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자리
- 감독
- 이유진
- 제작년도
- 2024
- 출연
- 채수하, 홍정민, 정태성, 진성찬
사진: 출판사 무제 가끔은 혼자서 몰래 이와 같은 생각들을 해왔다. 영화 시나리오는 영화에게 마치 엄마 같은 존재라고. 영화 촬영장에서 자신만의 일을 해내고 있는 이런저런 자식들은 역시 엄마가 있었기에 거기 있게 된 거라고. 엄마가 자식을 어찌 낳아 길러내는 건지에 대해 일일이 거론할 수 없다고 느끼듯이, 한 편의 영화 시나리오가 쓰이는 과정은 실로 재현이 불가능한 작업이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는 자신이 대체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시나리오를 써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스스로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모든 언어적·비언어적 창작의 속성이 그렇기는 하겠지만, 그중 특히 영화 시나리오 작업은 비유하자면 마치 밤사이 꾸는 꿈 같다. 아니, 밤사이 지나간 꿈을 일상과 인생에 연결시켜 플롯화하려는 편집증적인 집착에 가깝다. 이 과정은 환한 조명 아래 카메라 앞에서 기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거칠고 어두운 침묵의 방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대개 주목받지 못한 채 잊히거나 심지어 무시당하기도 한다. 마치 우리들의 엄마들이 그러하듯이. 언제부턴가 나는 이것이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불운이자 불행이라고 생각해왔다. 또한 이 모든 불리함과 아픔을 작가가 자기만의 것으로 기꺼이 끌어안을 때, 그때야 비로소 그에게는 더없는 보상이라 할 만한 삶의 아이러니와 예술의 신비로 가는 비밀스러운 문이 열린다고도. 좀 더 구성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해보자면, 영화 시나리오에는 어떤 의미에서건 작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고유한 인생의 단면뿐 아니라, 그를 스쳐 가는 여러 만남들, 인연들, 인연이 아닌 것들, 실제의 사건들과 환상 혹은 망상 속의 기미들이 모두 담기기 마련이고 담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허구의 영화를 최대한 진짜 삶 같이 보이게 하기 위하여, 영화 시나리오 작가는 매순간 여러 사람이 되어야 하며, 동시에 여러 사람을 보는 카메라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로 집필 중인 영화 시나리오 작가는 매순간 자신을 부수고 또 부순다. 얼마나 부술 수 있을지에 승부가 달려있다. 혹자는 나에게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작가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이 마치 정신분열증 환자가 겪는 일과 비슷하다는 말을 해주었는데, 나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의 말이 옳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마도 이와 같은 유체이탈의 무한반복과정을 포착해내거나 이해해내는 일은, AI 첨단 장비를 구비한 미래의 뇌신경과학자나 도스또예프스키 급의 작가에게 맡겨져야 할 법도 하다. 영화제작현장을 찍는 메이킹필름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정말로 이와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이해하는 일에 한 획을 긋는, 꽤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과학 일기가 될 수도 있겠다. 오랫동안 아주 은밀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온 일이기에 더욱 그럴 것 같다. 나는 가끔은 혼자서 몰래 이와 같은 생각들을 해왔다. 영화계라는 곳, 보이는 게 너무도 중요한 세계에서 하필 영화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다. 애초에 영화는 작가의 고독한 삶에서, 그의 일상을 지나쳐가는 모든 유의미하고 무의미한 사물과 인연 속에서 절묘하게 잉태된다. 그것은 언어로 쓰여 책이 되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되며, 그 사람들이 붐비는 촬영장이 된다. 그곳에서 카메라를 통해 결코 만질 수 없으나 만져질 듯 생생한 영상으로 기록된다. 이 영상은 마침내 무수한 디지털 입자가 되어 하얀 화면 위로 투사되고, 화면 앞에 앉은 익명의 인간들의 망막을 뚫고서 그들의 몸과 삶 속으로, 어쩌면 영혼 속으로 침투한다. 그러므로 나는 영화가 최종적으로 만들어지는 곳은 결국 우리들 각자의 인생 속에서 라는 생각을 갖게 됐는데, 이것은 점점 하나의 견해라기보다 신념에 가까운 것이 되어갔다. 나는 어느새 영화는 잔상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고, 어느 날부턴가는 우리 안에서 영화의 잔상이 우리 각자의 삶과 섞이고 섞여 뒤죽박죽인 상태가 될 때, 그때야 비로소 영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어졌다. 책 『내 모든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생각의 바탕에서 생겨났다. 이 책의 집필 과정에 관한 이야기 중 가장 아카이빙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바탕이라고 본다. 『내 모든 것』 중 인물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언급한 작품들 (상) <걸어도 걸어도>, <애정의 조건> (사진: IMDb , Photo by Archive Photos/Getty Images, © 2012 Getty Images) (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코요테 어글리> (사진: IMDb , © 2000 Buena Vista Home Entertainment) 좀 더 용기를 내서 첨언하자면,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대한 본질적 이해와 현실적 지지 없이 영화 및 기타 영상산업의 인간다운 도약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이미 AI가 다 할 수 있겠구나, 싶은 방향으로 퇴행 중이라고도 본다. 그러나 영화라는 것이 단지 영상 오락물 내지 서비스 업종이 아니라 예술일 수 있다고 믿는 어떤 인간이 있는 한, 그는 기필코 자신만의 고유한 인생을 스쳐 갔던 기억과 상상을 통하여서 스스로에게 운명 같은 영화 시나리오를 써내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지금과 같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는 꽤 뼈아픈 전투가, 아마도 산업적으로 패배할 확률이 높은 무모한 도전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하여 나는 이 시대의 자본과 시스템에게 굳이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만약 인간만이 이룰 수 있는 예술에 투자하고 싶다면? 골방에 처박힌 가난한 작가를 더 자주, 더 집중해서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마치 <삼체>(2024)에서 인류의 미래를 미리 사냥해 둔 외계인이 등장하기 전에 면벽수행을 할 현자들을 골라 침묵의 인류구조 시나리오를 비축해달라고 강제하듯이. 그러나 유튜브 쇼츠로부터 도파민을 공급받기 위하여 어둠 속 이부자리에서 녹내장의 위험을 무릅쓰는 현대의 인간들이 과연 그와 같은 투자를 감행할 투지를 품을 수 있을런지? 내 판단으로는, 영상예술의 미래는 당분간 AI에 삼켜졌다고 본다. 한편 이후 AI의 인격적 고민이 가시화될 세계에 대해서는, 내 능력 밖의 일이란 낙관론을 남겨두겠다. 그러므로 책 『내 모든 것』이라는 한 영화 시나리오 작가의 취재일기, 이런저런 사람들의 삶과 영화에 대한 고백들을 담아낸 우연하면서도 필연적인 순간들의 기록,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각각의 의미 있는 단편으로 구성해보고자 애를 쓴 창작노트, 그 창작의 과정 속에서 작자 스스로의 삶을 거울로써 이용하고 들여다보고자 한 고군분투기는 그저 티끌 같은 기록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기록은 아주 개인적이면서도 유일한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영화 시나리오 작업이란 본래 이처럼 개인적이고 유일한 것일 수밖에 없음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쓰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그저 평범한 에세이나 인터뷰집이 아닌 단편소설집 같다고 느끼곤 한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본래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작가 자신과 작가 주변의 삶을 바탕으로 허구의 주인공을 찾아내고 그의 삶을 진짜처럼 그려내는 것이니까. 책 『내 모든 것』의 맨 처음 가제는 “삶을 이기는 영화”였다. 실은 그 시절 나 자신에게 던지고픈 질문이었다. 영화라는 게 과연 삶을 이기나? 혹은 영화라는 게 과연 삶의 고통을 이기게 해주나? 영화라는 게 내가 이렇게 기를 쓰고 진을 빼며 만들어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건가? 그럴 만큼 영화라는 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필요하긴 한 건가?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서 늘 이러한 질문들을 품고 살아가다보니, 집필 중에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 취재를 하다보면 자연스레 영화 이야기를 하게 됐고 묻게 됐다. “살면서 영향을 받은 영화가 있나요? 그게 영화의 이야기든 영화 속 한 장면이든, 인생에 남아있는 어떤 영화가 있나요?” (사실 이 책에 ‘사람들의 진짜 인생영화에 대한 이야기’라는 이름표를 달아준 이는 작가가 아닌 이 책을 펴낸 무제출판사였음을 여기서 밝혀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책의 소재가 되기에는 너무 보잘것없거나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또 그런 만큼 자유로웠다. 그들이 더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익명의 장치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책 속 ‘노아’와 ‘세라’라는 가명으로 등장하는 두 여성과의 잇단 만남이었다. 둘 다 집필 초반에 우연한 기회로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다. 왠지 들어볼 만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인터뷰를 청했는데, 각각 성폭력 피해 경험과 자살 중독을 앓은 경험을 털어놓으며 내 작은 머릿속에서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를 가져다줬다. 이곳에는 노아의 이야기를 남겨두려 한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 중 / 사진: IMDb( 1 , 2 ) 노아는 조기유학시절 덜 신중했던 성관계로부터 비롯된 집단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로서, 이후 성(性)적으로 문란하고 예민하고 특수한 각종 시도와 방황을 통해 생존해가고 있었다. 나에게 그것은 그녀 안에서 필연적인 서사로 느껴졌다. 좀 더 과감히 말하면, 고통으로 각인된 자기 몸의 한계를 부수려는 존엄한 투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영화 < 릴리슈슈의 모든 것 >(이와이 슈운지, 2001)에서 집단 성폭력의 피해를 입은 후 자살을 하는 여고생, 아오이 유우와 친구가 되는 상상에 빠져들곤 했는데, 단지 그 영화 속으로 들어가 그녀 곁에 있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그냥 피해자가 한 명 느는 거죠. 그렇지만 덜 외롭잖아.” 나는 노아의 초현실적인 연대의식에 충격을 받았으며, 그녀가 혼자였던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애타게 누군가를 기다렸을지에 대해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실제로 몸이 조이는 것 같은 감각을 느껴 원고를 만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헤맸다. 내 글의 처음 엔딩은 노아가 아오이 유우와 함께 무해한 동네 청년들 속에 섞여 마음껏 수영을 하는 장면이었다. 그때는 그저 그녀의 몸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살 속에 잠겨 있기만을 바랐던 것 같다. 그러나 글쓰기를 마친 후 거듭해서 읽어볼수록, 이와 같은 결말은 용맹했던 노아의 고백에 비해 너무나도 유치한 것 같았다. 어느 나른했던 저녁에, 나는 친구에게 원고를 보여주며 이렇게 고백했다. “사실 노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영화 속에서 연이 날던 그 언덕이 더 무서워졌어. 영화에서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아이들이 빨간 연을 날리고 있잖아. 너무 착해 보이고 너무 잘 웃고 너무 평범해 보이는 남자아이들이, 딱 일본사람들 같잖아. 태양 같은 욱일기를 휘날리면서 해맑게 사람을 죽였던 그 사람들 말이야. 내 말은 일본인이라서 그렇다는 게 아니고, 일본이든 어디든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있는 사람 같다는 거야……. 그런데 있잖아, 나한테는 그게 마치 영화 같기도 하거든. 영화라는 게 원래 너무 예쁘고 너무 멋지고 그래서, 그냥 그것 자체로 충분해보일 때가 많잖아. 심지어 영화 속 어떤 장면이나 인물이 내 영혼을 병들게 해도, 그게 나보다 근사해보인단 이유로 내가 거기에 그냥 머무르고 싶을 때가 있잖아. 주저앉아버리기도 하잖아. 혹시 노아에게 <릴리슈슈의 모든 것>이 그런 거 아닐까? 자꾸 그런 걱정이 들어서 그랬는지, 나는 이 이야기를 쓰는 게 너무 힘들었어. 사실 나는 노아가 그냥 또 한 명의 피해자로 그 영화 속에 들어가는 게 싫어. 나는 노아가 이제 그만 그 영화에서 나왔으면 좋겠거든. 아오이 유우의 손을 잡고서 같이 탈출했으면 좋겠거든. 내가 영화인이랍시고 영화에 대해 이런 책을 쓰고는 있지만, 영화 같은 게 뭐 그리 중요하겠어? 노아가 사는 게 중요하지!” 그래서 나는 노아와 아오이 유우를 그 영화로부터 탈출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사람들의 진짜 인생영화에 대한 이야기, 책 『내 모든 것』은 그렇게 시작됐다. 2026년 4월, 오정미. <릴리슈슈의 모든 것> 중 (사진: IMDb )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오정미(영화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l 영화 < 버닝 >(2018), < 심장소리 >(2022), <가능한 사랑>의 각본을 썼다. 책 『내 모든 것』을 썼다.
보고 난 다음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이미 불이 켜진 다음이고 화면은 하얀 천을 드러내면서 영화가 끝났음을 내게 알려주었다. 극장은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이미 텅 비어있었다. 그때는 항상 그러했다. 나는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를 처음 보았을 때의 어리둥절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지금 숨은 걸작을 발견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무언가 이건 난처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 족보 >를 만든 다음, 이미 < 짝코 >를 만든 다음, 이미 < 만다라 >를 만든 다음에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는 < 안개마을 >과 ‘동시에’ 만들어졌다. 나는 이 말을 단지 연대기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임권택 이 우진필름에서 <나비 품에서 울었다>를 찍을 때 화천공사에서 <안개마을>을 함께 진행하고 있었다. 그냥 ‘충무로 식으로 말하면’ 두 편의 영화는 ‘가께모찌(掛持ち)’로 진행되었다. 한쪽에서는 <안개마을>의 촬영 로케이션 장소에 내려가서 준비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한 쪽에서는 <나비 품에서 울었다>의 시나리오를 써가면서 강원도에서 충청도에 이르는 지역을 돌면서 촬영을 시작하였다. (내가 알기로) 이 두 편의 영화는 임권택의 마지막 ‘가께모찌’ 영화이다. 나는 이 방법에 대해서 공격할 생각이 없다. 이건 상황이다. 한국영화는 오랜 시간 동안 이런 일정에 대해서 익숙해있었고, 많은 영화들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1982년 그해 가을에서 겨울 첫눈이 내릴 때까지의 이야기이다. 내게 말하기를 “<안개마을>은 첫눈이 내릴 때 즈음 촬영이 끝났어요”라고 했다. 그런 다음 임권택은 < 길소뜸 >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 티켓 >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 씨받이 >를 만들 것이다. 종종 임권택을 하나의 직선처럼 설명할 때가 있다. 그저 단순하고 군더더기 없으며 일직선처럼 이어지는 선. 앞의 영화가 뒤의 영화를 설명할 수 있다는 진화론적인 작가주의의 믿음. 그때 의도적으로, 이를테면, <나비 품에서 울었다>(와 같은 영화)를, 슬그머니 셈에서 빼고 지나쳐버린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영화의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무엇이 무엇을 포함하는가, 라는 질문이 있다. 숨어있는 사건. 우리는 선을 따라갈 때 종종 중간에 사라져버린 점을 놓칠지 모른다. 하지만 점이라고 생각한 것이 구멍이 되어 그 안에 예기치 않은 역량들을 숨겨놓았을 때 우리는 결정체의 서사들 속에서 이리저리 빠져나가버린 새로운 감각의 가능성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어떤 가시적인 비정상성. 예기치 않은 구성. 거의 부서져버릴 지도 모를 지경까지 이르러도 할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된 시퀀스들. 영화에서 가끔 그런 순간들과 마주칠 때가 있다. 나는 지금 힛치콕의 <염소자리 아래에서>를 떠올리고 있다. 아슬아슬할 정도로 견디고 있는 화면들. 그런데도 더할 나위 없이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하는 감각. 예기치 않은 반응. 그 안에서 지각의 상황과 청각의 조건이 변화하기 시작할 때 거기서 나는 과거의 관습과의 긴장을 해결하는 새로운 기능의 가능성을 바라보게 된다. 가능성의 조건들. 상황을 열어 놓아야 한다. 상투적인 비평들은 <만다라> ‘이후’를 말하면서 임권택의 ‘완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나는 이 말이 게으른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주어진 영화 모두를 경험해야 한다. 그런 다음 매번 영화를 본다는 문제가 그 유일무이한 중간과정의 상황에 던져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야 한다. 작가주의 담론 안에서 헤게모니화 되지 않은 점. 그때 이 점을 파고 들어가 구멍으로 만든 다음 그 안에서 미처 전개되지 않은 가능성에 대해서 밀고 나가볼 용기가 비평에 있어야 한다. 블록을 무너트려야 한다. 펠릭스 가타리가 1965년 메어리 반스의 사례를 본 다음 한 선언. 그런 다음 여백에 무언가를 써 넣어야 한다. 데리다가 필립 솔레르의 소설을 읽고 난 다음 했던 그 작업. 이건 나의 배움이다. 단순하게 말하고 싶다. 나는 지금 임권택의 1980년대 영화들, 그러니까 <만다라>와 <길소뜸> 사이에, <나비 품에서 울었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끌어들이려고 한다. 우스꽝스러운 제목에 대한 (다소 도식적인) 가설.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라는 제목은 누구라도 임권택 의 영화 목록을 정리하다말고 다시 그 이름을 확인하고 싶게 만든다. 나는 이 제목에서 어떤 시적인 기분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이 영화의 배경은 늦가을에 시작해서 이른 겨울로 향하고 있다. 아마도 영화가 끝나면 이야기의 무대가 되었던 장소들, 이영하와 나영희 두 사람이 그렇게 돌아다녔던 강원도와 충청도의 낯선 공간에는 첫눈이 내릴 것이다. 그리고 그때 임권택은 안성기 와 정윤희 를 데리고 정일성 의 촬영으로 < 안개마을 >을 찍고 있었을 것이다. <나비 품에서 울었다>와 <안개마을>은 두 편 모두 시나리오를 송길한 이 썼다. 이 영화는 봄에 진행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단 한 장면에서도 나비를 볼 수 없다. 혹은 봄을 기다리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비 품에서 울었다>라는 제목은 이 영화의 이야기, 장소, 인물, 에피소드, 미장센, 소도구, 그 어느 것과도 공명현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나는 <나비 품에서 울었다>가 영화감독 정진우 의 영화사 우진필름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잘 알려진 것처럼 정진우는 임권택과 함께 정창화 밑에서 연출부 도제수업을 했으며, 그런 다음 그 둘은 1962년 거의 동시에 첫 번째 영화를 찍었다. 좀 더 정확하게 임권택이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찍을 때 “그 영화가 대작이잖아요, 스타들도 많이 나왔고, 내가 첫 영화인데다가 아무래도 아직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없으니 영화사에서 진우한테 좀 도와주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진우가 데뷔할 때 내가 돕는 걸로 이야기를 했죠, 물론 그냥 이야기로 끝났죠, 아무래도 이미 감독이 된 사람이 현장에 와서 있으면 불편하니까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정진우는 그 이듬해 < 외아들 >로 데뷔하였다. 그 대신 임권택은 그 후에 제작사를 낸 정진우의 영화사에서 많은 영화를 찍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영화를 연출했다. (임권택 자신의 말을 빌리면) “가장 안 팔리던 시절”인 1973년 < 장안명기 오백화 >로 시작해서 두 편의 영화 < 연화 >와 < 연화 2 >(1974년), < 맨발의 눈길 >과 < 아내 >(1976년), < 임진왜란과 계월향 >, < 옥례기 >(1977년), < 아벤고 공수군단 >(1982년), 그리고 <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1984년)까지 모두 11편을 만들었다. 정진우 자신도 1960년대에 쉬지 않고 영화를 연출하였다. 임권택과 다른 점은 (아마도) 1967년부터 그는 자신의 영화를 직접 기획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영화사를 차렸고, 그는 자신의 영화를 거기서 연출하였고 그러면서 다른 감독들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 영화사의 목록에는 김기영 의 < 화녀 >와 <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가 포함되어 있다. 나는 좀 더 제목을 열거할 수 있다. 김수용 의 < 화조 >. 정소영 의 < 나는 고백한다 >. 그러면서 정진우는 영화감독으로서 자신만의 목록을 만들어나갔다. 그 영화들이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하여튼 자기의 리듬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나비 품에서 울었다>를 제작할 무렵 정진우는 그 자신이 제작한 일련의 영화들을 마치 연작처럼 제목을 지었다. 1980년에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를 만든 다음 그 이듬해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 그리고 <나비 품에서 울었다>를 임권택이 찍고 있을 때 그 자신은 <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를 찍었다. (하지만 두 편이 동시에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두 편은 모두 나영희 가 주연이며 동일한 계절이 아니다) 그저 제목만을 생각한다면 <나비 품에서 울었다>는 마치 정진우의 일련의 영화들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제목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나는 제목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영화 안으로 이끄는 입구와도 같은 것이며, 때로는 영화 전체에 대한 일종의 다이어그램 역할을 하기도 한다. <나비 품에서 울었다>라는 제목은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영화를 (다시) 보고 난 다음에도 그렇다. 나는 여기서 영화와 제목 사이의 상호간의 거리를 좁히려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내가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를 처음 본 다음 느낀 난처함은 단지 그런 이유가 아니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느끼는 것은 위험한 혼합의 가능성이 종종 각자의 방법을 독립된 항목처럼 내세울 때마다 서로 분리되는 것만 같은 형태 안에서 매번의 표현이 매번의 다른 방향에서 제시된다는 데서 오는 기괴한 당혹스러움이었다. 내가 이 영화에서 본 것은 단순히 서로 다른 것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상하게도 함께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서로 어떤 관계도 갖지 않은 채 기이하게도 서로가 서로에 대한 돌연한 근접이 계속해서 시도되었다. 이때 영화는 위계질서가 중요해진다. 이제 그것을 저것과 연결할 것인가, 아니면 주변에 놓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위 혹은 아래로 옮길 것인가. 영화에서 배치라는 문제. 이때 이것이 저것과 소통하느냐의 문제는 단지 미학적인 질문이 아니다. <나비 품에서 울었다>는 보고 난 다음 무언가를 주저하게 만든다. 이 영화 안에서 무언가는 소멸해가고 다른 무언가는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아마 나는 끝내 그 무언가를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엔 스쳐 지나갈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나를 붙든다. 다만 나는 여기서 몇 개의 씬들을 설명하는 대신 불규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그 안에서, 그 씬의 방법 안에 들어가서, 그것을 배열하는 구성의 원칙을 물어본 다음, 서로의 이질성을 존중하면서 재빨리 빠져나올 생각이다. 나는 이들 사이의 기능보다는 다소 제한적으로 그냥 그 씬이 활동하는 흔적만을 볼 것이다. 그 씬의 방법은 어디서 왔는가, 그런 다음 어디로 가는가. 같은 질문의 다른 판본. 어떻게 바깥은 안에 있는가. 끊임없는 분산. 이때 임권택 은 중심 없는 중심에서 어떻게 그것을 동여매는가. 매듭이라는 방법. 그저 인상적으로만 말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는 어딘지 모르게 < 만다라 >의 다른 버전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있다. 물론 어떤 장면도, 어떤 이미지도, 어떤 줄거리도, 그런 연상을 불러들이지는 않는다. 나는 단지 임권택 이 연출을 하고, (<만다라>의 각색을 한) 송길한 의 시나리오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만다라>는 영화가 시작하면 한 겨울 어느 시골길에서 시외버스가 멈춘 다음 거기서 두 승려가 내리고, 그런 다음 두 번 다시 그 두 사람은 차를 타지 않고 내내 걸으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나비 품에서 울었다>는 영화가 시작하면 늦가을 강원도 어느 호텔 앞에서 여자가 택시에 올라탄 다음 내내 이 택시를 타고 (운전기사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때 둘 사이는 단지 걸어간다, 와 차를 탄다, 라는 동사의 차이가 아니다. 우리는 걸어가면서 보는 세상과의 만남의 방식과 차를 타고 달리면서 지나쳐가는 세상과의 관계의 방식의 차이를 생각해야 한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주제나, 테마나, 소재나, 인물이나, 대사나, (말하자면 그런 방식의 분류에 따르면) 서로 아무 것도 겹치지 않는다. 단지 한 가지. 둘 사이의 진행방식의 지각이라는 점(의 차이)에서만 동일하다. 이때 여기서 문제 제기를 하는 위상은 우리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게 만든다. 영화가 세상을 지각하는 두 가지 방법. 신체적 지각과 기계적 지각. 이때 기계적 지각은 우리의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과 운동을 어떻게 연결하느냐, 라는 질문에로 이끈다. 당신은 누구보다도 지가 베르토프가 떠오를 것이다. 그런 다음 요리스 이벤스가 있다. 나는 여기에 장 마리-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이예를 더하고 싶다. 당신은 내가 지금 너무 많은 예를 들고 있다고 염려할지 모른다. 나는 이미 말했다. 원칙을 물어본 다음 그 안에서 다이어그램의 계보를 생각해보자고 제안할 생각이다. 먼저 지가 베르토프의 간격. 따로 떨어진 것은 끝내 서로 하나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 둘 사이에서 그 안에 있는 규칙을 따르는 대신 그 둘의 간격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예외적인 특징의 관계를 끌어내야 한다. 영화가 보여준다는 것은 세상의 틈을 드러내는 예외적인 시간의 이미지들이 행동한다는 뜻이다. (고스란히, 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비 품에서 울었다>는 무엇보다 간격의 영화이다. 거의 일제히, 라고 할 만큼 시퀀스들이 각자의 구성 원칙에 따라서 떨어져 나간다. 임권택은 그걸 이상할 정도로 느슨하게 연결시켜 놓은 다음 그냥 거기서 멈춘다. 심지어 어떤 장면들은 분리가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을 정도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장면들은 계획 없이 찍혔으며, 많은 쇼트들은 그 장소의 조건에 기꺼이 따르고 있다. 이상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구체적이라기보다는 개념적이고, 종종 어떤 장소들이 초현실주의적인 무대처럼 보이며, 때로는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 상황 때문에 부조리하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영화를 말하기 위해서 < 나비 품에서 울었다 >가 진행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따라가면서 그대로 그 방법을 복사하듯이 전달할 것이다. 한가로운 첫 장면, 설악산의 늦가을. 호텔 침대에서 막 일어난 여자가 잠시 풍경을 감상한 다음, 한껏 게으르게 그 시간을 누린다. 계절의 기호. 장소의 약속. 이곳에 이 시간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행객들이다. 그러나 이 여자가 이상한 것은 이 장소에 혼자 왔으며, 그녀가(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냥 그녀는 한가하게 풍경을 본 다음 테라스에 앉아서 무언가를 생각한다. 자동적인 약속. 아마도 이 영화는 그 사연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여자의 이름을 한참 뒤에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아는 사람은 이 주변에 없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것이며. 자기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호명하기 전에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말하기 전에는 나도 그저 그녀라고 부를 것이다. 체험된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기. 아마도 차례로 나타나게 될 장애물.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될 것이다. 지식? 그렇다. 우리는 아직 이 영화의 목표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단지 그녀에서 멈추지 않고 동시에 그 경로 자체에 대한 탐색이 될 것이다. 이때 이걸 어느 한 쪽의 이야기라고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나는 좀 더 밀고 나가고 싶다. 이 순간 이 장애물들은 오로지 그녀이기 때문에 미리 결정지어진 장애물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우얼바하는 매우 흥미로운 가설을 우리에게 제시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율리시즈를 방해하는 괴물들, 마녀, 재난, 하여튼 그 모든 장애물들은 오로지 그가 율리시즈이기 때문에 그 앞을 가로 막고 나선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그들은 율리시즈를 설명하는 존재들이다.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우리를 막아 나서는 모든 것들은 우리들이 만들어낸 장애물이다. 세상의 일부였던 내가 부분들 사이의 연결의 계기가 될 때 갑자기 세상은 마술적인 질서를 새로이 만들어내기 시작할 것이다. 끊임없이 새로 짜여지는 경우의 수. 무엇이 무엇을 대체한 것일까. 관점의 새로운 이동.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의 분리. 아마도 이것을 임권택 은 < 만다라 >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그는 이 분리를 다시 한 번, 그러나 다른 지각의 간격을 통해서 반복한다. 그저 다짜고짜, 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시작. 그녀가 누구인지, 그녀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지, 혹은 만날 것인지, 누가 그녀와 동행할 것인지, 아니, 그 모든 것보다 먼저 여기가 어디인지, 미처 아무 것도 준비되지도 않았는데 바깥으로 나온 다음 호텔을 나서서 그녀가 학동으로 가자고 했을 때 모두들 이 장소에 가기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거절의 제스처. 그때 그 거절은 장소에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무언가 끊어진 것을 다시 이으려는 노력. 그런데 무엇이 끊어진 것일까. 그것을 다시 이어놓을 때 그녀에게는 어떤 이익이 돌아오는 것일까. 그녀가 처음 택시를 잡으려 들자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는 운전기사들은 고개를 가로 저은 다음 그녀 곁을 떠난다. 그녀는 지금 갈 수 없는 곳에 가려는 것이다. 가능하지 않은 장소. 아마도 지금 그녀를 태운 기사는 거기가 어딘지 잘 모르기 때문에 엉겁결에 태웠을 것이다. 택시 엔진에 문제가 생기자 정비소에 잠시 머물렀을 때 여기서 만난 청년은 운전기사에게 거기가 얼마나 먼 곳인지 아느냐고 핀잔을 준 다음 그 택시비로는 어림도 없다고 충고한다. 이때 우리는 이 장소가 이 이야기의 영감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두 번째 등장인물. 그녀의 여행을 위해서 운전하며 함께 목적지까지 가게 될 남자. 택시운전기사는 그녀의 길 안내를 하게 될 것이며, (그러므로 그녀의 동선이 될 것이며), 그녀의 말 상대가 될 것이며, (그러므로 그녀의 상대 쇼트(reverse shot)가 될 것이며), 그녀에 관한 지식의 일부를 공유하게 될 것이다. 이때 운전기사는 처음에는 택시라는 자동차와 거의 동일한 사물처럼 다루어진 다음 다시 자기의 인격을 얻게 될 것이다. 두 가지 단락. 첫 번째, 언제 운전기사는 택시로부터 분리되어 자기의 인격을 갖게 될 것인가. 두 번째, 그런 다음 어떻게 그녀로부터 분리되어 다른 하나의 세계를 갖게 될 것인가. 아마도 그때 그녀는 그와 새로운 관계를 만들게 될 것이다. 혹은 반대로 그녀 아니면 그는 상대방의 세계로부터 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녀가 택시에 타자 운전수는 오로지 그녀를 위해 라디오를 튼다. 이때 라디오에서는 영화 < 러브 스토리 >의 사운드 트랙을 편곡한 선율이 흐른다. 하버드 대학교 교수였던 에릭 시걸이 쓴 베스트셀러를 아서 힐러가 1970년에 만든 미국영화. 하버드 법대를 다니던 백만장자의 아들과 프린스턴 대학교 여대생의 ‘러브 스토리’. 그 둘의 사랑은 여자의 불치의 병으로 끝나고, 남자는 눈 내린 센트럴 파크의 공원에서 “바하와 비틀즈와 나를 좋아한 다음 29살에 죽은 여자의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까요”라고 이야기를 시작한 다음 긴 플래시백을 하고 나서 그렇게 거기서 끝난다.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는 <러브 스토리>로부터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있는 영화이다. 게다가 프란시스 레이의 음악은 이 영화와 거의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영화가 다른 영화에서 이미 들었던 ‘지나간’ 영화 음악을 다시 들을 수는 있다. 그때 이 음악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그렇게 <나비 품에서 울었다>는 라디오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마치 하나의 리듬처럼, 영화 바깥의 음악을 끌어당기고 있다. 이때 이 영화는 라디오에 가깝게 다가간다. 영화가 때로 미디어에 다가간 다음 자신이 그 자체가 되기를 원할 때가 있다. 더 할 나위 없는 예.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 비디오드롬 >. 마치 이 영화는 종종 라디오의 사연처럼 진행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임권택 은 영화를 진행한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음악과 풍경의 교차. 달리는 자동차. 그녀는 지금 풍경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녀는 여기에 이미 와 본 적이 있는 것일까.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영화는 대답하지 않는다. 임권택은 고의적이리만큼 그녀의 마음을 불투명하게 만든다. 여자는 풍경을 쳐다보다 말고 생각났다는 듯이 운전수에게 이 영화를 미국에서 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칠년 동안 미국에 있다가 막 돌아왔다고 덧붙인다. 이 대답을 듣자마자 어리둥절해졌다. 나는 구태여 셈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만일 <러브 스토리>를 보았다면 이 여자는 한국에서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영화에 거의 관심이 없었거나(이 영화는 한국에서도 크게 성공하였다) 아니면 영화를 볼 수 없었을 만큼 바빴을 것이다. <러브 스토리>는 그 이듬해에, 그러니까 1971년에, 서울 국제극장에서 개봉하였다. 여자는 조금 전에 미국에 칠년 동안 갔다 왔다고 말했다. 지금은 1982년이다. 그녀는 1975년에 한국을 떠났을 것이다. 아직 세상에는 비디오가 없었고, 영화를 다시 볼 수 있는 방법은 극장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한 가지 가설이 더 남아있다. 그녀는 지금 그냥 떠오르는 대로 거짓말을 하는 중이다. 나는 지금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다. 자동차라는 지각. 그것으로 어떻게 건드리고 싶은 것일까. 라디오라는 청각기호. 그것으로 무엇을 끌어당기려는 것일까. 물론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는 그녀가 옛 애인을 찾아가는 것이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잡아 이끄는 것일까. 왜 그렇게 많은 것들이 그녀를 가로 막아 나서는 것일까. 그들은 마치 그녀에게 다가가서는 안 된다고 경고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 각자의 역할. 그들 각자의 은유. 택시가 고갯길을 넘어 학동에 다가가려 할 때 그들을 가로 막아나서는 사람은 그저 태워달라는 큰 짐을 옆에 낀 영감이다. 택시는 그냥 지나치려 하지만 마치 자석이 끌어당기듯이 자동차는 고개에서 뒤로 미끄러지고, 그걸 쳐다보던 영감은 학동까지 가는 지름길을 자기가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과 동행이 된 영감은 여행을 함께 하기에 좋은 동반자가 아니다. 이미 올라탄 영감의 보따리에서 생닭이 푸드덕 거리기 시작할 때 무언가 여기에는 어딘지 불쾌한 초현실주의적 기분이 감돌기 시작한다. 이때 무례한 영감과 그가 들고 탄 생닭은 무언가 그녀의 이 여행에 대한 기대를 깨트리고 있다는 인상을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킨다. 무엇이 무엇을 망쳐버리고 있는 것일까. 마치 그녀를 조롱하는 듯한 기분. 그걸 단지 환상 안으로 침입한 실재라고 간단하게 말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여기에는 정반대로 추상적인 미로 안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는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바깥과 안의 비대칭의 탈구. 그녀는 무언가를 음미하고 싶어 하지만, 그러나 정확하게 그 만큼 무언가를 일깨우려고 방해하는 자들의 노력. 그런 다음 듣게 되는 두 번째 음악. 다시 두 사람이 되자 택시운전기사는 그녀에게 말한다. “라디오를 틀어드릴까요?” 라디오를 켜자 그룹 이글스(Eagles)가 부른 <호텔 캘리포니아(Hotel California)>가 흐른다. 1976년의 노래. 나는 두 가지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 첫 번째. 무언가 이 영화의 선곡에는 동시대라는 느낌이 없다. 마치 여기에는 1970년대의 어디론가 시간적인 추락을 했다는 인상이 있다. 혹은 저 멀리서 다시 거슬러 올라온다. 두 번째. 처음 <러브 스토리>의 선율을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여기서 음악이 영화에 무드를 제공한다고 얼핏 생각했다. 내가 틀렸다. <호텔 캘리포니아>는 지금 이 영화의 무드와 아무 관계가 없다. 혹은 서사에 어떤 모티브도 제공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이야기의 진행과 대칭이 되는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면 <호텔 캘리포니아>는 무엇을 위해서 흐르는 것일까, 혹은 누구를 위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라디오는 마치 자율적인 행동을 개시한 등장인물처럼 그녀의 마음 따위를 신경 쓰지 않고 자기만의 선곡을 시작한다.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는 그렇게 자꾸만 사슬에서 영화의 여러 기호들이 풀려나간다. 두 번째 오류 추론. 나는 학동에 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곳에 끝내 도착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처 그렇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택시는 학동에 도착했다. 이미지만을 생각한다면 학동 장면은 < 나비 품에서 울었다 >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퀀스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에서 가장 동떨어진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학동(鶴洞)이라는 지명을 들었을 때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고즈넉한 옛 마을의 이미지. 그러나 여기는 탄광촌이다. 이제까지 설악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던 것과 대조적으로 사방이 온통 시커먼 색으로 가득 차 있고, 거기서 살고 있는 가난한 아이들의 무리가 보인다. 그녀는 여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내내 자신이 떠도는 모든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기표이다. 그녀가 찾는 남자는 여기까지 어떻게 흘러들어온 것일까. 그러나 사무실에 찾아갔을 때 그녀는 그 남자가 불미스러운 일로 파면 당했다, 는 말을 들을 뿐이다. 우리는 불미스러운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끝내 알지 못한다. 그는 자꾸만 그녀로부터 달아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그의 행방을 멀리서부터 하나씩 다시 찾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가지 더 이상한 점. 학동에 도착했을 때,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하여튼 여기서 머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는데도, 그녀가 (이 곳에 단 하나밖에 없다는) 여인숙 앞을 서성거리는 장면만을 찍은 다음, 영화는 더 이상 그 앞에서, 그 안에서, 그 주변에서 진행되지 않는다. 그녀는 그날 밤 그 여인숙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숙에 머무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 어떤 상상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마치 거의 피하듯이, 영화는 단 한 쇼트도 이 장소에 할애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날 저녁 그녀는 낮에 헤어진 택시 운전기사를 다시 만난다. 그런 다음 그에게 남자가 범우사에 가서 스님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건 우리가 사무실에서 들은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그걸 그녀는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왜 그녀는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을까. 그때 나는 이 영화가 지금부터 남자의 자리를 놓고 일종의 수건돌리기와 유사한 게임을 시작한 것처럼 여겨졌다. 처음부터 빈자리. 그런 다음 차례로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그 무언가가 동원되기 시작한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거기엔 원래 아무 것도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자리가 비어 있으면 목표는 사라지고 이 여행은 중단될 것이다. 그때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은 단지 그녀의 말뿐이라는 것을 당신은 환기해야 한다. 말이 채우는 공백. 말 속의 인물. 역설적으로 그녀와 그녀의 말 사이에서 정작 탈락되는 것은 그 대상으로서의 남자 그 자체이다. 도식적 설명. 환상과 상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이상한 전도가 보여주는 역설은 이때 그녀는 사실상의 빈자리에 지나지 않는 그 남자의 뒤에 숨어서 자기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진행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을까. 두 번째 날. 그녀와 운전수는 범우사를 가기 위해 강원도를 떠나서 충청도로 옮겨간다. < 나비 품에서 울었다 >에서 지역적 분배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임권택 으로서는 드물게 지리적인 지표들의 모습도 거의 대부분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이 경계를 넘을 때 임권택은 작은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이튿날 그녀가 운전수 옆자리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좀 더 가까워진 거리. 단지 거리만이? 이때 그 자리가 앞과 뒤에서 옆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함께 계산에 넣어야 한다. 평행의 자리. 새로운 관계의 시작. 이날 운전수는 라디오를 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그녀와의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그 어떤 기호도 그 둘 사이의 대화에 개입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듯이, 그는 라디오를 켜지 않는다. 우리는 첫날 라디오를 켠 사람이, 그녀(와 우리)에게 <러브 스토리>의 음악을 들려준 사람이, 운전수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택시에는 언제나 누군가를 위한 빈자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하지만 항상 예기치 않은 이들이, 그 여행 안으로 끼어든다. 그녀가 뒷좌석을 비우자 마치 그 자리가 비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문득 길 위에 선 스님이 그 차를 멈춰 세우고 동승을 부탁한다. 그런 다음 잠시 후에 무례하기 짝이 없는 통기타를 든 청년과 그의 애인이 더불어 남은 자리를 차지한다. 뒷좌석은 가득 차고, 택시는 과밀해진다. 그 안에서 청년은 자기 애인의 바지 안에 손을 넣고 성적인 제스처를 취한다. 이때 나는 그녀를 앞좌석으로 보낸 다음 뒷좌석을 비워놓은 것이 단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챘다. 이 자리의 핵심은 운전석 앞에 매달려 있는 백미러에 있다. 스님과 통기타 청년과 그 애인이 뒤에 탔을 때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그들을 볼 수 있는 방법은 (구태여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 거울을 통해서 보는 수밖에 없다. 그들은 기능적으로 그녀와 운전수가 더 이상 친밀해지는 것을 그 자리에서 중단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나는 좀 더 밀고 나가고 싶다. 이들은 왜 나타난 것일까. 이 질문이 이상하게 여겨질지 모른다. 우리는 이 여행이 그녀가 자기의 과거를 찾으러가는 여행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질문을 바꿔보자. 그들은 왜 그녀가 과거로 가는 시간 여행 안에 끼어들었는가. 이 질문이 성립된다면 우리는 같은 질문을 반대의 방법으로도 던져볼 수 있다. 왜 그녀는 지금 그들 각자의 여행길을 동시적으로 하나로 묶는 순간을 마련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우연의 계획이라는 네트워크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다. 물론 이 계획은 임권택 의 배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대방향에서 바라보면서 그녀는 범우사에 가기 위해서 가던 길에 스님과 통기타 청년을 만난 것이 아니라 스님과 통기타 청년을 태우기 위해서 범우사에 가고 있었다고 사후적으로 설명하면서 배치에 관한 다른 의미의 네트워크를 건드려볼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스님과 통기타 청년과 그 애인은 인내심을 갖고 그 자리에서 오늘 여기를 ‘우연히’ 지나가게 될 그녀를 기다렸다고 말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말하자면 순환의 네트워크. 이 순환이 그녀의 과거에로 향하면서 만들어져가는 이야기라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 그때 그녀가 만난 스님과 그 곁의 통기타 청년과 그 애인은 길 위의 우연이라기보다는, 또는 우연이라 할지라도, 뒷좌석에 앉아있는 그들은 그녀의 그 남자와의 시간 속에서 불러온 과거 안의 미래와 과거의 과거 그 어느 순간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미 그 남자가 불교에 귀의하고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소 서둘러 보자. 그녀가 잠시 후 범우사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단 한 번 그 남자와의 과거를 짧게 플래시백으로 회상한다. 이때 그녀가 떠올리는 시간은 그 남자와 모닥불 캠프에 와서 텐트를 치고 보낸 그날 밤이다. 아마도 통기타 청년과 그 애인의 그 나이, 그 복장. 하지만 영화는 과거의 시간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스님이 먼저 내리고 그 택시를 떠나자, 마치 운이 다하기라도 한 것처럼 택시는 고장 나고, 뒤이어 통기타 청년과 그 애인이 그 차를 떠난 다음, 운전수는 도리 없이 자동차를 수리할 부품을 구하기 위해 여자를 혼자 남겨 놓고 떠난다. 저녁이 찾아오고, 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차 안에서 혼자 기다리는 여자. 깊은 밤이 된 다음 돌아온 운전수는 내일 아침이나 되어야 수리할 정비차가 이곳에 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 낯선 곳에 함께 밤을 보내야 한다.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는 그녀와 운전수에게 서로 더 다가갈 상황을 계속해서 만든 다음 반대로 이 상황을 방해하는 인물을 정확하게 그 순간에 제공한다. 그녀와 운전수가 비를 피해 한 밤중에 낯선 집의 작은 방에 머물 때, 그들 자신만의 시간을 시작하기 위하여 막 저녁을 먹으려고 할 때, 비를 피해 이 방에, 낮에 헤어졌던 통기타 청년과 그 애인이 다시 찾아온다. 망친 시간. 하지만 무엇을? 임권택 은 단지 그 둘 사이의 시간만을 망치지 않는다. 저녁을 먹은 다음 문득 통기타 청년은 기타를 들고 마치 답례라도 하듯이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가 두 번째 날 듣게 되는 유일한 노래이다. 호세 펠리치아노(Jose Montserrate Feliciano Garcia)의 <레인(Rain)>. 청년은 누군가를 위해서 노래를 부른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다소 감동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기의 목소리를 음미한다. 이때 (아마도 이 집의 주인으로 짐작되는) 옆방의 할머니가 문을 열고 나와서 이 노래로부터 아무런 감흥도 받지 못한 표정을 지으면서 “잠 좀 잡시다”라는 말로 이 분위기를 망쳐 놓는다. 임권택은 이 여행에 어떤 무드가 만들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정확하게 그 무드는 그녀가 되찾고 싶어 하는 과거 속의 시간 그 어딘가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억의 어떤 기호들이다. 왜 그걸 망치는 것이 중요해진 것일까. 이상한 장면. 그녀와 통기타 남자와 여자, 운전수는 (지금 열거한 순서대로) 차례로 누워서 불을 끈 다음 잠을 청한다. 상상하기에 따라서 몹시 외설적인 동침. 통기타 청년은 이불 속으로 그의 애인을 노골적으로 만지기 시작하고 그들은 곧 성적인 관계를 가질 것이다. 이때 이 둘이 애무를 시작하자 운전수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버린다. 이제 통기타 청년과 그의 애인, 두 사람과 그녀 사이에는 아무런 방어막도 없다. 그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성적인 관계를 나누기 시작한다. 두 가지 이상한 점. 첫 번째. 이때 갑자기 이 상황이 비현실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누워있는 얼굴을 보여줄 때 상상선을 넘어간다. 나는 임권택 의 영화를 보면서 상상선이 거의 철의 규칙처럼 지켜져 온 것을 보아왔다.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는 그의 일흔 여덟 번째 영화이다. 이 데쿠파주는 그녀가 성 관계를 나누는 통기타 청년과 그의 애인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시선을 맞추기 위한 것도 아니다. 기술적으로만 설명하면 이렇게 찍기 위해서 그들을 반대 방향으로 다시 눕혀야 한다. 혹은 그녀가 반대방향으로 다시 누워야 한다. 말하자면 여기서 넘어간 상상선을 일부러 그렇게 찍어서 선의 체계 바깥으로 나간 것이다. 이때 이 넘어간 상상선이 기이하게도 두 남녀의 성적인 행위와 등을 돌린 그녀 사이에 마치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선을 그어서 저 쪽으로부터 이쪽으로 넘어올 방법이 없다는 듯웰옛錚?방어선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상한 점. <나비 품에서 울었다>에는 (이미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녀가 그 남자를 생각하는 단 한 번의 플래시백이 나온다. 그때 그 남자는 텐트 안에서 무리하게 그녀의 옷을 벗긴 다음 성적인 관계를 갖고 싶어 한다. 그녀는 저항하며 가까스로 팬티만을 입은 채 자신의 젖가슴을 드러내고 텐트 바깥으로 나왔다가 주변 사람들 때문에 다시 돌아 들어간 다음 화가 나서 그에게 거절의 이유를 설명한다. 남자는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녀가 그 남자에게 떠오르는 (영화 속의 유일한) 기억은 섹스(에 대한 시도의 실패)이다. 그런데 이 순간, 섹스에 관한 광경이 바로 그녀 곁에서 펼쳐지고 있는데도, 그녀는 그걸 떠올리지 않는다. 작동하지 않는 플래시백. 기억의 지연. 그녀가 이걸 떠올리는 건 다음 날 범우사에 가서 한낮에 그 절에 놀러온 젊은 커플들을 보면서이다. 영화에서 작동하지 않는 기억장치. 그렇다면 그때 그녀의 얼굴을 보여주는 클로즈업의 표정 이미지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 만일 그 표정에서 시간을 볼 수 없다면 우리가 읽어야 하는 감정의 기호들은 그녀 뒤편의 섹스로부터 무엇을 끌어내고 있는 것일까. 종종 <나비 품에서 울었다>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 지는 분명한데도 무엇을 지칭하는지에 대해서 과도하리만큼 불투명해진다. 세 번째 날. 그녀와 운전수는 범우사로 간다. 그리고 여기서 그녀는 운전수에게 자기가 여기 왔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처음으로 자기 이름이 오현주라고 말해준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갑자기 둘 사이에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 다음 동일한 상황의 반복. 남자는 이 절을 이미 떠난 다음이고, 오현주는 다시 운전수와 함께 그 남자를 찾아서 이 여행의 선을 계속 연장한다. 이 날도 장소를 이동하는 중에 한 남자를 만나고, 남자는 운전수에게 고장 난 자신의 자동차의 수리를 부탁한다. 잠시만 멈춘 다음 약간의 셈. 세 번의 반복. 매번 오현주(와 운전수)는 자신들을 방해하는 누군가를 길에서 만난다. 매번 그 남자는 거기에 없다. 반본 안의 차이. 오현주는 운전수에게 그만큼 다가가고, 그 만큼 방해를 받는다. 그때 이상한 것은 오현주가 찾으러 다니는 남자의 점에서 우리는 그들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삶의 선을 거의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현주의 말에 따르면) 폐병을 앓던 그 남자가 왜 갑자기 실종되었다가 탄광촌에 갔는지 우리는 어떤 단서도 거기서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다음 범우사에 들어가서 스님이 되었다는 것과 탄광촌에서 “불미스러운 일로 쫓겨났다”는 사실 사이에서 느끼는 당황스러운 인상은 그 둘이 전체 안의 부분이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기에 실패한 데서 오는 그 어떤 심연의 자리, 혹은 그 안의 한계와 부딪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여행은 앞으로 밀고 나가면 나갈수록 미로 안에 들어간다기보다는 반대로 점점 더 신기루에 의해 채워지는 텅 빈 비일관성과 마주칠 따름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에 접근하고 있는 것일까. 다른 판본. 같은 말의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 드는 것일까. 이때 둘 사이의 간극은 오현주의 두 개의 시간에서 오는 엇갈림이다.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 사이의 틈새로의 여행. 그 여행을 하나로 묶는 것은 반대로 차례로 현재의 칸막이를 넘어가는 오현주와 운전수 사이의 성적인 이끌림이다. 우리는 이미 둘째 날의 비오는 밤에 (통기타 청년과 그 애인에 의해서) 망쳐진 그들만의 시간을 보았다. 세번째 날 오현주와 운전수는 함게 금정여관에 머물면서 거의 키스하기 직전까지 가지만 갑작스럽게도 검문이 있다는 핑계로 (그들의 안전한 방어막이었던 방문이 열리고) 임검경찰이 이들에게 신분증을 요구하면서 이들의 키스 사이에 끼어들어 그 둘 사이를 (이야기의 차원에서) 찢어놓는다. 나는 이때 이 방문이 반투명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다. 아마도 그 남자를 만날 때까지 오현주의 동선과 운전수의 동선은 겹치지 않을 것이다. 아직은 아니다. (불확실한) 의심. 나는 왠지 < 나비 품에서 울었다 >에 원래는 진행할 생각이었다가 중간에 그만 둔 대목이 있다는 상상을 멈출 수 없다. 이상할 정도로 수많은 쇼트들이 거기서 더 나아갈 수 있는 어떤 잠재성을 놓아둔 채 그냥 거기서 머뭇거린다는 인상을 줄 때가 있다. 가능한 사건. 그 안에 담긴 가능한 행위.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가능한 감정. 물론 이런 쇼트를 잘못 건드리면 그때부터 소설이 된다. 나는 그 위험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쇼트는 하나의 증거이다. 오현주와 운전수가 이제 그 남자를 만나러 강 위에 놓여진 다리를 건넌다. 그 다리를 건너기 직전 <나비 품에서 울었다>로서는 이례적으로 커다란 클로즈업의 쇼트가 나온다. 그 장면이 쇼트이기 때문에 안보고 싶어도 안 볼 수가 없다. 이 남자는 아마도 사진작가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무리들과 함께 이곳을 걸어서 지나가고 있다. 쇼트의 진행은 단순하다. 그러나 이상한 자리에 이상한 순간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새로운 등장인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상한 자리? 잠시만 거슬러 올라가보자. 오현주는 지금 막 강원도의 경계를 넘은 다음 충청도에 와서 그 남자가 있다는 (태안반도에 있는) 청산까지 왔다. 그리고 그 신문사 앞에서 거의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운전수가 그를 부르러 간 짧은 순간에 오현주는 그 남자를 만나는 상상에 잠긴다. 그 남자의 첫 마디. “오랜만이군” 대답. “그렇군요” “우리 칠년 만인가?” “그래요” 그런 다음 오현주가 질문한다. “결혼은 하셨겠죠?” “아니, 현주는?” “좋도록 생각 하세요” “이렇게 만나다니 꿈만 같군” “저도요” 그러나 우리는 이 장면이 오현주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나가던 자동차 소리에 문득 깨어나면서 깨닫게 된다. 이때 이 모든 대화가 오현주의 환상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대화에서 가장 이상한 부분은 오현주가 그 남자에게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의 결혼 여부라는 것이다. 오현주는 그 남자와 의 결혼을 허락받기위해서 칠년을 기다린 다음 미국에서 여기까지 온 것일까. 그런 다음 더 이상한 반응. 질문에 부정을 하자 오현주는 만족한 표정을 지은 다음 그 남자의 반문에 대해서는 좋도록 생각하세요, 라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한다. 잠시의 틈새 사이로 들어온 찰나의 상상. 이때 그녀의 환상이 재구성하기를 바란 상상적인 상황은 누구라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으로 인하여 그 환상의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요구가 원하는 지위가 무엇인지 그 상황에서 달아나버린다. 왜 오현주는 자기의 환상 안에서조차 자기의 요구에 대한 대답과 타협하지 않는 것일까.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오자. 오현주가 환상에서 깨어나자 그 환상의 자리에 동일한 자세로 뛰어온 운전수는 (그가 왜 동일한 자세로 그 자리에 왔는지를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불길한 표정을 지은 다음 이 곳에 없지만 그 남자가 있는 장소를 알려주었다면서 그 곳에 가기를 망설이는 말을 한다. 내가 지적한 쇼트는 그런 다음 등장한다. 영화가 갑자기 무드를 바꾼 다음 추락의 신호를 보냈을 때 마치 어떤 절단이 거기 있는 것처럼 그 쇼트가 등장했을 때 누구라도 거기서 어떤 방향 전환의 기호를 읽을 것이다. 하지만 그 쇼트는 그런 다음 더 이상 아무런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다. 더 이상한 것은 설혹 그 장면을 찍었다 할지라도 편집실에서 그 쇼트는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거의 얼룩처럼 그 쇼트는 그 자리에 그냥 남아있었다. 끝내 설명되어지지 않는 이 클로즈업은 우리에게 무엇의 소재를 알려주기 위한 것일까. <나비 품에서 울었다>는 마치 환상의 얼룩을 그냥 남겨 놓음으로써 영화의 기억을 보존하려는 방법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자리에 그 쇼트들이 그렇게 머물러 있다. 결국 마지막 시퀀스. 오현주의 환상이 그만 깨져버렸을 때 누구라도 그 남자가 환상 속에 머물러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물론이다. 우리는 이미 오현주의 여행에서 그 남자의 자리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걸 눈치 챘다. 점점 희박해지는 기억의 자리. 끊임없이 차에 동승하기를 희망하는 인물들은 이미 그걸 경고하기 위하여 그 빈자리를 차지한 다음 도착을 조금이라도 미루도록 지연시킨다. 말하자면 이직 셈이 끝나지 않은 리비도의 경제학이 취하는 부채의 바리케이드. 왜 통행은 제한되는가. 그 남자를, 이제는 비루해져버린 그 남자를 그저 멀리서 보고 아무 말 없이 돌아가는 길에 다시 한 번 라디오가 무언가를 대답한다.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가 1980년에 발표한 음반 <바보 같은 행동 (Foolish behaviour)> 두 번째 실려 있는 노래 <패션(Passion)>. ‘바보 같은 행동’, 그리고 ‘열정’. (어쩌면 ‘수난’?) 하지만 당신은 이 음반의 제목과 노래가 서로 묶이면서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설명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부터 시작될 시간을 경고하는 것인지 서둘러 결정하면 안 된다. 오현주가 이제 미국에 돌아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운전수는 “미치도록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면 돌아 오겠냐”고 반문한다. 그게 누구냐고 반문하자 “최순호라는 남자”라고 대답한다. 물론 최순호는 운전수의 이름이다. 이제 두 사람에게 남은 것은 작별밖에 없다. 사실상 영화는 여기서 끝났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갑자기 영화가 이야기 바깥으로 나와 버린다는 느낌을 주기 시작한다. 끝나야 할 데서 끝나지 않을 때 그것은 이후, 가 아니다. 새로운 가정. 말하자면 재구성. S#1 S#2 S#3 S#4 S#5 여기서부터 오현주와 최순호, 그 두 사람이 호텔에서 각자의 방에 머물 때, 마치 이 영화에서 이 시퀀스 전체가 이야기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온 다음 무언가 처음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진행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처음? 그렇다. 이 영화가 막 시작했을 때의 장면으로 돌아간 다음, 미처 그 호텔을 떠나기도 전, 그 남자를 찾으러 가기도 전, 그러니까 오현주가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의 거의 그 순간 언저리 어딘가에서 다시 맴돌기 시작한다. 의미의 위치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먼저 임권택은 둘을 갈라놓는다. 오현주의 방에서 최순호를 내 보낸 다음 (S# 1) 최순호는 자기 방으로 할 수 없이 돌아온다. (S# 2) 다음 쇼트. 오현주의 샤워 장면. (S# 3) 이 변덕스러운 전환. 이때 이 장면이 현실적인 대구인지 아니면 최순호의 방 안에서 그의 뇌 속에서 진행되는 잠재적인 장면인지 이상할 정도로 모호하다. 그런 가정을 끌어내는 카메라의 좀 더 분명한 제스처는 마치 최순호가 그녀를 훔쳐보기라도 하듯이, 그 상상의 시선을 따라가듯이, 쏟아지는 샤워물길을 따라 과도하게 다가간 카메라가 오현주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 살결 위로 핥듯이 따라 내려온다. 사라진 욕실의 마스터 쇼트. 제 방으로 돌아온 최순호는 망설이다가 방문을 나선 다음 오현주가 머무는 208호실 문 앞까지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S# 4) 이때 작동하는 것은 환상의 안으로의 향유일까, 아니면 그 바깥에로의 접근일까. 이 위험한 움직임. 이 쇼트는 욕실 장면 바로 뒤에 따라오기 때문에 두 가지 양상, 두 가지 회로, 두 가지 선택 사이에 놓이게 된다. 하나는 두 개의 쇼트 사이의 시간적 동시성에 따라 샤워하는 오현주의 방 안으로 거의 유혹에 이끌리듯 빨려 들어가는 최순호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상상하는 장면에 사로잡힌 채 문 저편의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 안에 침입하는 것이다. 상상적인 전체에 잡아먹힐 것인가, 아니면 육체적인 사건에 사로잡힐 것인가. 최순호는 문 앞에서 저편의 소리를 들으면서 서 있다가 문 열쇠 고리 안으로 그 안을 들여다보려는 듯한 자세를 취한 다음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 되돌아온다. (S# 5) S#6 S#7 S#8 자기 방으로 되돌아온 최순호. 세 가지 기호. 최순호는 자기 방으로 되돌아올 때 자기 방문을 닫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 반쯤 열린 문. 바깥으로 벌어진 방의 틈. 그 누군가를 초대하기 위해 배려한 듯한 통로. 그런 다음 최순호는 침대 위에 엎드려 눕는다. 마치 침대와 섹스를 나누는 듯한 그 자세. 몸이 무언가를 향하여 자기를 쓰고 있다. 상형문자와도 같은 제스처의 문장들. 그러다가 최순호는 수화기를 든 다음 교환에게 208호실을 연결시켜 달라고 한다. 그는 더 이상 망설임을 참지 못한다. 만일 그 전화를 받았다면 그는 도대체 무엇을 요구할 수 있었을까. 교환은 금방 그 방에서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일러준다. 세 가지 가정. 오현주는 벌써 잠든 것일까. 그렇다면 침대 곁에 있는 전화를 받지 못할 만큼 깊이 잠들어버린 것일까. 오현주는 아직도 샤워를 마치지 않은 것일까. 마지막 가정. 만일 오현주가 방에 없었기 때문에 그 전화를 받지 못했다면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대답. (S# 6) 오현주는 지금 최순호의 열린 방문 앞에 서서 그가 자기에게 시선을 돌리길 기다리는 중이다. 이때 내 시선을 끄는 것은 최순호의 침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마치 어떤 입구를 지시하기라도 하듯 매달려 있는 이상하리만큼 불길한 베일이다. 마치 무대와 같은 장치. 만일 이 장면의 고정점이 최순호라면 오현주가 그를 앞지르기 시작한다. 반쯤 열린 이 문 안으로 들어온 다음 그 문을 잠그고 마치 확인이라도 하듯이 이중자물쇠의 열쇠소리를 채우는 클로즈업. 오현주의 손의 활동. (S# 7) 이상한 대사. “여긴 조용해서 좋아요, 살인이 나도 쥐도 새도 모를 거예요” 지금 두 사람은 동반자살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섹스에는 어딘가 모르게 죽음의 그림자가 감돈다. (S# 8) S#9 S#10 S#11 S#12 S#13 S#14 S#15 S#16 그런 다음 마치 장면들은 회상 안에 빠져든 것처럼 연속성 없는 단편들의 씬으로 이어지고 있다. 기억 없는 추억. 이것이 팽창된 환상인지, 반대로 수축한 시간인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사건의 시간들은 지금 어디서 흘러와서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갑작스럽게 두 사람이 야외 벌판에 놓여진 택시에서 섹스를 나누는 장면으로 옮겨간 다음 (S# 9) 전혀 다른 공간인 일본식 적산가옥에서 아침에 일어나 다시 섹스를 나누는 장면으로 이동한다. (S# 10) 이때 의도적으로 임권택 은 이 시간이 아침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까치들의 장면의 인서트한 다음 그걸 오현주가 보게 한다. 다시 한밤중에 호텔에 택시가 들어선 다음 (S# 11) 방 안에서 오현주는 최순호의 신발을 벗긴다. (S# 12) 이 장면을 임권택은 의도적으로 침실로 들어가는 방문 바깥에 카메라를 세워두고 영화의 프레임 안에 프레임을 만든다. 이때 이 프레임은 처음 오현주가 최순호의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가 보았던 베일의 반복이다. 더 이상한 것은 그런 다음 우리가 마주치는 검은 페이드이다. (S# 13) 이 갑작스러운 신호. 무엇이 무엇에로? 마치 자기 뒤에 아직 세계가 있는 지 돌아보는 것만 같은 이 이상한 단절. 그런 다음 싸구려 욕실로 보이는 곁에서 시작해서 오현주와 최순호의 섹스가 이어지는 무아지경으로 옮겨간다. 이때 이 이부자리는 명백히 이 장소가 신발을 벗겨주던 그 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S# 14) 그런 다음 다시 페이드. (S# 15) 나는 이 장면을 순서대로 몇 차례를 보았지만 아직도 이 칸막이의 빗금 친 지층을 넘어가기 힘들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다음 장면. 마치 맨 첫 장면의 호텔로 되돌아온 것만 같은 장면. (S# 16) 원래로 돌아온 영화의 리듬. 처음으로 돌아온 장소. 나는 처음에는 이 장면이 영화 전체가 오현주의 회상을 알리는 출구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은 틀렸다. 깨어난 오현주 저 편의 침대에는 최순호가 아직 잠들고 누워있다. (주의. 약간의 스포일러) 전화하는 오현주를 엿들으면서 우리는 그녀가 유부녀이며, 남편이 잠시 동안 집을 비우자 강원도에 혼자 온 것이며, 그녀가 생각지 않았던 이른 일정으로 남편이 돌아오자 황급히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폭력적인 환상의 연기의 끝. 잠시 동안의 시간의 연출. 미처 우리가 어리둥절해서 기억의 셈을 끝내기도 전에 오현주는 잠든 최순호를 남겨두고 그에게 “고단하게 주무셔서 그냥 갑니다. 즐거웠어요. 안녕”이라고 쓴 다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장소를 떠난다. 사라진 최순호의 자리. 즐거웠어요, 안녕. 작별인사. 두 번 다시 우리는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끝난 시제.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는 이 마지막 장면을 여기서 필요 이상으로 늘려놓을 생각이 없다. 뒤늦게 깨어난 최순호가 택시를 끌고 달려가지만 이미 떠나가는 기차를 그저 먼발치에서 보아야 한다. 돌아가는 길. 어디로? 원래의 그 자신의 삶에로. 옆 자리가 비었지만, 이번에는 오로지 그 자신을 위해서, 최순호는 라디오를 켠다. 청취자 사연을 읽어주는 프로그램. 진행자 중의 한 명은 모두들 고독, 고독, 고독을 말한다면서, 이제 앞으로는 고독이라는 말을 쓰면 사연을 소개하지 않겠다고 까지 말한다. 사라져가는 택시의 라디오에서 마지막으로 듣는 노래는 서바이버(The Survivers)의 <아이 오브 더 타이거>(Eye of the Tiger)>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 록키 3 >의 주제곡. 이 뜬금없는 노래. 이때 이 어처구니없는 노래를 의미로 쫓아간다면 아무런 대답도 얻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나비 품에서 울었다>가 막 개봉할 무렵 이 노래가 히트곡이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영화 사이의 동시대성.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는 최순호의 마음 따위에 아무 관심도 없다. 무기력한 행위에로의 이행. 이때 주인공의 실패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세상이라는 시간의 폭력인 제스처. 당신을 위한 매우 복잡하고 리얼한 심리적인 설명 따위란 없다. 마치 라디오의 음악은 먼 시간의 여행으로 시작해서 바로 지금까지 온 다음 그 시간의 끝에 도착하자마자 최순호를 보잘 것 없는 현실로 되돌려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자,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다. 그러나 여기엔 왠지 불현듯 끝나버린 난처함이 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빨리 < 안개마을 >을 찍어야 한다. 이미 쫓기기 시작한 일정. 금방 첫눈이 내릴 것이다. 아마도 그때 임권택은 서둘러 함께 진행되고 있었을 그 현장으로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 1983년 83분 컬러 1.85 감독 임권택 제작 우진필름 각본 송길한 촬영 손현채 편집 김희수 음악 이철혁 나영희 이영하 한소룡 윤양하
나는 두 편의 임권택 의 첫 번째 영화에 관해서 썼다. 첫 번째는 그의 ‘두 번째’ 첫 번째 영화 < 달빛 길어 올리기 >이고, 두 번째는 그의 첫 번째 영화 < 두만강아 잘 있거라 >이다. 이번에는 나의 첫 번째 임권택 영화를 쓸 차례이다. 말하자면 나의 마들렌의 시간. 부디 당신께서 잠시 동안 내가 되찾은 시간에 잠겨서 배움을 구했던 기쁨을 이야기하는 것을 용서해주시길. .... “혹은 그처럼 오랫동안 기억 바깥에 버려진 그런 기억에서, 살아남은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게 분해되어버렸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마르셀 푸르스트의 조언. 그래서 나는 그것을 여기서 불러오려고 한다. “뿌리 깊게, 무형으로, 집요하게, 충실하게, 오래 동안 넋처럼 남아있어, 추억의 거대한 건축을, 다른 온갖 것의 폐허 위에, 환기하며, 기대하며, 희망하며” 종종 나는 동료들과 임권택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말고 문득 질문을 한다. 당신이 첫 번째 본 임권택의 영화는 무엇입니까? 물론 이 질문은 자료를 거슬러 올라가서 기억을 더듬으려는 것이 아니다. 이 질문의 정확한 판본은 당신이 임권택이라는 이름을 의식하고 본 첫 번째 영화는 무엇입니까, 라는 것이다. 이미 내 주변에는 1962년 2월 4일 국제극장에서 개봉한 <두만강아 잘 있거라>에서부터 시작한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이 질문이 크게 의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상하게 이런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진다. 그런 다음 공중에 매달린 시간. 약간의 우회. 1979년 그해 봄.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투를 흉내 내자면) 그때 내 마음 속에 떠 있는 영화의 별 중에서 가장 빛나는 세 개의 별은 알프레드 힛치콕과 장 르누아르, 그리고 고다르였다. 물론 당신은 다른 이름을 불러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거기에 몇 개의 별을 더할 것이다) 그때 앙드레 바쟁의 책은 읽는다기보다는 차라리 한 줄씩 외우고 있었다. 그건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누군가 내게 해 준 충고. 시를 음미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그 시를 불러내서 낭송할 만큼 외어야만 해요. 그때 비로소 당신은 한 단어씩, 한 문장씩 맛보게 될 거에요. 나는 영화를 음미하고 싶었다. 거의 매일 프랑스문화원에서 영화를 보았고, 1968년 이후 서울에서 상영된 단 한편의 쇼 브라더즈 영화도 놓치지 않았으며, 매주 주말 텔레비전에서 명화극장을 보았다. 그때 내가 본 한국영화들은 대부분 나를 실망시켰다. 당신은 이 시절 한국영화의 대부분이 반공영화이거나, 새마을영화이거나, 혹은 문예영화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각색영화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한국영화는 외화 스크린 쿼터를 따내기 위해서 최소의 제작비로 재빨리 촬영한 다음 의무 상영일수를 마치기가 무섭게 간판을 내렸다. 대중들은 텔레비전으로 모두들 떠난 다음의 일이다. 내게는 어떤 나침반도 없었다. 나는 한국영화를 거의 보지 않았다. 다만 동시상영으로 내가 보고 싶은 영화와 함께 상영할 때 할 수 없이 절반만 본 다음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극장을 떠났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비평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문학을 참고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비평은 전적으로 나 자신만을 위한 글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계간지를 읽기 시작했다. ‘창작과 비평’과 ‘문학과 지성’은 배움의 시작이었다. 김병익과 염무웅, 그리고 백낙청, 그런 다음 김현. 누구보다도 박현채. 민족문학론이라는 말. 내가 사는 땅. 제 3세계로서의 한국문학. 처음에는 그렇게 내 앞에서 오래 머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두 개의 말,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나는 문학비평에서 사용된 말들을 영화로 번역해서 읽고 있었다. 그런 다음 그 말을 고스란히 한국영화에로 돌렸다. 한국영화, 당신은 무엇입니까? 그때부터 나는 한국영화를 의식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고통스럽거나 불쾌한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장면들은 하나의 씬 안에서 서로 맞지 않았으며, 등장인물들은 종종 서로 다른 데를 쳐다보고 있었고, 줄거리는 너무 나빴으며, 대사들은 상투적이었고, 후시로 녹음한 대사들은 입과 따로 놀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남산에 자리했던 영화진흥공사 시사실에서 가끔씩 마련한 상영 일정을 찾아가 최인규 의 < 자유만세 >, 이강천 의 < 피아골 >,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유현목 의 < 오발탄 >, 김기영 의 < 하녀 >, 신상옥 의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를 보았다. 한국영화는 아주 가끔씩만 좋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나라에서 나는 마치 외국영화를 보듯이 한국영화를 보았다. 아마 봄날 이었을 것이다. 그날 걸어가던 길 가로수가 막 피어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침 수업은 마침 휴강이었으며, 나는 학교에 일찍 도착했다. 버스 정거장에서 내려서 오른쪽으로 오던 길을 따라 다시 내려가면 건물 오층에 작은 극장이 하나 있었다. 나는 이 극장의 이름이 지금은 떠오르지 않는다. 이날 상영되는 영화를 확인하지도 않고 그냥 습관적으로 표를 산 다음 극장에 들어갔다. 아침나절 이른 오전의 텅 빈 객석. 따분한 표정을 한 매점 소녀. 운 좋게도 영화는 잠시 나를 기다린 다음 시작했다. 나는 그 시절 항상 가장 나쁜 자세로 영화를 보았다. 먼저 언제나 가운데 통로 쪽 가장자리를 잡았다. 두 손으로 옷깃을 잡은 다음 의자 깊숙이 몸을 반쯤 비틀고 그런 다음 한쪽 발을 앞의 의자에 걸치고 다른 발을 그 위에 포개어 올려놓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제목을 영화가 시작한 다음에야 알았다. 그냥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줄거리는 시작하자마자 아, 오늘은 망쳤구나, 라고 나를 탄식하게 만들었다. 조선총독부. 일제 강점하를 무대로 한 영화. 경기도청 총력 1과에 다니는 일본인 다니( 하명중 )는 지시에 따라 경기도 수원에 살고 있는 지주 설진영( 주선태 )를 만나러 간다. 조선총독부는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창씨개명을 하는데 유독 수원 지역의 반발이 심해서 다니는 지역 유지인 설진영을 만나 설득을 해야 한다. 이 이야기는 텔레비전 방송에서 드라마로도 방영한 적이 있었다. 나는 이미 영화에 관심을 잃고 있었다. 그런데 거의 동시에 이 영화의 진행이 내가 실망한 것과 달리 갑자기 어느 순간 어떤 특수한 순간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두 개의 순간. 이 순간(들) 사이의 간극. 어쩌면 실망이 나로 하여금 텅 빈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게 만들어주었는지도 모른다. 그건 내가 보아왔던 것과 전혀 다른 방법이었다. 그저 이미지의 표면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여기엔 설명해야할 새로운 조건이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없어도 되는 장면들이 길게 이어지고, 때로 있어야 할 장면들이 없으면서 새로운 리듬이 나타났다. 간단한 예. 영화의 이상한 계산법. 4 +6 +5 와 2 +6 +7 을 각각 더하면 그 결과는 동일하지만 이 두 셈의 형태는 완전히 다르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때 동일한 결과를 다시 7 +0 +8 로 늘어놓으면 0은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질 것이다. 이때 0은 ‘제로’가 아니라 미지수 x가 되는 것이다. 왜 그 자리는 비어있는가.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서관 서가의 빈 칸. 어느 순간보다도 영화가 시작되고 19분이 막 지났을 때, 다니가 설진영의 집에 머물면서 혼자 저녁을 맞이하며 문득 여기가 한국의 전통적인 집 안이라는 느껴보기 시작할 때, 이 영화는 (그 당시의) 내가 가늠할 수 없는 리듬으로 전체를 이끌기 시작했다. 이 리듬이 전적으로 한국의 전통적인 가옥의 선에서 시작되어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선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나는 갑자기 정신을 차려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어리둥절해졌다. 도대체 내가 지금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때 이걸 설명하지 못했다. 다만 이 리듬이 매우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몹시 우아하다는 걸 보았다. 나는 극장을 나서면서 포스터를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監督 林權澤’이라고 써 있었다. 그 당시 한국 영화포스터는 이름을 모두 한자로 썼다. 임권택 의 68번째 영화. 그런 다음 나는 임권택의 영화를 차례로 보기 시작했다. 물론 < 족보 >가 내가 본 첫 번째 임권택의 영화는 아니다. 이미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동시상영을 하는 다른 영화와 함께, 하지만 나는 그 다른 영화를 보기 위해서, 때로는 중학교 때 단체관람으로, 하여튼 여러 경로를 통해서 보아왔(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인터뷰를 위해서 필모그래피를 정리하면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이름을 그 전에는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족보>는 내가 의식적으로 그 이름을 염두에 두고 차례대로 보기 시작한 첫 번째 임권택 영화이다. 나의 첫 번째. 차례로 본다는 문제. 나는 거기서부터 셈을 시작하였다. 무엇이 나중에 오고 무엇이 먼저 나타난 것일까.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아있는 것일까. 나는 이 모든 것을 임권택이 계산했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 안에서 나타난 그 영화의 어쩔 수 없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한다. < 족보 >는 일제 강점하 1930년 경성에서 태어난 다음 여기서 10살 때까지 살았던 일본인 가지야마 토시유키(梶山季之)의 단편소설을 영화로 옮긴 작품이다. 이 소설은 먼저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이때 드라마 대본으로 한운사가 쓴 각본을 영화사 화천공사에서 가져와 임권택 에게 영화화를 제안하였다. 가지야마 토시유키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사람은 임권택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1967년 신상옥 이 만든 < 이조잔영 >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의 많은 소설들이 한국에도 번역될 만큼 잘 알려진 작가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가지야마 토시유키는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조선’에 대해서 향수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자기 소설 속에 그려냈다. 그러나 그가 ‘조선’에 관한 소설만을 쓴 것은 아니며 추리와 포르노를 곁들인 일본 기업소설로 더 유명하다. 그에 관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그가 1975년 홍콩에서 원인불명으로 객사했다는 사실이다. 그 말은 가지야마 토시유키는 임권택의 <족보>를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나는 그가 쓴 소설 속의 문학적 ‘조선’에 대해서 평가할만한 자리에 있지 않다. 그 대신 먼저 가지야마의 소설을 살짝 읽어본 다음 영화에로 옮겨갈 것이다. 소설 <족보>에서 다니가 설진영을 찾아오는 장면은 이렇게 시작한다. “국도를 따라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파란 풀 무리였던 뚝도, 버드나무 가로수도 이제는 갈색으로 모습을 바꾸고 있다. 빨래를 하고 있는 농부의 손이 찬물에 빨갛게 얼어 보인다. 마른 풀 위에 널어놓은 흰 저고리와 치마는 무딘 초겨울의 햇살을 받으면서 왠지 을씨년스러운 느낌으로 눈에 비친다. 길의 좌우는 넓고 끝없는 추수가 끝난 그루터기가 우수수 기분 나쁘리만큼 정연하게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나는 조금 일찍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했다” 임권택 은 대본을 읽은 다음 이 소설의 원작을 읽었다. “내가 원작을 읽어보니까 이미 기울어져가는 한국 농촌풍경을 그려내고 있는데, 일방적으로 지배자의 입장에 선 사람의 감상이 풍경으로 떠오르고 있는 거요. 그 풍경 자체가 음산하고 살풍경하고 별로 정이 붙지 않는 그런, 이미 기울어져가는 나라이면서, 풍경 자체로 기울어진 나라의 을씨년스러움을 계속 잡아나가는 거요 ... (중략) 그런데 나는 왜정시대를 살면서, 이런 가혹한 지배 아래서도 한국인끼리 일어나고자 하는 활력이 그 안에 있다고 보는 거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둘 사이의 차이. 소설이 영화로 옮겨오면서 결정적으로 바뀐 것은 계절이다. 거의 가을이 끝나가고 추수도 마친 다음 이제 막 겨울이 오기 시작할 때 시작했던 소설은 영화에서 막 여름이 시작되고 있는 계절로 옮겨가고 있다. 그러나 소설이 일인칭 화자 나,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을 영화는 바꾸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소설은 거의 다니의 독백처럼 이어진다. 그래서 그의 시선이 닿는 모든 풍경들은 거기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신 모두 주관적인 감정을 담고 형용사의 세계로 옮겨간다. 다니의 발길. 나의 시선. 이때 이 영화를 본 다음 나는 기묘하게도 소설에서 영화에로 각색하면서 단지 늦가을, 혹은 초겨울에서 초여름으로 옮겨갔다기보다는 무언가 계절을 거슬러 올라갔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정시대를 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력에 넘치는 조선인”의 계절. 초여름. 한창 피어나는 나무들. 이제 막 시작된 활기를 띠기 시작한 논밭들의 기운. 일본인들이 지배하지만 이 땅의 계절을 어찌해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제 강점하이다. 결국 설진영은 창씨개명의 요구 앞에서 마지막 남은 유일한 저항의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하고, 다니는 그 장례식에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나면 여름이 끝날 것이다. 그런 다음 가을이 지나가면 긴 겨울이 시작될 것이다. 이것은 잠시 미룬 계절의 잠깐 동안의 이야기이다. 역사 안의 틈새. 잠시 동안 가졌던 시간의 일시적인 환대. 예정된 수순. 하지만 그 안에서 나타난 새로운 간격. 말하자면 임권택 의 간격. 그렇다. 내가 임권택의 영화에서 본 것은 운동이 아니라 새로운 간격이었다. 내가 일찍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간격의 리듬들. 영화가 그 어떤 한계에 부딪칠 때 그 안에서 찾아내는 새로운 면들, 또 다른 선들, 그 안에 가득 찬 힘이 모여 있는 점들. 그런데 그것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내가 붙잡은 질문. 나를 사로잡은 힘들. S# 1 S# 2 S# 3 S# 4 S# 5 S# 6 S# 7 S# 8 S# 9 S# 10 S# 11 S# 12 S# 13 S# 14 S# 15 S# 16 S# 17 S# 18 S# 19 S# 20 첫 만남의 과정. 순서대로 하는 내 경험의 고백. 판에 박힌 듯한 질서의 리듬이 갑자기 멈추고 이 모든 것들이 다시 구성될 때, 그래서 마치 기습처럼 내게 느껴졌을 때, 나는 어리둥절해진 채 머물면서, 내가 이제까지 본 영화들을 베끼고 있는 듯한 질서로부터 갑자기 빠져나와 쇼트의 리듬이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갈 때,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내가 모르고 있을 때, (여기서 내가 느끼고 있을 일인칭 주어의 이동을 유심히 느껴주시기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어떤 아름다움을 볼 때, 나는 새로운 영화와 만났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느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항상 새로운 영화와 만났다. 영화가 시작한 다음, 가지야마 토시유키의 소설 속의 다니의 방문을 소개한 바로 위의 문장을 영화로 옮긴 그 장면에서부터였다. 임권택 은 가지야마의 소설에서 다니가 설진영을 찾아오는 장면을 20개의 쇼트로 찍었다. 매우 건조하게 찍힌 조선총독부 실내 구석에 홀로 서서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긴 다니를 보여준 다음 갑자기 영화는 바깥으로 나온다. 나는 < 족보 >를 설명하면서 몇 차례이고 갑자기, 라는 말을 쓸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이상할 정도로 어느 순간, 자꾸만 다시 시작하는 것만 같은 갑자기, 의 쇼트와 마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경성을 벗어나서 수원에 도착하기까지의 장면이 없다. 그 대신 생각에 잠기자, 마치 그가 상상하는 조선의 풍경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듯이, 이미, 수원의 설진영 마을의 근처에 와 있다. 첫 쇼트는 다니가 멀리서 걸어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S# 1) 이때 이 장면은 이상한 방법으로 다니를 바라본다. 그는 여기에 막 도착했다기보다는 마치 그 풍경 안에서 낯설지만 무의미한 오점이 묻어나오듯이, 혹은 스며 나오듯 (수동적으로) 보여 진다. 더 이상한 다음 쇼트. 카메라는 거기서 그대로 아주 멀리 떨어져서 다니 따위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이 롱 쇼트로 농촌 초여름의 한가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S# 2) 나는 소설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이 다니의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이 두 번째 쇼트는 다니의 시점 쇼트가 아니다. 오히려 영화가 다니를 바라보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풍경이 다니를 바라본다. 그런 다음 수평으로 소나무 솔밭길 사이를 따라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두리번거리면서 걸어가는 다니를 보여준다. (S# 3) 그가 고개를 들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날아가 나무 위에 평화롭게 앉는 백로를 본다. (S# 4) 하지만 임권택은 재빨리 다니의 시점 쇼트를 중단시킨다. 다니의 쇼트로 돌아오면 그는 초록색이 파도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밭 사이를 들여다보면서 한껏 풍경을 느껴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S# 5) 이 설명의 방점은 보여준다, 에 있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다니. 임권택은 조금도 그런 모습에 동요되지 않는다는 듯이 수평 로우 앵글로 내려앉아서, 마치 카메라가 그 갈대밭 너울거리는 갈대 중의 하나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서 다니를 바라본다. (S# 6)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카메라. 그 무심함. 그때 등 뒤의 버들나무 가지들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그렇다. 이 장면 전체를 연결하는 힘은 바람의 방향에서 오는 것이다. 나무를 흔드는 바람. 여기서 살아본 사람만이 느껴보는 초여름의 기호. 다니는 마치 바람에 날려서 금방이라도 여기에 도착한 다음 그 바람결을 따라 이 풍경 속을 떠도는 것처럼 보인다. 저 멀리 논밭을 매는 남편을 위해 점심 찬을 준비한 아낙이 딸의 손을 잡고 막 도착했다. 롱 쇼트. 지금은 점심시간이다. 해가 중천에 든 시간. 그림자가 가장 짧은 시간. 풍경은 온전하게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S# 7) 가방을 움켜쥐고 주눅이라도 든 듯, 다니는 경이에 차서 두리번거리면서 걸어간다. 그건 분명히 식민지 지배자의 모습이 아니다. 다니는 그저 이 풍경 앞에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주춤거리는 이방인으로 보일 뿐이다. 이때 이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막 시작한 초여름 옷을 입고 있는 동안 오로지 다니만이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것만 같은 두터운 마지막 겨울 옷, 혹은 이른 봄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그는 마치 다른 시간에서 온 사람처럼 보인다. 게다가 흰색으로 이어지는 조선 사람들의 하얀 의상과 대조적으로 누런 군복색 옷을 입은 다니는 풍경 속에서 죽은 색처럼 보인다. 수채화처럼 물기가 묻어나는 초여름 풍경 안에 유화의 질감과도 같이 두텁게 처리된 낯선 인물. 당신은 그 사람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S# 8) 이때 이 장면의 위로 여자들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청각적 쇼트의 반응. 저 편에 네 명의 조선 처녀가 한복을 입고 무언가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기를 방문한 낯선 일본인 따위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마치 그의 존재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걸어온다. 흩날리는 초록색 갈대밭. ( S# 9) 그걸 웃으면서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걸어가며 마주보는 다니. (S# 10) 하지만 이 쇼트는 처녀들의 시점 쇼트가 아니다. 그녀들 중 아무도 그를 보지 않는다. 같은 말의 반복. 그렇게 아무도 보지 않는다. 그저 무심하게 저 멀리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는 아낙이 보인다. (S# 11) 카메라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얕지만 제법 넓은 개울가에 놓인 다리를 건너가는 다니를 다시 한 번, 필요 이상으로 멀리 떨어진, 롱 쇼트로 바라본다. (S# 12) 여기서 음악이 끝난다. 처음 이 영화를 볼 때 나는 여기까지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를 멈춰 세운 것은 바로 그 다음 장면부터이다. 카메라는 여전히 다니를 쳐다볼 뿐이다. 더 정확하게 다니는 이 장소의 내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는 바깥에서 포함된 얼룩이다. 거기에 있지만 들어맞지 않은 운동의 일부. 보여 지지만 보지 않는 전체의 일부. 중단된 시선의 교환. 왜 이 교환은 불가능해진 것일까. 그때 그것을 어떻게 다시 문턱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까. 아니, 이 이상한 쇼트들의 진행은 도대체 무엇을 준비하는 것일까. 음악이 끝나자 (S# 13) 다니는 이 동네 입구에 막 도착하여 그 안으로 들어선다. 그때 카메라는 마치 다니를 감싸 안듯이, 그를 안으로 이끌듯이, 마주보는 대신, 그의 등 뒤에서 걸어가는 방향을 향해 바라본다. 처음으로 동네 입구에 선 청년이 하던 일을 멈추고 다니가 동네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다니를 바라본 첫 시선. 그러나 그가 아직 시선의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영화는 다니의 동선을 따라가지 않는다. 갑자기 카메라는 집 안에 들어와서 대문 바깥 저편에 걸어오고 있는 다니를 아주 작게 보여준다. 사내 한명이 허둥지둥 달려와 집 안의 동네 어른들에게 일본인이 나타났다고 알리자 저마다 한마디씩 수군거린다. (S# 14) 그런데 누구의 집? 여기서 이상한 쇼트가 등장한다. (S# 15) 바로 눈앞에 초록색 나뭇잎이 초여름 바람에 흔들릴 때 시네마스코프 2.35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면서 왼쪽 끝 너머에서 오른 쪽 너머까지 한 채의 한옥이 거기 있다. 그리고 그 한옥 중앙에 대문이 있다. 그 대문 안으로 한옥의 그 너비에 비해 볼품없게 작은 점처럼 보이는 롱 쇼트의 다니가 들어간다. 이때 다니를 따라 들어가는 대신 그 집안의 방에 카메라를 세워놓고 열린 방문을 통해 바라보면서 그를 마중하는 쇼트가 등장한다. (S# 16) 그 방에서 한 사내가 서둘러 나와 다니를 맞이하며 “저, 그런데 어디서 오셨지요?” 라고 묻는다. 이때 그 방이 오로지 한옥에만 존재하는 대문 옆 바깥 행랑채라는 사실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이건 오로지 이 집, 한옥에서만 성립되는 쇼트이다. 다니가 집 안에 들어오는 것을 이미 바라본 마루 위에 선 사내들 중 아무도 그 질문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 해야 할 일. 그때 다른 누군가는 그걸 구태여 하지 않는다. 체계의 세계, 순서의 절차.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넘겨진 안내. 그를 따라 다니는 집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언제나 쇼트는 집 안에서 다니를 맞이하는 방식으로 찍혔다. 중문간 행랑채에서 마을의 노인 둘이서 바둑을 두고 있고 다니는 낯선 동작으로 인사를 하며 마루로 올라올 때 카메라는 두 노인보다 더 안쪽에서 들어서는 다니를 쳐다본다. (S# 17) 그런 다음 카메라는 더 깊숙이 집 안으로 들어가 작은 정원에 서 있다. 이때 사내가 어른의 허락을 받아 나오면서 안채 쪽 마당에서 중문간 행랑채 너머 열린 방문 너머 서 있는 다니에게 전한다. “저, 들어오시랍니다” 집 안에서 더 깊숙한 집 안으로. 그 다음에서야 공손하게 한국인의 방법으로 예를 갖춰 절을 하는 다니의 쇼트와 만난다. 이때 열린 방문 바깥에서 다니의 뒷모습 너머 병풍 앞에 앉아있는 설진영을 보게 된다. (S# 18) 여기서 카메라는 절을 하는 다니의 뒤에서 그만큼 내려온 다음 무릎을 꿇은 다니보다 조금 더 낮은 수평 로 앵글로 서 있다. 그런 다음 명함을 건네고 (S# 19) 비로소 다니와 설진영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란히 앉은 투 쇼트가 등장한다. (S# 20) 순식간에 지나가긴 했지만 이 쇼트들의 과잉은 내게 섬광과도 같았다. 존 포드는 이렇게 찍지 않았을 것이다. (< 수색자 >) 알프레드 힛치콕은 이렇게 집 안에 사람을 들이지 않는다. (< 레베카 >) 장 르누아르는 이렇게 집을 방문하지 않는다. (< 게임의 규칙 >) 오즈는 이렇게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 고하야가와가의 가을 >) 임권택 은 쇼트의 경제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전적인 연출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진행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 족보 >는 한국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기영 도 낯선 이가 이렇게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 하녀 >) 신상옥 도 이렇게 낯선 이가 방문하지 않는다.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 임권택만이 지금 그렇게 진행하고 있다. 지금 나는 누가 옳고 그르냐는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멈춰 서야만 했다. 그런데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영화를 멈춰 세울 방법을 알지 못한다. 나는 갑자기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온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새로운 윤곽. 한참 뒤의 인터뷰. “다니는 설진영을 만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집이 그 만남을 방해하는 것만 같습니다. 왜 그 쇼트들이 거기 있어야만 합니까?” 대답을 하기 전에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여긴 한국인거요. 그게 나이 어린 사람이 어른을 만나는 태도인거요, 거기 그런 게 없으면, 그건 한국영화가 아닌 거요, 그러니 그건 도리가 없는 거요” 후렴구. 도리가 없다. 이 무서운 말. 없어도 상관없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거기 있어야만 하는 쇼트들. 이때 비로소 그 쇼트 안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 아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쇼트 안에서 사람이 살아야 한다. 그건 마치 집 안에서 그 나라 사람이 살아야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한국이라는 환경. 그 위에 세워진 집. 그런데 그 집은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의 방향을 따라 뻗어나가면서 세워진 삶의 틀일 것이다. 벽면과 그 벽의 창문들. 창호지 위로 스며드는 반투명의 햇빛. 거기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그걸 느껴보아야 한다. 적어도 내게 <족보>는 집과 함께 다시 시작하였다. 내 아버지가 살았고, 내 아버지의 아버지가 살아온 영토의 한 순간이 거기 머물러 있었다. 아마도 임권택은 내 아버지와 그 영토의 시간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공통감각. 그들이 살아온 영토. 말 그대로 바탕. <족보>는 그 위에 미장센이라는 면을 세우고 인물들의 동선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단단하게 주춧돌 위에 선 다음 옆으로 이어지는 가옥의 선을 따라 구도와 단면들을 만들어냈다. 나는 여기서 살아야 한다. 그때 구도는 프레임이 되고 단면들은 쇼트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한) 이상한 인용. “K가 도착했을 땐 늦은 저녁이었다. 마을은 눈 속에 깊이 묻혀있었다. 성이 있는 언덕은 안개와 어둠에 잠겨 있어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으며, 어렴풋이나마 큰 성이 있음을 알려주는 불빛도 없었다. K는 오랫동안 큰길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나무 다리위에 서서 허공으로 보이는 데를 쳐다보았다. 그리고선 그는 잠자리를 찾으러 갔다... ” 카프카의 <성>의 첫 문장. 물론 가지야마의 <족보>와 임권택 의 < 족보 >와 카프카의 <성>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러나 다니가 조선의 한 마을, 창씨개명을 완강히 거절하고 있는 이 동네 앞에 들어선 다음, 난공불락의 설진영의 집 안에 들어서서 그가 끝까지 느꼈을 난처함에는 왠지 카프카의 기계 안으로 들어온 다음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이리저리 내쫓기면서 그 어떤 것의 의미도 이해하지 못한 채, 오로지 경험만을 한 채, 되돌아 나오는 발걸음을 뒤쫓았다는 느낌을 준다. 나에게 <족보>는 카프카와 프루스트,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루이스 캐롤이라는 기계 그 사이 어딘가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용이 오해를 불러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낯선 세계 안으로 들어온 이방인 다니를 설진영은 기꺼이 환대한다. 설진영의 옆에 앉아있는 옥순. 그의 딸. 물론 그녀가 등장했을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자동적으로 다니와 옥순 사이의 판에 박힌 듯한 감정선이 생겨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상황은 종종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작동하도록 유도한다. 우리는 수 없이 같은 상황을 보았다. 그러나 임권택은 옥순의 선을 이야기 바깥으로 끌고 나왔다. 이때 낯익은 선이 바깥으로 빠져나오면서 상투적인 기능을 내버려둔 채 갑자기 빈자리가 생기자마자 임권택은 그것을 거기 있는 다른 이미지가 차지하도록 이끌었다. 내가 멈춰 설 수밖에 없었던 순간. 다니는 설진영의 집에서 저녁 만찬을 먹은 다음 그의 집에 머문다. “벌써 6시군요” 시간의 신호. 이제 막 매직 아워가 끝나가는 시간. 초여름의 느린 저녁. 하늘은 아직도 어둠이 시작되기 직전의 푸른 하늘이다. 다니는 사랑채에서 나와 저녁의 밤공기가 가져다준 초여름의 바람을 느껴본다. 그 앞에 이어지는 정원. 다니는 무슨 생각에 잠긴 것일까. 멀리서 어디선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판소리가 들려온다. 무언가 충만한 것만 같은 장소. 그때 쇼트는 다니와 정원을 찍는 대신 사랑채 마루 앞에 앉아서 정원을 바라보는 다니를 단 하나의 프레임에 담은 다음 다니의 시선을 수평으로 놓고 수직으로 바라본다. (S# 1) 수평의 인물의 시선과 수직의 기계의 시선. 그때 둘은 서로 느슨하게 연결된 다음 각자의 계열에 따라 작동한다. 임권택 은 거기서 더 물러나면서 수평의 상상선 반대편에서 정원을 가로질러가는 다니를 롱 쇼트로 보여준다. (S# 2) 시네마스코프의 우아한 길이. 그런 다음 어둠이 떨어지고 있는 한옥 기와의 지붕을 보여준다. (S# 3) 다니는 이 정원을 느껴본다. 방에서 방으로 이어지는 한옥 가옥의 면들. 그때 다니의 저 뒤편에서, 마치 스크린의 일부에서 구멍이라도 뚫리듯이 작은 문이 열리면서 거기서, 저 멀리서, 작은 점처럼, 옥순이 걸어 나온다. 이 조용한 화면에서 들리는 나무로 만든 대문소리. 그 소리가 다니를 멈춰 세우고 그 쪽을 보게 만든다. 옥순은 저 멀리서 천천히, 사뿐사뿐, 다니에게 걸어온다. 고무신이라는 신발의 속도, 이때 다니는 잠시 멈춰 섰다가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수평으로 걸어가고 옥순은 저 멀리서 화면 앞에 있는 다니에게 수직으로 걸어온다. 그러나 이때 두 사람은 서로 겹쳐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은 서로 (아직은, 그리고 겉으로는 앞으로도) 아무 사이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인(의 딸)과 손님의 사이일 뿐이다. 나는 이 장면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왜 여기서 옥순으로 하여금 저 멀리서 걸어오게 한 다음 이미 충분히 앞 장면에서 설명된 설진영과 다니의 호의적인 사이를 다시 한 번 딸 옥순의 입을 빌려 이렇게 길게 설명해야 할까. 아니, 무엇보다 지금 이 데드 타임은 내게 무엇을 느껴보기를 요구하는 시간의 기호일까. 이때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이 쇼트가 이상하게도 어둠 속에서 다니와 옥순을 보여주려 한다기보다는 그들의 표정을 포기하고서라도 더 물러남으로써 만들어내는 새로운 광경의 발견, 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은 더 넓고 더 큰 화면으로 이루어진 로 앵글의 구도라는 사실이었다. 이때 어스름한 초여름 저녁 막 어둠이 내린 직후의 한옥의 기와의 선들이 거기서 우아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 쇼트 바로 앞 쇼트의 느닷없는 인서트의 이미지가(S# 3) 구태여 등장시킨 한옥 기와지붕이라는 것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고다르가 니콜라스 레이를 설명하면서 말한 교육의 쇼트. 이때 임권택은 지워져가는 어둠 속에서 모습은 사라져가면서 선으로 남아있는 한옥 기와지붕의 윤곽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같은 말의 반복. 사라져가는 선. 어둠 속에 지워져가는 한옥. 일제강점하의 조선. 근대 앞의 한국. 그 속에서의 음미. 사라져가는 아름다움이 불러일으키는 그 가련한 시네마스코프의 선. 윤곽으로서의 영화. 물론 < 족보 >가 모든 점에서 만족스럽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이야기 안으로만 들어오면 난처할 정도로 상투적인 사건들과 마주치게 된다.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나쁜’ 일본 관료들은 서투를 정도로 도식적인 음모를 꾸미고 있으며 이 음모가 시작되면 이상할 정도로 영화는 단조로워진다. 그 속에서 마주치는 과도하리만큼 넘쳐나는 민족주의적 열정에 사로잡힌 쇼트들. 설진영에게 자발적인 창씨개명 협조를 구하지 못하자 일본인들은 그의 딸 옥순의 약혼녀에게 독립군과의 (있지도 않은) 관계를 자백받기 위하여 그를 붙잡아 고문을 하기 시작한다. 한국영화에서 이미 수없이 본 장면의 기계적 반복. 이미 수 없이 경험한 장면의 거의 학습에 가까운 감정의 반복. 일제 강점하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에 찬 거의 장르에 가까운 이야기. <족보>는 이 시대를 다루기 때문에 마치 이 장면들을 피해갈 수 없다는 듯이 그 이야기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이 영화는 갑자기 모든 점에서 무력해지기 시작한다. 혹은 임권택 은 이 장면들 안에서 구태여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그 장면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 스스로 작동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수동적인 규칙들. 그것이 만들어내는 종종 자포자기에 가까운 영화적 클리셰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족보>는 기괴하리만큼 좁은 통로사이를 오가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다소 도식적으로 말한다면 충실하고 창조적인 내부성과 상투적이고 반복적인 외부성. 여기에는 어떤 통일의 고정점이 없다.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내부와 외부가 나누어진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다니가 설진영의 공간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거의 모든 쇼트들이 초여름의 햇살과 기분 좋은 바람을 쇼트들이 느끼면서 한옥의 선과 면들이 이 모든 인물들의 동선을 움직이기라도 하듯이 활동하기 시작하지만, 반대로 이 집을 떠난 다음 조선총독부의 건물로 이동하면 어두운 군복을 입은 일본군들이 가장 상투적인 일제 강점하의 반일영화의 관습에 따라 힘을 잃은 채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옥순과 다니 물론 임권택 이 이 둘 사이를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예. 잠시 동안 옥순의 약혼자를 일본군이 고문하는 장면으로 돌아와 보자. 여기서 고문의 장면을 전시하는 것은 다소 기괴하지만 설진영이나 옥순이 아니라 다니의 앞에서이다. 나는 이 설정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옥순의 약혼자와 옥순과 다니. 말하자면 매개항으로서의 옥순. 우리는 물론 다니가 설진영의 집을 방문했을 때 자신의 통역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옥순을 두 사람의 사이에 설진영이 불렀을 때, 그래서 다니와 옥순이 서로 마주할 때, 그 둘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흐르는 감정의 선을 영화의 관습적인 규칙에 따라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임권택은 그 선을 이 이야기 안에서 그저 가능세계로 남겨둔다. 다니와 옥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의 가능은 그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가 표현하는 것을 감추면서 단지 영화가 그걸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다니가 설진영의 집을 찾아갈 때 그는 우연히도 옥순의 약혼자와 다리에서 서로 스쳐지나간다. 어쩌면 이 쇼트는 아무 것도 기능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때 이 장면을 약간만 찡그려서 보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의 그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롱 쇼트로 잡은 구도. 이 쇼트와 동일한 위치에서 우리는 이미 다니가 설진영의 집을 찾아가기 위해 이 다리를 건너가던 동일한 쇼트를 본 적이 있다. 그때 그는 혼자서 이 다리를 건너갔다. 이번에는 맞은편에서 옥순의 약혼자가 걸어온다. 당신은 이 시퀀스가 다니가 아니라 옥순의 약혼자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옥순의 약혼자는 설진영이 몸져눕자 방문한 다음 조심스러이 병색을 살펴보고 몇 가지 조언을 하고 옥순에게 인사를 한 다음 돌아간다. 그가 돌아가는 길에 다리가 있을 것이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설진영의 집에 오기 위해서 이 영화의 지리적 지도에 따르면 반드시 이 다리를 통과해야만 한다. 설진영의 집으로 가는 기호. 이때 우리는 옥순의 약혼자를 따라가다가 다니를 그 다리에서 마주친 다음 다시 다니를 쫓아서 설진영의 집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 다리를 막 지난 다음 다니는 문득 무슨 생각이 든 것처럼,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갑작스러운 궁금증이라도 생긴 것처럼 이 남자를 돌아본다. 그러나 옥순의 약혼자는 녹색으로 펼쳐진 논밭 사이의 바람결 속으로 어떤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등을 내보이고 걸어간다. 이 시선의 실패한 교차는 이상할 정도로 보뇩옜二?멈추게 만든다. 다니는 무엇을 느낀 것일까. 왜 다니만이 느낀 것일까. 이 두 말의 차이를 동시에 생각해주기 바란다. 약간의 첨언. 나는 여기서 다소 소심한 추측을 해보고 싶어진다. 여기에는 두 개의 계열이 있다. 하나는 다니의 계열이다. 다른 하나는 옥순의 약혼자의 계열이다. 이때 둘 사이를 연결하는 사람은 물론 옥순이다. 이 연결이 우리에게 쇼트의 감정적 성질을 읽어보도록 요구하는 것은 옥순이 여자라는 기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기호 사이에 일제 강점하의 일본과 조선이라는 칸막이 쳐진 두 개의 나라가 이 둘 사이를 강제로 찢어내면서 일종의 명령을 내리기 시작한다. 가능한 사랑과 불가능한 사랑. 나는 여기서 옥순의 약혼자에서 시작한 쇼트의 진행이 다리에서 다니를 만난 다음 고스란히 반대의 역순으로 다시 우리를 되돌리는 배치를 생각해보았다. 이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 쇼트의 진행은 아무리 보아도 이상할 정도로 예절바르면서 어딘가 수줍게 그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감정을 바라보고 있다. 물론 이 세 사람은 자신들이 각자 다른 자리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의 서로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는 운명을 알지 못한다. 그건 오로지 우리들을 위해서 배려한 것이다. 그때 이들을 계속 겹쳐 놓으면서도 임권택은 결정적으로 불편한 자리를 피하면서 우리들에게 그들의 관계의 층위를 고스란히 드러내서 보여준다. 처음에는 잉여의 쇼트들의 진행처럼 보인 이 장면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국 감정의 파국이라는 쇼트와 대면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중의 파국. 그런데 왜 이 장면의 순간을 피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했던 것일까. 이 순간을 피해야한다는 그 절대적인 노력. 그런 다음 이후 계속해서 반복하게 될 임권택의 외면. 말하자면 자신의 등장인물에게 갖는 임권택의 ‘한국에 사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예의의 쇼트. 나는 그때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 장면의 결정에 관한 결정적 순간을 한참이 더 지난 다음 < 길소뜸 >에서 다시 만났다. 두 개의 결정이라는 말의 (공유로서의) 차이. 나는 이 순간을 임권택의 영화에서 ‘외면의 쇼트(face-away-shot)’라고 정식화시키고 싶다. 이 쇼트들은 거의 깨달을 사이도 없이, 미처 돌아볼 분명한 신호를 주지 않으면서, 그러면서도, 그들 사이의 감정적 의미를 우리에게 육화시킨다. 이때 이 장면을 성립시키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 영화가 우리를 대하는 태도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우리들은 이들 사이의 고귀한 감정을 다치지 않으면서도 위태로운 그 관계의 감정 안으로 수렴되고 있음을 나중에야 비로소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종종 임권택은 < 족보 >에서 많은 장면들을 분명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의 쇼트들의 능력과 가능한 경험들 사이의 목적을 일치시키는 종합에 관한 배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 족보 >는 그런 의미에서 비탈에 선 영화처럼 종종 보는 나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내가 임권택 을 발견한 것은 이 영화가 막 시작하고 난 다음 다니가 설진영의 집을 찾아오는 순간이었지만 내가 앉은 자리에서 이 영화를 두 번 보게 만든 것은 설진영이 집안의 창씨개명을 결정하고 난 다음 자신은 자살하는 대목에 이르러서이다. 약간의 장황한 설명. 설진영은 창씨개명은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순간에 이르고 만다. 손자들마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다면서 할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린다. 설진영은 손자들에게 내일 창씨개명을 하마, 라고 약속한 다음 아내에게 긴 독백을 한다. 여기서 설진영이 인용하는 문장은 일본 민속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조선백자에 빗댄 조선 문화(에 관한 주관적인 감상)을 담은 글이다. 이때 임권택은 갑자기 이야기의 계열로부터 벗어나 조선 백자의 이미지 쇼트를 차례로 열거하기 시작한다. 멈춰 세운 카메라. 오로지 백자만이 담겨진 쇼트. 그 단조로운 화면. 하나의 백자가 마치 다른 백자들을 불러오기라도 하듯이 이어지면서, 차라리 백자들이 증식이라도 하듯이, 그런 다음 무려 10쇼트가 차례로 이어진다. 조선 백자라는 그 자체의 세계. 이 말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이 순간 조선백자는 영화보다도 우월한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이야기가 여기서 중단되어도 할 수 없으니 차라리 조선 백자가 만들어내는 기품과 역사가 민족에게 안겨준 슬픔을 여기서, 이 절대적인 쇼트들의 병풍 앞에서, 영화가 느껴보는 시간을 할 수 있는 한 늘려본다. 나는 당신이라고 써야할 자리에 영화라고 잘못 쓴 것이 아니다. 임권택은 그렇게 영화를 진행한다. 나는 이 순간 거의 멈추어 섰다. 그런데도 임권택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거기서 다시 한옥 기와 지붕을 보여준 다음, 그 기와의 장면을 차례로 5개의 쇼트로 펼쳐 보인다. 이때 이 쇼트들을 보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쇼트를 음미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쇼트. 차라리 쇼트가 우리를 바라 보는듯한 시간. 그런 다음 갑자기 다음 쇼트와 마주친다. 바로 이 장면. 설진영은 초여름 한 낮 바람에 흔들리는 커다란 가로수길이 늘어서있는 길 저 편에서 걸어온다. 이때 우리는 15개의 쇼트를 음미하면서 차례로 마주하였다. 혹은 쇼트가 우리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쇼트는 원래의 계열로 돌아오는 대신 저 멀리서 걸어오는 설진영을 마치 조선 백자를 음미하듯이, 그 사람을 바라본다. 나는 이걸 환유의 쇼트라고 단순하게 말하고 싶지 않다. 이 쇼트는 그냥 단 한 마디로 거의 절대적이다. 35초 동안 꼼짝도 않는 카메라. 아무런 대사도 없이, 거기서 우리는 초여름의 바람을 느껴본다. 나무를 흔드는 그 바람결. 그런데도 그 바람 속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정면으로 설진영이 저 멀리서, 거의 멈추어선 듯한 망원렌즈 앞으로, 그렇게 걸어온다. 그저 그의 흰색 한복 옷깃이 바람에 가끔 흩날릴 뿐이다. 한국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 이때 당신에게 충고를 하고 싶다. 이 장면은 발췌해서 보면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이 쇼트들의 진행 속에서만 그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장면의 비밀을 맛보고 싶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처음부터 다시 보면서, 이 장면과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리고 나는 경험적으로 그 방법이야말로 시네마틱 센스를 느껴보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영화의 비밀을 느껴보는 절대적인 방법이다. S# 1 S# 2 S# 3 S# 4 S# 5 S# 6 S# 7 S# 8 S# 9 S# 10 S# 11 S# 12 하지만 우리는 이 장면에서 멈추면 안 된다. 이제 임권택 이 이야기의 선 바깥으로 완전히 빠져나온 다음 오로지 영화의 힘만으로 버텨보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설진영은 동 사무소에서 가족들의 창씨개명을 차례로 한 다음 자기 이름만 남겨 놓는다. 소장이 의아하게 묻자 그저 무심하게 “게까지는 아직까지 생각해보지 못했소. 차차 할 거요, 잘 부탁하오”라고 말을 끊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난다. 동 사무소 직원들의 배웅을 받고 나서는 설진영은 집으로 돌아간다. 이때 마을 청년들이 트럭에 짐을 싣는 모습을 본다. (S# 1) 나는 여기까지 그냥 무심코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장면이 나온다. 돌아오는 설진영을 따라 가깝게 다가간 카메라는 수평으로 이동한다. (S# 2) 저 멀리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마치 여름이 지나가는듯한 이 기분. 설진영은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동네 어느 집에 들어선다. (S# 3) 그리고 그 집의 조카와 마주 앉아 그 집 사정을 듣는다. (S# 4) 그런 다음 집을 떠나는 설진영은 골목길을 돌면서 다른 사내와 마주친다. (S# 5) 그리고 골목 담장 길을 따라 혼자 걸어오는 설진영을 보여준다. 점차 설진영으로부터 멀어지는 카메라. (S# 6) 아마도 설진영의 오랜 친구일 법한 동네 어른의 방에서 두 사람의 짧은 대화 (S# 7) 그리고 골목 담장 길을 따라 혼자 걸어가는 설진영 (S# 8) 걸어오는, 과 걸어가는 쇼트의 이어짐. 누군가의 집 대문으로 들어서면 그를 반기며 말한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S# 9) 그 누군가의 집을 나서는 설진영을 바라보는 더 멀리 떨어진 카메라 (S# 10) 그리고 거기서 더 멀리, 아마도 밭 건너에서, 걸어가는 설진영을 바라보는 먼 롱 쇼트. (S# 11) 점점 멀어진다는 말. 세상으로 멀어져가는 시간. 그리고 나서, 해가 떨어지고, 한옥 집이 어둠에 잠겨서야, 설진영은 자기 집 대문으로 들어선다. (S# 12) 이 12개의 쇼트는 사실상 아무 기능도 하지 않는다. 또한 임권택 자신도 여기에 어떤 사건을 만들지 않는다. 별다른 대사가 없으며, 어떤 쇼트도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이 쇼트들을 데드 타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쇼트들은 그 계보 안으로 들어선다. 로셀리니가 다시 영화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 앙드레 바쟁이 정식화하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하나의 형식으로 만든 시간. 멈추어 섰지만 이상하게 동요하는 시간. 이야기에서 아무 것도 더 나아가지 않지만 앞으로 계속 진행되고 있는 시간. 이때 이 시간은 변화를 묘사하는 시간이 아니라 관찰하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다. 어떤 예측도 우리에게 기대하지 않고 우리도 거기서 무언가 벌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때, 거기서 새로운 시간이 움직이고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아무리 유심히 보아도 당신이 고작해야 이야기를 쫓아간다면 여기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할 것이다. 설진영이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마치 직선을 중단한 다음 의도적으로 곡선을 그리듯이 동선을 연결하기 시작할 때 이 행동은 어떤 이야기도 동반하지 않는다. 그저 거기서 이어질 뿐이다. 거기에는 낭만도 없고, 그렇다고 어떤 비통한 감정에 휩쓸리지도 않는다. 게다가 이 쇼트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우리가 영화에서 처음 보았거나, 반복해서 등장했지만 별다른 설명이 없었던 인물들이다. 설진영은 그들 중 누구에게도 오늘 오후에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어떤 결정. 말하자면 사건. 그런 다음 다시 일상의 시간 안으로 되돌아올 때 임권택은 거기서 조금씩 물러난다. 이 씬은 수십 번을 다시 볼만한 가치가 있다. 단 한 마디로 이 12개의 쇼트는 < 족보 >에서 그 어느 장면보다도 중요하다. 그건 이 장면들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S# 1 S# 2 S# 3 S# 4 S# 5 S# 6 이 12개의 쇼트가 끝났을 때 어쩌면 영화는 이미 함께 끝난 것일 지도 모른다. 설진영은 그날 하루를 끝내고 조용히 이부자리에 눕는다. 그의 죽음에 동반하는 것은 ‘한 오백년’의 슬픈 가사이다.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이 영화에서 우리가 들은 노래. 그 다음은 느닷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눈부시도록 화창한 초여름 한낮 펼쳐진 마당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장례식에서나 볼 수 있는 흰색 상복을 한 사람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장면과 갑자기 만난다. (S# 1) 그 장면이 이상할 정도로 동떨어져 나왔다는 느낌을 주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이제까지 이 영화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은 방법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 족보 >에서 카메라가 이야기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했다는 인상을 받은 장면은 그 이전까지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거의 대담하리만큼 과격하게 손으로 들고 (말하자면 ‘핸드 헬드’) 카메라가 그 인파 속을 꿰뚫고 지나간다. 그 카메라는 흰 색 옷으로 가득 찬 상갓집 방문객들 사이를 지나 그들 사이로 이 집을 다시 찾은 다니를 보여줄 때까지 통과한다. 이때 다니는 이들 모두와 대조적으로 검은 색 양복을 입고 찾아왔다. 흰 색과 검은 색. 수 없이 많은 흰 점과 단 하나의 검은 점. 전통적인 한복의 물결과 단 한 벌의 양복. 전통과 근대. 마치 다니를 찾는 것처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카메라는 그를 보자 마치 자석처럼 다가간 다음 다니를 따라서 그 집 안으로 따라 들어간다. 이때 이 장면을 낯설게 만드는 것은 이렇게 사람이 많은 대낮에 이토록 과격한 카메라의 운동이 드러나 보이고 있는데도 아무 소리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이 정도의 사람들, 그것도 상갓집을 방문했을 때의 소란스러운 청각적 상황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없다. 마치 소리를 잊어버린 것만 같은 쇼트. 그저 운동만 남아있는 화면. 이때 다니의 방문을 가로 막아 나서면서 한 노인이 그의 멱살을 잡으며 “네, 이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라고 외쳐볼 때까지 화면은 침묵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 쇼트는 그런 다음 다시 무겁게 침묵이 내리 누른다. 이 쇼트는 단지 이 씬의 시작이 아니라 이제까지 진행되어왔던 영화 전체와 ‘설진영이 없는’ 나머지 사이의 단절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결정적이다. 아마도 임권택 은 이 씬을 마치 하나의 쇼트처럼 찍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S# 2) 다니가 설진영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집을 찾아오는 장면을 하나의 쇼트로 찍은 다음 마루에 올라와 방 안에 둘러앉은 마을 어른들에게 무릎을 꿇고 인사를 드리기까지 어쩔 수 없이 나누어야 하는 쇼트를 액션 매치로 두 개의 장면을 연결한 것은 그 예이다. 그런 다음 다니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마당에 서 있는 옥순을 바라본다. (S# 3)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다니는 설진영의 영정사진 앞에 간다. (S# 4) 이 네 개의 쇼트의 길이는 짧은 것이 아니다. 지금은 대낮이고 설진영은 이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어른이었으며 지금 마당과 방에는 문상객들로 넘쳐난다. 그런데도 이 집에서 우리는 거의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다. 무거운 침묵. 그들이 조심스럽게 움직인다기보다는 영화가 화면 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이 비대칭이 가져오는 음향적 관계는 이상하게도 내게 화면 속의 사람들이 아니라 계절과 관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 여름 대낮의 무서우리만큼 고요한 침묵. 나는 여기서 시각적 운동과 음향적 침묵(속의 선택)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기묘한 부조화 사이에서 어떤 정신적 이미지를 느껴본다. 다니는 설진영의 영정사진 앞에서 한국식의 예법에 따라 절을 올린다. 그때 마치 그 절을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설진영의 영정 사진을 클로즈업 한다. (S# 5) 좀 더 정확하게 설진영의 사진 위로 다니의 얼굴이 반사되어 보이면서 두 개의 이미지가 겹친다. 여기서 이 문장을 곡소리를 듣듯이, 노래를 부르듯이 소리를 내어 읽어주실 것. 웅얼거리듯이 들리는 아이고, 아이고, 라는 곡소리. 망자를 위한 후렴구. 마치 그 절에 대한 반응이라도 오듯이, 다니의 작별인사에 대답을 하듯이, 설진영이 이부자리에 누웠을 때 들었던 ‘한 오백년’의, 그 선율을 곡소리 위로 이어 듣게 된다. 이때 절을 올리는 다니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위치는 정확하게 설진영의 영정사진이 놓여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이다. (S# 6) 그렇게 절을 올리는 다니를 바라보는 유일한 시선은 옥순의 눈길이다. 다니의 바로 뒤에 상복을 입고 앉아있는 옥순. 등과 얼굴. 두 개의 신체. 교차하지 않는 시선. 그때 옥순의 눈길은 다니의 절하는 모습을 따라서 이동할 것이다. 절을 한 다음 일어나는 다니의 등 뒤로 설진영의 영정사진이 보일 때, 두 개의 이미지가 하나가 될 때, 사실상 두 개의 쇼트가 하나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올 때, 옥순의 마음속의 두 사람이 하나의 눈길 안에 머무를 때, 고인 앞에 절하는 기계적인 운동이 감정의 이미지로 넘어올 때, 감정의 여러 다발이 거기서 각자의 좌표를 설정할 때, 이 모두를 하나로 감싸 안는 것은 고인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면서 바치는 한국적 장례의 예절이라는 복잡한 절차의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예절의 액션이다. 그런 다음 마지막의 마지막 작별인사. 상여가 나가는 순간, 그 장면의 비통한 아름다움, 달리 말할 수 없는 그 작별의 아름다움.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이 장면 앞에서 거의 숨을 멈추었다. 그런 다음 많은 시간이 흘러 다시 보았을 때, 고맙게도, 이 장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어떤 장면들은 세월이 지나고, 시간이 흘러간 다음, 그 시간의 마모를 견디지 못하고, 그저 망가져버리는 영화 속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수없이 경험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내 안목을 탄식하였다. 그러나 < 족보 >는 그때 내가 본 아름다움이 말 그대로 숭고하리만큼 보는 나를 사로잡은 다음 그 어디론가 데리고 가는 움직임의 힘이 발생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다시 볼 때마다 일깨워주었다. 이 말의 방점, 다시 볼 때마다. 물론 나는 이 장면을 카메라의 움직임과 쇼트의 단위, 그리고 인물들의 동선과 이러 저리 휘어진 논두렁길의 곡선으로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장면에는 그 설명을 그냥 지나쳐버린 다음 만들어내는 그 무언가의 출현이 거기 있었다. 무언가는 거기서 매번 소멸하겠지만 그러나 반대로 무언가는 거기서 불멸하는 것이었다. 단지 그것은 이미지의 힘이 아니었다. 나를 이끌어 어느 순간으로 들어 올린 다음, 그것이 주는 아름다움의 공중에 나를 매달아 놓고, 마치 멈춘 듯한, 그 어떤 힘의 약속, 프루스트라면 시간으로부터 탈취한 그 어떤 순간, 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 특별한 진공의 시간, 이 장면은 임권택이 내게 한 약속의 시간이다. 어떤 약속? 영화, 더도 덜도 아닌 영화라는 약속. 나에게 임권택 은 여기서 시작하였다. 아니, 그렇게 나는 임권택을 만났다. (계속) 1978년 110분 칼라 2.35 감독 임권택 제작 화천공사 각본 한운사 촬영 이석기 음악 정민섭 미술 김유진 편집 김희수 하명중 다니 주선태 설진영 한혜숙 옥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