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 감독
- 원일구
- 제작년도
- 2015
- 출연
- 변우민, 지대한, 강세정, 이새윤, 김인경, 이수민
<그저 사고였을 뿐> 중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 Les Films Pelleas) 몇 해 전 한 시네필 커뮤니티에서 “영화, 어디까지 봤니(소위 ‘시네필력’ 테스트)”의 끝판왕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영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권역을 담당하는 프로그래머로서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론 묘한 민망함이 스쳤다. 같은 아시아 대륙에 속해 있지만, 우리에게 동남아시아나 서아시아 영화들은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심리적으로도 멀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국내에 소개되는 편수 자체가 절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은 앞다퉈 아시아의 새로운 영화들에 주목하고 있다. 이곳이 지금 가장 역동적인 작가군이 형성되고 있는 흥미로운 화수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매해 주요 영화제 수상작 리스트에는 이 지역 감독들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산업적인 지형도 바뀌고 있다. 필리핀과 태국이라는 전통적인 영화 강국 외에도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신흥국들이 자국 상업영화로 박스오피스를 주도하는 단계에 진입했다. 탄탄해진 산업적 기반 위에서 작가주의 영화들이 칸, 베를린, 로테르담 등 서구권 영화제를 휩쓰는 현상은 이제 하나의 경향으로 굳어졌다. 한편, 검열이나 전쟁으로 억눌려 있던 서아시아권의 목소리 또한 잠재력을 폭발시키고 있다. 망명지에서 혹은 비공식적인 루트로 영화를 만들던 이들은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와 도하를 중심으로 한 공격적인 지원 정책에 힘입어 그들의 언어로 동시대의 서사를 드러내고 있다. 비슷한 역사적 상흔과 아시아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우리로서는 이 흐름을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 그 거대한 파도의 맨 앞자리에 선 젊은 작가들의 데뷔작들을 통해 아시아 영화의 현재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쓸모 있는 귀신>: 눈을 뜨는 것은 곧 살아있다는 증거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 Best Friend Forever 불교 국가이자 뿌리 깊은 민간신앙의 전통을 가진 태국은 동남아의 오랜 영화 강국이다. 하지만 강력한 검열 탓에 근현대사나 사회적 이슈를 직설적으로 다루기는 어려웠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들이 몽환적인 숲과 은유로 점철된 것은 이러한 억압에 대한 미학적 응답이었을 것이다. 반면 < 쓸모 있는 귀신 >(랏차뿜 분번차초케, 2025)은 태국 주류 장르인 호러 코미디에 SF와 퀴어 코드를 뒤섞으며 노골적으로 장르를 융합하고 파괴하는 혁신적인 태도를 취한다. 진공청소기에 빙의한 귀신이 다른 귀신을 퇴마하고 살아있는 남편은 혼령의 기억을 붙들려 애쓴다는 설정은 자칫 난해하거나 신인 감독의 객기 어린 실험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놀라운 지점은, 그 황당한 설정 속에 태국 사회, 더 넓게는 국가 폭력의 은폐와 트라우마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심어놓았다는 데 있다. 영화는 기억을 저장하는 타임캡슐로서 매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하다. 교육 제도와 레거시 미디어가 철저히 은폐하려 했던 태국 민주화 과정의 잔혹한 상흔을 이토록 대담하고 환상적인 화법으로 직시한 영화가 또 있었던가. < 노란 누에고치 껍데기 속 >: 나비가 되기 위한 인고의 시간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베트남 영화는 강렬한 색감과 회화적인 구도에 강점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팜 티엔 안 감독은 이 시각적 유산을 능숙하게 다룰 뿐 아니라 편집이라는 시간의 리듬마저 훌륭하게 조율해낸다. 데뷔작이라고는 믿기 힘든 정교한 롱테이크는 단연 압권이다. 영화 속에서 때론 아름답게 때론 무심하게 스쳐 가는 풍경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기원전부터 수백 세대를 거쳐 ‘사람이 가꿔온’ 장소이자 척박한 정글을 일군 땀, 수천 년에 걸친 전쟁의 피와 외세의 침략을 물리친 눈물이 배어 있는 역사적 지층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 던져진 주인공의 삶 역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간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가족을 잃고 시골로 내려가 장례를 치르며 조카를 돌봐야 하는 현실은 그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오롯이 그의 몫에 달려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베트남 영화사에 이정표가 될 만한 지점은 그간 금기시되던 베트남 전쟁의 상흔을 무심한 듯 툭 건드리는 대목이다. 그것이 당국의 실수였든 의도치 않은 허용이었든 이 장면은 베트남 영화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 호랑이 소녀 >: 소녀의 해방이 선사하는 날 선 카타르시스 사진: IMDb , 부산국제영화제 이슬람 문화권인 말레이시아에서 소녀의 신체적 변화는 흔히 부끄럽고 감춰야 할 대상으로 치부된다. 아만다 넬 유 감독은 12세 소녀 자판을 통해 이 금기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자판은 초경을 불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의 몸이 겪는 변화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 여기서 ‘바디 호러’라는 장르는 사회적 억압을 찢고 나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어 탁월한 선택이 된다. 영화를 견인하는 힘은 소녀들이 뿜어내는 야생적인 활력이다. 기성세대가 씌워놓은 차별과 억압의 프레임을 내면화하는 대신, 자판은 두려움마저 집어삼키고 사회가 경외하는 호랑이로 탈피한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긍정하는 것만큼 큰 자유가 어디 있을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정작 본국인 말레이시아에서는 검열 문제로 논란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가진 전복적인 힘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자서전>: 깨지 않는 숙취 같은 독재의 그림자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 KawanKawan Media < 자서전 >(막불 무바락, 2022)은 독재 정권이 끝나면 곧 공정한 세상이 올 것이라 믿었던 청년의 순진한 믿음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수십 년간 이어진 독재의 잔재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일상의 미세한 틈새에서 악취를 풍긴다. 수감된 아버지를 대신해 은퇴한 장군의 저택에서 일하게 된 청년 라킵은 카리스마 넘치는 장군을 아버지처럼 따르며 냉혹한 어른의 세계를 학습한다. 그는 권력자의 눈치를 보며 거짓을 덮고 우발적인 폭력을 묵인한다. 약육강식의 법칙 속에 새겨진 부패는 라킵의 내면을 서서히 갉아먹는다. 인도네시아의 신예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인 막불 무바락 감독은 자칫 관념적으로 흐를 수 있는 사회적 담론을 부자 관계를 연상시키는 개인의 서사로 치환하여 설득력을 얻는다. 과거의 유령이 현재의 청춘을 어떻게 잠식하는지 그 서늘한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이러한 표현이 허용된다는 사실 자체에서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희망을 엿보게 된다. <대통령의 케이크>: 달콤한 케이크 위로 흐르는 씁쓸한 아이러니 사진: 토론토국제영화제(TIFF) 이웃 국가와의 전쟁과 강압적인 철권통치 아래 놓인 1990년대 이라크. < 대통령의 케이크 >(하산 하디, 2025)는 이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 소녀의 험난한 여정을 그린다. 9살 소녀 라미아에게 떨어진 숙제는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할 케이크를 구해오는 것. 경제 제재로 당장 먹을 빵조차 부족하고 사기꾼이 들끓는 거리에서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다. 하지만 절대권력과도 같은 선생님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는 소녀는 길을 나선다. 시장과 검문소에서 마주친 어른들은 소녀를 도울 여력이 없거나 오히려 이용하려 든다. 그러나 라미아는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전문적인 연기 수업을 받았을 리 만무한 비전문 배우가 보여주는 그 단단한 눈빛은 연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체득한 앙상한 강인함처럼 보여 마음을 울린다. 가장 달콤해야 할 케이크를 구하기 위해 가장 비정한 현실을 통과해야 하는 아이러니. 영화는 그 끝맛이 달콤함이 아닌 강렬한 메시지임을 담담히 보여준다. <그저 사고였을 뿐>: 보이지 않는 감옥에서 외치는 진실 앞서 살펴본 데뷔작들과는 조금 결이 다르지만 올해 가장 주목받은 영화중에 하나인 < 그저 사고였을 뿐 >(자파르 파니히, 2025)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늦은 밤 운전 중에 발생한 로드킬로부터 시작된 영화는, 도입부 이후 자기의심과 복수심 사이에서 국가폭력 희생자들이 겪는 끊임없는 갈등이 고조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정부로부터 영화 제작 금지와 출국 금지라는 가혹한 처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며 저항의 서사를 써 내려온 작가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그저 사고였을 뿐>은 제목이 주는 무심함과는 대조적으로, 이란 사회 내부에 깊게 뿌리 박힌 불신과 권위주의, 그리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집단적 심리를 이전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한층 서늘해진 시각으로 해부한다. 국가적 트라우마가 개인의 일상을 어떻게 잠식하는지를 묵직하게 웅변하고 있다. 사진: Cinema Galeries 스크린으로 목격하는 아시아의 오늘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의 전반적인 경향을 짚어보자면, 동남아시아는 적극적인 국제 공동 제작의 틀을 활용해 자본과 기술의 한계를 영리하게 극복하며 외연을 확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서아시아는 국가 정책의 기조가 과거의 통제에서 적극적인 지원으로 선회하며 산업 성장의 새로운 탄력을 받는 모양새다. 두 지역 모두 이전보다 압도적인 작품 수와 두터워진 작가군을 배출하며 영화 산업의 비약적인 고도화를 이뤄내고 있다. 물론 모든 곳이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이란과 같이 정부의 직접적인 검열과 통제가 오히려 강화되는 역행의 길을 걷는 국가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영화는 그 틈바구니 속에서 가장 날카로운 저항의 언어로 거듭난다. 억눌린 목소리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 기어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본래 영화는 소설이나 미술 등 인접 예술의 자양분을 섭취하며 성장해왔지만 동시에 대중과 가장 밀착된 예술로서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아 왔다. 과거에 금기시되었던 소재를 수면 위로 올리고 소외되었던 관점을 복원하는 이들의 시도는 단순한 미학적 성취를 넘어선다. 특히 초반에 열거한 다섯 편의 영화들은 각기 다른 국가, 장르,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하나의 거대한 맥락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바로 기억과 응시다. 이들은 국가가 감추고 싶어 하는 치부나 사회가 강요하는 금기를 외면하지 않고 장르적 상상력 혹은 집요한 리얼리즘을 통해 스크린 위로 기어이 끄집어낸다. 특히 이 작품들이 모두 신인 감독들의 데뷔작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윗세대가 남긴 부채와 상흔을 물려받았지만 그것을 자신들만의 새로운 문법으로 해석하고 기록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망각에 저항하는 기록이자 억압된 목소리들의 연대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낯선 아시아 영화들을 보며 기시감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 또한 지난한 근현대사를 통해 비슷한 고통과 성장을 겪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대 아시아 작가들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단지 이국적인 풍광을 즐기는 취미를 넘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들의 고군분투에 보내는 가장 조용한 응원일지 모른다. 스크린 너머 그들의 치열한 오늘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박성호(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l 10년 이상 해외에 거주하며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영화를 중심으로 활동해왔다. A Million Years (2018) 등 다수의 단편 및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다.
나는 덜컹거리는 좌석에 앉아있다. 새벽부터 감질나게 내리던 비가 차창 밖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창 밖으로는 처음 보지만 익숙한 시골 풍경이 그보다 빠른 속도로 흘러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지금 나는 이 글을 지방 어딘가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쓰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을 마칠 때 즈음이면, 아마 추측하건대 나는 또 어딘가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단편 영화 배급이라는 것은 나에게 항상 이런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독립영화계에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생소할 이 직업은, 내가 처음 일을 시작할 때에도 모호했지만, 곧 십오년 경력을 달성하게 되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어떤 일인지 딱 정리하기엔 애매하다. 그래서 십여년 전부터 나는 이 직업을 인디아나 존스 같은 모험가라고, 맘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딘가 이상한 합리화 같지만, 실제로 나는 이 생각이 꽤 그럴싸하다고 여겨왔다. 인디(이럴 수가 심지어 이름도 ‘인디’잖아!)의 직업은 대학교에서 재직하는 고고학자이다. 그의 일상은 학교의 연구실이나 도서관에서 수많은 책들 속에 파묻혀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상의 다른 한편으론, 놀랍고 신기한 보물을 찾아 전세계를 누비는 모험의 삶 또한 존재한다. 단편 영화 배급이란 직업도 지루한 일상과 두근거리는 모험의 기묘한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업무 자체의 대부분은 온라인으로, 사무실의 모니터 앞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수많은, 어떻게 보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서류 작업의 시간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새로운 영화와 관객을 찾기 위해 세상을 누비는 모험의 시간이 항상 같이 따라 붙는다. 인디는 시리즈 몇 편에서인가 그런 말을 했었다. 고고학은 도서관의 책 속이 아닌, 바깥 세상에 존재한다고. 마찬가지다. 배급은 결코 서류에서 끝나지 않는다. 영화도, 창작자도, 관객도 그들 모두는 서류와 모니터 밖에 있는 현실 세계에 존재한다. 정말 좋아해서 배급을 하게 된 한 영화가 모니터 속 서류와 파일로만 존재하다가… 마침내 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나게 될 때- 관객들이 그 영화를 나처럼 좋아하게 되었다고 느끼게 되는 멋진 순간이 있다. 그것은 내가 이 일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이 문장을 쓰고 있는 나는 이제, 경상도 해안 도시 어딘가의 한적한 카페에 앉아있다. 얼마 남지 않은 커피를 홀짝이며 방금 쓴 문장을 되뇌자, 나는 몇 개의 과거 속에 남아있는 행복한 감정을 떠올린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씁쓸한 기억의 흔적이 함께 어렴풋이 떠오른다. 얼마 전에, 몇 년 전부터 인연을 맺고 있는 한 감독의 새 단편 영화를 배급하게 되었다. 그는 유독 GV(관객과의 대화)에 집착을 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그는, 초청된 모든 영화제의 GV 시간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또 체크했으며, 입고 갈 의상과 그 날의 질의응답을 거듭 준비하곤 했다. 나는 그의 열띤 모습이 좀 의아했다. 나는 그에게, 이전 영화로 이미 꽤 많은 GV를 하지 않았었냐고 물었다. 왜냐하면 그의 이전 영화는 그 해 가장 주목받고, 또 많은 영화제에 초청되었던 작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대답을 들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저는 그 영화로 GV를 거의 해 본 적이 없어요.” 그의 이전 작품은 2020년, 팬데믹 시대의 영화였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나와 똑같은 느낌으로 팬데믹 시기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굉장히 힘들었고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어렴풋한 기억, 그리고 마치 꿈이라도 꾼 것처럼 그 기억은 점점 뿌옇게 흐려져가고 있다. 언젠가는 힘들었다는 추상적인 기억과 땀이 찬 마스크의 축축한, 기분 나쁜 감촉만이 기억 날지도 모르겠다. 팬데믹의 기억에 대한 이 이상한 감각은 단편 영화들이 겪었던 이상하고, 때론 의심스러웠던 수많은 일들의 기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처음 팬데믹이 시작되었을 때, 아니 처음 나의 현실을 덮쳐 왔을 때가 기억난다. 나는 어딘가로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 어느 영화제 스태프들과 배급사 담당자들 간의 미팅 자리로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 뉴스의 해외 단신에 나오던 새로운 역병은, 조금씩 뉴스의 메인 꼭지로 다뤄지는 빈도가 높아져 가고 있었다. 그 날의 미팅도,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안전한 영화제를 진행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을 예정이었다. 미팅 장소로 향하는 나는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한편으론 좋은 쪽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란 평소와 같은 열띤 흥분이 조금 더 강했다. 하지만 그 장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의 핸드폰으로 새로운 이메일과 동료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상영은 취소되었다. 영화제는 온라인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일은 균형을 잃기 시작했다. 그 뒤에 내가 맞이한 세상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비대면”, “뉴노멀”. “새로운 세상이 온다”. “기존에 알던 우리의 세상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모두가 힘들었지만, 단편 영화들에 있어서는 유독 모진 시기였다. 이렇게 말하자면- 더 힘든 사람들, 더 끔찍한 일을 겪은 영역도 있다고 하겠지만...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단편 영화는 “중요하지 않은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더 모질었다. 강력한 방역 조치와 거리 두기가 시행되자 그토록 많던 상영과 행사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그것들은 아주 간단하게 “온라인”으로 대체되었다. 수많은 영화제와 상영회들이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영화를 상영했다. 창작자들이 서로 만나 밤새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은 ‘메타버스’의 이상하고 어색한 사교 활동으로 바뀌었다. 그 결정을 내린 사람들과 단체들이 가벼운 마음이 아니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그 결정들이 “변곡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몰랐다. 언젠가는 온라인 상영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될 수도 있겠지. 미래에는 극장이 사라질지도 몰라. 분명 그런 생각은 팬데믹 이전에도 있어왔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그런 변화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언젠가 올 것이라 생각했던 수많은 일들이 너무나 빨리 우리 앞에 현실로 닥쳐왔었다. 팬데믹 시대, 나의 일은 두배 세배의 모니터 앞 서류 작업으로 변질되었다. 일의 양도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이 일에 ’모험’의 두근거림이 사라지고 끊임없이 ‘일상’만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아무리 많은 서류 작업을 하고 어떤 좋은 영화를 영화제에 진출시켜도, 나는 내 노력의 결과를 느낄 수 없었다. 그 시기 내가 배급했던 영화들은 많은 경우, 온라인 상영 결산 서류의 숫자가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수많은 온라인 상영과 가상 공간에서의 행사들. 그것들은 오프라인에 있던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벗어난 새로운 기회인 것 같았다. (최소한 그렇게 포장했다) 하지만 실제 결과는 많이 달랐다. 조회수는 꽤 자주 처참했고, 아바타 대화는 종종 무의미했다. 그리고 불과 2년여의 시간이 지났다. 팬데믹의 공포가 옅어져 가고, 답답한 마스크를 더 이상 매일 쓰지 않아도 될만큼 시간이 지났다. 우리의 미래인 양 얘기했던 그 수많은 변화들은 “놀라울 만큼” 빠르게 사라져갔다. 영화제의 온라인 상영은 이제 단편 영화를 제외하곤 거의 하지 않는다. (사실 왜 단편영화들만 온라인 상영을 계속 하는지는 나의 소소한 의문이다) 혼란스러운 시대를 틈타 사람들을 현혹시켰던 NFT나 메타버스는 이제 사람들의 우스개소리로, 누군가의 실패한 주식 테마주로만 기억된다. 나도 이제 다시 도시에서 도시로, 산과 바다로 돌아다니며 새로운 영화와 관객을 찾는다. 나의 일은 다시 균형을 찾았다. 문제는,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혹은 떠올리기 싫어하는 그 시기의 기억 속에, 어떤 것들은 남겨졌다는 것이다. 팬데믹 시대의 단편 영화와, 그 작품의 창작자들은 아직도 그 망각 속에 남아있다. 팬데믹 시기, 그들의 단편영화를 세상에 내놓았던 이들에게 나는 무척 안쓰럽고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누군가에게는 일생 일대의 기회였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앞으로 영화를 계속 해나갈 응원일 수도 있었을 순간들을- 그들은 누리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의 노력과 성취에 응당 따라 왔어야 할 보상이었다. 나는 이 일을 하며 그런 보상들이, 그 크기와 화려함의 정도와는 별개로 사람들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봐왔다. 나는 이제 이 글의 마지막 단락을 쓰며 또 다른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그곳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꽤 만날 것이고, 운이 좋다면 새로운 인연도 만나게 될 것이다. 작은 상영관에 모여 앉은 관객들은 어쩌면 그들이 새로 좋아하게 될 어떤 영화를 찾을지도 모른다. GV에 집착하는 그 감독도 내일 있을 또다른 영화제 때문에 조금 상기된 모양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번엔 꽤 신경 쓴 정장을 챙겨 둔 모양이다. 그는 다행히 새로운 영화를 만들었고, 두번째 기회를 잡아냈다. 나는 그의 행운이 정말 기쁘다. 하지만 팬데믹의 기억 속에, 누군가는 끝내 남겨져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고다르를 베끼면서 얘기를 시작해야겠다. 우리들 사이에 '한국고전영화'란 대체 무엇을 지칭하는 걸까? 『한+ 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문화예술에서 논하는 고전이란 "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모범이 될 만한 가치를 지닌 사상집이나 문예 작품"을 일컫는단다. "모범"이란 표현에 딴지를 걸고 싶어지긴 하나, '세계고전문학'이나 '클래식 음악' 같은 말이 통용되는 바를 떠올려보면 그래도 말뜻에 납득이 가긴 한다. 그런데 '한국고전영화'라? 나로선 이 말을 기어이 꺼내려다가도 결국엔 어색해서 주춤하게 된다. 과연 한국영화에 있어 고전이란 무얼 지칭할 수 있을까. 아니, 과연 무엇이 고전일 수 있을까. 당신의 생각이 정말 궁금한데, 왜냐하면 나는 이 물음 모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쟁점, 한국영화에 고전기가 있다면 이는 언제부터 언제인가? 달리 말해 한국영화의 뼈대가 세워진 시기는 언제인가? 한반도에 영화 기술이 들어오고 식민지 조선인들이 그것을 활용하기 시작한 일제강점기일까, 아니면 이 시기를 포함해 한반도 영화계의 짧은 해빙기였던 광복 전후일까, 그도 아니면 한국전쟁부터 5.16 쿠데타 직전까지인 이승만 정부 전후일까, 이도 아니면... 확언하기 어렵다. 사실 고전영화라는 말 자체가 실은 '옛날 영화'를 좀 더 고상하게 부르려는 세속적 용어라는 것쯤은 알고 있으나, 미국이나 일본의 영화사 연구에서 고전기라는 범주가 이런 용법을 넘어 이론 안에서도 ('파벌'에 따라 구분은 상이할지언정) 어느 정도 설정되어있다는 걸 떠올리면, 한국영화의 경우는 역시나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는 식민지나 군사 정권의 경험을 가진 비 서구 국가들의 공통적인 현상이 아닐까? 하지만 (발리우드 스타일이 일찍이 굳게 자리 잡은) 인도나 (빈곤한 환경으로 인한 문화적 혼종성을 오히려 '내수용'으로 스타일화한) 브라질의 영화사를 떠올리니 금방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요컨대 한국영화사에 있어 "일제강점기"나 "유신 체제 시기" 같은 사회적 구분은 가능하더라도 자체적인 '고전기'에의 설정 및 구분은 임의적으로도 불가능한 것이다. 어째서? 아마 21세기 전까지 한국영화가 스스로 독자적인 문화로서 성립된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오해를 피하고자 서둘러 덧붙이건대, 나는 윗세대 영화인들의 문화적 투쟁을 폄하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들 다수의 오만한 행보와 의심스러운 작업에 대해선 깊은 불만이 있어도, 그들의 투쟁의 결과를 향유하며 살아가는 입장인 만큼 투쟁 자체에 대해선 오히려 깊은 존경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런 투쟁이 (사실 현재진행형으로) 오랫동안 이어진 것은 역시 한국영화가 독자적인 문화는 아니란 의식을 모두가 갖고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우리는 1998년 필름 발굴 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국가가 일제강점기 때의 영화를 단 한 편도 소유하지 못했음을 알고 있고, 1970년 이후 외국영화 수입쿼터제를 충족하기 위해 수많은 한국영화가 제작되기'만' 했음을 알고 있으며, 제작이고 비평이고 무관하게 1980년대의 '신세대'들이 총체적인 고립무원의 환경에서 활동을 겨우겨우 이어갔음을 알고 있고, 같은 1980년에 공개되었음에도 (당시 국산영화 최대 흥행작이었던) 〈 미워도 다시 한번 '80 〉 대신 〈 전원일기 〉를 '옛날'의 지표로 흔히 떠올리고 있다. 역사의 연속이나 단절을 논하기도 전에 이미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받지 못해 독자적인 문화로 선 적이 없고, 그러니 (우스꽝스럽게도, 선후배의 엄격한 계열은 있어도) 스타일과 방법론에 있어 표준이나 관습으로 삼을 역사적 대상이 내부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영화에 고전기는 역시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두 번째 쟁점, 한국영화에 있어 고전으로 기능하는 영화가 얼마나 있나? 아마도 이 물음에 당신은 즉각 김기영의 이름을 거론할 것이다. 그래, 확실히 창작자든 관객이든 한국영화와 깊이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 하녀 〉를 비롯한 김기영의 영화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아니, 그 이전에 이 조건 자체를 뒤집어봐야 하지 않을까. 고전이란 이미 그 자체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사후적인 (재)평가 속에서 (위태롭게) 성립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가령 에드거 앨런 포우가 오늘날 같은 문학의 정전에 등재되도록 선제적으로 상징투쟁을 벌인 건 당대의 미국인들이 아니라 샤를 보를레르를 위시한 프랑스 상징주의자들이었으며, 이 상징투쟁의 영향은 포우가 죽고 한 세기 이후에야 미국에 도달했다. 또 오랫동안 잊혀졌던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바흐 사후 세간에 재발견된 것은 물론 젊은 펠릭스 멘델스존의 강력한 열정 때문이기도 했으나, 관습을 타파한 새로운 예술적 장을 마련하고자 한 (멘델스존을 포함한) 신세대 음악가들의 전투적인 의식과, 국가와 종교에 대한 세간의 믿음을 굳건히 하고자 한 지식인들의 계산적인 의식이 예기치 않게 연합하여 이끌어낸 결과였다고 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김기영이 1990년대에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은 당대의 영화광들에게 공통적인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식? '우리에게도 컬트영화가 필요하다'라는 '국제적'인 의식. 많은 연구자와 비평가들이 합의했듯, 오늘까지 이어지는 김기영의 위상은 여기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에 더해, 영화사 연구자 금동현은 「협잡꾼 당신-『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1)」에서 김기영의 1971년 이후 영화들이 대부분 (해외 영화제 실적을 중요시한 문화융성정책에 따라) 시체스 국제영화제를 염두에 두고 제작되었음을 지적하며, "해외를 경유하여" "한국 혹은 한국영화라는 구조에 순응/활용하는 김기영의 행위성"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조금만 더 발을 내딛으면 우리는 "여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조건들에 의해 뒤틀린 (...) 한국영화의 부정교합 자체가 도착적인 미학으로 승화된 것"으로서, 곧 가장 한국영화적인 한국영화로서 김기영의 영화들을 재정의하는 영화평론가 유운성의 「이식과 기생 : 봉준호의 < 기생충 >을 계기로 다시 읽는 임화의 영화론」과 마주치게 된다. 그렇다면 김기영의 '귀환'은 역사의 관점에선 필연적인 결과였을까? 확신할 수야 없지만, 90년대 이후의 김기영 수용에 또 다른 (무)의식이 있었으리란 '잠재적인' 가설은 분명 흥미진진하며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한국영화가 가진 것은 집단적인 스타일과 방법론이 자의적으로 형성된 고전기가 아니라, 각각의 스타일과 방법론 사이에 일말의 계열을 만든 환경인 게다. 한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김기영 같은 취급을 받은 이는 결국엔 김기영뿐이었다. 물론 이만희와 임권택 역시 한국영화사의 만신전에 올랐다. 하지만 이만희는 2005년 〈 휴일 〉의 발견과 함께 뒤늦게 관객들을 (다시) 자극한 경우였고, 임권택은 이미 영화계 내외에서 한국영화의 아버지상으로 군림했으나 오히려 그것이 그를 제작자에게나 관객에게나 (부정적인 의미에서) 예외로 취급받도록 만들었다. (내친김에 부연하자면, 나는 한국영화의 가장 이질적인 작가는 다름 아닌 임권택이라고 보는 쪽이다) 요컨대 이들에겐 김기영 만큼의 폭넓은 애정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2000년대 들어 대기업 자본의 (재)진입으로 인해 통째로 재편되기 시작한 한국영화산업은 충무로에 기반을 둔 21세기 이전의 영화 혹은 영화인들 대부분을 망각과 은퇴로 몰아넣었고, 한국영화사에는 또 한 번의 극심한 단절이 일어났다. 예컨대 이순재는 알아도 김지미를 아는 한국의 2~30대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 한국영화에는 고전으로 기능하는 영화가 터무니없이 적은 것이다. (한국의 문학과 대중음악에서도 비슷한 단절이 일어났었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쟁점, 그렇다면 추후에 21세기 이전의 한국영화들이 고전으로 성립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터무니없는 도박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곧장 대답을 내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입을 떼보자. 지금 같은 단절의 상황이 연속되는 한은 역시나 어렵지 않을까? 이는 앞서 언급한 '대중적' 단절만 지시하지는 않는다. 옛날 한국영화를 새로운 고전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엔 (결코 많지는 않은) 국내 시네필들의 몫일 터이다. 한데 그들이 영화 제작 환경에 편입되는 것도, 옛날 한국영화를 끈질기게 보러 다니는 것도, 아예 이런저런 극장을 다니며 영화 관람을 지속하는 것도 요원한 게 요즈음의 상황이지 않던가? 한국영화를 이루는 행위자들은 갈수록 서로 간의 마주침과 뒤섞임 없이 분열되기만 하고 있다. 이 행위자들에게 책임을 온전히 돌리려는 것도, 행위자들이 서로 반드시 마주치고 뒤섞여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상황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대다수의 국내 시네필들은 (어느 시대의 작품이건 간에) 한국영화에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도 않다. (2010년대 전후로 한국영화사 연구의 헤게모니가 국문학과로 옮겨간 것은 그 결과이자 원인일 테다) 후기 자본주의 하에서 '국제적인 것'이 대도시와 대도시 간의 연결로서 블록으로만 환원되는 것과 유사하게, 국내 시네필들은 한국영화와 거의 단절된 채 '국제적인 것'에 스스로의 위치를 잡는다. 그 원인에 대한 규명은 본고에서 책임지고 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므로 넘어가야겠지만, 하여튼 옛날 한국영화의 낮은 접근성은 (불균질한 더빙을 비롯한) 형식적 층위의 어색함에서만 기인하지는 않는 것이다. 부끄럽게 고백하자면 비평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 역시도 이런 상황의 바깥에 있지는 않아서, 불과 몇 주 전인 5월 7일에 강수연 배우 1주기 추모전의 일환으로 상영된 〈 경마장 가는 길 〉을 (거의 8년 만에 다시) 보고 나서야 나는 앞선 쟁점들을 포함한 '한국(고전)영화'를 문제다운 문제로 여기게 되었다. '한국'도 '영화'도 '한국영화'도 온전히 믿지 않는 장선우의 태도가 이 영화를 통해 순식간에 전염됐다고나 할까? 그동안 옛날 한국영화들을 찾아보고 그에 관한 연구들을 찾아보았어도, 또 동시대의 믿을 만한 동료들이 한국영화와 씨름한 결과물들에 지지를 보냈어도 나는 결국 '한국(고전)영화'를 개입해야 할 문제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혹은 다소 의무적으로 수행한 제스쳐들을 갖고 스스로가 이미 개입하고 있다 착각했던 건 아닐까. 말하자면 이 글은 그런 늦은 깨달음에 따라 서둘러 쓴 반성문이라 해도 좋다. 이렇게, '한국고전영화'는 몹시 잠정적인 개념으로 남는다. 하면 우리는 이런 잠정성에 대해 어떤 리액션을 취해야 하는가? 리액션으로서 큐레이션에 대해선 영화연구자 박진희가 이미 「한국고전영화 상대하기 – 나의 경우」를 통해 솔직하고 재밌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럼 리액션으로서 비평이나 연구는? 실망스럽게도 많은 이들은 두 개의 우회로만을 길로 인식하고 있던 것 같다. 이미 고전으로 꼽힌 작품들만 텍스트로 삼거나, 아니면 사회적 압력에 주목해 한국영화사를 연민해야 할 상처투성이로만 기술하거나. 나는 그 대신에, (21세기 이전의 한국영화들이 고전으로 성립될 리 만무한) 당장은 이 잠정성을 고스란히 전면화하는 길을 택하고 싶다. 허황된 관념이 된 '한국영화'가 환희에 이른 지 얼마 안 돼 금방 처참히 붕괴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그 붕괴가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 있어 (실패와 망각과 단절과 분열로 나타났던) 오랜 기반이었음을 적극적으로 증언해야 하지 않을까? 다만 붕괴가 새로운 사유를 가능케 하리라는 식의 역전적 논리가 아닌, 붕괴 속에서 하여튼 '한국(고전)영화'라는 것이 잠정적으로나마 존재해왔다는 식의 '경험론적' 논리를 갖고서 말이다. 지난날 전복적이라 여겨졌던 형식을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게 대안 우파들인 요즈음에 역전적 논리는 부정적인 조건의 부정성을 간과할 위험이 크다. 그러니 (헤이든 화이트를 따라)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기반이 주어진다는 것을 명심한 채 말을 이어가자. 가령, (한국의 모든 문화예술이 그렇지만) 이념으로서의 리얼리즘은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 있어 어떤 기형적인 형체로써 ‘반복’되어왔는가? 금동현과 유운성이 간접적으로 일러주었듯 한국영화에 있어 붕괴와 반복은 한 몸이다. 달리 말해 붕괴의 반복이야말로 한국영화의 조건이요 전통이다. 그렇기에 나는 새로운 것 대신 오래된 것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리와 단절된, 하나 우리에게서 멀지 않은 오래된 것을. ‘한국영화’와의 대면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