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댁
- 감독
- 이봉래
- 제작년도
- 1962
- 출연
- 도금봉, 이대엽, 김희갑, 황정순, 최남현, 이빈화, 방성자, 엄앵란, 박암, 이수련, 주증녀, 주선태, 석금성, 양석천, 전계현, 박노식, 유계선, 문일봉, 김삼화, 신소영, 고향미, 박순봉, 최삼, 고봉덕
이만희 감독은 한국영화사에서 몇 안 되는 천재로 회자된다. 15년간 만든 51편이란 숫자도 놀랍지만, 작품 간 기복이 심하지 않고 꾸준히 일정 수준을 유지했다. 유독 비범한 영화도 있고, 1970년대 영화처럼 범작처럼 보이는 영화도 있지만 이만희의 치밀한 미장센과 유려한 리듬, 자기파괴적인 운명과의 싸움 같은 인장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1955년 제대한 후 조감독 생활을 했다. 이후 < 주마등 >(1961)으로 데뷔했고 (고작) 다섯 번째 영화인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을 통해 미학적 성취와 흥행 성적 모두를 성공시켰다. 그는 이 영화로 한국전쟁영화의 원형을 만들어냈으며, 그해 관객동원 1위의 기록을 갖게 되었고 각종 영화상을 휩쓸었다. 이만희의 필모그래피를 떠올리면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뛰어난 대중영화, 사실적으로 전쟁에 접근한 전쟁영화의 장인, 사실성을 위해 실탄을 쏠 정도로 영화에 미쳐 있는 완벽주의자, 반공 이데올로기에 타협하지 않는 강한 품성의 소유자, 높은 개런티를 받는 A급 감독으로의 도약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이듬해 느와르의 관습을 과감하게 몰아붙인 < 검은 머리 >와 호러의 법칙을 보다 치밀하게 고안한 < 마의 계단 >을 만들었는데, 두 영화 모두 고유한 무드를 따라 넘실거리는 정념과 가혹하고 파괴적인 운명과 대결하는 캐릭터를 보여줬다. 이만희가 연달아 발표한 걸작 < 물레방아 >(1966), < 귀로 >(1967), < 휴일 >(1968)도 전작들의 분위기를 이어받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과감하게 넘어선다. 귀기 서린 여인의 얼굴과 새하얀 버선, 그 아름다움에 홀린 남성의 집착과 파멸이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흐리고, 서울의 낮과 밤을 부유하며 자신이 정한 계율과 투쟁하다 죽음을 선택한 여인의 불안과 공허는 무심히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와 공명한다. 또 담배 한 개비조차 편히 피울 수 없는 젊은 룸펜과 그의 연인의 육체를 날려버릴 만큼 강력한 모래바람의 운동처럼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은 우연히 튀어나올 리 없는 창조적 역량과 그의 무드가 온전히 결합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유작 < 삼포 가는 길 >(1975)까지 이어지는 이만희의 영화들은 반공영화와 문예영화처럼 국가와 영화산업의 필요에 따른 규칙을 뛰어넘어 살아 생동하며, 원작과 다른 정취를 표현함으로써 고답적인 한계에 갇히지 않았다. 또 전쟁영화, 멜로드라마, 스릴러, 첩보물, 만주 웨스턴 같은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고 장르의 규범을 탈바꿈시켰으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넘나들며 인간과 삶, 가변적인 감정과 불변하는 운명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갇힌 인물의 도덕성을 가혹할 정도로 밀어붙였다. 이만희는 프레임에 인물의 감각과 감정을 새겨 넣고 그 시대의 무드를 기입했으며 빛과 어둠을 새롭게 조직하고 그만의 속도와 리듬을 창조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인간됨에 대한 믿음과 캐릭터의 생생함, 스펙터클과 정감을 조율하는 뛰어난 영화적 감각, 운동하는 존재와 갇힌 존재가 숏 안에 배치되고 격돌하는 미장센과 리드미컬한 편집을 갖추고 있다. 이 영화는 인천상륙작전에서 시작해 서울 수복을 거쳐 인해전술을 펼치는 중공군과 대치한 전선에서 끝을 맺는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가장 강력한 사건을 향해 점진적으로 확대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만희는 마지막 참호전을 위해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찍은 것처럼 느껴질 만큼 중공군과의 전투에 모든 힘을 쏟는다. 이를테면 첫 번째 전쟁 시퀀스인 상륙작전은 오프닝에 등장해서 이 영화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드러낸다. 두 번째 전투 시퀀스인 텅 빈 건물에서 벌어진 매복과 총격전은 인민군에 의해 학살된 시민들의 주검으로 이어지는데, 시선의 방향에 따른 빈틈없는 편집과 시각적 스펙터클 뿐 아니라 심리적 긴장까지 녹여낸 유장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압권은 마지막 전투 장면이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전선에 합류한 분대원들은 “적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진지를 방어하는” “불리한 싸움”을 해야 한다. 영화에서 가장 긴 시간을 할애한 이 장면은 4번의 전투 시퀀스로 구성되어 휴지기/전투의 반복과 확장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증명하는 주검으로 뒤덮인 참호로 향한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전투가 벌어지는 사이에 개성이 강한 분대원들과 호랑이 분대장(장동휘)이 전쟁이란 무엇인지 자문하고, 전쟁에서 이겨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체념을 수시로 체험하며, 군인으로서의 의무와 전우애를 뼈저리게 느끼고, 후방에 맡겨둔 아이 영희(전영선)의 편지를 받고 눈물 흘리는 집단 초상화에 가까운 얼굴들이다. 분대원 각각의 클로즈업은 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드러나는 반면, 군인이라는 유대감으로 똘똘 뭉친 그들은 사람 살아가는 곳 어디에나 있는 집단의 구성원으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총원 42명”이던 분대원들이 하나씩 프레임에서 사라져 2명만 남게 되는 순간, 우리는 분대장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얼굴에 압도된다. 마찬가지로, 죽어가면서도 “내가 없으면 누가 웃겨주니?”라고 너스레를 떨던 봉구(구봉서)의 죽음에 애통해하는 분대원들은 진흙과 피와 눈물로 얼룩진 개인의 얼굴로 포착된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뛰어든 분대원들에게 “14시 이후의 생존자는 집으로 돌아가라.”며 죽지 말고 살아남길 당부한 분대장의 말은 마지막 전투 시퀀스에서 살아남은 대원에게 “너희 둘만은 꼭 살아 돌아가서 전쟁의 증인이 되어라.”는 명령과 연결된다. 살아남으라는 말이 채 가시기 전에 구일병(이대엽)마저 죽어 엎드러질 때 눈물 흘리는 최해병(최무룡)과 흐느끼는 분대장의 얼굴은 전쟁의 실체를 겪은 자의 무참함을 드러낸다. 셀 수 없는 주검과 진흙과 피로 범벅이 된 분대원의 얼굴, 전쟁 후 복구되지 못한 당시의 황폐한 산천도 참담하고 고통스런 얼굴에 다름 아니다. 이만희의 실제 경험과 영화적 역량이 여실히 드러난 전투 장면과 전쟁의 무의미함에 대한 고백과 개인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최선의 길임을 선언하는 것도 놀랍지만,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백미는 전투를 치르지 않는 후방의 막사나 럭키 클럽에서 드러나는 분대원 개개인의 놀랍도록 선명한 기질처럼 세부적인 것들이다. 영희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별명을 듣고 껄껄 웃거나 불만을 표하는 모습, 시가전에서 잡은 인민군 포로에게 그 흔한 매질 한 번 없는 모습, 눈이 녹은 땅을 보며 “전장에도 양지는 있구나.”라며 감탄하던 봉구의 구성진 말소리, 최해병이 건넨 총을 받아들고 그의 손에 이끌려가는 분대장의 휘청거리는 발걸음, 어린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심겨진, 민둥산에 가까운 산등성이의 나직하고 고운 모습 등이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해병대원이 몇 천 명 참여했고, 탱크와 총기를 지원받아 실탄을 쐈다는 기록보다 귀중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실제를 방불케 하는 스펙터클을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당대 영화인들의 노력과 이만희의 천재적인 연출력과 서정민의 역동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카메라 움직임처럼 다양한 힘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에 감동적이다. >> 돌아오지 않는 해병 고화질 VOD 보러가기 <<
1960년대 중후반 이만희 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아니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멜로드라마 세 편을 발표한다. < 만추 >(1966), < 귀로 >(1967), < 휴일 >(1968). 하지만 1970년대의 이만희는 그 시절의 창조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 들국화가 피었는데 >는 이만희가 < 청녀 >(1974), < 태양을 닮은 소녀 >(1974) 등을 발표하던 무렵의 작품이다. 이 무렵의 이만희 영화는 뭔가 지쳐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들 영화에 짙게 깔린 허무의 정서는 1960년대 영화에서도 드러난 것이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면 그의 영화는 훨씬 더 어둡고 무기력하다. 심지어 죽음 충동이 감지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영화진흥공사는 설립 기념작 중 하나인 <들국화는 피었는데>의 연출을 이만희에게 맡긴다. 그것은 이만희가 이미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 등의 전쟁영화를 통해 자신이 전쟁의 스펙터클을 얼마나 잘 다룰 수 있는 감독인지, 그리고 그 와중에도 인물 하나하나를 얼마나 개성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지 입증한 감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진흥공사는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어 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임권택 의 < 증언 >(1972)의 성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1억에 가까운 제작비를 투자하고, 국방부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제작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이만희는 (그 시절의) 임권택이 아니었다. 1970년 3차 개정 영화법과 1973년 4차 영화법을 연이어 발표하며, 검열을 통해 반공과 근대화를 찬양하는 국책영화만을 양산하려 했던 유신정권의 영화정책 앞에 이만희는 고개를 숙일 생각이 없었다. 영화를 정치적 수단으로 여기는 국책영화와 오로지 영화만이 영화의 목적이어야 했던 이만희의 만남에서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고, 결국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이만희와 영화진흥공사 간의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비균질적인 영화로 완성되고 말았다(그는 이 영화의 편집권을 빼앗기기까지 한다).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한국전쟁의 발발에서 서울수복까지의 기간을 담고 있다. 이만희가 영화에서 방점을 찍는 것은 북한의 공격에 속수무책 당하며 일방적으로 남으로 쫓겨 내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서울 수복의 기쁨을 잠시 보여주지만, 영화 말미에 배치된 이 장면들은 영화 전체의 분위기에서 이질적인 불순물처럼 억지로 붙어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들국화는 피었는데>가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몰고 온 무력감과 절망감, 그리고 그 끝에 짙게 깔려 있는 허무함의 정서를 담은 영화라는 의미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전쟁영화의 외피를 걸친 허무의 고백이다. 정대위( 이대엽 )가 진격해오는 북한 탱크를 향해 폭탄을 안고 뛰어드는 무모함은 군인의 사명감이나 용기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도무지 돌파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는 현실의 절망감에서 비롯된 자포자기의 행위에 가깝다. 이는 유사한 행위를 반복하는 송소위( 고강일 )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자신을 짓누르는 절망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다. 이 허무함은 전쟁이라는 영화의 소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또한 한편으로는 영화주의자였던 이만희가 온전히 자신의 영화를 찍을 수 없는 시대에서 느끼는 절망감의 토로이기도 할 것이다. 이로 인해, <들국화는 피었는데>에는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는 이질적 힘의 충돌이 남긴 흔적이 남아있다. 이는 영화 속에 영화진흥공사의 흔적과 이만희의 흔적이 공존한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들국화는 피었는데>가 분열되고 찢겨진 이유다. 북한이 탱크를 몰고 진격해오는 장면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당시 국방부의 지원 속에 완성된 국책영화의 스펙터클을 보여주면서도, 북한군에 의해 말살된 마을 주민들의 참담한 죽음을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그려내는 등의 이만희다운 영화적 표현이 공존한다. 또한 영화 엔딩의 희망찬 진격의 이미지에서 드러나듯 반공영화의 전형성이 존재하면서도, 이데올로기를 냉소하며 전쟁 자체를 허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허무주의자로서의 이만희도 공존한다. 중심인물이 현대위( 신성일 )에서 돌이( 김정훈 )로 갑자기 전환되는 등 반복적으로 툭툭 끊기는 서사적 진행과 반공과 반전(이데올로기적 허무감)의 이질적 가치가 서로 충돌하는 등의 영화적 결함은 시대와 불화하는 자와 그 시대를 강요하는 자의 공존이 불러일으키는 불협화음의 증거다. 많은 사람들이 1970년대를 한국영화의 암흑기라 부른다. 그것은 사실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이 시대의 영화를 주목해야 한다면, 암흑의 절망 속에서도 자신의 영화를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이들의 몸부림의 흔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현목 은 투항했지만, 이만희와 하길종 의 영화는 있는 힘을 향해 무언가를 지킨다. <들국화는 피었는데>의 비균질성이야말로 이만희의 몸부림친 증거다. 그렇기에, 참 처연한 영화다. >> 들국화는 피었는데 VOD 보러가기 <<
이형표는 1960~70년대에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수놓았던 흥행 감독이며,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최초’라는 수식이 붙어다닌다. 1922년 황해도 출생으로 서울 효재국민학교 입학(1930), 경성사범학교에 진학(1937)하여 서울대 사범대학 영문과를 졸업(1949)했다. 미술에 재능을 보여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1943)하고 김기림, 김순남, 이인성 등으로부터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소양을 얻는다. 대학 졸업 후, 그는 USIS(주한 미공보원 영화과)의 영화 제작 보좌관으로 입사하여 미국 문화영화의 자막 번역을 맡으며 처음으로 영화계를 접하게 된다. 이윽고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서울에서 조선미술가동맹 일원으로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며 인민군 점령 시기를 견뎠다. 그러나 이 사실이 문제가 되어 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미공보원을 떠나게 된다. 이후 유엔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 운크라)에서 뉴스를 비롯해, 홍보영화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한국에서의 만남 Encounter in Korea>(리차드 배글리(Richard Baegley), 1952) 등의 제작에 참여한다. (사진1)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배글리, 이형표, 코넌트, 여자주인공 기순, 촬영조수였던 임병호 (사진2)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촬영 현장에서 이형표(맨 왼쪽), 카메라를 잡고 있는 임병호 <고집>에서 이형표는 통역 겸 연출 조수를 맡았는데, 녹음기사로 참여한 미국 영화인 테드 코넌트(Theodore Conant, 1926~2015)를 통해 처음으로 자기녹음기(마그네틱 레코더)를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이형표는 미국 파라마운트사가 제작한 3D 입체영화 <휴전 Cease Fire>(오원 크럼프(Owen Crump), 1953)의 통역 겸 조연출로 일하면서 남보다 먼저 할리우드 특수영상 제작 현장을 경험한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활발하게 참여하던 시기에, 이형표가 조력자의 입장에서 제작 주체로 거듭나는 데에는 동료였던 테드 코넌트의 영향이 컸다. 테드 코넌트 1) 는 1952년 유엔 한국재건단(UNKRA) 영화팀원으로 한국에 와서 1960년경까지 약 8년간 전쟁 및 전후 복구 중인 한국의 모습을 기록하는 한편 이형표와 돈독한 우정을 쌓으며 협업 창작 활동을 했다. 또한 코넌트는 한국영화계에 많은 기여를 했는데, 1956년 유네스코와 운크라가 한국 정부와 공동으로 설립한 신생활교육원에서 시청각 교육을 담당했고, 1958년에 미 국무부 산하 국제협조처가 한국 영화인 교육 및 영화제작소 설립을 지원하기 위해 시라큐스 대학과 맺은 ‘시라큐스 컨트랙트’에 참여하여 공보실 영화과의 사운드 분야 인력 교육을 담당했다. 이형표는 테드 코넌트와의 교류를 계기로 외교 파우치를 통해 들어온 서구 문화를 다양하게 흡수하고, 코스모폴리탄적인 문화 체험을 바탕으로 공동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한다. 이는 이후 이형표의 영화 창작 세계를 구축하는 데 단단한 초석이 된다. 1953년부터 그는 대한민국 공보처 영화과에서 대한뉴스를 비롯해 공보처에서 주관하는 기록영화 제작을 전담하게 된다. 영화 <한국의 시각 Korean Perspective>(1953)과 <낙원 제주>(1953) 등이 이형표가 감독한 기록 영화들이다. 이 두 작품들은 천연색 코닥크롬(Kodakchrome)으로 촬영한 컬러 영화이고, 한국의 자연경관과 명승고적을 소개하는 <한국의 시각>은 한형모 감독이 촬영을 맡았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단편영화 <한국에서의 만남>(1952)에서 조연출을 했던 이형표는 이 이야기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장편 시나리오 <불사조의 언덕>을 썼고 2) , 공보처에서 이를 영화화한다.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에는 감독 전창근, 조연출 김한일, 촬영 한형모, 조명 김흥만, 스크립터 홍은원 등의 영화인들이 참여했다. (사진3)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 제작진들, 둘째줄 왼쪽 두번째부터 이형표, 전창근, 홍은원, 배우 나애심 또한, 이형표는 테드 코난트와 함께 다큐멘터리 <한국의 환상 Korean Fantasy>(1955), <한국의 예술가(Korean Artist)>(1955), <위기의 아이들(Children in Crisis)>(1955)을 만든다. <한국의 환상>은 전후 한국의 폐허와 재건 및 전통문화 등을 다뤘고, 화가로서의 이형표 자신이 출연한 다큐멘터리 <한국의 예술가 Korean Artist>(1955)는 1956년 제1회 마닐라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위기의 아이들>은 한국전쟁 고아를 비롯한 전후 어린이들이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열악한 생활상을 담았다. 이 작품은 나레이션을 배제하고 녹음기를 사용하여 현장음만으로 상황을 전달하는 다이렉트 시네마(direct cinema) 형식의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다. 이형표는 당시 전후 서울의 아이들을 보여주는 많은 장면을 직접 촬영했는데, 콘덴서 마이크로폰(condenser microphone)을 사용하여 레코더를 군용 트럭에 숨겨둔 채 거리 촬영을 진행했기 때문에 매우 생생한 거리의 소리들을 담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3) 작품 후반부에는 ‘북진통일’ 관제 데모와 전체주의적 교육에 동원되는 학생들 역시 ‘위기의 아이들’로 보여주면서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는 태도를 취한다. 4) 이 때문에 이형표는 한국전쟁 중 부역 전력으로 고초를 겪은 바 있는 자신의 신상을 염려하여 스스로 공동연출자로서의 크레디트를 포기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이승만 정권 측으로부터 ‘공산주의적’이라는 항의를 받기도 했지만 제5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이와 같이, 그는 당시로서는 드문 다수의 제작 경험을 통해 한국 영화제작기술의 열악함을 통감하고, 유엔 한국재건단(UNKRA)에서 원조를 받아내 공보처에 영화 기자재를 들여온다. 더불어 이를 기반으로 스튜디오를 지어 활용하도록 하는 등, 전후 한국영화의 제작 기반과 환경을 조성하는 데 큰 공헌을 한다. 1950년대 중반까지 다큐멘터리 활동을 하는 동시에, 화가로서의 정체성도 유지하며 그림을 그리던 이형표는 신상옥 감독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극영화계에 본격 뛰어들게 된다. 신상옥은 이형표가 영화제작 과정과 기술 전반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점을 간파하고 <젊은 그들>(신상옥, 1955), <무영탑>(신상옥, 1957)의 각색 및 <동심초>(신상옥, 1957) 등의 제작에 이형표를 참여하도록 한다. 이윽고 이형표는 신필름 기술부장으로 입사하여, 1961년 장안의 화제였던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에서 촬영을 맡는다. 그는 이 영화에서 컬러 영화 제작을 위한 기술 전반에 관여하며 직접 분장까지 맡는다. 이형표는 이미 천연색 다큐멘터리를 제작해본 경험이 있는 바, 이번엔 코닥 이스트만 필름을 사용하여 국내 최초로 컬러 시네마스코프 극영화를 촬영함으로써 한국 극영화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데 큰 몫을 해낸 것이다. 같은 해 그는 신상옥이 제작자로 나선 <서울의 지붕밑>(1961)으로 감독 데뷔한다. 이 작품은 조흔파의 소설 『골목 안 사람들』을 영화화한 것으로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김승호, 황정순, 김희갑, 허장강, 최은희, 도금봉, 김진규 등을 초호화 캐스팅한 도시 서민 코미디로 관객과 평단의 큰 호응을 얻으며 성공한다. “대표작이 될 것”이라는 신상옥의 예견이 적중한 것이다. 기성 세대 한의사인 김승호가 자녀의 결혼 문제를 계기로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산부인과 의사 김진규와 각을 세우며 시의원 선거에도 나서보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자녀 세대와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낙천적으로 그려냈다. (사진4)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촬영 현장 빌리 와일더나 윌리엄 와일러의 작품 세계를 동경했다는 이형표의 바램대로,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간적인 결함을 가진 인물들의 애환을 가슴에 와닿는 코미디로 완성했다. 또한 <서울의 지붕밑>은 독특한 구도와 새로운 카메라 기법을 이용하여 서울의 다양한 풍경들을 담아낸다. 각각의 쇼트들에는 화가가 되고자 했던 이형표 감독의 미적 감각과 영화 테크니션으로서의 실력이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사진5) <대심청전>(이형표, 1962)의 용궁 장면 (사진6) <대심청전>(이형표, 1962)의 세트 촬영장에서 제작진들. 뒷줄 가운데가 이형표 이듬해, 그는 고전 심청전을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영화화한 <대심청전>(1962)을 연출한다. ‘미러 워크’라는 특수 효과를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시도하였고, 일본에서 촬영한 용궁 수중 장면 등의 특수 촬영이 압권이다. (사진7) <아름다운 수의>(이형표, 1962) 촬영 현장, 주연 배우 태현실 옆에 앉아있는 이형표 (사진8) <아름다운 수의>(이형표, 1962) 촬영 현장, 카메라에 손을 올리고 있는 이형표 1960년대 청춘영화의 시초격으로 불리는 영화 <아름다운 수의>(1962)는 주역을 신인 배우들만으로 구성하였고 배우 태현실, 최난경, 한문정, 트위스트 김 등의 영화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이형표 감독의 쾌적한 템포, 유려한 카메라 구사, 재치있는 커팅이 인상적” 4) 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후 그는 연달아 청춘물 <말띠 여대생>(1964), <연애졸업반>(1964), <백발백중>(1966) 등을 연출한다. (사진9)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포스터 (사진10)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의 한 장면 (사진11) <연애졸업반>(이형표, 1964) 제작진. 둘째줄 왼쪽 세 번째부터 조감독 김기풍, 배우 엄앵란, 이형표 감독, 배우 남미리 <말띠 여대생>(1963)은 개봉 후 대학 측으로부터 그런 학생이 어디 있느냐는 항의를 받는 등 영화의 리얼리즘 문제를 놓고 공방이 펼쳐지기도 했으나, 당시 외화만 보던 젊은 세대 관객들까지도 끌어들일만한 경쾌한 템포와 시원한 전개로 흥행에 성공한다. 이어 속편 <말띠 신부>(김기덕, 1966), <말띠 며느리>(이형표, 1979)가 제작되어 한국영화 최초의 시리즈물이 된다. 이형표는 1963년 무렵 신필름 전속을 그만두고 한양영화사, 극동흥업, 합동영화사 등을 오가며 청춘영화, 문예영화, 통속 멜로, 변장 코미디, 하이틴 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상업영화를 만들며 대중과 소통한다. (사진12) <아름다운 눈동자>(이형표, 1965)의 주연 배우 엄앵란과 김용연, 각각 청룡여우주연상과 청룡특별상(아역상)을 수상했다. <아름다운 눈동자>(1965)는 순박하지만 당찬 식모와 애정결핍인 주인집 아들이 훈훈한 정을 나누는 이야기로, 감독의 안정되고 세심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웃음이 터지는 박자를 놓치지 않는 센스 있는 템포와 면밀한 씬 구성, 정확한 콘티뉴이티가 관객을 편안하고 즐겁게 몰입하도록 한다. 식모 역할을 맡은 배우 엄앵란은 출산 후 컴백하여 연기생활 11년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하는 열의를 보였으며, 제 3회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형표의 다방면에 걸친 박식하고 해박한 소양은 영화 기술적인 성과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취하는 영화 소재나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가는 방식에도 묻어난다. <애하>(1967)에서는 인공수정이라는 당시에는 낯선 소재를 삼각관계가 얽힌 미스터리한 구성으로 대담하게 전개한다. 획기적인 참신함으로 주목 받았던 이 작품은 제6회 대종상 각본상(이형우)과 남우조연상(윤일봉)을 수상한다. 또한 성(性)을 주제로 한 다수의 섹슈얼한 문예영화들 <밤은 무서워>(1968), <너의 이름은 여자>(1969), <방의 불을 꺼주오>(1970) 등을 통해 젊은 남녀의 내밀한 심리 세계를 긴장감 있게 표현한다. (사진13) <회전의자>(이형표, 1966) 촬영 현장에서 카메라 옆에 이형표 (사진14) <밤은 무서워>(이형표, 1968) 포스터. 위에서부터 배우 남궁원, 윤정희, 박노식 일체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거추장스럽게 여긴 이형표 감독의 자유로운 사고 방식은 그의 주특기 장르인 코미디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언니는 좋겠네>(1963), <청색 아파트>(1963), <심술각하>(1966), <오대 복덕방>(1968), <산에 가야 범을 잡지>(1969), <내 것이 더 좋아>(1969), <염통에 털난 사나이>(1970), <방자와 향단이>(1972), <맹물로 가는 자동차>(1974) 등의 작품들에서 세태 풍자와 함께 권위를 조롱한다. 또한 웃음에 야박하고 저급하다고 폄하하는 기존의 시선을 가볍게 뛰어넘어 넌센스 코미디,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자유자재로 시도한다. 특히, 연기자 서영춘을 기용해 여러 작품을 만들었던 이형표는 당시 그의 뛰어난 희극 배우로서의 재능이 ‘저속 코미디언’으로 분류 되어, 높이 평가받지 못했던 점을 안타까워했다. (사진15) <청색아파트>(이형표, 1963) 오른쪽부터 배우 이대엽, 이형표 (사진16) <소문난 여자>(이형표, 1966) 촬영장에서 연기 연출 중인 이형표와 배우 고은아 (사진17)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 주연 배우 구봉서와 서영춘(오른쪽) (사진18) <염통에 털난 사나이>(이형표, 1970) 왼쪽부터 배우 서영춘, 구봉서, 김희갑 1970년대 TV 보급시대에도 이형표는 누구보다 빨리 변화하는 관객의 감성에 적응해갔으며, 당대 인기 배우들을 기용한 그의 청춘영화들은 꾸준히 인기를 누렸다. “이형표 감독을 잡으면 돈을 번다”는 말이 당시 제작자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로, 이형표는 경제성 있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서 대중이나 제작자 모두가 요구하는 탁월한 상업영화 감각을 유지했다. 이는 그가 영화는 오락이고 유행이라고 생각하며, 그 유행에 맞춰 관객과 상호 작용하는 유연함을 스스로 즐길 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진19) <모범운전사 갑순이>(이형표, 1972) 포스터 (사진20) <리칭의 여선생>(이형표, 1972) 촬영장에서 이형표 감독과 중국 배우 리칭(오른쪽) 6) (사진21) <리칭의 여선생>(이형표, 1972) 포스터 (사진22) <너무 너무 좋은 거야>(이형표, 1976) 포스터. 주연 전영록, 임예진 1970년대 중반에는 하이틴 영화의 붐을 타고 <이런 마음 처음이야>(1976), <너무 너무 좋은 거야>(1976), <제7교실>(1976), <괴짜만세>(1977) 등을 연출했고, 1980년대 한국영화 침체기에도 이형표는 성룡의 <취권>(1978)을 패러디한 코미디물 <애권>(1980)을 흥행시키며, <여애권>(1982), <애권(신)>(1982), <소애권>(1983) 등의 속편을 연달아 연출한다. (사진23) <아가씨 참으세요>(이형표, 1981) 포스터 그는 1980년대에 계속되는 저예산 흥행영화 제작 와중에,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삶의 애환을 담은 일상서민극 <젊은 시계탑>(1984)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형표는 1986년 작품 <먼 여행 긴 터널>을 끝으로 극영화 연출 활동을 마치고, 국내 최초의 360도 서클 비전 영화 <내사랑 금수강산(1990)>을 제작하여 전시 영상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 이후 몇 년간 전시 영상 분야에서 새로운 영상에 대한 끊임없는 개척정신을 보이는 활동을 이어갔다. (사진24) <젊은 시계탑>(이형표, 1984) 촬영 현장. 오른쪽부터 배우 송승환, 이형표 감독, 배우 김현주 이형표의 영화 인생은 한국영화 제작 기술 발전사와 궤적을 같이 한다. 그는 전후 폐허에서 출발하는 1950년대 한국영화계를 위해 영화 기자재 도입에 앞장 섰고, 그 제작 기술을 안내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뿐만 아니라 19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변모하는 세태에 뒤쳐지지 않고, 항상 새롭게 대중의 감수성을 포착해내고 섭취하는 감독이었다. 이렇듯 대중의 기호와 관심에 부응한 결과, 그의 영화 연출작들 대다수가 준수한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이형표는 예술가라는 자의식을 발현하기보다는,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이해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유쾌하게 향유할 수 있는 영화 만들기를 추구했다. 그는 영화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예술이어야 한다는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특유의 낙천적인 개성으로, 가족 드라마 <서울의 지붕밑>(1961)부터 코믹 액션물 <아가씨 참으세요>(1981), 한국판 뱀파이어물 <관 속의 드라큐라>(1982) 등과 같은 기발한 재미와 웃음을 선사했다. "그림을 아는 스타일리스트" 7) 이형표는 다양한 장르에서 편협한 시각을 벗어내고, 규범을 해체하는 데서 생겨나는 통쾌한 오락으로 대중과 함께 하는 감독이었다. *이 글은 필자가 쓴「관객과 함께 웃는 영화 패셔니스타(Fashionista), 이형표 감독」, <서울의 지붕밑> DVD 소책자, 한국영상자료원, 2008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이방인이 기록한 전후 한국, 영화_시어도어 코넌트 컬렉션』, 한국영상자료원, 2015 참고. 2) 앞의 책, 297쪽 참고. 3) 앞의 책, 293쪽 인용. 4) 앞의 책, 292쪽 참고. 5) 「[신영화] 병든 청춘의 풍속도/ 이형표 감독 <아름다운 수의>」, 《한국일보》, 1962년 11월 18일. 6) “톱감독과 톱스타 계보 (제4회)/이형표 편”,《영화잡지》통권116호, 1973년 5월, 190쪽. 7) 「[새영화] ‘스케치북’ 넘기는 재미/ 이형표 감독 <연애졸업반>」, 《서울신문》, 1964년 6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