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도필승
- 감독
- 왕정
- 제작년도
- 1991
- 출연
- 임정영, 왕정, 오군려
홍콩 시티대학교와 한국영상자료원 공동 주최해 2025년 5월 16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된 국제 컨퍼런스 ‘목적지 홍콩: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와의 조우 (Destination Hong Kong: South Korean Cinema’s Encounter with Chinese-Language Cinemas)’의 기조연설과 2일차 발표 및 토론 내용 을 요약합니다. 컨퍼런스 개최 개요와 1일차 발표 및 토론 내용은 이전 글( 링크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기조연설> 아시아 지역에서의 초국가적인 영화 협업 활동의 사례를 발견하고 그 맥락을 짚는다는 컨퍼런스의 목표에 맞춰,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의 크리스 베리 교수와 한국영상자료원의 김홍준 원장이 기조연설을 진행했다. 20세기 중후반의 역사적 사건들이 당대 아시아 영화의 제작과 배급, 수용에 미친 영향을 거시적인 차원의 담론과 미시적인 차원의 자전적 경험담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한국과 중국어권의 영화 연결 역사 속 우연성과 불가해성: 최국인, 신장, 그리고 <용의 해> (킹스 칼리지 런던 영화학과 교수 크리스 베리) 크리스 베리(Chris Berry) 교수는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이 주 활동 무대였던 영화인 최국인과 그가 공동 연출한 <용의 해>(아사날리 아시모프, 최국인, 1981)를 중심으로, 영화를 통한 한국과 중국어권의 연결이 얼마나 우연적이면서도 불가해하게 발생할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그는 두 문화권의 영화적 교류가 이외 지역의 개입을 통해 더욱 확장된 프레임으로 논의될 가능성을 보였다. 아시아 내 여러 지역을 옮겨가며 활동한 “마이너 디아스포라”로 규정되기도 하는 최국인은, 1926년 조선에서 태어나 1934년에 부모님을 따라 상하이로 이주하고, 6.25 전쟁 이후 북한에 체류하다가 1950년대 초반에는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 브기끄(VGIK)에 다니며 영화인으로서의 이력을 정립했다. 이후에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카자흐필름스튜디오(Kazah Film Studio)를 마지막 근거지로 하여 활동했다. 다큐멘터리 <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김소영, 2017)을 통해 최국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크리스 베리는, 최국인을 ‘냉전’ 개념의 복합성을 깨닫게 해준 인물로 기억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 개인 숭배(cult of personality)를 통해 자신을 절대적 지도자로 신격화했던 스탈린의 행태를 비판하며 스탈린 체제로부터 이탈해야 함을 주장한 흐루쇼프의 연설이 있은 후, 당시 소련에서 브지끄의 학생이었던 최국인과 그의 동창들은 이를 모방해 북한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한다. 이에 따라 그들은 졸업 이후 북한으로 돌아간다면 신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고 우려해 소련에 잔류하기로 결정하고, 소련은 이를 허가한다. 흔히 미·소 간 대립을 중심으로만 이해되는 냉전의 이분법적 의미는 대개 서구 사회에 의해 구성되었고, 이외 문화권이 처한 사회적 상황에 따라 그 서구적 의미 바깥에서 (심지어 사회주의 집단 내부에서도) 얼마나 다양한 굴절이 발생하는지 를 알게 해준 일화였다. 게다가 동아시아가 ‘현대’ 사회로 돌입하며 받아들이게 된 이념은 상당 부분 외부로부터 유입되어 동아시아 각지에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는데, 크리스 베리는 이 혼란에 대응하기 위해 영화를 통해 연대하려는 노력 이 최국인과 같은 영화인에게서 엿보인다고 주장했다. (이는 패권국이 시시각각 대립하며 파장을 낳는 동시대 사회 속 불안정한 일상과 일면 유사하기도 하다.) 관련 활동은 연설의 제목에도 나타나듯이 아시아 곳곳의 영화인들에 의해 ‘우연적’으로 발생했다. <용의 해(Year of the Dragon)> 포스터 / 사진: IMDb 그가 1981년 중 연출에 참여한 <용의 해>는 신장 지구와 위구르족에 대한 청나라의 폭력적인 정복을 다룬다. 작품의 제작과 개봉에 관해서는 여러 의문이 제기된다. 당시 소련에서는 어떤 목적으로 이러한 내용의 영화 제작을 허가했고, 왜 최국인을 공동 연출자로 임명했을까? 작품 자체가 갑작스럽게 종적을 감춘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적 맥락을 먼저 살펴보자면, 작품은 20세기 중·후반 지속됐던 중·소 분열(Sino-Soviet Split)을 배경으로 기획됐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부터 중국은, 흐루쇼프를 필두로 탈스타린 기조에 접어든 소련과 대립하기 시작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1964년에는 두 국가 간 국경이 과거 불평등 조약에 의해 확정됐다며 중국 측에서 소련을 대상으로 국경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여기에는 중국 서부 국경 지대에 해당하는 신장 지구가 포함된다). 그리고 당시 소련의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신장 지구 내 위구르족의 투쟁이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전개됐다는 입장으로 위구르족을 지지하며, 과거 청나라와 당시의 중국이 견지한 무리한 영토 확장 욕구를 비판하곤 했다. 더불어, 민족성(ethnicity)에 대한 두 국가의 인식 차이도 작품에 드러난다. 소련은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연방에 속한 개별 국가들의 자치 가능성을 시사한다. 하지만 중국은 각기 다른 민족이 통합되어 ‘하나의 중국’을 형성함을 주장해왔는데, 크리스 베리는 극중 청나라의 장군과 위구르족의 일원이 위구르족의 중국 융화 필요성, 그리고 민족의 자기 결정권 존속을 두고 논쟁하는 장면이 이러한 인식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짚었다. 과거에 위구르족을 향해서 그랬던 것처럼, 작품이 제작됐던 당시에도 중국은 소련에 대해 ‘하나의 중국’ 기조를 강요한다는 소련의 비판적 입장 이 내포됐다는 분석이다. 연설 중 재생된 <용의 해> 본편 영상 일부 한편, 최국인 개인의 이념이 작품과 연관되어있을 가능성은 쉽사리 파악하기 어렵다. 그의 정치·사회적 이념을 추정해볼 수 있는 자료가 부재할 뿐더러, 그가 활동하던 시기 소련 영화산업의 현실을 고려하면 연결고리가 잘 형성되지 않는다. 당시 소련의 영화 제작은 보통 개별 감독에게 국가가 작품을 배당함으로써 진행됐기에 배당을 받지 못한 감독들의 수입은 비교적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최국인이 순전히 물질적인 관점에서 공동 연출 제의를 수락했는지, 그 이면에 개인의 이념적 지지 등이 존재했는지는 연설 제목처럼 여전히 불가해(unknowable)하다. 크리스 베리가 작품과 관련해 지적한 우연적이고 불가해한 또 다른 부분은 작품이 갑작스레 사라졌다는 점이다.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예산을 들여 제작됐고 1982년 제15회 소련 탈린영화제 수상까지 경험했음에도 오늘날 본편을 감상할 수 있는 자료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저화질의 유튜브 영상에는 작품 배급이 갑작스레 중단된 데 대해 여러 이용자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원인으로 추정해볼만한 상황을 역사학자 피터 롤버그(Peter Rollberg)의 설명을 참고해 제안했다. 본 작품이 소련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의 알레고리 로, 즉 중국이 아니라 소련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은유로 인식될 여지가 있어 소련 차원에서 배급 중단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가설이라고 할 수 있다.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영화학적 개념으로 그는 이스턴 장르를 언급한다. 서구 문화권에서 비롯된 웨스턴 장르는 미국 서부 지역을 정복한 유럽인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를 모델로 발전한 이스턴 장르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소련의 정복을 다룬다. 원주민과 카우보이의 구도가 바스마치(소련에 저항한 중앙아시아 세력)와 볼셰비키로 전환되는 것이다. 사막이나 스텝 지대를 배경으로 삼고 석양을 따라 말을 타고 달리는 인물들, 그들의 총격전 등을 보면 자연스레 웨스턴 장르가 연상된다. 극중 몇몇 장면을 컨퍼런스 현장에서 직접 재생한 그는, 중·소 분리와 소련·중앙아시아 간 대립을 동시에 은유할 가능성을 통해 냉전 국면에서 아시아의 영화사적 기록을 되짚을 때 감지되는 우연성과 불가해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황홀한 기억: 홍콩영화와의 조우, 1966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영상자료원 김홍준 원장) 김홍준 원장은 삶의 궤적을 따라 홍콩영화와 맺어온 관계와 그로부터 받았던 인상, 영감, 깨달음을 개인적 일화들을 바탕으로 공유했다. 그가 영화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며 한국영상자료원장으로 재임하기까지 되새길 만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홍콩영화는, 동시대 아카이브가 지닌 고유의 임무를 환기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67년, 11살이 되고 막 사춘기에 접어들던 때 그는 홍콩영화를 처음으로 접했다. 당시는 박정희 정부가 유신정권에 돌입하기 전, 국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시기다. 동시에 반공주의적 의식이 사회 전반에 공유됐는데, 흥미롭게도 007 시리즈가 이러한 이념에 부합하는 영화로 인식되기도 했다. 시리즈에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는 공산주의 세력으로 묘사되었고, 주인공들은 '위험 세력'으로 그려진 이들을 소탕했기 때문이다. 이때 국내 군사 정부는 과거 식민 통치를 자행한 일본의 문화를 배격하던 와중이었기에 일본영화가 수입되지 않았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 일본영화가 점했던 영역을, 한국에서만큼은 홍콩의 액션 및 시대극 영화들이 차지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같은 시기, ‘마카로니 웨스턴’ 장르의 등장으로 < 황야의 무법자 >(세르지오 레오네, 1964) 등의 명작이 소개된 직후, <대취협>(호금전, 1966) 을 접했다. 중국어권에서 집필된 무협소설이 크게 인기를 얻고 있었던 시절, 김홍준 원장 역시 이 작품을 만나기 전에 대만의 유명 무협소설 작가 와룡생이 쓴 『군협지』를 먼저 접한 상태였으며, 그의 표현처럼 어린 시절 그에게 “무협의 피”는 이미 흐르고 있었다. <대취협>은 홍콩에서 1966년에, 한국에서는 이듬해인 1967년에 개봉했다. 당시 17살이었던 그가 처음으로 본 무협영화이기도 한 이 작품은, 그가 대만 출신 배우 정패패와 영화 속 쿵푸의 세계를 최초로 알게 되는 계기였다. 이후 중국어권의 여러 무협영화 들이 국내에도 선을 보이면서 10대 관객들은 이들의 무협적 요소에 매료됨과 동시에 장르에 내재된 정서에 힘입어, 사춘기의 반항심이 거세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특히 정패패, 데이비드 치앙, 적룡과 같은 배우나 당대 걸출한 연출자로 꼽혔던 장철이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종류의 무협영화들이 정교하게 연출된 액션이 아닌 맨주먹을 이용한 싸움을 소재로 하기 시작했기에, 무협 장르의 본령을 져버렸다고 생각한 그는 이전만큼 홍콩영화에 애정을 갖지 못했다. 이소룡과 성룡이 등장한 이후 20년간 홍콩영화를 그렇게 잠시 잊고 지내다가, 그가 2001년부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이끌게 되면서 인연이 다시 시작됐다. 국내 최초로 호금전 회고전을 기획해 < 협녀 >(1969), < 용문객잔 >(1967), < 산중전기 >(1979) 등의 작품을 상영한 것인데, 놀랍게도 30~50대 관객이 크게 몰렸다. 영화제 관객의 주 연령대인 2030 세대가 아니라 중년 관객층이 호응한 이례적인 사례였다. 2003년에는 복원 또는 재개봉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쇼브라더스 특별전을 개최했고, 영화제를 방문해 자신의 영화 인생 안내자로서의 호금전에 대해 설명하던 정패패를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맞기도 했다. <대취협> 중 정패패 /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대학 재학 중이던 1976년으로 돌아가보면, 김홍준 원장은 슈퍼 8mm 필름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제작했고, 이중 < 서울 7000 >의 수상을 계기로 영화 제작 활동을 보다 진지한 취미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군 제대 이후에는 학내 영화 동아리 ‘얄라셩’에 합류해 영화와 관련된 워크숍을 진행하며 관련 활동을 지속했지만, 본래 인류학을 전공했고 학업을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에 1987년부터 1989년까지는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영상·문화인류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남는 시간에는 캠퍼스나 시네마테크 등을 찾아 계속 영화를 감상했으며, 교내 도서관의 간행물 섹션에서 《사이트 앤 사운드( Sight and Sound )》나 《아메리칸 시네마토그래퍼( American Cinematographer )》,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éma )》와 같은 영화잡지를 즐겨 읽었다. 이때 토니 레인즈가 작성한 한 기사에서 홍콩영화계의 새로운 세대가 “ 홍콩 뉴웨이브 ”를 구축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홍콩영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렇게 학업을 이어가며 영화도 자주 감상하던 어느 날, 미국의 한 극장에서 < 도마단 > (서극, 1986) 을 상영하는 더블 피쳐 프로그램이 열렸고, 영화잡지 외에는 관련 정보를 살펴볼 기회가 드물었기에 그는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갔다.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관람했지만 홍콩 출신 여자 배우 3인의 우정이 아름답고 감성적으로 그려지는 순간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인물들이 곧 일어날 ‘혁명’을 예고하는 마지막 장면 역시 돋보였다. 1980년대는 광주 민주화운동을 시작으로 한국에서도 ‘민주화’를 향한 사회적 외침이 본격화되던 시기였기에, 해당 장면 속 대사와 분위기가 암시하는 ‘혁명’은 그로 하여금 단어에 내포된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도록 했다. 작품을 연출한 홍콩 출신의 영화인 서극은 감독이자 제작자, 배우로서 여러 역작을 남겼다. 국내에서는 그가 연출 또는 제작한 < 영웅본색 2 >(오우삼, 1987), < 황비홍 >(1991), < 신용문객잔 >(1992) 이 흥행했다. 공교롭게도 김홍준 원장의 연설이 있기 3주 정도 전에, 서극은 이탈리아 우디네극동영화제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며 거장의 반열에 공식적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 좌 ) <도마단> 중 주인공 3인 / ( 우 ) 혁명 후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지는 인물들 / 사진: IMDb 그리고 몇 년 후, 김홍준 원장은 국내 영화잡지 《로드쇼》에서, 한 작품의 특정 장면을 영화 이론이나 영화사적 개념으로 해설하는 “도시에” 섹션 연재를 맡는다. 섹션 내 첫 원고의 주제로는 대중적 관심도에 비해 주류 평론계에서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던 홍콩영화를 선택했다. 원고 작성 시 참고할 만한 자료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서 고충은 있었지만, 편집장이었던 정성일 평론가의 말처럼 1990년대 홍콩영화를 진지하게 비평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는 데서 의미를 찾았다.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본 잡지에 그가 ‘구회영’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한 이 원고들은 이후 『영화에 대하여 알고싶은 두세 가지 것들』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된다. 그가 홍콩영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키워가도록 한 작품이 한 편 더 있다. 왕가위 감독의 < 열혈남아 >(왕가위, 1989)다. 국내에 수입된 당시 배포됐던 포스터와 한국어 제목이 전형적인 홍콩 누아르의 이미지를 연상시킨 것과는 정반대로. 작품은 완성도 높은 예술영화에 가까웠다. 결투 중심의 홍콩영화로부터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적 동요와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혀 홍콩영화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감독이 나타났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그는 눈에 띄는 강렬한 몇 장면을 연설 중 공유했으며, 그중 하나는 포장마차에서의 액션 신이다. 얼핏 보면 인공 혈흔과 같은 특수효과가 매우 어색해보이지만, 액션을 비롯해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 기술이 무척 유려하게 적용됐다는 점이 놀랍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유덕화와 장만옥이 만들어낸 명장면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김홍준 원장이 본래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홍콩영화 관련 영상자료들도 다수이지만, 그는 원내수집 담당 부서에서 국내 기증자를 대상으로 대규모 수집을 진행한 덕에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 1,000여 점에 달하는 홍콩영화 DVD 또는 블루레이가 소장돼 있다고 전했다. 아카이브를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는 기억의 과정으로서, 작품을 재발견하고 수집한 후 디지털 복원해, 대중에게 그 가치를 전파하면서 작품 자체가 다시 상상(re-imagine)되는 데 기여하겠다는 마음가짐을 밝히기도 했다. 연설을 마무리하며 그가 재생한 <열혈남아> 속 두 배우의 얼굴처럼, 과거의 한 순간에 멈춰 있지 않고 미래 세대를 위해 계속해서 재발견될 영화 속의 무언가를, 필름 아카이브로서 꾸준히 찾아 공유하고 싶다는 소망도 덧붙였다. <패널 3> 장르, 리메이크, 그리고 조우 특정 장르 속에서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계가 각자의 스타일과 인력을 교환한 역사를 들여다보고, 그 이면의 지정학적·산업적 영향을 분석했으며, 홍콩대학교 김소혜 교수가 발표자들을 소개했다. 중국 멜로 TV 드라마 속 한국 남성 스타와 한류 남성성의 현지화 (영국 카디프대학교 현대언어학부(중국학) 조교수 일레인 정) (당시 해외 체류 중이었음에 따라 비대면 발표 진행) 일레인 정(Elaine Chung)은 중국 멜로영화나 TV 시리즈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한국 남성 배우들의 배역을 통해, 중국어권이 ‘한국의 남성성(Korean masculinity)’을 현지화하게 된 배경과 사례를 소개했다. 특히 상당수의 한류스타가 중국어권 콘텐츠 산업에 진출한 시기, 즉 그들의 인기가 중국어권에서 부상한 2000년부터 사드무기체계(THAAD) 배치로 인해 양국 교역이 대폭 축소된 2016년까지의 작품들에 주목했다. 당시 한국인 배우들이 연기한 남자 주인공의 특성으로부터 중국어권 사회가 도출한 ‘한국의 남성성’과 이에 대한 인식이 내러티브에 어떻게 반영되어있는지를 분석하기도 했다. 로맨스와 남성성은 한국 드라마는 물론 아시아에서 흥행한 한류 콘텐츠 전반이 중심적으로 다루는 소재다. 정선의 한류 연구(“Pan-East Asian Soft Masculity”, 2001)에서는 두 요소의 결합을 통한 남성 한류스타들의 강력한 팬덤과 한국 멜로 TV 시리즈 흥행이 2000년대 초반 동아시아 한류 열풍을 본격적으로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한다. 일레인 역시 한류 콘텐츠 속 한국인 남성 주인공들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으로 ‘ 부드러운 남성성(Soft masculinity) ’을 언급했다. 신사적이고 예의 바른 태도, 차분한 말투, 그리고 섬세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는 그들은 종종 재벌로 등장하며,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상대역 여성과 함께 신데렐라 내러티브를 완성시킨다(2000년대 초반 당시 한국 멜로 TV 드라마의 전형이다). 그러나 일레인은, 한류 콘텐츠를 통해 이상화된 부드러운 남성성이 중국 TV 시리즈 속 한국인 남성 배우를 거치면서, 중국어권 대중에게는 다르게 인식될 여지가 있다며 TV 시리즈 세 편을 예로 들었다. 부드러운 남성성을 지닌 한국인 남성 주인공의 성격이 또 다른 중국인 남성 배우와 비교 또는 대조되며 내심 부정적으로 평가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백령공우(White Collar Apartment)>(2002)의 안재욱, <100번째 신부(The 100th Bride>(2004)의 지진희, <다이아몬드 러버(Diamond Lover)>(2015)의 정지훈 모두 여성 주인공과 연인 관계를 주도적으로 이어가지 못하고 결국 관계를 지켜내는 데 실패한다. 반면 그들과 여성 주인공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이룬 중국인 남성 배우는, 실용적이면서도 강인한 면모를 보이며 마침내 여성 주인공과 연인이 된다. 혹은 한국인 남성 주인공과 달리, 이들은 부유하지는 않지만 자수성가했으며 여성 주인공에게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독립적이고 성숙한 어른을 표방하면서 더욱 이상적인 방식으로 ‘부드러운 남성성’을 구현한다. <다이아몬드 러버> 주요 인물 / 사진: TV Time 예시가 된 세 작품의 자세한 줄거리를 살펴보면, 시리즈 흥행을 위해 남성 한류스타를 캐스팅하고 전면에 내세워 홍보하면서도 결말은 중국인 남성에게 우호적으로 전개된다. 중국어권 콘텐츠 제작자의 관점에서 강력한 팬덤을 동원한 한류스타의 이미지를 문화적 자본으로 활용 해 상업적 성공을 꾀하면서도, 인물 구도와 내러티브를 중국어권 문화의 맥락에서 지역화한 결과 라고 일레인은 분석한다. 경제 발전 이후 중국사회에서 단정하고 신사적인 외양으로 대표되는 소위 “화이트 칼라 남성성(White-collar masculinity)”이 호응을 얻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레인에 따르면, 중국어권에 아직 널리 공유되어있는 통념상 가장 바람직한 남성 이미지는 ‘부단히 노력한 후 사회적 성공을 거둬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에 가깝다. 따라서 부드러운 남성성을 지닌(부유한 집안에서 편안히 자랐지만 가정을 이끄는 독립적 주체로까지는 성장하지 못한) 한국인 남성 배우의 역할은 이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로 지각되어 내러티브에서 소외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일레인은 추측했다. 중국어권 콘텐츠 흥행 수단으로 한류의 대중적 인기를 활용함과 동시에, 인기의 핵심이 되는 남성 이미지는 지역화해서 내러티브에 반영함으로써 한류와의 차별화를 시도하는 전략이라는 해석이다. 한·중 영화 협력의 산업적·정책적 측면: <제3의 사랑>을 중심으로 일본 교토대학 강사 김수현(현 영국 퀸즈대학교 벨파스트 조교수) 김수현 교수는 2000년대 이후 본격화된 한국과 중국어권 간 콘텐츠 합작이 시도된 역사를 산업과 정치의 맥락에서 분석했다. 특히 한·중 합작 영화에서 작가로서의 권리와 투자자로서의 권리가 각 스태프에 의해 복합적으로 행사되는 현상 을, 동아시아의 정치와 산업에 관한 담론에 기반해 설명했다. 연구 방법론 중 하나로 참여관찰법을 도입해 합작 영화 < 제3의 사랑 >(이재한, 2014) 제작 현장에서 어시스턴트 프로듀서로 활동한 경험을 녹여낸 점도 인상적이었다. “20세기는 방송(Broadcasting)의 시대”라며 방송이라는 동시다발적 송신의 매체가 대중문화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 미셀 힐름스(Michele Hilmes)의 주장을 ‘영화’에도 적용하는 것으로 발표가 시작됐다. 영화도 기술을 바탕으로 초국적으로 전파될 수 있고, 스타나 대중문화에 관한 담론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계화된 문화적 양식으로 공유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는 2000년대부터 영화를 매개로 초국가적인 협업이 발생했는데, 그중에서도 중국은 같은 시기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고 정부 당국이 한층 완화된 문화 정책을 펼치면서 ‘합작’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때 한국은 합작 파트너로서 중국어권 제작나와 배우와 협업해 < 비천무 >(김영준, 2000), < 무사 >(김성수, 2000), < 아나키스트 >(유영식, 2000) 등의 작품을 내놓았다. 김수현 교수에 따르면, 이러한 초국가적 합작의 경제적 기반을 조성한 여러 주체들 간의 협상 결과에 따라, 작품의 ‘작가(author)’로서 창작의 방향을 결정하고 통제할 권리가 주어진다. 한·중 합작 영화의 경우 제작 과정 전반에 걸쳐 정부 당국의 검열이 만연한 중국 영화산업의 특성까지 더해져, 작가로서의 권리가 제작 주체들 사이에서 합리적으로 배분되기가 쉽지 않다 . 그는 <제3의 사랑>의 어시스턴트 프로듀서로서 각색과 제작, 배급 과정에 직접 관여했던 경험을 빌려, 이 과정에서 견제나 갈등, 때로 불공정한 상황까지 야기될 수 있음을 보였다. <제3의 사랑> 포스터, 스틸 / 사진: IMDb( 1 , 2 ) <제3의 사랑>은 동명의 중국 소설을 원작으로 한국인 이재한 감독(John. H. Lee)이 연출하고 중국 제작사 HS엔터테인먼트가 제작을 맡은 멜로드라마 장르의 영화다. 원작을 각색한 각본은 본래 이재한 감독이 집필했지만 최종적으로 채택된 각본은 중국 측 프로듀서의 작업 결과물이었다. 특히 영화 제작 및 배급을 담당하는 국영 기업 차이나 필름 그룹(China Film Group Corporation)의 당시 부대표는, 일부 장면이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대면하려는 동기를 약화한다는 이유로 원작 소설에 충실할 것을 지시하는 이메일을 감독에게 직접 보내기도 했다. 차이나 필름 그룹이 중국영화에 관한 대규모 투자 및 배급을 주도하는 국영 기업이라는 점에서, 각색에 참여한 한국 스태프 인력은 합작 영화의 창작을 둘러싼 권력 구조를 개편하지 못하고 그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중국 제작사 측의 불공정한 대우는 직업 안정성에 대한 위협으로까지 이어졌다. 김수현 교수가 인터뷰한 한국 출신 조감독의 경우, 현장 참여를 위해 중국에 체류하던 중 비자가 만료되었음에도 중국 제작사는 이를 연장하는 데 협조하기를 거부했고, 해당 조감독은 촬영 도중 출국해야 했으며, 중국 측 제작사와의 갈등을 이유로 중국 재입국도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중국 제작사는 촬영 종료일까지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그의 이름을 작품 크레딧에서 제외하고 만다. 이렇게 중국에서 일시적으로 근무한 한국 출신 스태프들은 체류 목적에 적절히 부합하는 비자를 발급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제작 현장에 기여한 바와 관계없이 스태프로서의 지위까지 위협받는 불안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배급 지역마저도 중국 측 배급사가 단독으로 결정하면서, 대규모 흥행에도 불구하고 한국 관객으로부터 발생할 잠재적 수요는 무시된 채 작품은 중국 내에서 배급되는 데 그쳤다. 또 다른 한중 합작 영화 < 평안도 >(장윤현, 2014)는 출연한 배우가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는 정치 성향을 띤다는 등의 이유로 중국 내 상영이 금지됐고, 중국 당국의 압력으로 인해 해외 상영까지도 무산되며 2016년까지 개봉을 하지 못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위와 같은 몇몇 사례를 종합했을 때, 한·중 합작은 중국이 상대 국가와 맺고 있는 여러 종류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며, 그에 따라 합작 결과물의 중국 시장 진출 향방이 정해지는 현상을 엿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합작’이라는 외형을 지녔지만 제작과 배급 전반이 실질적으로는 중국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게 되는 한계 가 드러나기도 했고, 상대국 제작진이 체감하는 지정학적 불안정성 이 그들의 제작 참여 경험의 질에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김수현 교수는 이렇게 영화산업의 논리와 제작 방식이 서로 달라 충돌하는 상황에서, 국제 합작이라는 작업에는 통상 모종의 긴장 관계가 형성됨을 언급했다. 그리고 ‘시장 확장’을 목표로 한다는 본래 특성상 합작 영화 제작 시 감독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여지가 있으며, 위에 언급한 국가 간 이해관계와 지정학적 역학 관계에 따라 창작과 배급을 주도할 권리가 주어지는 현상도 소개했다. 국제 합작은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권 간 타협과 조율, 그리고 힘겨루기의 장이 되며, 합작을 둘러싼 권리는 예술적 아이디어나 행위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영향력이 작용하는 가운데 주장 된다. 다만 산업 환경이 변화하면서 오늘날 동아시아의 국제 합작 경향은 조금씩 달라지는 중이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합작에서는 각본이나 캐스팅 등을 공동으로 진행하며 작품의 ‘창작’을 함께 하려는 기조가 강했다(단, 일본의 경우 < 박하사탕 >에서처럼 제작 투자 위주로 참여했다). 그리고 시장을 효과적으로 확장하기 위해 동아시아 관객 모두가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의 주제(< 적벽대전 >과 < 묵공 >에서와 같이 대개 역사적 사건)를 바탕으로 한 블록버스터 대작들이 주로 제작됐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 중국을 무대로 한 작품을 중심으로 한중 합작이 주로 이뤄졌고, 중국을 찾는 한국인 제작진들의 규모도 증가했으며, 후반 작업 단계까지도 합작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최근 2020년대에는 분위기가 달라져, 앞서 언급한 캐스팅, 각본 집필 등의 창작 과정을 함께 하지 않고, 장소 섭외와 같은 프로덕션 서비스만을 서로에게 제공하는 새로운 방식의 합작이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김수현 원구원은 한·중 합작 사례가 갈수록 드물어지고 있다는 부정적 현실을 전했다. 2016년, 사드무기체게(THAAD) 배치 문제로 한·중 간 지정학적 긴장 관계가 형성되면서 대부분의 합작 프로젝트는 취소되었다. 해당 분야에 투자되던 예산 역시 삭감되면서 2020년대까지도 한중 합작은 거의 성사되지 않고 있고, 최근 동아시아 내 합작은 주로 일본과 중국, 대만 간 진행된다. 액션! 대만 갱스터 영화의 부활과 한국 영화인·문화와의 연결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 조교수 팅 우 초) 팅 우 초(Ting Wu Cho) 교수는 이전부터 자신이 연구해왔던 ‘대만 펄프 영화(pulp film)’라는 주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대만 갱스터 영화가 한국영화와의 상호작용을 거쳐 2000년대 이후 부흥한 현상을 다뤘다. 이를 위해 1950~60년대 대만 고전영화를 비롯해 대만 내 영화산업의 발전, 지역문화, 그리고 지정학적 관계의 변화에 따른 영향까지 폭넓게 고려했다. 논의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개념으로는 냥유연(Long-liu-lian) 을 제안했는데, 중국어 방언의 한 종류인 복건어로 표현된 ‘낭유연’은 목적 없이 방랑하며 시간을 흘려 보내는 행태를 말한다. 그는 제작 자본의 투자와 시장 구조, 장르적 요소의 측면에서 불안정하고 혼종적인 성격을 지닌 대만 갱스터 영화 의 특성이 이 개념과 유사하다고 봤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대만 갱스터 영화 중 다수가, 타국의 영화산업과의 합작을 통해 액션연기를 수입하고 자국 관객의 취향에 맞게 변화시키면서, 작품의 장르와 자본 모두 초국가적이고 혼종적인 방식으로 구성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팅 우 초는 대만 갱스터 영화를 시간 순으로 세 종류로 구분했다. ‘방랑자’의 전형을 타고난 인물에 대한 구원 서사 가 중심이 되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작품들이 첫 순서다. 대만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범죄 및 갱스터 영화의 관습이 이들에게서부터 처음으로 발견되기 시작했다. 냥유연을 체화한 방랑자로서의 인물과 지역의 청년문화, 그리고 유행가 삽입을 통한 뮤직비디오와도 같은 연출이 눈에 띈다. 장르의 측면에서는 일본의 야쿠자 영화와 홍콩의 액션 영화가 모두 엿보인다. 그리고 제작 자본은 불안정하게 투입된 데다 당시 검열의 강도는 높았기에, 이 시기에 발표된 대만 갱스터 영화들 대다수는 상업적 흥행을 이루지 못했다. 계엄이 해제된 1990년대에는 대만 뉴웨이브 의 영향으로, < 비정성시 >(허우샤오셴, 1989),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에드워드 양, 1991), < 남국재견 >(허우샤오셴, 1996) 등 작가주의적 경향이 짙고 독특한 내러티브를 지닌 작품들이 갱스터 주제의 대만 펄프 영화 중 대다수를 이뤘다. 반면 세 번째 구간이라고 할 수 있는 2000년대 이후에는, 상업적 장르영화의 형식을 갖춘 작품들을 통해 갱스터 장르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 맹갑 >(유승택, 2010)과 같은 “ 대만 뉴 갱스터 필름 ”, 즉 1970~80년대 대만 펄프 영화의 특징에 청년들 간의 낭만주의적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상업성을 띠게 된 2000년대 이후 장르영화가 대중적 인기를 얻은 것이다. 같은 시기에 아시아 전역에 세계화 트렌드가 나타나기도 하면서, 대만의 최신 가요와 인기 배우 등에 대한 국제적 인지도가 향상됐고, 타국 영화산업 인력과의 영화 공동 각색 및 합작 역시 활성화될 수 있었다. 대만 갱스터 영화의 지역적 전통과 세계적인 영화 트렌드가 맞물린 지점이다. <맹갑> 포스터 / 사진: IMDb < 하이자오 7번지 >(위덕성, 2008)라는 멜로드라마가 흥행하면서, 대만의 지역적 특성이 대중적인 인기를 불러일으킬 잠재력을 지녔음이 재발견되고, 대만 영화산업의 십년 간의 침체가 극복되는 기회가 마련됐다. 이윽고 2010년에 개봉한 <맹갑>은 실제 야외 거리와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갱스터들을 묘사하는 등 초기(1970~80년대) 대만 갱스터 영화의 특징을 여럿 지니고 있다. 하지만 초국가적 협업 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초기의 형태와 차별화된다. 촬영과 프로덕션 디자인, 액션 연출 등의 주요 보직에 외국인 스태프를 많이 기용했다. 그리고 액션 자체도 정교하게 짜인 홍콩 스타일이 아니라 정제되지 않은 본능적 움직임이 돋보이도록 연출됐는데, < 올드보이 >(박찬욱, 2003)의 액션에서 영감을 받아 양길영 무술감독을 섭외한 후 배우들에게 액션 연기를 전수해주기를 요청하기도 했다. 양길영 감독의 지도를 바탕으로 작품에는 1분 28초에 달하는 싱글 테이크 액션신이 삽입될 수 있었고, 이 장면은 <올드보이>의 장도리 액션신에 대한 오마주이자 동시대 대만 액션 연출의 우수 사례로서 현재까지도 언급되고 있다. <맹갑>에서 양길영 감독이 참여한 사례를 기점으로 대만의 갱스터 영화의 액션 연출은 물론 각색, 투자 등 종합적 측면에서 한국 영화인들의 기여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는 대만의 상업영화 제작 기반이 다시금 다져지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일례로, 한국영화 < 남자가 사랑할 때 >(한동욱, 2013)를 대만의 문화와 관객 취향에 맞게 리메이크해 흥행한 < 맨 인 러브 >(은진호, 2021)를 들 수 있다. 연출을 맡은 대만 출신 감독 은진호는 이전에 대만 밴드 “EggplantEgg”의 뮤직비디오 연출을 맡았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해당 뮤직비디오에서 역시 청년 갱스터 문화를 반영하는 서사가 전개되며 음악과 잘 어우러져 “방랑자(Wanderer)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런 그는 <남자가 사랑할 때>를 대만의 관점에서 제작된 갱스터 영화로 리메이크하기 위해, 대만의 문화적 혼종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동남아시아 출신 노동자 인구가 집중돼 있거나 일본문화도 일부 관찰할 수 있는 지역을 배경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여기에 대만의 인기 가요까지 삽입하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성공적인 지역화 사례라는 평가를 받으며 본 작품으로 당해 대만 개봉작 중 최고 흥행 성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좌) 국내 원작 <남자가 사랑할 때> / (우) 대만 리메이크작 <맨 인 러브> (사진: ㈜사나이픽처스, IMDb ) 한편, <맹갑> 흥행 이후 해당 작품의 제작자는 대만의 소위 ‘지하세계’ 경험을 모티브로 또 다른 갱스터 영화 <가타오>를 제작했다. 이 작품 역시 인기를 얻자 제작자 장웨이인이 후속편을 제작하면서 시리즈에 대한 관심은 높아져갔다. 후속편 <가타오 2: 제왕의 부상>(2018)은 대만 뉴웨이브 작품에 자주 등장한 배우 겸 감독이자 과거 조폭집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고 알려져있던 옌정궈가 연출을 맡아 화제가 됐다. 가오제나 콜린 쩌우와 같은 유명 배우가 출연하기도 했으며, 한국의 홍의정 무술감독과도 협업했다. IP 활용 범위도 넓어져, 작품 관련 OTT 스트리밍과 주제가 발표, 라이브 콘서트를 기획하며 ‘가타오 유니버스’를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다음 편인 <가타오: 최후의 방랑자>(2021)에서는 한국 투자사와 타이베이 영화 기금 모두로부터 자본을 조달할 수 있었다. <가타오 2: 제왕의 부상> 포스터 / 사진: IMDb 결론적으로, 한국 영화인들의 전문성과 산업 구조 도입에 힘입어 형성된 대만의 뉴 갱스터 장르 는, 상업영화의 공식을 정립하고 이를 대만이라는 지역에 특화 하면서 대만 영화산업에 내재됐던 야심을 실현하는 장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은 또 다른 종류의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데, The Pigs, the Snake and the Pigeon (2023)이라는 작품이 대만영화로는 처음으로 중국 본토에서 대규모 흥행 성적을 거두며, 아시아 국가 간 협업을 통한 갱스터 장르의 색다른 변모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위 작품의 무술감독은 대만의 스턴트맨 출신이지만 <가타오> 시리즈에서 한국인 무술감독과 함께 작업한 이후 무술감독으로 성장했다. 또한 대만에서 가장 큰 규모의 멀티플렉스를 운영하는 비쇼시네마(Vieshow Cinema)의 대주주인 와닌국제비주얼엔터프라이즈(Wanin International Visual Enterprise)는 중국의 영화 제작 및 배급 업체 알리바바픽처스(Alibaba Pictures)와 계약을 맺어, 작품의 IP를 범중국어권에 수출하려는 의도를 내비쳤고, 추후 일본과 한국, 말레이시아와의 합작 가능성도 열어 뒀으며, 리메이크 작품 제작을 맡을 한국 지사까지 설립하기도 했다. 이렇게 다차원적으로 심화되기 시작한 아시아 국가 간의 영화 합작이 대만 영화계에도 생기를 불어넣을지, 혹은 대만의 갱스터 장르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게 되는 현상으로 이어질지를 주의 깊고도 흥미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팅 우 초는 설명했다. 포스트 정동 혹은 새로운 사후세계: <마약전쟁>과 <독전>을 통해 본 홍콩 누아르의 공명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 박은지) 박은지 연구원은 특정 시기에 한국을 찾아온 ‘ 홍콩영화 신드롬 ’의 특징을 바탕으로 < 마약전쟁 >(두기봉, 2012)과 이의 한국판 리메이크작 < 독전 >(이해영, 2018)을 비교하며, 한국영화 속 (포스트) 홍콩 누아르의 흔적 을 발견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 관객이 홍콩영화에 열렬히 반응한 일련의 현상을 일컫는 홍콩영화 신드롬은 특유의 감성과 에너지를 국내 영화계에 각인시켰으며, ‘문화적 기억’으로 회자될 만큼 영화문화 형성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국내 영화인들의 상상력까지 가미되어 여러 차례의 각색과 리메이크, 오마주가 나타나기도 했다. <독전>은 그러한 사례들 중에서도 상업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둠과 동시에 평단의 반응도 호의적이었던 작품이다. 반면, 놀랍게도 <마약전쟁>의 리메이크작이라는 이 작품 본연의 정체성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는 홍콩 반환 이후 제작된 영화들의 국내 수입량과 인지도가 크게 감소한 데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국내 수입된 홍콩영화 편수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연간 50~80편이라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지만 1997년부터 41편으로 급감했고, 2000년대에는 이내 한 자릿수까지 곤두박질치며 반환 이후 급속 냉각되고 있는 홍콩영화 시장의 현실을 드러냈다. 하지만 신드롬이 한창이던 시기, 한국영화는 홍콩영화 특유의 어둡고 강렬한 미학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이며 ‘홍콩 누아르’의 등장에 열광했다. 기록적인 흥행을 거둔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 시리즈에 이어, < 첩혈쌍웅 >(오우삼, 1989)과 < 천장지구 >(진목승, 1990), < 지존무상 >(왕정, 향화승, 1989) 등 범죄 및 갱스터 장르의 홍콩영화가 한국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며 홍콩 누아르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홍콩 누아르’라는 용어는 1991년에 『영화에 대하여 알고싶은 두세 가지 것들』에서 김홍준 원장이 처음 사용하며 이후 비평계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홍콩 누아르에 대한 국내 팬들의 열정이 거세졌고, 이전까지 이상적인 목표로 받아들여졌던 할리우드와 유럽영화로부터 벗어난 영역으로서, 한국 영화문화의 매력적인 대안으로 고려되기에 이르렀다. <첩혈쌍웅>, <지존무상> 중 (사진: MUBI , IMDb ) 박은지 연구원은 홍콩의 누아르와 액션을 한국영화만의 방식으로 수용 했다는 데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환이 일어난 1997년 즈음 홍콩에 스며든 우울함을, 민주화를 열망하던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재전유(reappropriation) 했다는 분석이다. 홍콩영화를 접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는 서울올림픽을 통해 본격적으로 세계화를 경험하는 한편, 1987년 민주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불완전한 정착에서 비롯된 감각 역시 이상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특히 충심과 형제애 등의 유교적 이상에 부합하지 않는 분위기로서의 “ 정동적 아노미(affective anomie) ”는 홍콩 누아르의 핵심적인 감수성으로 국내 관객에게 지각됐고, 파멸적이고 어두운, 울분의 폭발과 같은 키워드가 이 장르를 추동하는 감정으로 거론됐다. 박은지 연구원은 당시 한국사회의 정치적 불안정성의 영향으로 내면에 모종의 불안이 자리하게 된 국내 관객이, 선과 영웅주의 위주의 표면적 서사 이면에 있는 이러한 누아르적 감수성에 열광했을 가능성을 제안했다. 비슷한 시기에 영화잡지 《키노(KINO)》는 오우삼과 왕가위 등을 정전화하며 해당 장르를 작가주의적 관념과 연결해서 이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영화 감독들은 홍콩 누아르의 기묘한 매력에 이끌려 200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본 장르의 연장선상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홍콩 원작들에 대한 눈에 띄는 리메이크 시도들 역시 있었지만, 아쉽게도 많은 작품이 무산되거나 흥행에 실패했다. 반환 이후 홍콩에서 직접 제작된 누아르 영화들 자체가 국내 관객에게 소개되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었는데, 홍콩 누아르의 중심 인물인 두기봉 감독이 2000년대 연출한 역작 Breaking News , Election , PTU 등마저도 국내 대중에게 선보일 기회가 없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좌) 홍콩 원작 <마약전쟁> / 사진: IMDb (© 2013 - Variance Films) (우) 국내 리메이크작 <독전> 중 / 사진: ㈜용필름 와중에 <독전>이 흥행에 성공하며 원작 <마약전쟁>에 대한 관심도 불러일으킨 점이 흥미롭다. 두 작품은 줄거리는 같지만 스타일과 톤,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이를 통해 <마약전쟁>은 전형적인 홍콩 누아르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작품으로 국내 관객에게 인식될 수 있었다. 영화는 두기봉 감독이 연출한 첫 홍콩-중국 본토 합작 영화로, 홍콩 마약 카르텔의 브로커 티미(Timmy)가 사형을 면하기 위해 마약 경찰 장(Zhang)과 공조한다는 설정으로 언더커버 범죄 스릴러의 흔한 관습을 따르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티미의 배신이 가져온 범죄 조직의 붕괴로 초점을 옮겨가고, 경찰 조직이 참혹하게 파괴되며 마무리된다. 치밀하게 탈출을 계획하는 티미와 마약 카르텔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장은 각자의 목표를 향한 굳은 결심을 지닌 채 극명하게 대립한다. 반면, <독전>은 경찰 원호( 조진웅 )와 락( 류준열 ) 사이의 정서적 긴장을 강조하고, 두 인물 간 경쟁 관계를 점차 심화시킨다. 그리고 자기 존립과 배신을 원동력으로 움직여 윤리적 측면에서 모호한 위치에 있던 <마약전쟁>의 티미와 달리, 락은 마약 조직 내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로서 경찰의 수사를 도우면서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인물로 상정된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인물 설정은 홍콩 누아르의 특징을 공유하는 한국형 범죄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며, ‘ 속죄를 통해 회복된 영웅적 행동 ’의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원작 <마약전쟁>은 국가 간 합작으로 탄생한 동시대 홍콩 누아르에 그치지만, 리메이크작 <독전>에서는 남성 인물들이 차츰 동료애를 형성함과 더불어 서로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주고받는 와중에, 극단적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카르텔의 착취 구조를 배경으로 그에 대한 사회적 응징의 아이디어도 제시한다. 원호와 락은 마약 카르텔의 폭력에 어머니를 잃은 락의 사연, 그리고 그 카르텔에 대한 수사에 공조하려는 의지를 매개로 잠시나마 연대하고, 이로써 경찰과 범죄 조직원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이후 경찰 원호는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개인의 실행을 중심으로 ‘정의’의 개념을 재구성하고, 락은 무자비한 착취를 기반으로 이익을 창출해온 브라이언의 신체를 훼손해 흔적을 남기며 사적 응징을 완수한다. 두 인물은 이윽고 서로를 총으로 겨눈 채 마지막 장면에서 마주하는데, 한때 감정적으로 결속했지만 극중 사건 이후 멀어진 둘 사이에 모호한 연대와 상호 환멸의 분위기가 감돈다. 박은지 연구원은 <독전>의 이와 같은 차별화된 서사와 감정들이, 홍콩영화 신드롬이 정착시킨 ‘농도 짙은 감정’의 범죄물을 한국 조폭영화의 관점에서 이해한 결과 라고 설명한다. 창작자의 시네필적 면모와 장르의 혼종이 작용하면서, 홍콩 누아르와 한국형 범죄영화의 특징들을 반영함과 동시에 전복하기도 하는 독창적인 리메이크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 토론 * 홍콩 침례대학교 영화과 조교수 도로시 와이 심 라우(Dorothy Wai Sim Lau)가 패널 3 발표자 4인의 연구 내용을 요약하고 아래와 같이 질문했으며, 발표자들이 답했다. Q. 김수현 교수에게 (질문1) 시대별로 한국과 중국이 처해있는 외교적 상황에 따라 합작 양상이 달라진다고 설명해주셨다. 그렇다면 <제3의 사랑> 제작 당시 한·중 간 정치·사회적 관계 는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답변) <제3의 사랑>이 제직됐던 2010년부터 2015년 사이, 한국 정부는 영화산업에서의 합작에 호의적이었고 관련 절차가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되기도 했다. 이에 힘입어 본 작품의 감독과 촬영감독, 음악감독을 비롯한 여러 스태프 역시 작업을 위해 한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했지만, 발표 중 이야기했듯이 중국 제작진의 개입과 지정학적 불안정성 등으로 인해 충분한 창작 권리를 획득하지 못했다. (질문2) 중국의 제5세대 감독들에게서 나타난 작가주의적 특색과 달리, 블록버스터 < 유랑지구(The Wandering Earth) >와 같은 작품은 국가 권력에 기반한 창작(national authorship)과 국가적 브랜딩이 눈에 띈다고 발표 중에 말씀하셨다. 후자의 ‘ 국가 권력에 기반한 창작 ’이 무엇일지 보다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답변) 물론 장이머우와 천카이거 감독과 같은 이들은 한국의 봉준호 와 박찬욱 감독처럼,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통해 작가주의 감독으로서의 지위를 오랜 기간 인정 받아왔다. 하지만 이들이 속한 제5세대 이후에 등장한 주선율영화(1990년대 중국에서 개혁·개방이 이뤄진 후 사회주의와 애국주의 등의 중국사회 주류 이념을 교육 및 선전할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의 종류)와 같은 장르에서는 작가주의에 관한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는 중국 정부가 추구하는 가치관과 비전이 관객 선전을 목적으로 하여 주입돼 있다. 따라서 감독이나 스태프 개인의 개성을 중심으로 한 작가주의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국가 권력과 이념을 기반으로 ‘중국영화’라고 이름 짓는 행위 자체만이 의미를 갖게 된다 는 점에서 제5세대 감독들의 활동과는 맥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겠다. Q. 팅 우 초 교수에게 (질문) 중국과 홍콩에서 비롯된 액션 스타일과, <맹갑>에 도입된 한국식 액션 스타일의 차이점을 설명해줄 수 있는가? (답변) 홍콩의 액션은 중국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아, 각기 다른 그룹이 터득한 기술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연출돼 있다. 한국의 영화인들은 이와 같은 홍콩식 액션을 받아들이되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응용 했는데, 카메라 앵글에 맞춘 인위적 동작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움직임을 가미 했다는 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Q. 박은지 연구원에게 (질문) 발표에서도 언급해주신 홍콩 누아르의 ‘정동’적 측면이 동아시아 국가의 리메이크작을 통해 표현 될 때 주로 어떤 특징이 나타난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다. (답변) 이번 발표를 위해 진행한 <독전>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말씀드리자면, 먼저 정동적 모티프로부터 영향에 따라 범죄자와 경찰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는 설정 이 있다. 이는 남성들 간의 연대에 기반한, 매우 불안정하고 양가적인 감정에서 비롯된다. 다른 하나는 ‘ 상호반영적 페르소나(mirroring persona) ’의 발견이다. 한국 범죄 스릴러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으로, 두 남성 인물이 서로를 응시하면서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상대의 모습을 자신의 정체성에 투영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패널 4> 한·홍 합작의 재해석 특정 영화인이나 작품의 사례를 인용해 한국과 홍콩 간 영화 합작이 일어난 역사를 돌아보고, 눈 여겨 볼 만한 몇 가지 대목을 자세히 살펴봤다.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서 새로운 시대를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 영화를 통한 두 국가의 협력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제언도 이어졌으며, 패널 발표 전반은 홍콩 침례대 케니 응 교수가 이끌었다. 호금전의 한국 산악영화에 대한 재평가 (영화사가 · 독립 연구자 스테판 테오) 1970년대 한국영화는 홍콩과 대만과의 합작을 여러 번 시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Destination South Korea”와 같은 현상으로 일컬을 만큼 합작 영화의 주 촬영지로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 스테판 테오(Stephen Teo)는 그중에서도 < 사문의 승객 >(1979)과 < 산중전기 >(1979)에 집중해, 한·홍 합작의 로케이션으로 한국의 산세가 선택된 맥락과 함께 각 작품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었다. 그는 한국의 산속에 자리한 전통적 양식의 건축물과 사찰, 주변의 절경이 두 작품의 핵심적인 미적 요소로 기능했고, 배경이 되는 전근대 중국(historical china)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어줬다고 말했다. 모든 장면이 인위적인 세트나 스튜디오를 이용하지 않고 실존하는 장소에서 있는 그대로 촬영된 점도 특별하다. 스테판 테오는 ‘문화적 냉전(cultural cold war)’이 이어지던 1970년대 중·후반 중국어권과 한국의 영화 합작이 선호되는 환경이 마련됐고, 두 편의 작품 역시 그 결과물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당시 중국은 문화혁명의 잔재로부터 벗어난 직후였기에 정치와 사회 전반이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무협을 비롯해 귀신, 종교, 미신 등(신이나 요괴, 초자연적 현상을 다루는 중국영화의 한 장르로 ‘신괴’로도 일컬어진다)이 개입한 장르나 서사의 유통도 금지돼 있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영화 촬영지로서, 감독 호금전이 의도한 장르를 시도할 ‘자유’를 선사 했다고 봤다. 한국과 홍콩, 대만이 영화 제작 측면에서 ‘ 자유에 기반한 네트워크(freedom nexus) ’를 구축하며, 중국 본토에서의 정치, 사회, 문화적 제약으로 인해 수용되기 어려운 작품들이 제작되는 환경으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지정학적 상황도 변화했기에 위와 같은 맥락은 작품의 가치를 뒷받침하기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대신 그는 한국이 ‘문화적 중국’으로 재현됐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합작의 의의와 효과를 설명했다. 유교학자 뚜웨이밍(Tu Wei-ming)이 제안한 개념인 ‘문화적 중국’은 중국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지역으로 구성된 국제적 공동체를 가리키며, 중국 본토와 홍콩, 대만을 포함해 전 세계의 중국어권 디아스포라 지역도 해당된다. 그중에서도 홍콩은 ‘문화적 중국’의 기조로 기획된 영화를 한국과 합작했고, 호금전의 위 두 작품에서 한국이라는 배경이 ‘문화적 중국’을 재현하는 데 효과적임이 입증됐다고 그는 평가했다. 호금전이 한 인터뷰에서 답변한 내용에 따르면,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과 몇몇 자연 경관으로부터 중국과의 문화적 유사성을 발견한 경험을 계기로 두 작품을 한국에서 촬영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두 국가는 유교와 불교와 연관된 의식이나 생활 양식을 오랜 시간 공유해왔다. 같은 맥락에서, 홍콩의 영화 제작진들 역시 중국과의 교류가 단절된 문화적 냉전 시기, ‘문화적 중국’을 재현할 수 있는 대안적 공간으로 한국을 택해 합작을 시도했다는 주장이다. <산중전기> 중 / 사진: IMDb( 1 , 2 ) 한편, 아시아 문화권에서 공유되어온 동양 철학의 개념이 작품 속 주제의식의 동력이 된 점도 눈에 띈다. 도가적 사상에서 비롯된 장자의 ‘소요유’는 『장자』 제1편에 등장하는 용어로,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정신적 경지를 뜻한다. 사물과 세상에 구속 받지 않고 광막한 공간에서 누리는 절대적인 자유이자 참된 행복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이는 호금전의 작품의 모티프로 자주 등장한다. <사문의 승객>과 <산중전기>에서도 인물들은 계속 걷는다. 단순히 땅 위를 걷는 것뿐만 아니라 적을 쫓아 뛰고, 몇몇 액션신은 공중에서 펼쳐지며 ‘하늘에서 걷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스테판 테오는 소요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의 감각을 포착한 호금전이, 이를 인물의 다양한 움직임들(걷기, 뛰기, 공중에서 활동하기)로 작품 속에서 실현 하고 있다면서, 배경이 된 한국의 자연경관 역시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관점에서 ‘소요유’ 개념에 기반하고 있는 두 작품은 그 개념의 특성에 따라 존재와 시간의 ‘실존’을 지지하게 된다. 한편 호금전은 일종의 방랑자로서, 당시 중국사회의 제한적 환경에서 벗어나 한국이라는 대안적 공간에서 예술적 자유를 발휘해 창작한 작품으로 소요유 개념을 시각화했다고 덧붙였다. 무사, 스파이, 그리고 쿵푸 마스터: 정창화 감독과 초국가적 영화 제작자의 탄생 (홍콩 시티대학교 창의미디어학부 조교수 이상준) 이상준 교수는 그간 학술적으로 분석된 적이 드문 정창화 감독에 대한 예비적 수준의 연구로서 1960~70년대 한국과 홍콩에서 그가 지나온 연출 여정을 들여다봤다. 감독으로 데뷔한 1953년부터 1977년까지 그는 50여 편에 달하는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국내는 물론 홍콩에서도 합작영화 제작의 주역으로서 크게 활약했다.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가 마련한 회고전을 계기로 그의 연출작이 지닌 영화사적 가치가 국내에서 재발견되기 시작했고, 당시 회고전에서는 쇼브라더스와 골든하베스트와 작업한 한·홍 합작영화 9편이 상영됐다. 여러 국가를 오가며 활동하는 아시아 영화인들은 ‘내셔널 시네마’라는 프레임에 부합하지않는다는 이유로 과거 연구의 대상으로 쉽사리 선정되지 못했다. 현재는 이런 편협한 경향성이 사라지긴 했지만, 정창화 감독이 활동하던 당시만 해도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지녔거나 초국가적 작업에 참여하는 감독과 촬영감독, 배우 등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정창화 감독은 활동 초기부터 여러 장르에 걸쳐 왕성화게 활동했다. 1965년부터 3년간 멜로드라마, 청춘, 무협 등의 장르영화 15편(< 황혼의 검객 > 등)을 한국에서 연출했고, 1968년에 쇼브라더스와의 협업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6.25 전쟁 이후로 중국어 문화권의 제작사 두 곳(쇼브라더스, 골든하베스트)과 공식적으로 협업하며 높은 흥행 수익을 올린 최초의 한국인 감독으로 거듭났다. (물론 그가 쇼브라더스와 초반에 합작한 다섯 편은 제목과 감독의 이름을 사실과는 다르게 명시한 ‘위장 합작(counterfeit coproduction)’에 해당한다.) 그리고 많은 한국인 배우와 촬영감독, 무술감독과 같은 제작 인력이 그의 활동을 계기로 홍콩으로 넘어와 본격적으로 합작에 합류하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제작 파트너가 골든하베스트로 바뀐 뒤에는, 그는 제작사 산하에서 본인이 직접 운영하는 별도의 전속 스튜디오를 설립해 한국은 물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제작사들과도 활발히 합작하기도 했다. 다만 그가 홍콩에서 제작했지만 한국에서 공개한, 앞서 언급된 ‘위장 합작’ 작품들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터라, 홍콩에서의 그의 활동이 학술적으로 면밀히 분석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낳고 말았다. 국내의 많은 영화사 연구자들은 그 작품들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거나, ‘탈국적(denationalized)’ 활동의 결과물 또는 한국영화사의 ‘비공식적 일화’ 정도로만 평가했다. 이는 홍콩영화사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 철인(죽음의 다섯손가락) >(1972)이 ‘컬트적 고전(classic)’으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역시 그를 ‘작가’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이상준 교수는 이와 관련해 2008년에 홍콩의 영화 연구자 웡 아인 린(Won Ain-ling)과 대화하며 접한 설명을 인용했다. 웡 아인린에 따르면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홍콩영화’의 정체성 구성이 간절해진 상황에서, 홍콩을 상징하는 무협 장르의 영화에 한국과 일본 출신의 영화인들이 관계되어있다는 사실이 홍콩의 영화인들을 약간은 불편하게 했을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주자(Emigré)와 망명자(Exiled)와 같은 디아스포라 영화인들은 초국가적 영화사 형성의 핵심 동력이라는 점에서 ‘내셔널 시네마’의 영역에 편입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활동이 망각돼서는 안된다고 이상준 교수는 주장한다. 영화와 사람, 문화적 움직임, 협업, 공간 등이 여러 국가에 걸쳐 조직될 수 있다는 ‘초국가적 관점’ 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정창화 감독은 1960~70년대 한국과 중국어권 간의 영화적 교류를 중개한 이로 상정된다. 그는 정치적 상황이 불안하고 정부 개입도 심각했던 당대 한국영화계에 쿵푸영화의 매력을 제시했고, 새로운 합작 파트너로서 동남아시아권의 인력을 소개하는 참신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상준 교수는 관련해 정창화 감독이 한국에서 홍콩으로 제작의 근거지를 옮기고 초반에 발생한, 쇼브라더스와의 합작 사례를 더욱 자세히 설명했다. 그가 < 망향 >(1958)을 통해 홍콩과의 합작을 처음으로 시도한 이후 < 조용한 이별 >(1967)과 < 비련 >(1967)을 제작했지만 홍콩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1960년대 한국의 대표적 첩보 스릴러로 손꼽히는 < 순간은 영원히 >(1966)의 흥행 성적은 비교적 준수했다. 설립자 런런쇼의 관심을 끄는 데도 성공해 1968년, 쇼브라더스와 5년간의 계약을 체결하게 되기도 했다. 정창화 감독은 (당시 기준) 동시대적 설정을 바탕으로 ‘현대 액션 영화’를 구현할 줄 알았기에 자신이 섭외됐을 것 이라고 추정했다. 이때까지 홍콩은 사극 기반의 무협 장르가 액션 영화의 중심이 되어 현대적 액션 연출 경험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쇼브라더스에서는 일본 출신 감독, 촬영감독, 작곡가, 안무가 등이 상당수 활동 중이었으며, 정창화 감독이 입성한 이후 성훈, 임지은, 남석훈 등의 한국 배우들의 합류도 앞두고 있었다. 당대 여느 제작사보다 국제적으로 조직이 구성되었던 업체라고 할 수 있다. 쇼브라더스의 국제 교류 역량에 힘입어 정창화 감독이 해당 제작사 안에서 처음으로 연출한 작품은 < 천면마녀 >(1969)로, 홍콩에서 007 시리즈가 유행하던 중 그와 같은 형식으로 제작된 여성 주연의 액션 영화다. 두 명의 조감독과 배우 한 명(성훈)은 한국인으로, 세 명의 핵심 스태프는 일본인으로 기용하며 동아시아 출신의 인력들이 어우러졌다. 크게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적정 수준의 상업적 이익을 달성하며 유럽 영화계에 진출한 최초의 쇼브라더스 제작 작품이라는 수식어를 얻게 됐다. 그 사이 호금전의 <대취협>(1966)이 홍콩 박스 오피스에서 신기록을 세우고 아시아 전반에 무협 장르 붐을 일으키면서 쇼브라더스의 제작 기조도 무협 장르 쪽으로 기울었다. 이후 정창화 감독 역시 시장의 수요를 의식해 한국에서 <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 > 등 ‘국내 무협영화’를 연출한 데 이어 쇼브라더스에서도 중국어권 출신이 아닌 감독으로서는 최초로, 사극 무협 기반의 작품들을 연출했다. 그는 쇼브라더스의 무협 액션 스타일에 반일 감수성을 결합하고, 미국의 웨스턴 장르도 일부 차용했으며, < 강호여협 >(1970)과 < 아랑곡의 혈투 >(1970)와 같은 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아랑곡의 혈투>가 긴박하고 현실적이면서도 효율적으로 연출된 전투 장면들로 볼 때 1960년대 만주리안 웨스턴 장르의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천면마녀>, <아랑곡의 혈투>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다만 이상준 교수에 따르면, 정창화 감독은 무협 장르의 붐에 다소 늦게 반응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쇼브라더스와 계약하고 본격적으로 무협 장르 연출을 시도했던 1970년대 초반은 쇼브라더스의 무협 제작 열기가 식고 홍콩영화가 ‘쿵푸’라는 물결을 마주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보다 현대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노동 계급의 이야기, 그리고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맨손 쿵푸 액션은 홍콩영화의 새로운 흥행 공식으로 자리매김했고, 골든하베스트(Golden Harvest)라는 제작사의 설립 및 운영의 주된 목표가 됐다. 정창화 감독은 이 트렌드를 재빠르게 수용해 1972년에 <철인(죽음의 다섯손가락)>을 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연출한 쿵푸영화였지만 한국에서 제작했던 전작들과 유사하게 반일 감정을 모티프로 한 서사가 중심이 됐다. 다만 작품 개봉 직후에는 홍콩 내에서 흥행에 실패한 듯 보였고, 쇼브라더스의 새로운 인력과의 의견 불일치 등의 문제도 겹쳐 정창화 감독은 같은 해에 골든하베스트로 이직한다. 하지만 1973년 작품은 미국 박스 오피스 흥행 1위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1970년대 초반 홍콩영화의 국제적 영향력을 입증했다. 골든하베스트는 할리우드와 같이 수직적으로 통합된 구조를 추구하며 유연한 제작 체계역시 갖춘 기업이었다. 정창화 감독은 이곳에서 < 흑야괴객 >(1973), < 흑무사 >(1974), < 황비 >(1974), < 심판자 >(1976)를 연출했고, 다양한 장소를 로케이션으로 삼는 골든하베스트의 방침에 따라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만, 한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들에서 촬영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작품 < 충열도(파계) >(1977)가 개봉하자, 그는 갑작스럽게 홍콩을 떠났다. (정창화 감독은 당시 “홍콩영화 발전에 기여하신 만큼 한국영화의 발전에도 기여해줬으면 한다”라는 부탁을 문화공보부로부터 받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 즈음 국내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 이후 전두환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있어 정치 상황이 매우 불안정했다. 귀국 후 정창화 감독은 스스로 제작사 화풍흥업을 설립해 1980년대 중에는 국내에서 제작자로 활동했고, 이를 계기로 영화 연출에서 은퇴한 그는 1996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상준 교수는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정창화 감독 회고전 프로그램의 코디네이터로 활동한 조영정을 인용하며, “액션영화의 선구자로서 이 장르를 한국에 소개하고 발전시킨 그가 다채로운 이력에도 불구하고 심도 깊은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라는 점에 아쉬움을 표했다. 그리고 발표 당시 컨퍼런스에 함께 하며 기조연설을 맡기도 했던 연구자 크리스 베리(Chriss Berry)의 말처럼, “영화를 통한 한국과 중국 간의 연결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민족성(ethnicity)과 유사한 ‘국민국가(nation-state)’ 개념에 기반하지 않고, 개별적인 초국가적 프로젝트들에 의해 더욱 구체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관련된 학술적 논의가 이어지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기도 했다. 하나의 냉전에서 또 다른 냉전으로: 한·홍 합작의 과거로 미래를 살펴보기 (홍콩필름아카이브 소속 영화평론가 샘 호) 샘 호(Sam Ho)는 이틀 간의 컨퍼런스를 마무리하는 순서에 걸맞게, 한·홍 합작의 과거를 지나 그로부터 역동적으로 변화한 결과로서의 현재를 개괄하고, 이를 바탕으로 양국 간 영화 협업의 미래를 조망했다. 그는 동시대 사회가 유례 없는 새로운 질서 를 마주함과 동시에, 그와는 정반대의 가치를 추구하는 국제사회의 냉전 상황 역시 목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이번 컨퍼런스의 목표가 더욱 뜻깊은데, 두 국가로부터 비롯된 영화적 움직임들이 갈라지면서도 합쳐지는 대목들을 다루고 있어, 모순되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는 오늘날의 역사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지난 150년의 역사만 보더라도, 아시아는 외부의 오랜 침략과 억압으로 인해 깊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만큼 고통으로부터 교훈과 깨달음을 얻어 현재와 미래를 가꾸려는 의지가 돋보인다고 샘 호는 말했다. 따라서 아시아는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는 와중에 지정학적 권력의 중심으로 피할 수 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는 동시대 상황 속에서, 지금까지의 역사를 통해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그 권력의 중심지를 조정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려면 마주하게 되는 사건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을 짚어야 하는데, 개인이 모든 맥락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여러 연구자가 관점을 공유하는 이번 컨퍼런스와 같은 자리가 자주 마련되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그가 한·홍 합작 역사를 읽는 방법으로 추천한 바는 이렇다. < 이국정원 >(전창근, 도광계, 와카스기 미쓰오, 1957)을 기점으로 합작이 시작된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를 그는 홍콩영화의 제1 황금기라고 보는데, 좌익(left-wing)과 우익(right-wing) 진영의 제작사들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며 홍콩영화 발전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홍콩영화의 두 진영은 당시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으며, 샘 호에 따르면 오히려 긴밀히 연결된 채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찾아온 냉전 체제에도 불구하고 다극적인(multi-polar) 영화산업을 구축해나갔다. 여러 작품에 걸쳐 홍콩과 합작한 한국인 정창화 감독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그의 작품을 처음으로 관람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과거 홍콩국제영화제에서 2000년대 초반의 독창적인 한국영화들을 관람하고 완전히 매료된 그는 해당 작품들 이전의 한국영화사가 궁금했고, 홍콩필름아카이브의 지원으로 한국에 방문해 한국고전영화를 연구하는 기회를 얻은 바 있다. 정창화 감독을 비롯해 홍콩과 합작한 여러 한국영화인들의 활동 역시 이러한 연구의 의지를 다지도록 해줬다. 그는 그러면서 한국과 홍콩의 합작이, 동아시아의 문화와 가치를 통합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양국이 공유하게 된 경험 이고, 결과적으로 두 국가의 영화적 전형에서 벗어난 새로운 무언가가 창작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그는 홍콩필름아카이브의 여정을 홍콩영화사와 연결 지어 돌아봤다. 홍콩은 자국 내 영화산업도 활성화된 상태였지만 영화 미학의 측면에서도 기여한 바가 큰 반면, 타국에 비해 필름아카이브를 상당히 늦게 설립했다(1990년대). 그래서 소장자료의 규모 역시 상대적으로 작은 편인데, 그럼에도 아카이브로서 사업을 개척하고 학계와 유기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샘 호는 그 비결이 영화 연구에 미치는 지정학적 영향력을 수용하면서도 아카이브 고유의 임무에 충실한 연구를 병행 했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 영화 연구의 성과를 측정하는 기준은 아직까지 상당 부분 서구 문화권의 기준을 따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하거나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은 연구 주제는 여전히 “저명한 지면”, 즉 서구의 주도 아래 발행되는 지면을 통해 공개되기 어렵다. 샘 호는 이를 비판하기보다, 지정학적 영향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회 속 불가피한 현실임을 인정한다. 따라서 그는 필름아카이브의 연구 업무를 수행하는 자로서 영화학계의 여론을 지배하는 서구 문화권의 가치관에 근접한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만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더라도, 필름아카이브만이 파고들고 매진할 수 있는 주제로 연구하는 이들을 지원 하기도 한다. 아시아 영화인 1인의 필모그래피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저서를 집필하는 등, 주류 학계의 틈새를 메우는 이들의 유의미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샘 호는, 자신을 포함해 과거와 현재를 면밀하고 꾸준하게 연구하려는 의지를 지닌 아카이브의 일원들이 있기에, 홍콩영화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으리라고 내다봤다. * 토론 * 패널 3과 4의 발표자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청중이 질문을 던지거나, 발표자들이 서로의 주제와 관련해 궁금했던 점을 문의하고 답변했다. Q. (청중) 이상준 교수에게 (질문) 정창화 감독은 홍콩에서 영화를 제작할 당시,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에 더욱 영향을 받았는지 , 혹은 홍콩 영화산업과 연출 방식에 동화된 상태였을지가 알고 싶다. (답변) 그의 자기 정체성 인식이 작품을 통해 명확히 나타나지는 않는다. 다만 처음 쇼브라더스를 통해 홍콩에 진출했을 당시, 그는 제작사와의 계약에 의해 섭외된 여러 외국인 감독 중 하나였다. 따라서 각본에 개입하지도 않았고, 작품 자체를 통제할 권한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연출 방식(액션 동작과 인물 설정, 반일 감정에 관한 요소 등)만큼은 당대 쇼브라더스에서 제작된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됐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골든하베스트 에서의 필모그래피는 달랐다. 이곳에서는 그가 창작에 관해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더욱 확대 됐고, 한국 출신 인력을 도입할 여건도 형성되어 쇼브라더스에 비해 훨씬 많은 ‘합작’ 작품이 제작될 수 있었다. 그래서 본인은 개인적으로 그가 골든하베스트에서 작업할 당시 연출한 작품들을 선호한다. 물론 작품의 가치를 기준으로 평가한 것은 전혀 아니며,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말씀드렸다는 점 참고 부탁드린다. Q. 샘 호 평론가 (질문) 일레인 정이 발표한 ‘부드러운 남성성’은, 중국의 유교적 가치관으로부터 파생된 이미지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래 전부터 유래된 유교 사상에 입각해, 중국에서는 학문에 정진하는 ‘학자’로서의 태도 가 남성의 이상적 이미지를 구성하는 조건이 된다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유교적 남성상은 점차 변화를 겪어 ‘신체적 강인함’을 수련하려는 태도도 강조 된 바 있다. 그럼에도 중국에서는 학문 수양을 중심으로 한 전자의 ‘부드러운 남성성’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지 궁금하다. (답변: 김수현 교수) 대부분의 각본을 남성이 집필하는 한국‘영화’ 의 경우, 신체적으로 강인하고 마초적인 남성성을 형상화하는 작품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반면 한국‘드라마’ 작품들은(특히 멜로드라마 장르가) 여성 작가에 의해 주로 집필되곤 한다. 그리고 이들이 그린 남성 인물의 이미지는 작가의 주관이 반영된, 이상적이면서도 무척 비현실적인 요소들이 집합함으로써 탄생하기에, 한국드라마가 설정한 남성 이미지는 현실 사회에서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리하면, 한국 영상 콘텐츠를 통해 남성성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영화와 드라마에 각기 다른 양태로 형성되어있는 젠더 및 섹슈얼리티 구분 현상 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본다.
현재 북미 애니메이션 업계는 지각변동 중이다. 잘 나가던 디즈니, 픽사, 드림웍스 3강의 위상이 흔들리는 가운데 중소 스튜디오들의 뚜렷한 성장세가 눈에 띈다. 소니 픽쳐스는 < 하늘에서 음식이 내리면 >와 < 몬스터호텔 >을 흥행시키며 입지를 다졌고, 명실상부한 업계 3인자 블루스카이스튜디오는 신작 < 에픽 >을 선보이며 나름 순조로운 성과를 이어가고 있다. 최고의 한해를 맞이한 일루미네이션 엔터테인먼트도 빼놓을 수 없다. 2010년 창립작 < 슈퍼 배드 >로 전미 박스오피스 9위라는 기염을 토했던 이 신인답지 않은 제작사는 올해 < 슈퍼 배드 2 >로 픽사의 야심작 < 몬스터 대학교 >마저 누르며 명실상부한 승자로 등극했다. 반면 기존 3강의 성적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가장 위기에 봉착한 건 드림웍스인데 < 가디언즈 >의 흥행 참패 후 오랫동안 함께 했던 파라마운트와 결별했다. 다행히 폭스와 손을 잡으며 재기를 노렸던 <크루즈 패밀리>가 전 세계 5억불을 넘어서며 평균 이상의 흥행을 기록했지만, 이어진 < 터보 >의 참패로(전 세계 1억 3천만불) 여전히 악몽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하반기 개봉을 앞두고 있는 <드래곤 길들이기 2>에 남은 기대를 걸어 본들 이미 애니메이터를 대량으로 해고해야 할 만큼 자존심을 구긴 지 오래다. 디즈니와 픽사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하지만 < 카2 >, < 메리다와 마법의 숲 > 등 왕년의 왕자의 명성에 다소 못 미치는 작품들로 아쉬움을 더한다. 2006년 디즈니와 픽사의 합병 이후 승승장구 할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서로의 장점을 갈아먹는 쪽으로 결합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일은 디즈니와 픽사가 합쳐진 시점부터 업계 전반의 평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단 점이다. < 토이 스토리 >로 일대 혁신을 일으키며 단번에 부상했던 픽사는 기발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혁신에 가치를 두고 있었다. 디즈니의 셸 애니메이션에 대항하여 3D 애니메이션으로 시장 흐름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 보수적인 동화를 고집하던 디즈니 클래식을 넘어서는 젊고 유쾌한 감각으로 포스트 디즈니 시대, 즉 3강 시대를 열었다. 디즈니를 뛰어넘으려는 픽사의 도전정신, 디즈니에 저항하며 반대의 길을 걸으려는 드림웍스의 반골정신, 그리고 시대에 발 맞춰 무거운 엉덩이를 들며 변화를 꾀한 디즈니의 아성은 2000년 초중반 북미 애니메이션의 중요한 패러다임이었다. 3사의 작품들은 각각 나름의 개성이 뚜렷했고 관객들은 작품만큼 이들 제작사의 브랜드를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최근 3사의 뚜렷한 개성이 점점 희미해지며 이 같은 3자 구도 역시 함께 무너지고 있는 모양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작은 신생 제작사들에겐 좋은 기회였다. 신생이라고는 하지만 디즈니가 애니메이터들을 전부 독점 관리하고 있을 때와는 업계 환경이 달랐다. 애니메이터의 개별적인 역량에 상당 부분 영향을 받는 셸 애니메이션에 비해 3D 애니메이션의 기술적 환경은 이미 어느 정도 평준화 되어있었다. 3D라는 기술이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실상 디즈니 바깥에서 생겨난 흐름이기 때문이었다. 3D 애니메이션 시장에서는 애니메이터들 간의 이동도 예전에 비해 자유로워졌고 축적된 기술력이 고스란히 다른 제작사로 이동하기도 한다. 투자자본 역시 이에 맞춰 유동적으로 지원 중인데 현재는 크게 디즈니와 폭스가 경쟁하고 있는 구도다. 덕분에 이젠 제작사가 달라도 관객들이 작품의 질적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할 정도로 엇비슷한 수준까지 평준화되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애니메이션이 전체 시장을 두고 작품 별로 여러 프로젝트 그룹이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지금 북미 애니메이션 업계는 현재 역사의 분기에 서 있다. 디즈니 절대 왕정이 끝나고 들어선 디즈니, 픽사, 드림웍스의 삼국 시대가 저물고 여러 제작사들이 겨루는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제작사간 구분이 큰 의미 없고 개별 작품의 완성도로 평가받는, 절대 강자 없는 난세다. 혼란스런 시대는 영웅을 부르는 법. 픽사가 3D 애니메이션 시대를 연 것처럼 새로운 영웅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인가. 매 작품 긴장을 늦을 수 없는 스튜디오들은 괴롭겠지만 관객 입장에선 흥미진진하다.
박근혜 씨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씨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요즘 종종 어른들로부터 박정희 씨가 대통령이 되었던 1963년 10월에 대해서 어제 일처럼 이야기를 듣는다. 물론 그로부터 2년 전 5월 16일 군사 쿠데타가 있던 날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지금 이 글을 2013년 겨울이 끝나고 밤과 낮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에 쓰고 있다. 말하자면 50년 전의 일. 박정희라는 이름은 당신에게 얼마나 멀리 있는 이름인가, 혹은 가까이 있는 이름인가. 나는 유령을 호명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너무 가까이 있는 이름, 멀리 떠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응답하는 이름, 그래서 오늘밤 다시 나타난 이름에 대해서 먼저 생각한다. 임권택 의 < 망부석 >은 그 해에 만들어졌다. 부디 오해하지 말 것. 나는 여기서 역사의 감각이라는 문제를 꺼내들 생각이다. 그런 다음 당신을 1963년에 데려다 놓고 싶다. 그때 조선시대는 얼마나 가까이 있었을까, 혹은 멀리 있었을까. 감각의 원근법. 1392년 태조 이성계로 시작하여 1910년 순종까지 23명의 왕조를 거쳐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로 끝난 역사. 그때 사람들은 일제 강점하를 살면서 자신들을 조선 왕조의 신민이라고 생각했으며 대한민국의 국민이라고는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시대가 끝난 다음 한반도의 백성들은 단 한 번도 대한민국에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의 무조건적인 항복 이후에서야 비로소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전체의 삶은 너무 짧았다. 시작하자마자 한반도는 절반으로 나뉘었고 그런 다음 한국전쟁이 이어졌다. 전쟁은 휴전으로 끝났고 우리는 남한의 국민으로 살기 시작했다. 자, 모두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내 이야기의 요점은 < 망부석 >이 휴전으로부터 고작 10년 후의 영화라는 것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때 한국사회는 조선으로부터 53년 후의 시간의 자리에 놓여있었다. 내가 지금 매우 위험한 논제를 건드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역사 속에서의 삶과 삶 속에서의 역사 사이의 상대성. 나는 다소 간단하게 역사에 관한 감각의 근접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다. 앞의 역사의 가장자리는 종종 뒤의 역사 안에 (여러 가지 형식으로) 흔적을 남겨놓았다. 언제나 역사는 차츰차츰 사라져간다. 약간 전통적인 방식으로 말해보자. 기억과 사고의 교차 안에서 양태들은 오랫동안 남겨질 것이며 속성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두 개의 세상에서 매듭은 하나의 고리를 만들겠지만 앞과 뒤 사이에서 그것을 묶어놓은 힘은 뒤의 자리에서 앞의 기억을 모방하고 종종 거울처럼 들여다보게 만들 것이다. 모든 세계는 두 세상의 연결이다. (혹은 다가올 세상을 셈에 포함해야 한다면 셋이 될 것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였으며, 더 많은 것을 오랫동안 남겨놓았다. 모든 관념들은 사물들과 함께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은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때 기억은 이미 사라진 사물을 찾아서 흔적 주변을 기웃거리기 시작할 것이다. 1963년에 남겨진 조선시대. 서울시대의 궁궐들. 사대문을 둘러싼 왕가의 무덤들. 내게 약간 문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이 말을 우회하고 싶다. 당신이 오늘 오후 경복궁 안뜰에 서서 하늘을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볼 때 당신은 얼마만큼 조선을 느껴볼 수 있을까. 똑같은 의미로 1963년 창경궁에 서서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임권택 은 얼마나 가까이 조선의 왕조를 느껴보았을까. 둘 사이의 차이. 혹은 둘 사이의 거리. <망부석>을 찍기 위해서 촬영 내내 드나들었을 장소. 야외촬영은 언제나 날씨의 영향을 받는다. 사방에서 볼 수 있는 한복을 입은 여자들. 나는 지금 이 당시의 사진을 약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다. 홀린 듯이? 그렇게 시간에 홀린 듯이. 젊은이들은 신사복을 입고 있다. 그때 나이 많은 노인들은 갓을 쓰고 나들이를 하였다. 나는 지금 세계의 이중성 안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중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질서를 자기 안에 복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를 세계 안에 배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 개의 자리. 1762년에 시작해서 1776년에 끝나는 이야기.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때부터 정조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이어지는 조선의 시간. 그리고 1963년 박정희 씨가 대통령이 된 대한민국의 시간. 두 개의 시간 사이의 임권택의 공명. 나는 여기서 어떤 정치적인 이음새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체제. 하나의 제도, 하나의 시대가 끝날 수 있지만 사물 속에 머물고 있는 기억은 마치 그림자처럼 둘 사이의 공감의 부피를 체현할 것이다. 나는 거기서 본래의 모습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세상을 뒤덮고 있는 그림자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다. 그림자? 그렇다. 당신이 지금 박정희 씨를 느껴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 그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임권택은 조선을 바라본 다음 그걸 영화로 끌어당기고 있다. 이야기와 그림자 사이의 인접관계. 나는 지금 지식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림자 앞에 잠시 멈춰 선 다음 그 안에서 무언가를 느껴보려는 이야기의 제스처를 바라보려는 것이다.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보기 바란다. 임권택은 1762년 혹은 1776년, 이때의 조선시대를 보여주기 위해 1963년 창경궁에 카메라를 세우고 그 앞에 배우들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가 제시하는 상상의 동선들. 그 사이에 주어진 어떤 질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박정희 씨가 막 대통령이 되었던 그 해. 사도세자 화완옹주 정조 그 다음은 불연속성에 대해서 말할 차례이다. < 망부석 >은 두 개의 이야기로 나뉜 영화이다. 앞부분은 영조가 칠순이 되고 기력이 쇠하자 그의 세자에게 국정을 맡기지만 임금의 자리를 노리는 화완옹주의 계략에 빠져 사도세자가 영조의 미움을 사고 뒤주에 갇혀 굶어죽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영조 38년인 1762년 음력 5월 13일에 사도세자가 영조의 명에 따라 갇힌 뒤 아흐레 후에 굶어죽었다고 역사에 기록된 임오화변에 바탕을 두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단지 화완옹주의 계략에 따라 영조가 속아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는 벌을 내린 것은 아니다) 그때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이며 뒤를 이어 임금이 된 정조가 11살 이었다. 영화는 거기서 일단 중단된 다음 영조에 의해 그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이제 장성한 정조가 입궐하고 다시 시작한다. 피비린내 나는 왕위를 둘러싼 정쟁이 벌어지고 그런 다음 영화는 정조가 왕위에 오른 음력 1776년 3월 10일에 끝난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이야기가 둘로 나뉜 것이 아니다. 임권택 은 수 없이 둘 혹은 셋으로 이야기를 분할하였다. (< 왕십리 >, 혹은 < 길소뜸 >) 아니면 아예 조각조각내기도 하였다.(< 짝코 >) 그런데 <망부석>은 사도세자의 이야기와 다시 입궐한 정조의 이야기를 서로 분리하여 그 둘이 마치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다른 관점을 취해야한다는 듯이 주어진 사료를 정반대의 방식으로 다룬다. 다소 도식적으로 설명하면 <망부석>은 앞의 이야기는 사료에 근거하여 그 안에서 진행되는 정사에 가까운 반면 뒤의 이야기는 오로지 영화를 위하여 지어낸 인물인 꽃봉이를 하나의 동선으로 하여 이야기를 진행한 다음 모든 인물들을 다시 역사의 사료에 수렴시키는 야사에 가까워진(다음 다시 역사로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두 개의 진행. 좀 더 간단하게 하나는 아버지의 이야기(histoire/ Histoire)이고, 다른 하나는 아들의 드라마(histoire/ drame)이다. 그 둘은 11년간 서로 겹친 다음 헤어진다. 영화 <망부석>은 두 개의 시간의 교집합을 이루는 씬이 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힐 때 그의 아들이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매달려 아버지 대신 불초 소자를 벌해 달라고 매달리는 장면. 그러나 앞의 이야기는 거기까지이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질서. 왜 하나는 다른 하나가 아닌가. 두 개의 이야기는 멀리 떨어진 시간이 아니다. 둘로 나누어진 조선이라는 시간의 형상. 왜 하나의 시간을 둘로 나눈 다음 같은 패턴으로 반복할 수 없었을까. 나는 여기에 어떤 지식(의 영향이나 모델)이 개입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왜 이 이야기는 두 개의 관점을 한 편의 영화 안에서 공유하는 것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느냐고 물어보고 싶어진다. 이때 두 이야기가 다른 한편으로는 영조의 시간 안에서 연속된 이야기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영조 안의 두 개의 항. 사도세자와 정조. 반대로 사도세자와 정조를 연결하는 하나의 집합, 영조. 이중의 요구 조건. 왜 하나는 역사의 사료가 그 자체만으로 드라마로 성립하지만 다른 하나는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 등장해야만 역사의 사료 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을까. 나는 여기서 역사의 사료를 놓고 영화의 구성에 대해서 설명하는 대신(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마치 두 개의 영화가 있는 것처럼 < 망부석 >을 다룬 다음 그 둘 사이의 상이한 방법을 통해서 조선시대가 왜 그렇게 해야만 서로 상호보충을 이루는 지에 관한 다소 의심스러운 질문을 할 생각이다. 의심? 물론이다. 나는 <망부석>이 조선시대의 역사 안에 실제로 사료에 기록되어있는 구체적인 한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종종 몽환적인 순간을 보여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아하게 여겨왔기 때문이다. 이 순간들은 차례로 임권택 의 영화에서 사라져갔다. 나는 단지 이 문제가 연출에서의 진화에 따른 해결이라는 식으로 손쉽게 대답될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겉으로 드러난 이 순간은 점점 더 임권택의 영화 안으로 침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좀 더 정교하게 설명해야 하지만 그냥 직관적으로 말할 수도 있다. 앞의 이야기가 전체로 주어진 역사의 광경 안의 이야기를 바라보고 있다면 뒤의 이야기는 그 광경의 이야기가 역사의 과정을 바라보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맞은편의 광경. 나는 역사 사료 안의 그림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그때 공백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먼저 이야기의 외곽에 놓은 인물. 이 영화의 제목인 < 망부석 >은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녀는 남편이 뒤주에 갇혀 죽은 다음 아들을 돌보면서 영조의 눈 몰래 남편이 세상을 떠난 그 언덕에 올라 마치 멀리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되어버렸다는 망부석(望夫石)인 양 저승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저승을 바라보는 일.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 차라리 자기도 죽고 싶다는 간절한 표현. 그래서 제발 자기도 데려다달라는 제스처. 하지만 여기 머물러야 한다. 왜냐하면 남편이 남기고 간 아들이 여기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들을 왕위에 올려 역사 속에서 남편을 복권시켜야 한다. 혜경궁 홍씨의 눈물에는 영조에서 정조에로 넘어가는 맹렬한 인정투쟁이 담겨있다. 영화는 계절이 바뀌어도 언덕에 올라 바라보는 혜경궁 홍씨를 보여준다. 하지만 혜경궁 홍씨에 대한 관심은 거기까지이다. 만일 제목을 생각하면서 <망부석>이 혜경궁 홍씨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크게 실망할 것이다. 혹은 영화의 선을 놓칠 것이다. 이야기는 정 반대로 사도세자를 따라갈 때에는 혜경궁 홍씨가 거의 등장하지 않고 그런 다음 다시 입궐하여 정조의 이야기가 되었을 때는 그의 어머니로서 모습을 보인 다음 마치 다른 건물에 머물기라도 한 것처럼 만날 수 없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 즈음에야 다시 볼 수 있다)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제목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어리둥절했다. 종종 선이 끊어지는 인물. 이때 무엇이 이 연속성을 다시 이어놓을 수 있을까. 당신은 이 이야기가 역사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역사가 연속성과 관련될 때 그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인물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일까. 말하자면 여기에는 이야기를 설명하는 두 개의 방법이 결정된 다음 여러 개의 체계로 다시 분류가 시작되고 있다. 여기서 혜경궁 홍씨를 어디에 위치지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역사의 도표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불분명하고 혼란스러우며 조각난 역사의 사료들을 하나의 연속으로 다루어야 할 때 이 선을 연결시켜주어야 할 유일한 방법은 그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 밖에 없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려고 한다. 역사의 사료로부터 시간의 연속으로 넘어와야 할 때, 바로 그때, 임권택 의 영화에서는, 여기에 그 사이를 연결하는 기형적인 연극이 반드시 개입되고 있다. 기형적인 연극? 그렇다. 역사 앞에서 상연되어야 하는 소극적인 역할. 그 안에서 무시해서 소멸된 것이라도 된 것처럼, 하지만 그 안에서 선택해서 다시 존재하게 불러낸 것처럼, 그 무언가가 상연된다. 이때 내 질문은 왜 그 역할이 역사의 사료 속에 존재하는 혜경궁 홍씨가 아니라 가상의 인물인 꽃봉이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임권택이 역사를 찌그러트리면서 그 사이에 채워 넣은 질서. 꽃봉이 중전 이때 우리는 이 문제를 단순하게 역사 앞에서 (여성의) 희생이라는 방식으로 바라보는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는 단순해진다. 여기에는 단지 꽃봉이라는 이십대 여자의 미숙한 사랑과 자기가 넘볼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계급적 좌절의 따분하리만큼 반복적인 도식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그건 구태여 우리가 조선시대라는 배경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동일한 여자들의 희생을 수많은 판본으로 거듭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반대로 꽃봉이라는 인물이 < 망부석 >에서 개연성이 없다는 사실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는 앞부분에서 이미 어린 정조가 등장하고 있지만 그러나 꽃봉은 이 이야기와 아무 관계가 없다. 차라리 그녀는 완전하리만큼 역사 바깥에서 온다. 심지어 <망부석>을 본 다음 꽃봉이가 어느 장면에서 처음 등장했는지를 질문할 때 대부분은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영화에서 거의 절반이 가까워질 즈음, 영화가 시작한 지 37분이 지난 다음, 그러니까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11년이 지난 다음, 삼청동에 혜경궁 홍씨와 정조가 살고 있는 가난하고 외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그러고 나서 영조의 노년의 외로움과 자기 아들을 벌로 사했다는 괴로움을 헤아려 (이 모든 장면들이 차례로 나온다) 중전이 주상궁을 불러 혜경궁 홍씨와 정조의 근황을 물어볼 때 그 곁에 선 시녀로 등장한다. 처음 이 영화를 볼 때는 아무도 그녀를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 임권택 은 꽃봉이를 이상한 방식으로 인물들 사이의 네트워크 안으로 끌어당긴다. 중전이 주상궁과 혜경궁 홍씨와 정조에 대해 은밀한 이야기를 나눌 때 꽃봉이는 사실상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전과 주상궁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꽃봉이는 서 있기 때문에 그녀는 하반신만 찍혔다. 그런데 중전이 일어서서 이야기의 자리를 옮길 때 카메라는 기이하게도 상대 쇼트로 주상궁을 그냥 지나쳐서 꽃봉이를 보여준다. 이 카메라의 이동은 너무 이상해서 몇 번을 다시 보아도 기이하게 선을 긋는다는 인상을 안겨준다. 그런 다음 이 쇼트의 상대 쇼트는 중전을 보여주는데 이 시선이 명백히 꽃봉이의 시선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동일한 방법으로 다가간다. 두 개의 동일한 운동. 말하자면 의도적인 카메라의 동선을 보여준 다음 똑같은 방법으로 시선의 운동이 이어질 때 우리는 이 유사성이 가져다 준 관계의 기호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이때 하나가 관계의 선이고 다른 하나가 시선의 선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두 개의 선. 그런 다음 이상한 시선의 교환이 등장한다. 중전은 주상궁에게 혜경궁 홍씨와 정조를 다시 입궐시킬 묘책을 이야기한다. 이때 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라면 상식적으로 곁에 서 있는 꽃봉이를 이 방에서 내 보내면 된다. 그러나 그녀를 내 보내는 대신 그 두 사람은 갑자기 귓속말을 나눈다. 그런 다음 중전은 마치 이 비밀 이야기를 꽃봉이가 들었을까 염려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본다. 그때 이 표정의 상대 쇼트는 꽃봉이가 마치 들켰다는 듯이 마주보던 얼굴을 숙이면서 시선을 피한다. 왜 그 두 사람은 귓속말을 나누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걸 관객이 들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때 꽃봉이는 이 이야기의 관객과 비스듬히 겹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과도하게 단순화시켜서 관객과 꽃봉이가 동일시되어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꽃봉이는 역사의 바깥에서 와서 이야기의 안으로 들어왔지만 이상하게도 이야기의 중심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의 전부를 그녀에게 다 알려주면 안 된다는 듯한 어떤 거리가 그 사이에 개입하고 있다. 그녀는 이야기를 알고 있어야 해, 하지만 그녀가 너무 많이 알아서는 안 돼, 라는 이 거리감은 시종일관 이 이야기를 유지시킨다. 그건 마치 꽃봉이가 이 시대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심지어 나는 꽃봉이에 대해서 그녀가 존재한다기보다는 영화를 보는 우리와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는 인물들 사이의 간극을 채우기 위해서 거기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이 시선의 관계는 바로 이어지는 다음 씬, 그러니까 삼청동에 중전의 뜻을 전하러 간 주상궁의 곁에 서서 꽃봉이가 정조를 처음 만날 때의 시선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주상궁과 혜경궁 홍씨가 만나는 이 씬에서 (master shot) 구도로는 마치 꽃봉이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세워져 있다. 주상궁과 혜경궁 홍씨의 대화를 보여주면서(two shot) 이어지던 쇼트의 진행은 갑자기 인서트처럼 그 두 사람을 바라보는 꽃봉이를 보여준다. 그 시선의 자세는 정확하게 관객의 시선이다. 그러나 꽃봉이는 거기서 시선을 약간 돌린 다음 그 뒤편에 서 있는 정조를 바라본다. 이때 카메라는 마치 그 시선의 선을 따라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조를 향해서 직진한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달리로 촬영된 이 장면은 마치 꽃봉이가 그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며 다가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나는 이것을 도식적인 설명의 따분함을 무릅쓰고 불가능한 욕망의 시선으로 다시 번역하고 싶은 다소 위험한 상상을 하게 된다. 두 개의 선의 유사성. 꽃봉이가 중전을 바라볼 때의 시선과, 마찬가지로 정조를 바라볼 때의 시선 둘 사이의 유사성에서 노골적인 겹침을 떠올리게 된다. 여기에는 꽃봉이가 정조의 아내의 자리, 미래의 중전의 자리에 대한 드러내놓고 거기에 다가가려는 시선의 발걸음을 느끼게 된다. 물론 그건 (조선시대에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금지된 욕망이다. 그때 나는 이 시선의 발걸음이 정조에서 먼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중전을 바라보는데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이것은 사랑의 시선이 아니라 자리의 시선이다. 그 자리가 불러일으킨 환상. 그러나 갈 수 없는 자리. 그러므로 이 시선은 죽음의 발걸음이 될 것이다. 이때 임권택 은 이 죽음을 두 번 반복하고 있다, 물론 하나는 사도세자의 역사 속에서의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꽃봉이의 드라마 안에서의 죽음이다. 두 개의 죽음. 공통점은 둘 다 화완옹주의 음모에 빠져서 죽음에 이르는 것이며, 차이는 사도세자가 모두의 시선 앞에서 죽음을 선택한다면 꽃봉이는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어떤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기이하게도 사도세자와 꽃봉이는 동일한 장소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이다. 이 둘의 죽음은 좀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사도세자는 모두들 앞에서 상연되듯이 죽음을 맞이한다. 그때 그는 의도적으로 큰 웃음을 터트리면서 이 모든 상황이 우스꽝스럽다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가 보기에 왕권을 둘러싼 이 음모와 싸움은 희극적이다. 반대로 꽃봉이는 마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상연되듯이 그 자리에 없는 정조를 부르며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처지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독약을 마신다. 나는 < 망부석 >이 두 개의 세계관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결국 하나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우리가 놓쳐선 안 되는 것은 이 두 개의 이야기가 모두 영조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진행되는 음모의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망부석>은 두 명의 관객이 있다. 하나는 물론 영화를 보는 당신이지만, 다른 한 명은 영조이다. 이때 둘의 차이는 당신은 이 음모의 과정을 보지만 영조는 단지 음모만을 본다. 과정 없는 음모. 좀 더 정확하게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연기되는 음모의 상연. 혹은 영조를 관객으로 한 음모의 상연. 이때 사도세자는 영조 앞에서 자기의 운명에 대해서 영조를 관객으로 하여 희극적인 상연을 한다. 그는 정말 미친 것처럼 크게 웃는다. 그때 그 웃음은 어리석게도 음모에 속아 넘어간 채 자신에게 죽음에 이르는 벌을 내리는 영조를 향한 것인지 이 모든 것이 그의 운명이 되어버린 조선 시대의 왕정 정치를 둘러싼 음모를 향한 것인지 모호하다. 반대로 꽃봉이는 이 음모의 상연에서 이쪽과 저쪽 사이를 오가면서 영조의 눈을 속이기 위해 진행되는 거짓의 드라마가 만들어내는 허구의 질서와 그 질서의 이면 사이 그 어디에도 역사의 자리가 없기 때문에 결국 역사에로 귀결될 때 이미 예정된 대로 그녀의 자리가 폐제될 것이라는 데 비극이 있다. 나는 여기서 두 개의 길을 본다. 하나는 사도세자를 다루면서 역사의 부채를 물어보는 방식이다. 이때 여기에 더해진 것은 다만 화완옹주의 음모뿐이다. 그런 다음 가려진 것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한 다음 그를 뒤주에 가두어 죽음에 이르게 할 명분을 찾는 과정이다. 이때 다소 곡예를 부린다면 우리는 영조의 잘못을 화완옹주에게 떠넘겼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런 다음 다시 역사를 올바르게 되돌려 놓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단지 이야기의 권선징악이나 사필귀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드라마가 아니다. 올바르게 되돌려 놓는다는 것은 역사 안의 부분적이고 왜곡된 형태로 개입한 화완옹주를 정조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드라마가 만들어낸 인물인 꽃봉이의 희생의 형식을 빌려 다시 역사 바깥으로 쫓아낸다는 의미이다. 이 셈을 드라마의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다가간다면 다소 공허하게 여겨진다. 왜냐하면 바깥에 있던 것을 삭제하기 위하여 다시 바깥을 끌어들인 다음 부채를 청산하는 방식을 취할 때 이것은 인물들 사이의 운명을 놓고 벌인 대차대조표에 관한 일종의 타협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관점을 취할 때 임권택 이 어딘가 모르게 역사의 대상에게 직접적인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종의 외부적 장애를 만들어 놓은 것 같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는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꽃봉이가 정조를 향해 품었던 정념이 어떤 방식으로 드라마의 구조 안에서 자기의 주체를 기형적으로 찌그러트리면서까지 대상으로 몰락해 가는지를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비극의 물화. 나는 역사 안에서 기형적인 연극의 상연을 위해서 임권택이 종종 인물을 찌그러트린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은 < 망부석 >뿐만 아니라 임권택이 ‘이후’에도 줄기차게 조선시대를 다루면서 가져온 하나의 방법이다. 역사의 자리에서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이야기의 자리에서 보면 이 인물들은 방해물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자기의 존재를 증명해낸다. 이때 역사의 실존하는 인물들에게 그들은 단지 방해물이 아니다. 방해물이기는커녕 그들이 없다면 주인공들은 역사 속에서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것이다. 지젝이 (프레드릭 제임슨에게서 영감을 얻어) 쉘링을 끌어들인 방식으로 개념화한다면 이들은 사라지는 매개자들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이 문제를 과도하게 도식화시키고 싶지 않다. 다만 이 매개자가 필요해진 까닭은 총체성의 일관성을 유지시키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라는 지적을 끌어당기고 싶다. (지젝의 방점은 일관성이지만)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방점은 전략이다. 말하자면 반대로 역사 속의 주인공들이 역사 속에 접근해가기 위해서 이 매개자의 도움이 없다면 임권택의 영화는 무언가 역사를 건드려야 한다는 돌이킬 수 없는 폭력적인 방식의 왜곡을 더해야 할 것이다. 나는 바로 이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경계와도 같은 자발적인 망설임 앞에서 1960년대에 조선시대에 관한 사극영화를 만들면서도 (아마도 임권택과 동시대에 이 장르를 만들면서 또한 대가였던) 신상옥 을 중심으로 한 (역사에 대해서) 폭력적인 영화들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또 다른 결정적인 차이로서의 (존재론적인) 폭력을 느낀다. 두 개의 폭력. 나는 1960년대 한국 사극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들이 항상 폭력적인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건 21세기 한국영화가 조선시대를 종종 우스꽝스럽게 조롱하는 것과 달리 (이를테면 두 편 모두 천만 명의 관객이 넘은 < 왕의 남자 >와 < 광해, 왕이 된 남자 >가 동시에 ‘광대’와 왕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것이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이 시기의 사극영화들은 조선시대와 이제 막 근대가 시작된 (일제 식민지 강점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리승만 대통령의 체제를 끝내고 다시 시작하고 있는) 대한민국 사이에서 (리승만과 박정희의 정치적인 평가와는 무관하게 근대로서의 한국이라는 자리에서) 항상 무언가 대결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당신은 즉각적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또 다른 일제 강점하의 산물이다.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시대 안에서 그 이름이 하나의 담론으로 사회 안에 언제 등장했느냐는 질문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물론 이 말을 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훨씬 정교한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는 이 논쟁을 하기에 적절한 자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대신 나는 여기서 다만 임권택의 사극영화에 대한 설명만으로 만족할 생각이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게 지적하고 싶다. 하나의 시대 안에서 서로 다른 두 개의 사극의 태도를 하나로 묶어서는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다. 자, 원래의 논점으로 돌아가자. < 망부석 >에서 꽃봉이라는 매개자는 정확하게 무엇을 방해하는가. 얼핏 보는 것과 달리 꽃봉이는 역사가 아니라 드라마의 진행을 방해하는 중이다. 이때 이 영화의 드라마는 사실상 음모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가정이지만 만일 우리가 꽃봉이라는 인물을 치운다면 즉각적으로 정조는 사도세자의 운명을 반복하면서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을 것이며 혜경궁 홍씨는 그녀의 남편과 동일한 운명에 처해졌을 것이다. 이때 정확하게 멈추는 것은 무엇인가. 만일 당신이 정조가 왕위에 등극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완전히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어떤 난관이 벌어져도 결국 역사는 집행될 것이다. 반대로 화완옹주의 음모를 어떻게 해서든 다른 방식으로 막아야 하는 영화의 역할이라는 역설 앞에서 멈추는 것은 역사의 개입을 중단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는 음모 그 자체이다.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꽃봉이가 드라마 속에서는 음모의 진행을 폭로하고 그런 다음 음모 자체를 역사로부터 치우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반대로 역사의 관점에서는 꽃봉이가 음모 그 자체의 일부라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때 무언가 여기에는 다소 불편한 진실이 있다. 임권택 은 꽃봉이를 매우 쉽게 정조의 곁에 머물게 하면서도 끝내 그에게 손 끝 하나 댈 수 없게 만들면서 마치 역사에 쉽게 다가가면서도 끝내 조선시대라는 역사의 과정에 손 끝 하나 댈 수 없게 만든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임권택은 조선시대를 그저 감상할 뿐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를 계속 방해하다가 끝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나는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서 이와 유사한 태도를 수없이 반복해서 경험하였다. 이를테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 족보 >. 나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 <족보>를 설명하면서 건드렸다. 혹은 < 씨받이 >와 <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 그런 다음 < 취화선 >. 거의 그의 영화 전부에서 내내 지속적으로 해당하는 이상한 반복. 물론 이때 이 반복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핵심은 반대로 이 반복이 동일성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균형이나 조화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임권택은 조선시대를 무언가 설명할 수 없지만 하여튼 여전히 유지될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 다루고 싶어 한다. 나는 < 망부석 >에서 꽃봉이가 자살하는 장면의 기괴함을 환기시키고 싶다. 꽃봉이는 화완옹주가 정조에게 건네주기 위한 독이 든 보약을 숨겨놓은 채 정조를 만나러 간다. 이 만남은 그녀의 마지막 작별인사와도 같은 것이다. 임권택 은 할 수 있는 한 그 만남을 미루려고 한다. 정조의 처소에 찾아갔을 때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은 정조의 스승인 홍국영이다. 물론 꽃봉이는 홍국영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다. 음모의 일부인 꽃봉이는 자신의 속내를 말하지 못하고 돌아가려할 때, 그때에야 비로소, 먼저 정조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 다음 정조는 꽃봉이에게 다가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러나 사실상 음모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 채, 기다려달라는 말을 반복한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시간은 오지 않을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그 시간이 오지 않아야만 정조는 왕위에 오를 수 있다. 이 씬은 이상하게 진행된다. 꽃봉이가 홍국영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방에서 나와 정조가 그녀를 발견한다. 이때 그 둘이 이야기하는 장면이 계속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정조의 시점 쇼트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적으로만 말하면 정조는 마치 꽃봉이를 보지 않는다는 듯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 다음 떠나려는 꽃봉이를 정조가 부른다. 나는 이 작별장면에서 정조가 꽃봉이를 보는 시점 쇼트는 있지만 꽃봉이가 정조를 보는 주관적인 시점 쇼트가 없는 것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여기에는 정념의 쇼트가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임권택은 꽃봉이가 정조를 마주볼 수 있는 영화적인 쇼트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꽃봉이가 정조를 보는 쇼트는 모두 어깨를 걸은(over-the-shoulder) 투 쇼트로 둘 사이의 장면을 나누고(shot-reverse shot) 있다. 이때 정조가 꽃봉이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동작은 “고개를 들라”라고 말한 다음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턱에 손을 댄 다음 얼굴을 들어 올리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 전체를 통해서 유일하게 정조가 꽃봉이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이다. 꽃봉이가 내내 기다려 온 순간. 그러므로 이때의 시선은 사실상 그들 사이의 유일한 사랑의 몸짓이다. 그러나 이 순간 임권택은 꽃봉이에게 어떤 권리도 제공하지 않는다. 꽃봉은 아무런 고백도 하지 못하고 정조에게 인사를 한 다음 그 자리를 떠난다. 이때 갑자기 영화는 기이하게도 이제까지 분위기를 고조시키던 배경음악 대신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63년에나 어울릴 법한 반주음악과 창법으로 다듬어진)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 노래는 너무 이상해서 마치 우리들로 하여금 조선시대로부터 단번에 이 영화를 보고 있는 현대의 자리에로 되돌리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물론 이런 식의 현대적 버전의 노래가 사극영화에 사용된 것은 임권택의 영화가 유일한 것은 아니다. 종종 이 시기의 사극영화들은 거리낌 없이 현대적 버전의 주제가를 사용하였으며, 그 노래들은 구태여 사극의 무드를 만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S# 1 S# 2 S# 3 S# 4 나는 < 망부석 >에서 꽃봉이가 자살하는 장면에서 모든 것이 거의 일제히 서로의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고, 그런 다음 일부가 빠져나가고, 마치 작동을 멈춘 것처럼 중단하고, 그래서 결국 무언가를 버린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싶다.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장면. 꽃봉이가 자살을 하기 위해 언덕에 왔을 때, 그 언덕은 사도 세자가 죽음을 당한 바로 그 장소이다. 그 장소에 꽃봉이는 서 있는 카메라 바로 앞으로 걸어온다. (S# 1) 바로 이때 저 언덕에 혜경궁 홍씨가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S# 2) 나는 처음에 이 장면이 꽃봉이의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이 장면은 환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임권택 은 그 판단을 보류한다. 그 대신 이번에는 카메라가 꽃봉이에게 다가간다. (S# 3) 그런 다음 여전히 혜경궁 홍씨가 거기 서 있는 모습을 꽃봉이가 바라볼 때 카메라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는다. (S# 4) 이 시선의 교환은 어딘가 매정한 데가 있다. 꽃봉이는 혜경궁 홍씨를 바라보며 눈물짓지만 혜경궁 홍씨는 멀리서 그저 떠나간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는 몸짓으로 화면 오른쪽 너머 먼 곳을 바라볼 뿐 꽃봉이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무정한 롱 쇼트. 마치 꿈결 같은 세트. 나는 이 장면에서 시선의 차단을 영화적으로 다시 읽고 싶어진다. 혜경궁 홍씨는 단 한 순간도 꽃봉이를 사도세자의 연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꽃봉이의 사랑은 그녀 혼자만의 절망적인 환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비참한 비대칭으로 끝난다. 이때 그녀의 편에 선 유일한 존재가 영화 바깥에서 들리는 현대적 버전의 주제가라는 목소리인 것은 얼마나 암시적인가. 그런 다음 꽃봉이는 이 시대로부터 더 이상 자기가 서 있을 곳이 없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죽음을 선택한다. 이 장면은 그 자체로 임권택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시대 안에서 한계가 진행될 때 그 자체로 찌그러지는 어둡고 반복적인 상연의 폭력이라는 형식의 모델이라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 망부석 >이 임권택 의 첫 번째 사극영화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조선시대 속으로 들어왔다. 그런 다음 지속적으로 이 시대로 다시 돌아왔다. 임권택의 101편의 영화중에서 어떤 시대로 이만큼 끈질기게 반복적으로 그를 다시 불러내지 못했다. 아니 차라리, 마치 그는 이 시대 속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나는 언젠가 물어보았다. 감독님에게 조선시대란 무엇입니까. 임권택 감독님은 한참을 생각한 다음 대답했다. “그건 내가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내 부모님을 통해서,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통해서, 그 분들의 삶을 통해서 수 없이 들었고, 그분들의 삶의 태도를 통해서 쳐다보았고, 그래서 그걸 느껴보았고, 그런 다음 그분들을 떠올릴 때, 내가 그 시대를 그 분들과 함께 살아보았구나, 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시대인거요, 나는 그냥 그 시대를 영화로 다루고 있으면, 그게 편해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나는 여기서 편하다, 라는 말에서 멈추었다. 임권택은 불편하게 역사 속을 내내 살아왔다. 그가 태어났을 때 한반도는 일제 강점하였다. 그런 다음 좌우익의 대립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한국전쟁이 벌어졌다. 좌익의 집안이었던 임권택은 한반도가 분단으로 휴전을 한 다음 집을 떠났고, 그런 다음 내내 연좌제에 시달리며 이데올로기의 그늘 아래 숨어살아야만 했다. 그는 영화를 찍으면서 자기가 살아본 적이 없는 시간, 자기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가 살았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거기서 아무 것도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때 거기서 내가 보는 것은 한계가 아니다. 반대로 그 시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은 다음 자기의 기쐽오旻섯?방어하려고 임권택이 배치해놓은 다음 종종 기이한 방법으로 숨겨놓거나 때로는 평면적으로 보이는 구조 안에서 갑작스러운 변화를 일으키는 굴곡을 창조해내는 영화의 장치들, 차라리 오로지 자기만을 위한 코나투스라고 부르고 싶은 추억의 기호들을 발견하고 싶어진다. 종종 이 굴곡들은 이상할 때도 있고, 때로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만들어내면서 어떤 변덕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하지만 이 기호들이 점점 우아해지고, 점점 더 더할 나위 없이 슬픈 정감을 떠올리면서 순수한 그 자신만의 힘을 만들어나간 것은 사실이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본 다음 그는 20세기에 영화를 만드는 19세기 사람, 이라고 불렀다. 나는 <망부석>을 본 다음 임권택이 1963년에 영화를 만들면서 조선시대에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자신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간.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임권택은 영화를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한 타임머신으로 만들고 있다. 나는 그 기계에 동승할 방법을 익히는 중이다. (계속) 1963년 123분 흑백 2.35 감독 임권택 제작 극동흥업 각본 장천호 촬영 장석준 음악 이인권 미술 박석인 편집 김희수 이경희 혜빈 홍씨 신성일 세자 김운하 세손(정조) 최남현 영조 도금봉 화완옹주 강미애 꽃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