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명
- 감독
- 알프레드 히치콕
- 제작년도
- 1946
- 출연
- 캐리 그랜트, 잉그리드 버그만, 클라우드 레인스, 루이 칼헌
연흥사(演興社)와 장안사(長安社)는 러일전쟁 직후 만들어진 조선인 극장이다. * 연흥사는 1907년 11월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송지만(宋芝萬), 이준동(李俊東), 이종진(李鍾振) 등이 절골, 즉 사동(寺洞) 장윤직(張潤稙)의 집을 개조하여 연희루(演戱樓)를 건축하고자 경시청에 청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연희장이 연흥사가 아닌가 한다. 이 정확한 위치는 탑골공원 왼편 훗날 조선극장 자리로,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30번지이다. 1912년 연흥사에서 연극공연을 본 바 있는 연극인 박진(朴珍)의 회고에 따르면, 동향(東向)에 비계목(飛階木)으로 만든 이층짜리 건물이었으며 일층 객석은 나무로 만든 장의자를 길쭉길쭉하게 놓았고 이층에는 삿자리를 깔았다고 한다. 당시 여느 조선인 극장과 마찬가지로 객석은 성별에 따라 나누어져 있어서 일층은 남자석, 이층은 여자석이었다. 1912년 여름에는 극장 천장에 선풍기를 달아 관객들로 하여금 한여름의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하여 관람의 편의를 높였다. 사진 2. 딱지본 소설 『산천초목』의 표지에 그려진 연흥사의 모습(이해조, 유일서관, 1912) 초기 극장이 대게 그러하듯 운영자는 자주 교체되었다. 1908년 연흥사는 박원근(朴元根)이 총무를, 송종오(宋鐘五)가 감독을 맡았다. 개장 초기에는 창극을 주로 공연했으나, 극장을 경영해본 경험이 일천했던 데다가 전황으로 경영난이 닥치자 극장을 방매한다. 이후 전당포 주인 석숭환(石崇煥) 등이 돈을 대어 유지해 나갈 수 있었는데, 1909년 당시 석숭환이 연흥사에 투자하여 손해 본 액수만 3만 냥에 이르렀다고 한다. 연흥사가 언제부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단, 1908년 초부터 신문지상에 연흥사 광고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대 들어 연흥사는 다른 어떤 극장보다 신파극을 자주 공연한다. 이로써 경영난을 극복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신파극은, 1910년대 초반 조선인 극장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는데, 특히 연흥사는 신파극 공연을 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신파극 전용 극장이라 선전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박진 역시 연흥사에서 이뤄진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革新團) 공연을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 당대 사람들에게 연흥사는 신파극의 본산으로 인식되었던 모양이다. 혁신단의 연흥사 공연은 1912년 2월 18일 <육혈포강도>를 기점으로 본격화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수전노(守錢奴)>, <소위휘선사자친죄(少尉揮善捨子親罪)> 등의 작품을 올렸는데, 쌀값 폭등으로 불경기가 도래하자 임시로 공연을 중단, 다시 개연하여 <선탐후개(先貪後改)>, <서승어적(庶勝於嫡)> 등을 공연했다. 이후 <눈물>이나 <장한몽> 같은 대표적 신파극 레퍼토리 공연이 큰 인기를 끌면서, 임성구의 혁신단은 신파극의 대표 주자로 인정받게 된다. 예컨대 <눈물> 공연을 본 ‘사동생’이라는 이름이 독자는, “나는 눈물 연극 구경을 갓다가, 부인셕에셔 일졔히 우는 것을 보면은, 졀로 눈물이, 것잡지 못하게 쏘다져요” 1 라며 극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장한몽>을 본 '애극생'이라는 관객은, “연흥샤 쟝한몽 연극은, 참 재미잇습듸다. 사람은, 엇지도 그리도, 만히 드러 가는지 매일 여젼하던 걸이오. 잇흔날브터는 즁편이라지오, 샹편 보고, 즁편 안 볼 슈 잇나, 불가불 일즉 언이 가, 보아야 하겟스니, 할인권 백인 신문이나, 오날은 일즉이 돌이게 하십시오” 2 라며 연흥사의 신파공연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을 표현했다. 신파연극의 흥행 성공과 더불어 연흥사는 탕자음부가 모이는 곳이라는 오명도 쓰게 되었다. 이에 조산부(助産婦)양성소의 자선연주회 같은 공익적 역할의 공연을 개최하는 등 인식 개선에 나서기도 했다. 1914년 10월 8일, 연극장이 협소하여 공연하기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경무청에서 허가를 취소함으로써 연흥사는 돌연 문을 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이 바로 철거되지는 않았는데, 신파극을 대신하여 김창환, 이동백 등 명창들의 판소리 공연장으로 활용되다가 1915년 5월 무렵 철거된다. 철거된 자리는 빈터로 남아 있다가 7년 뒤인 1922년에 조선극장이 들어선다. * 장안사는 동구(洞口) 내(內) 장대장동(張大將洞) 장사골에 건립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박진은 장안사의 위치에 대해 “낙원동과 익선동 사이, 즉 단성사에서 동관대궐이라던 창덕궁을 향해 가는 큰 길과, 낙원동에서 경운동으로 가는 큰 길과의 사이”에 “동궐나뭇장(柴場)이라고 해서 넓은 공지가 있었는데 그 공지가 장안사가 있던 터”라고 회고했다. 장안사의 건설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성사, 연흥사와 비슷하게 1907년 말에서 1908년 초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개장 초기에는 전통 연희를 비롯하여 중국의 경극을 상연하고, 활동사진도 상영했다. 개관 초기에는 관람자가 적어 여타 극장들처럼 경영난을 맞았지만, 연흥사나 단성사에서 연행하지 않는 “꼭두각시의 홍동지, 박첨지놀음과 광대 줄타기, 남사당패의 무동 서기, 서도잡가, 경기 입창 등”의 전통 연희를 주요 레퍼토리로 삼아 공연하면서 장안사만의 전문성을 살려 나갔다. 사진 3. 장안사에서 상연된 중국연희 공연(《황성신문》, 1909년 4월 21일자, 3면.) 장안사는 최홍석(崔弘錫)이 사장이던 1910년 4월 무렵 활동사진 영사기를 도입하여 프랑스 파테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활동사진을 상영하기 시작했다. 3 이에 학부(學部)에서는 장안사에서 상영하는 활동사진을 중등 이상의 학교 교육에 활용하도록 지도하기도 했다. 4 같은 해 5월부터는 파테회사가 아닌 일본인 흥행업자 가즈토키(和常)와 필름 배급계약을 체결하고 일본에서 오는 필름을 상영했다. 5 1912년에는 잠시 서양인이 극장을 임대하여 지만관(志滿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요컨대 1910년대 초반 장안사는 활동사진관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1912년 말 대정관, 우미관, 황금관 등 본격적인 활동사진관이 설립되어 운영되기 시작한 이래로는 송만갑, 김창룡 등의 명창이나 채란, 해선 등의 기생들에 의한 노래 공연이나 소위 구(舊)연극을 상연하는 장소로 더 유명했다. 장안사는 1915년경에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된다. 단성사가 화재로 소실된 뒤 단성사에서 연행하던 김재종(金在鍾) 일행이 장안사로 옮겨 연행을 계속한다는 기사가 있는 한편, 그들이 연흥사에서 연행한다 기사도 있다. 미루어 짐작컨대, 장안사의 극장 상태가 공연에 부적절했다기보다 시설이 괜찮은 연흥사를 택해 연행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장안사는 아마도 이즈음 폐관된 것으로 보인다. 1) 「독쟈구락부」, 《매일신보》, 1913년 10월 29일자, 3면. 2) 「독쟈구락부」, 《매일신보》, 1913년 11월 4일자, 3면. 3) 「광고」, 《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1일자, 3면. 4) 「교육에 활동」, 《황성신문》, 1910년 4월 17일자, 2면. 5) 「활동사진 계약」, 《황성신문》, 1910년 5월 17일자, 3면. * 참고문헌 유민영, 『한국근대극장변천사』, 태학사, 1998, 116~151쪽.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50~52쪽. * 사진1(상단). 혁신단 단장 임성구(《매일신보》, 1914년 2월 11일자, 3면.) [자료] 《대한매일신보》, 1906.03.30. 奉常劃提調李苾和氏가 人民敎育하기를 爲하야 上䟽한 全文이 如左하니 續 此臣所謂敎育一事庶可以爲日後來復之基也雖然所謂敎育者亦有古今之異其泥於古而昧於今者子莫之執也 若專尙今而棄舊則忘其本者也盖有國有民必有宗敎故宗敎興則其國興宗敎衰則其國衰環天下亘萬古不易之典也 夫孔孟之道我 國之宗敎也惟我邦國之不振由於宗敎之不興如欲振興其邦國必先懋興其宗敎也 今以遭世界更新之運不得不學今之學者又事勢之不得已也孔孟之敎係是三綱五常之道也必使幼冲之子弟經之以三經五常之道使不失其本然之彜性然後學今之學則中散萬事末合一理可以並行之不悖矣臣願 陛下深留聖意於斯亟令學部益勵敎育之責任 規模則先興孔孟道學之宗敎次修開明之新學節次則特加尊崇文廟仰瞻羹墻而俎豆絃誦升降拜揖使靑年子弟咸知慕聖之本義而尊重其宗敎焉 以成均舘爲大學校而京師則一署各置一中學校而一面各置小學校一里各置一村塾 小學校卒業之人陞之中學校焉中學校卒業之人陞之大學校焉定其課程第其高下歲拔其優等者薦之於政府而充補其相當職不出十年之間而仕於 朝者皆大學校卒業之人至於農商工亦莫不然而隨其人才派送各國各修其藝焉 又錄其敎師之勤者而薦用之又採私立學校者優施補助者而褒賞之不數年之內不費國金而學校之設必遍滿於 國中 然則三千里內養成之聰明子弟亦不少矣夫何患乎人才之不能就乎雖然敎育一事爲近日之例套語而已則終未見其效而今日之勢惟在實踐二字而已 臣願 先下詔勅令學部改定敎育一致之法上自太學至于各郡鄕校置大中小學校實行其作成人才之方 今漢城及各道道臣上 奏學校私立之人以勳章褒章以勸以奬焉臣雖不學的知今日 國家之興惟在敎育之興惟在宗敎之興故 忘其僭陋而爲 陛下國家一言之伏乞 陛下勿以臣之卑微而少 垂察其言則 國家幸甚生民幸甚 完 [자료] 《황성신문》, 1906.04.19. ●李氏上疏 奉常副提調李苾和氏가 皇帝陛下께 上䟽한 全文이 如左하니 伏以臣向以興學校振敎育一事猥陳荒說優蒙 聖批至有令政府禀處之旨旣而大 詔煥發如綸如綍使於敎育人才事方專心講究俾有實効臣伏讀 詔書感極涕發窃有少湏臾無死之願而計以爲此時此 詔不啻若大旱之逢甘霈則其舉而行之宜必汲汲如不及以對揚休命矣伏竢累日以臣之躁妄實不能無滋惑焉盖今日百獘之本惟以虛文二字爲詐飾若幷此敎育一事而亦歸虛文則臣所謂國家來復之基永無其望矣然則臣安得不心枯膓焦疾聲㪅籲於 天陛之下哉我國素穪文明而至于近日禮義都毀而學問盡味則昔之爲文明者旣不可復見矣又於新學問者亦未有一人能窺其藩籬者然則可謂東敗西傷矣爲今之計莫如尊重太學申明先聖之道責任學部篤習當時之務使宗敎復明繼聖訓開來學以忠愛爲義務然後弱可爲强野可爲文國權可以光復文運可以賁篩臣旣以敎育不行爲憂而冒此煩陳則固不當㪅攙他說而區區忠激之意有不容不一陳者尙有數事焉其一即掌禮院旌褒例納錢事也夫忠孝烈旌閭乃是國家所以扶植綱常敦尙風化之大柄也有其實者亦當精擇審知然後可許其棹楔之典况乎無其實者乎今則不然不問事行之虛實惟視例納金八百之有無而許之碍之則是行迹爲虛而例納爲實也雖有忠孝烈實蹟必湮沒於千古而不得闡揚於世矣此豈 廟堂立法之本意哉伏乞 亟下嚴勅于掌禮之臣永革其旌閭例納錢凡干係 恩典者必令道臣博釆而審知之然後 奏聞請褒若有循私納賄誣虛而爲實者該呈狀人及道臣幷論罪以勵風化千萬幸甚其一即判任官及地方官俸金與兵丁巡檢掖庭所屬吏胥皂隷之月料事也夫仕者祿足以代其耕然後可以忘父母妻子之憂而能盡心職事不生他念矣今夫判任官及地方官之俸給僅足以資其一身而不能食其父母妻子則雖持心淸白者不爲事勢所牽者鮮矣書曰旣富方糓富而後能善古昔帝王之使臣工先富其身而使善其心此所以必先重祿使之忘其憂也伏乞陛下垂察焉內而府部院廳判任官巡檢兵丁掖庭所屬吏胥皂隷之屬外而觀察守宰鄕將吏輩使喚之屬當厚其俸給使之忘其家憂而盡其職事如是而有不用命者論罪而正法綱焉則千萬幸甚其一卽協律社貽獘事也臣聞孔子於顏子以爲邦之道必曰放鄭聲今夫協律社者臣雖不知其主倡之爲何人然臣聞其通宵設戱男女雜遝鬪爭易起亂淫相屬此豈非鄭聲乎大抵習舞演劇之戱於外國亦皆有之不過是俳優丐賤之軰區區營生者而如今協律社之穪以 宮內府所管發票營利者東西列邦所未聞見事也淫聲亂色眩惑耳目傷風敗俗年少之學問實業一不留心淫風從生實爲國家人民憂者此也伏乞 陛下亟令警廳不日嚴禁以絕亂階申飭掌樂之臣復講法樂千萬幸甚右臣所言諸條雖皆當今之可行而語其最急且大者則果能上下一心務進敎育之實而國家人民之知識一開則如貪賂之俗淆雜之風亂淫之戱雖不禁而人自耻焉而不爲矣伏望 陛下留 神裁察焉하소셔하얏더라
좌초된 기대작-이만희의 <기적>(1967) 1967년 초, “한국 최초의 논 뮤직”영화 1) , “스토리 극이 아닌 심리묘사 위주의 새 스타일 실험영화” 2) 한 편이 세간의 주목을 끈다. 일주일의 촬영기간, 일체의 효과음 없이 기차가 달릴 때 발생하는 각종 소리만으로 음향을 대신하겠다는 포부를 앞세운 이 영화는 이만희 감독의 <기적>이었다. 최무룡, 남정임 주연의 <기적>은 살인용의자로 지목된 석구(최무룡)가 기차에서 지연(남정임)을 만난 후 벌어지는 일을 담은 것으로 영화 배경의 대부분은 기차 안, 그것도 야간의 기차 안이었다. <만추>의 성공으로 영화계의 기대를 받던 이만희 감독의 차기작 <기적>은 “국산영화의 때를 대담하게 벗”겨 “산뜻한 외화”와 같은 느낌을 준다는 평을 받았고, 3) 1967년 3월 30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하여 약 4만 명의 관객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영화 <기적>은 개봉 후 실험적인 시도 때문이 아닌 불미스런 이유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기적>은 개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르지 카발레로비치(Jerzy Kawalerowicz) 감독의 <야간열차 Trem Noturno>(1959) 4) 라는 폴란드 영화를 표절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1년이 넘는 공방전을 벌였던 것이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1960년대 많은 영화들이 표절의 의심을 받았으면서도 국외 작품에 대한 표절(대부분은 일본)은 도덕성의 문제를 지적하는 정도에서 그쳤으며, 당시 많은 문제가 되었던 국내 소설을 영화가 표절한 경우에는 소설가가 제작사 대표를 저작권침해로 고소하는 식의 개인적인 소송으로 시비를 가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5) 그러나 <기적>의 표절시비 문제는 명예훼손 소송으로 시작됐다. <기적>의 시나리오를 썼던 백결은 처음으로 이 문제를 거론한 관련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면서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고자 했으며, <기적>의 제작사였던 대한연합영화사는 표절여부를 가려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른다. <기적>의 심의서류는 신문지면 등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기적>의 표절시비 문제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를 꼼꼼히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영화업자협회(이하 업자협회) 산하 각본심의위원회와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 사이의 미묘한 알력관계, 제작사가 인식하던 민간심의기구의 의미, 공보부 영화위원회의 무능 등을 확인시켜준다. 필사적으로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는 것을 가리려 했던 제작사의 노력과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는 심의기구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공보부의 행태는 왜 <기적>의 표절시비 문제가 1년 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매우 흥미롭게 보여주면서 당시의 검열체계와 위상을 추측케 한다.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현재의 시각으로 <기적>의 표절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것을 둘러싼 더 흥미로운 면면들을 지금 확인해보자. 민간심의기구 사이의 알력 : 업자협회 VS 예륜 영화 <기적>의 심의서류를 살펴보면 <야간열차>와의 표절시비가 있기 전 또 다른 표절시비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시나리오 작가 이희중이 1967년 3월 27일 상영허가 보류신청서를 공보부에 제출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기적>의 시나리오 작가 백결이 자신의 작품 <빙화>를 도용한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이희중은 진정서에서 백결이 자신의 작품을 윤색하여 한 잡지에 연재하겠다고 합의한 후 연재는 하지 않고 <기적>의 시나리오로 만든 것이기에 형사소송을 제기할 것이며, 이 작품의 상영을 보류해 달라는 내용을 보낸다. 그러나 같은 날짜로 영화 <기적>의 영화검열허가신청서, 영화학생관람허가신청서 등이 접수되고, 역시 같은 날 <기적>의 제작사 대한연합영화사 대표인 홍의선은 <빙화>와 <기적>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작품이며, 표절을 운운하는 것은 이희중과 백결 두 사람의 문제일 뿐 이것으로 영화 전체가 피해를 입는 것은 억울하다는 요지의 글을 보낸다. (그림 1) 극영화 <기적> 상영허가 보류신청에 대한 회신 이희중의 상영허가 보류신청서가 접수된 지 이틀 후인 3월 29일 공보부는 이희중에게 위의 공문을 회신하는데, 저작권에 관한 문제는 당사자 간에 해결되어야 할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상영허가와 관련한 것은 공보부가 정하는 공적인 영역의 문제이며 시나리오 표절의 건은 작가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사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니 공보부는 어떠한 결정도 내릴 필요가 없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1960년대 초 소설과 표절시비가 일어났던 영화들이 왕왕 있었고, 이 문제를 부풀리기보다는 개인적인 선에서 처리하려던 당시의 관행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이희중은 본인이 냉철히 판단해보니 본 문제로 제3자인 제작사가 피해를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여 자신이 제출했던 상영허가 보류신청서를 철회한다는 서신을 공보부 측으로 보냈고, 6) 이 문제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은 채 조용히 마무리 된다. 이후 <기적>은 어떠한 지적이나 수정사항 없이 필름검열을 통과했고, 1967년 3월 29일자로 영화검열합격증을 받아 다음날 개봉한다. 문제는 개봉 후 《일요신문》 4월 9일자 기사에 <기적>이 폴란드의 영화 <야행열차>를 본뜻 것이라는 영화평이 실리면서부터이다. 이 기사가 나간 후 시나리오 작가 백결과 제작사 대표 홍의선은 4월 15일 일요신문의 편집국장 최병욱과 공보부 영화자문위원 이순근, 취재기자 조관희 등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동시에, 7) 업자협회 측에 <기적>의 표절여부를 판단해달라는 건의서보내기에 이른다. 제작사가 표절의 판단여부를 공보부가 아닌 업자협회에 의뢰한 것이 매우 흥미로운데, 이는 당시 실질적인 시나리오의 심의가 업자협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당시 업자협회는 공보부의 요청으로 1967년 4월 1일부터 산하기구 각본심의위원회를 설치하여 영화의 제작신고 전 자체적으로 각본을 검토한 후 문공부에 제작신고서를 내도록 했는데, 제작사는 <기적>의 표절여부를 바로 이 업자협회의 산하기구에 요청했던 것이다. (그림 2) 심의의견서 업자협회는 각본심의위원 이청기, 이진섭의 심의의견서를 첨부하여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는 의견을 공보부로 보낸다. 사실 업자협회는 <기적>의 표절 여부를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기구로 보기는 힘들다. 당시 영화가 공보부에 제작신고의 신청을 위해서는 사전에 반드시 업자협회를 경유했어야 했는데, 이미 자신들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여 공보부로 경유시킨 이 작품에 대해 표절여부를 객관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같은 해 4월 1일자로 각본심위원회를 설치, 공식적으로 공보부보다 먼저 각본을 심의하게 된 업자협회의 높아진 위상으로 볼 때, 제작사들에 대한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쉽사리 표절판단을 내리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찌됐든 업자협회 측은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는 점을 공보부로 회신했는데, 공보부는 이 결과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륜 쪽으로 다시 한 번 의견을 물으면서 신경전이 벌어진다. (그림 3) 극영화 씨나리오 심의결과 회신 공보부 영화과에서는 6월 10일 예륜에 영화 <기적>의 표절여부를 심의하여 줄 것을 의뢰하고, 약 열흘 후인 6월 19일 예륜에서는 줄거리, 주제 및 구성, 무대설정, 등장인물, 사건, 효과 및 분위기, 기타 소도구 등 일곱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유사성을 분석한 후 “누가 보드라도 표절이라고 해석할 수밖에는 없다고 결정한다.” 이는 업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가 내린 결과와 정반대의 것이었고, 제작사는 이에 발 빠르게 대응한다. 예륜의 결과가 나온 직후인 6월 21일 제작사 대표 홍의선은 바로 공보부 장관에게 예륜의 결정에 대한 불인정통고의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과 통고문을 발송한다. 심의기구에 대한 영화계의 인식 : 제작사 VS 예륜 (그림 4) 예술문화윤리위의 결정에 대한 불인정통고의 건, 극영화 <기적> 표절결정 불인정 통고 홍의선는 이 통고문에서 예륜이 내린 결정에 대한 격앙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이 통고문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과연 예륜이 영화에 대한 심의를 할 수 있느냐?’는 제작사 대표의 물음이다. 홍의선은 이 영화가 이미 공보부에 제작신고, 상영허가신고를 한 후 검열에 합격한 작품으로 공식적인 절차를 거쳤다는 점, 영화평론가나 영화감독, 영화업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와 같은 영화 ‘전문가’들이 표절이 아니라고 인정했다는 점을 들며 영화전문가도 아닌 이들이 이 영화의 표절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월권이 아니냐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당시 예륜의 어정쩡했던 지위에 대한 일침이라 할 수 있다. 1966년 1월27일 발족한 예륜은 4.19이후 자율적인 검열이 필요하다는 요구 하에 생겨났던 많은 민간 심의기구들 즉, 각종 윤리위원회들의 발생과 흐름과 함께 한다. 그러나 예륜이 발족 준비의 아이디어, 발족 후 모든 예산이 공보부에서 나온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예륜이 완전한 민간기구라고는 보기 힘들다.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민간기구였지만 정확히 민간기구도 그렇다고 정부기구도 아닌 예륜의 더 큰 문제는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업무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의 각본은 업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에서 맡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상영허가의 신청은 공보부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예륜은 만약 이 각본에 대한 심의조치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 일시적으로 판단하는 정도에 그쳤다. 8) 어떠한 제재를 가할 수 없는 예륜은 의견을 쉽게 말할 수 없었고 말한다 해도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단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작사 측이 예륜의 결정에 흥분하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통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을 텐데, 이만큼이나 불쾌한 감정을 내비치던 것이 업자협회이다. 업자협회는 공보부가 자신들의 심의의견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륜 측으로 다시 한 번 표절 심의를 넘겼다는 것에 매우 불쾌한 감정을 표시하고 있다. (그림5) <기적> 표절문제에 관한 건의 6월 30일 업자협회가 공보부에 보낸 위의 서류를 살펴보면, 공보부 스스로 업자협회에게 준 권위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항의 의사가 엿보인다. 이 공문에 따르면 ‘업자협회의 표절 여부’를 ‘참고’하여 공보부가 ‘공보부 영화위원회에서 재심 처리’하는 ‘타당한 순서’를 무시하고 ‘전문분야가 아닌 구성원으로 된 예륜’에 의견을 묻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홍의선과 마찬가지로 업자협회 역시 예륜은 이 공식적인 절차에서 끼어들 만한 전문성을 갖추지 않은, 무용한 존재로 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제작사의 통고문이나 업자협회의 건의서에 대해 예륜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 각본 심의에 대한 전문성을 들어 항의하고 있는 업자협회의 태도는 자존심 싸움에 가까웠다. 영화의 제작을 위해서는 업자협회를 거쳐야만 하고, 업자협회가 내린 의견을 공보부가 바로 수용을 해오던 이전까지의 과정에 끼어든 예륜이 탐탁지 않았음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작사의 입장에서 표절여부가 가려지지 않는 것은 실질적인 피해로 남는 것이었다. 업자협회와 예륜의 의견이 정반대로 나뉘고, 이 사이에서 공보부 영화위원회가 표절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기적>은 해외영화제의 출품작에서 모두 제외되었던 것이다. 당시 해외영화제 출품작은 공보부 영화위원회에서 선정했는데, 제작사는 그 해 베니스, 베를린, 아시아 영화제에 <기적>을 출품작으로 신청했지만 표절시비 문제로 인해 어느 곳에도 출품작으로 선정되지 못했다. 해외영화제에 출품되었을 때 받을 수 있는 엄청난 혜택이었던 외화쿼터는 이 지난한 과정 속에서 날아가 버렸고, 제작사는 그만큼의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눈치 보는 공보부 : ? VS ? 상반된 두 심의의견서를 받아든 공보부는 꽤 긴 시간이 지나도록 이 작품의 표절 여부를 가리지 못했고, 급기야 10월 6일에는 아시아 영화제의 국제심사위원으로 일본에 체류 중이었던 여석기 교수, 조경희 여사에게 표절여부를 판단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림 6) 대한민국주일공보관의 업무연락, 영화소견서 그러나 공보부의 요청으로 보내온 심의의견서는 이 자체로는 표절이다 아니다를 판단하기에 매우 애매하게 작성되어 있다. 유사한 부분을 지적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크게 달라진 것인지, 혹은 무엇이 표절여부를 판단할 만큼 결정적인 차이인지 등을 정확하게 명시하지 않은 것이다. 업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나 예륜에서 보낸 심의의견서 등이 정확하게 표절이다 아니다를 결정한 마지막 문장을 포함시켰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견서라 할 수 있다. 당시 기사에서는 동경에서 보내온 심의의견서는 표절이 아니라고 알려왔다고 기술했지만 9) 이 의견서만으로는 그러한 확답을 얻기에 모호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결국 공보부는 이 의견서까지를 받고서야 <기적>이 표절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는데, 이때에도 깔끔하게 마무리 한 것은 아니었다. 공보부는 영화의 시나리오와 스크린에 비친 결과의 차이점을 중시했다 10) 고 말하거나 예륜 사무국장의 말을 옮기고 있는 한 기사에서 공보부의 최종 결단은 시나리오는 표절일 수 있겠으나 영화는 표절이 아니라고 나올 것이라는 추측이 11) 새어나올 만큼 애매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이는 업자협회와 예륜 측 모두의 손을 들어주는 것일 수 있지만 사실상 책임을 회피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림 7) 극영화 <기적> 씨나리오 표절에 관한 건 공보부의 태도가 애매하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기적>은 표절이 아닌 것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1967년 11월 21일로 공보부는 <기적>이 표절이 아니라는 것을 공식화했고, 신문들은 <기적>이 억울한 일을 겪었으며 끝내 표절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에 유일하게 <기적>이 표절작임을 주장했던 예륜은 공보부 장관에게 위의 서류를 보냈던 것이다. 공보부의 이러한 결정은 ‘본 위원회의 심의는 불필요한 것이며 동시에 본 위원회의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니 주의해 달라는 항의에 가까운 공문을 보내지만, 이후 특별한 회신은 받지 못한다. 앞서 업자협회나 제작사의 항의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던 예륜이 공보부의 최종결정에 항의하는 것은 예륜이 공보부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 그리고 공보부에서만 인정받을 수 있는 단체였다는 점 등을 추측케 한다. 이처럼 지난한 과정을 거쳐 <기적>은 표절의 오명에서 벗어났지만, 이미 제작사는 큰 피해를 입은 후였고 영화에 대한 관심도 사그라진 뒤였다. 영화 <기적>의 표절시비 문제를 두고 오간 서류들은 당시의 영화 심의에 어떤 기구들이 관계하고 있었는지, 그 절차는 어떠했는지, 각기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지, 이를 관장하고 있는 공보부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등을 잘 보여준다. 민간심의기구였던 업자협회와 예륜의 알력, 제작사들이 인정하는 민간기구, 그리고 이 사이에서 뚜렷이 어느 한 편의 의견에 비중을 두지 못하는 공보부의 태도 등은 검열을 무조건적인 상하관계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1960년대 후반의 영화검열은 아직 업자협회처럼 영화계 내 민간 기구의 입김이 세게 작용할 수 있었고, 예륜은 어정쩡한 위치에 있었다. 약 10년 후 예륜이 한국공연윤리위원회로 명칭을 바꾸어 발족하고 강력한 사전검열기구가 되는 순간을 떠올린다면 아이러니할 뿐이다. 1) 《경향신문》, 1967.2.11. 이하 본고에서 인용하는 신문기사 중 《신아일보》, 《서울신문》의 기사는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1967)』, 한국영상자료원, 2008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두 신문사의 기사를 인용할 때에는 신문의 발행일자와 함께 위의 책의 면수를 함께 표기할 것이다. 2) 《신아일보》, 1967.2.14.(160면). 3) 《서울신문》. 1967.3.30.(281면). 4) 당시의 심의서류와 신문기사 등은 이 작품의 제목을 <야행열차>와 <야간열차>로 혼용한다. 이 작품은 2012년 부산영화제에서 <야간열차>라는 제목으로 관객에게 공개되어, 현재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을 때에는 <야간열차>라는 제목을 이용하는 것이 수월하다. 이 글에서 역시 확인이 용이한 <야간열차>라는 제목을 사용할 것이다. 5) 영화 <돌아보지 말라>가 단편소설 「임진강」의 표절이라며 제작사의 대표가 피소되거나(《동아일보》, 1964.3.4.), 영화 <진성여왕> 역시 동명의 소설 『진성여왕』의 작가에게 제작사 대표가 피소되었고(《경향신문》, 1964.4.18.), 영화 <흑산도>의 경우 표절시비 작가가 공보부에 상영허가취소요구를 하기도 한다(《경향신문》, 1963.6.19.). 6) 이희중의 진정서취하신고서는 정확한 일자의 표기 없이 1967년 3월로만 적고 있다. 때문에 본 서류를 받은 후에 보낸 것인지 그 전에 보낸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여러 정황상 공문을 받은 후일 확률이 크다. 7) 《서울신문》, 1967.4.15.(318면). 8) 배수경, 「한국영화검열제도 변천에 관한 연구」, 중앙대 석사학위논문, 2004, 37면. 9) 《신아일보》, 1967.11.25.(750면); 《경향신문》, 1967.12.2. 10) 《신아일보》, 위의 기사. 11) 《서울신문》, 1967.12.12.(800면)
삶은 개구리 증후군. 현재 모든 미디어가 처해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모두 데워지기 시작한 냄비 안의 개구리 신세지만, 물이 끓는 줄도 모른 채 넋 놓고 있는 게으른 개구리는 없다. 미디어 환경은 분기별로 트렌드가 바뀌고, 사용자는 이미 모바일 왕국으로 이사를 떠났다. 삶아지기 전에 냄비 밖으로 튀어나가야 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과연 냄비 밖에 우리들이 살아갈 새로운 ‘물’이 존재하는가? 아무도 모른다. 일단 냄비 밖으로 튀어나왔는데, 가도 가도 바싹 마른 모래사막이라면? 튀어나갔다가 더 빨리 죽을지도 모른다. 일단 지금은 살아야 한다. 점차 뜨거워지는 냄비 안에서 괴롭게 버티면서, 다들 사력을 다해 생존 가능한 냄비 밖 개척지를 찾고 있다. 이미 흐물거리기 시작한 ‘종이 개구리’들은 더욱 절박하다. 맥스무비가 2013년 11월 종이 잡지 『맥스무비 매거진』을 복간할 때, 사라져가는 종이 영화 잡지의 귀환을 반기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우려하는 시선이 더 많았다. 오랜 오프라인 기반 미디어들이 ‘디지털 퍼스트’ ‘모바일 퍼스트’를 외치며 종이 대신 온라인에서 생존 가능성을 찾는 차에 온라인 기반이었던 맥스무비가 종이 잡지, 그것도 이제는 종적을 감춘 ‘영화 월간지’를 되살린다니 그럴 만했다. “요즘 사람들은 (잡지)를 안 읽는다”는 조언을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맥스무비가 선택한 ‘종이 월간지’는 오히려 냄비 밖에서 물을 찾으려는 탐험이었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읽지 않는 시대’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미디어는 항상 ‘독자(소비자)’를 향한다고 말하지만, 대개 ‘만드는 사람’ 중심으로 사고한다. 예전처럼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는데, 왜 읽히지 않을까. 이 질문을 파고들 때, 미디어라면 ‘읽을 것이 없는 시대’를 만든 자기 반성이 더 중요한 질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비자 입장에선 ‘돈을 주고 사서’ 읽을 만한 것이 없는 시대가 됐고, 더 큰 책임은 미디어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있다. ‘온라인은 확산 매체, 오프라인은 저장 매체. 온라인 콘텐츠는 공유하고 싶어야, 오프라인 콘텐츠는 소장 하고 싶어야 살아남는다.’ 기존의 온라인 미디어 맥스무비에 월간지 『맥스무비 매거진』을 복간해 ‘On & OFF’ 양 날개를 정비하면서 세운 원칙이다. 온라인 콘텐츠는 빠르고, 쉽게 많은 사용자에게 도달할 수 있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빠르고 쉽게 흘러가 버린다. 다들 공들여 콘텐츠를 만들지만, 수많은 뉴스피드 안에 섞여 들어가면 비슷비슷하게 보인다. 무엇보다 온라인 콘텐츠는 대개 ‘무료’다. 전문 미디어로서 생존하기 위해선 반드시 우리만의 무기가 필요했고, 유가 종이 잡지가 새로운 무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여기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콘텐츠는 그 성질이 달아야 한다. 하나의 콘텐츠를 그저 양쪽 그릇에 옮겨 담아선 안 된다. 그래서 월간지의 방향을 ‘대특집’으로 잡았다. 한 가지 이슈를 정해 잡지 전체 콘텐츠의 60% 이상, 매달 80~1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특집 이슈로 채웠다. 오프라인 콘텐츠는 일부 확산 가능한 아이템을 제외하면 온라인에 무료로 발행하지 않기로 했다. 콘텐츠에 돈을 지불하고 소장한 사용자에게 지불 가치를 보존해줘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3년간, 36권의 잡지 중 몇몇 이슈는 즉각적인 독자의 반응을 얻어 완판 사례를 기록했다. 판매율도 높아져 평균적으로 손익분기점을 넘었고, 매진된 이슈가 중고 사이트에서 웃돈을 얹어 거래되는 걸 흐뭇하게 지켜보기도 했다. 타 월간지보다 가격을 높게 책정했고, 부록 등의 부가 선물을 제공하지 않고 얻은 성과였다. 분명히 긍정적인 신호를 확인했지만, 시행착오의 기간이기도 했다. 어렴풋이 선택과 집중의 윤곽을 더듬었지만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말이 쉽지, 독자의 소장 욕구를 자극하면서 영화 전문 미디어로서 아카이빙의 가치를 갖는 콘텐츠를 매달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가장 어려운 것은 ‘골라 담기’였다. 한 주에 평균 크고 작은 20여 편의 영화가 개봉하고, IPTV로 직행하는 영화들도 있다. 영화와 관련된 책과 공연도 줄줄이 등장한다. 감독, 배우, 스태프 등 놓치고 싶지 않은 인물도 많다. 모든 ‘NEWS’는 즉각 온라인 피드가 되어 돌아다니기 때문에 미리 취재해서 월간지에 실어도 종종 뒷북처럼 여겨졌다. 한정된 인원으로 온라인 콘텐츠는 속도 경쟁에 합류하면서, 오프라인 콘텐츠의 소장 가치를 강화하는 일이 힘에 부쳤던 것도 사실이다. ‘투 트랙’ 전략은 우리 모두에게 낯설었고, 전례도 없었다. 콘텐츠를 만들 때, 더하기보다 빼기가 열 배쯤 중요하다는 걸 3년의 시행착오 끝에 배웠다. 원 이슈 『맥스무비 매거진』, 원피스 ~ 봉준호 ‘백 가지를 나직하게 속삭이지 말고, 한 가지를 크게 부르짖어라’ 책 『미친 듯이 심플』 2016년 12월 『맥스무비 매거진』 시즌 2 ‘원 이슈 리뉴얼’은 쉽지 않았던 ‘빼기’의 결과물이다. ‘대 특집’을 내세우면서도 이 영화도 빼면 안 될 것 같고, 이 인물도 빼면 안 될 것 같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지 않겠냐며 주섬주섬 담았던 게 사실이다. ‘잡지는 잡스러워야, 잡지’라는 오랜 습관을 털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올인’은 살 떨리는 배팅이다. 우리가 선택한 하나가 독자에게 외면받으면 끝이라는 두려움도 컸다. 하지만 하나를 크게 부르짖기 위해선, 다른 것을 빼는 것 말곤 방법이 없다. 활성화된 온라인 플랫폼이 있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첫 원 이슈 『맥스무비 매거진』 37호의 주제는 < 원피스 >였다. 다른 데서 볼 수 없었던 우리의 콘텐츠가 필요했다. 10년 넘게 원피스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빌려줬던 국보급 성우들을 한 자리에 모았고, 일본 도쿄 타워에 위치한 ‘원피스 테마파크’로 취재를 떠났다. 시도 때도 없이 “나는 해적왕이 될 거야!”를 외치는 루피의 무대뽀 정신을 우리에게 세뇌시켰다. “가자! 그곳이 어디든!”은 우리의 등을 다독여주는 대사처럼 들렸다. 첫 원 이슈 매거진 <원피스>는 고맙게도 완판됐고, 재판을 찍었다. 이후 ‘신카이 마코토’ 이슈 38호는 < 너의 이름은. > 촬영지 직접 투어 콘텐츠가 회자되며 판매 신기록을 세웠다.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단독 인터뷰를 진행한 이슈 39호 ‘로건’, 2017년을 빛낼 라이징 스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한국에서 발행된 봉준 호 감독의 첫 단행본 형식 매거진 ‘봉준호’, 지천명 아이돌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은 배우 설경구의 25년을 담은 ‘설경구는 아름답다’까지 원 이슈를 이어왔다. 고맙게도 독자들은 지갑을 열었고, 완판 보도 자료를 여러 번 낼 수 있었다. ‘읽지 않는 시대는 없다’고 말해주는 독자들 덕분에 매번 용기를 얻고 있다. 물론 ‘원 이슈’라는 길을 앞서간 훌륭한 매체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다. 일본의 기획 매거진 『부루투스』 『뽀빠이』의 지속성, 한국의 브랜드 원 이슈 『매거진 B』가 닦아 놓은 단행본 형식 매거진의 가능성을 영화 잡지에 접목 시켰다. 마침 문학계에서도 『릿터』 『악스트』 『미스테리아』 등의 잡지가 창간되어 주목받았다. 마침 올해 6월, 데이비드 색스의 『아날로그의 반격』이 출간되면서 ‘한물갔다’고 조롱당하던 낡은 것들의 ‘반격’이 시작된 것 같은 흥분도 있었다. 이 책의 원제는 ‘아날로그의 복수 THE REVENGE of ANALOG’다. ‘레거시(Legacy)’라는 우아한 오명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했던 오프라인 미디어에겐 ‘반격’이 더욱 통쾌하게 들리겠지만, ‘복수’가 더 정확하고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반가운 마음에 『아날로그의 반격』을 오독할 수도 있다. 아날로그의 반격이 시작되었으니 과거의 종이 잡지를 그대로 만들어도 사 줄 독자가 있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은 망상에 가깝다. 지금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대등하게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다만 이 책은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말살시킬 것처럼, 아날로그는 완벽하게 숨이 끊어진 것처럼 떠들던 호들갑이 ‘팩트’가 아님을 확인시킨다. ‘아날로그’ 혹은 ‘종이’라는 이유로 덮어놓고 한물간, 구태의연한, 혁신적이지 못한, 박물관에서나 구경할 법한 ‘유물’ 취급을 하는 것인 매우 쉽다. 동시에 게으르다. 한편으로는 디지털 독트린에 휩쓸려 디지털이라는 껍데기만 주물럭거리다가 낭패를 본 경우도 수두룩하다. 뉴스피드에 난무하는 큐레이션을 가장한 카피 콘텐츠는 미디어 신뢰도를 깎아 먹었고, 조각난 정보로 오독을 불러일으키고, 조회 수 낚시질에 열을 올리다가 ‘기레기’라는 오명을 얻지 않았나. 게다가 모두 디지털을 외치고 있지만, 디지털 미디어는 아직 괄목할 만한 매출 구조를 찾지 못했다. “자동차가 발명됐다고 말이 사라진 게 아니다. 비싸고 귀해졌을 뿐.” 『뉴스위크』프리미엄 인쇄본 재창간 축사에서 2013년 종이 잡지를 폐간한 『뉴스위크』가 1년 만에 『뉴스위크』 프리미엄 인쇄본을 재창간 하면서 일러 준 교훈이다. 『맥스무비 매거진』원 이슈를 발행하면서 얻은 교훈을 덧붙이자면, ‘종이 잡지’는 비싸고 귀한 말을 탄 ‘경험’을 공유하는 사용자가 있어야만 가치가 생긴다. 특히 ‘신카이 마코토’와 ‘로건’ 그리고 가장 최근 발행한 43호 ‘설경구는 아름답다’를 만들면서 독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는 데 얼마나 적극적이고 열성적인지 놀랍게 확인할 수 있었다. 디지털 시대의 콘텐츠 사용자들에겐 경험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최근 원 이슈 매거진 발행 후 우리는 동일한 콘텐츠 경험이 타인과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되어 준다는 걸 확인했다. 콘텐츠 구매 경험을 통해 연결되고 싶은 욕구를 가진 독자를 찾아내고, 그들이 소장 하고 싶어 하는 이슈를 탐색하는 예민함이 에디터에게 어느 때보다 필요한 자질이라는 걸 배워가고 있다. 모든 사람이 좋아할 만한 이슈를 찾는 건 유니콘을 찾는 것과 같다. 원 이슈 『맥스무비 매거진』은 앞으로 ‘콘텐츠를 사고 싶어, 살 수 있는’ 사용자가 잡지를 손에 쥐고, 책장을 넘기는 그 경험을 만족시킬 콘텐츠를 찾기 위해 더욱더 눈에 불을 켤 생각이다. 사족이지만, 비싸고 귀하지만 소장할 만큼 가치 있다고 판단할 수준의 콘텐츠 완성도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독자는 귀한 줄 안다면, 귀한 대접을 하는 게 당연하다. 구구절절 길게 적고 보니, 실은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를 혼자 비장하게 떠든 것 같아 부끄럽다. ‘맥스무비’가 온라인 영화 미디어로 쌓아온 시간이 18년, 유가 오프라인 잡지를 발행한 지 4년이 됐다.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아직 쌓아가야 할 것이 더 많다. 오프라인 매거진은 더욱 공들여 독자를 만족시켜야 하고, 온라인 미디어는 더 빠르게 퍼져나가야 한다. 맥스무비 동영상 콘텐츠는 가벼운 스낵 스타일을 탈피해 더욱 ‘영화적’인 콘텐츠로 방향을 잡았다. 온라인에 무료 배포하지 않았던 종이 잡지 콘텐츠는 디지털 그릇에 제대로 담아 유료화 서비스로 선보일 계획이다. 반드시 바뀌어야 하는 것과 절대 바뀌지 않을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미디어 종사자들의 숙명이니 앓는 소리 할 것도 없다. 가끔 예전이 그리울 때도 있다. 영화 한 편을 보고, 인터뷰를 한 뒤, 대화하고 생각하며, 글을 다듬고 또 다듬어서, 며칠 불면의 마감을 보낸 뒤 따끈한 잡지 한 권을 들고 소주 한잔하러 가면 일이 끝났던 때. 하지만 시간은 똥도 꽃으로 만든다고 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한 번도 쉬운 적은 없었다. 그래서 눈이 팽팽 돌아가는 이 시대도 즐겁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영화만을 말할 수 있는, 영화 전문 미디어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