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연구소 월례포럼 : 1950~60년대 영화주제가의 변천과 의미
- 제작년도
- 2010
20대 때 아르바이트를 했던 카페의 매니저는 < 타짜 >의 모든 대사를 외우고 있었다. 디자이너로 일하다 카페 창업의 꿈을 품고 매니저가 된 지 1년, 쥐콩만한 월급을 받으며 하루 12시간씩 일했고 마감 후에는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캔맥주를 마시고 컵라면을 먹었다. 나도 종종 그와 함께 했다. 그는 스니커즈 수집이 취미였고 옷을 잘 입었으며 한번도 험한 말을 하거나 알바생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가 험한 말을 할 때는 오로지 <타짜>의 대사를 따라 할 때 뿐이었다.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잘난 놈 제끼고 못난 놈 보내고.. 안경잽이같이 배신하는 새끼들 다 죽였다... 고니야? 담배하나 찔러봐라. 한창 유럽산 예술 영화에 빠져 있던 나에게 <타짜>는 그저 그런 영화였다. 영화계는 < 범죄의 재구성 >이 개봉했을 때 이미 천만감독이 될 최동훈의 잠재력을 알아봤지만 나는 전혀 감을 잡지 못했고 간혹 <리피피> 같은 영화가 레퍼런스로 언급되면 줄스 다신의 영화를 찾아봐야겠군! 하고 중얼거리며 서치를 했다. 그러다 줄스 다신이 훗날 그리스의 문화부 장관이 되는 배우 멜리나 메르쿠리와 결혼했다는 사실과 그녀가 그리스의 파시스트들과 싸운 용기 있는 배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며 결국 줄스 다신과 멜리나 메르쿠리가 함께한 영화 < 일요일은 참으세요 >에 이르게 되는 이상한 경로를 밟을 뿐이었다. 매니저가 <타짜>에서 가장 좋아했던 캐릭터는 “호구”로 간혹 예림이! 예림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나쁜놈이야 같은 대사를 중얼거리기도 했다. 나는 “호구” 캐릭터에 대한 그의 애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20대 내내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만나본 최고의 매니저였고 지금까지 가장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로 남아있지만(그가 어디선가 이 글을 읽기를) 당시에는 왜 이렇게 <타짜>를 좋아할까?? 뭐가 그리 좋지?? 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웬걸, <타짜>는 개봉 당시의 히트를 넘어 21세기 한국 영화의 새로운 고전으로 등극했고 수많은 밈을 낳았으며 거의 모든 캐릭터가 재생산됐다. 그러니까 금정연이 박무석이 어쩌고 저쩌고 했을 때 나는 매니저가 떠올랐고 2008년 즈음 편의점에서 캔맥주와 컵라면을 먹던 시절이 떠오른 것이다. 비록 우리는 망원동의 카페 테라스에 앉아 아메리카노와 휘낭시에를 먹고 있지만 말이다(솔직히 말하면 나는 박무석이 누군지 몰랐다. 아마 박무석을 아느냐 알지 못하냐에 따라 한국 영화-문화에 대한 친숙도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를 K-man지수K-man factor라고 부르자. 당신이 만약 박무석을 알고 박무석이 부른 노래 제목까지 안다면 당신은…). 그렇죠, 지돈씨. 금정연은 이주 전 일산으로 이사했고 훨씬 쾌적한 환경에서 육아와 집필을 하게 되었다며, 결국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시네마의 실행Exercise”라고 했다. 크리스티앙 메츠는 말했죠. 나의 목표는 시네마의 실행이 폭넓은 인류학적 형상들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통과하는,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은 일련의 경로들을 지적하는 것이다. 오….. 메츠의 이론적 논의에서는 시네마 장치의 정신분석학적 구성이 중요하지만, 우리는 그 부분은 우선 제쳐두기로 했다(어쩌면 영원히 제쳐둘지도…). 우리가 만들 오버디터미네이션 에세이 필름overdetermination essay film <한국 영화에서 길 잃은 한국 사람들>에서 중요한 건 “인류학적 형상들”이라는 말이며 우리의 목적은 21세기 한국 영화가 포착하고 실행되어 루핑 작용을 일으킨 계기들을 탐색하여 상상적 테크닉으로서의 인류학 장치인 한국 영화를 수행하는 거라고, 금정연은 말했다. 뭐라고요? 이제부터 저를 K정연이라고 불러주세요. 금정연은 Keum정연이고, 그러니까 K정연… 나는 정연 K.가 맞는 거 아닌가 잠깐 생각했지만 나름 생각이 있겠지.. YS나 DJ처럼 JY로 불러 달라고 하지 않는 게 어디냐고 생각했다. 동시에 20대 중반 일했던 (또 다른) 카페의 사장이 나를 JD라고 불렀던 게 떠올랐고 최근에 지인과 나눴던 대화도 떠올랐다. 지인은 봉준호의 이름이 준호라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냐고 말했다. 친구들은 준호라고 부르겠지? 아니, 친구들도 봉이라고 부르지 않을까? 근데 그게 중요해? 이게 무슨 대화야? 우리는 잠시 의문에 빠졌지만 지인은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이번 씨네21에서 뽑은 2010년에서 2020년 영화 베스트10에서 통합 1위를 먹은 영화가 < 기생충 >이야. 그 사실을 기억해. 음……(무슨 상관?) 하지만 호칭은 언제나 중요한 문제다. 특히 영화의 이름에 관한 문제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왜 영화를 무비라고 했다가 시네마라고 했다가 픽쳐라고 했다가 필름이라고 하는가. 하물며 지금은 필름으로 찍지도 않는데! 넷플릭스의 토크 프로그램 <사인펠드와 함께 커피 드라이브>에서 사인펠드와 윌 패럴은 이 문제에 대해 간단히 정의 내린다. (<커피 드라이브>는 억만장자 코미디언인 사인펠드가 고급 클래식카를 타고 명사들을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으로 버락 오바마도 출연했다. 심지어 재임 중에. 세계에는 제정신이 아닌 지도자가 너무 많다: 미국의 지도자 오바마 왈). 사인펠드 : 이 단어들이 얼마나 가식적인지 순위를 매겨봐요. ‘필름’, ‘픽쳐’, ‘무비’ 패럴 : 가장 가식적인 단어는 픽쳐예요. It’s a wonderful Picture. 사인펠드 : 아주 의식적으로 멋있는 척 하는 것 같아요. 패럴 : 두 번째는 필름이요. 무비가 확실히 덜 가식적이에요. 사인펠드 : 무비, 필름, 픽쳐에 나오는 사람들은 왜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할까요? 패럴 : 몰라요… 그래도 저는 영화가 너무 좋아요…. 존 포드는 자신의 영화를 절대 film이나 movie라고 하지 않았어요. K정연이 말했다. 항상 picture라고 했지요.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사람들이 cinema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K정연이 콩고물 휘낭시에를 한입 잘라먹으며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네마를 해야합니다. 비록 제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 10 중에 <스탭 브라더스>가 있지만 말이에요. * 참고. 윌 패럴이 주인공을 맡은 <스탭 브라더스>는 이혼 가정의 두 백인 극우파 망나니가 중산층 속물 좌파로 개종하는 과정을 그린 유사 가족 로맨스로 지금은 주류 좌파 감독으로 변신한 아담 맥케이가 연출했다. 혹시 영화가 궁금한 사람은 보지 마시길… 시네마를 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일반적으로 시네마는 극장과 영화 산업 전반을 모두 아우르는 용어로 정의된다. 가끔 무비와 차별되는 예술 영화를 지칭하는 어휘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시네마는 그게 아니었고 특히 21세기 한국 영화로 시네마를 수행한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일 수 있다. 전후 일본에서 활동한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인 하시모토 시노부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 <복안의 영상> 시작을 일본 최초의 영화주제가 “도쿄행진곡”(1929)으로 시작한다. 시네마를 보시겠습니까, 차를 마시겠습니까. 차라리 오다큐선을 타고 도망가시겠습니까. 변해 가는 신주쿠… <도쿄행진곡>은 기쿠치 간의 장편 소설을 미조구치 겐지가 감독한 것으로(기쿠치 간은 아쿠타가와 상과 나오키 상을 제정한 사람이다), 주제곡의 가사는 프랑스 유학파 출신 상징 시인 사이조 야소가 작사했다. 시네마가 나오는 구절의 가사는 원래 “장발의 마르크스 보이 / 오늘도 붉은 사랑을 안고”였으나 검열을 두려워한 레코드 회사의 요청으로 바꿨다고 한다. 마르크스를 시네마가 대체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약하자면) 시네마는 단순히 영화 한 편이 아니라 삶의 문제다. 시네마를 하는 것, 시네마를 하지 않는 것 모두 생활을 새롭게 조직한다. 정연씨가 < 나랏말싸미 > 대본을 쓴 것처럼요? K정연의 표정이 잠깐 어두워졌다. 지돈씨, 지돈씨는 그 영화 안 봤잖아요. 어떻게 안 볼 수가 있죠? 내가 그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은 건 사실이다. 정연씨에게 여러 번 얘기했지만 마음이 아파 볼 수가 없었다. 왜 마음이 아프냐고? 그건 <나랏말싸미> 네이버 평점을 확인하면 알 수 있다… 아무튼 나는 얼마 전 왓챠로 <나랏말싸미>를 봤고 정연씨에게 당당히 얘기할 수 있었다. <나랏말싸미>는… 한국 영화입니다. 조선 시대가 배경이지만 노래하는 장면도 있고 목욕 장면도 있고. K정연은 잊고 있었다는 듯 중얼거렸다. 송강호가 말하죠.. 아픕니다. 아파요… 그 씬 쓰면서 아저씨들이 참 좋아했는데… 우리는 성산초등학교에서 망원 유수지에 이르는 골목을 산책하며 한국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의 곤혹스러움에 대해 대화했고 - K정연은 익명의 트윗을 인용했다 “모든 씨네필은 자국 영화를 싫어한다, 미국의 씨네필만 빼고” – 제3세계의 씨네필들은 결국 자국 영화를 발견할 유무형의 의무 또는 압박을 느낀다, 문학이나 미술이 그렇듯 로컬의 역사와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으면 세계 시장에서 먹힐 수 없기 때문에, 또는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거나 기반이 사라진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 따위의 이야기를 나눴다. 산책이 마지막에 이르렀을즈음, 우리는 우연히 ㅁㅈ출판사의 편집자 h와 마주쳤다. 종종 소식을 주고받는 분으로 감동을 주는 책의 편집자이자 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거리에 서서 출간될 책들과 – 알렉산더 클루게, 스베틀라나 보임,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등등 두근거리는 이름들이 언급됐고 – 사소한 근황을 주고받았다. 두 분은 요즘 뭐하세요? 영상자료원에서 연재를 시작했어요. 아, 그러고보니.. 편집자 h가 말했다. 영화평론가 임재철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순간 K정연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말씀을? 편집자 h에 따르면 최근 임재철 선생님은 서교동과 망원동 일대에 출몰하며 지식을 전파 중이었고 K정연도 잠시나마 숙주가 된 적이 있었다. 나도 한번에 불과하지만 임선생님이 주관한 영화 상영회에서 K정연과 함께 장 피에르 고랭의 <Routine Pleasures>를 봤다. 영화가 끝나고 임선생님은 고랭과 아녜스 바르다, 자크 드미에 대한 차마 여기 적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임 선생님이 언젠가 정연씨를 만난 다음 날 저한테 전화를 걸어 정연씨 얘기를 했어요. 편집자 h가 말했다. 같이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금정연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어쩌면 금정연이 자기 후계자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했던가…아닌가… 편집자 h와 헤어지고 난 뒤 나는 K정연에게 물었다. 정연씨 대체 임재철 쌤과 무슨 얘기를 나눈 거예요? K정연이 말했다. 지돈씨.. 그건… (다음회에 어쩌면 계속…) *참고도서 『복안의 영상』(하시모토 시노부, 강태웅 옮김, 소화, 2012) 『존 포드』(태그 갤러거, 안건형, 신범식 옮김, 이모션북스, 2018) 『영화에 관한 질문들』(스티븐 히스, 김소연 옮김, 울력, 2003)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정성조 (1946~2014)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 활동했던 대중음악 작곡가이자 영화음악가, 플루트와 색서폰 연주자이다. 서울대 음악대학 출신으로 KBS관현악단장과 서울예술대학 교수를 역임하는 등 ‘엘리트’ 음악인이기도 하다. 지금도 여러 현장에서 현역 재즈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김민기, 양희은 , 한대수 같은 1970년대 포크 음반에 중요한 ‘산파’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대중음악사에서도 중요한 ‘배후’ 인물이었다. ‘ 정성조 쿼텟’ 또는 ‘정성조와 메신저스’를 통해 연주자로 구성된 그룹 활동을 하면서 대중음악에 재즈적 어법의 연주와 편곡을 삽입했다. 그렇지만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재즈 록 어법이 보다 빛을 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영화음악이 주효했다. 1970년대 중반 무렵 < 어제 내린 비 >( 이 장호 , 1974), < 영자의 전성시대 >( 김호선 , 1975), < 겨울 여자 >(김호선, 1977) 등의 영화에는 메신저스와 함께 트럼펫이나 색서폰 등의 브라스 섹션을 위시하여 재즈 록(또는 퓨전 재즈)적인 사운드가 투영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정성조는 ‘청년영화’ 또는 ‘호스테스 멜로드라마’를 위시한 새로운 영화의 개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상의 음악들은 ‘본격적인’ 의미의 사운드트랙 레코딩 시대를 개막한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한국 영화음악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시 한 작품을 위한 영화음악 음반이 발매되는 사례는 거의 없었고, 영화음악 음반이라고 해도 단순하게 한두 곡의 주제가만이 해당 가수의 음반이나 컴필레이션 음반에 수록되는 정도에 그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온전한 의미의 사운드트랙 음반이 존재하지 않던 상황에서, 연주 음악과 주제가, 대화 클립 등을 모두 담은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본격적인 사운드트랙 음반이 발매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별들의 고향 >이나 < 바보들의 행진 >처럼 < 어제 내린 비 >나 < 영자의 전성시대 >의 경우 영화와 음악을 위한 상생전략으로서 음반사와의 기획물로 발매되기도 했다. 이전 시기 많은 영화음악가들의 작품이 관현악단의 오케스트라 사운드 위주였던 경향과 달리, 그는 밴드 음악이 주도하는 일렉트릭한(또는 록적인) 어법의 사운드를 구사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영화음악’의 경향을 이끈 선두주자였다. 1970년대 ‘청년영화’로 대변되는 새로운 젊은 영화들의 실험이 ( 강근식 이 속해있던 ‘동방의 빛’과 마찬가지로) 대중음악인의 작품과 조우하면서 화학작용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처럼 정성조 는 재즈 록 밴드 메신저스와 함께 (당시 대중가요계에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던) ‘모던한’ 사운드를 위한 실험을, 영화 스코어 위에 구현했다. 이는 여러 버전의 변주 트랙을 통해 마련되기도 했고, < 겨울 여자 >처럼 (곡명에 모두 삽입되어 있는 것처럼) ‘겨울’을 소재로 한 컨셉트 음반 형식을 통해 표현되기도 했다. 또한 노래 형식의 각인적인 주제가를 통해 대중적인 접근도 함께 담았다. 이후에도 그는 김호선 과는 < 밤의 찬가 >(1979), < 죽음보다 깊은 잠 >(1979)의 영화(이상은 한 음반으로 발매)를, 이장호 와는 < 이장호의 외인구단 >을 통해 영화음악 작업을 이어갔다. 버클리 음대 유학파 1세대로서 수학하고 돌아온 뒤인 1980년대에도 그는 영화음악계에서 다수의 영화음악을 맡아 왕성한 활동을 했다. < 깊고 푸른 밤 >(1985)을 필두로 < 기쁜 우리 젊은 날 >(1987), < 안녕하세요 하나님 >(1987), < 천국의 계단 >(1991) 등 배창호 감독의 영화의 작품에서 영화음악을 맡았다. 이외에도 < 이혼하지 않는 여자 >( 곽지균 , 1992), < 레테의 연가 >( 장길수 , 1987), < 나의 사랑 나의 신부 >( 이명세 , 1990), < 우리 사랑 이대로 >( 강정수 , 1992) 등에 참여했다. 영화음악의 경향은 보다 다채로와지는데, 정수라가 부른 영화주제가가 크게 히트했던 <이장호의 외인구단>처럼 노래 형식에 몰두된 경우도 있다. <깊고 푸른 밤>에서 ‘제인의 테마’처럼 쓸쓸하고 슬픈 트랙 이외에 불협화적이고 불길한 실험적 음악을 주인공의 절망과 갈등에 매치시킨 반면, <기쁜 우리 젊은 날>이나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는 경쾌한 스윙감 넘치는 재즈 클립을 통해 낭만적인 청춘영화의 분위기를 돋우기도 했다. < 이장호의 외인구단 >으로 1986년 대종상 영화제에서 음악상을, < 레테의 연가 >로 1987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에서 수여하는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다니던 1970년대, 친구들과 밖에서 뛰어놀다가도 오후 5시면 어김없이 집에 뛰어들어온다. TV 애니메이션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이제 생각해보니, 모두 일본수입 애니메이션이었지만, 당시로써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TV 프로그램이며, 그 애니메이션이 그려진 만화잡지와 동화책, 그리고 화보집과 캐릭터 상품을 꼬깃꼬깃 용돈을 모아 사모으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방학 때마다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 기껏 챙겨보던 유일한 극장방문 기억은 < 로보트 태권브이 >와 < 마루치 아라치 >와 같은 국산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이었다. 영화주제가를 크게 따라부르며 이제는 뵐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시는 김청기 감독님이지만, 당시로써는 우상이었던 감독님을 연호하던 시절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일본애니메이션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친구들과 캐릭터의 연표와 역사를 우겨가며 싸우던 시간도 있었다. 우리가 경험해온 전통적인 애니메이션 플랫폼은 이처럼 TV, 극장, 그리고 비디오였다. 애니메이션을 기획할 때마다 가장 먼저 정하는 것은 플랫폼이다. 그 플랫폼에 맞추어 시간과 장르, 캐릭터와 시나리오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애니메이션 제작펀드를 받기 위해 기획서를 작성하는 프로듀서들은 대개 TV용 시리즈 애니메이션과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그리고 DVD로 배급할 작품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고민한다. 그러나 최근 애니메이션 플랫폼의 대세가 바뀌고 있다. 전환되는 시점을 넘어 이제 주된 배급시장의 유통구조와 제작시스템이 혁신적으로 재배치되고 있다. TV 시리즈의 경우, 지상파 중심의 타임벨트(time belt, 오후 4시~5시의 애니메이션 방영 시간대)가 급격하게 붕괴되고 있다. 수 십 년 동안 지켜오던 지상파의 애니메이션 고정시간대가 더 이상 맞춤형 관객과 만날 수 없는 시간대임을 자인하기 시작했다. 대개 오후 4시에서 5시까지 방영하던 신규 국산 애니메이션 방영 시간대에 TV 앞에 달려와 애니메이션을 봐줄 관객들이 없다. 대부분 방과 후 수업과 학원 수강으로 프로그램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EBS처럼 취학 전 아동을 위해 아침 8시~9시, 오후 3시~4시라는 맞춤형 시간대 전략을 성공적으로 편성한 지상파 방송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방송사가 애니메이션의 유용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환되었던 방송플랫폼이 케이블의 애니메이션 전문채널 PP(Program Provider)였다. ‘투니버스’로 시작된 애니메이션 전문채널의 인기는 ‘애니원’, ‘챔프’, ‘애니박스’, ‘애니맥스’ 등으로 신규채널의 신설 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채널들도 프라임타임에 집중적으로 배치한 일본애니메이션 붐이 잦아지면서 결국 마니아 중심의 채널로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다. 극장용 장편의 경우, 2014년 초 디즈니 애니메이션 < 겨울왕국 >의 흥행신드롬이 그나마 플랫폼의 생명력을 연장시켰다. 연속되는 드림웍스의 흥행실패와 새로운 신작 시리즈의 출현이 더뎌지면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도 이제 그 수명이 다 된 것처럼 여겨졌는데, 블루스카이, 일루미네이션 엔터테인먼트, 라이카 스튜디오, 소니픽쳐스 등의 영화사들이 신작을 새롭게 선보이고, 역시 디즈니라는 찬사와 함께 2014년의 문을 열었던 <겨울왕국>은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의 신화를 재현했다. 그러나 여전히 국산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의 기획과 제작, 그리고 배급 및 상영은 힘들고 어둡다. 최근, IPTV를 통한 VOD 배급이 본격화되면서 애니메이션의 유통배급망이 실시간으로 구매하여 스마트기기에 저장하고, 언제 어디서나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도록 하는 VOD 구매로 전환하고 있다. 특히 취학 전 아동 및 유아를 동반한 부모들의 애니메이션 구매는 거의 IPTV와 앱 및 포털사이트의 VOD 구매로 이어진다. 식당, 장보기, 대중교통 등에서 필요한 아이들을 달래주고 봐주는 콘텐츠로 스마트 기기에 저장된 애니메이션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글의 유튜브와 네이버 티비캐스트(tvcast) 등 OTT(Over The Top)서비스를 통해 애니메이션 클립으로 상품을 소비하는 세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결국 무료로 애니메이션을 즐기고 그러한 영상서비스 전에 보여지는 광고를 소비함으로써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 즐기는 실속소비자가 애니메이션 수요의 중심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플랫폼의 혁신은 애니메이션 제작 장르의 변화까지 주도하는 추세다. ‘라바’의 성공 이후, 1분~2분 이내의 초단편 애니메이션 클립이 옴니버스식 에피소드 시리즈로 제작되고 있다. 대사 없는 넌버벌(Non verbal), 몸개그를 통한 슬랩스틱 유머, 3D 캐릭터 디자인, 유머러스한 반전과 반복적인 음악 등 장르화 되고 있는 작품의 유형이 국산 애니메이션의 제작 트랜드를 형성하고 있다. 공공 사이니지와 시내버스 및 지하철의 영상방송 등으로 소개되면서 이러한 초단편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공략은 스마트한 소비시대에 맞춤형 고객 찾기 라는 새로운 전략을 이해시킨다. 플랫폼이 변하면 콘텐츠도 변해야 한다. 콘텐츠가 플랫폼이 되는 시대, 애니메이션도 이제 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