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 감독
- 김진홍
- 제작년도
- 2001
본 게재글은, 17-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국영화박물관 교육 프로그램 ‘청소년을 위한 영화 글쓰기 키트’의 최종 과제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 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의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영화에 관해서는 망설임이 더했고 지금도 그렇다. 이는 남에게 지적받을 것도 없이 바로 나 스스로 순수한 영화인이 아니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이다.” TV 프로그램의 AD와 다큐멘터리 연출자의 시절을 거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본인의 영화 언어가 텔레비전 방언이 밴 변칙적인 언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스스로를 ‘순수한’ 영화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2018년 5월, 그는 <어느 가족>(2018)으로 제 71회 칸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 최고의 권위를 가진 영화제에서 전 세계의 영화인들에게 가족 영화의 대가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영화 언어의 순도가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 그가 전하는 밀도 높은 감정일 것이다. 이별 후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이야기(<환상의 빛>), 뒤바뀐 가족에 대한 이야기(<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어머니가 다른 가족의 이야기(<바닷마을 다이어리>), 헤어진 가족의 이야기(<태풍이 지나가고>) 등 줄곧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영화 속에 담아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에서도 다시 한번 가족의 의미를 재정의한다. 도둑질과 납치 <어느 가족>의 원제는 '만비키 가족'으로, 해석하면 '좀도둑 가족'이라는 뜻이다. 가르칠 것이 도둑질밖에 없다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세탁 업체에서 일하며 주머니 속 물품들을 빼돌리는 노부요(안도 사쿠라) 부부는 성매매 업소에서 여동생의 이름으로 돈을 버는 가출 청소년 아키(마츠오카 마유), 열 살 정도 되어 보이지만 초등학교에 다니지 않는 쇼타(죠 카이리), 죽은 남편 덕분에 연금을 받는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와 함께 살아간다.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좁은 집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가족’은 하츠에의 연금과 상습적인 도둑질로 생계를 이어간다. 쇼타는 문득 노부요에게 질문을 던진다. “물건 훔치는 건 나쁜 일이야?” 잠시 고민하던 노부요는 쇼타에게 되묻는다. “아빠(오사무)는 뭐라고 했어?” 쇼타는 답한다. “가게에 진열된 물건은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래.” 한편, 시간이 흘러 취조를 당하는 노부요는 하츠에를 땅에 묻은 사실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버린 게 아니라 주운 겁니다.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웠습니다.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닙니까?” 어쩌면 정말 좀도둑 가족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주인 없는 것을 가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의 다툼을 피해 밖으로 나와 있던 5살 유리(사사키 미유)는 방치된 아이였고, 이 가족은 그런 유리를 품었을 뿐이니 말이다. 사람에게 버림받은 이들이 뭉쳐 서로를 보듬어주는 가족이 되었다. 누구의 것도 아닌 물건을 가지고서 겨우 겨우, 그렇지만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가게가 안 망할 정도로만, 사회에 커다란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로만 살아가려 했는데 세상은 그것조차 내버려두지 않는다. 상처를 알아봐주는 존재 “팔 좀 보자꾸나. 여긴 왜 이러니?” 유리를 처음 만난 날, 하츠에는 유독 말라 있는 유리를 걱정하며 온몸에 난 상처를 살핀다. 상처에 꼼꼼하게 약을 바르는 하츠에의 행동은 애정을 표현하는 그의 방식이다. 무심해 보이던 쇼타 또한 유리의 상처를 발견한다. “그 상처 왜 났어?” “넘어졌어.” “그거 화상자국이잖아.” 쇼타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유리에게 “나한테 애써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유리의 상처는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제껏 겪은 내면의 상처까지 포함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하츠에와 쇼타의 관심 덕분에 유리는 신체의 상처와 함께 마음의 상처도 거의 회복한 것처럼 보인다. 치유 받는 입장에 처해 있던 유리는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 유리는 샤워하는 노부요의 팔을 보고 묻는다. “거기 왜 그랬어?” 그리고는 이내 자신의 팔을 내밀며 자신에게도 같은 위치에 상처가 있음을 보여준다. 얼굴이나 성격은 달라도 흉터의 모양이 꼭 닮은 둘은 정말이지 ‘모녀’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유리가 노부요의 팔을 쓰다듬는 이 장면은 결이 비슷한 단편영화 <손님>(2011)을 떠올리게 만든다. 특히 <손님>은 한국의 고레에다 히로카즈로도 불리는 윤가은 감독의 초기작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손님>의 주인공 자경(정연주)은 잔뜩 화가 난 채로 아빠의 불륜녀가 살고 있는 집에 찾아간다. 하지만 그곳에는 죄 없는 어린 남매만이 있을 뿐이다. 남매 중 동생인 기림(송예림)은 이마에 밴드를 붙여주는 자경의 눈썹에 흉터가 있음을 발견한다. “언니 왜 그래. 아파?” 밴드를 붙이는 자경과 눈썹의 흉터를 만지작거리는 기림은 오늘 처음 만났지만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공감하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손님>과 <어느 가족>에서 ‘상처를 알아보는’ 행위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영화의 후반부,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 유리는 친엄마의 상처를 발견한다. 유리가 상처를 만지자 친엄마는 “만지지 말랬잖아.”라며 짜증 섞인 말을 내뱉는다. 친엄마와 노부요의 차이는 여기에서 나타난다. 만지면 아플 정도의, 그러니까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아이의 위로를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물론 아이의 상처 또한 보듬어주지 못한다는 것. 홀로서기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각자 다른 프레임 속에서 취조 당하는 이 영화의 후반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초기작 <원더풀 라이프>(1998)의 장면과도 닮아있다. 화면을 꽉 채우던 가족들은 온데간데없이, ‘혼자’가 된 사람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족의 분리를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는 면회 씬에서도 적확하게 드러난다. 투명 유리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쇼타와 노부요는 사실상 같은 장소에 있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들을 철저하게 떼어놓는다. 동그란 대화 구멍의 은색 테두리라는 또 하나의 프레임을 만들고 노부요의 얼굴을 가두어버린다. ‘집에서 공부할 수 없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거 아닌가요?’라는 쇼타의 질문은 이제껏 쇼타의 세상이 얼마나 좁았는지 말해주고 있다. 양쪽 손끝을 맞대고 검지를 빙글빙글 돌리다가 주먹을 쥐어 얼굴에 콩. 훔친 물건을 숨기던 파란 가방 대신 책이 들어 있는 새 가방을 멘 쇼타는 이제 학교에 다닌다. 오사무 또한 “아빠는 이제 아저씨로 돌아갈게.”라고 말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영화 초반부의 쇼타는 유리에게 밀개떡을 사준다. 천국에 있는 유리 할머니의 존재를 알고 “그러면 이제 잊도록 해.”라고 말한다. 이제는 쇼타와 유리가 노부요와 오사무, 그리고 야키와 하츠에를 잊어야 할 차례가 되었다. 버스 창문 너머의 오사무가 사라지고 나서야 마침내 ‘아빠’라는 말을 내뱉는 쇼타, 쇼타네 가족들과 부르던 노래를 아파트 복도에서 홀로 부르는 유리. 이름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름이나 호칭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 가족들은 서로가 함께였던 순간들을 쉽게 잊지 못할 듯하다. 사실 <어느 가족>을 따뜻한 영화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마냥 슬프고 비극적인 영화로 해석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보통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 가족은 마음뿐만 아니라 돈 문제로도 얽혀있는 보통 가족이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서로를 ‘선택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제는 홀로 서야 할 때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비혈연 가족의 이야기가 아닌 모여 있는 가족과 흩어진 가족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2002년 | 강제규 필름 감독: 정초신 | 시나리오: 박채운 | 제작: 최진화 | 촬영: 서정민 | 프로덕션 디자인: 서명혜 | 음악: 이영호 이소윤 CAST 병철: 이범수 | 유리: 김선아 | 동현: 노형욱 | 석구: 전재형 | 상민: 정재훈 | 영재: 안재홍 아마 이 영화가 전국 3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할 거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한참 성적 호기심에 불타는 남자 중학생들과 여자 교생 선생님의 이야기였던 < 몽정기 >는,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의 대표적인 ‘슬리퍼 히트’, 즉 ‘예상치 못했던 흥행작’입니다. <몽정기>의 촬영이 있던 2002년 8월 부산의 한 여중 교실은 영화 현장이라기보다는 생기 넘치는 교실 같았습니다. 창 밖엔 부슬부슬 비가 내렸지만 아이들의 호기심을 사그러들 줄을 몰랐습니다. 교생 선생님과의 점심 식사 장면. 도시락 세대의 추억이기도 하죠. “선생님, 첫 키스는 언제 하셨어요?” “애는 어떻게 생겨요?” 녀석들은 ‘성’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을 묻지만 꿈 많은 소녀 표정의 선생님은 풋고추를 좋아한다느니 하며 아이들의 짓궂은 질문을 가볍게 넘어버립니다. 겉모습은 조금 궁상맞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선생님 역은 이범수. 교생이자 과거 제자였던 김선아는 그를 사랑하는데요, 이범수의 필모그래피에서 로맨스 라인은 이 영화가 처음 아니었나 싶습니다. 노총각 병철을 짝사랑하는 유리. 그녀에게 그는 ‘영원한 테리우스’지만, 병철은 그녀에게 엄격하기만 합니다. 아이들과 너무 허물 없이 지내는 모습에 “아무리 그래도 교생도 선생이야”라며 엄하게 충고합니다. 유리의 친구이자 동료 교생인 소정 역을 맡은 배우는 김기연 . < 노랑머리 >(김유민, 1999)의 상희 역으로 알려진 배우죠. 소정은 유리에게 말합니다. “세상에 저렇게 더러운 테리우스가 어딨니?” 짬을 내 네 명의 ‘중딩’들을 모아,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해 보라고 했습니다. 왼쪽부터 조숙한 아이 상민(정대훈), 그나마 똑똑한 영재(안재홍), 어리숙한 석구(전재형) 그리고 교생을 사랑하는 평범한 소년 동현(노형욱)입니다. 영화에선 중학교 2학년 설정이지만, 영재 역의 안재홍(14살)을 제외하곤 나이를 꽤 먹었습니다. 정대훈과 노형욱은 18살, 전재형은 성인인 스무 살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들이 모두 30대가 되었네요. 모두 오디션을 통해 선발되었습니다. 석구 역의 전재형은 이 영화의 ‘신 스틸러’였죠. 첫 영화였는데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 몽정기 2 >(정초신, 2005)에도 출연합니다. 노형욱은 <몽정기> 개봉 즈음 시트콤 <똑바로 살아라>가 시작되면서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졌죠. <몽정기> 전엔 < 깊은 슬픔 >( 곽지균 , 1997)에서 김승우 의 아역이었고요. 이후 < 효자동 이발사 >( 임찬상 , 2004)에선 송강호 의 아들로 출연하기도 합니다. 상민 역의 정대훈은 ‘여관집 아들 상민’ 역을 맡았습니다. 성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엔 천혜의 환경인 셈인데요, 그래서 <몽정기>의 인상적인 여관 에피소드가 가능했죠. 안재홍은 < 악어 >( 김기덕 , 1996)의 ‘앵벌이 꼬마’ 역으로 인상적이었던 배우죠. 묘한 표정의 김선아. 이때만 해도 그녀는 영화계에선 신인급이었죠. < 예스터데이 >( 정윤수 , 2002)의 여전사 메이가 첫 영화였는데요, ‘포텐’이 터진 건 <몽정기>였습니다. 취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한 이범수. 이 시기 그는 < 일단 뛰어 >( 조의석 , 2002) < 정글 쥬스 >( 조민호 , 2002) 등으로 서서히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흥행작 <몽정기>를 통해 좀 더 확고한 자리를 잡습니다. 메이크업 중인 이범수와 김선아의 모습입니다. 이범수는 촌스럽게, 김선아는 귀엽고 청순하게 보이는 것이 컨셉트였습니다. 1988년이 배경인 만큼, 교실 뒤편에 가지런히 놓인 도시락들은 빼놓을 수 없는 정겨운 소품들이었죠. 그 옆에 당시 남자 아이들이 즐겼던 종이 축구 게임판이 있습니다. 프로듀서 출신으로 첫 연출작 < 자카르타 >(2000)에서 흥행을 맛 본 정초신 감독은 두 번째 영화로 <몽정기>를 선택했고, 흥행세를 이어갑니다. <몽정기>에 대해 “오프라인 세대의 청소년기를 위한 영화”라고 표현했습니다. 일종의 ‘노스텔지어 무비’라는 거죠. 이 영화의 카메라는 서정민 촬영감독이 잡았습니다. 1934년생이시니 촬영 당시 68세의 노익장이셨죠.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 < 마의 계단 >(1964) < 만추 >(1966) 등 이만희 감독과 콤비를 이루며 스타일리시한 촬영을 보여주었던 그는 대규모 스펙터클부터 섬세한 감성까지 매우 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촬영감독이었습니다. 1980년대엔 이장호 감독의 실험적인 작품들이 그의 카메라를 통해 탄생했습니다. 1990년대엔 < 개 같은 날의 오후 >( 이민용 , 1995) 같은 코미디부터 < 아래층 여자와 윗층 남자 >( 신승수 , 1992) 같은 로맨스, 그리고 < 손톱 >( 김성홍 , 1994) 같은 스릴러와 < 여고괴담 >( 박기형 , 1998) 같은 호러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셨고요. 놀라운 건 <몽정기> 이후 칠순의 연세에 < 어린 신부 >( 김호준 , 2004) 같은 ‘뽀사시’한 영상을 만드셨다는 점인데요, 서정민 촬영감독에게 불가능한 장르와 톤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15년, 위대한 카메라맨은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2001년 < 친구 > 이후 한국의 영화 현장에 ‘현장 편집’이라는 게 생겨 급속하게 보급됩니다. <몽정기> 현장에선 그 장비가 매우 간소해졌더군요. <몽정기>의 콘티 북입니다. 이 시기 한국영화의 콘티 북이, 어떨 땐 그래픽 노블을 연상시킬 정도로 매우 정교했는데요, <몽정기>의 콘티 북은 거의 ‘졸라맨’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엔 슬픈(?) 사연이 있었으니… <몽정기>는 제작 초기 감독이 교체되는 우여곡절을 겪었고, 갑자기 투입된 정초신 감독은 시간이 없어 꼼꼼하게 콘티를 그릴 시간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대충 그린 콘티 북이 탄생했는데요, 그럼에도 영화는 ‘대박’을 기록했죠.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
이경미 의 < 미쓰 홍당무 >는 2008년에 나온 한국 영화들 중 가장 심각한 작품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단지 ‘코미디’라는 장르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간단하고 자명한 사실을 놓치고 지나간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검토해보라. 당시 나온 영화들 중 <미쓰 홍당무>만큼이나 캐릭터의 고통과 고민을 전면으로 끄집어내고 어떤 냉소나 타협 없이 진지하게 바라본 영화가 얼마나 되나. 이 영화는 진짜로 하드보일드하다. 반대로 보면 < 미쓰 홍당무 >의 하드보일드한 접근법이 먹힐 수 있었던 것은 이경미 가 이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선택한 장르가 코미디였기 때문이다. 안면 홍조증이 있으며 옛날 사제지간 사이였던 같은 학교 선생 서종철을 짝사랑하는 러시아어 교사 주인공 양미숙은 비극적인 인물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웃긴다. 별다른 계획도 생각도 비전도 없으면서, 무작정 서종철이 동료 러시아어 교사인 이유리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막기 위해 서종철의 딸인 제자 서종희를 끌어들여 온갖 유치한 소동을 벌인다는 이야기는 더욱 웃기다. 이 우스꽝스러움을 무시하고 넘어간다면 영화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며, 주인공이 살고 있는 험악한 환경을 적당히 윤색하는 것이 된다. 우스꽝스러운 존재는 우스꽝스럽게 그려야 한다. 단지 그렇다고 그 우스꽝스러운 존재의 비극성을 감추어서는 안 된다. 일반적인 한국 코미디의 공식을 보자. 대부분 이들의 공식은 비슷하다. 4분의 3정도는 정말로 괴상한 인물을 등장시켜 코미디를 만든다. 그러다가 4분의 3지점 이후부터는 갑작스럽게 멜로드라마로 전환해 눈물을 뺀다. 외국 관객들에게 이 전환은 괴상하며 거의 컬트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국 관객들의 눈에는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주인공이 아무리 우스꽝스럽고 괴상하다고 해도 그들은 반드시 영화가 끝나기 전에 사회와 타협의 과정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 엽기적인 그녀 >를 예로 든다면, 그건 폭력적인 판타지에서 순정만화 주인공으로의 전환이다. 얼핏 보면 그럴싸해 보이겠지만, 그것은 일종의 한국식 항복이다. 무난한 사회성만을 강요하는 사회적 폭력에의 굴복이다. < 미쓰 홍당무 >에서는 그런 전환이나 항복의 지점이 없다. 영화 후반에 법정영화를 연상시키는 어학실 장면이 나와서 주인공들이 빠져 있는 거짓과 집착과 착각의 거미줄을 정돈해주긴 한다. 이들은 이를 통해 그들이 갇혀 있던 난장판을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나간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일반적인 한국 코미디 영화식 전환이 아니다. 양미숙과 어쩌다가 공범자가 된 전교 왕따 서종희에게는 개선의 가능성이 없다. 그들은 여전히 이전처럼 우스꽝스럽고 오싹하며 어리석다. 영화가 끝나도 사회는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으며, 영화가 끝날 무렵 사회의 폭력은 거의 물리적 린치와 같은 형식으로 표현된다. 영화의 결말은 그래도 낙천적이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장기적인 해피엔딩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 미쓰 홍당무 >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 영화를 일종의 공포물, 그 중에서도 괴물 영화로 보았다. 관객들을 무섭게 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타자화 되기 마련인 괴물을 연민의 대상으로 보게 하는 그런 종류의 영화 말이다. 나는 <프랑켄슈타인>과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를 떠올렸고, 종희가 학교에서 겪는 무심하게 일상화된 집단 따돌림의 가해자들이, 온갖 종류의 농기구들과 횃불을 휘두르며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쫓아 세트장을 달리던 유니버설 공포 영화의 엑스트라들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자연스럽게 팀 버튼의 작품들과 비교했다. 비주얼과 영화적 스타일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절대로 정상적인 세계와 타협과 공존이 불가능한 두 괴물과 같은 주인공들이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고 굴복하지 않고 그들의 좁고 이상한 세계를 이해해주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이야기의 유사성은 부인할 수 없지 않겠는가. 나에게 < 미쓰 홍당무 >의 에필로그는 < 크리스마스의 악몽 >에서 잭과 샐리의 마지막 이중창만큼 아름답다. 단지 그 장면에도 나오는 불쌍한 피부과의사 박찬욱 선생도 같은 의견일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