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뉴먼츠 맨 : 세기의 작전
- 감독
- 조지 클루니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조지 클루니, 맷 데이먼, 케이트 블란쳇, 장 뒤자르댕, 빌 머레이, 존 굿맨, 휴 보네빌, 밥 바라반
< 모어 >는 무용수, 드랙퀸 예술가, 뮤지컬 배우, 에세이스트로 활동 중인 모지민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다큐멘터리이다. 영화의 제목 ‘모어’는 모지민의 예명으로 ‘more(조금 더)’와 ‘毛漁(털 난 물고기)’를 함의한다. ‘more’는 화려하고 과잉된 드랙퀸 미학을 지시할 수도 있지만, 트랜스젠더인 그를 향한 사회의 잔인한 편견에 의해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꿈과 욕망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육지에서도 물에서도 이질적인 ‘털 난 물고기’처럼 관습적으로 주어진 자리를 넘어서 그 이상의 다른 자리를 찾아 나선 비규범적 존재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세상 사람들은 ‘털 난 물고기’에게 ‘털’이 살아가는 데 무슨 소용이냐고 존재 이유를 따져 물으며 괴롭히지만, 모지민은 오히려 그 털의 움직임과 방향, 그리고 길이와 색을 다양하게 만들며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실천해오고 있다. 영화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발레의 길에서 이탈한, 그럼에도 예술가로서 살아남은 모지민의 삶을 예찬한다. 발레 전공으로 예고를 나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발레리노가 아닌 발레리나가 되고 싶던 모지민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그 길에서 이탈한다. 여성성을 버리라고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무용계에서 모지민은 예술가로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발레리나라는 최선의 선택지가 있었지만 세상은 그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드랙퀸 공연은 그 대체제였다. 그래서 드랙퀸 공연은 그에게 애증의 대상이다. 그가 발레리나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비극, 그럼에도 춤과 공연이라는 예술적이고 신체적인 표현에 대한 갈망을 채워준 환희의 무대, 그리고 클럽에 놀러 온 관중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엔터테이너로서 감정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노고. 그에게 드랙퀸 공연은 복합적인 대상이다. 영화 <모어>는 드랙퀸으로서의 모지민에 대한 매혹을 숨기지 않는다. 클럽에서 드랙퀸 공연을 하고, 뮤지컬 오디션을 보고, 애인에 대한 애정과 소소한 갈등을 드러내고, 농촌지역에 사는 부모님을 방문하는 등 모지민의 일상이 스케치 되는 가운데 화려한 쇼가 계속된다. ‘쇼는 계속 된다’는 뮤지컬 장르의 정언명령에 의해서 말이다. 서울과 뉴욕 같은 대도시 한복판에서, 부모님의 살고 계시는 고향의 논밭 사이에서, 아버지가 운전하는 경운기 위에서, 황량한 항구에서, 눈 내리는 산 속에서 그는 화려한 분장과 의상을 더한 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드랙퀸은 기본적으로 과잉의 미학이다. 여성성의 인위적 과장은 기존 사회에서 규범화된 여성성이 원래 얼마나 과장되고 인위적인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정해진 자리와 규범을 초과하는 일탈의 쾌락을 공유하고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전시한다. 드랙퀸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무언가를 ‘더(more)’ 덧붙이는 방식으로 모지민을 보여준다. <모어>는 미국의 드랙 리얼리티 경연쇼 <루폴의 드랙 레이스>(2009~현재)나 드랙 문화를 소재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포즈>(2018~2021)에 나올 법한 프로페셔널하고 미학적인 드랙 공연을 삽입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과장되고 장식적인 아름다운 드랙쇼 만큼이나 집중할 것은 덧붙이기보다는 덜어냄을 통해 만들어내는 공연과 마음들이다. 영화는 자주 삽입되는 야외 공간에서의 드랙쇼 외에 실내의 어두운 무대에서 나체로 춤을 추는 모지민의 공연을 길게 보여준다. 이 공연에서 모지민은 어떤 분장이나 의상도 없이 춤을 춘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모지민이 큰 갈등과 어려움 없이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지냈다고 과거를 기억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어른들은 알 수 없거나 눈치 채도 크게 의미두지 않았던 따돌림과 폭력이 있었다. 나체로 춤을 추는 한 장면에서 모지민의 뒤로 중학교 시절 친구로 은유되는 댄서가 어둠 속에서 등장해 그의 목을 조른다. 그는 강렬한 분장을 하고 있다. 어른들이 아름답게 추억하는 이면에는 어린 모지민의 혼란, 고통, 분노, 좌절이 공존했다. 영화는 그가 감당했어야 할 어두운 이면이 무엇이었는지 깊고 상세하기 묘사하기 보다는 춤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사실 비수술 트랜스젠더로서 자신의 나체를 보여주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모지민은 자신의 신체가 표현하는 주체이자 오브제이기도한 예술가로서 자신과 세계와의 복잡한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표현과 장식을 덜어내고 어두운 이면을 보여줄 것을 선택한다. 더함과 덜어냄, 넘침과 모자람, 화려함과 단순함 모두 모지민이기 때문이다. 장난스럽고 인위적이고 과장된 독백의 내레이션과 대화하듯 자연스러운 내레이션이 교차해 나오지만 둘 모두 모지민의 목소리인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카메라는 분명 뮤지컬적인 드랙의 화려한 스펙터클에 매혹되어있고 그것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 동기임을 숨기지 않는다. 동시에 모지민이라는 예술가가 표현하고 싶은 어둡고 미니멀한 춤과 침잠되어 있던 마음을 표현할 자유로운 무대를 펼쳐주기도 한다. 극단의 표현들은 대립적이지 않고 서로를 밀고 당긴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보여주어야 하는 스크린과 다 보여줄 수 없는 스크린 밖 현실이 그 경계를 끊임없이 이동시킨다. 감독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인 모지민은 예술가 대 예술가로서 끊임없이 협상을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큐멘터리는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극영화보다 얇고 투과성도 높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거나, 완성된 다큐멘터리가 단순히 현실을 변화시키는 식의 일방향으로만 힘이 흐르지는 않는다. <모어>는 영화와 현실, 보고 싶은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것, 보여줄 만한 것과 끝끝내 보여주지 못한 것 사이의 얇은 경계막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파열되고 움직이고 있는 현장을 포착해 낸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거의 흠 잡을 데 없이 잘 만들었는데도 대중과 잘 만나지 못하고 비평적으로도 만족스러운 반응을 얻지 못하는 영화가 있다. 배창호 감독의 < 꿈 >(1990)이 그런 경우였다. 화면의 격이라고 할까, 등장인물과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에 미묘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형식의 품격이 뛰어난데, 그만큼 주인공들과 격정적인 동일시를 느낄 관객의 처지가 보장되지 않는 것이어서, 관객은 영화가 잘난 체한다고 느끼거나 심심하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비평적 평가라도 올곧은 지지를 보내는 쪽이 있어서 그 영화가 외롭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이 좋았을 텐데 대체로 저널리즘의 반응은 잘 만들었으나 흥행성이 약하다는 정도의 입장으로 정리되고 말았다. 배창호 감독은 < 깊고 푸른 밤 >의 역대급 흥행 이후 자기 예술세계에 대한 자의식이 깊어지면서 박력 있는 호흡의 대중영화 대신 롱테이크의 미감과 여백을 최대한 살린 < 황진이 >(1986)로 연출 색깔을 완전히 바꾸는 모험을 걸었다. 그 영화를 극장에서 봤던 당시의 충격과 흥분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영화의 예술적 가치에 비해 반응은 매우 박한 편이었다. 흥행사로 정점에 오른 감독이 보인 예술적 만용의 결과로 비판받은 <황진이>의 상영 이후 배창호는 긴 호흡의 영상미는 살리되 낭만적 사랑의 관념을 서민적 삶의 일상에 녹인 < 기쁜 우리 젊은 날 >을 연출했고 기성 영화에선 잘 다루지 않았던 부성의 책임감을 전통적인 가족제도와 이웃 관계에 대한 향수를 섞어 따뜻하게 묘사함으로써 다시 한 번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했다. < 안녕하세요 하나님 >은 < 고래사냥 >과 비슷한 소재를 새로운 형식에 담으려는 시도였고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는데 그다음 작품 < 꿈 >은 설화적 구성을 현대적인 형식으로 담아내려는 배창호의 예술적 야심이 거의 완벽하게 구현된 영화였다. 이광수의 원작이 바탕인 < 꿈 >은 신상옥 감독도 만들었지만 배창호 의 이 영화는 신상옥의 것과 하나도 닮지 않았다. 당시 충무로에서 가장 탄탄한 영화사였던 태흥영화사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만들어진 흔적이 화면 곳곳에 드러나는 이 영화는 그때까지 충무로가 아직 헤어나지 못했던 기술적 낙후성을 훌쩍 뛰어넘었으며 상당수 장면의 이미지들은 아날로그적 장인정신으로 충만하다. 승려 조신( 안성기 )이 자신이 수도하는 절에 온 달례( 황신혜 )의 미모에 반해 파계를 감수하고 달례를 좇아 속세로 내려오면서 펼쳐지는 이 영화의 내용은 두 사람이 평생 달례의 정혼자에게 쫓기면서 자신들의 가정을 꾸려 제대로 살려 했으나 운명의 도움을 받지 못해 비극으로 귀결되는 결말로 이어지는데 그 모든 것이 제목 그대로 한갓 꿈이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야기의 내용이 꿈이라는 걸 전제하고 시작하는 소설과 달리 이 영화는 현실과 꿈의 경계를 모호하게 해놓고 주인공 조신의 깨달음을 꿈속에서 깨어난 결과인 것에 국한시키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깜짝 놀랄 만한 장면들이 많은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후반부에 아들을 산에 묻고 조신과 달례가 황폐한 골짜기를 걸어 돌아오는 장면이다. 자신들의 욕망을 좇았으나 그 과보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가혹한 상황 앞에서 마냥 순하기만 했던 조신은 거의 실성하기 직전의 상태가 된다. 그가 달례를 향해 미친 사람처럼 돌변한 채 다가가자 달례는 “이러지 마. 나도 힘들어”라고 말한다. 대체로 과묵했던 달례와 조신의 관계에서 가장 격정적이고 솔직하며 직설적인 이 대사가 주는 낯선 어감이 이물감을 주는데 화면에는 그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 없는 귀기 어린 아름다움과 서늘함으로 가득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것과 대비되는 것은 영화 초반 조신의 동료가 ‘두견새가 피를 토하는 것 같은’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감탄했던 서라벌 최고의 미모를 지닌 달례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절의 큰 스님이 철쭉꽃을 따서 자신에게 인사하는 달례에게 줄 때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조신에게 화면이 커트되고 카메라가 그를 향해 서서히 움직이면 두견새에 비유된 여인에게 안기는 한 송이 철쭉이고 싶은 조신의 심정과 꽃을 딴다는 행위에 조응하는 파계에의 유혹 등의 감정이 연상되면서 절묘한 영화적 호흡이 무엇인지 실감하게 만든다. 욕망의 과실을 따기 전의 설레는 감정과 그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았을 때 받는 잔인한 과보가 대비되는 과정을 아름다운 촬영, 조명, 연기, 편집으로 섬세하게 뒷받침한 이 영화는 그 섬세함의 독자성을 굳이 헤아릴 이유가 없는 극장관람의 무심한 관성 앞에서 덧없이 무너졌다. 그런 재앙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불멸성은 길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2015년 봄, 아피찻퐁 위라세타쿨은 새 영화 < 찬란함의 무덤 Cemetery of Splendour >을 완성했고 칸 영화제는 다시 한 번 그의 영화를 지중해 곁으로 초청했다.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찬란함의 무덤>의 상영이 확정되었을 때, 그 소식을 한국에서 누구보다 먼저 접하고, 누구보다도 더 기뻐했던 곳이 있었다. 그 곳의 이름은 <찬란함의 무덤> 엔딩 크레딧 공동제작자 리스트에서 발견할 수 있다. ‘Asian Arts Theatre(South Korea)’ - 아시아예술극장. <찬란함의 무덤>의 아시아 프리미어 상영이 열린 곳은 부산도 블라디보스토크도 아닌 광주에 위치한 아시아예술극장이었다. 10월의 해운대가 아니라 9월 광주에서, 어떤 이유로 아피찻퐁과 차이밍량이 함께 관객들 앞에서 담소를 나누게 되었는지. 아직은 생소한 이름인 아시아예술극장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 그곳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먼저 아시아예술극장이라는 이름에 대해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아시아’라는 명칭도 가볍지 않은 어휘인데 거기에 무려 ‘예술’이라는 단어까지 극장 이름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아시아예술극장의 정식 명칭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아시아예술극장이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라는 기관에 소속되어 있는 극장이라는 것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광주광역시, 옛 전남도청 주변 부지에 새롭게 문을 연 공간으로, 정부의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계획” 추진 결과로 만들어진 복합 문화공간이다(‘아시아’의 ‘문화중심’이라는 프레임은 이미 10여 년 전에 규정된 것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는 문화정보원, 문화창조원 등 다섯 개의 세부 기관이 있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예술극장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기관의 성격을 조금 거칠게 설명하자면 문화정보원은 아카이빙과 교육, 문화창조원은 전시, 예술극장은 공연을 만들고 선보이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전당의 보도자료를 보면, 아시아예술극장이 “창·제작 중심의 아시아 동시대 공연예술센터”로 소개되어있다. “창·제작 중심”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예술극장은 이미 완성된 작품들을 초대하여 보여주는 것보다 직접 아티스트를 섭외하고 작품을 제작하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아티스트와 작업하고, 어떤 작품을 만들려고 하는 것인가. 이것에 대한 단서는 위 보도자료에서 “아시아 동시대 공연예술”이라는 문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소위 ‘컨템퍼러리 아트’라고 불리는 작품들. ‘동시대 예술’이라는 것이 본디 형식적인 장르나 규범에서 벗어나는 시도들을 일컬어 왔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예술인가에 대해 정확히 설명하는 것 자체가 태생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예술극장 ‘아워 마스터’ 프로그램을 큐레이팅 한(‘국제 공연예술계의 대모’라 불리는) 프리 라이젠(Frie Leysen)의 풀이를 참고하자면 그것은 “우리 동시대 세계를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예술이며, 동시대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예술가가 “형식적인 면에서 새로운 소통언어”를 사용하는 작업이다. < 찬란함의 무덤 >(아피찻퐁 위라세타쿨) <그의 죽음은 의뭉스럽다>(라야 마틴) 이쯤에서 아시아예술극장 개관 페스티벌 라인업을 한 번 살펴보자. (나를 포함한) 영화를 애호하는 이들에게는 차이밍량, 아피찻퐁 위라세타쿨, 라야 마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등의 익숙한 이름이 아무래도 먼저 눈에 들어오기 쉬울 것 같다. 기본적으로 공연예술을 선보이는 곳인 아시아예술극장에서 영화를 만드는 이들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술극장이 만들고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경계 짓기’에 대해 사유하고자 하는 ‘동시대 예술’이기 때문이다. 개관 페스티벌을 준비하면서, 예술극장은 기존의 예술 장르 구분에 구애받지 않은 채 아시아의 동시대성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아시아 작가들을 찾아다녔고 그 결과 차이밍량, 아피찻퐁 위라세타쿨 등의 영화감독들과도 접촉하게 되었다. 아피찻퐁의 경우, 그는 이미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전시 경력을 통해 현대 미술가로 이름을 널리 알리는 등 영화 이외의 매체를 통해서도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 오고 있었다. 그가 몇 년 전부터 새롭게 준비하던 영화의 아이디어(“전쟁과 사랑, 꿈과 역사가 어우러지는 정교한 미로”, “열병에 걸린” 태국 사회에 대한 반추)는 예술극장의 비전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고, 이에 아시아예술극장은 영화의 제작자로 참여하며 그에게 영화의 내용과 연결되는 공연을 만들어 볼 것을 제안했었다. 예술극장 개관 페스티벌에서 공개된, 영화 < 찬란함의 무덤 >과 공연 <열병의 방>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아피찻퐁은 예술극장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게 영화와 공연은 같은 개념이다… 다만 새로운 장치들, 새로운 규칙으로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상영 프로그램 참가를 위해 전주국제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 등 이미 여러 차례 한국을 찾은 바 있는 라야 마틴은, 이번 예술극장 개관 페스티벌을 통해 영화가 아닌 공연 만들기에 도전한다. 그는 필리핀 코딜레라라는 산악 지역에서 반정부 투쟁을 이끌었던 그 지역의 ‘영웅’, 페드로 둥곡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배경으로 한 공연 <그의 죽음은 의뭉스럽다>를 만들었다. 라야 마틴의 기존 작품 대부분은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형태였지만, 영화라는 틀 안에서 그는 이미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통해 필리핀의 역사 그리고 영화의 역사에 대해 발언해 왔다. 그랬던 그가, < 오토히스토리아 >(2007)에서 역사적 인물의 재현 모델을 교묘히 비틀어보았던 라야 마틴이, 이번에는 그것을 무대 위에서 어떻게 다시 변주해 낼지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또한 개관 페스티벌 라인업 중에서, 올해 베니스 영화제 공식 경쟁부문에 초청된 자오량 감독의 설치-영상 작업 <자오량 프로젝트>도 씨네필이라면 관심 가져볼 만한 프로그램이다. 아시아예술극장은 공연을 올리고 이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고자 하는 기업체가 아니라 국가의 기금으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이다. 국가 차원에서 상당한 규모의 자금을 들여, 다른 장르도 아닌 ‘동시대 예술’을 제작하고 전파하는 경우는 외국에서도 찾아보기 매우 힘든 사례다. 작품 제작을 위해 연락을 주고받았던 다른 나라의 작가들, 제작 실무 담당자들은 한결같이 아시아예술극장의 존재를 부러워했다. 전후 맥락이 어찌 되었든, 한국은 거대한 규모의 컨템퍼러리 아트센터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 기관이 최초의 비전대로 “아시아의 예술이란 무엇인지, 동시대 예술이란 무엇인지, 이런 질문들을 포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왜 이런 질문들이 필요한지”에 대해 사유하는 작품들을 꾸준히 제작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러한 작품들은 아피찻퐁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공연의 형태를 띨 수도 있고, 영화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극장의 비전이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페스티벌이 지속되어, 동시대성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영화 작가들이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