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교시
- 감독
- 유희정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조아, 임지섭, 김우진, 송영규, 강별, 권고은, 김정욱, 이푸름, 조서윤, 박시윤, 최윤영, 이주미, 김지윤, 라종호, 오정연, 강예진, 김회창, 길경식, 도휘빈, 박상우, 박형준, 배우혁, 안채연, 이찬희, 정혜민, 정혜윤, 전규원, 최서호, 한서영, 김정윤, 박소언, 신수경, 윤한별, 임운화, 김규범, 김성경, 김성하, 성가인
증기선이 질주한다. 목재를 태우고, 목재가 떨어지자 뜯어낸 갑판을 태우고, 구명보트를 태우고, 밀랍인형을 태우고, 악마의 음료이자 만병통치약인 럼주를 태우며 질주한다. 닥터 존(윌 로저스)이 이끄는 낡은 ‘클레어모어 퀸’ 호는 폭발할 듯 불꽃을 뿜으며 1890년대의 미시시피 강을 달린다. 태울 수 있는 것들을 모두 태우자(존 포드의 형인 프랜시스는 여전히 술에 취한 채 동료 선원도 태우려 한다) 비로소 결승점에 도착한다. 목적지에 이르자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된다. 간발의 차이로 닥터 존의 조카 듀크는 교수형을 면하고, 그들 가족은 또 다른 증기선 ‘프라이드 오브 파둑’을 획득한다. 증기선은 자기의 모든 것을 태우고 달리며, 영화는 서사의 모든 것을 태우고 달린다. < 굽이도는 증기선 >이 걸출한 액션영화라면(하스미 시게히코는 이 영화를 최고의 액션영화 50편 중의 하나로 뽑았다), 증기선의 물리적 운동감 때문이 아니다. 사실 이 증기선은 그렇게 날렵하지도 빠르지도 않으며, 영화의 서사도 민첩하기는커녕 태평스럽고 느리기 짝이 없다. 태워질 것이라 예상할 수 없었던 것들, 사라질 것이라 기대하기 힘들었던 차이들이 화로에서 한몸이 되어 불타오른다. 불타오르며 둔중한 증기선을 힘차게 밀고 간다. 우리를 사로잡는 건 배의 속도감도 불의 물리적 형상도 아닌, 배의 육체도 서사의 육체도 다 태워버릴 듯한 난폭하고도 맹렬한 불의 활동이다. #1 #2 1939년 < 역마차 >가 나오기 전까지 존 포드의 1930년대는 위대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윌 로저스를 주연으로 기용한 세 작품(< 닥터 불 > < 저지 프리스트 > < 굽이도는 증기선 >)과 < 순례여행 > <에어 메일> 등을 제외하면 그가 <역마차> 이전에 만든 20여 편의 유성 영화들은 어딘지 허술하고 독창성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물론 < 밀고자 >(1935)로 첫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긴 했지만 이 영화는 과대평가된 포드 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의 동년배인 킹 비더와 조셉 폰 스턴버그가 무성 시대의 말기와 유성시대의 첫 10년 동안 자신의 대표작들을 쏟아낸 것과 비교하면, 존 포드의 1930년대는 차라리 탐색기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 굽이도는 증기선 >은 이 탐색기의 의심할 수 없는 최고작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존 포드의 거의 모든 것이 여기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처음엔 자신을 한 사건의 서사로 제시하지만 사건이 거의 잊혀질만큼 그것의 장악력이 느슨해지면서, 그 틈새들 사이로 유머와 헛소동, 잉여의 몸짓과 표정들, 그러니까 삶의 조각들과 세계의 조각들이 제멋대로 빛을 내며 활동하기 시작한다. 포드는 이 조각들의 난장을 플롯의 기예로 정리할 생각이 없다. 대신 하나의 결정적 활동 안에 그들을 밀어 넣는다. 미시시피 강에서 증기선 경주가 벌어지는 마지막 20여 분의 시퀀스는 그 조각들이 불타오르며 벌어지는, 영화사가 기억해야 할 황홀한 축제이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닥터 존은 미시시피 강 일대를 돌아다니며 싸구려 럼주를 만병통치약으로 속여 판다. 그는 한때 항해사였고 유일한 가족은 조카인 항해사 듀크다. 두 사람은 닭장처럼 초라하고 낡은 증기선 ‘클레어모어 퀸’을 최근에 구입해 들뜬 상태다. 듀크가 늪지대에 사는 소녀 플리티 벨과 사랑에 빠져 그녀를 데리고 나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그녀에게 추근대던 선원을 살해한 것이다. 선원이 먼저 칼을 뽑았기 때문에 정당방위이지만, 유일한 목격자인 얼뜨기 예언자 ‘새로운 모세’는 행방을 알 수 없다. 듀크의 사형이 확정되고 항소는 거부당했다. 사형은 증기선 경주가 끝나는 시점에 경주의 결승점에서 집행될 것이다. 클레어모어 퀸은 듀크의 결백을 증언할 ‘새로운 모세’를 찾아 결승점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한다. 여기엔 멀쩡한 사람이 없다. 주인공인 닥터 존은 사기꾼 약장사이며, 그의 조카는 정당방위이긴 하지만 사람을 죽였다. 자신을 새로운 모세, 새로운 엘리아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엉터리 예언자들, 자수하러 온 살인자에게 귀찮다는 듯 감옥 열쇠를 던져주는 보안관, 사형집행을 앞두고도 증기선 경주에 더 관심이 많은 주지사, 항상 취해있는 알콜 중독 기관사 에페(프랜시스 포드) 등등, 이곳은 사기꾼과 가짜 예언자와 주정뱅이와 게으른 관리의 세계다. 여기엔 영웅도 악인도 없다. 신기하게도 포드는 이 비루한 세계를 더없이 평화롭고 따뜻한 곳으로 그려놓았다. 닥터 존과 ‘새로운 모세’는 적이지만 둘은 부딪히는 일 없이 각자의 방식으로 사기 치며 살고 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미 벌어진 정당방위 살인과 곧 벌어질 부당한 사형집행.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 문제를 포드는 사소하게 다룬다. 그의 인물들은 종종 그 문제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의 서사는 스스로 종종 그 문제를 잊어버린 것처럼 진행된다. 인물도 서사도 주어진 그 순간이 전부인 것처럼 현재에 몰두하는 것이다. 포드는 때로, < 황야의 결투 > 혹은 < 웨건 마스터 >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영화가 심각한 문제를 다룰 때조차 심각해질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처럼 보인다. 혹은 영화가 사건을 등장시킨다 해도 사건을 다루는 매체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에게는 중심 사건조차 서사의 한 조각일 뿐이거나 때로 핑계에 가깝다. < 굽이도는 증기선 >에서 살인과 사형집행은 무엇의 핑계인가. 혹은 살인과 사형집행을 사소화하면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결국 증기선의 연료가 될 두 소재, 럼주와 밀랍인형을 먼저 떠올려보자. 닥터 존은 럼주가 전설의 인디언 처녀 포카혼타스의 처방약이라고 선전한다. ‘새로운 모세’는 럼주가 악마의 음료라고 주장하며 ‘병든 영혼을 치유하는’ 성령의 리본을 판매한다. 각각 전설과 성경을 근거로 럼주를 찬미하거나 규탄하는 것이다. 의미의 원천인 전설과 성경이 여기선 두 사기꾼의 효과적인 선전도구로 작동한다. 하지만 포드는 이 사기행각들의 악덕을 드러내기는커녕 그것에 유쾌한 활력과 정감을 불어넣는다. 우리의 주정뱅이 에페가 성령의 리본을 달고 악마의 럼주를 들이키며 즐거워할 때, 그는 사기의 희생자라기보다는 조작된 의미들과 유희를 벌이는 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존재처럼 보인다. 증기선 안에 설치된 밀랍인형 박물관은 모세와 선지자들, 나폴레옹, 조지 왕, 그랜트 장군 등 위대한 전설을 거느린 역사적 인물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영리한 사기꾼 닥터 존은 그들을 남부의 농부들이 좋아할 만한 인물로 바꿔버린다. 조지 왕은 조지 워싱턴으로, 북군의 그랜트 장군은 남군의 리 장군으로, 모세는 무법자 제시 제임스로 명찰을 바꿔단다. 이 영화의 가장 우스꽝스러운 장면 가운데 하나는, 박물관을 부수러 온 성난 농부들이 제시 제임스로 앞에서 겁을 집어먹고, 리 장군에게 경례를 하는 장면이다. 총을 든 제시 제임스는 좀 전까지 모세였고, 리 장군은 좀 전까지 자신들이 싫어하는 그랜트 장군이었다. 물론 둘 다 밀랍인형이라는 모조품이다. #3 #4 #5 #6 럼주와 밀랍인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소동들 속에서 역사와 전설, 신화와 성경은 제멋대로 전용되며 조작된다. 진리의 원천, 의미의 심층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지금 이곳에서 모든 것은 표층의 유희로 전유 되어 끝없이 변형된다. < 굽이도는 증기선 >가 기호 놀이라면 기의를 따돌린 기표들의 아방가르드적 유희가 아니라, 임의적이고 일회적이며 종종 기만적인 의미작용 자체를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기호놀이다. 이제 이 영화에서 사건의 역할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형집행은 사건으로서의 중대성 때문이 아니라 이 기호놀이의 종결자로 동원된 것이다. 클레어모어 퀸은 유일한 증인 ‘새로운 모세’를 찾아 사형집행 전까지 결승점에 도착해야 한다. 그 둔중한 육체를 전속력으로 약동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건 에너지이며 힘이다. 이제 주변 사물들은 그것의 유동하는 의미와 상징이 아니라 에너지를 발산하는 순수한 물질로서만 가치를 지닌다. 조지 워싱턴, 리 장군, 제시 제임스, 악마의 음료, 만병통치약은 사라지고 오직 연료로서의 물질들만 남았다. 사형집행은 기만적이고 유희적인 기호놀이를 중단시키고, 모든 것을 힘과 속도의 문제로 바꿔버린 것이다. 목재는 물론이고 갑판도 구명보트도 태워버린 뒤, 닥터 존이 외친다. “박물관을 태워.” 이제 이름들과 의상들이 상징들이 사라지면서 밀랍인형들이 불탄다. ‘박물관’마저 다 태워버리자 화로는 다시 죽어간다. 부당한 사형집행을 막을 시간도 사라져 간다. 이때 주정뱅이 에페가 화로 곁에서 럼주를 마시지 않았다면, 그를 본 ‘새로운 모세’가 화를 내며 술병을 빼앗아 화로에 던지지 않았다면, 아무도 이 악마의 음료가 그토록 가공할만한 연료인지 몰랐을 것이다. 누가 주정뱅이를 비난할 것이며, 거짓예언자를 손가락질할 것인가. 우연의 간계는 때로 악덕을 천상의 미덕으로 바꿔놓는다. 럼주가 마지막 연료로 등장해 화로에서 폭음을 내며 배를 집어삼킬 듯 불꽃을 내뿜을 때, 탄성을 참기 힘들다. 닥터 존에게 럼주는 이제 조카의 죽음을 막은 진정한 만병통치약이 되었다. ‘새로운 모세’에게 이것은 악마의 음료를 태워 없애며 한 생명을 살린 신성한 의식이 되었다. 두 사람은 사기꾼이며 엉터리 예언자였고 또한 서로 적이었지만, 어떤 논쟁도 대결도 없이 럼주를 함께 불태우는 행위 하나만으로 자신의 사기와 엉터리 예언을 자기도 모르게 정당화한 것이다. #7 의지와 우연, 미덕과 악덕들이 모두 하나의 불꽃으로 타오르자 비로소 간발의 차이로 행복한 목적지에 이른다. 이 대책 없는 서사의 낙천성은 세계관의 낙천성과 무관하다. 그것은 의지의 뜨거움이 아니라 운명의 차가움에 대한 긍정이며, 운명의 차가운 힘을 알게 된 자의 유희정신이다. 존 포드는 후에 “이건 훌륭한 영화가 될 수 있었는데, 나서기 좋아하는 새 매니저(대릴 F. 자눅을 말한다)가 와서 코미디를 다 덜어내는 바람에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불평했지만, < 굽이도는 증기선 >는 여전히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코미디 중 하나이고, 소란과 난장의 활력이 영화 전부를 지배하는 포드의 첫 유성영화이며, 그의 후기 대표작들을 예기하는 걸작이다. 이 영화가 개봉하기 3주 전인 1935년 8월 15일, 윌 로저스는 비행기 사고로 5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전 세계를 누빈 카우보이, 신랄하고도 유머러스한 칼럼니스트, 보드빌과 연극과 영화를 오간 배우이자 타고난 익살꾼이었던 로저스는 대통령에서부터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당대 미국인이 가장 사랑한 사내였다. < 굽이도는 증기선 >의 원래 엔딩은 로저스가 또 다른 증기선 선장에게 손을 흔들며 안녕을 고하는 장면이었지만, 그의 죽음 직후 그가 증기선에 편히 누워있는 지금의 엔딩 장면으로 바뀌었다. 원래 엔딩으로 상영할 경우 극장이 울음바다가 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비디오테이프가 나오기 시작한 1980년대만 해도 볼만한 영화가 많지 않았다. 비디오를 빌려주는 가게에서도 유명한 배우들이 나오는 메이저영화는 소수였다. 일주일에 서너 편 빌려 보면 고작이었다. 한창 영화에 빠져들었던 시절이라 비디오 가게를 일주일에 서너 번 갔고, 갈 때마다 두세 편은 골랐다. 금방 볼 영화가 떨어졌다. 그러면 전혀 모르는 제목과 비디오 재킷을 곰곰이 살펴보며 어디선가 들어본 감독이나 배우인지 생각했다. 짧은 줄거리를 읽으면서,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을지를 상상했다. 그렇게 본 영화들은 주로 B급 영화였다. 원래 B급 영화는 동시에 2, 3편을 개봉하는 극장에서 유명 배우가 나오는 A급 영화에 끼워 파는 영화를 말했다. B급 영화는 SF, 호러, 범죄와 액션 등 소수의 팬이 존재하는 특정 장르를 표방한 영화들이 많았다. 제작비와 시간만 엄수한다면 비교적 자유로운 제작환경이었기에 독특한 영화들이 나올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제작과 배급의 독점이 금지되면서 원래의 B급 영화 제작은 사라졌지만, 소규모 제작사들이 만드는 저예산 영화를 흔히 B급영화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화사적으로도 B급 영화의 자유로운 정신과 기발한 표현을 평가하게 되었다. 한참 B급 영화들을 빌려볼 때의 성공 확률은 1/3에서 1/4이었다. 감독과 배우의 이름도 낯설고, 선정적인 내용이지만 조잡해 보이는 영화들 중에서 간혹 흥미로운 영화들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유명한 감독이었지만, 그 시절에는 미처 몰랐던 경우도 있었다. 켄 러셀의 < 크라임 오브 패션 >이나 조지 로메로의 <데이 오브 더 데드>도 80년대 중반에 비디오로 봤을 때는 누구인지도 잘 몰랐다. 몇 년 뒤에야 거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실 이런 영화들은 B급 영화라고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다. 진짜 B급 영화라고 부를 만한 영화들은 거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다. 감독도, 배우도 누군지 잘 모른다. 하지만 논리도 없고 유치한 상황들이 전개되면서도 기묘한 흥을 자아내는 영화들이 있다. 뒤죽박죽이지만 일관되게 자신의 취향이나 주장을 밀고 나가는 유희정신 같은 게 보인달까. 포스터 로비 픽커링 감독의 < 프릭스 오브 네이처 >를 포스터만 보고 아무런 정보 없이 선택했다.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아마도 주인공으로 보이는 고등학생 남녀가 밤길을 마구 달려간다. 아마도 좀비처럼 보이는 무리가 그들을 뒤쫓는다. 남자의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이 모든 것이 시작된 이유는 에이리언 때문이라고. 아니 좀비 영화가 아니라고? 그리고 영화는 시작점으로 돌아간다. 딜포드는 햄버거 패티를 만드는 공장이 있는 작은 마을이다. 고등학교의 평범한 아침 풍경이 보이는데 뭔가 다르다. 통학버스에서 좀비가 함께 내린다. 옆의 아이를 물어뜯으려 하자 좀비의 목걸이에서 전기충격이 일어난다. 사물함 옆에서 약자를 괴롭히는 아이에게는 기다란 송곳니가 있다. 뱀파이어다. 딜포드는 인간과 뱀파이어와 좀비가 공존하는 사회다. 왜,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좀비를 값싼 노동력으로 이용하는 것은 알겠지만 왜 학교를 다녀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뱀파이어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설정을 정교하게 만들어 관객에게 이해를 시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를 전개시키는데 필요한 설정만 있으면 되니까. 싸구려 B급 영화의 흔한 경우다. 키도 크고 멀끔하게 생긴 대그는 로렐라이에게 푹 빠져 있는데, 로렐라이는 대마초를 맡기고 가끔 들러 피우는 용도로만 대그를 이용한다. 대그가 접근하면 자기는 순결을 지킨다고 말한다. 페트라는 좋아했던 뱀파이어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아 설레지만 그의 목적은 오로지 피였다. 뱀파이어가 된 것을 안 페트라는 절망한다. 공부는 잘하지만 너드인 네드는 학교에서 따돌림받고, 집에서도 외면당하자 자진해서 좀비가 된다. 좀비처럼 사는 것과 좀비가 되는 것, 어차피 뭐가 다를까. 대그와 페트라는 어렸을 때 약간의 악연이 있었고, 대그와 네드는 친구였지만 성장하면서 멀어진 사이다. 이렇게 인간인 대그와 뱀파이어인 페트라와 좀비인 네드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외계인이 침공한다. 그러니까 < 프릭스 오브 네이처 >를 장르로 말한다면 전통적인 유니버설 호러 영화의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하는 50년대 외계인 침공영화의 현대판이다. 외계인이 침공을 시작하자 인간과 뱀파이어와 좀비의 대립이 격화된다. 서로를 의심하고, 서로 외계인을 불러들였다고 비난한다. 좀비가 된 네드가 이끄는 좀비들도 공격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외계인이 모두를 잡아먹기 시작하자 아수라장이 된다. 대그와 페트라와 네드는 지하실에 숨는다. 대그와 페트라는 사랑에 빠지고, 천재인 네드는 외계인을 공격할 방법을 찾는다. 뇌를 먹지 않는 좀비는 인간의 지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도 뜬금없이 나온다. 외계인이 딜포드의 햄버거 패티가 필요해서 왔다는 사실도 그냥 밝혀진다. 어이없는 이야기 진행이지만 애초에 정확한 논리가 중요한 영화가 아니다. 갑자기 거대해지고 영리해진 외계인이 인간에게 교훈을 늘어놓는다. 평화롭게 열심히 잘 살아라. 그러자 갑자기 사람들이 비난을 시작한다. 너나 잘해, 네가 뭔데 설교질이야 등등. 그러자 화가 난 외계인이 다시 공격을 시작한다. 이런 식이다. 어이없는 상황이 난데없이 벌어지고 그걸 발판삼아 다음 상황이 전개된다. 그런데 그런 밑도 끝도 없이 등장하는 장면들이 제일 재미있다. 어차피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뒤죽박죽으로 모든 것을 싸안고 달려가는 것. 앞뒤를 재는 것이 아니고 그 순간, 오로지 하나의 말장난이나 액션이 필요해서 만들어지는 장면들. 그야말로 전형적인 B급영화의 장난이고 책임방기다. 알게 뭐냐. 그냥 재미있으니까 이런 장면을 넣어야지.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주로 대화로 진행되는 초반이 황당하면서도 별 재미는 없는 것에 비해 중반을 넘어 액션으로 진행되면 확실히 경쾌하고 즐거워진다. 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순간의 어처구니없음이 순수한 B급 영화의 재미다. < 프릭스 오브 네이처 >가 그렇다.
우리가 여행하려는 존 포드의 세계는 넓고 깊다. 잘 알려진 곳도 있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곳도 있다. 물론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경도 있다. 잘 알려진 곳들을 표준적인 코스, 덜 알려진 곳들을 마니아 코스, 거의 알려지지 곳들을 나만의 코스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안내자로서 표준적인 코스를 제시하는 것을 가능하면 삼가려 한다. 표준적인 것은 이미 검증을 거쳤으므로 실패할 위험은 없지만 다소 따분해질 수 있다. 우리의 여행은 샛길과 뒷골목의 여행이 되면 좋겠다. 빠져나갈 길을 못 찾아 헤매기도 하고, 결국 시간 낭비로 판명될 우회로를 하염없이 걷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이편이 좋을 것이다.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우리가 영화에 사로잡히는 순간은 종종 표준적인 지식, 공인된 영화사적 상식 밖에서 일어난다. 본격적인 탐방에 앞서, 두 가지 예비적 가설을 말하려 한다. 예비적 가설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것이 확증된 진실의 테제가 아니며, 수정과 반박에 열려 있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여행이 끝날 무렵 이 가설이 오류로 판명될 수도 있다. 하지만 완전한 무지 상태에서의 여행은 불가능하다. 어떤 여행자도 최소한의 기대조차 없이 발걸음을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가설은 표준적 가이드북을 일단 가방 맨 밑바닥에 쑤셔 넣은 우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지침, 혹은 기대의 지평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가설은 다음과 같다. 1. 존 포드는 ‘고전적’ 감독이 아니다 입문자는 물론이고 영화사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들에게도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먼저, 시네필이나 영화전공자들에게는 불필요한 말이겠지만, 고전영화라는 표현이 불러일으키기 쉬운 혼동을 짚고 가는 게 좋겠다. 영화사에서 고전(classic)은 정전(canon)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이 영화는 영화사의 고전이 될 것이다”라는 간혹 접하게 되는 문장에서의 고전이라는 단어는 문학사에서의 용법을 빌려온 것으로 사실상 정전을 뜻한다. 하지만 영화사에서 고전이라는 단어는 대개 정전이 아니라, 음악사 혹은 미술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의 사조를 지칭한다. 여기서 우리의 용법도 거의 예외 없이 ‘고전’은 ‘고전적’으로 바꿔 써도 좋을, 특정 사조의 수식어에 한정될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사에서 고전은 어떤 사조인가. 고전영화는 고전 할리우드영화, 혹은 고전 서사영화와 동의어이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고전영화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할리우드를 지배했던 영화전통”으로 “주류 서구영화에서도 그 전통을 찾을 수 있다.”(「영화사전」, 수잔 헤이워드, 한나래). 1917년에 시작해 1966년까지 이어지는 할리우드 감독으로서의 존 포드의 영화 이력은 이 시기의 거의 전부를 포괄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고전영화의 문법을 확립한 거인들 중 하나다. 그런데 왜 존 포드가 고전적 감독이 아니라는 말인가. 여기엔 서로 연관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고전영화와 모던영화의 이분법이 초래하기에 십상인 오해 때문이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말하면 고전영화는 기승전결의 완결적 서사구조를 갖춘 영화, 모던영화는 그 완결성에 저항하는 열린 구조의 영화다. 문제는 이 이분법이 종종 일종의 시대구분론까지 은연중에 강제한다는 점이다. 즉 영화의 탄생부터 1920년대까지를 초기영화(혹은 원시적 영화) 시대,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를 고전영화 시대, 1960년대 이후(논자에 따라서는 2차 대전 이후, 혹은 오슨 웰즈와 로베르토 로셀리니 이후)를 모던영화 시대로 구분하는 흔한 도식이 전형적인 사례다. <셜록 주니어> <선라이즈> <분노> <사이코> 이런 도식이 정당화되려면, 초기영화와 고전영화와 모던영화에 대한 정교한 정의와 각 시대의 방대한 영화들에 대한 실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건 성공하기 힘든 시도이다. 모던 혹은 모더니즘과 모더니티에 대한 악명 높은 개념적 혼란을 피할 수 없고, 아방가르드를 제외한다 해도 너무도 많은 예외들을 외면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초기영화’이자 당대의 주류영화인 < 셜록 주니어 >(버스터 키튼, 1924)가 어떻게 그 놀라운 액자구조를 통해 ‘모던 이후’를 선취했는가. < 선라이즈 >(무르나우, 1925)는 이미 모던영화의 데드타임을 깊이 의식하고 있지 않은가. 로베르 브레송은 고전영화와 모던영화 어느 편에 속하는가. 프리츠 랑의 < 분노 Fury >(1936), 혹은 프랭크 카프라의 < 멋진 인생 It’s a Wonderful World >(1946)은 과연 완결된 서사인가. < 리오 브라보 >(하워드 혹스, 1959)에서 황혼녘에 울려 퍼지는 그토록 아득한 노랫소리를 서사적 기능에 한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 사이코 >(알프레드 히치콕, 1960)에서 마리온의 눈앞에 등장한 불길한 저택의 이미지는 그녀의 죄의식이 반영된 서사적 요소인가, 아니면 서사적 기능을 뛰어넘는 모던한 자율적 이미지인가. 텍스 에이버리의 ‘포스트모던’한 유희정신으로 가득한 애니메이션은 또 어떤가. 우리는 여기서 복잡한 이론과 역사의 문제에 뛰어들 필요는 없다. 다만 앞서 말한 시대구분의 도식이 한 위대한 감독의 영화세계를 여행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두고 싶다. 물론 이건 나만의 견해는 아니다. 자크 오몽은 「영화와 모더니티」에서 “어떻게 고전/모던과 같은 조잡한 기준으로 영화사 40년을 서술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화난 듯이 썼다(이 책에는 오몽조차 모던이 시대적 개념인지 미학적 방침인지 혼동하는 듯한 대목들이 있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저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시대구분 도식의 고착화에 기여한 들뢰즈의 「시네마」에 대한 날카로운 논평이 담긴 ‘하나의 이미지에서 또 다른 이미지로? - 들뢰즈와 영화시대들’(「영화 우화」, 자크 랑시에르)를 읽어봐도 좋겠다. 요컨대 영화사는, 굳이 그 개념을 써야 한다면, 고전과 모던과 포스트모던이 착종된 역사다. 카메라라는 기계장치와 편집을 포함한 후반 작업에서의 창의적 테크닉이 빚어내는 놀랍게 다양한 표현능력의 원심력과 시장논리에 지배되는 시스템의 구심력이 매번 특별한 조합을 빚어내는 기이한 분야가 영화사다. 다른 예술 장르에서라면 소수의 예외들을 제외하고 성립하는 진화론적 시대구분은 영화사에선 이 때문에 대개 실패한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과잉의 매체’이며(「영화이론의 개념들」, 더들리 앤드루), 끝내 정돈되지 않는 이 과잉성에 언제나 모던한 요소가 잠재해 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따라서 한편의 영화를 두고 고전 혹은 모던의 소속을 정하는 건 대개 무의미한 노력이 된다. 물론 어느 시대이건 지배적 양식이 있다. 영화사의 양식들은 영화의 과잉성을 다루는 방식과 관계있다.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이 장의 표제어인 ‘고전’ 즉 ‘클래식 할리우드’라는 양식이다. 영화의 과잉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최소화한 이 양식은 분명히 할리우드에서 정립되었고, 지금도 가장 강력하고 지배적인 양식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고전’이라는 단어는 엄격히 사조 혹은 양식의 의미로만 써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금방 혼란에 빠진다. 고전은 모던과 같은 층위가 아니라, 표현주의, 시적 리얼리즘, 네오리얼리즘 등과 같은 층위에 놓인 단어다. <젊은 날의 링컨>(1939) <변호인>(2013) 고전이라는 양식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관해선 데이비드 보드웰의 중요한 저서(「The Classical Hollywood Cinema : Film Style and Production to 1960」, 1985)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 책의 도움 없이도 그 대강의 내용을 우리의 관람체험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질서-무질서-질서의 회복이라는 플롯, 인물 중심의 이야기, 서사의 완결성, 보이지 않는(이음매 없는) 편집, 서사에 봉사하는 스타일 등등. 이런 의미에서라면, 최근 1천만 관객이 본 < 변호인 >은 어떤 고전영화들 못지않게 ‘고전적’이다. 고전영화는 사실상 주류영화와 거의 동의어이다. 존 포드는 어떠한가. 그는 고전적 양식의 수립에 기여한 감독이지만 그 양식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고전적 정전들을 빚어냈지만 표현주의자이기도 했고, 모더니스트이기도 했다. < 변호인 >과 많은 공통점을 지닌 < 젊은 날의 링컨 >(1939)을 비교하면 후자가 놀라울 정도로 모던하다(이 문제에 대해선 나중에 별도의 장에서 상세히 말하고 싶다). 75년 전 고전기의 한가운데서 태어난 고전적 거장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모던영화이고, 21세기의 한국영화가 고전영화라면, 이 단어들의 효용성은 초라한 것이다. 요컨대 고전영화라는 개념은, 모던 혹은 포스트모던과 마찬가지로 영화 세상에서 지배적 양식을 설명하는 데 일정한 효용성이 없지 않지만, 시대 구분의 표제어로 등장하거나, 한 감독 때론 한 작품의 학파를 규정하는 용어가 되는 순간 너무 헐거워지거나 부정확해지기 십상이다. 대안적 이론이나 개념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여행과 감상을 도와주기는커녕 방해하기 십상인 어설픈 개념들과 선입견을 버리자는 것이다. 존 포드가 고전적 감독인가 모던한 감독인가, 같은 질문 자체를 폐기하자는 것이다. 곰브리치는 “사람을 속물근성에 젖게 만드는 어정쩡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보다는 미술에 관해 전혀 모르는 것이 훨씬 낫다”(「서양미술사」)고 했는데, 여기서 미술을 영화로 바꿔도 이 말은 유효할 것이다. <역마차>(1939) 2. 존 포드는 서부극 감독이 아니다. 이 명제는 단순하지만 논쟁적인 면도 포함하고 있다. 단순한 면부터 먼저 말해보자. 존 포드는 43편의 무성 서부극을 만들었고, < 3인의 악당 3 Bad Men >(1926)의 흥행 실패로 13년 동안 서부극을 만들지 않았다. < 역마차 >(1939)로 소위 A급 서부극을 부활시킨 이후 포드는 15편 정도의 서부극을 만들었다. 이 수치는 그가 토키시절에 만든 극영화 편수의 4분의 1 정도다. 물론 거기엔 고전적 서부극의 완성이라 일컬어지는 <역마차> 외에도 서부극 최고의 걸작으로 칭송되는 < 수색자 >(1956), 서부극에 대한 위대한 만사로 간주되는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1962> 등이 포함되어 있다. 「사이트 앤 사운드」 (2012. 12)의 설문조사에서도 서부극 톱 10 목록에 4편의 존 포드 영화가 올라있다.(<수색자> <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 웨건 마스터 >) 그런데도 존 포드를 서부극 감독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 억지가 아닌가. 나도 다소 억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이 명제를 꺼내 든 것은, 우선 그가 서부극만 만든 게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물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중요한 건 아니지만, 4번의 감독상을 비롯해 그가 받은 6번의 아카데미상도 모두 비서부극에 주어졌다.) 그런데도 이 강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 존 포드 세계의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경이 비서부극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 존 포드의 최고작 5편을 뽑으라면 < 도망자 > < 태양은 밝게 빛난다 > < 라이징 오브 더 문 > < 젊은 날의 링컨 > < 수색자 >이다. (물론 이 명단은 수시로 변할 수 있다) <수색자> 외엔 비서부극이다. 그렇다면 존 포드를 서부극의 감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게 과장인 건 분명하지만, 억지만은 아니지 않을까. 맞다. 나는 지금 여행가이드라는 직분을 핑계 삼아 사적인 편견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가이드를 만난 게 불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새로운 코스를 발견하는 도전적인 여행의 기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로선 당연하게도 후자라고 생각해주시기를 바란다. 내가 편견을 주장함으로써 기대하는 것은 동의가 아니라 환기이며, 그것이 질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정당화의 핑계를 하나 더 대자면, 나와 내 동료들의 경험에 비춰볼 때, 편견과 편애는 영화 세상에서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종종 생산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나는 영화 개론서들을 싫어하는데, 그 책의 저자들이 나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다 해도, 그것으로 익힌 어설픈 표준적 지식들이 내가 편견과 편애를 가질 기회를 종종 박탈하기 때문이다. 필름누아르의 걸작을 보며, “저 장면이 독일 표현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명암대조법이군”이라는 말을 중얼거리게 된다면 그 영화에 결코 다가갈 수 없다. 이 명제의 논쟁적인 면은 서부극의 장르적 지위와 관련이 있다. 최근의 장르연구들은 영화사 초기의 멜로드라마를 모든 할리우드 장르의 기본양식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미국 저널리즘과 학계에서 사용되는 멜로드라마의 개념은 우리의 개념과는 달리 “열정과 부정과 범죄와 보복에 관한, 유혈과 폭력이 난무하는 드라마”(「영화 장르」, 배리 랭포드)로, 19세기 통속연극을 스크린에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이 논지에 따르면 서부극도 멜로드라마에 뿌리를 둔 하나의 장르이다. 이와는 별개로 거의 모든 장르연구가들이 동의하는 서부극의 장르적 성격은 ‘황야와 문명의 대립 및 상호모순적 의존’이라는 모티프에 의존하며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서부극에 대한 이 견해와 정설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 견해는 전문학자들처럼 방대한 실증적 사례가 뒷받침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직관적인 것이다. 다른 글(「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서문)에서 그 견해를 밝힌 바 있으므로 요지만 말하자면 이렇다. 서부극에서 황야로 표현되는 풍경은 문명의 대립항이 아니라, 문명 내부의 갈등이 벌어지는 장소이면서 그것을 초과하는 시간이자 큰 형식이다. 서부극의 주인공들은 황야와 싸우는 게 아니라 황야라는 장소 혹은 풍경의 시간 내부에서 또 다른 문명 혹은 문화와 싸우는 것이다. 미국학자들이 황야를 문명과 같은 층위의 대립항으로 놓은 것은, 건국 초기의 서부 개척이라는 자신들의 역사적 경험을 과도하게 도식화해 적용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서부극이 왜 서부 개척의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외국 관객과 영화인들에게도 그렇게 큰 호소력을 가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서부극처럼 미국의 삶이 상상계 구조에 너무도 촘촘히 짜여져 있는 장르가 상이한 시기에 다른 내셔널 시네마 몇몇에 의해 성공적으로 흡수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영화 장르」) 서부극에는 세 가지 시간대가 교착하며 상호작용하고 있다. 인물들의 시간, 역사적 시간, 그리고 풍경의 시간이다. 풍경의 시간이 결국 다른 두 시간을 압도한다. 서부극의 진정 위대한 전통은 미국학자들이 역사적 경험을 재현했다고 간주하는 서부-황야-풍경이라는 장소와 시간의 영화적 발명이다. 멜로드라마는 연극의 무대장치를 계승했지만, 서부극은 영화적 풍경을 발명했다. 이런 의미에서 서부극은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또 하나의 원형적 장르이며, 이후의 영화들은 이 세 시간대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이 논의는 이후 존 포드의 개별 작품을 말할 때, 다시 거론할 생각이다. 정리하자. 이렇게 서부극을 이해한다면, 이 장의 명제는 뒤집혀야 한다. 존 포드야말로 진정한 서부극 감독이다. 어떤 서부극 감독도 그처럼 풍경의 시간을 서사적으로 또한 시각적으로 풍성하게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포드는 “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대지(land)”라고 말했다. 이 말은 왜 그의 비서부극조차 그토록 서부극적인지를 이해하게 해주는 열쇠다. 그런 면에서 존 포드를 관습적인 의미에서의 서부극 감독이라고 부르기보다 차라리 ‘대지의 감독’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장의 명제를 과도한 역설로 표현한 것은, 이 말에 이르기 위해서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