산 공비 짝코는 도망치고 그를 붙잡았던 송기열 경사는 그를 놓치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 난다. 아마 그 자신도 짝코를 잡으려던 세월이 그렇게 오래 계속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짝코도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이 밤 그림자 타고 도망 다니게 될 것이라곤 몰랐을 것이다. 하긴 누군들 알았겠는가. 이야기는 그 둘 사이를 오가면서 플래시백이 시시때때로 스며든다. 두 남자의 삶의 시간. 우리들의 역사. 거미줄처럼 이어진 시간. 그들을 칭칭 동여매기 시작했을 때 임권택과 송길한은 종종 좁디좁은 작은 방 안으로 삶을 수축시키기도 하고 때로 그 작은 사건을 역사 전체로 확장시키기도 한다. 끝없는 추락. 비탈에서 그렇게 떨어지는 짝코. 잘못된 미끄러짐. 그 앞에서 순간적인 송기열의 실수. 그런 다음 그들은 정반대의 이유이지만 동시에 같은 이유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역사의 오류. 단 한 마디로 이 영화는 걸작이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은 이 영화를 알아보지 못했다. 21세기가 된 다음에 긴 세월의 먼지를 털고 이 영화는 임권택의 걸작의 반열에 올라서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짝코>가 자신의 야심과 깊이를 충분히 대접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더 멀리 갈 것이다. < 만다라 >(1981) 그렇다고 해서 금방 임권택 과 송길한 이 함께 작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영화사에서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사이의 오랜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 오즈 야스지로와 노다 고고, 노년의 루이스 부뉴엘과 장-클로드 카리에르, 데이빗 린과 로버트 볼트, (그리고) 수 없이 많은 예. 하지만 종종 두 사람의 대표작이라고 알려진 < 만다라 >의 첫 번째 각색자는 송길한이 아니라 이상현이었다. 송길한은 두 번째 각색을 했다. 물론 여기에는 영화사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조건들이 겹쳤을 것이다. 나는 이런 문제가 간단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영화 <만다라>는 두 번째 판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송길한의 시나리오 판본을 읽어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미 임권택과 < 신궁 >에서 손발을 맞춰 본 정일성 촬영감독이 (잘 알려진 대로) 큰 수술을 받고 난 다음 “의사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건 내가 찍다가 죽어도 후회가 없다는 심정으로” 촬영을 했다. <만다라>는 (아역배우를 하다 긴 공백을 끝내고 돌아온 다음) 주연 배우를 한 안성기 에게도 전환점이 되었다. <만다라>는 어떤 마술 같은 순간의 힘이 사방에서 빛나는 신기한 영화이다. 198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음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떤 영화는 누군가의 힘, 때로는 감독, 혹은 배우, 가끔은 촬영이나 각본(의 대사)가 그 영화의 이것임을 드러내는 힘의 중심에서 형태를 만들어내고 존재를 증명하지만 또 어떤 영화는 그 모든 힘이 화음처럼 서로 조화의 기적을 만들어낸다. 나는 기적이라고 썼다. 왜냐하면 이런 순간을 영화에서 맛보는 것은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영화의 힘은 한편으로 서로 다른 힘들 사이의 긴장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은 이 긴장의 균형이 불화를 일으키고 종종 그 누군가의 힘으로 다른 힘들을 복종시킨다. 임권택 과 송길한 , 그리고 정일성 은 때로 제한된 조건과 시간 속에서조차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냈다. < 안개마을 >은 한쪽에서 쓰고 다른 한쪽에서는 찍으면서 12일 만에 완성해낸 영화이다. 이 영화를 걸작이라고 부를 순 없지만 어떤 순간들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종종 대담한 힘의 결정. 그들은 그것을 때로 서로 믿었다. 서로 다른 힘들의 위상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구성. 갑자기 변형을 일으킨 시청각 기호들의 활용. 그들 자신은 별로 믿지 않았지만 그건 <안개마을>과 거의 동시에 찍은 < 나비 품에서 울었다 >의 알 수 없는 불균질에서 조차 그 힘을 가끔씩 거만하게 드러냈다. 무엇보다도 임권택과 송길한은 한국영화에서 거의 손대지 않은 영토를 차례로 건드려나갔다. < 불의 딸 >은 이미< 신궁 >에서 임권택이 다루었던 무속의 세계를 거의 환골탈태하다시피 하여 밀고 나아갔다. 여전히 숨어있는 이 걸작. 임권택과 송길한, 그들은 어떤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의 일상생활 안까지 들어가고 싶어 했다. 그 사람이 산사에서 불경을 외우면서 해탈을 꿈꾸는 승려라 할지라도(< 만다라 >), 혹은 사람들의 사주팔자를 들여다보면서 신 내린 무당일 지라도(<불의 딸>), 전쟁 통에 부모를 잃어버리고 강가에 빠져죽은 사람들 시체를 건져내서 살아가는 사내의 삶일지라도(< 길소뜸 >), 그저 삶의 비루한 곁에 다가가서 생활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생활 없이 인간이 어떻게 하루를 견딜 수 있을까. 아마도 <길소뜸>은 임권택과 송길한이 만들어낸 화음의 절정일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모든 대사, 모든 씬에서 어떻게 영화가 자기의 순간을 만들어내는지를 이끌어낸다. 여기서 모든 장면들은 그 스스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 안에서 자기를 보존하면서 단지 체험되는 것을 매번 넘어서서 그것을 바라보게 만든다. 여기서 방점은 바라본다, 는 말이다. <길소뜸>은 대부분 불안정한 감정의 관계에 내내 머물면서도 매번 어느 순간 마치 곡예를 하듯이 그 안에서 자기 개연성을 찾아 균형을 맞추고야 만다. 이 영화는 분명히 그 두 사람 누구에게나 이전에 보여주지 못했던 경지에 스스로 가 닿은 작품이다. 비구니회 제작중단 요구 현장 그런 다음 < 비구니 >가 있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한 여인의 비구니로서의 고행 길. 불가에서는 수행을 하기에 전쟁보다 더 좋은 시절은 없다, 라고 할 만큼 지옥의 수행의 나날들. 1984년 4월 7일 신흥사에서 주연배우 김지미 씨가 삭발의식을 하면서 첫 촬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국 비구니회에서 제작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유는 시나리오에서 다룬 비구니의 육보시 장면을 예로 들었다(고 한다). 나는 정확하게 어느 씬이 문제가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시나리오를 읽어보았지만 잘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추측으로) 아마도 씬 87, 한국전쟁 중에 피난중인 아이들을 떠안은 비구니 수경이 중공군을 피해서 추운 겨울날 남하하다가 타이어가 펑크 나서 수리중인 트럭에 아이들을 태워 고아원까지 내려가기를 부탁하자 운전수가 수경에게 담요를 내밀면서 “(은밀히) 마누라 잃은 지가 3년이우, 애들은 책임지고 태워줄 테니까 대신 내 사정도 좀 봐 주슈” 라는 대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나리오에는 그런 다음 별다른 장면이 없다. 아이들을 태우고 멀리서 포성이 울리고 나면 다음 씬으로 옮겨간다. 4월 16일 전국 비구니회는 법원에 제작중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그러자 영화인회의에서는 4월 31일에 창작자유 수호결의 대회를 열었다. 하지만 전국 비구니회는 5월 11일에 제작 중지를 요구하며 가두시위에 나섰다. 초파일이 그 무렵이었고 <비구니> 팀은 수몰 지구에서 일단 촬영을 시작했다. 하지만 항의는 점점 거세졌다. 태흥영화사는 6월 13일 제작중단을 선언했다. 분하지만 <비구니>는 거기서 끝났다. ( 임권택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전쟁 장면은 내가 이제까지 찍은 것 중에 가장 힘 있게 찍혔는데...” 라고 대답했지만 그건 이미 회고담이다. 시나리오를 읽은 내 기분으로 <비구니>는 < 만다라 >와 < 길소뜸 >, 그리고 < 아제아제 바라아제 >의 중간 어디쯤에 자리 잡았을 것만 같다. 혹은 그 영화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다음 임권택 과 송길한 , 정일성 은 다시 함께 작업하지 못했다. 임권택과 송길한의 다음 작품 < 티켓 >은 구중모 가 찍었다. 강원도 항구도시 구석 지하에 자리 잡은 다방을 무대로 티켓을 팔며 먹고 사는 네 명의 여자와 그녀들을 다시 뜯어먹는 다방 마담을 중심으로 바닥까지 떨어져 내린 삶의 안으로 들어갔다. 어쩌면 이 영화는 임권택과 송길한이 찾고 싶어 했던 리얼리즘의 한쪽 끝을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리얼리즘은 임권택의 목표였던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일상생활의 디테일 안에서 살고 싶어 했다. 그는 오로지 그것만이 믿을만하다고 생각했으며, 그 안에서 성찰의 방법을 끌어내려고 했다. 그게 조선시대가 되었건 일제 강점하가 되었건, 혹은 해방 전후의 혼란 속으로 들어가건 새마을 운동을 하던 농촌 마을로 가건 거기엔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소재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송길한은 <티켓>을 위해서 강원도 항구도시에 머물면서 여관방에서 계속 티켓을 끊어가며 낯선 다방에 커피 배달을 시켰고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고 오래 전 인터뷰에서 내게 말했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켜켜이 쌓이면서 이 영화의 인물이 되어갔다. <티켓>에는 사람에 대한 어두운 실망과 삶에 대한 피로가 가득히 고여 있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단 한 번도 그들의 작업을 해피엔딩으로 끝내지 않았다. 물론 그것을 단순히 반대말인 비극으로 끝냈다고 말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그저 열어놓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파국을 맞이했으며 그 앞에서 결국 비관적인 비감이 감돌고 있었다. 비극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지라도 세상 앞에 선 슬픈 자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에 대한 연민. 어쩌면 여기서 더 밀고 나아갔다면 임권택과 송길한은 각자에게 새로운 구성의 방법에로 나아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공동 작업은 여기서 끝났다. < 씨받이 >를 작업하던 중 송길한은 미국에 가서 다음 영화 <아메리카 아메리카>의 취재를 했고 임권택은 그 시나리오를 부여잡고 세트에서 조선시대 양반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남자 아이를 낳으러 안채에 들여다 놓은 어린 소녀 옥녀의 이야기를 찍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영화는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되었고 강수연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 주었다. 유럽의 (이른바) 3대 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수상한 공식적인 첫 번째 호명이었다. 그들은 그런 다음 각자의 영화를 만들어나갔다. 아마 긴 이야기가 거기 있을 지도 모른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가 별로 궁금하지 않다. 누군가는 만날 것이며, 또 누군가는 헤어질 것이다. 모든 예술가들은 그렇게 자기의 힘을 가다듬을 것이다. 물론 송길한은 여전히 시나리오만을 고집스럽게 썼다. 장길수의 두 편의 영화, <아메리카 아메리카>와 <불의 나라>를 썼고, 노세한 의 두 편의 영화 < 아낌없이 주련다 >와 < 대학촌의 달빛 >을 썼다. 그런 다음 이장호 의 < 명자 아끼꼬 소냐 >를 쓰고 나서 그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새로운 작품 소식을 듣지 못했다. 내가 안타까운 것은 그가 임권택과 왜 더 오래 작업하지 않았느냐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왜 더 많은 작업을 더 오랜 기간 동안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만일 송길한이 이른바 1995년 세대와 함께 작업할 기회가 있었다면 한국영화는 지금 보다 훨씬 성숙한 영화의 명단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작업할 행운을 가질 수 있었던 젊은 감독들은 새로운 경지에 이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기회를 잃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남았다. 나는 다가올 시간을 기대하면서 송길한이라는 이 힘센 작가를 만나러 간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그리고... 정성일 평론가(이하 정성일)_ 영화를 하겠다고 결심을 하면 먼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감독, 촬영, 편집, 배우, 이렇게 많은 결정 중에서 선생님은 시나리오를 선택했습니다. 1970년 동아일보에 <흑조>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시나리오 작가로 입봉하였습니다. 많은 시나리오 작가들은 그런 다음 감독으로 다시 데뷔하기도 하지만 선생님은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작업만을 해오셨습니다. 송길한 작가(이하 송길한)_ 처음부터 영화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영화를 좋아하고 그랬지만, 근데 나이 육십을 넘어서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니까 영화는 내게 적어도 운명이었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어. 그전에는 늘 전전긍긍이었지. 여차하면 보따리 싸려고 하다 세월이 간 거지. 그때 한번 해볼 만하다, 하고 나를 붙들어 주신 게 임권택 감독님이었어. 서로 그런 것이 없었으면 떠났지, 그렇게 수많은 감독하고 한 건 아니지만. 나는 영화하고는 안 맞았거든. 생계형이었던 거지. 나는 생계형이 결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엄밀히 말해 생계랑 상관없이 내가 모두 걸고 한번 써봐야지 하는 거랑은 다르거든. 생계형도 많이 썼지. 그건 서로 알아. 먹고 살아야지, 란 말이 안 나오고, 목숨까지는 아니어도 그 다음을 걸고 임 감독님이랑 같이 작업을 한 거여. < 피아골 > 정성일 _ 작가로서 영화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선생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화는 어떤 작품들이었습니까? 송길한 _ 쥘리앙 뒤비비에부터 시작해야하는 얘기지. (고향) 전주라는 데가 군산 비행장이 바로 옆에 있어서 군인들에게 틀어줘야 하는 영화를 할리우드랑 프랑스 등지에서 많이 수급했어. 그걸 야매로 살짝 빼내가지고, 소위 ‘깡통극장’이라고 하는, 지붕이 깡통으로 되어 있고 낮은 나무의자가 있는 극장에서 봤었어.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뭔가 알만할 때가 고(등학교) 일, 이(학년)가 아닌가 싶어. 그때 한국영화 촬영장을 갔거든. 이강천 감독이 < 피아골 >, < 아리랑 >을 지리산, 전주에서 찍었다고. 참말로 그때만 해도 엉성스러웠고, (웃음) 그래도 소위 내로라, 하는 배우들이 6.25 전쟁 끝나고 오고갈 데가 없으니까, 한 무더기가 부산에 있었고 한 무더기가 전주에 있었거든. 그때 전주 극장에서 그들을 먹여 살렸어. 거기서 있던 것이 김진규 선생, 허장강 선생, 이예춘 선생, 그들을 다 거기서 만났던 거야. 아주 조그만 골목이 있는데, 그땐 배우인줄도 몰랐는데, 뭔가 분위기가 달랐어. 어느 날 이강천 감독이, 그러니까 원래 전주가 아니고 군산에 있던 양반이야. 이 양반이 군산에서 극장 간판 그렸는데 미술을 잘했어. 전주 백도 극장 홍보맨으로 와서 극장 간판을 그렸어. 그때 아직 잔류 공비가 있어가지고 민간 버스가 털리고 그랬었는데, 휴전이 53년도 7월 27일이었는데 그 이후에도 공비들이 산간에서 버스 스톱시키고 먹을 거 다 거둬가고 그럴 때였으니까. 도(道) 경찰국에서 반공의식을 길러야한다는 의도에서 영화제작을 한 거야. 그게 그 유명한 <피아골>이야. 요 며칠 전에도 국군방송에서 그걸 봤어. 그 시나리오를 나중에 영화인 되고나서 이강천 감독이 줘서 시나리오를 봤는데 지금 봐도 잘 쓴 시나리오야. 영화가 여건상 그걸 못 따라가서 그렇지 참 잘 쓴 시나리오야. 전라북도 경찰국 공보과장 김종환 씨가 썼는데, 그 양반이 소위 빨치산을 많이 다루고 현장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건 거짓말 없는 시나리오야. 그땐 몰랐어. 어느 땐가 돌아가신 노경희 씨가 김지미 씨를 붙잡고 <피아골>을 (다시 제작) 해볼 생각이 없냐, 했는데 나는 귀가 번쩍 뜨였지. 근데 그 양반이 돌아가셨어. 나는 그걸 좋게 생각하고 (제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근데 그 무렵 패션에는 안 맞었어, 사실 (그때 제작을 하려고) 다루면 오히려 < 짝코 > 스타일이 되는 거였어. 빨치산이고, 적이다 공비다, 이런 반공 개념 말고. 그들이 거기서 싸우고 최후까지 버텨내고 그런 게 결국 인간이거든, 이게 나는 뭉클했던 거지. 영화로는 (크리스티앙-자크감독의) <싱고아라 Singoara>(1949) 그게 어려운 영화였어. 어릴 때부터 좋은 영화를 많이 접했었어. 아주 어렸을 때 본 채플린 영화 빼고는 고등학생 쯤 되어 본 것은 < 나의 청춘 마리안느 >였는데, 그 영화 땜에 잠도 잘 못자고 (웃음) 난 그때 왜 그렇게 조숙했나 몰라. 할리우드 영화보다는 프랑스 영화가 흥행성은 없어도 예술성이랄까 막연하나마 그게 월등히 차이난다는 것을 느꼈어. 이 차이가 중요한 거지. 영화판에 들어와서도 내게 암암리에 정신적 영향력을 줬을 거야. 내 감수성에 너무 맞았고 그때는 텔레비전도 없고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그때 꿈을 주고 판타지를 주고 했던 게 영화가 아니었을까. 정성일 _ 선생님 연배의 영화인들을 뵙고 같은 질문을 하면 대부분 할리우드 영화들, 특히 서부영화나 < 자전거 도둑 > 같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얘기하시는데 선생님은 프랑스 영화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게 참 인상적입니다. (웃음) 송길한 _ 난 프랑스 영화에 끌렸어. 물론 < 자전거 도둑 >이나 펠리니의 < 길 >이나 나도 다 재밌게 감동적으로 봤어. 여러 날 가슴 속에 생각하곤 했는데, 난 대사가 시끄럽고 그런지 이태리 영화보다 프랑스 영화가 훨씬 부드럽게 마음에 와 닿았어. 이태리 영화는 간단한 것도 왜 그렇게 시끄럽게 떠드는지, (웃음) 나는 조용하게 젖어 들어오는 것들이 훨씬 좋았어. 쥘리앙 뒤비비에는 시인이기도 하고.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본 채플린은 만화 개념이었고, 영화가 이런 것이었구나, 아, 죽이네, 그런 생각이 든 건 프랑스 영화였어. < 나의 청춘 마리안느 >는 나를 숙성시킨 영화였어. 소년단계에서 청년 단계까지, 상당한 영향력이야. 주인공 마리안느를 왜 그렇게 찾고 싶었던지.. (웃음) < 오발탄 > 정성일 _ 선생님이 영화 현장에 도착하기 전 한국영화는 1960년대 황금시대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세대마다 한국영화에 대한 전제랄까., 선입견이랄까, 그런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전 선생님에게 한국영화란 어떤 것이었습니까? 송길한 _ 유현목 감독의 < 오발탄 >을 보고 반했죠. 그게 이범선 의 소설도 좋았지만, 영상의 그 현실 감각이 너무 좋았다고. 아 이런 감독도 있었구나. 사실 유현목 감독을 흠모했어. 그때는 영화판에 들어 올라고 생각도 안했거든. 근데 그 뒤에 이 양반의 일련의 영화들은 그냥 그랬어. (잠시 생각) 한국영화 중에 특히 <오발탄>이 그렇게 좋았어. 그 리얼리즘도 좋았지만 그 속에 담긴 유현목 특유의 허무주의 같은 게 그때 감성에는 매우 맞았던 거 같아요. 정성일 _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전에는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송길한 _ 학교를 다니다가 관두고, 거 참, 개인 사정이 거기 있었는데, 나는 청춘이나 이런 거랑 거리가 멀게 이십대를 보낸 거야, 그러다가 대한 석탄공사 시험에 합격을 해서 도계 광합소에서 한 삼년 석탄을 캤지, 근데 가만히 보니 아무래도 석탄을 캐기는 아까운지 소장이 나를 계장으로 앉히더라고. 그때 수입이 괜찮았어. 술 좋아하고 여자들 많고 거기가 아주 재미있는 데였어. 근데 거기 계속 있는 게 아닌 거 같아서 퇴직금 받아서 나와 버렸지. 서울에 다시 오니 힘들지. 중부시장가면 까대기라는 게 있었어. 쌀 한가마니를 어깨에 짊어지고 내리면 5원, 들어 올리면 10원. 그런 노동을 했어. 살아야 하니까. 짬이 생기면 시네마 코리아 알지? 조선일보 있는 데 있던. 동시 상영할 때 난 그때 거기서 정말 좋은 영화를 많이 봤어. 아침에 일찍 가. 그래서 하루 종일 앉아 있다가 저녁에 오고, 시원찮은 거 볼 때는 잠을 자기도 하고.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 날, 맨날 소비적으로 보기만 할 것인가 그래서 수첩에다 보기 좋았던 것, 인상적이었던 것, 대사가 쌈빡했던 것. 끄적 끄적 메모하면서 그걸 봤어 그게 나의 유일한 학교였어. 그러던 차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나리오 부문이 나오더라고. 근데 내가 무슨 텍스트가 있겠어, 탄광에서 서울 올라왔을 때 갈 데라고는 시네마 코리아뿐이 없는 거여. 한 씬에서 다음 씬으로 넘어가고, 거기서 디렉션이 움직이는 거고, 이 씬에는 뭔 얘기를 하는 것이고 가장 원시적인 거지. 그냥 무대뽀로 썼어. (웃음) 그때 돌아가신 오영진 선생님이 심사위원이셨어. 그런대로 심사평도 괜찮았어. 내용은 별 거 없고 프랑스 스타일의 러브 드라마였는데, 감각이나 그런 것이 씀씀이가 너무 아름답다고 뽑아주셨던 거죠. 그렇게 그 양반을 만나게 되고. 그 양반이 정치하느라고 무척 바빴는데, 시간 나면 토요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당사(堂舍) 앞으로 와라, 그러면 거기 가서 얘기 듣고, 이 양반은 얘기해도 시나리오 가르쳐줄 정신은 없고. 그런데 사상계에 이 양반 작품이 실렸는데 아, 이거 장난 아니구나, 많이 배웠어. 당선작은 이상언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서 당시 국도극장에 붙였는데 흥행은 부진했어요. 그때 당선작이 수준이 너무 높다고 한 단계만 낮춰서 신파로 만들어 달라는 거야, 그때 내가 학을 띠고 속으로 여기서 얼른 짐을 싸야겠다 했어. 정성일 _ 맨 처음 시나리오를 쓰실 때 영화를 본 것 말고는 배운 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시나리오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양식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씬의 분류나 장면의 기술적 표기랄까, 그런 것들을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송길한 _ 영화보고 배웠지. 이달 말이 동아일보 마감이야. 그런데 문서화를 해야 하니까, 그래서 생각을 해본 거지, 씬은 도대체 어떻게 되고. 고등학교인가 중학교인가, 교과서에 시나리오 단편 공부한 게 생각나서. 헌책방을 더듬어 갖고 그걸 다시 찾아봤어. 그게 유일한 교재였어. 그리고 나서 시네마코리아에서 본 것을 그 이튿날 또 종일 보고, 며칠 또 종일 보고, 내가 쓴 걸 그거하고 씬이나 지문을 맞춰 보는 거여. 씬이 구분이 되잖아. 요즘과 같이 커트로 갈 때도 아니고. 내가 쓰고 싶은 데로 썼는데 됐어. 그런 것이 오히려 오영진 선생한테 더 좋아 보였나봐. 실험적이고, 불란서 감각이 있는 것처럼 보였나봐. 내가 속았는지 그 양반이 속았는지 모르지(웃음) 정성일 _ 그 당시 문학은 모든 예술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시나리오 작가는 결국 이야기꾼이기도 한 건데, 그때 선생님께 영향을 미쳤었던 소설가 혹은 소설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습니까? 송길한 _ 당연히 최인훈의 <광장>이지. 딱 하나야. 두 개도 필요 없어. 나는 깜짝 놀랐어. 이런 작가가 우리나라에도 있는가. 그때 의식 있는 학생들에게는 센세이셔널 했지. 4.19 직후니까. 반짝 자유로울 때 그 찬스에 잡지에 실린 거야. 그러고 나서 바로 5.16으로 아작이 났지만. 그러니 참 우리 삶이 험준해. < 흑조 > 정성일 _ 죄송하게도 선생님의 당선작 < 흑조 >가 영화화 된 작품을 보지 못해서 그저 줄거리로 짐작을 해보면 줄거리는 불륜이지만 섬에 갇혀 벌어지는 이야기의 상황이랄까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느낌은 부조리극과 실존주의적 질문을 떠올리게 합니다만.... 송길한 _ 당연하지. 칼 마르크스, 이런 거 집어치우고 나면 가는 게 실존주의니까. 그리고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이 한마디에 우리는 완전히 갔어. 살아 실존하는 것이 우리가 만들어내는 문학이나 기타 등등 이런 거에 앞서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큰 윤리나 도덕보다도 더 앞에 서서 우선 살고, 살아 숨 쉬고 보자는 거지. 이건 뭐, 굉장히 대단했지. 그래서 내게 영향을 줬던 것은 오히려 카뮈의 <이방인>의 뫼르소였지. 근데 오랜 기간 동안 이런 걸 못하고 영화 하니까 재미도 없고, 그렇다고 한국영화가 그때 장사가 잘 된 것도 아니고, 긴 시간 힘들었던 거지. 정성일 _ < 흑조 >를 쓰면서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영화는 어떤 작품이었습니까? 송길한 _ 그 뒤에 본 것인데 클로드 를르슈의 < 남과 여 >를 볼 때, 아 이렇게 못 만드는가? 부러워했던 기억이 나요. 난 요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젊은 친구들의 창작과정이 불만이야. 그냥 머리만 써. 정말로 욕구하고 피나게 갈구하는 게 없으니까 안 되는 거다. 그게 뭔지 한번 찾아보고 생각해봐라, 그때는 그런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쓴 것 같아. 정성일 _ 시나리오 작가의 운명 중의 하나는 누가 자기 작품을 연출하느냐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쩌면 처음 등단하신 무렵에는 임 감독님을 만나지 않는 쪽이 다행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때 감독님은 다찌마와리 액션영화, 만주 웨스턴 영화. 무국적 무협영화를 만들면서, 지금도 그때 시절 영화가 모두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늘 말씀하고 계시니까요. 송길한 _ 맞어. 감독님도 그런 소리했어. 기억 남는 것은 < 애꾸눈 박 >뿐이여. 그때에도 내가 볼 때 이 작품은 꽉 짜여있고 좋았다고 하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구. (웃음) 정성일 _ 처음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을 때 당시에 한국영화에서 활동 중인 감독 중에서 선생님의 작품을 이 사람이 연출하면 참 좋겠다, 하고 염두에 둔 감독이 있었습니까? 송길한 _ 없었어. 그게 유일하게 그나마 눈에 띠었던 것이 유현목 감독이었지. 신상옥, 한형모, 이 분들은 흥행은 됐지만 내가 하고 싶은 세계와는 멀었고, 그나마 얘기를 하면 좀 소통을 할 수 있는 건, 그래서 내가 작가가 되고 나서 우연히 유현목 감독을 만났는데, 둘이서 술도 먹고 이러고, 지금은 알겠는데, 그때는 이 양반이 뭔 얘기를 하는지 몰랐어. 자기하고 하나 해볼 생각이 없냐 그러는데, 이게 판타지인지 뭔지 모를 소릴 하는 거야. 어느 날 불쑥 나를 만나더니 <삼일로 왕>이라는 시나리오를 딱 주고, 그때 삼일빌딩이 생길 때거든. 그게 삼일빌딩 건축주의 입지전을 쓴 시나리오야. 그게 도저히 마음에 안 맞는다고 내게 각색을 해달라는 얘기야. 그런 얘기는 쓴 사람한테 가서 얘기하시죠. 건축주를 하늘같이 모시자는 얘긴데 < 오발탄 > 정신은 다 어디 갔냐고 내가 막 항의하고 자리를 떴어. 철이 없었지.(웃음) 내가 그때 상당히 사나웠어. (웃음) < 만추 > 정성일 _ 그 당시 감독들 중에서 김기영 감독이나 이만희 감독은 어땠습니까? 이를테면 < 하녀 >나 < 만추 >는 어른이 된 다음에 본 세대이기도 하신데요. 송길한 _ 두 개는 다 좋았지. 난 이만희 감독 작품 중에 < 만추 >에 빡 갔지. (웃음) 이 소재가 이만희 감독한테 딱 맞은 거야. (< 7인의 여포로 > 때문에) 반공법에 걸려 감방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같은 감방에 있었던 사람이 휴가를 얻어 촬영현장에 있는 이만희를 만나러 온 거야. “너 언제 나왔냐” 그러니까 “석방이 아니라 휴가 나왔다.” 이게 포인트가 됐대요. 이게 정말 중요한 얘기여.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야. 이만희 감독이니까 그 생각을 한 거지. 이걸 여자로 바꾸면 어떨까 그림 나오잖아. 대단한 거여. 그 뒤에 < 삼포 가는 길 >도 처음은 괜찮았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빠져서 좀 그냥 그랬고. 정성일 _ 선생님이 등단했을 때 시기가 안 좋았습니다. 정확하게 그때부터 한국영화가 이중 검열과 외화수입을 위한 스크린 쿼터제로 긴 시간 동안 내리막이었습니다. 아마도 매일 매일이 선생님께 실망의 시기가 되었을 텐데, 그럼에도 임권택 감독님을 만나기 전 십년의 시간 동안 영화를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러 계셨습니다. 영화의 어떤 매력이 선생님을 실망 속에서도 붙잡아두었나요? 송길한 _ 내가 떠난다고 해도 세상에서 내가 딱히 할 만한 일이 안 떠올랐어요. 게다가 그 시절에는 내 노동에 대한 가치가 있고 대가가 있고 해야 할 텐데 그런 게 너무 없었어. 그 무렵에 찬스만 있으면 떠나고 싶었어. 더 볼 것이 없다. 예술이고 지랄이고 아무것도 없다. 완전히 공황 상태에다가 일종의 절망. 그래도 하자고 찾아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때가 참말로 웃기는 시대로 가잖아. 저급한 멜로드라마 아니면 얄개시리즈까지. 또 여자 시리즈가 십 년 동안 판을 쳤어. 나도 여자 시리즈 많이 썼어. ‘여자’자 안 붙으면 간판을 못 걸 정도였으니까. < 순자야 > 정성일 _ (웃음) 작품 제목을 찾아보니 많이 쓰셨습니다. < 순자야 >랄까... 송길한 _ (정색을 하며) 그 중에 < 순자야 >는 괜찮았어요. 그건 하길종 , 최인호 가 보고 깜짝 놀란 작품이야. 원래 그 제목이 <순자야 문 열어라>야. 그게 전두환 부인한테 문열어라하니 시나리오 검열에서 가만있었겠어, ‘문 열어라’를 빼고 그냥 <순자야>로 간 거지. 그때 한진에서 하길종이 < 한네의 승천 >을 하려고 했던가, 그랬는데 최인호 작가랑 제목만 보고 킥킥 웃은 거야. 근데 읽어보니 그게 아닌 거야. 그걸 보고 최인호가 깜짝 놀랐지. 형을 달리 보게 되었다고. 나도 재밌게 썼고. 그 내용이 트랜지스터 라디오 월부장사를 신성일 이가 하고 정윤희 가 순자를 했으면 더 재밌었을 텐데 (신성일, 이영옥 주연) 미스캐스트에다 감독이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 영화 나온 거 보니까 부끄럽더라구. 감독이 운명이란 이야기를 했잖아. 아무리 잘 써도 최종집행은 감독이 하니까 감독이랑 소통이 안 되면 안 되잖아, 그때 짐 싸려고 하는데 삼영필림에서 (기획실장을 하라고) 나를 부른 거야. 그때 월급도 꽤 빵빵했지. 작품도 하고 싶은 거 쓰고 니가 해라. 이렇게 제의가 온 것이지. 거기서 제일 처음 하고 싶어 한 게 임권택 감독이야. 회사에서 전폭적인 기획권한을 내게 줬으니까. 그때 레퍼토리가 뭐냐. 맨 처음 만난 게 김원일의 <노을>이었어. <짝코>가 신(新) 빨치산 얘기라면 그것은 원조 빨치, 구(舊) 빨치산 얘기였어. 어떻게 해방직후 빨치가 태어났는가, 그걸 찍으려면 세트를 다 지어야 하는데, 몇 번이나 강대진 사장 옆구리 찔러봐도 대꾸가 없어.(웃음) 임 감독님한테 소설을 한번 읽어보라고 했어. 근데 읽고 오더니 이런 걸 영화하자는 사람이 다 있네, 이러는 거야. 긴 소리 짧은 소리 할 거 없고. 회사가 이 세트 지어줄 거 같아요? 나보고 그래. 그걸 맨 처음 하려고 했었어. 판이 무너지려고 했었는데 삼영필름 부속 영화사에서 임 감독님이랑 나를 부른 거야. 소위 탱크 부대 얘기였지. 탱크 부대를 찾아갔는데 안기부, 보안사 요원들이 따라붙는 거여. 탱크가 뒤집어져 폭파하는 얘긴데, 소대장이 부하들을 살려내고 탱크가 폭발하는 바람에 장렬하게 죽었다는 신문기사인데 이건 반공영화나 우수영화상감이지, 우린 재미가 없었어. 그래도 일단 전방에 가봤지. 이 이야기는 소대장과 탱크 부대원간의 병영 생활이 어떻게 얽혀있는가가 키를 갖고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병영에서 머무르려고 했는데... 택도 없어. 완전 자포자기 하고 오다가 내가 < 짝코 > 얘기를 넌지시 했지. 여관방에 둘이 들어가서 소주를 한 잔씩 한 거여. 30년 동안 잡으러 댕기는 얘기인데 우리가 하자. 그렇게 시작된 거여. 정성일 _ 선생님께서 임권택 이라는 이름에 관심을 갖고 보기 시작한 첫 번째 영화는 무엇이었습니까? 송길한 _ < 잡초 >는 기억에서 좀 멀어지고 그렇게 와 닿지는 않더라고. 내가 깜짝 놀랐던 거는 그 < 족보 >. 아주 좋았어요. 주선태 로 상정되는 설씨 집안의 비극은 감독님의 직간접적인 체험이 없다면 그렇듯 생생하게 표현될 수 없다고 느꼈어요. 일제시대를 살아내면서 멸망하는 나라를 표현하는데 라스트의 만장행렬과 새파란 보리 싹이 돋아나는 황토 언덕을 보는데, 어휴 뭉클하게 하는 거요. 그리고 < 깃발 없는 기수 >, 해방 무렵에 전기부족으로 전봇대 불이 꺼졌다 들어왔다 하는 장면을 보면 정말 소품을 다루는 대가야. 그런 것들이 다 빈틈없고, 특히 선우휘의 원작 소설에서 간결하게 넘어간 대목들, 거기가 영화를 하면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대목들이 있는데 거기서 추가한 부분들이 정말 빛나는 거야. 단순히 영화를 본 게 아니라 괄목할만한 발견이었죠. 임 감독님의 세심하고 사려 깊은 연출력에 대해... 정성일 _ 임권택 감독님을 사람으로서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은 어떠셨어요? 송길한 _ 뭐랄까. 눈이 빛나고, 순발력이 뛰어난 건 이미 소문이 나 있었지만, 안으로 많은 얘기를 간직한 분 같았어요. 내가 임 감독님을 굉장히 순수하게 본 거는, 언젠가 대포집에서 내게 그러더라고. 송 작가 나 그렇게 순진한 사람 아니요, (웃음) 그때 알아본 거지, 임권택 감독에게 사실 어느 시간이 제일 기가 막히게 좋았냐면 제도권의 시간이 아닐까 싶어요. 이 양반은 부담이 없잖아. 이때가 최고로 좋았던 때고 충만한 때인 거지. 우수영화만 찍으면 되니까 얼마나 좋아. 우선 상업성에서 벗어나는 것만 해도 살판나는 거지. 이거 아는 사람 별로 없어. 그때 이 양반이 정리하고 앞으로 가야하고 침잠되고 그러면서 자기 성찰의 시간이 딱 온 거야. 그거 낭비한 사람 무지 많거든. 난 그걸 굉장히 대단하게 봐. 좌충우돌하며 깨달은 것도 있지만 정돈해가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유용하게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어. 정성일 _ 그래서 그 시간에 임권택 감독님만 살아남은 거군요? 송길한 _ 다 좋았잖아. 작품이 나쁜 것 없었잖아. 박스오피스에서 벗어나올 수 있었다는 건 정말 행복한 거지. 거기서 자기 하고 싶은 걸 한다고 생각해봐. 그걸 또 백 프로 활용한 것도 무서운 거야. 유일하게 살아남았잖아. < 짝코 > 정성일 _ 선생님과 처음 만난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 짝코 >입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짝코>는 어떤 영화입니까? 송길한 _ (잠시 생각) 일단은 획기적이었고, 그때 소위 흐름이란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 짝코 >에 대한 시점을 사람을 위한 내면적인 측면(에 두고 보면), 영화상에는 그렇게 안 나타나 보인다고 하더라도 서브텍스트가 굉장히 좋은 영화야. 내면을 읽어나간 거요. 형식적으로 플래시백은 늘 있는 것이지만, 플래시백이 현재진행형에 들락날락하면서도 극을 추동할 수 있는 힘을 갖느냐, 안 갖느냐, 그게 문젠데 묘하게도 힘을 받는 거요. 처음에는 다들 이상하다 생각했지. 그때는 영화진흥공사에서 어떤 영화든지 영화인들을 모아놓고 시사를 했어. <짝코>가 상영되는 동안 임 감독님이랑 나랑 뒤에 서있었어. 완전히 사람들이 빨린 거야. 송길한 이 술만 마시고 하더니 다시 봤다고 하더라고. 임 감독님도 표정을 보니 흐뭇해하더라고. 그때 플래시백이 참 많았지만 딱 줄자로 잰 것처럼 절묘하게 들어갔어. 플래시백은 내면의 흐름 이런 걸 모르면 안 돼. 그것이 살아있다는 거지. 지난 일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더 열 받게 하고 정서적으로 파란(波瀾)을 만들어내는 것. 거기서 서브텍스트가 들어가야 더 발전을 하거든. 그게 굉장한 생명력이야. 나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지. 영화를 보고서야 알았어. 임 감독님 말마따나 영화가 흐르는 방향, 영화가 가고자 하는 쪽으로 가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게 그 말이여. 겉보기에는 그저 소박해보이지만 그 양반의 철학이 제일 맞는 철학이여. 영화도 생물이죠. 가고 싶은 쪽이 있다고 그런데 우리가 작위적으로 만들어서 미끈하게 못 가잖아.. 굉장히 단순하고 철학적인 얘기야. 영화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 부단히 그 길만 천착해 온 게 임 감독님이 지금까지 작업을 이뤄낸 저력인거 같아. 크게 봐서. 정성일 _ < 짝코 >를 작업할 때가 등단한지 10년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 전까지 많은 감독들과 작업을 했습니다. 임권택 감독님은, 이 사람은 이 점은 좀 다르구나, 느꼈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송길한 _ 치밀한 준비성! < 짝코 >를 나하고 얘기하면서도, 앉았다 누웠다 뒹굴뒹굴하면서 얘기한 거 같아도 며칠 준비한 거여. 나한테 준비한 메시지가. 어떤 에피소드를 갖고 웃다가도 자기 절제, 흐트러질까봐서 우리 너무 웃는 거 아니여? 그럴 때 나는 매력을 느꼈어. 그때 작가인 나도 경계를 하게 되는 거야. 우리가 집필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에피소드 얘기하면서 웃는 건 당연한 건데, 거기까지 절제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 만만치 않네, 굉장하네. 무서움 같은 것이 느껴졌어. 정성일 _ 임권택 감독님이 < 짝코 >를 쓰기 전에 선생님에게 요구한 점이 있었습니까? 송길한 _ 없었어. 내가 초고를 썼지. 나는 다분히 그때 그 시절 검열을 솔찬히 의식했었어. 거기서 풀어지게 된 것, 내가 기뻤던 것이 뭐냐면,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인간으로 놔버리니까 그때부터 이야기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한 거야. 당신은 그 작품 준비하고, 나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쓰고, 그리고 이삼일 만에 만나서 쓴 거 보여주면 군소리가 없었어. 그 양반 특징 중 하나가 아주 기분 좋고, 그 작품이 마음에 들면 아무 소리 없는 거여. 원고지를 낚아채듯이 확 갖고 없어져버려. 수고했고 그런 소리도 없어. 본인도 벅차서 그런 거겠지. 나는 그게 작가와 감독으로써 최고 희열이라고 생각해. 정성일 _ 처음 작업하셨을 때부터 표현이 그렇지만 서로 궁합이 잘 맞은 거군요. 송길한 _ 처음부터 잘 맞았지. 왜냐하면 살아온 배경이랄지 피차간에 개인적 편차가 있다고 해도, 지금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에서 맞아 떨어지고, 살아있는 에피소드들이 둘 다 있거든. 지금까지 은밀하게 다져놓은 것들이 서로에게서 막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정성일 _ < 짝코 >는 플래시백이 몹시 복잡하게 진행됩니다. 시간을 압축시킬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이야기 안의 긴 시간 때문에 리듬이 흐트러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구성을 결정했을 때 어떤 위기감도 느꼈을 것 같습니다. 송길한 _ 당연하죠. 그런데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삼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어떻게 제한된 시간에 구겨 넣겠어. 정성일 _ 한편으로는 이전에 해 오셨던 작법에서 시행착오와 함께 훈련을 해 온 방법이 아니라 < 짝코 >에서 거의 처음 쓰다시피 한 작법이 아닙니까? 송길한 _ 그건 둘이 다 마찬가지야. 그래서 어느 정도 모험성도 있었다고 봐. 구성상도 그렇고 이야기도. 여기엔 그때의 냉혹한 검열에 대해 모험이 있었어. 그런데 검열에서 딱 핵심만 잘라냈어. 그들이 한수 위지. 그런 다음에 반공영화상도 두 번이나 타고. 우리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은 반공영화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여. 가만 두면 그럭저럭 살 사람들을, 이 많은 햇수 내내 둘이 도망가고 잡게 만들었냐는 거지. 이 두 사람의 긴 기간의 삶을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궁극적으로 무화(無化)가 되어버리는 이 허망한 삶, 이것을 안 그릴 수 없죠. 정성일 _ 시나리오를 쓰시면서 선생님만의 원칙이 있습니까? 이를테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경우 무조건 엔딩을 먼저 쓴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영화가 어떻게 흘러가도 엔딩을 향해 달려가서 길을 잃지 않으니까. 선생님만이 갖고 있는 그런 습관이랄까, 원칙이 있습니까? 송길한 _ 나는 엔딩을 설정하지만 절대적이지 않아. 변화 가능하다. 가변성을 두고. 엔딩을 정해두면 목적성이 있어서 좀 스피디하게 갈 수 있어도 이게 휘어지면 엉뚱하게 휘어진단 말이야. 언제든지 가변성이 있되 일차적으로는 엔딩이 있지. 그게 < 길소뜸 >같은 경우지. 이게 말하자면 글을 꾸리기 위한 나름의 계산이지. 이야기를 어떤 구조로 가느냐. 우리는 그냥 가보자, 엔딩을 설정하지 말자. 일단 글이 흘러가고자 하는 방향대로 따르되 많은 고민을 했어. 완성을 하고도. 우리 조선 사람으로서는 에미들이 갖고 있는 멜로드라마적인 속성이 있잖아. 어떻게 자식을 버려. 그래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이라이트지. 그렇게 통일을 본거지. 정성일 _ 선생님은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어느 정도 쓰고자하는 얘기의 배경을 취재하시는 지요? 이를테면 < 짝코 >에서 두 사람의 삶에 대해 배경이 되는 갱생원이란 장소는 범인들은 쉽게 알기 힘든 세계이지 않습니까? < 만다라 >의 산사 안의 스님들의 세계도 잘 모르는 세계고. 또 < 티켓 >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의 일상생활도 그렇고... 송길한 _ 그렇지. 나는 시나리오 쓸 때 절대 머리로 쓰지 마라 이거지. 발로 써라 가슴으로 써라. 가보지도 않고 비슷한 삶을 산 사람을 만나보지도 않고. 니 멋대로 규정화하고 작위적인 것을 쓰지 마라. 정성일 _ 배경이 되는 것을 늘 취재하세요? 송길한 _ 그건 필연적으로 하는 거지. < 짝코 >의 갱생원도 원래 갱생원이 아니여. 그냥 행려병자 병원이야. 이것을 회사에 얘기해서 서울시에 질문하니까 그런 사람들을 모아둔 데가 있어. 거기를 감독님이랑 나랑 갔어. 가보니까 완전 깡패 소굴이야. 대장은 고가의 외제 오토바이도 갖고 있고. 실제로 가보니까. 그리고 집도 절도 없고 이판 사판으로 사는 사람들은 다루기가 힘들잖아. 실장 이런 놈들은 주먹도 세고. 그리고 아마 갱생원 원장하고 커넥션 같은 다른 것도 있는 거 같아. 우리 작품이 그걸 얘기하려는 게 아니어서 관심을 껐는데 실제는 그런 상황이었지. 근데 그런 것은 다르지. <짝코>에서 군 내무반 같은 실내는 우리가 설정해야지. 왜냐면 갱생원 거기는 다 온돌방이거든. 카메라 워킹도 안 되고. 노숙자들이 밥만 기다리고 앉아있는데 극을 어떻게 진행하겠어. 일단 메인 세팅이 될 수 있는 곳은 다 가서 헌팅 해야지. 그걸 그러려니 하고 머리로만 하려고 하면 안 되지. 인물들의 삶의 터전이고 생활 현장인데. < 짝코 >의 최윤석 < 짝코 >의 김희라 정성일 _ < 짝코 >를 보고 있으면 두 인물이 연기를 통해 영화에서 구현되는 것도 그렇지만 시나리오에서도 두 인물이 주는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실제 모델이 있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습니다. 생생한 생기를 불어넣은 인물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특별한 작법이 있는 건지요? 송길한 _ 특별한 작법이 있는 건 아니고, 한국전쟁을 통과하면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나도 많이 봤고, 임 감독님도 많이 봤어. 하나는 음흉하고 교활하지. 짝코 같은 경우에. 이 사람이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지. 엄마 만나려고 고향집에 가는 거 보면 소년인데, 험한 세상 살다보니 그렇게 음흉해지고 교활해진 거여. 또 송기열 같은 경우는 오히려 심플하면서도 올곧았거든. 그러니까 편집증이 생긴 거야. 자기가 안했는데 했다고 하니까. 그건 평생을 갈 수밖에 없어. 도망 다니는 놈과 잡으러 다니는 놈은 톰과 제리가 되는 거고 이들이 갖고 있는 갈등이 정서적인 원한과 회한의 앙금이고 그러니 상당히 긴장이 살 수밖에 없지. 인물들이 뭘 해도 다 의미가 있는 것이고. 헛소리를 할 짬이 없지. 그러니 캐릭터가 살아나지. 정성일 _ 시나리오에서 어떤 인물을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영화에서 그걸 연기하는 것은 뼈와 살을 가진 배우이기 때문에 실제 누가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을 만들어냅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구체적인 배우를 염두에 둘 때가 있습니까? 송길한 _ 나는 천지차이라고 봐. 제일 처음에 짝코 는 김희라 를 찍어놨어. 송기열을 하려고 보니, 곽지균 이가 젊은 시절의 백윤식 을 데리고 왔어. 감독님이 나를 이렇게 보더라고. (웃음) 이게 소위 섹스어필한 데가 없어. 근데 최윤석 은 섹시한 데가 있어. 그때 텔레비전에선 알랭 들롱으로 막 떴을 때거든. 이놈을 짝코랑 비교하면 집요한 성격이 확 보이지. (잠시 생각) 시나리오를 쓸 때 미리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대부분 주인공은 상정이 돼. 감독님도 갖고 있고 나도 비슷하고. 뭐 누구라고 딱 지칭하고 거기에 맞출 수는 없는 거고. 시나리오 쓸 때랑 영화 캐릭터랑 편차가 많이 컸지. 김지미 랑 < 길소뜸 > 할 때도, 우리가 이 캐릭터를 밟아버리자. 아예 아작 내는 방향으로 가자했어. 김지미 씨가 쌓아온 기성 이미지가 있잖아. 이거 그대로 가져갔다가는 우리 셋 다 죽는 거지. 감독도 죽고 나도 죽고 배우도 죽고 영화도 죽고. 그러니까 그 얘기를 임 감독님이 나한테 가끔 해. < 잡초 > 때 김지미 보고 이기적인 에미의 모습을 한번 하라는데 죽어도 못하겠다고 했대. 그런데 결국에 이기적인 에미의 모습을 <길소뜸>의 화영에서 결국 한 거지. 그걸 임 감독이 굉장히 깊이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하더라고. <잡초>때는 그것까지는 못하겠다고 했는데 김지미가 <길소뜸>에서는 했거든. 정성일 _ 디테일에 관한 질문입니다. < 짝코 >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가 짝코가 지리산 토벌대에서 쫓기다가 점순이 손을 잡고 언덕에서 뛰어내릴 때 슬로우 모션으로 화면이 바뀌면서 김영동 의 음악이 깔리는 대목입니다. 제 질문은, 이 장면을 시나리오에서 찾아보니 슬로우 모션을 지문으로 써놓은 것입니다. ( S#_39. 지리산 계곡. 포화 속에 도망쳐 오는 짝코와 점순. 공비들도 뿔뿔이 도망쳐간다. 사방에 터지는 포탄과 총소리. 계속 달리고 있는 짝코와 점순. 앞서 도망치던 공비 하나가 총을 맞고 나뒹군다. 쫙 깔려 포위하고 있던 전경대원들이 일제히 사격한다. 너울거리듯 도망치고 도망치는 짝코와 점순의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계속되다가 멎어서면 더벅머리의 공비 하나가 두 사람 앞에 다가와 선다) 이건 연출의 권리라는 게 제 생각인데, 임권택 감독님과의 작업에서 이런 대목들은 미리 이야기를 나누신 것인가요? 송길한 _ 그것은 내가 썼을 수도 있어. 왜 그러냐면 이건 절박한 상황이라고. 슬로우 모션 효과가 뭐여, 발이 땅에서 안 떨어지는 거잖아. 사랑한 여자가 임신해서 데리고 도망가야 하는데 그게 우리에게도 안타까움이 있어야 되잖아. 막 쏘아대고 있는데. 모든 빨치산이 다 그랬을 거야. 급박할 때일수록 몸은 마음을 따라가 주지 않는 게 사람 아닌가? 아마 나는 그런 감정으로 썼을 거야. 하지만 나는 그런 (촬영) 부분에 일체 개입을 안 해. 그건 시나리오 작가가 할 일이 아니야. 감독이 할일이지. 그리고 임 감독은 절대 나에게 콘티에 대해 귀뜸 안 해. 나는 촬영현장을 거의 안 빠지고 갔거든. 그 장면을 슬로우 모션으로 한다고 하더라고. 당연히 난 좋았지. 말을 나누거나 그러진 않았어. 그래도 서로 아니까. 그리고 감독님이 검열관이었어. 며칠 만에 와서 보고 기분 좋으면 휙 나가고. < 짝코 >같은 경우는 시나리오 손 한번 안대고 그냥 찍었다고. 그건 이게 유일한 시나리오야. 그만큼 집필 전 사전협의가 충분했던 거죠. 정성일 _ 방에서 끝나지 않고 촬영 현장까지 쫓아갔다고 하셨는데, < 짝코 > 이전에도 그러셨나요? 송길한 _ 안 그랬어요. 어떻게 찍고 있나 우선 그것도 궁금했고, 어느 날은 현장에 갔는데, 임 감독이 나보고 넌지시 그러는 거여 “어이, 자기 감독 하려고 그러지” 대답을 했지. “걱정하지 마세요. 감독 안 해요. 이것, 시나리오 하나만으로도 가랑이가 찢어지려는데” 임 감독님 입장에서는 자기를 알고 그렇게 쉽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작가가 어디 쉽냐고. 그리고 작가가 현장에 있나 없나, 는 실제적으로 큰 차이가 있어. 유명한 얘기인데 가령 < 만다라 >때 후시 작업할 때 녹음실에 보니까 찍힌 게 녹음이 나온 거여. 지산이 “나 같은 짐승도 제도를 해주고”하는 장면이 있는데 ‘짐승’은 아닌 거여. ‘짐승’을 영어 번역하면 ‘애니멀’인데 여기서는 중생(衆生)이지. 근데 당시 시나리오를 인쇄하던 <영문사>에서 타자를 잘못 친 거야. 아무리 자기를 낮춘다고 해도 짐승은 아닌 거지. 그런데 그러려면 녹음을 새로 해야 하는데 녹음실에서 누가 좋아 하겠냐고. 그래도 바르게 가야지. 단어 하나지만 엄청 큰 차이가 있어. 그리고 안성기 와 함께 수학했던 도반 수관이 손가락을 불사를 때 인상만 쓰고 있는 거여. “감독님 지가 도통한 놈이 아닌데, 손가락에 불이 닿았는데 이마빡에 땀도 안나요?” “맞어. 땀 나야해…” (웃음) 작가는 그런 조그만 한 것들도 구체적으로 알고 있으니까, 애정을 갖고 또 정확하게 봐주니까. 임권택 감독하고 작업할 때는 거진 현장에 있었어. 정성일 _ 임권택 감독님과 < 짝코 >를 처음 작업할 때 가장 좋았던 점은 무엇입니까? 송길한 _ 둘이 죽이 맞는 것. 시대적 배경이나 얘기하는 것들이 착착 앵기니까. (웃음) 감독님이 고등학교 삼학년이면 내 나이는 초등학교 졸업할 때거든, 여섯 살 차이니까. 지금 청소년시절에서 청년단계로 갈 때가 감독님이었다면 난 소년이었으니까. 그때가 전쟁이라는 시국이어서 감독님도 나도 굉장히 민감했거든. 그런 과거의 시절이 분출이 되는 지점이 공유되니까 굉장히 좋았지. 하여튼 둘이 많이 웃었어. 정성일 _ 그러면 첫 번째 작업을 하면서 특별히 힘들었던 점은 무엇입니까? 송길한 _ 특별히 힘들었던 점은 없었어. 해야 할 얘기를 하고 있고, 해야 할 감독과 같이 하고 있다는 게 더 이상 좋을 수 없었기 때문에, 무슨 얘기도 두 번 얘기할 필요 없이 한 번에 거두절미하고 통하니까 얼마나 해피한 거겠어. 정성일 _ 제가 임권택 감독님을 1987년에 인터뷰하면서 외람된 질문이지만 “감독님, 이제까지 찍은 모든 영화중 한 번 더 다시 찍으라고 한다면 어떤 영화입니까”라고 질문 드리니 “< 짝코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어떤 점이 두 분에게 제일 아쉬웠습니까? 송길한 _ 많이 아쉽지. 우선 필름도 싼 이스트만 컬러인데 게다가 불량품이었고, 근자에 다시 한 번 보니까 내가 손대고 싶은 부분도 있고, 아마 감독님도 더 찍을 수 있는 부분도 있고, 보완해야할 부분이 꽤 있었어요. 정성일 _ 기술적인 부분들 말고 작품 내적인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아쉬웠습니까? 송길한 _ 내적인 부분을 보면, (잠시 생각) 본인이 리메이크하려고 했다가 부질없다고 생각했다고 하는 거는 지금 내용에서 크게 상황이 바뀔 수는 없다는 거지. 외면을 매끈하게 더 근사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원천적인 소스를 바꿀 수 없는 거지. 그때가 작품이 없어서 궁핍할 때가 아니었거든. 어느 날, 동숭로라고 생각되는데, 거기서 술을 먹는데 < 짝코 >를 다시 만들어보자는 그 얘기를 하는 거야. ''''''''좋지요'''''''' 나도 그 생각을 했거든.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 소리가 없어. 그리고 서로 해야 하는 작품이 있었고... 임권택 감독님은 본인이 프로로써 견지하고 살아왔고, 부단히 준비하고 노력하면서 살아온 것이 충무로 판에서 살아남은 비결이기도 했지만, 내가 보기에 감독님은 그래. 뒤늦었지만, 내 결론은 천재였어. 적어도 스토리텔링에 대해서는 천재였어. 존재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미스터리를 심도 있게 그려내는 스토리텔링의 달인이기도 하고, 나는 그 양반을 얘기하라면 이제 그것밖에 안남아. 작가로써 상당한 시간을 같이 겪었고, 떨어져서 쳐다보기도 했지만, 예찬이 아니라 임권택 감독님에 대해 냉정하게 말하더라도 달인이고 천재였어. 생각해봐. 아니면 백편 넘는 작품을 할 수 있겠어요. 그것도 서로 다른 소재를 소화해 내다니 놀라울 따름이죠. < 우상의 눈물 > 정성일 _ 다음 작품은 < 우상의 눈물 >입니다. 전상국 작가의 원작에 먼저 끌린 것은 두 분 중 누구입니까? 송길한 _ 감독님은 다음 작품이 준비되어 있어야 안심이 되는 분 같아요. 아까 언급했던 준비성! 하루는 나한테 < 우상의 눈물 >이라고 읽어봤어,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 단편을 전상국씨 만나서 판권을 사왔어. <우상의 눈물>과 <돼지새끼들의 울음> 단편 두 개를 합쳤어. 주인공(기표)는 낙제해 꿇었지만 동(同)학년으로 여대생이 된 애인을 설정하자. 너무 남자 애들만 나오니까. 그렇게 하고 간 거여. 정성일 _ < 우상의 눈물 >에서부터 임권택 감독님과 정일성 촬영감독님, 그리고 선생님, 어쩌면 198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팀워크가 갖춰졌습니다. 정일성 촬영감독에게 가장 높이 산 것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송길한 _ 임 감독하고는 < 신궁 >에서 둘이 이미 만났어. 일단은 풍광이었지. < 만다라 >에서 이게 특히 중요했는데 이 영화는 풍광이 없으면 안 되는 영화니까. 너무 관념적인 게 많으니까. 사토 다다오 평론가한테 <만다라> 알겠냐? 물어보니 안다는 거야. 표정이나 언어 리듬이나 풍광이나 백그라운드에 가진 영상들을 통해 감은 잡혔겠지. 관념 투성이의 그 언어들을 어떻게 알겠어? 어쨌든 <만다라>에선 풍광이 인물들의 심상을 많이 반영했지요. 정성일 _ 잠시만 < 우상의 눈물 >을 좀 더 질문 드리겠습니다. 그때 한국영화에서 하이틴 청춘물이 유행이긴 했지만 이 영화는 십대들이 주인공이긴 해도 하이틴들이 볼 수 없는 정치적인 알레고리의 영화입니다. 말하자면 관객이 없는 이상한 영화라고 할까요. 송길한 _ 이것은 군사정권에 대한 어떤 은유지. 전상국 의 단편소설이 갖고 있는 은유야. 권위 있는 담임선생이 아이들을 동원해 주인공의 순수한 야성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얘기지. 개성이 있어야 하는데 개인의 개성을 밟아 일사불란 통솔하는 얘기잖아. 전상국 씨도 보통 맹랑한 사람이 아니거든. 하지만 너무 짧은 단편인 거야. 그래서 전상국 씨의 다른 단편도 합쳐서 각색한 거죠. 나는 주제가 선명해서 오히려 그게 좋았어요. 전상국 씨가 그때 대학교 교수가 아니라 고등학교 선생이었거든. 그래서 애들을 잘 알아. 그걸 정치적인 시각으로 봤기 때문에 생생하게 끌어낸 거지, 하지만 이 영화는 어른 영화지. 그런데 이걸 제작한 영화사는 얄개 시리즈인 줄 안거야. (웃음) 그래서 (시나리오) 잔금 받을 때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얄개>시리즈인줄 알았는데 작품이 이게 뭐냐고, 나한테 그러는 거야. 그래서 눈 똑똑히 뜨고 소설 다시 봐. 그게 어디 얄개냐? 감독한테는 못 그러고 나를 만만하게 보고 막 그러는 거야. 내가 만만한가. 입금 안하면 회사 불질러버리겠다고 했지(웃음) (첫 번째 이야기 끝, 두 번째 이야기 계속) 인터뷰_ 11월 10일, 날씨 화창했지만 바람이 몹시 차가웠음. 정리, 진행, 사진_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