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프 온리: 맨 위드 레인
- 감독
- 마리아 리폴
- 제작년도
- 1998
- 출연
- 레나 헤디, 더글라스 헨샐, 페넬로페 크루즈, 마크 스트롱, 구스타보 살메론, 엘리자베스 맥거번
영화 <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는 지난 2017년 개봉해 일본에서 크게 흥행한 작품이다. 어느 촬영 현장에 나타난 좀비가 스태프들을 뜯어먹는 잔혹한 장면들로 시작하지만 결국 이 영화는 한 편의 영화를 완성시키기 위한 사람들의 고단함을 보여주며 끝난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라는 제목에 영화의 슬픔과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배우가 연기를 못하더라도, 스태프들이 불평불만을 쏟아내거나 술에 취해 있더라도, 심지어 좀비가 나타나도 카메라는 멈추면 안 된다. 이 영화의 감독과 배우, 스태프는 지금 코로나 19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 4월 13일, 일본의 산케이 신문은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코로나 19 버전’이 제작된다고 보도했다. 이미 지난 2019년 속편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스핀오프: 할리우드 대작전>이 개봉되기도 했지만, 코로나 19 버전은 그것과도 다른 이야기다. 이번에 제작되는 작품의 제목은 <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원격 대작전! >(이하 <원격 대작전!>)이다. 코로나 19로 외출 금지와 자가격리를 강요받은 일본의 현재가 영화의 배경이다. 자가격리 중인 영화 프로듀서에게 영상 통화가 걸려온다. "이달 중으로 재연 드라마 한 편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다. 하지만 자신뿐만 아니라, 스태프와 배우들도 모두 자가격리 중인 상태. 결국 프로듀서는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원격으로 작품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1편의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는 스태프와 배우들이 단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영상 통화 화면이나 배우가 직접 스마트폰으로 찍은 화면을 편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배우들은 집에 있는 옷으로 의상을 해결할 것이고, 자신의 대사를 하는 장면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대사에 반응하는 장면까지 스마트폰으로 찍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촬영감독은 역시 자신의 집을 이용해 여러 인서트 샷을 찍어줄 것 같다. 영화적인 완성도를 기대할 수 있는 프로젝트는 아니지만, 시도만으로도 흥미롭다. 코로나 19 상황에서 전 세계의 영화산업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여러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개봉을 연기했고, 칸 영화제마저 개최 여부가 불확실하다. 전 세계 영화인들은 먼저 영화팬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다. <겨울왕국>의 제작진과 목소리 배우는 각자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목소리를 더해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 <앳 홈 위드 올라프>를 유튜브로 공개했다. <원더우먼>의 갤 가돗과 나탈리 포트먼을 비롯한 22명의 배우들은 존 레넌의 ‘이매진’을 부르는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 19가 보여준 사실은 영화가 자가격리 중인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지만,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세계에서 영화 산업은 버티고 설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산업 자체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사람들은 자구책을 찾아 나섰다. 미국의 라이언스게이트는 <라라랜드>와 <헝거게임> 등을 유튜브에서 무료로 공개하고, 관련 행사에서 성금을 모금해 영화 산업 근로자를 돕는다고 발표했다. 한국의 영화인들도 당장 수입이 없는 스태프들을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원격 대작전!>의 사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이 작품은 자가격리 중인 시민들이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목적으로만 제작된 게 아니다. 앞선 영화인들의 노력은 크게 두 가지의 바람에 의한 것이었다. 영화에 대한 영화팬들의 관심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 이 업계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업계를 떠나면 안 된다. 그런데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은 영화 현장 또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완전 원격 제작으로 만들어지는 이번 작품이 누군가에게 새로운 일거리를 창출하는 하나의 팁이 됐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일거리가 없는 영화인들에게 생활을 지원하는 방식이 아닌, 새로운 일을 만드는 맥락에서 <원격 대작전!>을 기획한 것이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약 3천만원의 제작비로 만든 영화학교 워크숍 작품이었다. 열악한 조건에서도 영화적인 매력을 구현했던 제작진의 입장에서는 ‘코로나 19’가 위기가 아니라 아이디어가 됐을 것이다.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의 말처럼 <원격 대작전!>이 이후의 영화산업에 팁을 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작품을 기대할 수 있을까? <원격 대작전!>은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뒤덮은 상황에서 찾아낸 자구책이지만, 바이러스가 종식된 이후의 세계에서도 ‘원격’과 영화는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지난 오스카 시상식에서 서로에 대한 존경을 나누었던 봉준호 감독과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각자의 공간에서 촬영한 영상과 대화를 공유하는 작품이 나올 수도 있다. HBO가 제작하는 드라마판 <기생충>의 주인공으로 거론된 마크 러팔로와 송강호가 ZOOM을 이용해 나는 대화만으로도 훌륭한 콘텐츠가 될 것이다. 이전에는 쉽게 협업하지 못했던 전 세계 영화인들이 ‘원격’으로 만나고, 그렇게 나온 작품을 넷플릭스나 디즈니 플러스, HBO MAX같은 플랫폼을 이용해 ‘원격’으로 감상하는 세상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 ‘코로나 19’는 세상의 많은 것을 바꾸고 있다. 불가피하게 시작된 ‘온라인 개학’은 언젠가는 찾아오게 될 ‘원격 교육’의 시험대가 되었고, ‘재택근무’ 또한 노동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되어가고 있다. 영화계에서는 최근 넷플릭스의 시가총액이 디즈니를 앞섰다는 보도가 나왔다. 안 그래도 변화의 시기에 있던 영화의 세상도 ‘코로나 19’로 인해 더 빨리 변하는 중이다. <원격 대작전!>은 그런 변화의 소용돌이에서도 카메라는 멈추지 않을 수 있다는 안심을 주는 사례다. 이 작품은 5월 초까지 완성된 후, 유튜브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지난해부터 한국영상자료원이 주관해 온 ‘사사로운 리스트’라는 기획을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작품의 완성도나 품격, 내외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영화들의 목록. 이 기획은 ‘좋은 영화’, ‘가치 있는 영화’, ‘완성도 높은 영화’의 순위를 매길 때 준용되는 식상한 목록의 기준을 저버려달라는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공인된 평판작이나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해 먼저 알려진 영화들은 가급적 배제하고자 했다. 기획자들의 취지에 부응하는 의미로 순전한 사사로움을 기준삼아 아래 10편의 작품을 골랐다. 가장 먼저 무빙 이미지의 창조적인 화용론을 보여주는 신작들이 눈에 띈다. 로이스 파티뇨의 < 나이트 위드아웃 디스턴스 >, 피터 보 랩먼드의 < 토포필리아 >, 가이 매딘/ 에반 존슨의 < 금지된 방 >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나이트 위드아웃 디스턴스>와 <토포필리아>에서 이미지의 탐험가인 두 감독은 때로는 회화, 때로는 사진을 연상시키는 풍경의 경이로움을 통해 순수 이미지의 조형과 리듬이 주는 감흥을 만끽하도록 만든다. 영화적 풍경의 영기가 발산되는 두 작품은 오늘날 영화가 닿을 수 있는 표현의 지평이 어디까지인가를 가늠할 수 있는 역작이다. 무성영화의 영혼이 전편을 장악하고 있는 가이 매딘의 <금지된 방>은 매딘의 전매특허와 같은, 유령과 환영을 따라 꿈의 미로를 헤매는 것 같은 신비로운 체험을 제공한다. 칠레의 대문호 로베르토 볼라뇨의 역작 ‘2666’을 모체로 한 <산타 테레세 앤드 아더 스토리스>는 신성과 악의 미로를 헤매는 시대의 정황을 ‘산타 테레사’라고 하는, 멕시코의 가상공간을 무대로 구성하고 있다. 다큐멘터리와 픽션, 아방가르의 화법을 유려하게 오가는 이 영화는 올해 본 가장 혁신적이고 용기가 있는 작품이었다. 지난 10월 5일 영면한 벨기에 출신의 아방가르드 감독 샹탈 애커만의 유작인 <노 홈 무비>는 더 이상 거주할 수 없는 ‘집’의 상실을 메타포로 헐벗고 굶주린 이미지들을 만들어놓은 에세이 필름이다. 극영화 중에는 찰리 카우프만과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감독 듀크 존슨이 합작한 < 아노말리사 >가 단연 돋보인다. 찰리 카우프만이 왜 위대한 작가인지를 통절하게 만드는 <아노말리사>는 한 작가의 강박적인 정신세계를 탐문하는 고도의 심리드라마이다. ‘사운드 연극’으로 기획되었다가 최종적으로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된 이 영화는 집착과 강박, 로맨스, 악몽이 교차하면서 무엇이 우리를 진짜 인간으로 만드는가에 대한 속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루마니의 뉴웨이브의 주역인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의 < 트레저 >, 아르노 데스플레샹의 < 내 청춘 시절의 세 가지 추억 >, 미겔 고미쉬의 < 천일야화 >, 아티나 레이첼 창가리의 < 슈발리에 >도 해당 작가의 개성과 스타일이 십분 발휘된 작품들이다. 이들 가운데 < 슈발리에 >를 간판으로 소개하고 싶다. <슈발리에>는 그리스 여성감독이자 제작자로 명성이 높은 아티나 레이첼 창가리가 < 아텐버그 > 이후 6년 만에 발표한 장편영화이다. < 비포 미드나잇 >, < 송곳니 > < 더 랍스터 >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프로듀서이기도 한 창가리의 이 야심작은 배타적인 남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경쟁 본능이 야기하는 우스꽝스러운 결과에 대한 냉정침착한 관찰기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유럽영화계에서 새로운 문명의 발상지라고 할 정도로 괄목상대한 주목을 받고 있는 그리스 영화의 저력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연출자는 여성이지만 영화에는 (전화 목소리로 출연하는 이를 제외하면)단 한 명의 여성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는 2012년 창가리가 만든 중편영화 <캡슐>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다. 등장인물이 모두 여성으로 이루어진 <캡슐>은 동성 집단 안에서 권력과 통제에 관한 영화였는데, <슈발리에>에서 창가리는 남자들의 커뮤니티로 표적을 이동하였다. 에게 해 한가운데에 뜬 럭셔리 요트에 6명의 남성 선원들이 모인다. 다소 권태로운 호화 요트 여행. 남자들은 어느날 저녁을 먹다 ‘슈발리에’라는 게임을 하기로 뜻을 모은다. 게임의 ‘목적은 누가 더 멋지고 훌륭한 남자인가?’ 를 가리는 것. 요컨대 의협(義俠)을 선발하는 이 게임은 한 사람에 대해 나머지 다섯 명이 점수를 매겨 최고점을 얻은 이에게 승자의 영예가 돌아간다. 한 마디로 선하고 의로운 말과 행위를 통해 용기와 정의를 수호하는 사도를 찾는 게임인 셈이다. 게임에 돌입한 선원들은 잠자는 자세에서부터 다이어트 습관, 발기된 성기의 길이 등을 측정하면서 누가 더 멋진(?) 남성인가를 겨룬다. 그러나 반지를 획득하기 위해 벌이는 이들의 황당무계한 게임은 아군이 없는 적대적인 무한경쟁으로 치닫는다. < 슈발리에 >는 시스템의 통제에 대한 우화이자 블랙코미디이다. ‘버디가 없는 버디무비’ 라는 카피를 단 영화는 여섯 명의 이성애자 남자들이 수컷의 공격성을 한껏 부풀리면서 벌이는 경쟁을 희화화한다. 남성들 간의 경쟁심이 점점 체면과 품격, 선의를 상실하는 과정이 점입가경의 상황들을 통해 전달된다. 요트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이는 게임은 얄팍한 이해관계 앞에 신의와 우정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를 입증한다. 남자들만의 공동체를 무대로 한 이야기라는 점, 저들의 어리석음을 구경하는 관찰적인 시선이 긴장과 쓴웃음을 자아낸다. 아티나 레이첼 창가리 영화의 특징은 흡사 동물의 행동을 대면하는 것 같은 경험을 제공하면서 인간 행위를 응시하게 만드는 인류학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그는 럭셔리 요트라는 제한된 공간에 남성-동물을 가두고 그들의 기벽을 관찰하면서 섹슈얼리티와 죽음, 폭력, 사회구조의 속살을 파헤친다. 수컷들의 드잡이 싸움이 벌어지는 비합리성의 세계는 남성들의 집단의식을 풍자하는 비틀어진 코미디로 형상화된다. 창가리는 남성의 세계, 통제와 길들이기, 인간의 아둔함, 집단 안에서의 불가사의한 영향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거리두기의 방식을 동원하여 인상적인 연출을 보여준다. 집단의 광기와 이기라는 이슈를 다룬 것처럼 보이지만 연출자의 감정이나 의도가 거의 섞여 있지 않은 영화는 사회적 관계와 태도를 질기게 붙잡고 있다. < 슈발리에 >는 남성성의 신화와 그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조롱한다. 남성, 부성, 가부장의 어위군들이 불신의 눈초리를 받는 이 시대에 남성들의 세계는 타자성의 세계로 묘사된다. 이성애 집단 안에서 하나의 성(여성)을 제거한다면 그들 내부에서 권력과 욕망은 어떻게 일그러지는가? 이 불구적인 욕망의 일탈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의 산물인 영화는 용렬한 인간의 민낯을 가차없이 발가벗긴다. 한편으로 <슈발리에>는 창가리가 ‘스크루볼 비극’이라고 부르는 장르에 대한 실험이기도 하다. 부분적으로 영화는 스크루볼 재담극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일부는 그리스 비극의 전통과 닿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장르에 대한 실험으로도 보이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배우들이 주고받는 대사의 억양과 톤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말의 억양은 하나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언어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했다. <슈발리에>에서 모든 인물들은 양식화된 대화를 나누고 때론 웅변을, 때론 노래를, 때론 시를 읊는다. 내러티브가 진행될수록 말의 리듬과 운율이 희비극의 양면을 내포한 작품과 기이하게 호응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 슈발리에 >에서 자기애에 들든 과시적인 남자들을 통해 세상을 풀이하려 하는 창가리의 시선은 염세적이다. 풍자코미디의 끝은 대게 허무하지만, 이성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광기에 대해 준열히 꾸짖기보다 속절없이 인간의 괴상한 행동을 목격하도록 만드는 것이 연출의 목적이다. 전투적인 경쟁과 교활함, 자애로운 연대를 가장한 탐욕은 점점 더 불신과 배반을 전염시킨다. 여기에 가담하는 것이 통제의 매커니즘이다. 상호견제와 긴장으로 점철된 게임은 질서유지와 통제의 수단이 된다. 여섯 남자들의 게임을 주관하는 시스템(선장과 그의 조력자들)은 불모의 경쟁을 부추기면서 체제유지의 밸런스를 부산물로 얻으려 한다. 이 지배와 통제의 무한질주를 제어할 만한 시스템은 없으며 관객들은 점차 쩨쩨하고 비열해지는 인간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군데군데 유머아 기지가 넘치는 장면들이 여럿 있고, 존재의 무능을 확인하는 나른함이 사지를 옥죈다.
영화를 보러 쏘다니는 것은 가끔 시대착오적으로 여겨진다. 나는 이 말을 단지 새로운 방법으로 방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영화관에 가는 것을 비웃기 위해서 꺼내 든 것이 아니다. 영화 그 자체가 아니라 영화를 보는 경험이라는 것을 중심에 가져다 놓는 것을 허락한다면 영화들은 서로 구름처럼 뒤섞인다, 고 말하고 싶어진다. 이 영화가 저 영화와 겹치고, 저 이미지가 이 영화 안으로 들어온다. 쇼트들 사이의 칸막이는 어느새 사라지고 그 사이를 어떤 경계도 없이 자유자재로 비행할 때 거기엔 어떤 법칙도 없고 중심도 없다. 그저 감정의 바람이 있을 뿐이며, 이따금 하나로 뭉친 구름들이 만들어낸 비가 내리거나, 혹은 반짝이는 감각의 빛이 섬광처럼 스쳐 갈 것이다. 이 구름과 저 구름을 서로 구별할 수 있을까. 영화들 사이를 오가는 것은 나를 흘러가는 구름처럼 자유롭게 만든다. 그렇다. 영화를 보러 다니는 것은 멈추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이때 나는 이 말을 공간적인 자리에 제한하고 싶지 않다. 그건 나만 그런 것이 아닌 모양이다. 자크 오몽은 약간 웅변조로, 게다가 어떤 예술분야에서 (전문가가 아닐 뿐만 아니라 특수한 문화적 소양도 없는) 대중 관객이 과거와 최근 작품들을 동등하게 찾아보는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라고 반문한 다음 나는 같은 날 저녁에 존 포드와 힛치콕, 오우삼이나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다 함께 볼 수 있으며, 시간 여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서로 다른 스타일 사이를 여행했다고 느낄 것임을 말하는 또 다른 방식, 이라고 설명했다. (<영화와 모더니티>) 영화 관람의 새로운 일상생활을 영원한 동시대성이라는 정의 곁에 놓아둘 때 영화는 아무것도 모순되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당신에게 여기서 임권택 의 영화(들)을 읽는 시간이 바로 지금, 2013년 늦봄에서 초여름에 이르는 계절이라는 것을 일깨우고 싶다. 지금 내 곁을 흘러가는 구름. 나는 막 난니 모레티의 <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를 본 다음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를 썼다. 난니 모레티는 처음에 다소 우스꽝스럽게 시작했지만 교황청을 빠져나온 멜빌을 따라가면서 마법에 가까운 운율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한편으론 바티칸에 갇혀서 교황 발표가 날 때까지 기다리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추기경들이 편을 나눠 배구를 하는 장면들은 이상할 정도로 시적인 감흥이 감돈다. 왜 아무도 이 기적적인 순간을 함께 감탄하지 않는 것일까. 타비아니 형제의 < 시저는 죽어야 한다 >는 생각지 못했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지만 영화를 보면 정확하게 거기서 멈춘다. 켄 로치의 < 엔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 >는 시작하고 15분은 여전히 훌륭하다. 그러나 이야기가 시작되면 여전히 지루하리만큼 계몽적이다. 두 개의 여전한 사이의 불균형한 면적. 그리고 지금 내 눈앞을 지나가고 있는 구름들. 스티브 맥퀸의 < 헝거 >는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 셰임 >은 안전하고 세련되었으며 그만큼 상투적이다. 필요 이상으로 안정적인 균형상태 안의 권태로운 음악들로 이루어진 장식. 런던의 아일랜드인과 뉴욕의 아일랜드인의 차이? 2013년 5월 15일 오후 7시 칸에 자리한 뤼미에르 극장에서 상영된 < 위대한 개츠비 >는 칸 영화제의 첫 번째 3D 개막작이다. 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분한 만찬. 끝. 이를테면 작년 개막작인 우디 앨런의 < 미드나잇 인 파리 >와 비교해보라. 물론 지금 (그다음 영화인) < 로마 위드 러브 >가 상영 중이다. 누군가는 두 편의 우디 앨런의 영화 중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한다. 나는 둘 사이의 차이는 그저 유럽지도 전체를 펼쳐놓은 다음 파리와 로마를 힐끗 쳐다보면서 배치의 공존을 모색하는 지리학적인 거리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낀다. 할 수만 있다면 뉴욕과 베니스와 파리를 연결한 다음(<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 바르셀로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 런던(< 스쿠프 >, < 매치 포인트 >, < 환상의 그대 >) 를 펼쳐놓고 우디 앨런의 유럽 지도를 만들어보고 싶다. 나는 의도적으로 목록을 펼쳐 들지 않고 그저 떠오르는 대로 열거하는 중이다. 아마 여기에 빠진 영화제목이 있을 것이다. 경계선 없는 도시들. 그 사이를 마치 거미가 쳐 놓은 함정처럼 이어지는 선들. 사랑의 선. 질투의 선. 의심의 선. 그때 그 선을 건드리는 것은 우연과 운명이다. 서로 아무 관계도 없는 각자의 존재들 사이의 비평형적 균형. 저 멀리 흘러가는 구름. 나는 그 시간에 < 안개마을 >을 다시 보고 있었다. 여전히 반짝거리는 정윤희. 때로 어떤 배우는 전혀 연기하지 않는데도 그 존재만으로 아름다울 때가 있다. 근처에서 떠도는 구름. 나는 두 편의 영화를 어떻게 해서든 여기 잠시 머물게 하고 싶다. 레오 카락스의 < 홀리 모터스 >는 종종 섬광처럼 빛나며, 때로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복화술사의 테크닉을 이용해서 영화 그 자체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우리에게 내기를 요구한다. 어떤 내기? 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술래잡기. 그때 어디선가 영화의 죽음이 어른거린다. 레오 카락스는 영화를 구하기 위해 밤새 유령을 잡기 위해서 온갖 곳을 돌아다닌다. 수평과 곡선. 상승과 추락. 당신이 영화를 사랑한다면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임무이다. 구름들 사이의 대기현상. 하늘의 구름들이 일시에 대지로 내려올 때 거기서 새로운 질서를 보게 될 것이다. 리차드 링클래이터의 < 비포 미드나잇 >은 잘 알려진 것처럼 < 비포 선라이즈 >, < 비포 선셋 >에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물론 리차드 링클래이터가 에릭 로메처럼 사랑의 도덕적 서스펜스를 전개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점심을 먹으면서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산만하고 상투적으로 찍혔다. 자신이 없으면 식탁에 앉히면 안 된다. 하지만 리차드 링클래이터는 일단 걷기 시작하면 설명하기 힘든 매직의 순간을 만든다. 산책의 영화. 걸어가는 영화. 선물 받은 호텔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제시와 셀린느가 걸어가면서 대화하는 기나긴 매직 아워는 마치 저물어가는 햇빛을 쫓아가는 것처럼, 때로 즉흥적인 순간에 의지하면서, 종종 아슬아슬하게, 그리고 우아하게 연출되었다. 하루의 날씨. 대기의 이동. 제프 니콜스의 < 테이크 쉘터 >는 코엔 형제의 < 시리어스 맨 >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대답처럼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다음 곧 자기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이야기? 그렇다. 이 영화는 이미 이야기의 영화가 끝났다고 생각한 바로 그 자리에서 아직 구름이 지나가지 않은 것처럼 구름의 그림자 아래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때 나는 <나비 품에서 울었다>를 보고 또 보고 있었다. 영화들 사이에서 마치 구름들처럼 이것 때문에 저것이 안 보이는 경우란 없다. 마치 두 개의 구름이 서로 겹칠 때 번개가 일어나는 것처럼 내가 그 글을 쓸 때 그 영화들은 새로운 영감을 안겨주었다. 그럼 다음 < 울지 않으리 >를 보았다. 상황의 설명. 임권택 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처음부터 만들었다. (지금 프린트가 남아있지 않은) 두 번째 영화 < 전쟁과 노인 >(1962년) 이후에도 < 전쟁과 여교사 >(1966년), 그리고 < 증언 >(1973년)을 연출했다. 여기에 무장공비나 간첩과 관련된 영화를 포함시키면 셈이 더 복잡해진다. <증언>과 <울지 않으리>와 1960년대 전쟁영화의 차이점은 국가 행정기관이었던 영화진흥공사의 제작으로 만들어지면서 국방부의 실제적인 군부대 지원을 받았고, 그런 까닭에 이 영화들은 당시 정부의 반공정책에 따른 홍보영화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물론 이런 영화를 만든 것은 임권택만이 아니다. 이만희는 국방부 국군영화 제작소에서 < 고보이강의 다리 >(1970년)을 만든 다음 영화진흥공사 제작으로 < 들국화는 피었는데 >(1974년)를 찍었다. 이 목록은 한참 더 이어질 수 있다. 시나리오는 사전 검열을 거쳐 감독의 손에 도착했으며, 그런 다음 완성된 영화는 다시 한 번 검열을 거쳤고, 이렇게 개봉된 영화들은 반공교육의 일환으로 학생 단체관람을 거친 후에 극장에서 사라졌다. 이 시기의 영화들은 대부분 영화사 안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었으며, 대부분의 진지한 연구들도 영화들을 정책 홍보의 담론 안에서 제한적으로 설명하였다. 나는 의도적으로 어제 본 영화를 맨 앞에 붙여놓았다. 물론 이 영화가 제작된 배경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 과정을 다른 영화들과 함께 간단하게 당신에게 환기시켰다. 그런 다음 즉시 여기서 제작 과정을 치워버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괄호 치기이다. 대신 나는 여기서 질문의 방식을 바꿔볼 생각이다. 우선 간단한 줄거리. 재남은 아직 국민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년이다. 병원원장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밀려오자 서울에 유학 중인 형과 누나가 내려온다. 할아버지는 집을 지키기 위해서 남고, 식구들은 피난을 떠난다. 그러나 피난길에 아버지는 북한군의 총에 맞아 숨지고, 어머니는 폭격에 숨을 거둔다. 폭격에 뿔뿔이 흩어진 형과 누나와 헤어진 재남은 오던 길을 되돌아서 고향으로 간다. 그러나 고향은 이미 북한군 인공치하가 되었고, 할아버지는 반동 지주로 몰려 강제부역을 하는 중이다. 재남은 동네 아이들과 힘을 합쳐서 마을을 점령한 북한군을 괴롭히고, 여기에 북한군에서 탈영한 동네 아저씨들이 돕는다. 그 사이 서울이 수복되고 북한군은 철수를 결정한다. 떠나기 전에 마을 사람들을 몰살하려던 음모를 알게 되고, 북한군과 마을 주민들은 밤새 총격전을 벌인다. 아침이 밝아오자 북한군은 물러가고 군인이 된 형과 간호병이 된 누나가 돌아와 재회한다. 자, 무슨 이야기인지도 알겠고 거기서 어떤 것을 원하는지도 알겠다. 하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효과 전부라고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을까. < 울지 않으리 >를 건드릴 때 정책 담론의 효과를 설명하려는 방법들은 대부분 영화가 자기를 둘러싼 세계의 제도와 정책(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데올로기 효과)에 대해서 이미지들이 어떻게 조합되고 그런 다음 증언하는가를 따라간다. 이때 사실상 그 설명들은 영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다음 이후를 겹쳐놓고 동어 반복하는 것이다. 나는 반대로, 하지만 그 안에서, 거기, 바로 거기, 그 영화 안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무엇이 그 안에서 홀로 말하고 있는가. 틈새들. 하지만 그 균열은 작지만 좁고 깊게 그 안으로 파고 내려가기 시작할 것이다. 임권택 은 기계적으로, 상투적으로, 자동적으로 시나리오의 서사를 따라가다가, 가끔, 아주 가끔, 갑자기 어느 장면에서, 경험의 존재론이라고 부를만한 어떤 순간의 쇼트를 지금 진행되는 영화의 규칙 바깥에서라도 온 것처럼, 지금 보고 있는 영화의 진행에 변형을 가해서라도, 그것을 디테일 안의 표현이라는 방법으로 다시 그려 넣기 시작한다. 줄거리 바깥에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단지 디테일이라는 표면 위에서 활동하는 표현의 쇼트들. 그게 너무 이상해서 영화의 다른 전체와 아무 상관도 없는 증인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이때 이야기는 희미하게 지워지고 마치 그 위에 덧칠을 하는 것처럼 다시 표현되기 시작한다. 지금 영화를 둘러싼 제도의 증언과 그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이야기 속의 증인. 그때 경험의 표현. 좀 더 정확하게 그 시간을 경험한 존재의 증명을 어쩔 수 없이 더하는 표현. 이 쇼트들은 시나리오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이야기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인물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건 전쟁을 경험한 사람의 몸에서 온 체험의 디테일이다. 내 질문은 간단하다. <울지 않으리>에 국가 정책과 반공 효과는 어떻게 배치되었고, 어디에서 작동을 시작하며, 그 안에서 어디로 연결되는지를 물어보는 것은 지배에 대한 전략적인 비평의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헤게모니를 둘러싼 영화 안의 (지배) 질서에 대한 거절과 저항. 이때 나는 문득 돌아본 다음 질문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참, 임권택은 어디에 있습니까. 불확실성 안에서 진행되는 관계. 이야기 안의 경험이라는 문제. 그리고 그들 사이의 표현. 나는 분석하는 대신 묘사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그 안에서 임권택이라는 인칭, 그것을 통해서만 설명되는 장면을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그 이야기를 다루면 그 배경 안에서 피할 수 없게 되는 시간을 바라보아야 하는 순간의 시선. 그때 그 시선으로 이야기의 틈새 사이를 지나가야 할 때, 다소 고개 숙인 시선 아래서 차라리 더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쇼트와 마주칠 때, 바로 그 시간의 쇼트들에서 나는 이 영화에서 부정할 수 없는 임권택의 흔적을 보게 된다. 말 없는 보충. 남겨진 흔적. 무엇이 거기서 사라졌을까. 그런 다음 무엇이 남겨진 것일까. 산만하게 흩어진 자국들. 그 사이를 연결하는 선. 나는 그 선을 따라 그려나가면 거기서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그림? 나는 매번 새로운 방법을 생각할 것이다. 내게 다소 유머를 허락한다면 지금은 마티스를 떠올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1904년 앙리 마티스가 그의 그림 <사치, 고요, 쾌락>을 그렸을 때 한 말. “나는 지금 내 감각을 조정하는 중이다” Henri Matisse, < Luxe, calme et volupte > < 울지 않으리 >를 다시 보면서 나는 두 장면에서 멈추었다. 비슷한 장면. 이 말의 방점, 비슷한, 이라는 반복의 바깥, 혹은 차이의 디테일. 임권택 이 의도적으로 둘로 나눈 것은 아니지만 같은 씬이 두 번 반복된다. 첫 번째 씬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두 번째 쇼트부터 시작되는 첫 번째 대목이고, 그런 다음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거의) 절반에 이르렀을 때 그 씬의 쇼트들이 다시 반복된다. 이때 이 둘은 서로 동등하지도 않고 짝이 맞지도 않는다. 그 둘이 반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오로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의 이미 본 장면들에 대한 경험의 기억에만 의존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이 비대칭 안의 대비적인 구조는 <울지 않으리>에서 전쟁에 의한 순환의 중단이라는 재난 속으로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다. 삶의 탈선. 이때 차이는 역사라는 얼룩에 의한 어두운 바탕을 배경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무엇이 차이를 운반하고 있는가. 그때 무엇이 반복되고 있는가. 그 사이를 연결하면서 머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두 개의 씬 사이에서 수없이 참혹한 전쟁 장면들을 이미 보았다. 임권택은 그런 다음 전쟁의 효과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다. 전쟁의 효과? 그렇다. 이 무시무시한 말. 영화는 전쟁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당신은 맨 먼저 전쟁의 지각을 떠올릴 것이다. 임권택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경험에 대해서 느껴보고 있는 중이다. 무엇이 와해되고 어떻게 폐기되고 그런 다음 지워져버렸는가. 영화가 느껴보는 비극. 나는 재남이라고 쓰지 않았다. 첫 번째 질문. 이때 쇼트는 왜 어제를 반복하지 못하는가. 대답. (역사 안의) 전쟁은 지금 영화를 부수고 있는 중이다. 두 번째 질문. 이때 쇼트는 어떻게 반복하는 일을 멈추는가. 우리는 반대로 질문해야 한다. 무엇이 반복을 봉쇄하는가. S#1 S#2 S#3 S#4 S#5 S#6 S#7 S#8 S#9 S#10 S#11 S#12 S#13 S#14 첫 장면. 초여름, 조용하고 화창한 대낮. 느리게 수평으로 이동하는 화면(horizontal_pan)은 마치 병풍처럼 보일 정도로 과도하게 아름답다. 이 말의 방점. 과도하게. 이 영화 전체의 얼룩. 금방이라도 지나쳐버릴 것만 같은 평온함. 이런 감흥을 이 영화에서 두 번 다시 맛보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막 1950년 6월 25일이 지난 다음 월요일일 것이다. 혹은 아무리 늦어도 화요일일 것이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고, 북한군은 쳐내려오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금방 그들은 물러갈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오늘도 어제 같은 하루를 시작한다. 아버지는 병원에 출근하고, 막내 재남은 학교에 가야 한다. 사람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런 다음 두 번째 쇼트. 토끼장 안에 토끼들( S# 1) 그 토끼들에게 먹이를 주는 재남, “튼실한 놈으로 열 마리만 낳으라구, 알았지” 라고 말하면서 일어서는데(hand_held_tilt_up) 어머니가 멀리서(LS) 학교 가라고 이른다.( S# 2) 재남 집의 행랑채에서 사는 성식이가 어머니에게 인사하고(pan_right) 문 저편에 보이는 재남에게(LS) “재남아, 나 먼저 학교 갈께”라고 하자 재남이 “알았어”라고 대답한다.( S# 3) 마루가 보이는 전경, 아버지와 재남은 각자 집을 나설 채비를 한다.( S# 4) 아버지 정원을 가로 질러( S# 5) 옆 정원을 돌보는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재남 따라와서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서려는데 저 멀리서(LS) 어머니가 따라 나온다( S# 6) 집 대문 앞에서 자전거를 탄 아버지와 재남에게 쫓아온 어머니가 도시락을 건네준다. ( S# 7)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버지와 재남의 뒷모습.( S# 8) 어머니, 그걸 바라보다가 (BS) 손을 흔든다.( S# 9)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버지와 재남, 읍내 큰 길에 ‘영광 오토바이’가 보이고 다리를 저는 아저씨가 지나가는 아버지에게 배앓이 약 처방을 해준 것에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다. ( S# 10)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버지와 재남, 은화상회, 中央精肉店, 德元商會가 (pan_right) 차례로 보이고 ( S# 11) 慈愛病院 입구에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세우자 재남은 학교로 간다.( S# 12) 멀리서 대포소리가 들리자 아버지 불안한 표정으로(BS) 돌아본다. ( S# 13) 학교 앞에서 친구들을 만난 재남은 함께 등교하면서 정문까지 걸어간다. ( S# 14) 여기서 평화는 끝난다. 나는 다소 장황하게 두 번째 장면까지의 광경을 설명할 것이다. 당신은 줄거리를 따라오지 말고 이것이 광경의 묘사라는 걸 떠올려야 한다. 사방에서 감도는 피비린내. 그런 다음 우리는 이 영화가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찍은 영화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디테일이라는 묘사의 미시적 재현들. < 울지 않으리 >에는 자꾸만 이야기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광경의 디테일 속에 들어가 멈칫거리면서 그 안에 펼쳐지고 있는 세상이 진정 그러하다, 는 순간과 만나는 사건들이 나타난다. 경험의 밀도. 기억의 부피. 영화에서 디테일이라는 난처한 개념. 어떻게 이미지의 디테일들은 서사의 흐름을 중단시켜가면서까지 대상의 실감을 자아내는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아무리 동화 같은 설정이 벌어져도 거기에 달라붙는 이상할 정도로 사실적인 재현들의 무게. 임권택 과 어린 재민이. 둘 사이에서 공유하는 시간. 학교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담임선생님은 불길한 표정으로 아침 조회를 시작한다. 그리고 미처 선생님의 말이 끝기도 전에 가까이서 들려온 포탄소리가 교실 맨 뒤에 자리 잡은 아이들의 미화게시판에 걸려있는 그림을 뒤흔들어 한쪽 끝이 떨어져 나가게 만든다. 전쟁의 신호. 그런 다음 이야기는 무자비하게 진행된다. 할아버지는 집에 남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울에서 막 내려온 형과 누나와 함께 재남을 데리고 피난을 떠난다. 마치 끊어지지 않는 줄처럼 이어진 수많은 난민들. 길에서 죽은 어머니와 울고 있는 가엾은 어린아이. 기력을 잃은 채 길에 주저앉은 할머니와 어린 손녀. 거기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날 밤 아버지는 길을 막아선 공산군으로부터 중상을 입은 중대장을 치료해달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그 자리에서 총살당한다. 갑작스러운 폭격. 마치 세상이 화가 난 듯한 불바다. 어머니는 중상을 입고도 딸을 구하기 위해 후퇴하는 국군 트럭에 그녀만을 실어 보내고 그만 숨을 거둔다. 형은 전쟁에 휩쓸려 피난민을 따라 가족과 헤어진다. 순식간에 모두가 헤어져 버린 가족. 이제 혼자 남은 재남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을 거두어 착한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묘를 만들고 우연히 죽은 국군의 시신에서 수류탄이 잔뜩 담긴 가방을 손에 쥔 다음 수차례의 고비를 넘긴 끝에 고향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거기까지 걸어갔으니 아마도 재남은 걸어서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떠날 때는 온 가족이었지만 돌아올 때는 재남 혼자뿐이다. 게다가 재남은 이 영화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을 모두 본 유일한 증인이다. 재남은 이미 고향을 떠날 때의 그 소년이 아니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을 보았고,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았고,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았고, 피 흘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고, 손에 피를 묻혀보았고, 그런 다음 수류탄을 던져서 사람을 죽였다. S#1 S#2 S#3 S#4 S#5 S#6 S#7 S#8 S#9 S#10 S#11 S#12 S#13 S#14 S#15 S#16 S#17 두 번째 광경은 재남이 다시 돌아오게 된 자기 동네에 들어서는 장면이다. 이때 이 둘 사이에 개입한 시간의 부피는 한국 근대사를 둘로 쪼개는 단절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첫 장면. 살던 동네로 돌아온 재남, 힘없이 걸어간다. (LS)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휴지가 흩날린다.( S# 1) 걸어오는 재남, (frontal_tracking_back) 바람이 분다.( S# 2) 재남이 쳐다보는(point_of_view) 을씨년스럽게 닫힌 가게들 ( S# 3) 걸어가는 재남, 신문지가 재남의 얼굴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 S# 4) 재남의 시선으로(point_of_view) 德元商會, 中央精肉店이 차례로 보인다.( S# 5) 재남, 달려가기 시작한다.( S# 6) 재남, 읍내 대로변을 따라 달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LS) ( S# 7) 재남, 집 앞 골목을 달려온다.( S# 8) 재남, 집 대문 앞으로 뛰어 들어간다.( S# 9) 재남, 집 안 마당으로 뛰어 들어간다.( S# 10) 그리고 집을 두리번거리면서( S# 11_12, dissolve) 누가 없는지 둘러본다. 재남을 반기는 건(point_of_view) 토끼장이다.( S# 13) 바라보는 재남, 표정이(CU) 밝아진다.( S# 14) 재남, 토끼장 앞에 서서 (over_the_rabbit’s_shoulder) 새로 낳은 토끼 새끼들을 세어본다.( S# 15) 한 마리씩 세어보는 재남(voice_over/point_of_view) 앞의 토끼들.( S# 16) 재남, 토끼 한 마리를 들어 올리는데 뒤편에서 성식이 재남을 부른다. ( S# 17 ) 먼저 환기할만한 사실. 재남이 고향에 돌아오기 전에 사실상 영화는 이미 돌아온 다음이다. 이 첫 장면 앞의 씬은 고향에 남은 재남의 할아버지가 ‘노력동원’에 끌려가 무거운 통나무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장면이다. 이때 이 작업은 (첫 장면에서 본 이 마을의 녹음 짙은 풍경과 동떨어진 채) 마치 다른 지역에 끌려가기라도 한 것처럼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벌판에서 다른 ‘반동분자’들과 함께 부역을 하는 중이다. 발은 피범벅이고, 할아버지가 등에 엎쳐 들고 나르는 건 이미 그 나이에 들 수 없는 무게의 통나무이다. 그림자 한 점 없어 쉴 곳조차 없는 벌판. 낯선 장소. 마치 병풍과도 같았던 그 숲과 같았던 나무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 더 이상 여기는 낙원이 아니다. 혹은 일상생활의 시간선은 이미 끊어졌고 지금은 역사 안의 함정에 떨어져 그 안에서 견뎌야 한다. 새로운 조건. 임권택은 그렇게 두 개의 씬을 연결하였다. 재남에게 어떤 희망도, 어떤 기대도, 어떤 구원도 서둘러 뺏어버리는 것. 그는 이곳에서 저곳을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지금 이곳은 다른 이곳이다. 정확하게 이 두 번째 시퀀스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B_S# 1 A_S# 10 나는 두 개의 시퀀스를 비교하기 위해서 첫 번째 시퀀스를 A라고 부르고, 재남이가 돌아온 시퀀스를 B라고 구별할 것이다. 재남이가 동네에 들어서는 첫 장면은( B_S# 1)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장소를 이동한 다음 원래의 장소로 돌아올 때 마을 전체의 풍경을 보여주는 편이(establishing_master_shot) 쇼트의 진행에서 경제적이며 재빨리 다음 씬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을 통해서 공간적인 지각을 할 수 있게 지형적이며 지표적인 지도를 소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권택 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가게 안에 들어가서 동네로 돌아오는 재남을 보여주고 있다. 텅 빈 동네. 아마도 동네 사람들은 모두 ‘노력동원’에 나가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 쇼트의 바로 전 씬. 그러므로 가게에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왜 가게 안에 들어가서 재남을 바라보는 것일까. 그렇게 되면 이미지의 면적은 매우 제한적인 풍경만을 보여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때 이상하리만큼 스산한 바람이 불어 휴지들이 흩날린다. 우리에게 읽기를 요구하는 것만 같은 우연한 대기현상의 기호. 이 바람은 물론 만든 것이다. 휘날리는 바람은 동네에 재남이 들어서는 것을 방해라도 하듯이, 혹은 반기지 않는다는 듯이, 이제부터 벌어질 나쁜 사건들에 대해서 불길한 예언이라도 하듯이, 그렇게 재남을 마주 보고 맞은편에서 불어오고 있다. 이 쇼트는 재남이 아버지와 함께 학교 가던 첫 번째 씬에서 집 앞 골목을 막 벗어난 다음 마을 읍내에 들어서던 첫 번째 쇼트와 같은 방법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 A_S# 10) 그러나 여기서 두 개의 쇼트 사이의 관계가 개념적으로는 동일하지만 형식적으로 마치 오른손과 왼손처럼 다르다는 것을 설명할 것이다. 첫 번째, 배치라는 문제. 두 개의 쇼트 모두 마을 읍내로 들어가는 것을 안내하는 첫 번째 쇼트이다. 이것을 만일 풍경으로 찍었다면 우리들은 순간적으로 놓쳤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두 쇼트의 풍경은 정반대로 찍혔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하나는 평화롭고 행복한 ‘전쟁 이전’ 시간의 풍경이고, 다른 하나는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전쟁 이후’의 풍경이다. 나는 반복해서 이전과 이후라는 말을 꺼내 들 것이다. 임권택은 둘 사이에서 여전히 거기 머물면서 변하지 않는 읍내 가게 공간을 프레임으로 하여 재남이가 읍내로 들어가는 장면의 풍경 입구(introducing_master_shot)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쇼트는 가게 안에서 재남을 찍으면서 동일한 프레임을 보여주지만 동일한 가게에서 찍은 것이 아니다. 동일한 구도. 두 개의 쇼트 모두 왼쪽 길에 자리 잡은 가게 안에서 찍었다. 다른 가게. 그 둘은 같은 가게에서 찍으면 안 된다. 첫 번째 장면에서 우리는 저 멀리 ‘영광 오토바이’가 보이지만 재남이 돌아오는 장면에서는 그 가게가 보이는 그 자리가 아니다. 안 되는 이유. 재남은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첫 번째 장면은 집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이 둘을 동일한 가게에서 찍으면 재남이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의 연속적인 쇼트를 집에서 나오는 장면의 역순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이 문제를 기능상의 문제로 단순하게 환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재남이 같은 길을 되돌아옴과 그 길의 다름은 동일한 과정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제 더이상 동일한 시간의 길이 아닌 것이다. 임권택은 두 개의 쇼트 사이의 거리와 차이 사이에서 그 동일성을 때려 부순 전쟁이라는 효과를 보여주는 중이다. 두 번째, 분배라는 문제. 이야기 안에서 기계적인 운동은 인물의 동선을 따라가면서 진행될 때 주거나 배분받은 인물이 누구인가 만큼이나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해진다. 재남이가 아버지와 학교에 갈 때 그들의 자전거 선을 가로막고 나선 사람은 다리를 저는 동네 아저씨이다. 이 영화에서 그가 다리를 저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기억할 수밖에 없다. 아저씨는 아버지에게 처방해주신 약 덕분에 배앓이가 모두 나았다고 길게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까다로운 문제. 재남이와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이 장소를 지나가기 때문에 순식간에 지나쳐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저씨의 장광설은 이 쇼트를 오랫동안 붙잡아 놓는다. 게다가 이 아저씨는 다리를 절기 때문에 더 속도가 느려진다. 나는 이 동선을 반대로 설명하고 싶다. 이 쇼트를 기억하지 못하면 재남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마을 읍내의 첫 쇼트를 여기서 시작하기 난처해진다. 두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기 때문에 쇼트의 프레임을 순식간에 가로질러 가버릴 것이다. 만일 여기서 쇼트를 나누기 시작하면 동선이 끊어져 버릴 것이다. 하나의 동선. 하나의 운동. 이 곡선을 나누면 안 된다. 다리 저는 아저씨는 여기서 가게 안의 프레임 쇼트를 멈춰 세우는 고정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때 자전거가 프레임을 빠져나간 다음 그 동선은 카메라의 기계적인 운동으로 이어진다. 임권택 은 쇼트를 나누는 대신 여기서 거의 곡예에 가까운 운동으로 줌과 팬을 이용해서 다리 저는 아저씨에게 머문다. 그러나 전쟁 ‘이후’ 다리 저는 아저씨는 ‘지주’인 할아버지를 고발하고 당원이 된다. (그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말을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재남이의 씬에 있었던 아저씨는 재남이 마을 읍내로 돌아올 때 할아버지를 감시하는 자리에서 강제부역이 진행되는 전 씬에 자리하고 있다. 만일 이 아저씨가 당원이 되지 않았다면 있어야 할 자리는 전 씬의 강제부역이 진행되는 황량한 벌판이 아니라 마을 읍내 큰길가에서였을 것이다. 다리가 불편한 그가 강제부역 공사장에 있어야 할 자리가 달리 어디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일 읍내 길가에 서 있다면 반대로 재남의 동선을 다시 가로막고 나섰을 것이다. 하나의 선. 멈추지 않는 선. 끊어지지 않는 선. 우리는 영화에서 동선이라는 문제가 동시에 각자의 자기 자리의 자기 원인의 운동이자 실존의 곡률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B_S# 3 B_S# 4 B_S# 5 B_S# 6 A_S# 11 두 번째 쇼트. 재남은 이 낯선 풍경 앞에서 마을 읍내로 들어선다. 물론 집으로 가는 길이다. 영화는 재남을 바라보면서 뒤로(tracking_back) 물러난다. 재남의 표정. 그는 다른 풍경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이때 재남을 가로 막아나서는 것은 바람이다. 그의 얼굴을 때리고 지나가는 바람결. 나는 첫 장면에서 이상하리만큼 바람 한 점 없었던 여름날 화창한 기후를 기억한다. 여기서 이 바람은 이상할 정도로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 바람은 비를 불러오기 위한 신호가 아니다. 바람결의 매치 컷. 재남을 맞이하는 것만 같은 바람. 단지 그것이 만들어진 바람이라서가 아니라 왠지 그 장소에 불어오는 바람이 그 쇼트 바깥에서 불어오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바깥의 어디? 이제까지 진행된 전쟁 장면들의 쇼트들 사이의 잔인함과 무심한 순간들의 이미지가 서로 부딪치면서 만들어낸 충돌의 몽타주 효과. 그것이 아니라면 달리 어디서 불어 올 수 있겠는가. 여기에 더해 A씬에서 단 한 번도 자전거의 속도로 카메라가 이동한 적이 없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싶다. 더도 덜도 아닌 풍경(속의 재남)을 바라보기. 그렇다면 여기서는 왜 재남의 발걸음이라는 속도가 필요해진 것일까. 당신을 환기시키고 싶은 사실. 말 그대로 불가능한 이야기. 이제부터 우리는 한국전쟁의 이상한 나라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재남이 만들어내는 주관적인 이야기의 세계. 만일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재남의 ‘전쟁’은 우스꽝스러울 뿐만 아니라 너무나 어처구니없어서 더이상 이 모험의 선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이야기의 위기. 새로운 속도. 이때 이 바람을 재남이 고향의 낯선 공기 안에서 느껴보는 감정의 터치라고 말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더이상 마을 읍내의 가게들은 정겨워 보이지 않고( B_S# 3) 지나쳐가는 바람결에 날리는 신문지가 재남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B_S# 4) 마치 그에게 마을 읍내의 풍경을 돌아보기를 요구라도 하는 듯한 일깨움.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면서 보았던 가게의 간판들이 (역순으로) 차례로 보인다.( B_S# 5) 德元商會, 그리고 中央精肉店. 이때 이 쇼트를 전쟁 ‘이전’의 쇼트 맞은편에 세워놓을 필요가 있다. 전쟁 ‘이전’의 쇼트( A_S# 11)에서 재남은 아버지의 자전거에 실려 이 가게들 앞을 기분 좋게 달려간다. 조금 더 앞부터 시작된 자전거의 운동은 은화상회를 거친 다음, 德元商會, 그리고 中央精肉店을 지나서 간판이 없는 가게 앞을 지나간 다음에도 마치 그 기분을 음미하기라도 하듯 자전거가 빠져나간 다음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도 잠시 그 자리에 머문다. 그 순간이 매우 짧은 데도 불구하고 임권택 은 인물이 빠져나갈 때 거기 공백을 남겨놓지 않기 때문에 이 쇼트의 여분의 지속이 이상할 정도로 길게 느껴진다. 그러나 전쟁 ‘이후’의 쇼트는 하나로 찍은 쇼트를 찢어놓았다.( B_S# 4_5_6) 이 쇼트의 분리는 반대로 마을 읍내의 풍경과 아버지와 재남을 연결하는 자전거의 동선이 단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하게 유기적인 관계를 구성하지 않으면 하나의 쇼트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만 같다. A_S# 7 A_S# 8 A_S# 9 A_S# 11 B_S# 7 B_S# 8 두 개의 씬, 전쟁 ‘이전’과 ‘이후’에서 한 장소를 반복해서 오가면서 임권택 은 같은 쇼트와 다른 쇼트를 마치 붙였다 떼어놓기 혹은 하나를 다른 하나 위에 겹쳐놓는 것처럼 보인다. 재남이 집을 향해서 달려갈 때 마을 읍내를 수평으로 달려가는 장면( B_S# 7)은 아버지와 자전거를 타고 같은 길을 지나가던 장면( A_S# 11)을 같은 자리에서 단지 자전거와 재남의 동선을 반대로 하여 다시 한 번 찍은 것이다. 집으로 가는 길의 진행에는 단 하나의 어떤 다른 장소의 쇼트도 개입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되풀이. 그 둘은 형태적으로는 동일한 것이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마치 이 길은 집으로 가는 다른 길을 알지 못한다는 듯이 그렇게 하나의 선을 따라간다. 그래서 읍내의 이 길을 벗어나자 다음 장소는 바로 집 앞의 골목으로 이어진다. 골목과 집 앞 대문을 하나의 이미지로 찍은 쇼트는 없지만 이 길은 분명히 집 앞 대문에서 이어져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 ‘이전’의 씬에서( A_S# 7_8_9) 집 앞 대문까지 따라 나온 어머니가 재남에게 도시락을 건네주고( #7) 골목 앞을 자전거를 타고 빠져나가는 아버지와 재남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8) 손을 흔들 때 ( #9) 그 세 개의 쇼트 사이에서 문 앞에 서 있는 어머니가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손을 흔들기 위해서는 시선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 개의 쇼트로 진행되는 이 씬을 처음 보았을 때 운동의 연속성을 지연시킬지라도 골목을 빠져나가는 아버지와 재남을 마을 읍내로 보내기 위해서 어머니의 손짓이 둘 사이를 면과 면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면서(invisible_cut)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집합의 다리(transitional_shot)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문제를 기능적으로만 바라보면서 ‘엄마의 클로즈업’이라는 정감이 가져다주는 씬 전체 안에 놓인 관계의 도약을 놓쳤다. 이 자리가 분명해지는 순간은 재남이 전쟁 ‘이후’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사라진 쇼트 안에 있다. 구멍 뚫린 씬. 그 쇼트는 거기 있지 않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거리를 두고 자기의 존재를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서술의 목소리. 나는 그 바깥의 체험을 사라진 쇼트 안에서 느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재남이 집에 가기 위해서 집 앞 골목으로 뛰어오는 장면은 ( B_S# 8) 재남이 아버지와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빠져나가던 그 장면 ( A_S# 8)과 같은 프레임이다. 다만 둘의 차이는 온다, 와 간다, 는 반대 운동방향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무슨 수를 써도,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어머니의 손짓 장면을 반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 가지 가능성은 가까스로 남아있다. 그건 재남이 환상을 동원해서 어머니의 손짓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동원하면 재남은 어쩔 수 없이 환상이 요구하는 명령을 따라야 할 것이다. 결과는 지금보다 더 가련해진다. 재남은 전쟁 ‘이전’과 ‘이후’를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재남은 이제 자기만의 전쟁을 시작할 명분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임권택은 그 가능성을 처음부터 차단하였다. 재남은 어머니를 자기 손으로 아버지 곁에 묻고 지금 여기에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는 더이상 재남이 (환상 안에서) 진행해야 할 행위의 줄거리는 남아있지 않다. 매장이라는 문제. 나는 따분하게 여기서 억압의 귀환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A_S# 7 B_S# 9 B_S# 17 이때 내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사라진 쇼트가 아니다. 비슷한 것과 같은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이 두 개의 씬, 그러니까 전쟁 ‘이전’과 ‘이후’의 씬은 사라진 쇼트와 비슷한 쇼트 사이, 이 둘 사이에서 서로 다른 짝을 찾아가고 있다. 이 둘 사이에서 공명을 느껴보기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둘 사이의 진동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놓여있는 전쟁이 없다면 반대로 그 둘은 아무런 진동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이 둘 사이의 플래시백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임권택 은 여기서 어떤 사건, 어떤 줄거리, 어떤 설명을 하는 대신 그냥 간단하게 성립이라는 질문을 던져본 다음 동일한 쇼트의 재현이라는 요구의 불가능을 마주하게 만든다. 재남이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면서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집을 떠나는 쇼트( A_S# 7)는 재남이 집에 도착하는 장면( B_S# 9) 과 동일한 장소지만 동일한 프레임이 아니다. 왜 두 개의 쇼트는 동일한 쇼트 대신 비슷한 쇼트라는 방법으로 짝을 이루는 것일까. 이 세 개의 쇼트와 두 개의 쇼트는 그 둘을 비교할 때 동선의 방향이라는 질문 앞에서 갑자기 부서진다. 우리는 영화가 물리적인 예술이며, 장소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 안에서 뇌 위에 펼쳐지는 상상적인 지도를 만든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반복된 설명(을 통한 문제제기). 재남과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집을 떠나는 골목과 재남이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은 같은 골목이며 같은 방향에서 (거의 같은 자리에서) 찍었다. 그런 다음 어머니의 손짓과 눈길로 이 골목과 집 대문의 선에 대해서 이미 설명했다. 전쟁 ‘이전’의 쇼트만으로 이 선을 따라가면 이 골목은 집 대문을 정면으로 해서 오른쪽으로 이어진 길이다. 그러나 재남은 이 골목을 따라 어떤 우회도 없이 일직선으로 수직으로 집 대문을 향해 뛰어간다. 동선으로만 설명하면 이 두 개의 골목은 서로 다른 골목이다. 첫 번째, 오로지 기능적인 설명. < 울지 않으리 >는 시네마스코프로 찍었고, 자전거에 재남을 태운 다음 아버지가 끄는 자전거로 이 프레임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수평의 구도가 필요해졌다. 이렇게 설명하면 재남이가 돌아오는 쇼트는 완전하게 잘못 찍힌 동선이다. 자동적인 설명. 그렇게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두 개의 쇼트는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재남의 동선을 연결하기 위하여 곡선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에 (혹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둘 사이에 직선을 그은 다음 180도를 기준으로 하여 연결시킨(match_cut)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이걸 경로적 공간으로 재 정의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전쟁 ‘이전’과 ‘이후’의 두 개의 시퀀스가 진행되는 과정이 단순히 역순을 밟아나가는 대신 사라진 쇼트와 비슷한 쇼트로 이루어져있다고 말했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왜 두 개의 씬은 함께 가능하지 않을까. 하나의 세계에서 가능했던 쇼트가 다른 세계에서는 불가능해질 때 우리는 그 둘 사이에 놓인 칸막이로서의 시간을 생각해야 한다. 이 장면들은 지금 공간적인 특징을 따라오는 대신 재남이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세상의 풍경이다. 그렇지 않다면 재남이가 이 동네로 들어올 때 부는 바람은 달리 설명될 수가 없다. 마치 재남의 마음으로부터 불어온 듯한 바람. 게다가 단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은 마을 읍내. 어른들은 부역에 모두 끌려 나갔다고 반문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강제부역 현장에서 단 한 명의 여자도 보지 못했다. 재남의 할머니가 없기 때문에 여자들의 부역장을 찍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재남의 친구들은 모두 어디에 갔는가? 그 아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았다고 주장하려면, 혹은 그 시간에 모두 학교에 있었다고 가정하려면, 그와 동시에 재남이 집에 들어선 다음 토끼장 앞에 섰을 때 행랑채에 살던 성식이는 왜 그 시간에 집에 있었는지를( B_S# 17)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둘 중 어느 쪽이 재남의 주관적인 풍경이라고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임권택은 양쪽 모두 부분적으로 풍경 안에 주관적인 디테일의 삽입이라는 방식으로 외상의 얼룩을 더해놓았다. 이를테면 전쟁 ‘이전’의 과잉할 정도로 평화로운 낙원에 가까운 풍경. 반대로 전쟁 ‘이후’의 인공적으로 삭제시킨 낙원의 디테일들. 그 안에서 종종 비정상적인 운동이 그 내부의 배치 사이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B_S# 10 B_S# 11 B_S# 12 B_S# 13 B_S# 14 B_S# 15 집을 나서는 장면과 돌아온 장면의 차이. 재남이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면서 아버지와 자전거를 타고 집을 떠나는 장면이 집에 돌아오는 장면에서 반복될 수 없는 것은 두 쇼트 사이의 크기가 불러일으키는 같은 장소의 다른 조건이다. 그저 힐끗 보는 것만으로 느껴보는 두 쇼트 사이의 차이는 마치 전쟁 ‘이전’의 쇼트를 ‘이후’의 쇼트는 확대시켜 놓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두 쇼트는 카메라의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확대하여 촬영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두 가지 모두를 건드려볼 필요가 있다. 전쟁 ‘이전’의 쇼트는 가벼운 이동 사이에서 집 대문을 열어 놓고 어머니를 왼쪽에 세운 다음 아버지와 재남의 자전거를 오른쪽에 세웠다. 물론 세웠다는 표현은 정확한 묘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지금 막 병원(과 학교)로 떠날 채비를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때 이 세 사람을 뒤로하고 집 대문은 활짝 열려있다. 이제 막 시작하는 하루. 누구라도 환대할 준비가 되어있는 문. 물론 이 장면을 보는 사람들의 관심은 누구라도 이 세 사람의 가족에게 모여 있기 때문에 그 문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전쟁 ‘이후’의 장면은 여기서 재남의 집 대문과 지붕이 담길 만큼 뒤로 물러서서(long_shot) 찍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집 대문을 중심으로 한 전체의 모습. 이건 지금 이 집의 흉한 몰골을 보라는 이미지이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고 있을 것만 같은 집. 이때 초여름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이 집의 행랑채 창문은 닫혀있고, 오른쪽에 자리한 쪽문도 단단히 닫혀 있다. 그런데 왜 대문은 열려있는 것일까. 그 말은 이 집을 돌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재민이가 피난을 떠날 때 그대로의 집.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는 집. 연신 땀을 닦고 있는 재민의 제스처. 그렇게 힘들게 재민이 먼 길을 돌아 돌아왔는데도 누구도 반기는 사람이 없는 집. 대문이 반쯤 열려있지만 마치 집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로 막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문 안의 벽은 우리가 전쟁 ‘이전’의 쇼트에서 보지 못한 것이다. 이 을씨년스러운 풍경. 마치 모두가 어디로 가버린 것만 같은 집. 집에 들어선 재남은 텅 비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 B_S# 10_11_12) 그런 다음 고개를 돌려 토끼장을 바라본다. ( B_S# 13_14_15) 이 쇼트는 물론 영화의 맨 첫 장면으로 되돌아온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영화는 여기서 다시 시작한다. 다시 시작한다. 이중의 용례. 나는 위험한 자리에 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모두들 들어서기를 두려워한 시작. 임권택 의 영화를 다룰 때 < 증언 >에서 시작하는 일련의 국책영화에 대해서 할 수만 있으면 그 자리를 피한다. 종종 임권택의 60년대 영화들, 이를테면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로 이어지는 다찌마와리들, 그리고 < 황야의 독수리 >와 함께 하는 만주 웨스턴들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하던 관대한 대중영화의 친구들마저 1970년대 정책영화들 앞에서는 침묵을 지킨다. 심지어 임권택 자신도 이 영화들에 대한 대답을 미루거나 혹은 종종 피한다. 하지만 나는 그걸 마주 볼 생각이다, 그리고 마주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생각이다. 모델? 그렇다. 나는 지금 이브 알랭-브아를 떠올리고 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프리모 레비의 증언을 읽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에서 살아남는 것, 그런 다음 연좌제의 그늘 아래서 1970년대 반공국가의 독재를 통과해온 삶. 이 둘이 서로 비스듬하게 겹칠 때, 결국 이 모든 것은 다시 삶의 문제이다. 나는 이 질문을 외상적 증후의 과도한 도식으로 만드는 것에 맹렬하게 저항할 것이다. 희생이라는 방법으로 살아가기. 그 안의 임권택. 영화를 저들의 것에서 다시 나의 것으로 되돌리는 순간, 바로 예외적 순간만이 영화를 다시 한 번 가능하게 열어줄 것이다. 영화 안에서 예외적 지위에 놓여있는 쇼트들. 굴복하지 않는 쇼트. 나는 지금 1970년대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계속) 1974년 115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제작 영화진흥공사 각본 신봉승 윤삼육 나한봉 촬영 박승배 조명 박태수 편집 김창순 음악 한상기 이승현 재남 황해 할아버지 김진규 아버지 문정숙 어머니 박지훈 재석 김영숙 지은 이일웅 칠용 추석양 다리 저는 동네 아저씨 독고성 공산당 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