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풍(暖風)
- 감독
- 최훈
- 제작년도
- 1968
- 출연
- 오영일, 윤정희, 태현실, 조미령, 유계선, 김신재, 방인자, 한은진, 박기택, 박기범, 정민
누군가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사진첩 속에서 그 누군가는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그렇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한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영화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사진첩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경기도 시흥군 동면 안양리(현 안양시), 얼핏 봐도 백 명은 족히 넘어 보일 정도로 인파가 북적이는 이곳.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이리도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일까? 흙먼지 폴폴 날리는 공사장에 말이다. 화기애애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고, 짓고 있는 중으로 보이는 콘크리트 건물 앞에서 멋들어지게 늘어서서 단체 사진은 또 왜 찍고 있는 걸까? 혹시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해 모인 것일까? (좌) 홍찬, 현제명 등 / (우) 박계주, 조경희 (좌) 한형모, 허백년, 이진섭 등 / (우) 김학성, 유계선 등 엄청나고 대단한 것이 들어설 것 같은 흥분으로 가득한 이곳은 다름 아닌, 동양 최대 규모의 영화 스튜디오가 될 수도영화사(대표 홍찬 ) 안양촬영소 정초식 및 상량식(이하 정초식) 현장이다.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속 여러 장에 걸쳐 발견되는 일련의 사진들에는 수도영화사 사장 홍찬과 현제명 박사, 문학가 박계주 와 조경희, 시나리오 작가 유한철 과 이진섭 , 영화평론가 임영 과 허백년 , 스틸 작가 백영호 , 감독 한형모 , 배우 이민 과 유계선 등의 인물들이 포착되어 있다. 생전 이 사진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던 촬영감독 김학성 의 모습 역시 박혀있다. 그러나 이 행사에는 문화계 인사만 자리한 것이 아니었다. 단신에 가까운 신문 기사와 이승만 대통령의 동정을 따라가는 <대한뉴스>에서 확인되는 이날의 공식 기록은 이러하다. 안양촬영소 정초식은 1956년 10월 17일 오전 11시, 경기도 안양리 공사 현장에서 수도영화사 사장 홍찬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현제명 박사는 공사 경과를 보고했고, 이승만 대통령과 최규남 문교부 장관의 축사가 이어졌다. *주1 그 밖에도 여기에는 당시 민의원 의장이었던 이기붕과 내무부 장관이었던 이익흥 등의 정부 인사 역시 자리했다. 영화배우 주증녀 가 영화인 대표로서 단상에 올라 대통령에게 꽃다발을 전달했고, 정초식 이후 대통령은 공사 현장을 둘러보고 촬영소 모형도를 살폈다. *주2 이 같은 공식 기록을 놔두고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의 사진들이 유독 눈에 띄는 이유는 그것이 다름 아닌 ‘개인의 기록’이라는 데 있다. 객관적인 사실을 열거하며 대통령의 동정에 초점을 맞춘 공적 보도와 달리, 이 일련의 사진들은 순수하게, 안양촬영소 건립에 들뜬 영화인의 시선으로 기록된 것들이다. <대한뉴스>에서 전달되는 근엄하고 정제된 분위기와 달리, 사진은 어딘가 다소 어수선하고 북적인다.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시각 요소만 담겨 있지만, 그럼에도 왠지 이곳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재잘거리는 대화 소리, 북적이는 인파와 공사장의 소음이 그대로 들리는 것만 같다. 공적 기록과 달리 정제되지 못한 개인의 사진(심지어 이 사진들은 인화되지 못한 채 필름으로 남아 있다)은 이렇게 예상외의 것마저 전달한다. 그렇다면 영화인뿐 아니라 여러 문인과 정부 관계자들이 나서서 모두 축하하고 있는 안양촬영소 건립이란 당시에 어떤 의미였을까? 일제강점기 때부터 국내의 영화인들은 영세한 자본에다 촬영소는 물론이고 변변한 영화 기자재도 없는 현실을 탄식하며 탄탄한 자본력을 가진 영화 기업을 기대했고, 영화 예술을 위해 헌신하는 굴지의 독지가가 나타나길 바라는 비현실적인 꿈을 꾸기도 했다. 해방을 맞이했지만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고 한국전쟁으로 그나마 있는 시설마저 파괴되었으니, 영화인들이 느꼈을 실망과 좌절은 굳이 말하지 않더라고 쉬이 짐작 가능하다. < 춘향전 >(이규환, 1955년 국도극장 개봉) 흥행을 계기로 영화 제작에 숨통이 조금 트였다고는 하지만, 안양촬영소가 개소하기 전까지 국내에 있는 영화촬영소라고는 미국의 아시아재단 원조로 들여온 기자재를 관리하기 위해 설립된 정릉 스튜디오와 < 자유부인 >(한형모, 1956)의 제작사 삼성영화사가 서울 군자동에 설립한 삼성스튜디오 정도였다. 이마저도 모두 안양촬영소가 한창 공사 중이던 1957년의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1956년 10월의 안양촬영소 상량식이 영화계, 나아가 문화계 전반의 큰 행사이자 축제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안양촬영소는 대지 면적 32,000평, 건평 5,400평의 규모로, 자타공인 당시 동양 최대 스튜디오였다. 한국영화 1세대 촬영기사이자 테크니션이던 이필우 의 설계를 바탕으로, 3개의 스튜디오(500평, 380평, 150평)와 래보라토리(105평), 녹음실(60평), 소도구 및 대도구 제작실(150평), 분장실(100평), 촬영 장비 저장소(100평) 등을 구비했고, 식당과 샤워실, 총 3,300kW 출력이 가능한 변전실 3개 등의 부대 시설까지 완비했다. 기자재로는 당시 접하기 힘들었던 미첼 NC 카메라 3대와 웨스트렉스 녹음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최신 설비와 시설을 자랑했다. *주3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확인되는 이 같은 모습을 차츰 갖춰가고 있던 1956년 10월, 사진 속의 이날은 그렇기에 더욱 흥분과 경이로 가득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근사하게 차려입고 이곳에 모인 많은 이들의 상기된 표정은 안양촬영소가 영화인들에게 와닿는 의의를 설명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한편 안양촬영소가 여전히 한창 공사 중이던 1957년 3월의 어느 날, 수도영화사 대표 홍찬은 《국제영화》와의 인터뷰에서 촬영과 조명, 소품, 의상, 메이크업 등의 기술 스태프 500여 명을 전속으로 기용할 예정임을 은연중에 밝히기도 했다. *주4 홍찬이 발표한 이 말이 사실이라면, 수도영화사의 안양촬영소 건립은 영화인들에게 또다시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속’이라 함은 곧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도영화사가 안양촬영소 건립과 함께 제시한 청사진은 영화인들이 불안정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수도영화사와 전속 계약을 맺은 스태프가 누구였는지,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지만, 위 사진들의 원 소장자 김학성이 수도영화사와 촬영감독 전속 계약을 맺은 사실은 그의 컬렉션을 통해 확인된다. 김학성의 수도영화사 전속 촬영감독 임명장 (한국영화박물관 상설 전시 자료, 우측은 필자의 한글 병기) 수도영화사의 전속 촬영감독으로서, 김학성은 이곳에서 수도영화사 안양촬영소 창립 작품 < 생명 >(이강천, 1958)의 촬영을 담당했다. 그 과정에서 그에게도 수도영화사 전속 촬영감독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양촬영소 상량식 사진들 못지않게,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에는 그가 <생명>을 촬영할 당시에 찍은 사진들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도영화사 사무실에서 촬영된 필름을 검토하고 있는 모습부터 <생명> 고사 현장, 한강 로케이션 촬영 현장과 안양촬영소 세트장에 이르기까지, 사진 자료만도 89점에 달한다. 이는 그가 참여한 작품에 관한 컬렉션 사진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인들의 환대를 받으며 성대하게 지어진 수도영화사 안양촬영소의 수명은 안타깝게도 그리 길지 못했다. 수도영화사는 창립 작품 <생명>에 이어 < 낭만열차 >(박상호, 1959)를 제작했지만, 두 작품의 잇따른 흥행 부진으로 수십억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안양촬영소는 1959년 4월 부도 처리되며 상업은행의 관리로 넘어갔다. 이후 선민영화사와 홍성기 감독, 범아영화사가 잠시 운영을 맡기도 했지만, 한동안 방치되었고 1966년,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에 인수돼 안양필름(1967~1968), 안양영화제작주식회사(1970~1973) 등의 스튜디오로 활용되었다. *주5 *** 주1. “안양촬영소 정초식 성대”, 《조선일보》 1956. 10. 18., (석)3면. 주2. “ 대통령 각하, 안양촬영소 정초식에 임석 ”, <대한뉴스> 제94호, 1956. 10. 주3. 안재석, 「 안양촬영소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4. “[신춘대담 no.3] 현란한 문화기업의 개화전: 영화산업의 왕자 ‘수도’의 구상”, 《국제영화》 1957년 4월호(15호), 93쪽. 주5. 안재석, 앞의 글; 조준형, 『영화제국 신필름』, 한국영상자료원, 2009.
데뷔와 함께 세 편에 출연 황정순은 해방 전 불과 열다섯 나이에 <그대와 나>(허영, 1941)의 단역으로 스크린에 처음 얼굴을 비췄다. 이향이나 이민자와 마찬가지로 어쩌다 불려나온 반짝 출연이었다. 그러나 배우로서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49년 봄 우리나라 최초의 16밀리 천연색 극영화 <여성일기>(홍성기)부터였다. 친구의 오빠(송재로)를 사랑했으나 그에게 본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속세를 떠나 사회사업에 헌신하는 한국보육원 원장 황온순의 반생기이다. 그의 뒷얘기는 1.4후퇴 때 미공군 헤스 대령의 도움을 받아 전쟁고아들을 제주도로 실어 날은 록 허드슨 주연의 영화 <전송가>(1957)로 이어지지만, 황정순은 자신의 이름과 비슷한 황온순(주증녀)이 아닌 그의 친구로 나왔다. 이런 그녀에게 주연의 기회를 준 것은 장황연 감독의 <청춘행로>(1949)였다. 시댁의 학대에 시달리면서도 참고 견뎌내 끝내 행복을 얻는 며느리의 이야기로, 주선태(시아버지 역)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여성일기>에 나온 지 4개월 만이었다. 다음에는 최인규 감독의 흑산도 올 로케이션 영화 <파시(波市)>(1949)가 기다렸다. 어촌의 사내들이 즐겨 찾는 선술집 작부 김홍도 역이었다. 후배 작부(최지애)를 친동생처럼 여기면서도 돈에 팔려 다른 파시로 옮겨 가야 하는 조연급, <청춘행로>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였다. [사진] <청춘행로>의 한 장면 생필름을 구하기 어려워 제작비가 뛰어 오르고 여름부터 퍼진 뇌염 때문에 극장 문까지 닫히던 시기였다. 한국영화 초창기의 변사이자 배우, 해방 후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1948)의 원작자이기도 한 김조성(金肇聲, 예명 춘광)도 이해 6월에 뇌염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황정순은 나라의 재난 속에서도 세 편이나 출연하는 행운을 얻었다. 30대 중반부터 시작된 노역의 멍에 하지만 불의에 닥친 6.25전란으로 그녀의 활동은 5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재개되었다.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을 비롯한 <숙영낭자전>(신현호, 1956), <사랑>(이강천, 1957), <김삿갓>(이만흥, 1957), <봄은 다시 오려나>(이만흥, 1958), <촌색씨>(박영환, 1958),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 <인생차압>(유현목, 1958), <청춘극장>(홍성기, 1959) <육체의 길>(조긍하, 1959), <대원군과 민비>(유진식, 1959) 등 20여편이 그 산물이다. 이 시기에 <사랑>으로 제1회 한국평론가협회상 최우수여우상을 받았다. 영화계에 들어와 처음 받은 상이었다. 잇따라 <인생차압>의 이중생(김승호) 부인 우씨 역으로 제2회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사진] 황정순이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인생차압>의 한 장면, 중앙이 배우 최남현, 우편이 유계선 <귀거래(歸去來)>(이용민)와 <박서방>(강대진)으로 시작된 1960년대는 그녀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지평선>(정창화, 1960), <주마등>(이만희, 1961), <마부>(강대진, 1961), <삼등과장>(이봉래, 1961),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2), <한 많은 미아리고개>(엄심호, 1962), <한석봉>(이만희, 1963), <굴비>(김수용, 1963), <외아들>(정진우, 1963), <혈맥>(김수용, 1963), <성난 능금>(김묵, 1963), <잉여인간>(유현목, 1964),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 <대석굴암>(홍성기, 1964), <삭발의 모정>(강대진, 1965), <이 땅에도 저 별빛을>(김기덕, 1965), <갯마을>(김수용, 1965), <친정어머니>(김기덕, 1966), <팔도강산>(배석인, 1967), <산불>(김수용, 1967), <대원군>(신상옥, 1968), <화산댁>(장일호, 1968), <저 언덕을 넘어서>(강찬우, 1968), <부인행차>(문여송, 1969) 등 120여편이라는 양이나 질적으로 그러하다. 황정순은 이미 서른세 살 때부터 머리에 흰 칠을 하고 얼굴에 주름살을 그리며 카메라 앞에 섰다. 그보다 한 살 위인 박암의 장모 역(<인생차압>)이 그 시작이었다. 이렇게 출발한 그녀의 노역 행진은 특히 <마부>, <굴비>, <혈맥>, <갯마을>, <육체의 고백>, <산불> 등에서 빛을 내며 자신의 대표작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사진] <외아들>에 출연한 황정순, 왼편 아역 배우는 박종화(사진제공: 김종원) <마부>의 경우는 식모(수원댁)에서 마부(김승호)의 재취로, <굴비>에서는 분가한 자식들의 냉대에도 보듬어 안는 농사꾼의 아내로, <외아들>에서는 자식을 위해 온갖 역경을 견디며 살아가는 어촌 어머니로, <혈맥>에서는 과년한 딸을 술집에 보내려 ‘신고산타령’을 가르치는 노점의 주모로, <갯마을>에서는 재가한 며느리를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과부 시어머니로, <잉여인간>에서는 무직인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 마른 동태에 바람을 불어넣는 억척스런 아내로, <육체의 고백>에서는 환락가에 군림하는 나이트클럽의 마담으로, <산불>에서는 마을에 숨어든 공비(신영균)와 통정하는 바람난 과부(도금봉)의 어머니로, <삭발의 모정>에서는 휴가 온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이기 위해 머리를 잘라 파는 가난한 군인 어머니로, <화산댁>에서는 처가살이하는 아들에게 냉대 받으면서도 사업 빚을 갚아주는 농촌 어머니로 각기 나타난다. [사진] <굴비>의 한 장면, 중앙이 배우 이빈화, 우편이 김승호(사진제공: 김종원) 초기에는 <촌색씨>, <자식복 돈복>(윤대룡, 1959), <모상>(박상호, 1960) 등의 경우처럼 연극 연기가 몸에 밴 오버액션의 경향이 있었지만, 60년대 초반 <혈맥>, <잉여인간> 등 일련의 문예영화에 출연하면서 한층 여과된 디테일 연기로 다듬어졌다. 일찍이 황정순을 <월급봉투>, <산불> 등 여러 영화에 출연시켜 그의 필모그래피를 빛나게 한 김수용 감독의 말처럼 ‘연기인에게 젊은 역과 노역의 구별이 있을 수 없지만 젊은 날 무대의 여왕이 은막의 노파로 전향’ (『주부생활』, 1969년 9월호 부록, 「영화와 스타 스토리」) 한 것은 의도와는 다른 운명이었을 것이다.
[사진] <성벽의 뚫고>(한형모, 1949)에 출연한 이집길 이집길(李集吉)은 한림, 최은희와 간발의 차이로 1947년 <그들이 가는 길>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무성영화시대 나운규의 <아리랑>(1926)과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1932)에 마부와 건축기사로 나왔던 단역배우 임운학이 처음 만든 감독 진출작이었다. 세트장치 없이 뚝섬 근처의 절에서 야외 촬영한 이 16밀리 영화는 부친(정민)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친구의 아들을 데려다 길러 평양감사가 되도록 만들었으나 키운 보람도 없이 외면당하자 암행어사가 된 그의 아들(임운학)이 배은망덕한 평양감사를 응징한다는 얘기다. 권선징악적 요소가 강한 이 이조(李朝) 야사의 악역인 평양감사에 이집길이 발탁된 것이다. 엑스트라가 모자라 경동중학 연극부 학생까지 동원했다고 한다. (임운학 「예(藝)에 살다(16) 영화배우 55년」 일간스포츠, 1979.8.11) 일본대학 산업경영과를 다닌 한림과 마찬가지로, 일본국제음악학교에서 공부한 해외 유학파인 이집길이 영화배우가 된 것은 당시로선 매우 드문 일이었다. 아무튼 그는 이듬해 이만흥 감독의 <끊어진 항로>(1948)에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밀수범으로 변신한다. 성실히 살아가는 직장인인 친구(이강천)는 바르게 살자고 설득하지만 이집길은 정부(유계선)와 공모하여 밀수품을 실어놓은 배로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끈질긴 친구의 노력으로 생각을 바꿔 당국에 자수한다. 그의 친구 역할과 함께 미술을 담당한 이강천은 5년 후 <아리랑>으로 감독의 길을 걷게 된다. 이집길은 1년 후 <자유만세>를 찍은 촬영기사 한형모의 감독 데뷔작 <성벽을 뚫고>(1949)의 출연을 계기로 연기에 열정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들이 가는 길>이나 <끊어진 항로>가 16밀리 무성영화인데다 반응이 좋지 않았던 반면 이 영화는 이미 검증 받은 한 감독의 35밀리 영화였기 때문이다. 1948년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로당에 의해 촉발된 제주 4,3사건과 10월 19일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계기로 일기 시작한 공산주의 배격의 흐름은 결국 <성벽을 뚫고>와 같은 반공영화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공산주의자인 매부(권영팔)는 육군 소위인 처남(이집길)을 매수하려 하고 또 처남은 처남대로 매부를 설득하려 들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서로 총을 겨누게 되는 상황에 놓인다. 이 영화에 이어 그는 이만흥 감독의 <애정산맥>, <청춘>(이상 1953), <탁류>(1954) 등 3편과 홍성기 감독의 <출격명령>(1954), <열애>(1955) 등 2편에 출연하여 편수는 많지 않으나 꾸준히 배우의 길을 걸었다. <애정산맥>은 전투 경찰과 공비로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 친구의 이야기로 <성벽을 뚫고>와 같은 유형에 속한다. 다만 그들 사이에 마을 처녀와의 삼각관계가 설정되고 그의 배역이 육군 장교에서 전투경찰관으로 바뀌었을 정도의 차이다. <청춘>에서는 음악교사인 여선생을 둘러싸고 영어교사(황남)와 사랑싸움을 벌이는 체육교사로, <탁류>에서는 공비들에게 공급할 무기를 들여오려던 간첩단을 일망타진케 하는 방첩대원으로, <출국명령>에서는 적탄에 맞아 떨어진 라이벌인 조종사(전택이)를 죽음을 무릅쓰고 구출해내는 공군 조종사로 등장한다. <출격명령>(홍성기, 1954)에 출연한 이집길, 왼쪽은 배우 전택이 그의 마지막 출연작이 되어버린 <열애>에서는 나병을 앓으면서도 한 여인(염매리)을 포기하지 못했던 화가 박혁의 불우한 삶을 온몸을 사르다시피 연기했다. 그는 간장염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공교롭게 그의 아버지 박혁 목사 역을 맡은 나운규 시대의 배우 이금룡도 이 영화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고, 그 역시 같은 해 11월 세상을 떠났다. 술에 젖은 말년의 삶 이집길은 1923년 서울 혜화동에서 태어났다. 일설에는 고향이 전라북도 군산이라는 말도 있다. 중앙고보를 거쳐 일본제국음악학교 성악과를 다니다가 일본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다고 한다. 데뷔 당시에는 ‘교양을 갖춘 침착하고도 겸양한 인품, 근대인으로서의 지성과 샤프한 신경, 무엇보다도 천성적으로 타고난 굴곡 있는 입체적인 선 등이 조화된 한국영화계의 호프’로 기대를 모았다 .(한국일보, 「금주의 스타, 이집길」 1954, 11,29) 그러나 그는 배우로서 큰 고민거리가 있었다. 키가 작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단점을 메우기 위해 열심히 연기에 임했고 구두 뒤축을 두 개나 달고 다닐 정도로 키에 신경을 썼다. 말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젖어 지내다시피 했다. 이즈음 시골에 있던 아내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상경하여 병간호를 했다. 그러나 <열애>를 유작으로 11월 11일 오후 2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운명하였다. 한창 활동할 나이인 32세였다. 원인은 간장염이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 아내의 손을 잡고 과거의 무절제한 생활과 과오에 대해 사죄했다고 한다 .(한재수, 「배우로 본 한국영화 광복 50년」 『월간 영화』 1975년 3월호. 78쪽) 유작이 된 <열애>(홍성기, 1955)의 한 장면(아래쪽이 이집길) 뒷날 감독이 된 영화평론가 유두연은 그의 죽음에 대해 “영화인들이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겨우 장만한 소나무판 관을 메고 가서 해골 같이 말라버린 시체를 끌어안고 ‘영원의 출연’을 위한 메이크업을 시켜주고 있는 뼈 저리는 마음을 알고 있기에 이 붓을 들었다‘며 다음과 같이 추도문을 마무리했다. -그 몸뚱이와 넋을 원통 필름에 발라버렸다. 그가 생전에 출연했던 영화를 더듬어 보면 그 얼마나 대중들의 마음이 그가 움직이는 그림자 속에 뭉쳐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성벽을 뚫고>에서의 이집길은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정신의 심벌이었다. 지리산 암벽에서 공비로 화한 친우와 대결하는 국군 소위의 검은 눈동자는 우정도 감상도 범할 수 없는 정의에 번쩍이고 있었다. <출격명령>의 항공 대위는 그 두꺼운 가슴팍에 자유를 갈구하는 민족의 마음을 안고 적진에 포탄을 퍼붓다가 드디어 산화하고 말았다. <열애>의 이집길은 파멸하여가는 육신을 이끌고 인간성의 존엄을 긍정하기 위하여 마지막까지 생을 찾는 문둥병 환자였다. 모두가 다 절실한 환경의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 얼마나 성실하게 대중들의 마음이 반영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이렇던 이집길도 가버렸다. - 「젊은 배우의 죽음 , 곡(哭) 이집길의 사(死)」 조선일보, 1955.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