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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펜(Arthur Penn) 감독이 연출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 1967>는 워너브라더스에서 제작한 영화로 1930년대 미국의 대공항 시대에 은행 강도였던 보니와 클라이드의 실제 삶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한국에서는 1968년 11월 16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보니와 클라이드”라는 실존 인물이 가진 상징성을 공유할 수 없었기에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제명으로 개봉하였는데, 영화가 “불우하게 태어나 내일 없는 젊음을 절망과 반항, 자포자기 속에서 불살라 1 ” 버리는 내용을 담고 있어 수입과 개봉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1966년 12월 2차 영화법이 개정되고, 1967년 시행령이 발효되면서 외국영화 수입과 상영절차는 보다 까다로워졌는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경우는 수입 승인 단계에서 거부를 당하기도 했다. 기존의 ‘외국영화 수입추천’ 과정이 ‘수입예정 외국영화 사전심사’로 바뀌면서 영화 내용에 대한 사전 검열이 보다 명시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벌어진 일이었다. 외국영화가 가진 대중적 영향력이 컸던 탓에 기본적으로 외화수입 추천과정은 그 자체로 검열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세기상사가 수입해오면서 왜색논란이 빚어졌던 <8月 15夜의 찻집(The Teahouse Of The August Moon, 1956)>은 1961년 10월 27일부터 1962년 10월 27일까지 1년간 총 3번에 걸쳐 수입추천 신청이 반려된 경우였다. 정책 당국은 영화상영 허가를 보류하면서 상영에 제동을 걸었지만, 결국 영화는 1963년 9월에 상영 허가를 받게 된다 2 . 외화수입업자들은 흥행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영화를 수입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당국의 입장에서는 수입된 영화를 엄격하게 금지할 경우 무의미한 외화(外貨)의 유출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손실을 고려해야 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심의 서류를 통해 검열 과정을 재구성하면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외화수입업자들이 피검열자의 위치에서 당국의 처분을 받아들이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몫을 정당하게 주장하는 위치에서 당국과 협상을 벌이는 행위 주체였다는 것이다. 심의 과정을 시간 순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사전 심사 절차 1) 수입예정 외국영화 사전심사 의뢰서 제출(1968.6.27.) 1968년 6월 27일 <우리에게 내일의 없다>의 수입사인 합동영화사는 수입예정인 영화에 대한 기본정보를 담은 ‘수입예정 외국영화 사전심사 의뢰서’를 문화공보부에 제출한다. 서류에는 영화 원제, 제명을 비롯한 제작주체의 국적 및 영화 종별이 기재되어 있다. 이는 1967년 2차 영화법 시행령이 발효된 이후에 달라진 형식으로 기존의 ‘수입영화 추천허가 신청서’의 양식에 비해 간소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별첨 자료로서 사전심사에 필요한 영화의 시놉시스(영문)와 수기로 작성된 영화의 줄거리, 기타 홍보자료가 첨부되어 있는데, 俺たちに明日はない(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제명의 일본어 포스터가 포함되어 있어 한국어 제명이 일본어 제명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사전심사 의뢰서 및 홍보자료 2) 수입예정 외국영화 사전심사 결과 통보 절차(1968.7.10.) 1968년 7월 4일, 문화공보부는 수입사인 합동영화사에게 “6.27일자 제출한 수입예정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사전심사 신청에 대하여는 당부가 심사한 결과 그 내용이 단순한 범죄행위로서 ‘추천할 수 없는 것’임을 통보”한다. 그리고 아래 서류와 같은 형식으로 두 개의 ‘검토의견’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영화사가 제공한 ‘줄거리’를 토대로 제출된 것으로 생각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시나리오 검토의견 1. 제명: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2. 원작자: 3. 각색자: 데이빗드 뉴맨 4. 제작자: W. B.社 (미국) 5. 내용: (생략) 6. 의견: 영화 내용의 대부분이 연소자들의 범죄(犯罪) 행각(行脚)을 주로 묘사한 것으로, 이는 사회정화에 폐해(弊害)를 가져올 우려가 있으므로 추천(推薦)불가함. 3) 수입예정 외국영화 사전심사 재의뢰 및 수입 허가 통보(1968.9.23.) 1968년 9월 17일, 수입추천이 반려되었다는 통보를 받은 합동영화사는 영화에 대한 미국 언론의 반응을 보여주는 논평들과 함께 사전심사를 재의뢰한다. 그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화공보부에서는 영화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하는 해외의 논평들을 근거로 영화에 대한 수입허가를 통보한다. 1968년 9월 23일에 승인된 결과통보 기안지에는 승인 근거로서 영화에 대한 평단의 반응을 옮겨놓고 있다. 다음 서류에서 알 수 있듯이, 해당 내용이 수기로 작성된 것이라 판독이 쉽지 않으나 몇 부분만 옮기면 아래와 같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관련 해외 평 해외평 현재까지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 중 최우수 작품의 하나 볼만한 가치가 많고 훌륭하게 제작된 탁월한 가치가 있는 영화. 미국의 금년 최우수 작품의 하나 노도와 같은 소용돌이. 영화의 예술작품. 스크린은 폭력으로 **되있으나 폭력은 의미심장한 것이고 이 둘 진실한 인간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잊을 수 없는 작품. 경의를 표한다. 2. 수입추천 절차 1) 외국영화 수입추천 신청서 제출(1968.9.26.) 수입예정 영화에 대한 사전심사를 마친 후, 합동영화사는 영화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담은 수입추천서를 문화공보부에 제출한다. 해당 신청서에 추가적으로 기입되는 사항은 영화의 규격(35미리 12권 3편)과 수입가격(로얄티 US $18,000, 프린트대 US $1,800)이다. 해당 문서는 한국영화제작자협회를 경유하여 문화공보부로 제출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수입추천 신청서류에는 허위신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실사고사를 받을 것이라는 내용의 각서와 외국영화 수입쿼터 사용확인서, 합동영화사가 대한연합영화사에게 오퍼를 양도한다는 내용의 양도서, 워너브라더스 일본지사와 체결한 계약서 사본 3통 및 국문으로 된 영화홍포 리플렛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워너브라더스 일본지사와 영화 계약 오퍼를 양도받은 대한연합영화사가 채결한 계약서의 경우, 계약 조건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서류라 생각된다. 계약서의 형태는 물품매도확약서(offer sheet)인데, 이는 1968년 5월 20일에 작성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해당 서류에는 판권대금과 배급 지역(한국) 그리고 2년간의 배급 라이센스 기한이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해당 계약이 취소불능신용장(irrevocable L/C)으로 작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계약을 통해 수익을 얻는 자(수익자)인 워너브라더스 사의 동의가 없이는 해당 계약을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물품 매도 확약서 이러한 사실을 통해 수입예정 사전심사 과정을 되짚어보면, 합동영화사를 대리한 대한연합영화사는 사전심사를 받기 전인 1968년 5월 20일에 이미 취소불능신용장으로 영화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였다. 살펴본 바와 같이 해당 건은 사전심사에서 수입불허가 통보를 받았었는데, 계약을 이미 체결한 상태인 영화사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뜻을 분명하게 관철시켜야만 했다. 영화수입업자로서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인데, 영화 판권 계약을 취소불능신용장으로 체결해야 하는 당시의 정황은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2) 외국영화 수입용 외화(外貨) 사용허가 및 수입 추천 절차(1968.10.2.) 1968년 10월 2일, 문화공보부에서는 외국영화 수입에 필요한 외화사용을 허가하기 위해 관계 기관에 협조 요청 공문을 발송한다. 수신처는 기존과 동일하게 상공부장관, 외환은행장, 서울세관장이며, 여기에 한국은행총재가 추가되었다. 해당 서류에는 부내참고로서 해당 건이 제 18차 베를린 영화제 출품작인 <망각>에 대한 보상 쿼터임을 명시하고 있고, 1968년 9월 23일 사전심사를 통해 수입가능 통보를 내렸음을 알리고 있다. 3. 실사검열 절차 1) 영화검열 신청서 제출(1968.10.28.) 영화의 배급자인 합동영화사는 1968년 10월 28일자로 영화검열 신청서를 접수한다. 서류에 기입된 작성일자는 10월 25일이나 서류가 접수된 시점은 10월 28일로 확인된다. 동일하게 해당 서류는 한국영화제작자협회를 경유(1968.10.28.)하여 문화공보부의 승인을 얻게 된다. 승인 일자는 1968년 11월 4일이다. 검열을 신청하는 주체는 별첨자료로서 시세완납증명서와 자립저축이행필증명서, 면허세납세증명서, 수입신고서, 외국영화수입추천서를 첨부하여 신청을 접수하게 된다. 2) 외국영화 검열결과 통보(1968.11.9.) 문화공보부에서는 11월 2일자로 검열을 실시하여 그 결과를 11월 9일에 영화사에 통보하였다. 합동영화사는 11월 9일자로 검열필증을 받게 되는데, 제한사항으로는 화면삭제 4개처, 화면단축 2개처, 대사삭제 3개처를 지정하였다. 제한 사항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검열 제한 사항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제한사항) 화면삭제 1. 그라이드의 지나친 나체 장면 2. 경찰의 습격을 받고 형 및 형수가 피투성이가 되는 장면 및 경관 살해장면 3. 경비대장을 배에 태워보내는 장면 4. 남녀주인공이 경찰의 무차별 총격으로 죽어가는 장면 화면단축 1. 보니가 노인(차에 매달린)을 소아 자동차 유리창에 피가 비치는 장면 2. 남녀 배드신(여자가 몸부림치고 남자를 더듬는 장면) 대사삭제 1. 목사의 딸이라 헌금을 좋아하지 2. 직업은 은행강도 3. 사업은 은행강도 (밑줄은 원문) 해당 영화의 경우, 내무부의 의견이 함께 제출되었는데 내무부에서는 “전체적인 범죄수법이 사회에 경종을 주는 것보다는 청소년들의 범죄 행위의 모방 또는 인간 사회생활의 절망적 기풍조성과 경찰에 대한 불신조장 등으로 사회적인 물의가 야기될 것으로 사료”된다는 의견을 보낸다. 이는 문공부 자체에서 검열한 의견서에 포함되지 않은 내용도 있는데, 결과적으로 검열필증에 기재된 제한사항은 이 둘을 종합한 것이었다.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검열의견만 놓고 본다면 수입 및 상영이 제한될 수준이었지만, 영화가 해외의 평단으로부터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사실로 인해 영화는 상영이 허가된다. 이를 통해 검열과정이 국가의 제도적 폭력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다양한 사회적 힘들의 경합하고 협상하는 지점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의 서류를 통해 검열과정의 구체적인 내막을 살펴보는 작업은 검열 과정에서 어떤 논리가 어떤 수준으로 개입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1. 「내일은 없다」, 《경향신문》, 1968.11.16. 2. 「<8月 15夜의 찻집> 검열 서류」(한국영상자료원 소장)를 기반으로 정리한 내용임.
1960년 영국에서 제작된 <비트 걸, Beat Girl>은 10대들의 성(性)과 비행을 다룬다는 이유로 제작에서부터 많은 논란을 낳았다. 1959년 3월, 영화의 오리지널 대본인 <스트립티즈 걸, Striptease Girl>은 영국영화검열위원회(The British Board of Film Censors, BBFC) 1 에 제출된 뒤 “기계로 찍어낸 쓰레기(machine-made dirt)”, “몇 년 사이에 본 최악의 스크립트(the worst script I have read for some years)”라는 혹평을 받았다. 이후 영화의 제목을 <비트 걸, Beat Girl>로 변경하고 누드 장면들을 대폭 삭제했으나, 검열위원회는 스트립티즈에 대한 묘사와 소년범죄, 그리고 기차 레일에 누워 담력을 시험하는 십대들의 치킨 게임 장면이 지닌 문제점을 강하게 지적하였다. 결국 영화는 스트립 클럽에서의 노출 장면을 비롯한 문제적인 장면들을 삭제당한 뒤, 관객 제한 수위가 가장 높은 X등급을 받고 개봉하였는데 2 작품에 대한 악의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영국 박스오피스에서 성공적인 성적을 기록했다 3 . <비트 걸>의 상영을 둘러싼 논란은 동시대적으로 영화를 개봉되었던 대부분의 국가에서 발생했다. 특히 성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전무하다시피 한 한국사회의 문화적 환경을 고려하면 <비트 걸>의 상영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었다. 실질적으로 <비트 걸>의 국내 상영은 4.19 혁명 이후 급진적인 사회변혁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제도적 변화를 빼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영화를 둘러싼 정책적 기조가 국가권력에 의한 일방적인 통제에서 민간기구에 의한 문화예술의 보호육성이라는 관점으로 이동하면서 영화 상영은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로 변경되었다.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 아래서 시장의 자율성은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될 수 있었고,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시장 주체들의 도발적인 기획은 영화심의를 둘러싼 논란을 야기했다. 1960년 10월 4일, 영화윤리위원회의 심사를 마친 후 아카데미 극장에서 상영 중이던 <연인들(Les Amants, 1958)>이 불륜을 소재로 삼기에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문교부가 일방적으로 상영 중지한 사건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트 걸>의 경우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외국영화에 대한 수입 추천권을 지닌 문교부는 수입업체인 세기상사가 <젊은 육체들>이라는 제명으로 해당 영화를 배급하고자 했을 때 이를 승인하였고, 오히려 영화윤리위원회(이하 영륜)에서 해당 영화가 사회풍기를 문란케 한다는 이유로 상영보류판정을 내렸다. 이후 세기상사는 해당 조치에 불응하며 상영을 강행하는데, 세기상사와 문교부, 그리고 영륜 사이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전개되는 <비트 걸> 논란은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와 맞물려 비로소 일단락되게 된다. 물론, 세기상사는 수입한 영화를 상영해야만 하는 입장이었기에 군부 정권이 자신들의 지배 체제를 수립한 시점에 다시금 상영허가를 신청하게 된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KOFA)에서 보관하고 있는 <비트 걸> 검열 서류는 영화의 수입과 상영, 그리고 보류통보와 재상영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을 재구성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정보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시간상으로 가장 앞선 서류를 살펴보자면, 1960년 11월 9일,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는 리버티 상사(Liberty Trading Company)가 도쿄 지부를 통해 세기상사로 계약관련 내용을 확인하는 전신(cable) 내용이다. [그림 1] 리버티 상사가 세기상사에 보낸 계약 내용 확인 서신 [그림 1]에서 알 수 있듯이 해당 전신은 1960년 10월 29일에 세기상사가 “BEAT GIRL”이라는 제목(안건)으로 리버티상사에 보낸 문의사항에 대한 회신이다. 리버티상사는 세기상사에 <비트 걸>에 대한 복사 권한을 허용하되 프린트 복사를 5본으로 제한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미루어 알 수 있는 내용은 10월 29일 이전에 양자 간의 영화 수입 계약이 체결되었고 원본 네거티브에 대한 듀플리케이션은 세기상사에서 진행했다는 점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검열 서류에는 계약서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판권대금을 비롯한 라이센스 기한과 같은 구체적인 계약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영화상영신고서’에 판권 대금이 “35미리 필름 10권 US $4,000”로 명시되어 있어 계약 사항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영화상영신고서’에는 “35미리 필름 10권 3편”만이 신고 대상에 올라와있는데, 복사판 계약을 5본으로 진행했던 정황을 미루어볼 때, 해당 시점에 나머지 2편에 대한 국내 배급 계약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에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림 2] <비트걸> 영화상영신고서 ‘영화상영신고서’의 경우는 해당 서식이 없어 기존의 ‘허가신청서’를 ‘신고서’로 수정한 흔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변경이 그만큼 급격하게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는데, 여기서 주목해볼 점은 해당 서류에는 제명이 “젊은 육체들”로 변경되어 있다는 점과 1961년 1월 18일에 사단법인 외국영화배급협회를 경유하여 문교부에서 승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외국영화배급협회는 배급업자들의 이익 단체인 만큼, 영화에 대한 심의권한을 독점하려는 영륜과 긴장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 협회는 영륜의 권한은 심의 결정이 아닌 권고 수준에 그쳐야 하며, 영화에 대한 최종적 검열 권한은 배급협회에서 자율적으로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젊은 육체들>이라는 제명으로 상영신고서를 제출할 당시, 수입사이자 배급사인 세기상사는 자율적인 심의를 통해 상당한 분량을 삭제하였다. [그림 3] 세기상사에 의한 자진삭제분 一 대사삭제부분 1. 사랑이란 섹스를 고상하게 표현한 말이죠(204) 2. 늙은 바보야(365) 3. 우린 양친과 무관계. 나는 나…. 제니에요. 완전히 독립된 신인간(632-634) 4. 내주엔 펑하고 세계가 연기로 화해 제로에요(650) 5. 법률엔(902, 905,906, 909, 913) 6. 굶주려선 정도를 못 지켜요 (985) 二 화면삭제부분 1. 나이트클럽 장면(5권) 단축 2. 무대 뒤에서 스테이지가 보이는 장면 단축 (529) 3. 노래 장면 삭제… 입과 입, 엉덩이와 엉덩이, 그대 욕적으로 수평선(846~847) 4 4. 제니가 옷을 벗는 장면(8권) 5. 스트립쇼에 유방 나오는 장면(10권) 6. 장면 변경 (1001에서 1010으로) [그림 3]은 1961년 1월 27일자 영화상영신고 품의서로서, 세기상사가 자체 심의를 통해 삭제한 항목이 명시되어 있다. 대사 6개처, 화면 6개처에 해당하는 삭제된 부분은 미풍양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 선정적 장면과 지배질서에 반하는 반사회적 내용에 주로 해당된다. 문교부는 자체 검열 결과에 대해 별다른 의견을 덧붙이지 않고 기안이 올라온 일자에 영화상영신고필증을 발부한다. 그런데 영화상영신고에서부터 신고필증이 발부되기까지 영륜의 심의과정을 반영한 문서는 보이지 않는데, 1961년 1월 28일자 《한국일보》의 기사를 참조해볼 때, 영륜에서는 상영신고 일주일 전인 1월 21일에 <비트 걸>에 대한 실사 심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해당 영화가 사회풍기를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로 전문위원 11명 전원일치로 상영보류 판정을 내렸다. 그리고 세기상사는 영륜의 판정에 불복하여 재심을 청구하였는데, 재심은 1월 27일 오후 7시에 재심이 열린 것으로 확인된다 5 . 그런데 주목할 점은 1월 27일은 세기상사가 자체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는 장면을 삭제하여 상영신고필증을 받은 날이기도 하다. 신고필증이 정확히 언제 발급되었는지 구체적인 시각은 알 수 없지만, <비트 걸>의 러닝 타임이 90여 분인 점을 감안하면, 신고필증의 발부는 영륜의 심의의견이 제출되기 전에 문교부의 일방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영륜의 최종 심의의견은 다음날인 1961년 1월 28일에 언론을 통해서 공개되는데, 영륜은 전원 위원회에서도 9대 7로 상영보류를 희망한다는 의견을 제출한 상황이었다. 세기상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젊은 육체들>로 개봉할 영화는 문교부가 고시한 행정적 절차에 따라 상영신고필증을 받았기에, 상영보류 의견은 받아들일 수 없는 권고였다. 따라서 예정대로 신문사에 광고를 게재하며 “강렬한 장면의 연속! 숨막히는 애욕묘사!”와 같은 자극적인 문구로 대대적인 홍보를 시작하였다. 물론 세기상사의 행보는 영륜의 심의의견이 단지 권고일 뿐 근본적으로 어떠한 구속력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영륜은 언론을 통해 사건을 쟁점화하고 문교부와 세기상사의 행태를 비판하는 여론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의미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영륜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화심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입지와 사회적 역할을 분명히 명시하게 되는데, 1월 28일 기사를 필두로 영륜의 존재의미를 부정하는 문교부의 처사를 비판하는 기사가 연이어 쏟아지고, 검찰도 풍기단속을 위해 절차상 직무 유기를 한 이들에게 형법을 적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게 됨으로써 <비트 걸> 논란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된다. 결국 문교부장관은 영륜의 존재를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으며 단순한 사무적인 실수일 뿐이라고 한발 물러섬으로써 사건을 일단락 지을 출구를 마련한다 6 . 이후, <젊은 육체들>에 대한 재심이 진행되었는데, 검열 서류에는 재심에 참여한 위원의 명단을 비롯하여 재심 과정의 내막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 4] <비트 걸> 상영신고 필증 회수 관련 문서 [그림 4]는 1961년 2월 9일, 문교부가 세기상사에게 보내는 공문으로 <젊은 육체들>에 대한 재심의 결과 상영신고필증을 회수한다는 사실을 통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외국영화 <젊은 육체들>의 상영을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보류함 (2) 앞으로 상영 시에는 제명을 원명대로 할 것 (3) 현재 이후 모든 선전 및 광고에는 '젊은 육체'의 제명과는 일체 무관하게 할 것 신고필증 회수를 통보한 날로부터 나흘 뒤인 2월 13일에는 각 도지사에게 공문을 보내어 “이미 흥행허가가 시행되었다면 긴급히 흥행을 보류시켜 주기”를 요청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14일에는 세기상사에 다시 공문을 보내어 복사판 2편에 대해서도 상영신고필증을 반납할 것을 요구한다. 앞서 전신(cable) 내용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세기상사는 복사판을 5본 제작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는데, 첫 번째 상영신고서를 제출할 당시에는 3편만을 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2편의 복사판에 대한 상영신고는 별도로 신청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실질적으로 <젊은 육체들>이라는 제명으로 영화를 개봉할 예정이었던 극장이 대한극장(서울)과 문화극장(부산) 그리고 천일극장(광주)이었던 점을 감안해보면 세기상사는 1차적으로 위의 세 극장과 상영계약을 체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2편의 복사판에 대한 계약이 체결되고 그에 대한 상영신고필증을 발부받았을 것인데, 2월 14일의 문서는 해당 건에 대한 보류 통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교부의 일방적인 신고필증 회수통보는 세기상사가 수입추천을 받을 시점인 1960년 11월 29일에 작성하였던 “각서”에 근거한 조치였다. 뿐만 아니라 문교부는 세기상사로 하여금 회수 통보를 받은 즉시 “서약서”를 쓸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할 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포괄적인 내용의 ‘각서’와 ‘서약서’는 행정적 절차의 미비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책임을 민원인에게 지우고 그에 따른 행정적 처분을 받게끔 한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사후적인 검열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즉, 4.19 혁명 이후 검열제도의 폐기는 그 의의와 함께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는 만큼, “각서”의 억압적 효과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림 5] <비트 걸> 상영신고 필증 재교부 관련 문서 [그림 5]는 2월 15일 세기상사가 제명을 <비트 걸>로 변경 후 신규로 상영신고필증을 발급받기를 희망하고 이를 허가해줄 것을 요청하는 품의서이다. 상영을 보류하지 않는 조건으로 문교부에서는 “<비트 걸>에 대한 선전 및 광고에서 ‘젊은 육체들’과 전혀 무관하게 할 것”과 “문제의 영화 운운하는 문구를 삽입치 못하게 할 것” 그리고 “영화 상영 시에 있어 관람객을 비롯한 일반여론을 충분히 파악하시어 물의가 있을 시에는 즉시 보고할 것”을 명시한다. 이와 같은 조치는 영화배급사인 세기상사가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를 이용하려는 시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라 판단된다. 그러나 세기상사는 다음날인 2월 16일, 영화의 선전과 광고가 아니라 “사과문”의 형식으로 신문광고란에 “사회 저명인사 중에는 극력 <젊은 육체들>을 찬양한 바도 있었으나 당국의 요청에 의해 <젊은 육체들>을 <비트 걸>로 개제하여 상영 7 ” 하게 되었음을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기상사의 행태는 결국 문교부로 하여금 상영을 중지케 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결과가 된다. [그림 6] <비트 걸> 상영 중지를 요청하는 문교부의 공문 1961년 2월 19일 문교부는 서울특별시 교육감과 각 도지사에게 <비트 걸> 상영 중지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한다. 해당 문서에는 상영중지 처분의 이유를 “상영 후의 제반 사항을 고려하여 동 영화상영을 당시에 배급회사인 세기상사주식회사 우기동으로부터 수리한 별첨 각서와 상영계획서에 의거하여” 상영계획에 있던 극장에서 “재상영 및 동일 극장의 장기 상영을 일체 중지”할 것을 명령한다. 당시의 개봉이 계획된 극장은 대한극장, 문화극장을 비롯하여 대구의 제일극장, 광주의 동방(東方)극장, 그리고 인천의 동방(東邦)극장 5곳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후의 신문기사와 관련 검열 서류를 참조해보면, 서울지역에서는 2, 3류 극장은 제외한 개봉관 상연은 제한적으로 허가된다. 2, 3류 극장의 경우 청소년들의 입장을 단속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영화 상영을 개봉관에 한정한다는 논리인 것 같으나, 어째서 서울 지역만 예외로 두었는지는 현재의 서류만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영화수입추천에서부터 상영신고필증의 발부까지 문교부의 고시에 따라 절차를 밟아왔던 사안이었던 만큼, 세기상사에게 일방적인 손해를 입힐 수 없어 마련된 일종의 중재안 정도일 것이라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비트 걸>을 둘러싼 논란은 영륜의 권고안을 받아들여 서울의 개봉관에 한정하여 상영을 하게 됨으로써 일단락된다. [그림 7] <비트 걸> 재상영 허가 관련 서류 [그림 7]은 5.16 이후 정부조직이 개편된 뒤 세기상사가 공보부에 상영보류 해제를 신청했던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서류이다. 해당 문서는 1961년 12월 6일에 작성된 품의서인데, 그보다 앞서 1961년 11월 14일, 세기상사는 공보부 장관에게 상영보류해제와 관련하여 서신을 보낸 것으로 확인된다. “개봉 후 영화의 교육적 가치”가 인정되었고, “혁명 후(5.16 쿠데타를 의미) 이와 유사한 수편의 영화가 국내에서 상영된 사실”을 참작하여 상영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후, 1961년 12월 6일, 공보부로부터 해당 영화가 “2월 18일로 상영보류된 작품이나” “서류고사 및 실사고사를 통하여 내용을 검토한 바 관객으로 하여금 저속한 감정을 도발할 우려가 있는 스트립쇼- 장면을 삭제하고 상영함이 무방하다”고 판정을 받고 재상영을 위한 허가증을 받게 된다. 검열 서류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해당 영화에 대한 검열이 8월에 이미 실시되었다는 점이다. 군과 법무부, 민간 인사(추정)로 구성된 검열 위원회는 해당 영화에 대해 양가적인 결과를 내어놓는데, 역설적이게도 군에서 파견된 오세용 소령만이 “반항이 그 생리가 된 젊은 세대가 범하기 쉬운 악풍조의 감염을 부모들의 사랑과 조언으로 미연에 방지해야 된다는 것을 암시한 영화”로서 이를 검토한 결과 “스트립쇼를 하는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야비하고 저속한 감정을 도발할 우려가 있으니” 해당 “장면만 삭제하면 상영하여도 가하다고 사료”된다는 입장을 내어놓는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상영허가가 되었고, 그 권리는 2년간 보장이 되었다. 검열 서류를 통해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1971년 6월에 세기상사가 다시 한 번 <비트 걸> 상영허가를 신청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검열 당국은 해당 영화에 대한 권리가 세기상사에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상영허가를 반려한다. 이후, 세기상사는 자신들이 가진 권리를 입증함으로써 권리 상에 문제가 없음을 보이고 문제가 되는 장면을 삭제하여 재심을 요청하는 의견을 전달한다. 그러나 검열당국은 “전체적인 영화의 내용이 문제되므로 화면 일부를 제거하여도 상영이 불가하다고 사료되어, 현재로서는 허가할 수 없으니” 이를 반송한다는 의견을 통보함으로써 상영금지처분을 내린다. <비트 걸> 검열과 관련된 일련의 서류들은 동일한 영화가 정책 당국의 입장에 따라 어떤 처분을 받게 되며, 그 과정에서 시장 주체는 어떠한 방식으로 대응하는지, 그리고 그들 사이의 역학 관계는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어 한국영화사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되리라 생각된다. 1. 1912년에 설립된 영국영화검열기구(BBFC)는 비정구기구로서 현재는 영국영화등급분류위원회(The British Board of Film Classification, BBFC)로 그 명칭과 기능이 변경되었다. 2. 1960년대의 영국의 영화 등급분류 기준은 U등급(Universal, 전체관람가)과 A등급(Adult, 성인동반 관람가능), 그리고 X(16세 이상 관람가능)등급으로 나뉘었다. 따라서 <비트 걸>의 X등급은 한국의 현행 영상물등급분류 기준으로 따지면, 청소년관람불가 등급 정도라 할 수 있다. 3. 「Beat Girl」, Wikipedia. (URL: https://en.wikipedia.org/wiki/Beat_Girl) 4. 의미를 알 수 없음. 5. 「<젊은 육체들> 말썽, 사회적 악영향을 우려하여」, 《한국일보》, 1961.1.27. 6. 「패륜영화의 상영과 극장가의 환경정리」, 《경향신문》, 1961.2.9. 7. 「영화 <젊은 육체들>에 대한 사과문」, 《경향신문》, 1961.2.16.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하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국민적 합의에 기반한 외교 정책은 부재했고 식민지배의 역사적 책임은 온전히 제기되지도 못한 채 ‘경제난 해결’이라는 미명으로 ‘경제협력자금’ 3억 달러에 협상은 서둘러 종결되었다.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태평양 냉전 질서 아래서 종용된 화해였고 굴복이었다. 그 결과 국민적 반발은 극에 달했고, 1964년 4월에는 박정희 정권을 탄생시킨 ‘민족적 민주주의’가 기만적인 구호였음을 폭로하는 ‘화형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6.3 학생운동으로 확대된 시민적 저항은 결국 위수령과 계엄령이 발동되면서 진압되었는데, 협정이 체결된 7차 한일회담은 그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열린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한일협정은 ‘굴욕외교’, ‘구걸협상’으로 표상되었다. 식민지 역사를 안고 있는 민족이 가질법한 분노와 울분이 투영된 현실인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는 신(新) 식민지적 종속 관계를 예기하는 모종의 불안과 두려움도 함께 섞여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지점은 일본에 대한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정서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잉여, 혹은 복합적이고 양가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식적인 민족 서사의 문법과 달리 대중문화를 매개로 사적영역에서 작동하는 일본에 대한 정서는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했다. 식민지 역사를 안고 있는 민족의 근본적인 비극은 헤게모니를 지닌 식민국의 문화적 감성을 향수(享受/鄕愁)하게 된다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장은 이러한 대중의 부인된(disavowed) 욕망을 기민하게 포착해냈다. 거리의 가판대를 메운 ‘왜색잡지’와 다방에서 들려오는 일본 대중가요는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일본을 우선 알고 거기에 대처할 민족적 주체성 확립해야 한다”는 논리는 “노도처럼 밀려들어와 우리의 말초신경을 간지럽히는” 1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 금기와 선망이 착종된 양가감정의 표현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영화계에서는 한일친선과 문화교류 문제가 적극적으로 논의된다. 물론, 일본영화 수입과 한일 합작영화에 기대를 거는 측은 외국영화 수입업자들이었다. 방화제작자들은 일본과의 합작영화는 미끼일 뿐이며, 이를 통해 일본 자본이 국내 영화제작계에 유입되면 한국영화는 일본의 영화산업에 종속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한편, 정책당국의 입장에서는 한일협정에 비판적인 국민감정을 억누르기 위해서라도 민족주의 정서에 기대어 일본대중문화에 대한 통제를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1965년에 내려진 <동백 아가씨> 방송금지 조치는 단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수입업자의 입장에서는 일본영화 수입이 개방되면 그로부터 발생하는 이익이 분명했기에 자신들의 뜻을 인적교류에서부터 단계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했다. <잊지 못할 모정(Typhon sur Nagasaki, 1957)>를 수입 배급했던 세기상사는 누구보다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행위 주체였다. ‘한국영화’ 최초로 일본배우가 캐스팅되어 논란이 되었던 <총독의 딸>(1965)은 세기상사가 제작한 영화로 제작단계에서부터 공보부와 마찰을 빚었다. 세기상사는 공보부의 승인 없이 단독으로 촬영을 진행했고, 결국 영화는 상영금지 처분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이 있다고 하여 정책당국이 일본문화를 전적으로 배척할 수는 없었다. 일본과의 수교를 맺은 박정희 정부로서는 자유아시아의 우방이자 이웃으로서 일본과의 친선과 우호를 강조해야 했기에 한편으로는 교류의 방식과 정도를 제시해야 했다 2 . 이와 같이 일관된 원칙이 작동될 수 없는 틈으로 일본영화계와의 교류를 시도하려는 기획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는데, 제작의 측면에서는 일본과의 인적 교류와 로케이션 촬영을 확대해나갔다면, 외화수입의 측면에서는 일본인 배우가 출연한 서구 영화를 수입 상영함으로써 일본을 금지하는 제도적 기준을 완화시키려 노력했다. 일본영화에 대한 문화적 금기의 핵심은 배우였다. “제작신고에는 일본에서 필요한 장면만 찍겠다”고 로케이션 촬영 승인을 받은 뒤 현지에서 일본 배우를 출연시킴에 따라 촬영중지를 통보 받은 <고안>(최무룡, 1966) 3 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의 공보부의 입장은 “로케와 일본인의 기술지도는 무방하나 일본배우의 출연은 아직 허가할 수 없다” 4 는 것이었다. 일본 배우의 출연은 외국영화를 수입하는 데도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1965년 MGM에서 제작한 <8월15야(夜)의 찻집(The Teahouse Of The August Moon, 1956)>의 경우,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에 출연하여 국제적인 인지를 얻은 교 마치코(京マチ子)를 비롯하여 다수의 일본 배우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수입추천을 승인 받지 못했다. 이후 세기상사는 진정서를 제출하며 지속적인 민원을 통해 수입 및 상영 허가를 취득하게 된다. <잊지 못할 모정>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경우인데, 심의 서류에는 세기상사가 자신들의 기획을 관철시키기 위해 한일수교의 논리와 검열행정의 내적인 일관성 그리고 상영보류에 따른 경제적 피해를 거론하여 행정당국을 압박하는 정황들이 담겨 있다. 사실, 이브 샴피(Yves Ciampi)가 연출한 <잊지 못할 모정>은 1957년에 제작된 영화로 나가사키의 조선소에서 일하는 선박 기사 말샤크(Jean Marais)와 노리코(기시 게이코, 岸 惠子)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어 왜색시비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세기상사는 1964년 9월 영화를 수입한 뒤 1966년에 상영 허가 신청을 접수한다. 1966년 시점에서 외화 수입과 상영 과정은 크게 1. 외국영화 수입추천허가 절차, 2. 상영허가 승인 절차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하에서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소장 중인 <잊지 못할 모정>의 심의 서류를 중심으로 수입과 상영 과정을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1. 외국영화수입추천허가 1962년 1월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영화업자는 외국영화를 수입‧상영하기 위해서 공보부에 ‘외국영화 수입추천허가 신청서’를 제출한 뒤 승인을 얻어야 했다. 영화 시장에서 외국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았고, 이들 영화가 야기하는 사상과 풍속의 문제 또한 컸기에 영화검열 행정에서 외화수입을 통제, 관리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1956년 문교부에서 영화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우수영화 포상제도로 외국영화수입 쿼터를 배정하면서 정부는 보다 효율적으로 외화 관리를 할 수 있었는데, 5.16 이후 검열권한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외국영화에 대한 ‘수입추천허가절차’가 신설되었다 5 . 이는 수입된 외화가 상영되지 못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는 의미가 있으나 수입업자들은 사전검열의 형태로 ‘수입추천허가’를 받아야 했다 6 . 수입추천을 받기 위해 영화수업업체는 영화 제명 및 원제, 제작주체, 필름종별 및 규격, 권수, 판권대금과 같은 영화에 대한 제반 정보를 담은 ‘허가신청서’를 비롯하여, 영화의 원문 대본 1통과 국문 대본 3통, 그리고 수입면장 및 기타 요청 서류들을 구비하여 공보부에 제출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행정적 절차가 제한과 통제에만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외국영화 수입과정은 외환관리법을 비롯하여 통관절차에 따른 관계 법령을 준수해야 했기에, 공보부는 상공부, 서울세관, 외환은행과 긴밀히 협력하며 통상에 필요한 절차를 일원화하여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검열이라는 제도적 장치가 근본적으로 통치 합리성을 제고하려는 국가 이성의 산물인 만큼, 개별 텍스트에 대한 검열과정은 일반 행정업무와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수입추천단계와 관련된 서류들은 아래와 같다. 1) 외국영화 수입추천 허가신청서 제출(1964.9.10.) <잊지 못할 모정> 수입추천 허가신청서 영화 <잊지 못할 모정>의 수입사인 세기상사는 1964년 9월 10일 공보부에게 영화수입추천 허가를 위한 신청서를 제출한다. 신청인은 한국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 유성엽이며, 한국영화업자협회를 경유(1964.9.14.)하여 공보부의 승인을 받았다.(1964,9.15.) 신청서에는 영화의 제작 정보만이 아니라 종별(천연색, 와이드스크린)과 규격(35mm, 12권, 3편) 및 판권대금(US $4,000)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영화필름과 원문 대본 1통(번역문 포함), 국문 대본 3통 그리고 수입면장 및 기타자료를 첨부했음을 알 수 있다. 기타자료에는 리버티상사와 체결한 계약서 사본과 영문으로 된 전신(cable), 그리고 외화수입쿼터 배정서와 각서가 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된다. 전신을 통해서는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는데, 한국에서 통용되는 라이센스 기한은 10년이며 신용장 개설 은행 정보를 비롯한 결제 기한(1964.9.30.)이 명시되어 있다. 공보부에서 외환은행 기관장에게 보낸 배정서에는 외화수입권을 배정받은 대한영화주식회사의 외화수입업무를 세기상사가 대행한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 <잊지 못할 모정> 수입 추천 신청 단계에서 세기상사가 제출한 각서 수입추천 단계에서 눈에 띄는 것이 각서인데, 총 두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세기상사 대표이사 이기동의 이름으로 공보부에 보내는 것으로서, 각서에는 “영화의 왜색 및 감독의 사상관계나 기타 귀부의 심사 기준에 저촉되는 경우에는 하시든지”(언제든지) 공보부의 지시대로 따르겠다 내용을 담고 있다. 수기로 작성된 다른 종류의 각서는 모두 2통인데, 모두 한국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의 이름으로 작성된 것으로서, “필름이 도착 즉시 실사고사를 받을 것”이며 “고사규정에 저촉되거나 상영이 불허가 되는 경우에는” “신용장 개설을 비롯한 제반 책임을 본인이 부담”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후 상영 허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참조해볼 때, 책임을 소재를 정하는 각서가 강력한 구속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기타자료에는 수기로 작성한 영화 해설과 스토리가 포함되어 있다. 동일한 양식의 서류가 3부인 점을 미루어보아, 외화수입 절차를 담당하는 주무부처인 상공부와 서울세관 그리고 외환은행에게 각각 보낸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를 담은 해설인데,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일찍이 <악의 결산>으로 발란서의 제일선 감독으로 각광을 받은 바 있는 “이브 샴피” 감독이 처음으로 시도한 동양색체가 짙은 감명 깊은 명화 이다. 이 영화제작을 위해 제작기간 2년, 구상에 3년, 광대한 오픈 세트 등 영화사상 공전의 스케일의 획기적 거작이다. 특기할 것은 일본 나가사키시를 방불케 하는 광대한 오픈세트를 건조했다는 사실이다. 출연인 너무나 유명한 불란서의 일급 배우 “장 마레-”와 상대역인 세기의 미녀 “다니엘 다류-”, 조연엔 일본의 인기 여우 “기시 게이코”가 각각 출연하여 초연을 보여주고 있다. (강조는 인용자) 영화가 일본의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일본인 여성과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에서 드러나는 ‘일본색체’는 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입사는 이를 “동양색체”로 설명하고 있는데,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나가사키’도 사실 “일본 나가사키를 방불케 하는 광대한 오픈 세트”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 영화가 프랑스 감독과 배우가 주축을 이룬 작품임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수입대행사인 세기상사는 서류심사만으로 수입 추천을 승인해야 하는 행정절차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영화 <잊지 못할 모정> 수입추천 통지 본 영화는 불란서 파테시네마 델라필름사가 1956년도 제작한 작품으로서 선박소에 근무하는 우수한 청년 기사 말사크는 친구의 소개로 '노리'라는 처녀를 알게 되어 사랑하는 중 우연히 그의 옛 애인 후란스와즈가 나타나 고민하게 된다. 말사크는 후란스와즈를 잊기 위해 출장을 떠난다. 돌아오는 날 밤, 나가사끼엔 심한 태풍이 불어 ‘노리’를 염려하며 그녀를 찾았으나 건물에 깔려 이미 숨을 거두고 이러한 사실을 본 후란스와즈는 그를 단념하고 나가사끼를 떠난다는 내용. (강조 및 밑줄은 인용자) 영화사에서 제출한 자료를 토대로 공보부에서는 유관 부처로 협조 공문을 보내는데, 참고 항목으로 부기된 내용에서는 영화에서 기시 게이코가 분한 노리코의 이름이 ‘노리’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세기상사가 제출한 자료에 근거한 것인데, ‘노리코’의 이름을 ‘노리’로 명명함으로써 왜색 시비를 비켜가고자 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관계기관에 수입추천 서류를 발송한 다음날인 1964년 10월 2일, 공보부에서는 한국영화주식회사 유성엽 앞으로 ‘외국영화 수입추천’ 건에 대해 관계 기관에서 추천을 하였다는 공문을 보낸다. 본편에 대한 수입추천 허가승인 절차가 완료된 후, 1964년 12월 11일 대한영화사는 예고편 통관을 위한 품의서를 공보부에 제출한다. 예고편은 총 10권으로 한 편당 1권임을 감안해볼 때, 10편의 예고편이 들어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공보부는 12월 22일자로 서울세관에 협조공문을 제출하면서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수입추천 허가절차가 마무리된다. 2. 상영허가 승인 절차 1966년 1월 6일, 세기영화사는 수입한 영화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신청서를 제출한다. 영화가 수입된 절차가 완료된 시기가 1964년 12월 22일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영화가 수입된 지 1년이 지난 시점까지 상영허가는 신청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추론컨대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일협정을 둘러싼 시민적 저항이 극에 달했기에 상황의 변화를 지켜봤던 것이라 생각된다. 아니면 한일국교 정상화를 위한 협정 체결이 기정사실화된 시점에서 일본영화 수입개방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가늠해보고자 논란이 될 만한 영화를 수입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간에, 영화 수입을 주도한 것은 한국영화주식회사라기보다 세기상사라 할 수 있는데, 실질적으로 상영허가신청서를 제출하기에 앞서 세기상사는 12월 9일자로 외국영화 수입추천 명의변경 신청서를 양도증 사본과 함께 공보부에 제출한다. 이로써 세기상사는 수입대행업무가 아닌 영화를 수입, 배급하는 주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상영허가를 둘러싸고 공보부와 세기상사는 마찰을 빚게 된다. 공보부의 입장에서는 한일협정에 비판적인 민족주의 정서가 반정부적인 방향으로 표출되는 데 대한 부담감으로 영화 상영을 보류할 필요성이 있었다. 반면 세기상사의 입장에서는 공보부의 수입추천허가에 의해 수입된 영화를 공보부가 상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절차의 합리성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했다. 다음은 4차에 걸친 상영허가 신청과정을 재구성한 것이다. 1) 제1차 시도 (1)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서 제출(1966.1.6.) 1966년 1월 6일 세기상사는 공보부에 <잊지 못할 모정>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한다. 해당 서류에는 수입신청허가 시와 동일하게 영화에 대한 제반 정보와 영화필름, 대본 및 별첨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시세완납증명서를 비롯하여 필름 입고증, 문화영화수속필증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 시기는 1966년 12월 2차 영화법 개정이 이루어지기 이전 시점이어서 62년 영화법의 시행령을 따르는데, 문화영화수속필증은 일반 극영화 상영 시 문화영화의 의무상영 조항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점은 <고래>라는 제명의 문화영화의 제작사가 세기상사주식회사라는 사실이다. 실질적으로 문화영화는 정부가 제공하는 공보영화 차원을 넘어 계몽성을 핵심적인 속성으로 갖춘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아우르는 역사적 개념인데, 문화영화의 의무상영이 제도화되면서 문화영화를 제작하는 민간회사가 생겨나기도 했다 7 . (2) 외국영화 상영허가 보류(1966.1.11.) <잊지 못할 모정> 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보류 통보 서류 발신: 공보부 장관 수신: 세기상사주식회사 우기동 제목: 외국영화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보류통보 위하가 66.1.10자로 제출한 외국영화 <잊지 못할 모정>의 상영허가 신청은 동 영화를 심사 결과 당부 방침에 의하여 상영허가가 보류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끝. 부내 참고: 본 영화는 왜색이 농후한 영화임 . 세기상사는 상영허가 신청 당시 연소자 관람 신청서도 함께 제출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수입 추천까지 받은 영화가 상영보류 통보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3) 중앙정보부에서의 재심의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의견 통보 검열서류에는 없지만, 1월 11일자로 상영보류를 통보받은 세기영화사는 재심을 청구한 것으로 보인다. 위 서류에서 알 수 있듯이, 1966년 1월 29일 중앙정보부에서는 “65년 1월 12일(66년의 오기)”자로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해 재심을 진행하였다. 중앙정보부가 심의에 참여하여 의견서를 보내는 경우는 일반적인 절차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즉, 공보부가 당시의 정세를 고려하여 정무적인 판단을 내림에 있어 중앙정보부의 의견을 요청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4) 외국영화 상영보류 최종 통보(1966.3.28.) 중앙정보부는 해당 영화가 “보안상 지장이 없음으로 공보부 장관이 적의 판단 조치”할 것을 주문하는데, 공보부에서는 1966년 3월 28일자로 세기상사에게 다시 한 번 상영보류 통보를 내린다. 이유는 1차와 동일하다. 2) 제2차 시도 (1) 진정서 제출(1966.3.29.) <잊지 못할 모정> 수입 관련 세기상사가 공보부 장관에게 보낸 진정서 첫 페이지 진정서 수신: 공보부장관 귀하/ 제목: 진정서 귀부의 1966년 3월 28일 자 공보영 1733.2~2959에 의한 외국영화 상영허가신청에 대한 불허가 통보는 감사히 복송하였읍니다. 취송(就悚) 본건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귀부의 정책상 이유로 당분간 허가할 수 없다는 통보취지에 대하여는 폐사(弊社)로서도 타의 없이 충분히 이해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폐사로서 본건 "잊지 못할 모정"에 관하여 국내상영예정하에 (1) 서기 1964년 10월 2일 자로 귀부의 수입추천을 받고 (2) 동시에 신용장을 개설하고 (3) 서기 1966년 1월 6일 자로 통관절차를 필하여 서기 1966년 1월 10일 자로 귀부에 상영허가신청에 이르기까지 막중한 자금을 투입하여 동 필름은 완전 국내물품으로 되어 있는 즉 상영치 않으면 안 될 불가피한 고충에 직면하고 있는 실상 을 보살펴 주시고 더욱 본건과 견연(牽連)지어서 기왕 국내에서 상영한 바 있는 소위 왜색영화의 경우를 대조적인 면에서 돌이켜보시더라도 국교정상화 이전에 있어 한 때 한일 간의 격앙된 국민감정에 아무런 자극됨이 없이 (1) <흑선>, <전장과 영원히>, <8.15의 찻집>, <해병에 동경에 가다>, <벽안의 나비 부인>, <카이강의 다리>, <원한의 도곡리 철교> 등을 상영한 선례 를 상기하시와 보살펴주시고, 특히 본건 "잊지 못할 모정"의 경우는 문화교류의 성과면에서 보더라도 음악 및 미술과 문학 등이 불란서의 문화적 지반을 기조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2차 대전 당시 원자폭탄 세례를 받은 일본 장기(인용자: 나가사키) 등을 배경으로 하여 본 영화를 제작함에 이른 불일 간 국민감정의 순화는 목하 한일 국교정상화가 실현된 차제에 있어 무형의 정책적 PR에 도움이 되는 좋은 하나의 선도적 동인이 됨에 족할 것이며 , 더욱 한일국교 정상화의 당면한 중요 과정에 비추어보더라도 한일 간 문화교류의 계단적인(인용자: 단계적인의 오기) 일책으로써 이상 진정들인 수단에 정황을 현찰하시와 본건 영화 "잊지 못할 모정"이 상영되도록 허가하여 주시압기 바라옵고 자이 진정서를 올리나이다. 세기상사주식회사 대표이사 우기동 (강조 및 밑줄은 인용자) 2번에 걸친 상영보류 통보를 받은 세기상사는 대표이사의 이름으로 공보부 장관에게 진정서를 제출한다. 진정의 핵심은 공보부가 고시한 행정 절차에 따라 수입추천을 받아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었고, 일본인이 출연하거나 참여한 영화가 상영된 선례가 이미 있고, 국교 정상화가 실현된 시점에 해당 영화가 정책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홍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진정에 대한 회신(1966.4.4.) 공보부는 1966년 3월 30일자로 제출된 진정서에 대해서 1966년 3월 28일에 통보한 바와 같이 당분간 허가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간략하게 통보한다. 세기상사가 상영불허가 판단의 불합리성을 조목조목 짚은 것과 대조적으로, 공보부에서는 별다른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당분간 허락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한 것이다. 3) 제3차 시도 (1) 외국영화 산영허가 신청 사유서(1966.8.4.) 세기상사는 공보부의 보류 통보를 일단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본 동보가 제작한 작품으로 특히 감독 및 기타 기술진영 전원이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제작된 동경 올림픽 영화가 상영허가”를 받게 되자 세기상사는 다시금 상영허가를 신청한다. 반려 이유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영화 상영허가를 보류했다면, ‘동경 올림픽 영화’ 또한 개봉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진정에 대한 회신(1966.9.12.) 공보부는 별다른 이유 없이 다시금 진정 내용에 대해 불가 통보를 한다. 다만, 달라진 점은 “당부정책 상” 허가할 수 없다는 부분을 수정하여 “당부정책이 변경될 때가지 당분간”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영화 상영 허가를 보류한 것은 기관의 정책적 일관성에 의해서라기보다 당시의 정무적 상황을 고려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세기상사의 입장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4) 제4차 시도 (1)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서 두 번의 진정이 묵살되지 세기상사는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를 다시금 신청하게 된다. 서류상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서류 작성일은 1966년 8월 3일이나, 이를 접수한 시점은 9월 14일이라는 사실이다. 즉, 두 번째 진정을 통해 해법을 찾으려 했던 시도가 어그러지자 행정 당국의 비일관적인 처사를 비판하는 ‘신청사유서’와 함께 상영허가 절차를 새롭게 밟음으로써 공보부를 압박하는 전략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회신(1966.10.10.) <잊지 못할 모정> 수입에 대한 방침을 밝힌 공보부 내부 메모 반복된 진정과 신청사유서를 통해 공보부의 행정적 실책을 지목함으로써 공보부는 그에 대한 해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렸다. 1966년 10월 10일자로 세기상사로 통보된 상영허가 보류 판정은 이전과는 달리 그 이유가 상세히 부가되어 있다. 판정이 핵심 이유를 요약한 메모의 내용을 보면 해당 영화가 “불란서 제작이라고 하나 일본 가요(歌謠), 민속(民俗), 무용(舞踊) 등이 처음서 끝까지 강하게 나타나 일부분을 삭제(削除)할 수도 없는 영화이므로 한일 영화교류가 시작(始作)될 때까지 상영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5) 제5차 시도 1966년 12월 20일, 세기상사는 다시금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한다. 해당 서류 또한 앞서와 동일하게 8월 3일에 작성된 것이지만, 접수는 4개월 뒤인 12월 20일이 이루어졌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으나, 세기상사는 별도의 진정서나 사유서 없이 영화의 상영허가를 신청하는데, 공보부에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이를 승인한다. 공보부의 <잊지 못할 모정> 상영 허가 통보 서류 결국 5번째 상영허가 신청을 낸 끝에 공보부에서는 해당 영화에 대한 상영허가를 통보한다. 그러나 내부결재 문서에는 국내상영이 무방하다고 판단한 근거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단지 해당 영화의 줄거리만을 요약해놓았다. 다만 실사 검열을 통해 화면 6개처, 녹음 9개처를 삭제할 것을 명령했는데, 이를 통해 유추해본다면 공보부가 문제 삼았던 ‘왜색시비’는 정책 당국의 입장에서는 정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당 영화가 프랑스에서 제작되었던 만큼 일본에 대한 서구의 이국적 취향을 충족시킬 요소들이 과도하여 왜색이 매우 짙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세기상사는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켜 영화를 개봉하였는데, 심의 서류를 토대로 이를 재구성해 볼 때 검열 당국과 시장 주체들 사이의 권력 관계가 일방적으로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민족의 자주성(4) - 영화, 음악」, 《경향신문》, 1965.12.22. 2. 이화진, 「‘65년 체제’의 시각 정치와 <총독의 딸>」, 『한국근대문학연구』 18(1), 2017, 282-283쪽. - 이 논문은 한일협정이 체결된 ‘65년 체제’ 아래서 일본을 특정한 방식으로 (비)가시화하는 시각장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극장에 상영된 적도 없이 영화사의 서술로부터 배제된 <총독의 딸>의 제작 과정과 심의 단계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3. 서울방송국 연속극 <동경 나그네>의 영화화한 작품으로 최무룡이 제작 및 감독을 맡았으나, 결국 촬영이 무산되어 많은 빚을 지게 된다. 그 여파로 최무룡은 김지미와 이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4. 「TBC의 〈동경 나그네〉 일본 현지 촬영 중지령」, 《중앙일보》 1966.12.03. 5. 우수영화 제작에 대한 포상으로 외국영화수입쿼터 배분과 영화법 개정에 대한 논의는 조준형, 「지배하는 국가와 교활한 시장」, 이순진, 이승희 편, 『한국영화와 민주주의』, 선인, 2011, 311-346쪽 참조. 6. 수입추천허가신청 단계에서 제한을 두는 경우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심의 서류 해제」(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를 참조할 것. 7. 1960년대 문화영화의 존재방식에 대해서는 조준형, 「문화영화의 제도화 과정: 1960~70년대 영화법과 관련 정책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지워진 한국영화사 – 문화영화의 안과 밖』, 한국영상자료원, 2014, 75~114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