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니와 준하
- 감독
- 김용균
- 제작년도
- 2001
- 출연
- 김희선, 주진모, 조승우, 최강희, 김광림, 이혜숙, 최광일, 손세광, 박정환, 이삼우, 서자영, 김수진, 민윤재, 김승현, 양영정, 김홍파, 이정은, 최민금, 현숙희, 조덕제, 정경호, 송희연, 김영임, 구원영, 서영석, 강미연, 고주연, 고기범, 이동운, 이지미, 민난주, 백정림, 김준호, 나현진, 박찬유, 김희선, 김연희, 변창석, 김준영, 임현균, 송은혜, 임동혁, 송은현
사진: “ 복합 장애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어릴 때부터 장애가 있는 혈육 또는 이웃들과 별 이질감이나 불편함 없이 살아왔다. 20대에는 몸이 불편한 학우들의 활동 보조도 해보았다. 30대 이후, 장기 입원을 하거나 중병을 앓는 가족의 간병도 해보았다. 돌이켜 보면 삐거덕거리고 비틀대고 휘청이는 다양한 몸들과의 여러 활동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러한 활동들이 돌봄이란 단어로 일원화되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의 활동 보조를 할 때도 돌봄이나 돌봄 노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못했다. 그야말로 보조였고, 치료를 받는 이의 간병인이었으며, 집이 필요한 고양이와 공간을 나눠 썼을 뿐이다. 모두 돌봄으로 환원할 수 없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돌봄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을 때, 영국의 한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부터 배리어프리 상영을 제안받았다. 우리의 영상이 시각장애인에게 어떻게 전달될지 궁금해 흔쾌히 허락했다. 상영일에 모니터를 가리고 사운드만 키운 채 영상을 청취했다. 영상의 사운드와 함께 누군가 장면 하나하나를 문장으로 읊어주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이미 수십 번도 더 보아왔던 영상을 오직 사운드에 의존해 각 장면을 떠올리며 관람했다. 그때 함께 했던 시각장애인들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그렇게 듣는 관람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시각장애인이라는 관객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야말로 우리 안의 장벽(barrier) 하나가 허물어진(free) 셈이다. 그때서야 ‘배리어프리’가 장애인들만이 아니라, 비장애인들에게도 새로운 감각을 열어주는 장치임을 알게 됐다. <복합 장애> 포스터 (사진: “ Multi-Handicapped ”, IMDb)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 복합 장애 >(1986)를 보는 내내 몇 년 전 배리어프리 상영회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각의 해방감이 상기되었다. 물론 이 영화에는 감독이 의도한 인터뷰나 설명 같은 건 전혀 없다. 헬렌 켈러 학교란 곳에 재학 중인 감각 장애가 있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교육활동으로부터 발생한 다양한 신체 언어와 공간 소음이 전부다. 게다가 영화 속 복합장애인들이 주고받는 고요한 수어 이미지와 그들의 신체가 외부 자극에 의한 감각을 다스리기 위해 내는 자기 자극음은 대부분의 비장애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이다. 생각해보면 수어와 점자는 대부분의 비장애인들이 배우지 않아 모르는 언어인데, 복합 장애를 단순히 잘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몸의 어느 기관이나 감각의 결핍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몸은 외부 자극이 과도할 때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다소 괴성처럼 지르는 소리를 내거나(자기 자극음), 상대의 소리를 그대로 따라하는(반향어) 등, 매우 적극적으로 신호를 내보낸다. 복합장애인들의 세계에서 비장애인들이 맞닥뜨리게 된 장벽(barrier)에 대해 감독은 굳이 해석해주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언어를 받아들이고 교감할 수 있는 길을 터준다. 각자가 마주한 장벽을(barrier) 허무는(free) 것은 관객 본인의 몫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 더 눈과 귀를 예민하게 열고 감독의 카메라 워킹을 따라가야 한다. 감독의 카메라는 복합장애인들의 교육 활동에 어떠한 서사도 부여하지 않는다. 가령 학생들이 수업을 받거나 선생님들이 커리큘럼을 고민하는 과정은 문학으로 치면 묘사와 대사로만 이뤄진 씬들이 교차편집되어 있을 뿐이다. 매일 매시간 학생들의 수업 내용이 달라지듯이 영화 또한 다양한 장애를 지닌 여러 학생들과 선생님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교육 활동의 나열만으로 그들의 하루를 보여준다. 수평적으로 연쇄되는 각 씬 사이에 영상적 빈칸은 없다. 다만 비순차적으로 병치된 씬들이 축적될 때마다 마치 문단 사이의 여백 같은 것들이 생성된다. 그 빈칸을 채우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감독의 발걸음을 쫓으며 머리 속에서 자꾸 생성되는 공란을 채워나가다 보면 비로소 발견되는 것들이 있다, 무엇보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관람 중인 ‘나’의 눈과 귀가 어디에 붙들렸는지,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 장애를 둘러싼 세간의 윤리와 편견에 앞서 일단 잘 모르던 세계를 영화로나마 경험하고 감각해 보는 게 우선이다. 사진: “ 복합 장애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물론 이 영화를 통한 경험이 VR을 쓰고 여러 감각 장애를 체험해 보거나 복합장애인이 되어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적어도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는 관람객들은 시각과 청각이 어느 정도 온전하게 기능하는 자들이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처럼, 그의 카메라와 녹음기기처럼 관람객들은 오직 두 눈과 귀에 의지해 복합장애인들의 하루를 지켜봐야만 한다. 영화에서는 때때로 이 부분이 충돌을 일으킨다. 이 충돌이 윤리적인 문제로 확산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에 감각 장애를 앓고 있는 학생들을 어떻게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국 와이즈먼의 다소 차갑고 거침없는 카메라 워킹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뇌경화증을 앓고 있는 사촌동생을 만날 때마다 그가 내는 괴성과 자해에 가까울 만큼 세게 몸을 치는 행위가 어릴 땐 좀 무서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가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소리와 급변하는 온도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른들은 우발적이라며 그를 제지하는데 급급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거나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릴 때 그의 몸은 더욱 크게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요동치는 감정이 그의 몸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가까이서 지켜보고 감각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아니면 평생 그를 무섭고 괴팍한 장애인으로만 여기며 기피했을 거다. 그를 마주할 때 교육받은 윤리의식과 사전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 끊임없이 소통의 방식을 찾아야 하는데, 그 과정이 좀 느리고, 광범위하며, 때때로 막막해 다소 시간이 걸릴 뿐이다. 헬렌 켈러 학교 학생들을 보며 사촌동생과의 소통의(혹은 소통불능의) 경험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들의 배움은 깜깜한 눈, 적막한 귀, 무성의 입 중 2개 이상이 교집합 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뤄진다. 가만히 있으려 해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이상한 소리가 삐져나오는 몸으로는 수건 하나 접는 일조차 쉽지 않다. 비장애인들이 너무도 익숙하고 쉽게 해내는 모든 일들을 이들은 매우 느린 속도로 배우고 익히며 각자의 고비를 꾸역꾸역 넘어서야 그나마(학교와 선생님들의 교육이 지향하는) 사회화가 가능하다. 그 배움에 나이와 단계에 따라 자동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일관된 커리큘럼은 없다. 시계를 읽지 못하는 학생, 이름과 주소를 겨우 읽어내는 학생, 상대의 수어를 직접 만져야 대화가 되는 학생 등. 헬렌 켈러 학교라는 하나의 교육기관 안에서 작동되는 교육 과정은 온전히 학생들의 신체 상태에 맞춰 갈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수어로 대화가 가능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혼자서 몸을 일으켜 밥을 먹는 것조차 쉽지 않다. 때문에 학생들 각자의 배움과 앎의 과정에 학년, 과목 등 시스템에서 정한 용어를 붙이기가 어려워 보인다. 어느 정도의 사회화와 점자, 수어 등 기본 언어도구를 익힌 뒤 그들은 상급 학교에 진학하고 직업을 구하기 위한 교육을 받지만 그마저도 쉬워 보이지 않는다. 복합 장애를 극복하고 대학에 진학 후 사회 운동가가 되었던 기적의 헬렌 켈러는 영화 속 복합장애인들이 재학 중인 학교 기관으로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영화 속 선생님들은 수돗가에서 짐승처럼 날뛰던 7세의 헬렌 켈러를 헌신적으로 붙잡고 그녀의 손에 끝내 “WATER”란 글자를 새겨 무지를 깨우쳐준 설리번 선생처럼 할 수 없다. 그들은 헬렌 켈러 학교에 재직 중인 피고용인이다. 교육 제도와 학교의 교육 시스템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 학생들이 받는 수업과 생활지도 또한 학교의 예산안과 지침 하에 시행된다. 그들이 소속된 교육기관의 목적은 헬렌 켈러의 기적이 아니다. 복합 장애 학생들은 학교에서 필요한 교육을 받고 장차 직업을 구해 사회인으로서 기능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교육 시스템의 고리가 느슨해질 때가 있다. 식사 후 휴식 시간이다. 휴게 공간의 티브이가 켜지고 아이들과 선생님들 각자 편한 자세로 앉아 쉰다. 교육의 공백 속에서 아이들은 몸을 뱅글뱅글 돌리거나 반복적 입소리를 내고, 목적 없이 뛰어다닌다. 신기한 건 앞이 잘 안보이고 몸의 제어가 힘든 상황에서도 부딪치지 않게 서로의 간극을 조율해 나가기도 한다. 이때 허밍음 혹은 가스펠 같은 나지막한 한 선생님의 노래소리가 들린다. “One more river to go”로 시작되는 노래다. 가사는 ‘건너야 할 강’의 반복이다. 우선 ‘내’가 건너야 하고, ‘그녀’가 건너야 한다. 마치 선생님 자신과 그녀의 학생들을 위한 노래 같다. 선생님과 학생들의 느리고 더뎌 힘든 교육 활동이 일단락된 순간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노래가 또 있을까.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눈앞의 강이었던 배움 하나가 또 그렇게 실현된 셈이다. 영화는 헬렌 켈러 학교의 하루를 넘어 또 다른 하루인 주일로 넘어간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지도 하에 교회에 간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아름다움이란 말이 오직 신으로 일원화된 곳에 놓여 있다. 아이들의 수어는 설교와 찬송가의 내용을 번역하는 수단이 되고 성경과 신에 대한 의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곳에서도 아이들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잘 말하지 못한다. 그들의 몸이 흔들리며 반향어를 내뱉어도 돌아오는 건 신을 향한 찬양과 성경구절뿐이다. 교회에 가기 전까지 이어졌던 무수한 몸짓, 소리, 그들의 언어가 모두 무력화 되어버린 것 같다. 설교자는 아이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직 성경의 내용만 전달한다. 모든 것들이 교회로 빨려 들어가 버린 것 같다. 무진형제(미디어 작가 그룹) l 무진형제는 3명으로 구성된 작가 그룹이다. 세간의 지배적인 가치와 믿음체계로 굳어져버린 것들을(眞) 의심하고 해체시켜(無) 동시대의 ‘인간-환경 시스템’을 재구성한다. <삼속(三俗)의 담(談)>, <궤적(櫃迹)-기술된 선인(善人)들> 등을 작업했다.
(좌) <젊은 육체들> 중 (사진: " Beat Girl . 1960. Directed by Edmond T. Gréville", MoMA ) / (우) <오발탄> 중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혁명과 함께 영화검열 폐지가 가시화되다 1960년대는 한국정치와 사회의 거대한 격변과 함께 시작한다. 4월혁명은 이승만으로 상징되는 노쇠하고 부패한 옛 체제를 불과 한 달여 만에 파괴했고, 각 분야의 개혁 작업이 뒤따랐다. 이는 영화검열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5월 경이 되면 관에 의한 검열 폐지 주장이 본격화된다. 5월 6일 문교부는 이승만 정권 말기, 특히 3.15 부정선거 이후 강화된 영화검열로 상영 불허가 된 작품의 재상영을 검토하는 등 검열을 완화할 것이라는 취지를 밝혔고, 13일에는 관제 영화검열을 철폐하고, 영화계의 자율적인 위원회에 검열을 맡기겠다는 취지를 영화인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언급한다. 이후 한국영화제작가협회와 외화배급협회(대한영화배급협회), 영화인단체협의회 등 3자는 관영 영화검열제도를 반대하고 자율적으로 영화계가 검열을 시행하기로 합의하는 동시에, 영화윤리위원회의 설치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동구성안은 분란의 씨앗을 안고 있었다. 워낙에 한국영화 제작자들과 외화수입업자들의 이해관계가 달랐던 데다,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 한국영화 제작 관련자들이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 외화수입쿼터의 일부를 한국영화제작계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외화 수입업자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는 갈등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1960년 6월 15일 헌법이 개정되었다. 제2공화국 헌법은 “...언론, 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 결사에 대한 허가를 규정할 수 없다”(28조)라고 규정하여 검열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였다. 또한 6월 27일 법무부는 “영화도 새 헌법상에 규정된 언론·출판 개념에 포함되므로 검열이나 허가를 할 수 없다”라는 유권 해석을 내렸다( 《동아일보》, 1960. 6. 28 ). 이제 민간 주도의 심의 기관이 시급해졌다. 그러나 5, 6월 내내 골이 깊어진 제작자들과 수입자들은 각각 별개로 영화윤리위원회를 추진했다. 7월 2일, 영화배급협회는 외국영화윤리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별도의 윤리규범을 마련했고, 영화인단체연합회 및 한국영화제작가협회는 7월 5일 영화윤리위원회창설준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에 영화계 안팎에서는 통합된 영윤의 출범을 촉구하였고, 그 여망을 받아 7월 내내 통합된 기관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영윤의 설립과 정부와의 줄다리기 드디어 8월 5일, 영화윤리전국위원회(이하 영윤)가 발족했다. 7월 28일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영화인단체연합회, 외국영화배급협회, 극장협회 등 4개 단체의 대표들이 모여 연석회의를 열고, 8월 5일 창립총회를 열 것을 결의하였고, 5일 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 회의실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는 규약과 규정을 통과시킨 한편, 위원장에 이청기 , 부위원장에 이진섭 , 전문위원에 이진섭, 허백년 , 최일수 등을 임원으로 선출하였다. 윤리위원으로는 박계주 , 조풍연, 백철, 허백년, 호현찬 , 오영진 , 선우휘 , 한운사 등 영화계 안팎의 전문가 28명이 선임되었다. 영윤의 윤리규정은 국가 및 사회, 법률, 풍속, 성, 교육 등 6개 부문 22개의 세부 기준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일부에서는 이 규정이 지나치게 까다로워 자승자박이 될 수 있고, 영윤이 권력기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위원장 이청기는 “말초적인 장면에 구애되는 좁은 단정을 피하면서 되도록 그 영화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주제정신의 건실성 여부에 대한 핵심적인 평가에까지 그 심의도의 범위를 아량껏 넓힐 것”을 약속했다(《한국일보》, 1960. 8. 18.). 8월 5일 공식 출범을 했으나, 실질적으로 영윤이 업무를 시작한 것은 9월 5일이 되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영윤의 시작은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영윤 출범 직후 검열을 제대로 하지 않고 사무국장이 독단으로 심의필증을 발급함으로써 물의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일회적 사건 외에 더 심각한 것은 문교부와 벌어진 일종의 권한 쟁의였다. 문교부는 영윤의 출범에 한국영화의 심의권을 넘겨줄 수는 있지만, 외국영화에 대한 적부 심의는 문교부가 지속적으로 맡아야 한다는 종전의 주장을 반복적으로 제기했다. 문교부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문교부에 외화수입추천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보자면 외화수입추천의 절차는 검열의 절차와 다소 결이 다르다. 외화수입추천 절차는 기본적으로는 특정 외화를 수입해도 될 것인지에 대한 표현수위를 결정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수입되는 외화의 총량 관리(즉 영화의 질이 아니라 양적인 규제), 국가의 외환 관리나 무역 관리 과정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권한은 국가기관이 아닌 영윤으로 이관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외화에 대한 실질적인 검열권(즉 상영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권리와 수입이 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권리)이 영윤과 문교부에 애매하게 분리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문교부는 이 권한을 빌미로 외화에 대한 심의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였다. 혁명 후 외화의 수입추천 과정을 규정한 영화및공연물 사무요강 (문교부 고시 132호) 이는 9월 초 영윤이 실제 업무에 돌입했던 즈음, 과도정부 시절에 만들어졌던 문교부의 영화사무요강을 통해 가시화되었다. 이 사무요강에는 “외화의 수입추천은 서류 심사 또는 실사 심사로 하며 심사기구 및 규정은 따로 정한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윤은 영윤의 심의권을 침해하는 조치라며 크게 반발했고, 문교부와 영윤의 사이에 끼어 이중의 심의절차를 밟아야 할 상황에 처한 수입업계는 영윤을 통한 일원화를 강하게 촉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일원화는 제도적으로 해결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교부가 처음부터 수입추천의 권한을 적극적으로 행사했던 것 같지는 않다. 당시 기사들에 따르면 4월혁명 이후 대략 9월까지 문교부는 영화의 수입추천권을 거의 서류적으로만, 즉 형식적으로 행사해 왔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분위기는 <차타레 부인의 사랑>(마르크 알레그레, 1955) 등 사회적인 논란이 되는 영화들이 다수 수입되거나 상영금지가 해제되고, 이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조성되면서 반전되었다. 그 중심에 있던 영화는 1960년 10월 수입된 루이 말 감독의 < 연인들 >(1959)이었다. 이 영화의 불륜성과 외설성을 이유로 사회 일각에서 비판적인 여론이 형성되자 문교부 장관은 10월 4일, 이 영화에 대한 고발 조치를 통해 상영을 중지하겠다는 의견을 밝힌다. 또한 18일부터는 기존 서류 심사 위주의 수입추천 절차를 실사 심사로 실질화시키고, 관세법 126조(공안을 해치거나 풍속을 문란케 할 서적, 도화, 조각물, 기타의 물품은 수출 또는 수입을 금지한다)에 의하여 철저히 단속할 방침을 밝히기에 이른다. <연인들>을 계기로 선정적 외화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일기 시작한다. (“ 영화가는 불륜개방시대 ”, 《경향신문》, 1960. 10. 23.) 이와 같은 문교부의 방침은 사실상 영화검열제도의 부활로 인식되었고, 영윤은 물론 당대 대다수의 언론들은 이와 같은 조치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 말에서 11월 초 사이 사친회의 <연인들> 상영 중단 요구를 비롯 미풍양속을 해치는 영화의 상영과 광고에 대한 반대 여론은 무시 못할 정도였다. 문교부는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 10월 말 이에 대해 실사 심의 후 문제가 되는 영화는 ‘컷’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수입추천을 하지 않고 수입추천이 거부된 영화는 재차 수입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강경한 방침을 밝혔고, 나아가 11월 초에는 외화 배급사 대표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음탕한 영화광고, 유인물을 첨부하는 것’까지 단속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젊은 육체들> 사건으로 룰이 정립되다 1961년 초 검열과 관련하여 또 다시 커다란 사회적 논란이 발생했다. 당시 젊은이들의 행태에 대한 선정적인 표현으로 세계적으로도 논란이 되었던 영국영화 < 젊은 육체들 >(원명 Beat Girl , 1961)의 수입 상영과 관련된 것이었다. 검열 폐지 이후 실질적인 검열의 필요성을 주창함으로써 문교부가 공세에 섰던 <연인들>의 경우와 달리, 이 영화의 수입·상영 논란에 있어서는 영윤이 공세적인 입장에 섰다. 1961년 1월 21일 영윤은 사회풍기 관계 전문위원 11인의 심의 결과 이 영화에 대해 전원 일치로 상영보류 결정을 내렸고, 수입 회사인 세기상사의 재심 의뢰로 열린 전원위원회에서도 9대 7로 상영보류 조치를 결정했다. 이는 4월혁명 이후 영윤에 의한 최초의 상영보류 결정이었다. 그러나 문교부는 이 영화에 대한 심의가 이루어지던 1월 28일 이미 상영신고필증을 발부해 버렸고, 이에 기반해 수입사인 세기상사가 영화의 개봉을 준비했다. 이는 2월 내내 한국사회에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영윤을 무시한 문교부의 결정에 대한 비판은 물론, 기존 미풍양속을 해치는 외화의 수입 관행에 대한 비판, <젊은 육체들>이 주제로 삼은 비트 세대에 대한 소개, 영화에 대한 찬반양론 등이 물끓듯 일어났다. 검찰 당국은 2월 7일 이 영화에 대한 입건 방침을 세우고 조사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문교부는 2월 15일 청소년 단속이 어려운 2, 3번관의 상영은 보류하고, 대사 여섯 군데, 화면 일곱 군데 등 320피트를 삭제한 채 이 영화의 상영을 허가했다. <비트걸> 제한 상영중지 명령 문서 (“외국영화 <비트걸> 상영중지의 건”, 문교부, 1961. 2. 18.) 이 사건은 영윤과 문교부 간의 감정적인 대립에 가까운 반목을 불러왔음은 물론 영윤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특히 수입추천 단계에서 문교부의 실사 심의, 상영 단계에서 영윤의 심의라는 이중의 심의를 감당해야 하는 외화수입사들의 불만은 영윤의 무용론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대다수의 언론이 문교부의 독단과 검열의 부활 움직임을 비판하는 한편. 영윤의 유지와 강화를 지원하면서 문교부의 입장은 곤란해졌다. 이와 같은 논란 끝에 문교부와 영윤은 3월 중순 다음과 같은 합의에 이르게 된다. 문교부와 영화윤리위원회 전국위원회는 당면한 영화정책에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1. 외국영화 추천심의는 문교부 주최 아래 영화윤리위원회와 함께 한다. 2. 외화 통관후의 작품심의는 영화윤리위원회측에서 한다. 3. 외국영화 수입추천을 심의할 때 문교부와 영화윤리위원회 사이에 합의가 안되었을 때 영화윤리위원회측의 전원위원과 문교부가 위촉한 심의위원이 합석하여 심의한다. 4. 예고편, 선전자료등을 통관추천심의할 때는 문교부와 영화윤리위원회가 합동심의한다. 5. 신문광고, 극장간판, 선전탑 등의 단속은 영화윤리위원회에서 한다( 《조선일보》, 1961. 3. 15. ). 이와 같은 합의안은 문교부가 독점해왔던 외화 수입추천 심의를 문교부와 영윤이 함께 수행한다는 점에서 영윤의 입장에서는 진일보한 성취였다. 그리고 이 결정으로 4월혁명 이후 오랜 기간 모호한 채로 유지되었던 외화의 수입과 심의절차의 행정 과정이 정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을 거쳐 새롭게 시작해야 할 영윤의 역사는 채 두 달이 못 돼 발생한 5.16 쿠데타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쿠데타 이후 계엄사령부는 사전 검열을 부활시켰다. 1961년 5월 15일 이전 신고필증을 받고 상영 혹은 공연 중인 영화·연극에 대해서는 사전 검열을 면제했지만, 신고필증을 받았더라도 상영 혹은 공연되지 않은 작품에 대해서는 사전 검열을 받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영화계는 쿠데타 직후 사회가 안정되면 영윤이 부활되기를 고대했으나, 이는 희망사항으로 남고 말았다. 검열은 부활되었고, 이후 오늘날까지 민간의 자율에 의한 심의제도는 채택되지 못하고 있다. 영윤: 짧지만 중요한 역사적 경험 영윤의 수립에서부터 기관의 운영, 해체에 이르는 대략 8~9개월의 짧은 기간은 다소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관권이 배제된(물론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한국영화의 검열사에서 거의 유일한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 하녀 >(김기영, 1960), < 오발탄 >(유현목, 1961) < 삼등과장 >(이봉래, 1961) 등 한국영화사를 수놓는 명작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4월혁명과 영윤에 의한 자율적인 심의의 성과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좌) 제한 사항이 없이 발급된 <하녀>의 상영허가서(1960. 11. 1.) / (우) 제한사항 1개로 발급된 <오발탄>의 상영허가서(1961. 2. 14.) (더 많은 서류는 " 검열서류 컬렉션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좌 , 우 ) 그러나 앞서 몇 가지 사례를 통해 보았듯이 영윤의 시절이라고 해서 모든 영화가 자유롭게 상영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문교부에 의한 수입추천권이 실질적인 검열 기제로 작동하였음은 물론, 심지어 영윤이 자체적으로 영화의 상영을 보류하는 결정까지 내릴 정도였다. 이는 민간에 의한 자율적인 심의가 모든 영화의 자유로운 상영에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한 영화의 수용 여부는 단순히 검열의 자율성 여부뿐 아니라 사회단체나 수용자들의 여론, 혹은 영상에 대한 감각의 한계선, 즉 망탈리떼(mentalite)에 의해 더욱 중요하게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오랜 기간 권위주의 정권을 겪으며 검열의 가장 중요한 변수를 국가로 두어왔던 한국영화사 연구의 흐름이 놓친 부분이기도 하다. 나아가 비록 등급 “서비스”를 표방하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관영 심의의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영화계의 현실에서, 영윤의 경험은 한국영화 심의 체제의 미래를 고민할 때 반드시 복기되어야 할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조금 식상한 표현이지만 영화제, 그리고 영화 시상식을 우리는 ‘영화인들의 축제’라고 부른다. 한 해 동안 좋은 작품을 만들어낸 감독, 스태프와 배우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영화팬들 또한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과 그에 참여한 배우, 스태프들이 상을 받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뻐하고, 영화에 깃든 자신만의 추억들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영화인 중 누군가가 “그저 상(賞)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라고 말한다면, 관객의 입장에서는 다소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상이라는 것은 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거나 예술성을 인정받은 작품에 대해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명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한때, 정말 ‘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심지어 이 상에 어마어마한 보상이 붙어있어서 영화사에는 회사의 존폐가, 감독에게는 차기작의 유무가 걸려있었고, 이로 인해 매년 이 상을 둘러싸고 갖은 암투와 비리들이 횡행하며 영화계에 온갖 잡음을 만들어냈다. 대종상 타면, 그 상 타는 데서 심사위원들한테 로비를 해서 해마다, 지금까지도, 문제가 있었지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영화계에 스캔들이 생기고 그렇지요. 또 유명한 사람들이 거의 심사위원 안 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뭐 예술회원, 유명한 작가, 다 거의 심사시켜야 된다 그래 갖고. 또 (로비 받은 게) 걸려서 망신을 당하기도 하고. 그런 추악한 일이 오랫동안 계속 돼…. - 호현찬 , 2004 영화평론가인 호현찬이 말하는 것처럼 최근에도 대종상에서는 수상작 선정 과정과 영화인들의 시상식 불참 등 해마다 논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지만, 1990년대 이전과 이후의 논란들은 성격이 많이 다르다. 여기서는 1980년대까지, 대종상 하나가 정말 중요했던 이유 와 그것이 불러일으킨 다양한 스캔들 에 집중할 것이다. 사실 1990년대와 그 이후 시기 대종상과 관련된 논란들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아주 쉽게, 그리고 정말 훌륭하게 정리된 글들이 많아서 굳이 영화인들의 입을 빌릴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에 비해, 궁금하고 흥미롭지 않은가? 기록도 많이 남아있지 않은 옛날 옛날에 대종상을 놓고 영화인들 간에 온갖 정치와 거래가 오갔다는데, 당사자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지만 이를 알아보려면 우선 우리가 당시 대종상과 영화산업의 성격에 대해 이해해야 하는 지점들이 있다. 조금 지루하겠지만, 이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간결하게 하고 넘어가겠다. 나라에서 주는 상 대종상은 공보부 주최로 1962년 3월 30일 국립극장에서 처음 개최되었다. 이날 행사에서는 작품상, 감독상, 남녀 주⋅조연상을 포함해 총 16개 부문에 대한 시상이 이루어졌다. 당시 대부분의 상을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에서 가져가면서, 신필름은 훌륭한 스태프들을 데리고 좋은 영화를 만드는 영화사로 명성을 굳혀갔다. 각종 신문과 잡지 기사에서도 이러한 신필름의 약진에 주목하는 한편, 처음으로 제정된 영화 시상식이 성공적으로 개최된 데에 대해 고무적인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62년 3월 30일에 열린 제1회 대종상 시상식 사진 하지만 이러한 찬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대종상 시상식에 대한 불만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 제2회 대종상부터였다. 영화평론가 이영일 은 대종상 심사위원 명단이 발표된 직후 신문 지면을 통해 대종상 심사위원들의 전문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버려야 할 전문가 기피증, 대종상 심사위 구성에 일언”, 《동아일보》, 1963. 2. 28. 6면 기사 *주1 ). 그렇지만 심사위원들의 교체 없이 제2회 대종상 시상식은 예정대로 3월 8일에 진행되었다. 그런데 대종상에 대한 논란은 시상식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 당시만 해도 대종상 시상과 더불어 해외영화제에 출품할 작품도 함께 선정했는데, 이게 영화제작자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제작가협회에서는 며칠 후 아시아영화제 출품작 선정에 대한 건의서를 공보부에 진정했다. 11일 저녁 6시에 모인 제작가협회 이사회에서는 공보부 당국에 대하여 아시아영화제 및 백림영화제 출품작품 선정을 재심해줄 것을 건의하기로 결의하였다.… 근본적인 저의는 이번 대종상심사와 영화제 출품선정의 결과에 대한 영화가의 비등한 반발 여론에 비추어 심사결과에 대한 불만불신의 표기로 짐작된다. 영화계 일부에서는 이번 심사를 ‘보이코트’하자는 여론도 높았으나, 재심으로 출품작품을 엄선하자는 결정에 이르렀다. - “아주영화제 출품작 재심 건의키로”, 《동아일보》, 1963. 3. 12. 6면 기사 이전 해 대종상 시상식에서 제기된 불만을 의식한 것인지, 공보부는 제3회 대종상 시상식을 앞두고 영화평론가와 연극영화과 교수 등을 심사위원단에 포함시켰고, *주2 해외영화제 출품작의 경우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추후에 별도 선정하는 것으로 방식을 변경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1964년 제3회 대종상부터 “우수영화를 장려하는 보상책”으로 대종상 수상작에 대해 ‘외화쿼터’를 지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외화쿼터 주어, 대종상시상식”, 《경향신문》, 1964. 3. 5. 8면 기사). 대종상은 (공보부) 영화과에서 맹글었어요, 우리가. … ‘우리나라 대표적인 영화제를 하나 맹글자, 영화상을’ 그래서 ‘상의 이름을 뭘루 허느냐?’ 게 생각허다가 ‘대종상으로 허자’ 이렇게 된 거예요. (우수영화) 장려를 말로만 허믄 또 시비가 되니까, 실제적인 실리를 주는 방향으로 허자. 그게 뭐냐? 쿼터. 우수헌 영화 장려하는 방법으로 쿼터를… 뭐 이렇게 된 거죠. - 이성철, 2009, 309~310쪽 1961년부터 공보부 공보국 영화과장으로 일했던 이성철은 대종상을 만들게 된 배경에 덧붙여, 우수영화 제작 장려 및 그 보상의 일환으로 ‘쿼터’가 주어지게 된 과정에 대해 언급했다. 아무래도 ‘상(賞)’이니까, 무언가 그에 맞는 적절한 혜택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일종의 보상으로서 주어진 것이 다른 것도 아니고 ‘쿼터’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쿼터란 국가에서 배정해주는 외국영화 수입 권한을 뜻한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갈등의 씨앗은 바로 이 ‘외화쿼터’로부터 나온다. 외화쿼터라는 것은 왜 그렇게 영화인들에게 중요한 것이었을까? ‘억’ 소리 나는 쿼터의 가치 1963년 1차 영화법 개정 이후 영화제작사와 외화수입업을 일원화시키는 동시에 이들 영화사의 수는 국가에서 등록제를 통해 조절하고 있었다(영화업 등록제는 1973년 제4차 영화법 개정으로 허가제로 바뀌며, 기존 20개사에서 거의 절반 수준인 12개로 줄어든다). 매 시기 영화법 시행령에 따라 허가된 영화사의 수나 외화수입쿼터의 수가 늘었다 줄었다 하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영화산업은 소수의 영화사들이 제한된 ‘쿼터’ 숫자를 놓고 경쟁하는 독과점 체제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외국영화 수입편수 및 상영편수(1964~1985) 위의 표를 보면, 그래도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까지는 1년에 50~70편 정도의 외국영화가 배정⋅수입되었다(쿼터 수와 실제 검열을 받은 영화의 수가 다른 이유는 이전 해의 쿼터의 ‘이월’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표]에서 상영편수가 실제 수입편수보다 많은데, 이는 전 해에 수입되었지만 상영되지 못한 영화가 개봉하거나, 인기 있는 영화를 재상영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 이후 수입추천(외화쿼터) 수가 줄면서, 외국영화의 수입이나 상영이 급격히 감소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외화쿼터를 둘러싼 각종 문제 역시 197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 더 심각해진다. 그때는 외화를 들여오면 1년에 20~25편이야. 그러니까 외국영화를 보려고 하면 하여튼 1년에 고것밖에 못 봐. 다른 작품은 들여오지를 못하니까. 그러니까 아주 그건 정말 커다란 특혜지, 그냥. 그 대신에 쿼터를 어떻게 해서 얻느냐. 1년에 4작품을 해야 돼. 그래야 인정을 받아, 영화사 영업하는 걸. 그러고 저 우수작품 뭐, 대종상 에서 상을 탔다든지, 뭐 아세아영화제 이런 외국 가서 (상을) 탔다든지 그러면 쿼터 하나씩 나왔다고. … 또 뭐 반공영화를 만들면은 좀 점수를 줬고. … 그렇게 하고 인제 수출을 많이 해서 실적을 올려서 (쿼터를) 타는 수가 있고. 여러 가지 정책이 그렇게 돼 있었지. - 강범구 , 2011 , 268쪽 외국영화도 상을 타면 쿼터 하나. 근데 쿼터 값이 얼마냐면, 국산영화 한 편 제작하는데 700만 원 내지 800만 원인데, 쿼터 하나 값이 1,500만 원이었어 , 외화 들여오는 거. - 최경옥 , 2008, 143쪽 그게 내가 파라마운트(극장)에 있을 당시니까, 66년도부터 72년도까지 있었거든요? 나도 거기서 외화를 우리 사장님이 쿼타를 사오고 팔고 해가지고, 나도 그때 쿼타를 사가지고 네 편을 수입해 봤거든요. 쿼타를 사고 팔고 했지, 그때는. (쿼터 하나에) 천만 원 했나? 그거 하나 있음으로 해서 내가 수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거니까. {그때 개봉관이 60원 정도할 때} 맞어, 60원. {그럼 억 단위네요, 지금은?} 크지. 그 당시에 60원 하면 요즘은 (입장료가) 6천 원이니까, 100배인가? 10억인가, 지금 돈으로? - 김성근 , 2010, 122~123쪽 그 대종상에서 작품상 타면 외화수입쿼터 하나 준 거야, 그냥. 그 외화쿼터 하나, 수입권을 얻으면 요새 가치로 봐서 약 한 50억 돼, 50억. 가서 외국영화 하나 괜찮은 거, 외국영화 수입을 무제한 개방해 놓은 게 아니고 1년에 20편, 24편 내외 수입쿼터로 맨들어 놨기 때문에, 우리나라 들어오면 그냥 어떤 거든지 그건 (관객이) 30~40만 들어간다니까? 음, 그러니깐 외국 나가서 한 10억 주고, 판권 10억 주고 외국영화 하나 사왔다 이거야. 근데 이게 여기서 100억이 되니 이게 얼마나 되냐, 돈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라, 황금알 채 생긴 거위야. 그래서 그냥 서로가 별짓을 다하고, 인제 사회상은 그랬어요. - 김영효 , 2013, 430~431쪽 위의 구술도 대체로 이 시기의 상황들을 설명하고 있다. 김영효 감독의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외화는 일단 상영을 하면 그게 어떤 영화든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30~40만의 관객들을 끌어올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영화사들은 위험성이 큰 한국영화 제작보다 외국영화 수입⋅상영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최소의 비용만을 가지고 한국영화를 제작하고, 이를 통해 획득한 외화쿼터를 가지고 외국영화를 수입해서 상영하거나, 아니면 그 쿼터 자체를 팔아서 이득을 챙기자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강범구 감독의 구술에서 이 외화쿼터 획득 방법이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각 회사들은 할당된 한국영화 제작 편수를 채우거나, 우수영화로 선정되거나, 대종상을 수상하거나(시기에 따라 걸린 상의 개수가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최우수작품상, 우수반공영화상을 수상하면 1편씩 쿼터가 지급됨), 해외 수출 실적이 있거나, 해외영화제에서 상을 받거나 하는 방법으로 외화쿼터를 하나씩 얻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1년 동안 영화사들은 최소한의 예산을 가지고 4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한다(제작권도 쿼터가 있어서, 이 숫자도 매해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 4편의 영화에는 우수(반공)영화 또는 대종상용 영화 1편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외화쿼터 외에도 추가로 1편의 외화쿼터를 더 얻을 수 있다. 1960년대부터 신필름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구술자 최경옥의 말에 따르면, 한국영화 1편 제작에 7~800만 원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4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하고도 이익을 남기려면 외화쿼터 2개는 필수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김영효 감독이나 외화수입사와 극장에서 일했던 김성근의 구술을 보면 그냥 외화쿼터를 팔았을 때는 오늘날 물가로 약 10억 원의 가치가, 직접 외화를 수입해서 상영했을 때는 적어도 50억 원의 이익이 보장되었다(심지어 이 역시 10년 전 물가를 기준한 것으로, 2024년의 물가를 반영하면 더 큰 금액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은 최소 10~50억의 가치를 갖고 있었고, 수입해온 외화가 흥행에 성공하게 되면 김영효 감독의 말처럼 100억 이상의 가치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니 ‘대종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는 말이 나올만 했다. 대종상을 잡아라!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대종상을 둘러싸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영화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먼저 로비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대종상이 문제가 된 것은, 70년대 중반 이후부터예요. 형식은 이런 겁니다. 심사위원을 누가 맡았다 하면은, 그 심사위원 중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을 로비대상으로 정해 만나는 거예요 . 가령 당시 심사위원 가운데 소설가가 있다면 ‘작가의 원작을 영화화 하겠다’ 이런 식으로 접근합니다. 그래서 영화화하기 어려운 소재라도 원작료를 주고 입수하는 거예요. 그거 안 받을 수 있어요? 명분이 있는데. 그게 시가(市價)보다 많아요. 그런 식으로 로비를 합니다. 그 당시 Y 모라는 유명한 심사위원이 있었습니다. 각계에 문어발식으로 관계했던 문화계의 마당발이었죠. 이런 사람들은 A영화상, B영화상 다 해요. 그럼 A영화상에서 로비 받아가지고 안 된 경우가 있어요. 로빈 받았지만 작품이 밀리니까. 그러면 B영화상 시상식 때 그것을 갚아요. 그럼 이쪽에선 불만이죠. 저쪽은 쿼터가 걸려 있고, 이쪽은 상금이 없다 보니까. 이런 식이에요. - 김종원 , 2008, 355쪽 누구한테 욕먹을 소리겠지만은, 대한민국 영화 대종상은 절대 정상으로 한 영화가 없어. 보믄 뒷거래가 다 있어. …내 누구라고 얘긴 하지 않지만은 대종상 시상날이야. 근데 인제 그날 6시부터, 6시 반부터 시상식을 하는데, 그날 최우수작품을 갖다 결정하는 날이 그때가 5시 반쯤 될 때, 막 거기서 회의를 하는데, 그 안에서 인제 투표를 허는 거야. 하기 직전에 누가 문을 탁 여는 거야. 문을 탁 열어가지고 “어이구, 죄송합니다. 이거 미안합니다.” 문을 닫은 거야, 그 사람이, 응? 그 사람은 왜 그거 문을 열었겠느냐? 자기가 만난 사람들 있잖아. 자기가 만난 사람들이 자길 잊을 수도 있잖어? 그니까 도장 찍을라고 문을 연 거야, 일부러. 그러구선 모르는 척하고 “어구, 이거 잘못 찾았습니다.” 문을 탁 닫은 거야. 그러니 그 만났던 사람들은 소름이 끼칠 거 아니야. 잘못했다간 나중에 탈이 날 거 아니야. 그 < 경찰관 >(이두용, 1978)이라는 영화가 있었어, 합동영화사. 그러구 우성영화사에서 < 세종대왕 >(최인현, 1978)이란 영화를 맨들었어. 막말로 대한민국 사람들 다 갖다 보여줘서, “이 영화가 좋으냐, 저 영화가 좋으냐?” 할 때 영화적으로 좋은 건<세종대왕>이 좋대는 건 다 인정될 거야. 돈도 많이 들었고. 그런 영화가 결과적으로 6:5로 졌어. … 쿼터가 걸린 데는 쫙 시커먼 게 쫓아댕겼으니까, 그때. - 양춘 , 2009, 210~211쪽 (상) 제17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경찰관> (하) 남녀조연상⋅미술상을 받은 <세종대왕> 위 구술에 등장하는 <세종대왕>은 우성영화사에서 말 그대로 ‘대종상을 노리고 만든’ 제작비 2억 5천여만 원에, 등장 인원만 16,000명이 동원된 대작 사극이다. 거기에다 교육성을 강조하기 위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로부터 자료제공과 협찬을 받는 한편, 역사학자 10명의 고증⋅감수를 받았다. 그러나 흥행업자들로부터 영화적 재미가 없는 ‘교과서영화’라는 평가를 받고 외면당해, 완성한 지 4년이나 지난 1982년 3월 5일 대한극장 에서 개봉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열심히 구애를 했으나 대종상에 외면당하고, 심지어 극장과 관객에게까지 버림받은 비운의 대작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영화제작자 양춘의 구술에서 언급된 합동영화사는 대종상 스캔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 중 하나이다. 특히 우성사와 합동영화사의 대종상 경쟁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더 앞서 이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에 대해 들어보자. 최훈 감독이 감독한 그걸 골랐는데, 얘길 들어보니깐 얘기가 쪼금 낯익은 것 같기고 해서 시나리오를 봤더니 시나리오가 표절이라. 그래서 이걸 좋은 영화로 만들 순 있지만 소위 대종상이나 우수영화로 내놓기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세 번인가를 뜯어 고쳤어, 시나리오를. 그걸 뜯어 고쳐가지고 < 수선화 >(최훈, 1973)로 결정을 졌어. 그 최훈 감독이 대종상을 한 번도 못했잖아요. 그래서 후보작을 고르자 그래서 최훈 감독을 줬고,또 출연자들도 좀 그렇게 대종상의 혜택을 볼 수 있는 사람을 고르자 그래서 장동휘 씨 뭐 이래 가지고 배역진을 골라가지고 시작을 했고. … {그런데 이게 감독상하고 몇 가지 상을 받기는 했는데, 작품상은 못 받았더라고요} 작품상은 아마 < 비련의 벙어리 삼용 >(변장호, 1973)이 받았나? - 박행철 , 2014 , 295~297쪽 그다음에 <비련의 벙어리 삼용>을 우성영화사에서 했더니… 아침에 사장한테 대종상에서 11개 부문이 상이라고 연락을 받았어요. 근데 그때 대종상에는 쿼터가 붙어 있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나오니까 김용덕 씨가 나한테 뭐라고 그러냐면 “밤에 대가릴 짤라 갔어요.” “그게 무신 소리요?” 그랬더니, 최우수작품상에만 쿼터가 붙어 있는데 나머진 다 놔두고 최우수작품상만 딴 데로 돌렸다 이거야. “그럼 어떻게 된 거요?” 그랬더니, 합동영화사에서 만든 < 홍의장군 >(이두용, 1973)이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태권도영홥니다. 그게 대종상 작품상 탈 영화가 못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엊그저께 새로 들어온 제작자가 11개 부문에 대종상을 휩쓸어 버리면 우린 뭐냐! 이거 우리를 아주 그냥 밟어 버리는 거 아니냐!” 굵직굵직한 회사 다섯 사람이 안기부국장을 만나자고 그래서, “이건 말이 안된다. <벙어리 삼룡> *주3 은 포르노영화다” (웃음) 그때 국시가 ‘자국안보’ 이런 거였어요. 그럼 “대통령의 뜻을 따르려면 <홍의장군>이 상을 타야지, 어떻게 포르노영화 상을 주느냐.” 국장이 어떨결에 “<홍의장군>이 타야지.” 그래서, 그때 문공부에서 주관을 했으니까, 상당한 돈도 오고 갔대요. 그러니까 밤에 소집을 했어, 심사위원들. “다시 심사해라. 국책영화에다 상을 줘야지 말이 되냐?” 그래서 심사위원들이 다시 투표를 해서 작품상을 <홍의장군>으로 바꿔쳤어요. 그러니깐 영화계가 “말이 되냐, 어떻게 <홍의장군>이 작품상이냐?” 그리고 심사위원들이 “우리는 <홍의장군>을 뽑은 일이 없다. 안기부가 동원을 했다” 막 시끄러워지니까 문공부도 골 아파지고. 이걸 수습할라고 그러는데 여론이 워낙 나빠지니까. 그래서 그러면 <벙어리 삼룡>도 쿼터를 하나 더 주자. 그래서 우수작품상까지 쿼터를 타 먹었어요. - 변장호 , 2016, 122~123쪽 <수선화>(좌)와 <비련의 벙어리 삼용>(우)은 모두 우성영화사 작품으로 제12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수선화>는 감독상⋅각본상⋅편집상⋅녹음상을, <비련의 벙어리 삼용>은 우수작품상⋅촬영상⋅여우주연상⋅여우조연상⋅음악상⋅미술상⋅조명상을 수상해, 총 11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영화제작자 박행철은 1970년대 우성사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하며 <수선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대종상을 노리고 기획된 것으로, 사실 일본영화 < 24개의 눈동자 >(기노시타 게이스케, 1954) 시나리오를 각색한 것이었다. 그러나 표절작은 대종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원작과 차이를 만들기 위해 세 번의 시나리오 수정을 거쳤다. 그리고 아직까지 대종상을 받지 못한 뉴 페이스 최훈 감독에게 기회를 주고, 캐스팅은 ‘대종상이 사랑하는’ 배우들로 뽑았다. 그 결과 <수선화>는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녹음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작품상은 받지 못했다. 박행철은 자신이 작품상을 <비련의 벙어리 삼용>에게 빼앗겼다고 기억했다(<비련의 벙어리 삼용>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같은 우성사 작품이다). 하지만 박행철의 기억과는 다르게 <비련의 벙어리 삼용> 역시 작품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최우수작품상은 합동영화사에서 제작한 <홍의장군>에게 돌아갔다(변장호 감독은 <홍의장군>을 태권도영화라고 표현했지만, 이 영화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활약상을 다룬 대작 사극영화이다). 변장호 감독의 구술은 한 줄 한 줄이 정말 흥미로운데, 무엇보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합동영화사 곽정환 사장을 비롯한 ‘친구들’이 달려가서 “엊그제 새로 들어온 제작자가 11개 부문의 상을 휩쓸어” 버리는 것에 대해 항의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1973년 제4차 영화법 개정 후, 한국영화제작업은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변경되면서 기존 영화사의 몇몇이 정리되고, 소수의 신생 회사들이 새롭게 인정받았다. 이중에서도 우성사는 가장 그 설립 시기가 늦었는데, 이를 가지고 기존 영화사 대표들이 몰려가서 텃새를 부렸다는 것이다. 이 ‘텃새’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구술자가 들려준 다른 내용의 구술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것이라 변장호 감독의 기억이 완전 거짓이나 과장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아무튼 변장호 감독 구술에 따르면 이 이야기의 결말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홍의장군>이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데 대해 온 영화계가 반발하였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우수작품상인 <비련의 벙어리 삼용>에게도 쿼터 하나가 주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대종상에는 최우수작품상 외에도 쿼터가 주어지는 부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우수반공영화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워낙 이 부문도 경쟁이 심했기 때문에 영화제작자들은 머리를 잘 써야 했다. 각 영화사의 라인업을 들여다보면 일반적으로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을 만한 작품으로 문예영화(문학작품을 각색한 영화), 예산이 많이 들어간 대작 역사영화, 새마을운동을 강조한 휴먼 드라마류의 영화들을 한두 편 제작하고, 우수반공영화상을 노린 전쟁액션영화나 첩보영화(이는 007 유행의 영향도 있었다)를 한 편 정도 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앙정보부가 아주 막강한, 영화계에 못된 행세를 한 거지. 대종상에도 관여를 해가지고 뭐 뒤에서 압력해서 “이것 줘라” 이런 정도까지. 중앙정보부에서 파견 나온 사람이 영화계를 좌지우지 했다고 해도 맞는 정도로. … {그 압박 수단은 주로 검열…} 그렇죠. 검열 가지고 하는 거죠. 그때는 검열해서 우수영화, 좋은 영화, 또 외국 나가서 상을 타고 그러면 외국영화 쿼터를 하나씩 주고 그러니깐 그 사람들이 입김이 굉장히 셌다고 봐야죠. … < 지옥의 49일 >(이두용, 1979)이라는 이두용 감독의 울릉도 가서 찍은 영화가 있어요. 근데 그게 사실은 우수영화가 될 정도가 아닌데, 그게 반공영화라는 걸로 해가지고 그걸 압력을 좀 넣었다든지 뭐 어떻게 해가지고, 심사위원들한테 금일봉식으로 이렇게 나눠주고 어떻게 해가지고 그게 상을 탄 적도 있고 뭐 그런 예가 있어요. … 그렇게 하는 이유가 그 상을 타기 위해서 반공영화를 한 거죠, 그 당시에는. 그러고 이제 암암리에 “반공영화 좀 하나 해” {우수영화 타기 위해서?} 어어.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게 사실이에요. - 주종호 , 2017, 156~157쪽 < 땅울림 >(설태호, 1980)은, 대종상에서 다 휩쓸 줄 알았어요. 어떻게 됐어? 심사하는데 대종상에서, 박암 만 조연상 탁 타버렸어. 그리고 또 뭐 하나 타고 그랬어. 그러구 이 양반이 화가 났어요. 중앙극장 사장이거든? 그래서 중앙극장에서 약간 (상영)한 것 같아요. 근데 손님들이 잘 안 들지만, 군에서는 괜찮았어요. … 우리 대종상 못 탔잖아요? 다 되는 걸로 알았거든요? 근데 안됐어요. 근데 누가 됐는가 하면, 임권택 이 한 < 짝코 >(임권택, 1980) 있지요? <짝코>가 당선된 작품이에요. 그래가지고 거기서 이제 작품상 탔어요. … {결국에 제작자는 쿼터 받아서 외화 수입하고자 하는 마음이 좀} 음, 그게 앞서는 거예요. 다! 그땐 다 그랬어요. 경제적으로 {수지를 맞추려면} 그렇죠,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데요. - 설태호 , 2010, 251~260쪽 <땅울림>은 제19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우수반공영화상을 노리고 있었지만, 남우조연상 하나를 받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설태호 감독의 <땅울림>은 대영영화사(영화사 대표 김인동 은 중앙극장을 운영했다)에서 국방부의 후원을 받아 제작된 군민 합작영화로, 제작 기간만 1년이 걸린 대작영화였다. 국방부로부터 제작비 일부와 각종 무기, 탱크, 전차, 화약 등을 지원받아 영화의 스케일도 크고, 총격⋅폭파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비슷한 시기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 < 인천(오! 인천) >보다 볼 만하다!). 그러나 그 경쟁 상대가 <짝코>라니. 그저 운이 없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지만, 엄청난 제작비와 시간을 들인 대영영화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아쉬운 결과였을 것이다. 이렇듯 모두가 당시 상황 속에서 자신은 억울하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본인이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서는 ‘나의 상’을 빼앗는 가해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내가 대종상을 받을 때는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이지만, 상을 겨냥해 만든 작품이 막상 그 상을 받지 못했을 때는 빼앗긴 것으로 표현되는 이들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흥미진진하다. 그래서 사실 누가 상을 빼앗았고, 어떻게 상을 빼앗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오늘날의 시점에서 당시 대종상을 둘러싼 구술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던 이들이 느꼈던 자괴감과 그 자괴감을 뚫고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그것을 모종의 암투로 인해 타인에게 빼앗겼을 때 느꼈을 좌절감 또는 그래도 ‘상을 받을 만큼의 작품을 만들었다’라는 자부심 사이에서 요동치는 이들의 양가적인 감정과 그 기억 속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우리가 이 시기 한국영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의 문제로 연결될 것이라 생각한다. *** 주1. 이영일의 해당 기사가 게재되기 전에 공개된 제2회 대종상 심사위원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강영수(대한일보 주필), 유건호(조선일보 편집국장), 이진섭(시나리오작가), 유석진(의사), 최정희(작가), 김대현(작곡가), 남홍우(교수), 심태진(명성여중고 교장), 김정환(미술가), 신용성(경향신문 사회부장), 이용상(공보부 공보국장). 주2. 제3회 대종상 심사위원은 다음과 같다. 정충량(평론가), 유건호(언론인), 여석기(고려대 교수), 이청기(영화평론가), 김붕구(서울 문리대 교수), 양광남(중앙대 영화연극과 주임), 박권상(언론인), 이진섭(시나리오작가), 이순근(교육평론가), 김진환(공보부 공보국장 서리), 강영수(언론인). 심사방식도 완전합의제로 변경되었으며, 기준 또한 이전보다 분명해졌는데 "①자기 목소리로 녹음하지 않은 연기 ②‘오리지널’이 아닌 음악 ③표절작품"은 수상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했다. ("6일에 대종상시상식", 《조선일보》, 1964. 3. 5. 5면 기사; "제3회 대종상 수상자 결정", 《동아일보》, 1964. 3. 7. 5면 기사 참조.) 주3. <비련의 벙어리 삼용>(변장호, 1973)을 의미한다. ※ 인용 구술 목록 한국영상자료원, 「호현찬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이채, 2005. 신필름채록연구팀, 『2008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신필름1: 최경옥⋅박행철⋅최승민⋅김갑의』, 한국영상자료원, 2008. 신필름채록연구팀, 『2008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신필름2: 임원식⋅이형표⋅이상현⋅김종원』, 한국영상자료원, 2008. 공영민, 『2009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4권: 양춘』, 한국영상자료원, 2009. 공영민, 『2009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5권: 이성철』, 한국영상자료원, 2009. 권용숙, 『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김성근』, 한국영상자료원, 2010. 김승경, 『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5권: 설태호』, 한국영상자료원, 2010. 권용숙, 『2011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강범구』, 한국영상자료원, 2011. 김승경, 『2013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김영효』, 한국영상자료원, 2013. 김승경, 『2014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2권: 박행철』, 한국영상자료원, 2014. 이정아, 『2016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5권: 변장호』, 한국영상자료원, 2016. 공영민⋅송영애, 『2017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70년대 한국영화계의 변동: 조관희⋅주종호』, 한국영상자료원,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