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조
- 감독
- 노진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김철윤, 이수형, 류상현, 차지현
영화 <오발탄> 검열 과정 개요 유현목에 따르면 영화 <오발탄>의 제작은 4.19 발발 직전에 기획되었다. 이범선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그 암울한 내용 때문에 제작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감독 유현목, 촬영기사 김학성, 그리고 조명을 담당했던 김성춘이 동인 프로덕션을 구성하고 어려운 여건 하에서 제작을 시작했다. 제작비 조달 문제 때문에 제작 기간이 길어져서 결국 영화는 제작이 시작된 지 1년 여가 지난 1961년 2월에 와서야 완성되었다. 당시는 4.19의 발발로 출범하게 된 영화윤리전국위원회에 의한 ‘민간 자율심의’가 시행되던 때였기 때문에 <오발탄>은 영화윤리전국위원회(이하 영윤)의 심의를 거쳐 1961년 4월 13일에 국제극장에서 개봉되었고 같은 달 20일까지 8일간 상영되었다. 4.19 이후의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개봉을 마쳤지만, 1961년 5월 16일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오발탄>은 상영금지 영화가 된다. 내무부의 “불순영화 금영조치 요망에 대한 여론 보고”(1961년 5월 23일, 내치정 제3846호)라는 문서로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재검열의 결과 1962년 3월에 <오발탄>을 포함한 7편의 영화에 대한 상영금지 처분이 최종 확정되었다. <오발탄>의 제작자 김성춘은 1963년 1월 26일을 시작으로 6월 11일(7월 8일), 8월 1일, 8월 21일 등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오발탄>의 상영금지 해제를 위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8개월에 걸친 상영금지 해제를 위한 노력은 일부 장면을 삭제하고 자막 및 화면을 추가하는 등의 자진 개작을 포함한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 <오발탄>은 여섯 군데 화면을 삭제하거나 단축할 것을 조건으로 8월 23일 상영을 다시 허가받았다. 이렇게 개작된 <오발탄>은 1963년 10월 12일 을지극장에서 재개봉되어 25일까지 14일 간 총 5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10월 말에는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 출품되었다. <오발탄>은 4.19와 5.16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국면들을 통과하였고, 이 영화에 대한 검열서류들에는 그와 같은 정치적 격변에 따른 영화검열 제도 및 운영 방식의 변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오발탄> 검열 서류는 매우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료라고 하겠다. 검열 서류를 통해 본 영화 <오발탄>의 검열 과정 첫 번째 국면 1961년 2월 9일자로 작성된 “국산영화 상영신고서”부터 첫 번째 개봉을 마친 4월 말까지를 첫 번째 국면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서류는 (1) “국산영화 상영신고서”(1961년 2월 9일) (2) “국산영화 <오발탄> 상영 신고의 건”(1961년 2월 14일, 문화 제665호) (3) “국산영화 심의 의뢰의 건”(1961년 4월 14일, 문화 제1623호) 및 “국산영화 심의 의뢰의 건”(1961년 4월 19일, 내치정 제2948호) 등 세 묶음으로 나눌 수 있다. (1) “국산영화 상영신고서”에는 원작자 이범선과 작곡자 김성태가 작성한 저작권 관련 서류와 한국은행이 발행한 국채소화증명서가 첨부되어 있다. 상영신고서는 (사)한국영화제작가협회를 경유(2월 13일)하고 영윤의 심의(2월 13일 접수)를 거쳐 문교부 장관에게 제출되었다. (2)의 서류는 (1)의 상영신고서를 접수한 후 문교부에서 작성된 것으로, 여기에는 영윤의 “심사논평서”가 첨부되어 있다. 이 심사논평서에서 영윤은 “개천 하수도에서 어린이를 업은 여인이 목 매단 장면을 삭제하기를 희망”한다는 소견을 피력했다. 이와 같은 영윤의 의견은, 그것이 민간의 자율심의기구였기 때문에 명목 상으로는 행정적 강제력을 갖지 않았지만, 문교부는 이 권고사항을 수용할 것을 전제로 상영허가를 내주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강제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1] 국산영화 <오발탄> 상영 신고의 건 (1961년 2월 14일, 문화 제665호) 첫 번째 국면에서 쉽게 해명되지 않는, 그래서 더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상영 중이던 4월 14일에 문교부가 내무부 치안국장과 법무부 검찰국장 앞으로 <오발탄>에 대한 심의를 의뢰했다는 사실이다. 당시는 영화에 대한 정권의 통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4.19 이후의 국면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이미 적법한 절차를 거쳐 상영하고 있는 영화에 대한, (영화검열의 주무부처도 아닌) 내무부와 법무부의 사후 심의가 왜 필요했던 것일까? 특히 “사회윤리적인 책임성이 전무“하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한 선전자료가 되는 것으로 관취“되므로 ”추천키 난“하다는 내무부의 부정적인 의견이 <오발탄>의 상영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의아할 수밖에 없다. [그림 2] 국산영화 <오발탄> 심의 의뢰의 건 (1961년 4월 19일, 내치정 제2948호) 다만 당시 영화계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에 대해서 한 가지 추론을 할 수 있다. <오발탄>이 아직 개봉하기 전이었던 1961년 3월 31일에 문교부는 국제영화제에 출품할 작품을 심사, 결정하는 국제영화 심사위원 12명을 위촉했다. 정부 관료가 다수 포함된 이 심사위원회 1) 에서는 4월 21일 베를린영화제에 출품할 작품으로 <마부>(강대진, 1961)를 선정했다. <오발탄>을 제치고 <마부>가 선정된 것은 무지한 관제 심사가 낳은 불공정한 결과라는 영화계의 여론이 형성되면서 국제영화제 출품을 둘러싼 논란이 일었다. 문교부가 내무부와 법무부에 <오발탄>의 심의를 의뢰한 4월 14일은 베를린영화제 출품을 위한 심사가 진행되던 시기였고 영화 <오발탄>이 영화계 내에서는 베를린영화제 출품작으로 유력시되었기 때문에, 문교부로서는 공식적인 심사위원회를 개최하고 출품작을 결정하기 전에 내무부와 법무부의 의사를 미리 타진해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국가기관에 의한 영화의 사전검열이 폐지되었던 당시 상황에서, <오발탄>에 대한 내무부의 부정적인 견해가 영화의 상영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겠지만 국제영화제 출품작을 결정하는 데는 반영되었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이 추론이 맞다면 4.19 국면이 야기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회적 분위기와는 별개로, 관이 주도하는 국제영화제 출품작 선정은 사실상 또 다른 검열의 관문으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국면 5.16 쿠데타가 발발한 지 일주일만인 1961년 5월 23일에 내무부는 “불순영화 금영조치 요망에 대한 여론 보고”(1961년 5월 23일, 내치정 제3846호)라는 문서를 문교부에 보냈다. 이 문서로부터 촉발된 대대적인 재검열이 한국영화 <오발탄>을 비롯한 총 7편의 상영금지 처분으로 마무리될 때까지가 두 번째 국면이다. 두 번째 국면에서 <오발탄>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문제는 상당히 복잡한데, 그것은 <오발탄>의 재검열이 내치정 제3846호 문서에서 언급한 총 57편(한국영화 35편, 외국영화 22편)의 영화들에 대한 재검열과 동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발탄>의 재검열 과정을 담은 서류는 <오발탄> 검열서류철 뿐 아니라 외국영화 <폭력교실 Blackboard Jungle>(1955) 검열서류철에도 남아 있다. 따라서 쿠데타 세력에 의한 대대적인 재검열 과정의 전체상은 문제가 되었던 57편 영화들의 검열서류철 모두를 검토함으로써만 구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오발탄> 검열서류철에 남아 있는 이 시기의 서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순영화 금영조치 요망에 대한 여론 보고”(1961년 5월 23일, 내치정 제3846호) 및 “한국영화 <오발탄>에 대한 여론 통보”(1961년 5월 28일, 내치정 제3971호) [그림 3] 한국영화 <오발탄>에 대한 여론 통보 (1961년 5월 28일, 내치정 제3971호) 내치정 제3846호 서류에서는 1958년 이후 개봉된 국산영화 35편과 외국영화 22편이 이른바 “불순영화”로 분류되어 있다. 재검토 대상의 광범위함과 문건 작성에 소요된 짧은 시간을 감안한다면 이 “불순영화” 목록에서 드러나는 지향점은 놀랄 만큼 분명하다. 대상에 오른 외국영화는 대개 영윤 시절에 풍속의 차원에서 문제가 되었던 작품들이었다. 한국영화의 목록을 보면 당대의 정치적 맥락에서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이승만과 김구의 전기영화 두 편과 ‘의적’을 다룬 <의적 일지매>(장일호,1961)를 제외한다면 사극은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다시 말해서 당대의 사회상이나 서민의 일상생활을 다룬 영화들이 집중적인 재검토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옥화>(신상옥, 1958), <내가 낳은 검둥이>(김한일, 1959), <아름다운 악녀>(이강천, 1958), <종말 없는 비극>(이강천, 1958), <철조망>(조긍하, 1960)처럼 한국전쟁의 여파를 다룬 영화들, 그리고 <돈>(김소동, 1958)과 <오 내 고향>(김소동, 1959), <하녀>(김기영, 1960), <3등 과장>(이봉래, 1961)처럼 1960년대 초 가족 드라마의 보수적 관점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벗어나 있는 영화들이 포함되었다. 5.16 직전에 베를린영화제 출품작으로 결정되었던 <마부>까지 포함된 것은 다소 의외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이 도시 빈곤층의 일상을 다룬다는 점이 중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밖에 <춘희>(신상옥, 1959), <쟌발쟌>(조긍하, 1961), <카츄샤>(유두연, 1960) 같은 외국 번안물과 외국으로부터 유래한 ‘투명인간’을 소재로 한 작품이 ‘사회불합리’의 이유로 문제가 되었다. 장르적으로는 미국 갱영화의 영향을 현저하게 받은 범죄영화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내치정 제3971호의 서류는 불순영화 목록을 전달한 지 5일 만에 다시 내무부 치안국장이 문교부 문화국장에게 보낸 <오발탄>에 대한 별도의 의견서이다. 이 서류가 지적하는 <오발탄>의 핵심적인 문제는 “자본주의에 대한 증오심”의 조장과 “반미감정의 극단화”,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절망적 비전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오발탄>이 왜 문제가 되었는지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2) “국산영화 <오발탄> 재검열의 건”(1961년 7월 18일, 문화 제2412호) 및 “국산영화 <오발탄> 상영보류의 건”(1961년 7월 20일, 문화 제2412호) [그림 4] 국산영화 <오발탄> 재검열의 건 (1961년 7월 18일, 문화 제2412호) 7월 18일자 서류에서는 내치정 제3971호에 표명된 내무부 치안국장의 의견에 따라 <오발탄>의 재검열을 위한 시사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이에 대한 재결을 요청한다. 1961년 7월 20일 3시에 문교부 시사실에서 열릴 시사회에는 내무부 치안국장, 법무부 검찰국장(정보과장), 중앙정보부 제3국장, 재건국민운동본부 예능과장, 문교부 문화국장 등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7월 20일자 서류는 시사회 결과 <오발탄>의 상영보류가 결정되었음을 보고하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시사회에 참석했던 법무부,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정보부의 관계관들이 제출한 “검열 의견서”가 첨부되었다. 내무부는 5월 28일에 제출한 내치정 제3971호의 견해로 검열의견서를 갈음하였다. (3) “상영보류 작품 합동심사 결과보고”(1962년 3월 22일) [그림 5] 상영보류 작품 합동심사 결과보고 (1962년 3월 22일) 영화 검열 사무가 문교부로부터 공보부로 넘어온 후이기 때문에 이 서류는 공보국 영화과에서 작성하였다. 이 서류는 1961년 5월 23일 내무부에서 작성한 총 57편의 “불순영화” 가운데 공보부에서 재심을 결정한 11편(국산영화 3편, 외국영화 8편)에 대하여 1962년 1월 26일부터 29일까지 실시한 심사의 결과를 담고 있다. 내무부의 “보류 작품 영화 심사결과 통보”(1962년 2월 10일, 내치보 제65호)와 중앙정보부의 “검열의견서(종합 재검열 분)”(1962년 2월 6일로 추정)가 첨부되어 있다. 이 서류에 따르면 당시 공보부의 재심 대상으로는 한국영화 <하녀>, <고바우>(조정호,1959), <오발탄>, 그리고 외국영화 <템페스트 La Tempesta>(1958), <챠타레부인의 사랑 Lamant De Lady Chatterley>(1960), <로마의 여성 La Romana>(1954), <적과 흑 Le Rouge Et Le Noir>(1954), <폭력교실>, <위험한 고빗길 Les Tricheurs>(1958),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 J'irai cracher sur vos tombes >(1959), <비트 걸 Beat Girl>(1961) 등이 올랐다. 이 가운데 재심에 참석했던 내무부, 문교부, 중앙정보부, 공보부 등 네 기관 가운데 다수가 상영불가 의견을 낸 7편, 즉 <오발탄>, <템페스트>, <챠타레 부인의 사랑>, <로마의 여성>, <적과 흑>, <위험한 고빗길>,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 등이 최종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았다. 세 번째 국면 <오발탄>의 제작사인 대한영화사 대표 김성춘은 1963년 1월 26일 첫번째 탄원서를 제출한 것을 시작으로 1963년 8월 23일 마침내, <오발탄>의 상영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총 네 차례에 걸쳐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 기간 동안 일부 화면의 삭제와 자막 및 몇몇 화면의 추가 등의 자진 개작을 하고 탄원서를 제출한 외에, 제작자 김성춘은 감독 유현목과 함께 여러 비공식적인 루트로 로비를 펼치는 등 <오발탄>의 상영금지 해제를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했다. 서류들에 나타나는 공식적인 발화의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성춘과 유현목의 ‘비공식적인 노력’이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구술자료 및 여타의 자료들을 참조함으로써 공식적인 서류가 발화하지 않는 이면의 맥락까지 가급적 살펴보고자 한다. 세 번째 국면의 검열 서류들은 다음과 같다. (1) “국산영화 재심사 신청의 건”(1963년 1월 23일 김성춘 작성, 26일 공보부 접수) 및 “국산영화 <오발탄> 재심사 신청의 건 반려”(1963년 2월 25일, 435호) [그림 6] 국산영화 <오발탄> 재심사 신청의 건 반려 (1963년 2월 25일, 435호) 첫 번째 탄원서는 접수된 지 한 달 만에 반려되었다. 제435호의 “반려” 서류에서는 “해(該) 기간 중에 재심사에 불응한 작품 및 불허가 조치된 작품은 일체 재심 청구를 접수치 않기로 하였으므로 재심이 불가”하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재심 신청과 반려 사이에 <오발탄>의 재심이 있었던 사실은 외국영화 <폭력교실>의 검열서류철에 철되어 있는 <오발탄>의 재심 관련 서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서류에 따르면 공보부는 2월 13일 외국영화 <폭력교실>과 <오발탄>의 재검열 시사를 열었고 재심위원으로 참석한 최유현과 백영석은 두 작품 모두 상영을 보류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재검열 의견서”, 1962년 2월 13일) 그런데 두 작품 모두 상영보류 판정이 내려진 지 3일 만인 2월 16일에 문교부 문화국장은 <폭력교실>은 2개 처를 단축하고 상영을 인정해도 무방하지만 <오발탄>은 “현실과는 너무나 부합되지 않은 비참한 스토리”라면서 상영보류 의견을 표명하는 공문을 공보부 공보국장 앞으로 보냈다. (“<폭력교실> 및 <오발탄>의 재검 시사의 건”, 1962년 2월 16일) 결국 <오발탄>은 상영보류가 해제되지 않았고 두 차례의 합동심사를 거쳐 외국영화 <폭력교실>은 7개 처를 삭제 또는 단축하는 것을 조건으로 상영이 허가되었다. (2) “진정서”(1963년 6월 11일 김성춘 작성, 공보부 접수), “진정서”(1963년 6월 11일 김성춘 작성, 1963년 7월 8일 중앙정보부 접수), “부전지”(1963년 6월 13일), “민원서 이첩”(1963년 7월 10일, 중비서 060), “부전지”(1963년 7월 22일), “영화 <오발탄>에 관한 각계의 의견”(날짜 및 작성자 불명) “국산영화 <오발탄> 상영허가에 대한 진정서 회신”(1963년 7월 22일, 분류기호 1733.01),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1963년 7월 22일, 분류기호 1733, 내무부),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1963년 7월 22일, 분류기호 1733, 중앙정보부), “민원서 처리결과에 대한 통고”(1963년 7월 25일, 분류기호 1733.01 3042), “극영화 <오발탄> 상영허가에 대한 진정서 회신”(1963년 7월 25일, 분류기호 1733.01 3041) [그림 7] 진정서 (1963년 6월 11일 김성춘 작성, 공보부 접수) [그림 8]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 (1963년 7월 22일, 분류기호 1733, 중앙정보부) 김성춘이 작성한 진정서 두 통이 공보부(6월 13일)와 중앙정보부(7월 8일)에 접수되었다. 이 진정서에서 노모의 “가자” 대사를 “저 푸른 벌판의 양떼를 따라가자”로 바뀌는 개작이 처음 언급되었다. 이 진정서 이외의 서류들은 이 진정서가 접수되고 나서 이루어진 공보부와 중앙정보부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6월 13일자 “부전지”는 진정서를 공람 처리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특기할 만한 것은 1962년 1월 26일~29일 사이에 있었던 재심결과 불허가 조치되었지만 “영화내용은 건전하다”는 담당관의 견해가 피력되어 있다는 점이다. 당시 담당관은 공보국 영화과 행정서기로 근무하고 있던 신봉승으로, 그는 검열관이라는 자신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오발탄>의 해금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신봉승 구술증언) 역시 신봉승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7월 22일자 “부전지”는 제작자 스스로의 개작과 “예술적 가치”에 대한 “신문 및 미국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맥칸 박사 등”의 견해를 언급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오발탄>의 상영금지 조치를 해제할 것을 주장한다. 이 “부전지”의 내용을 참조하면 “영화 <오발탄>에 관한 각계의 의견”이라는 문서 또한 같은 시기에 신봉승이 작성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신봉승은 자신이 <오발탄>의 해금을 위해 신문기사 등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여 서류 기안 당시 첨부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신봉승 구술증언) 첨부 자료 가운데 특히 흥미로운 것은 리처드 다이어 맥칸(Richard Dyer MacCann)이 당시 공보부 공보국장 이성철 앞으로 보낸 “베니스영화제 출품작(Feature Film Entry for Venice Film Festival)”이라는 문서다. 미국 남가주대학교(USC) 영화과 교수였던 리처드 다이어 맥칸은 다큐멘터리를 전공한 학자로서 미국무성의 지원을 받아 1963년 4월부터 8월까지 4개월 간 한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는 국립영화제작소와 중앙대학교 등지에서 강의를 하고 한국의 여러 영화인들과 접촉했다. (박익순 구술증언, 김정옥 구술증언) 신봉승은 국립영화제작소의 감독인 배석인이 소개하여 리처드 다이어 맥칸과 만났고, 특히 그와 <오발탄>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구술하고 있다. (신봉승 구술증언) 리처드 다이어 맥칸은 베니스영화제에 출품할 한국영화에 대한 의견을 제시해달라는 공보부의 요청에 따라 정부 추천 두 작품(<굴비>(김수용, 1963)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1963))과 사적인 경로(미국으로 돌아간 후 맥칸이 쓴 글에 따르면 <오발탄>을 그에게 추천한 것은 극작가 이근삼이었다.)를 통해 보게 된 <오발탄>에 대한 평가를 적은 보고서를 냈다. 이 글에서 맥칸은 <굴비>는 일본 영화 <도쿄 이야기 東京物語>(1953)를 표절한 작품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미국의 전쟁영화와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베니스영화제 출품작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썼다. 대신 그는 <오발탄>이야말로 “세계 수준에 있는 작품”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 뿐만 아니라 <오발탄>에 대한 맥칸의 견해를 인용한 기사들이 여러 신문에 게재되었고 한국영화의 해외진출을 위해서는 <오발탄>의 상영금지 조치가 해제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영화 <오발탄>에 대한 각계의 의견”이라는 문서에 첨부된 것은 당시의 이 같은 여론을 보여주는 기사들 중 일부이다. [그림 9] Feature Film Entry for Venice Film Festival (발신 : Richard Dyer MacCann, 수신 Lee Sung Chul) 요컨대, 1963년 7월 당시에 검열관 신봉승, 국립영화제작소 배석인을 포함한 공보부 내 인력들, 그리고 이근삼을 비롯한 문화계 인사들, 그리고 미국의 영화평론가까지 합심하여 <오발탄>의 해금을 위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공보부는 7월 22일 노인의 “가자” 대사 및 화면 삭제와 미군이 명숙을 희롱하는 장면을 단축할 것을 조건으로 상영을 허가하는 공문을 작성했다. <오발탄>의 상영을 허가한다는 결정은 제작자 김성춘, 그리고 이미 7월 10일자 “민원서 이첩”(중비서 060)에서 “상연 허가함이 가할 것”이라는 의견을 표명한 바 있던 중앙정보부와 <오발탄>의 상영금지를 결정하는데 참여했던 내무부에도 통고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3일 후, 결정이 뒤집혔다. 중앙정보부와 제작자 김성춘을 수신인으로 한 7월 25일의 서류 두 종에는 <오발탄>의 상영을 불허가한다고 적혀 있다. 전후 맥락을 이해할 만한 다른 서류들이 없기 때문에 이처럼 갑작스럽게 결정을 번복한 것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이 사례는 검열제도가 일관된 원칙에 따라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서 작동하기보다는 여러 우연적 요소들(예컨대, 검열관의 자의적 판단이나 외부의 정치적 압력, 또 피검열자와 검열자 간의 협상 등과 같은)이 결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자의성’은 사실 검열제도가 작동하는 근본적 방식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3) “탄원서”(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윤봉춘 제출, 1963년 8월 1일 공보부 접수), “극영화 <오발탄> 상영에 대한 탄원서 회신”(1963년 8월 5일, 분류기호 1733.01 3226) [그림 10] 탄원서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윤봉춘 제출, 1963년 8월 1일 공보부 접수) <오발탄> 상영보류 해제를 위한 탄원서가 한국영화인협회에 의해서 제출되었으나, 공보부는 7월의 재심 결과에 따라 상영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회신하였다. (4) “탄원서”(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윤봉춘 제출, 1963년 8월 21일 공보부 접수),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 해제”(1963년 8월 21일 작성, 23일 장관 결재, 분류기호 1733.01), “극영화 <오발탄> 상영허가증 교부”(1963년 8월 21일 작성, 23일 장관 결재, 분류기호 1733.01 3473),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1963년 8월 23일 작성, 28일 장관 결재, 분류기호 1733. 3543과 1733. 3544) 8월 21일 한국영화인협회가 탄원서를 제출하자 곧바로 공보부는 <오발탄>의 상영허가 보류를 해제하고 상영허가증을 교부했다. 이어서 <오발탄>의 상영금지 결정에 참여했던 중앙정보부와 내무부에 이같은 사실을 통고한다. 상영허가 보류 해제 문서에서는 미국 MGM 및 영화업자들이 <오발탄>의 수출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 리처드 다이어 맥칸의 고평과 국내 언론들에 의한 상영허가 여론 등이 해금의 이유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이유로 든 사실들과 관련한 근거 자료는 이미 1963년 7월에 제출된 바 있고 8월 21일에 한국영화인협회가 제출한 탄원서도 이미 거부되었던 8월 1일자 탄원서와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 그리고 시사 및 재평가 같은 재심의 절차 없이 탄원서가 제출된 날 바로 허가증교부 절차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오발탄>의 상영금지 조치 해제에는 어떤 다른 힘이 작동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 다른 힘이 무엇이었든 간에, 최종 허가 당시에 제한사항은 여섯 군데의 화면 및 대사 삭제와 화면 단축이다. 이전부터 문제가 되었던 “가자” 대사와 미군이 명숙을 희롱하는 장면 외에 상이군인이 소변을 보는 장면이 추가로 삭제되었는데, 감독인 유현목은 이 삭제 처분이 소변을 보는 장소가 한국은행 앞이었고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4) “영화상영허가 신청서”(1963년 10월 18일), “국산영화 <오발탄> 복사판 상영허가”(1963년 10월 19일, 분류기호 1733.12 4096), “영화상영허가증”(1963년 10월 19일) 상영을 허가받은 <오발탄>은 1963년 10월 12일 을지극장에서 재개봉되었다. 이 서류들은 재개봉에 사용된 프린트 외에 별도로 한 벌의 프린트(복사판)의 상영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식민지시대 이래 한국의 검열제도에서는 같은 영화라 할지라도 그 복사판은 원칙적으로 별건으로 처리되어왔다. 이는 원본과 복사판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우려와 더불어, 영화 검열이 내용에 대한 검토 뿐 아니라 프린트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까지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4. 재개봉 이후의 서류들 1963년 10월의 재개봉 이후에 작성된 서류들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첫째는 대한영화사 김성춘으로부터 영화 <오발탄>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양도받은 동원영화사 김진문이 이를 공보부에 통보하고 새롭게 상영허가서를 받는 과정에서 생산된 서류들이고 둘째는, 세계문화자유회의에서 유현목 감독이 이만희 감독의 영화 <7인의 여포로>(1965)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 일 때문에 반공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던 당시에,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과거 <오발탄>의 상영금지 이력과 관련한 사실조회를 요청하는 문서이다. 1. 당시 동아일보가 보도한 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권순영(서울지법 소년부 지원장), 이병일(제협 회장), 김은우(이대 교수), 홍승면(한국일보 편집국장), 오종식(영륜위원장), 오영진, 서정덕(문교부 문화국장), 최운조(외무부 방교국장), 노태준(문교부 예술과장), 문총사무국장, 법무부 국사처 영화과장. 《동아일보》, 1961.03.31.석간 3면.
종종 임권택 을 공격하기 위해서 ‘따분한 계몽영화’라는 표현을 동원한다. 이 단정적인 범주와 싸우는 것은 꽤 까다로운 일이다. 그건 공격적인 지시어를 꺼내 든 쪽도 마찬가지이다. 계몽은 매우 긴 철학적 토론의 역사를 지닌 개념이기 때문이다. 계몽은 두 갈래 길의 교차로에 서 있다. 하나는 합리주의 프로그램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국가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지식 사이에 스며든 권력 장치의 작동방식이다. 물론 여기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칸트이다. 잘 알려진 대로 칸트는 1784년 계몽주의란 무엇인가, 라고 물어본 다음 1798년 다시 한 번 약간 질문을 바꾸어 혁명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어보았다. 그사이에 놓여있는 것은 프랑스 대혁명이다. 논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나치를 피해 망명길에 쓴 「계몽의 개념」에서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계몽의 방식에 몸서리쳤다. 계몽이라는 이름의 후퇴. 이 역설적인 패배. 우리들이 계몽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꺼내 들 때 대부분은 이 책에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잘 알려진 대로 이 글은 다른 단상들과 함께 1969년 4월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책으로 묶였다) 하지만 푸코는 이 말을 재치 있게 뒤틀었다. 그는 계몽주의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계몽이라는 사건은 무엇입니까, 라고 되물었다. 이 질문(을 빌린 대답)을 읽은 사람들은 그런 다음 푸코와 하버마스 사이에 있었던 지적인 불화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자리는 이 논쟁을 다루기에 적절치 않다. 하지만 나는 ‘계몽영화’라는 개념 속에 서로 완전히 대립적인 두 갈래 길이 놓여있다는 것만은 환기시키고 싶다. 종종 이 논제를 쉽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게으른 비평가들은 일련의 영화들에 대해서 (미처 정의내리지 못한) ‘계몽영화’라고 부른 다음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그 영화들이 국가에 의해서 산업에 부과된 강제적인 수행인 것처럼 부른다.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도시는 매우 빠른 속도로 근대의 과정을 밟아나갔고 농촌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형태에 머물러 있는 단계가 장기적으로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 존재하는 (약간 따분한 표현이지만) 둘 사이의 간극에는 어떤 지체가 존재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단계가 있다. 여기에는 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관계를 일시에 와해시키고 경작자의 농작물에 대한 노동의 결과를 자본주의 노동지대로 전화시키는 과정에는 토지의 소유라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차액지대라는 다소 까다로운 잉여가치의 모순이라는 계산법이 기다리고 있다. 그 계산은 내 몫이 아니다. 이 과정에 국가가 폭력적으로 개입했을 때 예술이 항상 국가를 비판한 것은 아니다. 도브첸코는 이 개입을 시적으로 옹호했다. (< 대지 Zemlya >(1930)) 부뉴엘은 처음에는 다소 에매한 입장을 취했다. (< 빵 없는 대지Las Hurdes >(1933)) 반대로 누군가는 이 개입을 필요한 악이라고 옹호하기도 하였다. 물론 필요한 악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잘 알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평범한 악이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arung」 이 시기에 임권택 은 근심스럽게 그 폭력을 바라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강제적인 과정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임권택은 (아주 직접적인 의미에서) 계몽교훈극 영화에 가담했다. 그건 사실이다. 아마 그 첫 영화가 < 아내들의 행진 >일 것이다. 1974년은 새마을 운동이 국가주도로 진행되고 있었던 해이다. 하지만 그런 다음 < 아내 >와 < 옥례기 >를 찍고 나서 새마을 영화를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 ‘이후’이다. 임권택은 자발적으로 계몽 교훈극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사태가 기묘한 것은 이 첫 번째 교훈극이라고 부르고 싶은 영화가 <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다. 이때 임권택은 단순하게 계몽에 합류하는 이상으로 사회 안의 사람이 가져야 할 도덕에 대해서 선악을 구별한 다음 가혹하게 비판하기 시작한다. 이때 공동체의 도덕은 다소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임권택의 도덕은 지나가 버린 공동체와 도래할 (혹은 해야 할?) 공동체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지금은 틀렸지만 그 비판이 어느 쪽을 향하는지 종종 모호하다. 그래서 다소 따분하게 여겨지는 훈고주의적 향수처럼 느껴지던 설교가 어떤 때는 갑자기 공허할 정도로 원칙적인 자리에 창백하게 머물면서 현실 안에서 거의 불가능한 비판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임권택의 일관성은 거의 무조건적인 충실함이다. 무엇에 대한? 여기에 이상한 대답이 기다리고 있다. 이웃에 대한 충실함. 이때 자기 자신의 주인의 자리를 잃지 않으면서 이웃의 자리에 대한 충실함이 지켜져야 할 때 여기에는 자기와 이웃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속되어야 하는 전체선이라는 불길한 구름이 떠오른다. 우리를 내려다보는 구름. 그것이 무엇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투명한 덩어리. 건드릴 수 없는 자리에 떠 있는 저 그 무엇. 나는 여기서 구름이라는 표현을 단지 문학적 수사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붙잡을 수도 없고 건드릴 수도 없는 저 모호함이 종종 공허하게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저것이 마치 (이 말을 피하고 싶지만) 큰 타자처럼 아주 분명하게 머물고 있음을 환기시키고 싶다. 이 세계에는 어떤 권리도 없고 오직 의무와 책임만이 있다. 어떤 의무? 그것을 쳐다보아야 할 의무. 어떤 책임? 그 의무를 지켜야 할 책임. 그것이 이 세계에 머무는 방법이다. 임권택은 이 방법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문제는 종종 그 구름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하고 싶어 할 때 생긴다. 그때 임권택은 그 자리를 법정에 넘기거나(< 법창을 울린 옥이 >) 혹은 왕의 자리에서 명령하는(< 망부석 >과 < 십년세도 >) 형식을 취했다. 그런 다음에도 그의 영화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이 자리를 구태여 남겨 놓았다. 종종 임권택이 절제와 단호한 결정에 따른 결말을 마련했다고 설명하는 후기 영화들에서조차 그 자리는 좀 더 세련되고 때로 뒤로 물러나 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 데도 김두한이 어린 시절의 친구 김동회가 혼마치깡의 일본 야쿠자 하야시 패의 앞잡이가 되어 대결을 청할 때 갑자기 지식인이었지만 거지패로 전락한 사내가 끼어들어 상대방의 민족의 도리를 외마디처럼 따져 묻는다. (< 장군의 아들 >) 나는 임권택의 영화 전편을 놓고 이 자리에 관한 긴 목록을 작성할 수도 있다. 여기서 내가 제기하는 질문은 큰 타자의 자리를 가장한 국가의 요구와 임권택 스스로 자발적으로 나서서 그 자리를 채우려는 노력 사이에서 1970년대 혹은 80년대 초의 영화들이 겹치면서 사태를 까다롭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거의 이야기되지 않는 < 복부인 >은 임권택 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며 그래서 심지어 순수하다고까지 말하고 싶은 계몽교훈극이다. 좀 이상한 것은 이 영화가 1979년 10월 26일 이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유신을 국가의 이념으로 내세우고 새마을운동을 근대화의 정책으로 집행했던 장기집권 독재자인 대통령이 부마항쟁에 이어진 요정에서의 총격으로 사망한 다음에 만들어진 이 영화에는 아주 잠깐 있었던 80년의 봄의 기운이 전혀 없다. 그건 그해 만든 다른 영화 < 짝코 >에서 그나마 희미하게 느껴지던 그런 열린 숨통의 약한 기운조차 없다는 점에서 더 이상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임권택은 정치적인 담론들 사이에 가까이 다가간 적이 없다. 물론 <복부인>은 우수영화에 선정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임권택의 영화는 우수영화에 선정되지 않은 영화를 찾기 힘들다. 심지어 반공영화에 대한 반(反)영화라고 부르고 싶은 <짝코>도 반공 우수영화로 선정되었다. 그러던 시절이 있었다. <복부인>을 보고 난 다음 잠시 멈추게 되는 것은 부의 축적과정에 대한 분노에 가까운 경멸감이다. 그것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과정 자체에 대한 분노라는 점에서 정치경제학적인 계몽의 관점에 선다는 사실에 당황스럽고 그럼에도 여기에 그 과정에 대한 분석적 비판이 전혀 없다는 것이 어리둥절하다. 임권택의 새마을 운동 계보 임권택 은 돈을 종종 징그럽게 쳐다본다는 인상을 준다. 내가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서 반복적으로 마주친 것은 돈에 대한 그의 태도이다. 마치 임권택은 돈이 자본주의의 형식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전염병인 것처럼 대하면서 돈을 다루는 등장인물들의 관계 사이에서 그 누군가의 악에 의해 다른 누군가가, 혹은 그 전체가, 붕괴되는 대신 아무 문제 없었던 관계에 돈이라는 불순물이 끼어들어서 생겨난 새로운 관계 사이의 잉여가치에 의해 타락하는 것처럼 다루었다. 여기서 이 설명을 경제적인 관점으로 문제 제기하는 것은 요점이 아니다. 물론 자본주의는 잉여가치의 형식 자체의 비밀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그 잉여가치의 이면에 숨겨진 그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다룬다. 미처 보지 못했지만 형식 뒤에 숨져진 돈의 이면이 만들어내는 물신숭배 속에서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다룬 첫 번째 영화는 < 잡초 >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가정한다. 그런 다음 그는 긍정의 계열과 부정의 계열 양쪽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전자의 계열이 ‘새마을 영화’인 < 아내들의 행진 > < 아내 > < 옥례기 >로 이어진다면 후자는 < 맨발의 눈길 > < 내일 또 내일 > < 복부인 > < 오염된 자식들 > 그리고 < 티켓 >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런 다음 마치 이것이 돈에 대한 이론적 실수인 것처럼 양쪽의 계열 모두 갑자기 사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임권택이 함께 계몽교훈극의 양식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리고 돈의 문제가 완전히 이야기에서 쫓겨난 것도 아니다. 다만 돈의 운동이 관계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관찰을 중단했을 뿐이다. 이 두 개의 계열에서 이상한 것은 한쪽에서 긍정적인 가치로 다루었던 부의 축적이 다른 한쪽에서는 수수께끼처럼 악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두 개의 계열은 거의 공존하듯이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마치 임권택은 둘 사이에 아무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번갈아 두 계열 사이를 오갔다. 여기에 단순하게 시골과 도시의 대립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내>는 서울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이다. 반대로 <티켓>은 이전의 영화들이 무대로 삼았던 서울로부터 강원도의 작은 항구도시로 물러난다. 물론 둘 사이에 약간의 차이는 있다. 하나는 부의 축적을 향한 ‘선한’ 의지가 있다. 다른 하나는 부의 효과에 의해 ‘나쁜’ 선택을 한다. 물론 그 둘이 결국 도달하는 차이는 정반대의 자리이기는 하지만 문득 그 결과를 바라보면서 그 둘이 서로에 대한 외설적 버전이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둘의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 복부인 >은 그 점에서도 좀 괴상해 보인다. 임권택 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희극에는 자신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약점을 고백하곤 했다. 그의 영화는 대부분 무겁고 종종 어두우며 희극적인 요소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건 처음부터 그러했다. 나는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서 내내 낭만적인 기분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이따금 희극영화를 만들긴 했지만 1969년에 만든 시인 천상병의 기행에 관한 희극 < 신세 좀 지자구요 > 이후 임권택은 이 장르를 완전히 잊은 것처럼 보였다. <복부인>은 거의 대부분의 장면이 조금도 우습진 않지만 임권택은 그녀들의 행동을 다소 과장된 톤으로 우스꽝스럽게 다룬다는 점에서 희극에 가깝다. 이 영화는 이미 제목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한혜숙이 연기하는 한 여사가 달동네에서 살다가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복부인이 되어 처음에는 아파트 투기를 하다가 땅 투기에 나서고 그녀들을 상대로 커미션을 받던 부동산 업자가 사기를 치고 해외로 달아나려던 순간 경찰이 이들을 덮쳐 모두 감옥으로 간다. 희한하게도 이 영화에서 고등학교 동창으로 나오는 세 여자는 이름을 부르는 대신 서로에게 ‘여사’라는 호칭으로 부르면서 끝내 우리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말하자면 익명의 존재. 그녀들은 누구나 그 자리에 불려갈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며 또한 누구도 그 자리에 가면 안 된다는 경고가 거기에 있다. 한 컷으로 촬영된 들고찍기 두 번째 괴상한 점. < 복부인 >은 임권택 의 영화에서 가장 난폭한 카메라의 움직임을 지닌 영화이다. 임권택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카메라를 들고 찍는 것을(hand_held) 선호하지 않는다. 그는 정교한 구도를 선호하며 종종 그 자리에 멈춰 서서(fixed) 등장인물을 바라보거나 때로는 그냥 내버려두는 것만 같은 거리를 선택한다. 더군다나 임권택은 <복부인>을 찍은 이듬해 그의 가장 명상적인 영화 중의 한편인 < 만다라 >를 그렇게 멈춰 선 채 망원렌즈로 멀리서 바라보면서(long_shot) 찍었다. 그는 그때 자신의 촬영 스타일의 변화를 찾고 있지 않았다. 임권택은 사실상 < 족보 >에서 자기 스타일을 찾았고 그런 다음 그걸 밀고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복부인>은 거의 예외적으로 인물을 따라 카메라를 들고 찍으면서 몹시 흔들리거나 때로 인물 동선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당신은 이때 가벼운 경량 디지털카메라가 아니라 무시무시하게 무거운 미첼 필름 카메라로 영화를 찍던 시절이라는 것을 셈에 포함시켜야 한다. 임권택이 여기서 서정민에게 요구했을 카메라의 스타일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뉴스를 찍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 복부인의 생태를 고발한다는 심정으로 따라가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그래서일지 모르지만 <복부인>은 드물게도 (그리고 아마 거의 마지막으로) 1.33 사이즈로 찍은 영화이다.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이 영화의 화면을 보고 있으면 고전적인 4대 3 비율의 텔레비전 모니터가 떠오른다. 만일 스타일로 설명한다면 <복부인>은 <족보> 이후 이어지는 일련의 나중에 나타날 것의 준비라는 과정의 바깥에 놓여있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하게 불순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영화에 담긴 분노가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보는 내내 그걸 느낀다. 그래서 그 과정 자체를 중단하고서라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그 어떤 대상이 여기에 있다. 이때 해야 할 그 무엇이 나중에 나타날 그 무엇을 방해하고 있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대목은 여기에 있다. < 복부인 >은 나중에 나타날 그 무엇과 타협할 수 없는 과정에 대한 부정적 계기인 것이다. 우리가 이걸 완전히 역전시켜서 물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 <복부인>에서 임권택 이 한 것은 이 일련의 과정에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걸 해야만 했다. <복부인>은 이야기 안에서 보기에는 도덕적이지만 형식적으로 이 영화는 임권택에게 윤리적인 결정이다. 그걸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 그리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걸 한다. 나는 지금 <복부인>의 미학적 결정을 물어보는 중이 아니다. 이 영화를 형식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간다면 너무 빈곤하고 앙상해서 누구라도 그냥 빨리 지나쳐가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왠지 여기에는 임권택이 이건 그렇게 해야만 한다, 는 어떤 태도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복부인>은 < 짝코 >가 만들어지던 해에 거의 동시에 만들어졌고 < 깃발 없는 기수 >와 < 만다라 > 사이에서 만들어졌다. 물론 다른 계열이 여기에 공존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복부인>은 < 내일 또 내일 >에서 < 오염된 자식들 >로 가는 그사이에 놓여있다. 여기에는 다루어야 할 그 무엇에 대한 충동과 그것이 불러일으킨 진동의 목표는 형식 안에 통합될 수 없다는 어떤 두려움이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내가 임권택의 내면을 말할 수는 없다. 그건 비평의 자리를 훨씬 벗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설명할 수는 있다. 임권택에게 돈은 미학적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에서 더 있는 그 무엇이다. 후렴구 같은 반복. 더 있는 그 무엇. 그래서 때로 임권택의 계몽교훈극들은 마치 자본주의 바깥에 놓인 것처럼 시작한 다음 거기에 돈이 침입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다소 따분하게 설명하면 임권택은 고전경제학에 머무르는 것처럼 보이고 그 잉여의 형식을 분석하는 자리로 밀고 나가지는 않기 때문에 그가 보수주의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임권택이 단지 국책영화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수동적인 영화들을 추월해서 자발적으로 그 과정의 불행과 경제적 행위 뒤에 놓여있는 도덕적 타락을 공격하기 시작할 때 그는 무언가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해야만 한다면 심지어 자신의 영화 안에서 나타나야 할 과정의 형식조차 포기한다. <복부인>이 취한 다소 보수적(일 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 부정확해서 종종 도덕 교과서적)인 관점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섬뜩해지는 순간은 그때 나타난다. 내내 돈의 교환관계에서 계약의 사법적 테두리 안에 머물면서 위법의 행위에 대해서 반감을 표시하던 이야기에서 비교적 주변에 놓여있던 인물들이 한 여사와 함께 계급적 상승을 하는 동안 이따금씩 등장하다가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주인과 노예의 전도된 관계로 도약을 시도할 때 임권택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경멸의 태도를 취한다. 이를테면 한 여사의 어머니. 그녀는 영화에서 아주 가끔 등장해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다음 이야기는 한 여사를 따라가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의 변화를 과정 안에서 보면서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해한다. 하지만 아주 이따금 등장하는 어머니는 마치 그녀의 인격이 집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으로 이 신에서 저 신으로 옮겨갈 때 점프한다. 아니, 차라리 돈이 만들어낸 재산과 그에 따른 부의 축적이 가져온 새로운 관계에서 두 명의 다른 어머니가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논점이 있다. 돈은 인물과 사회 사이의 매개가 아니다. 돈이 가져오는 가장 큰 효과는 그 인물에 대한 타자로서의 또 다른 그 인물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때 그 인물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물이 된다. 좀 더 명료한 설명. 그 인물에 돈이 플러스 될 때 그 인물은 +a가 아니라 a라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혹은 이동하는 것이다. 이게 왜 중요한가? 임권택은 모순이 발생할 때 그 안에서 어떤 종합도 시도하지 않는다. 반대로 모순이 점점 더 확장되면서 전체가 붕괴되어 간다. 다만 그는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있다. 몹시 무서운 사실. 아무리 모순이 확장되어도 세계가 붕괴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건 그의 경험주의적 진술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확장되어도 세계가 몰락하지 않을 때 세계는 끝이 없는 지옥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물은 간신히 견디면서 점점 더 찌그러진다. 그때 항상 임권택이 선택하는 방법은 둘 중 한 가지이다. 그 과정에서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갔을 때 이야기의 고정점이 되었던 인물을 삭제하거나 아니면 이야기 바깥으로 떠나보내는 것이다. 혹은 내보내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복부인>은 <짝코>와 동일한 결말을 맞는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인지도 모르다. 혹은 <만다라>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있으면 참선의 세계에서조차 그런 결정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나면 세계가 남는다. 혹은 지옥이 기다린다. 세 번째 괴상한 점, 혹은 맨 처음의 질문. < 복부인 >이 계몽교훈극의 형식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이 영화의 교훈은 어딘가 당혹스럽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긴 설교가 나온다. 한 여사를 비롯한 세 명의 복부인은 토지 사기를 당하기 직전 현장을 덮친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구조받듯이 경찰서에 잡혀 온다. 이때 마침 그녀들이 땅 투기에 치마 바람으로 바깥으로 나도는 동안 내기 화투에 빠진 남편들이 타짜들의 짜고 치는 도박에 걸려들기 직전 마찬가지로 현장을 덮친 형사들에게 구조받듯이 경찰서에 잡혀 온다. 나는 일부러 복부인과 그녀들의 남편을 거의 반복하듯이 썼다. 그런 다음 그 둘은 우연히도 운 나쁘게 같은 경찰서에서 서로 마주치게 된다. 복부인과 남편의 대면, 그리고 남편의 일장연설 양쪽을 번갈아 본 다음 “지금이 어느 땐데 정신 못 차리고 이래?”라고 야단치는 형사에게 한 여사의 남편이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형식을 빌려서 긴 설교를 한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사기를 해서 얼마의 돈을 땄든 원망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저기 앉아있는 복부인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사람들입니다. 노름판에서의 희생자들은 그 판에 끼어든 사람들로 끝나지만 저들 복부인들의 투기는 사기 도박꾼들보다도 훨씬 반사회적인 해악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저 여자들 때문에 주택과 땅값은 천장을 모르고 뛰고 결국 그 대가를 마지막으로 치르는 것은 저 여자들의 투기와는 하등 관계없는 영세민이요, 실수요자들입니다. 저들이야말로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하게 찍혔고 그러면서 필요 이상으로 길게 이어진다. 영화는 이 대사를 하는 동안 마치 경청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약간 웅변을 하는 것처럼 하는 이 설교는 < 복부인 >이 일종의 교육극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환기시킨다. 그들은 교훈을 얻기 위해서 시련을 겪었고 이제 설교를 들어야 할 시간이다. 이 대사가 끝나면 암울한 감옥이 보여지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영화는 끝난다. 대사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설명으로 이어진다. 이 대사 안에서 땅 투기와 도박 중에 어느 쪽이 더 “반사회적 해악”인지를 따지거나 남편이 아내에게 그렇게 잘못을 따져 물을 자격이 있느냐고 바보같이 반문하는 것은 논점을 벗어난 것이다. 이 대사는 <복부인>이라는 계몽교훈극이 주는 교훈이라는 것이 요지이다. 그런데 이때 이 대사에는 어떤 교훈도 없다. 한 여사를 비롯한 세 명의 복부인이 경찰서에 온 것은 경찰의 부동산 사기단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그녀들의 투기 과정이 드러나 함께 검거된 것이지 그녀들의 땅 투기 과정에서 “투기와 아무 상관 없는 영세민들이요, 실수요자들의” 고발 때문에 여기에 온 것이 아니다. 또한 이야기에서 세 명의 복부인은 서울 인근 지역의 재개발 지구의 농토를 소유하던 할아버지를 속이긴 했지만 그녀들은 그 과정에서 영세민들과 거의 어떤 불화도 겪지 않았다. 그 땅은 내놓은 물건이었으며 그녀들은 중개업자로부터 그 땅을 사들인 다음 되팔았다. 여기에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거래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한 여사는 자신의 남편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설교에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거시적인 경제적 관점을 도입한다면 그녀들은 시차 간 차액을 이용하여 부당한 착취를 한 것이긴 하지만 <복부인>은 그런 관점과는 멀리 있다. 그녀들이 부동산 중개업자 송 사장을 통해 그 정보를 미리 취득하기는 했지만 여기는 지금 1980년이고, 그때 서울을 중심으로 한 부동산 투기는 행정과 자본 사이의 부의 재편과정의 일부였다. 몹시 끔찍한 이야기지만 정확하게 이 시기부터 대통령들도 부동산에 뛰어들어 친인척을 동원하여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물론 예외의 명단이 있지만 나는 논제를 단순하게 만들고 싶다. 이제 막 한강 이남에서 강남이 세워지기 시작하던 바로 그때는 야만의 시간이 시작하던 영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설교는 교훈의 형식을 빌려 무엇을 건드리고 있는 것일까. 만일 이 대답을 구하기 위해 그저 마지막 장면을 반복해서 본다면 끝내 대답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는 비밀이 있다. < 복부인 >은 영화가 시작하면 공항에 남편이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남편은 돈을 벌기 위해서 중동에서 (아마도) 장기간 일을 한 다음 지금 막 귀국하는 길이다. 그런 다음 장모를 만나 호언장담하면서 그동안 600만 원이나 벌었으니 이제 집도 사서 이런 달동네를 벗어나자고 말한다. 그가 되돌려 받는 말은 그 돈으로 어떻게 집을 살 수 있느냐는 대답이다. 600만 원이나 벌었다는 가치의 평가와, 600만 원밖에 벌지 못했다는 대답 사이의 간극. 단순하게 말하면 남편의 노동에 대한 임금의 가치가 느리게 축적되는 동안 재빠르게 상승한 사회 자본의 가치가 추월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꿈은 즉각적으로 좌절된다. 그건 이미 그가 아내와 함께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을 때 예고된 일이다. 그의 집은 마치 등산을 하는 것만 같은 계단을 따라 올라간 달동네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곳엔 택시도 가지 못한다. 아내는 택시비를 낸 다음 잔돈을 받기 위해 운전기사와 승강이를 벌이고 그런 다음 남편으로부터 ‘쪼순이’라는 핀잔을 듣는다. 한 여사는 주택 청약금을 든 아파트를 보기 위해 나갔다가 거기서 복부인으로 나선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고 얼떨결에 그녀들에게 당첨 순위인 아파트 청약번호를 넘긴 다음 며칠 후에 600만 원을 번다. 동일한 액수. 당연한 말이지만 돈은 질적으로 다른 모든 대상을 동일한 가치의 척도로 환원시키기 때문에 그 앞에서 남편이 중동에서 그 돈을 벌기 위해 팔아야 했던 노동력의 양과 시간은 한 여사가 단 며칠 동안 별다른 노력 없이 아파트를 환매한 차액과 동일한 교환가치의 수치가 된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방법은 둘 중 하나이다. 그 하나는 자본주의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화폐로 전화된 노동의 형식을 내용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은 전자이다.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 영화들은 과격한 정치적 해결을 제시하지만 대답은 진부하기 짝이 없다. 켄 로치는 매번 도식의 덫에 걸려든다. 후자를 선택하고 이 문제의 핵심으로 인물을 끌어당긴 다음 그 심연까지 들여다본 영화는 로베르 브레송의 < 소매치기 >이다. 물론 임권택 이 브레송의 방법을 따른 것은 아니다. 브레송은 그 간극 자체를 영화의 형식으로 만들어서 먼저 돈과 손의 운동을 보여준 다음 그 운동을 감옥으로 이동시킨다. 미셀은 마지막 순간 안타깝게 독백하듯이 말한다. “당신에게 이르는 길은 왜 이다지도 어려운 것이었을까” 두 영화가 모두 감옥에서 끝났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싶다. 하지만 <복부인>은 <소매치기>가 아니다. 임권택은 이 계보의 한쪽 끝을 건드리고 있기는 하지만 형식과 내용 사이의 매듭이 어떻게 사회적 네트워크 안에서 실재적 추상이라고 부르는 수수께끼에 이르는지를 다루지는 않는다. <복부인>은 다만 형식의 효과 안에서 내용에로 되돌아가기 위해 애를 쓸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형식을 다시 내용으로 전도시키는 과정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 과정에 관해서 약간 도식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한 여사가 자신의 동창인 박 여사와 정 여사와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남편은 이야기의 뒤편으로 물러난다. 한 여사의 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남편은 이따금 등장하며 그때마다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바뀐다. 이때 임권택 은 < 복부인 >의 이야기를 사회로 확장하는 대신 가족 안에 머물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시피 한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복부인>은 근본적으로 홈드라마이다. 이것이 맨 마지막 장면에서 남편의 장황한 설교가 영화 자신과 조응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래서 이 장면은 두 사람 사이에서 거의 바깥으로 나간 남편이 자기의 원래의 자리에로 되돌아오려는 재귀적 주체의 자리에 대한 변명처럼 들린다. 마치 이 마지막 장면은 <복부인>이 설교의 신과 나머지 영화 전체 둘로 나뉘어 있으며 이 신에서 다른 부분 전체가 미처 말하지 않은 영역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반대로 이 설교에 포함되지 않은 부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반문이 거기 고스란히 따라온다. 임권택은 이 설교를 단지 아내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집으로 돌아와야 하며 남편은 (다시 한 번 같은 표현을 반복하면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가부장적 주체의 정립을 위한 헛소리에 가까운 설교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이전에 임권택의 많은 영화들은 집을 지키기 위해 아내가 나서야 했으며 그녀들은 남편과 역할을 바꾸거나 자식들 앞에서 어머니로서 아버지의 역할을 하거나 때로 그녀 혼자 자립해야만 했다. 남편의 설교가 목표로 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 다시 한 번 영화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중동에서 돌아온 남편과 그의 아내 한 여사(와 딸과 장모)가 살고 있는 집은 영세민들의 동네였으며 한 여사가 복부인 동창들을 만나게 되는 아파트 분양 현장에 간 것은 그녀 가족의 실수요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집(home)과 집(house) 사이의 간극이 있다. 그런 다음 이 둘은 내용으로서의 집과 형식으로서의 집으로 분리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그 둘이 조응하는 대신 형식으로서의 집은 갑자기 내용에 구멍을 뚫은 다음 새로운 네트워크로 빠져나가면서 자기의 형식에 조응하는 새로운 참조틀로서의 내용을 찾기 시작한다. 이 공식은 여러 차례 임권택의 영화에서 반복되었다. 이제 서로 다른 두 개의 내용을 갖게 된 형식으로의 집은 자신의 (확대) 재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내용에 집중하면서 낡은 내용을 형식에 대한 형식으로 전도시키기 시작한다. 간단하게 한 여사와 남편 사이의 부부관계는 형식에 지나지 않게 된다. <복부인>은 기이할 정도로 남편과 한 여사 사이에서 부부관계를 보여주는 그들만의 아주 사소하거나 은밀한 장면이 없다. 그런 장면이 비어있어도 될 만큼의 알리바이를 제공할 수 있는 (다소 상투적이라 할지라도) 남편이 한 여사에게 이 관계에서 실패하거나 무심하게 대하는 어떤 순간도 없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남편이 중동에서 벌어온 600만 원이 집을 사는데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곧장 부동산의 네트워크 안으로 뛰어든다. 임권택은 이 간극이 심화되어가는 과정을 난장판이라고 파악한다. 그는 여기에 어떤 영화적 형식을 부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임권택에게 영화에서 형식이란 절대적으로 그 인물의 외재적 내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설교는 오로지 재귀적으로 경청할 때만 의미를 갖는다. 그렇게 들어야만 <복부인>이 지닌 계몽교훈극으로서의 진정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에는 내용이 형식의 타락에 대한 방어선이라는 교훈이 담겨있다. 만일 그걸 지키지 못하면 내용 자체가 소외의 모습으로 형식에 대한 형식으로 전락해가는 과정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므로 임권택의 도덕은 여기서 나온다. 그는 대상이 자신이 지닌 내용을 포기하고 형식이 압도할 때 타락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이때 형식으로부터 내용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과정은 둘 중 하나이다. 대가를 치러야 하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 그때 내용은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그 무엇을 잃어야만 이 셈은 비로소 성립된다. 임권택의 도덕이 처음 시작할 때는 항상 보수적인 자리에서 시작하거나 때로는 국책 홍보의 일부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그 자리를 추월해서 자신의 도덕을 집행하기 시작할 때 섬뜩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시간이다. 갑작스러운 ‘끝’ 네 번째 괴상한 점, 혹은 영화 이후의 시간. < 복부인 >의 마지막 설교의 장면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어떤 화해의 시간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그 둘은 서로에 대한 자기 자신을 위한 반성의 시간이 없다. 설교의 마지막 말을 이렇게 끝난다. “저들이야말로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저들, 이라고 부른 다음 용서할 수 없는 자들, 이라고 단호하게 판결을 내린다. 남편은 아내를 용서할 생각이 없으며 아마 이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그럴 것이다. 남편은 사기도박의 피해자이고 아내는 부동산 투기의 사기조작에 일부 가담했지만 동시에 피해자의 신분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약간의 벌금을 내고 경찰서에서 풀려날 것이다. 이 부부는 함께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 다음 남편은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자”와 함께 살 수 있을까. 한 가지 더. 아내의 반론은 여기에 없다. 계모가 되어 남의 자식에게 애정을 베풀면서 자기 자식을 홀대하며 평생을 살아야 했던 어머니가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낳은 자식과 마주해서 서로의 입장을 길게 논쟁하다시피 전개했던 < 둘째어머니 >를 생각해보면 의외라고 생각할 정도로 여기에는 형평성을 잃고 있다. 누가 보기에도 여기에는 남편의 오만이 있다. 이 설교의 앞부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사기를 해서 얼마의 돈을 땄든 원망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저기 앉아있는 복부인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사람들입니다. 노름판에서의 희생자들은 그 판에 끼어든 사람들로 끝나지만...(중략)” 남편은 자기의 자리를 희생자의 자리에 가져다 놓은 다음 복부인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다소 까다로운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복부인의 “반사회적 해악”을 비판하기 위해서 왜 이 자리에 와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그 말은 그 전에도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한 여사는 종종 집에 늦게 돌아오긴 했지만 언제나 귀가를 했으며 그녀는 자신의 가정을 파괴할 생각이 없었다. 언제나 딸을 걱정했으며 남편이 속을 썩인다고 말을 하면서 여전히 관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잠시 동안 춤바람이 나긴 했지만 다른 남자들과 성적인 교제를 하고 다닌 것은 아니다. 약간 조롱을 섞어 말하자면 그녀가 부동산 투기를 하고 다니는 동안 남편이 사회경제적인 운동 단체에서 활동을 하면서 갑자기 세상의 모순을 깨닫게 된 것도 아니다. 그동안 남편이 한 것이라곤 화투밖에 없다. 그런데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왜 이 자리가 필요해진 것일까. 나는 이 장소가 경찰서라는 것을 환기시키고 싶다. 임권택 은 교훈의 순간 종종 법정이나 경찰서, 혹은 교실과 같은 제도 기구의 장소를 선택한다. 그런 다음 그 설교를 제도의 담론처럼 환유시킨다. 임권택이 이루어낸 환유의 설교를 하는 장면에서 미학적으로도 가장 무시무시할 정도로 어떤 한계까지 밀고 나아간 순간이 < 티켓 >에서 정신병원에서 진행되는 마지막 대화일 것이다. <복부인>에서 순서는 이렇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결국 타락한 형식이 마지막에 도착할 장소는 경찰서일 것이다. 한 여사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거나(< 맨발의 눈길 >) 혹은 미쳐버리는(<티켓>) 것은 여기에 올바르지 않은 목적지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계몽교훈극이다. 이때 이 장소에 형식의 외곽으로 물러나면서 형식이 되어버린 남편이 같은 장소에 도착해야 한다. 여기서 남편이 한 여사에게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관점이 필요하다. 하나는 둘 모두를 사법의 무대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그 형식을 바라볼 수 있는 내용의 일그러진 시선이 필요해진다. 남편은 우월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여사의 자리에 대한 은유인 것이다. 노름판과 부동산 투기. 타짜들에게 속아 판에 앉아있는 도박 화투의 희생자들. 부동산 투기 전문가들에게 속아 판에 앉아있는 부동산 복부인들. 이 둘 사이에 비스듬히 세워진 거울이 그 둘을 마주 보게 만든다. 회화에서의 관점의 이동에 의한 잉여지식의 자리. 이때 내용은 형식을 내면화하고 주관화시키지 않으면 그 형식이 본래적으로 출발했던 내용의 도착적인 욕망을 읽어낼 수 없는 것이다. 남편이 재귀적 주체의 자리에로 돌아가기 위해 이 말을 할 때 그 설교는 고스란히 그 자신에게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한 여사의 반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만일 구태여 그 말을 해야 한다면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임권택은 그 반복을 찍지 않았다. 혹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직 중요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계몽교훈극의 대답은 언제 와야 하는가. 영화가 끝난 이후로 미루어 놓아쐽옳求짙옛틈句옜덫옛호옰颱督쳐杞옳求짙? 임권택 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 자리를 영화 안에 남겨놓았다. 이때 이 대답이 구조 안의 일부가 되는 것이 옳은가, 라는 반문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교훈이 목적론적이 되는 것은 옳은가. 그래서 많은 계몽교훈극들은 이 대답을 사후적으로 남겨놓기 위해 그 자리를 영화 바깥에 포함시켜 왔다. 임권택은 그 자리가 가진 불편함을 뻔히 알면서도 그 안에 끌어들이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그의 영화 전체에 걸쳐서 일관되게 유지된 거의 유일한 태도이다. 종종 임권택의 영화를 본 다음 설명적이라고 불평을 늘어놓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도 이 불평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아니, 잘 아는 정도가 아니라 여기에 대해서 물어볼 때마다 다소 몸서리를 치듯이 끄덕이며 대답한다. 잘 아는 것 같죠, 그런데 그걸 정말 알아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거예요. 그러니 그걸 말할 수밖에 없는 거죠. 여기에는 어떤 화해도 없다. 그는 이 화해가 심지어 굴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하겠다. 그러니 그걸 말할 수밖에 없는 거죠. 나는 이 말에 대해서 오fot동안 생각해왔다. 그런 다음 비로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임권택의 영화는 그 말이 영화 전체의 활동 자체를 통해서만 제대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 말이 올바른가는 내가 해야 할 질문이 아니다. 내가 할 일은 그 활동을 설명하는 것이다. (계속) 1980년 95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세경흥업 각본 윤삼육 촬영 서정민 조명 김강일 편집 김희수 음악 정민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