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글와글 꼬꼬맘
- 감독
- 홍원기, 게이치로 모치즈키
- 제작년도
- 2009
올해 나는 한낱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부활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게 되었다. 감히 꿈꿀 수 없는 성스러운 부활보다는 ‘평범한’ 사람 라자로의 이야기가 희망이 되어주었다.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 지난 라자로는 예수의 부름에 응답해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걸어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희망뿐만 아니라 좌절도 안겼다. 신체의 형상을 묘사한 대목이 특히 그랬다. 부활을 꿈꾸기 위해서는 일단 신체가 보존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죽은 몸은 보존되기보다는 대부분 화장된다. 부수어져 가루가 되어버린 몸의 부활은 아무래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상상하기를 포기할 수 없던 나는 잘게 부수어진 입자가 사람의 형상으로 바뀌는 광경을 기어이 상상했다. 머릿속에 재생된 그 장면은 마치 21세기 SF 판타지 영화처럼 보였다. 과장된 상상은 부활과 무관하다고 여긴 영화를 부활의 서사로 보게 했다. < 3000년의 기다림 >에서 알리테아는 골동품점에서 발견한 작은 유리병을 전동 칫솔로 닦다가 그 속에 존재했던 정령 지니를 깨운다. 뚜껑이 달린 작은 호리병은 축소된 유골함이고, 그래픽화된 연기는 기체처럼 흩날리는 뼛가루와도 같다. 뚜껑이 열리면서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죽음(혹은 영원한 기다림)의 시간은 삶의 시간으로 역행한다. 거대한 몸이 부딪히지 않을 정도로 트인 장소에서 나타나곤 했던 지니가 이번에는 고개조차 제대로 펼 수 없을 정도의 호텔 방에 구부정한 상태로 등장한다. 일상성과 구체성은 그것이 리얼하다고 느끼게끔 하는 데 기여한다. 호리병 속 생명체가 죽음에서 삶으로, 입자에서 거대한 몸으로, 거대한 몸이 점차 부피를 줄이며 생체 순환을 역행하듯, 이야기의 방향도 전환된다. 소원 성취 스토리에서 사연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소원의 주체에게 있지만, 여기에서는 그간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지니의 오랜 사연이 중심에 놓인다. 알리테아는 구멍이자 심연이었던 지니의 삶을 깨우는 눈이다. 그는 모든 이야기를 섭렵한 훌륭한 서사학자로 소원의 무용함을 진작에 간파한 인물이다. 지니가 기나긴 사연을 늘어놓게 된 이유도 알리테아가 소원 기회를 포기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3000년 동안 좁은 병에서 깨어났다 갇히기를 반복한 지니의 인생 이야기가 불러오는 연민과 공감 그리고 사랑은 결국 알리테아의 마음을 돌린다. 알리테아의 첫 번째 소원은 정령을 향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당신도 나를 사랑해 달라는 요구에는 지니에게 바쳐진 소원들에 대한 메타적인 시선이 잠재해 있다. 모든 소원은 그것이 사람에 관해서든, 부와 명예 같은 추상적인 대상에 관해서든 소원을 비는 현장에 연루되지 않은 인물 혹은 사물과 관련될 수밖에 없다. 알리테아의 소원은 이후에 존재할 무수한 변수를 차단해 소원이 지닌 근본적인 모순을 벗어나는 해결책처럼 보인다. 알리테아의 소원을 통해 소원의 실행자이자 대상이 된 지니는 거의 소원과 동일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알리테아의 소원 역시 다른 소원 성취 서사와 마찬가지로 실패의 과정을 겪는다. 지니가 알리테아의 곁에 머무는 것이 그에게 고문과도 같아지면서 그를 살리기 위해서는 소원을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패의 원인은 소원의 내용보다는 소원에 내재한 구조에 있다. 소원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세 가지인 이유는 구조를 이루기 위해서다. 소원은 소원 빌기,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한 실패, 폐기 혹은 수정의 삼단계를 거쳐 완전해진다. 구조 속에 소원의 실패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 이를 바꿀 순 없을지라도 인간에게는 남은 기회가 한 번 더 있다. 알리테아의 선택은 소원의 완료 이후에 덧붙은 저주의 해제를 자신의 소원으로 삼는 것이다. 소원 이야기의 최종 결말은 지니의 자유에 있다. 알리테아는 변치 않는 조건을 소원 삼아 실패 없는 결말을 만든다. 반면 영화가 주는 감동은 알리테아가 소원 성취 서사의 허점을 간파해 지혜로운 방식으로 그 굴레에서 빠져나왔다거나 익숙한 정령의 이야기를 새롭게 썼기 때문이 아니다. 감동의 자취를 따라가 보면 구조에 눈을 돌리면서 누락한 내용 쪽으로 다시 눈을 돌리게 된다. ‘이 세계가 버겁다면 당신이 있을 곳으로 가요. 그곳이 어디든지.’ 소원이기보다는 애원에 가까운 알리테아의 말에는 소원의 구조 분석 따위는 무화시킬 힘이 있다. 마지막 소원은 첫 번째 소원의 전제였던 지니에 대한 알리테아의 사랑을 증명하며 이것이 결국 사랑의 서사임을 긍정하게 한다. 모든 행복한 사랑 이야기의 결말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합일에 바쳐진다. <3000년의 기다림>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나란히 언덕 너머를 향해 걸어가는 알리테아와 지니의 뒷모습은 합일의 증거처럼 보인다. 다만 이 아름다운 장면 위에 깔리는 내레이션은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아니다. 둘은 그 뒤로도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을 반복했으리란 것, 알리테아는 죽을 때까지 지니를 기다리리라는 것을 예감케 할 뿐이다. 영화의 결말이 아름다운 이유는 알리테아가 홀로 있던 순간들 때문이다. 알리테아가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결에 고개를 돌리면 지니는 어김없이 나타난다. 이를 한낱 환상으로 치부하든, 영화적 사실로 받아들이든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전까지 지니가 나타난 장소들이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장소인 것과 달리, 마지막 장면의 배경은 개인 컴퓨터의 기본 바탕 화면 속 그래픽화된 들판과 하늘을 연상시키는 가공된 자연 이미지다. 정령은 여전히 정령이며,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다. 다만 알리테아는 인간과 정령이 어울릴 수 있는 환상의 장소를 마련해 두었을 뿐이다. 거기에는 사실도, 거짓도 없다. 다만 이야기가 있다. 인간과 정령은, 알리테아와 지니는 서로에게 아우라를 형성한다. 기나긴 시간에 대한 상상과 오랜 기다림이 바로 아우라의 정체다. 그것은 이야기의 본질이기도 하다. 올해는 새삼스럽게 서사의 위기에 관한 진단이 부활한 해였다. 위기론은 서사에서 극장으로, 극장에서 서사로 주어를 바꾸어 반복된다. 극장의 위기는 여름과 추석 시즌에 연달아 부진한 성적을 낸 한국 상업영화만이 아니라, 견고할 것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현주소인 마블 유니버스의 부진에 의해서도 견인되었다. ‘서사의 실패’에서 은폐되는 건 논의 대상이 ‘거대’ 서사라는 점이다. 마블 코믹스 유니버스에 기생하며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던 거대 서사의 세계는 망각의 수혜 속에 몇 번이고 다시 새롭게 무너질 수 있는 세계처럼 보였다. 그런데 더는 무너질 것이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무너진 것일까. 이를 논하는 데는 거대 서사라는 말보다는 ‘메타 서사’가 더 익숙하고 적합한 단어 같다. 영화에 관한 영화가 점해온 메타라는 수식은 이제 평행 우주를 오가는 메타버스 영화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지금 여기의 세계 바깥에 평행한 세계를 지으며 도망치고 부활하는 세계는 단 몇 시간의 즐거움을 위해 지금, 여기 실존의 감각을 점차 훼손시켰다. 부활도 죽음도 심드렁하거나 곧 잊혔다. 어쩌면 부활이 가장 시급한 대상은 부활 그 자체다. 부활이 전과 같은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 지금, 부활은 부활할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여전히 우리 곁에는 근사한 부활이 남아 있다. 공교롭게도 영화에 관한 영화, 혹은 자전적인 영화로 돌아온 반가운 이름이 유독 많았다. 마치 ‘메타’를 되가져오려는 비밀스러운 집단 공모가 진행 중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배우가 극 안에서 다른 배우로 등장해 세트장 사이를 평행 우주처럼 만들기도 했고( 애스터로이드 시티 ), 감독이 극 중 다른 감독으로 등장해 영화 존재의 부활을 견인하기도 했다( 파벨만스 ). 브레송의 당나귀는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당나귀로 부활해 신성은 인간의 형상을 요구하지 않음을 드러냈으며( 당나귀 EO ), 시대를 초월한 채 영속하는 것 같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인물을 마주하기도 했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 ). 충고와 모방으로부터 도망치던 홍상수의 인물들은 도망치는 대신 도망을 유발하는 방식을 통달했으며( 우리의 하루 ), 거의 다큐멘터리처럼 여겨졌던 빅토르 에리세의 배우와 필름을 찾는 여정은 득도의 체험처럼 느껴졌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 ) 인물의 구원을 차단하는 냉정함에 부활의 염원을 덧씌워 보기도 했고( 토리와 로키타 ), 잔소리꾼 수다쟁이 감독이 한 명쯤은 존재해도 괜찮지 않을까 괜스레 긍정적인 마음이 되기도 했다( 찬란한 내일로 ). 리스트를 뽑는 것만큼이나 폭력적인 요약지만, 그렇게라도 기다림에 대한 응답의 증거나 여전한 기다림의 이유를 찾고 싶었다. <3000년의 기다림>은 다시 기다림의 역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영화 내부에만 소용되는 데서 벗어나 개별 관객의 삶을 두루 자극하는 방식으로 메타를 쓴다.
한 사내가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선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이들은 늘 한결같다. 눈인사를 슬쩍 던지는 매력적인 여인, 자전거를 타고 내달리는 사내, 시간에 쫓겨 서두르는 회사원. 이들의 일정과 경로는 한 치의 오차 없이 매일 반복된다. 이렇게 되풀이되는 일상 속에 세 커플의 삶도 반복된다. 묵묵히 신문만 읽는 남편과 그에게 식사를 떠먹여 주는 아내, 목을 매려는 사내와 그 목줄을 끊어주지만 결코 그를 받아들이지는 않는 여인 (그래서 다시 목을 매려는 사내), 그리고 반갑게 내달려와 사랑을 나누려다가도 전화 소리에 황급히 떠나버리는 여인과 그로 인해 좌절하는 사내. 이들의 관계는 끝없는 도돌이표 속에서 돌아간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이렇듯 어제와 별다를 바 없고, 내일도 오늘과 크게 차이 날 것 같지 않은 반복의 궤적을 따라가지 않는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라는 표현처럼, 삶은 꽉 짜여진 궤도 속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다. 안정적인 것 같지만 권태롭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혹시 세 커플의 맥빠진 관계에서 엿볼 수 있듯이, 진정한 사랑 (이 작품에서는 그 대상이 첫사랑임을 암시한다)을 만나지 못한 탓일까? 그래서 리셋 버튼을 누르듯, 관계를 (애초에 원했던 상대를 만나서) 새롭게 시작한다면 날마다 행복할까? 산책을 시작하는 사내의 발걸음에 맞춰 경쾌하게 들려오는 테마 음악은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 점점 고조되고, 가속도가 붙는 반복의 패턴은 급기야 폭발점에 다다른다. 마침내 감독 미카엘라 파블라토바는 반복의 전개를 멈추고, 기꺼이 세 커플의 짝을 교체시켜서 삶을 재부팅 시킨다. 그렇게 새롭게 시작하는 삶은, 그러나, 이내 이전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반복과 권태로 복귀한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어떠한 짝을 택해도, 그 짝이 이상형에 부합할지라도, 일단 관계가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반복의 덫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반복의 삶, 그것이 강제하는 권태의 늪을 순순히 받아들이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일까? 아니, < 리피트 >의 힘은 체념을 권하는 표면에 맞붙어 있는 뒷면을 보여주는 지점에 있다. 바로, 목줄을 끊고 도망쳤던 개가 다시 주인에게 꼬리를 치며 돌아와서는 순순히 다시 그 목줄을 묶는 장면 말이다. 이 모습은 단순해 보이는 이 작품에서 가장 경악스런(!) 장면이다. 그리고 파블라토바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세지이기도 하다. 벗어날 수 없는 반복의 일상에서 당신은 순순히 주인에게 목줄을 맡기고 마는 개와 같은 삶을 살 것인가? 우리가 되풀이되는 일상에서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고, 이로부터 진실로 벗어나고자 한다면 결국 우리는 목줄 없이도 삶을 살아나갈 각오가 필요한 것이다. 이 작품은 내가 애니메이션에 비로소 관심을 갖기 시작할 무렵에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고, 이후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을 할 때에는 물론이거니와, 누군가에게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소개하고 설명해야 하는 현재까지도, 이야기의 구조와 작품 전체의 얼개를 소개할 때 본보기로 삼는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단순한 모티브를 가지고 반복과 차이를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그리고 그것들의 귀결을 이끌어낼 때 단순함 속에 어떻게 다양한 결말을 포함할 수 있을까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걸음걸이의 구현과 같은, 일정하게 반복되는 애니메이션 움직임 (사이클)을 이야기 속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게다가 4/4박자의 음악이 등장인물의 움직임을 강조함은 물론이거니와, 반복과 증폭을 통해서 주어진 짧은 시간 내에 관객의 귀에 익숙하게 되어, 결국 마지막에는 어떻게 박수까지 유도해낼 수 있는지 (그리하여 페스티벌 같은 무대에서는 관객의 호응도를 통해 심사위원들에게까지 어필하는지)는 애니메이터에게 귀중한 덤으로 다가올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