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희 통합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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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정보
경아의 사생활
- 감독
- 엄종선
- 제작년도
- 1983
- 출연
- 최정민, 이영하, 전운, 사미자, 장혁, 박기수, 김민규, 박용팔, 이강수, 최석, 주상호, 최성관, 박병기, 한다영, 안진수, 이예성, 석인수, 김신명, 이한숙, 한지정, 이난실, 박주영, 오은희, 장재옥
태
- 감독
- 하명중
- 제작년도
- 1986
- 출연
- 원유미, 강희주, 오은희, 이미숙, 김미경, 신영은, 양병열, 고초재, 최음전, 장문정, 강승우, 마흥식, 채희아, 백황기, 원미원, 조정수, 이혜숙, 조은영, 조학자, 최일, 추봉, 나소운, 송일근, 상일환, 임동문, 박효근, 신동욱, 성미진, 이현아, 최근제, 지윤주, 김애라, 권일정, 김경란, 양춘, 오도규, 장영주, 유화식, 이진수, 강현주
수집자료
공연 <98 오은희의 오늘춤>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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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98 오은희의 오늘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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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98 오은희의 오늘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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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아의 사생활 (3)
- 매체유형
- CCT 콤팩트카세트
- 연주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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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아의 사생활 (1)
- 매체유형
- CCT 콤팩트카세트
- 연주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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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아의 사생활 (2)
- 매체유형
- CCT 콤팩트카세트
- 연주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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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들의 영화 평가 결정요인 연구 : 제작국가 및 장르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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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날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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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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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야 놀자] ′글러브′ 진짜 주인공은 야구부원 1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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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영화제, ‘피치&캐치’ 작품 공모
- 실물구분
- 아날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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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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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1937년 벽두 《삼천리》에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경무국장에게 보내는 아등(我等)의 서(書)」 1 라는 제목으로 실린 공개서한은 식민지 조선 대중의 자본주의적 욕망과 문화적 욕구를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자료로서 그동안 자주 언급돼 왔다. 이제는 너무 익숙한 제목과 내용이지만, 이 공개서한을 다른 맥락과 겹쳐 읽는 것으로 이 글의 서두를 열고자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공개서한에 연명한 이들은 “대일본레코-드회사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 조선권번 기생 오은희, 한성권번 기생 최옥진, 종로권번 기생 박금도, ᄲᅡ- <멕시코> 여급 김은희, 영화 여우(女優) 오도실, 동양극장 여우 최선화”이다. 한 명의 남성과 일곱 명의 여성. 일곱 여성들의 직업은 마담, 기생, 여급, 여배우로 그들은 모두 근대 도시의 유흥과 여가에 종사한다. 공개서한의 수신자는 부임 3개월째를 맞는 미쓰하시(三橋) 경무국장이었다.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라는 도발적인 제목과는 달리 “미쓰하시 경무국장 각하여”라며 공손한 어투로 시작된 서한은, ‘댄스홀’이 문명 도시를 가늠하는 상징적인 기준이며 ‘댄스’가 얼마나 건전하고 명랑한 오락인지를 극도의 존칭과 경어를 사용하며 조목조목 설득한다. 여기서 경무국장에 대한 존경과 자신들에 대한 겸양은 다소 과도할 정도인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당돌해 보이기까지 한다. 다시 말해, 이 공개서한은 경무국장에게 보내는 진지한 호소라기보다 경무국장에게 ‘댄스홀’ 허가를 요청하되 그 결과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의 ‘의미 없는 메시지’임을 과시하는 ‘넌센스(nonsense)’다. 식민 도시 경성에서 벌어진 이 ‘넌센스’는 문자 그대로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에 누구도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다. 수신자인 ‘미쓰하시 경무국장’조차 이 공손한 서한에 공식적으로 화를 내지는 못했을 터이다. 그러나 경성의 모든 풍속에 대하여 취체의 책임이 있는 경무국장으로서, 그는 통제의 대상인 공개서한의 발신자들―끽다점, 권번, 바, 레코드, 흥행업 종사자들―과 《삼천리》의 독자들이 구성하는 공감 속에서 기실 유머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미쓰하시는 원래, 1936년 8월 조선에 부임한 미나미 지로 총독이 소위 ‘동아 정국’, 그러니까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무기한 정간된 상황에서 경무국장으로 임명한 인물이었다. 일본의 청년 장교들이 천황의 친정을 명분으로 쿠테타를 일으켰던 5.15 사건 이후 점차 짙어졌던 군국주의 기운이 조선에도 여파를 미치던 시점에서, 경무국장에게 ‘서울에 댄스홀을 허하라’는 내용의 서한을, 그것도 경성에서 술과 노래와 음악과 연기를 업으로 하는 이들이 보낸다는 것 자체가 당돌한 일이리라. 그렇다면 이 넌센스는 그저 의미 없는 농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발신자와 수신자 그리고 이들이 놓인 권력의 위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긴장을 돌발적으로 노출한 사건일 수 있다. “만주사변 직후에 우가키 전(前) 총독은 서울 있는 신문 기자를 향하여 국가 비상시에 딴스는 허가할 수 없다고 말했읍니다. 그러나, 만주사변은 모다 이제는 평정하게 되고 평화의 기상이 세상에 차고 있지 않읍니까”라는 호소는 일본과 조선에서 ‘비상시(非常時)’라는 말이 다시 유행하는 상황을 우회적으로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계엄령이 내려지고 도쿄에서도 댄스홀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던 터에, 식민지의 도시 경성에 댄스홀이 허가될 리 없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할 때까지 근 8년간은 ‘전쟁의 시대’이자 ‘총동원의 시대’였다. 식민지 조선의 삼천리 방방곡곡에 ‘총동원 체제’가 가동되고 ‘비상시’가 장기화됨으로써 ‘비상시의 상시화’라는 상황적인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된다. 1937년 벽두 ‘댄스홀을 허하라’는 이 느닷없는 호소문의 넌센스는 ‘비상시의 상시화’라는 상황적 아이러니에 대한 예보, 비상시의 일상에서 수도 없이 발생하는 ‘의미의 과잉’과 ‘무의미의 의미’에 대한 예고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상시가 아니다’라는 이 단순한 의미의 ‘비상시(非常時)’는, 1937년 이후 보다 구체적인 맥락에서 사용된 ‘전시기(戰時期)’나 ‘전환기(轉換期)’, ‘신체제(新體制)’ 등과 계열을 이루게 된다. 중일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엘리트들 사이에서 이미 유행했던 ‘전환기(轉換期)’라는 표현이 어떤 혼란이나 불안을 내포한 것이었다면, 1940년 제2차 고노에(近衛) 내각이 출범하면서 내걸었던 ‘신체제’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전시체제에서의 선명한 수행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비상시’는 이러한 ‘전환기’의 불안과 ‘신체제’의 수행을 모두 아우르는 동시에, 통치 주체로 하여금 전시에 발생하는 그 어떠한 제도적 폭력과 비합리성도 정당화하면서 아무런 기약 없이 정상화를 유예할 수 있게 하는 주문과 같았다. ‘비상시가 상시화’되고 사회의 전분야가 전시체제로 재편되는 가운데, 식민지 조선의 각 주체들은 지역별(도시와 농산어촌), 직능별(노동자, 농민, 지식인, 문인 등등), 젠더별(‘청년’, ‘소국민’, ‘총후부인’ 등)로 자신이 어떻게 ‘봉공(奉公)’하고 ‘보국(報國)’하는지를 전시했다. 주체들의 이러한 자기 전시 혹은 자기 증명은 전시체제 속에서 ‘진술적인(constative)’ 언어들이 ‘수행적인(performative)’ 언어로 전환되는 과정과 겹쳐지기도 한다. 예컨대, ‘나는 총후부인이다’라는 말은 표면적으로는 진술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참과 거짓의 판단과 연관되기보다는 오히려 ‘총후부인 되기’를 선언하는 것으로, 이를 끊임없이 자각하고 수행하는 실천을 동반하게 된다. ‘봉공(奉公)’이라는 말이 함축하듯이, 이때의 ‘나’는 ‘나의 것’이기도 하며 ‘나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비상시의 ‘국민(國民)’이라면 심지어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는 것까지 일상의 매순간을 국가와 연관지어야 하며 ‘비국민(非國民)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공중(公衆) 앞에서 과잉된 언어와 제스추어로 자기를 전시해야 하는 때도 있었다. 사회의 모든 혼란과 무질서의 원인이 ‘비상시’로 수렴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이해득실이나 생존의 문제도 ‘비상시’라는 말뚝에 얽매여 있었다. 그런데 제국주의 전쟁이 초래한 ‘비상시’의 일상 속에서 이 수행적 언어들이 갖는 동원의 효과는 어디까지였을까. 전쟁이 장기화되고 비상시가 더 이상 비상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일상의 모든 것이 시국(時局)과 연관되어 있는 한편으로 그 시국의 긴장감은 둔화되어 버린 순간, ‘신체제’니 ‘봉공’이니 ‘보국’이니 하는 말이 어떤 감흥도 없이 상투어처럼 내뱉어지는 순간, 이러한 순간순간들에 ‘비상시’는 필연적으로 ‘의미의 과잉’이나 ‘무의미의 의미’를 낳는 것이 아닐까. 전시체제하 개개인의 신체가 일상적으로 국가적 의례와 결부되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국가와 결속시키는 그 순간순간들에서, 의미의 충만을 넘어선 과잉들은 필연적으로 어떤 전도(顚倒)를 초래하지 않을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는 가장 ‘숭고한 것’이 가장 ‘통속적인 것’이 되고 ‘비속한 것’이 ‘성스러운 것’으로 뒤집히는 상황이다. 그림1. 「극장에 늘어선 사람들에게 일감을 준다면」 출처: 《신시대》1941년 5월호, 182쪽 그림2. 「악극단」 출처: 《신시대》1941년 5월호, 180쪽 중일전쟁 발발 이후 식민 도시 경성의 극장가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어트랙션(attraction)’은 ‘비상시’가 초래한 넌센스의 상황들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관객을 극장으로 유인하기 위해 메인 프로그램에 부수적으로 편성된 쇼를 일컫던 어트랙션은, 당시 경성에서 연극이나 영화와 거의 맞먹을 정도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여 때로는 연극과 영화의 아성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1930년대를 지나며 담론화되었던 ‘도시=소비/농촌=생산’의 이분법적 구획이 전시체제기에는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한편에서 도시에 집중되었던 극장을 농산어촌, 공장, 광산 등의 생산지대로 확산시키는 ‘이동극장’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자숙(自肅)’과 ‘내핍(耐乏)’이 강조되는 사회적 분위기라고 해서 전쟁 전에 이미 팽창해 있었던 문화적 욕구들이 경성의 극장가에서 아주 사그라진 것도 아니었다.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서양영화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던 시기 프로그램의 공백을 메워가던 악극과 어트랙션이 전쟁의 장기화와 더불어 점차 프로그램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 상황, 그리고 그 버라이어티 쇼가 반서구 정책에 의해 부정되었던 ‘재즈(Jazz)’나 ‘양풍(洋風)’을 풍부하게 접속할 수 있는 장소로서 위치된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근대의 극장은 언제나 국가 권력의 통제 아래 있었지만, 철저하고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1) 「서울에 댄스홀을 허하라―경무국장에게 보내는 我等의 書」《삼천리》1937년 1월, 162~166쪽. ‘친일’과 ‘반일’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을 무너뜨리며 식민지 시기의 다채로운 풍경에 주목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김진송의 저서―『현대성의 형성: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현실문화, 1999)―가 이 공개서한의 제목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것은 상징적이다. 2) 이 공개서한은 일본의 시인 사토 하치로(サトウ・ハチロー, 1903-1973)가 만주사변을 전후한 시점에서 발표했던 ‘넌센스’들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소설가, 수필가, 동요 작사가 등으로도 활동한 사토는 방탕과 기행을 일삼았다고 전해지는데, 단편집 『아사쿠사(浅草)』(素人社, 1931)는 특유의 넌센스가 넘치는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 「경시청감에게 드리는 글(警視総監に与ふるの書)」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는바, 어쩌면 이서구는 공개서한의 제목을 구상하며 사토 하치로의 넌센스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사토 하치로의 넌센스와 관련한 아이디어는 미리엄 실버버그의 『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근대 일본의 대중문화』(강진석·강현정·서미석 옮김, 현실문화, 2014)에서 얻었다. * 상단사진 1. 《삼천리》에 실린 「서울에 댄스홀을 허하라」기사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雙Q生「[거리의 수첩] 애트랙슌론(論)」《조선일보》1940년 6월 27일자, 4면. 흥행업자들에게 있어서 일 년 중 네 절기에 있어서 여름 같이 또 싫은 『씨-즌』은 없다. 우선 더워서 사람이 안 들어오니까 짐이고 낭패다. 그러나 그렇다고 여름철만 어떻게 극장 문을 닫아버리고 그야말로 무슨 학교나 그런 곳 같이 ‘하기휴가’를 할래야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소위 요즘에 하나의 유행 같이 횡행하고 있는 『애트랙슌』인 것이다. 지금 서울서 우리가 『써-비스』 받고 있는 『애트랙슌』이란 얼른 말하자면 영화를 보고 또 거기다가 덤으로 노래나 춤을 공으로 보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애트랙슌』은 이러한 본질적인 의의에 견주어보아서라도 어디까지나 가볍고 명랑하고 즐거워야 한다. 한다가 아니라 했으면 한다. 그렇지 못하고 그저 우리들로서는 뭐가 무엇인지 이해키 어려운 것을 가져다가 그저 아쉬운 대로 『애트랙슌』이란 딱지만 붙여 내놓는다면 이거야말로 『애트랙슌』으로서는 낙제하지 않을 수 없을 비참한 『애트랙슌』이다. 그야 사람에 따라서는 그 사람의 취미나 교양에 따라서 영화보다도 『애트랙슌』에 끌리어 단순히 그것만을 보러 가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러한 관객이 하나라도 는다면 느는 그대로 극장으로서는 성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여튼 이 점에서 영화상설관은 연극상연단체나 극장보다는 유리하고 편리하다. 반대로 극단이나 연극만을 상연하는 극장은 그야말로 선전 『발류-』(value)가 찬란한 『애트랙슌』이 없이는 이 여름 한철을 무난히, 다시 말하면 결손 없이 돌파하기는 힘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영화상설관에서는 『애트랙슌』이라는 미명 아래 값싼 오락물을 질서 없이 덤 주듯 한다면 이 역시 단순히 『애트랙슌』만을 보러 가지 않는 우리로서는 할 이야기가 과연 많을 줄 안다. 그것은 불평도 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항의도 될 수 있다. 2. 요시무라 고도 * 씨 담(談)「전시(戰時)의 생활 이대로 좋을까④ / 극장 앞에 늘어선 풍경 아메리카풍의 재즈와 레뷰 환영은 국민의 수치」《매일신보》1942년 1월 21일자, 4면. 생활에서 영미 양풍을 쫓아내자 총후를 명랑케 하는 수단으로서 건전한 오락을 건설하는 것은 국민을 위하여 국가에서 대단히 생각해온 바입니다. 시국과 관련하여 그처럼 건전 오락이 특별히 문제가 된 것은 지금까지의 오락이 건전치 못했던 때문이올시다. 그럼 지금까지의 오락이 왜 건전치를 못했나 하면 그것은 그 오락이란 것이 근대의 그 개인주의와 향락주의의 소산으로서 대개가 국민의 생활과 떠나서 순전히 향락적인 것으로 퇴폐해 갔기 때문이올시다. 만일 그 오락이 무슨 생활과 관계가 있었다면 그것은 도시의 유한(遊閑)한 젊은 남녀의 소비적인 향락 취미 생활에 뿌리를 박고 있었을 뿐일 겝니다. 그러니까 국민의 전체 생활로 보면 아무 관계없는 오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락이 저급해지고 타락이 된 데는 한편으로는 그것을 보아 온 여러분의 오락 취미가 그렇게 떨어져버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네가 자기의 취미를 돌아보면 잘 아실 겝니다. 극장에서 그 아메리카 풍의 재즈라든가 경박한 레뷰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극장 앞마다 장사의 진을 치고 젊은 남녀가 서로 어우러져서 몰려섰는 풍경은 이 시국에서 가장 보기 창피스러운 풍경의 하나인 줄 생각합니다. 이번 대동아의 전쟁이 되면서부터 당국에서도 적극적으로 통제를 하고 지도도 해서 일반 악극 단체에서도 많이 자숙해져서 이른바 악극에서 아메리카의 요소를 뽑아버리려는 노력도 있고 해서 퍽 색채가 달랐지만 근본 문제는 그 문제보다도 여러분 자신들의 오락에 대한 취미문제올시다. 여러분의 오락 취미로선 아직도 그런 아메리카의 경박한 향락적인 레뷰나 재즈를 좋아하는 경향이 마음에 남아 있다고 하면 이것은 국민으로서의 양심에 부끄러운 일이요, 또 자신네의 오락의 취미로서도 여간 부끄러운 바가 아닌 줄 압니다. 우리들의 모든 생활면에서 영미의 요소를 조사해가지고 청산해 버려야 할 이때에 우리 일상생활의 중요한 부분인 오락의 취미에 아직도 미국 같은 곳의 저급한 오락을 환영하는 경향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것은 당국이나 지도 측에서 노력하고 지도할 점도 많겠지만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이 자진해서 깨닫고 오락에 대한 건전한 취미를 길러 가시기를 바랍니다. [강조는 원문] * 요시무라 고도(芳村香道) :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소설가 등으로 활동했던 박영희(1901∼?)의 창씨명.
연예계의 지주 영화계의 대모, 복혜숙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대일본 레코-드 회사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 조선권번기생 오은희 한성권번기생 최옥진 종로권번기생 박금도 빠-「멕시코」 여급 김은희 영화여우 오도실 동양극장여우 최선화 경무국장게 보내는 아등의 서 삼교경무국장 각하여 우리들은 이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여 줍시사고 연명으로 각하에게 청하옵나이다. (하략)” 1)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며 경무국장에게 편지를 보낸 장안의 내로라하는 문화계 인물 중에는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卜惠淑(馬利),1904~1982)’도 있었다. 한국의 대중문화, 연예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예의 복혜숙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연극, 영화, 방송에서의 연기 생활은 물론 가수와 성우 활동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중연예사의 곳곳에서 그녀의 이름을 빼놓을 분야는 없기 때문이다. 연극 연기로 배우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마호정, 이월화에 이은 세 번째 여성 영화배우로 이름을 올렸다. 일제강점기 조선영화계를 점령했던 예쁘장하고 다소곳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성 배우와는 거리가 멀었던, 배우 복혜숙은 초창기 조선영화에서 담대하고 현대적인 역할을 맡아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숨을 다하는 그날까지 복혜숙은 한국 대중연예사에 살아있는 성좌로, 원로 여성영화인으로 선구적인 역할을 해내며 60여년의 연기생활을 이어갔다. (사진1) 왼쪽부터 배우 전계현, 배우 복혜숙, 홍은원 감독 (사진2) 배우 최은희(가운데)와 함께 한 노년의 복혜숙 (오른쪽) 충청남도 대천에서 태어난 복혜숙은 서학을 공부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아버지와 담대하고 영민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에게 한글은 물론 한학도 배워 당시 배우로서는 보기 드문 학식과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화여자고등학교에 다니며 배운 수예에 흥미를 느껴 수예 선생이 될 요량으로,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 기예학교에 들어갔다. 정작 일본에서는 영화, 연극, 가부키에 마음을 빼앗겼다. 특히 <충신장 忠臣藏>에 감동을 받아, 그녀는 연기자가 될 생각에 수예학교를 나와 시와모리 모리노무용소에 입학했다. 하지만 딸을 찾아 나선 일본까지 건너온 아버지는 복혜숙을 자신이 관여하던 강원도 금화학교의 일본어 교사로 만들어 버렸다. 1920년, 배우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도망치듯 상경한 그녀는 단성사의 인기 변사 김덕경의 소개로 김도산을 알게 되어 신극좌에 입단했다. 이듬해 복혜숙은 <오! 천명>으로 첫무대에 서게 되었다. 복혜숙은 극단이 지방 공연을 다닐 때면 악대를 앞세우고 공연 홍보를 위한 거리행진(街廻り)을 도맡았다. 또 일본에서 여러 번 관람하여 대사를 기억하고 있던 <대위의 딸 大尉の娘>을 각색한 <누교 淚橋>를 직접 쓰고 주연까지 맡아 공연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사진3) 젊은 시절의 복혜숙 극단생활을 이어나가면서도 1925년에 복혜숙은 연기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현철이 세운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했다. 비슷한 시기 극단 토월회에도 입단했다. 토월회의 인기 배우 이월화를 대체할 배우로 복혜숙이 등장했던 것이다. 복혜숙은 토월회가 공연한 <춘향전>의 ‘춘향’ 역으로, <카쥬-샤>의 ‘카쥬-샤’ 역으로 이월화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됐다. 2) 그 뒤에는 조선극우회와 중앙무대로 옮겨 무대에 섰다. 무대에서 인기를 얻은 그녀는 1926년부터는 최초의 방송국 경성방송국에서 시험용으로 내보낸 첫 방송극 <새벽종>(1926)에도 성우로 출연했다. 3) 또 복음성가를 잘 부르던 복혜숙이 음반도 냈다. 영화대본을 직접 연기하듯 읽어 녹음하는 영화극 음반인 <장한몽>(1929)이 그 시작이었다. 이어서 <쌍옥루>, <부활>, 그녀가 출연한 <낙화유수>에서 주인공의 비련의 운명을 담은 주제곡 ‘강남 달이 밝아서 임이 놀던 곳~’으로 시작되는 <강남달>을 선보였다. 그 후로도 <숙영낭자전>, <심청전>, <춘희> 등의 수많은 음반을 취입했다. 곧 1930년 <애(愛)의 광(光)>을 발표하고는 장안 최고의 재즈가수로 불리기도 했다. 4) 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다재다능한, 명실공이 그녀는 ‘만능 탤런트’였다. 물론 그녀가 이렇듯 많은 재능을 발휘하게 된 데에는 한국 대중문화사 초창기의 한계적 특징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중문화에 투신했던 인원이 적기도 했거니와 연극배우, 영화배우, 성우나 가수 등의 역할 분할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복혜숙은 한국의 개척기 대중문화사에서 빛나는 공적을 쌓은 선구자이자 연예계의 지주로 살았다. 하지만 그녀의 주요 활동 영역은 영화였다. (사진4) 영화 <농중조>(이규설, 1926)의 현장. 복혜숙은 아버지의 엄한 감시 때문에 새장 속의 새처럼 집안에 갇혀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여학생 화숙을 연기했다. 연극계에서는 이미 장안에 이름이 났던 복혜숙은 1923년 영화에도 출연을 시작한다. 첫 출연은 마호정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계몽을 목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윤백남이 연출을 맡은 위생 영화 <방역 防疫>이었다. 5) 출연료 2원을 받은 영화에서 그녀는 길거리에서 파는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호열자(콜레라)에 걸려 눕는 주인의 딸 역할을 했다. 곧 극영화에도 출연하는데, 첫 출연작은 당시 인기 있었던 일본 제국키네마의 <농중조 籠の鳥>(松本英一, 1924)를 번안한 이규설의 <농중조 籠中鳥, 새장 속의 새>(1926)였다. 유교사상이 팽배했던 조선에서 젊은이들의 자유연애를 다루어 당시로서는 퍽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사랑을 쫓는 신여성 화숙으로 분한 복혜숙은 다리를 노출하기도 하고 안식(이규설)과 손을 잡는 러브신이 있어 인구에 회자되었다. 통속 신파 번역극이라는 비판 속에도, 남녀 학생들에게는 큰 환영을 받았다. 6) (사진5) <낙화유수>(이구영, 1927)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영환이 진주 기생이던 어머니의 일생을 극화한 <낙화유수>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복혜숙은 주인공 기생 역할을 맡았다. (사진6) <낙화유수>(이구영, 1927)에 참여한 스태프들 이듬해 복혜숙은 조선배우학교 시절 선생님이던 이구영이 연출하는 〈낙화유수〉(1927)를 찍었다. 배우학교의 동기생 이원용이 남자 주인공이었다. 이번에는 기생 역할이었다. 당시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영환이 진주 기생이던 어머니의 일생을 극화한 <낙화유수>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기구하게 기생이 된 여인과 젊은 화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그린 이 신파극은 개봉 당시 장안의 기생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라며 치맛자락을 휘감고 구경들을 와 더 화제가 되었다. 7) 실연의 마음을 가누지 못해 여인이 투신하는 장면이 두고두고 회자되었는데, 장마철에 한강에 자살하기 위해 뛰어드는 장면을 회고하는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오고가는 행인들이 여자가 자살한다고 구경이 났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그녀는 대담한 연기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당대의 다른 여배우와는 달랐다. 그녀는 연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배웠다. 서예를 배우는가 하면 창과 러시아 댄스, 유도는 물론 자동차 운전을 배우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8) 그렇게 배운 솜씨들은 배우 생활을 하면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사진7) 감독이자 배우 이규설. 복혜숙은 이규설의 작품 <농중조>(1926), <홍련비련>(1927), <순정은 신과 같다>(1928)에서 주연으로 열연했다. 그 뒤 ‘현대학생극’으로 불리던 〈홍련비련〉(이규설, 1927) 9) 에서 복혜숙은 지극히 우정이 깊은 두 대학생 김일과 현진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배우 편실 역할을 했다. 이어 이규설 감독과의 세 번째 작업은 <순정은 신과 같다>(1928)였다. 둘은 지주의 아들 이규설과 소작인의 딸 복혜숙로 만나 부부로 연기했다. 같은 해 <세 동무(세 걸인)〉(김영환, 1928)에서 복혜숙은 어부의 딸 역을 맡아 사랑에 빠지는 연기를 선보였고, 만주 현지 촬영으로 이월화와 함께 출연했던 〈지나(支那)가의 비밀(일명 흑진주)〉(유장안, 1928)에서는 중국인 거리에 인질로 납치된 조선 여자 송미례 역을 맡았다. 주연으로 활동하던 이 시절 ‘얼굴이 땡그랗’던 복혜숙은 쾌활하고 발랄한 왈가닥 ‘잇 걸(It girl)’로 불린 클라라 보(Clara Bow)를 닮았다는 말을 듣곤 했다. 10) 해방 이전은 배우 복혜숙의 전성기였다. (사진8) <세 동무(세 걸인)〉(김영환, 1928)의 한 장면, 복혜숙은 사랑에 빠지는 어부의 딸 역을 맡았다. (사진9) <지나 가의 비밀>(유장안, 1928) 신문 광고. 만주 현지 촬영을 감행한 이 영화에서 복혜숙은 질로 납치된 조선 여자 송미례 역이었다. 《동아일보》 1928년 5월 25일자 6면 하지만 배우 활동만으로 생활을 꾸려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1928년부터 8년간 카페 비너스를 운영했고, 이때 결혼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두 젊은이들의 사랑의 도피를 다룬 영화 박기채의 <춘풍>(1935)에 출연으로 영화계에 복귀했다. 안종화의 <역습>(1936)에는 살인자의 아내 역으로 출연하면서 카페 비너스를 제작 사무실로 제공하면서 실질적인 제작에 참여했다. 11) <반도의 봄>(이병일, 1941)에서는 배우가 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정희와 함께 방을 쓰는 음반회사 직원으로 등장했다. 조선인들의 영화 제작이 힘들어진 식민지 말기에는 <감격의 일기 感激の日記>(신경균, 1943), <그대와 나 君と僕>(허영, 1944)를 비롯한 다수의 어용영화에도 출연했다. (사진10) <역습>(안종화, 1936)의 한 장면 (사진 11) <반도의 봄>(이병일, 1941)에서 음반회사 직원 모경숙 역의 복혜숙 1920년대 말 자유분방한 신여성의 아이콘이던 복혜숙이 연기를 전환하게 된 계기는 최인규의 <수업료>(1940)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동시녹음이 진행된 이 영화에서 30대 복혜숙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자식 내외가 행상을 하러 도시로 나가자 소학교에 다니는 손자 영달을 돌보기 위해 넝마를 주우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할머니 역을 맡았다. 당시 그녀 나이 37세였다. 이 영화 이후 그녀는 노역을 주로 맡았다. 인자한 어머니,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상인, 유난스런 할머니 같은, 그녀는 연기력을 요구하는 조역으로 이후 300여 편의 영화에 얼굴을 비쳤다. 또 텔레비전 드라마 <아내의 얼굴>(KBS, 1962), <아씨>(TBC, 1970), <옛날 나 어릴 적에>(MBC 신년특집, 1981) 같은 작품에도 종종 출연하였다. (사진12) <수업료>(최인규, 1940)에서 복혜숙은 병상에 누워서도 어떻게든 손자 영달이의 수업료를 마련해보려는 애달픈 할머니를 연기했다. 해방 후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자재와 필름이 부족해 영화제작이 열악했던 시기, 새롭게 시작하는 영화계에서 그녀 역시 주조연을 마다않고 성실히 한몫을 했다.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에 간호사 혜자(황려희)의 어머니를, 〈똘똘이의 모험〉(이규환, 1946)에서는 똘똘이의 어머니를 맡았다. 또 〈죄 없는 죄인〉(최인규, 1948), 〈여명〉(안진상, 1948), 〈수우〉(안종화, 1948),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에도 작은 역이나마 출연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에 입대해 공연을 하며 전장을 누볐고, 잠시 머물렀던 마산에서 촬영한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에서는 전선에서 실명한 아들(최현)에게 자신의 눈을 이식해주는 어머니로 분했다. (사진13) <여명〉(안진상, 1948) 신문광고 (사진14)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 신문광고 (사진15)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 광고. 아들에게 자신의 눈을 이식해 주는 어머니 복혜숙이 보인다. 전후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한국영화계에서 복혜숙은 전성기를 넘은 나이에도 활동을 이어나가는 거의 최초의 여성 배우였다. 더 이상 주연을 할 만한 시나리오가 없었지만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 <아리랑>(김소동, 1957), <조춘>(유두연, 1959), <삼등과장>(이봉래, 1961), <청춘교실>(김수용, 1963), <여판사>(홍은원, 1963), 그리고 미공보원(USIS-Korea)이 제작한 문화영화 <황토길 Litany of hope>(양승룡, 1962)에서 어머니와 할머니 역할을 전담하면서 꾸준히 식지 않은 연기력과 열정 보여주었다. (사진16)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에서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중학교 교사 명호(황해)의 어머니로 분했다. (사진17) <삼등과장>(이봉래, 1961) 구소장(구봉서)의 어머니 역을 맡았다. (사진18) <황토길>(양승룡, 1962)에서 한센 병을 앓고 있는 시인 한하운(김웅)의 어머니로 출연한 복혜숙 (사진19) <청춘교실>(김수용, 1963)에서는 손녀 셋을 거느린 왈가닥 할머니로 등장했다. (사진20) <여판사>(홍은원, 1963)에서는 치매를 앓고 있어 우연히 독을 마시게 되는 시할머니 역할을 했다. 김수용 감독이 배우 복혜숙이 자신의 영화에서 열연했던 강렬한 장면을 회고한 적이 있다. 해방촌 빈민들의 군상을 그린 김영수의 희곡을 영화화한 <혈맥>(1963)에서 김덕삼(김승호)은 새로 얻은 아내가 자신의 돈을 훔쳐 달아나자, 중신을 선 대폿집 주인(복혜숙)에게 무작정 따지러 간다. 아내를 찾아내라는 어깃장을 놓는 덕삼과 이 어이없는 주장에 맞서는 꼿꼿이 맞서는 대폿집 주인 아낙의 대단한 육탄전이 펼쳐진다. 이 장면에서 복혜숙은 담배를 입에 물고 김승호와 몸싸움을 하면서 거칠게 대거리를 하는데, 그녀는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생활 전선에 나서야했던 강단 있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몸소 보여준다. 김수용의 또 다른 영화 <사랑의 조건>(1979)에서 일흔이 넘은 복혜숙은 어린 손자를 데리고 필사의 힘으로 한 겨울 눈 내리는 대관령을 넘는 할머니로 특별출연을 했다. 이 영화에서 그는 모진 날씨 따위에는 아랑곳없던, 여전히 두 눈에서는 광채를 내뿜으며 서슬 퍼런 연기를 해내던 노년의 복혜숙을 잊지 못한다. 12) (사진21) <혈맥>(김수용, 1963) 중 김덕삼(김승호)과 대폿집 주인(복혜숙)의 육탄전 복혜숙은 평생을 배우로 무대 위와 또 카메라 앞에 있었다. ‘남들이 안하던 때에 배우로 입문해 연예계의 여러 방면에서 초창기 증인으로 또 산 역사 노릇’을 했다. 다방면에서 최고의 인기와 함께 여성으로서 선각자의 길을 걸었다. ‘복혜숙 여사의 연기생활 40주년 기념하는 스타의 밤’에는 많은 동료와 후배들이 기꺼이 함께 해줄 만큼 평생 한국영화를 지켜온 한국영화의 어머니로 평가를 받았다. 또 ‘뭐든 뒤로 미루지 못하는 성격 탓’에, 또 연예계를 통찰하는 식견을 갖춘 몇 안 되는 배우로 영화인들의 존경과 대우를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13) 18세부터 연기해 온 그녀의 일대기가 특별드라마 <얼굴>(1981, KBS)로 만들어질 만큼 그녀의 생 그 자체가 한국 대중연예사이기도 했다. (사진22) <대한뉴스>(제 387호, 1962) 연예계 소식 중. 962년 10월 12일부터 2일간 시민회관에서 복혜숙의 연기생활 40주년을 기념하는 스타의 밤‘ 행사가 열렸다. 당시 이원우 공보부 장관이 복혜숙에게 표창을 수여하고 있다. 스크린 밖에서도 그녀는 영화계의 원로로서 업계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발 벗고 나섰다. 1954년 한국영화 입장세 면세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해 선봉에 섰고, 한국영화협회가 한국영화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영화회관 건립 기금을 위해 야심차게 기획된 영화 <애정삼백년>(윤봉춘, 1962)에도 앞장 서 힘을 보탰다. 1955년 대한영화배우협회를 창설해 10년간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1962년부터 한국영화인협의의 연기분과 위원장으로 배우들의 뒷바라지에 힘을 쏟았다. 그녀의 은막 인생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영화는 진용(박재호)의 할머니 역을 맡은 〈낮은데로 임하소서〉(이장호, 1982)였다. 하지만 78세의 그녀는 아직도 ‘못 다한 일 많아 은퇴할 생각이 없’ 14) 었다. (사진23) 한국영화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영화회관 건립 기금을 위해 야심차게 기획된 영화 <애정삼백년>(윤봉춘, 1962) 포스터. ‘윤봉춘 복혜숙 지휘’라는 문구가 보인다. (사진24) <낮은데로 임하소서>(이장호, 1982)에서의 복혜숙 1)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삼천리》 1937년 1월호 9권 1호, 162~166쪽. 2) “명우와 무대(7), 복혜숙 양의 『카쥬-샤』, 부활의 여주인공으로, 토월회 무대에”, 《삼천리》 제5권 4호, 1933년 4월, 11쪽. 4) 복혜숙의 생애는 다음 자료들을 참고해 요약 기술하였다. 『여성실화: 빛나는 성좌 복혜숙』, 명서원, 1976: 이영일, 「스크린을 빛낸 예도 60년-복혜숙」, 『한국영화인열전』, 영화진흥공사, 1982; 황문평, 「여성 연예계의 선구자 복혜숙」, 『삶의 발자국』(1), 선, 1988; 조영만, 「여배우 복혜숙의 활약」, 『30년대 문화예술인들: 격동기의 문화계 비화』, 범양사, 1988; 한국예술연구소 편, 「2장 복혜숙」,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복혜숙·이구영 편』, 도서출판 소도, 2003, 이순진, 「복혜숙」, 이승희 외 지음,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도서출판 소도, 2006; .한상언, “한상언의 <한국영화스타>3 :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한국영화의 어머니 복혜숙”, 오마이스타, 2004년 10월 13일,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0214631 4) 이동순,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한국 최초 재즈가수 복혜숙의 노래를 들어보세요”, 조선Pub, 2013년 10월 18일, 조선Pub 홈페이지 http://pub.chosun.com 5) 복혜숙, 「나와 영화반세기 복혜숙 편」, 월간 《영화》 1974년 1월호, 53쪽;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3> 영화계 데뷔”, 《동아일보》 1981년 5월 6일 7면. 6) “영화평 농중조 조선키네마 작품”, 《동아일보》 1926년 6월 27일 5면. 7) 안종화, 앞의 책, 157쪽; 김남석, 「배우 복혜숙 연구」, 『인문과학연구』 13,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5, 123~125쪽. 8)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1>”, 《동아일보》 1981년 4월 29일 7면. 9) KMDb에는 이필우가 감독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신문지상에는 이규설이 감독으로 명시되어 있다. “홍련비련”, 《동아일보》 1927년 2월 5일 5면. 10) 한국예술연구소 편, 「2장 복혜숙」, 앞의 책, 144쪽. 11) 복혜숙, “나와 영화반세기: 32세 때부터 노인역만”, 월간 《영화》 1974년 3월호, 68쪽. 12) 김수용,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1탄 복혜숙: 드라마 분위기 설정해가는 역광 같은 배우, 복혜숙”.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블로그, 2014년 2월 26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블로그 http://siwff.tistory.com/503 13)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97> 첫 TV드라마”, 《동아일보》 1981년 5월 26일 7면. 14)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100> 복혜숙 연예생활 60년”, 《동아일보》 1981년 5월 30일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