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프리미어
- 감독
- 김선빈
- 제작년도
- 2025
- 출연
- 정회린, 김연교, 문상훈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 중 (사진: “ jinu montage ”, 유튜브) 본 원고는 필자의 개인적 견해에 기반해 작성됐으며, 기관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함을 안내드립니다. * 이 글은 2024년 12월에서 2025년 12월까지의 한 무명 영화평론가의 도전기다. 다 쓰고 보니 비평에 관한 고차원적인 통찰은 없는 것 같다. 그걸 논하려면 실력적으로 좀 더 여물어야 한다. 그전에 평론가로서 생존해야만 했다. 이 글은 그 과정에서 만난 영화들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걸어온 길은 나를 다른 관점으로 좋게 보아온 이들의 눈을 통해서 [1] 만들어졌다.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Intro 바퀴가 되던가 바퀴에 깔리던가 난 다른 차선에 세우고 깜빡이 켜놔 - 이센스, <쉬게> “보안정책에 의해 차단 되었습니다.” 2026년 상반기에 잠시 일하는 곳에서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기로 한 영화를 예매 취소하려고 로그인하니 떡하니 보였던 문구다. 차단, 배제, 초대받지 못함 등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차단은 상당히 신선했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갑자기 일을 하게 돼서, 평소에 가던 평일 오후 2시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주로 하는 언론배급 시사회는 당분간 못 가게 됐다.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영상자료원이나 서울아트시네마에 가기가 아직은 엄두가 나질 않는다. 퇴근 후 노트북으로 영화를 파편적으로 보거나 주말을 이용해 밀린 숙제처럼 영화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그것이 결코 나쁜 일은 아니라고 여긴다. 내가 취소하려고 했던 영화는 로베르 브레송의 < 아마도 악마가 >(1977)였다. 손에 넣으려고 하면 언제나 그랬듯이 도망간다. 영화와 잠시 멀어졌지만, 근무지에서 사람들을 대하며 오히려 영화적인 순간을 최근 체험했다.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꼭 그러면 만난다. 하나는 친했던 옛 친구를 오랜만에 마주쳤다.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신세라 친구와 담배 하나를 같이 필 수 없었다. 아쉽게 손 인사만 하고 그를 떠나보냈다. 잠시 마주친 그 순간이 어쩌면 그 친구와의 마지막이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다른 하나는 답답해서 사무실을 나와 찬 공기를 마시는데 두 명의 영화배우가 지나갔다. 작년 《씨네21》 ‘프런트 라인’에 합류해 처음 쓴 비평이 두 배우가 나온 영화였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잘 움직였던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도로에 멈춰 선다. 그는 차 안에서 담배 하나를 피며 생각을 고쳐먹는다. 지금이 나에게 그런 시기 같다. 하는 일이 끝날 무렵, 시네필들이 안 좋아하지만 나는 애정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 오디세이 >(2026)가 아마도 용산 아이맥스관에서 시사회를 열 것이다. 놀란이 매달리는 ‘귀환’이라는 화두처럼 나는 다시 영화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시사회 인원수 제한에 컷 당하지 않고 무사히 입성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비평, 안녕하십니까? 글쎄 전혀 안녕하지 못하다. KMDb의 “비평, 안녕하십니까” 코너에 나는 언제 써보나? 영자원에 자주 가는 건 소용없다. 이들의 눈에 띄려면 어디서 놀아야 할까? 쟨 뭔데 50주년 리스트를 썼지? 왜 난… 이런저런 불만 섞인 질문들이 쏟아졌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점점 마음이 꼬여갔다. 늘 위기인 비평과 < 기생충 >(봉준호, 2019)으로 정점을 찍고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직격탄을 맞은 후 급격하게 추락 중인 한국영화보다 내가 더 걱정이었다. 그곳에 기생하는 존재라 숙주가 위기일 때 가장 먼저 떠날(능동) 혹은 떨어져 나갈(수동) 이들은 누구일까? 래퍼 이센스의 <A-G-E>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와중에 버는 놈들이 타짜지.” 그런 타짜들이 부럽다. 나도 타짜가 되어 전국을 누비며 한몫 챙기는 영화평론가를 꿈꿨지만, 지금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다. 타짜가 되기엔 애매한 재능 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악마의 저주일까? 이런 상황에서 영화와 비평을 고민하는 것 자체가 내겐 사치다. 위기라고 상정하고 파국이 된 그곳을 사유하는 것은 어찌 보면 안전거리가 확보된 이들에게 허락된 고상한 일은 아닌지 생각도 해본다. 그러기엔 내 눈앞에 놓인 현실이 비루하기 짝이 없다. 간단하게 말해서 일이 없는데 누가 누굴 걱정하겠는가. 영화 시장이라는 곳에서 나는 스스로를 내보이곤 있지만 매칭이 잘 이뤄지지 않는 매력적이지 않은 매물인 것이다. 비평가 자체가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다. 대(大) 인플루언서 시대에선 더욱이 말이다. 등단 이후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갔는데) 콩고물이 떨어지길 기대했던 것이 오산이다. 요즘은 등단 없이 혹은 등단 제도에 콧방귀를 뀌며 등장한 평론가들이 오히려 내가 원했던 그 자리에 더 빨리 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를 써준 분들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완성형 시네필로 등단한 케이스가 아니다 보니, 지금도 나를 쓴다는 것은 어느 정도 리스크를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그 불안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선 시네필-평론가들이 학창 시절부터 영화에 쏟아부었던 시간만큼 나 역시 영화에 투자해야 한다. 적게 잡아도 10~15년. 하지만 세상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잡지는 싸움의 장소라기보다는 매칭 애플리케이션이 되었다. 크림처럼 실패한 비평가이자, 실패한 산문가는 오늘날에 잡지에서 그렇게 환대받는 작가는 아닐 것이다. 크림은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엄숙한 비평 스타일에서 탈피, 구어적이고 생생한 언어로 비평을 썼지만, 그의 지위는 어중간한 평론가로 머물며, 독자에게 호응받지 못했다.” 강덕구 평론가가 한예종 웹진에 기고한 “ 잡지의 전성기에 관한 영원한 수다 ”란 글의 한 부분이다.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실패한 평론가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의 눈에는 신기한 행보로 비칠 수도 있다. 근데 그 누군가는 어디에 있을까? 아예 안 되진 않는다. 뭔가 되기는 한다. 그게 저주처럼 느껴지는 요즘이다. 내가 원하는 타이밍이 아닌 뒤늦게, A를 바라면 B나 C를. 확실한 건 직행 티켓은 없다는 것! 우회를 거듭하며 돌고 돌아 영화라는 왕국에 잠시 머물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감질나게 맛만 보고 말이다. 2024년이 시작하고 《씨네21》에서 주는 리뷰만 쓰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다. 나이는 차고 ‘젊은’ 시네필-평론가들이 새롭게 씬을 장악하는 상황에서 나는 시작도 안 한 것 같은데 끝난 느낌을 받았다. 리부트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거창한 계획은 없었다. 뭔가를 도모할 동료도 없었다. 그저 혼자서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것만이 내게 남은 선택지였다. 또다시 등단을 시도해야만 했고, 단편이 아닌 장편을 만들어야만 했다. 도착 지점은 다름 아닌 영화제. 여태 안 불러줬는데 내년이라고 다를까… 이런 허무함이 나를 뒤엎을 무렵, 안 불러주면 ‘내가 직접 간다’라는 밑도 끝도 없는 오기가 작동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뭐라도 만들어서 도전해 보고 그러고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그래야 후회가 덜 남을 것 같았다.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영화제에서 일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그 정도야 나도 안다. 그 천운이 내게 안 떨어지는 걸 어떡하겠나. 뭔 수를 써서라도 그 근처라도 가는 수밖에. 내가 찾은 틈새는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전. 부산영평 출신 평론가들이 부산국제영화제 크리틱b상 심사위원을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이 우회로. 물론 그해 공모전 주제였던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좋아해서 쓴 것은 맞지만 앞서 설명한 저 욕망이 없었다면 글은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2025년. 김칫국을 드럼통째로 마시고 있었는데 연락은 없었다. 갑자기 《씨네21》의 김성훈 기자님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왔다. -이번에 부산 내려가시죠? -안 불러줘서 못 가요. -(다 함께) 하하하 30주년 기념으로 씨네21상이 신설되면서 심사위원으로 선정됐다는 반가운 섭외 전화였다. 왜 뽑혔는지 나름 예상은 했지만, 핵심은 작년에 부산영평에서 등단했다는 것. 글을 안 썼으면 열리지 않았을 문이다. 우회에 우회. 그렇게 부산에 내려가서 12편의 영화를 보라는 미션이 떨어졌다. 1. <아코디언 도어>: 월경(越境)의 이미지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비전’ 부문의 한국독립영화 12편 중 씨네21상은 손경수 감독의 < 아코디언 도어 >(2025)에게 돌아갔다. 위에서 하이라이트한 부분은 모두 이 영화의 대사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우선 영화를 다시 볼 수 있게 스크리너를 친히 내준 손경수 감독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영화제 심사 때 쓴 “CINEMA”라 적힌 노트를 다시 꺼내 봤다. 그때 미처 보지 못한 것을 영화를 다시 보며 발견했다.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아코디언 도어>에 왜 끌렸을까를 생각해 봤다. 작가(Writer’s Block) 한예종 전문사에 입학하면서부터 글 쓰는 캐릭터에 나도 모르는 새 빠졌던 것 같다. 이창동 감독의 < 버닝 >(2018)의 종수를 시작으로 이지은 감독의 < 비밀의 언덕 >(2022)의 명은이, 그 누구도 기회를 주지 않을 때 GV 모더레이터 데뷔를 시켜준 천재 김홍기 감독의 < 익스트림 페스티벌 >(2022)의 래오, 홍상수 감독의 <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2025)의 시인 동화 그리고 <아코디언 도어>의 지수까지. 영화평론가가 다양한 활동을 한다지만 기본이 되는 것이 결국 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영화와 비평이 내 삶에서 멀어지려고 할 때, 작가의 형상이 아른거리는 영화를 마주하면 더 눈길이 갔다. 캐릭터들의 고민이 그 시기의 나의 고민과 공명한 것도 한몫한다. 초기엔 뭘 써야 할지(<버닝>), 얼마나 솔직해야 하는지(<비밀의 언덕>)를 고민했다. 그러다 최근엔 좀 더 현실적인 고민에 접어들었다. 글을 안 쓰고 있는 나의 게으름(<익스트림 페스티벌>)과 나이는 먹어가는데 평론가로서 자리를 못 잡고 있는 현실(<그 자연>)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초라한 상황과 상반되게 영화제는 너무나 화려했다. 그곳에서 본 <아코디언 도어>의 한 문장이 내 가슴을 후벼팠는지 노트에 많이 적혀있었다. “어차피 평범해질 운명이었다.” <아코디언 도어>에 대한 작품 비평은 이 영화의 개봉을 고대하며 뒤로 미루고 싶다. 대신에 이 영화의 전환점에서 보여주는 놀라운 수직의 움직임을 말하고 싶다. 타임라인 상 가운데에 해당하는 지점에서 영화는 하늘 높이 풍선을 띄운다. 소제목에도 썼듯이 <아코디언 도어>는 경계를 넘는 이미지로 넘실대는 영화다. 크게는 지구와 우주,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도달하는 이 영화는 그 사이에 낀 ‘재능’이란 녀석을 주목한다. 물에서 뭍으로 사진: " 아코디언 도어 ", 부산국제영화제 / ⓒ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과학 괴짜 종윤이가 우주 풍선을 쏘아 올린다. 성층권 33km까지 도달한 풍선, 그곳에서 내려다본 지구. 한계에 다다랐을 때 풍선은 터지고 지구로 추락한다. 지구에선 지수( 문우진 )가 강 아래로 추락하고 있다. 물에 빠진 건 이때뿐인데 <아코디언 도어>가 그리는 세계는 마치 수면 아래의 세계 같다. 영화 내내 간간이 들리는 파도 소리와 귀가 먹먹한 사운드 효과는 물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영화를 다시 감상하며 지수가 마치 물고기처럼 느껴졌다. 영화 속 인물들이 처한 상태 역시 물과 관련됐다. 예를 들면 무언가에 심취(心醉)한, 몰입(沒入)한, 사랑에 빠진(fall in) 등등. 이는 모두 물과 관련된 혹은 연상되는 표현들이다. 그러한 물의 세계와 작별을 고하고 뭍으로 넘어온 지수는 대전환을 맞이한다. 정확한 출처는 기억나지 않지만 유튜브에서 보고 적어둔 글귀가 있다. “물고기가 육지로 올라오는 것은 인간이 산소통 없이 달에 간 정도의 놀라운 기적.” 물에서 건져진 이후로 지수는 키가 자라고 털이 나기 시작한다. 일종의 진화라고도 볼 수 있는 육체적 성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능만 믿고 까불었던 지수는 새롭게 다가오는 환경에 적응해야만 했다. 모종의 사건이 벌어지고 지수는 빵을 만드는 마이스터고에 진학한다. 글 쓰는 것과는 상관없는 곳에서 지수는 무탈하게 지낸다. 그리고 글을 조심스럽게 다시 쓰기 시작한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거리감이었다. 매몰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글의 내용이 내레이션으로 나오고 여러 장면이 몽타주된다. 몇몇 장면에서 감독 본인이 지수의 어른 역으로 등장한다. 그가 출연한 사실 또한 영화를 다시 보며 엔딩크레딧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잠시 나오는 그의 뒷모습에서 자신의 첫 장편영화를 만들기까지의 부침(浮沈)의 시간이 느껴졌다. <아코디언 도어>는 감독 자신을 영화에 각인시킨 에세이적인 면모를 지닌 흥미로운 픽션이다. 영화제에서 볼 때는 몰랐지만 해가 바뀌고 지수와 엇비슷한 상황에 놓여 영화와 잠시 멀어진 상태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니 묘했다. <아코디언 도어>는 내게 미래의 한 조각을 미리 보여준 셈이었다. 물 안에서 지수가 봤던 익사한 남자는 최악의 경우 나의 자화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시 아찔했다. 내시현상(內視現象) - 내 눈에만 보이는 벌레 사진: " 아코디언 도어 ", 부산국제영화제 / ⓒ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재능이란 기생충을 CG로 선보이는 방식보다 지수의 시점 숏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놀라웠다. 영화제 때는 발견조차 못했던 장면이다. 그 장면은 지수가 잠에서 깰 때 등장한다. 무언가가 내 눈에만 보이는 내시현상, 의학 용어로 비문증(飛蚊症)으로 볼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기생충이 지수의 신체 내부에 있는 실체인지 아니면 환영인지는 알 수 없다. 둘 중 어느 쪽으로도 환원시키고 싶지 않다. 그 두 개의 영역이 중첩된 숏이라 말하고 싶다. 기생충이 지수의 눈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낼 때의 조건이 흥미롭다. 무매개적인 조건이 아니라 빛과 커튼이 필요하다. 잠에서 깬 지수가 빛을 머금은 커튼을 바라볼 때 기생충의 모습이 잠시 등장한다. 영화의 영사 원리가 떠오르기도 한 장면이다. 하지만 스크린을 통해서 다 같이 볼 수 있는 영화와 달리 기생충은 지수 눈에만 보인다. 기생충이 몸에서 빠져나간 이후에 지수의 시점 숏이 같은 조건에서 다시 등장한다. 더 이상 지수에게 기생충이 떠다니는 불투명한 필터는 없다. 맨눈이 된다는 것의 두려움. 지수는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아물지 않은 어떤 상처가 이제 눈에 들어오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에도 지수의 시점 숏이 나온다. 이 영화의 엔딩은 여전히 내게 미궁으로 남아있다. 지수의 흐느낌, 멈춰버린 그의 몸, 시끄러운 기계음. 밀폐된 공간 속에서 시청각적으로 구성된 이 감각적인 엔딩은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당장에 비평의 언어로 재단하고 싶지 않다. 그저 내가 몽타주하고 싶은 것은 현재 지수의 멈춘 뒷모습과 그가 다시 쓰기 시작한 글에서 표현했던 미래의 자신의 뒷모습이다. <아코디언 도어>는 두 뒷모습 사이의 간극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2.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 수인(囚人)의 이미지 두 뒷모습은 현실과 픽션의 간극처럼도 보인다. 현실은 잠시 멈춰있지만, 미래에는 좀 더 자유로워지길 바라며 써 내려간 희망의 픽션. 나 역시 현실의 고민을 픽션에 투영해 바라본 적이 있다. 그 영화는 기사 한 줄 없이 주목도 못 받았지만 그래도 영화제에 흔적은 남긴 지옥의 영화 <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 >(2025)이다. 이것은 희망의 픽션은 아니다. 무언가를 내려놓지를 못하는 나를 산 정상에 올려다 놓고 장대비를 맞게 한다. 절벽 끝으로 몰아붙이는 느낌으로 말이다. 계속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하산할 것인지. 질 들뢰즈가 말하는 ‘사유’가 영화의 끝에서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내리는 비라는 사건은 “사유하도록 강제하는 것과의 우발적인 마주침” [2] 이다. 원래 엔딩은 “CINEMA”라 적힌 노트를 봉수대에 넣고 태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왠지 뻔해 보였다. 찬물을 끼얹고 싶었다. 그래서 빗소리를 붙여봤다. 썩 마음에 들었다. 기껏 노력해서 무언가를 했는데 말짱 도루묵이 되는 느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제에 가기 위해 200자 원고지 50매 이상을 썼다. 이번엔 장편 분량의 에세이 영화를 만들었다. 어떤 평론가가 이럴까 싶지만, 방법이 그것뿐이니 어쩔 수 없었다. 감독이 되고자 하는 열망은 없다. 평론가로서 나를 알리기 위해 만들었을 뿐이다. 그게 과연 통했을까? 프랑수아 트뤼포의 명언이라고 잘못 알려진 ‘시네필 3법칙’을 등단한 이후에 몸소 실천했다. 같은 영화를 두 번 보고, 영화 비평을 쓰고, 직접 영화를 만들기. 이 과정을 통해 나는 영화와 좀 더 멀어진 것 같다.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 중 (사진: “ jinu montage ”, 유튜브) 부산 무사이극장에서 당연히 만들면서도 알았고, 실제도 다 만들고 나서는 더욱 더 난감했다. 이걸 받아 줄 만한 영화제가 있을까? 어느 영화제에 붙여놔도 안 어울렸지만 그냥 일단 다 출품해 봤다. 그래도 받아 줄 만한 곳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였다. 당연히 떨어졌다. 그것에 낙담한 적은 없다. 떨어질 만한 영화기 때문이다. 서울독립영화제 빼곤 남은 카드가 없었다. 연락이 없는 걸 보니 떨어진 것 같았다. 때마침 부산의 김영광 평론가가 운영하는 1인 시네클럽 ‘시네마 언노운’에서 상영작 공모가 시작했고, 인스타그램에서 홍보 게시물을 보자마자 바로 보냈다. 그렇게 다시 부산에 가게 됐다. 부산국제영화제 일정이 끝나고 바로 다음 주 화요일인 9월 30일에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이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하게 된 것이다. 부산 무사이극장에서 진행된 상영회에서 김영광 평론가는 3시간에 육박하는 GV를 진행했다. 그는 ‘뉴웨이브’가 올 것 같냐고 물었다. 그것은 초청된 모든 감독에게 물어본 공통 질문이었다. 그때는 이걸 왜 물어보나 싶었다. 최근에서야 알았다. 그는 3월 7일에 열리는 ‘뉴웨이브 전초전’이란 대규모 행사를 그때 이미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당시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당분간 뉴웨이브는 안 올 것 같다. 지금은 기획자를 원하는 것 같다. 저런 거(<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 만들지 말고, 영화를 틀어야 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시네마토그래프의 ‘이윤영’ 씨가 지금 스타다. 비평계에선 ‘김병규’ 평론가가 스타고 그 이후엔 없다. 등단하고 나서야 안 것이지만 이미 학창 시절부터 시네필이고 파워블로거고 그 집단을 끌고 들어왔다는 점, 다시 말해 인터넷 인간들을 우군으로 끌고 왔기에 리더다. 밑도 끝도 없이 온 나의 경우는 지지기반이 아예 없는 거고… 지역 기반이 있거나 혹은 업계 사람들을 많이 알아서 일을 따가고 잘 나가도, 그처럼 아이콘은 될 수가 없다. 래퍼 더 콰이엇의 명언이 이곳에도 적용된다. “스타는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고 사람들과 시대가 원해서 나타나는 것에 더 가깝다. 근데 스타가 안 나온다는 것은 그걸 안 원한다는 거예요. 이 시대가… 근데 때가 되면 나타날 겁니다.” 비평이라면 그것을 소비하는 블로그, 커뮤니티, SNS 사용자를 끌고 와야 하는 것인데, 다음은 어떤 매체일까? 비평을 담을 수 있는 마지노선이 블로그가 아니었을까. 혼자서는 버겁다. 잘난 사람들도 뭉치는 판이다. 아이돌 그룹처럼 모여서 팀으로 활동한다. 소리그림, 키니마 등등. 현장에선 얼추 비슷하게 말했던 것 같고 상영 이후에 정리한 말들이다. 평론가의 역할이 좀 더 확대되고 있었다. 나 역시 상영 기획을 해야 하나, 영화를 수입/배급해야 하나 별별 생각이 들었다. 평론가의 다음 단계가 있다면 그것은 감독이 아니라 프로그래머나 수입/배급업자가 아닐까? 활황인 관객 프로그래머와 시네클럽들. 프로그래밍의 외주화. 영화제와 영화관은 이들과 손을 잡고 ‘멋(hip)’을 뽐내고 있는 중이다. 이를 통해 기획, 상영, 비평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융합형 인재가 양성되고 있었다. 새로운 종의 출현인 것이다. (새로운 것은 아닐 수 있다. 잠복기를 거쳐 다시 부상한지도 모르겠다. [3] ) 나는 단종된 이전 모델의 길을 걷고 있는 퇴화하는 평론가의 종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러한 압력은 상당한 부담감으로 작용했다. 어떤 영화를 어떻게 쓸 건지보다는 어떻게 상영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게 생존에 유리해졌다. 글도 잘 못 쓰는데 시장에선 그런 사람들을 더 반기니 말이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선 이러한 시류를 반영이라도 하듯 ‘클럽 시네마’란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소리그림과 키니마가 그 첫번째 주인공으로 참여해 시네토크를 했다. 여태 이 글을 읽었거나 혹은 영화제를 간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나는 해당 영화제에 영화로도, 평론가로도 초대받아 일해 본 적이 아쉽게도 없다. 작가로서의 평론가만 지나치게 고수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점검하게 됐다. 과감하게 집어던지고 건너편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비평은 일종의 패시브 스킬이 된 것은 아닐까? 세상은 바뀌고 있는데 나는 그 스킬을 익히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렇게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은 영화를 보러온 동지들(김영광, 강원우 평론가, 마산영화구락부의 김준희)과 화명역 근처에서 새벽까지 소주 먹고 대단원의 마무리가 되는 줄 알았다. 마지막 남은 한 발이 먹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공식 발표 하루 전날 서울독립영화제 사무국에서 전화가 왔다. 페스티벌 초이스 장편 쇼케이스 부문에 선정됐다는 전화였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시네마테크KOFA 기획전 “영화로 영화쓰기” 중 섹션 “오진우 단편선”(상영작 중략) 그전에 7월 15일에 “오진우 단편선”이란 제목으로 그간 만든 영상들을 틀 기회가 있었다. 다른 평론가들이 상영 기획으로 저변을 확대하며 예비 프로그래머로 성장할 때, 나는 영상을 만들어왔다. “ 영화로 영화쓰기 ”라는 프로그램 안에서 내 영상들이 가장 이질적이었다. 다른 상영작들과 어울릴 수 없는, 그래서 단독으로 꾸려졌을 것이다. 특색이 있다지만 일종의 갈라파고스. 나도 다른 창작자들과 교류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도마 위의 생선이 되겠다는 것이다. 평론가와 프로그래머는 칼을 들고 도마 위의 영화라는 생선을 바라본다. 일종의 게이트 키퍼로서 영화를 선별한다. 나도 그렇게 남의 영화를 바라보고 싶었는데 스스로 생선이 되었다. 비평의 세계에서 영화 창작의 세계로. <아코디언 도어>의 지수처럼 나 또한 물고기 같았다. 지수는 변화한 환경에 적응했다. 나는 이것이 진화인지 아니면 퇴화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후자에 마음이 쏠린다. 애초에 내가 평론가로서 잘 풀렸다면 영화까지 만들었을까? 아닐 것 같다.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타입의 영화를 만든 것은 분명하다. 계속해서 비평의 끈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비평을 놓아버리고 건너편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미련하게…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KMDb에 이렇게 글을 쓰기 전에 웹진 아카이뷰에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또한 우회. 그 글 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비디오 에세이와 에세이 영화는 내게 고치지 못한 습관 혹은 만성적인 질환처럼 남게 됐다. 이 증상으로서의 시네마 를 발견해 준 담당 프로그래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린다. 향후 미래에 다시 누군가가 이 분야를 디깅했을 때 재발견되어 한국 영화비평사의 B-Side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까지, 설령 그날이 안 와도 영화로 가는 길을 계속 걷는 수밖에 없다.” “오진우 단편선”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나를 최초로 발견한 은인 황민진 프로그래머님의 제안 덕분에 성사된 일이다. 좀 더 강단 있고 잘나가고 예술적인 평론가였다면 행사의 흥행을 위해서 고사를 했을 텐데, 아쉽게도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보통 일이 들어오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다. “네, 가능합니다.” 황민진 프로그래머가 쓴 노트를 살펴보자.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비디오 에세이,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뮤직비디오를 아우르는 오진우 감독/평론가의 작업은 단일한 규정으로는 묶이지 않는다.” 맞는 말이다. 동시에 저 모든 걸 안 하고 있기도 하다. 정확히는 못한다. 저 장르로 나아가 아예 감독이 돼서 뭘 만들 줄을 모른다. 자본화되지 않는 기술력인 것이다. 학창 시절부터 감독을 꿈꾼 것도 아니고, 영화과 출신도 아니고, 제작 워크숍을 경험한 적도 없다. 평론가로서 다급해져서 만든 성과일 뿐이다. 내 영상은 그간 본 것들의 총합이다. 다양한 것들을 가져와서 믹스하는 것이다. 황민진 프로그래머가 분석한 나의 작업의 특성은 유운성 평론가가 정의한 ‘에세이 영화’의 형식과 공명한다. 유운성 평론가는 에세이 영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에세이란 고전적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부정하는 대안적 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포괄하고 자신의 특수한 사례들로 만드는 보편적 형식이다.” [4] 에세이에 관한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실제로 에세이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와닿는 정의가 바로 저 문장이다. < 영상자료원 가는 길 >(2022)과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이 저 정의에 부합하는지는 모르겠다. “오진우 단편선”을 본 몇 안 되는 관객 중 유운성 평론가님이 계셨고 유일무이하게 리뷰를 남겨주셨다. 글의 일부분을 옮겨 보자면 다음과 같다. (상) <영상자료원 가는 길> / (하) <Hong Sang-soo: Gravity and Grace> 사진: “ jinu montage ”, 유튜브 / “ MUBI ”, 유튜브 “(…) 최근작인 <홍상수: 중력과 은총>(2025)은 비평적 몽상의 발걸음이 홍상수 영화를 일렁이게 하는 은밀한 저류와 짜릿하게 만나면서 그것을 드러내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다만, 이전 작업들에서 두드러졌던 ‘캐릭터로서의 비평가’는 여기서 훨씬 은근한 형상으로, 수줍은 자취로만 감지된다.” 바로 직전 작업인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에서 ‘캐릭터로서의 비평가’를 전면에 내세워서 반작용이 있었던 걸까? 하긴 이 영화에서도 내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목소리로만 등장한다. 이 영화 또한 직접 보러 와주신 유운성 평론가님은 다음 작품에서는 본인이 직접 출연해 보라고 조언해 주셨다. 나는 숨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사라지고 싶었던 것일까. 어디로부터?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영상자료원 가는 길>과 마찬가지로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도 영화제 맛을 본 작품이다. 여기에 <Hong Sang-soo: Gravity and Grace>라는 비디오 에세이는 해외 영화제에서 상영 후 MUBI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됐다. 나름 괄목할 만한 성과임에도 불구하고 아시다시피 기사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은 부산을 찍고 서울에 입성한다. 이 영화를 통해서 내가 원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서울독립영화제의 자랑인 ‘독립영화 매칭 프로젝트: 넥스트링크’란 프로그램이 있다. 보통의 영화들은 개봉이 목표다. 서독제의 넥스트링크는 배급사와의 미팅을 주선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2025년 서울독립영화제 장편 상영작 중 배급사 미정인 작품이 이 프로그램의 자격 조건이다.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이 조건을 갖췄으나 (양심적으로) 개봉이나 배급사를 둘 정도의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이 영화가 내가 바라는 다음 스텝을 위한 땔감이 되길 희망했다. 마침 그런 장면이 이미 영화 안에 있기도 했다. 이 영화를 통해 얻은 것은 감독의 자리. 내가 바라고 원했던 자리는 평론가의 자리인 모더레이터가 앉은 저 자리. 장편 분량의 영화를 만들고 고작 바라는 게 그것이냐고 묻는다면, 당장은 그렇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하지만 여기서 일단 마무리가 됐다. 이 영화를 통해서 영화제 측에 나를 처음으로 알렸다. 그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나를 말이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 달리 영화만 틀고 끝날 수도 있다. 개막식 때로 시간을 돌려보자. 개막작 < 무관한 당신들에게 >(2025)를 기획한 문주화 평론가님을 보면서 깨달았다. “아! 일은 저렇게 보는 거다.” 지난 1년간 내가 걸었던 길이 구태(舊態)라고 느껴졌다. 그녀는 최근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발탁됐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나는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관객석으로 그리고 엉뚱한 사무실로 점점 영화와 멀어졌다. Outro 이것이 나의 지난 1년 간의 이야기다. 손경수 감독이 쓴 <아코디언 도어>의 연출 의도가 떠오른다. “잘해서가 아니라 좋아해서 계속할 수 있다는 단순한 답은 계절처럼 한 템포 늦게 찾아왔다.” 비록 잘한 적도 없지만 좋아해서 계속할 수 있다는 단순한 답은 아직 내게 도착하지 않았다. 올해는 어떻게 될까? 그 사이 계절은 겨울에서 봄이 됐다. 영화에 대한 사랑보단 돈… 거짓말이라도 돈 말고 영화를 사랑한다고 외쳤어야 했다. 모든 것이 내가 자초한 일이기에 별다른 변명도 할 수 없다. 많은 분의 도움으로 영상자료원 로그인 차단은 해제되었다. 차단 해제 이후 영상자료원에서 처음 본 영화는 오구리 코헤이의 < 진흙강 >(1981)이었다.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명작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끝으로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진흙강>은 인물들 간의 거리감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우동집 아들 노부오는 창문을 통해 강 건너편에 정박한 배 한 척을 본다. 그것은 그에게 신기한 매혹의 세계였고, 잔혹한 진실의 세계였다. 비가 퍼붓는 날 다리 위에서 노부오는 배에 사는 키이치를 만나 친구가 된다. 배에는 두 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하나는 남매의 방으로,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방으로. 배는 벽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공간으로 분리됐지만,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 세계였다. 들어도 못 들은 척 고통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세계 속에서 남매는 살아간다. 두 장면이 떠오른다. 하나는 식사 장면이다. 키이치와 그의 누이 긴코는 우동집에 초대를 받아 밥 한 끼를 맛있게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때 긴코가 즐겁게 노는 동생을 쳐다보는 장면이 있다. 그녀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잠시 누린 이 행복이 내 것 같지 않은 느낌. 다른 하나는 마지막 장면이다. 진실을 목격한 노부오는 남매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다음 날 배가 떠나기 시작한다. 노부오는 강을 따라 배를 뒤쫓기 시작한다. 그는 연신 친구 키이치를 불러보지만, 배는 무심하게 아무 말 없이 떠난다. <진흙강> 중 / 사진: <진흙강> 중 (“ Doro no kawa ”, IMDb) * 지난 여름과 겨울에 제 영화를 보러 와주신 관객분들, 감독님들, 평론가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영화제 이후 자신의 영화를 내어준 < 관찰자의 일지 >(2025)의 임정환 감독님과 < 겨울날들 >(2025)의 최승우 감독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글을 쓰지 않고, 영화를 만들지 않았으면 볼 수 없었던 길이기에 그저 꿈만 같다. “영원히 꿈을 꾸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5] 이제 꿈에서 깰 시간. *** [1] 배우 권해효의 멘트를 문장에 맞게 변형해서 사용했다.( 링크 ) [2] 질 들뢰즈, 김상환 옮김, 『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313쪽. [3] 한국영상자료원의 “1990s 시네마테크의 필름들”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세대가 다른 시네필들이 만났다. 비슷한 연장선상에서 읽히는 “영화서클”은 지금 활황인 시네클럽의 부상에 화답이라도 하듯 이전 세대의 시네클럽은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추적하는 고고학적인 방식의 프로그램 같다. [4] 유운성 평론가는 장 뤽 고다르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 인디아 >(1959)에 대해 남긴 짧은 글로부터 ‘에세이’라는 형식을 다음과 같이 도출한다.(유운성, 『유령과 파수꾼들』, 미디어버스, 2018, 310쪽.) [5] <관찰자의 일지>에 나오는 대사다. 영문 자막이 흥미롭다. “… Dreams can’t last forever … is the theme.” 비평, 안녕하십니까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오진우(영화평론가) l 2020년 《씨네21》 영화평론상으로 데뷔했다. 이후 2021년 한국독립영화협회, 2024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전에서도 수상한 바 있다. 에세이 영화 <영상자료원 가는 길>(2022), <서울아트시네마 가는 길>(2025)과 비디오 에세이 <Hong Sang-soo: Gravity and Grace>(2025)를 만들었다.
지난 6월 21일, 로빈 하디의 < 위커맨 >는 개봉 50주년을 기념하는 4K 복원판이 영국에서 첫 월드 프리미어를 가졌다. 이후 미국 전역을 비롯한 각 국가 개봉에 이어 10월에는 현존하는 본편 3개 버전과 방대한 서플먼트 그리고 폴 지오바니와 밴드 마그넷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포함한 5 디스크 DVD 박스세트가 출시되었다. 동시에 <위커맨: 공식 스토리>라는 신간도 함께 출판되면서, <위커맨>은 올해 복원된 고전 중에서 가장 활발한 커리어(!)를 이어가는 히트작이 되었다. 이미 개봉 40주년을 기념한 디지털 복원판이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상영되었던 전력을 떠올려보면, 새로운 4K 복원판에 대한 식지 않는 관심은 진정한 컬트 고전으로서 <위커맨>이 가진 위상을 다시 한번 증명해 보인 셈이다. 요란스러운 상찬과 제사에 불구하고, 컬트의 지위를 가진 대부분의 걸작들이 그러하듯 <위커맨>은 시작부터 개봉까지 쉬웠던 순간이 하나도 없었던 고난의 영화였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말 그대로 복원과 부활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위커맨>은 < 발자국 >(Sleuth, 1972)로 유명한 작가 안소니 샤퍼가 제작사 ‘브리티시 라이언’의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제작자 피터 스넬 그리고 해머의 드라큘라 재생산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배우 크리스토퍼 리와 1967년 출간된 데이빗 피너의 소설 ‘의식(Ritual)’의 영화판권을 공동으로 구입하면서 시작되었다. 개발에 난항을 겪던 프로젝트는 당시만 해도 ‘듣보'였던 로빈 하디가 의기투합하면서 주말동안의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순식간에 하우이 경사를 중심으로 한 제대로 된 시나리오로 전개되었다. 완성된 시나리오에 만족한 스넬은 ‘저예산으로 제작할 것'이라는 조건을 붙이고 비로소 <위커맨>은 1972년 가을 크랭크인에 들어갔다. 촬영은 약 7주 가량 25개 스코틀랜드 지역 곳곳에서 진행되었지만, 정작 로케이션 중에서 진짜 섬은 한곳도 없었다. 로빈 하디는 공간의 통일성을 위해 이곳 저곳에서 찍은 장면들을 패치워크하듯 이어붙이는 작업이 오히려 흥미로웠다는 후일담을 전하기도 했으나, 가을의 스코틀랜드에서 5월 초여름의 풍경을 담아야 한다는 미션과 더불어 로케이션 중간중간 출몰하는 근대와 문명의 흔적을 피하는 촬영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예산 부족과 고된 촬영, 추위와 이어지는 과음으로 하우이 역의 에드워드 우드워드는 발가락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고, 윌로우 역의 브릿 에클랜드는 촬영 내내 우울증에 시달린 나머지 이후 완성된 영화를 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에클랜드는 2023년 5월 <위커맨> 50주년 특별행사에 참석하여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100분이 넘는 길이로 영화는 완성되었지만 <위커맨>의 개봉은 요원했다. 20세기 초중엽 에드가 월리스, 알렉산더 코다, 캐롤 리드 등 영국영화의 대표주자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았던 브리티시 라이언은 만성 적자에 시달리며 계속해서 주인이 바뀌던 상황이었는데, <위커맨>이 완성된 시점의 사장인 마이클 딜리는 완성본을 싫어한 나머지 영화의 개봉을 거부했다. 제작자 스넬은 딜리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칸 영화제에 완성본을 들고 가 쇼케이스를 진행하는 동시에 호텔 로비에 거대한 위커맨을 세워 홍보에 열을 올렸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이때 <위커맨>을 본 영화 관계자 중에는 로저 코먼도 있었는데, 드라이브 인 상영에 좋겠다고 판단한 코먼은 편집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 결국 브리티시 라이언은 영화를 87분으로 대폭 가위질해서 먼저 개봉하여 별 재미를 보지 못한 니콜라스 로에그의 < 쳐다 보지 마라 >(Don’t Look Now, 1973)와 동시상영하는 조건으로 영화의 개봉을 허가했다. 크리스토퍼 리는 안면이 있는 모든 평론가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서 좌석을 빼두는 등 공을 들이기도 했다. 20세기 브리티시 호러의 대표작인 두 편의 영화가 동시상영이라는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는 비극인지 아니면 두 편을 동시에 본다는 엄청난 기회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시 관객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처참한 박스오피스 결과를 통해 드러났다. 어떻게든 제작비를 환수하려고 애썼던 브리티시 라이언은 로저 코먼을 비롯, 미국 배급을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결국 미국 배급권은 워너 브러더스에게 헐값에 넘어갔다. 워너는 개봉 전 테스트 상영을 했지만, 버라이어티를 비롯 지면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소규모 상영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덕분에 <위커맨>은 순식간에 시네필 그리고 영화학도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볼 수 없는 걸작'이 되면서 컬트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6년 할리웃으로 와 각본작업을 하던 로빈 하디는 <위커맨>의 부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워너 브러더스는 이미 미국 배급권을 단돈 2만불에 아브락사스라는 소규모 회사에 넘겨버린 상태였고, 하디는 아브락사스를 설득해서 난도질당한 <위커맨>의 부활 작업의 허가를 얻었다. 하디는 바로 피터 스넬, 앤드류 샤퍼 그리고 크리스토퍼 리에게 연락을 취했고, ‘위커맨 4인방'은 가위질 이전의 롱 버전 프린트 사냥에 나섰다. 개봉버전과 로저 코먼에게 견본으로 보냈던 오리지널 프린트를 찾아낸 하디는 결국 1977년 가을 미국에서 첫번째 디렉터스 컷이라고 할 수 있는(현재는 ‘미들 버전’이라 불리는 버전으로 4K 복원 상영본인 ‘파이널 컷’의 원형이 된 판본이다) 92분 버전의 <위커맨>이 상영되었고 결과는 큰 성공이었다. 이후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위커맨>은 숏 버전과 미들 버전이 번갈아가며 TV와 홈비디오 시장을 통해 배급되었지만, 본격적인 복원은 2001년 영화의 세계배급권을 갖게 된 스튜디오카날에 의해 시도되었다. 이 과정에서 처음 완성된 100분이 넘는 오리지널 프린트는 찾지 못했지만 현존하는 프린트와 텔레시네 버전들을 조합한 99분 버전의 ‘디렉터스 컷’이 DVD로 출시되었다. 스튜디오카날은 <위커맨>의 복원을 위해 프린트 사냥을 멈추지 않았는데, 하버드대 필름보관소에서 92분 버전의 필름 4K 버전을 입수하면서 제대로 된 디지털 복원의 신호탄을 쐈다. 로빈 하디는 페이스북에 올린 비디오 메시지를 통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영화의 디지털 버전을 복원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는데, 복원 과정에서 하디는 섬머아일로 가기 전 경찰서 등 하우이의 일상 장면을 포함, 디렉터스 컷에 삽입되었던 장면들을 제외한 92분 버전의 복원에 동의하고 이 버전은 2013년 크리스토퍼 리가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던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이 버전이 올해 4K 복원판 상영으로 이어진 이른바 ‘파이널 컷'으로, 국내에서는 지난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국내 관객을 처음 만났다. 영생을 믿는다며 부활을 울부짓었던 하우이의 희생 덕분이었는지, 아이러니하게도 불굴의 4인방의 <위커맨>은 부활에 성공하여 영생을 얻은 셈이다. 영화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영화의 부활 서사때문에라도 <위커맨>은 수많은 관련서와 팬매거진을 거느린 컬트 고전이자 아리 에스터 등 현대의 감독들에게도 영감의 원천이 된 걸작이지만, 역경을 딛고도 부활할 수 있었던 영화의 저력은 전무후무한 전복적 상상력에서 나온다. 지난 10여년 간 글로벌 호러의 지배적인 서브장르로 급부상한 포크 호러 열풍과 더불어, <위커맨>은 < 심판 >(Witchfinder General, 1968), < 사탄의 피부 >(The Blood on Satan’s Claw, 1971)과 포크 호러 장르의 ‘불경한 삼위일체'라는 명성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 중 <위커맨>은 근대 서구 문명의 이성과 기독교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과 완전한 전복을 스크린에 구현했다는 점에서 다른 두 편과 궤를 달리한다. 엄격한 교리와 도덕률 그리고 사법제도의 규칙으로 무장한 채 아버지의 법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근대적 남성주체 하우이는 로완 모리슨의 실종을 추적하는 탐정으로서도, 순결한 총각으로서도, 무엇보다도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도 성공하지 못한 채 예상치 못한 결말을 맞이한다. 섭리라는 말로 수렴될 수 없는 자연의 동학을 긍정하는 섬머아일에서 섹스와 남근, 수확과 재생산은 하우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질서를 구성한다. 그 안에서 당혹과 충격 그리고 어이없음과 무력함을 넘나들며 심리적 폐소상태에 놓인 하우이의 클로즈업과 영화의 절정을 향해 치닫는 메이데이의 현기증나는 의식은, 종교적 이성과 원시적 이단이라고 재단된 양립할 수 없는 두 질서 사이의 근본적인 충돌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는 한편의 블랙 코미디’라고 너스레를 떠는 로빈 하디의 코멘트에 충분히 고개가 끄덕이면서도 왠지 영화의 강열도를 축소시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다.
영화 <미망> 하성국 배우, 이명하 배우 2019년 여름, 종로에서 공간 드로잉을 배우고 있었다. 배워두면 언젠가 영화의 스토리보드를 작업할 때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고, 이 또한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이라 여겼다. 그 그림 수업에는 4가지 원칙이 있었는데 1. 지울 수 없게 펜으로 그릴 것. 2. 틀리더라도 그대로 두고 계속할 것. 고치기 위해 선을 덧칠하면 오히려 지저분해질 뿐, 다 그리고 나면 조금 틀린 건 아무것도 아니다. 3. 한 번에 할 수 있는 만큼 선을 최대한 길게 쓸 것. 선을 짧게 사용하는 건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이다. 4. 시작을 하면 반드시 완성할 것. 이 원칙은 삶의 원칙처럼 다가오기도, 영화를 만드는 자세로도 다가왔다. 돌이켜보면 이 네 문장이 코로나라는 미로를 통과하는 길잡이가 된 것 같다. 영화 <미망> 이명하 배우 수업을 듣기 위해 종로를 걷던 어느 날.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뒤돌아 마주한 얼굴은 배우 이명하였다. 반갑게 인사하는 그녀는 서울극장에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길을 잘 알지 못했고, 나는 그림 그리며 광화문과 을지로, 종로 일대의 골목들을 속속들이 알게 된 덕분에 그녀가 예매한 시간에 늦지 않도록 길을 안내해 줄 수 있었다. 서울극장에 도착한 우리는 다음에 꼭 영화를 찍자는 인사와 함께 헤어졌다. 그 인사가 ‘영화 그리기’의 시작이었다. 영화 <미망> 이명하 배우 그해 여름, 선을 지울 수 없게 선택했던 도구는 카메라가 됐고, 이명하 배우와 헤어지며 약속했던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는 길을 헤매던 남자와 여자가 우연히 만나, 서울극장을 찾아가는 이야기였다. 촬영을 마치던 날, 나는 할 수 있는 한 선을 최대한 길게 쓰라는 두 번째 규칙을 떠올렸다. 영화 속, 서울극장 앞에서 여자와 헤어져 다시 발걸음을 돌린 남자는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서울극장에 간 여자는 어떤 영화를 보고, 누구를 만나게 됐을까. 그 질문으로 이야기는 다음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각자의 시간을 보낸 뒤 두 사람이 어디선가 다시 만나 함께 걷게 되는 구조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그러나 영화를 곧바로 촬영할 수 없었다. 제작비는 첫 번째 파트를 촬영할 수 있는 정도가 전부였고, 후반작업을 하면서 다음 파트를 촬영할 제작비를 준비하고 있을 때 코로나가 시작됐다. 그로 인해 제작비 마련도 어려웠을뿐더러, 촬영을 위한 인원들이 모일 수 없었다. 게다가 다음 챕터는 서울극장에서 시작해야 했는데, 실내 촬영 협조 또한 불가능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이 계속됐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나아질 것이라는 예상은 때마다 빗나갔다. 그럼에도 시작을 했기에 반드시 끝을 내야 했다. 그것이 시작하며 다짐한 규칙이기 때문이었다. 영화 <미망> 하성국 배우 앞서 촬영한 영화를 우선 편집하여 단편으로 선보이고, 그 결과를 발판 삼아 다음으로 이어가야겠다는 막연한 계획을 세웠다. 영화는 2020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국내외 영화제에 초청됐다. 첫 번째 파트는 < 달팽이 >라는 제목으로 관객들과 영화 관계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다음 시나리오를 더 보완해 나갔다. 그렇게 1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다음 영화를 찍을 수 있는 환경은 조성되지 않았고, 생계를 위해 조감독으로 일하던 공연 극장마저 코로나를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영화를 찍기에 앞서 생존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문을 닫는 극장에 대한 아이디어를 두 번째 에피소드로 끌어오게 된 계기가 됐다. 오랫동안 공연을 이어왔던 무대를 추억으로나마 남기기 위해 배우들과 스태프들과 함께 단편 영화를 만들었다. 후에 서울극장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게 됐고, 또 하나의 공간이 사라지기 전에 그 공간을 담아내려는 마음을 되새겼다. 영화를 만들기 위한 환경은 작아져갔지만, 이야기와 영화를 통해 사라지는 것들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커지는 시기였다. 상업 영화와 독립 영화 구분 없이 제작에 착수할 수 없어 생계 전선에 뛰어든 많은 동료들처럼 나 또한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해야 하는 일을 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견뎌낸다는 개념이 아닌,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날들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코로나 이전에 영화를 만들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됐다. 이듬해인 2021년, 영화진흥위원회는 코로나를 극복하기 위한 지원 사업을 실행했고 많은 영화인들이 참여했다. 나 또한 그 사업을 통해 한편의 단편 영화를 만들었는데, 다시 동료들과 현장을 실감하며 멈춰있던 영화라는 선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다. 동료들은 이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면 영화를 찍을 수 있는지 궁리했다. 그리고 작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토대로 영화를 만들어 보자는 아이디어를 낸 친구의 영화를 제작했다. 아마도 코로나 이후 독립영화들이 주로 한 공간 혹은 야외에서 소수의 인물들이 끌어가는 대화 위주의 이야기였던 것은 이처럼 환경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 <미망> 박봉준 배우, 이명하 배우 2019년 촬영을 시작하고 그 뒤로 두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하고 한 편의 장편영화에 조감독으로 참여했다. 시간은 흘렀고, 서울극장은 결국 문을 닫았다. 그간 준비했던 시나리오는 제작지원을 받게 됐다. 모든 분량을 제작할 만큼의 제작비는 아니었지만, 서울극장의 외관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촬영을 시작했다. 코로나 또한 소강상태로 서울시는 실외 마스크 해제를 실시했다. 3년 만에 다시 모인 스태프와 배우들, 그리고 영화의 배경이 될 공간들은 비슷한 듯 달라져 있었다. 달라도 지울 수도 없었거니와, 덧칠하여 지저분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길게 찍고자 시작했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내며 나아간 영화는 4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끝을 보았다. 2023년, 영화 < 미망 >은 전주국제영화제 워크인프로그레스에서 특별상을 수상했고,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첫 공개될 예정이다. 완성된 영화에는 코로나로 인해 당연했던 일상의 순간들이 사라졌던 경험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자연스럽게 반영됐다. 그로 인해 이야기는 뚜렷한 사건이 아닌 작은 일들과 순간의 정서로 이루어져 있다. 관객분들이 영화를 보는 동안 각자의 일상을 떠올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극 중의 대사에 담았다. 극장 문을 열고 나가면 여러분의 소소한 일상이 한 편의 영화로 계속되길 바란다는 대사처럼, 코로나를 보내고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의 삶이 소중하게 계속해서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