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팅 셀러스
- 감독
- 유호 쿠오스마넨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투오마스 아이롤라, 텝포 매너
< 맨발의 청춘 >( 김기덕 , 1964)에 대한 평론과 연구는 이미 차고 넘친다. 1950~60년대 한국영화와 대중문화사에 대해 한 마디 얹으려면 피해갈 수 없는 영화가 < 자유부인 >( 한형모 , 1956), <맨발의 청춘>, < 미워도 다시한번 >( 정소영 , 1969)이고, 그런 만큼 논문과 평론 등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청춘영화의 본격적 출발, 신성일 ‧ 엄앵란 콤비의 시작, 방황하는 밑바닥 청춘의 울분과 좌절, 과장되게 미국화하여 전시된 화려하고 발랄한 질감 등, 이 작품에 새삼스레 한 마디 말을 더 얹을 필요가 없을 정도다. 한국영상자료원 사이트에 국한해도 <영화천국> 18호에 수록된 이길성의 글 「 한국 청춘영화의 아이콘, 레전드가 되다 」 같은 충실한 글이 이미 있다. 그런데 각도와 폭을 좀 달리해서 보면 좀 다른 것들이 보인다. 1964년이란 시기이다. 대중예술 작품의 인기는 해당 작품 하나의 극본과 연출의 완성도, 배우의 매력, 혹은 유통 과정에서의 우연 등 다양한 요소에 좌우된다. 하지만 전후를 함께 살펴보면 그 작품이 인기 있을 만한 조짐이 이미 한두 해 전부터 축적되고 그것이 임계점에 도달한 시점에 그 작품이 놓인 경우가 많다. <맨발의 청춘> 역시, 한 해 전에 일본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 청춘교실 >( 김수용 , 1963)‧< 가정교사 >(김기덕, 1963)라는 전조가 있었고, 더 길게 보면 전쟁 중 소년기를 보낸 아이들이 청년기를 맞으며 자기 세대 얘기를 시작하는 전 세계적 현상이 유럽‧미국에서 일본의 태양족까지 차근차근 영향을 주고 있었다. 한국에서 1964년은 더 생각할 지점이 있다. 그 해에 주목할 만한 대중문화의 새로운 흐름이 솟아오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간지 시대의 시작, 민영 TV의 본격화 등 여러 매체 환경이 변화한 것도 이 해인데, 작품 경향으로 보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계기로 트로트가 부활한 것이다. 대중가요사 시작 이래 한 번도 제1주류 양식의 자리를 내준 적이 없던 트로트는, 1961년 <노란 샤쓰의 사나이>의 인기로 몇 년 간 확실한 침체를 보였다. 그 사이 제1주류 양식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미국풍 가요인 스탠더드팝, 그 중에서도 손석우 작곡의 명랑하고 반듯한 질감의 작품들이었다. 1964년을 계기로 트로트가 다시 부활하고, 스탠더드팝 역시 최희준이 부른 주제가 <맨발의 청춘>(유호 작사, 이봉조 작곡)이 몰아온 어두운 뒷골목 냄새 풍기는 재즈 분위기의 작품이 부상하는 변화를 보인 것이다. 대중가요계에서 1964년 부상한 이 두 가지 흐름은 완전히 상반된 경향처럼 보인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손석우 노래가 주도하던 모범생처럼 건전‧명랑한 분위기가 아닌, 어둠과 절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1960년부터 1963년까지를 주도했던 건전하고 명랑한 가족 멜로드라마(‘ 김승호 영화’라 할 만한)가 주춤거리면서, 어두움과 절망이 깃든 <맨발의 청춘> 같은 청춘영화가 부상한 것과도 비견될 만하다. 영화계에서도 < 모녀기타 >( 강찬우 , 1964) 같은 복고적인 신파적 영화가 함께 부상하고 있었으니 사실 가요계와 비슷한 흐름이 나타나고 있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청소년 취향과 성인 취향 양쪽에서 모두 몇 년 동안 잠복되었던 어두운 절망‧퇴폐 같은 감성이 이 해에 일제히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즈음에 대중의 사회심리가 바뀔 만한 사회적 변화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게 옳다. 1960년대 초에 영화와 가요계에서 모두, 과거의 어둡고 퇴폐적이던 흐름을 청산하고 명랑하고 반듯한 질감의 작품이 인기를 끈 것은 확실히 4‧19와 5‧16, 본격적인 경제개발과 산업화의 시작 등과 무관하지 않다. 어느 정도 정부의 통제가 개입되어 있다 할지라도,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의 억지스러운 관제적 건전성과는 확연히 다르게, 대중 스스로 기꺼이 동의한 건전‧명랑‧희망의 질감이 1960년대 초의 작품에는 넘쳐난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다 되어 가고 정치까지 바뀌면서 사람들은 ‘허니문 현상’의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1963년에 군정이 끝나고 대통령 선거를 치른 후 1964년에 박정희의 민정 제1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제 대중의 심리에서도 몇 년 간의 허니문의 거품 희망이 서서히 꺼지면서 잠복되어 있던 절망‧불안‧소외감‧퇴폐 같은 감성이 다시 부상하게 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950년대로 되돌아 간 것은 아니다. 세상살이가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거품이 조금 가라앉았을 뿐 여전히 오랫동안 힘을 발휘했다. 1950년대의 자유주의와 화려함이 전후의 엉망진창 한국사회에서 풍기는 허무주의의 냄새를 품고 있다면, 1960년대 <맨발의 청춘> 속의 주인공 두수는, 비록 좌절되었을지라도 진정한 사랑과 계층상승이 동시에 가능하다는 꿈을 지니고 있는 ‘신데렐라 맨’이었다. 물적‧성적 욕망의 질감 역시 1950년대의 <자유부인>이 보여주는 그것이 아니었다. 영화 <자유부인>이 ‘두루뭉술하게 서양적인’ 질감을 보여주는 것과 달리, <맨발의 청춘>은 신성일의 청바지와 트위스트김의 스윙댄스, 화면 뒤로 흐르는 색소폰의 재즈 연주와 프로레슬링, 현대적이고 실용주의적 디자인의 미국대사관 건물에 이르기까지 확연히 미국적 질감을 과시한다. 대중가요계에서도 그랬다. 1964년에는 한국 최초로 록그룹의 음반이 두 장이나 출시됐다. 차중락‧윤항기 등의 키보이스, 신중현이 이끄는 애드훠의 음반(<빗속의 여인> 수록)이 그것이다. 서수남‧하청일이 이끄는 컨트리뮤직 그룹인 아리랑부라더스의 음반(<동물농장> 수록)도 이 해에 나온다. 물론 이것들이 다 흥행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방향성은 분명하다. 1960년대는 이렇게 두 번째 시기로 넘어가고 있었고, 바로 그 지점에 <맨발의 청춘>이 위치한다. 그리고 1960년대의 세 번째 시기로 넘어가는 즈음에 < 미워도 다시한번 >이 놓여있다. 한국영화사의 ‘대박히트’ 작품은 이렇게 한국현대사와 기막힌 조응을 보여주고 있다. <맨발의 청춘> VOD 보러가기
(그림1) <홍길동>(신동헌, 1967) 신문광고, ‘한국최초의 장편 만화영화 나왔다 홍길동’ 1) (그림2) <호피와 차돌바위>(신동헌, 1967) 신문광고. ‘약속대로 또 나왔다!’ 영화의 예고편을 TBC-TV를 통해 매일저녁 광고한다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2) 어쩌면 ‘홍길동(洪吉童)’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허균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인 ‘홍길동’은 오늘날 가장 널리 쓰이는 견본용 이름이 되었다.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고 의를 실천하고자 한 가상의 위인이자 의적(義賊, Dark Hero), 홍길동이 평범한 인물의 대명사가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허균의 한글소설 『홍길동전』(16세기 경)에서 탄생한 홍길동이 이렇게 유명해진 데에는 아마 이 두 형제의 역할이 혁혁하지 않았을까. 동생 신동우 화백의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소년조선일보》에 1965년에서 1969년까지 1300여회 연재)에서 홍길동은 그 모습을 찾고, 형 신동헌 감독의 한국 최초 극장용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에서는 드디어, 말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 그간 소실된 줄 알았던 그 <홍길동>이 2008년 5월 41년 만에 한국영상자료원 개관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스크린에 걸렸다. <소년 용자 길동(少年勇者ギルドン)>이란 제목으로 일본에 수출되었던 이 영화는 일본 오사카 필름아카이브에 일본어판 16밀리 네거티브 필름으로 소장되어 있었다. 이를 복제해 한국에 남아있던 사운드 필름과 동기화시켜 복원, 10년 전 다시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그림3) 신동우의 신동우 화백의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소년조선일보》에 1965년에서 1969년까지 연재) 3) 당시 신문기사에서 누누이 언급하고 있듯이 <홍길동>이 개봉된 1967년은 ‘특수오락영화 붐’이었다. 특수영화란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같은 공상과학 영화, <흥부와 놀부>(강태웅) 같은 인형극 영화는 물론 <홍길동> 같은 애니메이션 영화 등 이전에 시도되지 않았던 장르의 영화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이런 특수영화는 ‘사랑 타령의 극영화에 식상한 관객에게 무한한 공상과 스릴을 맛볼 수 있게 하는 돌파구’이기도 했다. 4)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들 장르는 전통적으로 어린이를 대상 관객으로 하는 장르로 일컬어지던 것이기도 했는데, 당시 이렇게 특수영화가 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만을 대상으로 한 잡지와 신문들을 보고 자라 나름의 하위문화를 형성하며 일군의 관객으로 성장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때를 놓치지 않고 1950년대 후반부터 디즈니 영화들을 수입 상영해 수익을 내던 세기상사는 이 해에 애니메이션 <홍길동>과 공상과학 영화 <우주괴인 왕마귀>(권혁진)를 통해 국내 기술로 셀-애니메이션과 특수 효과를 선보이며 어린이 영화의 장에 선두로 나섰다. 신동헌의 <홍길동>은 1967년 1월 21일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곧이어 만들어진 <호피와 차돌바위>는 여름방학이 한창이던 8월 15일 또 다시 스크린에서 어린이 관객과 만났다. (그림4) 당시 방송인 전영우, 여성 산악인 김정심, 한글학자 양주동, 극작가 이서구 같은 명사들이 등장해 광고했던 한독약품의 소화제 훼스탈 광고에 신동헌 감독도 기용되었다. 5) 화백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인 신동헌(申東憲, 1927~2017)의 일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만화의 모든 유형-만화 삽화와 한 칸 만화, 서술형 만화와 단행본 만화, 그리고 애니메이션 영화까지-을 만날 수 있다. 그는 회화에서 만화,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그림과 연관된 모든 분야에서 폭넓게 활동한 가히, 한국만화사를 관통하는 인물이다. 그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일곱 형제 중 다섯째로 나서 자랐다. 벽성공립보통학교와 회령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중학교를 다니면서 음악부, 도서부, 미술부에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했다. 학창 시절, 일본의 학생잡지 《형설시대》와 《학생》에는 그가 그려 보낸 만화가 당선되어 실린 적도 있었다. 졸업 후 고향에서 초등학교의 교편을 잡다가 해방을 맞았고, 서울로 내려와서는 학원 교재 삽화일과 미군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서울대학교 예과 이과 갑류에 진학하였다. 충무로에서 ‘코주부’로 유명한 김용환 화백을 만나 인연을 맺어 『스티브의 모험』(1947)을 간행한 것이 만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기 대부분은 인천, 거제, 동래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탈출, 부산 《연합신문》 문화부에 전속만화가로 근무하면서 4컷 만화 「주태백」을 그렸다. 한국전쟁 후 서울로 올라온 신동헌은 《민국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한국일보》, 잡지 《여원》, 《새벗》, 《학원》 등에서 본격적인 만화가로 활동하였다. 그가 신문사의 전속만화가에서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의 길로 옮겨가게 된 것은 1960년이었다. 이 해 3월부터 극장과 텔레비전 광고에서 처음으로 애니메이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달부의 ‘럭키 치약’ 애니메이션 광고, 엄도식의 ‘활명수’ 애니메이션 광고가 인기를 끌었고, 신동헌 역시 진로소주의 제안으로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에 뛰어들었다. 이들 애니메이션 광고는 극장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1961년 12월 KBS가 개국하면서 이를 텔레비전용 16미리로 축소 프린트로 만들어 송출했다. 6) 그는 자신의 집에 ‘신동헌프로덕션’을 차려놓고, 해외 전문 서적을 찾아가며 애니메이션 제작기법을 연구했다. 신능파(넬슨 신), 정병권, 김대중, 신동철, 신동우 등 애니메이터와 컬러리스트들을 훈련시켜 가면서 진로소주의 세 편의 애니메이션 광고를 만들었다. (그림5) 진로소주 두 번째 광고 ‘의견일치 진미의 진로’ (그림6) 진로소주 세 번째 광고 ‘파라다이스’ 첫 번째 광고는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에 연료로 진로소주를 넣는 것이 그 내용이고, 두 번째는 ‘의견일치 진미의 진로’라는 내레이션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 직장인들이 진로소주를 마시러 술집에 들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 번째 제작한 ‘파라다이스’ 광고는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라는 광고 음악에 맞추어 제작한 것으로, 선원들이 파라다이스 섬에 내려 그곳의 여인들과 소주를 즐기는 내용이다. 이는 그가 신문사 기자의 자격으로 해군 함정을 타고 하와이까지 항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당시 이 광고에 삽입한 음악은 부산 MBC 피디였던 손권식이 작사하고, 허영철이 작곡한 것이었다. 노래에 맞추어 애니메이션을 사용한 이 방식, ‘선녹음 후작화’ 기법을 사용한 것은 텔레비전 광고로서는 일대 혁신을 꾀한 것이었다. 음악과 동작이 리듬감 있게 맞아떨어지는 애니메이션 화면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그 이후 신동헌프로덕션에는 제약회사, 양조회사, 섬유회사, 전자회사의 극장용·방송용 애니메이션 광고 문의가 쇄도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에서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사용은 국립영화제작소의 문화영화 일부와 애니메이션 광고가 주를 이루었다. 순수 애니메이션 작품이나 어린이 대상의 애니메이션 작품들로 애니메이션의 제작의 포문을 열은 영화 선진국들과는 달리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계몽이나 선전을 위한 뉴스/문화영화를 제작하던 국립영화제작소를 제외하면 민간에서는 애니메이션 광고를 중심으로 시작되고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이 계몽과 상품 프로파간다에 활용되는 중요한 매체로 출발하고 있었다는 점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적 특수성으로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들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들은 애니메이션과 대중을 보다 친숙하게 해주는 매개였던 데다가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 인력들의 실질적 훈련의 장이기도 했다. (그림7) 신동헌이 제작한 선거홍보 문화영화 <공명선거의 노래>(1960) 중,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이 제공하는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갖인 이 한표로’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장면 그가 만든 애니메이션 광고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을 무렵, 장면 정부는 공명선거 중요성 인식을 위한 선거홍보 문화영화 <공명선거의 노래>(1960) 7) 의 제작을 신동헌프로덕션에 의뢰했다. 당시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국립영화제작소 이전의 담당기관)은 제5대 국회의원선거를 맞아 ‘공명선거의 노래’를 통해, 4·19혁명 이후 새롭게 제정된 양원제를 담은 선거법을 국민에게 알리고자 했다. 신동헌 감독이 제작한 이 문화영화의 후반부 3분가량의 애니메이션은, ‘선거일 7월 29일이 참다운 민주주의 기초를 이룩할 뜻 같은 날이므로, 불의와 부정을 물리치고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 자유의사로 공명한 선거를 실시해야하고, 민의원과 참의원 두 번의 투표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와 정부 부처에서 의뢰하는 문화영화의 애니메이션 부분 제작을 통해 신동헌은 24프레임을 사용하는 디즈니의 ‘선녹음 후작화’ 방식을 실험하며 애니메이션 노하우를 축적했다. 이렇게 경험이 무르익은 그는 드디어 애니메이션 영화에 도전한다. 영화 선진국에서는 이미 40여 년 전부터 만들어져 왔던 애니메이션 영화가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순간이었다. (그림8) 신동우의 연재만화 단행본 『홍길동』 1권 표지(근일문화사, 1968년 발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획된 장편만화영화 「홍길동전」이 만화가 신동헌 씨의 총지휘로 완성되었다. 상영시간 1시간 15분의 만화영화 「홍길동전」은 일반에 널리 알려진 고전소설 「홍길동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양민을 괴롭히는 양반에 소년 「홍길동」이 반기를 든다는 이야기에 현대적인 「코믹」 「스타일」도 가미되었다고 한다. 66년 6월에 제작에 착수하여 6만 여 장의 그림을 그려 7개월 만에 제작 완료되었다. 일반영화완 달리 연기 「로케」 「세트」 등이 필요 없지만 「홍길동전」엔 백 80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애니메이터」 50여 명, 채색원 130여 명). 한국에선 처음 시도된 일이라 상상 이상의 노력이 들었고 많은 NG를 내야했다는 것. 화면의 한 동작에 필요한 그림이 60여 장씩이나 들었다고 한다. 녹음도 「배터런」성우인 김수일·이춘사 등이 맡았고 음악은 전정근. 【세기상사 제작】 8) 1967년 1월 21일 공개된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홍길동>은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개봉해 8만 5천 명을 동원하는 파격적인 흥행을 거두며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같은 해 제6회 대종상 문화영화상도 수상했다. 한국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홍길동>은 1966년 한남동 세기상사의 촬영소 지하에서 수십 명의 동화부 스태프들과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그간 애니메이션 광고 작업을 진행해 전문 인력을 양성했다지만 장편 영화를 위해서는 그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운데, 보름이나 개봉을 연기하며 작업했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제작이 이루어졌다. 이 영화는 미군들이 쓰다 남은 정찰용 필름의 젤라틴을 양잿물에 벗긴 셀룰로이드 위에 비닐 컬러 (vinyl color) 물감이 없어 포스터 컬러(poster color) 물감을 칠해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수채화용 포스터 컬러 물감은 뜨거운 카메라 조명 아래서 금방 말라 비틀어져버렸다. 그 때문에 컬러리스트가 붓을 들고 촬영 현장에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림9) <홍길동>의 주요 장면. 잘 알려졌다시피 원작 「풍운아 홍길동」은 신동헌의 동생인 만화가 신동우(1936~1994)가 허균의 『홍길동전』을 모티프로 해박한 역사 지식을 총동원하고 자신만의 상상력을 가미해 재탄생시킨 것이었다. 신동우가 원작자였지만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서는 신동헌의 조수로 활약했다. 지면 만화와 애니메이션 영화는 배경과 인물, 움직임의 표현에 있어서, 또 서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도 매체 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례로, 신동헌은 원작 만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의 배경을 한국적인 것이 아닌 보다 애니메이션에 적합한 가상적 공간으로 바꾸었다. 또 만화 「풍운아 홍길동」에서 홍길동의 눈은 까만 점으로 그려져 있는데 반해 애니메이션 <홍길동>에서는 캐릭터의 다양한 표정과 감정을 담기 위해서 실제 사람의 눈처럼 눈동자를 그려 넣는 방식을 택했다. ‘선녹음 후작화’ 방식으로 <홍길동>은 성우들의 녹음을 먼저 진행했는데 홍길동은 역은 KBS 성우 공채 1기의 김수일이, 차돌바위는 TBC성우 4기로 데뷔한 여성 성우인 김순원이 맡았다. 먼저 녹음을 진행한 성우들의 대화에서 원작자나 감독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좋은 효과와 감정이 드러나 후작화에 반영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과정에서 알아낸 큰 수확이었다. 미국의 ‘월트 디즈니 같은 만화왕국’을 꿈꾸었던 신동헌은 <홍길동>을 제작하고 난 직후 한국 만화영화의 가능성은 크다고 믿고 있었다.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그가 고민한 것은 ‘외국의 것을 흉내 내지 않고 우리대로의 동작의 선을 확립해야한다. 우리 만화영화의 한국적인 동작을 어떻게 창안할 것인가’였다. 9) (그림10) <호피와 차돌바위>(1967) 타이틀 크레딧 (그림11) <홍길동>에 등장했던 ‘야무지고 단단한 작은 돌’이라는 뜻의 차돌바위 (그림12) <호피와 차돌바위> 포스터 <홍길동>이 대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제작과 배급에서 세기상사와 갈등을 빚었다. 납품 일자를 어겼다고 수익을 배분해주지 않았고, 이런 갈등은 이후 작품에 재투자로 이어지기 만무했다. 하지만 국내 유일의 애니메이션 기술력을 가진 신동헌프로덕션은 곧 합동영화사의 제안으로 만든 <호피와 차돌바위>를 같은 해 개봉했다. 원화 6만 장을 그려 상영시간 75분짜리로 찍었고, 그 제작비로 1천만 원이 소요되었다. 사실 <홍길동>을 만들면서 신동헌은 <속 홍길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세기상사와의 갈등으로 속편이 여의치 않자 스핀오프(spin-off) 시리즈격인 <호피와 차돌바위>로 선회했다. 호피는 호랑이 가죽을 쓴 의로운 인물이라는, 차돌바위는 ‘야무지고 단단한 작은 돌’이라는 의미의 마치 배트맨과 로빈을 연상시키는 이 짝패는 「풍운아 홍길동」에서 단역으로 등장하는, 신동우가 창조한 서브캐릭터였다. 세기상사와의 생겨날 수 있는 판권문제를 염두 했던 신동헌은 『홍길동전』이나 <홍길동>에는 없는 <호피와 차돌바위>를 후속으로 한 것이었다. 중국과의 경계 지역인 함경도 회령이 고향이었던 신동헌, 신동우 형제답게 이 영화에서는 여진족이 서사상의 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호피(명호)의 아버지(유세진 장군)가 정벌하던 오랑캐 여진족, 호피의 아버지를 모함한 사또 최진달, 또 그 사또가 연합한 세력인 여진의 욕심 많은 괴물 도마술이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어린이 관객들에게 반공 의식을 고양시키는 계몽적인 장면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서사상의 적은 ‘여진족’으로 명시되지만 은유적으로 이는 북한의 공산세력을 뜻하는 것이다. 삭풍 선생 : 이 역적무리들. 봐라, 이것이 최진달 일파가 우리나라를 도마술에게 바치겠다는 문서다. 정신 차려라, 호피야. 북녘의 야만인의 피에 굶주린 발톱이 우리나라의 땅을 짓밟으려고 노리고 있는 이때에, 너 같은 젊은 놈이 그 좋은 칼솜씨를 지니고도, 나라를 위해서 일 해보겠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도둑질만 일삼다니. 부끄러워 할 줄 알아라, 이놈아. 우리의 조상들은 자기의 목숨을 투계와 같이 버리며 몇 천 년 몇 만 년 동안 이 나라를 지켜왔다. 알겠느냐? 북쪽 오랑캐들은 이 나라를 삼킬려고 호시탐탐 그 기회만을 노려왔으니. (그림13) <호피와 차돌바위>(1967) 중 삭풍 선생의 뼈아픈 훈계를 듣고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호피의 모습 하지만 <홍길동>은 물론 <호피와 차돌바위>까지 흥행 수익을 둘러싸고 제작사와 갈등을 겪으면서 신동헌은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서 손을 뗀다. 영화제작사들은 흥행 수입만을 챙기고 애니메이션 제작 재투자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정작 신동헌 감독은 오히려 재정난에 빠졌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극영화보다도 제작비가 더 많이 들고, 제작 소요 기간도 길며, 오랜기간 숙련된 전문 기술 인력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드는 기술력을 가진 인력과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영화제작사 간의 불협화음이 한동안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발전에 장애가 되었던 아쉬운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림14)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서 신동헌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타이틀 크레딧 장면들 신동헌 감독이 이렇게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와 안타까운 결별을 했지만, 그의 애니메이션 작업은 일부 극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 <말띠 신부>(김기덕, 1966)의 오프닝 크레딧은 조애희가 부르는 주제가 “말띠 신부”(음악 최창근, 작사 유호)의 멜로디에 맞추어 등장인물 커플을 애니메이션으로 캐리커쳐하여 소개하는데 이를 신동헌이 담당했다. 또 이어령의 원작을 영화화한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은 신동헌프로덕션의 크레딧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철훈이 구상한 소설 내용을 재현하는 장면이 있는데 신동헌이 만든 애니메이션이 10분가량 들어있다. (그림15)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 중에서 신동헌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부분 그 외에도 TBC의 풍자해학 사극 <여보 정선달>(1971~1974)에도 신동헌이 참여했다. 인물 좋고 재주가 비상한 조선의 정선달이 전국을 유랑하며 각종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인데, 드라마 주제가에 맞추어 타이틀 크레딧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MBC의 장수 어린이프로그램 <뽀뽀뽀>(1983~1992)에도 애니메이션 작업을 했다. <뽀뽀뽀>의 고정 캐릭터들이 연기하는 배경을 그려 넣었고, 동화적인 이야기를 구성하는 꼭지에서는 예의 신동헌의 애니메이션 작업이 빛을 발했다. 2008년 유실되었던 필름을 되찾은 후 그는 애니메이션 관련 인터뷰나 강연으로 맹활약했고, 2014년 제14회 만화의 날에 기념공로상을 받았다. (그림16) <뽀뽀뽀>(MBC, 1989년 1월 9일) 중 애니메이션을 활용해 만든 장면들 신동헌 감독을 회고하면서 다시 궁금한 점이 생겼다. 한국 최초의 극장용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인 <홍길동>은 ‘프랑스 아네시영화제(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되기로 결정되었다’는 신문기사가 있지만 10) , 실제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하지는 않은 것 같다. 1967년 <홍길동>이 앤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되었더라면, 신동헌 감독이 직접 참관했더라면 우리나라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 이 글은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에서 진행한 『2008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신동헌』 편에 실린 필자의 「신동헌 해제」와 구술문, 2016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출시된 DVD <홍길동>에 포함된 필자의 「신동헌 감독 소개」를 참조해 재구성하였습니다. 1) 《동아일보》 1967년 1월 19일 5면. 2) 《경향신문》 1967년 8월 12일 5면. 3) 《소년조선일보》 1965년 9월 11일. 4) “[연예오락] 특수 오락영화 「붐」. 괴수물·만화 등, 영화로 뒤쫓는 우주시대 국내기술로 제작 가능”, 《한국일보》 1967년 6월 18일자 7면. 5) 《동아일보》 1972년 1월 4일. 6) 광고정보센터 한국광고 100년 홈페이지 http://data.adic.co.kr/ 참고. 7)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명선거의 노래>는 “공명선거의 노래”(1분 41초)와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3분 8초)의 두 개 영상으로 나뉘어 있다. 신동헌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은 후자의 영상이다. 해당 홈페이지에는 이 문화영화의 제작년도가 1961년으로 오기되었다. 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목록(1950~1993)』, 37쪽;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 http://www.ehistory.kr. 8) “첫 선보인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전」, 7개월간 6만 여 장 그려”, 《한국일보》 1967년 1월 19일자 7면. 9) “만화영화 전망과 가능성, 『홍길동』이 던진 문제점”, 《동아일보》 1967년 1월 28일 5면. 10) “만화영화 홍길동 아네시영화제 출품”, 동아일보, 1967년 4월 25일 5면.
영화 <철조망> 검열 사례의 역사적 의미 영화 <철조망>의 검열 서류는 두 가지 점에서 흥미롭다. 첫째는 이 작품이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검열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던 4월혁명의 국면에 놓여 있었다는 점이다. <철조망>의 상영허가 신청서가 접수된 것은 1960년 3월 29일, 우여곡절 끝에 상영을 허가받은 것은 5월 19일의 일이다. 요컨대 이 영화의 검열과정은 4월혁명 발발 직전에 시작되었고 이승만정권이 붕괴한 후에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4월혁명과 함께 영화계에서는 구악의 청산과 새로운 제도의 구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승만정권의 영화계 장악에 앞장섰던 임화수 등을 징치하는 것과 더불어 관권에 의한 영화검열을 폐지하고 민간의 자율적인 영화심의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하지만 영화계 내부의 이권 다툼 때문에 새로운 영화 심의제도를 마련하는 일은 계속 미루어졌고, 결국 1960년 9월이 되어서야 민간자율을 표방한 영화심의기구인 영화윤리전국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4월혁명 발발에서 9월 이전까지 영화검열은 여전히 문교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영화 <철조망>의 검열서류는 바로 이와 같은 과도기에 개별 영화의 검열이 어떻게 실행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기존의 관행이 엄존하는 가운데 새로이 도래할 (것으로 예상되는) 미래의 규범을 둘러싼 혼선이 계속되었던 이 과도적 시기에 개별 영화에 대한 규제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4월혁명 발발 직전에 상영허가 신청이 접수된 <철조망>에 대해서 검열의 주무부서인 문교부는 기존의 관행대로 내무부, 국방부, 법무부, 공보실, 대검찰청의 관계자들이 참여하는 합동검열을 실시했다.(4월 15일 검열시사) (그림 1) 국산영화 <철조망> 검열의견서 (4월 15일 검열시사) (그림 2) 검열위원 위촉의 건, 국산영화 <철조망> 상영불허가의 건 (5월 9일 상영불허 결정) 여기서 국방부는 제한허가, 법무부는 불허가, 외무부는 “우방의 우호관계를 해칠 우려가 있음”, 공보실은 제한허가, 내무부는 “상영의 시기가 상조”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승만정권이 무너진 후인 5월 6일에 문교부는 관권 검열에 대한 비판여론을 의식한 탓인지 민간인들(김은우, 유호, 원경수, 성인기, 천관우, 권순영)을 중심으로 검열위원회를 다시 구성하고 <철조망>에 대한 재검열을 시행하였다. 하지만 4월혁명 이후의 완화된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민간 검열위원들은 1차 검열 당시 당국의 의견을 대부분 그대로 수용하였으며, 따라서 영화 <철조망>의 상영은 허가되지 않았다(5월 9일 상영불허 결정). 주로 언론인들(그들은 이후 영화윤리전국위원회의 핵심 구성원이 된다.)로 구성된 검열위원회의 견해가 과거 정부 부처가 표명했던 입장과 대동소이했다는 사실은, 이후 출범한 영화윤리전국위원회의 이른바 “민간 자율심의”가 근본적으로는 혁신적이지 못할 것임을 예고한 것이었다. 제작자는 검열에서 지적받은 사항을 반영하여 총 27개 처를 수정, 재편집한 후에 5월 11일에 다시 상영허가를 신청했다. 이에 문교부는 원경수와 권순영을 검열위원으로 위촉하고 5월 18일에 재검열을 실시하여 “반공사상 및 우방 유엔군과의 우호관계에 유해한 장면을 대폭 삭제”할 것을 조건으로 상영을 허가하기로 한다. 서류 상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는 없으나(관련 서류가 누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제작자가 검열신청 취하 요청서를 접수(4월 8일)하고 자진 수정 후 재검열을 요청(4월 9일)한 것으로 보아 5월 11일 이전에도 이미 한 번의 자진 개작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영화 <철조망>은 총 세 차례에 걸친 검열과 개작을 거친 후에야 상영이 허가되었고 1960년 7월 21일에 개봉되었다. 현재 <철조망>의 필름은 유실되었고 녹음대본만이 남아 있는데, 이 마지막 검열에서 지적된 사항을 수정한 흔적이 녹음대본에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 이 영화의 검열사례는 유엔군으로 표상되는 이른바 자유우방을 어떻게 재현해야 하느냐의 문제에 있어서 일종의 기준점을 제시했다. 일찍이 <피아골>을 둘러싼 논란이 한국영화에서 공산주의자와 관련한 재현의 한계를 획정지은 바 있었다. 냉전체제가 피아(彼我)의 적대적 관계로 구조화되어 있고 영화를 비롯한 시청각 미디어들이 이와 같은 적대적 관계를 구축하고 공고화하기 위한 심리전의 도구로 동원되어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같은 냉전체제 하에서 상대편(공산주의자)과 우리 편(자유우방)의 재현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피아골>이나 <7인의 여포로> 등의 사례를 통해서, 한국의 영화검열이 공산주의(자)의 재현 문제를 어떻게 다뤄왔는지는 비교적 자주 거론되었던 반면에 그와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을 ‘자유우방’의 재현에서 표현의 한계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크게 주목받은 적이 없었다. 영화 <철조망>의 검열사례는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우방의 재현 문제를 시험대에 올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물론 <철조망>이 한국영화에서 자유우방을 재현한 최초의 영화는 아니다. 1950년대 중반에 제작된 한국전쟁 관련 영화들에서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한국군의 이른바 ‘혈맹’으로서, 또는 구원자로서 재현되곤 했다. <자유부인>을 비롯한 1950년대 후반의 멜로드라마들에서는 미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젠더의 문제와 결합되면서 부정적인 양상으로 재현되었다. 요컨대 1950년대에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은 정치, 군사적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문화적으로는(또는 풍속의 차원에서는) 부정적으로 재현되는 것이 대체적인 경향이었다. 1950년대에는 <지옥화>처럼 기지촌과 양공주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조차도 검열에서 별다른 제재를 받았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데, 양공주와 미군 장면을 대폭 삭제한 <오발탄>(1961)의 검열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1960년대 들어와서 이와 같은 양상은 크게 변화한다. 영화 <철조망>은 <오발탄>보다 앞서 양공주와 유엔군(미군)의 장면이 문제가 되었던 영화로서 그와 같은 변화의 시작 지점에 위치한 셈이었다. <철조망>과 <오발탄>의 검열과 더불어, 1960년대 한국전쟁 영화의 전환은 이후 한국영화에서 자유우방의 재현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5인의 해병>으로 시작되고 <돌아오지 않는 해병>으로 정점을 찍은 1960년대의 한국전쟁 영화에서 유엔군의 존재감은 현저히 약화되는 대신 민족주의적 남성 영웅으로서의 한국 군인이 전쟁 수행의 주체로서 위치지어졌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의 등장을 전후해서 강화된 사회 전반의 (군사주의와 결합한) 민족주의적 분위기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 영화에서 유엔군의 존재가 사라지거나 약화되었기 때문에, 자유우방의 재현이 전면화될 수 있는 무대 또한 축소되었다. 박정희정권이 검열을 명문화한 영화법을 제정(1962)하고 검열시행세칙에서 “국제 간의 우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영화”를 금한다는 것을 명시하기는 했지만, 1960년대 이후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은 정치적,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대체로 비가시적인 존재였다. 영화 <철조망>의 검열사례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해방 이후 한반도에 미친 미국(과 서방진영)의 강력한 영향력이 가시화되는 것을 회피하고자 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재현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영화 <철조망> 검열의 쟁점과 자유우방의 형상화 문제 사실 <철조망>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상황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이미 문제적이었다. 포로수용소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았을 때, 한국인은 모두(그들이 공산주의자건 반공주의자건 간에) 유엔군(미군)의 관리 아래 놓인 포로로서만 재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공포로들의 능동성을 아무리 강조한다 하더라도, 한국전쟁 당시 한국인들이 처한 근본적인 존재조건을 부인하기는 어려웠다. 영화는 중립 포로인 신도람 깡(주선태 분)의 대사(“뚜렷이 내 나라 땅이면서도 외국사람이 감시하는 이 철조망 속에서 이렇게 또 같이 우리들이 싸우고 죽어야 하니”[S#3])를 통해서 바로 그와 같은 인식을 분명히 드러낸다. 또 한편으로 영화에서 치열한 반공투쟁으로 형상화되었던 포로수용소 내의 유혈폭력사태는, 사실상 유엔의 수용소 관리가 근본적으로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와 같은 폭력사태를 두고 국제적인 비판여론이 비등했음을 감안했을 때 검열관들이 특히 이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법무부는 “그와 같은 무질서한 관리는 국제신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다고, 외무부는 “우방 및 유엔군과의 우호관계에 자미롭지 못한 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전쟁 포로의 송환이 냉전체제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모두 수렴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쟁점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포로 송환에 있어서 본인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제네바협정에 따라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유지했던 ‘적색 포로’와 남한에 남기를 희망하는 ‘백색 포로’를 구분하는 일종의 사상검증이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가혹한 고문과 (전향의) 강요, 그리고 적색, 백색 포로 간의 유혈폭력사태가 벌어졌다. 반공영화를 표방했던 <철조망>은 백색 포로와 적색 포로를 각각 선과 악을 표상하는 것으로 그리고 양자 간의 폭력사태를 공산세력에 맞서는 반공포로들의 투쟁으로 위치짓고자 했지만, 한국전쟁에서 포로 송환이라는 쟁점은 그와 같은 이분법적 구도로 포섭되지 않는 미묘한 지점들을 갖고 있었다. 첫째, 이승만정권은 포로 송환 문제를, 공산세력과의 협상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유엔(미국)의 방침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결국에는 일방적으로 백색 포로를 석방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비난을 초래했다. 이승만이 백색 포로의 석방을 지시하는 <철조망>의 마지막 부분이 대폭 삭제된 것은 이와 관련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이승만의 독단적인 반공포로 석방이 국제사회에 던진 파문을 축소하고 그같은 이승만의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제작자는 영화의 마지막을 “석방되는 포로들의 화면에 장엄한 배달민족을 상징하는 태극기”를 겹쳐놓은 화면에 대통령이 “단신 책임을 지시고 애국 방공포로를 석방하는 용단”을 내렸다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삽입하는 것으로 바꿨다. <철조망>이 다루는 포로송환 문제는 ‘혈맹’이어야 할 자유우방과 한국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검열관들은 그와 같은 균열이 어떤 형태로든 가시화되는 것을 금하고자 했다. 또 한편으로 한때 공산주의에 부역했으나 이제는 자유 대한의 품으로 돌아오는 이들(반공포로) 위에 태극기를 겹쳐놓는 결말은, 일찌기 <피아골>이 취했던 해법을 가져온 것이었다. 보도연맹원의 대량학살이나 전쟁 기간 중의 부역전력자들에 대한 가혹한 처사에서 보듯이, 대한민국은 한때 공산주의를 위해 복무했던 이들(그것이 자의건 타의건 간에)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끊임없는 의심과 사상검증, 부역 전력자들에 대한 물리적 폭력과 협박이 횡행하던 한국사회에서, “자유 대한의 품으로 돌아온 이들”의 진정성에 한 치의 의심도 깃들지 않도록 재현할 것이 요구되었다. 돌아오는 이들과 태극기 이미지의 중첩은 검열제도가 만들어낸 일종의 클리셰로서, 사상검증에 대한 한국사회의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반영한 것이었다. 둘째는 본인의 의사에 따른 송환이라는 원칙이 북한 또는 공산주의를 가능한 ‘선택지’로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북한을 조국으로 선택한 적색 포로들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내부에 인공기를 게양하고 일종의 해방구를 구축하는데, 영화의 서사적 장치들이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인공기가 펄럭이고 적색 포로들의 역사인식과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이 대사로써 피력되는 것은 허용되기 어려웠다. 1960년 4월 19일자 국방부의 검열의견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으며, 제작자는 국방부의 의견에 따라 인공기가 나오는 화면을 전면 삭제하고 강삼수를 비롯한 적색 포로들의 대사를 대폭 삭제했다. 선택의 가능성이라는 문제는 또한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는 포로의 존재를 통해서 더욱 부각된다. 1950년대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제3세계 비동맹 운동의 바람이 한국에도 상륙했고 4월혁명의 분위기 아래서 동서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 노선이 가능한 선택지로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요컨대 본인 의사에 따른 포로 송환이라는 문제는 동과 서, 또는 이도저도 아닌 제3지대가 선택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을 형상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4월혁명의 자장 안에 놓인 최인훈의 소설 <광장>(1961)에서 포로가 된 주인공 명준이 남과 북 어느 쪽도 아닌 중립국 인도를 선택하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철조망>은 적색, 백색 포로 외에 중립 포로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이와 같은 당시의 흐름을 반명하고 있지만 중립 포로로 설정된 “신도람 깡”(주선태 분)의 형상화가 제대로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영화 초반부에 그는 “이런 병신같은 새끼들. 인공기는 뭐구 태극기는 뭐냔 말야. 아 그렇게 말을 해도 모르겠니? 응? 여기 붓들려온 뜻을 아직도 모르느냔 말야. 패전해서 붓잡혀온 못난 쌔끼들이 무슨 국기 투쟁이냔 말야 응”(S#3)같은 대사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분명히 드러내지만 S#53 이후에 갑자기 영화에서 사라진다. 이것이 단순히 형상화의 실패인지, 아니면 다른 힘이 작용한 결과인지는 남아 있는 서류와 녹음대본만으로는 단언하기 어렵다. 영화 <철조망> 검열서류의 구성 영화 <철조망>의 검열서류는 크게 세 묶음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1960년 3월 29일자 상영허가 신청서에서부터 문교부의 주관으로 국방부, 법무부, 외무부, 공보실, 내무부의 관계자들이 참석한 1차 검열시사(4월 15일) 및 김은우(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 및 이화여대 교수), 유호(경향신문사 문화부장), 원경수(연합신문사 기획국장), 성인기(조선일보사 부사장), 천관우(한국일보사 논설위원), 권순영(서울지방법원 소년부 지원장) 등 민간인들을 중심으로 한 검열위원회의 2차 검열시사(5월 7일)를 거친 후에 최종 상영불허가 판정을 내리기(5월 9일)까지의 과정을 담은 서류이다. 제작사인 홍기영화사에서는 최초의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한 이후에 영화를 자진 개작하고 상영허가를 재신청했다. 그 과정에서의 서류는 일부만 남아 있는데, 3월 29일에서 4월 5일 사이에 검열의 주무부처인 문교부와 제작사 사이에서 모종의 조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때 자진 개작한 부분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남아 있는 서류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 정부 각 부처의 관계자들에 의한 1차 검열시사와 민간 위원들에 의한 2차 검열시사가 이루어졌던 것은 이례적이다. 이는 4월혁명과 그 여파로 인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 듯한데, 민간의 검열위원들 또한 상영 불허가 의견을 견지했다. 4월혁명 이후 풍속 차원에서의 검열은 상당히 완화되었으나, 사상검열의 기준은 여전히 강고하게 존속하고 있었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둘째, 5월 9일자 공문서(문화 제1540호 “국산영화 <철조망> 상영 불허가의 건”)에서 지적된 사항을 토대로 홍기영화사 대표 이봉근은 영화를 대폭 수정하여 5월 11일에 재검열을 신청한다. 이에 문교부는 2차 검열시사에 참석했던 6인을 재차 검열위원에 위촉했다.(“검열위원 위촉의 건”, 1960년 5월 17일)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5월 18일에 실시된 검열시사에 참여한 민간 검열위원은 원경수, 권순영 두 사람 뿐이며, 그 외 문교부 관료인 변시민(문화국장), 유성열(예술과장) 두 사람이 배석했다. 재검열 결과 총 7개 처의 화면 및 대사를 삭제할 것을 조건으로 상영이 허가되었다.(문화 제1540호, “국산영화 <철조망> 상영허가의 건”, 1960년 5월 19일) 7개 처 가운데 6개 처가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지시를 다루는 영화의 결말 부분(S#126~137)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작자는 이 부분을 통째로 들어내는 대대적인 수정을 했다. 셋째는, 개봉 이후에 이봉근으로부터 홍기영화사의 대표직을 물려받은 정병준이 16mm 판본으로 <철조망>의 흥행을 하기 위해 복사판의 상영허가를 신청했던 1962년의 서류들이다. (“국산영화복사판 상영허가 신청서”) 당시에는 35mm 판본으로 극장 개봉을 마친 후에 16mm로 복사판을 만들어 흥행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었으며, 이 시기 영화들의 검열서류들 상당수는 16mm 판본의 상영허가서 관련 서류를 포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