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가자
- 감독
- 정동민, 김현승, 이원현, 오병호, 이미지
- 제작년도
- 2007
이두용 의 영화 < 최후의 증인 >의 결말은 의아하다. 모든 사건이 마무리되고 주인공인 형사 오병호( 하명중 )도 수사 과정 중 범했던 살인 죄목으로 체포되어 이제 법의 심판대에 서야 할 처지다. 하지만 오병호의 살인은 스스로의 주장처럼 정당방위에 해당하므로 법은 그의 편이 되어 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그가 그다지 낙망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그 때 오병호는 사람들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강가의 갈대숲으로 홀린 듯이 걸어 들어가더니 입안에 총부리를 넣고 급히 방아쇠를 당겨 자결한다. 그리고 영화는 종료된다. 그러니까 이것이 의아하다. 아니, 의아해서 흥미롭다. 오병호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하는가. 감독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사람을 보호하려고, 약자를 보호하려고 했던 자신의 피땀 어린 노력이 결과적으로 그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들의 아픈 상처를 파헤쳤다는 자책, 자신을 포함해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을 보호해주지 않았고 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다는 자책과 속죄” 오병호가 살인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한국전쟁 중 있었던 황바우( 최불암 )와 손지혜( 정윤희 )의 억울한 사연들이 속속들이 드러난다. 그리고 오늘날의 살인 행각도 그들의 자식인 태영이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벌인 사건이었음이 밝혀진다. 하지만 태영은 이미 미쳐 버렸고 태영의 죄를 대신하여 용서를 빌며 양아버지 황바우가 자살하자 손지혜도 남편인 황바우를 따라 자살해버린다. 오병호는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또 다른 비극을 만든 것이다. 그러니 감독의 설명은, 이 복잡하고도 비극적인 상황 앞에서 무력감과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오병호가 인간적 자책과 속죄의 행위로써 자결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인과에 따른 결과라는 점을 추정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우리에게 의아하고도 흥미로운 것은 서사적 무리를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그 인과를 납득시키려는 이 영화의 감정적 자세와 강도다. 이를테면 자신에게 하달된 업무를 이행했을 뿐인 일개 형사가 의도치 않은 죽음들의 속출 앞에서 도덕적으로 괴로워할 수는 있다 해도 정녕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극단적 행위로 속죄를 결행해야만 하는 것인가 하고 누군가는 또 반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최후의 증인>의 결말부 오병호의 자결은 이 영화가 모종의 도덕적 과잉 상태에 진입해 있음을 여실히 시사한다. 그러니 여기서의 핵심은 이 도덕적 과잉의 상태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된다. 이 사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관객에게라면 우리가 의아하다고 표현한 도덕적 과잉은 더없이 흥미로운 무엇이 될 것이다. 요컨대 <최후의 증인>의 무엇이 우리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인가 질문할 때 그 흥미로움을 자아내는 활동의 요체는 사실상 전쟁이라는 비운의 역사나 그 참혹하게 뒤엉킨 복수극 혹은 한 여인의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수난의 연대기(손지혜) 혹은 천하고 낮은 신분을 지녔으나 더없이 선한 한 남자의 억울한 옥살이(황바우) 같은 것에 있지 않다. 핵심은 진흙탕 같은 과거사와 관계 속으로 몸소 휩쓸려 다니는 동시에 관객인 우리 또한 끌고 다니는 오병호의 난처한 활동에 있으며 그 활동 중에 일어나는 그의 심정과 감정의 비극성에 있고 그 비극성을 통해 겪어지는 오병호라는 인물의 존재론적 변화 과정에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자 오병호의 자결은 그렇게 변화되어간 존재의 최종적이면서도 불운한 선택에 해당된다. 이렇게 더 줄여 말할 수도 있다. <최후의 증인>의 흥미로움은 오병호라는 인물의 존재론적 변주에 있다.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다음과 같이 다른 각에서 진입해 보아도 사태는 유사하다. 따지자면 <최후의 증인>의 영화적 매혹은 이두용의 영화가 예의 성취해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특별한 미장센이나 시각적 운동성 등에 있지 않다. 그러한 점들은 < 경찰관 >의 초반부, 빗속의 두 경찰관과 장대 같은 빗줄기, < 장남 >의 결말부, 아파트 꼭대기에서 붉은 천에 쌓여 공중에 뜬 채로 크레인에 실려 위태롭게 위에서 아래로 휘청거리며 내려오는 관, <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의 중반부, 방안에 잠시 우두커니 서서 주요 사물들과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뤄내는 한 여인의 육체적 형상, < 피막 >의 종결부, 불길하면서도 활기찬 마지막 움막의 화재 장면 등에서 훨씬 더 뛰어나다. <최후의 증인>에서 압도적인 것은 시각적 요인들이 아니다. 비밀과 사연과 비극의 힘으로 철저하게 전개되는 내러티브 연쇄성과 그 연쇄 안에서 심리적 긴장감을 느끼는 주인공 오병호의 방황이 이 영화의 압도적인 면모다. 오병호는 여기서 질문이라는 사유의 활동 자체이며 이리저리 차이고 건네지는 감각의 공일뿐만 아니라 거대한 내러티브를 자신의 훼손되어 가는 몸과 정신으로 짓고 꿰어 나가는 매개자다. <최후의 증인>에서 여기서 저기로 이동해가며 운동하는 것이 있다면 혹은 스스로 변해가는 것이 있다면 그게 바로 오병호의 존재다. 때문에 그는 형사로 시작하지만 형사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마감된다. 오병호의 존재에 대해서는 사실 처음부터도 잘 알 수 없다. 다른 부하가 아니라 그가 왜 이 사건을 맡아야 하는가에 관하여 설명하는 서장도“누군가는...”이라는 납득할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오병호 자신도 여기에 뚜렷한 확신이나 반문을 갖지 않는다. 예컨대 오병호에 관하여 인상적으로 특별히 흥미로운 건 그가 적어도 여느 경찰이나 형사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그는 때때로 날렵한 형사가 아니라 예민한 기자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가. 영화도 이와 같은 점을 얼마간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오병호에게 호감을 느끼는 초등학교 교사가 그의 외양을 두고 “미남”이라고 칭찬하면서“경찰 같지가 않아서 그래요”라고 말하는 것은 흘러가는 대사로만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더하여 오병호가 정말 유능한 경찰이나 형사라면 그는 사건을 그렇게 추적해 나가선 안 되었을 것이다. 양조장 주인의 죽음으로 가장 크게 이득을 갖게 되는 자는 누구인지, 살인 사건의 현장에는 정확히 누가 있었는지 등 흔히 우리가 범죄 수사물의 클리셰로 보아온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의문과 수사 과정들이 여기에는 거의 없거나 뒤늦다. 대신 오병호가 집중하는 일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회고를 따라가고 채록하는 것이다. 오병호는 묻혀 있던 과거사를 캐낸다. 대개 그가 만나는 관계자는 살인 사건에 직접적으로 결부된 용의자나 증인들이 아닌데다가 그들로부터 듣는 것은 사건에 대한 긴밀한 증거라기보다는 참혹한 역사의 한 부분이어서 그가 행하는 일은 살인 사건에의 탐문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를 탐문하는 일이 되고 있으며 때문에 그는 형사가 아니라 어느 지역 주민들의 소사를 연구하는 역사가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오병호는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들을 두고 그렇게 오래오래 돌아서 간다. 그가 형사로서 얼마나 무능한 자인지는“손지혜는 살인 같은 걸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단정 짓는 것에서 가장 확실히 드러난다. 그는 사실관계가 아니라 자신이 한 인간에게서 마음으로 느낀 인상과 인성에 추론의 근거를 둔다. 그러니 그는 얼마나 무책임한 탐문관인가. 그는 더 이상 형사가 아닐뿐더러 사실을 챙겨야 하는 저널리스트의 성격조차도 포기하고 소사를 기록하는 역사 기술자의 행위에서도 주춤한다. 그가 점점 더 중시해 가는 것은, 가령 손지혜에게서 그러한 것과 같이, 그의 눈앞에 있는 인간들에게서 느껴지는 막연한 도덕성이며 동시에 그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도덕성이다. 그 때문에 그는 때때로 지극히 혹은 과잉적으로 괴로워하거나 분노에 가득 찬다. 예컨대 황바우를 모함한 한동주의 동생을 취조하는 장면에서 그의 과잉된 분노를 우린 접하게 된다. 오병호의 자결에 관하여 던졌던 같은 질문을 이때에도 할 수 있다. 가령, 오병호는 왜 저토록 분노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형사도, 기자도, 역사가의 기질도 이즈음 모두 사라진다. 영화의 후반에 이르자 오병호는 마치 도덕이라는 종교에 몰두하고 헌신하는 하지만 다소 광신적이어서 폭력적 수행을 일삼기도 하는 그런 종교 수행자의 모습을 갖춘다. 오병호에 관하여 경찰서장이 지나치듯 했던 말에서 몇 가지를 뽑아 요약 연결해야만 하겠다. “그는 거대한 뜻이 있는 사건을 수사 중이고 그건 우리 모두가 책임 져야 할 문제이지만 대신 그가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병호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이 사건은 제가 꼭 해결하고 싶습니다” 하면서 다 부서져 가는 몸을 추스른다. 하지만 실상 오병호는 해결할 수 없고 단지 떠맡을 뿐이다. 오병호는 해결 불가능한 미욱한 인간 세계의 비극을 맹렬한 종교적 신념으로 기꺼이 떠맡아 흡수하려는 일종의 성자의 자세를 자처하게 된다. 하지만 이 성자는 완결하지도 무결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히스테릭하다. 그는 이미 병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러티브의 예상치 못한 격전과 혼란 속에서 오병호라는 인물의 존재는 시시각각 변주를 거듭해가다가 마침내 어떤 병적인 성자라는 기묘한 부정합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최후의 증인>은 마침내 그 병적 성자의 탄생과 그의 히스테릭한 순교라는 최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영화의 결말부에서 갑작스럽게 행해지는 그의 자결은 단순히 가여운 이들에 대한 혹은 자신 때문에 또 다른 피해를 겪은 이들에 대한 순진한 속죄나 책무로만 말해지기는 어려운, 저 스스로 심각할 대로 심각한 존재론적 다각화의 변주를 겪어나간 결과 마침내 병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어느 성자의 자리에 스스로를 세운 오병호라는 인물의 히스테릭한 도덕적 경련이며 자해적 순교다. 역사의 비극 앞에서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며 숨겨진 진실을 자신의 몸과 정신에 새겨 오던 오병호라는 내러티브적 공은 부풀대로 부풀어 팽창한 뒤에 마침내 스스로 터져 버리기를 택한 것이다. 그러니 뒤집어 말하면, 오병호라는 이 공의 모양새가 변하고 팽창하여 마침내 터져 버릴 때까지 속절없이 몰아 나아가며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만들어 버리는 그 긴장감의 강도, 그것이야말로 <최후의 증인>의 진정한 매혹이다.
얼어붙은 땅에 비가 내려 곤죽이 된 진흙탕을 밟고 걸어가는 사내가 있다. 사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깊게 파인 발자국이 남고, 그가 신은 구두는 진흙탕이 집어삼킨다. 사내는 진흙탕에 빠진 구두를 양손에 들고 진흙 범벅이 된 양말 차림으로 비바람이 몰아치는 길을 걷는다. 살을 에는 비바람에 사내는 손에 쥔 구두를 들어 귀마개를 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짓을 하며 계속 걷는다. 그는 살인 사건의 용의자들을 추적하는 형사 오병호( 하명중 )다. 앞으로 그가 사건을 조사하며 듣는 말들은 귀를 막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오병호가 살인사건 용의자들의 자취를 찾아가면서 감추어졌던 진상이 드러나는데, 살해된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이었고, 살인 사건의 범죄 용의자들이 커다란 슬픔을 지닌 피해자들이란 것이다. 살해당한 자들이 저지른 끔찍한 죄악이 드러나고 한국전쟁이 끝난 지 20여 년이 지난 그때까지도 지리산 공비, 토벌대, 빨갱이, 학살이란 이름의 악령들이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범인을 잡으려 하는 오병호 형사의 앞길을 막고 있다. 하드보일드 영화가 이야기를 풀어 가는 태도대로 오병호 형사는 수사를 하면서 수많은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 대부분이 자신들이 저지른 죄가 드러날까 두려워 이방인을 경계의 눈초리로 꼬나보고 투박하고 무뚝뚝하게 처신하는 70년대의 대한민국 남성들이다. 젓가락 장단과 작부의 처량한 노랫소리가 가득한 술집 골목을 들어서는 오병호. 그는 추위도 피하고 목도 축일 겸 초라한 술집에 들어가 막걸리 한주전자를 시켜 놓고 난롯가에 앉아 늙은 술집 여주인과 이야기를 나눈다. 늙은 술집 여주인의 푸념과 넋두리가 시작되고, 오병호가 지역 사정을 청취하려 질문을 던지는 순간, 좁은 술집의 골방 창호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이불을 덮어쓰고 누워있던 중년의 사내가 입에 담배를 꼬나물고 서슬이 시퍼렇게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여주인의 말을 막는다. 늙은 여주인의 아들인 사내는 처음 본 낯선 남자에게 신세타령하며 자신이 사는 지역의 사정을 말하려는 어머니가 못마땅하여 입을 막아 버린 것이다. 아마도 그는 어머니가 술을 팔아 번 쥐꼬리만 한 푼돈을 빼앗아 밤이 되면 도박을 하거나 여자를 찾아가는 자일 것이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부는 해질녘, 마당에서 펌프질을 하며 저녁 찬거리를 씻는 늙은 여자에게 다가가 탐문을 하는 오병호. 늙은 여자가 꽁꽁 언 손을 비비며 형사의 물음에 답하려 하자, 사랑방 문이 벌컥 열리며 아랫목에 이불을 깔고 누워 있던 사내가 험상궂은 얼굴을 내밀며 이방인과 대화를 하려는 늙은 여자의 입을 막는다. 우리 마을의 사정을 타지에서 온 사람에게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눈이 무릎까지 쌓인 강원도의 깊은 산골 외딴집. 굽은 허리로 산에서 나무장작을 해 지게에 지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마당으로 들어선 할머니에게 오병호가 다가가 말을 걸자 이번에도 골방의 문이 벌컥 열리며 젊은 청년이 낯선 이방인과 이야기를 하려는 할머니의 입을 막는다. 청년은 무릎 아래가 잘려져 나간 한국전쟁의 상이군인이다. 형사가 찾아가서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이방인을 경계하고 자기 마을의 사정과 사건의 진상을 덮으려 하고, 늙은 어미와 늙은 아내를 겨울바람 속에서 일하게 하고 자신들은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덮고 누워 하루를 까먹으며 무위도식하는 자들이다. 형사가 만난 남자 중에서 일을 하는 자들은 비바람이 부는 외딴곳의 창고에 숨어서 온몸에 돼지 피를 묻히고 밀도살을 하거나, 거드름을 피우며 책임 전가를 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공무원들이다. 영화 속에서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순리대로 살아 보려고 한 남자들은 힘이 세고 교활한 남자들에 의해 죄를 뒤집어쓰고 교도소로 가거나 죽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비루하고 포악하게 변해버린 한국 남성들의 폭력적인 어두운 모습이 이 영화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 영화에서 한국 남성들의 비루한 모습이 이토록 예리하게 담긴 영화는 < 최후의 증인 >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 협잡과 권모술수, 배신으로 온몸을 무장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한 짓이고 남들도 다 그렇게 했다’는 더러운 변명을 방패로 해방과 전쟁의 와중에 남의 것을 강탈하여 치부한 양달수( 이대근 )가 그의 아내와 딸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에서 살아남고 성공한 한국남자들이란 어떤 존재인가가 예리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양달수의 양조장 마당 신이다. 양달수는 지리산 공비 토벌대장의 완장을 차고 온갖 더러운 짓을 벌이고, 양조장을 강탈하여 치부해 남부러울 것이 없는 몸이다. 최고급 한산모시로 만든 옷을 입고 입에 곰방대를 문 양달수가 양조장 마당에 서 있다. 토벌대장 시절의 초라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지역 최고의 부자이자 유지가 되어 한눈에도 부자 티가 줄줄 흐른다. 학교 수업을 마친 양달수의 딸이 마당으로 들어선다. 하얀 여름 교복을 입은 그녀는 활기차고 싱그럽다. 부자 아버지와 남부러울 것이 없는 환경에서 자라난 예쁜 딸. 언뜻 보기에 아름다운 풍경이다. 아버지와 딸의 사랑이 듬뿍 담긴 인사가 오가고, 딸은 부엌에서 나오는 어머니에게 반갑게 달려가는데, 양달수와 마주친 어머니( 정윤희 )는 그와 마주치자 딸의 인사에 제대로 대구를 안 하고 마치 더러운 것을 피하듯 황급히 방안으로 도망친다. 그 모습은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하고 혐오가 가득한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을 피해 사라져 버린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양달수는 “또 그런다. 쌀쌀맞게”라며 무안함을 얼버무리려는 듯 말한다. 어머니 손지혜(정윤희)는 양달수를 비롯한 악당들에게 배신당하고 모든 것을 강탈당한 여자다. 그녀는 악당 양달수에게 결혼이란 이름으로 납치되어 눈과 입을 닫고 포로로 살아왔던 것이다. 양달수는 그녀가 왜 자신을 벌레 보듯 피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양달수는 자신과 그의 일당들이 그녀에게 저지른 사악한 죄를 성공을 위해 일하다 생긴 당연한 사건이었다고 깊숙하게 묻어 두고는, 그녀가 남편인 자신을 존경하지 않고 벌레 보듯 하는 것을 넓은 아량으로 용서할 수 있다는 듯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여성에게 죄를 지은 남성이 그 죄를 애써 외면하는 장치로 허세를 사용하는 것이다. 납치된 어머니와 악당 아버지 밑에서 사는 딸은 발랄함과 쾌활함으로 끔찍한 가족사를 치장하려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그녀의 노력은 역부족이었고,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손지혜와 황바우( 최불암 ) 사이에 난 아들 역시 부모들에게 죄를 저지른 악당들의 죄를 응징하려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악업은 대를 물리며 자식들까지 파멸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 <최후의 증인>은 추악한 죄를 애써 덮으려 했지만 덮어 놓은 흙 밖으로 비어져 나온 진상이 드러나면서 벌어지는 비극의 하드보일드이다. 라스트, 감당 못 할 진상의 무게에 못 견디고 총구를 입에 쑤셔 박는 주인공의 최후까지 이 영화는 한눈을 팔지 않고 죄의 근원을 따라 족적을 찍으며 간다. 1970년대 말, 살을 에는 강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동토의 왕국에서 만들어진 영화 <최후의 증인>은 1980년에 집권한 신군부의 검열관들이 훼손하고 조롱하며 흙더미로 덮어버렸지만 추악한 흙더미를 뚫고 20여 년 만에 부활한다. 어쩌면 이렇게 영화의 내용과 영화의 운명이 일치하는지.
“굉장한 영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몰입해서 봤다. 이두용 감독의 다른 영화들도 다 챙겨볼 생각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 최후의 증인 >을 처음 본 베를린영화제 포럼 위원장 크리스토프 테레히테는 이 영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올해 이두용 감독의 회고전을 준비한 입장에서 해외 영화제의 이런 반응은 일한 보람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다. 영상자료원에서 때마침 디지털 복원한 <최후의 증인>을 완성, 부산에서 선보인 것도 해외 영화제 관계자들에게 이 영화를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이두용 감독 본인은 이렇게 <최후의 증인>이 다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데 큰 기쁨을 표했다. 그가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온 것 같다”고 말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1980년 제작된 이 영화는 개봉 당시 검열 문제 때문에 40분 이상이 삭제된 채 개봉했고 완전히 잊힌 영화가 됐다. 2006년 삭제 이전 원본이 공개되자 비로소 이두용의 최고 걸작이라는 평가를 얻게 됐고, 다시 오랜 세월이 흘러 올해 화면과 음질이 개선된 복원판을 선보인 것이다. 국내외 영화인 가운데 많은 이가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후의 증인>에 출연했던 배우 최불암, 동시녹음을 담당했던 배우 양택조 씨도 완성된 지 36년 만에 처음 <최후의 증인>을 봤다며 감격했다. 영화 외적인 화제가 많지만 < 최후의 증인 >은 작품 자체로 더 많이 논의돼야 할 영화다. 한국전쟁에 기원을 둔 비극의 사슬을 그리는 이 영화에는 2명의 대표적인 피해자가 등장한다. 한국 현대사의 모순을 대변하는 듯한 이 두 사람은 손지혜( 정윤희 )와 황바우( 최불암 )이다. 지리산 빨치산 사령관의 딸인 손지혜는 토벌작전을 피해 숨어있던 곳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황바우 덕에 간신히 살아나지만 다시 몸을 빼앗기고 원치 않는 사람과 20년을 살아야 하는 고통을 당한다. 순박한 남자 황바우는 손지혜를 지키려 무던히 애쓰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고 출옥을 한 뒤에도 아내와 아들과 함께 하는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2명 모두 이데올로기와 아무 관련 없는 인물이건만 그들은 철저히 짓밟힌다. 전쟁의 그림자 아래 숨어 있던 인간들의 욕심이 괴물 같은 형체를 드러내고 약자들의 몸과 마음을 찢어놓는다. 이들의 한 많은 사연을 파헤치는 인물로 형사 오병호( 하명중 )가 등장한다. 영화는 오병호 형사가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을 통해 수십 년에 걸친 기막힌 사연을 속도감 있게 보여준다. 이두용 감독의 대담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 전개능력이 십분 발휘된다. 이야기 자체가 갖고 있는 힘과 무게가 대단한 영화인데, 그중 아주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은 오병호 형사의 캐릭터이다. 차디찬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 낡은 코트를 입고 쓸쓸하기 짝이 없는 시골 마을을 누비며 사건을 추적하는 이 남자는 처음부터 대단한 정의감을 가진 인물은 아니다. 어찌 보면 그는 지나치게 냉정하고 때로 야비한 느낌마저 준다. 그가 지리산 빨치산 부사령관이었던 강만호를 만나 그의 증언을 듣고 취하는 태도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곧 죽을 것 같은 노인 강만호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줄 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아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태도로 강만호의 집을 나서던 오병호 형사는 강만호의 죽음을 목격한다. 고의가 아니었지만 자신의 말로 사람이 죽었다. 오병호 형사가 나중에 손지혜와 황바우의 사연에 감정이입을 하며 그들 편에 설 수 있던 것은 자신이 강만호를 죽였다는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이두용 감독은 오병호 형사를 정의감 투철한 영웅이라는 일차원적 캐릭터로 만들지 않았다. 그는 시대의 어둠에 다가가며 결국 스스로 감당 못 할 진실에 도달한다. 역사의 진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역사의 희생자가 얼마나 처참하게 망가졌는지를 오병호 형사는 최후의 증인이 되어 목격한다. 분단의 아픔을 다룬 수많은 영화 가운데 < 최후의 증인 >은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직접 전쟁을 다루지 않고,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그리지 않고서도 이 영화는 한국 현대사의 모순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보여준다. 가해자들은 단죄되지 않고 피해자들의 억울함은 더해만 간다. 영화는 이 비통한 사연이 대를 이어 유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최후의 증인>이 제작된 1980년 광주에서 억울한 이들의 죽음이 있었다. 영화 속 비극은 다시 현실이 되고 세월호의 침몰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인간의 이기심, 욕망, 사리사욕이 빚어낸 한국 현대사를 <최후의 증인>은 증언할 뿐 아니라 예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