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라이샹(夜來香)
- 감독
- 정창화
- 제작년도
- 1966
- 출연
- 신성일, 문정숙, 최남현, 허장강, 주연, 이빈화, 전계현, 김동원, 김칠성, 김성옥, 고수미, 이예성, 이철, 라정옥, 김병휘, 김영란, 안성기, 안천룡, 노도원
이지룡은 1954년부터 1992년까지 영화계에서 활동한 영화제작자이다. 외화수입업으로 영화계에 입문해 명보극장을 설립했고 정창화 감독을 비롯한 유명 감독들의 작품을 제작한 인물이다. (사진1) 젊은 시절의 이지룡 그는 1926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함흥에서 치마대소학교와 대흥상업학교, 금정고등학교를 나와 함산금융조합 출납계원으로 일했다. 일제강점기 안정된 직장을 다니며 함흥 명보극장에 들어오는 영화를 놓치지 않고 보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안정적이었던 생활은 해방으로 인하여 변화된다. 그렇다해도 좌우대립이 심한 남한보다 그곳이 낫다는 생각에 그는 함흥에서 장사를 하며 새로운 체제에 적응해갔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곧 한국전쟁을 만나게 된다. 만세교를 건너 함흥에 입성하는 국군은 그에게 해방군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사진2) 함흥만세교 사진 (사진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군이 입성한 뒤 그는 함흥 민사부 동원부장으로 국군을 도왔고 흥남철수작전이 시작되자 퇴각하는 1군단과 함께 서호진에서 간신히 수송선을 타고 월남한다. 배는 예상과 달리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포항에 닿았다. 단신에 무일푼으로 월남한 그는 국민방위군에 차출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방위군이 해산되자 본격적인 피난생활이 시작된다. 부산에서 그는 친척인 삼양물산 주동태의 도움으로 쌀창고와 함흥냉면 장사를 하며 종자돈을 모아, 휴전되기 전 도강증을 구해 서울로 상경한다. 그리고 전쟁으로 파괴된 서울에서 건설업을 시작한다. 입찰과 재무 업무는 자신 있었지만 건설에는 영 취미가 없던 그는 친척인 이회극이 부사장으로 있는 수도극장에 자주 출입하게 된다. (사진3) 1951년 한국전쟁기의 수도극장의 모습과 2003년 스카라극장의 모습이다. 수도극장은 1930년 약초극장으로 개관해 1945년 수도극장, 1962년 스카라극장으로 재개관하며 유지되어 오다 2005년 근대문화재로 등록예고 된 뒤 소유주에 의해 철거되었다. (사진출처_한국콘텐츠진흥원kocca 문화컨텐츠닷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극장 문 닫는 법이 없어. 손님이 오는 거야.” 사람이 끊이지 않는 극장에서 그는 영화사업의 가능성을 보게 되고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준비한다. 그는 먼저 외화수입을 통해 영화흥행에 대한 감을 익히며 명보극장 건설을 추진한다. 삼양물산의 주동태와 고향 친구이자 후에 연방영화사 부사장이 되는 양봉식을 설득해 투자유치를 하고 파리에서 귀국한 건축가 김중업에게 설계를 의뢰해 극장건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국회부의장 조 모 씨의 권력을 등에 업고 나타나 일신산업에게 공사를 맡기며 위기는 시작된다. 자본도 기술도 부족했던 건설업체인 일신산업의 미숙으로 공사가 난항을 겪게 된 것이다. (사진4) 1956년 명보극장(공사 초기 명성극장) 기공식 현장. 오른쪽 끝이 양봉식, 그 옆이 이지룡으로 일신산업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사진5) 1956년 명보극장 기공식 현장. 양봉식과 이지룡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그는 자본과 기술이 있는 대림산업에게 공사를 의뢰했고 대림산업은 초기 투자자들 보다 더 많은 지분을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대림산업의 요구를 들어준 뒤 공사는 시작되었다. (사진6) 명보극장 상량식. 대들보에 돈을 넣은 하얀천을 묶고 있다. (사진7, 사진8) 명보극장 건설현장 1957년 여름, 드디어 명보극장은 완성된다. 한국전쟁 후 처음으로 건설된 현대식 영화상영관이자 그가 청년기 함흥 시내에서 영화를 봤던 명보극장이 서울 충무로에도 들어선 것이다. 이때가 그의 나이 29세이다. 명보극장은 1957년 8월 25일 개관식을 갖고 개관작 <상류사회 High Society>(찰스 월터스, 1956)를 시작으로 극장영업을 시작한다. 그는 명보극장 부사장으로 자리한다. (사진9) 1957년 명보극장 개관기념. 극장종업원들과 명사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가운데가 당시 민의원 의장 이기붕이고 오른쪽이 부인 박마리아, 그 옆이 이지룡이다. 명보극장은 개관했으나 대림산업과의 알력다툼으로 친구 양봉식을 비롯한 초기 관계자들은 명보극장에서 손을 떼게 되고 그 또한 명보극장에서 나오게 된다. 대림산업 측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으나 5.16으로 유야무야 된다. 그는 다시금 심기일전해 1960년대 중반 영화제작업에 뛰어든다. 1964년 <학생부부>(김수용) 등 다른 영화사의 이름을 대명해 세 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1966년 아세아영화사를 만들어 자신의 메이커로 본격적인 영화제작을 시작한다. (사진10) <학생부부>(김수용, 1964) 촬영현장. 선글라스를 낀 이가 김수용 감독이고 그 옆에 양복을 입고 있는 이가 제작자 이지룡이다. 카메라 뷰파인더를 보고 있는 이가 촬영감독 전조명이다. 그리고 1965년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로 정창화 감독과 처음 만나게 된다.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중 미얀마 전선을 배경으로 스스로를 황군으로 정체화한 조선인 지원병이 미얀마 게릴라 대원과 친구인 조선인 학도병들의 죽음을 통해 각성하고 일본군에 대항하지만 미얀마 게릴라 대장의 오해에 의해 결국 죽임을 당한다는 내용의 남방전쟁액션영화이다. 열대 지방인 미얀마 전선을 국내에 재연하기 위해 그는 미공보원에 있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정창화 감독과 함께 미공보원에 들어가 동남아 전투장면에 대한 영상을 살펴보고 자료를 모았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군 초소와 열대 밀림을 광릉에 만들고 실제 동남아 전선을 촬영한 미공보원의 필름까지 복사해 영화에 사용했다. (사진11)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의 한 장면으로 동남아 분위기를 내기 위해 미공보원에서 가져온 필름을 사용한 것이다. (사진12)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의 한 장면으로 열대 전선 상공을 나는 전투기 장면도 미공보원에서 가져온 필름을 영화에 사용한 것이다. (사진13, 14, 15)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에서 오픈세트로 만든 일본군 초소는 그 규모와 정교함에서 추석 대작프로그램의 면모를 보여준다. 정창화 감독은 본인의 구술에서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의 열대 야자수는 국내의 호사가에게 빌려서 촬영한 것이라 증언했다. 제작자 이지룡은 야자나무를 제작팀이 천이나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직접 만든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쌀과자로 중국식 발을 만들었던 당시 소품팀의 재주라면 야자나무 또한 그럴듯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영화 속에 열대 풍경을 재현하기 위해 야자나무 일부는 빌리고 일부는 만드는 식으로 처리한 듯하다. (사진16, 17)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에서 야자나무가 화면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데 옥의 티처럼 화면 왼쪽 하단에 화분이 보인다. 당시 촬영현장에는 따로 모니터가 없고 카메라의 작은 뷰파인더로만 촬영 중인 화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시네마스코프 영화의 경우 카메라 뷰파인더에는 일명 쫄쫄이 화면이라 불리는 세로로 긴 왜곡된 화면이 보이기 때문에 이런 실수가 발생했을 것이다. (사진18, 19, 20)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에서 광릉에 만들어 놓은 열대밀림과 서해안으로 보이는 곳에 만들어 놓은 열대의 바닷가 장면이다. 전쟁이 끝나고 회한에 젖은 주인공이 홀로 바닷가로 향하는 장면에는 큰 키의 야자나무들이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호사가의 야자나무인지 제작팀이 직접 제작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도 당시 대부분의 한국영화 처럼 지방배급업자들에게 지역판권을 선판매한 자금에 초기 투자금 및 초과되는 제작비를 제작자가 감당하는 방식으로 돈을 조달해 영화를 만들었다. 제작 초기 스틸사진만 보고 지방배급업자들이 어음을 끊어주고 시사회에서 개봉관 아카데미극장 방우영 사장이 일어나 박수 칠 정도로 평이 좋아 흥행을 기대했으나 대중의 반응은 달랐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손해만 안겨준 작품이 된다. (사진21)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 포스터 깐깐하고 꼼꼼한 정창화 감독을 만족시키는 데는 많은 제작비가 들었다. “정창화한테 내가 밤낮 지지...연출자가 뭐 하는데 밀어줘야지. 그러니까 다른 회사는 가지도 않고, 다른 회사에서도 정창화가 제작비를 많이 들인다 해가지고 정창화 쓰는 걸 겁내 한 거야.” 그럼에도 그는 정창화 감독의 가능성을 보고 영화를 계속 제작했다. 정창화 감독의 연출로 1966년 <순간은 영원히>, <예라이샹>, <위험한 청춘>, 1967년 <비련>, <위험은 가득히>, <황혼의 검객>, <조용한 이별>, 1970년 <아랑곡의 혈투>(정창화·짱깅퍼)를 연이어 제작했다. 정창화 감독이 2년간 연출, 개봉한 작품의 70퍼센트를 그가 제작했다. 정창화 감독의 까다로운 연출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제작사는 아세아영화사 말고는 없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사진22) 아세아영화사 사무실에서 이지룡, 정창화 당시 홍콩 굴지의 영화사 쇼브라더스가 정창화 감독을 스카우트하게 된 영화 <순간은 영원히>도 그가 한홍합작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그는 정창화 감독이 아시아 무협영화의 거장으로 탄생할 수 있는 밑거름을 제공한 제작자였다. 자칫 멜로드라마로 오해할 법한 제목인 <순간은 영원히>는 사실 홍콩을 무대로 남한 정보원들이 대남공작을 위해 막대한 금괴를 수송하려는 북괴 간첩단을 일망타진한다는 첩보액션영화이다. 영화의 원래 제목은 <위기X7호>인데 무슨 일인지 공보부는 개명을 권유했고 결국 <순간은 영원히>로 변경한다. 그래도 영문제목은 <Special Agent X-7>이다. (사진23) <순간은 영원히>(정창화, 1966)의 포스터 <순간은 영원히>는 홍콩 로케이션 촬영을 위해, 국내에서 중화권 영화의 통번역을 맡았던 인물의 소개로 홍콩의 군소영화사인 유린영화사와 합작해서 만들어졌다. 달러의 반출이 어렵던 시절 이국적인 홍콩배경이 필요한 경우 합작은 유리한 선택이었다. 국내 배우와 스태프들의 개런티와 국내 촬영 비용은 국내제작사가 부담하고 홍콩배우들과 홍콩촬영분은 합작한 홍콩 현지 제작사가 비용을 부담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이런 제작 방식은 홍콩이나 대만의 영화사들에게도 매력적인 일종의 공동제작, 투자방식이었던 듯싶다. 그래서 그는 <순간은 영원히>(정창화, 1966), <비련>(정창화, 1967), <조용한 이별>(정창화, 1967), <낮과 밤>(전우열, 1968), <아랑곡의 혈투>(정창화, 1970), <대벽관>(부청화·장진원, 1970) 등을 한홍합작으로 제작했다. 홍콩에서 <순간은 영원히>(정창화, 1966)를 본 쇼브라더스사는 정창화 감독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아세아영화사에 연락했고 그는 정창화 감독 외에 액션영화에 일가견이 있던 김기덕, 장일호 감독도 함께 소개해주었다. 또한 부족한 홍콩의 남자배우들을 채우기 위해 배우 성훈, 남석훈, 방수일, 오경아 등을 추천해 그들 또한 홍콩에서 한동안 활동하게 된다. (사진24) <아랑곡의 혈투>(정창화, 1970)에 출연 중인 오경아와 방수일 정창화 감독을 쇼브라더스에 소개한 인연으로 아세아영화사도 쇼브라더스와 함께 <아랑곡의 혈투>를 합작하게 된다. 이 작품은 쇼브라더스의 영화를 합작영화로 둔갑시킨 위장합작 영화라는 논란이 많은 작품이다. 당시 외국영화의 수입편수가 국가에 의해 통제되다 보니 인기 있는 외국영화와 겉모습을 취할 수 있는 합작영화의 제작이 인기였다. 실제 국내영화사와 거래를 했던 홍콩과 대만의 영화사는 국내 영화법의 각종 제약(합작영화의 조건인 국내감독의 참여, 국내배우의 출연, 투자금액의 제한 등)을 인식하고 이에 맞춰 때로는 이면계약이 이뤄지던 시절이었다. 당시 홍콩이나 대만영화에 국내 영화제작사가 사전투자를 통해 합작영화 타이틀을 얻기도 했는데 이런 작품들 모두 당시 기준으로는 위장합작이다. 아세아영화사는 김진규의 추천으로 대만 영화에 사전투자를 했지만 결과물이 좋지 않아 추가 투자를 철회하고 판권을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국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합작영화의 제작은 대단히 유동적이고 탄력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진25) 쇼브라더스와 아세아영화사와의 합작영화인 <아랑곡의 혈투>(정창화, 1970) 포스터이다. 홍콩무협영화의 색채를 띈다. (사진26) 홍콩의 군소영화사인 영광영업공사와 아세아영화사의 합작영화인 <조용한 이별>(정창화, 1967) 포스터이다. 주연 여배우인 홍콩 배우 정향이 신성일과 남정임 사이에 작은 크기로 그려져 있다. 1971년에 그는 <20인의 여도적>(이지룡, 1971)을 연출한다. 아세아영화사의 여배우 공모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인데 당시 공모전 사진을 보면 지금의 오디션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사진27) <20인의 여도적>(이지룡, 1971) 포스터 (사진28) <20인의 여도적>(이지룡, 1971) 여배우 공모전 사진 1972년에는 영화제작사인 유림흥업을 설립한다. 그리고 1973년 이성구 감독 연출로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일본의 고즈시마섬에서 로케이션으로 제작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쥬리아는 임진왜란기 일본에 입양된 조선 출신 여성으로 천주교도로 성장해, 천주교를 박해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실 제안을 거절하여 유배당하고, 유배지에서 약자와 병자에게 헌신해 성자로 추앙받는 인물이 된다. (사진29)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 포스터 1973년 오타 쥬리아에 대한 기사가 국내에 소개되어 인기를 얻자 다섯 개의 영화사가 이 소재를 영화화하고자 경합했다. 영화사들이 기획안을 문화부에 접수했고 그 중 유림흥업의 작품이 선정된다. 유림흥업은 야심차게 일본 고즈시마섬에서 이 작품의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한다. (사진30, 31)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의 스틸 섬 사람들의 관심과 우호적인 협조 속에서 진행된 작품이라 벅찬 마음에 제작자는 영화 타이틀이 뜨기 전 작품의 취지에 대한 제작자의 당부 영상과 이를 일어로 통역하는 배우 김진규의 영상까지 넣어 완성시켰다. (사진32)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 일본 고즈시마섬 촬영 현장. 보조출연을 해 준 섬 주민들과 함께한 사진으로 양복을 입은 이가 이지룡이고 오른쪽이 배우 김진규이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의 단체관람도 기대했으나 신통치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을 초대한 시사회에서 추기경이 관람 도중 나가는 사태가 발생할 만큼 영화에 불편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쥬리아가 유배를 가게 된 동기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쥬리아의 성녀로서의 이미지가 훼손된 것이 원인이라 지적했다. 흥행을 위해 외설적인 묘사를 시도한 것이 오히려 흥행에 악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사진33, 34)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 도꾸가와 이에야스 역의 허장강과 쥬리아 역의 신숙 야심차게 제작한 작품의 부진으로 타격을 입은 그는 10년 정도 합동영화사와 한진흥업, 남아진흥공사에서 부사장으로 있으며 극장업과 영화제작에 대한 자문과 기획 활동을 했다. 극장업과 수입, 제작을 아우르며 폭넓게 활동한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제작사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1986년 다시 다남흥업을 설립한다. 1992년까지 <프리지스 오너 Prizzi’s Honor>(존 휴스턴, 1985)와 같은 흥행작을 수입했으며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 1989)를 비롯하여 6편의 작품을 제작했다. <프리지스 오너>는 1986년 9월 다남흥업이 수입하여 단성사에서 개봉한 작품이다. 당시 신문에 의하면(《매일경제》 1986년 8월 13일 9면) 다남흥업은 <프리지스 오너>의 사전제작단계에서 수입을 결정해 저렴한 가격에 좋은 영화를 수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35, 사진36) <프리지스 오너 Prizzi’s Honor>(존 휴스턴, 1985) 개봉 당일. 종로 극장 단성사 앞의 풍경으로 관객들이 표를 사기 위해 극장 앞에 길게 줄 서 있다. 단관 개봉관 시절에는 인기작의 경우 영화표를 사기 위해 극장 앞에 관객들이 길게 줄지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제작자들은 이것 또한 광고라 생각하고 일부러 줄을 대로변으로 세우거나 티켓박스를 조금 늦게 열기도 했다. 1989년에 제작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는 작가 이문열의 요구에 따라 원작료를 러닝개런티로 선점하고, 베니스영화제와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당시 최고의 인기 배우 강수연을 캐스팅해, 영화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로케이션 촬영한 야심작이었다. (사진37, 38)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 1989) 홍보사진 이 작품은 음력설이었던 개봉일, 한파에도 불구하고 국도극장에서 을지로까지 줄을 선 관객들로 전회 매진을 기록하며 극장 문을 열었다. 31만이 넘는 관객이 들어 그해 방화 3번째 흥행작이 된다. 그리고 1990년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과 기획상 등 7개 부문을 수상해 흥행은 물론 작품성까지 인정받는 영화가 된다. 그동안 그가 제작한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등 흥행성과 작품성을 만족시키고자 큰 투자를 감행했던 작품들이 기대에 못 미쳤으나 드디어 만족스러운 성과를 낸 작품이 나온 것이다. 그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 1989)의 성공 이후 소품 두 어 편을 제작한 뒤 40년 가까이 몸담은 영화계를 은퇴한다. 무일푼 단신으로 월남했지만 빠른 판단과 추진력, 도전정신을 통해 영화계에 족적을 남긴 그의 다이나믹한 인생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2012년 원로영화인 구술에서 좀 더 깊이 있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예라이샹 >이라는 영화는 기묘한 구석이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조세영( 신성일 )이 긴급하게 도피하고 있다. 4.19. 혁명의 시간이다. 세영은 난희( 문정숙 )의 집으로 들어간다. 난희는 세영을 모르지만 당시의 정치적 저항에 공감하는 그녀는 오른손을 다친 세영을 의사를 불러 와 치료해준다. 이러한 도입부는 정치적 긴급 상황이 로맨스의 조건이 되는 다른 해방 이후 영화들에 대한 기억을 불러온다. 예컨대 대표적인 포스트 해방 영화 < 자유만세 >(1946)도 이렇게 시작하고 끝난다. “일제하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지하공작을 하던 전창근이 어느 날 일경에게 쫓기다가 총을 맞고 급한 김에 아무 집에나 뛰어 들어가 숨게 되었다. 간호원인 그 집 딸 황려희가 그를 숨겨주어 위기에서 구출된다. 두 사람은 어느덧 사랑을 느꼈지만 전창근은 조국광복에 바친 몸이기에 미처 사랑도 외면해야만 했다. 그런 어느 날 그들이 일경에게 발각된다. 악착같은 일경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조국광복의 날을 눈앞에 두고 장렬하게 죽어간다.” 배경은 이렇듯 1960년의 4.19이고, 세영과 난희의 만남도 혁명의 시간 속에서 배태되었으나 < 예라이샹 >이 사회와 개인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은 물론 매우 다르다. 우선 세영과 난희는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다기보다 난희는 세영을 극진하게 간호하고, 세영은 난희에 감사와 애정을 가지게 된다. 위의 < 자유만세 >와는 달리 세영은 난희를 조국을 위해 외면하지는 않는다. 이들의 계층적 위치가 일차로 문제로 등장한다. 난희는 바 (bar)걸이고 세영은 명문 법대 4학년이라 고시를 앞두고 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이 계층의 문제가 내러티브의 쟁투 지점은 아니다. 솜씨 좋은 감독이자 흥행사인 정창화 가 조각해내는 긴급 상황 속의 남녀, 세영과 난희에겐 풀어야 할 다른 숙제가 있다. 그것은 이 혁명의 시간과 어긋나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 상해에서 일어났던 모종의 사건이다. 이 상해의 시간과 현재 (1960)의 시간의 중첩이 일어나는 시점은 영화가 공개되는 1966년쯤이다. 그 사이 1961.5.16이 있었으나 영화는 그 사건을 부재시킨다. 동시대적 이벤트를 서사의 의식 안에 매립하고, < 예라이샹 >은 과거 상해 조직 세계의 어떤 치명적 문제를, 현재에 간섭하는 역사의 트라우마로 삼고 예의 바걸과 재즈 밴드를 클럽에 소재시켜 ‘Moritat’을 연주하게 한다. 여기서 영화는 역사와 한 시기(period)를 전면화하는 형식과 이별하고, 가정과 세계의 변증법인 멜로드라마와도 작별하여 필름 누아르의 뒤틀린 어법과 미장센으로 우리를 이끈다. 밤의 거리, 밤의 여자인 팜므파탈, 성적 도착, 남성적 힘과 권력의 간극, 폭력의 법, 방관하거나 지나치게 참견하는 국가의 법, 음모, 돈의 어지러운 누빔이 만화경처럼 펼쳐지는 필름 누아르 말이다. 그래서 <예라이샹>은 상해의 프랑스 조계 지역에 주로 거주하며 독립 운동가로서 그리고 문예활동가로서 살아가던 사람들보다는, 당시 가난에 못 이겨 매매춘과 아편 판매를 하던 유민들도 어느 정도 의식하지만, 오히려 <상해에서 온 여인>과 같은 1948년 오손 웰즈의 필름 누아르를 인용하고 있는 듯하다. 웨스턴을 참조한 대륙 활극, 액션 장르, 한홍 합작을 열었던 장르 영화의 대가의 참조체계를 보자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필름 누아르가 불려옴으로써 영화는 상해의 밤과 더불어 미국의 밤을 서울의 밤거리에 이중인화시킨다. 역사적 파편과 당대 긴급성의 선택적 배치 (4.19의 현존과 5.16의 부재), 장르적 관행이 <예라이샹>을 이질적으로 횡단하고 있다. 이것이 기묘한 복합성을 이루는 야래향의 “리좀” 들이다. 야래향의 향기 따위는 이 영화의 관심이 아니다. 환원되지 않는 이질성들이 걸출한 장르 영화 감독이 만든 대중 영화의 데칼코마니적 비/재현 안에서 표출된다. 리좀들이 만들어내는 지도 그리기 (cartography)는 해결되지 않은 도착적인 근대의 기억과 트라우마가 행위자의 연속적 수행에 의해 재연되며 재앙과 비극이 재생산된다. 가까운 5.16을 오히려 부재시키고, 상해를 소환하는 문제는 잠깐 괄호 속에 넣고, 기묘한 시간의 중첩 부분으로 돌아가 보자. < 예라이샹 >이라는 제목 자체가 대만 가수 덩리쥔의 노래 <夜?香 yelai xi?ng>( 문근영 이 < 댄서의 순정 >에서 번안해 불렀던)를 연상하게 하는 것처럼, 영화는 지리적 상상력의 배후를 서울의 클럽 풍경을 매개해 중국 상해로 끌고 간다. 서울의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명곡 ‘Moritat’는 “미국의 밤”으로의 접속이다. 시간과 공간의 이과 같은 전치적 중첩은 위에서 이야기한 필름 누아르 인용과 더불어, 동시대적 한국 영화의 지형에서 보면 정창화 감독 자신이 성취한 “대륙 활극”과도 접속한다. 대륙을 전면적으로 배경화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 이만희의 대륙 활극이 엮어내는 비대칭적 “역사적 쌍” (강점기의 민족주의와 박정희 체제의 국가주의라는 다른 시대적 요구들을 배치해 비대칭성을 강조하는 < 쇠사슬을 끊어라 >)을 이 영화에 소급 적용해보면 상해의 1930년대와 남한의 1960년대가 어둠의 세계로 겹쳐지고, 거기에 재즈와 댄스가 있는 클럽 문화로 불야성을 이루는 미국의 밤이 삼중 노출된다. 밤에 도착하는 꽃향기라는 야래향을 빌어 말하자면, 밤들이 도착한다. 상해와 남한의 혁명의 어둠 , 그리고 미국의 밤. 다문화라면 다문화이고, 한국 영화가 불러오는 세계라면 세계인데 거기에 역사성과 정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와 정치가 표준어가 아닌 다른 방식의 “은어”, 필름 누아르를 통해 형상화되기 때문에 다른 읽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 은어는 성적 변이와 청산되지 않는 과거의 비밀을 말하기 위한 방식이다. 은어와 더불어 방언이 있다. 필름 누아르의 번역으로서의 방언인 코리안 누아르는 선취된 근대의 밤인 상해를 아메리칸 필름 누아르의 형식으로 말한다. 영화의 도입부는 혼자 칵테일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여자 난희( 문정숙 )의 미디엄 숏으로 거기에 제작 등 크레딧이 올라간다. 팜므파탈이 소개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바걸과 엘리트 남자 대학생의 결합은 사실 큰 반대에 부딪히지 않는다. 난희와 세영, 두 사람 모두에게 부모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시국이 어수선하기도 하여 세영의 지도교수도 별달리 이들의 관계를 비판하지 않는다. 관계의 문제는 오히려 예의 “상해” 커넥션에서 발생한다. 난희의 단골고객들인 박사장 ( 최남현 )과 허상무( 허장강 )은 난희에게 도착적인 관계를 강요한 사람들인데, 4.19로 가정교사를 하던 집이 불타버려 새로운 일자리를 찾던 세영은 박사장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설상가상 박사장과 허상무는 상해에서 난희의 아버지를 죽이고 재산을 빼앗았다. 박사장은 어머니를 겁탈해 딸까지 낳았는데 가정교사로 들어간 세영을 흠모하는 박사장의 큰딸이 바로 박사장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난희의 이복자매다. 물론 난희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상해에서 아버지의 옛 친구가 “중공”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돌아와 이 비밀을 알려주는데, 그는 박과 허에게 살해당한다. 난희는 클럽에서 춤을 추다가 박사장을 죽여 복수한다. 그녀는 감옥에 갇히고 세영과 난희의 이복 자매가 그녀를 찾아온다. 복수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복수를 통한 정의의 구현이라기보다는, 허망한 정서가 만연하지만 젊은 세대의 패배는 아니다. 팜므파탈적 여성의 소란한 출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4.19를 거친 새로운 젊은 남성 엘리트가 처한 어떤 국면, 함정, 유혹, 필요 등을 포착한다. 그가 법대생이라는 것은 우연한 설정만은 아니다. 법을 이해해야 하는 사람이 목도하고 관계하게 된 상해에서 서울에 이르는,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폭력적 (불)법의 존속. 난희는 그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하고, 체험하게 하지만, 몸으로 그 사태를 받아치고 끊어내는 것은 그녀 자신이다. 아버지가 부재한 세대, 5.16은 괄호 부호 속에 여전히 은밀하게 숨어 있고 어머니 대신 팜므파탈적 여성이 과거의 매듭을 끊고 간다. 5.16의 텍스트 속 은닉과 더불어 구조화된 부재는 일제 강점기에 대한 역사적 언급이나 참조다. 필름 느와르, 재즈의 문화적 형식을 빌어 미국적 모더니티는 텍스트의 형식으로 통합되어 있고, 상해는 두 명의 악당 에이전시를 통해 불려오나 한국 근대사에서 상해가 놓여있는 자리, 맥락은 일제 강점기이나 이 텍스트에는 그런 컨텍스트적 의식이 없다. 증후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언급했듯이 대륙활극, 한홍합작 등을 이루어낸 감독의 지정학적 역사 판타지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나이트 클럽이 끝날 때를 기다려 난희를 찾아온 세영과 밤길을 걸어갈 때 난희가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이전 이들은 고통을 겪었다. 세영의 표정을 살피며 난희가 “사랑해”라고 말하고 거리는 어둠 속에 있고 그들은 계속 걷는다. 표정과 언어와 발걸음, 카메라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여성의 정동을 미묘하고 가슴 저리게 전한다. 한국영화사에서 드문 장면이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어두운 골목길에서 움직이며 전달할 수 있는 여성의 자리, 여배우 문정숙 의 탁월한 연기의 성취는, 순간적이나마 “세계를 안에서부터 밖으로, 밖에서부터 안으로 ” (아리프 딜릭) 읽는 하이데거의 월딩의 새로운 자리이며 열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