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라빛 새
- 감독
- 오광록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오광록, 강민아
박찬욱 감독의 11번째 장편영화 < 헤어질 결심 >(2022)의 제목은 주체의 ‘의지’를 강조한다. 제목의 주체는 이별을 방해하는 것에 대항해 자기 의지를 다지고 필요한 전략을 실행하고 목표에 도달하고자 한다. 제목만 보면 이 영화는 낭만적인 주체의 세계 대 자아 혹은 자율적인 이성 대 (무)의식적인 욕망 간의 투쟁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의 실체는 정반대다. 인간중심적인 주체의 의지를 강조한 이 제목은 반전을 위한 ‘미끼’다. 실제로 영화가 강조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들 사이의 정서적이고 투쟁적인 관계를 넘어,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무생물, 인공과 자연, 물질과 비물질, 감정과 행위, 데이터와 의미, 사건과 시스템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행위자들(actors)의 복잡한 배치와 네트워크이다. 그렇기에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이 영화와 가장 닮은꼴을 찾아본다면 < 파란만장 >(2011, 33분)일 수 있다. 이정현과 오광록 주연의 <파란만장>은 KT의 제작지원을 받아 미디어아트 작가인 박찬경과 함께 작업한 단편으로 당시 신형이었던 아이폰4로만 촬영을 해서 극장 개봉을 했다. 이 영화는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던 시점에 전문가적 역량을 어디까지 구현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제작된 캠페인 영화였다. 두 감독은 각종 취미 및 생활기계가 하나의 기기 안에 통합돼 있으면서도 휴대성과 편재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개별 기기들의 고성능 라인에 근접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있던 스마트폰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귀신의 시공간에 접속할 수 있는 영매의 역량으로 은유화 한다. 즉 비인간 기계와 초월적인 영적 존재 사이의 경계를 허물면서 이질적인 것들을 채널링하는 그들의 공통역량을 조명한다. <헤어질 결심>은 짐짓 ‘나’의 정체성을 허물 정도로 깊은 사랑에 빠진 두 사람, 서래(탕웨이)와 해준(박해일)의 파괴적 관계에 집중하는 전통적인 멜로드라마를 가장한다. 그러나 자아와 타자의 경계와 정체성의 “붕괴”는 인간들 사이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시대 행위자들의 경계는 어떤 면에서 이미 ‘나’ 아닌 것에 매개되고 ‘지금-여기’ 아닌 시공간에 연결되어 있기에 이미 붕괴되어 있다. 영화는 ‘사랑’이라는 근대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감정언어로 최종적으로 번역되기 이전의 현상, 즉 다층적으로 배치되고 네트워크 되어 있는 행위자들과 그들이 모이고 교차하는 마디점들(nodes)의 감각적 민족지학에 더 관심이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의지(의식의 의미화)와 감정(정동의 의미화)이 있기 전의 사건들을 관찰한다. 경찰인 해준이 졸음 방지를 위해 동료인 수완(고경표)과 통화를 하며 밤 운전을 하는 장면에 나온 대사는 인간주체의 의지를 먼저 앞세우는 습관에서 벗어난 인과관계의 전복을 보여준다. 주체로서의 ‘너랑 나랑’을 강조하는 수완에게 해준은 “잠복해서 잠 부족이 아니라 잠이 안 와서 잠복근무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영화는 이러한 경계의 무너짐과 네트워크 현상을 강조하기 위해 의인화를 탈피한 비인간 중심의 응시를 곳곳에 배치하고 이질적 시공간을 오고가며 낯설게 사건들을 연결하는 교차편집 기술을 부각시킨다. 특히 시체와 휴대폰부터 디지털 워치, 소프트웨어, 유튜브 플랫폼, 오늘날의 영화체계, 산과 바다, 폭력적이고 잔인한 이민 체계와 가부장제까지 무생물과 비물질의 응시가 이 영화에선 탈인칭 쇼트뿐 아니라 시점 쇼트로도 작동한다. 그래서 영화는 두 사람의 관계와 감정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영화 전반적으로 매우 소란스럽다(내가 끝내 이 영화에 몰입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뿐 아니라 다종다양한 무생물 행위자들도 네트워크에 연결된 자기의 행위성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시끌벅적한 눈들은 일종의 평등함을 부여받는다. ‘인간중심의 좌표를 벗어난 주체의 해체, 비인간적 주관성은 인간도 물질적이고 창발적인 세계의 질료 중 하나가 되게 만든다.’ (스테이시 알라이모) 비인간 시점은 영화사에서 여러 감독들에 의해 다양한 목적을 갖고 사용되어 왔다. 동물, 유령, 신, 사물들, 자연 풍경, 기계와 시스템은 비인간 시점을 표현해온 대표적 행위자들이다. 이 비인간-눈들은 장르적이든 그렇지 않든 대개는 친밀하고 낯선 기이함(the uncanny)의 느낌을 통해 자아와 타자, 내부와 외부,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흔들면서 불안정성을 만드는 데 기여해왔다. 비인간 시점의 미학적 실천은 최근 들어 한층 빈번해지고 있는데 주요하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하나는 기후위기에 대한 발본적 성찰로 인간중심성을 해체하려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디지털화로 인한 물질적인 것의 재규정이다. <헤어질 결심>의 비인간 시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사랑으로 번역된 것의 네트워크에는 두 사람의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인간과 비인간의 동맹이 있다. 영화는 그것을 종종 쇼트와 역쇼트를 하나의 쇼트 내에 보여주는 유사-주관적 시점으로 보여준다. 크레딧 타이틀 이후 나오는 첫 씬에선 서래의 남편인 기도수의 시체의 눈 안쪽으로부터의 응시를 보여준다. 시체 내부로부터의 시점으로 인해 눈동자의 실핏줄과 망막 위를 기어 다니는 클로즈업된 개미가 보인다. 그리고 저 멀리 역쇼트에 해당하는 암벽을 오르는 해준과 수완이 한 프레임에 담기게 된다. 쇼트에 해당하는 보는 주체와 역쇼트에 해당하는 보이는 대상이 한 프레임 안에 담긴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적인 주관적 시점이 아니다. 시체를 ‘보고 있는 주체’로 설정할 수 없기 때문에 영화는 보고 기록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기계와 같은 시스템으로 표현할 뿐이다. 해준이 그 시체를 보지만 시체 또한 해준을 보고 있다. 그 눈은 살인의 증거를 보았던 눈이기도 하고 살아있을 적에 서래를 폭력적으로 소유하고 통제하던 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눈이 현재 어떤 인간적인 욕망과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표현은 특히 병원의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띄워진 서래 몸의 멍든 사진을 보며 해준이 마우스로 이미지를 확대해 픽셀이 가시화될 때, 휴대폰으로 서래와 문자를 나누거나 녹음된 음성파일을 들을 때 두드러진다. 화면 내부로부터의 시선, 즉 시스템의 시선은 해준과 기계가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해준과 서래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이포와 부산에 떨어져 있을 때, 해준은 밤에 잠이 오지 않자 서래와 문자를 주고받는다. 서로만 아는 방식으로 농담을 할 정도로 관계가 발전해 가는 상황에서 서래가 문자를 쓰고 있는 중임을 표시하는 “…”는 해준의 마음을 동요시킨다. 그것은 기대와 설레임 등으로 언어화할 수 있다. 이 순간 카메라는 다시 휴대폰 내부로부터의 시선을 유지하며 스크린에 표시된 “…”와 휴대폰 스크린을 보고 있는 해준의 얼굴을 디졸브 시킨다. 해준은 “…”의 표현(농도, 깜박임, 지속시간 등)을 포함한 휴대폰의 문자 시스템과 동맹 중이다. 서래와 해준이 서로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번역기와 녹음기를 사용하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번역기 사용으로 인해 둘의 표현은 문어체에 가깝거나 직설적이게 되고, 심지어 오역을 만들어 낸다. ‘마음’은 ‘심장’으로 번역된다. 사극 드라마를 통해 배운 서래의 한국어는 고풍스럽다. 해준은 서래가 ‘꼿꼿해서’ 좋다고 고백한다. 소프트웨어와 미디어의 사용은 서래를 더 ‘꼿꼿한’ 이미지로 만들어 준다. 해준과 서래가 이포에서 재회한 후, 해준은 서래가 입은 옷의 색상에 집착한다. 그 옷은 청색인가, 녹색인가. 서래를 목격한 사람들은 동일한 드레스를 저마다 달리 증언한다. 그리고 해준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진다. 이 장면은 다분히 2015년 즈음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드레스의 색상 논란을 염두에 둔 농담이다. 당시 같은 드레스를 놓고 흰색 바탕에 금색 줄무늬로 보는 사람들과 검은색 바탕에 파란색 줄무늬로 보는 사람들로 나뉘어 뜨겁게 논쟁을 했다. 드레스의 주변 밝기가 동일한 드레스를 다르게 보이게 한 것이다. 인간은 대상만을 떼어내 색을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밝기에 맞춰 원래 색을 판별하려 한다. 뇌는 환경에 맞춰 색체보정을 하고 여러 번 보다보면 학습에 의해 색은 새로운 정보에 상관없이 고정된다. 해준은 서래를 판단함에 있어 새로운 정보가 들어올 때마다 지속적으로 조정한다. 해준은 끊임없이 정보를 찾고 주변 환경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며, 사건이 종결되기 전까지 의미는 고정되지 않은 채 열려 있어야 한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는 이상 잠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해준은 꾸준하게 정보를 잘못 읽는다(서래의 몸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운다고 착각했던 것을 생각해 봐라). 오늘날의 세상에서 정보는 쉴 틈 없이 생산되고 또한 왜곡되기 때문에 세계(사건)의 종결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서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종결하는 법을 안다. 그는 살인자다. 그는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삶마저 언제 끝낼지를 주체적으로 정하려 하는 이다. 서래는 주변 환경에 크게 휘둘리지 않고 욕망을 응시하는 이다. 그렇다고 비인간 네트워크를 거부하는 자는 아니다. 그는 오히려 자기가 갖고 있는 기기들을 목적에 맞게 이용한다. 스마트폰의 위치기록 기능을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 기능을 역으로 사용해 정보를 기록하고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든다. 시스템에는 구멍이 있다. 해준은 ‘사랑’이란 말을 직접적으로 한 적이 없지만 서래는 해준이 범행증거를 없애버리라고 한 말과 해준 자신이 붕괴되었다는 말을 ‘사랑’으로 번역한다. 해준이 정보 수집가라면 서래는 번역하는 사람이다. 해준이 미결자라면 서래는 종결자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상대적으로 꼿꼿한 사람이고, 스스로 소프트웨어 혹은 시스템이 될 줄 아는 사람이다. 서래는 해준이 멀리 바다에 던져버리라던 휴대폰 대신 스스로를 바다에 묻는다. 위치기록 소프트웨어에서 그의 위치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사랑의 네트워크에 구멍을 낸다. 이제 사건 혹은 의미화의 종결은 구멍으로서만 가능하다.
< 올드보이 >(2003)의 오프닝 시퀀스는 거두절미(去頭截尾)의 박력을 품은 하나의 이미지로 열린다. 수직의 구도로 촬영한 검은 실루엣의 물체가 위압적으로 프레임을 짓누른다. 흡사 그것은 권총을 쥐고 있는 사람의 손을 앙각으로 촬영한 쇼트로 보인다. 검은 실루엣의 손이 천천히 좌우로 움직일 때 폭발 직전까지 고조되는 사운드의 비트를 따라 카메라가 틸트 업 하면 어둠에 감싸인 얼굴이 드러난다. 이 돌연한 이미지의 형상들은 군불을 떼듯 서서히 긴장을 상승시키는 관습적인 영화 오프닝 기능을 무시한다. 정면의 클로즈업에서 왼쪽으로 카메라의 각도를 변경한 미디엄 부감 쇼트로 전환되면 이전에 보았던 이미지의 참모습이 드러난다. 그것은 강아지를 안은 성명불상 남자(오광록)의 넥타이를 주인공 오대수(최민식)가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다. 식은땀을 번들거리면서 강아지를 안은 남자가 대수의 이름을 묻는 질문에서 시간은 15년 전으로 빠르게 되감긴다. 15년 전 경찰서의 대수가 현재의 남자가 던진 질문에 대답한다. 결과적으로 영화의 첫 번째 쇼트는 남자가 건물의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매달린 순간 그의 목과 실루엣의 형상으로 보였던 대수의 단단한 그립의 조합이었음이 밝혀진다. 대수는 이 사내를 건물 바깥으로 밀어 떨어뜨리려 하면서 그를 위협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올드보이>에서 처음 보이는 것은 진실을 잔인하게 배반한다. 영화의 테마를 압축한 이 이미지로 20분 후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을 때 우리는 강아지를 안은 남자가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하고 있고, 대수는 그런 남자의 자살을 저지하려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오인의 몽타주는 처음 생긴 인식과 그것이 잘못된 인식으로 입증되는 장면들이 영화의 곳곳에 매설되어 있음을 알리는 전조라고 할 수 있다. 오프닝의 시간과 20분 뒤 다시 그 시간으로의 복귀는 남자에 대한 위협을 구제로 전환한다. 넥타이가 총으로 변하고, 응징이 구원의 제스쳐로 화(化)하는 이 의미의 대전환은 <올드보이>를 주재하는 처음 본 것의 의미가 바뀌고, 주체와 객체가 뒤집히는 플롯의 효과를 모방한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관객은 이와 같은 뒤집힌 이미지들의 도발에 계속 직면한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연결을 도모하는 시청각 언어의 관습을 의도적으로 묵살하는 구조적, 스타일적 경향은 박찬욱 의 후속작인 < 친절한 금자씨 >(2005), < 박쥐 >(2009), < 아가씨 >(2016)에서도 일관되게 관찰된다. <올드보이>는 영화의 문법, 내러티브 구조, 명시적이고 강력한 장면화 등 거의 모든 방식에서 이러한 스타일이 자라나는 출발점이다. 총이 넥타이로 변하는 둔갑술은 지난 20여 년 동안 박찬욱의 작가적 명성을 만든 문체적이고 형식적인 요소를 대표한다. 이 장면과 연관하여 추락을 저지하려는 제스쳐는 중요한 순간마다 되풀이된다. 그것은 대수를 거대한 복수의 고리에 갇히게 한 태초의 죄와 연관된다. 과거의 행동에 대한 탐사와 복수에 대한 갈증 사이에서 동요하는 대수의 깊은 망각을 깨고 솟아오른 이미지는 이 모든 사태를 조종한 이우진(유지태)의 누이인 수아(윤진서)의 투신자살이다. 서사의 클라이맥스에서 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손을 뻗고, 시간이 전환하여 수아가 어린 우진의 손에 매달려 흔들리다가 검은 강물 아래로 추락한다. 누이의 추락을 막으려는 우진의 애절한 제스쳐가 오프닝 시퀀스에서 강아지를 든 남자의 추락을 저지하려는 대수의 액션으로 순환하는 것이다. 제스쳐의 순환은 복수(復讎)의 순환, 돌고 도는 원한의 고리를 암시한다. 이러한 영화의 주제는 비선형 퍼즐 플롯으로 최고조에 달했으며, 종종 여러 층위의 신들을 평행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예기치 않은 극적 도약을 달성하고 있다. 미도(강혜정)와 대수가 15년 간 먹은 만두의 맛을 단서로 하여 중국음식점들을 순례하는 여정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시청각 몽타주는 시간과 공간, 행위의 계열을 가공할만한 리듬으로 건너뛰면서 신속하게 연결한다. 수직과 수평으로 틸팅과 패닝하는 카메라의 운동은 방향과 흐름, 속도를 일치시키면서 순식간에 미도와 대수의 수첩에 적힌 중국음식점들의 리스트를 지워간다. 대가의 손길을 느끼게 하는 이 몽타주 신의 종지부는 노트에 빨간 줄을 긋는 미도와 대수의 액션 매치 커트이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 놓인 두 인물의 행위를 일치시킴으로서 탐사의 여정은 마무리된다. 박찬욱의 복수 스릴러는 서사적으로 복잡하고, 스타일적으로 화려하다. 그의 주인공들은 종종 난해해지기도 했지만 몽타주에 기반한 양식은 세련미를 더해갔다. 그는 추상 회화와 비(比) 서사적 이미지, 장식적이고 구조적인 디자인, 타이틀과 자막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청각 표현의 요소를 극대화한다. 쇼트의 구성과 편집의 차원에서 <올드보이>는 내러티브 사건들에 대한 불가능한 뷰를 제공하고 카메라가 그 자신의 삶을 갖도록 허용한다. 넥타이-총의 변환과 더불어 이미지의 계열이 연속적인 시퀀들 안에 배치됨으로써 형태와 의미의 몽타주를 강화하는 사례는 미스터리를 품은 박스이다. 비가 추적대는 밤거리에서 납치되었을 때 대수는 공중전화 박스 안에 있었고, 15년 후 아파트 옥상에서 최면 상태로 풀려날 때 붉은색 박스를 박차고 나온다. 미도와의 관계를 확증하는 증거들은 봉인된 보라색 박스 안에 들어 있다. 이처럼 영화 속의 시각 요소들은 스토리에 접근하여 가장 인상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 계열을 이룬다. 쇼트의 접속과 이행에 있어서도 정해진 룰을 따르지 않는다. 오대수가 이우진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이우진이 설명하는 펜트하우스 신은 전통적인 시간의 편집을 몽타주로 대체하고 있다. 감금방의 여러 국면을 포함한 긴 플래시백 시퀀스도 이러한 특성이 강조된다.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현란한 에피소드들로 구성된 이 시퀀스는 다양한 속도와 크기, 지속시간을 오가는 장치들로 구성되어 있다. 대규모의 점프 커트, 오래 돌아다니는 카메라 움직임, 패스트 모션, 분할 스크린 등 선형적인 방식으로 쇼트를 배열하는 규범을 위반하면서 인물의 행동이 프레임 내에서 가장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지각될 수 있는 방식을 쓴다. 이러한 시, 공간의 조직방식은 강렬하게 시선을 잡아채면서도 분명하고 확실한 단서를 통해서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숱하게 많은 장면들에 녹아 있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겉보기엔 평범하고 멀쩡한 어느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특별한 주인공 없이 각자 다른 사연을 갖고 있는 여러 인물들이 경험하는 어느 이상한 하루 동안의 이야기인 이 단편영화의 원래 제목은 <푸른 계절>이었다. 적어도 내가 피드백을 부탁받고 읽은 시나리오엔 저렇게 적혀 있었다. 어딘가 괴상해 보이는 인물들이 왠지 부조리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자살하거나 자살시도를 하거나, 알고 보니 귀신이었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연달아 등장해 읽는 이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더니, 마치 8~90년대 공영방송 청소년 드라마의 그것처럼 개성도 없고 영혼도 없어 텅 빈 듯한 그 제목이 결국엔 꽤 짓궂고 음흉하게 느껴져 이건 좀 내 취향이라고 생각하며 읽은 시나리오였다. 그로부터 반년 후 < 어느 날 갑자기 >로 제목을 바꿔 달고 완성된 영화를 봤을 땐 내가 예전에 읽었던 그 이야기가 맞는지 아리송한 느낌을 받았는데, 비유하자면, 문구멍을 통해 뭔가 흥미진진한 사건을 본 것 같은데 그게 마치 깨진 거울 조각처럼 파편적인 상황들뿐이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상상할 때의 그런 초조한 아리송함과 비슷했다. 그런데 원래 이런 영화의 재미는 그런 아리송함의 정도와 비례하는 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극장을 나서면서 “이게 도대체 뭔 이야기야?” 라고 같이 본 친구에게 따져 물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때부터가 진짜 재미의 시작이거든. 단지, 그런 질문이 딱히 대답이나 설명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내뱉는 짜증스런 추임새일 경우가 더 많다는 게 아쉬울 뿐. 그래서 지금부터 내가 열심히 주절대려는 말들은 이 영화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이며 어떠한 재미의 화살을 과녁에 겨누려 했는지에 대한, 초고 시나리오를 읽어본 사람으로서 내릴 수 있는 근거 있는 짐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추리가 영화를 못 본 사람들로 하여금 굳이 이 영화를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진짜 목표나 이유 따위가 될 것이다. ‘여고생 호진은 진지하게 사귀던 같은 학교 선생 영호에게 갑작스럽게 이별 통보를 받는다. 호진은 영호와 헤어지지 않기 위해 거짓말까지 하지만 영호는 문자 한 통을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인터넷에서 긁어온 이 시놉시스는 앞에서 말한 그런 이유로 교활하다. 영화상에서 그나마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의 이야기를 극적인 태도로 포장하여 밑밥으로 던져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선생과 연애하는 발칙한 여고생 호진이긴 하다. 여러모로 조숙한 척하는 이 여학생과 왠지 띨빵해 보이는 수학선생은 정말로 진지한 연인 사이인 것 같다. 생리를 안 한다고 고백하는 제자에게 선생이란 이 남자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고함을 치고 있으니까... 꽤 심각한 커플이지. 그리고 그런 호진을 좋아서 쫓아다니는 남학생 용진이 있다. 그렇다면 이건 삼각관계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런 용진을 좋아서 쫓아다니는 남학생 지수까지 있다는 것이다. 그럼 사각관계. 여기에 또, 약자(언더독)를 향한 격려/동기부여 강박관념을 가진 체육선생이 있는데, 그녀는 몸치인 호진을 붙들고 무용 개인교습을 시키며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파이팅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다가 지쳤는지 결국 자살하고 만다), 그리고 이성복의 시를 일인극 무대 배우의 독백이자 주술사의 주문처럼 읊고 다니는 문학선생이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 오광록 )가 연기한 이 인물은 체육선생의 반대편에서 호진에게 자살을 부추기는 저승사자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는 이 영화의 문을 닫는 최후의 등장인물이다.) 줄거리와 인물 정리를 최대한 간소하게 풀어 써보았는데 영화를 못 본 사람은 도대체 이게 어떤 이야기로 꿰여 있는지 짐작하기 힘들고 한편 짜증스럽기도 할 것이다. 이 인물들이 서로 자연스러운 관계를 나누는 사람들처럼 보이지도 않고, ‘인기척 좀 하고 다녀라!’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음흉하게 움직이는 카메라도 왠지 신경 쓰인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어떤 의도를 가진 연출자의 계획에 따라 특별하게 세팅이 된 세계와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것을 짐작하는 데 필요한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단서는 호진에게 “임신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니야!” 소리치는 띨빵한 그 선생이 실은 ‘귀신’이라는 것이다. 그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죽었던 사람이기에, 영화 속에서는 (자기와 사귀었던 여학생) 호진의 플래시백 형태로만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항상 (상단의 스틸 사진에서처럼) 창고에서 저런 괴상한 포즈로 만나는데, 저긴 아마도 선생 영호가 자살한 곳 같다. 또, 그가 죽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현재의 타임라인과 교묘히 섞어 놓은 데다 그가 목을 매 자살하는 장면을 편집에서 뺐거나 아예 찍지 않았기 때문에 첫 번째 감상으론 눈치채기 힘든 단서이다. 즉, 영화의 시작부터 ‘...가 없는 학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 억지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는 일기장 나레이션을 하는 이 조숙한 여학생은 영화 내내 죽은 선생의 유령과 대화하며 (그렇게 해서) 내가 그를 자살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자신 또한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성복의 시집을 빌려주면서 ‘죽을 수 있을 때 죽어야지 안 그러면 타이밍 놓쳐서 못 죽는다’는 괴상한 조언을 해주는 문학선생은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저승사자일 것이고.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학교의 선생들과 학생들이지만, 이들 모두 전염병에 걸린 것 마냥 죽음을 생각하고 자살의 유혹에 시달리다 누군가는 시도를 하고 누군가는 성공한다. 서로가 죽음의 원인과 동기를 제공하고, 문학선생은 죽음의 사신처럼 이들의 관계를 관조한다. 이 학교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자살과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들 강박적으로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다들 간신히 무언가를 붙들고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어떤 사소한 계기로 툭 끊어졌을 때 이들은 유령이 되거나 창고에서 목맨 시체로 발견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호진과 용진, 지수, 세 아이들이 기름 웅덩이 앞에 서서 호진의 일기장을 불태우고 돌아서는 그 장면이 영화의 모든 이야기를 닫는 엔딩으로써 연출자가 의도한 만큼의 시적 쾌감을 준다거나, 영화적인 해소로 이어진다거나,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건지 속 시원한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성공하고 있다거나... 등등에 대해선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들은 선생들처럼 창고에서 목을 매 끔찍하게 죽을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 다행스러웠다. 나의 그런 예측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는 단서는 시나리오상에서 저승사자 문학선생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장면에서 발견된다. #29. 비 개인 거리 / 김밥천국 / 초저녁 학교 앞에 위치한 김밥천국 안. 비를 맞았는지 흠뻑 젖어 미역처럼 내려온 머리에 김 서린 안경을 쓴 문학선생, 지갑을 들고 우동 포장을 기다리고 있다. 쇼윈도 앞으로 푸른색 노트를 든 지수가 가방을 매고 혼자 걸어간다. 그때 가게 안에서 우동포장을 기다리고 있는 문학선생을 발견하는 지수. 멈춰서 쇼윈도 밖에서 문학선생을 바라본다. 잠시 후 문학선생이 쇼윈도 밖의 지수를 발견한다. 손을 흔들어 환하게 웃는 문학선생. 나는 이 마지막 장면을 읽으면서 모든 등장인물이 강박적으로 죽음의 사이클을 돌리는, 이 괴상한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자 심장은 어쩌면 이 문학선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인물들이 서로를 쫓아다니며 붙들고 징징대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애네들은 하루 종일 왜 이러는 걸까 싶다가도 결국 이 문학선생이 김밥천국에서 우동 포장을 기다리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밀린 체증이 확 풀리는 것 같더라니까. 영화에서는 그가 동네 책방에서 이성복의 시집(「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을 꺼내 드는 장면으로 바뀌었던데, 또 다른 수수께끼를 남기는 것 같은 이런 두루뭉술한 결정은 사실상 패착이라고 본다. 인물들이 웃는 것도 이상하고 우는 것도 안 어울리는 이 애매모호한 분위기의 영화에서 저승사자인 줄 알았던 죽음의 천사 문학선생이 김밥천국의 우동을 먹으려고 추레한 몰골로 포장을 기다리고 있는 그 장면이 품고 있는 아이러니야말로 정확하고 진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바뀐 결말이 좀 아쉬웠다. 정리하자면, 틈이 맞지 않는 깨진 거울 파편들을 모아서 그럴듯해 보이게 붙여놓은 듯한 지금의 영화도 나름 재미있는 편이지만, 그래도 이 영화가 원래 되려고 했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더 훔쳐보았던 사람으로서 < 어느 날 갑자기 >는 이런 식으로 쓸데없이 긴 잡담을 늘어놓게 만드는 음흉하고 비밀스런 재미가 숨어있는 영화라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