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
- 감독
- 아리 애스터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토니 콜렛, 밀리 샤피로, 가브리엘 번, 알렉스 울프, 앤 다우드, 재커리 아서
한국에서 공포영화를 좋아하기란 많은 난관이 있다. < 티탄 >으로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은 쥘리아 뒤쿠르노의 데뷔작 <로우>(Raw, 2016)는 칸을 비롯한 많은 영화제에서 수상한 화제작이고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도 초청되었으나 결국 수입되지 않았고, 넷플릭스를 통해 뒤늦게 공개됐다. 아마도 카니발리즘이라는 소재 때문이 아닐까. 올해 아카데미 주요상을 휩쓴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와 < 더 웨일 >을 만든 제작사 A24의 영화는 언제나 독특하다. < 유전 >과 < 미드소마 >, < 더 위치 >, < 잇 컴스 앳 나잇 >, < 램 > 등 A24가 만든 공포영화들도 장르적으로는 아쉽다 말할 수 있어도 개성이라는 면에서는 모두 탁월하다. A24의 2022년 작품인 티 웨스트의 < X >는 비평가와 관객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고, 약 1천 5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린 성공작이다. A24는 프리퀄인 < 펄 >(Pearl, 2022)을 바로 제작하여 작년 9월 개봉했고, 시퀄인 <맥신>(MaXXXin)도 제작 중이다. 그러나 오락성과 작품성 모두 뛰어난 공포영화 <X>는 한국에 수입되지 않았다. 1979년을 배경으로 시골 농장에 포르노 영화를 찍으러 갔다가 학살당하는 내용인데, 역시 ‘포르노 영화’라는 소재가 불편하기 때문이 아닐까. 데미안 레온의 <테리파이어>(Terrifier, 2016)는 3만 5천 달러의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슬래셔 영화다. 2016년부터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하다가 2018년 개봉한 <테리파이어>는 ‘아트 더 클라운’라는 개성적인 살인마 캐릭터와 신랄한 고어 장면이 찬사를 받으며 컬트영화가 되었다. 데미안 레온은 2편 제작을 위해 5만 달러 펀딩을 시작했고, 목표를 훨씬 초과 달성하여 총 25만 달러를 모금했다. 상영시간 2시간 18분의 고어 슬래서 영화 <테리파이어 2>는 작년 미국에서 개봉하여 1천 5백만 달러의 극장 수익을 올렸다. 제작비는 약 25만달러. <테리파이어> 1, 2편은 한국에 수입되지 않았다. 수입한다 해도 고어 장면이 노골적인 영화라 많은 장면이 잘려나갈 것이다. 온전하게 한국의 극장에서 <테리파이어2>를 볼 방법은 영화제를 통하는 것밖에 없다. 1970, 80년대의 슬래셔 영화를 리부트하는 감각으로 만들어진 화끈한 호러 영화 <테리파이어 2>를 극장에서 볼 수 없다는 현실이 참 안타깝다. 호러영화에서 ‘캐릭터’는 대단히 중요하다. 살인마의 캐릭터를 잘 잡으면 시리즈가 끝없이 이어진다. < 할로윈 >의 마이클 마이어스, < 나이트메어 >의 프레디. < 13일의 금요일 >의 제이슨, <헬레이저>의 핀헤드 등은 호러 장르의 아이콘이다. 데미안 레온이 창조한 아트 더 클라운도 그들의 뒤를 이을 자격이 충분하다. 아트 더 클라운은 데미안 레온의 첫 번째 단편영화 <9번째 서클>(The 9th Circle, 2008)에 조역으로 등장했고, 단편 <테리파이어>(Terrifier, 2011)에 초자연적 존재로 등장하여 존재감을 드러냈다. 데미안 레온은 두 편의 단편을 활용하여 장편 <올 할로우스 이브>(All Hallow’s Eve, 2013)를 연출한다. 할로윈에 캔디를 받으러 나갔던 아이의 주머니 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디오테이프가 들어 있다. 베이비시터는 비디오를 틀었고, 아트 더 클라운이 등장하는 단편영화들을 보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 데몬스2 >의 악마가 TV 브라운관을 통해 현실에 나오듯, 클라운이 베이비시터를 바라보고 다가와 브라운관을 두들기다가 현실로 들어온다. 데미안 레온은 <올 할로우스 이브>에서 아트 더 클라운의 가치를 충분히 깨달았고,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장편 <테리파이어>는 오로지 아트 더 클라운을 위한 슬래셔영화다. 할로윈 밤, 광대 코스튬을 입은 남자가 두 여성을 쫓아간다. 그리고 만나는 모든 이들을 살육한다. 제한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살육은 85분의 러닝타임 동안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저예산이기 때문에 장소와 인물의 제한은 필연적이다. 주인공은 몇 번이나 위기에서 도망치면서 아트 더 클라운을 죽이지 않는다. 클라운이 쓰러지거나 정신을 잃으면 그대로 두고 도망치다가, 다시 공격당한다. 80년대 슬래셔 영화의 클리셰를 너무 반복해 사용하는 탓에 약간 지루한 감도 있다. 스토리에서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테리파이어>의 참신한 고어 장면들과 아트 더 클라운의 섬뜩한 매력은 호러영화 마니아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테리파이어>는 호러의 컬트가 되었다. <테리파이어 2>는 1편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가진 데미안 레온이 작정하고 만든 영화다.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것, 보여주고 싶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2시간 18분에 담았다. 호러 그것도 고어 영화를 2시간 넘게 본다는 것은 마니아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데미안 레온은 하고 싶은 것, 보여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창의성이 넘치는 감독이 공식에 충실한 영화를 걸작으로 만들어 성공했을 때, 속편의 기회가 주어지면 자의식이 충만하다 못해 가득 넘치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 팀 버튼의 < 배트맨2 >(Batman Returns, 1992), 길예르모 델 토로의 < 헬보이2 >(Hellboy 2: The Golden Army, 2008)가 그렇다. <배트맨>과 <헬보이>는 모두 걸작이지만, 철저하게 슈퍼히어로 영화의 공식 안에서 자유롭게 상상력을 전개했다. 그러나 <배트맨2>와 <헬보이2>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경계선을 가볍게 초월해 버린다. <배트맨2>의 히어로는 배트맨이 아니라 캣우먼과 펭귄이고, 추방된 자들의 부활을 다룬다. 크리스토퍼 월킨이 연기한 빌런 맥스 슈렉의 존재는 스리슬쩍 지워진다. <헬보이2>는 길예르모가 애착을 가진 기형의 존재, 신묘한 기계장치, 뒤틀린 신화와 전설 그리고 저주까지 모두 등장하여 헬보이의 모험을 보여주는 판타지다. <테리파이어 2>를 <배트맨2>, <헬보이2>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데미안 레온의 야심만은 인정할 수 있다. <테리파이어 2>는 80년대 하이틴 슬래셔 영화 풍의 오프닝 크레딧으로 시작한다. 주인공도 10대의 남매다. 시에나는 자살한 아버지가 만들었던 검을 든 천사 코스튬으로 할로윈 파티에 가고 싶어한다. 동생 조나단은 아버지가 남긴 엽기적인 그림들이 아트 더 클라운과 관련있다고 믿는다. 1년 만에 다시 나타난 아트 더 클라운은 어쩐 일인지, 시에나와 조나단 남매에게 집착한다. 친구 앨리와 시에나의 어머니를 죽인 아트 더 클라운은 조나단을 납치한다. 최종적으로 시에나와 아트 더 클라운의 맞대결이 벌어진다. <테리파이어>는 심플한 슬래셔영화였다.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아트 더 클라운도 초자연적 존재로 묘사되지 않는다. 쫓고, 죽이고, 절단하는 장면을 긴장감 넘치게 구성하는 것에만 집중하여 작지만 확실한 성공을 거두었다. <테리파이어 2>는 <나이트메어>를 연상시킨다. 부활한 아트 더 클라운은 초자연적인 괴물이고, 꿈과 현실을 넘나든다. 시에나와 조나단은 꿈속에서 클라운을 만나고, 깨어나자 현실에서도 상처가 지속된다. 학교의 환상 장면은 확실한 <나이트메어>의 오마쥬다. 그런데 묘하다. 죽음 직전까지 몰린 시에나는 환상적으로 되살아나 마치 게임 캐릭터처럼 클라운과 최종 보스 대결을 벌인다. 영락없는 게임 판타지의 엔딩이고, 검을 든 여전사의 각성이 메인 플롯이 된다. <테리파이어 2>의 초점은 아트 더 클라운보다 시에나에게 맞춰져 있다. <테리파이어 2>는 데미안 레온의 야심이 넘쳐 장르도, 스토리도 마구 넘쳐난다. 단점에도 불구하고 <테리파이어 2>가 성공적인 속편이 된 이유는 데미안 레온의 창의적이고 현란한 고어 장면들 때문이다. 시에나의 친구인 앨리의 집에 찾아 간 아트 더 클라운이 그녀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은 아주 길고 자세하게 묘사된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테리파이어 2>는 호러영화 마니아에게 기억될 영화로 남는다. 조나단을 찾아 시에나와 함께 테마파크에 간 친구 브룩과 남자친구 제프가 아트 더 클라운에게 공격당하는 장면 역시 아이디어가 넘친다. <테리파이어2>는 데미안 레온의 야심으로 장황하고 호사스러운 속편이 되었지만, 하이틴 슬래셔 호러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정확하면서도 강렬하게 그려낸 작품이 되었다. 공포와 긴장감, 살육 그리고 유머와 에로틱까지 겸비한, 21세기를 대표할 하이틴 슬래셔 영화다.
156분의 러닝 타임 동안 어둠의 한가운데로 인간을 몰아넣는 초자연적인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 곡성 >(2016)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라스트 신의 페이드아웃으로 종결된다. < 추격자 >(2008)와 < 황해 >(2010)로 이어지는 전작에서와 같이 나홍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파괴적이 되어가는 서사를 통해 능숙하게 통제된 폭력 장면들을 단계적으로 제공한다. 기이하게 뒤틀린 내러티브와 감정의 격동을 야기하는 대담한 묘사를 내장한 이 영화는 물과 나무, 약초, 동물, 산으로 둘러싸인 전라남도의 작은 마을 곡성을 미스터리에 휩싸이게 한다. <곡성>의 줄거리는 뇌우, 번개, 안개, 악몽, 좀비, 퇴마사, 교수형에 처해지는 사내 심지어 죽은 사슴의 시체를 먹는 악마와 같은 이미지를 통해 조형되는 공포의 확장에 의존한다. 주술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고요한 마을에서 끔찍한 죽음이 발생하고 그 뒤를 좇아 기이한 사건들이 공동체를 압박한다. 동네 경찰이자 아버지인 종구(곽도원)가 미스터리를 조사하는 탐정 역할을 맡는데, 이 순박하고 익살스러운 시골 경찰이 광기와 착란의 상태로 변질되는 과정이 서사의 주조를 이룬다. 이 병증을 퍼뜨리고 있는 용의자는 깊은 산중에 사는 과묵한 일본인(쿠니무라 준)이다. 외지인으로 불리는 그가 불길한 기운을 몰고 오면서 종구의 딸 효진(김환희)에게도 발진이 돋고 험악한 말을 내뱉기 시작한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반쯤 벌린 종구는 아버지의 본능이 발동하면서 공격적이고 위협적으로 변한다. 어린 소녀의 천진함에 반해 선과 악의 공존은 인간의 본성이며 감정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비극을 더욱 강조할 수 있는 소재이다. < 엑소시스트 >(1973)와 < 캐리 >(1976), < 유전 >(2018) 같은 전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기원을 추정하기 힘든 악령의 공세는 어린 소녀를 향할 때 더욱 끔찍하게 느껴진다. 마을 사람들의 소문, 속담, 신념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공포와 불편함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무기력한 느낌을 전하는, 반복되는 롱 쇼트가 암시하듯이 악령은 공동체 곳곳에 그윽하게 도사리고 있다. 나홍진의 전작들이 도시 환경의 조건을 활용한 착란적인 편집을 구사한 것에 비해, 원시적인 시골 마을을 무대로 한 <곡성>은 쇼트의 지속시간을 늘림(퇴마의식을 묘사하는 신들)으로써 공포의 시간을 부채질한다. 공포가 퍼지고, 스며들면서 도입부에 존재했던 어두운 유머를 빠르게 쓸어버리면서 나홍진은 관객을 마지막 동굴의 공포로 인도하기 위해 그럴듯한 개연성을 만든다. 믿음에 대한 성찰로 장식된 이 무자비한 어둠의 움직임은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영화적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나홍진은 그가 다루는 영화의 언어 규범을 숙달했다는 증거를 보여주면서 관객을 원하는 곳으로 안내하거나 이야기를 조작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돌리는 데 있어 능숙함을 보여준다. 마을을 휩쓴 테러의 원인이 영원한 수수께끼로 봉인되기 때문에 종구의 탐색과 구조 노력이 무너지고 마을 사람들은 광기와 영적 위기의 가장자리로 내몰린다. 관객은 종구와 마찬가지로 길을 잃고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딜레마를 감수해야만 한다. 당황한 인물들 역시 세상이 점진적으로 사악해져가는 이유에 대해 해명할 길이 없다. 악은 어디서 오는가? 나홍진의 영화는 냉정하게 답한다. 이유는 없고, 인간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먹잇감이고, 악은 상황의 문제일 뿐이다. 등장인물들에게 내리는 폭우도 공포와 유혈 사태를 씻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무력함을 동반한 채 악마가 숨어 있는 지하 통로를 배경으로 하는 피날레는 타협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곡성>이 던지는 질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 라는, 영적인 차원에 놓여 있다. 악마의 확연한 존재 앞에서 보이지 않는 신을 믿을 수 있는가? 신성에 대한 의문과 확신 사이에서 동요하는 이 영화는 따라서 보이는 것과 믿는 것 사이의 관계를 형식적으로 구축한다. 기독교의 교리에 근거한 스토리 안에서 나홍진은 초자연적 현상 앞에서 사실과 증거가 얼마나 흔들리는지를 묘사하기 위해 애쓴다. 외지인의 존재가 드러나는 방식은 이와 관련된다. 일본인으로 설정된 외지인의 정신은 너무 괴물적이어서 그의 육체적 한계를 넘어 확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에 대한 역사적인 트라우마와 연결되어 국가 혹은 민족적 경계를 흐리는 이 인물은, 순박한 무지렁이들의 세계를 교란한다. 일본인이 공동체를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관념은 국가 정체성의 형성과정에서 축적된 뿌리 깊은 위기의식을 소환한다. 컨텍스트와는 무관하게 세상에 만연한 악의 본성은 그것이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통제불가능한 것이다. 일종의 보안관인 종구는 가족, 공동체, 민족의 수호자로서 정당한 이유가 없이 횡행하는 악마의 공격에 맞서야 한다. 심리 지리학이라는 관점에서 주목할 것은 외지인이 기거하는 어둡고 허름한 집을 묘사하는 두 개의 신이다. 종구와 그의 동료 경찰 성복(손강국)이 처음 외지인의 집을 탐문할 때 카메라는 안에서 방으로 향하는 종구를 찍고 있다. 조류도감과 음화 등이 발견되는 이 날의 탐사에서 종구는 찢어진 창호지에 난 구멍 사이로 불이 켜진 신당을 훔쳐보다 돌로 자물쇠를 부수고 안으로 진입한다. 종구의 액션이 진행되는 동안 성복의 수색이 교차편집으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방 안의 가려진 장소를 들춰내기 위해 문을 여는 성복의 액션과 신당으로 들어서는 종구의 액션이 평행하게 이어지는 상황에서 두 인물은 각자의 시점으로 밀실의 풍경을 본다. 기괴한 형상의 조형물과 무당 의식용 밧줄, 향로, 흑백 사진이 붙은 신당과 죽음의 이미지가 덕지덕지 붙은 사진들의 몽타주를 카메라가 훑는 동안 카톨릭 부제 양이삼(김도윤)의 발을 물고 짖어대는 맹견의 흉포함이 또 하나의 계열을 형성하며 나란히 놓인다. 개에 물려 바지가 뜯겨나가는 소동은 마을에서 벌어진 죽음의 이미지를 촬영한 사진들의 몽타주와 편집된다. 삼분할 액션을 나열한 이미지들의 조합은 연쇄적인 죽음의 모티프를 환기하면서 신성(神聖)의 침탈과 그 대가를 형상화한다. 외지인의 집에 대한 두 번째 방문은 동일한 궤적으로 진행되지만 반대의 방향에서 조망된다. 종구와 양이삼, 두 사람만 등장하는 이 신에서 카메라는 종구의 위치에서 방을 찍는다. 그가 처음 방으로 들어갔을 때 보이는 것은 낡은 상 위에 삶은 닭발이다. 극단적으로 낮아진 위치에서 찍은 로우 앵글의 측면 쇼트는 벗겨진 벽지와 서까래를 배경으로 프레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하는 종구의 위태로운 움직임을 보여준다. 방 안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찢어진 신문지가 너덜너덜 붙은 벽을 배경으로 시효를 다한 향로와 초들이 놓인 신당이 드러난다. 카메라는 마침내 종구가 보는 것을 드러내는데 완전히 꺼진 제단은 그 위에 소용돌이치는 증오와 처벌의 앞날을 예고한다. 첫 번째 방문에서 이삼의 바지를 문 맹견이 종구를 공격하기 위해 방안으로 뛰어들면서 응징이 시작된다. 촬영감독 홍경표는 이때 혼돈의 우주 속 인물의 고립을 강조하고 사건의 임의성을 강조하는 수평적인 와이드 쇼트를 별안간 보여준다. 이성을 상실한 종구가 귀신들린 집 안에서 맹견과 사투를 벌일 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외지인의 모습은 바스트 쇼트에서 익스트림 롱 쇼트로 후퇴하는 것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거리로 퇴각한 카메라는 익명의 눈을 암시하듯 느리게 앞으로 이동한다. 이 시선의 주체는 누구인가? 두 장소 간의 교차편집은 신체의 정신적 혼란과 그 병이 즉각적인 공간으로 확장되는 방식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한다. 외지인의 방은 심리 지리학의 시각적 구현이다. 벗겨진 벽지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흉가가 숨겨진 정신병의 공간화라면 곡성은 그 증상이 발현되는 곳이다. 건축학적으로 이 집은 바깥에서는 그리 눈에 띄는 공간이 아니다. 친숙하고 무해해 보이는 집은 표면은 깊고 불길한 내부 방을 숨기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곡성>의 미장센은 경계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면서 여러 겹의 레이어와 비밀을 숨긴 공간을 설정한다. 나홍진에게 이런 설정은 익숙한 것이다. 데뷔작 <추격자>에서 그는 연쇄살인마의 음울한 내면을 시각화한 집을 <곡성>의 그것과 동일한 형상으로 구조화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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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게 다가올 때가 있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공간이 낯설어져서 무서워질 수도 있고, 식상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색다르게 재배열 되는 과정이 신선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2020년 상반기 한국영화 중에 < 침입자 >(2019)를 마주한다는 건 단순히 텍스트를 분석하거나 장르적인 성취를 설명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스릴러에 기반을 둔 장르의 연장선에서 볼 때 <침입자>는 명백히 관객의 기대를 배신한다. 설정도 흥미롭고, 미스터리 스릴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흥미로운 클리셰들이 꽤 많지만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후반부의 전개과정에서 개연성이 부족해 중반까지는 나름 긴장감을 유지해 가던 이야기가 후반부에 이르러 급격히 무너진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일정부분 동의 한다. <침입자>는 혼란스럽다. 마땅히 설명되어야 할 것들을 미뤄둔 채 모호하게 남겨져 방치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전반에 차곡차곡 쌓아나갔던 긴장감은 후반부 작위와 우연의 남발로 씻은 듯이 사라지고 끝내 엉뚱한 길로 접어든다는 인상을 남긴다. 장르영화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여러 방향에서 이야기 될 요소가 다분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침입자>를 실패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과잉과 오해의 서사 때문이다. 우선 과잉에 대해서 먼저 말하자면 이 영화는 잔가지가 지나치게 많다. 미스터리 장르로서의 긴장감, 가족의 의미와 익숙한 것들이 주는 공포,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 기억과 공간의 관계등 하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짧은 시간 안에 정리해내지 못했다. 좀 더 심도 있게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는 건 오해에 관한 부분이다. <침입자>의 콘셉트는 한 줄로 정리된다. ‘내 가족 안으로 낯선 존재가 침입해 들어와 나를 밀어낸다.’ 영화의 전반부는 홈 인베이젼 장르의 길을 충실하게 따른다. 안전해야 할 공간, 집과 가족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긴장과 공포가 피어난다. 철저히 서진( 김무열 )의 시점에서 쌓아나가는 서스펜스는 제법 효과적이다. 하지만 ‘유진이 친동생인가 아닌가’를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시키던 영화는 어떤 상황을 기점으로 ‘유진이 왜 이 집으로 들어왔나’로 질문 자체를 선회 한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는 오컬트의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이 터닝포인트가 상당히 급작스럽고 논리적인 공백들을 자아낸다는 점이다. 결정적으로 손원평 감독은 이러한 공백을 메우거나 설득시키는데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침입자>가 확실히 성취해내는 건 모호한 불안감의 확산이다. 한국사회의 현재를 녹여낸 결과물로서 이 영화는 믿음이 사라진 시대의 불안을 투영한다. 기억과 공간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믿음에 관한 상식들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침입자>는 익숙한 레퍼런스로 지은 집이다. < 오펀: 천사의 비밀 > < 요람을 흔드는 손 > 등 할리우드 홈 인베이젼 장르부터 < 유전 >, < 미드 소마 > 등 아리 에스터의 영화들, <어스>나 < 겟 아웃 >을 연상시키는 전환과 설정, 심지어 < 하녀 >나 < 화차 >와 같은 사회계급 속 여성의 위치를 그린 영화까지 찾고자 하면 곳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조합의 결과물은 사뭇 낯설다. 보는 관점에 따라선 레퍼런스를 제대로 녹여내지도, 정리하지도 못한 연출력의 부재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낯설고 어색하고 당황스럽기까지 한 전후반의 전환이, 과장해서 말하자면 관객을 농락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철저히 무너지는 내러티브가 곧 <침입자>가 전하고 싶었던 감각 또는 목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익숙한 것들을 차용하고 뒤섞어 잘 이끌고 가다가 별안간 쌓아올리던 구성을, 비유하자면 레퍼런스라는 집을 송두리째 부숴버리는 것이다. 인물들이, 이야기가, 그리고 장르라는 패턴이 믿었던 것들을 해체시키는 방식으로 말이다. 아마도 감독은 믿음과 진실이 사라진 시대 자체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전체 이야기 구조로 환원시키고 싶었던 게 아닐까. <침입자>는 진실을, 혹은 진실이라고 착각할 수 있는 정보들을 설명하고 나선, 정작 사실을 제대로 보여주거나 사실로 믿을 수 있게 증명하지 않는다. 진실과 사실의 경계마저 희미해져가는 혼란 혹은 불안. 이 영화의 가장 큰 패착이 여기에 있고,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도 여기에 있다. 때로 어떤 영화들은 어떻게 파헤치고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스스로도 몰랐던 비밀을 들려주기도 한다. <침입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의 반응 혹은 부조화가 흥미로운, 문제적 영화다. 우리는 이 영화를 좀 더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