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장르 대격돌
- 감독
- 대월초 6학년1반
- 제작년도
- 2023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 7인의 여포로 >(이만희, 1965)는 한국검열사에서 매우 중요한 영화이다. 한국영화사 최초의 반공법 위반, 최초의 감독 구속 사건을 초래한 유례 없는 사건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 돌아오지 않는 해병 >(이만희, 1963)의 비평적·대중적 성공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이만희 감독은 1964년, 새로운 한국전쟁 소재의 영화를 연출한다. 전쟁 중 북한군에게 사로잡힌 간호부대 소속 7명의 여군 포로(정확히는 4명의 여군과 양공주를 포함한 3명의 민간인 여성, 그리고 운전병 1명으로 총 8명이다)를 호송하던 북한군 수색대 대원들이, 중공군에게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 여군들을 구하고 남한으로 귀순한다는 줄거리를 가진 이 영화는, 개봉 직전인 1964년 12월 중순 검찰에 의해 ① 감상적 민족주의를 내세웠고 ② 무기력한 국군을 묘사했으며 ③ 북한괴뢰군을 찬양하고 ④ 미군에게 학대받는 양공주들의 참상을 과장 묘사하는 등의 외세 배격 풍조를 고취했다는 네 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때 검찰은 이만희 감독의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당시 법원은 영장 발부를 기각했다. 이듬해 2월, 검찰은 다시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이 청구가 받아들여져 이만희 감독은 3월 보석으로 풀려날 때까지 약 40일간 옥중 생활을 해야 했다. 1965년 12월, 결국 선고유예의 판결을 받았지만, 그 사이 영화는 검열당국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채 1965년 7월 <돌아온 여군>이라는 제명으로 개봉했다. 한국영화사에서 악명 높은 이 사건의 전개 과정과 결말은 당시 검열서류를 통해 상세히 남아있다. 1막: 석연찮은 상영보류 결정 영상자료원에 보존된 검열서류 에 따르면 1963년 11월, 이 영화의 제작신고가 이루어졌고, 약 1년의 시간이 흐른 1964년 12월 7일, 완성된 영화의 본편 검열이 접수되었다. 12월 8일에는 실사 검열이 이루어졌고, 12월 10일에 상영허가가 승인되었다. 양공주의 노골적이고 비판적인 대사 및 여군이 “괴뢰장교에게 경례하는 장면” 등 화면 1개 처, 대사 3개 처에 대한 제한이 가해졌다. 통상적인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서류는 다른 서류와 달랐다. 일반적으로 상영허가 서류가 영화제작사에 대한 공문 발송의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반해 이 서류는 내부 보고의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즉 이 상영허가 결정이 제작사에게 통보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 이유는 약 열흘 후인 12월 19일 공보부 검열 실무자들에 의해 작성된 검열경위서를 통해 밝혀진다. 12월 19일은 검찰이 이 영화의 감독 겸 각색자 이만희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필름을 압수한 다음날이었다. 경위서에 의한 영화의 검열 과정은 다음과 같다. (글꼴: 경기천년바탕) 공보부 담당자에 의해 작성된 <7인의 여포로> 검열경위서 (1964. 12. 19.) 위 경위서에 따르면 1964년 12월 10일까지만 하더라도 중앙정보부 검열관은 통상적인 수준의 제한 및 개봉에 동의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11일, 급작스럽게 보류방침 이 통보된다. 그 내막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중앙정보부의 상영보류 조치와 검찰의 기소가 결정되면서 공보부는 급히 움직여야 했다. 일부 지역에서 예고편이 상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12월 하순 공보부는 각 지역의 시도지사에 공문을 발송했고, 합동영화주식회사는 지역 극장에서 상영 중 혹은 상영 대기 중이던 예고편 필름을 반환받았다. 한편 공보부는 상영보류 후 검찰 기소에 들어가기 전인 12월 15일 공보부자문위원회영화분과위원회(위원장 이순근)의 자문 심의를 받았다. 이순근, 이청기, 여석기, 이진섭 등으로 구성된 자문위원들이 12월 16일 제출한 장문의 보고서는 이 영화의 작품적 측면, 사상적 측면, 법적 측면을 고찰하였고, 종합적으로 군데군데 오해를 살 여지는 있지만 작품적으로 우수하고 반공영화임에는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언론들 역시 공보부 자문위원들의 견해와 대체로 일치했고, 이들의 입을 빌어 영화에 대한 검찰 수사를 비판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2월 21일, 서울형사지법 부장판사는 감독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하고 필름 압수영장만 발부했다. 물론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수사 기간 동안 영화에 대한 상영허가는 여전히 보류된 상태였고 이 영화의 수난은 이제 시작이었다. 2막: 감독의 구속과 논란의 확대(1965년 2월) 1965년 1월 검찰은 감독을 소환조사한다. 불구속 상태였지만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2월 4일 마침내 감독이 구속 기소되었다. 검찰은 영화의 대사와 캐릭터를 거론하며 앞서 언급한 네 가지 혐의를 거론했다. 감독 구속이라는 초유의 사건은 영화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언론들은 앞다투어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것을 우려했고, 검찰의 무리한 수사를 비판했다. 영화인협회 산하 영화감독협회 역시 공보부에 접수한 진정서를 통해 검찰의 공소장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한 예술인의 인신구속이 앞으로의 창작활동을 심리적으로 위축케 할지 모르”며, “반공군사영화가 앞으로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추는 위기를 조성할 우려”가 있음을 지적하며 이만희 감독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인신구속을 계기로 검열당국은 2월 6일 합동영화주식회사에 영화상영허가 보류를 공식적으로 통보한다. 동 영화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수사 중에 있다는 이유였다. 구속 다음날 발 빠르게 작성된 서류였다. 1964년 12월 7일 신청된 서류에 대한 2개월 만의 공식적 답변이었던 셈이다(물론 당사자 간의 비공식적인 의사소통은 있었을 것이다). 이후 검열당국의 반응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3월 15일 서울형사지법은 이만희 감독의 보석을 허가하여 석방 결정했다. 사회적인 여론과 영화계의 반응이 부정적인 가운데 감독마저 석방되면서 영화를 살리기 위한 타협이 필요한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만희 감독의 선처를 호소한 감독협회 진정서 (1965. 2. 10.) 3막: 천신만고 끝 누더기 상태의 개봉 합동영화주식회사는 4월 19일 작성하여 29일 접수한 민원에서 재편집과 보충촬영을 했으니 재심의 후 상영보류를 해제해주기 바란다는 취지를 밝힌다. 그런데 이 재편집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대사 삭제 100여 개처, 화면 삭제가 10개 처에 달하는 대규모 수정판이었다. 편집의 대상은 대개 검찰의 공소장에서 거론된 네 가지 문제의 흔적을 없애는 것이었는데, 그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전반부는 양공주 관련, 후반부는 북한군의 언행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또한 북한 수색대장과 동료들이 “자유대한으로 월남귀순할 것을 모의”하는 장면이 보충촬영을 통해 추가되었다. 이는 귀순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민원은 공식적으로는 4월 29일에 접수되었지만, 부속 자료를 감안할 때 실제로는 4월 20일에 접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보부 영화과는 중앙정보부 검열 담당과 함께 4월 27일 재편집본에 대한 재심의를 진행했다. 재심의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의견은 2주가 훨씬 지난 5월 14일 전달되었다. 영화사 측의 대규모 편집에도 불구하고, 정보부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는 우선 영화제명을 변경할 것을 요구했고, “검찰에서 기소한 문제점을 완전 삭제치 않았으므로 이를 시정하고 반공적인 내용으로 대폭 보강할 것”을 요구했다. 완전 삭제치 않은 부분으로 거론된 것은 “괴뢰군이 양공주를 총살하는 장면, 중공군이 여포로를 겁탈하려 하자 인민군이 중공군을 사살하고 인민군이 영웅적으로 동족애를 발휘하는 장면” 등 6개 장면이었다. 나아가 영화의 장면들을 “삭제하고 재편집함에 있어 관객으로 하여금 뚜렷한 반공적 이념을 공고히 하도록 주의깊게 보강”할 것을 요청했다. 애초 제작사의 재편집을 거치며 원모습을 거의 상실했던 영화는 그 잔재마저 사라져가고 있었다. 중앙정보부가 공보부에 보낸 「영화재심 의견통보」(1965. 5. 14.) 이에 영화사는 5월 25일 자로 영화검열보류재심 신청을 제기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작성자와 작성일자를 알 수 없는 공보부 내부 메모(부전지)에 의하면 공보부가 “CIA”에 해당 영화에 대한 의사를 문의했고, CIA, 서울지검 등의 관계기관과 충분한 합의를 거친 후에 보류해제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는 점이다. 그간 필자를 포함한 몇몇 연구자들이 “CIA”를 미국의 정보기관으로 오해하는 일도 있었으나, 여러 정황을 감안하건대, 한국 중앙정보부의 영어식 약자로 생각된다. 합동영화주식회사는 5월 25일 상영보류에 대한 재심을 요구하였으나, 공보부 내부 문건에 의하면 일부 필름의 재편집이 완료되지 못해 검열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재편집 과정이 그렇게 시간을 소요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어쩌면 5월 25일 당시 필름이 재입고되었으나, 공식적인 서류에 드러나지 않은 과정을 통해 정부 측의 불만족 사항이 전달되어 필름이 반려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는 5월 26일 CIA 측에 재심을 통고했다는 공보부의 7월 5일 자 서류상의 내용을 감안할 때 더욱 신빙성이 높아진다. 어쨌든 재검열 대상 필름은 6월 23일 입고되었고, 6월 28일 중앙정보부가 참석한 가운데 재검열이 이루어졌다. 중앙정보부는 7월 2일 “본 영화는 64. 12. 8 검열 당시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 후 동 작품이 수차에 걸친 수정으로 불온 부분을 삭제 또는 보강하여 건전한 반공영화로 재편집되어 보안상 유해로운 사항이 없음으로 상영보류 해제하니 상영조치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7월 2일 중앙정보부의 입장을 전달받은 공보부는 7월 10일 마침내 영화 제명을 <돌아온 여군>으로 개제하고, 추가 대사 삭제 9개 처의 의견으로 상영보류 조치를 해제 하게 된다. 중학생 이상 미성년자 관람가 등급이었다. 7월 10일 상영보류 해제를 통고받은 영화사는 드디어 7월 30일 자로 이 영화를 명보극장 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의 개봉 당시 검열로 화제가 되었던 사실을 강조하여 홍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1965년 7월 28일 자 경향신문 광고에는 “상영금지되였든 화제의 전쟁드라마! 드디어 상영금지 해제”라는 자극적인 선전문구와 함께 “칠인의 여포로”라는 원명을 적시하고 있다. 이는 제작사가 검열을 상업적으로 활용한다는 최근까지의 검열당국의 주장과 연계할 때 더욱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돌아온 여군> 광고 (경향신문, 1965. 7. 28.) 4막: 개봉이 끝이 아니었다-국방부의 참전 드디어 기나긴 과정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뒤늦게 국방부 가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국방부는 1965년 7월 30일 이 영화가 “여군 전체의 사기를 극도로 저하시키고 군의 대외 위신을 손상하며 장차의 여군 모병에 큰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다음과 같이 삭제 또는 수정하여 상영하도록 귀부에서 조치하여 주시기 의뢰”한다. 구체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장면은 인민군 부관이 여군을 강간하는 장면과 관련 대사였다. 이 요구를 접수한 공보부는 검열 주무기관으로서의 권위와 주관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보부는 국방부의 요청을 자체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국방부의 요청사항을 받아들일지를 중앙정보부에 문의한다. 이에 대해 중앙정보부는 자부의 의견은 이미 충분히 전달한 상태이므로, 국방부의 요구를 받아들일지는 공보부에서 자체적으로 판단해서 처리하라는 답변을 보낸다. 공보부는 결국 8월 10일, 국방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작사에 추가제한 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추가제한이 어느 정도 실효를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이 영화는 7월 30일 자로 개봉을 했고, 8월 10일이면 이미 개봉 2주차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봉관에서 대략 2~3주를 흥행하던 당대의 관행을 감안할 때, 적어도 이 조치는 서울 개봉관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후 지방의 개봉 등에는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국방부, 「군사극영화 “돌아온 여군”에 관한 삭제 의뢰」(1965. 7. 30.) 그리고 이만희 감독에 대한 법원의 판결 절차 역시 진행되고 있었다. 법원의 판결은 1965년 12월 8일에 내려졌다. 처음 문제가 된 지 정확히 1년 만이었다. 당시 서울형사지법은 이만희 감독의 반공법 위반 사건에 대해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의 선고를 유예하는 판결을 내렸다. 사실상 무죄에 가까운 판결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1심의 선고에 대해 검찰은 항소했고, 무려 4년 뒤인 1969년 3월에야 법원이 검찰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했다. 기나긴 이야기는 이제서야 끝이 났다. 영화적 반공이 본격화되다 우리는 막연하게 반공영화에 대해 정부가 추동 혹은 지원했던 영화 장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반공영화는 정부 정책을 지원하는 일종의 관제영화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검열 현장에서 항용 가장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영화 장르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반공영화이기도 했다. 비단 <7인의 여포로>뿐 아니라 1955년 작 이강천 감독의 < 피아골 > 역시 영화의 용공적 성격이 문제가 되었고, 조긍하 감독의 < 철조망 >(1960), 이만희 감독의 < 들국화는 피었는데 >(1974), 이두용 감독의 < 최후의 증인 >(1980) 등도 검열과 관련하여 당국과 마찰을 빚은 영화로 회자된다. 당대 평자들이 <7인의 여포로>를 옹호하는 과정에서 밝혔듯, 영화감독과 같은 창작자를 포함한 영화계 인사들은 보다 흥미로운 반공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북한군 캐릭터,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 전장에서의 병사들의 운명에 대해 보다 입체적이고 복잡한 해석을 가해야 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창작자의 의도는 검열자가 보기에 때로 작은 뉘앙스의 차이만으로도 한국전쟁과 남한 정부, 혹은 냉전적 세계체제의 본성을 폭로하는 불온한 영화가 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따라서 남과 북의 극한적 대결 구도의 선봉에 섰던 반공영화 장르는 뜻하지 않게 논란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위험한 장르이기도 했다. 검열자의 시각에서 <7인의 여포로>는 이러한 반공영화의 잠재적 위험성이 현실화된 극명한 사례였다. 그리고 <7인의 여포로> 사건은 이후 ‘ 영화적 반공 ’의 기준점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상징적이다. 1960년대 중반은 박정희 정권의 3공화국이 안정되며, 냉전 반공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아 정권의 권위주의가 강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제 한국전쟁 영화는 단순한 역사적 재현이 아니라 당대의 냉전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지형 내에 강고하게 포착되고, 관점과 캐릭터가 고정된다. 그와 함께 영화적 반공에 포착된 한국전쟁 영화, 스파이영화, 간첩영화, 문예영화 등은 점차 그 상업적 활기를 잃어갔으며, 1970년대에 이르게 되면 정부의 인위적인 “우수영화” 정책으로만 그 명맥을 유지해 가는 상황에 이른다. 그 중요한 분기점이 <7인의 여포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부록: <7인의 여포로> 사건 경과 ※
이두용의 < 귀화산장 >은 1981년작이다. 대표작인 < 피막 >과 거의 동시에 개봉된 영화이다. 그 앞뒤로 < 최후의 증인 >과 <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가 개봉되었으니 이 정도면 이두용 경력의 정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기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어떤 재미를 기대해도 될까? 미안하지만 아니다. 재미를 따진다면 위 문장에 언급된 다른 작품을 건드리는 게 낫다. 개인적으로는 <최후의 증인>을 추천한다. 네 편 중 가장 통속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영화가 세월이 지나면서 가장 재미없는 영화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건 영화의 재미가 관객들의 가치기준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냥 재미만 있으면 되지”라는 말을 아주 쉽게 하는데 대부분 영화들이 유통기한을 넘기지 못하는 건 바로 그 “재미만 있으면 되지” 정신 때문이다. <귀화산장>은 <디아볼리크> 장르에 속하는 영화다.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디아볼리크>는 개봉 직후 엄청난 양의 아류작들을 생산해냈고 그들은 거의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냈다. 주인공은 살인과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사건을 커버한다. 그 뒤로 주인공의 주변을 귀신일 수도 있고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는 희생자가 뒤를 따른다. 그 정체는 감독이나 작가 맘이다. (심지어 <디아볼리크> 리메이크들도 다들 결말이 제각각이다.) 이 영화들을 만든 감독들 중 일부는 심지어 클루조의 영화를 안 봤을 수도 있다. 원작이 번역되었으니 그걸 읽고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귀화산장>의 주인공은 한민우라는 의사다. 자기 이름을 단 의원을 갖고 있고 얼마 전에 중요한 과학적 연구를 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장모님은 신이 나서 사위에게 종합병원을 차려주겠단다(옛날 한국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남자들의 욕망 중 하나는 부잣집 딸과 결혼해 한몫잡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린 이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걸 안다. 제목이 뜨기도 전에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미쓰 리, 그러니까 간호사 경아를 성폭행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경아는 임신했다고 알리고 한민우의 별장에 눌러앉는다. (별장은 7,80년대 한국 호러와 스릴러 장르의 단골 무대이다. 당시 영화를 자주 본 관객들은 그 건축학적 분위기에 익숙할 것이다.) 한민우는 실랑이를 벌이던 중 경아를 밀치고 경아는 죽는다. 한민우는 시체를 우물에 버린다. 하지만 경아의 시체는 사라지고 빨간 옷을 입은 경아 또는 경아의 유령이 면도칼을 휘두르며 한민우 주변을 맴돈다. 그렇다. 익숙한 <디아볼리크> 이야기가 이어진다. 아주 비슷한 이야기가 < 마의 계단 >에서도 벌어졌다. 하지만 <마의 계단>은 남자 주인공의 치졸함을 단 한 번도 외면한 적이 없었다. <귀화산장>에서는 어떻게든 남자에게 알리바이를 주려고 기를 쓴다. 그 중 가장 어이가 없는 부분은 분명 앞에서 벌어졌던 성폭행을 없는 것처럼 만들려는 시도이다. 알고 봤더니 그것도 경아가 성폭행으로 한민우를 몰고 갔고 경아는 아직도 한민우를 사랑하고 있고. 미치겠다. 영화는 당시 권력을 가진 남자들의 끔찍함을 모르지는 않는다. 이를 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건 ‘가정부를 좀 건드렸다가 난처해진‘ 한민우 친구의 엄살 떠는 대사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과연 이 영화를 만든 남자들이 그 상황의 비열함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는지 의심이 간다. 영화를 닫는 결정적인 대사가 “여자를 조심하라”라면 더욱 그렇다. 7,80년대 한국영화는 한국의 부당한 남성우월주의 시스템 때문에 고통받는 여자들을 연민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도배가 되어 있다. 소재만 따진다면 페미니즘 영화가 따로 없다. 하지만 이들 영화 상당수는 3S 정책의 결과물인 한국 에로 영화 장르와 겹쳐지기도 했다. 관객들은 영화 속 주인공 여자들을 동정하고 연민했다. 하지만 그들이 건드리기 쉬운 예쁘고 젊은 여자들이라는 사실에 흥분했다. 아마 그들은 주인공의 무력함 뿐만 아니라 비극적 결말에도 자극 받았을 것이다. 이두용이 <귀화산장>을 만든 남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본다면 관객들은 <피막>이나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의 미심쩍은 부분을 관대하게 넘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고 난 뒤에도 그럴 수 있을까.
1987년에 도착한 < 영웅본색 >은 그 매혹의 강도에서 보자면, 적어도 어떤 세대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만한 것을 만들어냈다. 동시대의 그 어떤 한국영화도 이 영화가 불러일으킨 것과 같은 열광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저 고색창연한 대사는 소년들의 마음을 움켜잡았다. 그렇다. 의리는 땅에 떨어졌으나, 이 세계의 유일무이한 가치인 바로 그 의리를 세우기 위해 우리의 ‘따거(大兄)’ 주윤발은 홀홀단신 적진을 향해 나아가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소년들은 일시에 검은색 선글라스와 롱코트에 사로잡혔으며, 너도나도 성냥개비를 질겅질겅 씹어대고 싶어했다. 실상 <영웅본색>의 시작은 그렇게 창대하지는 않았다. 이 영화는 서울의 화양, 명화, 대지극장에서 1987년 6월 23일부터 7월 9일까지 개봉되었으며, 9만 4천 604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개봉관에서 ‘신통치 않은’ 성적을 거둔 이 영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 것은 “뒷골목과 변두리의 ‘동시상영’ 프로가 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급기야는 주인공의 웃차림과 제스추어를 모방하고 수십번씩 같은 영화를 되풀이해 보는 1) 열광적인 팬덤을 낳았다. 팬덤은 이제 막 불붙기 시작한 새로운 매체를 기반으로 장르에 대한 탐닉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988년을 기점으로 VCR 대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영웅본색>을 필두로 한 홍콩영화는 비디오 가게 선반이 나눠놓은 분류 속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로 카테고리화되었다. 이 ‘장르’는 이제 가장 충실하고 열정적인 관객을 갖게 될 터이다. 비디오라는 새롭게 추가된 매체의 영향은 있었으나, 여기에는 분명 1970년대 이래로 동시상영관을 채워왔던 이런 영화들(이른바 1970년대의 홍콩 권격영화)의 관객의 세대적, 젠더적 상속이 있었다. 이들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것은 10대에서 20대의 젊은 남성관객들이었다. 장사치들은 발빠르게 이에 조응하였다. <영웅본색> 이후 단 1년 만에 홍콩영화의 한국 판권은 2배에서 3배까지 치솟았으며, 1988년의 시점에 홍콩영화의 주요 수출국 중 3위로 랭크된 한국은 1990년에 이르면 대만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오우삼과 서극과 임영동의 이름은 이제 막 등장한 ‘시네필’들의 경전에 올랐고, 주윤발, 장국영, 왕조현, 유덕화, 적룡, 이수현, 여명 등 한국식 한자 발음으로 통용되는 이름들은 그 발음만큼 ‘친숙한’ 스타가 되었다. 이 열광을 가능케 한 조건과 근원은 무엇인가? 왜 이곳에서 <영웅본색>은, 나아가 이로부터 촉발된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소위 ‘홍콩 느와르’ 2) 로 불려진 일련의 홍콩영화들은 그토록 강렬한 매혹을 불러일으켰는가? 왜 그때 한국의 10대와 20대 젊은 남성들은 이 세계에 그토록 ‘진지하게’ 심취할 수 있었는가? <영웅본색>은 1987년과 88년 사이라는 한국 사회의 기점적 시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시작된 홍콩 느와르에 대한 열기는 1990년대를 전후하여 절정에 이르렀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분명 <영웅본색>이 불러일으킨 열광의 강도는 놀라운 것이지만, 누가 어떻게 향유, 소비했는가의 방식은 한편으로는 1970년대 이후 이 지역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획득했던 (그러나 그 하위문화적 성격상 거의 담론의 영역에서는 논의되지 않았던) 홍콩산 액션영화(이거나 종종 한국, 대만, 동남아시아 일대의 영세 영화자본들이 합종연횡하면서 만들어낸 출처 불분명의 ‘무국적’ 액션영화)가 소비되었던 방식을 답습하는 한편, 당연한 말이지만 1980년대 중후반이라는 사회적·미디어적 조건과 결부되어 향유되었다. 즉, 여기에는 한국에서 홍콩영화가 차지했던 독특한 위상이라는 종적 맥락과 <영웅본색>이 도착한 1987년부터 이 장르에 대한 열광이 사그라드는 199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이라는 횡적 맥락이 서로 연동되어 개입되어 있다. 1960년대 중후반 한국의 영화관객이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계층별, 세대별, 젠더별 분화를 시작하던 무렵 이른바 무협영화의 형태로 처음 한국 영화시장에 도착한 이래 홍콩영화는 재개봉관, 도시 변두리 소극장과 같은 지극히 남성 동성사회적(homosocial)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소비되며 젊은 남성들의 주요한 하위문화적 자원으로서 기능하였다. 특정 공간과 특정 세대, 젠더가 결합되어 있는 이 향유의 방식이야말로 홍콩영화에 관한 한국 담론 특유의 세대적 노스탤지어의 감각이 생겨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홍콩영화에 관한 서술이 종종 개인적 기억과 그것이 놓여진 시간과 장소로 이끌리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3) 10대, 20대의 남성 하위문화와 강하게 결부되어 있던 홍콩영화에 관한 이해는 내셔널 시네마 히스토리에 기반한 영화사적 계보 이전에 개인적 기억과 결합되어 수용되어왔다. 강력한 스타 시스템으로 운용되는 홍콩영화가 전시하는 친밀한 인종의 얼굴, 스타의 몸이야말로 바로 이 개인적 열망들의 투사체로 작용하였다. 이것은 홍콩영화의 향유 방식에 내재된 독특한 세대론적 감각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세대적 응집성은 강렬한 체험의 강도를 동반한다. 홍콩영화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이 영화들이 한국영화사에서 차지하는 기묘한 위치이다. 홍콩영화는 일본영화가 전면 금지된 이곳에서 오랫동안 한국영화를 제외하고 같은 동양인의 얼굴이 등장하는 유일한 영화였으며, 또한 한국영화와 가장 빈번하게 결합된 영화이기도 하였다. 1970년대 내내 도시 변두리 극장에서 가장 긴 흥행 사이클을 보여주었던 액션영화의 절대 다수는 소위 한국-홍콩 혹은 한국-대만의 ‘위장합작’ 영화들이었다. 1986년의 외국영화 수입 자유화 이후에야 완전히 사라진 이 오래된 관행 속에서 종종 한국어 더빙 버전의, ‘한국영화’로 알려지기도 한 홍콩영화는 익숙한 풍경과 언어를 지닌 것으로 감각되었으며, 그 속에서 홍콩영화의 외래성은 습관적으로 또 의도적으로 지워졌다.(홍콩 영화배우들의 이름이 한국식 한자 독음 표기로 호명되었던 사실은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홍콩영화에 대한 이곳에서의 감각은 외화와 방화 사이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마도 이 친밀성이야말로 홍콩영화에 대한 한국에서의 ‘번역가능성’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일 게다. 4) 바로 이와 같은 친밀한 방식 속에서 이 영화들에 열광한 절대적인 관객층이 10대와 20대 젊은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영화들이 이 시기 이들의 열망과 분노, 상상적 극복과 같은 것, 즉 어떤 정동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절반쯤 토착화된 영 컬처로서 <영웅본색>은 이 영화가 도착한 바로 그 시간인 1987과 1990년대 초까지 들끓었던 혁명적 열망과 정념과 관련되어 있다. 1987년의 6월 항쟁이 이끈 직선제 개헌 관철의 결과 그해 12월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6월 항쟁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함을 보여주었다. 7, 8월의 노동자 대투쟁과 전대협 결성, 이듬해의 노동법 개정투쟁, 6.10/8.15 남북학생회담 투쟁, 1989년의 전교조 결성, 노동자 총파업, 그리고 문익환 목사, 전대협 대표 임수경, 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 등의 방북, 1990년의 전노협 결성 등 대규모의 노동자 투쟁과 통일 투쟁이 이어졌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인 동시에 정치, 사회, 경제적인 모순에 대한 거대한 저항이 분출하고 있던 이 시기는 정확히 오우삼 영화에 대한 열광의 시간과 겹쳐져 있다. 한국영화를 포함해서 그 어떤 영화도 이 순간 그의 영화만큼 젊은 남성들의 열광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영화가 1987년의 정치와 정동과의 예기치 않은 충돌 혹은 밀착을 이루어내고 있는가를 역설해주는 것일 게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 <영웅본색>을 필두로 한 홍콩 느와르는 이 영화들의 과도한 폭력성이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로 점철되었다. 그것은 심지어 구체적인 숫자까지 동반하였다. 당시 한 시민단체가 주최한 ‘폭력영화와 청소년 문화환경’이라는 심포지움의 발표에 따르면, 1988년 관객 28만명을 동원한 <영웅본색 2> 전체의 21.9퍼센트가 폭력장면이고 89년 25만명을 동원한 <첩혈쌍웅> 24.3퍼센트가 폭력장면이다. 5) 라는 ‘구체적인’ 퍼센티지까지 제시되고 있다. 이 영화들에 대한 히스테릭한 우려는 더 이상 저질이라는 모호한 어휘를 맴도는 것이 아닌 직접적으로 ‘폭력’에 대한 과도한 염려였으며, 이 영화들에 대한 매혹 또한 액션의 ‘폭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87년 6월 항쟁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의 죽음이라는 기폭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대중이 애도의 공동체로서 형성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자, 또한 국가폭력이 저지른 이 무구한 죽음의 형상은 그 자체로 대항폭력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대항폭력은 ‘87년을 전후로‘ ‘정당한 약자의 무기로 자리잡았’다(김원). 그것은 가두에서 백골단과 구사대가 휘두르는 곤봉과 최루탄에 맞서는 화염병과 쇠파이프의 저항이었으며, ‘약자가 최대한의 도덕적 힘을 발휘한 가장 치열한 무기’(최장집)로서의 분신이었다. 즉, 이 격렬한 대중투쟁의 시간은 도저한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대항폭력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대항폭력의 정당성이야말로 공안정국을 유지하고자 했던 이 정권으로서는 가장 염려스러운 것이자 하루빨리 탈취해야 할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말해 폭력의 카테고리 안에 묶인 <영웅본색>의 힘은 그야말로 거리의 힘의 상상적 투사물일 수 있었다. 1990년 국군보안사령부가 각계 주요인사들을 사찰한 ‘청명계획’이 내부고발자에 의해 폭로된 직후 국면전환용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노태우는 “저는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이를 소탕해나갈 것입니다”라고 선언하였다. 범죄와 폭력이 ‘와’로 병렬되고 있는 이 연설은 대항폭력을 범죄화함으로써 이 폭력의 정당성을 삭제하고자 하는 언설 전략의 전형적인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폭력) 대 대항폭력. 한국에서의 홍콩 느와르 전성기와 함께 하는 이 두 폭력의 구도는 왜 이 영화들의 폭력이 어떤 이들에게 그토록 과잉 의식되는지 왜 이 영화들의 향유자들에게는 그토록 매혹적인 것인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준다. 저 영화적 폭력이 죽음과 애도와 긴밀히 연결된 대항폭력의 영화적 형상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분명 폭력 형상이 있으며, 나아가 그것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쾌감이 있다. 게다가 그 폭력은 오로지, ‘형제’를 위해서만 발현되는 것이다. <영웅본색>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이 정념의 활극은 오로지 형제애에 기초해 있다. 한때 조직에 발 담갔으나 갱생의 의지를 다지는 남자, 그러나 그의 이전의 삶이 그의 발목을 잡아끄는 이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영웅본색>이 느슨하게 관련된 1967년의 동명 영화로부터 비롯되었다. 감독 용강(龍剛)의 광동어 사회파 드라마인 이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하면서 오우삼은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는 마크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였다. 오우삼은 이 인물을 구축하는 여타의 서사를 지우고, 이 캐릭터를 송자걸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마크는 오로지 이 관계의 도덕, 의리라는 하나의 정념으로 움직인다. 젊은 남성들을 열광케 했던 소위 이 영화의 ‘명장면’들이 마크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컨대 위조화폐에 담뱃불을 붙이는 주윤발, 화분에 심어놓은 총을 꺼내어 춤추듯 유려한 동작으로 총을 쏘는 주윤발. 왜냐하면 이 캐릭터는 클로즈업과 슬로우모션을 통해 제스추어와 표정으로 특권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크에게 가족이 있는가, 그는 어떤 역사를 지니고 있는가. 우리는 여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송자걸이 서사의 캐릭터라면, 마크는 제스처의 캐릭터이다.(1974년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을 배경으로 마크의 전사를 그리고 있는 < 영웅본색 3 >는 영화의 성취와는 별개로 이 시리즈의 팬들을 얼마나 실망시켰던가. 3편에서 마크는 땅으로 내려왔고, 심지어 여자와 ‘연애’를 한다.) 오우삼은 마크를 통해서 신화적 공간을 창출한다. 단적으로 말해 그 공간은 ‘협(俠)’의 세계이고, 이 ‘협’이라는 세계의 기본원리를 그 자체로 현현해내고 있는 마크-주윤발이야말로 이 세계를 온전히 하나의 세계로서 형성시켜내고 있는 자이다. <영웅본색>을 비롯한 홍콩 느와르의 중요한 특질 중 하나는 이 세계가 ‘아버지’ 없는 세계라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아버지적 존재’는 행위의 동기 혹은 주체로서 기입되어 있지 않다. 이 세계에서 행위의 동기이자 주체가 되는 것은 동년배의 남성들이며 연대란 오로지 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형제를 위해!). 이 세계를 온전히 하나의 세계로서 구성해내는 원리라고 할만한 것은 다름 아닌 형제들 사이의 ‘의리’와 세계에 대한 ‘인의’이며, 형제를 배신하는 행위야말로 이 세계의 악이다. 오우삼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영화가 폭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의(仁義)와 형제애에 관한 영화임을 역설하였다. 그것은 단지 그의 영화가 과도하게 폭력적이라는 비난에 대한 변명이 아니다. < 첩혈속집 >에 출연했던 쿠니무라 준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오우삼은 진심으로 자신의 영화 모티브가 인의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소위 인의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삶과 죽음 사이에서도 상대를 지키는, 혹은 상대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인간의 관계성의 극단과 같은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남자들 간의 우정이라고 할까. 그것이 내가 영화를 찍을 때의 기본 모티브다.” 6) 오우삼이 인의를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삶과 죽음 사이에서도 상대를 지키는……남자들 간의 우정’이라고 언급할 때, 그것은 그의 영화 스승인 장철(張徹)이 ‘피의 형제애 blood brothership’라고 불렀던 것을 상기시킨다. 오우삼 스스로 경외를 바쳐 마지않는 영화사의 선배들 이름을 즐겨 거론하지만(이를테면 장철부터 샘 페킨파, 장 피에르 멜빌까지) 적어도 <영웅본색>에 한해서 말하자면 이 영화는 거의 전적으로 장철에 대한 오마쥬로 보인다. 오우삼이 장철의 영화적 인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 다량의 피, 파열하는 신체, 죽음의 순간을 지속시킬 수 있는 영화적 장치로서의 슬로우모션 등을 반복할 때 그것은 단지 스타일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장철 영화의 미학인 ‘비장’을 발현하는 데에 핵심요소들인 이 인장들의 반복이야말로 <영웅본색>을 그토록 비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장철은 홍콩의 주류 장르를 젊은 남성들의 영화로 옮겨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홍콩 내의 산업적, 인구적 변화와 맞물려 등장한 젊은 남성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그의 영화는 젊은 남성이 말 그대로 ‘죽도록’ 싸우는 영화에 심취해 있었으며, 장철의 관심은 시종 이 싸우는 신체가 어떻게 파열되고 부서지는가에 있었다(<영웅본색>의 적룡은 장철이 사랑해마지 않았던 그 부서지는 젊은 신체 중 하나였다). 이 이야기는 단지 그의 영화가 얼마나 익스트림한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스스로의 영화를 즐겨 ‘양강(陽剛)’ 영화라고 칭했던 장철에게 강력한 남성성(陽剛)은 비장미를 자아내는 데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비장미는 세계와의 대결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미학이다. 이 대결은 패배를 예정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장을 쏟아가며 선 채로, 끝까지 버티면서 죽음에 이를 때 비장미가 발현된다. 홍콩 영화 최초로 등장한 이 젊은 남성들의 영시네마가 홍콩의 가장 격렬한 정치적 저항의 시기인 1967년과 1968에 등장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우삼이 장철을 다시금 불러오고 있을 때, 이 영화들은 마찬가지로 불의와 폭력의 세계에 대한 정치적 주체의 정동을 반영한다. <영웅본색>이 홍콩영화 사상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던 그해 홍콩은 다가오는 1997년을 어둡게 만드는 사건으로 들끓고 있었다. 1986년 홍콩 센트럴에서 약 50미터 거리인 다야만에 설립될 중국의 핵발전소 건립계획은 홍콩 내의 격렬한 반대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4월에 발생한 체르노빌 사건은 이 반대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학생, 노동자, 시민단체 등이 결집한 ‘다야만 핵발전소 건설보류 연석회의’가 중국정부에 제출한 반대서명에는 참여한 숫자는 당시 홍콩인구의 1/5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오우삼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받는 < 첩혈쌍웅 >은 1989년 천안문 사태와 ‘본토’의 폭력을 목격한 홍콩 시민들의 광범위한 불안을 반영하였다. 1987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홍콩 느와르에 대한 한국의 젊은 남성들의 열광은, 홍콩의 정치적 맥락과 전혀 상관없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하나의 정동을 공유하는데, 그것은 인의와 그 인의를 보장하는 투쟁중인 집단의 형제애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왜, 한국의 젊은 남성들에게 주윤발은 ‘따거(大兄)’가 되었는가? <영웅본색>이라는 저 정념의 활극의 핵심은 형제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감내하는 헌신적인 형제애이다. 주윤발의 몸이 말 그대로 무수한 총알구멍들로 뚫려질 때, 그는 온몸을 부서뜨리며 이를 수행한다. <영웅본색> 2편에서 죽은 마크-주윤발의 총알구멍으로 너덜너덜해진 코트가 등장할 때 그것은 형제를 위한 이 죽음의 순간을 거의 물신의 영역으로까지 끌어올린다. 죽음을 무릅쓰는 이 형제애의 감정경제는 1987의 저 광범위한 연대, 세계의 폭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남성) 동지들의 연대와 그 속에 작동하고 있던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젠더적 편향성까지를 모조리 담아낸다. 다시 말해 이 의리란 세계의 부정과 대치하고 있는 (남성) 형제들 간의 의리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웅본색>의 ‘번역가능성’이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1987의 <영웅본색>은 한국과 홍콩영화 사이의 독특한 관계 속에서 일종의 외주제작된 정념의 ‘번안물’로서 이곳에 도착하고 있었다. (이 글의 내용 일부는 필자의 「형제애의 로망, 1987의 정동—<영웅본색>과 홍콩-한국 커넥션」을 가필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 1) ”구회영,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한울, 1991, 205쪽.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홍준이 구회영이라는 필명으로 로드쇼에 연재한 글을 묶어 출간한 이 책은 새롭게 등장한 시네필들의 관람 실천의 안내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한국에서 홍콩영화가 최초의 ‘컬트적’ 향유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은 이 관점에서 보자면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 관객들이 처음으로 시네필이라는 ‘세계’관객의 시민성을 향유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영웅본색> 이후의 홍콩 갱스터 영화를 일괄했던 이 표현은 일본과 한국의 저널리즘에서 즐겨 유통되었다. ‘필름 느와르’라는 매우 특화된 역사성과 내러티브-이미지를 지닌 영화 장르명을 원용해오고 있는 이 용어에 대해 우다가와 코우요는 <영웅본색>의 일본에서의 공개 당시, 일본 배급회사 선전부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전한다.(野崎歓・宇田川幸洋対談「香港犯罪映画の魅力」, 夏目深雪、石坂健治、野崎歓編, 『アジア映画で<世界>を見る』, 作品社、2013, p.110) 대개의 저널리즘적 표현이 그러하듯 엄밀한 의미를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직관적인 포착이 가능한 이 용어는 거의 같은 시기 한국에서도 즐겨 사용되었다. 한편, 홍콩에서는 <영웅본색> 이후 등장한 일련의 갱스터 영화들에 대해 ‘영웅편(英雄片)’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3) 홍콩영화 향유의 초기부터 있었던 개인적 기억과 결부된 ‘체험’으로서의 홍콩영화에 대한 매혹적인 서술의 사례들로는 다음을 참조. 오승욱, 「어느 장철교 신자의 신앙고백- 나는 왜 그렇게 장철 영화를 좋아하나?」, 『KINO』 2003.7/ 정성일, 「장철의 무협영화에 바치는 피끓는 십대 소년의 막무가내 고백담」,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바다출판사, 2010. 4) 1971년 쇼브라더스에서 장철의 조감독으로 영화 경력을 시작한 오우삼 자신이 1970년대의 홍콩-한국 커넥션을 직접 경험한 자라는 점은 꽤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의 공식적인 감독 데뷔작 <여자태권군영회 女子跆拳群英會>는 한국 관객들의 홍콩영화에 대한 저 친밀함이 1970년대의 어떤 시각적 경험을 통해서 저변화되어갔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3년 불어닥친 이소룡 영화의 붐 이후 국가적 전략으로까지 제시된 ‘태권도 영화’와 호응하여 만들어진 이 합작영화는 한국에서 올로케 촬영되었다. 김창숙과 남산식물원과 경복궁을 주된 시각적 재료로 삼고 있는 이 영화는 한국에서 1974년 제작사 골든하베스트와 감독 오우삼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동아수출공사가 제작하고 김명용이 감독한 ‘한국영화’ <위험한 영웅>으로 개봉되었으며, 1980년대 후반 오우삼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여자태권군영회>라는 원제목을 달고 한국에서 VHS로(세경) 출시된 바 있다. 5) 『동아일보』 1990.9.20 6) 「国村準インタビュー」, 宇田川幸洋編集, 『キネ旬ムック フィルムマーカーズ⑫ ジョン・ウー』, キネマ旬報社, 2000, p.74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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