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파이어 씨티
- 감독
- 마크 로스너
- 제작년도
- 1998
- 출연
- 마이클 파레, Robin Christopher
" 발성영화 ", 《조선일보》, 1930. 1. 28., 5면. (조선극장 <네날개> 상영 홍보)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세계영화사에서 발성영화(talkie)의 탄생은 중요한 변곡점으로 손꼽힌다. ‘무성의 양식’으로 출발했던 영화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1927년에야 비로소 사운드를 내장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다만 발성영화의 발생론적 조건인 사운드 기술은 그 자체로 혁신적인 ‘신기술’이라 보기엔 어려움이 있다. 이미 영화가 탄생하기 이전에 축음기가 개발되었고, 녹음과 재생 기술 또한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외려 문제는 넓은 공간을 충만하게 채울 만한 사운드 증폭 기술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 문제도 진공관이 개발된 1910년대부터는 해결될 수 있었지만, 소리 없이도 산업적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던 영화계가 굳이 새로운 기술을 접맥해 가며 모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고 했던가? 연이은 흥행 실패로 고초를 겪고 있던 워너브라더스는 이 새로운 양식에 회사의 명운을 걸어 보기로 결정한다. 축음기 회사인 바이타그라프를 인수한 것은 그 첫걸음이었다. 이후 워너브라더스는 영화에 소리를 입히기 위해 부단히 애썼고, 몇 번의 실패를 맛본 끝에 오늘날 최초의 발성영화로 손꼽히는 < 재즈 싱어 >(앨런 크로슬랜드, 1927)를 내놓았다. 결과적으로 워너브라더스의 승부수는 맞아떨어졌고, 할리우드는 본격적으로 발성영화 생산에 돌입하며 영화의 기술적 표준을 바꿔 나가기 시작했다. <재즈 싱어> 중 한 장면과 촬영 현장 (사진: “The Jazz Singer( 1 , 2 )”, IMDb / © 1927 - Warner Bros) 시각적 양식으로만 인식되어 왔던 영화에 새로운 감각(청각)이 더해진다는 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변화였지만, 발성영화가 영화산업 전반에 미친 영향은 훨씬 지대했다. 무성영화에 비해 배 이상의 제작비가 필요했던 발성영화는 필연적으로 영화산업의 자본집중적 성격을 강화시켰다.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군소 영화사들의 몰락이 가속화되었고, 적극적인 인수 합병을 통해 활로를 모색하려는 영화사들도 생겨났다. 유럽 영화계와 양분해 왔던 전 세계 영화산업의 패권을 할리우드가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 종사자들 역시 변화의 물결에 휩쓸렸다. 미셸 하자나비시우스 감독의 < 아티스트 >(2011)는 그 전환기의 풍경들을 세밀하게 포착해 내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남성 주인공 ‘조지 발렌타인’은 무성영화의 대스타였지만 발성영화의 등장과 함께 몰락하게 되며, 반대로 여성 주인공 ‘패피 밀러’는 새로운 시대의 스타로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조지’가 대사 연기에 극도로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것처럼 적지 않은 무성영화의 스타들이 “말하는 영화(더 정확히 말해 ‘들리는 영화’)”에 연착륙하지 못했다. 한편, 대사의 비중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발성영화기에 접어들면서 시나리오는 문학의 주요 하위 갈래 중 하나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는데, <아티스트>는 시나리오 작가의 위상 변화 또한 ‘깨알같이’ 묘사해 놓았다. 무성영화 촬영 현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시나리오 라이터’의 의자가 발성영화 촬영장에서는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티스트> 중 (사진: “The Artist( 1 , 2 )”, IMDb / © 2011 - The Weinstein Co.) 한편, 발성영화가 불러일으킨 변화의 파고는 대양 너머에 자리한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도 직감할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더군다나 서양발 수입영화가 극장 프로그램에서 차지하던 비중이 압도적이었음을 고려한다면, 발성영화로의 전환 문제는 단순히 먼 나라의 신기한 이야기로 치부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그것은 실질적인 위협을 환기할 만큼 중대한 변수로 인식되었다. 즉각적으로 야기된 문제는 신작영화의 수입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점이었다. 서양발 수입영화의 대부분이 발성영화로 제작되기 시작하자 조선인 극장들의 선택지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필름 대여료가 크게 인상되었던 점은 일차적인 난관이었다. 발성영화가 제작비 폭등을 불러오자 필름 판매비용 인상은 필연적 귀결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필름 대여료야 어찌어찌 마련할 수 있다 해도, 발성영화를 상영하려면 영사기 자체를 교체해야 했다. 비단 영사기뿐만이 아니다. 원활한 발성영화 상영을 위해서는 ‘입력-제어-녹음-재생-증폭’의 전 과정, 즉 ‘시그널 플로우’가 확립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극장은 발성영사기의 교체뿐 아니라 콘솔과 앰프, 라우드스피커에 이르는 사운드 장비 일체를 새로 장만해야 했던 바, 막대한 초기비용을 감수하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결국 1929년을 즈음하여 조선인 극장들은 과거 상영된 무성영화를 염가에 재상영하며 대응했다. 조선극장 의 경우에는 자체 레뷰단을 조직하여 공연 프로그램의 비중을 늘리기도 했다. 그러나 관객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재상영 정책은 ‘저열한 흥행수단’이라는 비난에 직면했고, 레뷰는 반나체로 등장한 여성 무용수의 육체적 스펙타클을 내세워 관객들을 끌어모으기도 했지만 그 인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극장 프로그램에서 ‘신작영화’를 제외한 채 미봉책으로만 버틸 수 있는 데드라인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셈이다. 조선극장 레뷰단(15세 이상의 여자) 모집 공고 (《조극주보》, 1929. 9. 17., 2면) 조선인 극장들이 공격적인 투자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때마침 닥쳐온 경영난 때문이기도 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식민지 조선 극장업은 호황기에 접어든다. 그러나 물 들어올 때 노를 너무 열심히 저어서였을까? 대표적인 조선인 극장으로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단성사 와 조선극장은 서양 대작 영화 유치를 위해 출혈경쟁을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 자금난을 겪게 된다. 이와는 정반대로 질이 낮은 필름을 들여와 ‘저가 정책’을 펼친 우미관은 경쟁에서 한발 물러서 있던 극장이었지만, 나중에는 이익금을 종업원에게 분배할 정도로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1929년 9월에 열린 조선박람회는 위기에 봉착한 단성사와 조선극장에게 한줄기 빛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박람회를 구경하기 위해 지방의 관광객들이 대거 경성에 모여들었고, 극장가도 덩달아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문화적 인프라가 열악했던 지방에서 올라온 관객들은 경성 관객들과 달리 재탕 상영에도 큰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다만 조선박람회로 인한 호황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었기에,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던 조선인 극장들은 즉각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박람회 기간 동안 얼마간의 종잣돈을 모으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낙후된 극장 시설을 전면적으로 개축하기엔 무리인 상황이었다. 서양발 발성영화 신작이 연일 발표되던 시점에서 대작 무성영화를 다시 수입하는 것도 별반 실효성이 없는 방안이었다. 결국 단성사와 조선극장은 발성영화를 수입하기로 결정하게 되었으며,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상영 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에 이른다. 1930년 1월의 일이었다. 사실 식민지 조선에 영화의 신기술을 소개하겠다는 명목으로 진행된 발성영화 시사회의 사례는 1920년대에도 간혹 찾아볼 수 있다. 스크린의 영상에 축음기의 소리를 끼워맞추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발성영화의 상영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사건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30년 1월에 진행된 수입 발성영화 상영은 기사를 통해 예고되고 정규 프로그램 광고를 거쳐 본격적 선전이 진행되었던 만큼 실험적 시사회와는 엄연히 다른 위상을 가진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식민지 조선에 당도한 ‘발성영화’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었을까? ㉮ 말하는 사진! 이것만으로도 어떠한 충동을 느끼었다. 서양에서 떠들고 일본에서 떠든다고 조선에서도 떠들어야 할 이유는 없겠지만 움직이는 사진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우리에게는 한번 보아두어야 할 필요로 첫날 단성사에서 토키를 보았다. 제일 재미있는 것은 서양의 선화(線畵)의 예술적 감흥이다. 이것은 발성을 빼어놓고 그대로 보고라도 누구든지 웃지 않을 수 업다. 그리고 “도란몬드” 대위는 발성영화로 감상하는 것보다 그대로 무성영화의 재미있는 “스토리”를 감상하는 편이 낫겠다. 다만 싸운드로써 발성영화의 원리를 뵈어줄 뿐이다. 순회극단의 맨 끝막에서 비로소 발견하고 광희하였다. 군중의 떠드는 소리, 분노에 타는 “세리프” 요염한 여자의 음성 참으로 신기한 생각을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어서 우리 조선말로 된 “토-키”가 나오기를 바란다. - 어의동 K생, “ 순회극단을 보고 ”, 《동아일보》, 1930. 1. 30.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 한국영상자료원, 2019, 193쪽. ㉯ 발성영화 야구시대를 조선극장에서 보았다. 완연히 실연을 보는 것 같다. 영화의 스토리는 무성영화에서 흔히 보던 것과 방사하지만 다만 신기한 것이 “간쓰메” 통을 떼는 소리까지 완연히 들린다. 영어를 잘 모르는 나로서도 가끔 가다가 한마디 두마디 주워 듣는 것이 “타이틀” 읽은 그것보다는 새로운 흥치를 느끼었다. 영어를 충분히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성음과 표정을 종합하여 귀와 눈을 한꺼번에 활동시키는 것은 연극 볼 때나 다름없다. - 어의동 K생, “야구시대를 보고”, 《동아일보》, 1930. 1. 30.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한국영상자료원, 2019, 193쪽. ㉰ 조선에 발성영화가 수입된 것은 기쁜 일이라 하겠으나 첫 시험으로 지난번에 상영한 발성영화로서는 그렇게 크게 기대한 보람이 있었느냐 하는 데 의문이었다. 우리가 보고자 한 발성영화는 과학적 안목으로 보아서이었고 영화에 나타나는 미국이면 미국인의 생활이라든가를 본다는 것은 둘째 문제이었다. 왜 그러냐 하면 첫째로 그들의 말에 통할 수 없는 우리로서(만약 조선의 발성영화라면 모르되) 이해하기 어려운 데다가 우리들이 배운 영어와 다른 사투리라든가 곁말 같은 것을 알 수 업는고로 다만 사진에서 음향이 나오고 그 음향이 실물체에서 울려오는 그 음향과 근사함에 여기에 호기심을 갖게 됨에 있다. 그런데 이번 조선극장에서 상영 중인 이 『례뷰-시대』라는 것은 미국의 환락경 『브로드웨이』를 배경으로 하고 초기 발성영화에 있어서의 일반 『팬』들이 알기 쉽도록 음악 같은 것을 많이 넣어 외국 발성영화로서도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 외에 그 스토리를 말한다면 우리와 거리가 먼 『브로드웨이』의 방종한 남녀들의 애욕 투쟁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는고로 우리들은 이것을 힘써 알려고 할 필요는 없다. - KO生, “ 인상기 - 레뷰-시대를 보고서 ”, 《조선일보》, 1930. 2. 9.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한국영상자료원, 2019, 268~269쪽. ㉮ 는 단성사에서 상영되었던 발성영화들(<순회극단>, <도라몬드 대위>), ㉯ 는 같은 날 조선극장에서 상영되었던 발성영화 <야구시대>에 대한 감상기이다. 그리고 ㉰ 는 열흘 뒤인 1930년 2월 7일부터 조선극장에서 상영된 <레뷰-시대>에 대한 촌평이다. 무엇보다 관객들이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발성영화의 기술적 신기성 이었다. 즉, 당대의 관객들은 화면 속에서 소리가 들린다는 점 자체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소요하는 군중의 소리, 분노의 감정을 전달하는 육성, 요염한 목소리의 매력은 “신기한 생각”을 느끼게 해 주었으며, 통조림통을 따는 음향효과 또한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발성영화만의 특징이라 여겨졌다. 이처럼 발성영화의 소구력은 무엇보다도 “실물체에서 울려오는 그 음향”이 영화 속에서 근사치로 재현된다는 점 자체에 있었다. 그러나 스토리의 차원에서 본다면 무성영화와의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다는 의견도 제기되었으며, 브로드웨이가 배경인 <레뷰-시대>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방종한 남녀들의 애욕 투쟁”을 다루었을 뿐이라 비판받기도 했다. <레뷰-시대(원제 “브로드웨이 베이비스”)>(1929) 중 (사진: “Broadway Babies( 1 , 2 )”, IMDb) 더 나아가 수입 발성영화가 언어장벽 문제 를 본격화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무성영화의 경우에는 외국어로 작성된 간자막의 분량이 상대적으로 적고, 변사 해설이 동반되었기에 수입영화 감상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외국어 발화의 비중이 크게 늘어난 발성영화는 원활하게 감상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심지어 지식계층에 속한 관객이라 해도 발성영화의 외국어 발화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해도 모국어 화자가 아닌 이상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나 ‘곁말(은어)’도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음성연기로 전달된 감정의 생동감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영어를 충분히 못하는 것”에 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성영화기의 상영관습인 변사 연행은 발성영화에 내장된 사운드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지만, 언어장벽 문제를 해소하려면 불가피하게 공존해야 했다. 결국 변사들은 발성영화의 볼륨을 낮춘 상태에서 해설을 이어나갔는데, 당대의 영화비평가 서광제 는 이러한 사운드의 충돌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콩버무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관객들에게 ‘두통’을 야기할 뿐이라 조소하기도 했다. [1] 그래서일까? ‘조선 최초’를 부르짖던 야심 찬 포부와는 달리 단성사와 조선극장 모두 본격적인 발성영화 전환에 대해서는 굉장히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발성영화 상영은 1930년 1월에 시작되었지만, 결과적으로 1930년에 식민지 조선에서 상영된 발성영화의 수는 손에 꼽힐 정도에 불과했다. 앞서 이야기한 언어장벽 문제도 있었거니와 초창기 발성영화들은 사운드의 녹음과 재생에 있어 “발성이 명조치 못한” 기술적 결함도 안고 있었다. [2] 아마도 극장업자들은 발성영화의 시장가치를 확신하기도 전에 전면적인 프로그램 전환에 나서기엔 무리라고 생각했을 공산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극장업자들은 본격적인 초기비용을 투자하기 전에 먼저 일종의 ‘간보기’ 절차에 돌입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토-키! 토-키! 영화팬들 사이에 한참 떠들던 토-키가 경성에서 그 첫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동시에 단성사, 조선극장 사이에는 피차간 하로라도 몬저 상영을 하야 영화팬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으려고 갖은 고심을 다하여 왔던 것도 사실이다. 동양영화사에서 토-키를 가지러 가던 이튿날 아침 파라마운트 지사에서도 뒤를 이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토-키를 가저오려면 사진뿐만으로는 되지를 않는다. 기계가 두 대나 잇서야 하며 책임 있는 기사가 따로 두 사람이 있어야 한다. 동양영화사와 파라마운트 두 배급소에서는 단성사, 조선극장 두 상설관을 배경하고 어쨌든 가슴을 졸이고 한시라도 먼저 가저오기를 도모하게 된 것이다. 동양영화사에는 이십륙일 아침에 기사 두 명 기계 두 대 사진까지 아울러 단성사에 도착이 되었다. 조선극장에도 반드시 뒤를 이어 토-키 일습이 도착할 것은 명백한 사실, 단지 시간문제에 걸려있을 뿐이다. - 관악산인, “토-키 만담”, 《중외일보》, 1930. 1. 27.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한국영상자료원, 2019, 193쪽. 관악산인( 이서구 )의 글은 1930년 1월에 단성사와 조선극장이 어떻게 발성영화 상영을 준비했는지 추정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실제적인 실무를 담당한 것은 배급업자들이었는데, 단성사는 동양영화사와, 조선극장은 파라마운트 지사와 팀을 이루어 ‘조선 최초’라는 타이틀을 놓고 2 대 2 태그매치를 벌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 건너간 배급업자들이 영화 필름만이 아니라 기계(상영기)와 영사기사까지 함께 묶어 대여해 왔다는 점이다. 이는 1930년 1월의 발성영화 상영이 발성영사기를 구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시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즉, 단성사와 조선극장은 발성영사기 구입을 차후 과제로 미뤄둔 상태에서 몇 차례의 테스트를 통해 시장의 추이를 면밀히 관찰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경성의 주요 조선인 극장(단성사, 조선극장, 우미관)들이 발성영사기를 전격적으로 장비하게 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발성영화 전환에 조금 더 적극적이었던 것은 조선극장이었다. 1931년 7월에 설립된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직영관으로 참여하게 된 조선극장은 보다 안정적인 자본 지원에 힘입어 발성영사기 구매에 나설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듬해인 1932년에는 단성사와 우미관도 발성영사기를 장만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추동한 원동력은 무성영화를 시대착오적인 구시대의 유물로 여기는 인식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는 점에 있었다.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 감독의 영화 < 모로코 >(1930)를 필두로 일본어 자막을 이용한 상영방식이 보편화되면서 보다 안정적인 상영환경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이왕 초기비용을 통 크게 투자한 이상 극장 프로그램에서 발성영화의 지분이 늘어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식민지 조선에 흘러들었던 발성영화는 그렇게 서서히 극장가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 [1] 서광제, “최근의 조선영화계(4)”, 《동아일보》, 1932. 2. 3. [2] 김연수, “1930년 조선연예계(4)”, 《매일신보》, 1931. 1. 8.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아서 펜(Arthur Penn) 감독이 연출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 1967>는 워너브라더스에서 제작한 영화로 1930년대 미국의 대공항 시대에 은행 강도였던 보니와 클라이드의 실제 삶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한국에서는 1968년 11월 16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보니와 클라이드”라는 실존 인물이 가진 상징성을 공유할 수 없었기에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제명으로 개봉하였는데, 영화가 “불우하게 태어나 내일 없는 젊음을 절망과 반항, 자포자기 속에서 불살라 1 ” 버리는 내용을 담고 있어 수입과 개봉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1966년 12월 2차 영화법이 개정되고, 1967년 시행령이 발효되면서 외국영화 수입과 상영절차는 보다 까다로워졌는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경우는 수입 승인 단계에서 거부를 당하기도 했다. 기존의 ‘외국영화 수입추천’ 과정이 ‘수입예정 외국영화 사전심사’로 바뀌면서 영화 내용에 대한 사전 검열이 보다 명시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벌어진 일이었다. 외국영화가 가진 대중적 영향력이 컸던 탓에 기본적으로 외화수입 추천과정은 그 자체로 검열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세기상사가 수입해오면서 왜색논란이 빚어졌던 <8月 15夜의 찻집(The Teahouse Of The August Moon, 1956)>은 1961년 10월 27일부터 1962년 10월 27일까지 1년간 총 3번에 걸쳐 수입추천 신청이 반려된 경우였다. 정책 당국은 영화상영 허가를 보류하면서 상영에 제동을 걸었지만, 결국 영화는 1963년 9월에 상영 허가를 받게 된다 2 . 외화수입업자들은 흥행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영화를 수입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당국의 입장에서는 수입된 영화를 엄격하게 금지할 경우 무의미한 외화(外貨)의 유출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손실을 고려해야 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심의 서류를 통해 검열 과정을 재구성하면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외화수입업자들이 피검열자의 위치에서 당국의 처분을 받아들이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몫을 정당하게 주장하는 위치에서 당국과 협상을 벌이는 행위 주체였다는 것이다. 심의 과정을 시간 순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사전 심사 절차 1) 수입예정 외국영화 사전심사 의뢰서 제출(1968.6.27.) 1968년 6월 27일 <우리에게 내일의 없다>의 수입사인 합동영화사는 수입예정인 영화에 대한 기본정보를 담은 ‘수입예정 외국영화 사전심사 의뢰서’를 문화공보부에 제출한다. 서류에는 영화 원제, 제명을 비롯한 제작주체의 국적 및 영화 종별이 기재되어 있다. 이는 1967년 2차 영화법 시행령이 발효된 이후에 달라진 형식으로 기존의 ‘수입영화 추천허가 신청서’의 양식에 비해 간소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별첨 자료로서 사전심사에 필요한 영화의 시놉시스(영문)와 수기로 작성된 영화의 줄거리, 기타 홍보자료가 첨부되어 있는데, 俺たちに明日はない(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제명의 일본어 포스터가 포함되어 있어 한국어 제명이 일본어 제명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사전심사 의뢰서 및 홍보자료 2) 수입예정 외국영화 사전심사 결과 통보 절차(1968.7.10.) 1968년 7월 4일, 문화공보부는 수입사인 합동영화사에게 “6.27일자 제출한 수입예정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사전심사 신청에 대하여는 당부가 심사한 결과 그 내용이 단순한 범죄행위로서 ‘추천할 수 없는 것’임을 통보”한다. 그리고 아래 서류와 같은 형식으로 두 개의 ‘검토의견’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영화사가 제공한 ‘줄거리’를 토대로 제출된 것으로 생각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시나리오 검토의견 1. 제명: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2. 원작자: 3. 각색자: 데이빗드 뉴맨 4. 제작자: W. B.社 (미국) 5. 내용: (생략) 6. 의견: 영화 내용의 대부분이 연소자들의 범죄(犯罪) 행각(行脚)을 주로 묘사한 것으로, 이는 사회정화에 폐해(弊害)를 가져올 우려가 있으므로 추천(推薦)불가함. 3) 수입예정 외국영화 사전심사 재의뢰 및 수입 허가 통보(1968.9.23.) 1968년 9월 17일, 수입추천이 반려되었다는 통보를 받은 합동영화사는 영화에 대한 미국 언론의 반응을 보여주는 논평들과 함께 사전심사를 재의뢰한다. 그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화공보부에서는 영화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하는 해외의 논평들을 근거로 영화에 대한 수입허가를 통보한다. 1968년 9월 23일에 승인된 결과통보 기안지에는 승인 근거로서 영화에 대한 평단의 반응을 옮겨놓고 있다. 다음 서류에서 알 수 있듯이, 해당 내용이 수기로 작성된 것이라 판독이 쉽지 않으나 몇 부분만 옮기면 아래와 같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관련 해외 평 해외평 현재까지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 중 최우수 작품의 하나 볼만한 가치가 많고 훌륭하게 제작된 탁월한 가치가 있는 영화. 미국의 금년 최우수 작품의 하나 노도와 같은 소용돌이. 영화의 예술작품. 스크린은 폭력으로 **되있으나 폭력은 의미심장한 것이고 이 둘 진실한 인간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잊을 수 없는 작품. 경의를 표한다. 2. 수입추천 절차 1) 외국영화 수입추천 신청서 제출(1968.9.26.) 수입예정 영화에 대한 사전심사를 마친 후, 합동영화사는 영화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담은 수입추천서를 문화공보부에 제출한다. 해당 신청서에 추가적으로 기입되는 사항은 영화의 규격(35미리 12권 3편)과 수입가격(로얄티 US $18,000, 프린트대 US $1,800)이다. 해당 문서는 한국영화제작자협회를 경유하여 문화공보부로 제출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수입추천 신청서류에는 허위신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실사고사를 받을 것이라는 내용의 각서와 외국영화 수입쿼터 사용확인서, 합동영화사가 대한연합영화사에게 오퍼를 양도한다는 내용의 양도서, 워너브라더스 일본지사와 체결한 계약서 사본 3통 및 국문으로 된 영화홍포 리플렛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워너브라더스 일본지사와 영화 계약 오퍼를 양도받은 대한연합영화사가 채결한 계약서의 경우, 계약 조건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서류라 생각된다. 계약서의 형태는 물품매도확약서(offer sheet)인데, 이는 1968년 5월 20일에 작성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해당 서류에는 판권대금과 배급 지역(한국) 그리고 2년간의 배급 라이센스 기한이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해당 계약이 취소불능신용장(irrevocable L/C)으로 작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계약을 통해 수익을 얻는 자(수익자)인 워너브라더스 사의 동의가 없이는 해당 계약을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물품 매도 확약서 이러한 사실을 통해 수입예정 사전심사 과정을 되짚어보면, 합동영화사를 대리한 대한연합영화사는 사전심사를 받기 전인 1968년 5월 20일에 이미 취소불능신용장으로 영화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였다. 살펴본 바와 같이 해당 건은 사전심사에서 수입불허가 통보를 받았었는데, 계약을 이미 체결한 상태인 영화사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뜻을 분명하게 관철시켜야만 했다. 영화수입업자로서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인데, 영화 판권 계약을 취소불능신용장으로 체결해야 하는 당시의 정황은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2) 외국영화 수입용 외화(外貨) 사용허가 및 수입 추천 절차(1968.10.2.) 1968년 10월 2일, 문화공보부에서는 외국영화 수입에 필요한 외화사용을 허가하기 위해 관계 기관에 협조 요청 공문을 발송한다. 수신처는 기존과 동일하게 상공부장관, 외환은행장, 서울세관장이며, 여기에 한국은행총재가 추가되었다. 해당 서류에는 부내참고로서 해당 건이 제 18차 베를린 영화제 출품작인 <망각>에 대한 보상 쿼터임을 명시하고 있고, 1968년 9월 23일 사전심사를 통해 수입가능 통보를 내렸음을 알리고 있다. 3. 실사검열 절차 1) 영화검열 신청서 제출(1968.10.28.) 영화의 배급자인 합동영화사는 1968년 10월 28일자로 영화검열 신청서를 접수한다. 서류에 기입된 작성일자는 10월 25일이나 서류가 접수된 시점은 10월 28일로 확인된다. 동일하게 해당 서류는 한국영화제작자협회를 경유(1968.10.28.)하여 문화공보부의 승인을 얻게 된다. 승인 일자는 1968년 11월 4일이다. 검열을 신청하는 주체는 별첨자료로서 시세완납증명서와 자립저축이행필증명서, 면허세납세증명서, 수입신고서, 외국영화수입추천서를 첨부하여 신청을 접수하게 된다. 2) 외국영화 검열결과 통보(1968.11.9.) 문화공보부에서는 11월 2일자로 검열을 실시하여 그 결과를 11월 9일에 영화사에 통보하였다. 합동영화사는 11월 9일자로 검열필증을 받게 되는데, 제한사항으로는 화면삭제 4개처, 화면단축 2개처, 대사삭제 3개처를 지정하였다. 제한 사항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검열 제한 사항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제한사항) 화면삭제 1. 그라이드의 지나친 나체 장면 2. 경찰의 습격을 받고 형 및 형수가 피투성이가 되는 장면 및 경관 살해장면 3. 경비대장을 배에 태워보내는 장면 4. 남녀주인공이 경찰의 무차별 총격으로 죽어가는 장면 화면단축 1. 보니가 노인(차에 매달린)을 소아 자동차 유리창에 피가 비치는 장면 2. 남녀 배드신(여자가 몸부림치고 남자를 더듬는 장면) 대사삭제 1. 목사의 딸이라 헌금을 좋아하지 2. 직업은 은행강도 3. 사업은 은행강도 (밑줄은 원문) 해당 영화의 경우, 내무부의 의견이 함께 제출되었는데 내무부에서는 “전체적인 범죄수법이 사회에 경종을 주는 것보다는 청소년들의 범죄 행위의 모방 또는 인간 사회생활의 절망적 기풍조성과 경찰에 대한 불신조장 등으로 사회적인 물의가 야기될 것으로 사료”된다는 의견을 보낸다. 이는 문공부 자체에서 검열한 의견서에 포함되지 않은 내용도 있는데, 결과적으로 검열필증에 기재된 제한사항은 이 둘을 종합한 것이었다.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검열의견만 놓고 본다면 수입 및 상영이 제한될 수준이었지만, 영화가 해외의 평단으로부터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사실로 인해 영화는 상영이 허가된다. 이를 통해 검열과정이 국가의 제도적 폭력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다양한 사회적 힘들의 경합하고 협상하는 지점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의 서류를 통해 검열과정의 구체적인 내막을 살펴보는 작업은 검열 과정에서 어떤 논리가 어떤 수준으로 개입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1. 「내일은 없다」, 《경향신문》, 1968.11.16. 2. 「<8月 15夜의 찻집> 검열 서류」(한국영상자료원 소장)를 기반으로 정리한 내용임.
타이틀이 뜨기 전의 짧은 인터뷰 컷들. 슈퍼히어로들 저마다의 고충이 이어진다. 악과 맞서 싸우며 세상을 지키고 평화를 수호하는 그들이 한번쯤 느꼈을법한 사소하고도 중요한 불만과 아쉬움들이다. 끊임없이 벌어지는 사건사고의 뒤치다꺼리를 하다보면 아이를 돌보는 가정부가 된 것 같다는 푸념부터 남성들만 히어로 대접 받는 걸 들러리로 지켜볼 수 없다는 헤로인의 항변이나 이중생활로 인해 불편한 연애관이나 결혼관까지 털어놓는 속내가 제법 진솔하게 들린다. 거기에 자신의 힘을 물려받은 2세들의 정체성 문제나 성장통까지 포함되면 사태는 조금 심각해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일반인들의 줄 고소가 이어지고 정부의 제반시설 복구에 대한 재정적 부담감까지 더해져 결국 더 이상 슈퍼히어로로서 삶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순간, 그들은 일반인보다 더욱 피곤한 삶을 살게 되는데... 픽사의 6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 인크레더블 >은 바로 이 지점부터 시작하는 유쾌하고 독특한 슈퍼히어로물이다. 그간 장난감이나 곤충, 동물에 국한해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던 픽사에서 최초로 사람들의 세계를 다룬 작품으로 종전의 모든 기록을 모조리 깨부수고 제목 그대로 ‘인크레더블’한 비평적 · 흥행적 성과를 거뒀다. 슈퍼히어로 가족 < 아이언 자이언트 >로 휴머니즘 가득하고 복고 지향적인 애니메이션을 선보인 바 있는 브래드 버드 감독은 자신이 좋아했던 60년대 스타일의 만화책들과 스파이 영화들에서 힌트를 얻어 슈퍼히어로 이야기를 떠올렸는데, 여기에 자신의 유년시절과 애니메이터로 회사에서 근무하며 느꼈던 감정들을 뒤섞어 일반적인 영웅담과는 조금 다른 재미와 감수성을 드러냈다. 슈퍼히어로의 액션과 로망에 주안점을 두기보다 일과 가족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여러 세대의 공감대를 이끌어낸 것이다. 애초 이 작품은 워너브라더스에서 셀 애니메이션으로 준비 중이었으나, <아이언 자인언트>가 재앙급 흥행 참패를 당해 입지가 좁아지자 자리를 옮겨 칼아츠 시절 자신의 친한 동기이자 픽사의 수장이 된 존 래스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픽사에서 완성되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선 보기 드물게 악당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며(극중에서 에드나가 그렇게 망토 반대를 외친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픽사에선 유래 없이 사상 최초로 외부 감독이 영입돼 단독 각본으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란 기록을 남겼다. 이미 다섯 편의 성공적인 CG 애니로 기술력을 쌓은 픽사의 모든 노하우가 발휘된 작품으로 부드럽고 자연스런 인간 캐릭터들의 움직임과 스피디한 추격전, 상상한 그 이상의 액션 스케일 등이 어우러져 개봉 전에 돌았던 기우를 말끔히 날려버리며 첫 주말 3일 동안에 7,047만불을 쓸어 담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해 아카데미 장편 애니상을 비롯해 제 32회 애니 어워드 7부문을 독식하며 2004년 최고 애니메이션으로 우뚝 섰다. 브래드 버드의 <인크레더블>에 대한 음악적 아이디어는 확고했다. 자신이 스토리를 떠올리며 지대한 영향을 받았던 5-60년대 수사물이나 스파이 뮤직 스타일을 원했던 것. 50년대 말 헨리 맨시니의 <피터 건>을 필두로 < 핑크 팬더 > 시리즈나 6-70년대를 풍미한 존 배리의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 그리고 랄로 쉬프린의 <미션 임파서블>과 제리 골드스미스의 < 0011 나폴레옹 솔로 > 같은 TV 첩보시리즈 테마가 그 대표적인 예로, 재즈 사운드의 경쾌한 스윙감과 긴장감 넘치는 그루브함이 무엇보다 이 코믹하고 신나는 활극에 잘 어울릴 거란 판단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그의 첫 선택은 당연하게도 스파이 뮤직의 대가, 007 사운드의 아버지 존 배리였는데, 그는 자신의 초기 스타일을 반복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몇 곡의 데모 작업만 진행하다 결국 하차하고 만다. 만약 작업이 이루어졌다면 배리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을 텐데, 그랬다면 그의 경력 중 시작과 끝을 완벽하게 잇는 결과물이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쉽게도 협업은 불발되었고 그 기회는 버드와 <아이언 자이언트>로 만났던 마이클 케이먼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이 또한 스코어 진행 중 케이먼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게 되며 중지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이제 막 꽃 피우기 시작한 신예 마이클 지아키노가 그 임무를 물려받게 된다. 그 당시 인기 TV시리즈 < 앨리어스 >로 첩보물의 음악을 들려주고 있었던 터라 그의 스타일이 눈에 띈 점도 한몫했다. 마이클 지아키노 60년대의 강렬한 빅밴드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원했던 브래드 버드 감독을 위해 마이클 지아키노는 멀티 채널의 최신 디지털 레코딩을 포기하고, 그 당시 녹음하던 방식 그대로 아날로그 레코딩으로 작업을 진행하며 그 시절의 분위기를 담아보고자 했다. 그런 각고의 노력 덕분인지 <인크레더블>의 레트로한 사운드는 놀랍기 그지없다. 브라스 섹션의 힘찬 팡파르와 울부짖는 와와 사운드는 물론, 리드미컬하고 이국적인 퍼쿠션과 비브라폰의 명징한 긴장감, 그리고 스케일의 위용을 드러내는 압도적인 스트링이 한데 어우러진 스코어는 가히 존 배리의 재림이라 불려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다. 이미 < 쥬라기 공원 >의 게임과 <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의 게임 버전이라 할 수 있는 <메달 오브 아너>를 통해 존 윌리엄스 사운드를 자기 방식대로 해석한 바 있는 지아키노였기에 <인크레더블>에서 존 배리식의 변주는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게임계의 존 윌리엄스라는 평가를 들었던 지아키노지만 사실 이 작업이 당시 그에게 주어진 가장 큰 기회였기에 긴장했을 법도 한데, 그는 50년 경력의 노련한 베테랑 작곡가처럼 숙성된 재즈 사운드로 감독과 관객들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인크레더블>의 음악은 닐 헤프티의 <배트맨> 테마처럼 날렵하고, 존 배리의 < 007 여왕폐하 대작전 >처럼 우아하다. 노골적인 클리셰와 컨벤션 덩어리지만, 그 유희는 창의적이고 도전적이기에 즐겁게 다가온다. 존 모리스가 멜 브룩스 영화에서 시도했던 일련의 재기발랄함보다 더 세련되고 영리하다. 포문을 여는 ‘The Glory Days’부터 그 명확한 색채를 드러낸다. 웅장한 팡파르 뒤로 펼쳐지는 올드 패션의 스파이 뮤직은 익숙하면서도 능청스럽다. 과잉의 빅밴드 사운드로 애니메이션 특유의 위트와 과장된 미키마우징을 소화하며 자칫 존 배리 스타일에 함몰될 수 있는 요소들을 교묘히 피해가고 있다. ‘Mr. Huph will see you now’와 ‘New and Improved’, ‘Kronos Unveiled’, ‘Lithe or Death’ 등은 제임스 본드 음악에 대한 훌륭한 지아키노식의 번안으로 단순한 스타일의 모방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테마를 덧입혀 솜씨 좋게 변형 가공하고 있으며, ‘Road Trip’과 ‘Marital Rescue’에서는 존 배리의 < 007 위기일발 >에서 흐르던 ‘007 Takes the Lektor’란 곡의 컨셉을 의도적으로 차용해 장르에 대해, 스타일에 대해 오마쥬하고 있다. 다시 슈퍼히어로로서 일을 하며 활기를 찾는 몽타주 씬에 흐르던 ‘Life’s Incredible Again’이나 ‘Lava in the Afternoon’, ‘Off to Work’는 부드러운 라운지 사운드로 낭만적인 모험담의 여유와 극적인 이완감을 선사하고 있으며, ‘Bob vs. the Omnidroid’나 ‘Saving Metroville’은 강력한 파워와 묵직한 긴장감을 오롯이 간직한 액션 스코어로 손색이 없다. 찬탄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아찔한 질주감을 던져주는 ‘100 Mile Dash’에선 비브라폰과 뮤트 트럼펫의 현란한 대쉬와 스트링의 숨 막힐 듯한 보잉을 맛볼 수 있으며, 대망의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The Incredits’는 그간 등장한 모든 테마의 총합이자 스타일의 과시로 지아키노가 들려줄 수 있는 최상급의 사운드를 들려준다. <인크레더블> 이후의 영화음악들 이후 그는 이 아이디어를 공유한 실사판 슈퍼히어로 영화 < 스카이 하이 >의 음악을 담당하며 본격적인 영웅담 팡파르에 도전했고, 60년대 첩보 시리즈를 블록버스터로 바꾼 < 미션 임파서블> 3 , 4편의 음악을 내리 맡으며 랄로 쉬프린의 테마를 재해석한 첩보물 사운드를 완성했다. 어디 그뿐인가. 브래드 버드와 다시 함께 손을 잡은 < 라따뚜이 >로 아카데미 음악상에 첫 지명됐으며, <업!>으로 대망의 아카데미를 비롯해 십여 개의 상을 휩쓸었다. <존 카터> 와 <슈퍼 에이트> 는 그에게 드디어 (‘게임계의’라는 한계를 떼고) 차세대 존 윌리엄스가 될 것이란 찬사를 붙여주었다. 그는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영화음악가다. 이 모든 게 바로 <인크레더블>의 사운드트랙에서 시작되었단 사실. Track List 1. The Glory Days 2. Mr. Huph Will See You Now 3. Adventure Calling 4. Bob vs. The Omnidroid 5. Lava in the Afternoon 6. Life's Incredible Again 7. Off to Work 8. New and Improved 9. Kronos Unveiled 10. Marital Rescue 11. Missile Lock 12. Lithe or Death 13. 100 Mile Dash 14. A Whole Family of Supers 15. Escaping Nomanisan 16. Road Trip! 17. Saving Metroville 18. The New Babysitter 19. The Incredi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