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회제에 나타난 원빈 <아저씨>
- 제작년도
- 2010
* < 비밀은 없다 >와 < 마더 >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국 장르 영화에서 모성은 오랫동안 여성인물의 주요한 서사적 동기로 사용되어 왔다. 전통적으로 남성인물이 이끄는 서사에서 자원쟁탈, 권력투쟁, 우정, 가족, 직업적 소명, 공동체의 대의 등 다양한 동기가 제시되어 온 것과 대비된다. 현실에서 가부장제가 여타의 활동공간, 역할, 관계를 허용하지 않고 모성의 자리에만 여성적 가치를 할당하며 제약해온 탓일 것이다. 역으로 주류의 허구적 서사는 자식을 위해 무조건적인 희생을 보여주는 모성성을 강화하는 신화가 되었다. 등장인물이 서사의 방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행동을 할 때는 설득력 있는 그럴듯한 동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여성인물에게는 모성이나 이성애 로맨스 이외의 상상력이 잘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잘 알다시피 그럴듯함, 핍진성, 개연성이라고 거론하는 서사적 약호들을 현실의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인과관계와 등치시켜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핍진성은 오랜 기간에 걸쳐 누적된 그래서 이제는 지나치게 당연하게 여기는 장르적 관습에 의해 상당부분 정립된다. 즉 익숙한 설정은 알고 있는 정보로서 쉽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별다른 근거제시 없이도 설득력을 높인다. 하지만 핍진성은 또한 역사적 구성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만들어내는 요소와 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고, 더 중요하게는 적극적으로 개입해 변화시킬 수 도 있다. 그렇다고 기존의 것을 완전히 버릴 필요는 없다. 여성인물의 주요한 서사적 동기로 모성이 아닌 완전히 다른 소재를 찾을 수 있지만, 기존의 모성서사를 구부리고 늘리고 비틀면서 스스로 균열을 내는 방법도 있다. <비밀은 없다>나 <마더>(봉준호, 2009)가 후자의 경우다. 두 영화는 자식을 잃거나 잃을 위험에 처한 엄마를 탐정으로 내세운 느와르 장르를 전유한다. 이 영화들은 자식을 위해 복수를 감행하는 폭력적 액션의 쾌감에 초점을 맞춘 일련의 모성복수극과는 다르다(< 오로라 공주 >, < 돈 크라이 마미 >, < 공정사회 > 등). 그보다는 자식을 위해 진실을 찾아 나선 탐정-엄마들이 자신이 근거해 있던 세계를 뒤집어엎을 돌이킬 수 없는 진실을 대면했을 때의 윤리적 태도를 시험하는 데 맞춰져 있다. 일반적 탐정과 달리 그들은 피해자라고 생각되는 자식과 거리를 둘 수 없으며 그 때문에 때때로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 영화들에서 의도적으로 과장되게 그려진 격한 모성과 탐정의 진실추적의 욕망은 문자 그대로 ‘-(하이픈)’이 필요한 마찰 있는 조합이다. 두 장르적 도상의 조합은 서로를 낯설게 만들면서 의문을 품게 만든다. 두 영화의 주인공인 연홍(손예진)과 엄마(김혜자) 모두 자식을 잃거나 잃을 위험에 처하면서 모성을 발판으로 그들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거기에는 진실에 대한 욕망도 포함되어 있다. 이 영화들에서 모성은 최종적 목표나 결과물이 아니라 서사의 시작점이자 욕망을 발현할 발판 정도가 된다. 여성이 강력한 욕망을 드러내고자 할 때 지배 이데올로기가 모성 내에서만 가능한 것처럼 틀 지웠던 것을 역이용한다. 한번 시동을 걸자 멈출 줄 모르는 그녀들의 폭발적인 욕망은 기반하고 있는 모성서사의 프레임을 뒤흔들어 버린다. 1970년대 활동했던 영국의 페미니스트 영화이론가 클레어 존스톤은 당대에 함께 활동했던 로라 멀비와 달리 스스로 서사에 균열을 내고 의문을 품게 만드는 진부한 도상의 사용과 여성의 집단적 판타지의 역량을 믿었다. 당시 멀비는 「시각적 쾌락과 서사영화」(1975)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에서 주류 서사영화가 이성애 남성의 성적 응시를 통해 여성을 대상화하고 서사적 쾌락을 만들어내는 영화구조를 비판하며 장르적 도상과 서사로부터 열정적으로 거리를 두는 아방가르드 영화를 옹호했다. 반면 클레어 존스톤은 스테레오타입을 반복하는, 말하자면 관습이 굳을 대로 굳어져 사유가 제거된 이미지는 스스로 균열을 만들어 내고 의심을 품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존슨톤은 멀비와 달리 대중장르영화를 옹호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화에서 여성들을 대상화하는 것에 반대하기 위하여, 우리의 집단 판타지들은 공개되어야 한다. 여성영화는 욕망의 작용을 구체화해야 하며, 그 목적을 위해 오락영화를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오락영화의 아이디어들은 정치적인 영화를 풍요롭게 해야 하며, 정치적 아이디어들은 오락영화를 풍요롭게 해야 한다. 즉 상호소통의 과정이 필요하다.”(「대항영화로서의 여성영화」, 1973) 흥미롭게도 <그녀의 이름은 베트남>을 만든 실험영화 감독 트린 민하도 진부한 도상, 즉 스테레오타입과 관련해 유사하게 말한다. “스트레오타입은 거짓된 재현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하는 현실의 포획된 재현”(「근처에서 말하기」, 1992)이기에 시적 언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스트레오타입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해체과정, 균열, 위치바꿈, 미끄러짐, 멈춤 그 자체를 포착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러한 태도 속에서 창작자는 번역가의 위치를 자처하며 의미의 종착지를 만들지 않고 스테레오타입과 아직 말해지지 않은 실재 사이에 무언가 있음을 지시할 수 있다. <비밀은 없다>와 <마더>는 존스톤이나 트린이 말한 낡고 낡은 도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럼에도 두 영화가 동일한 도착점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모성의 도상과 관련해 <비밀은 없다>가 궤도를 뚫고 이질적인 공간으로 튕겨져 나간다면, <마더>는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회귀해 심연에 재침잠하는 운동을 보여준다. <비밀은 없다>의 오프닝 씬에서 연홍은 관습적으로 장르영화가 그려온 모성의 과잉된 양상을 연기한다. 그녀는 기존 사회가 원하는 모성의 텅 빈 기표를 말 그대로 뒤집어쓴다. 연홍은 그 기표가 자신이 욕망하는 곳에 데려다줄 운반체라고 믿는다. 연홍은 유력한 지역 정치인 종찬(김주혁)의 아내로 남편을 성공시켜 영부인이 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연홍은 집을 아름답게 꾸미고 남편 선거를 도우며 내조를 한다. 딸 민진도 그 기표가 얼마나 텅 비어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비밀이 아니다. 민진은 너무 비밀이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엄마를 가엾게 여기고 자신의 가상친구 ‘자혜’를 연홍의 어린 시절 정보를 모아 몽타주한다. 또한 어떤 비밀들은 연홍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감춰야 하는 어두운 비밀이 되고 폭력으로 변질된다. 모두가 거리낌 없이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지역에서 연홍 혼자만 표준어를 사용한다. 광주출신인 그녀가 자신의 출신지를 말하지 않고 사투리를 쓰지 않는 방식으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더러운 것을 감추고 숨기는 비밀이 된다. 차이는 차별과 혐오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상대방 후보뿐 아니라 종찬의 선거운동원들도 연홍의 지역출신이 당연히 혐오해도 괜찮은 것처럼 말한다. 실상은 혐오의 낙인인 공공연한 비밀과 텅 빈 모성의 기표가 덕지덕지 붙어있던 연홍은 민진의 죽음 이후 달라진다. 선거가 우선인 종찬과 달리 민진을 죽인 자를 찾아내려는 연홍은 스스로 혹은 타인에 의해 덮인 기표들을 벗어낸다. 그 자리에는 각성하는 모성이 있다. 각성하고 진실을 찾아가는 연홍의 모습은 집착과 광기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푸라기 잡듯 굿을 하고, 자신의 손등을 찔러 자해하고, 민진의 이메일 비밀번호와 노트에 적힌 암호를 풀기 위해 몇날 며칠 밤을 샌다. 그러나 모두 민진의 실종과 죽음에 눈 감으려할 때 연홍은 고립되어 유일하게 진실을 찾으려는 자다. 그녀의 광기와 집착은 오히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연홍은 남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딸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비밀을 폭로한다. 자신의 애초의 욕망이 얼마나 스스로와 딸을 해하는 기반에 근거했는지를 연홍은 깨닫는다. 여성을 포함한 소수자들은 기존 사회로부터 더러운 비밀이 있는 자들로 분류되어 왔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그들을 배제하고 주변화하기 위해 ‘더러운 비밀’을 폭로해 ‘추문’을 만드는 방식을 자주 사용해왔다. 연홍은 남편 종찬에게 동일한 방식을 돌려준다. 연홍은 딸의 복수를 위해 종찬이 선거에서 이겨 목적을 달성한 순간 비밀을 폭로하고 추문에 휩싸이게 만든다. 첫 유세가 있는 남편과 친구 자혜와 함께 과제를 하다 늦게 들어오겠다고 하는 딸 민진(신지훈)을 알뜰살뜰 보살피는 첫 장면 바로 직전에 충혈되고 초점을 잃은 눈으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연홍의 얼굴 클로즈업이 붙는다. 이 쇼트는 <마더>에서 석양이 내리쬐는 갈대밭에서 정신을 놓은 듯 춤을 추는 엄마의 첫 쇼트와 상응한다. 기존의 많은 영화들에서 충격을 받아 초점을 잃은 여자의 얼굴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녀의 존재와 이미지는 그 자체로 그 충격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야 할 미스터리가 된다. 그러나 연홍과 엄마는 모두 스스로 미스터리이자 사회의 미스터리를 푸는 탐정이 된다. 미스터리로서의 모성을 만들어낸 사회적 구조는 자신 스스로를 포함하고 있기에 미스터리를 풀고 진실을 대면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세계를 뒤집어엎을 각성이 수반한다. 연홍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남편이 딸을 죽였다는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자신이 추구해왔던 것이 다 무너지더라도 그녀의 모성은 그 진실을 뚫고 지나간다. 스스로가 그 비루한 체제의 일부였기 때문에 기존의 자신도 해체된다. 그렇게 연홍은 무지한 자에서 깨달은 자로 변모해 나간다. 가족을 해체시킬 비밀의 폭로와 진실의 대면에서 <마더>의 엄마는 자신이 아들 도준(원빈)을 죽이려했다는 사실을 도준이 알고 있다는 진실과 도준이 살인범이라는 진실 두 가지를 모두 몰랐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에 침을 찌르고 정신없이 춤을 춘다. 한편 < 올드보이 >(박찬욱, 2003)에서 아버지 오대수(최민식)는 미도(강혜정)가 딸이라는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본인만 고통스럽게 진실을 품은 채 미도에게 최면을 걸어 그녀를 무지의 상태로 돌리려 한다. 여기서 미도는 알지 못한 채 근친상간을 저지른 오이디푸스, 비극의 주체인 오대수와 비교해, 진실을 모두 알고도 타인에 대한 애도를 포기하지 않는 안티고네가 될 수 있었음에도 아버지 오대수는 미도에게 아예 그러한 기회를 주지 않는다. <마더>의 모자서사와 <올드보이>의 부녀서사에서 여성들은 진실에 대면했을 때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감당하거나 이용하려는 남성들과 달리 무지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반면 <비밀은 없다>는 죽은 딸을 대체한 미옥과 함께 아직도 풀어야 할 암호가 가득 찬 ‘와일드 로즈 힐’에서 대항적 판타지의 세계를 구성하며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튕겨져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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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봉준호의 < 마더 >(2009)는 한적한 들판에 나타난 노년의 여인(김혜자)으로 열린다. 프레임의 뒤에서 가운데로 걸어 들어온 그녀는 배경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태어나서 처음 춤을 추는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는 모양이 기괴하다. 마더의 캐릭터 안에는 이 춤과 같은 히스테릭한 제스처가 있고 그 내면에는 우유부단함이 있지만 이와 같은 미장센의 톤을 파악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흘러야 한다. 한국의 어머니를 형상화한 상투적인 겉모습 외에는 마더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첫 장면에서 그녀가 춤을 추는 동기는 불분명하다.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카메라에 대고 직접적으로 말하려는 듯한, 마더의 불안정하고 원시적인 춤사위이다. 여하튼 최초의 등장은 영화 전체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 캐릭터에 이입하여 내러티브가 진행될 것임을 예고한다. 여기에 이 영화를 대하는 관객들의 곤경, 즉 어떤 역사나 성격, 뒷배경도 헤아리기 힘든 이상한 여인에게 마음을 주어야 하는 난감함이 있다. 이야기의 경계를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오프닝 쇼트는 캐릭터와의 동일시를 방해하는 대신 재현된 현실과 자연의 법칙 뒤에 숨겨진 무언가 다른 영역이 있음을 암시한다. 메마른 들판 한가운데서 히스테리적이거나 어쩌면 황홀한 상태로 카메라를 향하고 있는 마더의 춤이 이 드러나지 않은 영역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장면을 분석해보자. 스토리 영역 바깥에서 삽입된 논 디제틱(비(非) 동기) 음악을 동반한 카메라의 하강과 상승은 이 신의 미장센에 모호함을 가중한다. 흥미로운 것은 마더가 스토리 바깥에서 침투한 사운드(음악)의 존재를 알고 있는 양 춤을 춘다는 것이다. 음악의 선율과 굴곡, 호흡에 따라 마더의 몸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름이 없는 여인은 스토리 세계 바깥의 드러나지 않은 영역과 소통하고 있는 셈이다. 플롯의 논리적 진행과 관련하여 이 쇼트를 대체하기에 적합한 장면이 있다. 도입부 마더의 춤은 서사의 3/4 지점에서, 아들 도준(원빈)의 살인혐의를 입증할 증인(고물상 노인)을 스패너로 내리쳐 살해하고 피를 뒤집어 쓴 마더가 오두막에 불을 지르고 벌판으로 흘러들어 넋이 나간 채 걷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모습과 겹쳐진다. 여전히 마더가 이런 모양으로 방랑하는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이 신에서 주목할 것은 자연의 법칙에 따른 재현(마더의 살인)과 현실에 대한 주인공의 인식(도준의 살인)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현실이 분리되지 않고 통합된다는 점이다. 봉준호가 구성한 내러티브는 처음엔 익숙한 자연법칙에 기초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물과 동일시하고 깊이 있게 그를 탐구하기 시작하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대다수의 경우 서사는 중심인물의 주관에 의해 지배되고 일상적인 것과 불가능한 미스터리 영역의 혼합으로 미장센의 지위를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실재와 반 실재를 혼합하여 모순적인 방식으로 이들을 병치함으로써 서사적 모호성을 구성하는 독특한 서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가 작동하는 또 다른 양상은 시간을 활용하는 특성에서 나타난다. 봉준호의 대다수 영화는 선형적인 시간 순서를 따르지만 곳곳에서 스토리의 진행을 파열하는 갑작스러운 플래시백을 활용한다. 이러한 현실(현재)과의 분리는 플롯 진행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배경 스토리로 삽입되기 때문에 서스펜스 효과를 이끈다. 오프닝 시퀀스 외에도 <마더>에는 누구의 것인지가 불분명한 짧고 갑작스러운 회상 신이 끼어든다. 인물이 보는 환각인지, 과거에 일어난 실재의 재현인지, 잠에서 본 꿈 장면인지 모호하다. 그러나 이 쇼트들은 스토리의 방향이 단기간에 전환될 수 있음을 표지하는 계시이다. 이 짧은 계시의 모호함은 살인자로 유죄 판결을 받은 아들 도준의 무죄선고를 위해 애쓰는 동안 과거에 맞서는 마더의 모습에도 반영되어 있다. 마더가 살인을 저지른 범인을 추적하는 동안 우리는 마더의 관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살인의 순간에 대한 요약을 보게 된다. 도준의 살인 시퀀스에서 현장에 대한 모호한 시선을 통해 봉준호는 관객들이 마더가 결코 볼 수 없었던 사건을 목격하도록 만든다. 폐가의 안에서 창문을 통해 바깥의 소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소녀를 능욕하는 음산함을 뿜어낸다. 그러나 살인자의 시선으로 짐작되었던 이 쇼트는 목격자의 그것이었고 살인자의 정체는 놀라운 전환에 의해 드러난다. <마더>에는 두 번의 살인 재현 장면이 있는데 후반부 재현에 해당하는 이 장면은 전반부 재현의 부연에 해당한다. 전반부 신에서 어두운 폐가 입구에 카메라가 머무는 동안 프레임 안의 도준은 누군가의 시선에 붙잡혀 있고 그의 앞에는 돌덩이가 던져진다. 철저하게 도준의 관점에서 묘사되는 전반부 재현에서 드러나지 않는 영역의 어둠 속 존재는 후반부 재현에서 밝혀진다. 다음 신에서 도준은 집으로 돌아와 팬티만 입은 채 오른손으로 마더의 왼쪽 가슴을 쥐고 잠든다. 이 쇼트는 옥상에 빨래처럼 널린 소녀의 시체를 보여주는 다음 쇼트와 잠깐 겹친다. 크로스 페이스 전환 덕분에 소녀의 시체(왼쪽)와 잠들어 있는 도준과 마더(오른쪽)라는 두 모티브가 몇 초 동안 화면에 동시에 나타난다. 이러한 시각적 연결은 두 모티프를 평행하게 연결하면서 소녀를 살해한 범인이 도준임을 알려주는 구문적 기능을 하지만 편집과 미장센은 살인 행위가 프레임에 나타나지 않도록 구성하여 관객이 살인자의 신원을 확신할 수 없도록 만든다. 봉준호의 화자들은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제한된 관점을 가져와 그들이 재현하는 현실에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마더)는 현실의 본질을 감지하는 면에서 결함이 있다. 살인에 대한 재현은 마더에 대한 신뢰성을 단기적으로 중단시키고 그녀의 인식에서 벗어난 범죄 공간으로 미끄러지듯 흘러가며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각기 다른 관점으로 기술한다. 그렇다면 마더는 어떤 사람인가? 그녀는 약초사이자 침술사이며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에게 집착하는 어머니이다. 모자(母子) 간에는 구체적으로 말해지지 않은 과거가 있고, 그 외의 비밀들에 겹겹이 감싸져 있는 마더는 기억을 떨치고 과거를 버리려 한다. 과거 회상에 대한 기억 편향을 보여주는 짧은 회상체 대화에서 우리는 마더가 약을 먹여 도준을 죽이려 했고, 그로 인해 도준이 정신장애를 갖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마더는 아들에게 자신의 원죄를 잊도록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망각하기 위해 다리를 침으로 찌른다.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관점에서 도준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틈새에 놓인다. 그는 과거를 망각하고 거의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현재에도 속하지 않고 현재에 부적합한 사람으로 동요한다. 침술 치료의 영향인지 도준은 과거와 현재의 가치를 지배하는 데 있어서 연속성이나 일관성을 결여한 상태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것이 도준이 살인을 저지르는 폐가 장면을 마더가 목격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시간의 흐름에 굴복하여 마더는 과거를 잊기로 결심하지만 도준이 건넨 침통은 트라우마를 소환한다. 이런 사정을 고려했을 때 오프닝 시퀀스에서 마더의 춤은 의미를 갖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허벅지 한 지점에 침을 꽂는다. 나이든 여성들이 가득 찬 관광버스 안에서, 다른 승객들이 춤을 추며 마을을 떠나는 동안 마더는 이 광란에서 배제되어 침술에 의지한 채 암울한 과거를 잊으려 한다. 그러나 끝까지 그녀가 자신만 알고 있는 나쁜 기억과 상처를 잊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너 왜 그랬어’라고 물어봤을 때 ‘몰라 그냥 한 건데’라고 한 거는요, 그 사람이 정말 생각 없이 행동했던 게 아니라 지금 생각 없이 대답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잖아요 선생님.” 영화 리뷰 사이트에 들어가보면 이경미 감독에게 가장 많이 보이는 키워드가 ‘괴작’, ‘괴랄하다’ 라는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주에서 온 감독’, ‘신선한 문법’이라는 키워드도 찾을 수 있다. 나는 전자와 후자 모두가 이경미 감독을 수식할 수 있는 좋은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가파른 호흡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빠른 말, 그리고 빨갛게 상기된 얼굴. 학생들에게 ‘전따’라는 말을 듣는 선생. 자신의 손을 가위로 내리찌르고, 딸의 허밍을 떠올리며 모든 의심을 거두지 않는 엄마. 이경미 감독은 < 미쓰 홍당무 > (2008)과 < 비밀은 없다 >(2015) 두 편의 장편영화에서 강력하다못해 폭주하는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캐릭터와 그 캐릭터의 행동을 먼저 등장시키고, 불규칙한 사운드와 인서트를 통해 퍼즐 맞추기를 하듯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경미 감독의 도치법적인 연출은 위의 대사를 관통하고 있다.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고. <미쓰 홍당무>와 <비밀은 없다>는 전혀 다른 장르이다. 하지만 두 작품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많다. 무엇보다 아주 장르적이면서 동시에 장르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각각 코미디와 스릴러의 장르성을 강력하게 띄고 있으면서도 이경미 감독의 문법으로 코미디와 스릴러의 공식을 빗겨간다. 여기서 우리는 단번에 알 수 있다. 이경미 감독은 무엇을 아주 강력하게 뒤집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영화적 요소에서부터 ‘전복’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미쓰 홍당무>에서 미숙은 삽질을 하며 종철에게 자신이 전화를 한 이유에 대해서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라고 말 하고, 복장검사에 걸린 종희에게 ‘못되게 굴다가 한 번 착한 짓을 하면 사람들이 다 착하게 본다. 그러니까 착하게 살지 말아라’라는 말을 쏟아낸다. <비밀은 없다>에서는 고향을 숨기던 연홍이 딸의 실종을 파해치던 중 극에 달하자 ‘여기 사람들 하나도 못 믿것다야.’라며 굉장히 토착적인 호흡의 사투리를 구사한다. 관객 입장으로서는 한 번에 이해가 안 되는 대사들인데다가, 배우들의 호흡이 빨라서 잘 알아들을 수도 없다. 또한, ‘괴랄하다’라는 키워드가 가장 많이 보였던 <비밀은 없다>의 허밍음에 대해서도 관객들은 이질감을 느낄 수 있다. 이경미 감독은 인터뷰에서 평소 영화를 만들 때 음악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며, <비밀은 없다>의 허밍음은 배우에게 촬영 전부터 연습시켜 녹음한 중요한 장치라고 밝혔다. 실제 영화의 절반 가까이의 사운드를 이 허밍음이 차지하고 있는데, 관객들은 이에 대해 ‘불쾌했다’라는 평을 종종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배우와 감독이 가진 역량의 부족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다분히, ‘의도성’을 가진 연출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미쓰 홍당무>는 코미디 영화의 주인공을 ‘타의적’으로 웃기게 만든 것이 아닌, ‘내가 나여서’ 그랬던 거라며 그러나 동시에 사랑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관객은 웃지만 너무나도 슬프게 울어버리는 캐릭터를 등장시키며 코미디의 기존 문법을 빗겨간다. <비밀은 없다>는 실종된 딸에 관한 의문을 밝히는 스릴러로 포장되어있지만 단순히 딸을 찾는 엄마의 이야기와는 다르다. 배우들의 가파른 호흡과 폭주하는 스토리텔링으로 기존 서사의 문법을 명쾌하게 빗겨갓듯, 기존 서사 공식과 감독만의 호흡을 넘나들며 분위기를 환기한다. 이는 감독의 한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다. ‘내 영화에 여성이 등장하는 이유는 남성 영화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여성 영화가 많이 나오는 시대가 되면, 그때 나는 남성 이야기를 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이경미 감독은 자신만의 새로운 화법으로 세계 속의 이면을 발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단순히 영화적인 소스에서만 변주를 주었을까. 이경미 감독은 ‘캐릭터’라는 아주 강력한 무기로 자신의 의도를 더 확고히 한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 여성을 발견하는 새로운 시선으로 기존 문법을 또 한 번 비튼다. 바로 ‘감정적인 여성캐릭터’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여성캐릭터는 중요한 순간에 ‘감정’에 호소하며 영화 안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인물로 그린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를 뒤집기 위해서 이경미 감독은 ‘이성적인 여성 캐릭터’를 배치하는 것이 아닌 ‘정말로 엄청나게 감정적인’, 즉 아주 신경질적인 여성 캐릭터(미숙과 연홍)를 세계와 갈등하게 함으로써 여성을 새롭게 발견한다. <미쓰 홍당무>에서 전화를 받지 않는 짝사랑 상대 앞에서 실제로 ‘삽질’을 하며 폭주하듯 자신의 마음을 쏟아내는 미숙은 제자의 부모님의 이혼을 막을 대책으로 내연녀와의 성적인 문자를 기획하고, 제자와 합이 잘 맞지 않자 컴퓨터 실 부품을 부시고 서로 상처를 낸다. 또 생뚱맞게 피부과 의사에게 자신의 하루를 털어놓는다.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캠프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곳에서 남편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이성적인 수사방식이 아닌 굿, 최면술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딸의 메일 비밀번호를 알아내려고 고객센터에 딸의 목소리를 흉내낸다. <미쓰 홍당무>의 미숙과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신경질적인 여성’으로서 세계와 대립하며,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발견하게 한다. <미쓰 홍당무>가 감정적인 여성, 신경질적인 여성들(미숙과 종희)의 연대를 그리고, 여성들 사이에 남성(종철)을 존재하게 했다면, <비밀은 없다>에서는 그러한 여성을 남성의 세계로 대립하게 한다. 그리고 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지점은 ‘여성 청소년 캐릭터’이다. <미쓰 홍당무>의 종희와 <비밀은 없다>의 민진은 청소년물이나 성장영화의 주인공으로서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로 영화의 키를 쥐고 있는 건 종희와 민진이고,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말이 무색하게 정말 어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종희와 민진은 청소년이 아닌 종희와 민진 그 자체로 주체성을 획득하는데, 종희와 민진이 가장 중요하게 가지고 있는 키는 ‘연대’와 ‘전복’이다. 종희와 미숙, 그리고 민진과 미옥, 연홍의 연대는 신경질적인 여성을 세계와 대립시키는데 핵심적으로 작동한다. 종희와 민진은 왕따를 당하고 있는 청소년으로서 사회에 소외된 주체인데, 이들은 기성 여성(선생인 미숙과 엄마인 연홍)을 자신보다 멍청한 존재로 판단하고 그들의 손을 잡아주며, 지켜주기까지 한다. 선생인 미숙이 자신의 아빠를 짝사랑하게 된 이유가 ‘아빠가 귀에 대고 속삭여서’라는 어이없는 말을 듣고, 미숙에게 아빠가 ‘귀를 핥았다고 하라’며 지시한다. <비밀은 없다>에서는 <미쓰 홍당무>에서 이경미 감독이 스스로 다뤘던 선생-제자의 문법을 다시 비틀어, 아빠의 내연녀가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민진이 선생에게 돈을 요구하고 일방적인 욕을 퍼붓는다. 선생인 미숙은 종희가 자신의 팔이 아플까봐 ‘커진다 커진다 커진다’를 대신 써줬다는 얘기를 하며 베시시 웃고, ‘엄마는 멍청해서 지켜줘야 해요’라는 민진의 유언을 들은 엄마 연홍은 민진의 친구 미옥을 안아준다 바로 여기서 감독이 보여준 종희와 민진이 기성 여성을 연대하는 동시에 그들의 위치를 전복시키는 영화의 구조는 감독이 세계를 뒤집고 비틀고 있는 여러 단서들을 증명하는 격이 된다. 이경미 감독이 뒤집고 있는 세계에 대한 단서를 내가 다 파악하고 통찰하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경미 감독이 두 영화에 공통적인 화법으로 던져놓은 다른 소스들에서 조금의 단서들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작 <Love Set>를 통해 한 번 더 확고히 했다고 생각한다. 극 중 IU(이지은)와 두나(배두나)는 20분 가량의 단편 러닝타임 대부분을 테니스 코트에서 움직인다. 역시 어딘가 화나 있는 듯한 신경질적인 여성 캐릭터, 아빠를 내어주기 싫은 건지 남자친구와 결혼하기 싫은 건지 확실하진 않지만 강력한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여성 청소년 캐릭터. 테니스 경기 동안 배우들의 신음, 랠리, 자두를 씹어먹는 소리, 그리고 피를 뚝뚝 흘리는 여성의 신체를 클로즈업한다. 이들은 경기를 끝내고 손을 맞잡게 되는데, 몇몇 영화 리뷰에서는 이 작품에 대해 동성애적 코드가 있음을 암시한다고 해석한다. 또, male gaze가 담겨 있는 작품이라는 평도 많은데, 이 작품의 감독은 여성이라는 사실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부딪히고 있다. 이경미 감독은 대중에게 영화가 한 방면으로 해석될 여지를 주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연출점으로부터 이경미 감독과 대중의 관계는, 이경미를 지독하게 싫어하거나, 열렬히 응원하거나. 이 둘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전따와 전따 애인은 바로 무대로 올라와주시길 바랍니다.” “니가 전따고 내가 전따 애인이지?” “무슨 소리에요! 선생님이 전따고 내가 전따 애인이지!” <미쓰 홍당무>에서 미숙의 담당과목은 원래 러시아어였다. 하지만 뭐든지 자신보다 잘나 보이는 양희에게 담당 과목도, 짝사랑 상대도 빼앗겨버린다. (이 점에서 여성과 여성이 대립하는 방식에 대해서 아쉽다는 평도 있지만, 나는 영화 속에서 여성과 여성이 대립하는 것은 여성의 연대와 그 이면의 전복을 얘기하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얼굴이 빨개서 뭘 하든지 우스워보이고, 학생들에게 선생이 ‘전따’라고 불리며, 학생보다 영어를 못해서 아침마다 영어학원에 가야하는 미숙은 자신의 사랑도 지켜야하고 공연 연습도 해야하기 때문에 잠을 잘 시간도, 밥을 먹을 시간도 없다. 게다가 피부과는 미숙을 피해서 이사를 가 버린다.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지역 감정이 심한 경상도에서 전라도가 고향인 걸 숨기며 살다 들통이 나서 ‘정말 전라도에요?’라는 질문까지 받는다. 전라도면 전라도지 ‘정말 전라도에요?’라는 질문은 굉장히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출생지, 외모와 같은 것들로 차별받는 주인공들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과 자신이 가장 의지하는 남편의 세계에서 점차 소외된다. 이경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스스로 여성주의에 한정되어 작품을 찍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영화 속 여성을 분리되고 약하고 소외된 존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여기에 우리 사회의 단면이 보였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내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사람들의 편견들을 넣고 싶었고, 그것과 싸워서 극복하고 이기는 인물을 그려내고 싶었다. ”라고 한 점에서 비추어 볼 때, 이경미 감독이 여성캐릭터를 새롭게 발견한 점, 기존 문법과 다른 새로운 화법을 구사하며 신선한 장치들로 영화를 구성했다는 점들은 이경미 감독이 영화를 빌어 세계에 하고 싶은 말이 배타적인 동시에 이타적인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해보게 된다. ‘나여서, 내가 나여서 그랬던 거에요.’라며 자신을 한 없이 자조적으로 끌고 갔던 미숙이, ‘전따와 전따 애인’일지라도 우리는 너희와 수준이 다르다며 열심히 연습한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한다. 연홍은 민진의 가사를 해석하고, 미옥을 끌어안는다. 이윽고 어지럽게 나열되어있던 불규칙들이 한 곳에 모이고, 이들이 버티고 있던 세계는 전복된다. 미숙과 종희가 서로 등 지고 팔짱을 낀 채로, 번갈아가며 세계에서 발을 뗀는 것처럼, 한 발씩, 한 발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