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마이 지니어스
- 감독
- 구윤주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구윤영, 문선숙, 구윤주, 구윤희, 구민수
<플란다스의 개>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가고 싶은 질문. 영화평론가와 아닌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한때는 비평의 태도로 영화글을 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비평’의 의미를 정의해보려고 했고, 내 안에서만 작동하는 매우 보수적인 기준을 세워보려 했던 시절도 있었다. (《씨네21》이나 《부산일보》 등 매체에서 평론상을 받고 등단한 사람? 적어도 영화 관련 전공 대학원 석사 이상 학위를 소지한 자?) 요즘은 그냥 본인을 영화평론가라고 지칭하느냐 마느냐, 에 달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보기엔 쓰는 글에 차이가 없는데 누군가는 “어이쿠, 제가 감히? 어떻게? 영화평론가인가요? 그냥 리뷰어, 리뷰어!”라고 손사래를 치고 누군가는 영화평론가라고 본인을 수식하며 강연을 다닌다. (이것을 자신감의 차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그런데 영화평론가는 ‘영화력’의 등급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 아니었나. 이를테면 내가 이른바 언론고시를 준비했었고 ‘취재’를 직업적 정체성으로 생각하며 12년 동안 일했던 사람인지라 스스로를 ‘기자’라고 먼저 정의하는 것처럼. 어찌 됐든 자아 성찰 끝에 스스로를 ‘영화평론가’라고 지칭할 근거를 찾고 주변에서도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는 사람들, 이라고 얼렁뚱땅 정의를 내린 후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다. 한국에서 ‘영화평론가’라는 타이틀은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 비평가의 정체성이나 비평의 의미를 논하는 글이 아닌,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취미로 영화평론을 한다면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 브런치에 글을 올리거나 뉴스레터를 발행해도 되겠지만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글을 기고할 수 있는 매체를 확보하는 것이 권장된다. 영화 잡지가 여럿 존재했던 전성기(너무 아득해서 역사책에 나오는 얘기 같다)를 지나 지금은 비평을 실을 수 있는 매체가 얼마나 있는가? 그러니까 이 시장이 충분한 독자층을 갖고 있나? 구독 매출만으로 유지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기성 지면 매체는 결국 광고 없이 생존할 수 없다. 영화 관련 지면에 가장 많이 들어올 법한 광고가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영화다. 광고 집행을 결정하는 광고주 그리고 그들이 파는 영화를 비평하는 글이 실리는 매체의 협력 때로는 신경전은 그 역사가 참 유구해서 새삼스럽게 언급하기도 민망할 정도다. 그 와중에 영화 시장은 어려워지고 마케팅 트렌드가 급변했으며 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다. 멋진 독립 잡지들을 기획하고 발행하는 업계 동료들은 매체의 딜레마와 극장 산업 하락세, 비평의 위기 속에서 나름의 전략을 갖고 비평이 독자를 만날 수 있는 창구를 확장해 가고 있다. 늘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다. 영화평론가를 꿈꾸는 어느 20대 학생에게 “글만 쓰면서 먹고 살 수 없다”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줬더니 “관객과의 대화(GV)를 다수 진행하며 커리어를 키우고 싶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냉정하게 계산해 보겠다. 영화글과 GV 모더레이터 활동을 병행하는 것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매달 원고지 200자 기준 70~100매의 원고를 쓸 수 있는 (원고료를 후려치지 않고 입금이 밀리지도 않는) 안정적인 지면이 마련되어 있고 매달 5~10개의 GV를 진행해야 한다. 그러면 최저 임금 수준의 돈을 벌 수 있다. 글을 기고할 수 있는 매체든 GV든 이미 탄탄한 네트워크를 만든 선배들과 한정된 자리를 갖고 경쟁해야 하는 것도 명심할 것. 이 와중에 진행비를 안 받거나 최소한만 받고 하겠다는 더 유명한 사람이 나타나면 나라도 그 사람에게 맡길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자기 PR’의 기회로 삼아 방송 출연 기회까지 가닿는다면 돈벌이 면에서 나아질 수 있다. 당연한 소리지만 방송 출연료가 원고료나 모더레이터 진행비보다 들이는 시간 대비 수입이 높다. 방송 경험을 인정받아 안정적인 방송인으로 활동할 수 있다면 ‘영화평론가’여도 나름 괜찮은 수입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고정 방송 스케줄이 존재하는 영화평론가나 기자가 몇 명이나 있는지 떠올려보길 바란다. 요즘 영화 자체가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GV 문화가 사라진다면? 지금이야 존재하지만 딱히 대체할 마케팅 방식을 찾지 못해 지속되는 것일 뿐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안다. 나는 모더레이터 일을 병행하는 사람 중에 “언젠가 이 시장이 사라질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방송 출연 스케줄이 있는 사람들도 똑같이 말한다. 그밖에 대표적인 부업으로는 대학이나 교육기관 강연, 영화제 심사 등등이 있다. 그렇게 믿을 구석 없는 프리랜서는 알아서 경력 쌓고 인맥 만들고 일거리를 따와야 한다. 내가 존경하는 어떤 선배들은 비평 기고, 모더레이터, 교육기관 강연, 영화제 심사가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을 멋지게 개척했다. 역시 저 정도 기획력과 추진력이 있어야 오래오래 살아남는 걸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아, 한 가지 확실한 길이 생각났다. 바로 영화과 교수가 되는 것이다. 본업은 교수, 부업은 평론가라니, 할 수만 있다면 갖고 싶은 부러운 삶이다. 그러려면 석박사 학위부터 필요하겠지? 물론 쉽지 않다. 십 년 전쯤 “다 때려치우고 뉴욕의 모 영화 학교나 갈까?” 하고 정보를 알아볼 때 억대 학비와 생활비가 들어간다는 그 학교에 이미 다니고 있는 학생이 “여기 한국인이 되게 많고요…. 한국으로 돌아가면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그럼 우리끼리만 해도 경쟁률이…. 저요? 요즘 《씨네21》 영화평론상 준비하고 있어요”라고 말해서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이 난다. 석박사 학위, 그리고 꽤 많은 돈이 깨지는 유학 경력만으로 보장되는 것은 없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잘 해야 한다. 공교롭게도 이 글을 쓰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 플란다스의 개 >(2000)였다. 예술가보다는 인문대 시간 강사가 영화기자 및 평론가의 상황과 비슷해서라기보다는, 극중 캐릭터들이 처한 곤궁과 선택이 닮아서였다. 윤주( 이성재 )는 “여성들이 원하는 배우자의 직업 순위 48위 광부, 49위 농부”보다 순위가 낮은 “50위 인문계 대학원생”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인문대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지만 교수 임용이 되지 못해 경제적으로 아내에게 의지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 내 개 짖는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린 그는 결국 강아지들을 납치해 감금 혹은 살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 시작하는데, 정작 임신한 아내가 반려견을 집에 데려온다. 아내가 애지중지하는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러 나갔다가 실수로 잃어버린 후 윤주의 입장도 달라진다. 아파트 경비실 경리 현남( 배두나 )과 함께 강아지를 찾아 헤매던 그는 마지막 남은 양심을 걸고 자신이 독거 할머니의 강아지를 죽인 범인이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만취한 현남은 알아채지 못한다.) <플란다스의 개>는 한국의 일상적 공간에서 장르성과 정치 역학을 포착한 뒤 치밀하게 때로는 분방하게 교차해 온 봉준호 감독의 인장을 일찌감치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복도식 아파트, 지하실, 경비 사무실은 공포, 미스터리, 스릴러의 가능성을 시험할 수 있는 무대이자 한국 소시민 사회의 축소판이다. 현남은 사회 정의 실현으로, 윤주는 명예와 물질적 보상으로 일종의 신분 상승을 노리지만 완벽히 실현되지 못한다. 공교롭게도 현남에게는 명예와 물질적 보상이 부족했고, 윤주는 윤리를 저버린 타락한 소시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남의 행위는 대가가 허무했고(할머니가 남긴 건 무말랭이가 전부다) 그의 영웅적 행위는 널리 알려지지 못한다(그는 인터뷰에 응하지만 TV 뉴스는 그의 존재를 지운다). 강아지를 구한 자신의 인터뷰를 편집한 TV 뉴스에 실망한 현남은 아파트 경비실 경리직에서도 근무 태만으로 해고되고 친구와 함께 산으로 도피한다. 윤주는 아내가 퇴직금으로 마련한 천오백만 원을 뇌물로 바치면서 교수 임용에는 성공하지만, 마지막 양심 고백이 가닿지 못해 윤리의 최저선을 방어할 기회를 무산시킨다. 현남과 윤주 새로운 영화 담론을 제시해 사유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비평의 욕망에는, 이런 행위가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을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시킬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가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비평의 자리가 좁아지면서 나의 행위가 누구에게 전해지고 있는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직업적 자아실현과 ‘먹고사니즘’이 충돌할 때 우리는 때로는 타협한다.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것은 A지만, 꾸준히 A를 할 수 있는 미래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B와 C까지 하는 것이라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 생계 압박이 낳은 조바심이 내가 설정한 하한선을 위협할 때, 아니 그 하한선을 어디까지 더 내려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찾아온다. 영화기자와 영화평론가의 현실적 고민은 대체로 윤주와 현남 사이를 오간다. 그래도 윤주의 선택이 현실에 가깝다고 자조하기보다는 현남의 소우주에서 싹튼 정의감이 소소하게라도 이어졌으면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그런 성향의 인간이라 아직 좋은 글과 좋은 영화가 주는 성취감을 믿고 악착같이 붙잡고 있다. 임수연(영화기자) l 어렸을 때는 물리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보니 영화기자가 되어 있었다. 《씨네21》에서 영화를 포함한 미디어 업계 전반을 취재하며 다양한 심층 리포트를 써왔다.
2000년대 중반 한국 영화산업은 활황의 정점에 있었다. 넘치는 제작자본, 소재와 규모, 스토리텔링, 형식의 실험이 풍요로움과 다양성을 과시하는 르네상스의 시기로 요약된다. 이명세 감독의 < 형사 Duelist >(2005)는 이 무렵에 발표된 문제작 중 한 편이었다. 사실, 이 영화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낭만적인 액션 블록버스터를 목표로 했다면 슬픈 눈(강동원)과 남순(하지원)의 운명적인 키스 신 정도는 넣었어야 하건만 이명세는 칼날들이 부딪힐 때의 섬광 같은 번쩍임, 펄럭이는 천 조각들, 숨이 넘어갈 듯 뛰어다니는 배우들의 땀에 절은 얼굴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급작스러운 스토리의 비약, 감정의 흐름을 등한시하는 태도, 슬픈 눈과 남순이 첫 눈에 반하는 이유, 슬픈 눈이 병조판서(송영창)를 배신하는 이유 등 개연성을 갖춘 플롯이 의당 감당해야 할 요소들에 대해 납득할만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 것도 관객들의 불만을 촉진하였다. 그 대신 세상 돌아가는 일과 유리된 듯한 미적 도취, 비현실의 세계를 뛰노는 상상적 판타지, 인공미가 물씬 풍기는 연극적인 세트, 몽상가적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스타일로 장인적 세공술을 담금질한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이미지를 조각하는 이명세의 연금술은 현실과 꿈을 교차시키는 대담한 오버랩, 아기자기한 세트, 만화 같은 이미지, 비 관습적인 음악과 사운드로 이야기체 영화의 전통이 완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한국영화계에 논쟁을 던져왔다. 다수의 뉴웨이브 감독들이 치열한 현실인식과 그에 대한 발언으로서 이야기와 형식을 고민했다면 이명세는 영화는 무엇으로 말하는가를 밝히기 위해 모든 걸 거는 ‘시네마 뉴웨이브’의 시네아스트로 자신을 몰아갔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형사 이야기라는 흥미로운 설정에도 불구하고 <형사 Duelist>의 스토리는 혼돈이다. 때는 18세기, 입담 좋은 대장장이 봉출(윤주상)의 한담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누군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형식으로 진행될 것임을 예고하는 셈이다. 봉출은 호기심에 차 눈을 부라리는 남정네들을 앞에서 한밤에 만난 기이한 분위기의 요염한 아낙(김보연)의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춘다. 그때 프레임의 뒤편에서 애꾸눈의 사내가 “이 상놈의 새끼들, 집중이 안 되잖아!”라고 아리송한 타박을 한다. 험상궃은 사내의 기세에 이야기는 갈 길을 잃고 카메라는 슬그머니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천국과 지옥’의 캉캉에 맞추어 춤을 추는 탈을 쓴 사람들의 군무로 넘어간다. 이미지는 자연스러운 속도와 리듬을 무시하고 이어지는 붉은색 천 앞에서 칼춤을 추는 백발의 탈바가지, 북적대는 인파들로 발 디딜 틈 없는 장터의 풍경들로 이미지의 연쇄는 숨이 가쁘다. 군중들 사이에 섞인 좌포청 포교 남순(하지원)은 어지럽게 돌아가는 세상을 틈타 시중에 가짜 돈을 유통하는 범인을 잡기 위해 탐문 중이다. 머리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다혈질 형사 남순의 파트너는 사려 깊고 경험이 풍부한 안 포교(안성기). 의욕을 앞세우는 남순과 꼼꼼히 전후 사정을 따져 사건에 접근해가는 안 포교는 서로의 장단점을 상쇄시켜줄 만한 최고의 단짝이라 할 만하다. 수상한 사람들이 유독 많아 보이는 그날 돈자루를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소란의 와중에 남순은 유력한 용의자로 보이는 탈을 쓴 백발의 괴한을 쫓는다. 좁은 시장 골목과 담벼락 길 사이에서 서로의 뒤를 쫓는 추격전을 벌이지만 신출귀몰한 백발 괴한은 두 형사의 추격을 따돌리고 유유히 사라진다. <형사 Duelist>의 장면들은 관객을 추격의 스릴로 몰아 부쳐 아드레날린에 취하게 만든다. 상당한 속도로 리드미컬하게 진행되는 영화의 도입부는 통상적인 플롯의 전제에 해당하는 요소들을 갖추고 있지 않다. 개연성을 무시하고 단속적으로 진행하는 신들의 연쇄는 극중 애꾸눈 사내의 푸념처럼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의 도입부가 필요로 하는 차근차근 쌓아나가기 위한 세팅이 아니라 거두절미하고 스토리의 중간으로 잘라 들어가는 둔탁함이 거기에는 있다. 그렇다면 이미지의 혼돈과 충돌이 만발하는 이 시퀀스의 내적 논리는 무엇인가? 시퀀스의 주제는 봉합선이 존재하지 않는 움직임의 연쇄이다. 광란에 가까운 트릭을 구사하는 20분 동안의 시각적 스토리텔링은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카메라와 잠재의식을 시각화한 것 같은 편집을 결합한다. 시각적으로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스토리를 이해하는데 장애가 될 정도이다. 그 자신의 스타일적인 시그니처인 스톱모션 이미지와 번쩍이는 순간 다음으로 넘어가는 불분명한 쇼트의 이행, 피사체들의 수평적 움직임, 와이프와 같은 효과를 내는 쇼트의 수평적 전환을 통해 이명세는 시네마틱 무브먼트와 트랜지션을 매개로 한 대담한 실험을 보여준다. 화면 내 요소들과 카메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활력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속도와 방향이 모두 중요해 보인다. 전체 시퀀스는 하나의 쇼트가 사라지고 이어지는 쇼트 안으로 끌어 당겨지는 느낌을 준다. 백발의 괴한의 휘두르는 칼의 그래픽적인 움직임, 프레임 안 인물의 이동 따위가 광학적인 기교인 와이프를 대체하기도 한다. 구성적인 차원에서 이 시퀀스 하나의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한 장르에서 또 다른 장르로 이행으로 정의할 수 있다. 요상한 공포 분위기로 시작한 이야기는 캉캉 춤을 추는 무희들의 뮤지컬로, 수직의 길 위에서 맞서는 서부극적인 구도로, 몸과 칼의 안무가 이루어지는 무협영화로 전환된다. 속도는 진정되고 움직이는 카메라가 여전히 거기에 있는 동안 세트 디자인과 조명의 아름다움으로 구축된 골목에서의 결투는 이 시퀀스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슬픈 눈이 쓴 탈의 일부가 잘려 나가는 이 결투는 애간장을 태우며 끝이 난다. 탱고 춤과 무모한 칼싸움 사이 어딘가에서 백발의 탈과 남순이 화면에서 뛰어내리고 프레임을 분할한 조명에 잠겼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면서 선명하게 또는 흐릿하게 포착된다. 장엄한 촬영 기법과 세트 디자인 위에 얹혀진 조성우의 음악은 클래식과 전통 음악을 혼합하여 영화에 깊이를 부여한다. 전통적인 의미의 액션이 없는 곳에서도 여전히 움직임은 장면 연출의 초점이다. 도입 시퀀스를 마무리하는 결투 외에도 몇 차례 반복되는 영화 속 결투에는 고유한 스타일이 있으며 거기에는 인물들의 구애의 단계가 반영되었다. 두 번째 결투 신은 번쩍이는 칼날만이 어둠을 밝히는 그림자 속에서 정교하게 촬영되었다. 탱고 스타일의 테마로 보완된 음악은 한층 무르익은 감정의 깊이를 반영하고 있다. 세 번째 결투는 눈 속에서 사무라이 영화의 분위기를 풍기고, 네 번째는 유혹적인 동작들이 격렬하게 부딪히면서 에로티시즘의 기운이 가득하다. <형사 Duelist>에는 영화 예술의 본질이 물질적인 움직임을 주는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움직임을 전달하는 것이라는 관점이 스며 있다. 보는 사람의 정신에 닿게 하는 영화의 정수는 어떤 것일까? 그런데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전통적인 감각의 액션영화를 기대한 관객들에게 <형사 Duelist>는 골치가 아프고 지루한 영화였다.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스토리와 대화, 캐릭터, 장르 중 어느 것도 장면이 만들어내는 느낌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믿는 이명세는 관객을 설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움직임을 화면에 묘사하여 정신의 움직임을 시각화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움직임에 대한 이러한 강박은 현대영화가 잃어버린 무엇인가와 관련이 있다. 사운드의 출현으로 영화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소리조차 이미지화되는 감각의 전환을 창조하려는 야심이 이 영화, <형사 Duelist>를 특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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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거울 대학교 졸업을 앞둔, 통상적인 교육의 끝자락에서 돌이켜 본다. 다시 초등학생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과연 다르게 살 수 있을까. < 디어 마이 지니어스 >( 구윤주 , 2020)는 진로 선택의 기로에 놓인 감독이 교육의 시간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돌이켜 보았을 때 가장 후회되는 부분은 정작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곰곰이 들여다보지 못한 채 그 시간을 통과해버렸다는 것이다. 감독에게는 시간을 되돌릴 능력이 없지만,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어린 동생 윤영이 있다. 감독은 어머니의 관리하에 촘촘하게 짜인 윤영의 일상에 개입하면서 새로운 교육을 위한 답을 찾고자 한다. 영재 교육에 관한 이야기라고 홍보되었지만, 정작 영재 교육이라고 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어머니의 교육열은 남다르다. 어머니는 한 달에 두 번 도서관에 출근해 딸이 읽을 만한 책을 선별하고 한 번에 대출할 수 있는 최대 권수인 26권을 꽉꽉 채워 대출한다. 책을 운반하기 위해 장 볼 때 쓰는 카트는 필수다. 미리 비워둔 책장 속에 26권의 책을 꽂아두고 딸이 하나씩 빼 읽을 것을 상상하는 기쁨은 욱신거리는 팔목 통증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꼼꼼하고 성실한 매니저인 어머니는 매번 딸이 돌파한 책의 권수와 제목을 노트에 기록해왔고 지금 막 기록된 숫자가 7,000을 넘었다. 영어 학원에서 주최하는 1만 원의 상금이 걸린 100단어 영어 콘테스트를 위해 우는 딸을 달래가며 늦은 시간까지 공부시키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유난스럽기는 해도 어딘가 소박하게 느껴져 정감이 갈 정도다. 영재가 되고 싶다는 윤영의 소망도 대책 없이 솔직하다. 과거 영재 시험을 통과한 감독은 동생에게 ‘영재란 사람들이 붙인 이름일 뿐’이라는 진실을 누설한다. 그렇다고 해도 영재 시험에 통과하고 싶은 윤영의 소망은 꺾이지 않는다. 윤영이 영재가 되고 싶은 이유는 ‘무언가 높아진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재는 허상이지만, 그 허상이 주는 열매는 실재한다. 높은 교육열을 비판하기 이전에 성적이 곧 정체성이 되는 학생의 시간에서 학업 성취의 기쁨은 쉬이 포기할 수 없는 부분임을 인정해야 한다. <디어 마이 지니어스>는 교육의 당사자로서 가족을 비판적으로 보진 않는다. 교육 현실은 오직 가족을 통해서만 드러나기에 결과적으로 교육을 비판한다고도 보기 힘들다. 남은 건 어머니의 교육 방식을 비판하고 어린 동생을 구하고 싶은 감독의 욕망 그 자체다. 이 프로젝트가 가능했던 것은 어머니와 어린 동생 사이에 놓인 감독의 위치 때문이고, 실패한 원인 역시 그 때문이다. 감독은 종종 어머니에 대한 냉정을 잃는다. 특히 어머니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깔끔하게 청소된 집을 보는 것과 윤영의 하루가 계획대로 실행되는 것이라고 말하며 요즘 둘 다 제대로 되지 않아 속상함을 토로할 때 감독은 어머니보다 먼저 눈물을 보인다.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은 감독의 눈물은 그런 딸을 보는 어머니의 표정 변화를 통해 드러난다. 카메라 앞에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교육의 당사자로서의 어머니와 윤영이 아닌, 이들의 눈에 비친 감독의 모습이다. 감독은 질문으로 무장한 채 호기롭게 동생을 대하지만, ‘도대체 이걸 왜 찍고 있냐’와 같은 동생의 뼈 때리는 역질문에 종종 맞닥뜨린다. 애초에 윤영은 감독에게 ‘아주아주 재미있게 찍어 달라’고 주문하며 아무렇지 않게 상황의 주도권을 잡은 바 있다. 감독은 윤영의 일기장 속에 어느 날 ‘굶주린 독수리’였다가 다른 날 ‘월트 디즈니’도 된 자신을 발견하며 감정의 널을 뛴다. 이쯤 되면 조련당하는 쪽은 윤영이 아닌 감독이다. 어머니와 동생은 카메라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자신을 찍는 딸과 언니의 모습을 비춰낸다. 인생의 세 시기를 상징하는 모녀는 서로 과거를 투사하는 선형적인 관계에 놓인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그런 면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영화가 향해가는 곳은 각자의 현재를 찾는 것이다. 카메라 앞에 두고 마주 앉거나 나란히 앉은 이들은 서로의 현재를 비추며 각자 저마다의 출발선에 선 사람으로 존재한다. 감독은 마치 하나의 쌍처럼 종종 자신을 어린 동생의 옆에 나란히 세운다. 함께 거울을 보며 양치질을 하거나 카메라 앞에서 양팔을 물결치는 장난스러운 춤도 추며 둘의 관계를 수평적인 것으로 그리고자 한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동생은 ‘나는 구윤영이 될 거야’라고 답했고, 그 의미는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이라 똑 부러지게 정의한다. 그 대답은 영화가 다다른 장소가 어디인가를 보여준다. 그곳은 내가 나를 비추며, 내가 다시 내가 되는 자기 증식의 세계다. 가족을 통해 교육 현실을 찍고자 했으나 돌고 돌아 나를 성찰하게 되는 무한의 미로. 영화는 무언가를 비판하거나 답을 내리는 영화가 아니다. 다만 그 안에서 누구라도 자신의 단면을 마주할 넉넉한 표면을 제시한다. 마침내 우리는 교육을 통해 추구해야 할 하나의 원점과 같은 질문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나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