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그
- 감독
- 이상희
- 제작년도
- 2007
사진: “ 세계의 주인 ”, 네이버영화 * 본 글에는 극중 일부 장면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세계의 주인 >(윤가은, 2025)을 아무런 정보 없이 관람할 때, 관객은 필연적으로 오류 혹은 함정에 빠지게 된다. 초반의 시퀀스들은 수수께끼에 가까운 불규칙한 배열처럼 보인다. 영화의 시작은 교복을 입은 커플이 학교로 보이는 폐쇄된 장소에서 키스에 몰두한 모습이다. 곧 영화의 중심이 될 주인( 서수빈 )은 키스 도중 남자 친구( 김예창 )의 얼굴이나 손을 지속해서 교정한다. 이 장면은 성행위를 묘사한 웹툰 스케치로 넘어가는데, 마치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처럼 보인다. 방금까지 키스를 나누던 주인은 단짝 유라( 강채윤 )가 그린 웹툰이 담긴 화면을 바라보면서 다음 상황을 궁금해한다. 체육 시간에는 운동장에서 배구 연습을 하는 도중 자리를 이탈해 장난을 치다가 다른 학생에게 부딪히기도 한다. 이때 부딪힌 남학생 수호( 김정식 )와 주인은 이후에도 부딪히는 일이 잦다. 수호의 어린 여동생은 주인의 엄마( 장혜진 )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다닌다. 주인은 엄마를 따라 방문한 병원에서 팔에 깁스를 한 수호의 동생을 만난다. 그날 수호는 동생을 씻기다가 목덜미 근처에 난 꼬집힌 자국을 본다. 다음날 어린이집에 찾아가 CCTV를 보여달라고 말하지만, 어린이집 교사는 곤란해하며 자리를 피한다. 수호는 마을 어귀 담벼락에는 빨간색 라카로 성범죄자의 집이라고 적힌 곳을 지나친다. 주인의 동생 해인(이재희)은 마술을 배워서 가족 앞에서 상연하는 것을 좋아한다. 빨간 공을 손안에서 사라지게 하는 마술 등 대부분 무언가를 사라지게 하는 마술이다. 해인은 주인의 앞으로 온 편지를 몰래 숨겨두거나, 신발에 흙을 묻혀 오는 등 어떤 비밀이 있어 보인다. 주인의 엄마는 텀블러에 양주를 넣어서 몰래 마시곤 한다. 주인은 진로를 정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선생님( 이상희 )과 개별 면담 시간에 파티션 위에 놓인 사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숨쉬기 곤란해하는데, 알레르기가 있냐며 당황해하는 담임에게 주인은 장난이었다며 웃어버린다. 정확한 숏의 순서를 정리하기 어려운 일련의 몽타주 속에서 특정 인물이나 상황에 마음 두기 힘들다. 그러다 개별적인 상황을 한데 모으는 꼭짓점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복역 기간을 끝낸 성범죄 피의자의 학교 인근 마을로의 복귀가 임박해지자, 수호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성범죄자 복귀 반대 서명을 받는다. 주인은 홀로 서명에 반대하는데, 이유는 서명을 독려하는 문구 중 피해자의 아픔을 과장해서 묘사한 부분 때문이다. 피해자는 이 일로 인해 평생 씻을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는 문구는 클리셰에 가깝지만, 이것이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과 피해자성을 강요하는 문구가 될 수도 있다. 주인이 문구에 이의를 제기하는 순간, 어쩌면 그가 성폭력 피해 생존자일 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네가 뭐 성폭력 피해자라도 돼?”라는 일갈에 주인은 “그래, 나 성폭행 피해자다.”라고 답한 뒤 곧이어 농담이라고 무마해 버린다. 하지만 그것이 농담이 아님을 관객은 알게 된다. 그와 동시에 주인과 그를 둘러싼 모든 비밀스러운 상황과 행동에 하나의 질서가 생긴다. 아버지의 부재도, 편지를 숨기거나 마술을 배우는 동생도, 술을 마시는 엄마도, 주인의 활발함도, 모두 성폭력 트라우마와 관련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불규칙한 것처럼 보였던 배열이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질서로 통합되는 것을 느끼면서, 이에 대한 경계와 의심이 동시에 피어오른다. 이러한 해석이 결국 인물을 사건에 가둬두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서명문 속의 클리셰와 비슷한 짓을 내가 인물에게 가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여기에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동시에 느낀다. 서명을 부탁하는 수호와 반대하는 주인 (사진: “ 세계의 주인 ”, 네이버영화) 사실 확정을 위한 고백은 일종의 법정에서 이뤄진다. 문구를 수정했다는 수호의 말이 거짓임을 간단히 확인한 주인은 자리를 피하지만, 수호가 끈질기게 붙잡으면서 몸싸움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표출된 주인의 분노는 그가 가진 본래의 성격만을 표시할 수 있는가. 그 안에 잠재한 성폭행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그의 행동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문제의 그 문구를 상연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과연 영화가 지속하는 동안 인물은 이러한 잣대에서 놓여날 수 있을까. 교장실에 불려 간 주인과 수호는 서로를 마주 본 위치에 앉는다. 수호는 서명받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하고 싶다고 제안한다. 주인은 끝까지 서명을 거부하며 결국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을 차분히 고백한다. 가장 문제적인 장면이 이어진다. 차 앞좌석에 나란히 앉은 엄마와 주인은 세차장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것은 다소 노골적인 의식이자 클리셰다. 세차가 이뤄지는 공간 내부의 소음이 주인의 울부짖음을 가리는 동안, 주인은 엄마를 향해 원망의 말을 마구 쏟아낸다. 세차가 끝나고 울음이 잦아질 즈음 엄마는 말없이 휴지와 물을 건넨다. 그러고는 ‘한 바퀴 더 돌까?’라고 묻는다. 이 장면에서 수호가 쓴 서명문 속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문구가 속절없이 떠올랐다. 세차장 장면은 이를테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씻으려 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상처의 당사자인 이들은 상처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다. 다행히 그 안에서 주인은 혼자가 아니다. 주인의 엄마는 바깥에서 상처를 바라보거나 낫게 할 수 없다. 다만 그는 상처 안쪽에 함께 있는 사람이다. 이들과 함께 뒷좌석에 무단 탑승한 카메라 역시 상처 안쪽에 자리 잡으려 한다. 세차장 장면의 핵심은 무언가를 씻어내는 정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들의 위치에 있다. 외면했던 안쪽에서 여전히 울부짖거나 억눌린 상처들이 존재하고, 주인은 잠시 그 상처가 되어 아우성쳐 보았을 뿐이다. 세차장 기계 속 차 안, 엄마 태선과 주인 (사진: “ [세계의 주인] 메인 예고편 ”, 바른손이앤에이) 안쪽에 자리한 사람들이 있다. 법정 장면에서 친족 성폭력 피해자인 미도( 고민시 )가 피고 측 변호인의 심문에 맞서 증언할 때, 미도의 뒤편에서 슬쩍 손수건을 건네주는 인주( 백현주 )와 동료들은 상처의 안쪽에 있는 사람이다. 심문을 마치고 식당 부엌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미도는 가족이 찾아왔다는 동료의 말을 듣는다. 두려운 듯 커튼 뒤에서 슬쩍 바깥을 내다보았을 때, 뜻밖에도 창밖에 있던 주인이 시선에 잡힌다. 미도는 주인을 그 장소에서 가장 깊은 곳인 주방 안쪽으로 들인다. 둘은 그렇게 상처의 안쪽에 있다. 사건 이후 주인은 무리 짓던 친구들과도 어쩐지 데면데면해진다. 주인의 교실 책상 서랍 안쪽 깊숙한 곳이나 책 사이에서는 적대적인 느낌을 주는 쪽지가 발견되기 시작한다. 그 쪽지를 쓴 자가 누구인지는 관객 역시 알 수 없다. 그리고 복도를 촬영하는 카메라의 시점이 불현듯 등장했을 때, 카메라 뒤에 있는 자가 쪽지를 쓴 미지의 인물일 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그런데 방금 카메라 앞을 스치고 지나간 주인이 갑자기 렌즈 가까이로 얼굴을 들이밀면서 방금까지의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깨어진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사건 이후 유독 멀어진 친구 유라다. 유라와 주인은 머리를 대고 방금 찍힌 영상을 함께 확인한다. 이로써 유라, 혹은 미스터리한 쪽지를 쓴 이들 역시 상처의 안쪽에 자리한 사람이 된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대개 카메라 안에서 벌어진 일들의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이라 여겨지지만, 이들 역시 내부에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침범과 공유다. 영화는 거의 모든 이들을 상처의 안쪽으로 초대한다. 나 역시 주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 켄 로치의 영화, <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에서 제목이 곧 개인의 존엄을 표시하는 모두의 구호가 된 것처럼, <세계의 주인>에서도 ‘나, 주인’임을 기억할 수 있는 이들을 소환한다. 내 몸과 내 상처의 주인은 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 상처의 안쪽에서 때로는 욱하는 마음이 들고, 상처의 바깥에서 이 마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의심스러워도 상처와 함께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물론 여기에 동참할 수 없는 이들이 존재하리란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의 탓은 아닐 것이다. 사진: “ 세계의 주인 ”, 네이버영화 김소희(영화평론가) ㅣ 영화를 보는 동안 느낀 감정의 격랑이 내가 쓴 글 안에 거짓 없이 찍혀 있기를 바랍니다.
이완민 감독의 두 번째 장편 < 사랑의 고고학 >(2022)에서 주인공 영실(옥자연)은 고고학을 공부하고 30대에도 여전히 현장에서 흙을 털어내고 고르며 유물을 찾아내는 연구원을 하고 있다. 지도교수를 비롯해 같이 공부한 사람들이 이제 아카데미로 들어와 일을 찾으라고 해도 영실은 시간을 직접 만질 수 있는 현장이 좋다. 유적 안에 있는 옛 건물과 주거지가 변경되었음을 알려주는 지표인 유구선(遺構線)을 직접 붓으로 하나하나 흙을 털어내며 만지는 것은 시간의 과거와 접촉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영실이 자기의 삶 자체를 멀리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지층처럼 중첩된 과거, 현재, 미래가 발굴된 유적 현장처럼 그 시간들과 시간들 사이에 켜켜이 쌓여 있는 마음들의 유구선을 끈질기고 집요하게 털어내고 고른다. 그것이 무엇이고, 언제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마음으로 변해갔는지 그리고 어떻게 변해갈지 지켜보면서 말이다. 때로는 그러한 고고학적 실천이 영실 스스로를 상처 내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영실은 모두가, 심지어 함께 사랑을 확인하고 미래를 약속했던 연인이 떠나고 그 남자가 야기한 폭력으로 폐허만 남은 후에도 그 감정의 결과, 약속의 의미와, 폭력의 메커니즘의 유물을 섬세하게 손끝으로 감각하며 끝끝내 자신의 삶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시간을 응시하는 자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뒤늦음’의 시간이나 ‘후회’라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고학 현장에서 ‘이후의 시간’은 뒤늦지 않고 언제나 적당한 때이기 때문이다. 이완민 감독의 첫 번째 장편 < 누에치던 방 >도 두 번째 작품처럼 시간과 마음의 지층들을 보살핀다. <사랑의 고고학>이 40대에 다다른 여성이 30대의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발굴하는 데 집중하는 영화라면, <누에치던 방>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할 만큼 큰 상처가 각인된 청소년기의 시간의 방에 갇혀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힘든 이들이 서로를 지켜봐주고 증언하고 그 지층의 실들을 발굴하는 영화다. 그렇게 교차적으로 목격된 시간들은 사회를 만든다. 독립된 인간이란 사회에 참여하면서 사는 인간이다. 이 영화는 30대, 40대가 된 성인들이 서로의 청소년기를 목격하고 상대에게서 우연히 자신의 흔적을 찾아내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10년 째 고시공부를 하다 이제 30대 중반이 되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실패한 미희(이상희)는 남자친구와도 헤어진다. 고등학교 때부터 오로지 공부를 목적으로 친구 관계도 모두 끊어내고 고립되어 살아온 미희는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 미희는 고치에서 나오지 못한 애벌레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지하철에서 볼펜과 메모지를 나눠주며 자기한테 하고 싶은 말을 그게 뭐든지 적어달라고 호소하는 고등학생 유영(김새벽)을 만난다. 유영 역시 이 사회 속에 참여하고 싶은 열망이 있지만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키는 데 서툴다. 유영을 쫓아간 미희는 아파트 문을 두드리고 성숙(홍승이)을 만나게 된다. 미희는 충동적으로 한 번도 본적 없는 성숙에게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단짝친구라고 한다. 성숙은 그런 미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느끼면서도 집안으로 들여 다독여준다. 이 영화에서 성숙은 유일하게 사회에 참여하는 이다. 성숙은 미희에게서 자신과 자신의 진짜 어린 시절 단짝친구인 유영의 흔적을 읽어낸다. 미희는 부모의 만족을 위해 평생을 자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단절해온 상처를 갖고 있고, 성숙과 성숙의 남자친구 익주(임형국)는 단짝친구 유영을 잃은 상처를 안고 산다. 성숙과 익주는 유영이 죽은 이유를 알 수 없다. 유영은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말을 하고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사회는 그런 유영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성숙은 이제 겨우 고치에서 탈출해 사회로 나오려고 하는 미희에게서 그런 유영의 흔적을 처음부터 본다. 그리고 진짜 단짝 친구였던 것처럼 관계를 맺는다. <누에치던 방>은 30대인 성인도 뒤늦게 고치에서 나올 수 있다고 다독여진다. 그럴 때 아무 말 없이, 이유도 묻지 않고 친구로 받아들여주는 성숙 같은 주변인이 있다면 실패하고, 늦었더라도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연극배우인 성숙은 거리에서 어떠한 인위적인 무대장치나 소품도 없이 돈키호테를 연극하는 실험적인 공연을 한다. 관객도 지나가는 거리의 행인들이다. 그럼에도 성숙이 칼을 들고 풍차를 향해 달리는 연기를 하자 사람은 말이 되고, 지저분하고 무미건조한 회색도시의 풍경은 초원이 된다. 성숙은 사회에 참여하는 동시에 자기 주변의 사회를 바꾸는 사람이다. 미희는 과거에 자신이 모질게 굴어 단절했던 고등학교 친구와 대학교 선배를 찾아가 시간과 관계를 회복해 보려 한다. 그러나 선배와의 만남은 다소 허무하고 고등학교 친구는 만나주지 않는다. 결국 자살까지 시도하려던 미희는 수술을 하게 됐으니 보호자가 되어줄 수 있느냐는 성숙의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자살을 포기한다. 늘 보호와 관심을 요청하던 미희는 돌봄의 요청을 받는 자가 된다. 독립적으로 사회 속에서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성숙은 사실 미희만큼은 아니지만 유영이라는 상처와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미희는 그런 성숙을 알아봐준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유영을 알지 못했던 미희는 유령처럼 다른 시간대에 출현한 유영을 알아보지만, 성인이 된 성숙과 익주는 유영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한다. 아마도 미희가 만난 유영은 진짜 유영이기 보다는 유영과 같은 상처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등학생일 수도 있다. 그리고 미희가 그녀에게서 유영의 흔적을 읽어낸 것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 있는 이들이 교차하면서 서로의 이야기의 흔적을 찾아주는 혼란스럽고 복잡한 서사 속에서 그래도 미희와 성숙은 살아남아 미희의 고등학교 친구 근경을 찾아간다. 그러나 근경은 미희에게 ‘그만 스토킹을 하라’며 화를 낸다. 근경은 ‘이제 와서 무엇을 함께 할 수 있겠냐?’며 반문한다. 과거, 현재, 미래가 얽인 실타래처럼 혼재되어 살아가는 미희, 성숙과 달리 근경은 이미 오롯이 현재의 시간을 산다. 근경은 미희에게서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낼 수 없다. 그리고 영화는 그에 약간의 충격을 받은 미희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끝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다르게 흘러가고 그 시간이 언제나 맞아떨어질 수 있으리란 염원은 불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낙관을 말하기보다는 성숙이란 존재가 고대유물처럼 얼마나 희귀한 존재인지를 역설한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극장이 배경이 나오는 영화들을 좋아한다. 이 영화들 속엔 극장에 가면 으레 마주하게 되는 것들이 ‘비치’되어 있다. 예컨대 오래 된 얼룩을 머금은 카펫, 늘 같은 옷을 입고 시간을 때우는 우울한 얼굴들, 매대에 쌓여있는 오래된 과자들 등 새로운 것은 ‘1’도 없는 이 극장의 이야기는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에 아련하고 뭉클하다. 임권택 감독의 < 하류인생 >, 주세페 토르나토르의 < 시네마 천국 >, 임순례 감독의 < 우중산책 > 이 내겐 그런 영화들이었다. 보고있어도 그리운 영화. 그리고 이 리스트에 전지희 연출의 < 국도극장 >이 추가될 것이다. <국도극장>은 을지로에 있던 그 전설의 국도극장과는 아무 상관 없는 또 다른 국도극장의 이야기다. 영화는 주인공 기태( 이동휘 )가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자신의 고향, 벌교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고향이라고는 하나, 컴컴한 집에서 기태의 끼니를 챙기는 병든 노모( 신신애 )를 제외하고 그를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기태는 지인의 소개로 초등학교 동창, 영은( 이상희 )의 뒤를 이어 동네 국도극장에서 잡일을 시작한다. 잡일이라고 굳이 표현한 것은 이 극장에서 필요한 모든 일이 누군가의 업무로, 역할로 나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각자도생’을 모토로 수 십년을 버텼던 이 극장의 직원은 간판쟁이 오씨( 이한위 ), 박기사 그리고 앞으로 ‘매표부’ 외 모든 것을 책임 질 기태가 전부다. 국도극장을 채우고 있는 존재들이 기태에겐 초라하고 구태의연하다. 매점 구석에 놓여있는 고장 난 컴퓨터부터 골방에 앉아 허구헌날 소주와 담배로 시간을 때우는 오씨, 그리고 카운터에 턱을 괴고 앉아 가물에 콩나기로 오는 관객을 맞는 자신까지 말이다. 그럼에도 무기력과 우울함으로 숨이 멎을 것 같은 기태에게 서서히 재활의 생기를 불어 넣는 것 역시 이 존재들이다. 어느 때든 서로가 내킬 때, 오씨와 쭈구리고 앉아 담배를 나눠 피는 시간이, 싸구려 비빔밥과 소주 콤보를 사랑하는 영은과의 외식도 기태에겐 기다려지는 일상이 된다. 오씨가 그리는 간판만큼이나 흉물스럽기 짝이 없는 구닥다리 영화들 까지도 말이다. 서울에서 한번도 의미 있지 않았던 것들 혹은 의미 있을 수 없던 것들이 그렇게 영혼의 기력이 되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서울로 떠나는 영은으로 인해 돌아갈 명분이 생겼을 때, 그리고 회사에 다시 다닐 기회가 찾아 왔을 때, 기태는 국도극장에 남기로 한다. 암에 걸린 오씨가 수술을 받기 위해 잠시 병원으로 떠나야 했을 때도 기태는 생각을 고치지 않는다. 그렇게 국도극장은 기태의, 그리고 앞으로 돌아올 그 누군가의, 터전이 된다. 영화는 ‘아직도’ 극장을 채우고 있는 하릴 없는 ‘로우 라이프(low life)’들의 이야기인 만큼, 특이하지도, 특줄나지도 않지만 배우들의 연기와 공간의 향수가 웃음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특히, 배우 이한위의 압도적인 연기는 이 작은 영화의 거대한 스펙타클이다. 그가 이 작품에서 구사하는 호남 사투리는 아마도 지금껏 한국영화에서 등장한 사투리 대사 중 가장 적확한 기능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올곧은 자세와 시선으로 등장하지 않는 그가 보여주는 좁고, 구겨진 뒷모습은 덧 없는 인생의 완전체이자 삼라만상을 품은 인간의 형상이기도 하다. 영화의 또 다른 스펙타클, ‘극장’ 속 공간은 에드워드 하퍼(Edward Hopper)의 ‘밤의 사람들’에 등장하는 다이너(diner)만큼이나 휑 하지만 감독 전지희는 이 공백을 우리 모두가 그리워하는 극장의 오브제들로 채운다. 가령 기태가 오씨에게 건네 받는 일반티켓과 조조티켓 뭉치, 나무 벽에 걸려있는 거대한 좌석 배치도 등 ‘소싯적’ 극장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존재들 말이다. 결국 <국도극장>은 소멸위기에 있는 극장이라는 공간을 통해 ‘존재’의 재발견을 종용한다. 그것은 기태를 통해 재발견되는 인간들, 물체들 뿐 아니라 이 영화가 수고를 들여 비추는 작고 흔한 자연의 존재들 – 예컨대 극장의 머리 위를 지키고 있던 초승달이나, 가을 직전이 되면 고개를 내 빼는 앞 마당의 작은 들꽃 – 의 재발견을 포함한다. 많은 것들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의 ‘미물(美物)’들을 기특한 눈으로, 애정을 눌러 담아 바라보는 이 영화의 시선을 ‘발견’한 것은 매우 필연적이고 다행스런 사건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