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이란 무엇인가!
- 감독
- 이토 슌야
- 제작년도
- 2006
- 출연
- 오시마 나기사, 오가타 아키라, 오구리 코헤이, 최양일, 사카모토 준지, 코이즈미 쿄코, 나리타 유스케, 사노 시로, 이시카와 마키, 하라다 요시오, 야마시로 신고
숏을 찍는다는 것 “하스미 선생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사실 최근에 고민이 하나 생겼는데요. 숏을 찍을 때, 한 컷을 찍을 때 어느 정도의 힘을 들이는 게 좋을까 하는 겁니다. (중략) 영화는 숏이 생명이지요. 제가 가진 기술이란 그것밖에 없어요. 그것 외에 제가 잘하는 게 없는 거죠. 그렇지만 숏으로 어디까지 승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거에요.” “열심히 숏을 찍으려는 노력은 어디까지 전달될까요.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모르는 채로 두는 게 좋은 건지, 억지로라도 알아달라고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은 건지 항상 고민됩니다.” 올해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책 중에 한 권인 『영화 장화』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책은 일본 영화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와 그의 제자이자 일본 영화계의 작가주의를 대변하는 영화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그리고 아오야마 신지가 나누는 긴 대담집이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일본 영화 내 영향력은 대단했다. 70-80년대 그가 대학에 개설해 강의했던 “영화 표현론”은 영화를 분석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고, 그의 평문들은 젊은 영화광들에게 거의 교본처럼 낭독되었다(심지어 그의 글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당시 이 수업을 통해 구로사와 기요시와 아오야마 신지가 영화계로 입문하였다. (나는 이 두 감독에게 도대체 하스미 시게히코의 강의 방식과 내용이 무엇이었기에,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열광했는지 물은 바 있다. 아오야마 신지는 관념을 구체화시키는 쇼트를 발견하고 그것이 어떻게 영화 속에 구축되는지, 그 구성원리를 발견했던 방식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최근에 만났던 구로사와 기요시 역시 쇼트의 원리에 관해 이야기 했다. 경제적이고 기술적으로 가능한 쇼트를 통해 영화의 의미와 형식을 축적해 나가는 방법들, 그것은 그가 현재 일본 대학에서 영화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영화 장화』에서 이들이 나누는 대담은 때론 당혹스러우리만치 담대하고 솔직하다. 그들이 존경해마지않는 감독과 작품들에 대해서는 찬탄과 동경을 쏟아내지만, 반면 그들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영화와 감독들에 대해서는 혹독한 비판과 조소를 마다하지 않는다. 영화에 관한 날카로운 시선과 언어들을 가진 이들의 거침없는 이 대화는 오래전, 스승과 제자로 만나 긴 시간을 함께해온 이들이 나눌 수 있는 아주 사적이고 주관적인 취향의 고백이자, 이론과 현장을 넘나들며 체화되고 정립된 영화 존재론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과 고민들, 변화하는 영화의 위상과 환경에 대한 불안과 매혹을 모두 포함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다 불현듯, 가장 겸손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자신의 오랜 스승에게 새삼 진지하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쇼트를 만든다는 것.” 무려 사십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영화를 만들고 고민해왔던 세계적인 거장에게도 영화는 여전히 변화와 질문으로 가득 찬 모호한 대상인 것이다. 숏을 찍을 수 있는 자 하스미 시게히코는 구로사와 기요시를 당연히 ‘숏을 찍을 수 있는 감독’이라고 칭한다. 단순히 이야기를 전개하는 기능적이고 기술적인 컷들이 아니라, 의미와 형식을 갖춘 가장 영화적인 언어를 구축할 수 있는 예술가인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에게는 분명 그만의 언어와 모드가 존재한다. 설혹 크레딧을 보지 않고 마주하게 된 영상이라 할지라도, 보는 순간 ‘기요시의 영화구나, 내적 불안과 위기를 파고드는 기묘한 세계가 곧 시작되는구나’를 알아보게 하는 그런 영화적인 언어들이 있다. 웨스 크레이븐 감독이 영화관 체험을 어둠과 빛이 교차하며 시작되는 부두교 주술사의 환각적 제의에 비유하듯(영화관에 드리워진 어둠 사이로 스크린에 빛이 투사되는 순간, 부두교 주술사의 제의가 시작될 때 비현실적 사태를 기대하는 참여자의 흥분이 시작되는 것과 흡사하다고 비유하는 것),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는 늘 시작과 함께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알리는 묘한 매혹과 설렘, 긴장과 공포를 수반한다. <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 予兆 散歩する侵略者 劇場版>(2017)의 오프닝도 바로 그렇게 시작된다. 하스미 시게히코와 구로사와 기요시의 표현대로 ‘숏을 찍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붉은빛의 철제 안전망이 둘러진 공동주택의 현관 앞 계단. 안전망 저편으로는 도시 외곽의 주택들이 보이고, 이내 한 여성이 계단을 올라와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측면으로 비춘다. (문을 열고 들어선다는 것. 기요시 영화에서 ‘문이 열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만지는 행위’(접촉)와 더불어 가장 큰 사건의 추동 행위로 쓰인다) 다음 컷은 현관 입구에 놓인 켤레의 남성 구두, 그리고 조금 전 실내로 들어선 그녀의 발과 다리. 우리는 여전히 여성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영화 속 여성은 남성 신발을 통해 집안에 남편이 귀가해 와 있음을 알아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의 다음 컷. 이 쇼트야 말고 첫 번째 붉은 철제 안전망이 드리워진 현관 밖 전경을 포착한 장면과 더불어 기요시의 영화적 이미지와 카메라 움직임 모든 것을 망라한다. 기요시의 많은 영화에서 그러하듯, 집안 내부는 여러 격자로 구분되어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열린 창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의해 마치 생명을 지닌 듯 텅 빈 공간에서 너울거리는 커튼의 형상. 창밖에서 비추는 부드러운 햇살과는 대조적으로 죽은 듯이 가라앉은 실내 분위기. 이 화면 내 공간 안으로 현관을 통과한 여성이 거실로 들어와 집 안을 살피다 문득 뒤쪽 커튼 너머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남편을 부른다. 이때 프레임 외부 공간을 향한 그녀의 시선과 몸짓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발견한 듯 잠깐 멈춘 채 지속되고, 이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화면 밖 공간으로 빠져나간다. 이때까지 관객은 그녀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없다. 그녀가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간 뒤,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여 (흡사 유령적 시선처럼) 그녀가 머물러 응시했던 시점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그녀의 시선이 머물렀던 커튼 너머의 공간에는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남자가 있다. 매우 천천히 그러나 불길한 기운을 암시하며 움직이는 카메라 워킹을 통해 발견되는 남자의 형상은 빛의 조작으로 만들어진 그림자와 더불어 기괴하고, 그것은 흡사 기요시의 전작 < 회로 >(2001)에서 목격했던 유령의 형상을 연상케 한다.(벽이나 난간에 서 있다 얼룩으로 변하며 유령이 되어갔던 형상들). 잠시 뒤, 멈춰 선 화면 안으로 여성이 다시 들어와 남자의 뒷모습을 길게 바라본다. 유령과도 같은 존재감으로 움직이는 카메라가 운동과 정지, 시선과 응시를 구성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요시가 시작하는 이 새로운 영화적 세계에서, 저 남자에게 이미 무언가 사건이 도래했으며 여자는 이 짧은 순간에 그 모든 불안을 감지했음을 알게 된다. (기요시의 이러한 쇼트에서 카메라의 시선과 움직임은 할리우드 고전기에 구축된 제도적 재현 양식으로서의 촬영과 편집의 비가시적 메커니즘처럼 인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카메라의 유동적 시선과 위치의 전능성을 가시화하며, 영화적 디제시스와 관객, 그 사이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며 내레이션을 전개하고 분위기를 형성하는 주체가 된다) 여자가 한참이나 남자를 말없이 응시하고 나서야, 뒤늦은 대답을 하며 뒤돌아서는 남자는 조금 전의 이상한 기운과는 달리 금새 일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와 아내를 맞이한다. 여자는 남편의 응답을 듣고서야 방향을 돌려 현관 옆에 있는 주방으로 건너간다. 카메라는 천천히 그녀의 동선을 쫓아 그녀가 주방에서 물건을 정리하는 모습을 비춘다. 조금 뒤 남편이 그녀 곁을 지나 화면 밖 방안으로 빠져나가면, 조금 전 밝은 테라스와는 대조적인 어둠에 가라앉은 주방 안 그녀 모습 좌측으로 천천히 이 영화의 타이틀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가 제시된다. 타이틀이 사라지면 여자는 문득 하던 동작을 멈춘 채 의심 어린 시선으로 남편 쪽을 바라보다 천천히 테라스로 발길을 옮긴다. 그리곤 남편이 서 있던 자리에서 그가 바라보고 있었을 무언가를 응시하는 그녀의 모습을 카메라는 길게 비춘다. 이때 시작되는 그녀의 내레이션, “그것은 정말 사소한 위화감으로 시작되었다” 기요시의 전형적인 롱테이크 쇼트라 할 수 있는 이 세 번째 컷은 아파트 실내 공간을 좌우와 전후경으로 구분하는 카메라 워킹, 테라스의 밝은 빛과 주방과 복도의 어두움, 등장인물의 생명력 있는 움직임과 죽은 듯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정지된 순간의 대비. 아파트 외부 공간에서 들려오는 각종 소음들(외화면 소리, 그러나 논리적 근거가 없는 소리들까지 망라하는 기괴함. 기요시는 외화면 공간의 소리 활용에 대해 질문하자 인과론적 출처가 없는 소리들을 영화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즐긴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가령 현장의 스텝들이 실수로 자아내는 소리들, 엔지 사운드, 건물 밖에서 영문 모르게 들려오는 기계음 같은 소리들을 그는 녹음하여 보관하고 영화에 삽입하며 재창조하는 것이다)과 내화면 사운드를 조율하며 그로테스크하고 언캐니(uncanny 두려운 낯설음)한 기요시 특유의 영화적 세계를 안내한다. 예조와 산보 발터 벤야민의 근대적 주체, ‘산보자’ 개념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공연된 바 있는 미에카와 모토히로의 동명 작품 < 산책하는 침략자 散歩する侵略者>(2017)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개념을 상실하는 인간을 통해, 인간의 본질, 불안과 해방에 관한 은유와 풍자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의 기본 설정은 구로사와 기요시 작품과도 잘 맞닿아 있다. 그러나 원작을 각색하기보다는 스스로 시나리오를 써왔던 그의 작품 성향대로 기요시의 <산책하는 침략자> 시리즈는 오롯이 그만의 작가주의적 세계 안으로 흡수되어 재창조되었다. 특히 전작 <산책하는 침략자>가 외계인들의 개념 수집과 살상, 침략과 그 후의 과정까지 묘사된다면,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는 전작에 등장하지 않았던 다른 인물들을 중심으로 침략의 예조(징조)와 과정, 그리고 침략 직전까지의 과정을 이면화처럼 제시한다. 전작이 침략자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예조>는 발생하지 않은 사건, 혹은 드러나지 않은 실체를 직감적으로 감지하고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능력을 가진 지구 여성의 관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전작은 타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인간 존재에 대한 개념적 이해 과정이라면, <예조>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회피하거나 방어하자고 하는 인간 내부의 불안과 공포, 윤리적 갈등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작품은 큰 틀에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영화이다. ‘언어’라는 외부적 질서를 통해 자아를 인식하고 주체성을 학습하며, 동물적인 생존 본능으로 위기에 반응하는 인간들은 때로는 소멸해도 무방할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존재이며, 또 때로는 치명적인 자기 결함과 트라우마, 불안과 공포로 점철된 나약한 존재이고, 또 때로는 외계의 타자조차 감화시켜내는 사랑과 공존의 존재이자, 윤리적 존재이기도 하다. 언어와 주체성, 자아와 타자, 의식과 무의식 등 정신분석학과 구조주의 기호학의 기본 개념을 영화적인 사건으로 묘사한 듯한 이 작품에서 외계인들이 수집하는 기본 개념이 가족, 소유, 자아, 노동, 과거, 미래, 공포 그리고 사랑으로 시작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언어게임을 통해 주체 혹은 인간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기요시 영화에서 이미 낯설지 않다. 그의 걸작인 1997년작 < 큐어 CURE, Kyua >에서 우리는 이미 언어와 목소리라는 권력을 통해 타인을 지배하고 공포와 욕망, 불안과 적대를 끄집어내며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했던 기요시의 테마를 본 적이 있다. 정신의학을 공부하다 초월적 능력을 지닌 극 중 연쇄살인범 마미야는 빛과 목소리를 통해 타인을 지배하고, 그들 내면의 억압된 적대를 폭력과 살인으로 끄집어낸다. 그와 동시에 윤리적 갈등을 제거한다. (<큐어>에서 최면에 걸린 인간들은 억압된 불만을 끄집어내 살인을 저지르고도 윤리적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큐어>의 명장면 중 하나는 경시청에서 경찰 간부와 마미야가 벌이는 설전이다. 마미야는 자신을 비난하며 취조하는 경찰간부에서 반복적으로 ‘당신은 누구인가?’를 질문한다. 경찰 간부(오스기 렌. 이번 영화<예조>에서는 후생성 간부로 출현해 외계인과 비슷한 심문을 벌인다.)는 그 질문에 자신의 직함과 이름을 대지만, 마미야는 지속적으로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현대 사회에서 누구나 자신을 설명하며 이름과 직함을 대지만, 그것이 과연 인간의 본질적인 자아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예조>에서 외계인들은 인간의 ‘개념’을 수집하는 방법으로 <큐어>에서의 그것처럼 언어적인 목소리의 권능을 이용한다. 빛과 목소리를 통한 질문들, 그리고 무력하게 응답하고 순응하는 인간. 특정 개념이 상실된 이후 대부분 인간들은 오늘날 인간 사회의 ‘정상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행위와 불안 혹은 해방적 쾌감을 맞보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보태어, <예조>는 외계인들의 가이드로 활동하는 자들의 윤리적 불안을 역시 중요한 테마로 다룬다. 개념을 빼앗을 대상을 선정할 수 있는 권력. 그러나 그 선택 능력은 이내 타인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며, 그들의 죄의식이 육체적 통증으로 발현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이다. 언캐니와 유령 그리고 영화 <예조>의 초반부, 주인공 예츠코의 공장 동료가 그녀에게 불쑥 이상한 이야기를 꺼낸다. 집에 유령이 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면 안 되는 존재, 그런데 늘 곁에 머무는 존재, 얼핏 아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 더 공포스러운 존재가 집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상함을 느낀 예츠코는 다음 날 동료의 집을 직접 방문하게 되고, 동료가 유령이라 지칭했던 존재가 그녀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동료는 ‘가족’ 개념을 빼앗긴 이 영화 서사의 첫 번째 희생자이다. 친숙하지만 낯선 존재, 이 언캐니한 공포는 1950년대부터 숱하게 변주되며 만들어진 < 신체 강탈자의 침입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1956)의 설정으로부터 시작된다. 형상은 같지만 분명 다른 존재, 돈 시겔로부터 시작되는 <신체 강탈자의 침입>에서 외계인에게 가족의 신체를 강탈당한 사람들은 영문 모를 이질감과 친밀감(언캐니. 두려운 낯섬. 분명 같은데 같지 않은 듯한 느낌이 주는 공포) 속에서 존재의 불안과 공포를 훨씬 크게 체감한다. 이러한 설정은 <예조>에서 비슷하게 변주된다. 어딘지 익숙하기 때문에 더 큰 공포. 예츠코의 동료가 ‘유령’이라고 단정한 그것은 기요시 영화의 공포를 연장한 개념이기도 하다. 예전에 진행됐던 기요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유령을 본 적은 없지만, 내가 영화 속에서 유령을 표현할 때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죽음은 현실세계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 바로 옆에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죽음은 결국 세계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영화라는 픽션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본다. 아까 영화란 무엇인가를 질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장 현실적이면서 현실에는 없는 것이, 바로 죽음과 영화의 양면성이다. 유령은 죽음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유령이라는 것의 어려운 문제는 그것이 인간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즉 인간이 죽어서 유령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연장으로서 유령이 존재하는 가. 사실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은 길지 않다. 죽고 난 유령이야말로 사실은 인간의 본질일 수 있다. 그래서 유령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이고 진정한 본질이다. 또 사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 자신을 유령으로 결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과연 인간을 유령으로 상상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결국 나에게 유령이란, 영화의 존재론이자 인간의 존재론을 고민하게 만들고 출발하게 만드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영화 <로프트> 상영 후 나눈 인터뷰) 그의 이러한 유령적 세계관은 <예조>의 후반부, 외과의사 마카베의 신체를 빌어 존재했던 외계인이 죽음 직전에 하는 대사에서 다시금 드러난다. 이미 타인을 살해하면서 공포와 죽음이 연관되어 있음을 터득한 그는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 “나에게도 죽음이 찾아오는구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워, 하지만 죽음은 언제든 바로 옆에 있어. 이건 운명이야. 받아들이자”라고 말한다.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인간-죽음-유령--영화는 긴밀하게 연결되는 실체이다. <산책하는 침략자>와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 모두는 기요기가 최근 가장 다루고 있는 ‘사랑’의 테마를 관철시키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기요시와 러브스토리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그는 확실히 < 해안가로의 여행 岸辺の旅 >(2015)에서부터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인간 존재의 힘으로서 ‘사랑’을 묘사한다. 산책 시리즈 모두 결국 인류를 구원하거나 혹은 죽음 앞에선 개인의 공포를 극복하게 하는 유일한 원천은 사랑이라고 그는 피력한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감상주의나 낭만이 아니라,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기요시 감독이 느끼는 책무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인터뷰에서 했던 어른으로서의 책임감 발언(그가 왜 <밝은 미래> 이후 더 다크한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정도로 나빠지는 사회에 대한 불안을 언급했다)은 <산책하는 침략자>에서 소유 개념을 빼앗긴 히키코모리 청년과 가이드가 광장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하는 연설 내용, 즉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지기 전에 막아야 한다는 장면과 겹쳐진다. 그러나 영화 속 군중들은 이내 그러한 연설을 외면하고 무시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극 중 캐릭터들 혹은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발견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은 인류의 공존을 위한 사랑일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두 편의 장대한 지구 종말 서사로 구축된 개념적 SF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와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는 개별적 사건을 추적하던 그간의 미시적 스릴러 서사를 넘어, 장구한 인류의 근원과 현재 그리고 미래로 확장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상상하는 모든 것을 디테일하게 시각화하는 디지털 영화의 전능적 시대에, 여전히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재현할 수 없는 것, 영화적인 시간과 공간의 창조능력,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영화의 존재론적인 언어, 쇼트의 개념과 한계를 사유하는 감독의 흥미롭고 실험적인 인류학 에세이는 여전히 흥미롭고 매혹적이며 원숙하다.
<덩케르크>의 패착 크리스토퍼 놀런의 <덩케르크>에는 전장의 광기와 폭력 그리고 비극이 승리의 기념비를 위한 영웅적이고 애국적인 헌신으로 전화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전장의 ‘1일’을 채우고 있는 민간 선박에 관한 에피소드는 그러한 영웅적 서사로 가장 강력하게 수렴된다. 항구에 정박되어 있던 민간 선박에까지 국가의 징발령이 내려진다. 그러자 큰아들을 이미 이 전쟁에서 잃은 한 아버지는 해군에 배를 넘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직접 자신의 다른 어린 아들과 동네 소년까지 태운 채 전장에 참여한다. 그 와중에 동네 소년이 불의의 사고로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놓이게 되지만, 그 아버지는 소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배를 돌려 항구로 되돌아가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한 사람의 소년보다는 덩케르크에서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는 무수한 병사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을까? 크리스토퍼 놀런은 영화의 말미에 결과론적으로 아버지의 선택이 옳았다는 당위성을 부여한다. 한 아이를 잃는 대신 더 많은 병사를 구했으며, 그 소년은 바라던 대로 마을 신문을 통해 영웅으로 보도되었다. 주제적 차원에서 <덩케르크>는 영웅과 승리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전쟁 드라마이다.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헌신, 마지막 사병 하나까지도 챙기고자 했던 전투 지휘자, 위험을 감수하고도 끝까지 전투기를 몰았던 전투 조종사.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에 내래이션되는 승리의 오마주들. 그런데 이 순간 불현듯 떠올라 크리스토퍼 놀런의 국가와 역사관, 세계에 대한 이해를 압도해버리는 영화가 있었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이다. 이 영화에서 쇼헤이는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체제에 순응하고 동화할 수 없는 자)이 유년기 겪었던 국가와 권력, 아버지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전쟁 중 일본 역시 자국 민간 어선들에 대한 징발을 명령한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유일한 생계수단인 어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군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통 사정을 하게 된다. 이 장면을 목격한 주인공은 아버지를 굴복시키며 생존수단을 강탈하려는 군인들에게 달려들고, 결국 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는 징발에 수긍하게 되는 장면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쇼헤이에게 국가와 전쟁은 결코 애국이나, 대의, 승리로 설명될 수 없는 실체이다. 전범 국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모든 전쟁이 위정자들의 게임이이고 권력이기 때문이다.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 생활을 했던 노벨 문학상 수상자, 컷트 보네컷의 『제 5 도살장』에는 부제가 달려있다.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이다. 그가 전장에서 마주친 적군-악의 실체는 사실상 이제 막 13-4살을 넘긴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아이들을 사지로 내모는 전장의 게임은 그 어떤 승리의 명분도 수립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탄식만이 가능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거대하게 몰려드는 연합군의 공격에 대한 공포로 자폭을 선택했던 일본 병사들 역시, 죽음 직전에 엄마와 가족에게 편지를 남기며 울부짖었던 어린 소년들에 불과했다. 이스트우드는 그들이 자발적인 애국주의에서가 아니라 국가의 강요된 대의와 명분에 의해 이끌려왔음을 묘사한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광의 길> 역시, 전장의 최전선에 서 있는 병사들이 위정자들 혹은 권력자들의 승리를 위한 비인격화된 수단들로 간주되는지를 냉혹한 게임처럼 묘사한다. 세상에 대한 성찰의 시선을 가진 거장들에 의해 그려진 전쟁은 적과 아, 승리와 패배, 정복과 굴복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다. 모든 전쟁은 불모한 폭력에 불과하며, 그 무수한 이름 없는 죽음들 앞에 그 어떤 승리도 영광도 존재할 수 없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덩케르크>가 무려 6만 5천여 명이 죽어간 전장을 승리의 기념비로 다시 써 내려가는 순간, 이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 우매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것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런의 <덩케르크>에도 흥미로운 지점들이 존재한다. 첫 번째, 이 영화가 적어도 중반에 이르기 전까지 전장은 공격하는 자가 의해서가 아니라, 공격받는 자들에 관한 세계로서 묘사한다. 사실 주류 영화뿐만 아니라 서방세계에 의해 지배되는 뉴스 미디어, 드라마 등은 언제나 공격하는 자의 입장과 정당성에 입각해 서술되고 조작된다. 반면 <덩케르크>는 영화의 본편이 공개되기 이전부터 트레일러를 통해 전쟁에 관한 새로운 체험 감각(불안과 공포)을 제안하였다. 잔교에 운집한 병사들이 폭격기 소리와 함께 공포에 사로잡히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는 안타깝게도 언제나 본편보다는 트레일러가 더 훌륭하다). 실제로 영화의 초반부 및 잔교에서의 1주일을 묘사하는 많은 장면들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청년(토미)의 불안과 필사의 생존 의지를 묘사하는데 충실하다. 무엇보다도 호이테 반 호이테마가 촬영한 와이드한 전장의 풍경들은 그 드넓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시한폭탄처럼 짹각거리는 스코어 사운드와 더불어 주인공 및 관객을 심리적으로 고립시키는 효과가 탁월하다. 이 영화에서 더욱 흥미로운 두 번째 지점은 영화가 중반에 이르기 전까지 전개된 영화적 시간과 공간에 대한 흥미로운 아이디어들 때문이었다. 놀란 감독은 영화의 존재를 ‘시간’의 축으로서 구조화한다. <메멘토>로부터 <인셉션> <인터스텔라>, 그리고 <덩케르크>까지 그는 영화가 어떻게 아날로그적 시간에 대한 감감을 해체하거나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실험한다. <덩케르크>는 이 영화가 초반에 제시하듯, 명시적으로는 3개의 시간을 병렬적으로 배치한다. 해안가 잔교에서의 1주일, 선박을 타고 병사를 구출하기 위해 나선 가족의 하루, 그리고 공중폭격을 위해 출격한 항공기에서의 한 시간. 명백하게 서로 다른 길이로 구성된 시간이지만, 놀런은 이 영화의 서사 구조 내에서 교차 편집을 통해 세 개의 시간 층위를 동등하게 병렬적으로 배치하는 야심을 피력한다. 물론 이러한 배치가 온전히 새로운 영화적 실험은 아니다. 사실 영화는 조르쥬 멜리에스의 ‘트릭’이 발생했던 그 순간부터 이미 시간의 구조물이었다. 영화의 모든 시간들은 생략되거나 연장될 수 있으며, 압축될 수 있다. 다만 이미 1930년대, 할리우드 고전기에 이른 성과는 그 시간의 트릭을 관객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다시 말해 철저하게 인공적으로 선택되고 배열되는 시간의 파편들을 관객들이 서사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고 인과론적인 실체로서, 영화의 조작 가능성을 비가시화하는 심리적 구성물로 완성해냈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놀런의 시간 구조는 새로운 영화적 시간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연화된 고전적 서사의 시간을 탈구시키는 것, 즉 선형적이고 인과론적 서사로 수렴되었던 시간을 비선형적 단위로 재구성하는 행위에 가깝다. 여기서 핵심은 그가 영화의 논리 혹은 시간의 논리를 분절적이고, 비선형적인 디지털의 개념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그가 지독히도 아날로그적인 질료인 필름을 고집하고 있음에도 그의 영화적 시간 감각은 철저하게 디지털화된 감각이다. 선형적이고 물질적이며, 연속성과 원본(본질)성에 대한 감각인 아날로그와 달리 디지털적 감각은 비선형적이며 비물질적이며, 불연속성과 절대성의 속성을 지니지 않는다. 디지털 시대의 예술에 대한 분석적 이해를 시도하는 연구자 찰리 기어는 예술과 디지털의 상관관계를 자본주의적 형식논리(상품의 추상화, 표준화, 수량화의 논리. 그로 인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류의 새로운 분절적 감각과 논리) 속에서 파악한다. 자본주의가 가장 고도화된 형식논리로 작동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시간과 공간의 가치와 크기는 근대 이후 형성된 서구적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을 가장 미시적으로 파편화하거나 압축하고 해체한다. 밀레니엄 시대를 전후로 고조된 디지털적 감각에 대한 예술의 인식은 당장은 비선형성(랜덤 액세스)과 상호작용성의 신화가 만들어내는 무수한 경우의 수를 디자인하는 예술형식으로 무수하게 발현되어 왔다. 하나의 절대성, 하나의 인과론적 서사, 하나의 감각으로 통일된 시공간 구조의 수사학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덩케르크>에서 크리스토퍼 놀런이 디지털적 감각으로 시간과 공간을 구축한다고 할 때, 그것은 단순히 세 개의 시간(1주일, 하루, 한 시간)을 병렬적으로 분절해 제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덩케르크>는 사실 굉장히 관습적이고 장르적인 컨벤션과 스릴, 긴장 구성에 충실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관습을 배치하는 방법에서 눈에 띄는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면, 영화의 초반부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대의 인물들을 마치 동시적인 시간처럼 교차 편집을 통해 구성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일주일의 시간을 대변하는 토미가 잔교에서 부상당한 병사를 다른 이와 함께 함선으로 호송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거의 실시간적 시간 흐름을 가지고 서사에 배치되는데, 그 사건을 통해 관객의 긴장을 자아내기 위해 함선 장교의 출항 명령, 군집한 병사들로 인해 쉽게 나아가지 못하는 토미의 호송, 심지어 그 와중에 진행된 폭격과 진행을 가로막는 잔교의 끊어짐 등이 묘사된다. 이 순간들은 토미가 과연 배에 승선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지독히도 관습적인 긴장과 병렬의 편집방식을 채택한다. 그런데 이 장면의 트릭은 다시금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인물들의 긴박한 순간과 교차편집된다. ‘하루’의 시간을 보여주는 민간 선박 출항의 긴박함(해군들이 배를 징발하기 위해 다가오는 순간, 그들을 따돌리고 출항해 버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연료계가 고장 난 폭격기의 불안한 항공 등이 그것이다. 표면적으로는 1주일, 하루, 한 시간의 시간 위에 배치된 인물과 사건들은 교차편집을 통해 마치 동시적 시간인 양, 그것도 거의 실시간적인 방식으로 구성된다. 만일 이 영화가 초반에 세 개의 인물군이 서로 다른 길이의 시간을 배분받고 있음을 자막을 통해 알려주지 않았다면 관객들은 분명히 동시적 시간으로 인식했을 순간이다. 그러나 서사의 정황상 이 시간들은 전혀 다른 시간대에 발생한 사건들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영화가 편집이라는 장치를 통해 서로 다른 시간대에 얼마나 랜덤하고 자의적인 방식으로 접근 가능한지를 실험한다. 이 실험에서 ‘놀라움의 효과’를 유발하는 것은 놀런의 영화 그 자체라기보다는, 관객의 고전주의적이고 관습적인 관람행위(인과론적이고 선형적인, 무엇보다도 편집의 이음매 없는 연결이 구성한 영화적 일루전의 리얼리티 효과) 그 자체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디지털 시대의 감각으로서 영화의 시간과 공간을 새롭게 구조화하는 장인이다. <트윈 픽스>의 25년, 과거 혹은 미래? 이러한 크리스토퍼 놀런은 야심 많고 흥미롭지만, 그는 언제나 특정 한계치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부한 주제의식도 여기에 한 몫 하지만, 영화적 트릭과 야심이 영화의 존재 그 자체를 재구성하는 전복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비선형적, 랜덤 액세스 되는 시간이 서로 다른 서사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올해의 성취는 역시 25년만의 귀환, 데이빗 린치의 <트윈 픽스> 시리즈이다 노장의 예술가 데이빗 린치가 <트윈 픽스 3>를 통해 보여주는 세계는 놀랍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미학을 대변하는 호이테 반 호이테마의 웅장한 스펙터클의 위용이 없을지라도 그는 키치적이고 B급 영화적인 생략과 응축, 유머를 통해 감히 범접하기 힘든 불가해한 예술 세계를 달성한다. 린치에게 영화는 단순한 시공간적인 트릭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시공간의 세계로 진입하는 ‘열린 문’이다. 25년 전 <트윈 픽스> 시리즈를 봤던 관객이라면, 시즌 2의 후반부 붉은 방의 로라 팔머가 쿠퍼 요원에게 25년 후에 다시 만나자고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것은 정말로 25년이 지난 2017년, 시즌 3를 시작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억해야만 하는 또 한 가지. <트윈 픽스 3>의 붉은 방에서, 외팔이 사내는 여전히 그 공간에 앉아 있는 쿠퍼에게 지금이 과거인지 미래인지 질문한다.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를 결과를 미리 언급하자면, 시즌 3의 최종화에서 쿠퍼가 도달한 세계는 영화적 서사의 과거일까? 미래일까? 놀랍게도 시즌 3의 최종화는 전 에피소드들의 최종적인 귀착점이자 원점으로 돌려버린 출발점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트윈 픽스>는 영화의 안과 밖에서 두 개의 시간 구조를 제시한다. 영화 밖에 존재하는 첫 번째 시간은 정말로 25년의 공백 이후에 도착한 이 영화에 새겨진 물리적 시간의 흐름이다. 시즌 3에서 우리는 25년 만에 다시 뭉친 놀라운 출연진들을 거의 다 만나게 된다. 붉은 방에 갇혀 있던 쿠퍼는 말할 것도 없이 트윈 픽스의 보안관 사무실과 그 마을에서 살아가던 거의 모든 배우들이 시간의 흔적을 온 육체와 얼굴에 새기며 다시 등장한다. 그래서 이 시즌의 절대적 주제는 ‘시간’처럼 보인다. 시즌 3의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서사와 상관없이 25년의 공백(혹은 점핑)이 주는 놀라운 연속성과 단절성을 지속적으로 상기하고 인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역시 영화적 구조가 내재한 미궁과도 같은 세계를 관통하는 시간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시즌 3의 최종화는 이 모든 이야기의 귀착점이자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쿠퍼와 주요 인물들은 불가해한 세계의 문을 통과해 초월적 우주와 붉은 방,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시간의 경계, 과거와 현재 혹은 미래의 경계는 불가해한 미스터리로서만 제시될 뿐이며, 심지어 죽음이 존재의 끝으로 귀결되지도 않는다. 린치는 단일하고 절대적인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우주로 통하는 문들을 통해 하나의 서사가 아니라 언제든 변용가능한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제시한다.(트윈 픽스 3의 최종화의 마지막 대사는 “지금이 몇 년인가?” 하는 것이다) 어쩌면 별거 아닌, 그러나 거대한 매혹 철학자 들뢰즈로부터 영화 연구자 데이빗 노먼 로도윅까지 그들은 영화를 ‘공간에 기반한 시간 예술’이라고 정의한다. 영화는 공간의 구성을 통해 시간을 창조하는 것이 가능한 시간매체이다. 시간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시간이 영화의 존재론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이며, 모든 시간이 시작되는 탄생과 소멸되는 죽음까지도 영화의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로 작동한다. 올해 나의 사사로운 주목을 받았던 영화와 감독들은 모두 ‘시간’을 영화 그 자체로서 인식하는 감독들이자 영화들이다. 혹은 나에게 ‘영화적 시간’에 대한 사유를 재촉했던 작품들이다. 수십 년 만에 스크린으로 공개된 고다르의 <작은 독립영화사의 흥망성쇠>는 린치의 영화처럼 시간의 점핑과 함께 우리 앞에 도착했다. (당연히 이 영화 역시 여느 고다르의 영화들처럼 영화라는 매체의 자의식과 영화의 시간을 실험하는 이미지들로 구성된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순간은 이 영화 속에서 아직 젊었던 장 피에르 레오가 영화 상영 이후 실제로 극장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영화가 불멸의 시간을 소망한다던 바쟁의 말처럼 스크린 속 과거의 젊은 레오와 달리 그는 현실의 노쇠한 육신으로 관객들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장 피에르 레오 그 자신의 스타성과 영화적 역사들을 응축하는 것으로 점철되는 스와 노부히로의 영화 <오늘 밤 사자는 잠든다> 역시, 그가 죽음을 연기하는 장면으로 시작되고 종결된다. 그리고 극 중 영화 현장을 떠난 주인공은 자신의 기억이 깃든 과거의 공간들을 여행하며, 그곳에서 역시 먼저 죽어간 이들의 유령을 마주한다. 스와 노부히로는 이 영화에서 영화야말로 죽음에 저항하고 죽음을 기록할 수 있는 매체임을 새삼스레 상기한다. 그리고 언제나 나만의 베스트에 이름을 올리지 않을 수 없는 구로사외 기요시는 전작 <은판 위의 연인>(사진과 죽음, 영화에 관한 고혹적 괴담)에 이어 세계의 종말에 대해 이야기 한다. 시간의 끝, 죽음과 영화가 온전히 만나는 세계에 대해서 말이다. 디지털 시대에 영화는 그 스스로 디지털적인 속성(비록 아날로그였던 셀룰로이드라 할지라도 분절된 프레임으로 존재했던 영화적 이미지와 시간들)을 세상에 대한 인식론과 존재 그 자체로 현시한다. 파편화되고 불연속적이며 절대성의 위계를 상실한 신자유주의 시대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압축과 파편화. 최근 무수한 영화와 드라마들이 시간의 절대성을 넘어서는 서사들(평행적 세계, 4차원을 넘어 5차원의 세계, 우주적 시간, 비선형적 내러티브 등)은 포스트 모던을 넘어선 또 다른 예술적 시간의 재현능력을 탐닉하게 한다. 영화와 예술, 디지털적 감각과 영화적 시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수렴되는 형식 논리들. 이러한 것들이 요즘 나를 사로잡는 사사로운 매혹들, 사사로운 영화들이다.
0. 영화 스태프 영화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처음 꾸는 꿈은 대다수가 감독이다. 나 또한 감독이 되고 싶어서 이 일을 시작했으며 그래서 뭣도 모르고 독립영화 연출부 막내부터 시작해서 그사이 그나마 무탈하게 일하고 놀며 십여 년 좋은 사람들과 지내다 보니 지금은 운 좋게도 상업영화 조감독 일을 하고 있다. 라고 덤덤한 척 적다가 잠깐 글쓰기를 멈추고서 한숨을 쉰다. 사실 영화를 만드는 누구나 그렇지만 그들의 지난날들은 희망찼었고 혹은 원만했었던 또이 또이 (본전치기)의 날들보다 지난하고 고단한 추억, 말하고 싶지 않은 흑 역사의 시간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 여건은 늘 만만치 않았으니까. 풍족하며 여유 있는 영화란 지구상에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것. 그래서 그럴 때마다 가장 많이 했던 이야기들은. “비록 그렇지만 나는 영화를 그만 둘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나는 영화를… 여전히 너무 사랑해” 라는,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들과 “이번엔 진짜 정녕 반드시, 기필코 그만둘 거야, 잡지 마, 이번은 진짜야!” 라며 내뱉으며 자리를 박차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서 집에 갔는지도 몰랐던 그들의 뒷모습들. 사실 답은 목구멍 밑에 이미 있었다. “버티는 자가 승리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고 싶은 영화를 계속.... 여기가 중요하다. 계속 할 수 있다 ” 라는 것. 이 명제를 넘어서는 자는 보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다음날 사무실의, 촬영장의 풍경은 대부분 재미없는 해피엔딩이었다. 하나둘씩 술 덜 깬 얼굴로, 어제의 눈물 자국 그대로 멋쩍게 나와서는 다시 컴퓨터 전원을 누르고 문서를 만들고 세트에 그림을 그리고 소품의 손을 보며 촬영에 쓰일 옷과 장비, 도구들을 체크하며 쓸데없이 바지런히들 움직였다. 어쨌든 그렇게, 그렇게들 지내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영화 작업을 하면서 그 공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서 ‘영화 만들기’ 에는 감독이라는 포지션 외에도 수많은 소중한 포지션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과 맞는 포지션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하나의 작품을 하고 운 좋게도 다음 작품을 할 수 있게 되면, 어이쿠야! 영화를 계속할 수 있다는 점에 기뻐했고 노력해서 팀장도 달고 실장도 달고 퍼스트도 하고 감독도 달면서, 지화자! 자신이 작업했던 작품이 BP(손익 분기점)를 넘거나 혹여 크게 흥행이라도 하게 되면 그 누구보다 기뻐하며 함께 고생했던 스태프들에게 낯 뜨거운 엄지를 치켜세우기도 하고 또한 지지리도 원수처럼 지냈던 어제의 적과 서로 회개하고 용서하게 되는 기적의 순간들을 경험하기도 했다. 한편 관객 수 천만이라는 한국영화의 흥행시대에 빛이 닿지 않는 스크린의 반대쪽과 같은, 영화 현장의 노동 현실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안 하고 싶다. 당연히 사적으로는 영화인들끼리 이곳의 치부와 환부에 대해 지겨울 만큼 토해내고 담으며 비판하고 곱씹는다. 하지만 외부에서 보는 이곳의 문제점과 실제 이곳의 문제점에 대한 시각 차이가 크고 그 시각차를 줄이기 위해 이곳의 특수성에서 시작된 문제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하려다 보면 전체 글의 본래 목적성에서 벗어 날 우려가 있다. 그래도 굳이 두리뭉실 소견을 말해 보라면 물론 여전히 문제도 많고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지만 지금은 예전보다 조금 더 나아지고 있고 많은 이들이 문제 해결에 동참하고 있다 정도의 긍정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그리고 쓰다 보니 개인적 아쉬움에 좀 더 적는다면 “그 날고 기던 능력의 선배, 동생들도 이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수년간 많이들 이 바닥을 떠났습니다. 슬픈 일이죠. 누구는 도태라는 단어를 쓰며, 거품이 빠졌다는 용어를 쓰며 모두를 묶어서 폄하하지만 위에서 말씀드린 계속하기(노동의 안정성) 에 있어서 불합리성이 더 커져 왔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새로운 스태프들은 이전처럼 들어오지 않고 있죠. 마치 작고 단단했던 얼음 호수가 갑자기 넓어지면서 전체 얼음의 양도 같이 증가해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기존에 얼음 양 만을 가지고 억지로 늘어난 면적을 채우다 보니 이 호수 전체가 살얼음판이 되어버린 꼴입니다. 그 얼음판 위에 우리들이 서 있었고 그 과정 속에 많은 사람들이 살얼음판 아래로 충분히 추락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불안한 호수의 빙판 위에 새로운 사람들이 쉽게 올라서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도 고무적인 면이 있다면 예전보다 월급은 증가했고 D/N(하루 종일) 촬영은 줄었으며 몇 가지 기본적인 보험이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나는 희망차게 생각하고 싶다. 앞으로도 계속 한국 영화는 만들어져야 되기 때문이다. 솔직한 마음이라면 예능 프로 1박 2일의 엔딩처럼 “ 한국 영화 산업으로 많이들.... 일하러... 오세요!!!!” 라고 소리쳐서 홍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실제 내부적으로 나의 마음처럼 한국영화와 관계된 많은 분들이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앞으로 더욱더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이라 생각한다. 끝으로 이왕 진지해졌으니까 좀 더 진지하게 영화 < 인터스텔라 >에 나오는 명대사를 적으며 마무리해본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1. 조감독의 일 = (감독 + 배우 + 스태프) 들의 시간 우선 현시점에 조감독의 일을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요 몇 년 사이 영화감독에게 요구되는 룰의 달라진 점과 동시에 스태프들에 대한 처우의 변화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조감독의 입장에선 영화 현장에 감독과 배우, 스태프 모두 정해진 시간 안에 자신들의 모든 내공과 능력치를 쏟아내야 하는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공기와 우연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결국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감독의 재량이든, 톱 배우의 연기력이든, 시나리오 매력에 의한 스태프들의 헌신이든, 좋은 보수와 여건에 현장이든, 그 어떤 좋은 동기로 모두가 결승선까지 함께 열심히 달릴 수 있는 것. 감독과 배우만 100점 맞는 현장보다 모든 감독, 배우, 스태프들이 자신들의 역량을 펼쳐서 그 평균의 점수가 70점일 때 더 좋은 결과물의 영화가 나온다고 나는 경험상 알고 있고 믿고 있다. 덧붙여 많은 일반 분들이, 이제 막 영화 작업을 시작하는 분들은 영화작업이 약간의 허세와 멋. 미지의 어떤 것을 알고 있는 특별한 누군가들의 낭만. 현장의 마법들로 이루어지는 것. 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마법들은, 충분히, 싸우고 꼬집으며 치열한 회의와 고민, 시뮬레이션을 해서 촬영장에 갔을 때나 아주 가끔 하늘이 도와줘서 탄생했던 경험이 있다. 프리 프로덕션에서 120프로를 준비해 가도 촬영장에서 80프로 밖에 목표치를 이루지 못할 때가 다반사고 그 정도도 서로들 잘했다고 만족을 한다. 왜냐하면 이 일이 어떤 오락프로의 게임처럼 3분 안에 정해진 여러 미션을 수행해야 하고 그 미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계산밖에 알 수 없는 변수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곳이 촬영장이며 그것이 조감독들의 가장 큰 숙제이다. 수많은 좋은 우연들은 제발 일어나길 기대해야 하고 반면 수많은 나쁜 우연들은 제발 생기지 않도록 준비하는 직업인 것이다. 어쨌든 잠시 거두절미하고 조금 길지만 영화 현장에서 감독과 스태프들에 대한 인식 변화에 대해 살펴보겠다. (주의: 아래 이야기는 주로 한국영화의 연출파트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많은 이들이 영화를 시작하는 계기는 자신의 메시지와 감정을 영화라는 매체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다. 그리고 여러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영화와 감독(취향)이 생기고 결국 자신의 절절한 이야기를 하려면 반드시 감독이 되어야만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조금만 경험을 해보면 반드시 ‘영화 만들기=연출 감독’ 이 아니라 촬영. 조명. 사운드. 미술. 의상. 분장. 특수효과. 무술. CG. 마케팅, 투자, 배급 등등도 명백하고 중요한 영화 만들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처음 영화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나는 이런 영화의 요소가 좋다’라는 표현을 그 작품을 만든 영화감독이라는 상징적 대명사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만큼 영화라는 매체에서 감독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절대적인지이다. 그리고 그 감독의 위상은 지금보다 과거로 갈수록 혁혁히 높았다. 십여 년 전 감독이라는 분들은 나에게도, 연출부 선배들에게도 이 작품에 한해서는 전지전능하며 모든 파트를 통달했고 종종 왜 저렇게 찍을까? 라는 의심과 질문보다는 “아니야, 분명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그는 알고 있을 거야.” “그는 내가 보지 못하는 어떤 것을 보고 느끼고 있을 거야.” 라는 기대감을 한 몸에 받던 종류의 사람이었고 현장의 모든 스태프들은 그가 원하는 그림과 의미를 만들어 내기 위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 것이 영화 현장이었었다. 물론 기본적인 이 개념은 어느 정도 지금 영화 현장에서도 같지만 어느 시점 이전과 이후로 이러한 절대자 감독을 바라보는 시선, 혹은 요구되는 것들이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의 가장 큰 화두는 바로 시간이었다. 이전에 흔히들 영화 공정을 설명할 때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말을 많이 했었는데 그 안에는 많은 뜻이 담겨져 있다. 그 이전 시대의 시간 쉽게 말해 감독과 배우들이 어느 정도 시간에 있어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개념의 밑바탕에는 영화는 예술이며 그 예술을 위해 시간을 투자해서 노력하고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이 깔려있었다. 방금 어디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고백을 하자면 나도 그랬고 많은 배우들, 영화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상상하는 도자기 굽는 노인이 있지 않은가? “할아버지,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웬만하면 이제 그만하고 잠 좀 잡시...” 와 동시에 멀쩡한 도자기들을 와장창 깨뜨려 버리던 수많은 할아버지들. 조금 비꼬기는 했지만 영화를 하는 사람들의 프라이드는 굉장했었고 영화를 찍는 배우들 또한 절대로 TV 드라마를 찍지 않았고 스태프들도 방세가 밀렸지만 드라마는 찍지 않는 호기를 부렸다. 그리고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 작품에 들어가고 갑자기 소품으로 간이 필요하다고 하면 “냉큼 여기 있습니다!” 하며 자신의 간과 쓸개까지 내놓을 것처럼 자기 파트의 완성도를 위해 최선을 다했었다. 어쨌든 이러한 강력한 프라이드의 공감대가 확보한 것은 결국 촬영할 수 있는 많은 시간들이었다. 우리는 공을 들인다고 표현을 하는데 감독과 배우는 덕분에 현장에서 비교적 여유를 가지고 많은 리허설과 다양한 버전의 take를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찍고 나면 방금 찍은 화면을 모니터로 replay 했고 현장편집이라는 사람이 현장에서 컴퓨터로 OK 된 컷을 바로바로 앞뒤 컷들과 붙여서 보여줬고 그것을 보고서 감독과 배우, 많은 스태프들이 다시 수정할 사항을 이야기하고 누군가 한 번 더 찍자고 이야기하면 그에 따라 모든 파트의 사람들, 배우들이 화면 안을 더욱 정교하고 풍성하게 만들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 영화 현장만의 특화된 작업방식은 당연히 많은 오차를 줄였고 좋은 그림을 남길 확률을 높였기 때문에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의 퀄리티가 세계에서 인정받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작업방식의 단점은 너무나 분명했다. 엄청난 시간과 노동을 요구했고 따라서 제작비, 배우의 개런티는 조금씩 증가했고 이해가 안 가지만 스태프들의 페이나 작업 조건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더욱 이해가 안 가지만 스태프들은 그러한 비합리성에 꿈과 낭만이라는 MSG를 쳐가며 스스로 파수꾼이 되려고 했다. (참고로 현재도 촬영장에서 모니터링을 하며 현장편집이 있지만 과거처럼 모니터링을 할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스태프들의 프라이드는 아직도 여전하다고 믿는다) 그 이전 시대의 끝 그런데 시대가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애매모호 하게 이야기했던 그 이전 시대의 끝 이 다가온 것이다. 그 시작은 영화의 촬영 환경이 필름에서 HD 디지털로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세계 상업영화의 변화에 따라 관객들은 루즈한 영화 보다는 빠른 전개에 기술적으로 다이나믹한 영화를 원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 뜻을 조감독 입장에서 해석하자면 컷의 길이가 짧아졌고 (오히려 현장에서 찍어야 할 전체 컷의 개수는 늘었다는 이야기) 기술적, 시각적으로 다이나믹한 영화(기술적으로 다양한 카메라 및 기타 장비가 필요해졌고 영화의 공정 자체가 좀 더 정교해지고 복잡해졌다는 것을 의미 = 제작 비용의 필연적인 증가), 끝으로 필름에서 디지털로 바뀌면서 (디지털은 필름처럼 많이 찍는다고 필름 값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찍는 카메라의 대수는 증가했고 오히려 그 이전 필름으로 찍을 때보다 현장에서 찍는 촬영 분량이 어마어마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정리를 하면 시대가 변하면서 우리가 촬영 기간 안에 찍어야 할 컷의 개수는 늘었고 감독들은 그 전보다 더 많고 다양한 앵글에 그림들을 필요로 했고 또한 다양한 장비와 특수효과, 특수분장, CG와 같은 특수 기술들이 영화 공정의 뒷줄에서 메인으로 포지션을 옮기면서 영화 공정의 제작비와 시간은 더욱 증가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점은 이 과도기 라고 할 수 있는 기간에 스태프들은 여전히 그 이전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페이와 근무 조건으로 그 이전 시대보다 더욱 빠르고 영리하게, 그리고 오래~~~ 더 오래~~~ 일을 해야 했다는 점이다. A캠 한 대만 쓰던 촬영장에서 정해진 시간 안에 늘어난 컷의 양을 소화하기 위해 B캠(총 카메라 두 대)을 상용화하면서 효율성을 확보하려 했지만 오히려 더욱 작업 시간을 증가시켰다. 이유는 카메라가 2대라는 뜻은 한 번 찍을 때 스태프들이 커버하고 만들어야 할 공간이 더 넓어졌다는 뜻이며 또한 감독들은 여전히 본인들의 시간을 최대로 확보해서 많은 컷들, 다양한 쏘스를 남기길 원했기 때문에 B캠을 이용해서 약속된 콘티 외에 컷들을 찍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비극은 스태프의 숫자가 여전히 늘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100회차가 넘어가는 영화들이 우후죽순 등장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어제 D/N/D(하루 종일 찍고 다시 다음날 낮까지) 를 찍었네, 아 그래? 우리는 N/D/N(저녁에 시작해서 하루 종일 찍고 다음 날 저녁까지)를 찍었네. 아 그래? 우리는 요새 4방향 마스터로 찍어나가고 있네. (설명을 하자면 한 씬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제일 넓은 샷으로 그 씬의 처음부터 끝까지 찍는 샷을 마스터 샷이라고 하는데 보통 이 마스터 샷을 찍고서 같은 방향으로 여러 사이즈에 인물 샷을 찍기 마련인데 이러한 공정을 전혀 다른 4방향에서 다시 반복해서 찍는 것을 말함). 아 그래? 우리는 요새 8방향 마스터로 바뀌었다네. 껄껄껄 (설명하자면 주구장창 찍고 찍고 또 찍는다는 이야기). 뭐가 자랑이라고.. 경쟁도 이런 경쟁이 없듯이 찍어대던 시기가 한동안 지속 되었고 우리들끼리는 농담 삼아 컷이 세포 분열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훌륭한 스태프란 당시 최고 인기였던 박지성처럼 지치지 않는 심장으로 넓고 다양한 멀티 포지션을 군말 없이 소화할 수 있는 사람들을 뜻했다. 정예부대라는 말들을 하며. (나도 어떤 작품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 50시간 넘게 찍은 경험이 있다). 배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줄어든 상황에서 여러 번, 다양한 버전으로 찍어야 했기에 계속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고 즉각적으로 다양한 버전의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들이 선택되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얼마 안 가서 그 질기고 탄탄했던, 예술이라는 갑옷과 망토로 두르고 둘러서 견뎌왔던 많은 정예 요원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며 조금씩 듣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이야기들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경훈아. 살려줘 ” 이즈음의 시대부터 위에서 말한 시간 이라는 개념의 문제점에 대해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고 조금씩 영화 공정의 시간 이 감독과 배우, 그에 따라 혜택을 본 자본가들 위주에서 스태프들을 배려한 시간 으로 분배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최근 몇 년 전부터는 더욱 촬영시간과 비용을 세분화시킨 표준계약이라는 것이 의무 시행되면서 앞서 말한 그 이전의 시대에서 그 이후의 시대 로 넘어오게 되었다. 불과 몇 년 안 된 이야기. 그 이후 시대의 시간과 감독, 그리고 스태프의 전문화 그 이전 시대에 금기의 영역이자 감독의 특권이었던 촬영 시간이 줄었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인 것이다. 영화 현장에서 우리의 자랑스러웠던 제작비 최후의 마지노선. 스태프의 페이가 상승했고 그 스태프의 페이 계산이 예전처럼 통계약이 아니라 시간당 페이, 혹은 적어도 월급으로 계산하게 되었으며 노동법에 기준으로 정해진 노동시간을 넘을 경우에 OVERCHARGE 페이를 지불하게 되었다. 즉 과거, 스태프들의 프라이드로 확보되었던 시간에 대해 좀 더 정직하고 명확한 계산을 하게 된 것이다. 시간=돈. 이제는 그 누구도 얄짤 없음. 꽝꽝. 그러자 시간에 구애 없이 몇 번이나 곱씹고 생각해서 찍던 감독의 자리가 지금은 안 그래도 찍어야 할 컷도 많고, 그 컷의 기술적 난이도도 높아졌으며 거대한 숙제처럼 그날 분량을 어떻게든 찍어 내야 함과 동시에 영화 내적인 퀄리티의 성취, 외적인 상업적 흥행에 책임을 지는 극한직업으로 바뀌게 되었다. 스태프들 또한 근무와 보수의 조건이 좋아졌지만 마찬가지로 작업의 시간은 줄어들었고 그들 또한 시간 안에 능력을 발휘해야 할 전문성을 더욱 요구받게 되었다. 또한 100%의 퀄리티 보다는 80%의 퀄리티를 만들면서 정해진 스케줄을 소화해내는 것도 스태프의 미덕이 되었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 특수효과, 특수분장, CG, 다양한 액션과 특수 장비의 파트가 영화의 양념이 아니라 주재료가 되면서 지금의 영화 만들기는 이전처럼 연출 감독 본인이 직접 쉽게 통제하고 개입할 수 있는 덩어리의 크기를 넘어선 지 오래다. 전문 지식이 필요한 이런 파트들은 어느 정도는 그 파트의 전문가를 믿고 가야 하는 게 현실적이며 모든 것을 감독이 깊숙이 개입해서 디자인하기에는 기본적인 연출을 할 시간도 벅차다. 이 과정은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 좀 더 분업화되고 있음을 의미하며 감독만 바라보던 조감독의 역할도 좀 더 다양해진 스태프들을 바라보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들과 감독의 생각을 잘 공유하고 그들이 좋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앞에서 말한 수많은 좋은 우연들을 기대하고 반면 수많은 나쁜 우연들을 막을 수 있는 지금 시대에 방안이다. 또한 감독님을 위한 길이 기도하다. “영화는 아주 개인적인 것이다. 나는 영화를 만들 때 무엇보다 우선 내 자신을 위해 만든다. 내가 가지고 놀 멋진 장난감 상자 같다. 물론 아주 비싼 장난감 상자라서, 때로는 그렇게 재미있게 노는 게 부끄러울 때도 있다. 그러나 누구보다 나를 위해 영화를 만든다는 사실을 부정한다면 정직하지 않은 일이다. “ - 책, ‘거장의 노트를 훔치다’ 에서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의 말 멋진 말이며 100프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 상업영화에서 개인의 취향과 시간을 구애받지 않고 찍을 수 있는 감독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시대가 변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이 시간 분배의 문제. 감독을 포함한 전문화, 분업화된 수많은 스태프들이 정해진 시간과 예산 안에 최대한 창의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효율적인 작업환경과 시간을 제공하며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러기 위해 촬영 준비(프리 프로덕션), 본 촬영(프로덕션)을 위해 더 정교하고 실전적인 스케줄을 짜고 운영해 나가는 것. 그것이 지금 조감독의 가장 중요한 일이자 미덕이며 과거에 비해 더욱 전문화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