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된 자식들
- 감독
- 임권택
- 제작년도
- 1982
- 출연
- 안성기, 방희, 조남경, 최성호, 김지영, 이해용, 최희정, 이석구, 권일정, 김기종, 김기범, 남수정, 이미옥, 이예민, 박부양, 문미봉, 안진수, 최성관, 나갑성, 백상기, 박영숙
종종 임권택 을 공격하기 위해서 ‘따분한 계몽영화’라는 표현을 동원한다. 이 단정적인 범주와 싸우는 것은 꽤 까다로운 일이다. 그건 공격적인 지시어를 꺼내 든 쪽도 마찬가지이다. 계몽은 매우 긴 철학적 토론의 역사를 지닌 개념이기 때문이다. 계몽은 두 갈래 길의 교차로에 서 있다. 하나는 합리주의 프로그램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국가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지식 사이에 스며든 권력 장치의 작동방식이다. 물론 여기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칸트이다. 잘 알려진 대로 칸트는 1784년 계몽주의란 무엇인가, 라고 물어본 다음 1798년 다시 한 번 약간 질문을 바꾸어 혁명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어보았다. 그사이에 놓여있는 것은 프랑스 대혁명이다. 논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나치를 피해 망명길에 쓴 「계몽의 개념」에서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계몽의 방식에 몸서리쳤다. 계몽이라는 이름의 후퇴. 이 역설적인 패배. 우리들이 계몽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꺼내 들 때 대부분은 이 책에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잘 알려진 대로 이 글은 다른 단상들과 함께 1969년 4월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책으로 묶였다) 하지만 푸코는 이 말을 재치 있게 뒤틀었다. 그는 계몽주의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계몽이라는 사건은 무엇입니까, 라고 되물었다. 이 질문(을 빌린 대답)을 읽은 사람들은 그런 다음 푸코와 하버마스 사이에 있었던 지적인 불화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자리는 이 논쟁을 다루기에 적절치 않다. 하지만 나는 ‘계몽영화’라는 개념 속에 서로 완전히 대립적인 두 갈래 길이 놓여있다는 것만은 환기시키고 싶다. 종종 이 논제를 쉽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게으른 비평가들은 일련의 영화들에 대해서 (미처 정의내리지 못한) ‘계몽영화’라고 부른 다음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그 영화들이 국가에 의해서 산업에 부과된 강제적인 수행인 것처럼 부른다.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도시는 매우 빠른 속도로 근대의 과정을 밟아나갔고 농촌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형태에 머물러 있는 단계가 장기적으로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 존재하는 (약간 따분한 표현이지만) 둘 사이의 간극에는 어떤 지체가 존재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단계가 있다. 여기에는 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관계를 일시에 와해시키고 경작자의 농작물에 대한 노동의 결과를 자본주의 노동지대로 전화시키는 과정에는 토지의 소유라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차액지대라는 다소 까다로운 잉여가치의 모순이라는 계산법이 기다리고 있다. 그 계산은 내 몫이 아니다. 이 과정에 국가가 폭력적으로 개입했을 때 예술이 항상 국가를 비판한 것은 아니다. 도브첸코는 이 개입을 시적으로 옹호했다. (< 대지 Zemlya >(1930)) 부뉴엘은 처음에는 다소 에매한 입장을 취했다. (< 빵 없는 대지Las Hurdes >(1933)) 반대로 누군가는 이 개입을 필요한 악이라고 옹호하기도 하였다. 물론 필요한 악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잘 알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평범한 악이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arung」 이 시기에 임권택 은 근심스럽게 그 폭력을 바라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강제적인 과정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임권택은 (아주 직접적인 의미에서) 계몽교훈극 영화에 가담했다. 그건 사실이다. 아마 그 첫 영화가 < 아내들의 행진 >일 것이다. 1974년은 새마을 운동이 국가주도로 진행되고 있었던 해이다. 하지만 그런 다음 < 아내 >와 < 옥례기 >를 찍고 나서 새마을 영화를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 ‘이후’이다. 임권택은 자발적으로 계몽 교훈극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사태가 기묘한 것은 이 첫 번째 교훈극이라고 부르고 싶은 영화가 <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다. 이때 임권택은 단순하게 계몽에 합류하는 이상으로 사회 안의 사람이 가져야 할 도덕에 대해서 선악을 구별한 다음 가혹하게 비판하기 시작한다. 이때 공동체의 도덕은 다소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임권택의 도덕은 지나가 버린 공동체와 도래할 (혹은 해야 할?) 공동체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지금은 틀렸지만 그 비판이 어느 쪽을 향하는지 종종 모호하다. 그래서 다소 따분하게 여겨지는 훈고주의적 향수처럼 느껴지던 설교가 어떤 때는 갑자기 공허할 정도로 원칙적인 자리에 창백하게 머물면서 현실 안에서 거의 불가능한 비판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임권택의 일관성은 거의 무조건적인 충실함이다. 무엇에 대한? 여기에 이상한 대답이 기다리고 있다. 이웃에 대한 충실함. 이때 자기 자신의 주인의 자리를 잃지 않으면서 이웃의 자리에 대한 충실함이 지켜져야 할 때 여기에는 자기와 이웃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속되어야 하는 전체선이라는 불길한 구름이 떠오른다. 우리를 내려다보는 구름. 그것이 무엇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투명한 덩어리. 건드릴 수 없는 자리에 떠 있는 저 그 무엇. 나는 여기서 구름이라는 표현을 단지 문학적 수사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붙잡을 수도 없고 건드릴 수도 없는 저 모호함이 종종 공허하게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저것이 마치 (이 말을 피하고 싶지만) 큰 타자처럼 아주 분명하게 머물고 있음을 환기시키고 싶다. 이 세계에는 어떤 권리도 없고 오직 의무와 책임만이 있다. 어떤 의무? 그것을 쳐다보아야 할 의무. 어떤 책임? 그 의무를 지켜야 할 책임. 그것이 이 세계에 머무는 방법이다. 임권택은 이 방법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문제는 종종 그 구름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하고 싶어 할 때 생긴다. 그때 임권택은 그 자리를 법정에 넘기거나(< 법창을 울린 옥이 >) 혹은 왕의 자리에서 명령하는(< 망부석 >과 < 십년세도 >) 형식을 취했다. 그런 다음에도 그의 영화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이 자리를 구태여 남겨 놓았다. 종종 임권택이 절제와 단호한 결정에 따른 결말을 마련했다고 설명하는 후기 영화들에서조차 그 자리는 좀 더 세련되고 때로 뒤로 물러나 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 데도 김두한이 어린 시절의 친구 김동회가 혼마치깡의 일본 야쿠자 하야시 패의 앞잡이가 되어 대결을 청할 때 갑자기 지식인이었지만 거지패로 전락한 사내가 끼어들어 상대방의 민족의 도리를 외마디처럼 따져 묻는다. (< 장군의 아들 >) 나는 임권택의 영화 전편을 놓고 이 자리에 관한 긴 목록을 작성할 수도 있다. 여기서 내가 제기하는 질문은 큰 타자의 자리를 가장한 국가의 요구와 임권택 스스로 자발적으로 나서서 그 자리를 채우려는 노력 사이에서 1970년대 혹은 80년대 초의 영화들이 겹치면서 사태를 까다롭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거의 이야기되지 않는 < 복부인 >은 임권택 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며 그래서 심지어 순수하다고까지 말하고 싶은 계몽교훈극이다. 좀 이상한 것은 이 영화가 1979년 10월 26일 이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유신을 국가의 이념으로 내세우고 새마을운동을 근대화의 정책으로 집행했던 장기집권 독재자인 대통령이 부마항쟁에 이어진 요정에서의 총격으로 사망한 다음에 만들어진 이 영화에는 아주 잠깐 있었던 80년의 봄의 기운이 전혀 없다. 그건 그해 만든 다른 영화 < 짝코 >에서 그나마 희미하게 느껴지던 그런 열린 숨통의 약한 기운조차 없다는 점에서 더 이상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임권택은 정치적인 담론들 사이에 가까이 다가간 적이 없다. 물론 <복부인>은 우수영화에 선정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임권택의 영화는 우수영화에 선정되지 않은 영화를 찾기 힘들다. 심지어 반공영화에 대한 반(反)영화라고 부르고 싶은 <짝코>도 반공 우수영화로 선정되었다. 그러던 시절이 있었다. <복부인>을 보고 난 다음 잠시 멈추게 되는 것은 부의 축적과정에 대한 분노에 가까운 경멸감이다. 그것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과정 자체에 대한 분노라는 점에서 정치경제학적인 계몽의 관점에 선다는 사실에 당황스럽고 그럼에도 여기에 그 과정에 대한 분석적 비판이 전혀 없다는 것이 어리둥절하다. 임권택의 새마을 운동 계보 임권택 은 돈을 종종 징그럽게 쳐다본다는 인상을 준다. 내가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서 반복적으로 마주친 것은 돈에 대한 그의 태도이다. 마치 임권택은 돈이 자본주의의 형식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전염병인 것처럼 대하면서 돈을 다루는 등장인물들의 관계 사이에서 그 누군가의 악에 의해 다른 누군가가, 혹은 그 전체가, 붕괴되는 대신 아무 문제 없었던 관계에 돈이라는 불순물이 끼어들어서 생겨난 새로운 관계 사이의 잉여가치에 의해 타락하는 것처럼 다루었다. 여기서 이 설명을 경제적인 관점으로 문제 제기하는 것은 요점이 아니다. 물론 자본주의는 잉여가치의 형식 자체의 비밀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그 잉여가치의 이면에 숨겨진 그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다룬다. 미처 보지 못했지만 형식 뒤에 숨져진 돈의 이면이 만들어내는 물신숭배 속에서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다룬 첫 번째 영화는 < 잡초 >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가정한다. 그런 다음 그는 긍정의 계열과 부정의 계열 양쪽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전자의 계열이 ‘새마을 영화’인 < 아내들의 행진 > < 아내 > < 옥례기 >로 이어진다면 후자는 < 맨발의 눈길 > < 내일 또 내일 > < 복부인 > < 오염된 자식들 > 그리고 < 티켓 >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런 다음 마치 이것이 돈에 대한 이론적 실수인 것처럼 양쪽의 계열 모두 갑자기 사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임권택이 함께 계몽교훈극의 양식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리고 돈의 문제가 완전히 이야기에서 쫓겨난 것도 아니다. 다만 돈의 운동이 관계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관찰을 중단했을 뿐이다. 이 두 개의 계열에서 이상한 것은 한쪽에서 긍정적인 가치로 다루었던 부의 축적이 다른 한쪽에서는 수수께끼처럼 악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두 개의 계열은 거의 공존하듯이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마치 임권택은 둘 사이에 아무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번갈아 두 계열 사이를 오갔다. 여기에 단순하게 시골과 도시의 대립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내>는 서울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이다. 반대로 <티켓>은 이전의 영화들이 무대로 삼았던 서울로부터 강원도의 작은 항구도시로 물러난다. 물론 둘 사이에 약간의 차이는 있다. 하나는 부의 축적을 향한 ‘선한’ 의지가 있다. 다른 하나는 부의 효과에 의해 ‘나쁜’ 선택을 한다. 물론 그 둘이 결국 도달하는 차이는 정반대의 자리이기는 하지만 문득 그 결과를 바라보면서 그 둘이 서로에 대한 외설적 버전이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둘의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 복부인 >은 그 점에서도 좀 괴상해 보인다. 임권택 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희극에는 자신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약점을 고백하곤 했다. 그의 영화는 대부분 무겁고 종종 어두우며 희극적인 요소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건 처음부터 그러했다. 나는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서 내내 낭만적인 기분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이따금 희극영화를 만들긴 했지만 1969년에 만든 시인 천상병의 기행에 관한 희극 < 신세 좀 지자구요 > 이후 임권택은 이 장르를 완전히 잊은 것처럼 보였다. <복부인>은 거의 대부분의 장면이 조금도 우습진 않지만 임권택은 그녀들의 행동을 다소 과장된 톤으로 우스꽝스럽게 다룬다는 점에서 희극에 가깝다. 이 영화는 이미 제목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한혜숙이 연기하는 한 여사가 달동네에서 살다가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복부인이 되어 처음에는 아파트 투기를 하다가 땅 투기에 나서고 그녀들을 상대로 커미션을 받던 부동산 업자가 사기를 치고 해외로 달아나려던 순간 경찰이 이들을 덮쳐 모두 감옥으로 간다. 희한하게도 이 영화에서 고등학교 동창으로 나오는 세 여자는 이름을 부르는 대신 서로에게 ‘여사’라는 호칭으로 부르면서 끝내 우리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말하자면 익명의 존재. 그녀들은 누구나 그 자리에 불려갈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며 또한 누구도 그 자리에 가면 안 된다는 경고가 거기에 있다. 한 컷으로 촬영된 들고찍기 두 번째 괴상한 점. < 복부인 >은 임권택 의 영화에서 가장 난폭한 카메라의 움직임을 지닌 영화이다. 임권택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카메라를 들고 찍는 것을(hand_held) 선호하지 않는다. 그는 정교한 구도를 선호하며 종종 그 자리에 멈춰 서서(fixed) 등장인물을 바라보거나 때로는 그냥 내버려두는 것만 같은 거리를 선택한다. 더군다나 임권택은 <복부인>을 찍은 이듬해 그의 가장 명상적인 영화 중의 한편인 < 만다라 >를 그렇게 멈춰 선 채 망원렌즈로 멀리서 바라보면서(long_shot) 찍었다. 그는 그때 자신의 촬영 스타일의 변화를 찾고 있지 않았다. 임권택은 사실상 < 족보 >에서 자기 스타일을 찾았고 그런 다음 그걸 밀고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복부인>은 거의 예외적으로 인물을 따라 카메라를 들고 찍으면서 몹시 흔들리거나 때로 인물 동선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당신은 이때 가벼운 경량 디지털카메라가 아니라 무시무시하게 무거운 미첼 필름 카메라로 영화를 찍던 시절이라는 것을 셈에 포함시켜야 한다. 임권택이 여기서 서정민에게 요구했을 카메라의 스타일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뉴스를 찍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 복부인의 생태를 고발한다는 심정으로 따라가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그래서일지 모르지만 <복부인>은 드물게도 (그리고 아마 거의 마지막으로) 1.33 사이즈로 찍은 영화이다.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이 영화의 화면을 보고 있으면 고전적인 4대 3 비율의 텔레비전 모니터가 떠오른다. 만일 스타일로 설명한다면 <복부인>은 <족보> 이후 이어지는 일련의 나중에 나타날 것의 준비라는 과정의 바깥에 놓여있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하게 불순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영화에 담긴 분노가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보는 내내 그걸 느낀다. 그래서 그 과정 자체를 중단하고서라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그 어떤 대상이 여기에 있다. 이때 해야 할 그 무엇이 나중에 나타날 그 무엇을 방해하고 있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대목은 여기에 있다. < 복부인 >은 나중에 나타날 그 무엇과 타협할 수 없는 과정에 대한 부정적 계기인 것이다. 우리가 이걸 완전히 역전시켜서 물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 <복부인>에서 임권택 이 한 것은 이 일련의 과정에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걸 해야만 했다. <복부인>은 이야기 안에서 보기에는 도덕적이지만 형식적으로 이 영화는 임권택에게 윤리적인 결정이다. 그걸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 그리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걸 한다. 나는 지금 <복부인>의 미학적 결정을 물어보는 중이 아니다. 이 영화를 형식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간다면 너무 빈곤하고 앙상해서 누구라도 그냥 빨리 지나쳐가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왠지 여기에는 임권택이 이건 그렇게 해야만 한다, 는 어떤 태도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복부인>은 < 짝코 >가 만들어지던 해에 거의 동시에 만들어졌고 < 깃발 없는 기수 >와 < 만다라 > 사이에서 만들어졌다. 물론 다른 계열이 여기에 공존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복부인>은 < 내일 또 내일 >에서 < 오염된 자식들 >로 가는 그사이에 놓여있다. 여기에는 다루어야 할 그 무엇에 대한 충동과 그것이 불러일으킨 진동의 목표는 형식 안에 통합될 수 없다는 어떤 두려움이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내가 임권택의 내면을 말할 수는 없다. 그건 비평의 자리를 훨씬 벗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설명할 수는 있다. 임권택에게 돈은 미학적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에서 더 있는 그 무엇이다. 후렴구 같은 반복. 더 있는 그 무엇. 그래서 때로 임권택의 계몽교훈극들은 마치 자본주의 바깥에 놓인 것처럼 시작한 다음 거기에 돈이 침입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다소 따분하게 설명하면 임권택은 고전경제학에 머무르는 것처럼 보이고 그 잉여의 형식을 분석하는 자리로 밀고 나가지는 않기 때문에 그가 보수주의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임권택이 단지 국책영화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수동적인 영화들을 추월해서 자발적으로 그 과정의 불행과 경제적 행위 뒤에 놓여있는 도덕적 타락을 공격하기 시작할 때 그는 무언가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해야만 한다면 심지어 자신의 영화 안에서 나타나야 할 과정의 형식조차 포기한다. <복부인>이 취한 다소 보수적(일 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 부정확해서 종종 도덕 교과서적)인 관점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섬뜩해지는 순간은 그때 나타난다. 내내 돈의 교환관계에서 계약의 사법적 테두리 안에 머물면서 위법의 행위에 대해서 반감을 표시하던 이야기에서 비교적 주변에 놓여있던 인물들이 한 여사와 함께 계급적 상승을 하는 동안 이따금씩 등장하다가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주인과 노예의 전도된 관계로 도약을 시도할 때 임권택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경멸의 태도를 취한다. 이를테면 한 여사의 어머니. 그녀는 영화에서 아주 가끔 등장해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다음 이야기는 한 여사를 따라가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의 변화를 과정 안에서 보면서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해한다. 하지만 아주 이따금 등장하는 어머니는 마치 그녀의 인격이 집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으로 이 신에서 저 신으로 옮겨갈 때 점프한다. 아니, 차라리 돈이 만들어낸 재산과 그에 따른 부의 축적이 가져온 새로운 관계에서 두 명의 다른 어머니가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논점이 있다. 돈은 인물과 사회 사이의 매개가 아니다. 돈이 가져오는 가장 큰 효과는 그 인물에 대한 타자로서의 또 다른 그 인물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때 그 인물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물이 된다. 좀 더 명료한 설명. 그 인물에 돈이 플러스 될 때 그 인물은 +a가 아니라 a라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혹은 이동하는 것이다. 이게 왜 중요한가? 임권택은 모순이 발생할 때 그 안에서 어떤 종합도 시도하지 않는다. 반대로 모순이 점점 더 확장되면서 전체가 붕괴되어 간다. 다만 그는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있다. 몹시 무서운 사실. 아무리 모순이 확장되어도 세계가 붕괴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건 그의 경험주의적 진술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확장되어도 세계가 몰락하지 않을 때 세계는 끝이 없는 지옥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물은 간신히 견디면서 점점 더 찌그러진다. 그때 항상 임권택이 선택하는 방법은 둘 중 한 가지이다. 그 과정에서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갔을 때 이야기의 고정점이 되었던 인물을 삭제하거나 아니면 이야기 바깥으로 떠나보내는 것이다. 혹은 내보내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복부인>은 <짝코>와 동일한 결말을 맞는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인지도 모르다. 혹은 <만다라>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있으면 참선의 세계에서조차 그런 결정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나면 세계가 남는다. 혹은 지옥이 기다린다. 세 번째 괴상한 점, 혹은 맨 처음의 질문. < 복부인 >이 계몽교훈극의 형식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이 영화의 교훈은 어딘가 당혹스럽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긴 설교가 나온다. 한 여사를 비롯한 세 명의 복부인은 토지 사기를 당하기 직전 현장을 덮친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구조받듯이 경찰서에 잡혀 온다. 이때 마침 그녀들이 땅 투기에 치마 바람으로 바깥으로 나도는 동안 내기 화투에 빠진 남편들이 타짜들의 짜고 치는 도박에 걸려들기 직전 마찬가지로 현장을 덮친 형사들에게 구조받듯이 경찰서에 잡혀 온다. 나는 일부러 복부인과 그녀들의 남편을 거의 반복하듯이 썼다. 그런 다음 그 둘은 우연히도 운 나쁘게 같은 경찰서에서 서로 마주치게 된다. 복부인과 남편의 대면, 그리고 남편의 일장연설 양쪽을 번갈아 본 다음 “지금이 어느 땐데 정신 못 차리고 이래?”라고 야단치는 형사에게 한 여사의 남편이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형식을 빌려서 긴 설교를 한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사기를 해서 얼마의 돈을 땄든 원망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저기 앉아있는 복부인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사람들입니다. 노름판에서의 희생자들은 그 판에 끼어든 사람들로 끝나지만 저들 복부인들의 투기는 사기 도박꾼들보다도 훨씬 반사회적인 해악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저 여자들 때문에 주택과 땅값은 천장을 모르고 뛰고 결국 그 대가를 마지막으로 치르는 것은 저 여자들의 투기와는 하등 관계없는 영세민이요, 실수요자들입니다. 저들이야말로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하게 찍혔고 그러면서 필요 이상으로 길게 이어진다. 영화는 이 대사를 하는 동안 마치 경청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약간 웅변을 하는 것처럼 하는 이 설교는 < 복부인 >이 일종의 교육극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환기시킨다. 그들은 교훈을 얻기 위해서 시련을 겪었고 이제 설교를 들어야 할 시간이다. 이 대사가 끝나면 암울한 감옥이 보여지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영화는 끝난다. 대사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설명으로 이어진다. 이 대사 안에서 땅 투기와 도박 중에 어느 쪽이 더 “반사회적 해악”인지를 따지거나 남편이 아내에게 그렇게 잘못을 따져 물을 자격이 있느냐고 바보같이 반문하는 것은 논점을 벗어난 것이다. 이 대사는 <복부인>이라는 계몽교훈극이 주는 교훈이라는 것이 요지이다. 그런데 이때 이 대사에는 어떤 교훈도 없다. 한 여사를 비롯한 세 명의 복부인이 경찰서에 온 것은 경찰의 부동산 사기단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그녀들의 투기 과정이 드러나 함께 검거된 것이지 그녀들의 땅 투기 과정에서 “투기와 아무 상관 없는 영세민들이요, 실수요자들의” 고발 때문에 여기에 온 것이 아니다. 또한 이야기에서 세 명의 복부인은 서울 인근 지역의 재개발 지구의 농토를 소유하던 할아버지를 속이긴 했지만 그녀들은 그 과정에서 영세민들과 거의 어떤 불화도 겪지 않았다. 그 땅은 내놓은 물건이었으며 그녀들은 중개업자로부터 그 땅을 사들인 다음 되팔았다. 여기에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거래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한 여사는 자신의 남편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설교에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거시적인 경제적 관점을 도입한다면 그녀들은 시차 간 차액을 이용하여 부당한 착취를 한 것이긴 하지만 <복부인>은 그런 관점과는 멀리 있다. 그녀들이 부동산 중개업자 송 사장을 통해 그 정보를 미리 취득하기는 했지만 여기는 지금 1980년이고, 그때 서울을 중심으로 한 부동산 투기는 행정과 자본 사이의 부의 재편과정의 일부였다. 몹시 끔찍한 이야기지만 정확하게 이 시기부터 대통령들도 부동산에 뛰어들어 친인척을 동원하여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물론 예외의 명단이 있지만 나는 논제를 단순하게 만들고 싶다. 이제 막 한강 이남에서 강남이 세워지기 시작하던 바로 그때는 야만의 시간이 시작하던 영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설교는 교훈의 형식을 빌려 무엇을 건드리고 있는 것일까. 만일 이 대답을 구하기 위해 그저 마지막 장면을 반복해서 본다면 끝내 대답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는 비밀이 있다. < 복부인 >은 영화가 시작하면 공항에 남편이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남편은 돈을 벌기 위해서 중동에서 (아마도) 장기간 일을 한 다음 지금 막 귀국하는 길이다. 그런 다음 장모를 만나 호언장담하면서 그동안 600만 원이나 벌었으니 이제 집도 사서 이런 달동네를 벗어나자고 말한다. 그가 되돌려 받는 말은 그 돈으로 어떻게 집을 살 수 있느냐는 대답이다. 600만 원이나 벌었다는 가치의 평가와, 600만 원밖에 벌지 못했다는 대답 사이의 간극. 단순하게 말하면 남편의 노동에 대한 임금의 가치가 느리게 축적되는 동안 재빠르게 상승한 사회 자본의 가치가 추월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꿈은 즉각적으로 좌절된다. 그건 이미 그가 아내와 함께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을 때 예고된 일이다. 그의 집은 마치 등산을 하는 것만 같은 계단을 따라 올라간 달동네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곳엔 택시도 가지 못한다. 아내는 택시비를 낸 다음 잔돈을 받기 위해 운전기사와 승강이를 벌이고 그런 다음 남편으로부터 ‘쪼순이’라는 핀잔을 듣는다. 한 여사는 주택 청약금을 든 아파트를 보기 위해 나갔다가 거기서 복부인으로 나선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고 얼떨결에 그녀들에게 당첨 순위인 아파트 청약번호를 넘긴 다음 며칠 후에 600만 원을 번다. 동일한 액수. 당연한 말이지만 돈은 질적으로 다른 모든 대상을 동일한 가치의 척도로 환원시키기 때문에 그 앞에서 남편이 중동에서 그 돈을 벌기 위해 팔아야 했던 노동력의 양과 시간은 한 여사가 단 며칠 동안 별다른 노력 없이 아파트를 환매한 차액과 동일한 교환가치의 수치가 된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방법은 둘 중 하나이다. 그 하나는 자본주의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화폐로 전화된 노동의 형식을 내용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은 전자이다.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 영화들은 과격한 정치적 해결을 제시하지만 대답은 진부하기 짝이 없다. 켄 로치는 매번 도식의 덫에 걸려든다. 후자를 선택하고 이 문제의 핵심으로 인물을 끌어당긴 다음 그 심연까지 들여다본 영화는 로베르 브레송의 < 소매치기 >이다. 물론 임권택 이 브레송의 방법을 따른 것은 아니다. 브레송은 그 간극 자체를 영화의 형식으로 만들어서 먼저 돈과 손의 운동을 보여준 다음 그 운동을 감옥으로 이동시킨다. 미셀은 마지막 순간 안타깝게 독백하듯이 말한다. “당신에게 이르는 길은 왜 이다지도 어려운 것이었을까” 두 영화가 모두 감옥에서 끝났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싶다. 하지만 <복부인>은 <소매치기>가 아니다. 임권택은 이 계보의 한쪽 끝을 건드리고 있기는 하지만 형식과 내용 사이의 매듭이 어떻게 사회적 네트워크 안에서 실재적 추상이라고 부르는 수수께끼에 이르는지를 다루지는 않는다. <복부인>은 다만 형식의 효과 안에서 내용에로 되돌아가기 위해 애를 쓸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형식을 다시 내용으로 전도시키는 과정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 과정에 관해서 약간 도식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한 여사가 자신의 동창인 박 여사와 정 여사와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남편은 이야기의 뒤편으로 물러난다. 한 여사의 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남편은 이따금 등장하며 그때마다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바뀐다. 이때 임권택 은 < 복부인 >의 이야기를 사회로 확장하는 대신 가족 안에 머물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시피 한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복부인>은 근본적으로 홈드라마이다. 이것이 맨 마지막 장면에서 남편의 장황한 설교가 영화 자신과 조응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래서 이 장면은 두 사람 사이에서 거의 바깥으로 나간 남편이 자기의 원래의 자리에로 되돌아오려는 재귀적 주체의 자리에 대한 변명처럼 들린다. 마치 이 마지막 장면은 <복부인>이 설교의 신과 나머지 영화 전체 둘로 나뉘어 있으며 이 신에서 다른 부분 전체가 미처 말하지 않은 영역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반대로 이 설교에 포함되지 않은 부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반문이 거기 고스란히 따라온다. 임권택은 이 설교를 단지 아내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집으로 돌아와야 하며 남편은 (다시 한 번 같은 표현을 반복하면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가부장적 주체의 정립을 위한 헛소리에 가까운 설교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이전에 임권택의 많은 영화들은 집을 지키기 위해 아내가 나서야 했으며 그녀들은 남편과 역할을 바꾸거나 자식들 앞에서 어머니로서 아버지의 역할을 하거나 때로 그녀 혼자 자립해야만 했다. 남편의 설교가 목표로 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 다시 한 번 영화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중동에서 돌아온 남편과 그의 아내 한 여사(와 딸과 장모)가 살고 있는 집은 영세민들의 동네였으며 한 여사가 복부인 동창들을 만나게 되는 아파트 분양 현장에 간 것은 그녀 가족의 실수요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집(home)과 집(house) 사이의 간극이 있다. 그런 다음 이 둘은 내용으로서의 집과 형식으로서의 집으로 분리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그 둘이 조응하는 대신 형식으로서의 집은 갑자기 내용에 구멍을 뚫은 다음 새로운 네트워크로 빠져나가면서 자기의 형식에 조응하는 새로운 참조틀로서의 내용을 찾기 시작한다. 이 공식은 여러 차례 임권택의 영화에서 반복되었다. 이제 서로 다른 두 개의 내용을 갖게 된 형식으로의 집은 자신의 (확대) 재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내용에 집중하면서 낡은 내용을 형식에 대한 형식으로 전도시키기 시작한다. 간단하게 한 여사와 남편 사이의 부부관계는 형식에 지나지 않게 된다. <복부인>은 기이할 정도로 남편과 한 여사 사이에서 부부관계를 보여주는 그들만의 아주 사소하거나 은밀한 장면이 없다. 그런 장면이 비어있어도 될 만큼의 알리바이를 제공할 수 있는 (다소 상투적이라 할지라도) 남편이 한 여사에게 이 관계에서 실패하거나 무심하게 대하는 어떤 순간도 없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남편이 중동에서 벌어온 600만 원이 집을 사는데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곧장 부동산의 네트워크 안으로 뛰어든다. 임권택은 이 간극이 심화되어가는 과정을 난장판이라고 파악한다. 그는 여기에 어떤 영화적 형식을 부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임권택에게 영화에서 형식이란 절대적으로 그 인물의 외재적 내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설교는 오로지 재귀적으로 경청할 때만 의미를 갖는다. 그렇게 들어야만 <복부인>이 지닌 계몽교훈극으로서의 진정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에는 내용이 형식의 타락에 대한 방어선이라는 교훈이 담겨있다. 만일 그걸 지키지 못하면 내용 자체가 소외의 모습으로 형식에 대한 형식으로 전락해가는 과정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므로 임권택의 도덕은 여기서 나온다. 그는 대상이 자신이 지닌 내용을 포기하고 형식이 압도할 때 타락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이때 형식으로부터 내용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과정은 둘 중 하나이다. 대가를 치러야 하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 그때 내용은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그 무엇을 잃어야만 이 셈은 비로소 성립된다. 임권택의 도덕이 처음 시작할 때는 항상 보수적인 자리에서 시작하거나 때로는 국책 홍보의 일부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그 자리를 추월해서 자신의 도덕을 집행하기 시작할 때 섬뜩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시간이다. 갑작스러운 ‘끝’ 네 번째 괴상한 점, 혹은 영화 이후의 시간. < 복부인 >의 마지막 설교의 장면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어떤 화해의 시간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그 둘은 서로에 대한 자기 자신을 위한 반성의 시간이 없다. 설교의 마지막 말을 이렇게 끝난다. “저들이야말로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저들, 이라고 부른 다음 용서할 수 없는 자들, 이라고 단호하게 판결을 내린다. 남편은 아내를 용서할 생각이 없으며 아마 이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그럴 것이다. 남편은 사기도박의 피해자이고 아내는 부동산 투기의 사기조작에 일부 가담했지만 동시에 피해자의 신분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약간의 벌금을 내고 경찰서에서 풀려날 것이다. 이 부부는 함께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 다음 남편은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자”와 함께 살 수 있을까. 한 가지 더. 아내의 반론은 여기에 없다. 계모가 되어 남의 자식에게 애정을 베풀면서 자기 자식을 홀대하며 평생을 살아야 했던 어머니가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낳은 자식과 마주해서 서로의 입장을 길게 논쟁하다시피 전개했던 < 둘째어머니 >를 생각해보면 의외라고 생각할 정도로 여기에는 형평성을 잃고 있다. 누가 보기에도 여기에는 남편의 오만이 있다. 이 설교의 앞부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사기를 해서 얼마의 돈을 땄든 원망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저기 앉아있는 복부인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사람들입니다. 노름판에서의 희생자들은 그 판에 끼어든 사람들로 끝나지만...(중략)” 남편은 자기의 자리를 희생자의 자리에 가져다 놓은 다음 복부인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다소 까다로운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복부인의 “반사회적 해악”을 비판하기 위해서 왜 이 자리에 와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그 말은 그 전에도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한 여사는 종종 집에 늦게 돌아오긴 했지만 언제나 귀가를 했으며 그녀는 자신의 가정을 파괴할 생각이 없었다. 언제나 딸을 걱정했으며 남편이 속을 썩인다고 말을 하면서 여전히 관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잠시 동안 춤바람이 나긴 했지만 다른 남자들과 성적인 교제를 하고 다닌 것은 아니다. 약간 조롱을 섞어 말하자면 그녀가 부동산 투기를 하고 다니는 동안 남편이 사회경제적인 운동 단체에서 활동을 하면서 갑자기 세상의 모순을 깨닫게 된 것도 아니다. 그동안 남편이 한 것이라곤 화투밖에 없다. 그런데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왜 이 자리가 필요해진 것일까. 나는 이 장소가 경찰서라는 것을 환기시키고 싶다. 임권택 은 교훈의 순간 종종 법정이나 경찰서, 혹은 교실과 같은 제도 기구의 장소를 선택한다. 그런 다음 그 설교를 제도의 담론처럼 환유시킨다. 임권택이 이루어낸 환유의 설교를 하는 장면에서 미학적으로도 가장 무시무시할 정도로 어떤 한계까지 밀고 나아간 순간이 < 티켓 >에서 정신병원에서 진행되는 마지막 대화일 것이다. <복부인>에서 순서는 이렇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결국 타락한 형식이 마지막에 도착할 장소는 경찰서일 것이다. 한 여사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거나(< 맨발의 눈길 >) 혹은 미쳐버리는(<티켓>) 것은 여기에 올바르지 않은 목적지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계몽교훈극이다. 이때 이 장소에 형식의 외곽으로 물러나면서 형식이 되어버린 남편이 같은 장소에 도착해야 한다. 여기서 남편이 한 여사에게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관점이 필요하다. 하나는 둘 모두를 사법의 무대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그 형식을 바라볼 수 있는 내용의 일그러진 시선이 필요해진다. 남편은 우월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여사의 자리에 대한 은유인 것이다. 노름판과 부동산 투기. 타짜들에게 속아 판에 앉아있는 도박 화투의 희생자들. 부동산 투기 전문가들에게 속아 판에 앉아있는 부동산 복부인들. 이 둘 사이에 비스듬히 세워진 거울이 그 둘을 마주 보게 만든다. 회화에서의 관점의 이동에 의한 잉여지식의 자리. 이때 내용은 형식을 내면화하고 주관화시키지 않으면 그 형식이 본래적으로 출발했던 내용의 도착적인 욕망을 읽어낼 수 없는 것이다. 남편이 재귀적 주체의 자리에로 돌아가기 위해 이 말을 할 때 그 설교는 고스란히 그 자신에게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한 여사의 반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만일 구태여 그 말을 해야 한다면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임권택은 그 반복을 찍지 않았다. 혹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직 중요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계몽교훈극의 대답은 언제 와야 하는가. 영화가 끝난 이후로 미루어 놓아쐽옳求짙옛틈句옜덫옛호옰颱督쳐杞옳求짙? 임권택 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 자리를 영화 안에 남겨놓았다. 이때 이 대답이 구조 안의 일부가 되는 것이 옳은가, 라는 반문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교훈이 목적론적이 되는 것은 옳은가. 그래서 많은 계몽교훈극들은 이 대답을 사후적으로 남겨놓기 위해 그 자리를 영화 바깥에 포함시켜 왔다. 임권택은 그 자리가 가진 불편함을 뻔히 알면서도 그 안에 끌어들이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그의 영화 전체에 걸쳐서 일관되게 유지된 거의 유일한 태도이다. 종종 임권택의 영화를 본 다음 설명적이라고 불평을 늘어놓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도 이 불평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아니, 잘 아는 정도가 아니라 여기에 대해서 물어볼 때마다 다소 몸서리를 치듯이 끄덕이며 대답한다. 잘 아는 것 같죠, 그런데 그걸 정말 알아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거예요. 그러니 그걸 말할 수밖에 없는 거죠. 여기에는 어떤 화해도 없다. 그는 이 화해가 심지어 굴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하겠다. 그러니 그걸 말할 수밖에 없는 거죠. 나는 이 말에 대해서 오fot동안 생각해왔다. 그런 다음 비로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임권택의 영화는 그 말이 영화 전체의 활동 자체를 통해서만 제대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 말이 올바른가는 내가 해야 할 질문이 아니다. 내가 할 일은 그 활동을 설명하는 것이다. (계속) 1980년 95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세경흥업 각본 윤삼육 촬영 서정민 조명 김강일 편집 김희수 음악 정민섭
... (계속) 이 글은 < 내일 또 내일 >에서 이어진다. 그러므로 혹시 그 글을 놓쳤다면 먼저 읽어주기 바란다. 다시 한 번이라는 반복. 임권택 은 매우 부정확한 방법으로 반복을 반복하고 있다. (같은 말을 서로 다르게 두 번 사용했다는 것을 주목해주기 바란다) 핵심은 그게 전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환원이나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진화적 관점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재현하는 데 실패했다고 여겨질 때, 심지어 어디선가 자기가 다룬 세계와 분리된 무언가가 거기 표현되기를 거부하고 멈추었을 때, 그것을 작동시키기 위해서 다시 한 번 건드리기 시작한다. 이미 나는 이 가정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나는 이 가정을 따분한 작가주의의 지루한 도식 안에서 다시 한 번 종합을 시도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럴 생각이었다면 (그저 간단하게 말해야 한다면) 성공적인 통과에 매달렸을 것이다. 내 질문은 반대의 자리에 놓여있다. 무엇이 무엇을 더하는가. 혹은 무엇에서 무엇을 덜 하는가. 아니, 이 정반대처럼 보이는 시도가 어떻게 동시에 일어나는가. 그때마다 임권택이 확장하려는 폭은 무엇인가. 이상하게도 거기에는 무언가 깨어난다기보다는 발생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다음 그것을 육화시키려 하는 대신 어떤 정신적인 이미지라는 기호로 만들기 시작한다. 간단한 비교의 예. 거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쉬지 않고 걸어가고 있는데 < 만다라 >와 < 취화선 >이 보여주는 그 차이의 폭을 떠올려보라. 그런 다음 그 사이에 < 개벽 >을 놓으면 거의 삼항 관계가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약간의 우회. 영화에서 이미지는 단 하나의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매번의 영화, 매번의 시도 안에서 구별되는 순간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서 무언가 보는 대신 어떻게 출몰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임권택은 영화 안에서 이미지가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건 처음부터 그러했다. < 두만강아 잘 있거라 >의 마지막 장면, 눈 위에서 펼쳐지는 전멸의 이미지에 대해서 나는 이미 길게 썼다. 물론 여기에는 불연속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선이 가늘게, 종종 희미하게, 때로는 완전히 지워져 가면서, 그러다가 어느 순간 불쑥 나타나면서, 다시 이어진다. 누군가는 이걸 매번의 매듭으로 만들어 연결고리의 개념화를 시도하고 싶을지 모른다. 나는 그런 시도가 항상 실패할 것이라고 그저 무심코 조심스럽게 작은 목소리로 충고할 수밖에 없다. 임권택 영화 안에는 식별 불가능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순환이 맴돌고 있다. 때로는 작고 가끔은 크지만 그게 일종의 블랙홀처럼 건드리는 순간 마치 암흑처럼 여겨지기는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어떤 때는 임권택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블랙홀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망설이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나는 < 티켓 >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방 마담 민지숙이 백치가 되어버렸을 때 그것을 느낀다. 그런 다음 이 선은 다시 약간의 진동, 혹은 회전을 만들면서 < 노는계집 창(娼) >에서 이어진다. 나는 언젠가 이 영화의 이상한, 정말 이상한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할 것이다. 물론 영화는 사유를 재현하는 예술이 아니다. 하지만 재현을 매개하는 방법을 놓치면 그 안에서 전개되는 표현의 양태에 대한 범주를 세워볼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걸 우리에게 가르쳐 준 영화는 고다르의 <영화사(들)>이다. 고다르는 영화의 역사 앞에서 악순환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나는 그걸 용기 있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 오염된 자식들 >( 임권택 , 1982) < 어둠의 자식들 >( 이장호 , 1981) 먼저 영화의 주변. < 오염된 자식들 >은 화천공사에서 이장호 의 < 어둠의 자식들 >이 성공을 거둔 다음 마치 연작(이라는 이름을 내세운 속편)처럼 기획된 영화이다. 이장호는 처음에는 <어둠의 자식들>을 정말 일련의 연작처럼 찍을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빈민 철거촌에서 자란 이철용은 교육도 잘 받지 못했고 게다가 한쪽 다리도 불편한 신체장애였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가난과 말 그대로 ‘투쟁’하면서 진보적인 기독교 교회의 민중 신학을 접하면서 의식화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알리고자 이동철이라는 필명으로 (약간 자조적으로 자신을 ‘이똥철’이라고 소개하곤 했다) 자신의 이웃들을 한사람씩 소개하는 <어둠의 자식들>을 썼고 이 책은 1980년대 사회과학에 피와 살을 나눠준 현장문학 중의 하나가 되었다. 아마도 이 소설은 중남미 트리니다드토바고의 작가 비디아다르 S 네이폴의 (1970년대 내내 ‘창작과 비평’과 ‘세계의 문학’에서 산발적으로 발췌 번역해서 소개해온) 작품 <미겔 스트리트>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 다음 이철용은 13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장호는 < 바람불어 좋은 날 >을 만든 다음 다시 한 번 더 깊이 도시 빈민의 구체적인 삶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그때 소설 <어둠의 자식들>은 이장호에게 도시 빈민들의 뒷골목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이 영화의 조감독을 했던 배창호 는 < 꼬방동네 사람들 >로 첫 영화를 찍었다. 이장호는 <어둠의 자식들>을 만들면서 제목 뒤에 ‘첫 번째 이야기, 카수 영애’라고 붙였다. 물론 이 영화에 가수 지망생이었던 영애의 후일담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장호는 금방 이 이야기에 흥미를 잃었다. <어둠의 자식들> 두 번째 이야기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 인조 카빈총 강도단 이종대와 문도석 사건을 각색한 <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를 만든 다음 다시 한 번 빈민촌 사람들을 다루긴 했지만 형식적인 실험영화에 가까운 < 과부춤 >과 < 바보선언 >에로 이끌렸다. 그리고 재빨리 다시 그 길을 중단하고 대중적인 사극영화 < 어우동 >과 거의 컬트적인 인기를 누린 만화를 영화로 옮긴 < 외인구단 >를 만들었다. 여기서 변덕스러운 목록을 멈추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자. 임권택 이 <오염된 자식들>을 만든 것은 그 사이의 어느 즈음이다. 이 영화는 유익서 의 원작 소설 「비를 타고 오른 망둥이」를 각색했으며 이동철 의 소설이나 이장호의 <어둠의 자식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 구태여 둘 사이의 교집합을 찾아야 한다면 주연에 안성기 가 출연한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오염된 자식들>의) 병구와 (< 어둠의 자식들>의) 태봉 사이에는 아무 연관이 없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이 영화사의 기획이었는지 임권택의 제안이었는지 어리둥절하게 보인다. 만일 영화사의 기획이라면 이동철의 소설에서 이장호가 영화로 담지 않은 수많은 다른 에피소드를 다시 각색해서 제작했으면 되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어둠의 자식 2>라는 제목을 달면 되었을 것이다. 그때는 아직 임권택은 영화사에서 기획한 다음 제안하는 영화를 연출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 만다라 >를 찍은 ‘직후’에 만든 (국책) 전쟁영화 < 아벤고 공수군단 >으로 이어지는 목록. (그리고 만일 임권택이 연출을 내켜 하지 않았다면 그때 화천공사에는 많은 감독들이 있었다.) 반대로 임권택 감독은 내 질문을 간단하게 부정하면서 “화천공사 시절 내가 먼저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했던 소설은 <만다라>가 유일”하다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그때에는 누구라도 <오염된 자식들>은 <어둠의 자식들>을 연상할 수밖에 없는 제목이었다. 만일 원작이 필요했다면 왜 <비를 타고 오른 망둥이>라는 제목을 사용하지 않은 것일까. (이 소설은 연재소설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다음 한 권의 소설로 묶였다.) 나는 이상하게 이 제목 앞에서 서성거리게 된다. 임권택은 어떤 때는 제목에 대해서 몹시 소중하게 여기다가 어떤 경우는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를 취한다. 물론 그 제목이 그 작품에 대한 그 자신의 호의와 (직접적으로) 연결 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오염된 자식들’은 어딘가 환경운동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게 만드는 제목이다. (물론 이 영화는 환경운동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때 AIDS는 지구 상 어느 사회에서나 공포의 병명이었고 문화정치학의 논쟁적인 담론이었다. (물론 이 영화는 퀴어 시네마가 아니다.) 임권택은 이 영화의 제목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를 보기 전에도 그렇지만 보고 난 다음에도 이 제목은 영화로부터 이상할 정도로 멀리 있다. 규화와 진우 병구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자. 여기서는 먼저 이야기 안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의 공통된 모양을 건드려보고 싶다. 단순하게 형태론적으로 다가가서 서사를 양쪽에서 바라보면 < 오염된 자식들 >은 < 내일 또 내일 >을 느슨하게 리메이크한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간단한 복기. (<내일 또 내일>) 규화는 대학을 졸업한 다음 기자생활을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큰 회사의 사장 딸인 가희를 만나 어린 시절부터 친구이자 가난한 애인인 미연을 버리고 결혼한 다음 회사의 상무가 된다. 하지만 결국 추락하고 그 집을 떠난다. 간단한 반복. (<오염된 자식들>) 병구는 대학을 졸업한 다음 하숙집에서 만난 약혼녀 형자가 있지만 회사 사장의 제안으로 사장의 딸 명희와 결혼을 한다. 하지만 결국 추락하고 그 집을 떠난다. 사회적 계급의 상승, 그리고 추락. 돈을 둘러싼 욕망의 경제학. 다음 차이. 규화에게는 지치지 않고 곁에 머물면서 도덕적 의무를 상기시키는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 진우가 있지만 병구에게는 그런 친구가 없다. 나는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규화가 처음부터 진우라는 친구 없이 도덕적 균형을 유지할 수 없는 주인공이었으며 두 인물을 전형적인 대립의 배치로 설정하고 둘 사이의 힘의 관계 안에서 이야기를 진행했다면 <오염된 자식들>의 병구는 규화와 진우를 한 인물 안에 서로 일그러뜨리는 방식을 거쳐 하나로 합쳐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때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둘 사이에서 종합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서로 반대의 힘. 그 둘이 하나가 되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쳐부수거나 혹은 굴복시키거나 아니면 둘 사이에서 위계질서를 세운 다음 공존하는 방식을 취해야만 한다. 이것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양하거나 혹은 지향하려는 것과는 다른 문제와 만나게 된다. 하나 안에 둘이 있게 될 때 그중 하나는 유령이 되어 어슬렁거리면서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임권택 은 이걸 염두에 두면서 기형적인 덧셈을 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덧셈은 영화에 관한 담론에서 위험한 도박이다. 나는 여기서 어떤 도식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저 영화에로 건너갈 때, 앞에서 뒤로 나아갈 때, 한 것을 다시 할 때, 그 안에서 대상이 어떻게 형상을 이루어갈까, 를 질문하려들 때, 거기서 무언가를 어쩔 수 없이 느껴볼 때, 나는 그 안에서 발생하는 덧셈이 일으키는 일종의 경련에 대해 피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느껴볼 때마다 (이 단어가 철 지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그걸 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끌어당긴다면) 그 안에서 임권택의 인물들은 실존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스스로 느껴보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여기서 내가 거의 필사적으로 인상에 머무르려 한다는 점을 계산에 포함시켜주기 바란다. 실존과 인상 사이에서 어떤 대화의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규화와 가희 그런 다음 변주. 임권택 은 둘을 하나로 섞으면서 마치 카드를 서로 뒤섞듯이 어떤 법칙 없이 하나의 다른 질서로 만들어낸다. 하지만 카드를 섞어서 그 순서가 바뀌었다고 해서 있었던 카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주의할 점. 그때 카드의 순서가 바뀌면 같은 카드가 다른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규화의 친구 진우는 이야기의 진행 안에서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한쪽 다리를 절룩거린다. 보는 내내 그 불편한 걸음이 이야기 안을 맴돌고 있지만 마치 맥거핀처럼 이야기에서나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에서 거의 다른 기능을 하지 않는다. 혹은 임권택 자신조차도 진우가 왜 그런 설정이 되었는지 잊어버린 것처럼 단 한마디도 그에 대해서 언급되지 않는다. < 오염된 자식들 >에서 (한쪽 다리가 불편한) 친구 진우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병구가 결혼하게 될 회사 사장의 딸 명희가 두 다리를 쓰지 못하고 휠체어에 앉아서 그를 맞이한다. 여기서는 < 내일 또 내일 >과 달리 명희가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설정이 이야기의 진행에서 중심으로 옮겨온다. 명희가 두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의 무능력할 뿐만 아니라 어떤 사회적 배경도 갖지 못한 병구가 그녀와 결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임권택의 인물들 사이에서 등장하는 반복적인 신체적 불구. 요점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나는 규화와 진우를 하나로 더한 다음 다시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병구 1과 병구 2로 환원시켰다고 말했다. 그 둘은 종종 숨바꼭질을 벌이고 때로 하나 뒤에 다른 하나가 숨어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진우의 외양은 병구에게 머물지 않고 명희에게로 옮겨간다. 그런데 여기서 그 인물의 성격이 옮겨가지는 않으면서 그 장애라는 한계가 전도된 고정점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카드를 펼쳐보자. <내일 또 내일>에서 맨 먼저 규화와 진우라는 두 친구를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그 둘 사이에 미연이 있다. 미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우지만 미연은 규화를 사랑한다. 그런데 (진우와 달리 이미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장을 차지한) 규화는 계급 상승을 위해서 (외동딸을 가진 부자 아버지를 경유하여) 가희를 선택한 다음 그녀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간다. 다음 차례. <오염된 자식들>. 병구가 있다. (달동네 하숙집에 사는) 병구를 (뒷바라지까지 하면서 결혼을 약속한 옆방 이웃의 가난한) 사랑하는 형자가 있지만 (취직을 한 다음) 병구는 계급 상승을 위해서 (외동딸을 가진 부자 아버지를 경유하여) 명희를 선택한 다음 그녀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간다. 아마도 당신께서는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읽는 착각을 느낄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 단지 진우가 괄호 쳐진 것만은 아니다. (<내일 또 내일>) 규화와 가희가 처음 만나는 날 다소 가학적인 섹스를 나누기는 했지만 그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면서 결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결혼하자마자 중단된다. 그래서 임권택은 두 사람 사이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단 한 쇼트도 찍지 않는다. 반대로 <오염된 자식들>에서는 병구가 명희와 결혼 다음 거의 이야기 전체를 결혼생활로 진행한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다음 명희는 휠체어에 앉아서 다소 가련하게 병구에게 “사람이 그리웠어요,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어요”라고 고백한다. 아마 그 말은 (그때까지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결혼한 다음 형자는 그 둘 사이에 끼어들 틈이 없다. 하지만 명희의 부모가 손자를 보기 원하고 병구는 매일 밤 명희와 섹스를 해서 임신을 시켜야 하는 상황에 떨어지면서 서로 다르지만 동일한 지옥 가까이 다가간다. 두 영화 사이의 차이는 이 틈에서 시작한다. 여기까지 오면 약간 까다로운 전환점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왜 거의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두 영화는 서로 합류할 수 없는 것일까. 그때 두 영화에서 가희와 명희의 차이는 단지 신체적인 제한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다. 불가능에 관한 간단한 가설. 가희의 자리에 명희를 가져다 놓고 명희의 자리에 가희를 데려다 놓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규화와 병구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서 서로 상반된 태도를 취할 것이다. 규화는 가희가 이미 여러 남자들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다른 남자들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오직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정작 자신이 결혼하지 않는 미연이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규화가 파국을 맞이하는 것은 그들 사이의 게임과 상관없이 완전히 외재적 요인인 시장경제에 의한 자기 토대의 붕괴에 따른 것이다. 반대로 병구는 명희가 다리를 고친 다음 다른 남자를 만날 때, 그런 다음 그 자신을 제외하고 모든 가족이 그를 속이려들 때, 병구 자신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규화처럼)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위해서 눈가림의 게임에 참여했다면 그 상태를 계속해서 연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병구는 그걸 참지 못한다. 물론 영화가 완결된 다음 가정법을 계속해서 밀고 나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만일 병구가 그걸 못 본 척하고 오로지 자신의 계급적 안락함을 누리기 위해서 거기 계속해서 자발적으로 눈 감은 척 머문다면, 적어도 그럴 수만 있다면, 병구의 잔인한 승리(를 가장한 패배)는 도덕적으로 몹시 끔찍한 지옥이 될 것이다. 우리는 원래의 영화로 돌아와야 한다. 이 이야기의 순환 구조 자체는 외형적으로 동일하지만 그것이 순환을 그려나가는 궤적의 차이는 기묘해 보인다. 무엇보다 점점 사회적으로 확장되어나가던 원의 궤적이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이번에는 반대로 차이가 그 안으로 파고들어 오면서 신체적으로 육화되어가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가장 이상한 순간과 마주친다. 두 영화가 거의 동일한 배움을 얻는다는 것이다. 마치 그것은 서로 다른 경로를 통과했지만 마침내는 같은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두 개의 길을 간 것처럼 보이기조차 한다. 나는 이야기의 형태가 동일하기 때문에 동일한 ‘엔딩’을 맞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규화와 병구가 동일한 ‘엔딩’에 도달했다고 해서 서로 다른 경로를 통과한 두 사람이 동일한 배움을 얻는 것은 말 그대로 괴상한 일이다. 이 말뜻은 임권택 이 두 편의 영화에서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같은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 이야기를 소급해서 거슬러 올라간 다음 어느 쪽을 선택해도 마찬가지라는 무시무시한 필연성의 법칙을 보여주는 중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때 배움은 과정의 선택을 통해서 얻게 된 우연한 소득이 아니라 어느 쪽을 선택해도 동일한 목적에 이르게 되는 운동의 감옥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좀 더 중요한 질문. 임권택은 그렇게 해서 거기서 나오는 열쇠를 찾았는가. 나는 질문을 좀 더 밀고 나아가고 싶다. 동어반복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여기서는 두 번이 중요해진다. 두 번째는 하나가 미리 주어졌기 때문에 그 안에서 제한적으로만 활동할 수 있다. 여기서 두 번째는 부정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두 개의 순간이 동시에 찾아오는 긴장으로 가득 찰 것이다. 하나는 기대의 순간이지만 다른 하나는 환멸의 순간이다. 그 둘 중 어느 쪽도 버려서는 안 된다. 하나가 다른 하나와 대화를 나눌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그 둘 어느 쪽도 사라지지 않고 공존하게 될 것이다. 물론 임권택 도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임권택의 인물들이 그 안에서 구조적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실존적으로 변화하는 과정 중에 놓여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때 규화와 병구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단지 그 두 사람의 성격이라는 따분한 설명에 기댄 것이 아니다. 그 둘이 시간 안에서 자기를 수행할 때 임권택은 내용을 탐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 자신들은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자신이 전체를 구성하는 한 요소라는 사실을 결국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추락해가는 자신의 운명이 구조적 필연성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렇다. 그렇게 쳐다보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임권택은 그걸 전복시킬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처음에도 그러했고 이후에도 언제나 그러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실존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 운명을 부정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도덕과 윤리 사이에 모호하게 선 결정이라는 결론에로 밀고 나아간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했다. 그 자신은 그걸 < 잡초 >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다. 지금은 그걸 놓고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때가 아니다. 여기서 내가 항상 뛰어넘기 힘겹게 여기는 것은 그 틈새이다. 틈새? 그 사이에는 결핍 혹은 공백이라는 심연이 기다리고 있다. 그 안에서 임권택은 체현의 놀이를 반복한다. 틈새를 메우겠다는 헛된 약속. 물론 거기서 한계까지 밀고 나아가면 기다리는 것은 환상이다. 우리는 이미 < 천년학 >과 < 달빛 길어 올리기 >에서 그걸 보았다. 이때 내가 < 내일 또 내일 >과 < 오염된 자식들 >에서 보려는 것은 어느 순간 대상과 그 거리를 상실해버린 것만 같은 어떤 역설적 자리이다. 어떤 자리? 인물들이 무언가 (다소 따분함을 무릅쓰고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자를 향해 한발 나아갈 때 다시 저자가 인물들을 향해서 한발 들어온 것 같은 그 자리. 여기서 임권택은 이 자리가 이 모든 이야기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마치 처음부터 준비된 이 자리에 가기 위해서 자리 자체가 다가온 것처럼 마련한다. 여기엔 아무리 인물들이 실존적 태도를 취한다 할지라도 비참한 운명의 계획이 어른거린다. 나는 여기서 두 개의 동일한 결론을 앞에 놓고 그 사이에서 이루어진 차이가 그 안에서 가져야 하는 도덕과 윤리 사이의 내기에서 내적인 발전이라고 불러볼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영화 안에서 임권택의 이미지들이 정신적인 기호가 된다면 오로지 이 순간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미지들은 어떻게 새겨지는가, 이미지들은 사건 안에 어떻게 흔적을 남기는가, 그 흔적 안에서 인물들은 무엇을 배우는가, 그런 다음 그것이 모여서 어디로 나아가는가. 그때 선한 것과 악한 것은 어디서 서로 나뉘는가. 여기서 먼저 혹시나 가질지 모르는 오해를 거절해야겠다. 나는 규화와 병구가 동일인물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그들이 거의 유사한 단계를 밟아가다가 갑자기 자신이 허공에 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추락한 다음 기이하게도 동일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치 임권택 은 인물들을 다룬다기보다는 이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다음 사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 그 둘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사실상 동일한 병명을 가진 증후가 통과하는 과정을 복기하는 것만 같다. 이때 이 두 인물을 둘러싼 흔적들은 놀랄 만큼 서로 닮아있다. 착한 조언자. 그런 다음 실종, 희생하는 여자, 두 명의 여자, 다리를 쓰지 못하는 불구. 부의 페티시즘.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어진다. 동일한 증후를 앓고 있는 사람의 두 번의 꿈. 이때 흔적들은 (우리가 잘 설명할 수 없는 규칙에 따라) 매번 새롭게 자리를 바꾸거나 이동하고 종종 압축된다. 단지 둘 사이에 교집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요구들이 서로 자리를 바꾸면서 같은 이야기로 두 개의 무대를 만든다. 하지만 무대를 꾸밀 수 있는 형상화의 재료는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두 개의 무대는 사실상 서로 마주 보는 거울처럼 보인다. 둘은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처음에는 잠시 다르게 보이지만 곧 그들이 활동하기 시작하면 그 둘이 같은 것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여기서 반복은 흔적에 의해 자기를 보존하고 관리하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두 개의 이야기는 마치 물구나무를 선 것처럼 마주 보면서 서로에게 빠진 것을 채워 넣기 시작한다. < 내일 또 내일 >과 < 오염된 자식들 >을 마주 보면서 두 개의 무대가 고통의 특권을 포기하는 법이 없다는 무시무시한 사실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 여기서는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니라 무대가 인물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임권택은 여기서 그 운동의 질량이 그들을 둘러싼 세계라는 결론에로 밀고 나아간다. 물론 그 안에서 두 인물 사이의 심리적인 기제가 동일한 흔적들로 이루어진 무대의 서로 다른 배치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에 관한 차이와 간격을 설명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규화와 미연 그런 다음 규화와 병구를 서로 좀 더 가까이 데려다 놓아보자. 두 영화는 이상한 방식으로 거의 동일한데 규화와 병구는 자신의 리비도를 해결하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 시작한다. 규화는 진우에게 거짓말을 한 다음 멀리 지방까지 가서 (규화와 진우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진우가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미연과 섹스를 한다. 병구는 저녁이 다가오는 오후 5시 40분에 하숙집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면서 AFKN 방송을 들으며 영어 공부를 하는 척하다가 (방이 약간 반지하의 위치에 자리해서 아래서 올려다보이는) 유리창 바깥에서 형자가 빨래를 내걸 때 보이는 치마 속을 훔쳐보면서 자위행위를 한다. 둘은 자신의 리비도를 처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다. 이때 두 영화 모두 리비도의 환상의 장막을 찢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규화가 미연과 섹스를 할 때 갑자기 비밀 뒤에서 이들의 사이를 잘 알고 있는 진우의 목소리가 침입하면서(voice_over_narration) 고통스럽게 양쪽으로부터 배신당한 자신의 심정을 고백한다. 이때 찢어진 장막은 반복해서 < 내일 또 내일 >을 구성하는 일종의 막(幕)의 역할을 한다. < 오염된 자식들 >은 같은 척하면서 다르다. 우리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병구가 창문 바깥의 여자를 바라보면서 자위를 할 때 처음에는 그 행위를 대상과 주체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거리가 확보된 상황에서 자아가 만들어낸 환상과의 놀이로 받아들인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이 시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여자가 돌아서서 창문을 두들기며 병구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하며 말을 걸 때 갑자기 환상과 가졌던 그 거리가 무효가 되면서 생겨난 소통의 거래가 욕망을 욕구에로 물러나게 만들면서 이 자위를 역겹게 만든다. 간단해 보이는 차이. 그러나 일단 시작하자마자 그 둘 사이의 욕망에 이제 돈의 계급적 환원이라고 부를만한 교환가치들이 달라붙으면서 벡터의 포물선을 그으며 점점 서로 멀어지기 시작한다. 규화가 자본의 경제학이라고 부를 전쟁터 안으로 들어간다면 병구는 리비도의 감옥 안으로 들어간다. 물론 둘 다 지옥이다. 하지만 그 둘 사이의 차이는 그 안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충실한 수행이 가져올 단순한 결과보다 크다. 명희로부터 자신의 집안이 얼마나 가난했으며 부모님은 돈을 벌기 위해 어린 남매를 방치하다시피 했고 그런 중에 풀빵이 너무 먹고 싶어서 길을 나섰던 오빠가 트럭에 치여 죽고 자신은 소아마비가 된 사연을 들려주면서 왜 부모님이 그토록 자식을 갖고 싶어 하는지를 설명 들은 다음 병구는 오로지 손자를 낳기 위한 섹스에 몰두해야만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규화가 섹스라는 관계를 통해서 가희와 결혼을 하고 부가 베푸는 자리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을 때만 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성기와 욕망의 관계에 대해서 여전히 주인의 자리에 머무른다. 하지만 병구는 자기 육신의 권리를 포기한 대가로 그 자리에 간다. 두 개의 성기 사이의 지위와 위치의 교환. 섹스는 언제나 아내인 명희의 요구로 시작된다. 여기서 상징적 성기(phallus)의 의미는 사라지고 오로지 생물학적 기능만이 남을 때(penis) 반대로 병구는 자신의 존재자로서의 실존적 의미를 상실하고 아주 작고 초라하고 축축한 기표만 남은 기호로서의 존재로 축소된다. 여기에는 욕망의 그래프가 이미 부서진 다음이다. 그때, 바로 그때, 마치 인형을 위한 것처럼 보이는 (어쩌면 다소 변태적으로 보이는) 보조도구까지 동원하면서 섹스를 위한 음악을 크게 틀어놓을 때, 그래서 보니 M의 ‘금성으로 가는 야간 비행(Night Flight to Venus)’의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우스꽝스러운 (초기) 일렉트로니카 비트가 그에 맞춰 삽입을 반복해야 하는 병구의 성기에게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율동의 명령으로 변할 때 소름 끼치도록 무시무시해진다. 여기서 임권택 은 다소 완만한 경사를 오르내리는 방법을 통해 저쪽에서 이쪽으로 돌아온 다음, 자기의 무대를 만들더니 마침내 여기서 자기의 위치를 바꾼다.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세계의 법칙으로부터 방 안에서 벌어지는 관계에로, (다소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에서 리비도에로, 차라리 제도로부터 몸에로, (반복해서 말하자면) 사회로부터 규방 안으로 파고들어 온다. 어쩌면 그 둘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때부터 임권택은 반복적으로 몸의 관리와 기술에로 자기의 이야기를 변형시키고 무대를 바깥에서 안으로 옮겨놓기 시작했다. 나는 < 오염된 자식들 > 이후의 임권택 영화를 그렇게 다시 써보고 싶어진다. 반지하 다방 안의 다섯 여자들이 몸을 팔아가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통해 세상이 얼마나 부서져가는 지를 물어본다. (< 티켓 >) 분단이라는 무게 아래서 어린 시절 헤어진 화영을 평생 찾던 동진을 만남의 광장에서 만나 그들이 낳은 아들 석철을 찾아가지만 몸의 기억은 그들 사이에 놓인 시간이라는 차이 안에서 애써 부정된다. (< 길소뜸 >) 조선 시대 사대부의 무자비한 유교 사상이 어떻게 집행되는지를 어린 옥녀의 자궁을 둘러싸고 풀어나간다. (< 씨받이 >) 아다다의 이야기를 <오염된 자식들>의 반대 버전이라고 불러볼 수는 없는 것일까. 선천적으로 말을 못하는 아다다가 돈을 지참하고 시집 간 다음 사랑을 받지만 (돈 많은 회사 사장이 회사 직원에게 소아마비로 불구가 된 딸을 맡기고 사랑을 요구하지만) 이제 돈을 번 시댁은 온갖 구실로 그녀를 쫓아내고 친정집에서도 출가외인이라 돌아오는 것을 거절당하자 결국 저잣거리 남자를 만났다가 물에 빠져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에는 둘 사이에서 어떤 공명감이 떠돈다. (< 아다다 >) 비구니가 되겠다고 나선 순녀는 남자들과 만나는 자기 몸을 통해서 불가의 가르침을 깨우쳐 나간다. (< 아제 아제 바라아제 >) 아버지 유봉과 송화는 끝까지 근친상간의 위험한 거리에 놓여있으며 동호는 배다른 누이를 홀린 듯이 평생에 걸쳐 뒤쫓는다. (< 서편제 > 그리고 < 천년학 >) 사창가에 팔려온 영은은 처음에는 자기를 사러 방에 들어섰지만 그런 다음부터 자기만 바라보는 남자 길룡과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인연으로 그렇게 살아간다. (< 노는계집 창 >) 성춘향과 이몽룡은 몸이 맺어진 다음 조선 시대 신분의 차이에서 벌어지는 고통스러운 시련의 시간을 이겨낸다. (< 춘향뎐 >) 오원 장승업은 조선 팔도를 떠돌며 그림을 그리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 여자 사이를 떠돌며 그의 삶 전체를 보낸다. (< 취화선 >) 태웅은 밑바닥에서 시작해 돈을 모으면서 그 과정에서 점점 망가져 가지만 한편으로 혜옥과의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쓴다. (< 하류인생 >) 오 상무는 지금 막 세상을 떠난 아내의 장례식에서 내내 마음을 두었던 젊은 여자 추은주의 몸을 바라보며 시간의 막 사이를 오간다. (< 화장 >) 나는 여기서 단지 세 편의 < 장군의 아들 >, 그리고 < 개벽 >, < 태백산맥 >, 그리고 < 축제 >만을 셈에서 제했을 뿐이다. 두 영화가 동일한 배움을 얻는다고 했지만 < 오염된 자식들 >이 훨씬 비참하게 끝난다. 여기서 비판은 완전히 다른 자리에로 모두를 옮겨놓는다. 그런 다음 임권택 은 거의 자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듯한 결정을 내려버린다. < 내일 또 내일 >에서는 한 가닥 가능성으로 내버려두었던 순환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규화는 사업이 실패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기회가 남아있고 진우는 (규화가 버린) 미연과 그녀의 딸과 함께 살고 있지만 여전히 친구로서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언제든지 준비가 되면 데리러 오라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내일 또 내일>) 그러나 <오염된 자식들>은 이야기를 막다른 골목으로 처넣는다. 병구는 지금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병원에 들른 병구는 말기 간 경화 판정을 받은 환자에게 다가가 자기 증세가 당신과 똑같다고 말하자 아무 설명 없이 “노형, 몇 살이요? 아까운 나이구먼”이라는 대답만 듣는다. 우리는 그 대답이 영화에서 무슨 말을 함축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여기서는 소멸을 목표로 한 것처럼 밀고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때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누리던 대상과의 거리는 사라져가는 중인 셈이다. 이 이야기 전체에서 병구가 제로가 될 때 그 배움은 무엇을 향한 것일까. 여기서 이야기는 좀 더 잔인해진다. 명희는 두 다리를 고쳤고, 그녀의 부모는 병구를 내쫓는 것에 대해서 어떤 미안한 감정도 없다. 병구도 더 이상 여기 남아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부모에게 보상금을 요구한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한 집에 살 수 없을 것이다. 병구를 제외하고 이 집에서 모든 것은 재빨리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대상인 줄 알았던 명희는 주체의 자리를 되찾고 이제 다시 대상이 된 병구는 대상의 상실이라는 이중의 상실에 내몰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임권택이 새롭게 시도하는 실존적 자각의 자리이다. 이때 병구를 진정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이 집을 떠나는 것을 바라보는 임권택의 시선이다. 병구는 할 수 있는 한 이 집을 천천히 떠난다. 그는 명희가 타던 휠체어를, 한때 그가 밀어주었던 그 휠체어를, 거기 앉아서 자기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고백을 했던 그 휠체어를, 그 집을 향해 미련을 떨치기라도 하듯 밀어낸다. 하지만 병구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듯, 아니 어쩌면 너무나 잘 안다는 듯, 할 수 있는 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슬로우 모션으로 미끄러지듯이, 마치 기어가듯이, 멈추기라도 할 듯이,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 데도, 세 개의 쇼트로 나뉘어서, 그렇게 굴러가서 쓰러진다. 그런 다음에도 병구는 금방 이 집을 떠나지 못한다. 그는 문을 열다 말고 다시 돌아본다. 여기에는 어떤 아쉬움의 감정이 묻어난다. 병구는 이 순간에조차 이 집, 이 집이 베풀었던 부의 맛, 그 맛에 길들여진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다음 그걸 내다 버렸다. 그래서 거기서 내려오는 법을 알지 못한다. 내 질문은 그걸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때 그 사다리를 어디에 숨겨놓았느냐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 자체를 차단하는 것만 같은 어떤 단절이 있다. 사라진 절차. 그 안에 담겨있을 비판적인 질문. 왜 그런 일이 벌어져야 하는 것일까. 임권택은 이 문제에 분석적으로 다가가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다. 나는 그것이 그의 예술적인 선택인지, 아니면 문제 자체를 피해서 무언가 영화 저편의 고유한 형식 뒤편에 숨겨놓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단지 그가 이 세계 자체를 혐오한다는 사실만이 텅 빈 상태로 불균형한 쇼트의 결여 속에 거기에 잔향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 오염된 자식들 >의 거의 추신과도 같은 마지막 장면 전체가 모호하게 느껴진다. 물론 병구가 죽음을 마주했기 때문에 마지막 선택은 성립될 것이다. 그는 자기가 태어난 고아원을 찾아와 원장에게 명희의 부모로부터 받아낸 돈을 전부 희사하고 떠난다. 물론 형자는 왜 병구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고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도 있다. 어쩌면 병구가 형자와 결혼을 했다면 그 자리에 대신 서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병구에게는 이제 기회가 없다. 병구는 그저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이, 마치 도망치기라도 하듯이, 그 고아원을 빠져나온다. 하늘에서는 큰 비가 내릴 것만 같다. 그때 김영동이 애처롭게 부르는 ‘하나이었는데’가 몇 번이고 반복해서 흐른다. “사랑이었는데, 하나이었는데, 사랑이었는데, 하나이었는데...” 여기서 병구의 행위는 물론 어떤 배움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의 절차는 어떤 미지수처럼 남아서 수수께끼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만일 이것이 병구가 자신이 잃어버린 주체의 자리를 되찾는 과정에서 얻은 실존적 배움이라면 그 안에서 다시 잃게 될 존재자로서의 슬픔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임권택 은 여기서 물러난다. 나는 물러난다, 라고 썼다. 여기서 그 말은 단지 수사학적으로 한 말이 아니라 정말 필요 이상으로 멀리 물러난 롱 쇼트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 마지막 씬에서 임권택은 다가간 다음 순식간에 뒤로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마치 거기에 어떤비밀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그걸 알아버리는 것은 몹시 위험한 것이라도 한 것처럼, 혹은 그걸 건드리는 것은 간섭해서는 안 되는 그 무언가를 훔쳐보기라도 한 것인 것처럼, 할 수 있는 한 멀리 물러난다. 임권택은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오염된 자식들>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임권택의 생각의 형식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물론 그 안에는 놀랄 만큼 기묘한 비대칭이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진리는 내용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형식으로 진행된다. 이 결론을 형식주의의 도식으로 읽는 바보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읽었다면 처음부터 이 글을 다시 읽어주기 바란다. 만일 여기까지 당신이 동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함께 이제부터 좀 더 많은 긍정적인 비판을 수행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저것을 비판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것이라는 긍정. 여기가 1980년대 ‘이후’ 임권택 영화의 (또 한 번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재빨리 다시 1970년대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 흥미진진한 (미학적) 운동의 영화라는 경기장, 그리고 임권택이라는 영화적 제스처. (계속) 1982년 102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화천공사 각본 나한봉 촬영 정일성 조명 차정남 편집 김희수 음악 김영동
'산책, 양산을 든 부인' '야외 습작. 왼쪽을 마주보는 여인' '야외 습작, 오른쪽을 마주보는 여인' 같은 영화를 두 번 만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여기서 리메이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위대한 모네를 생각하는 중이다. 1875년 클로드 모네는 <산책, 양산을 든 부인>을 그린 다음 거의 같은 구도로 1886년 <야외습작, 왼쪽을 마주 보는 여인>을 다시 그렸다. 그리고 그해 이 작품과 하나의 짝을 이루는 <야외습작, 오른쪽을 마주 보는 여인>을 그렸다. 이 작업은 반복이지만 둘 사이의 차이에는 아르장퇴이으의 철교와 봄꽃이 만개한 들판에서의 작업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다음 다시 베퇴이으에서의 겨울을 셈에 포함시켜야 한다. 모네는 같은 대상을 다시 그렸지만 그는 그 대상이 이미 같은 시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대상이라고 불렀다. 그런 다음 수련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지베르니에서의 수련. 그리피스가 <국민창생>을 찍고 있을 때 모네는 그의 정원에서 수련으로 천지창조를 하고 있었다. 하나의 수련. 다음 수련. 오전의 수련, 오후의 수련. 여기에는 예술에서의 독특한 보편성과 특수한 일반성 사이의 대립이라는 다소 까다로운 질문이 뒤따라온다. 핵심은 예술이 행위이기 때문에 반복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배움을 영화에로 가져오고 싶다. 동일한 작업이 반복될 때 나는 거기서 종종 진정한 행위를 발견하곤 한다. 히치콕은 1934년 영국에서 <암살자의 집>을 찍은 다음 할리우드로 건너와서 1956년에 <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 >를 다시 만들었다. (두 편의 영어제목은 모두 이다) 오즈는 1934년과 1959년에 두 편의 <부초>를 찍었다. 또한 1949년에 < 만춘 >을 찍은 다음 같은 이야기로 1962년 예기치 않게 그의 마지막 영화가 된 < 꽁치의 맛 >을 찍었다. 프리츠 랑은 몇 차례이고 지치지 않고 마부제 박사의 커튼 뒤로 돌아갔다. 작품에서 무언가 반복될 때 왠지 예술에서의 순수한 순간성이랄까, 혹은 그것이 담보하는 영원성이 손상 받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질문을 바꿔보고 싶어진다. 영화에서 반복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는 대신 반대로 이들 작품 안에 들어와서 무엇이 반복을 성립시키느냐고 물어보고 싶어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영화에서의 일반적 규칙을 유지시키는 따분한 보편성으로부터 재빨리 빠져나와 반복을 성립시키는 바탕 위에서 보다 우월한 형식을 향해 도약하려는 의지의 프로그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서편제 >, < 천년학 > 같은 말을 반복하고 싶다. 무언가를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잘 전진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때 여기에는 분명히 반성이 포함되어 있다. 니체의 교훈. 세계의 변화에 대해서 가장 성공적인 반응은 실패이다. 그런 다음 거기서 무엇을 덧셈하는가, 혹은 뺄셈하는가. 다소 멀리서 임권택 의 영화를 따라가고 있으면 뭐랄까, 몇 차례이고 같은 영화를 두 번 만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나는 이것이 임권택의 참된 운동 중의 일부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그 자신은 이런 운동에 대해서 반복해서 경멸을 표시했고 때로는 대담의 형식을 빌어서 자기를 자석처럼 끌어당긴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두렵다고도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한다. 당신이 잘 알만한 사례. 그런 의미에서 나는 < 천년학 >이 < 서편제 >의 속편이라기보다는 무언가 이 영화를 다시 찍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천년학>은 <서편제> 이후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마치 <서편제 version 1.5> 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많은 이야기가 그 후일담이지만 또 그만큼 많은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진행된다. 가장 당혹스러운 순간은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서편제>가 처음 시작했던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간 다음 <천년학>을 다시 시작할 때이다. 그런 다음 이야기는 미처 <서편제>에서 하지 못한 버전의 다른 줄기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서편제>에서 송화의 동생 동호는 가족을 떠난 다음 고수로서 북을 놓아버리고 완전히 다른 일을 한다. <천년학>에서 동호는 가족을 떠나는 것까지는 마찬가지이지만 여전히 그런 다음에도 계속 북을 두드리며 누나 송화를 찾아다닌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 장군의 아들 >을 만들면서 임권택은 “이제까지 부정해왔던 영화들, 그런데 몸에 익어버린 것들로부터 얼마나 떨치고 나왔는지 나 자신을 한번 점검해보고 싶은 거요” 라고 말했다. 나는 좀 더 은밀한 예를 들고 싶다. < 만다라 >를 찍은 다음 원래 임권택이 만들려고 한 영화는 비구니에 관한 이야기 < 비구니 >였다. 겉으로는 <만다라>에서 스님을 찍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비구니를 찍음으로써 서로 젠더(sexual difference)로서 하나의 짝패를 이루기는 하겠지만 그보다는 (개인의 삶 속에서) 소승불교를 다룬 다음 (한국전쟁을 경유하는 역사 안에서) 대승불교를 다루려는 것이 불교에 대한 임권택의 서로 다른 두 가지 질문이었다. 그러나 <비구니>는 1987년 6월 11일 제작가처분 재판 이후 제작을 중단하였다. 하지만 임권택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좀 더 기다린 다음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를 찍었다. 당신이 <비구니>와 <아제 아제 바라아제>의 시나리오를 함께 읽어보면 두 영화의 상당히 많은 씬이 서로 겹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 잡초 >를 볼 수 없지만 거의 같은 이야기를 현대로 옮긴 < 맨발의 눈길 >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임권택은 성공한 영화를 반복한 적이 없다. 반대로 그 영화가 불만족스러울 때, 무언가를 망쳐버린 것에 대해서 보상을 요구하기라도 하듯이, 미처 치루지 않은 셈을 마저 청산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마치 그 자신의 억압의 귀환이기라도 한 것처럼 되돌아온다. 여기에는 분명히 통과에 실패한 무언가가 웅성거린다. 그때 둘 사이의 차이가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 내일 또 내일 >, < 오염된 자식들 > 나는 어쩔 수 없이 임권택 의 영화 중에서 순서를 역순으로 본 영화들이 있다. 그때 나중에 온 것을 먼저 본 다음 먼저 온 것을 나중에 보면서 생각지도 않은 일종의 전도된 관계의 네트워크를 발견하게 된다. < 오염된 자식들 >이 막 개봉했을 때 먼저 보고 난 다음 < 내일 또 내일 >을 한참 뒤에 보았다. 두 영화는 서로 다른 원작 소설을 각색하였고, 각자 각색을 했으며, 서로 다른 배우들이 출연한다. <오염된 자식들>은 유익서 의 원작 「비를 타고 오른 망둥이」를 나한봉 작가가 각색하였고, 정일성 이 촬영했으며, 안성기 가 주연이고, 화천에서 제작하였다. <내일 또 내일>은 김용성 의 동명 원작소설을 홍파 감독이 각색하였고, 이석기 가 촬영했으며, 이덕화 가 주연이고, 현진에서 제작하였다. 이 두 편의 영화가 시간적으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내일 또 내일>은 1979년에 만들었고, <오염된 자식들>은 1983년에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두 편의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순서를 뒤집어서 보았을 뿐만 아니라 기억 안에서 서로 너무 멀리 있었다. <내일 또 내일>을 처음 보았을 때 단지 내가 이미 이 영화를 어디선가 보았다는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그저 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다음 며칠 후 <오염된 자식들>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비로소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임권택 감독님과 두 번째 전작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고 순서대로 영화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 둘을 거의 연속으로 보게 되었다. 물론 둘 사이의 관계는 희미했고 인상적인 설명 이상으로 둘을 묶는 것은 까다로운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말을 돌리지 않고 <오염된 자식들>은 <내일 또 내일>을 다시 만든 것입니까, 라고 질문했고 둘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다, 라는 무심한 대답으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나는 이 질문을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다. 여기서 지금 작가(les auteurs)들은 같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변주한다는 작가주의 이론을 따분하게 되풀이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엔 거기 머물면서 활동하는 힘이 그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말하자면 내부의 힘. 거기엔 멈추지 않고 거듭 되돌아와서 미처 감당하지 못한 것을 끌어들여 자기를 다시 구성하는 것이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반복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이번에는 순서대로 따라가 볼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 내일 또 내일 >을 건드린 다음 < 오염된 자식들 >을 만져볼 것이다. <내일 또 내일>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로 진부한 이야기가 진행되는 영화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 안에서 인물들을 따라가기가 힘들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이야기의 선은 느슨하게 펼쳐져 있는데 그 안을 구성하고 있는 인물들 사이의 이접은 거의 종합을 와해시킬 정도로 서로 섞이고 끌어당기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조정되지 않는다. 단지 거기 변주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무언가 그들이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공생을 하고는 있는데 각자의 기호들이 만들어내는 힘이 어떤 협주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것을 불협화음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서로 모호한 채로 머물면서도 이미 수없이 본 진부한 이야기 안에서 서로를 착취하고 있을 때, 그렇다, 착취라고 할 수밖에 없는 관계 사이에 생겨나는 교차의 규칙들은 어디에 기대고 있는 것일까. 그러므로 여기서는 먼저 이야기의 선을 따라가면서 갑자기 생겨나는 굴곡들을 쳐다볼 것이다. 이상할 굴곡들, 어쩌면 얼룩들. 거기서 잠시 환상이 멈추고 무언가 응답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무언가? 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접었지만 그것을 바라볼 때 매듭처럼 보이는 무언가, 라는 이것임. 진우와 규화 규화와 미연 아마도 나는 지금 임권택 의 영화 중에서 가장 난처한 순간 중의 하나에 머물고 있는 중일 것이다. 무언가 비스듬히 자리 잡고 있는 장면들. 그 사이에 끼어드는 잔인함. 구태여 바쟁을 빌려 설명하면 < 내일 또 내일 >은 잔혹영화이다. 세상에 대한 이상한 비전, 화면 위에 표현되는 것과 정반대의 내밀한 내용들. 그 사이에서 살과 신경을 필요로 하는 긴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바쟁의 예. 루이스 부뉴엘의 멕시코 영화들. 윌리엄 와일러의 < 작은 여우들 >. 히치콕의 < 패러다인 부인의 사랑 >. 아마도 트뤼포라면 <염소좌 아래서>를 추가했을 것이다. 내가 떠올린 예. 임권택의 이상한 영화들. 나는 다소 장황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서울에서 함께 대학을 다니는 규화와 진우는 고향 죽마고우이다, 라고 썼지만 주인과 노예에 가까워 보인다. 이 영화의 첫 장면. 함께 걸어가던 규화는 길거리 리어커 과일상에게서 귤을 집어 들며 다짜고짜 진우에게 계산을 하라고 말한 다음 그냥 자기 갈 길을 간다. 그러면서 규화는 조금도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진우는 우물쭈물하면서도 자기가 계산을 한다. 규화와 진우, 미연은 어려서 소꿉놀이를 할 때부터 친구였고 진우는 미연을 마음속으로 사랑하며 열심히 연애편지를 썼지만 규화는 그 사이에 “힘으로 미연의 육체를 점한 다음 자기의 여자로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규화는 그걸 진우에게 비밀로 하고 지금 미연을 대전에서 만나기 위해 서울역으로 가는 길이다. 하지만 기차를 타러 가는 규화를 바라보는 진우는 그걸 이미 알고 있다. 비밀을 알고 있는 친구와 그걸 비밀로 삼고 있는 친구. 그런데 이 사이에는 긴장이 없다. 혹은 시작하자마자 그런 긴장으로 이 영화를 진행할 생각이 없다는 것만 같은 태도를 취한다. 왜냐하면 규화는 미안한 감정이 없고, 이 영화는 모든 걸 포기한 듯한 진우의 체념한 목소리로(voice_over_narration)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이야기가 진우의 관점으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정작 이야기의 진행은 규화의 편에 서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종종 우리는 진우의 동선을 놓치게 된다. 어느 순간 문득 영화를 보다가 지금 진우는 무얼 하고 있을지 궁금해지기조차 한다. 규화가 미연을 몰래 만나는 건 알지만 그 둘 사이의 시간의 디테일은 진우가 알 수가 없다. 그때 영화는 규화를 따라서 이동한다. 대전에 내려간 규화는 미연에게서 잠자리를 취할 뿐만 아니라 정기적으로 용돈을 받는다. 물론 규화는 미연에게도 미안함을 조금도 느끼지 않는다. <내일 또 내일>은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시작한다. 이야기는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데 그들 사이의 관계의 감정이라는 문제로 들어오면 갑자기 어리둥절해진다. 왜 이들은 서로에게 이렇게 이상한 관계를 허락하는 것일까. 그런데도 임권택은 이걸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어떤 우여곡절도 없이, 추호도 설명할 생각 없이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진행해나간다. 이상한 여기. 여기에는 두 개의 환상이 충돌하고 있다. 하나는 과정의 환상이고 다른 하나는 겪음의 환상이다. 그 둘 사이에서 주인공들은 견뎌야만 한다. 말하자면 고통 속의 기쁨, 그리고 기쁨 속의 고통을 보는 쪽과 공유하지 않으면서, 아니 그러기는커녕 매번 반대의 자리에서 주고받으면서, 그 자리로 갈 때마다 재빨리 반대의 자리로 오면서, 두 개의 과정이 소진될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 남게 된다. 그 뿐만이 아니다. 당신이 임권택 의 영화에 익숙하다면 여기에 또 다른 낯선 기호들이 기다리고 있다. 임권택은 시각적 내러티브와 청각적 선율이 서로 모순되게 작동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그는 이러한 불협화음이 간신히 만들어놓은 흥을 깨트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럴 바에는 그 대목에 음악이 없는 편이 좋다는 선택을 한다. 그러나 < 내일 또 내일 >은 반복적으로 (연주를 포함한) 노래가 끼어든다. 산울림은 이 영화를 위해서 새로이 작곡했고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내일 또 내일’ 이외에도 ‘유리인형’과 ‘어디로 갈까’를 듣게 된다. 그중에는 인스트루멘탈 버전으로 녹음한 ‘바람 부는 강 너머’가 포함되어 있으며(이 노래들은 「산울림 4집」에 다른 방송 드라마를 위해 작곡하고 연주한 곡들과 함께 실려 있다), 임권택도 기꺼이 여기에 호응하여 이 영화 이전에 발표한 노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의 인트로 부분을 발췌해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종종 이 노래들은 이야기를 방해하고 있으며, 때로 가사 말은 은유적 비유로 읽히면서 마치 드라마의 예언자이거나 변사와 같은 역할을 하려는 순간들이 있다. 어쩌면 (미셀 시옹의 지적처럼) 모든 노래 가사 말은 이야기에 덧붙여지는 순간 그것이 의도치 않는다 할지라도 일종의 몽타주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걸 임권택이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그렇게 한다. 이때 이 노래들은 단순하게 주인공들의 진부한 드라마와 기이한 심리상태의 긴장 사이에서 어떤 명령처럼 들린다. 명령? 그렇다. 고통스러운 정감이여, 다시 한 번. 마치 진행되는 고통스러운 이야기가 반복되어야 하기라도 하듯이 거기서 노래라는 통로를 통하여 달콤한 명령처럼 울려 퍼진다. 가희 이야기는 삼각관계에서 좀 더 복잡한 조합으로 옮겨간다. 졸업을 한 다음 규화는 기자로 입사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고, 진우는 자취방에서 수공으로 인형을 만들면서 살아간다. 미연을 단념한 진우는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데 그 여자를 만나는 자리에 “분위기를 만들어 달라”는 이유로 규화를 찾아와 함께 나간다. 거기서 규화는 가희를 만난다. 말하자면 행위의 반복. 마치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것처럼 외상적 상황이 반복되고 미처 보지 못한 규화와 미연의 관계의 시작을 보는 것처럼 이야기는 진행된다. 모욕감을 느낀 진우가 먼저 떠나면서 “난 널 미워하고 싶어. 하지만 미워할 수 없으니까 난 참 딱한 놈이야” 라고 말하며 규화에게 돈을 건네준다. 하지만 그 돈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규화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시계 좀 풀러”라고 요구하자 진우는 “미쳤구나. 넌 날 버렸어. 시계 주지. 이게 마지막이야. 절교야” 라고 말하고 떠난다. 그리고 그날 밤 규화는 가희를 데리고 호텔에 간다. 물론 여기서 벌어지게 될 상황은 자명하다. 그런데 진행은 어리둥절할 정도로 고통스럽다. 처음에 두 사람은 호텔 방에서 거리를 유지하고 얌전히 앉아있다. 규화는 설득을 하지만 가희는 거절을 한다. 규화가 가희에게 다가가 (한편으로는) 무릎을 꿇고 (그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모욕을 가하면서 섹스를 요구하지만 가희는 “자꾸 그러면 때릴 거야”라고 말하고는 규화가 벗긴 세미부츠를 빼앗아 있는 힘을 다해 내리쳐서 쓰러트린 다음 가방을 들고 재빨리 방문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규화는 복도까지 쫓아 나온 다음 가희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질질 끌면서 방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가 물이 가득 찬 욕조에 쳐 넣고 핸드백을 집어던지고 발로 그녀를 짓누른다. 그런 다음 흠뻑 젖은 그녀를 다시 방문 바깥으로 끌고 나가 핸드백을 집어던지면서 “갈 테면 가봐”라고 쫓아내고 문을 닫아 버린다. 복도에서 망설이던 가희는 돌아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들기면서 규화, 규화, 라고 이름을 부르며 열어달라고 호소한다. 이 장면은 갑작스러운 폭력으로 감정선이 절단되는 듯한 각자의 거절 때문에 놀라게 되고 그런 다음 떠나려던 그녀가 되돌아와 문을 조심스럽게 두들기면서 애처롭게 규화의 이름을 부를 때 포기해버린 (자유로운) 선택이 난처하게 만든다. 두 사람을 묶는 것은 폭력적인 행위의 교환을 나눈 다음에 이루어진 사랑의 행위이다. 이 새로운 조합이 생겨나는 동안 진우는 좀 더 이상한 관계를 만들어낸다. 진우가 사는 자취방은 거대한 저택의 정원 저편인데 그 안채에는 하루 종일 피아노를 치면서 한낮에도 잠옷에 가까운 옷을 입고 외롭게 지내는 미망인이 집사를 거느리며 살고 있다. 그녀는 종종 창문 바깥에 보이는 진우의 방을 쳐다보면서 시간이 나면 그를 방문하곤 한다. 그리고 진우가 가희를 만나러 외출하던 날에는 자신의 죽은 남편의 옷을 빌려주는 호의를 보여주면서 마치 오래된 아내처럼 직접 옷매무새를 만져주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그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진우는 사랑의 기호에 대해서 몹시 둔감하거나 혹은 리비도의 몸짓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차라리 진우가 사랑하는 대상은 규화라고 하면 모든 것이 쉽게 설명될 수 있을 정도이지만 임권택 은 이 둘 사이에 게이 커플로서의 어떤 흔적도 남겨놓지 않는다. ( 김용성 의 원작소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잘 설명하긴 어렵지만) 갑자기 이야기는 여기서 다른 차원으로 옮겨간다. 가희는 큰 회사 회장의 애지중지하는 외동딸이었으며 “멋대로 어디론가 아무 연락도 없이 사라진 다음 한참 후에야 돈이 떨어지면 집으로 돌아오는” 딸의 마음을 붙잡은 규화를 사위로 삼고 싶어 한다. 바로 그 순간 미연은 임신을 하고 이것이 추문이 되어 학교에서 퇴직을 당하고 서울로 규화를 찾아온다. 깊은 저녁 남산 레스토랑에서 만난 규화는 미연에게 임신중절을 요구하지만 거절하자 바로 눈 앞 낭떠러지에서 순간적으로 그녀의 목을 조르며 밀어버릴 듯한 행동을 취한다.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은 조지 스티븐스의 <젊은이의 양지>에서 공장 노동자 조지가 재벌 집 외동딸 안젤라의 눈에 들자 동거하던 여자 앨리스를 보트에 태워 물에 처넣는 순간이다. 물론 이 영화는 시어도어 드라이저가 1925년에 쓴 「미국의 비극」을 각색하면서 자연주의 기법의 시선으로 다룬 냉혹한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멜로드라마의 신파로 옮겨놓았다. 나는 임권택 이 원작소설을 경유하여 영화와 소설 어느 쪽의 영향 관계 아래 놓여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어처구니없게도 규화의 행동은 레스토랑 음식을 서빙 하는 여자가 창문 바깥을 향하여 주문한 음식이 나왔으니 식기 전에 먹으라는 외침으로 마치 해프닝처럼 갑자기 중단된다. 무언가를 찢어버리는 것만 같은 개입. 사건을 포기해버리는 것만 같은 연쇄망의 절단. 하려던 행위가 중단되었을 때 여기에 고스란히 남은 불만족의 경제학은 다음 이야기의 장면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씬을 반복해서 보았고 볼 때마다 이상하게도 이 장면은 꿈속의 무대처럼 보이기조차 한다. 그래서 꿈속의 나쁜 행위에 대해서 누군가 꿈 바깥에서 외쳐서 깨우는 것만 같은 효과를 보여준다. 그 유명한 프로이드의 예. 아버지, 지금 제가 불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으세요. 여기서 다시 시간이 점핑하고 나면 출산을 앞둔 미연은 진우의 자취방을 찾아온다. 병원에서 딸을 낳은 미연은 진우에게 “좋은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라는 충고를 한다. 말하자면 미연은 자신이 운명의 가장 밑바닥에 추락했을 때조차 진우와 맺어진다는 상상은 단 한 순간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충고에 따르기라도 한 것처럼 진우는 고향에 돌아가 결혼을 한다. 그 사이에 규화는 가희와 결혼을 한 다음 미국에서 비즈니스에 큰 성공을 거두고 돌아와 회사의 전무가 된다. 자, 이제부터 미연과 그 딸의 이야기가 남는다, 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틀렸다. 영화는 여기서 삼분의 일이 조금 넘게 지났을 뿐이며 이야기는 더 복잡해진다. 규화와 결혼을 했지만 가희는 여전히 가출벽으로 기회가 닿을 때마다 집을 떠나면서 연극 연출자와 바람을 피우는 중이다. 게다가 그녀는 미연과 그 아이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규화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한다. 진우는 고향에서 결혼을 했지만 그의 아내는 새로운 남자가 그녀 앞에 나타날 때마다 요사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유혹한다. 미연의 딸은 그녀의 아버지가 키우고 그녀는 혼자서 가난하게 전화 교환수를 하면서 살아가는 중이다. 이때 이 모든 이야기를 규화에게 들려주는 사람은 (다소 놀랍게도) 예전 진우가 살던 자취방의 저택 주인인 미망인이다. 심지어 그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미연의 집 주소도 갖고 있다. 여기까지 쫓아왔을 때 나는 거의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말 그대로의 부조리. 삶의 일상생활이라는 장소 안에서 진부한 인물들은 계속해서 활동하면서도 매번 기괴한 선택을 반복해서 하면서 점점 더 상황을 나쁘게 만들어나간다. 여기서 가능한 것들 중에서 매번 가장 나쁜 선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걸 단지 그들의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이야기는 잘 알겠는데, 잘 알 뿐만 아니라 이런 진부한 이야기의 진행에 대해서 비슷한 수많은 영화의 제목을 알고 있는데, 이 이야기 속의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는 감정선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 내일 또 내일 >이 만족스럽지 않다 할지라도 나는 이 영화에 까다로운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고 믿는다. 이상하게도 임권택 은 < 왕십리 >에서 < 오염된 자식들 >, 혹은 < 나비 품에서 울었다 >에 이르기까지 무언가 세상의 밤 안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왜 그런 것일까. 뭐랄까, 여기에는 곤궁에 처한 임권택이 있다. < 족보 >에서 < 짝코 >를 거쳐 < 만다라 >로 가는 임권택이 있지만 반대로 매번 마치 그 자리에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처럼 이 안으로 되돌아온다. 지금, 여기라는 문제는 단순하게 임권택에게 동시적인 삶의 평행관계가 아니다. 만일 여기서 올바른 대답을 구하지 못하면 우리는 < 길소뜸 >의 냉담함과 < 티켓 >의 참혹함 사이에서 길을 잃을 것이다. 무언가 계속해서 실망스러운 과정의 반복. 그 안에서 부서지는 과거. 새로 떠오르는 기괴한 교환 관계. 임권택은 몇 번이고 물어본다. 그런 계약관계를 맺어도 괜찮은 것일까. 말하자면 당연히 몰락해야 하는데도 그 안에서 다시 시작하는 세계라는 암흑. 자기가 포함되어 있는 세계의 변화와 영화가 바라보는 세계 사이의 무심함 사이에서 임권택은 반복해서 어디까지 몰입하여 건드려보아야 할지와 어디까지 다가간 다음 멈춰 서서 쳐다보아야 할지를 측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할 때의 이유이다. 임권택은 반복을 통하여 부분과 관계 사이에 놓인 암흑과 현실적인 동일성을 얻고 싶어 한다. 반복을 통하여 얻은 매번의 새로운 관계.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영화)와 (영화의) 세계 사이에 놓인 불화를 설명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것이 암흑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서사가 사라진 시간 안으로의 진입.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월드. 강제된 선택의 상황. 나는 당신에게 임권택이 <티켓>이후 < 화장 >까지, 1985년 이후 2014년까지 두 번 다시 우리와 평행하는 시간으로 돌아온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물론 < 아제 아제 바라아제 >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구니를 따라 산사를 떠돌면서 현재의 시간과의 끈은 느슨해진다. 그런 다음 <축제>를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시작하면 호남 저 시골 마을로 내려가 장례식을 치르는데 모든 시간을 바치고 있다. 거의 이야기되지 않는 < 창(娼) 노는 계집 >조차 현재의 시간에 이르자 문득 영화가 끝나버린다. < 달빛 길어 올리기 >를 말하고 싶을 것이다. 반대로 이 영화는 한지(韓紙)를 따라 현재의 시간을 떠나 불가능한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미망인 말하자면 여기서는 당신께서 이 질문을 안고 이야기를 따라가 보기 바란다. 아직 아무 것도 정리되지 않았는데도 여기에 다시 규화와 미연의 딸 옥희가 이야기 안으로 들어온다. 규화는 세속적 성공을 노리면서 가희를 붙잡아야 하기 때문에 옥희를 데려가야만 하고 미연은 자기가 딸을 키울 결심을 한다. 물론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한국영화사 안에서 < 미워도 다시 한 번 >(과 그 변주들)에서 수 없이 보았다. 임권택 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다. 규화는 미연과 다시 한 번 그녀의 집에서 섹스를 나눈 다음 옥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진우는 아내와 이혼을 하고 규화를 찾아온다. 그때 진우에게 미연이 술집에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은 규화이다. 말하자면 규화는 옥희를 데려온 다음에도 계속해서 미연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 데도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는 사진을 진우에게 보여준다. 모두를 집어삼키고 있는 정념의 지옥. 모든 관계가 망가졌는데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생활이라는 기계. 하여튼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 거의 맹목적인 사슬. 규화는 이제 사업에만 몰두하고, 미연은 옥희의 주변을 맴돌고, 진우는 미연의 주변을 맴돌고, 가희는 규화의 주변 바깥을 떠돈다. 이때 규화의 부동산 사업 확장을 위해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인물로 갑자기 큰 저택을 소유하고 있는 미망인이 다시 (난데없이?) 그 앞에 등장한다. 미망인은 단지 “땅을 사자는 사람은 많아요. 우리 측에서 땅을 팔겠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수한 사람들이 찾아들어요. 허지만 안 팔아요. 내 땅을 내놓을 이유가 생긴다해도 선진물산에는 팔지 않겠어요. 왜냐하면 그 회사에 이규화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죠.”라는 대답을 전한다. 그 대답은 당신이 올바르게 내가 보낸 편지를 읽을 줄 안다면 당신에게만 팔겠다, 라는 뜻이다. 물론 규화는 그것이 전달되는 회로를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하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바르지 않기 때문에) 올바른 대답의 행위도 알고 있다. 말하자면 그 행위는 그 둘의 관계에서 오로지 목표의 경제학 안에서는 옳지만 전체 안에서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잃어버리는 행위가 된다. 그러는 동안 미연은 옥희를 되찾아가고 그런 미연을 데리고 진우는 고향으로 다시 한 번 더 돌아간다. 물론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거기서 그 둘은 소꿉장난 시절의 행위를 반복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돌아간다. 여기서 이 이야기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규화가 실패하는 것이다. 그가 생각했던 사업은 부도의 형식으로 되돌아오고 미망인은 경제적으로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된다. 희생의 경제학은 이 영화가 멜로드라마라는 것을 증명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그때 비로소 가희는 규화와의 인연이 다했음을 깨닫는다. 둘은 바닷가까지 함께 드라이브를 한 다음 포옹한다. 그리고 피로에 지친 규화는 잠깐 잠이 든다. 그가 깨어났을 때 발견하는 것은 파도가 치는 바위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가희의 하이힐(뿐)이다. 처음 규화를 때렸던 그 신발. 자동차 앞창 유리에는 그녀가 마치 피처럼 붉은 립스틱으로 써놓은 유서가 남겨져있다. “규화! 진실된 자리에 앉고 싶었어요. 방황을 끝내며, 가희” 마치 잠깐의 꿈과도 같았던 도약의 입구와 끝. 규화와 자본을 중재한 매개항의 소멸. 하지만 여전히 그는 자기가 도착해야 할 곳을 알지 못한다. 규화는 (감옥에서 풀려나온 가희의 아버지를 경유하여) 다시 한 번 미망인의 곁으로 간다. 자기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고 말한 다음 모든 것을 가져간 유일한 사람. 그녀는 규화가 왔을 때 망설이지 않고 자기의 선택을 들려준다. “당신의 날개를 꺾어놓고 싶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불안했어요, 두려웠어요,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규화라는 파랑새를 붙잡고 싶었어요” 이 메시지를 올바르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운명론의 간극이 존재한다. 최종순간이란 결국 무엇인가. 규화는 자신이 손에 넣고자 했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혹은 실패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돈의 관점에로 이야기를 옮기면 이것은 하나의 자본이 다른 자본에로 이행하는 과정 중에 규화가 잘못 끼어든 잠깐 동안의 오류(인 척하면서 정확하게 작동한 재전유)로서의 매개의 사건이 소멸하는 시간이다. 임권택 은 이야기 안에서 규화를 선과 악 사이에서 나쁜 존재로 설명하는 대신 이중의 관점을 취해서 처음에는 규화를 자본의 환상이라는 무대에서 만들어낸 이상적인 주체로 만들고 그런 다음 마치 자기 자신의 어리석은 욕망에 이끌려 자발적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가정된 (다소 도식적으로 설명하자면) 평균이윤율 경향 저하의 법칙에 따라 시장에서 배제시킨다. 말하자면 주체로부터 대상에로의 이동. 물론 이것을 이야기가 경제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야기가 종종 교훈극처럼 진행되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교훈? 자본의 순환 속에서 마모되어가는 주체의 소멸에 관한 교훈. 멜로드라마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에서 규화에게 추락을 안겨주는 것은 그의 감정이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그의 바깥에서 작동하고 있는 시장 주기 안에서의 산업의 이동과 이자의 증가에 따른 자본의 해체과정이다. 여기서 사용된 부엉이들이 다소 불편하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임권택은 현대의 삶 안에서의 경제활동에 관심이 많다. 이때 임권택의 관찰은 인간이 경제 활동에 개입하는 과정이 아니라 반대로 경제가 인간의 활동에 개입하는 방식과 순서에 있다. 이 순간 이야기에 말 그대로 별안간 전도가 벌어진다. 그가 여기서 지식의 도구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1979년이 분할하는 삶의 방식 안에서 화해하지 못하는 것들 사이의 충돌을 건드린다. 영화가 자기가 살아가는 시간 안에서 새로이 나타난 기호들을 다루는 까닭은 일어났던 사실이 아니라 사실이 가져다주고 있는 분쟁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쳐다보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 내일 또 내일 >은 어느 순간에 이르면 거의 와해직전까지 와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있다. 물론 그것을 임권택이 모를 리가 없다. 그는 자기가 그 힘에 밀려나고 있는 것처럼 자기 영화를 다룬다. 내가 궁금한 것은 무엇이 그를 밀어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가 그 힘으로부터 영화를 방어하느냐는 것이다. 이야기는 순환을 그린 다음 규화를 고향에 함께 살고 있는 미연과 진우, 그리고 옥희에게로 이끈다. 그리고 거기서 그가 보는 것은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는 미연과 진우, 그리고 옥희이다. 규화는 옥희와 잠깐의 행복한 시간을 갖지만 그 앞에 나타난 미연은 옥희를 안고 아무 말 없이 딸에게 준 선물인 장난감 타조를 집어던진 다음 그 자리를 떠난다. 거절당한 선물.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남지 않은 규화는 역에 와서 기차를 기다린다. 그때 진우가 다리를 절면서 나타난다. 그리고 규화에게 말한다. “빨리 니 마누라랑 딸을 데려가라, 둘 다 나에게는 큰 짐이야. 그렇다고 지금 찾아가라는 얘기는 아니다. 변칙처럼 지름길만 찾아 미친개처럼 날뛰는 네 놈의 못된 버릇을 고치기 전에는 찾아가려고 발광을 해도 내주지 않겠어. 그렇다고 따라나설 미연이도 아니니까. 당당하게 대로를 택하기 전에는 말이다.” 규화는 잘 설명하기 힘든 표정을 지은 다음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그때 막 개발되고 있던 강남의 풍경이 멀리 보이면서 걸어가는 규화의 롱 쇼트 위로 진우의 마지막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규화는 옥희를 통해서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확인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규화라는 하나의 인간은 옥희를 통해서가 아니라 미연이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길고도 끈질긴 구원의 되풀이에서 손을 들고 난 후에 내가 얻은 단 하나의 결론이다. 오미연이라는 여자는 이규화라는 남자 없이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갑작스러이 끝을 맺는 것만 같은 이야기의 끝. 누군가 이야기의 줄기만을 따라왔다면 그래 알겠어, 규화라는 인물에 대한 설명은 충분해, 하지만 진우는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하는가, 라고 질문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 임권택 의 궁극적인 실패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여기서 실패는 < 내일 또 내일 >에 미학적 기준을 들이미는 말이 아니다. 진우는 규화를 끈질기게 저쪽에서 이쪽으로 잡아당기려간옛寧?쓴다. 이 쪽? 그렇다. 말 그대로 임권택이 생각하는 (아직은 그래도) 가능한 세계, 무심코 지나가 버렸지만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되찾아야 할 시간,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믿어지는 장소. 세 사람 사이의 교집합으로서의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 규화(와 미연)의 딸이 (부(富)가 만들어내는 불행을 맛본 다음) 유일하게 행복을 느끼는 동네. 그 무엇보다도 규화가 자발적으로 플래시백이 유일하게 가능해지는 풍경. 만일 진우가 없었다면 규화는 되돌아와야 할 (저 쪽으로부터) 이쪽의 지평도 사라질 것이다. 여기에는 그 둘 사이의 고리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거의 희생적인 노력이 뒤따르고 있다. 그것을 임권택은 진우의 목소리를 통해서 “구원의 되풀이”라고 개념화한다. 여기에는 단순하지만 몹시도 분명한 이분법이 그 둘 사이를 쪼개내다시피 하고 있다. 이때 그 둘을 나누는 것이 가능해지는 까닭은 그 둘 사이를 오가는 진우라는 매개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그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자기에게 기회가 왔을 때조차 기꺼이 규화를 위해서 그 자리를 비워놓은 다음 자신이 무효라는 존재가 되기를 기대한다. 말하자면 진우는 지치지도 않고 과거와 현재 사이를 왕복운동 하면서 그 둘 사이의 순환을 거의 참을 수 없는 단계까지 기다린 다음 기회가 다가오자 있는 힘을 다해서 규화를 여기로 잡아당기려는 이행의 시도를 되풀이한다. 그렇다면 그런 되풀이 운동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다. 임권택은 먼저 (진우와 같은) 매개자를 삭제한 다음 (규화처럼) 주체에서 대상으로 추락하는 인물을 다시 한 번 바라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 오염된 자식들 >에서 되풀이 될 것이다. (계속) 1979년 120분 컬러 1.33 감독 임권택 주식회사현진 각본 홍파 촬영 이석기 조명 장기종 편집 김희수 음악 산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