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MADONNA FELL IN LOVE WITH LEOS CARAX
- 감독
- 이문희
- 제작년도
- 1993
마지막 인간적 얼굴 영화의 기본 설정은 전형적이다. 홀로 짐가방을 손에 쥔 채 서울역에 막 도착한 여성을 보여주는 오프닝은 시골 여성의 도시 수난기를 시작하려는 것 같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짐작보다 노동에, 노동보다 노동 사이로 보이는 것에 초점을 맞춘 영화임을 알게 된다. 우연히 같은 버스에 탑승한 세 명의 여성 주인공은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버스 안내원 일을 관두는 결말을 맞는다. 영화의 주제가 노동의 불가능성 혹은 불가능한 상태로 지속된 노동으로 읽히는 이유다. 이영옥 이 연기한 영옥은 팍팍한 노동 현장에서도 유희를 소유한 드문 인물이다. 그녀는 터무니없이 적은 월급에 대한 저항으로 당당히 ‘삥땅’을 실행한다. 몸수색을 담당하는 직원과의 커넥션도 이미 형성한 터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쟁취하고 종국에 택시 운전사가 되어 탈주하는 진취적인 캐릭터다. 금보라 가 연기한 성애는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고 노동 시장에 뛰어든 여성이다. 버스에서 만난 또래 남학생에게 애틋한 마음을 품으나, 계급 격차를 실감하며 사랑에 실패한다. 그녀는 정신적인 상처를 이기지 못한 채 노동 시장에서 퇴장한다. 유지인 이 연기한 문희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순결한 도덕군자다. 문희는 일하는 꿈을 꾸는 동료들을 어루만지고, 삥땅 없이 있는 힘껏 일한다. 문희의 고결함은 거꾸로 노동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루트를 돌고 복귀했을 때 다음 운행까지 쉬는 시간은 단 17분. 17분 동안 입금하고, 몸수색 당하고, 화장실 가고, 식사까지 해야 한다. 문희는 몇 숟갈 뜨지도 못한 채 식당 직원에게 자신이 먹던 음식을 남겨두라고 당부한 뒤 달려 나간다. 수금액이 다른 직원에 비해 현저히 떨어질 경우 회사의 눈치를 봐야 하므로 어떻게든 손님을 몸으로 밀어 넣고 만원 버스에 끼어 탄다. 버스 기사의 텃세와 성적 유린의 위협 아래에 놓이며 때로는 손님으로부터 추행을 당하거나 잡상인 단속 일도 해야 한다. 문희는 쉬는 시간을 쪼개 동료들의 속옷을 빠는 허드렛일을 도맡으며 어렵게 돈을 모으지만, 도리어 관리자로부터 부정한 방식으로 돈을 축적했다는 오해를 산다. 노동 현실이 드러날수록 문희는 더욱더 비현실적인 인물로 보이고, (삥땅 없이)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결말은 아이러니하다. 문희가 강제 탈의의 수모를 당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굳이 남성 상관의 시선과 교차해 자극적으로 보여준 것은 불만스럽지만, 일단 넘어가 볼 수는 있다. 참을 수 없는 건 몸수색에 항의하며 건물 옥상에 오른 문희가 회사 관리자들에게 (혹은 관객을 향해) 돈을 빼돌린 다른 동료들을 대신해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동료들에게 더는 부끄러운 짓을 하지 말자고 호소한 것이다. 문희의 마지막 행위의 이유를 ‘몸수색에 의한 수치심’이라고 애매하게 표현해서는 안 된다. 물론 문희는 몸수색을 수치스러워하지만, 그녀가 옥상으로 내몰렸던 이유는 돈을 숨기는 동료들의 행위에 대한 수치심도 있었다. 문희는 건물 옥상에서 투신하는 것으로 노동 시장으로부터의 탈출을 상연한다. 그녀의 일화는 전설처럼 남아 모든 버스에는 ‘이문희를 기억하자’라는 문구가 새겨진다. 후배 안내원들은 이 문구를 보며 어렵고 힘들지만, 삥땅하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 영화 속 폐쇄된 세계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 결론이 성에 차지 않음은 물론이다. 바뀌어야 할 것은 삥땅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이들의 노동 환경이다. 그런데도 완료된 세계 바깥에 놓인 우리가 문희의 행동에 관해 오늘의 잣대로 비판할 수는 없다. 누구라도 문희처럼 세계 내부에 있을 때, 바깥을 쉽게 상상할 수 없다. 바깥으로 쫓겨난 뒤에야 비로소 내가 있던 세계를 똑바로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노동 투쟁은 대부분 끝없이 내몰린 상태에서 일어난다. 부당 해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노동자들은 대부분 참고 견딘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있을 곳이 여기 밖에 없다고 여겨지기 마련이며, 실패의 경험은 뼈아프기 때문이다. 문희가 도덕적 인물이어야 했던 이유는 그래야지만, 그녀의 고귀한 희생과 진심이 퇴색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희가 맞은 결말은 세계 내부에 존속한 상태에서 가능한 투쟁의 극단이 결국 향하게 되는 장소를 가리킨다. 오늘의 시선 속에 낯설게 보이는 것은 요금함과 카드 인식기 대신에 탑승객과 일일이 접촉하는 안내원의 손이 있었다는 사실일 거다. 기계로 대체되기 이전에 그곳에는 사람이, 특히 여성 노동자가 있었다. 이들이 손과 몸으로 힘껏 밀어붙인 것은 단지 버스의 승객만이 아니다. 자본의 광풍 한가운데에 선 이들은 산업화와 자본의 속력 속으로 승객을 떠민다. 그렇지만 아직 그들의 얼굴에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표정이 남아 있었다. 노동시장의 말단을 깊이 체험한 ‘천사’ 문희의 외침은 무엇보다 시스템 도입 이전에 인간에 대한 믿음의 회복을 호소한다. 오늘날 사라진 직업인 버스 안내원을 비롯해 노동자가 있던 자리는 빠르게 무인 시스템으로 대체되고 있다. 문희의 외침에 대한 응답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무인화된 세계에 일정 정도 편의를 누리면서도 사람이 사라진 자리가 인간을 향한 붕괴된 믿음과 이를 보충하는 감시의 증거는 아닌지 근심한다. >> 도시로 간 처녀 고화질 VOD 보러가기 <<
이만희 감독은 1965년 한 해 동안 < 흑룡강 >, < 7인의 여포로 >, < 흑맥 >, < 시장 > 등 네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 가운데 <흑맥(黑麥)>은 이 감독이 <7인의 여포로>로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재판 중인 과정에서 읽은 이문희 (李文熙)의 장편소설이 원작이다. 이 작품은 그가 처음 손댄 문예물이라는 사실과 당시 갓 여고를 나온 열여덟 살 대학 신입생의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그 신인 배우가 1천여 명의 공모자 가운데서 뽑힌 이순임(李順任). 바로 뒷날 윤정희 , 남정임 과 함께 트로이카 스타의 한 축을 이루며 한국영화에 기여한 문희 (文姬)이다. 이만희 감독은 그녀에게 본명 대신 원작자의 이름(발음)을 딴 ‘문희’라는 예명을 붙여 주었다. 전쟁의 후유증과 사회악에 대한 비판의식이 짙게 깔린 이 영화는 이만희 특유의 과감한 용인술과 캐릭터의 설정, 영상 감각이 돋보인다. 여기에는 서정민 (촬영)의 짜임새 있는 화면구도도 한몫을 하였다. 6,25동란 후 서울역 주변에는 깡패, 양아치들의 폭력과 절도, 매음이 만연되고 있었다. 이들 독초의 왕초는 목사인 아버지를 잃고 단신 월남하여 거리를 헤매다가 용산 패를 거느리게 된 독수리( 신성일 )이다. 이런 그 앞에 어느 날 미순( 문희 )이 나타난다. 하나뿐인 어머니를 여의고 서울로 일자리를 얻으러 왔다가 날치기 패들에게 걸려든 시골소녀이다. 독수리의 똘마니가 미순의 성경책을 훔치고 달아나는 바람에 생긴 일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미순은 비록 그들의 소굴에서 지내지만 두려움을 거두고 더러운 빨래와 끼니를 도와주며 잘 적응해 나간다. 마음도 열게 된다. 독수리도 미순에게 끌리기 시작한다. 청순한 미순의 사랑이 빗나간 왕초의 마음을 녹인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 그의 진심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미순을 사랑하면서부터 독수리는 두목으로서 박력을 잃기 시작한다. 이런 가운데 미순이 집을 나가자 독수리는 그녀가 몰래 나간다는 명동의 스탠드바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미순을 희롱하는 명동파 왕초를 보고 참다못한 독수리가 격투 끝에 그만 그를 살해하고 만다. 미순을 뒤에 남기고 수사관에게 끌려가는 독수리. 그는 수갑 찬 손을 미순이 보지 못하도록 성경책으로 얼굴을 가리라고 부탁한다. “인생이란 결코 뜻대로 운행되지 않는다. 본래는 허약했던 목사 아들이 도둑놈 우두머리로 출세했다는 사실이 그걸 말해 주고 있어. 기차를 탄다고 반드시 가고 싶은 델 갈 수 있는 건 아냐. 도중에 기차가 뒤집히는 수도 있거든.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이 장난감 기차뿐이야!” 피를 토하듯이 내뱉는 독수리의 독백이 화면을 덮는다. < 흑맥 >은 전쟁으로 인해 깜부기병에 걸린 보리처럼 사회에서 버림받은 부초(浮草) 같은 인생의 이야기이다. 이만희 감독은 여주인공 미순을, 때는 묻었지만 진흙 속에 핀 연꽃처럼 청순한 이미지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녀는 독수리에게 신앙이나 다름없는 존재이다. 이 영화에는 ‘쪼아온다’, ‘토꼈다’는 등의 은어가 많이 나온다. 이런 대사에서 현실에 안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전후 젊은이들의 비행과 일탈적 삶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의 특징은 등장인물을 거의 신인으로 충당했다는 점이다. 그들 중에는 배우지망생이 아닌 촬영 조수나 조명기사, 연출보 등 뒤에서 돕는 스태프들도 끼어 있다. 연기 면에서 독수리 역의 신성일 은 < 성난 능금 >( 김묵 , 1963) 이후 모처럼 분출하는 힘을 안으로 삭이려는 노력을 보여 주었고, 문희 역시 눈의 매력을 활용한 연기로 기대를 모으게 하였다. 아무튼 < 흑맥 >은 < 돌아오지 않는 해병 >, < 만추 >, < 삼포 가는 길 >과 더불어 이만희 영화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필름이 보존되어 있지 않아 기록상으로나마 반드시 남겨야 할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