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영혼들을 위하여
- 감독
- 정적
- 제작년도
- 2006
<소년시절의 너> 중 / 사진: Far East Film Festival 대만, 중국, 홍콩을 아우르는 동시대 중화권 청춘영화는 어딘가 안전한 자리로 호출되곤 한다. 이는 가볍고 말랑한 감정의 외피를 두른 ‘틴 로맨스’나 ‘학원물’이 지배적인 인상으로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두운 골목과 방 한 칸을 배경으로 한 ‘도시 로맨스’, 혹은 성적 지향이나 계급적 주류 범주에서 벗어나는 ‘아웃사이더’의 지난한 성장 서사 또한 그 반경을 꾸준히 확장해왔다. 거짓 없는 미소와 서툰 고백에서 길어 올린 풋풋한 청춘의 초상과, 체제와 현실의 제약 속에서 너무 이르게 마모되어 버린 성장의 잔혹한 기록. 두 계열은 서로 다른 미학과 정서를 지닌 채 엇갈린 방향을 향하는 듯 보이지만, 성장의 희미한 슬픔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교차하고 중첩된다. 우리가 중화권 청춘영화로 부르는 범주는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이 영화들은 어떻게 하여 이토록 ‘범아시아적’ 생명력을 유지하는가? 질문은 자연스레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누군가는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구파도, 2011)나 <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조미, 2013)을 기점으로 삼을 테고, 또 다른 이는 < 남색대문 >(이치엔, 2002)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야를 조금 더 긴 역사적 궤적 속으로 옮기면, 중화권 청춘영화가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동시대 현상만은 아니라는 점이 보다 분명해진다. 우선, 대만 뉴웨이브와 중국 6세대 영화, 그리고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덜 논의되어 온 홍콩 뉴웨이브의 성취 속에서 그 정서적, 미학적 뿌리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하나 아닌 여럿: 중화권 청춘영화의 기원들 누구나 겪지만 결국 지나간 과거로 남게 될 통과의례의 순간. 대만 뉴웨이브는 이러한 청춘을 형상화하는 데 탁월했던 시기로 기억될 만하다. 교복 입은 인물들의 초상이 전면에 놓인 작품도 가히 많았다. 그 출발점에 자리한 < 광음적고사 >(에드워드 양 외 3인, 1982)의 옴니버스 구성 가운데 타오더천과 에드워드 양이 각각 연출한 첫 두 에피소드(“작은 용 머리”와 “기대”), 그리고 진곤후 감독의 < 샤오피 이야기 >(천 쿤하우, 1983)는 소년·소녀들의 작고 애틋한 바람결 같은 초상을 내세운다. 그 물밑으로는 미국 이민, 대학 진학, 도시 중산층 진입이라는 당대 사회적 분위기의 기대와 규범이 조용히 도사리고 있다. 학교와 가정을 중심으로 일상의 반복을 미묘하고 리드미컬하게 포착한 이 감각은 <남색대문>과 같은 영화들의 정서적 결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를 일깨우는 동시에, 오늘날 중화권에서 ‘작은 청신함’이라 불리는 샤오칭신(小清新, Xiao qingxin)의 감정 구조와 그것이 하나의 서브 장르로 체화되어 온 흐름의 잠재태를 내포하고 있다. [1] 그러나 이 계보는 허우샤오셴의 < 연연풍진 >(1986)을 비롯한 성장영화에서 에드워드 양의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1991)까지 대만 뉴웨이브 1세대가 소외된 젊은 세대를 응시해온 흐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영화들은 포스트-경제 기적 시기에 접어든 관점에서 계엄령 시기의 역사적 조건을 되비추는 장치로서 청춘을 호출하며, 어쩔 수 없이 감내하며 통과해야 했던 국면으로 그것을 바라본다. 그 풍경은 담담한 일상으로, 때로 서늘하고 비정한 상태로 각인되는 한편으론 감독들의 노스탤지어와 자전적 경향을 투사한다. 도시로 향한 젊은 연인들이 이뤄질 수 없는 첫사랑을 흘려보낸 기억으로 남기거나(<연연풍진>), 백색 테러의 광풍과 외성인이라 불린 본토 이주민들의 불안정한 삶의 궤적을 통과하던 청년이 끝내 파국적인 폭력으로 치닫는 시간(<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속에서, 청춘은 이미 상실을 예감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광음적고사>,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중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 Asian Film Archive ) 이러한 정조는 중국 6세대 영화에 이르러 또 다른 시선으로 변주된다. 1989년 이후 중국에서 독립영화 [2] 로 분류될 수 있는 체제 외부의 작품들이 활성화되어, 급격한 시장화 한복판에서 방향성을 잃은 청춘의 초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아장커의 < 소무 >(1997)를 기점으로 가시화된 이 흐름은 로우예, 왕샤오슈아이, 장위안 등의 작업으로 이어지며 6세대라는 미학적 진영으로 일컬어졌다. 소매치기인 주인공과 ‘사업가’로 변신한 옛 동료를 대조하며 중국 소도시 시장경제의 비루한 풍경을 날것으로 포착한 <소무>의 감각은 < 쑤저우강 >(로우예, 2000), < 여름궁전 >(로우예, 2006), < 북경 자전거 >(왕샤오슈아이, 2001), < 북경 녀석들 >(장위안, 1992) 등에서 목표를 갖지 못한 채 그저 머물고 떠밀리며 시간을 견디는 젊음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 6세대는 이처럼 국가 주도 계획경제와 개혁개방 사이의 격변기에 놓인 청춘이 조기에 소진되어버리는 감정 상태를 대변하는 성취를 보였고, 이는 세계 영화제 회로에서 환대를 받았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중국 본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독립영화’ 정신이 만개했던 때로 기록된다. 작가영화마저 상업영화 및 주선율 영화의 논리에 함몰되어가는 현 풍경을 떠올릴 때, 동아시아 청춘영화의 한 모델―즉, 비관적이지만 정직한 모델―을 제시한 당시 6세대의 성취는 그리움으로 남는다. 2010년대에 들어서며 독립영화의 ‘죽음’이 목격되기 전 [3] , 이러한 계보를 근과거까지 계승하며 그 정서적 맥을 잇고 있는 작품으로 리위 감독의 < 관음산 >(2010)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소무>, <관음산> 중 / 사진: IMDb( 1 , 2 ) 홍콩영화의 경우 상황이 조금 달랐다 할 만하다. 서극의 < 제일유형위험 >(1980)이 보여주듯, 초기 홍콩 뉴웨이브에서는 청춘의 권태와 분노를 폭발할 듯한 폭력과 뒤섞어내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담가명이 호화롭고 자신감 넘치던 당시의 홍콩을 배경으로 도시 노마드들을 그려낸 < 열화청춘 >(1982)과, 왕가위의 < 중경삼림 >(1994)을 비롯한 1990년대 작품들은 청춘의 감정 구조를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이어진 프룻 챈의 < 메이드 인 홍콩 >(1997)은 포스트-반환 시기 처음으로 등장한 뛰어난 청춘영화가 아닐까. 영화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두 소년과 이에 합세한 소녀로 구성된 아웃사이더들이 비가역적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는 점에서는 <제일유형위험>을 환기시키면서도, 한결 차분한 시선으로 홍콩의 내면적 심상에 집중한다. 한편 왕가위와 같은 홍콩 뉴웨이브 2세대의 동시대에 함께 활동한 임영동의 <학교 풍운>(1988)은 전형적인 청춘영화의 문법과 거리가 있을지라도, 학교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성장기 소년·소녀들의 위태로움을 그려낸 가장 ‘홍콩적인’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될 만하다. <제일유형위험>, <메이드 인 홍콩> 중 / 사진: IFFR , IMDb 중국 문혁 세대와 Z세대의 초상: <방화>, <소년 시절의 너> 그렇다면 지난 10년으로 범위를 좁혀 중화권 영화로 시선을 옮겨보자. 동시대 작품들은 어떤 청춘의 풍경을 담아내왔을까? 이 작품들을 한눈에 조망하기란 쉽지 않고 필자의 한계도 있기에, 이어지는 글은 그 흐름을 가늠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몇몇 인상적인 작품들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를 제공하고자 한다. 먼저, 중국에서 제작된 청춘영화들은 대만발 ‘샤오칭신’ 장르가 중화권 전반에 끼친 영향력을 입증하듯 캠퍼스 로맨스가 주류를 이룬다. 매력적인 주연 배우들의 청신함, 푸르른 여름 하늘, 첫사랑과 서투른 고백 등 이 장르의 관습으로 간주될 만한 요소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공부’ 자체가 단순한 성장담의 소재를 넘어 과열된 입시와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짓눌린 청춘 서사의 엔진이 된다는 점은, 중국 청춘영화만의 독특한 지점이다. 모범생 소녀가 불량스럽지만 순수한 문제아 소년의 공부를 도와주며 사랑이 싹튼다는 대만 영화의 공식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1)가 보여주듯 다소 귀여운 수준에 머물지만, 중국의 대히트작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2013)에 이르면 사뭇 다르게 변주된다. 이는 공부만이 ‘흙수저’인 자신의 유일한 생존 전략이라 믿으며 로맨스를 아예 거부하는 주인공의 철벽같은 마음을 공략하기 위한 작전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중 / 사진: IMDb( 1 , 2 ) 증궈샹 감독의 < 소년시절의 너 >(2019)는 중국발 학원 영화들의 흐름 속에서 가장 성공한 판본인 동시에 사회성 짙은 텍스트로 각인된다. 대입 시험인 ‘가오카오’를 코앞에 둔 시기, 주인공 첸니엔(주동우)이 한 소녀가 학교에서 자살한 현장을 목격한다. 죽은 소녀는 교내 가해자들의 악명 높은 괴롭힘에 희생되었음이 드러난다. 가해자들의 다음 표적이 된 첸니엔은 자신을 보호해 주려는 십대 거리의 소년(이양천새)과 운명적으로 엮인다. 영화는 입시 위주 고등학교를 지배하는 잔혹함의 심리를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탐구하며 시작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온 세상에 맞서 싸우는 두 십대의 서로를 향한 헌신과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순수한 로맨스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처럼 교육의 살풍경과 두 연인의 낭만적 비극을 대비시키는 방식은 미덕이라기엔 다소 한계를 노출한다.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에 책임이 있는 체제 내부의 어른들(교사와 경찰들)이 지나치게 선량하고 도덕적인 인물로만 묘사되고, 가해자들 역시 충분한 전사나 깊이 없이 평면적 캐리커처에 가깝게 제시되면서, 두 상처 입은 영혼들의 고립은 사회적 압박 못지않게 스스로 세상과 단절하려는 관계의 내향성에 의한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오카오’ 점수가 부르주아로의 격상과 잔인한 빈곤의 삶 사이 간극을 결정짓는 상황에서, 첸니엔이 통과해야 하는 절박함의 정동은 한 편의 ‘십대 오페라’ 같은 이 영화를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강력한 요소일 테다. <소년시절의 너> / 사진: IMDb <방화>(2017)는 문화대혁명 말기, 문공단(문화예술선전대)에 입대한 젊은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공간이 당대의 예술학교나 사실상 다름없었던 현실이 재현될 뿐 아니라, 영화 역시 학원영화의 문법을 상당 부분 따르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블록버스터와 풍자극을 넘나들며 < 집결호 >(2007), < 아부시반금련 >(2016) 등을 연출해온 중국의 대표적 감독 펑샤오강의 야심작이다. 무용수가 되기를 꿈꾸는 샤오핑은 문공단에 입성한 첫날, 자신을 마중 나온 선배 류펑에게 한눈에 반한다. 하지만 이타적이고 충직한 성정의 류펑은 정작 자신의 호의를 이용하기만 하는 피아노 반주자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영화는 마오쩌둥의 사망과 4인방 숙청, 그리고 1979년 중-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약 5년간의 격동을 통과한다. 그 사이 샤오핑은 재교육 시설에 수감돼 있던 아버지의 죽음을 접하고, 류펑과 샤오핑 모두 전쟁에 참전한 뒤 정신적·신체적으로 소진된 상태로 귀환한다. 하지만 <방화>는 문화대혁명이 야기한 전면적인 비극을 정면으로 성찰하기보다는, 학교 청춘물의 형식을 빌려 이들에게 고통을 안긴 공산당 간부나 상하이 상류층 자녀들과의 격차를 부각한다. <소년시절의 너>의 첸니엔처럼, 샤오핑 역시 수줍음과 서투름, 그리고 계급 지위로 인해 조롱과 배제의 대상이 된다. 즉, 시대의 광기보다는 오늘날 중국사회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비판 가능한 엘리트 부유층의 부패와 계급적 소외에 비극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다. 제목인 방화(芳华)는 ‘꽃다운 청춘’ 혹은 ‘향기로운 시절’을 뜻한다. 세월이 흘러 1990년대 중반, 두 주인공이 재회하는 장면에서 문공단 시절은 노스탤지어 깃든 기억으로 남고, 그 공식적 종언을 알리는 해산식 장면에서 샤오핑은 생애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춘다. 대만 청춘 영화의 속삭임: <조니를 찾아서>,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 한편 오늘날 대만 청춘영화의 흐름이야말로 젊은 시절을 ‘아팠지만 예뻤던’ 감정으로 재배치하는 ‘샤오칭신’ 감성 구조와 떼어내 설명하기 어렵다. 동시에 그 한편에서는 이전 세대 영화들이 간직했던 불안과 공허의 정조를 일정 부분 봉합하면서도, 이를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변주하려는 흐름 또한 포착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만 청춘 영화들은 불확실한 현재를 견디기 위한 하나의 정서적 피난처를 제공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일상 속에서 작고 사소한 것들, 곧 ‘작은 행복과 미세한 슬픔’을 섬세하게 건드리는 이 방식은 개인주의적 정서를 중시하며,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로부터 물러나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하려는 태도를 전시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평론가이자 제작자인 페기 차오는 자신의 제작 영화 <남색대문>이 ‘샤오칭신’ 장르로 호명되는 데 대해 조금 다른 관점을 내놓는다. 그 미덕이 “대만 사회에 뿌리를 둔 일상적 디테일의 축적을 통해 그려낸 삶의 초상이자, 자비로 가득하며 악의가 없는 세계”의 포착에 있다는 것이다. [4] 후앙시 감독의 < 조니를 찾아서 >(2017)는 이러한 설명에 잘 부합하는 텍스트다. 타이베이를 배경으로 한 세 젊은 인물의 이야기는 인상 깊은 오프닝으로 시작된다. 지하철에서 작은 상자를 들고 탄 여자에게 한 청년이 다가와 새장이 아니냐고 묻는다. 여자는 나중에 답을 주겠다고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전에 그런 상자에 새를 담아온 적이 있다고 덧붙인다. 같은 빌라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걸어가는 긴 시퀀스를 통과할 때까지도 이들이 우연히 스친 타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후앙시는 허우샤오셴의 < 남국재견 >(1996)과 < 자객 섭은낭 >(2015) 제작부를 거치며 선배 감독의 인장과도 같은 롱테이크를 체득한 인물이며, 이 영화에는 실제 허우샤오셴이 제작자로 참여했다. 영화는 인물과 그들을 둘러싼 주변을 어떠한 판단 없이 평등한 시선으로 관조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일상의 미스터리를 낯설고도 신선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이를테면 화면에 익숙해진 뒤에야 청년의 티셔츠 무늬가 작은 새들이라는 사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순간처럼, ‘조니’라는 사람을 찾는 이상한 전화들을 계속 받아오던 여자는 문득 옛 애인을 조니라고 부른다. 앵무새를 키우는 여자와 자폐 성향을 지닌 청년, 그리고 탈출한 앵무새를 계기로 이들과 관계를 맺게 된 수줍음 많은 집수리공이 왜인지 모를 기분 좋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이야기. 이는 느슨하며, 너그럽고, 명확한 해답은 없지만 삶에 대한 낭만을 포기하지 않는 순간들로 가득하다. <조니를 찾아서> 중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2020)을 논하기 위해서는 대만발 청춘영화의 또다른 국면을 호출해야 한다. 전형적으로 이상화된 여성성보다는 강인하고 때로 보이시한 여성 캐릭터가 선호되고, 완성된 사랑보다는 첫사랑의 어슴푸레하고 틀이 잡히지 않은 감정에 집중해 온 흐름 말이다. <남색대문>, < 영원한 여름 >(2006), <여친 남친>(2012) 등이 보여주듯, 대만 청춘영화에는 퀴어 서사와 삼각관계의 묘사를 통해 장르의 영토를 확장해 온 하나의 계보가 존재한다. ‘사랑과 우정 사이’의 미묘한 긴장,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종종 촉발되는 모호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섬세한 터치는 대만 청춘영화만의 고유한 미학을 구축해왔다. 패트릭 류 감독의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막 계엄령이 해제된 1980년대 후반 대만을 배경으로 한다. 아한은 가톨릭 기숙학교에서 버디를 만나 단짝 친구가 되고, 두 소년 사이에 형성된 감정은 학교가 여학생을 받기 시작하면서 시험대에 오른다. 신입 여학생 반반의 등장은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을 직면하도록 압박하는 계기가 된다. 표면적으로는 삼각관계를 통한 ‘사랑과 우정 사이’라는 테마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네 마음>은 정통 퀴어 영화라기에는 터치가 다소 가벼웠던 기존의 청춘영화 흐름에서 한 발 더 묵직하게 나아간다. 기숙학교 내에 공공연히 만연한 호모포비아와, 스스로 게이였음에도 아한에게 ‘교정’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캐나다인 신부의 모순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영화는 계엄령 해제라는 조용한 변화의 출발점에서 시작해,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시간으로 닿는다. 과거의 고통과 열정을 다시 마주하며 잃어버린 줄 알았던 시대의 기억을 되찾으려는 듯, 주제곡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이 흐르는 가운데 두 주인공은 죽은 신부의 교구가 있던 퀘벡의 밤거리에서 우연히 재회하는 결말로 향한다. 홍콩 독립 청춘영화의 새로움: <쪽빛 하늘>, <좁은 길> 마지막으로 최근 홍콩 독립 청춘영화는 대만의 청춘물이 제공하는 감정의 완충 지대나, 중국 본토 학원영화의 서사와는 사뭇 다른 궤적을 그려낸다. 이 글을 준비하며 마주한 가장 큰 수확은 홍콩 반환 이후 감독들의 본토행에 따른 영화 산업의 공동화나 정체성의 약화라는 오랜 우려를 불식시키는, 독립영화 진영의 새로운 세대를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저예산으로 제작되면서도 도시 청춘들의 표정과 삶의 결을 세밀하게 기록해 온 이 영화들은, 때로는 홍콩을 향한 러브 레터처럼 읽히기도 한다. 아모스 와이의 <닷 투 닷>(2014), <냅핑 키드>(2018), <먼 곳에서>(2022)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주목할 점은 홍콩영화발전위원회(Hong Kong Film Development Council)가 주관하는 신인 감독 지원 사업(First Feature Film Initiative)을 통해 입봉하는 신예가 점차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업은 신인 감독의 데뷔작을 지원할 때 홍콩 영화계의 거장 감독이나 베테랑 제작자를 멘토로 매칭해 주는 방식을 취한다. 2013년부터 시작된 이 세대 간 유기적 결합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 덕분에, 최근 홍콩 독립영화를 보면 타이틀 크레딧에서 제작자로 이름을 올린 익숙한 홍콩 감독들을 발견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쪽빛 하늘> 중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 그중에서도 <쪽빛 하늘>(2017)은 동시대 홍콩을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중 하나인 청킹와이의 극영화 데뷔작이다. <천하태평>(2008), <음악 인생>(2009), <하나의 국가, 두 개의 도시>(2011), <테이스트 오브 유스>(2016) 등 홍콩의 현실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들과 허안화의 <밤과 안개>(2009)의 각본을 쓰며 다져온 청킹와이의 서늘한 시선은, 부모 살해 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소재를 통해 홍콩 사회가 청춘에게 드리운 그림자를 냉정하게 응시한다. <쪽빛 하늘>에서 부모의 시신이 지역 저수지 인근에서 발견된 뒤, 어린 코니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한다. 이 강렬한 스릴러는 누가 저질렀는가를 이미 알려주고 시작하기에, 질문의 중심은 ‘왜’라는 동기로 집중된다. 빈곤과 학대로 점철된 코니의 가정환경, 그녀가 학교 친구를 공범으로 끌어들이는 과정, 그리고 사건에 깊이 관여하면서 점차 자신의 사적인 삶까지 흔들리기 시작하는 여성 수사관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선정적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세심하게 펼쳐지는 이 탐구의 형식은 평소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코니와 같은 인물들이 스스로 말하게끔 유도한다. 대만이나 중국의 청춘 학원 영화에서 ‘파란 하늘’이 젊음의 자유를 상징한다면, 이 영화의 어스름한 ‘쪽빛’은 홍콩의 비좁고 폐쇄적인 공간을 짓누르는 색채로 활용된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안전하지 못한 채 위협받는 십대들을 압박감 가득한 스릴러에 담아낸다는 점에서 <학교풍운> 같은 홍콩영화의 고전적 전통이 환기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부모 살해를 자행한 소녀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거부하는 젊은 여경의 윤리적 딜레마는 평행선을 달리는데, 이는 세대 갈등의 단면이자 출구 없는 미로 같은 도시에 갇힌 홍콩 현세대의 실존적 질식 상태를 대변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좁은 길>(2022)은 2019년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 당시 자살을 예고한 어린 시위대를 구하려는 청년 구조대의 이야기를 담은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기를>(2021)을 렉스 렌과 공동 연출했던 람섬 감독의 단독 연출작이다. 이 영화 역시 대만의 낭만이나 중국의 열망과는 또 다른, 도시 속에서 존엄을 지키려는 홍콩 청춘들만의 정직하고도 아픈 초상을 그려낸다. 코로나19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 영세 청소 대행업체의 일원인 노동자 자크가 늦은 밤 식당을 방역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주로 가라앉은 팬데믹 시기의 밤 장면으로 구성된 <좁은 길>은 조용한 노동계급의 고독을 포착하지만, 음울하거나 비관적이기보다는 사회 주변부의 고단한 상황을 응시하면서도 어딘가 미묘한 위로와 해방감을 안겨준다. 일손이 절실하지만 도시를 덮친 팬데믹 탓에 자크의 형편은 넉넉지 않다. 그는 충동적으로 지원한 캔디의 비공식적인 구직 요청을 받아들이고, 매일 밤 일당을 현금으로 지급한다. 비교적 어린 여성인 줄로만 알았던 캔디는 사실 어린 딸을 키우는 싱글맘이다. 두 사람은 감정적 방어 기제를 세우면서도 서서히 비즈니스 파트너에서 친구 사이로 발전하지만, 영화는 연애담을 전형화하지 않는 선에서 결말을 열어둔다. 람섬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지난 몇 년간 힘든 시간을 보낸 홍콩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었고, 우리 모두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자 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5] 취약함을 인정하는 용기는 <좁은 길>의 가장 큰 미덕이자, 고립 속의 유대를 형성하는 두 주인공의 서사에 깊이 공감하게 만드는 동력일 것이다. 청춘영화라는 틀 안에서 보자면 입체적으로 그려진 젊은 청소 노동자와 싱글맘의 묘사 자체가 인상적인 ‘캐릭터 스터디’라 할 만하다. <좁은 길> / 사진: IMDb *** [1] Papan Yang, “The Taste of Ice kacang: Xiaoqingxin Film as the Possible Prospect of Taiwan Popular Cinema”, The IAFOR JOurnal of Asian Studies, 2:1, 2016, p. 75. [2] Chris Berry, “Cinema: Reconsolidation of Party-State Hegemony in a Market Economy,” in M Dahl, M. Szatkowski & H. Kups (eds.), China under Xi Jinping: An Interdisciplinary Assessment , Leiden & Boston: Brill, 2016, p. 351. 중국 독립영화는 일반적으로 정부 당국의 검열을 거치지 않은 영화를 말한다. 이는 체제 내 상영이 허가된 예술영화(艺术片, yishupian)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공식적으로 상영되지 못하는 독립영화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중국 내 독립 영화제(난징, 베이징 등)나 대안적 상영 공간을 통해 소개되거나, 주로 해외 영화제를 거점으로 유통되는 경향을 보였다. [3] Chris Berry, ibid., p. 350. [4] Song Hwee Lim, Taiwan Cinema as Soft Power: Authorship, Transnationality, Historiography , London & NY: Oxford University Press, 2022. p. 129에서 재인용함. [5] Elizabeth Kerr, “ Portrait of a City: The Narrow Road ” , ZOLIMA citymag (접속일: 2025. 12. 26.). 박은지(영화 연구자) l 프랑스 탈식민주의 영화와 동시대 동아시아 영화를 연구하고 글을 쓴다.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 및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프로그래머. 지은 책으로 『지중해의 영화』, 주요 논문으로는 「장-뤽 낭시를 경유한 클레르 드니의 여정: ‘신체-지리학’ 영화, 생태적으로 그려내기」, 「부산 프랑스문화원과 트랜스로컬 시네필리아」, 「홍콩 누아르에서 포스트-홍콩 누아르까지 성찰적으로 바라보기」, 「두기봉의 밀키웨이 제작사와 포스트-1997 홍콩영화 정체성의 문제」 등이 있다.
< 오월의 눈 >(Snow in Midsummer)은 말레이시아 총 킷 옹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로, 지난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섹션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던 단편이자 말레이시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5.13 사건을 다뤘던 <장중한 무덤>(Cemetery of Courtesy)을 장편 프로젝트로 확장하면서 완성한 작품이다. 올해는 해외 주요 영화제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성취한 아시아 영화들이 많았던 해로 평가할 수 있는데, 특히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수상한 말레이시아 출신의 아만다 넬 유 감독의 < 호랑이 소녀 >(Tiger Stripes)와 더불어 말레이시아 신인감독의 활약이 도드라졌다. <오월의 눈>은 올해 베니스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중화권 지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대만금마장 영화제 두 편의 개막작 중 한 편으로 선정되었으며, 총 9개 부문 후보지명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오월의 눈>은 말레이시아와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가 공동제작으로 협업해 완성한 영화다. 말레이시아 출신이 대만으로 이주해 창작을 이어가는 것은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다. 차이밍량 감독과 호 위 딩 감독이 대표적이지만, 그 이후로도 상당수의 말레이시아 젊은 창작자나 감독지망생들이 대만으로 이주해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흐름에는 여러 배경이 있겠으나, 아무래도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이주. 정착하면서도 여전히 중국식 문화와 언어, 생활을 유지해온 화교 문화권이라는 공통기반이 있어서 가능한 지점일 것이다. 특히 말레이시아 출신으로 대만으로 이주해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작업을 이어가는 라우 켁 후앗 감독은 1950년대 말레이시아 공산당 운동의 역사를 다룬 <무단 외출>(Absent without Leave)과 <오월의 눈>의 주요 소재인 말레이시아 5.13 사건을 다룬 <도끼는 잊어도 나무는 기억한다>(The Tree Remembers), 그리고 대만인과 대륙에서 건너온 외성인이 충돌하자 대륙에서 건너온 국민당 정부가 유혈진압을 자행해 3만명 가량의 희생자가 발생했던 대만 2. 28 사건을 다룬 <야생 토마토의 맛>(Taste of Wild Tomato) 등을 통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근현대사를 가로지르며 잊혀진 역사를 재구성하고 영화적으로 복기하는 과정을 수행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가 공동제작한 <오월의 눈>은 최근 몇년간 도드라진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동남아시아국가들의 공동협업이라는 뚜렷한 흐름을 보여주는 케이스이기도 하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베트남 출신의 팜 티엔 안 감독의 < 노란 누에고치 껍데기 속 >(Inside the Yellow Cocoon Shell)은 베트남, 싱가포르, 프랑스, 스페인 등이 공동제작에 이름을 올렸는데, 감독의 전작이자 단편인 < 정신차려 >(Stay Awake, Be Ready)가 2019년 칸영화제 감독주간 단편경쟁에서 주목 받으면서, 싱가포르 젊은 프로듀서와 의기투합해 장편 프로젝트로 개발했고, 이후 유럽에서 주요 펀딩을 받으며 완성에 이르는 과정을 밟았다. 비슷한 예시로,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대상을 수상하며 주목 받았지만 자국인 말레이시아에서 개봉 당시 일부 장면이 삭제되며 검열논란을 일으켰던 아만다 넬 유 감독의 <호랑이 소녀>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독일 등 무려 8개 국가가 공동제작에 이름을 올렸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여러 프로젝트 마켓을 통해 주목을 모았던 장편 프로젝트들이 대체로 동남아시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프로듀서를 중심으로 공동제작의 형태로 개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몇 년간 이러한 경향이 더욱 도드라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특히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여러 공동제작 프로젝트에 대만 영화기관과 펀딩이 주요 파트너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파트너십과 돌파구가 필요한 한국독립예술영화계에도 적잖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오월의 눈>은 1969년 5월 13일 말레이계와 중국계 이주민(주로 중국남부에서 이동해온 호키엔족)이 충돌해 유혈폭동으로 이어진 5. 13.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그리고 중국계 이주민들로 연결되는 복잡다단한 말레이 반도의 역사를 단박에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화교의 숫자가 많았던 싱가포르를 억지로 독립시켰고, 그럼에도 말레이시아에 남아 있던 중국인과 인도계에 대한 차별과 분리가 이어지던 1960년대의 말레이시아는 민족주의의 발흥과 인종 차별, 그리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로 인해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폭발 직전의 인종 갈등을 촉발시킨 계기는 1969년 말레이시아 세번째 총선거 이후 3일째가 되던 5월 13일,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중국인들이 승리를 자축하며 거리에 나서면서 이에 자극 받은 말레이계와 충돌하면서부터다. <오월의 눈>의 제목은 오랫동안 중국인의 사랑을 받아온 대표적인 고전 희곡인 관한경의 『두아원(竇娥寃)』에서 왔다. 『두아원』은 하늘에 사무치는 두아의 원한, 이라는 뜻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목이 베어지는 참형을 당한 두아(영어로는 Dou E)가 처형 직전, 내가 죄가 없다면 초여름에 눈이 내리고 가뭄이 들 거라고 외치고 처형을 당했는데, 실제 그녀의 예언대로 서리가 내리고 가뭄이 들자, 조정에서 재조사에 나서 그녀를 음해한 사람들을 처형한다는 스토리를 지닌 일종의 잡극. 중국에서는 초등학교 과정에서도 소개되며 모든 연령대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이자, 13세기 중국을 배경으로, 당시 지배계층의 착취와 혼란스런 정치로 인해 고통 받던 민중들의 현실과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는 정치극이었으며, 불평등하고 정의롭지 못한 경우를 당하는 민중에 대한 메타포로 종종 언급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어제목으로는 『The Injustice to You E』 또는 『Snow in June』로 번역되었는데, <유월의 눈>을 차용해 <오월의 눈>으로 제목을 지은 것은 감독의 명확한 의도가 읽혀지는 지점이다. <오월의 눈>은 크게 두 챕터로 나눠진다. 첫 번째 챕터는 1969년 5월 13일, 당시 중국인 집단 거주지역에서 중국오페라 거리극 <유월의 눈> 공연을 준비하는 극단 사람들과 두 아이를 가진 중국인 부부의 하루를 따라가며 그날, 중국인 거주지역의 현장으로 관객을 데리고 간다. 두 번째 챕터는 2018년 5월 13일, 말레이시아 14번째 총선거 이후 4일째가 되는 날 시작하는데, 이 총선거를 통해 말레이시아에서는 61년 만에 최초로 여야 간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다. 1969년 5월 13일 당시, 살아남은 아 엥은 신문기사를 통해 5.13 사건 희생자들의 집단매장지로 추정되는 공동묘지터가 재개발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50년만에 아빠와 동생이 묻혀있을 수도 있는 매장지를 찾는다. 영화는 크게 두 챕터로 나눠지지만, 두 개의 챕터를 연결하는 역할은 거리극 <유월의 눈>의 주인공인 “두이 Dou E”가 맡는다. 중국인 거주지역에서 거리극을 무대에 올리는 극단의 주연배우인 두이는 첫 번째 챕터에서는 마제스틱 극장 지붕에서 유혈현장을 바라보며 위무의 노래를 부르고, 두 번째 챕터에서는 집단매장지에서 죽은 자들과 무명묘를 위해 위무의 노래를 부른다. 첫번째 챕터는 역사서에 기록된 문장에서 시작한다. “말레이 연대기 The Malay Annals”에는 “왕의 한센병은 감히 말라카 술탄에게 탄원서를 보낸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치료를 위해선 술탄의 발을 씻은 물을 마셔야한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기록은 말레이인과 중국인의 관계를 보여주는 주요한 텍스트로, 그리고 텍스트를 시각화하는 주요한 영화적 상상으로 재연된다.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딸을 데리러 온 엄마는 버스를 타고 아빠 아쿠와 아들이 있는 신사로 향한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아들을 위해 Datuk Gong (말레이와 중국의 신이 혼재된 형태의 신)에게 바치는 의식을 행하는 부부. 아빠는 인근 마제스틱 극장 티켓 2장을 구했다며 아들과 극장으로 향하고, 엄마는 딸과 함께 거리극 <유월의 눈>을 관람한다. 당시 마제스틱 극장에는 대만영화 <부심적인 負心的人>(The Jilted)이 상영중이었는데, 상영 전 광고로 보여지는 차기 개봉작은 말레이시아 영화 <송곳니를 가진 왕>(Raja Bersiong, The King with Fangs)인데,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민담을 영화화한 것으로, 우연하게 음식에 들어간 피맛을 본 왕이 그 맛에 취해 더 많은 피를 원하게 되면서 민중들을 학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방화와 살인이 시작되고, 엄마와 딸은 극단원을 따라 무대 뒤 공간으로 숨어들지만, 외부에 소리가 들리지 않아 대피하지 못한 극장 안 사람들은 모두 살육당하고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간다. 영화의 두번째 챕터. 2018년 5월 13일. 당시 엄마와 함께 살아남은 아엥은 중년의 나이가 되었고, 남편의 구박에도 무기력하고 지쳐보인다. 오랫동안 아빠와 동생의 시신을 찾아 다녔지만, 그동안 엄마는 죽었고, 아무 기록도 흔적도 찾지 못한 채 아 엥은 무력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당시 5. 13 사건의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집단 매장지가 재개발된다는 기사를 보고, 음식을 준비하고 쿠알라룸푸르로 향한다. 당시 중국인 집단거주지역이었던 푸두 Pudu는 이제 고층빌딩이 들어선 도심으로 변했지만 마제스틱 극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서 있다. 어려서 다녔던 초등학교 옆 가게에서 차를 마시는 아엥은 옆 자리에 있던 일군의 사람들이 공연에 늦었다며 재촉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들 뒤로 남아 있는 낡은 신사에는 버려진 두리안 껍질들과 쓰러진 작은 불상들이 있다. 택시를 타고 숭가이 불로에 있는 지역 집단 매장지로 향하는 아엥에게 택시기사는 이곳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이 있던 곳이라고 설명하고, 도착한 아엥은 그곳에서 아까 가게에서 만났던 무리들이 무덤 주변에 공연을 위한 무대를 설치하려 하지만, 공무원으로 보이는 관리인이 말리자 포기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어느새 나타난 두이가 죽은 자들을 위한 위무의 노래를 부른다. 시대를 구분하여 두 개로 나눠진 영화의 구조는 완전히 다른 양식과 형식미를 보여준다. 학살의 순간, 극장 공간 안과밖에서 운명의 순간을 맞이해야 했던 한 가족의 비극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우아한 움직임과 다다미 쇼트를 연상시키는 낮은 앵글, 그리고 형식미를 강조한 미장센은 일본과 대만의 고전영화로부터 받은 영화적 유산을 여지 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여러 지점에서 허샤오시엔 감독의 < 비정성시 >를 떠오르게 한다. 특히 거리극의 공연장면을 삽입하고 거리극과 현실 사건의 스토리를 교차하면서 엮어내는 방식과, 코끼리를 탄 말라카 술탄이 등장하는 장면은 기이하고 신비로운 마술적인 영화적 경험을 선사하는데, 이를 다루는 신인 답지 않은 영화적 야심과 완숙미가 돋보이는 장면들이다. 2018년에서 시작하는 두 번째 챕터는 동남아시아 예술영화의 전통과 특징들이 묻어나는데,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아엥의 무료한 일상과 지근거리에 있는 신사의 존재, 그리고 산 사람인지 영혼들인지 불문명한 사람들이 등장해 도시를 지나 집단매장지에 이르는 동안, 카메라는 유령을 쫓듯 계속 흔들리고 유동하듯 움직인다. 50년이 지나도 여전히 드러나지 않는 사건의 실체. 남은 기록이라곤 증언과 기억밖에 없는 그날의 진실을 매년 5월 13일이 되면 집단매장지를 찾아와 제사를 지내는 유가족과의 인터뷰를 통해 인물과 사건을 창조하고, 아름다운 음악과 빼어난 사운드로 그날의 현장을 영화적으로 복원해낸 감독의 뚝심과 용기에 찬사를.
* 한국영상자료원 강좌 <2022 영화 글쓰기 키트: 영화 기자가 알려주는 리뷰 작성>의 과제 선정작입니다. 이 영화를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하얀 눈밭 위에 놓인 빨간 자동차일 것이다. 이는 상처받은 두 사람이 만나 치유하는 서사의 정점이다. 끌어안은 두 사람의 형상에서는 다소 직접적이고 고전적인 위로와 연대가 묻어난다. 감독은 전작 <아사코>, <우연과 상상>에서도 두 인물의 만남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치유했다. 아사코는 우연히 전 남자친구와 동일한 얼굴의 남자를 만났다. <우연과 상상>3부의 나츠코는 우연히 첫사랑과 닮은 여자를 만난다. 여기 <드라이브 마이카>도 예외는 아니다. 우연히 배정된 드라이버는 꼭 가후쿠처럼 가족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겨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여기서도 가후쿠가 우연의 힘을 빌려 위로받고 나아가도록 만들까? 앞서 언급한 설산의 이미지를 보면 이는 결과적으로 사실이다. 하지만 <드라이브 마이카>에는 차별점이 있다. 그동안의 서사에서 연기자는 주인공이 아니라 상대편에 부여된 몫이었다. 주인공은 첫만남에 상대를 오인하는 쪽인 관객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인공 가후쿠가 아예 연극배우로 설정되었으며 그의 연극은 극중극 이상의 존재감을 갖는다. <아사코>와 <우연과 상상>을 떠올리면 주인공을 미사키로 설정하는 서사도 있음직하다. 그녀가 연극배우인 가후쿠와 그의 연극을 차례로 만나 상실을 극복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왜 이번에는 관객, 즉 연기를 듣는 위치(청자)의 시선이 아니라 연기자, 즉 연기를 발화하는 위치(화자)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여줄까. “그의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 그렇게 되면 난 이 역에 자신을 바칠 수가 없어.” 부인 오토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 이어지는 씬은 가후쿠의 클로즈업한 눈물도, 오토가 떠난 빈 집도 아니다. 그것은 연극<바냐 아저씨>의 실연 장면이다. 여기서 가후쿠는 공연 도중 연기를 중단한다. 무대에서 뛰쳐 나온 가후쿠의 등 뒤로 “나도 말할거야. 내 아내는 달아났다고.”라는 대사가 지나간다. 영화를 위해 발췌된 <바냐아저씨> 대사들은 매번 가후쿠의 상황에 부합한다. 하지만 이를 보고 대사가 곧 그의 속마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1차원적이다. 그보다는 연기가 불가능한 상태를 선언하는 이 장면이 영화 2부의 시작임에 집중해보자. 시간이 흘러 2부의 마지막은 이전처럼 연기가 가능해진 상태의 가후쿠를 보여주며 닫힌다. 사실 그는 배우들의 뒷모습만 보고도 ‘무언가 일어났음’을 캐치하는 능숙한 연기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락된 2부는 그가 대사를 발화할 수 없는 순간에서 시작해 대사를 발화할 수 있는 순간까지의 과정이다. 영화는 연기불가능 상태에서 출발해 가능 상태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을 우리가 따라가게 만든다. 발화의 사전적 의미는 ‘소리를 내어 말을 하는 현실적인 언어 행위를 하다’이다. 부인 오토가 죽던 날, 가후쿠는 자동차 안에서 시간을 끌면서 대화를 미루고 있었다. 갑작스런 상실은 가후쿠를 이 상황 속에 가둔다. 오토는 첫 등장부터 흐릿한 형체와 또렷한 목소리를 보여주었고 딱 그 모습대로 자동차 속에서 반복재생된다. 2년 후, 달리고 있는 자동차의 바퀴는 여전히 카세트테이프의 릴과 겹쳐 보인다. 가후쿠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청자인 오토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 ‘바냐아저씨’의 자리를 빌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후일 미사키에게 ‘아내는 2년 전 죽었어. 그 테이프를 듣기가 무서워졌니’라고 물은 적이 있다. 2년 전 죽은 아내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듣는 행동은 스스로도 무섭다고 생각한 걸까. 그럼에도 오토에게 할 말이 남아있는 한 가후쿠가 선택할 수 있는 언어는 ‘바냐의 언어’밖에 없다. 가후쿠가 연출하는 연극 <바냐아저씨>에는 독특한 점이 눈에 띈다. 다국적 배우들이 각자의 모국어로 대사를 하되 연극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점이다. 2부가 새롭게 시작되는 표면적인 이유는 가후쿠가 이 ‘다국어 연극’의 연출직을 위해 히로시마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곧 2부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영화를 추동하는 힘이다. ‘바냐의 언어’에 갇힌 가후쿠의 앞에는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언어들이 기다리고 있다.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인터뷰에서 “연기의 바탕에는 불안이 깔려 있다”는 사고방식을 밝힌다. 이 말은 야외 리허설 장면에서의 연출가 가후쿠를 떠올리게 한다. 연기 현장의 하마구치 감독과 가후쿠는 둘 다 ‘날 것의 섬세한 무언가를 어떻게 지켜낼지’ 고민하며 그 불안을 누그러뜨리려 노력한다. 야외 리허설 장면에서 소냐와 엘레냐 역의 배우들은 연기 도중 가후쿠를 등지고 선다. 가후쿠는 연기를 볼 수 없음에도 확신있게 “방금 무언가가 일어났어”라고 외친다. 여기서 가후쿠가 발견한 ‘무언가’를 탄생시킨 주체는 잎사귀를 주워 내민 이유나의 손이다. 수화언어로 연기하는 이유나의 등장마다 우리는 그녀의 손이 보여주는 움직임에 빨려 들어간다. 첫 등장인 오디션 장면에서 카메라는 ‘손의 언어’를 복잡한 동선과 숏의 변화 없이 차분하게 보여준다. 다른 배우들의 다국어 오디션이 카메라로 쪼개지고 붙여지는 동안에도 침묵 속 ‘손의 언어’는 굳건하다. 유나와 윤수가 마련한 식사자리 장면 또한 마찬가지이다. 카메라가 나머지 세 사람 의 등을 비추며 어둠 속에 위치할 때도 그녀의 손은 중앙의 빛나는 공간에 놓여있다. 가후쿠가 히로시마에서 만난 새로운 언어는 ‘손’외에도 존재한다. 그 중 한 가지는 침묵하되 매번 섬세한 응답을 보내 주는 드라이버 미사키의 언어이다. 미사키는 어디든 가 달라는 가후쿠의 질문에 긴말없이 ‘있다가 없어진 흔적의 공간’으로 차를 몬다. 가후쿠의 과거사를 들은 뒤엔 “소중하게 대해 온 게 느껴져 그의 자동차가 좋다”는 말을 고른다. 그 정점은 가후쿠가 생각할 만한 장소를 물을 때 그녀가 자동차를 툭툭 두드린 몸짓이다. “차 안이 좋겠네요”같은 말은 구태여 하지 않는다. 어쩌면 겉으로는 상응하지 않는 듯 보이는 문답이지만 드라이버 미사키가 가진 ‘운전수의 언어’는 결국 가후쿠를 아픔에서 건져낸다. 그를 설산 위의 빨간 자동차까지 데려간다. 다시 하마구치의 말로 돌아와 보자. 섬세한 연기의 탄생은 불안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그 불안은 ‘바냐의 언어’를 붙잡고 싶은 가후쿠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자신이 정해둔 청자를 놓치기 싫은 불안감이다. 자신이 선택한 언어는 곧 자신이 선택한 청자와의 연결통로를 만든다. 이 다국어 연극 속에서는 상대배우의 낯선 언어가 끊임없이 낯선 연결통로를 만들고 있다. 가후쿠는 이 연극의 연출가로서 배우들이 감정을 제외하고 대본의 글자만 읽게끔 지시한다. 미리 결정하고 외워서 재현하는 감정표현과 그것을 서로의 큐사인으로 사용하는 순간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정작 가후쿠 자신은 그것에 실패했다. 그는 오토가 가진 ‘꿈의 언어’를 습관적으로 되돌려 주었을 뿐이다. 꿈이야기의 소녀처럼 징표를 남기고 싶어한 오토의 부유를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가후쿠가 ‘대본의 언어’뒤로 숨고, 오토가 ‘꿈의 언어’뒤로 숨었을 때 둘은 ‘좀 더 제대로 상처 받았어야’ 했다. 경계했어야 했다. 야외 리허설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보면 이유나가 상대 배우를 등 뒤에서 껴안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는 불쑥 상대의 눈 앞으로 수화를 등장시킨다. 통상의 음성언어에서는 두 사람이 한 방향으로 서 있을 때 껴안지 않아도 의사 전달이 가능하다. 하지만 낯선 손의 언어는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나뭇잎을 주워 주며, 바냐 아저씨의 가슴과 턱을 두드리며 말한다. 이 낯선 연결통로의 생성은 ‘무언가’를 만든 힘이고 가후쿠와 미사키가 서로를 안아주게 한 동력이다. “실제로 섬세한 연기가 탄생하는 것과 가후쿠를 비롯한 상처받은 영혼들이 재생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 전개가 딱 맞아떨어진다”는 감독의 대담 속 한 구절을 통과하며, <드라이브 마이카>의 차별점에 대한 실마리가 보인다. 물론 영화는 전작들의 장기인 ‘어긋남과 기다림’의 테마를 가후쿠-오토의 관계 속에 능숙하게 녹여낸다.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숏은 ‘오토를 외면한 가후쿠가 상처를 직면하고 나아간다’는 하마구치 식 서사구조 역시도 또렷히 전달한다. 다만 이번에는 여기에 연기자 가후쿠의 시선을 덧붙인다. 연기 불가능 상태인 가후쿠에서 시작해 연기 가능상태인 가후쿠에 도착하는 과정. 가후쿠가 연극을 둘러싼 새로운 언어들을 만나 불안을 겪고, 그 불안에서 탄생한 섬세한 위로를 경험하는 과정. 왜 이번에는 맞은편인 연기자의 시선을 경험하게 하면서 이 서사구조를 보여주었을까. <아사코> 속 아사코의 맞은편에는 새 남자친구인 료헤이가 있다. 료헤이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아사코가 전 남자친구와 갔던 사진관에 놓인다. <우연과 상상> 속 나츠코의 맞은편에는 미카가 있다. 미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대화 속 첫사랑의 자리에 놓인다. 이때 주인공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상대를 오인하고 맞은편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가후쿠의 시선을 경유하며 이 시간이 단순한 오인이나 관찰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에게 연기를 ‘요구’하는 중임을 안다. 맞은편의 상대에게 낯선 언어와 낯선 연결통로를 제안하는 중임을 보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 제안이 상대방의 재생을 촉구한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이는 그동안 스크린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관객석에도 해당된다. 우리도 가후쿠처럼 하마구치 영화에서 주인공의 맞은편에서 자리한 채 낯선 언어를 제안받아 재생을 경험했을지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냐는 야외리허설 장면과 동일한 정면샷으로 가후쿠를 안아준다. 하지만 객석을 등을 지는 것이 아닌 정면으로 마주보며 안아준다. 그렇게 연습 당시 두 배우 사이에 일어난 ‘무언가’가 드디어 객석의 미사키에게도, 스크린을 보는 우리에게도 허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