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평 - 더 블라인드 페인터
- 감독
- 이반석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이재걸, 오현숙
문득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게 다가올 때가 있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공간이 낯설어져서 무서워질 수도 있고, 식상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색다르게 재배열 되는 과정이 신선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2020년 상반기 한국영화 중에 < 침입자 >(2019)를 마주한다는 건 단순히 텍스트를 분석하거나 장르적인 성취를 설명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스릴러에 기반을 둔 장르의 연장선에서 볼 때 <침입자>는 명백히 관객의 기대를 배신한다. 설정도 흥미롭고, 미스터리 스릴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흥미로운 클리셰들이 꽤 많지만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후반부의 전개과정에서 개연성이 부족해 중반까지는 나름 긴장감을 유지해 가던 이야기가 후반부에 이르러 급격히 무너진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일정부분 동의 한다. <침입자>는 혼란스럽다. 마땅히 설명되어야 할 것들을 미뤄둔 채 모호하게 남겨져 방치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전반에 차곡차곡 쌓아나갔던 긴장감은 후반부 작위와 우연의 남발로 씻은 듯이 사라지고 끝내 엉뚱한 길로 접어든다는 인상을 남긴다. 장르영화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여러 방향에서 이야기 될 요소가 다분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침입자>를 실패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과잉과 오해의 서사 때문이다. 우선 과잉에 대해서 먼저 말하자면 이 영화는 잔가지가 지나치게 많다. 미스터리 장르로서의 긴장감, 가족의 의미와 익숙한 것들이 주는 공포,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 기억과 공간의 관계등 하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짧은 시간 안에 정리해내지 못했다. 좀 더 심도 있게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는 건 오해에 관한 부분이다. <침입자>의 콘셉트는 한 줄로 정리된다. ‘내 가족 안으로 낯선 존재가 침입해 들어와 나를 밀어낸다.’ 영화의 전반부는 홈 인베이젼 장르의 길을 충실하게 따른다. 안전해야 할 공간, 집과 가족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긴장과 공포가 피어난다. 철저히 서진( 김무열 )의 시점에서 쌓아나가는 서스펜스는 제법 효과적이다. 하지만 ‘유진이 친동생인가 아닌가’를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시키던 영화는 어떤 상황을 기점으로 ‘유진이 왜 이 집으로 들어왔나’로 질문 자체를 선회 한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는 오컬트의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이 터닝포인트가 상당히 급작스럽고 논리적인 공백들을 자아낸다는 점이다. 결정적으로 손원평 감독은 이러한 공백을 메우거나 설득시키는데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침입자>가 확실히 성취해내는 건 모호한 불안감의 확산이다. 한국사회의 현재를 녹여낸 결과물로서 이 영화는 믿음이 사라진 시대의 불안을 투영한다. 기억과 공간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믿음에 관한 상식들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침입자>는 익숙한 레퍼런스로 지은 집이다. < 오펀: 천사의 비밀 > < 요람을 흔드는 손 > 등 할리우드 홈 인베이젼 장르부터 < 유전 >, < 미드 소마 > 등 아리 에스터의 영화들, <어스>나 < 겟 아웃 >을 연상시키는 전환과 설정, 심지어 < 하녀 >나 < 화차 >와 같은 사회계급 속 여성의 위치를 그린 영화까지 찾고자 하면 곳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조합의 결과물은 사뭇 낯설다. 보는 관점에 따라선 레퍼런스를 제대로 녹여내지도, 정리하지도 못한 연출력의 부재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낯설고 어색하고 당황스럽기까지 한 전후반의 전환이, 과장해서 말하자면 관객을 농락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철저히 무너지는 내러티브가 곧 <침입자>가 전하고 싶었던 감각 또는 목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익숙한 것들을 차용하고 뒤섞어 잘 이끌고 가다가 별안간 쌓아올리던 구성을, 비유하자면 레퍼런스라는 집을 송두리째 부숴버리는 것이다. 인물들이, 이야기가, 그리고 장르라는 패턴이 믿었던 것들을 해체시키는 방식으로 말이다. 아마도 감독은 믿음과 진실이 사라진 시대 자체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전체 이야기 구조로 환원시키고 싶었던 게 아닐까. <침입자>는 진실을, 혹은 진실이라고 착각할 수 있는 정보들을 설명하고 나선, 정작 사실을 제대로 보여주거나 사실로 믿을 수 있게 증명하지 않는다. 진실과 사실의 경계마저 희미해져가는 혼란 혹은 불안. 이 영화의 가장 큰 패착이 여기에 있고,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도 여기에 있다. 때로 어떤 영화들은 어떻게 파헤치고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스스로도 몰랐던 비밀을 들려주기도 한다. <침입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의 반응 혹은 부조화가 흥미로운, 문제적 영화다. 우리는 이 영화를 좀 더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
“서 있는 위치가 달라지면 펼쳐진 풍경도 달라진다.” 최규석 작가의 웹툰 「송곳」에는 폐부를 저미는 날카로운 대사들이 곳곳에 박혀 있다. 그 중 유난히 뇌리 깊숙이 박힌 저 대사가 요즘 자꾸 되살아난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상황이 바뀔 수 있음을 표현한 대사지만 내겐 텍스트와 해석의 묘를 압축하고 있는 말로 다가왔다. 사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본 것을 말한다는 건 적지 않은 용기와 확신이 필요한 일이다. 잠시 머뭇거리는 순간 보편적인 정답의 존재를 믿는 메아리가 거대한 조류로 변해, 작지만 용기 있는 의견들을 순식간에 삼키고 지나가기 십상이다. 최근 < 택시운전사 >와 < 군함도 > 등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을 둘러싼 담론의 탁류를 접하며 가벼운 회의에 사로잡혔다. 지금, 새삼 서광제 감독의 < 군용열차 >를 꺼내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 때문이다. 1938년 제작된 <군용열차>는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친일영화로 분류된다. 실제로 당대의 대다수 관객들에겐 이른바 어용영화로 소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다시 본다면 당대엔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것들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 군용열차 >는 두 개의 기둥으로 이뤄진 영화다. 하나는 얽히고설킨 남녀의 통속극, 다른 하나는 친일 어용의 열차기관사 이야기다. 당대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열차 기관사 점용은 기관사들의 선망의 대상인 군용열차를 몰 기회를 얻는다. 점용의 성공 뒤에는 오빠를 철도학교에 보내기 위해 기생이 된 동생 영심의 희생이 있다. 영심은 점용의 절친 원진과 사랑하는 사이다. 하지만 원진이 영심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기생집에서 데려올 거액의 몸값이 필요한데 평범한 원진은 도저히 그 돈을 구할 길이 없다. 한편 점용의 주변을 맴돌다 혼쭐이 난 수상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원진에게 접근하여 점용이 모는 군용열차가 들어오는 시간을 알려 주면 거액의 돈을 주겠다고 회유한다. 원진은 업무수첩을 훔쳐 남자에게 전달하지만 이내 가책을 느껴 괴로워하다 점용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결국 군용열차를 파괴하려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점용은 군용열차 기관사의 꿈을 이룬다. 점용을 중심으로 본다면 이 영화는 ‘일본 제국의 승리와 동양영원평화를 위해’ 매진하는 철도기관사의 이야기다. 점용은 황국신민으로써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용열차를 노리는 테러리스트, 그러니까 독립군의 계획을 분쇄한다. 이를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고 친구를 버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실상 영화의 뼈대를 차지하며 이목을 사로잡는 건 영심과 원진의 애틋한 로맨스 파트다. 반면 영화에서 점용의 심리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는 에피소드는 사실상 거의 전무하다. 당위나 설득 없이 충성과 보국이라는 답변을 반복하는 점용의 캐릭터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능에 가깝다. 일제강점기를 버텨온 남녀의 안타까운 현실을 포장하기 위한 일종의 위장 내지는 일제강점기에 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기계적 알리바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반면 원진과 영심의 캐릭터는 피와 살이 도는 생생함을 안긴다. 원진은 변변한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조선 청년의 애환을 안타깝게 드러낸다. 영심은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하는 당대의 여성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데, 이 지점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한국문학에 빈번히 등장하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누이’의 변형이라 할 만한 설정이다. < 군용열차 >는 몇몇 장면에서 연출적 괴리를 숨기지 않는다. 가령 원진이 독립군과 이야기 할 때 영상과 음성이 불일치하는 장면들을 보며 제작 후 녹음 과정에서 불가피한 수정이 가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원진이 황국신민의 의무를 외치면서도 굳이 한복을 입고 선로에 뛰어드는 것도 의아하다. 프로파간다적인 주제와 충돌할만한 단서들을 곳곳에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영화 읽기란 이야기의 틈새에서 좋은 질문을 발견하는 작업이다. 간혹 창작자 본인도 의식하지 못했던 시대의 흔적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 군용열차 >는 친일어용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일제 치하의 아픔과 저항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영화다. 당대 일본인, 친일어용 지식인, 핍박받는 조선인 등 어떤 위치에서 보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영화를 감상했을 것이라 상상해본다. 본래 습자지처럼 붙어있되 전혀 다른 성질의 두 서사를 분리해내기 위해서는 본래 적극적인 독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촘촘한 거름망을 지난 지금 우리가 <군용열차>에서 친일영화의 뼈대를 발라내고 그에 저항했던 속살을 발라먹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 영화의 표리부동한 양식에서 최근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고전 영화를 읽는다는 것은 평자의 위치와 좌표를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때로 고전은 시간을 거스른 시금석이 되어 당대에는 쉽게 읽어 내지 못하는 정보들을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낸다. 오래된 영화가 끊임없이 되살아나 생명을 유지하는 비결은 거기에 있다. 서 있는 위치가 바뀔 때마다 영화는 다시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