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집합
- 감독
- 박성훈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김규리, 김미정, 오태림, 이지민
잔뜩 술을 마시고 아침이 되어 숙취에 시달리다 보면, 웬수같은 술을 두 번 다시 마시나 봐라,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러나 술을 끊는 일은 없었다. 언젠가부터는 그런 상투적인 말도 하지 않는다. 과하게 마시는 것을 피하기만 한다면, 술은 언제나 좋은 친구다. 오랜 친구와 절교하는 일은 쉽지 않다.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술은 평생 가야 하는 친구다. 술과의 적당한 관계를 조절하는 일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 어나더 라운드 >는 과하게 술을 마시는 청년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덴마크에는 호수를 한 바퀴 돌면서 맥주 한 상자를 비우는 대회가 있나 보다. 호수 둘레를 뛰다가 한 병을 마시고, 토하면 한 병이 추가되고 등의 규칙이 있다. 참으로 무모하다. 열차에 탄 청년들이 병나발을 불고, 승객들에게도 술을 권하며 한바탕 놀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어리석은 난동으로 보일 짓이다. ‘젊음은 무엇인가? 꿈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꿈의 내용이다.’ 키르케고르의 말이 나온 후 <어나더 라운드>가 보여주는 청년들의 음주 장면은 유쾌하다. 다음 날, 어제의 난동을 알게 된 학교에서는 이후 학생들의 음주를 금지하지만. 고등학교 교사인 마르틴은 평범하고 지루한 중년을 보내는 남자다. 같은 학교의 교사인 니콜라이, 페테르, 톰뮈도 다르지 않다. 인생의 방향은 이미 결정되었고, 새로운 길이 생기지 않을 것이고, 생의 마지막까지 변화는 없을 것이다. 그 중 마르틴의 권태가 가장 심각하게 보이기는 한다. 역사 수업에서 했던 말을 또 하고, 진도를 잊어먹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 학생들이 단체로 문제제기를 하면서 심각한 위기에 몰린다. 마르틴의 인생에는 아무 열정이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니콜라이의 생일, 함께 술을 마시던 네 명의 남자는 의기투합한다. 심리학을 가르치는 니콜라이는 새로운 학설을 알려준다. 인간의 혈중 알콜은 늘 부족한 상태이기에, 알콜 농도 0.05%가 되면 보다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는 것이다. 막다른 길에 몰린 마르틴은 술을 마시고 수업에 들어간다. 그러니 정말로 달라진다. 열정적으로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학생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진다. 가정에서도 적극적이고, 활기차고, 다정해진다. 소원했던 아내와의 관계도 훨씬 좋아진다. 니콜라이, 페테르, 톰뮈도 마르틴의 길을 따른다. 적당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어떤 문제가 있어도 그저 귀찮아서 외면했던 과거와 달라진다. 적극적으로 학생들의 상황에 개입하고,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네 남자의 변화, 활약상은 그야말로 놀랍다. 하지만 영화가,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극이 예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정도는 누구나 예감한다. 모든 이익, 행복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한때 덴마크는 세게에서 가장 술을 많이 마시는 나라였다. 지금은 러시아나 한국이 더 많이 마신다고 한다. 술에 대해서는, 우리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잘 알고 있다. 워낙 술을 많이 먹는 인간이 많다 보니, 주취 감경이라는 비합리적인 법률까지 존재할 정도다. 술을 마시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으니 벌을 감해준다는 것이다. 강제로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자기가 즐거워 마신 술에 취해 타인에게, 사회에 해악을 끼쳤는데 왜 죄를 용인해주는 것일까. 자신의 행복을 위해 술을 마셨고, 그로 인해 타인에게 죄를 지었다면 스스로 갚아야 한다. 술에 지나친 관용이나 애정을 주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술의 긍정적인 효과에 도취한 마르틴과 친구들 역시 가혹한 결과를 맞는다. 술은 적당히 먹으면 약이고, 과하면 독이다. 모든 상황이 좋아지자, 더 좋아지기 위해 그들은 술을 더 마신다. 과음을 한 탓에 학교에서 실수를 하고, 더 마시다 기억까지 잃어버린다. 감정을 멋대로 발산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마르틴의 아내는 떠나버리고, 톰뮈는 직장을 잃는다. 당연한 결과다. 욕망의 끝은 언제나 파멸이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고, 모든 상승은 언젠가 속절없이 낙하한다. <어나더 라운드>는 결론을 말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세상의 법칙 같은 것은 없다. 누군가는 평생 혈중 알콜농도 0.05%를 유지하며 흥겹고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인생을 포기할 수도 있다. 어디에도 정답은 없다. <어나더 라운드>는 네 명의 친구들이 걸어가는 길을 담담하게 따라갈 뿐이다. 1995년, 라스 폰 트리에와 함께 도그마 선언을 주도했던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어나더 라운드>는 순수하다. 지나친 의미 부여가 없고, 치밀하게 상징을 파고들지도 않는다. 관습적으로 인물들을 나열하지도 않는다. 익숙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상을 느슨하게 따라가면서, 결국은 빛나는 성찰의 순간을 던져준다. 희망도, 절망도 함께 껴안는다. 도그마 선언은 희미하게 지워졌지만, 빈터베르그는 여전히 정갈한 눈으로 인생을 바라본다. 마지막 장면, Scarlet Pleasure의 "What A Life"가 흐르면서, 한때 재즈 발레를 배웠다는 마르틴이 춤을 춘다. 그들이 가르친 학생들이 서로 졸업 축하를 하는 흥겨운 거리 풍경 속에서, 한동안 멀리 했던 술을 다시 마시며 춤을 춘다. 마르틴은 춤에 빠져들어 격정적으로 몸을 움직인다. 톰뮈는 죽음을 선택했고, 마르틴은 안정된 생활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마르틴이 더 옳은 선택을 했다거나,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연은 때로 가혹하게 벌을 내린다. 아무 죄가 없어도, 아무리 성실하고 선하게 살았어도 감내해야만 한다. 술 때문이 아니라, 운명이 그들을 서로 다른 길로 이끌었다. 술은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어나더 라운드>는 취한다는 것의 매혹을 너무나 아름답게 표현한다. 동시에 빠져들 수 있는 지옥의 구렁텅이까지. 모든 것이 인생이고, 무엇이 어느 순간 나에게 다가올지는 알 수 없다. 매 순간 생각하고, 매 순간 선택하며 나아갈 수밖에. 그러니 때로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취해야만 한다. <어나더 라운드>의 매순간이 그렇듯이.
2020년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소감에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말을 인용 한적이 있다. 영국 감독인 조안나 호그의 <수베니어>시리즈는 아마 이 말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 수베니어: 파트 II >(2021)를 이야기 하려면 < 수베니어: 파트 I >(2019)을 빼 놓을 수 없다. <수베니어: 파트 I>과 <수베니어: 파트 II>는 서로 연결 된 스토리로 영화를 전공한 조안나 호그가 대학시절 실제로 겪은 일들을 토대로 한 자전적인 이야기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난 주인공 줄리는 미래의 영화 감독을 꿈꾸는 영화 학도다. 학교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 분주하던 어느 날, 미스터리한 남자 앤소니를 만나게 된다. 만난 지 얼마 안된 앤소니는 줄리에게 당분간 그녀의 아파트에서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그에게 호감을 느낀 줄리는 흔쾌히 허락한다. 같이 생활하면서 점점 앤소니의 묘한 매력에 빠져들게 되는 줄리, 학교 프로젝트를 등한 시 한 채 급기야 앤소니를 위해 부모에게 거짓으로 돈을 꾸기 까지 한다. 하지만 앤소니의 마약 중독으로 인해 이들의 관계는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 된다. 불투명하기만 했던 앤소니와의 관계에서 헤어나지 못한 줄리는 그를 잊기 위해 다시 학교 프로젝트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경험했던 앤소니와의 과거를 토대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 하지만 그 둘의 범상치 않았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스텝과 배우들 때문에 난항을 겪기 시작한다. 전작 <수베니어: 파트 I>이 앤소니와 줄리와의 관계에 포커스를 맞췄다면 후속작인 <수베니어: 파트 II>에선 줄리의 순탄치 않은 졸업작품 제작과정에 비중을 둔다. <수베니어: 파트 I> 같은 경우 2019년 선댄스 영화제에 해외작품 경쟁 섹션인 월드시네마부문에 처음 소개되어 작품상을 수상하며 평단의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수베니어: 파트 II>또한 2021년 올해 칸느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 되어 <수베니어: 파트 I> 못지 않은 찬사를 받았다. 2019년과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를 포함해 이 두 작품을 초청한 영화제만 해도 40여개가 넘고 노미네이트만 30회 그리고 7차례의 수상을 하며 당해 전 세계 평론가들과 영화제가 가장 사랑했던 작품들이 되었다. 평단의 열화와 같은 호평을 받았던 <수베니어 파트: I & II>는 스토리 자체 보다는 캐릭터 하나하나에 중점을 둔 매우 담대하고 솔직한 영화다. 영화제 선정을 위해 이런 독립 예술작품을 수없이 많이 보게 되는데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스토리를 구성 하거나 연출 방향을 잡다 보면 너무 난해해지거나 개연성이 떨어져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다. 반대로 관객들을 너무 의식해 자신만의 색깔을 잃어 버리고 스토리가 진부 해지거나 뻔한 결말을 맺는 작품들도 상당히 많다. 그런 면에서 <수베니어 파트: I & II>는 그 경계선에서 완벽하게 중심을 잡는다. 관객들이 이영화를 어떻게 생각할까 보다는 어떻게 하면 본인의 이야기를 좀 더 진솔하게 표현 할까를 더 많이 고민 한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관객들이 캐릭터들에게 집중을 하면서 감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연출은 과연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 그런 점에서 조안나 호그 자신이 겪었던 일 중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한 흔적이 역력하다.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 그렇다. 주로 롱테이크로 처리되는 캐릭터들의 거의 모든 대화는 마치 연출이 되었다기 보다는 실제 상황을 대본 없이 연기 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조안나 호그 감독은 촬영 전 모든 배우들과 자신의 겪었던 상황에 대해 배우들이 완벽하게 소화할때까지 끊임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주인공 쥴리가 앤소니를 처음 만나는 부분이나 자신의 졸업 작품의 스토리를 어떻게 끌어 갈지에 대해 나머지 스텝과의 논쟁을 벌이는 장면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이 꾸밈없고 생생하다. 조연을 맡은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하나 같이 모두 자신이 어떤 캐릭터인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능력이 탁월하다. 관객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극적인 갈등이나 뭔가 감동을 줄만한 의미심장한 대사가 없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그들의 대화를 보고 있자면 조안나 호그 감독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배우들에게 쏟아 부었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배우 캐스팅에 관련한 일화가 하나 있다. 이 두 작품의 주인공 쥴리를 연기한 아너 스윈튼 번은 대사 없는 카메오로 출연한 것 외엔 연기 경력이 아예 없는 배우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녀는 쥴리의 어머니 역을 맡은 틸다 스윈튼의 실제 딸이라는 것이다. 1986년 조안나 호그 감독의 졸업작품이었던 단편 <카프리스>에 출연했던 틸다 스윈튼은 그 후 조안나 호그와 오랜 친구 사이로 지내왔다. <수베니어: 파트 I & II>의 여주인공역으로 뭔가 신선한 배우를 찾던 감독은 캐스팅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틸다 스윈튼을 찾아간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의 친구에게 인사를 하러 왔던 아너 스윈튼 번을 본 조안나 호그 감독은 (그녀는 친구 딸인 아너 스윈튼 번이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다) 갑자기 아너 스윈튼 번에게서 자신의 대학생 시절의 이미지를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그 자리에서 주인공 역할을 제안했다. 아너 스윈튼 번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했다고 한다. 관객들의 평가를 염두하기 보단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솔직하게 표한 것이 오히려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데 성공한 것 같다. 한마디로 평범함에서 비범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자극적인 소재가 난무하는 현재 영화계를 비추어 볼 때 <수베니어>시리즈는 참 귀한 영화다. 흔히 창작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색깔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면서 관객들의 공감대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독립영화 감독들, 특히 신인 감독들일 경우 자신들의 영화를 만들 때 많이 고민 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조안나 호그의 자전적인 작품 <수베니어>시리즈를 독립영화인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물론 뭔가 공장에서 찍어 낸 듯 정형화 된 영화들에 지친 관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안타까운 점은 이런 작품들이 흥행에 성공 하기에 참 어렵다는 것이다. <수베니어: 파트 I & II> 두 작품 모두 국내에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았다. OTT 플랫폼이 대세인 요즘 시대에 관객 또는 시청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컨텐츠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베니어>시리즈 같이 높은 완성도를 가진 작품들이 단순히 흥행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소외 받는 것 같아 아쉽다. 물론 감독 본인도 큰 흥행을 바라고 만든 작품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수베니어>시리즈 같은 잔잔하지만 절제된 연기와 연출 그리고 현실적이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작품들이 일반 관객들에게도 소개 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 졌으면 한다. <수베니어>시리즈도 조만간 국내에 수입 되기를 바라면서..
작게 열려진 방문 틈새로 누군가가 거실을 엿보고 있다. 나이프와 크리스탈 같은 식기류부터 식탁까지 온갖 가구들을 둘러보며 품평하는 여자와 그에 응대하는 여자가 보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놓치지 않으려 고집스럽게 염탐하는 이 주관적 시점은 시선을 통해 대상을 소유하는 힘을 갖기보다는 지극히 두렵고 불안해 보인다. 심지어 이 시선은 곧 손님을 응대하던 여자에게 들켜 차단당한다. 이 주관적 시점의 주인은 첼라이고, 문을 닫은 이는 그녀의 오래된 연인 치키타이다. 여성 주인공에 의해 서사가 추동될 뿐만 아니라 단역까지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여성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엄청난 밀도감으로 그려낸 파라과이 영화, <상속녀>는 이 첫 장면을 통해 바라보는 자와 바라보이는 자, 그리고 그것의 권력 관계의 이분법을 내파하고 새롭게 창조하며 시작한다. 훔쳐보는 첼라의 시선은 왜 힘을 갖지 못하고 불안한가, 그녀의 시선을 차단하는 손은 보호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통제와 지배를 위한 것인가? 여성들의 세계에서 권력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가? 50대 중반의 레즈비언 커플, 첼라와 치키타는 부유한 엘리트였지만 현재는 빚더미에 올라 갖고 있는 물건을 팔아야 하는 치욕적인 상황에 처한다. 더 이상 구겨질 자존심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대외적 관계와 재정을 책임져 왔던 치키타가 은행과의 소송에 휘말려 감옥에 가게 된다. 치키타는 특유의 적극성과 사교성으로 감옥에 금세 잘 적응한다. 반면 수줍고 내성적인데다 치키타 덕분에 세상물정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았던 첼라는 그 존재감을 더 잃어가는 듯 보인다. 여전히 철없는 부잣집 소녀 같은 첼라는 그저 방안에서 아침마다 마시는 차의 찻잔의 위치와 쟁반 종류를 트집 잡으며 탐미주의적인 일상을 보존하는 데 집착한다. 현재에 마주한 재난-늙음, 시들시들한 연인관계, 다 써버린 재산-을 인정할 수 없는 그녀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과거의 어느 시간에 고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기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젊은 시절의 사진에 눈을 돌린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견고한 치키타의 보호막이 사라지자 오히려 첼라에게 마법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차를 갖고 첼라는 운전기사 노릇을 하며 생전 처음 돈을 벌어 보고, 젊고 매력적인 앤지에게 강렬한 감정을 느낀다. 그녀는 너무나 오랜만에 살아있음을 느끼며 자기 인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저 나이든 한 여자의 성적 욕망에 대한 영화만은 아니다. 또한 계급, 노동, 정치 혹은 자기 삶의 통제력에 대한 사회적 풍자이기도 하다. 파라과이의 독재가 오래 지속되는 동안 첼라와 치키타는 오히려 안온한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인다. 자신들만의 오랜 친구와 공동체 속에서 레즈비언 연인들은 어떤 동성애 혐오도 없이 당연히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그녀들이 상속받은 부와 계급 덕택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가능했던 우정마저도 치키타의 것이지 첼라의 것은 아니다. 사실 치키타가 큰 잘못을 했다기보다는 오랜 관계가 그들의 역할을 고정시키고 서로의 모든 것을 안다고 확신하며 서로의 잠재성을 갉아먹고 녹슬게 만들었을 것이다. 부, 계급, 오랜 연인 등 모든 방어막이 사라지자마자 첼라는 바로 도전을 맞닥뜨린다. 그것은 가려놓았던 혐오와 계급의 재위치화이며, 사회적 역할과 위치의 재조정은 그녀에게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여겼던 새로운 욕망과 열정을 불 지핀다. 옆집에 사는 부자 노부인 피투카는 치키타가 어디에 갔는지를 캐물으며 카드게임 모임에 자신을 데려달라고 부탁한다. 사실상 그건 자신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안 좋은 소문을 내겠다는 은근하지만 공공연한 위협이다. 그렇게 평생 부모, 연인, 하녀 등에 의해 돌봄을 받던 첼라는 생전 처음 자신 스스로를 포함해 누군가를 돌보는 역할을 하게 된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과 운전을 하는 것은 자신의 성적 역할의 재조정이자 계급의 추락이다. 그녀는 받는 자에서 주는 자로, 소비하는 자에서 노동하고 생산하는 자로, 욕망 받는 자에서 욕망하는 자로 이동한다. 그녀는 피투카 뿐만 아니라 함께 카드를 치는 다른 노부인들을 차로 데려다주고 돈을 받으며, 고속도로를 달려 앤지와 앤지의 엄마를 병원에 데려다준다. 점점 더 자신감을 얻게 된 첼라는 앤지에 대한 마음도 함께 키워간다. 과거에서 현재로, 고립된 방 안에서 외부 세계로, 이자 관계에서 다자 관계로 나아가는 전진의 서사는 어떤 면에선 고립되고 무기력하고 위선적이었던 파라과이의 엘리트를 풍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기 삶의 통제력의 회복이든, 꺼져가던 욕망의 부활이든, 아니면 엘리트 계층에 대한 사회적 풍자든 이 전진의 서사는 강렬한 영화적 쾌감을 선사한다. 마르셀로 마르티네시 감독은 이 전진의 서사를 그려내기 위해 첼라의 주관적 시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초반에는 프레임 대부분이 문으로 가려져 있고 종종 완전히 차단당하던 첼라의 시선은 운전을 하고 자신감을 얻어가면서 점점 넓어진다. 식기와 가구를 둘러보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을 훔쳐보기 위해 열어두었던 방문의 틈은 점점 더 넓어지다 마침내는 방에서 나와 하녀 대신 직접 가격 협상을 한다. 식탁을 비싼 값에 판 첼라는 급기야는 자신의 취향을 포기하고 보기 싫다고 버렸던 식탁을 들인다. 단순히 방 밖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집과 취향에 이질적인 것을 들이며 자신의 계급성을 흩트린다. 한편 초반에 첼라의 시점으로 보이는 앤지는 얼굴이 프레임에서 잘린 채 몸만 보였다. 그러나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부끄러워하던 첼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선글라스를 찾아 끼고 자신을 숨기기보다 타인의 시선을 적극적으로 초대한다. 앤지를 향한 그녀의 욕망이 강해질수록 그녀의 시선과 공간은 바람이 부는 베란다로, 밤거리로 점점 더 열리고 확장된다. < 상속녀 >는 첼라의 주관적 시선 폭의 확장, 이동성의 확대, 서사의 진전을 정교하게 연계한다. 나는 마음의 문제든, 뇌 속의 작동이든, 내장이 뒤흔들어지는 감각이든, 내적인 것을 외화하는 능력은 영화라는 기계의 가장 중요한 역량 중 하나라고 믿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영화의 그러한 역량을 잘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상속녀>는 다른 이에게는 감지되지 않을 수도 있는 한 인간의 휘몰아치는 내적 변화-모멸감, 슬픔, 수치심, 우울감, 이기심, 활력, 욕정, 사랑 등-와 모험을 회피하지 않고 전진하는 운동성을 당사자의 시점과 구도를 통해 드러낸다. 그건 굉장한 영화적 쾌감이다. 거울을 비추거나 대립적인 방식이 아니라 그녀만의 시점과 운동성을 통해 만들어 내는 내적 변화의 시청각화는 한 나이든 레즈비언 여자를 하나의 우주로 만들어 버린다. 갑작스럽게 치키타가 돌아와 다시 그녀의 삶을 지배하려 하자 첼라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녀는 치키타가 팔아버리려 했던 차를 갖고 떠나버린다. 치키타가 첼라를 찾지만 그녀는 더 이상 프레임에 있지 않다. 시선을 좁히거나 떨어뜨리며 자기 주변의 공간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던 첼라는 아예 프레임 밖으로 나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나갔던 그 영화적 우주를 폭파하고 확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