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공간, 영화에 대한 나름의 연출론
- 감독
- 이병기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강예은, 이재진, 계영호
* 사진: 필자 제공 연출배경 < 주희에게 >(2025)는 세 명의 연출( 장주희 , 부성필 , 김성환 ) 중 두 명이 출연자로 등장하며, 네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복잡한 층위를 가지고 있다. 영화는 한 여성(장주희 감독)이 자신이 20대에 ‘혈액암’을 겪었음을 고백하며 시작된다. 사회로 복귀를 하게 된 무렵 만나게 된 동년배의 남성 다큐멘터리 감독(부성필 감독)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카메라의 시선은 그가 기록하는 장애인(선철규)의 번지점프 도전기에서부터, 2014년에 발생했던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전인숙)의 삶을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를 통해 영화는 본격적으로 한국사회의 지표에 흐르고 있는 ‘고통’과 ‘연결’에 대해 말한다. 이야기는 전적으로 다큐멘터리 감독에 의해 기록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야기를 실질적으로 전하는 목소리는 혈액암과 가정폭력을 겪은 출연자이자, 연출인 여성, 주희(나)의 것이다. 나는 다큐멘터리 속의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관계가 나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영화는 서로 무관해 보이는 가정폭력 피해자인 여성의 삶, 세월호 유가족의 진상규명, 와상장애인의 번지점프 도전기, 제주 4·3 유가족 3세대의 삶이 연결된 복잡한 서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코 복잡한 이야기로만 단정 지을 수 없다.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이것은 30대 여성이 자신의 삶의 어느 한 시점에서부터 지금까지 목격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타인의 고통 속으로 녹아들기 내가 목격한 것 자체가 하나의 사건으로서 영화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본다’라는 수동적 태도에서 ‘말하는 사람’으로 변화한 과정 자체가 이 영화의 연출 동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관찰자에서 화자로 거듭난다는 것은 ‘목격’이라는 경험이 나를 변화시킨 근본적인 이유이며, 이는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의지로, 적극적으로 기록하는 행위와는 다르다. 나는 영화 속에서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다. ‘가정폭력 피해자’와 ‘혈액암 환자’라는, 한 공간에 결박된 존재로서 철저하게 수동적이고 무력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진 목격자이며, 이 고정된 시선은 앞으로 진행될 영화 안에서 변화가 예상될 수밖에 없는 ‘화자’의 자리로 안착한다. 이 영화가 담아낸 화자의 출발점은, 고통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지독한 무력감의 고백에서 시작된다. 나는 오랫동안 가정폭력을 경험하고 목격하면서도 그 일이 없는 듯 살아왔다. 사회는 가정폭력을 일상의 예외로서 묵인하고, 사회에서 장애인은 보이지 않는 존재로 지워버린다. 우리는 304명의 승객이 탄 배가 가라앉는 걸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보다’라는 수동적인 행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무언가를 보기 전과 본 이후의 세계는 결코 같을 수 없다. ‘주희’가 장애인자립센터에서 만난 장애여성 ‘은미’는 시설에서 선철규의 탈시설 다큐멘터리 < 지렁이 꿈틀 >(2010)을 보았고, 그 이후로 은미의 세계는 장애인 수용 시설에서 시설 밖으로 확장되었다. 나 역시 다큐멘터리를 통해 거리에서 투쟁하는 어떤 이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한다. 나와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이가 거리에서 흘린 눈물은, 가정폭력 피해자가 집안에서 흘리는 눈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의 목격은 적극적으로 ‘나’를 그 프레임 속의 대상과 겹치며, 그 속에 나를 투사하고자 하는 욕구와 이어진다. 나에게 ‘본다’는 행위는 사건을 목격한 일시적 순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본다’는 것은 내가 목격한 사건이 나의 몸을 경유하여, 이전과 다른 몸을 만들어나간 과정이다. ‘본다’는 능동적 행위의 결과는 자신의 삶을 바꿔나가는 것이고, 더 적극적인 행위로서의 결과는 다른 사람의 삶에도 영향을 끼치는 일이다. 그런 맥락 속에서 ‘주희(나)’에게 ‘선철규(탈시설 장애인)’와 ‘전인숙(세월호 유가족 활동가)’의 존재는 자신의 문제에 온전히 투신하는 사람들, 즉 보이는 대상으로서 스스로 살아있는 이야기의 주체가 된 이들이었다. 이야기의 주체로서 나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말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주희에게>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로 인해 영화 속 ‘나(가정폭력 피해자, 암 환자)’의 이야기는 세 인물(다큐멘터리 감독, 장애인, 세월호 유가족)과 필연적인 상관관계를 맺으며 단단하게 얽혀 들어간다. “본다는 것은 이처럼 보이는 대상을 거쳐 다시 내 안으로 들어오는(for us and In-itself) 가시적인 것들의 여정으로써, 우리는 봄을 통해 우리 내부로부터 발현하는 타인의 살을 마치 우리 자신의 것처럼 경험한다. 이 순간, 우리는 우리 ‘내부로부터’ 몰려오는 타인의 고통과 슬픔 속에 살게 되고 그 속으로 ‘녹아들어가’는데, 이를 통해, 재난의 세계는 우리의 눈앞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바로 옆으로 다가온다.” - 최종철, 『재난의 예술』, 그린비, 2024, 24쪽. 타인의 고통과 내 안의 슬픔이 하나의 ‘살’로 섞여 드는 이 감각은, 프레임 너머의 비극을 지켜보는 것에 머물던 나를 기어이 말하는 주체로 밀어 올리는 동력이었다. 하지만 타인의 아픔이 내 안으로 밀려와 나를 바꾸어놓았다는 이 복잡한 연결고리를 과연 온전히 설득시킬수 있을까. 만약 관객들에게 이 예민한 호흡을 제대로 설득해내지 못한다면, 목격한 것을 말하는 ‘화자’로서의 내 존재 자체가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거대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영화’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서 목격자가 화자가 됨으로써 완성되는 이야기라면, 목격자가 화자가 된다는 이 단순한 전개는 결국 ‘주희’의 ‘성장 서사’가 되어야만 했다. 내가 본 것들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관객에게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장과 변화는 필연적으로 ‘미성숙’을 전제한다. ‘가정폭력 피해자’와 ‘환자’라는 정체성에 ‘미성숙’의 이미지를 덧씌워야만 성립되는 이 서사 구조 안에서는, 어떤 결핍이 과거의 나를 형성했는지, 그리고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내가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를 분명하게 전달해야만 했다. 친절한 전달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그러나 목격의 대가로서 스스로를 다시 한 번 결핍된 존재로 규정해야 하는 벽에 맞닥뜨린다. ‘성장’이라는 단어는 기묘한 불쾌감과 함께 스스로에 대해 또다시 질문하게 했다.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성장은 과연 필수적인 것인가? 고통은 늘 어떠한 성찰을 수반해야만 하는가? 나의 고백이 도리어 가정폭력 피해에 대한 인상을 수동적이고 고정된 틀에 가두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여성의 성장 서사를 ‘피해의 극복’이나 ‘수동성에서의 탈피’ 같은 전형적인 이야기로 반복하고 재생산하는 위치에 자리매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것은 내 존재가 그저 고통의 ‘친절한 전달자’로 머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 계속해서 의심하게 만들었다. 다큐멘터리의 바깥에서 그 안의 ‘결핍된 존재’인 나를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고통을 전시하는 방식에 타협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태도로 이어진다. 과거와 현재의 나를 분리해 바라보는 이 낯선 응시는, 곧 목격하기 전의 나, 그리고 목격한 후의 나, 그리고 그걸 되새기며 말하는 현재의 나라는 여러 층위로 인해 영화 안에서 인물 간의 여러 시간을 교차시킨다. 기록의 시간, 투쟁의 시간, 깨달음과 과거로의 회귀… 영화 안의 이 여러 시간 속에서 나의 위치는 그들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깨닫는, 자책하는, 스스로 질문하는, 통찰하는 여러 시점에 놓인다. 이로 인해 ‘주희’의 내면과 인식의 변화는 영화의 타임라인을 따라 유동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본다는 것’의 윤리와 연대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자문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수많은 질문과 의심들은, 영화가 상영되고 다양한 관객들과 마주하면서 비로소 온전한 대화가 되기 시작했다. 왜 지금 괜찮은지 묻는 이들에게 상영을 통해 관객분들을 만나다 보면 장애인의 번지점프에 대해, 세월호 진상규명의 방향에 대해 질문하는 분들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10년에 가까운 긴 기록이 ‘삶’이라는 흐름의 속도와 동일하게 압축되어 있을 뿐, 어떤 의도적인 결말을 관객에게 제시하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답변을 들은 관객들로부터 나는 그들이 안도하기도 하고, 더더욱 연대하겠다고 다짐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중 어떤 관객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가정폭력은 트라우마가 심하기 때문에 영영 치유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 질문은 마치 영화 밖, 현재의 나에게 “왜 지금 모든 것이 괜찮은 것처럼 있는지”에 대해 묻는 날카로운 의문 같았다. 그 의문 앞에서 나는 영화 안에서 피해자로서 관객에게 제대로 된 공감과 연결 지점을 설명해내지 못한 것인지 자책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가 저마다 그런 우려와 불안의 지점을 안고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으로 연결되었고, 관객분이 내비친 날카로움으로부터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불안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관객분이 제시한 솔직한 의문 속에서 나는 가정폭력 피해자가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라는 인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더 명확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불완전한 존재로서 가정폭력 피해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오직 폭력에 대한 응징과 가해자 처벌이라는 명확하고 클리셰적인 결말로만 해소될 수 있다는 고정관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가정폭력 피해 서사의 완결이 지닌 본질은, 사회와 국가가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는 제도를 통해 명쾌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이상 언제나 미완으로 남을 뿐이다. 국가폭력을 비롯한 ‘피해자’라는 정체성과 그 삶의 맥락을 가진 모든 존재의 역사 또한 그러하다. 제도적 해답이 제시되지 않는 한, 피해자를 향한 사회적 시선과 인상은 언제까지나 머릿속에 가득 찬 답답함과 같은 브레인 포그 현상처럼 뿌옇고 불명확한 인상만을 남겨둔 채 방치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안개 속을 우연히 뚫고 나왔을 뿐임에도, 나는 그것이 과연 ‘성장’이 될 수 있는지에 여전히 의문을 품는다. 아직도 내가 ‘성장’했다는 표현에 대해, 그리고 이 영화 속 나를 ‘성장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로 소개하는 것에 대해, 묘한 불편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분명한 변화가 있음을 인식하고,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성장한 주희’이자, 30대 여성으로서, 이 불평등한 세계 속에 굴하지 않는 동등한 스피커(화자)가 되어 주어 고맙다는 말로 들리는 착각과 환청 속에서, 나는 ‘여성’ 화자로서의 나의 위치성에 대해 고민하고 분노하고 인정하는 분열적 상태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분열이야말로 ‘존재의 바로 보기’를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음을 이제는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관객과의 만남’을 통해 영화를 만들던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다시 내릴 수 있었다. 나를 결핍된 존재로 규정해야 했던 것, 변화와 성장을 증명해야 했던 것으로 비롯된 나의 불편감에 대한 답을 말이다. 나는 비로소 내 존재 자체의 당혹스러움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수치의 반복을 넘어, 당신의 존재가 구원이 될 때 나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은 나 자신을 비롯해 나의 고통을 목격한 모든 이들의 당혹스러움을 감당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가정폭력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는지 몰랐다’라는 반응으로부터 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듯한 감각을 맞닥뜨려야 했던 그 순간 속에서 알 수 있었다. 결핍된 존재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수치심을 동반하며,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부정당하는 지난한 과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지독한 부정의 시선과 언어들 속에서, 드러내기와 수치의 반복 속에서 나와 당신의 존재가 결국 우리 모두의 구원과 연결되어 있음을 선언할 수 있는 강력한 힘, 나는 그 힘이 바로 이 영화를 만들게 된 이유라고 말하고 싶다. 다큐-코멘터리: 프레임 밖의 문장 타인의 삶이 모이고 흩어지는 한 순간을 카메라로 붙잡기로 결심한 또 다른 순간에 대해, 프레임 밖에서 감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장주희(여성인권활동가, 영화감독) l 장애인 대상 미디어 교육과 여성인권 단체에서 활동하며 < 장애인, 미디어, 교육 >(2022), <주희에게>(2025)를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내레이션은 “대사가 아니나 직접적으로 영화의 내용을 해설하는 말” 1) 로 정의된다. 영화 속 캐릭터와 별개의 해설자가 등장해 사건을 해설한다거나, 대사로 전달하기 어색한 정보 혹은 인물의 속마음을 1인칭 보이스오버로 전달하는 등의 방식으로 활용되곤 한다. 다큐멘터리에서의 내레이션은 주로 후자의 방식을 택한다. 화면에 더해 추가적인 정보를 전달하거나, 감독 자신이 화자가 되어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치거나. 배리어 프리 화면해설은 "시각장애인에게 영상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소리로 화면을 보여주는 것'" 2) 이다. 이는 화면에서 보이는 것 이상의 정보를 전달하거나, 1인칭으로 화자의 속마음을 발화하는 내레이션과 구별된다. 무엇보다 화면해설에는 객관성이 요구된다. 프랑스 화면해설방송헌장은 다음과 같이 객관성의 기준을 제시한다. 개인적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내용을 명확히 전달해야하며, 화면해설자가 이미지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선 안 되며, 설명 내용을 명료하고 압축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3) < 피아노 프리즘 >(2021)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영화는 모든 한국어 사용자를 위해 화면해설과 음향자막이 추가된 배리어 프리 방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이는 꽤나 독특한 효과를 가져온다. 배리어 프리 버전이 동시에 제작되어 일반 버전의 영화와 동시 개봉했던 이승준 감독의 < 달팽이의 별 >(2010)과 같은 사례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배리어 프리 버전은 사후적으로 제작된다. 한 차례 완성된 영화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과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이 별도로 제작되는 방식이다. 경우에 따라 영화의 감독이 직접 음성 화면해설의 연출을 맡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다. 다만 감독이 직접 자신의 작품에 음성해설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배리어 프리 음성해설에선 화면 속 인물을 이름이나 외모, 직책으로 묘사한다. 가령 < 기억의 전쟁 >(2018)의 초반부 시민법정 장면에서 “법복을 입은 세 명의 판사”라 해설한다거나, < 학교 가는 길 >(2021)에서 카메라를 든 감독을 제작진이라 명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오재형 감독의 음성해설은 영화의 연출자이자 주인공인 자신을 그대로 노출한다. 다른 작품이었다면 “오재형”, “주인공”, “감독” 등으로 지칭되었을 화면 속 오재형 감독은 “나”로 지칭된다. 감독 자신이 등장하는 영화의 첫 장면의 화면해설은 "잡다한 물건들이 많은 방, 잠옷 차림의 저는 가운데에 서서 허리 스트레칭을 합니다."라며 자신을 “저”로 지칭하고 있다. 보통의 영화였다면 이러한 이는 익숙한 사적 다큐멘터리 혹은 1인칭 다큐멘터리의 기법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피아노 프리즘> 속 화면해설 내레이션은 ‘내레이션’보단 ‘화면해설’의 기능이 최우선 목적이다. 다만 영화의 연출자이자 주인공이며 내레이터인 오재형 감독의 화면해설은 첫 문단에서 제시된 객관성의 기준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위배한다. “나”라는 지칭이 등장하는 순간 이것은 화면해설과 내레이션 사이에서 진동하게 된다. <피아노 프리즘>이라는 영화의 내용으로 잠시 들어가보자. 이 영화는 회화에서 영화, 피아노 등으로 이어지는 오재형 감독 자신의 예술적 궤적에 관한 기록임과 동시에, 감독 자신에 관한 자전적 다큐멘터리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통해 오재형 감독의 거의 모든 단편영화를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 <쇼팽 이미지 에튀드>(2008), < 강정 오이군 >(2015), < 덩어리 >(2016), < 블라인드 필름 >(2016), < 봄날 >(2018), < 화가의 숲 >(2019), < 보이지 않는 도시들 >(2021) 등 오재형 감독이 여러 영화제와 전시에서 선보여온 작품들이 <피아노 프리즘> 곳곳에 등장한다. 오재형 감독의 작업은 2020년 미디어극장 아이공에서 진행된 개인전 <피아노 프리즘: 보이지 않는 도시들>로, 그리고 개인전과 공연을 준비하는 자신에 관한 기록인 영화 <피아노 프리즘>으로 한데 모인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댄스 필름, 애니메이션, 퍼포먼스 등이 뒤섞여 있는 이 작품들을 하나로 묶긴 어려워 보인다. 영화들의 다양한 형식은 회화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피아노로 이동하는 오재형의 다종다양한 관심사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피아노 프리즘>은 그러한 자신의 과거 작업들을 포괄하는 피아노 공연을 선보이는 과정의 기록이다. 그 과정 속에서 그는 번복가능성을 내포한 화가 은퇴식을 꾸리고, 70살 노인이 될 때까지 피아노를 치겠다 다짐하며, 공황장애의 기억을 고백하고, 강정·밀양·용산·광화문 등에서 벌어진 투쟁과 집회에 연대한다. 다만 이 영화는 이러한 주제 하나하나에 집중하지 않는다. <피아노 프리즘>은 오재형이라는 개인에 관한, 다양한 장르를 횡단하고 혼합하는 예술가에 관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야기다. 당연하지만 여기서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야기”란 진술은 <피아노 프리즘>이 한 예술가의 자아도취라거나, 자기 홍보를 위한 작품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사적 다큐멘터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1인칭의 시선으로 전개”함과 동시에,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모두를 향해 “예술적 발언”을 한다 . 이러한 관점에서 <피아노 프리즘>은 근 10년 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등장한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경향 속에 놓인다. 동시에, “공적으로 발화되는 ‘예술적 발언’인 자신의 영화를 어떻게 발화할 것인가?”라는 첨예한 질문을 던지고 하나의 답변을 제출하고 있다. 다시 배리어 프리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피아노 프리즘>의 음성해설은 감독 본인이 직접 내레이터로 참여하고 있다. 때문에 종종 사적 다큐멘터리에서의 내레이션과 구별되지 않으며, 더 나아가 “나”라는 지칭을 통해 여타 영화들의 내레이션 개념과 배리어 프리 음성해설 사이의 구분을 흐려 놓는다. <피아노 프리즘>의 음성해설은 “나”라는 시각적 이미지의 청각적 확장이다. 반대로 자막해설은 시각적 이미지로 제시되고 있는 것을 해설한다. 음성해설이 오로지 청각적으로만 영화를 접하는 상황을 가정한다면, 자막해설은 오로지 시각적으로만 영화를 접하는 상황을 가정한다. 배리어 프리 영화는 가시적이지 않은 시각 이미지의 전달과 가청적이지 않은 청각 이미지의 전달이라는 양측의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여야 한다. 오재형 감독은 그 과제를 자처하여 수행한다. <피아노 프리즘>은 감독 자신의 예술적 발화를 모든 이에게 닿게 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오재형”이라는, “나”라고 지칭되는 자신을 가능한 모든 이에게 선보이고자 하는, 자신의 예술적 작업은 물론 그 작업을 생산해낸 과정과 예술의 주체인 자신 자체를 전달하는 행위다. 때문에 <피아노 프리즘>을 감독 자신이 사회 혹은 세상이라 할 수 있는 것과 맞부딪히며 경험해온 것을 예술적으로 전달해온 작업의 집합이라고 할 때, 이 영화가 보여주는 배리어 프리라는 형식은 “나”를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예술형식에 관한 치열한 고민의 결과다. *** 1) 『영화미학용어사전』(프랭크 E. 비버, 1995), 『영화용어사전』(김혜리 외 3인, 1999), 『영화사전』(김광철, 장병원, 2004) 등의 정의를 참고하였다. 2) 『배리어프리(barrier-free) 영상제작론』, 김정희, 산지니, 2018, 87p. 3) 앞의 책, 103p
이 글을 쓰기 얼마 전 나는 하나의 모순된 세계를 다룬 단편영화들을 떠올렸다. 그 영화들은 한 인물의 양면적인 모습, 한 작품 안에서 기묘하게 공존하는 이질적인 두 사건, 하나의 시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차이와 반복 등과 같이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구성하는 모순적인 두 개의 상태를 다루었다. 그것들은 흡사 세계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을 통해서 삶에 대한 앎과 이해, 오해와 착각, 꿈과 몽상 등에 대해서 다루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의 세계는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지면을 활용하여 내가 한동안 매료되었던 그 작품들의 친숙함과 낯섦에 관해 쓰고자 한다. 김태양 감독의 < 달팽이 >는 서울 종로 일대를 배회하는 한 남자가 같은 날 같은 공간에서 두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전반부의 배경은 어느 화창한 여름날 오후이며, 남자는 을지로 3가 근방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난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어색한 인사, 공허한 말들, 그리고 엇갈린 기억을 통해 이들이 과거에 연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편의상 전반부에 등장하는 그 여인을 과거의 여자라고 해두자. 후반부는 전반부와 같은 날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시간대는 저녁으로 그리고 날씨는 소나기가 내린 뒤 그친다는 것으로 바뀐다. 남자는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던 한 여자를 만나 세운상가로 이동한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친밀한 말투, 신체적 접촉, 서로 일치하는 기억을 통해서 두 사람이 현재 연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의상 후반부에 등장하는 그 여인을 현재의 여자라고 해두자. 혹자에게 이 영화는 익숙한 장르적 형식을 가진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나의 작품은 저마다의 영화사를 품고 있다는 질 들뢰즈의 말처럼, 도시를 배경으로 제작된 일련의 영화들이 하나의 느슨한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탓이리라. 초창기 무성영화 시절의 액츄얼리티 필름, 1920년대 독일의 거리영화, 1950년대 전후 유럽에서 등장한 여러 새로운 물결들에 속하는 영화들, 할리우드의 코미디 영화, 필름 누아르, 로드무비 등이 도시를 시각적인 인상이 형성되고 우연적인 사건과 만남이 발생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그런 점에서, <달팽이>가 서울 종로를 작품의 무대이자 배경으로 끌어들이고, 주요 인물들이 계속해서 도시를 걷고, 주인공 남자가 도시에서 우연한 만남을 갖는다는 것 자체는 모종의 영화적 관습을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이 영화에 관습만 있고 독창성이 없다고 말해서는 곤란하다. 이 영화는 서울의 종로를 오후와 저녁, 옛것과 새것, 소멸과 생성 등으로 구분되는 것들 사이의 기묘한 대립, 공존, 연속을 통해 그린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 전체가 고유의 리듬과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 이 영화의 구성적인 단조로움은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와 반복을 통해서 상쇄된다. 이 영화는 전후반을 데칼코마니처럼 겹쳐 놓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주로 물리적인 요소들과 관련이 있다. 전반부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을지로 3가에서 우연히 만나 청계천로를 따라 종로 3가로 이동하며, 후반부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을지로 3가에서 만나 청계천로를 따라 종로 3가를 거쳐 종로 5가의 세운상가로 이동한다. 전후반을 이끌어가는 남자 주인공의 존재, 영화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특정 장소와 건물, 그리고 을지로3가에서 종로3가로 이어지는 동선의 일치 등을 통해 이 영화는 반복의 질서를 획득한다. 그 반복은 관객인 우리가 틀린 그림 찾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전반부에 등장하는 과거의 여자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현재의 여자로 대체되고, 화창한 날씨는 소나기가 내리는 날씨로 바뀌고, 관객의 시선을 기준으로 주로 화면 좌측 편에 위치하던 남자는 우측 편에 위치하는 것이 그러하다. 그 일련의 변화는 영화 속 현실에 존재하는 물질적 실재가 지속과 생성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그것은 이 작품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변해가는 도시를 통해서 작품 전체에 차이와 반복의 질서를 구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영화의 차이와 반복은 공간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시간적이거나 정신적인 것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와 반복 또한 중요하게 활용한다. 후자의 차이와 반복은 주로 기억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전반부에 등장하는 남자와 과거의 여자는 지나간 일들에 관해 담소를 나눈다. 이 대화에서 남자는 오래전 자신이 과거의 여자에게 들려주었던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두 사람이 함께 공유한 순간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거의 여자는 과거의 시간 속에 묻혀 있던 여러 기억을 현재로 가져오기 위해 애쓰지만, 정작 그것들은 남자의 기억 속에서 이미 지워져 있거나 불투명한 상태였다. 이 일련의 대화에서 남자와 과거의 여자가 어긋난 기억 그리고 어긋난 시간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후반부에 등장하는 남자와 현재의 여자는 두 사람 사이에 공통의 기억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걷던 중 현재의 여자는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그 이야기를 남자가 알려주었다고 말한다. 남자는 현재의 여자에게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여자는 자기가 기억하고 있으니 괜찮다면서, 어차피 모든 것을 기억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남자와 현재의 여자가 같은 방향으로 걸으면서 같은 시간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전반부의 어긋난 기억과 시간은 후반부의 공유되는 기억과 시간으로 바뀐 것이다. 비유적인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이 영화가 강조하는 시간성은 달팽이의 형상을 하고 있다. 영화 전반부에서 과거의 여자와 함께 길을 걷던 남자는 혼잣말처럼 “변할 게 뭐가 있나, 그냥 시간만 가는 거지”라고 말한다. 남자는 시간의 흐름이 제자리걸음과 같다고 믿는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남자의 생각은 영화가 끝나갈 즈음에 바뀐다. 남자는 현재의 여자와 함께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중 언제나 제자리인 줄 알았던 시간의 흐름이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현재의 여자가 버스 창문에 나선형 형태의 원을 그리는데, 그것은 달팽이의 껍데기를 보면서 떠올릴 수 있는 나선형과 닮았다. 그것은 분명 차이와 반복 속에서 지속되는 시간의 흐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 장면을 보면서 누군가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 현기증 >에서 주인공 남녀가 삼나무 나이테를 바라보던 것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두 작품 모두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를 따라 직선으로 뻗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것을 품으면서 원을 그리듯이 나아가는 것과 같이 묘사된다. <현기증>에서 시간의 흔적이 새겨진 판이 삼나무였다면, <달팽이>에서 그런 판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도시 그 자체이다. 이 지점에서 <달팽이>가 도시를 작품의 무대 혹은 배경으로 끌고 온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어쩌면 이 영화의 연출자는 우리가 도시라는 삶의 공간 속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어제와 오늘, 만남과 이별, 생성과 소멸을 영화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영화적 시간에 대한 성찰로 연장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도시가 그러하듯, 영화는 지속과 생성으로 이루어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한다. 내게 다시금 비유와 함께 압축을 허락한다면, 나는 이 영화를 달팽이의 시간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으며, 영화는 달팽이의 시간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표현하는 예술인 것이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