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익스프레스
- 감독
- 조남국
- 제작년도
- 2005
- 출연
- 조재현, 송윤아, 차인표, 김효진, 오상무, 이아이, 정애연, 조상기, 윤현숙, 박근형
이 영화는 공포영화가 아니다. 아마 제목을 보고 먼저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 원한의 두 꼽추 >는 무협영화이다. 그렇게 부르기는 했지만 그 시절 충무로에서는 일부러 (해서는 안 될 유치한 짓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으로) ‘칼쌈’ 영화라고 부르거나 칼 소리가 부딪친다고 해서 의성어를 빌려 ‘짠짠바라’라고도 불렀다. 물론 이 표현은 일본영화에서 시대활극이나 임협물(任俠物)의 ‘殺陳’ 활극 시퀀스를 부르는 짠바라(チャンバラ)에서 온 말이다. 임권택 의 영화에서 무협영화는 1967년 < 풍운의 검객 >으로 일시적으로 나타났고 그런 다음 < 잡초 > ‘이후’ 그의 목록에서 완전히 사라진 장르이다. 종종 무기력한 방향상실. 나는 지금 < 뇌검 > < 월하의 검 > < 비검 > < 요검 >, 그리고 < 삼국대협 >을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이 제목들을 연도별로 순서대로 썼다. 이 영화들이 기괴해 보이는 것은 시행착오를 통해 자기의 세계를 확장시켜나간 임권택의 영화 중에서 유일하게 점점 나빠져 갔다는 것이다. 임권택은 이 영화들에 거의 공감하지 못했다. 그가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시절 연달아 서울에서 개봉한 호금전의 < 용문의 결투 >와 장철의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獨臂刀 )>를 흥미진진하게 보았다고 대답하긴 했지만 영화적으로 아무런 공명을 하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임권택은 이 실패들을 이미 준비된 결과처럼 받아들였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직업감독으로 그저 제안을 받으면 찍어야 했던 그런 시절이 내게 있었던” 영화들이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임권택은 이 영화들을 만들면서 반대로 직업감독으로서 자신의 위치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내가 사라져 가는 과정에 놓인 증명은 아닐까. 몰락해가는 영화산업. 참혹한 이중검열. 한국영화에서 1970년 혹은 1971년은 설명하기 까다로운 시간이다. <뇌검> <월하의 검> <삼국대협> 이 영화는 제목이 두 개다. 다른 제목은 <흑룡가의 쌍검>인데 (영진공 시절에 정리한) 예전의 감독 연보에는 두 편의 제목이 마치 다른 영화처럼 각각 등재되어 있었다. 같은 영화사. 같은 감독. 같은 배우, 같은 각본, 같은 촬영. (정리된 문헌에 따르면) 거의 같은 내용. 그래서 처음에는 한 편의 영화 스텝들과 배우들을 이끌고 동시에 두 편의 영화를 만들 줄 알았다. 1970년대에는 종종 그렇게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내가 들은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 감독이 제작자일 때 스텝들과 배우와 한 편의 영화 계약을 한 다음 시침 뚝 떼고 한 편의 영화를 찍는 척하면서 약간씩 대사와 세트를 바꾸면서 두 편의 영화를 찍고 나중에 편집해서 둘로 나누어 개봉했다가 분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다시 정리된 자료에서 <흑룡강의 쌍검>이라는 제목은 사라졌고 영화 자막에 올라오는 대로 < 원한의 두 꼽추 >만 남았다. 그런데 사라진 제목도 잘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우선 이 영화에는 중국 동북부와 내몽고 국경 사이를 흐르는 헤이룽강(黑龍江)은 고사하고 강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쌍검은 한 명의 무사가 두 자루의 검을 지니고 다니는 것인데 아무도 두 자루의 검을 지니고 다니지 않는다. 그렇다고 두 자루의 검이 각자 나뉘어서 운명을 따라 순환하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에서 문제가 되는 천검(天劍)은 단 한 자루의 명검이다. 구태여 말하자면 기구한 운명으로 서로 헤어져 자란 두 쌍둥이 형제를 비유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조롱하듯이 말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좀 기묘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사실도 덧붙여야겠다. 내 관심은 여기에 있다. 한걸음 뒤로 물러난 < 원한의 두 꼽추 >는 마치 물구나무를 선 것처럼 임권택 에 대해서 미처 다른 영화들이 말하지 못한 것을 거의 외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자포자기가 항상 가로막고 있던 어떤 방어선을 일시적으로 치워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떤 방어선? 그렇다. 내가 1960년대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서 반복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약간 추상화된 할리우드 고전 영화의 문법과 다소 두렵다는 듯이 공동체의 운명에 복종하기라도 하는듯한 굴복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공백이다. 서로 비대칭인 둘 사이의 거리는 임권택이 그것을 조선 시대, 혹은 한국전쟁의 전쟁터, 그리고 휴전 이후의 남한 사회에서 할리우드 장르영화들이 요구하는 것을 수행하려는 데서 발생한 것(들)이다. 그런 다음 그 공백을 메우는 과정에서 임권택은 풍경을 발견했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가혹한 삶을 보았고, 다시 한 번 그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순의 시간이 근대의 역사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으로 밀고 나아갔다. 나는 먼저 임권택이 이상할 정도로 웨스턴 영화들에 대한 열렬한 애호가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다. 물론 웨스턴이 일본 시대활극 영화들을 경유하여 홍콩에 도착했고 그런 다음 대만 무협소설과 결합하여 무협영화가 만들어졌지만 임권택은 그런 계보에 관심이 없었다. 분명히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 돌아온 왼손잡이 > < 황야의 독수리 >나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 <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 >를 만들었을 때 임권택은 틀림없이 자신이 본 웨스턴 영화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물론 그의 영화에서 누군가는 안소니 만을 볼 것이고, 누군가는 오토 플레밍거를 찾아낼 것이며, 아마 대부분은 윌리엄 와일러와 조지 스티븐스를 떠올릴 것이다. 이 영화들은 웨스턴 영화들의 거의 끝나가는 종말기에 마주할 수 있었던 거의 모든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악당들은 이제 더 이상 바깥에서 찾아오지 않으며, 주인공은 불안에 떨고 있고, 정의가 지켜지는 것은 종종 서사의 차원 바깥에서 이루어진다. 거기서 계보를 그려보는 것은 좀 더 나중에 할 생각이다. 하지만 임권택에게 좀 이상한 방법으로 할리우드영화의 고전주의가 지닌 우아한 아름다움이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을 뛰어넘어 승리를 거두는 순간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순간을 목격할 때마다 다소 당혹스러워진다. 이를테면 드라마를 따라가다가 갑자기 한순간 그 신을 어떻게 찍을 것인지를 몰두하는 것만 같은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그때 예상치 않은 상황이 나타난다. 임권택은 고전적인 가치들에 대해서 어떤 두려움을 가진 것처럼 보존하고 싶어 한다. 단지 이것은 권선징악이라든가 아니면 비극을 수행하기 위하여 하여튼 결말을 맺어야 한다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의 비극은 다른 데서 온다. 임권택은 어떤 경우에도 차라리 주인공이 희생될지언정 세상이 몰락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물러난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영화에서 기쁜 엔딩이 드문 이유인지도 모른다. 약간 과도할 정도로 단순하게 말하고 싶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가끔 기이하게 보이는 것은 그가 이미 바로크 시대에 접어든 웨스턴 영화에서 자기 자신도 모르게 감명받은 데서 오는 흔적일 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이 바로크적 미장센들은 1969년 혹은 1972년을 통과하면서 대부분 망가져 버렸다. 장기적인 과정에서 그 자신의 탈색과정, 하지만 일시적으로 그것이 이 시기의 임권택을 우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원한의 두 꼽추>는 이 시기에 놓인 영화이다. 첫번째 시간: 약을 탄 술을 마시는 지원필 두번째 시간: 꼽추가 된 지원필 다음 질문은 그렇다면 여기서 산산조각 났다고 생각한 파편 속에서 무엇을 물구나무 세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은 몹시 번잡한 작업이 될 것이기 때문에 다소 따분하지만 도식적으로 분류하는 방식을 택할 생각이다. 우선 세 개의 시간. 첫 번째 시간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이다. (이 장면은 이야기 도중에 흑백으로 되돌아간 다음 (flash_back) 진행된다) 검술의 한 유파에서 다음 장문을 가리는 자리인데 사형인 지원필은 가장 무술이 뛰어나지만 장문의 딸인 달래는 그의 경쟁자인 진수왕을 사랑한다. 그래서 장문을 가리는 자리에서 진수왕이 이길 수 있게 음모를 꾸며 지원필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척하면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약을 탄 술을 권한다. 지원필은 대결을 하다 쓰러지고 진수왕은 그의 등을 내리쳐 꼽추로 만든다. 뛰어난 무술을 가진 남자의 약한 마음을 파고든 사악한 계획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 그 여인의 비열한 애인. 공모 앞에서 좌절한 미래의 시간. 그러므로 이 남자는 이제 미래의 시간을 되찾고자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불구가 되어버린 이야기. 두 번째 시간은 첫 번째 시간으로부터 일정한 간격을 벌려놓은 다음 다시 이어진다. (그리고 여기가 영화의 첫 장면이다) 꼽추가 된 지원필이 돌아와 진수왕에게 대결을 신청한다. 무술로는 지원필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진수왕에게 그의 아내가 된 달래가 그의 친구인 정태성을 찾아가 모든 검을 잘라버리는 명검 천검(天劍)을 빌려오면 된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그렇게 아끼는 검을 빌려 줄 리가 없다고 하자 그러면 빼앗아오면 되지 않느냐고 재촉한다. 새로운 음모. 새로운 적. 새로운 복수의 계열이 여기서 생겨난다. 진수왕은 그의 친구를 죽이고 후환이 두려워 마침 절에서 아이를 낳은 그의 아내까지 참하려 한다. 그의 아내는 쌍둥이 청과 용을 낳았는데 진수왕의 부하들이 절에까지 찾아오자 자신은 청을 감싸 안고, 그리고 하인은 용을 안고 도망친다. 낳자마자 헤어진 형제, 그들의 기구한 사연. 그들은 성장한 다음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해결하기 위해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두 번째 시간의 복권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그들은 둘로 나뉜 그들 사이를 확인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어야 할 것이다. 하나를 둘로 나누고 그런 다음 이중으로 동여맨 세 개의 이야기. 아내는 부하들에게 쫓기다가 청을 절에 숨겨놓은 채 자신의 몸만 피신하고, 하인은 용을 나무에 숨겨놓고 부하들의 눈을 자신에 돌린 다음 죽음을 맞는다. 마침 진수왕과 대결을 하러 가던 지원필은 숲에 숨은 진수왕의 부하들과 싸우다가 그만 나무에 숨겨놓은 아이를 적으로 오해하는 바람에 상처를 입히고 급히 달려간 의원으로부터 이 아이가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꼽추가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미처 계산에 포함되어있지 않았던 실수. 자신의 원수에게 꼽추가 된 이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를 이번에는 자신이 꼽추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야만 하는 운명에 떨어진다. 무엇이 무엇을 삼켜버리고 있는 것일까. 비극 안의 비극. 참극 속의 참극. 죄 값을 받기 위해 찾아간 자가 새로운 죄 값을 치르는 자리에 간다. 지원필은 진수왕과의 대결에서 천검에 그의 칼이 잘리자 몸을 피신한 다음 꼽추가 된 아이와 함께 산에 묻혀 살아간다. 여기까지 영화가 시작된 지 17분 동안의 이야기이다. 세번째 시간: 꼽추가 된 용 그런 다음 세 번째 시간이 시작한다. 마치 이제까지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될 이야기의 서론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서 갑자기 긴 시간을 건너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벌어질 사건들은 시간의 기호들을 놓고 다투는 해독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꼽추가 된 용은 어른이 되었고 지원필을 아버지로 삼아 산속 오두막에서 살아간다. 청은 산사의 절에서 스님으로부터 무술을 전수받고 속세로 돌아온다. 당신이 상상하는 다음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청과 용은 형제임을 알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여기에 지원필이 가세해서 진수왕에게 복수를 할 것이다. 그렇게 풀려나간다면 < 원한의 두 꼽추 >가 당신을 안심시키기는 하겠지만 너무 진부해서 더 이상 볼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 세 번째 시간이 복수의 활극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임권택 은 차례로 우리의 기대를 차단시킨다. 우선 지원필은 용에게 복수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면서 그 자신도 진수왕에게 복수를 포기하고 살아간다. 그는 그냥 주어진 세계 자체를 인정한다. 그는 마치 복수 대신 다른 어떤 것을 하면서 살 수도 있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어떤 것? 아버지의 자리.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자리. 그는 용이 자기 품에 안겨 꼽추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게 자신의 진정한 운명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래서 용은 지원필로부터 어떤 무술도 전수받지 못했다. 청은 (아마도 과거를 알고 있는 것만 같은 태도를 취하는) 스승으로부터 자신의 부모가 일찍 돌아가셨으며 속세에 나가서도 자신보다 뛰어난 무술을 지닌 고수들이 있으니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충고를 듣는다. 그러므로 청은 자신의 부모뿐만 아니라 동생에 관한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한다. 그 둘이 쌍둥이이기는 하지만 둘 사이를 오간 재빠른 이미지의 교환을 통해서(parallel_editing) 서로 전혀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좀 더 중요한 순간은 스승의 교훈이다. 늙은 노승은 청이 지닌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지만 그에게 복수 따위란 처음부터 청이 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는 기회를 준다. 의무로부터 풀려난 자유. 하지만 영화가 이제부터 할 일은 당연히 청의 자유를 다시 의무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때 여기에는 정말 그 의무가 자유를 포기하고서라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뒤따라 올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두 사람을 셈에서 빼놓으면 안 된다. 한 사람은 물론 복수를 하기 위해 두 번째 시간에 돌아온 지원필이다. 만일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진수왕은 친구 정태성의 명검 천검을 빼앗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청과 용은 헤어질 이유가 없으며, 그렇게 되면 용은 꼽추가 될 이유가 없으며, ...으로 이어질 연쇄적인 사건들. 그런데 세 번째 시간이 되자 용을 키운 지원필은 정반대로 복수를 완전히 포기한다. 그는 용에게 마을로 내려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그 이유는 다시는 진수왕과 다시 얽히는 순간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고 용이 모피를 팔기 위해 마을에 내려가 진수왕의 아들과 만나면서 마찰이 벌어지고 지원필은 자기 발로 진수왕을 찾아가게 된다. 여기서 그 둘 사이의 멋진 대결의 순간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지원필은 이미 대결할 수 없는 자신의 육체를 드러내기라도 하듯 지팡이에 의지하고 몸을 불균형하게 뒤뚱거리면서 가까스로 진수왕의 성에 이른 다음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용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복수를 포기한 지 오래이며 이미 그럴 수도 없는 처지임을 몇 번이고 호소한다. 여기엔 나중의 결정적 장면을 위한 카타르시스를 상승시키기 위해 무언가 우리를 괴롭히면서 준비된 어떤 카드도 없다. 정말 그는 복수할 의사가 없으며 또한 그 순간을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오로지 감옥에 갇혀있는 용을 구하겠다는 생각뿐이다. 말하자면 지원필은 여기서 완전히 아버지가 되어있다. 그가 겉보기에는 비루해졌지만 오히려 지원필만이 유일하게 복수의 의무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의미에 누구보다도 충실해진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지원필만이 유일하게 두 번째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원한의 두 꼽추 >가 몹시 우스꽝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원인이 있자 그 결과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전통적인 주인공으로부터 벗어나 자기에게 부여된 의무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된 고전적인 주인공에로의 어떤 점핑이 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임권택 은 분명 여기서 카타르시스와 냉소적으로 대결하고 있다. 청과 용의 어머니 두 번째 인물은 아마도 당신이 잠시 잊었을 청과 용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두 번째 시간에서 청을 버리고 무사히 도망쳤으며, 그런 다음 의미심장하게도 용과 청이 진수왕의 마을에 들어섰을 때 그녀도 마을의 주막을 찾아온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해야겠다. 그녀는 청과 함께 마을에 들어선다. 물론 아직 그 둘은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마치 거기에 모성의 직감이 작동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러이 그녀 얼굴로 다가간 카메라(zoom_in)를 통해 드러난 약간의 놀라움을 담은 표정이 말없이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야 용이 빼앗긴 모피를 찾기 위해 주막에 찾아오면서 세 사람은 처음 한자리에 모인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두 쌍둥이의 어머니는 청을 보자마자 한 눈에 알아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용을 볼 때에는 그저 사태를 구경하듯이 쳐다본다. 이 장면만을 떼어놓고 보면 잘 설명이 안 된다. 그런데 한참을 더 지난 다음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롱 테이크와 마주하게 된다. 문제의 신. 마침내 지원필과 용의 어머니이자 정태성의 아내를 만났을 때의 장면은 내가 알고 있는 한 임권택 의 모든 영화중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 중의 하나이다. 다소 길긴 하지만 이 장면의 대사는 전부를 인용할만한 가치가 있다. 임권택은 수없이 잘게 쪼갠 이 영화에서 이 장면을 끊지 않고(long_take) 한 번에 찍었다. 지원필은 그녀의 주변을 빙빙 돌면서 대사를 하고 두 번 마치 심리적인 마음의 동요를 찍는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에 다가간(zoom_in) 다음 다시 물러난다(out). 01:06:59 ~ 01:08:18 롱테이크 _ “용을 어디다 숨겼나?” _ “당신이 가진 검법을 용에게 전수해준다는 약속을 해주면 만나게 해드리죠” _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_ “용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진수왕을 죽여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신 남편의 원혼을 위로해드려야죠” _ “용은 그 사실을 알고 있소?” _ “아직은...” _ “댁이 어머니라는 사실도?” _ “물론...” _ “댁은 내가 용을 어떻게 키웠는지 잘 모르실 겁니다. 핏덩이 어린 것을 그저 안고 비바람 눈보라 치는 긴긴 세월 헤매면서 이집 저집 돌며 동냥젖을 빌어 먹이며...” _ “말씀을 안 하셔도 짐작은 갑니다. 하지만 용은 아버지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_ “어린 것을, 그 불쌍한 어린 것을 죽음 속에 몰아넣을 수는 없지 않소” _ “그게 자식 된 도리입니다” _ “내가 대신 원수를 갚아 드린다면?” _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용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_ “당신이 어머니라는 사실도 비밀에 부칠 수 있겠소?” _ “...물론” 나는 처음에 이 장면 앞에서 몹시 당황한 나머지 이제까지 영화를 보면서 이들 사이의 인물 관계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했다. 대사를 따라가면서 차례대로 열거해보자. 우선 첫 번째, 어머니는 지원필을 만난 다음 용을 그동안 길러준 것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는다. 두 번째, 용을 납치한 사람은 그를 낳은 어머니이다. 그런 다음 기른 아버지를 협박하고 있다. 그녀는 용에게 단 한 번도 자신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히거나 혹은 따뜻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세 번째, 어머니는 지원필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용에게 검술을 가르쳐줄 것을 요구한다. 누구라도 반대의 판본을 떠올릴 것이다. 만일 여기서 지원필이 이제 생모가 나타났으니 내가 할 일은 다 했으며 내 갈 길을 가야겠소, 그러니 나머지 일은 당신들이 서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난 이미 복수를 포기했소, 라고 해도 사실 그를 붙잡을 명분이 없다. 그런데도 용의 어머니는 용을 볼모로 삼으면 지원필이 반드시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의 이상한 주술관계를 유심히 들여다보기 바란다. 여기서 마치 그 두 사람은 부모의 자리가 바뀐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넷째, 용의 어머니는 용이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 한다면서 그에게 출생의 비밀을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용은 왜 복수를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 차라리 그의 행위는 복수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게다가 용의 어머니는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조차 없다. 그렇다면 용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다섯 번째, 더 이상한 것은 지원필의 반응이다. 그는 생모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버지 역할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심지어 두 사람의 대화에서 용의 부모는 그를 낳은 어머니가 아니라 그를 키운 지원필인 것처럼 보인다. 여섯 번째, 가장 이상한 대화는 마지막 순간에 벌어진다. 지원필은 차마 용이 피를 보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내가 대신 원수를 갚아준다면?”이라고 말을 한다. 잠깐만. 그런데 진수왕은 동시에 지원필의 원수가 아니었던가. 그는 자신이 꼽추가 된 사연을 완전히 잊은 것처럼 행동한다. 이렇게 말하겠다. 여기서 지원필에게 첫 번째 시간의 계열은 완전히 삭제되었다. 이제부터 지원필은 그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용을 위해서 진수왕과 “죽음 속에 몰아넣는” 대결로 뛰어든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용의 어머니이다. “그 불쌍한 것을 죽음 속에 몰아넣을 수는 없지 않소”라고 물을 때 그 질문은 복수에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그 행위는 사실상 자살적 몸짓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단호하게 “그게 자식 된 도리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나는 이 대답을 계산해보고 싶다. 지원필은 복수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경고하는 데 그래도 그걸 해야 한다고 말할 때 용의 어머니는 만일 그걸 할 수 없다면 자식으로서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은 선택이라는 말을 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 죽음이 어머니로서의 그녀뿐만 아니라 죽은 남편의 아내로서의 그녀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런 다음 가장 이상한 질문과 대답이 등장한다. 지원필은 그래서 자신이 대신 복수를 하겠다는 질문을 하자 용의 어머니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용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나는 이 대답 앞에 약간 멍해졌다. 용은 물건이 아니다. 혹은 금은보화가 아니다. 용은 사람이다.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들이다. 그런데 그녀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심지어 그런 제안을 한 것도 아닌데, 자신이 먼저 지원필의 뜻을 잘 알기라도 하듯, 그가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한 번 더 반복하자면)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용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심지어 지원필은 그 대답을 받아 “당신이 어머니라는 사실도 비밀에 부칠 수 있겠소?”라고 다시 묻는다. 용의 어머니는 약간 망설이는 표정을 지은 다음(zoom_in) “...물론”이라고 대답한다. 물론, 이라고 했나요? 그 질문에 대해서 용의 어머니의 올바른 대답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이라는 일망의 망설임이 거기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그 요구에 대해서 “...물론”이라는 대답이 가져오는 의미의 반사적인 메아리는 얼마나 이상한가. 그 대답에는 만일 당신이 아들을 대신해서 남편의 복수를 수행한다면 나는 기꺼이 아들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이 압축되어 있다. 그건 남편의 복수가 아들의 의미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뜻인지, 아니면 용의 존재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인지, 잠시 동안 그 둘 사이에서 어리둥절해진다. 지금 이 두 사람의 거래는 얼핏 보기에는 장르의 규칙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는 것 같으면서 한편으로는 완전히 벗어나 있다. 서로의 대사를 따라가면서 이런 거래를 보는 영화는 무협영화가 아니라 멜로드라마이다. 그때 이 두 사람은 언제나 아이를 사이에 놓고 낳은 어머니와 기른 어머니의 만남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아이가 보고 싶어서 낳은 어머니가 찾아오고 기른 어머니는 차마 기른 정 때문에 아이를 떠나보내지 못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다소 아이러니한 심정으로, 희미하게라도, 하지만 누구라도, 정소영 의 < 미워도 다시 한 번 >을 떠올렸을 것이다. 1968년 7월 16일에 개봉한 다음 가장 유명한 멜로드라마 중의 한편이 된 영화. 어린 아들 김정훈을 사이에 둔 두 엄마 문희와 전계현. 물론 둘의 거래는 여기서 갈라선다. 가난한 형편의 낳은 어머니는 부잣집 기른 어머니를 만난 다음 그녀가 착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아이를 부탁하고 돌아선다. 아이를 낳지 못해 기른 엄마는 낳은 엄마에게 그 아이를 잘 기르겠다고 맹세한다. 물론 그다음 다시 우여곡절이 있다. 하지만 지원필과 용의 어머니는 기른 아버지와 낳은 어머니라는 비대칭을 사이에 둔 다음 고통스럽게 대중들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공감의 감상적인 눈물을 냉소적으로 뒤틀기 시작한다. 낳은 어머니는 기른 아버지에게 그 정을 미끼로 하여 자기의 목표를 이루려고 한다. 얼핏 보면 그녀는 아내로서 충실하기 위해 어머니의 자리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 비대칭을 좀 더 심층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죽은 남편은 아내가 자신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포기하는 것과 이제 돌이킬 수 없게 이미 죽은 자신의 헛된 복수를 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권했을까. 지금 지원필이 빼앗으려는 것은 사실상 용의 아버지의 자리, 그러니까 용의 어머니의 남편의 자리인 것이다. 차라리 그녀는 용을 지원필로부터 빼앗아 강제로 삭제된 남편의 자리에 돌려보내서 가문을 잇게 만드는 것이 진정해야 할 일이 아닌가. 좀 더 도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유령이 되어버린 남편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아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 아들인 용이 가문으로 돌아와 공백을 메울 때 비로소 그녀의 진정한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미워도 다시 한 번>(1968) <마더>(2009) 그러나 우리를 좀 더 복잡한 심경으로 이끄는 것은 그 둘의 자리 그 자체이다. 우리들에게 모성애는 거의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문화의 거의 모든 코드에서 가장 보수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자식에게 희생적이며, 자애롭고, 언제든지 자신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가족 안의 희생양. 이 사랑의 과잉을 실재의 자리에서 가까스로 다룬 영화가 봉준호 의 < 마더 >이다. 그러나 임권택 은 이 자리에 아버지를 가져다 놓은 다음, 그것도 낳은 아버지가 아니라 기른 아버지를 가져다 놓은 다음, 그 자리에서 낳은 어머니를 대립시킨다. 그런데 그 대립은 성립하는 것일까. 누구라도 여기서 멈칫 한 다음 그 둘 사이에 어떤 비밀이 담긴 서사가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을 가질지 모른다. 그런 건 없다. 이 설명을 위해서 여기에 미처 등장하지 않았지만 셈에 포함시켜야 할 세 번째 등장인물을 생각할 차례이다. 그건 이 자리에 없는 다른 한 명의 쌍둥이 청이다. 내가 영화를 다 본 다음 다소 의아하게 여긴 것은 청과 용 둘 사이에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 단 한 번도 구분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장면에 이르기까지는 물론이고 이 순간을 지난 다음 마지막 장면까지 그들은 서로를 부른 적이 없다. 더 이상한 것은 이 형제는 끝내 힘을 합쳐 아버지의 원수 진수왕과 싸우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지원필이 힘겹게 진수왕과 그의 아내 달래와 그의 아들과 싸우는 동안에도 청은 자신의 원수를 위해 용과 싸우다가 (이미 그럴 필요가 지난 서사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팔목 하나를 잘라버리기까지 한다. 청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면서 어떤 때는 지원필과 용을 돕고, 어떤 때는 진수왕의 식객으로 머물면서 그의 편을 든다. 마침내 청이 용의 칼에 찔려 숨지면서 그의 옷 속에 숨겨져 있는 형제임을 밝히는 문신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 둘은 비로소 포옹한다. 그리고 둘 중 하나만 살아남는다.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중인 것일까. 임권택 에게는 기이한 계산법이 있다. 너무나 이상한 계산법. 누군가는 이걸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공감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 어느 쪽에 서서 바라보건 계산법 자체를 무시한다면 그 이후를 더 이상 따라오기 힘들지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내가 신기하게 바라본 것은 청과 용이 힘을 합치는 대신 죽을 때까지、장르의 컨벤션 따위는 완전히 무시하고 정말 죽을 때까지, 그 둘이 마주 싸운다는 사실이다. 마치 하나만 남아야 한다는 듯한 칼부림. 이때 이 장면을 거슬러 올라가서 물어보고 싶어진다. 혹시 처음부터 둘 중 하나만 남아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머니는 용에 대해서 별다른 욕심이 없다. 그녀는 두 명의 쌍둥이 중에 청은 알아보면서 용은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 다음 용이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 사실을 숨기는 것은 지원필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다. 심지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아들을 담보로 하여 지원필을 협박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신의 아들이라는 걸 알아본 청에게는 단 한 번도 복수를 요구한 적이 없으며 그걸 전달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마치 지금으로 충분하고 앞으로도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달라는 것만 같은 태도. 자식과 어머니 사이에 벌어진 이 이상한 채무관계. 이와 비슷한 관계를 임권택 의 영화에서 십 년 후에 다시 보게 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그 영화는 < 길소뜸 >이다. 물론 <길소뜸>과 < 원한의 두 꼽추 > 사이에는 단순하게 시간적인 간극 이상의 복잡한 설명을 요구하는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요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태를 단순하게 만들고 싶다. 줄거리의 환기. 낳은 어머니 화영은 한국전쟁 때문에 그만 아들을 피난통에 잃어버린다. 그런 다음 그녀는 재혼을 하고 다른 자식들을 낳는다. 그 아이의 아버지 동진은 그녀를 오랜 시간 찾아 헤매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역시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는다. 그런 다음 KBS 방송국이 벌인 이벤트인 ‘이산가족 찾기’를 위해 여의도에 펼쳐놓은 만남의 광장에서 우연히 (필연적으로?) 다시 만난다. 잃어버린 자식을 함께 찾던 두 사람은 어쩌면 아들일 지도 모르는 석필이라는 사내를 만나러 춘천에 간다. 석필도 결혼을 했고 자식이 있다. 그런데 그동안 석필은 고아로 함부로 자랐으며, 교양도 없이 거칠고, 사사건건 화영과 부딪친다. 아니, 그보다 화영은 석필을 보자마자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을 느끼면서도 이 사내가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거부한다. 단지 세월이 이 두 사람을 낯설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에 놓인 계급이 어머니와 아들을 갈라놓는다. 그 둘 사이엔 어떤 정도 없다. 석필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돈 많은 여자가 나타난 것이며 자신을 어떤 조건도 없이 단지 아들이라는 이유로 경제적인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한다. 화영은 그걸 느낀다. 이 사내가 지금 자기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어머니(와 자식이라는 관계의 복원 혹은 화해)가 아니라 돈이라는 사실을 본다. 화영은 유전자 검사를 요구해서 그걸 구실로 하여 석필이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다음 현재의 가족들을 만나러 떠난다. <원한의 두 꼽추>의 아들과 어머니 <길소뜸>의 아들과 어머니 두 어머니는 거의 동일한 이유로 자기가 낳은 아들을 부정한다. 그것은 그 아들의 사회적으로 추락한 지위이다. 그리고 그 추락의 과정을 통해 학습된 행동이 즉각적으로 거부의 태도를 불러일으킨 다음 그 둘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한다. 좀 더 괴상할 정도의 유사한 장면을 지적할 수 있다. (< 원한의 두 꼽추 >에서) 용은 죽은 동물의 껍질을 벗긴 모피를 들고 와 진수왕의 아들과 흥정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어머니와의 첫 번째 대면이다. 좀 더 정확하게 용은 어머니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고, 어머니는 그가 용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 채 쳐다본다. 서로에 대한 지식의 바깥에 놓여있지만 총체적인 국면의 지식 속에 놓인 그들. (< 길소뜸 >에서) 화영과 동진, 그리고 석필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길을 지나가던 개를 그만 치어 죽인다. 석필은 피 흘리며 죽은 개를 안고 횡재를 한 표정으로 보신탕을 해먹자고 할 때 화영은 그 모습을 보고 치를 떨며 내다 버리라고 소리 지른다. 여기서 단지 두 사람 사이의 차이만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는 세월의 간극이 이 둘 사이에서 공백의 정치학을 작동시키고 있는 중이다. 물론 임권택 은 그 과정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하거나 역사적인 인과관계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그 대신 현존재의 시간이 자기 앞에 놓인 공백의 간극과 마주쳤을 때 그 앞에 놓인 가늠할 수 없게 깊은 심연의 무시무시한 재난을 임권택은 영화라는 방법을 동원해서 그 두 개의 시간을 오간 다음 몸서리치게 쳐다본다. 내 질문은 여기에 있다. 한쪽은 논리적으로 완전하게 설명되는데(< 길소뜸 >) 다른 한쪽은 어떻게 해서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두 개의 장면에서 작동하는 모성애의 기계는 완전하게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여기서 기계라는 말은 다소 부담스럽긴 하지만 완전하게 (캉길렘에서 출발하여 푸코를 경유한 다음 가타리를 거쳐 흘러들어 간) 들뢰즈에게서 빌려온 개념이다. 무언가 잘못 배치된 것 같은 이 장치들은 얼핏 보면 오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임권택 의 영화 안에서 그것은 제대로 활동하고 있는 중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같은 순간에 전혀 다른 맥락 안에서 동일하게 작동할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이 대답을 임권택의 전기로 덮어쓰고 싶지 않다. 그건 아무 해결도 아닐 것이다.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그러므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복수는 성공적이었다. 지원필은 진수왕이 여전히 천검을 지니고 있는데도 대결 끝에 죽이는 데 성공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진수왕과 결혼한 달래를 죽이는 데도 성공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낳은 아들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청이 죽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때 청은 이 대결 끝에 죽은 것이 아니라 용과의 싸움에서 죽은 것이다. 그는 죽기 전 끔찍하게도 용의 한쪽 손을 자르는 데 성공한다. 용은 이기기는 했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그의 다른 형제로부터 한쪽 손을 잃는다. 이제부터 용은 마음으로는 자신의 형제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할 것이며, 다른 한 편으로 그 형제로부터 자신의 한쪽 손을 잃었다는 분노를 안고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청은 지원필과는 아무 사이가 아니다. 그러므로 청이 죽은 것은 지원필에게 어떤 감정도 끌어내지 않는다. 남은 또 한 사람. 쌍둥이의 어머니는 자신의 소원대로 복수에 성공하긴 하지만 자신이 한눈에 알아본 아들 청을 잃고 기꺼이 지원필에게 양보하기로 약속한 용은 살아남는다. 그녀는 분명히 지원필에게 약속했다. 만일 지원필이 대신 복수를 한다면, 그녀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용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다음 “당신이 어머니라는 사실도 비밀에 부칠 수 있겠소?”라는 지원필의 요구를 지키지 못했다. 그만 대결 중에 자신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화가 끝난 다음이다. 용을 볼모로 지원필을 협박했을 뿐만 아니라 복수를 해준다면 자신이 용을 포기할 의사가 있음을 알게 된다면 용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지원필과 용, 그리고 용의 어머니가 무수한 시체를 뒤로하고 떠나가는 뒷모습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긴 하지만 이 장면 ‘이후’에 기다리는 것은 유사 가족의 성립이 아니라 이들 사이의 완전한 파국이다. 마지막 장면, 은실의 시선, 참혹한 쇼트들 아직 설명이 끝나지 않았다. 이 마지막 신에서 가장 이상한 점은 그들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pont_of_view)에 있다. 나는 아직까지 거의 이 영화의 서사에서 얼룩에 가까운 한 인물을 소개하지 않았다. 그건 진수왕과 달래 사이의 딸 은실이다. 은실은 지원필이 용을 풀어달라고 호소하기 위해 성을 찾아왔을 때 갑자기 등장한다. 그런 다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저 영화에 의지해서만 이야기한다면 오로지 인도적인 차원에서, 지원필과 용의 편을 들면서 아버지에게 자비를 요구한다. 나는 이런 장르에서 적의 딸이 갑자기 주인공 혹은 그이 아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순간을 수없이 알고 있다. 다만 이 서사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새로운 계열의 탄생. 거기에는 예상치 않게 두 사람 사이에, 혹은 둘 중 한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변수가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여기엔 그런 코드가 발생하지 않는다. 은실은 용에게 사랑의 감정을 전하는 어떤 기호도 제공하지 않으며, 용은 그녀의 호의에 대해서 단 한 순간도 의심의 제스처를 보이지 않는다. 마치 그 둘 사이는 어떤 감정의 계산도 없이 휴머니즘이 요구하는 희생만이 있는 것만 같은 윤리적 행동을 한다. 그러므로 지원필과 용과 그의 어머니가 은실웰염≠랜옇泉飴句옅개ぐ?#영?사이에서 나눌 감정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임권택 은 사실상 이 서사에서 완전히 외곽에 놓여있는 은실의 시선으로 어느 순간부터 이 마지막 신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이 시선의 논리에 아주 엄격하게 대응하듯이 차례로 쇼트를 소개한다. 그래서 구태여 서사의 관점으로나 혹은 감정선의 흐름에서나 아니면 리듬의 화음에서 무언가 불균질 하거나 불편해지는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죽은 진수왕과 그의 아내 달래와 그 둘 사이의 아들의 시체를 은실의 시선으로 차례대로 보여준다. 세 개의 참혹한 쇼트. 딸이 바라보는 부모의 시체. 여동생이 바라보는 오빠의 시체. 그런 다음 떠나가는 지원필과 용과 그의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은실을 보여준다. 그때 우리는 은실이 어떤 마음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호의는 가장 나쁜 형식으로 돌려받은 것인가. 이 마지막 신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은실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가장 불쌍한 사람의 시선.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가족 모두를 잃었으며 뿐만 아니라 성의 태수의 딸로서 안락하게 살아가던 삶 전체를 상실한 것이다. 만일 그녀가 이 결말 ‘이후’에 복수를 맹세한다 할지라도 아무도 그녀를 탓할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더 밀고 나아가면 즉각적으로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원한의 두 꼽추 >는 아직 충분한 대답을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러므로 표면의 설명에 머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임권택 의 이상한 계산법에는 어떤 메타 서사가 있거나 아니면 반대로 아주 은밀하게 감춰진 네트워크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 계산법 아래 숨겨진 침묵은 무엇일까. 대부분 숨은 듯이 가려져 있다가 때가 되면 갑자기 나타나 셈을 치르기 시작한다. 나는 수없이 예를 들 수 있다. 이 계산법은 < 화장 >의 마지막 시퀀스에까지 이어진다. 김훈 작가가 미처 쓰지 않은 오상무와 추은주 사이의 마지막 작별인사. 그 이상한 작별의 방식, 이때 거의 대립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선택의 전도가 있다. 여기에 감정의 카타르시스가 있는가? 없다. 그러기는커녕 이야기를 더 이상 진행하는 것이 위태로울 정도로 어리둥절해진다. 기른 아버지 지원필은 용을 위해서 모든 희생적인 요구를 받아들인다. 그는 용이 자기의 충고를 듣지 않고 마을에 내려와 소동을 벌인 끝에 진수왕에게 붙잡히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옛 원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용서해달라고 빈다. 달래가 황금불상을 훔쳐오면 교환하겠다는 제안을 하자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도둑질을 오로지 용을 위해서 한다. 하지만 황금불상을 훔쳐오는 데 성공을 했음에도 진수왕은 교활하게 지원필이 그 과정에서 무공을 되찾은 것임을 걱정한 나머지 그의 한쪽 팔마저 잘라버린다. 하지만 꼽추에 한쪽 팔마저 잃은 지원필은 이 지경이 되어도 단 한 번도 용을 원망하지 않는다. 당신은 임권택의 계산법이 이 모든 우여곡절을 치르고 난 다음에 낳은 어머니에게서 나온 제안이라는 것을 셈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 계산법은 어떤 법칙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간극 사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환상이 침입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이때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여기서 환상이란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 계산법이 현실에서는 맞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현실에서 모든 계산법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의 수식화이다. 핵심은 이 계산법이 어떤 이득을 취하느냐가 아니라 이 이득을 취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드러내고 있느냐는 것이다. 임권택은 자신의 계산 과정에 진실이 있다고 믿는다. 그때 진실이란 실재의 일부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계산속에서 우리는 임권택이 드러내는 진실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대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실재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한다. 영화의 방법이란 자신의 계산에 충실해지는 것이다. 임권택은 여기서 힘겹게 그 셈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용은 꼽추가 되고 한쪽 손이 잘려나가면서 기꺼이 그 계산의 미끼가 되었다. 나는 <원한의 두 꼽추>를 가혹한 영화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임권택은 점점 더 가혹해질 것이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영화는 공포영화가 맞을지도 모른다. 감정의 공포. 진실이라는 네트워크의 공포. 찢어진 네트워크 사이의 실재의 공포. 무엇보다도 방법의 공포. (계속) 1971년 78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태창영화 각본 박철민 촬영 구문석 안길원 김택수 한숙 김청자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 인터뷰 두 번째 이야기: “그때는 내가 쓰면 최고의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정성일 _ 드디어 < 만다라 >입니다. <만다라>는 한국영화사상 10 베스트 영화에 꼭 들어가는 한 편입니다. 이 영화는 단지 훌륭하다고 말하기보다 이상하게 볼 때마다 심금을 울리는 어떤 힘이 거기에 있습니다. 감상이랄까 그런 게 전혀 없는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마음을 움직인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깊이도 볼 때마다 새로운 배움을 얻는다고나 할까요. 임권택 감독님 말씀에 따르면 당신께서 어떤 영화를 하고 싶다는 말을 제작사에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만다라>는 예외로 소설을 읽자마자 이걸 영화로 하고 싶다고 화천공사에 이야기를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일성 촬영감독도 큰 수술을 마치고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찍다가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최후의 영화를 찍는다는 심정으로 소변통을 옆에 차고 촬영을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이 모든 힘들이 이 한 편의 영화에 모이면서 단지 1+1+1... 이 아니라 마술적인 화학작용이 일어난 영화인 것 같습니다. < 만다라 >(1981) 송길한 _ 그거는 정성일 평론가나 보는 눈이지. 다른 사람은 몰라. 이것은 창작자도 모르는 플러스알파가 있거든. 그건 몰라. 다 모르는 거거든. 이 비밀이 없으면 영화를 못해먹지. 이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거지. 미리 짜고 친다고 고스톱 되는 게 아니고, 영화를 하다 보면 진짜 아, 이건 정말 몸 한번 던져보고 해볼만 하구나. 이런 게 있거든. 근데 나는. 무엇인지 모르는, 애틋함 같은 게 근본 속에 있다고 하는 건, 소설에서처럼 단순히 두 사람의 구도자들의 실지적인 불교 생활을 그렸다면 그건 없어졌을 거야. 누구들은 이것이 광주사태 이후의 저항처럼 보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여. 그건 두 젊은이의 자기완성을 위한 어떤 치열함을 그리자, 그런 데서부터 불교가 갖고 있는 꽉 짜인 틀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 않나 싶어. 그게 나는 오히려 대중들에게 더 보편적인 진동을 주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해. 정성일 _ 선생님께서 처음 김성동 씨의 원작 소설을 읽었을 때 첫 느낌은 어떠셨습니까? 송길한 _ 난 그저 그랬어. 둘이 가다가 가끔가다 지산이가 나타나서,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서부극의 갱처럼 휘젓는 것 말고는 재밌는 게 없었어. 너무 논설이 길어. 안티 불교에 대한. 십 년간 회상을 하는데 지겨운 것들이 너무 많아. 그래서 교단에 대한 것들은 다 삭제해버리자.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지. 그러고 나니 상당히 좋은 거야. 특히 서정성이 좋아. 영화 처음 시작할 때 버스 오는 씬. 그 장면에서 숨 막혔거든. 극장에서도 물을 뿌린 듯 정적감만 감돌았지. 정성일 _ < 짝코 >가 플래시백 구조가 통할 것인가를 놓고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조마조마한 장치였다면 < 만다라 >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형이상학적인 대사가 통할 거라는 것이 제일 큰 관건이었을 텐데. 이 힘겨운 대사에 작가의 확신이 있었습니까? 송길한 _ 나는 확신은 없었어. 절간에 드나드는 사람이나 알까. 젊은 애들은 더더욱 모를 테고. 하지만 못 알아들어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아는 사람이 봤을 때 저건 구라야 하면 작품 전체가 정말 구라인 거잖아. 하지만 제대로 썼구나, 하는 소수가 있다면 괜찮은 거니까. 감독님도 그 신념이었을 거야. 그런 신념이 무섭지. 그런 오기 같은 게 임 감독님에게 있다고. 관객이 못 알아들어도 상관없다는 거. 전문인들 몇 명이 인정하면 돼. 그게 상당히 중요한 거 같아. 그러니 편해지지. 무슨 어려운 얘기가 있더라도 그냥 썼지. 그래서 감독님은 정일성 촬영감독을 그렇게 기다렸는지도 모르겠어. 앓을 때에 문병도 가고. < 만다라 >는 서정성을 살릴 수 있는 작품이었다고, 그게 맞아떨어졌어. 풍광이 주는 비애 또는 애수라 할까, 그런 정감들이 관객의 가슴에 스며드는... 정성일 _ 한편으로 < 만다라 >는 첫 번째 데뷔작부터 순서대로 따라 오면서 다시 보면 임권택 감독님의 첫 번째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영화이기도 합니다. 송길한 _ 근데 그 형이상학이 그렇게 보편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와주지는 않지. 그래서 맨 처음 이 영화를 절간의 승려가 아니라 두 젊은이가 자아완성을 향해서 가는 치열한 모습에 초점을 맞춘 거였어. 정성일 _ 여기에는 약간 복잡한 사연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찍지는 못했지만 < 비구니 >가 있고, 그리고 선생님이 참여하지 않았지만 < 아제 아제 바라아제 >가 있습니다. 1980년대 임권택 감독님은 많은 시간을 영화에서 불교와 함께 보냈습니다. 불교의 무엇이 그렇게 그 시기를 이끌었을까요? 송길한 _ 나는 우선적으로 구도승들이 갖고 있는 치열성. 그게 가장 매력적이여. 그래서 그네들이 ‘만다라’를 이루느냐 못 이루느냐가 아니라 거기까지 근접해가는 이야기를 한 것이거든. < 비구니 >는 분단 상황도 다 들어가는 건데, 전쟁 중에 그네들이 삶을 버텨내고 어떻게 자기들 나름의 원칙을 지켜내고 치열하게 가는가. 그리고 여기에서 고아를 위해 몸 한번 준다. 이런 거랑 의미가 달라. 이것은 붓다가 갖고 있는 큰 것과 맥이 닿고 있는 거지. 이 양반이 좀처럼 그런 소리를 안 하는데, 여름철에 혀 빠지게 쓰고 있는데 한번은 쓱 오더니 그래. 좋네, 어쩌면 이것이 송 작가의 대표작일 거여, 그런 소리를 다 하더라고. 나도 자부심이 있었고. 임 감독 자신도 본인의 입으로 나는 수많은 전쟁영화를 찍었지만 그렇게 스펙터클하고 착 앵기는 씬을 찍은 거는 처음이라고 했거든. 그런 걸 못 본다니 어이가 없는 거지. 김지미 씨도 몸을 던져 정말 열심히 했거든. < 만다라 >, 저건 내가 한방에 보낼 수도 있다, 그런 야심도 있었을 거야. 영하 몇 도 되는데 그 추운데 발가벗고 찬 물에 뛰어 들어가고 스텝들 다 있는데 무서운 거지. 그 열정이..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거여. < 만다라 >의 풍경 정성일 _ < 만다라 >는 여러 가지 빛나는 부분들이 있지만, 촬영의 풍광이 아름답게 빛나는 영화들 중 하나입니다. 이 풍광이 이야기의 일부이기도 한데, 이런 경우 시나리오를 쓰는 입장에서 헌팅과 시나리오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송길한 _ 그건 원작이 있는 경우니 내가 무슨 풍경을 잡자, 어쩌자 할 수가 없지. 내가 헌팅을 다녀와서 지문에 어떻게 쓰고 그럴 수도 없고. 감독님도 이미 헌팅을 다 해놓으셨을 거야. 그때 아마. 정성일 _ 시나리오를 쓴 입장에서 완성된 후에 < 만다라 >를 본 느낌은 어떠셨습니까? 송길한 _ 좋았어. 거진 완벽 하구나 그랬지. 녹음실에서 봤을 때, 처음에 동안거(冬安居)에 관한 디졸브 몽타주가 있잖아요, 선방생활을 하나로 묶는. 사실 그게 (시나리오에서는) 뒤에 나오거든. 임 감독님이 꿈틀꿈틀하더니 “어이 송작가” 부르더니, 나를 데리고 필름 들고 편집실에 간 거야. 그리고 그 부분을 도입부에 갖다 붙이는 거야. 아예 동안거 과정을 영화 앞에 간략하게 싹 전제해버리는 거야. 그리고 보니 벌판길 롱 테이크가 압도된 거지. 편집을 상당히 꾸물꾸물하더라고. 그러다 밤 두, 세시 되었는데 딱 결심을 하더라고. 그 기억이 참 생생해. 정성일 _ 시나리오를 써놓은 상태에서 < 만다라 >는 유랑하듯이 영화가 진행됩니다. 이 경우 시나리오와 영화의 편차가 어느 정도 작용이 됩니까? 송길한 _ 불교 특유의 만행(萬行)이라는 게 있잖아요. 떠돌면서 수행하는 거. 나는 처음부터 절간 포함 로드무비라고 생각했어. 절간도 지나가다 들리는 주막이나 마찬가지인 거지. 이걸 도입부에다 때려버리고 그렇게 프리하게 간 거지. 그게 간결하잖아. 정성일 _ 반면에 임권택 감독님 영화에 대해서 많은 비평가들이 그런 압축적인 표현, 간결함, 어떤 감정을 절제하는 것을 장점으로 얘기하면서도 가끔은 지나치게 설명적이지 않나 그런 얘기를 종종하지 않습니까? 간결함과 지나친 설명이 공존하는 게 이상하다는 느낌이 있거든요. 송길한 _ 영화 뒤에 자막 붙이는 거. 얘기를 영화로 다 해놓고, 주제가 되는 것을 목소리로 설명을 한다든가, 나도 대놓고 얘기 했어. 근데 감독님이 아니여, 다 필요해, 그러는 거여. 감독님이 필요하다고 하는 그런 영화들은 대부분 다 해외 영화제에 다 내보내려 한 것들이야. 그건 일종의 못 알아들음에 대한 어떤 자막으로써 주는 함축적인 테마가 아닐까. 오시마 나기사의 < 감각의 제국 >에서 “사랑도 모르는 것들이 전쟁은 무슨”하는 야유의 자막처럼 하면 되는데, 사실 아무 것도 없어야 저게 뭔 이야기야, 하면서 생각을 하게 되는데 결론을 딱 내려주니까, (잠시 생각) 하지만 그것이 감독의 자기 주관이고 신념이고 한다면 뭐라 말을 할 수 없어. 모르고 가면 몰라도 자기도 알고 간다는데 할 말이 없지. 어쩌면 그분만의 완벽성이 아닐까? 정성일 _ 자막 문제뿐만이 아니라 저의 경우 < 만다라 >에서 법운 스님으로 나온 안성기 선배의 속세시절 대학생 에피소드가 나온 순간에는 설명을 넘어서서 당황을 했습니다. 이게 왜 필요하지? 송길한 _ 나도 죽고 싶어. (웃음) 내가 썼지만 정말 죽고 싶어. 그건 쥐가 물어갔으면 좋겠어. 그건 감독님도 마찬가지일 거여. 잘 없어졌다 그러실 거여. 물론 그의 세속 시절의 출가 동기를 설명하는 씬인데, 너무 구질구질한 거지. 그림도 별로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쳐다보면 더 죽겠는 거지. 그때 당시는 몰라서 넘어갔는데, 한참 뒤에 쳐다보니 내 보기에도 웃기고 손가락이 오글거려. 그 관념적인 대사를 연인끼리 주고받는다는 게.. 정성일 _ < 만다라 >는 몹시 강렬한 에피소드인데도 저에게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기억 속에 지워지는 게 지산이 법운과 사창가에 간 대목입니다. 매우 중요한 장면이기도 한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법운이 떠도는 풍광이 너무 아름다우니까 그 대목들이 자꾸 잊혀 집니다. 한편의 영화 안에서 완전히 반대되는 그 두 에피소드, 지산과 법운의 세계의 균형을 잡는 게 무척 어려웠을 거 같습니다. 송길한 _ 법운의 승려생활이 청정 FM이라면 지산은 파계도 두렵잖은 무애주의(無碍主義)인거죠. 그러나 두 사람의 수행이 맞닿는 꼭짓점은 하나이고 같다. 길은 다를 수 있되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 종착점은 같다. 이게 두 사람의 균형이 아닐까? 정성일 _ 임권택 감독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어떤 태도를 취하면서 가끔 섬뜩한 느낌이 드는 순간과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새마을 운동의 성공적인 시골 지도자를 다르면서 온갖 우여곡절 끝에 그 자리에 이른 인물을 다룬 다음에 문득, 이건 성공 다음을 다루어야 진짜 이 사람을 보는 거야, 할 때, < 길소뜸 >, 그리고 < 티켓 >에서의 원래의 비정함. 여기에는 인간에 대한 불신, 거기서 오는 어떤 얼음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반대로 선생님의 시나리오를 읽으면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어떤 신뢰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해석이나 결론에서 서로 근본적으로 갈릴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송길한 _ 나도 무슨 신뢰나 이런 거 없어. 하지만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한, 우리가 그런 쪽에다 시야를 줘야하지 않겠나, 하는 막연한 투시지. 머 절대적인 사랑 이런 건 나도 없어. (잠시 생각) 무슨 말인지 나도 충분히 알겠고. 몇 년 전에 < 달빛 길어 올리기 >를 하는데 임권택 감독님이 저것들 미친 것들이여,를 입에 달고 살아. 전체 인물들이 다 미친 것들이여. 인간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치 자기 주문, 주술인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미친 것들, 하고 가는 거여. 거기 더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스스로 자기 경계를 강조하고 있는 듯한 느낌. 다 그분만의 안목이겠지. < 나비 품에서 울었다 > (1983) 정성일 _ < 만다라 >를 찍고 나서 다음 작품이 약간 당혹스럽게도 역시 로드무비이긴 하지만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를 찍었습니다. 송길한 _ 감독님도 그렇고 나도 그걸 생계형 영화라고 봤다고. 근데 전작전(全作展)에서 다시 보니 절대 생계형 영화가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얘기했어. 감독님 만나면 반드시 얘기할 거야. 지금 보니 생계형 영화 아니라고. (웃음) 정성일 _ 영화가 갖고 있는 굉장히 독특한 세계가 있다고 할까요. 진담으로 유부녀판 < 만다라 >라는 느낌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다소 기괴한 발상으로 영화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데요. 송길한 _ 이 영화는 많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는데. 그 무렵에 막 ‘묻지마 관광’이 시작되던 때인 것 같은데. 먹고 살만하니까 여자들이 천연덕스럽게 ‘고독’이란 단어를 은근히 발설하곤 했죠. 그 고독은 여자들의 정신적, 육체적 공허감을 말하는 건데 시대적으로 이상한 바람기가 맴돌던 때가 아니었나 생각되네요. 그 무렵에 남편이 해외출장을 떠난 한 여성의 방황을 로드무비로 만든 것이 < 나비 품에서 울었다 >이죠. 정성일 _ 그게 원작도 없고, 그 어디선가 발상이 시작된 건가요? 송길한 _ 정진우 감독이 뻐꾸기, 앵무새 시리즈로 재미를 봤잖아. 그 시리즈의 하나여, 그게. 그냥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로 제목까지 붙여줬죠. 우리가 생계형이라고 했을 수밖에 없는 게 감독님도 그냥 하지! 그랬고. (웃음) 그야말로 그것은 길 위에서 만든 작품이야, 인물 몇 명만 설정해 놓고, 사전 헌팅 해 봐야 딱 맞는 것도 아니고. 대충 이렇게 맥락만 세워놓고 스텝 끌고 떠난 거지. 정성일 _ < 나비 품에서 울었다 >와 < 안개마을 >과 시나리오의 전후 관계가 어떻게 된 건가요? 임권택 감독님 말씀에 의하면 <안개마을> 헌팅 떠나는 차에, <나비 품에 울었다>를 찍자고 떠났다고 하셨습니다. < 나비 품에서 울었다 >가 떠돌아다니는 장면 중간에 <안개마을>을 찍은 지역을 통과했고, 그래서 촬영이 끝나자마자 바로, 겨울이 시작하는 지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촬영 팀을 다 데리고 돌아와서 <안개마을>을 찍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나리오는 어느 쪽을 먼저 작업한 건가요, 아니면 촬영과 마찬가지로 시나리오도 동시에 작업에 들어간 건가요? -- 송길한 _ 대종상 접수마감이 문제가 된 거에요. < 나비 품에서 울었다 >의 시나리오가 먼저지. 그때 시나리오도 시간이 있나 길어봐야 한 달이지. 그 안에 하여튼 하는 거지. 일단 검열을 맡아야 하니까 그냥 출발하는 거지. 내가 현장에 안가면 몰라도 가니까.. 그리고 로드무비라는 게 현장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맥락만 서있고 궁극적으로 뭔 얘기인가만 공감하면 그냥 가는 거지. < 안개마을 > (1982) 정성일 _ < 안개마을 >은 임권택 감독님 영화중에서 많은 사람이 사랑하기는 합니다만, 감독님 필모그래피에서 매우 특이한 영화입니다. 감독님이 추구하던 테마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온... 송길한 _ 좀 미숙성된 영화지. 시나리오부터 좀 더 다졌어야하는데.. 정성일 _ 이문열 작가의 소설 “익명의 섬”을 처음 읽었을 때 어떤 느낌이셨어요? 송길한 _ 이문열 씨가 이미 익명성을 주제로 쓴 소설들이 시리즈로 몇 편 나왔고 그 중에 계간지 ‘세계문학’에 실린 걸 읽었는데 오지에서 일어나는 익명성이 에로티시즘으로 생명력에까지 이르는 그의 착안이 어릴 적 우리 시골마을에서 비밀리에 떠돌던 얘기도 같고, 존재의 신비감이랄까, 이런 게 마음에 들었죠.) 내가 거기서 버스 정류장 앞에 산월이란 벙어리 술집 아가씨. 남자들은 (성적인) 분출을 어떻게 해결 하느냐, 나는 그것이 자꾸 생각나더라고. 산월이 에피소드가 잘 들어간 거라고 봐. 그것도 없으면 거기 적막한 산골에서 무슨 에피소드가 있어. 정윤희 누드가 나오지만, 영화가 그것만으로는 힘드니까, 대종상 일정에 대느라 단양 근처 수몰지역 근처 직티리라는 데서 최단 시일 안에 찍어낸 작품이요. 그게 근데 그 영화 하면서 오랜 시간 지지고 볶는다고 잘 되는 게 아니란 걸 알았죠.(웃음) 대종상도 주고, 안성기 도 주연상 받고... 시즌이 많이 도와줬어. 눈이 올 때가 아닌데 눈도 많이 내려주고, 일이 되려면 그렇게 되는 거여. 감독님의 순발력의 승리랄까. 그런 작품이죠. 정성일 _ 문제는 정윤희 씨가 빛나게 아름답기는 한데 연기로 감당할 수 없는 역할을 맡은 게 아닌가요? 송길한 _ 맞어. 뭔지 모르고 나온 거 같았어. 거기다 내레이션도 밀착되지 않고 떠있지. 정성일 _ 그 영화는 이례적일 정도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유독 많습니다. 그건 정윤희 씨의 출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인가요, 아니면 처음부터 시나리오를 그렇게 쓰신 것입니까? 송길한 _ 처음부터 그렇게 갔어. 시간이 없기도 하고. 주인공의 육체적 백서이기도 해서, 내레이션이 없으면 맥락도 안서니까. 그런데 그걸 용케 보는 쪽에서는 굉장히 오랜만에 내레이션이 나오니까 쇼킹하게 느낀 사람도 있어. 그건 착각이지. 정성일 _ <익명의 섬> 같은 작품을 시나리오로 쓸 때, 꼭 이문열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도, 선생님의 경우 원작자와 이야기를 하시나요? 송길한 _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어차피 소설은 영화에서는 소재니까. 그러고 다 끝난 다음에 우리 끼리 보는 시사에서 한번 같이 보고. 본인은 족하게 생각하고. 영화화된다고 하면 소설가들은 다 좋지.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어. 근데 이 친구가 시나리오를 봤는지, 어쨌는지 이건 상당히 너무 깊이 들어갔고, 평론가나 할 소리를 하면서 어쩌고 뭐라 그러더라고. 아무튼 제작사인 화천서는 야무지게 계산했지. 베를린 영화제 출품한다고. 근데 영화제에는 그런 영화가 많잖아. 이게 로컬이지만 단순히 로컬도 아니고 익명성이잖아. 정성일 _ 선생님이나 임권택 감독님은 < 안개마을 >을 거의 이야기를 회피하지만 이 영화는 그때 런던영화제에 다른 한국영화 4편과 함께 상영되면서 비평가들로부터 큰 관심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때 <안개마을>은 유럽비평가들을 매혹시켰고, 많은 비평적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임권택이라는 감독의 다음 영화를 보고 싶다는 관심이 커졌지요. <안개마을>에 대해서 비평이 느끼는 매혹에 대해서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지는 지요? 송길한 _ 나도 이상하게 생각해. 정윤희 가 예뻐서 그런 건지.(웃음) 한국 고유의 로컬리즘과 그 속에 은밀하면서도 생생하게 숨 쉬는 생명력으로써 익명성이 이채로웠을지도 모르지. 인간 존재의 미스터리를 솔직하고 깊이 들여다본 감독님의 안목, 그 독특성이 어필했을 수도 있고, 주인공 정윤희가 갖는 백치미와 그녀의 내숭이 빚어내는 인간의 양면성도 재미있고, 그런데 곁에서 보니까 사실 정윤희는 백치미가 아니고 다독(多讀)을 하는 내실주의자였어요. < 불의 딸 > (1983) 정성일 _ 이상하게 이야기가 안 되고 있는 중요한 영화중의 하나는 < 불의 딸 >입니다. 여기서는 < 만다라 >에서 다루었던, 존재론적이고 철학적인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건드리고, 또 한편으로는 < 짝코 >에서 형식적으로 다루었던 플래시백이 더 복잡한 순서로 동원되면서, < 신궁 > 이후 임 감독님이 탐색해온 무속신앙이라는 세계를 다시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간의 주제와 형식, 질문이 집결되었다고나 할까요. 송길한 _ 욕심을 내자면 < 불의 딸 >은 샤머니즘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터득이 부족했어요. 그것이 피상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을 민족의 한이나 그런 쪽으로 이야기하고, 그런 것들이 뒤에서 생각해봐도 계속 걸리고, 좀 더 알고 덤볐더라면, 원작자인 한승원 은 잘 알았냐, 그쪽도 마찬가지여 오십보백보야. 내가 큰 만신 김금화 씨를 따라다니며 본질을 알고 보니까 그게 얼마나 피상적이었나, 그게 느껴지더라고. <서울만신>은 중간에 넘어졌잖아. 두 제작자들 간에 트러블이 생겨서. 나만큼 상처 많은 사람도 없어. 중간에 내린 게 참 많아. < 비구니 >도 그렇고, 차기작으로 썼던 <노을>도 좌절되고, <서울만신>까지... 정성일 _ < 불의 딸 >은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송길한 _ 임 감독님하고 나하고 김지미 를 왕 무당으로 하는 무당영화를 하자 그랬어. 그게 < 신궁 >에서 성이 차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 좋다 그렇게 했는데, 오리지널을 쓰자니 시간이 너무 짧고, 좋은 찬스인데 제작자는 기다리고 있잖아, 얼핏 보니 한승원 이 쓴 <불의 아들>이라는 연작이 있었어. 읽어보니 그런대로 말이 되더라고 그래서 감독님에게 읽어보라고 했지. 오히려 본질에 대한 확신도 없고, 그게 잘 안되니까 얘기가 내가 생각해도 좀 피상적인 게 많았지. 정성일 _ 한편으로는 무속신앙이라는 것 자체에 공감을 전혀 못하시고... 송길한 _ 모두 공감은 했으니 작업에 임했던 거 아니겠어? 상당량의 관련 서적이나 사례집 등을 통해 샤머니즘에 관한 공부도 열심히 했었지. 그럼에도 그 본질에 접근하는 데는 산 너머 산이었어. 공부해야할 폭이 너무 넓은 거야. 과학이나 정신 의학 같은 합리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무산되는 게 무속이어서 그 실체를 규명하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어요. 원작자인 한승원 도 어설프긴 비슷했어. 나는 좀 아는 줄 알고, 이건 어떤 의미에서 그런 거여, 하고 물어봤거든. 나는 시간도 없고 한승원 집에 눌러 붙어서 초고를 썼거든. 그 본질을 알려고, 근데 그도 본질은 모호하고 추상적인 픽션으로 쓴 거야. 본질을 모르고 덤벼드니 안 되는 거여, 정성일 _ 이 영화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시피 한데, < 비구니 >에 대한 아이디어는 맨 처음 언제부터 논의가 시작되었나요? 송길한 _ < 길소뜸 > 바로 전이지. 소설가 한승원 이가 < 비구니 >를 쓴다고. 감독님이 같이 작업을 한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그가 당시에는 불교를 그리 썩 잘 아는 사람이 아니야. 아주 해박하지는 않아도 뭔가를 좀 알아야 쓰지 않겠냐고. 중간에 보니까 본인도 슬며시 프레임 아웃을 해버리고, < 만다라 >때 우리 도와준 평상스님, 그 여름철에 평상스님을 오시라고 해서 고증을 받았지. 모르니까 물어봐야 할 거 아니야. 도움이 컸지. 이 분은 다른 분과 틀려서 관념적인 얘기라고 하더라도 맞아 떨어지는 거야, 나는 관념적인 얘기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지. 꼭 필요한 거 아니고는 벗어나려고 했어. 나중에는 엎어지고 나니까 그동안 얼마나 매달렸던지 <비구니>의 비읍자(字)만 들어도 신물이 넘어올 정도였어. 전국의 비구니들이 몰려와서, 뭐, 다 아는 얘기지만 전두환 씨한테 짓밟혀놓고는 화풀이는 엉뚱한데다 한 거지. 정성일 _ 시나리오 선집에서 < 비구니 > 시나리오를 읽어보면 분량으로는 선생님의 시나리오 중 가장 긴 것 같습니다. 만약에 실제로 영화화 됐으면 2시간 반이 훨씬 넘는 정도는 되었을 텐데요. 사실 한국영화 제도 안에서 2시간을 넘는 건 제작 규모랄까, 나중에 배급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를 만든다는 걸 너무 잘 알고 계실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시간 반이 넘는 분량으로 <비구니>를 이야기해야할 만큼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까? 송길한 _ 해야 한다는 이유란 것이, 남자보단 여성을, 그러니 일반 승려가 아닌 비구니를 그려야하니 소모되는 게 더 많았어. 그리고 그 원수 같은 놈의 역사성, 전쟁을 합쳐놓으니까 이야기가 길어질 수밖에 없지. 뒤에 축약을 어떻게 했을지는 몰라도 그것을 다 상영할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떤 점에서는 꼭 필요하고 있어야하는 거는 다 담아내자. 그리고 씬도 많아 그래서 죽었다 깨어난 작품이야. 그게 그만 엎어지고 나니까 내가 얼마나 울화가 치미는지, 한동안 술로 살았지. 감독님도 정일성 촬영 감독님도 김지미 씨도 다 함께 영화판을 떠나려고까지 했으니까... 정성일 _ 선생님 마음속에서 < 비구니 >는 가장 야심적인 시나리오... 송길한 _ 과장된 소리가 아니라 적어도 이게 완성되었다면 우리 작품을 밖으로 보여주는데 그 시간이 상당히 단축되었을 것이다, 난 그렇게 믿어요. 물론 거기에는 감독님의 완벽한 연출력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내용도 상당히 괜찮았고. < 비구니 >가 먼저 만들어졌다면 감독님 영화나 한국영화를 바깥에서 좀 더 보편적으로 보게 할 거라는 그런 자부심이 있었지. 그리고 이게 비구들의 얘기가 아니니까. < 리틀 부다 > 그런 엉터리들이 아니거든. 이게 말이 안 되는 얘기가 아니야. 붓다가 얘기한 게 그나마 고스란히 살아남은 것이 한국이여. 형식적으로나마. 그 내용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게 한국 불교여. 이것은 더구나 여성의 얘기이고. 여러 가지로 하면 괜찮은 얘기였는데, 임 감독님도 늘 아쉬워했거든. 그때 전쟁 씬은 정말 압도적으로 찍혔는데. 한번은 부산영화제에서 이태원 사장이 그러는 거여. 원작 승인을 해달라는 투로 얘기를 하는 거여. <비구니>를 다시 찍으면 어떻겠냐고. 좋다고 그랬지. 근데 그때 김지미 랑 지금이랑은 많이 달라졌을 테고, 그것보다도 (<비구니>의 일부 찍은 장면들) 필름의 보존 상태가 너무 나빠서 많이 삭아버렸대. 그래서 다시 그것을 못 한 거여. 시대가 조금 좋아졌기 때문에, 다시 무엇을 하더라도 괜찮았고, 필름 상태만 좀 좋았다면 영화를 볼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정성일 _ 그때 이미 찍은 < 비구니 > 촬영 분량이 어느 정도였었나요? 송길한 _ 잘은 모르지만 오분의 삼 정도는 아닌가 싶어. 상당히 많이 찍었지. 정성일 _ 임권택 감독님께서 이제까지 찍은 전쟁장면 중 가장 잘 찍었다고 말씀하시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이었는지 여쭤보면 말씀은 피하시더라구요. 저는 볼 수가 없었으니까... 어떤 전쟁 몹 씬이었나요? 송길한 _ 그 몹 씬을 찍을 때 차기작을 쓰느라 내가 못 갔어. 그 장면은 고향 사리원에 묘진이랑 둘이 갔다가 전쟁이 터져서 폭격을 맞는 장면인데, 폭격 통에 빠져나와서 육보시를 하는 거 아니여. 그 다음에 가보니 묘진이가 죽고, 그녀들의 수행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무척 중요한 시퀀스였어. 거기에 시가전도 있었을 것이고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고 있는데 그냥 폭격이 쏟아지는 그런 것이었어. 내가 시나리오에서도 꽤 강렬하게 쓴 거 같은데.... (잠시 생각) < 길소뜸 > (1985) 정성일 _ < 비구니 >를 전후로 해서 < 길소뜸 >, < 티켓 >이 연이어지면서 임권택 감독님과 김지미 씨와의 1980년대 여인 3부작이 어우러지는데, 선생님께 배우 김지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송길한 _ 좀 늦은 감도 있지만 내가 본 김지미 씨는 새롭게 개안된 김지미였어. 배우로써 지금까지 스타로 있던 고정관념 속의 여배우가 아니라 조금 벗어나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비로소 < 길소뜸 >에서야 냉혹한 여주인공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달라진 것이지, 그리고 그 열정이란 것은 무섭고 그 군번에 그런 열정을 갖는다는 것은 힘들 것이고. 그리고 우선적으로 감독님과 호흡들이 서로 잘 맞았어. 정성일 _ < 길소뜸 >의 주제는 분단으로 인해서 이산가족이 된 이야기인데, 임권택 감독님이나 선생님이나 사실 이산가족은 아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 짝코 >는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얘기이지만 <길소뜸>은 반대로, 물론 한집 걸러 이산가족 아닌 사람이 있겠습니까만 친지 일가 중에 그것을 경험한 사람이 없는 건데, 그럼에도 이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여의도 이산가족 광장을 시나리오도 없는 상태에서 찍어나가게 만든 그 소재의 힘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송길한 _ 당연히 분단문제였지. 우선 그게 불붙은 것은, 그때가 KBS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생방송으로 방영을 했고 전국이 눈물바다였지, 그런 다음 그 시기가 지나가자 침묵이 되고 공허해지고 잠잠해졌어. 그리고 실제 그런 사건이 있었어. KBS에서 발간한 사례집에 있더라고. 친자임에도 거부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 그런 것들에 초점을 맞춰두고 작품을 써나갔지. 정성일 _ < 길소뜸 >은 영화의 구성이 절반으로 갈라집니다. 절반은 화영과 동진이 만나면서 플래시백으로 그들의 삶을 돌아보고 그런 다음 둘이서 석철이라는 아들을 찾으러 갑니다. 그 둘이 함께 아들이라고 여겨지는 남자를 만나러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가는 장면을 망원렌즈로 찍은 장면은 정확하게 영화의 절반입니다. 구성으로서도 매우 특별한 구조입니다. 소재 혹은 주제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매우 특별한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송길한 _ 글쎄, 나는 미드 포인트를 놓고 쓴 건 아니고, 적어도 이 두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상황들이 어떤 것인가를 설득하지 않으면 뒷얘기가 아무리 기가 막혀도 안 될 거 같으니까 우선 그걸 정신없이 쫓은 거지. 그러고 보니 이 얘기 저 얘기가 붙은 거고. 나중에 완성 돼서 보니까 그런 것들이 결코 쉬운 게 아니었어. 나는 지금도 생각해요. 거기에 화영이와 신성일의 고등학교 시절, 둘이 자전거 타고 통학을 하는데, 가면서 시를 읊잖아. “산보다 높아라...” 근데 그 시 원작자가 누군지 아무도 몰라. 한용운 시야. 그 시대 유행했던. 나는 철저한 고증을 한 거야. 만약 지금 유행하는 하이칼라 시인의 시나 노래를 해버리면 시대적으로 안 맞아. 그래서 나는 거기 맞는 시를 찾기 위해서 무지 애를 썼어. 그러다 한용운 시를 뒤지던 중에 아주 딱 적절한 시를 발견했어. “산보다 높아라, 물보다 깊어라” 자전거 타고 가는데 사랑에 대한 더 길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고 사랑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이것만큼 맞는 시가 없어요. 근데 아무도 몰라. 이건 만해 한용운의 시야. 시나리오를 쓰면서 반쯤 죽어났던 그 여름이 생각나네요. 정성일 _ 임권택 감독님이 만든 모든 영화중에서 < 길소뜸 >은 전례 없이 논리적으로 찍은 영화입니다. 말 그대로 모든 쇼트, 모든 제스처, 모든 대사를 설명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길소뜸>은 정말 차가운 영화입니다. 어떤 점에서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중에서 형식적 절정이랄까요, 이 영화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나요, 혹은 이 시기에 그래야 할 미학적 목표가 있었나요? 송길한 _ 아까도 얘기했지만 인간이라는 것이 도대체 신뢰하고 껴안을 수 있는 존재냐. 나와 너가. 이런 개념도 있지. 민족이라는 게, 부부 간에 어쩌고저쩌고 한다고 해도. 그리고 아마 감독님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여기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 아닌가. 말하자면 좀 비정할 만큼 냉철하게 본 영화인 거지. 가령 셋이서 탄 차가 개를 치는 장면에서, 그 장면이 논리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이 지금 갖고 있는 내면의 상황들이 어떤 것인가 그걸 표명할 길이 없는 거여. 이 자식은 개를 먹거리로 생각하고, 전쟁은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게 이네들 입장이지. 신성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잖아. 가족회의를 몇 번이나 열어. 빼도 박도 못하지만, 그런 점에서 내면을 표출한 거고, 개를 치는 장면은 임권택 감독님의 아이디어인데 나는 전체에서 가장 좋다고 봤어. 감독님의 서브 텍스트의 무서운 점이지. 에필로그에서 또 다시 재이산(再離散)을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처지이자 복선이기도 했으니까. < 티켓 > (1986) 정성일 _ < 티켓 >은 임권택 감독님이 맹렬하게 리얼리즘을 찾는 영화입니다. 이때 이 영화는 이상할 정도로 < 길소뜸 >과 멀리 느껴졌습니다. 임권택 감독님 필모의 특징 중의 하나는 A를 하면 다음에 B를 하는 것이 아니고 A 다음에 NOT A, 무조건 A는 아니어야 한다는 작용 반작용의 리듬이 있습니다. 송길한 _ 어떻게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작품의 맥락이 왔다 갔다 한다고 생각하지. 나는 어떻게 보면 그래야 되는 것이고 하는 것이지 꼭 자기 세계를 만든답시고 비스무리하게 패턴화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봐, 다양성이란 면에서. 요는 각 작품의 완성도가 문제겠죠. 정성일 _ < 티켓 >은 한쪽에서는 < 짝코 >에서부터 죽 이어졌었던 역사의 문제가 희미하게 뒤로 물러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 만다라 >에서 이어지는 철학적인 존재론적인 문제가 잠시 뒤에 선 채, 아주 드물게 사회적인 문제에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도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에는 이상할 정도로 사회적 문제에 눈을 돌리는 영화는 없습니다. 이 이야기에, 혹은 네 명의 여자 주인공들의 어떤 부분에 끌렸습니까? 송길한 _ 사회적이라면 너무 거창하고, 세태(世態)적이라고 봐야지. 그것은 우리가 계획적으로 상업적인 영화를 하자고 했었어. < 티켓 >은 김지미 씨의 회사 지미필름의 오프닝 작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보고 감독님이 자꾸 얘기하는 거여. “어이, 이건 우리가 이제까지 했던 거랑 전혀 다르게 가야해”, 했던 게 장사가 되어야 하니까. 정성일 _ 이건 에로영화도 아니고 고발에 가까운 영화인데... 보는 사람을 몹시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심지어 검열에서 뒷부분이 뒤집힐 만큼 마지막 결론도 끔찍하게 끝나고 있습니다. 근데 그걸 상업영화로 생각했다는 게 좀 놀라운 말씀이네요. 송길한 _ < 티켓 >이란 게 표피적으로 보면 매춘에 관한 얘기 아닌가요. 그리고 그때만 해도 티켓에 대한 말이 없었어. 사회가 얼마만큼 사람을 비인간화 시키고 있나. 이렇게까지 이야기가 퍼져간 거여. 그래야 널찍하게 멀리 볼 수 있으니까. 사회가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것에 대해 그대로 그것을 고스란히 보임으로써 우리는 안티를 한다. 이런 얘기가 없어져야 한다, 그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거 나오고 티켓 다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 버렸잖아. 근데 나는 몸서리쳐지게 죽을 맛인 게, 그 무대가 실제 다방이잖아, (이야기가 전부) 거기서 들락날락 하는 것인데, 감독님이나 나나 그것을 마당극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근데 마당극처럼 됐지, 그게. 김지미 씨는 상업영화로 장사하려고 한 게 아니라 완전히 열정적으로 잘 했어. 박근형 씨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이었는데, 그래서 나는 이 친구를 시인 신동엽이 정도로 높여 놓은 거여. 거기서 흐르는 시가 신동엽의 시야. ‘아사녀’. 다들 모를 것인데, 반체제인사였고 또 그런 캐릭터가 변절해야 갈등도 증폭될 테니까. 나는 시나리오에서는 그런 걸 생각할 짬이 없었는데, 박근형이 딱 나타나서, 우리 사랑은 다 게임이 끝났다 그러고 차가 휭 하고 간다고. 처음에 이 친구가 그때 약 올리듯이 오렌지 캔 주스를 먹고 있었는데, 그걸 차 위에 놓아. 그리고 절교 선언을 하고는 차가 휭 가니까 그게 툭 떨어져. 그 소품이 말하는 건 쏙 빨아먹고 간다는 거지. 너무 자연스럽게 보여 지는 거야.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 노래가 딱 붙으니까. 절묘해, 그 대목이 오래 안 잊혀져. < 개벽 > (1991) / < 달빛 길어올리기 > (2010) 정성일 _ < 티켓 >까지 작업을 하고 나서 < 씨받이 >가 두 분의 마지막 작업이 되었습니다. <씨받이> 이후의 임권택 감독님 영화들 중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영화는 무엇입니까? 송길한 _ 나는 < 개벽 >을 상당히 좋아해. 당시의 우리 영화 수준이나 형편을 봐서라도 그런 걸 건드릴 사람도 없었고, 누군가는 건드려야하는데 아무나 못 건드리는. 그런 작품이 두개가 있어. < 달빛 길어 올리기 >와 <개벽> 두 작품. 누군가는 꼭 건드려야해. 하지만 이건 아무나 못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정성일 _ 긴 시간의 공백 이후에 임 감독님 현장을 다시 방문하신 건 < 달빛 길어 올리기 >의 각색으로 참여할 때였습니다. 25년 만에 다시 곁에서 보면서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송길한 _ 아직도 멈추지 않고 드라마의 관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험하고 있는 모습. 그걸 하여튼 구현하려는 정신, 그게 내심 감동으로 다가왔지요. 정성일 _ 임권택 감독님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서 쳐다봤던, 말하자면 함께 작업을 했던 작가로써, 102번째 작품 < 화장 >에서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송길한 _ 그 양반의 스타일에 맞게 쿨하고 콜드 한 것. 나는 궁극적으로 이 양반이 100 작품 넘게 만들었지만 현재까지도 그런 소재를 백미(白眉)로 한번 찍어봤으면 하는 것을 바라요.. 임 감독님도 굉장히 재미있어 하실 것 같아. 주인공 오상무 부부의 삶의 궤적과 여직원 추은주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궁금해요. 지금까지와는 전혀 색다른 걸작을 기대하고 있어요. 정성일 _ 마지막 질문입니다. 선생님에게 임권택 감독님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송길한 _ (망설임)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내 영화 인생에서 가장 존중하는 분. 정성일 _ 두 분 사이에서 지금 떠오르는 에피소드 하나만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사소한 이야기도 상관없습니다. 송길한 _ (한참 생각) 딱 떠오르는 게 없는데. 영화를 떠나서도 늘 마음속으로 가까이 계시니까. 정성일 _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_ 11월 10일, 날씨 화창했지만 바람이 몹시 차가웠음. 정리, 진행, 사진_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