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 싱글 데이
- 감독
- 이성철, 조은성, 박기림
- 제작년도
- 1999
올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 로 만나보세요. 정혜승 교수 는 영화와 미디어를 인종이나 정체성 등의 개념과 관련지어 연구해왔다. 미국과 동아시아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경험되는 대중문화 콘텐츠를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한편, 영화사 고문헌을 탐독해 한국영화 검열사를 연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Cinema under National Reconstruction: State Censorship and South Korea’s Cold War Culture(2024), Movie Minorities: Transnational Rights Advocacy and South Korean Cinema(2021, 공동 집필), Hollywood Diplomacy: Film Regulation, Foreign Relations, and East Asian Representations(2020), Movie Migrations: Transnational Genre Flows and South Korean Cinema(2015, 공동 집필) 등이 있다. 하와이대학교 마노아캠퍼스 미국학과와 오클랜드 대학교 영어·영화학과에서 강의한 후, 현재는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할리우드 키드에서, 실증적 영화연구자로 영화학자의 길에 들어서기 전, 그 시작을 만들어준 계기를 꼽자면 어린 시절 접했던 할리우드 영화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께서 < 애정이 꽃피는 나무 >(에드워드 드미트릭, 1957)를 보고 감탄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미군정 시기부터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몸소 경험한 세대는 이 시대에 대량으로 수입된 할리우드 영화에 매료되곤 했다. 이들뿐만 아니라 군사 정부 시절에 유년기를 보낸 나도 < 헐리우드키드의 생애 >(정지영, 1994)의 내용이 자서전에 가깝다고 느낄 만큼, 20세기를 통과한 한국인들이 영화에 처음 눈을 뜨는 데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 요인 중 하나로 할리우드를 빼놓을 수 없다. 나는 특히 미국 현실과는 동떨어진 판타지적 서사를 지닌 작품들(거의 엠지엠 스튜디오MGM Studios가 제작했다)에 눈길이 갔는데, 인물과 세계관(또는 서사)이 비현실적으로 설정된 콘텐츠를 즐기며 내가 처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욕망을 작품에 투사했던 것 같다. 언뜻 보면, 현재 미국의 사회적 소수자들이 한국의 아이돌을 보고 정서적으로 위안을 얻으며 K팝 팬으로 거듭나는 과정과 유사한 흐름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좌) 유년기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할리우드 영화 / (우) 한국영화 검열사에 관한 저서 Cinema under National Reconstruction (2024) 본래 나는 미국에서 활동하며 영화와 사회문화 이론을 중심으로 한국영화를 연구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영화의 역사적 측면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이론보다는 ‘ 실증적 ’ 방법론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고, 필름 아카이브에 대한 연구자들의 의존도 도 당연히 높았다. 여러 아카이브를 방문해 대량의 자료를 조사하고 그 결과물을 비교하는, 미국 영화연구의 이 주된 경향을 습득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을 박사 과정 재학 시절부터 들어왔다. 이후 학계에 입문하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2021년 풀브라이트 연구원으로서 한국을 찾아 1960~80년대 한국영화 검열사 연구를 시작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자원)이 공개한 검열서류 컬렉션 속 방대한 1차 자료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으며, 연구 결과는 저서 Cinema under National Reconstruction(2024)에 정리해 곧 출간할 예정이다. 한편, 이때는 < 오징어 게임 >(황동혁, 2021)이 넷플릭스에서 전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시기기도 했다. 한국 콘텐츠의 전례 없는 흥행에 세계가 놀랐고, 마침 CNN이 인터뷰를 요청해왔기에 여기에 응하기 위해서 이 작품에 대한 연구까지 병행했다. 그래서 검열사와 OTT라는, 교집합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듯한 두 주제를 동시에 들여다보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아카이브의 힘과 한국대중문화의 영향력이 상호작용하면서 영화연구의 새로운 방향성을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한국영화와 콘텐츠의 세계화, 그리고 넷플릭스 내가 미국에 처음 도착했던 1997년만 해도, 미국 현지에 알려져 있던 한국영화는 비디오 가게 ‘킴스비디오’에 소장된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배용균, 1989)과 < 삼공일 삼공이(301, 302) >(박철수, 1995)가 전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홍상수 등 몇몇 예술영화 감독들의 이름이 해외에 알려졌고, 한국형 블록버스터 속 스펙터클 역시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넷플릭스가 2010년대 자사의 스트리밍 및 DVD 대여 서비스 대상 작품에 한국영화 약 200여 편을 포함시키면서(물론 지금은 넷플릭스가 제작에 참여한 오리지널 콘텐츠가 주를 이루지만) 인지도는 더욱 높아졌고, 넷플릭스의 스트리밍 서비스 제공 범위는 2016년에 아시아 문화권을 포함한 전 세계로 갑작스럽게 확장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극장 보호를 위한 통상의 홀드백 기간을 두지 않고 봉준호 감독의 < 옥자 >(2017)를 이례적으로 동시 스트리밍한 플랫폼으로도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공개된 < 킹덤 >(김성훈, 2018)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가입자 수까지 폭발적으로 증가시켜 세계 OTT 시장에서 한국형 시리즈물의 두각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고, 이 기세는 <오징어 게임>을 비롯해 그 이후에 공개된 여러 작품을 통해서 국내 오리지널 시리즈가 넷플릭스의 주력 콘텐츠로 자리매김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넷플릭스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특정 지역의 문화와 정서에 맞는 콘텐츠를 기획해 글로컬리티를 선보임으로써 흥행을 꾀한다. 또한 더 많은 지역으로 빠르게 배급하기 위해 콘텐츠의 IP를 자사가 전적으로 보유하는 방식으로 오리지널 시리즈를 기획하곤 한다. 이렇게 제작된 국내 오리지널 시리즈로서 해외, 특히 미국에서 성공한 콘텐츠들은 대체로 액션 위주의 자극적인 구성이나 기괴한 분위기로 미국인들의 취향을 겨냥하고 있다고 본다. 이뿐만 아니라 넷플릭스는 한류 스타를 내세워 아시아 팬들을 사로잡는 시리즈들(주로 멜로드라마 장르에 치중한다)에도 투자하는데, TV 드라마를 기획하는 국내 콘텐츠 대기업과 공동으로 제작한 후 전 세계 배급을 위한 권리를 획득하며 아시아 시장에서의 수익 창출을 꾀한다. 이러한 전략을 바탕으로 제작된 국내 콘텐츠들이 해외에서 불러일으킨 반응들 몇 가지를 소개하고 싶다. 미국의 지인 한 명이 내게 <갯마을 차차차>(2021)에 대한 감상을 여러 번 전해준 적이 있다. 그는 삶의 어두운 면을 다루면서도 작품 속 갈등이나 미스터리를 차분하고 완곡하게 풀어나가는 한국 드라마만의 서사 전개 방식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또한 인물들의 성격을 인위적으로 설정하지 않고 극의 흐름과 복합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사실적으로 탄탄하게 구성한 점 역시 놀랍다고 말해주었다. 작품 속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서사에 몰입하도록 하는, 한국 콘텐츠의 흡인력이 효과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좌) 아시아 콘텐츠 시장을 겨냥해 넷플릭스와 국내 콘텐츠 대기업이 공동 제작한 드라마 (우)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에 관해 미국의 지인이 직접 전해온 감상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내 콘텐츠 산업에 침투한 넷플릭스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는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넷플릭스는 자사의 유명 오리지널 시리즈를 통해 한국의 창작자들과 기업들까지 관심을 받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고 주장하지만,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기존의 작업을 모두 OTT 시리즈의 형식에 끼워 맞추는 양상이 과연 긍정적일지에 대한 의문도 존재하는 것이다. 연구자로서 이렇게 양가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현상이 미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확정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국내 창작자들과 기업, 그리고 전 세계 OTT 플랫폼 간의 상호작용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국 콘텐츠가 어떻게 발전해나갈지는 현 시점에서 진단하기보다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분석해나가야 할 과제로 삼아야 할 것 같다. 영화 검열사 연구와 아카이브의 중요성 이제부터는 강의 서두에 언급했던, 필름 아카이브의 소장자료를 참고해 실증적으로 연구한 주제 ‘ 1960~80년대 국내 영화검열사 ’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역사를 간략히 짚고 가자면, 국내 영화검열은 미군정 시기인 1946년, 군정법령 제115호 가 공포되면서 주무 부처가 영화의 상영허가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허가를 담당하는 부처의 명칭(공보부, 문교부, 문공부 등)은 자주 변경되었지만 1996년에 사전심의가 위헌 판결을 받기 전까지 이 법은 계속 시행되었다. 영자원이 공개한 검열 관련 소장자료는 대부분 1960~80년대에 상영허가를 담당한 부처에서 작성된 행정서류들이었고, 한국에 온 나는 이 자료들을 토대로 관련 주제를 연구했다. 연구를 소개하기 전, 우리가 검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바를 먼저 공유해보자. 어느 사회에서든 ‘검열’은 대부분 독재나 반자유를 암시하는 부정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다만 나는 영화나 문학이론에서 이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검열에 접근하는 경향을 살펴봤는데, 푸코의 담론 일부를 인용해 이를 설명해보고 싶다. *주1 푸코는 ‘권력(power)’이 정복이나 지배의 도구가 아니라 사회 도처의 여러 주체들 사이에 다양한 모습으로 편재되어있는 관계의 일부라고 말한다. 다수가 욕망하거나 획득하고 타도해야 할 실체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 간의 관계 속에서 유동적으로 형성된 무정형의 네트워크라는 것이다. 이러한 권력에는 ‘저항’이 수반되는데, 나는 여기서 말하는 저항 역시 권력과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권력과 상호작용하거나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 또는 움직임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국내 영화검열 역시 검열자가 피검열자를 억압하려는 시도로만 인식되기보다, 두 주체가 활발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영화 창작과 배급의 생산성을 더하는 요소로 읽힐 가능성도 있음을 제안하고 싶다. 국내 영화검열, 특히 박정희 집권 당시 영화검열의 주된 목적 중 하나는 영화가 시장에 효과적으로 진출하도록 돕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할리우드의 자체 검열이 목표로 하고 있는 바와 유사하다. 영화를 개봉시켜 더 넓은 시장으로 배급하기 위해 제작자는, 그 안에 담긴 표현과 내용이 다양한 관객에 의해 무리 없이 수용될 수 있게 하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특정 인종, 지역, 젠더 등에 대한 혐오 섞인 시선을 반영하거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작품은 윤리적 논란에 휩싸일 뿐만 아니라, 시장에서 더 많은 관객에 의해 향유될 기회 또한 잃게 된다. 산업 육성이 최대 목표였던 박정희 정부에서, 개봉한 영화가 시장에서 공유되지도 못하면서 관련 산업의 활성화까지 저해하는 사태는 반기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영화 감상이 세계화된 오늘날, 텍스트는 창작자에게 종속되지 않고 전 세계의 감상자들에게 열려 있다. 이들을 구성하는 여러 집단을 존중하고 시장 내 더 많은 관객에 대한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좋은 의미’의 검열(good censorship)의 필요성이 더욱 두드러지는 때이다. 피에르 부르디외 역시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창작자는 시장의 구조를 고려해 무언가를 ‘완곡하게’ 표현하고, 이를 수용할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해 이후에는 스스로 자체 검열을 진행한다고 논의한다. *주2 이처럼 산업과 더불어 사회적 소수자를 보호하는 검열의 경우 올바른 방향으로의 창작을 활성화할 수도 있다고 본다. 1983년 이래, 미국영화협회(Motion Picture Association of America)는 마가렛 헤릭 도서관(Margaret Herrick Library)을 통해 2만여 점의 자체 검열 관련 서류들을 공개했는데, 이 자료들을 연구한 몇몇 학자들 역시, 자체 검열이 영화로 하여금 젠더와 폭력, 인종, 국적 등의 주제에 좀 더 세심하게 접근하도록 하며 미국 영화산업에 생산성을 더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한국영화 검열서류의 디지털 스캔본을 대량으로 공개한 영자원 한국영화 검열의 역사에도 이러한 측면이 나타날까? 영자원에서 1960~80년대 영화검열 당국(공보부, 문공부 등)이 작성한 행정서류들의 디지털 스캔본을 공개하면서 이에 관한 연구가 가능해졌다. 현재까지도 507편의 작품에 대한 서류가 온라인으로 게시되어있어 어디서든 확인할 수 있고, 영자원 내 영상도서관 멀티미디어석을 이용하면 온라인으로 노출되어있지 않은 4,000여 편에 달하는 작품에 관한 서류 스캔본을 열람할 수 있다. 국가가 직접 작성했던 방대한 규모의 행정서류를 공개하는 공공 필름 아카이브는 국내에서 이곳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이전까지 구술사나 신문기사 등의 2차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국내 검열사 연구자들이, 실존하는 1차 자료를 근거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영화는 물론 국내 문화예술 행정의 역사가 궁금한 연구자들이라면 이 검열서류 컬렉션 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 검열자외 피검열자의 관계, 그리고 <오발탄> 저서 Hollywood Diplomacy (2020)에 적었듯이, 중국의 영사(미국인)가 1933년 현지 영화계를 주제로 미국영화협회에 쓴 한 서신에서, 당시 중국의 영화들이 ‘ 승화(uplift) ’라는 기제를 영화에 어떻게 적용하는지가 나타난다. 영사에 따르면, 당국은 국가나 자국민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영화의 개봉을 검열로 통제했고, 대중에게 삶에 대한 낙천적인 의지를 주입하고 자국 문화에 성실히 적응하도록 하는 ‘승화’적 요소의 배치를 장려했다. 이 ‘승화’라는 개념은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이념과도 일맥상통한다. 당시 박정희는 이승만 집권기 동안 사회 전반에 번져버린 부패를, 전방위적인 개발을 통해 근면하게 척결해나가겠다는 정치적 목표를 내세웠다. 국민들의 ‘문화’ 역시 이를 바탕으로 형성되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그러지 못할 경우 나타나는 패배주의, 즉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어떠한 노력도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단정하는 나약한 관념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가 집권하던 시기에 이런 패배주의나 비관주의, 허무, 우울 등의 개념은 그야말로 ‘문화적인 적’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영화 속에서도 고된 여정을 지나 마침내 그 위기를 극복하는 인물형을 보여주면서 ‘승화’의 순기능을 강조해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맥락을 참고해서 < 오발탄 >(유현목, 1961)의 검열 과정을 이해해보자.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불순영화가 재검열되고 상영중지 처분이 내려졌다. 이때 상영이 중지된 국내 영화가 <오발탄>인데, 중지 처분의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극중 한 노파가 “가자!”라고 외치는 장면이 월북을 암시했고, 반공 기조가 심한 박정희 정권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점을 자주 거론한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서류를 보면 조금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당시 내무부 치안국이 검열 당국인 문교부에게, <오발탄>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한 선전 자료”라는 내용으로 심의를 의뢰한다며 보낸 공문을 보면, 작성일이 쿠데타 발생 전인 1961년 4월 19일이다. 1960년대 초, 문화 정책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중앙정보부가 영화검열에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위 서신에서 보듯이 이러한 타 부처의 간섭은 치안국 등이 검열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5·16 군사정변 이전부터 나타났다. 이어서 5월 28일에, 치안국은 문교부에게 <오발탄>을 둘러싼 여론을 홍보한다는 취지로 다시 공문을 보낸다. 이들이 문서에 적어둔 “부분적인 인상”에서, “기타 제대 군인, 실직자, 박봉 생활을 하는 소시민 빈민층의 절망만을 나열하여 결론적으로 아무런 해결의 암시도 없이 비참하게 끝을 맺는 점 등”이라는 표현이 두드러진다. 영화가 시대적 고난이 야기한 상황만을 강조해 승화의 의지를 불러일으키기는커녕 비관주의로 일관했다는 점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후 7월 20일 재검열을 거친 <오발탄>에 대해서는 결국 국내 상영 보류라는 결정이 내려진다. 중앙정보부 소속의 검열자가 작성한 의견서에도 “현 국가 재건 도상에 상반되는 내용”이라는 검열 이유가 적혀있어, 동 시기 건설적 미래에 대한 낙관적 희망을 가로막는다는 견해가 재검열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좌) 국산 영화 "오발탄" 심의 의뢰의 건(1961. 4. 19. / 발신: 치안국장, 수신: 문교부 문화국장), 그리고 한국영화 "오발탄"에 대한 여론 홍보(1961. 5. 28. / 발신: 치안국장, 수신: 문교부 문화국장) (우) 검열 의견서 (종합 재검열 분)(1962. 2. 6.) 검열이 검열자와 피검열자 간의 쌍방향적이고 미시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진행된 흔적도 엿볼 수 있다. 1963년, 제작자 김성춘 은 문제가 된 대사를 수정하고 혁명공약 일부를 마지막 크레딧에 명기했으며, 해당 작품은 본래 정부의 이념을 지지하려는 의도로 제작(주제의식이 ‘승화’임을 설득)되었기에 상영중지를 재고해달라는 진정서를 공보부에게 보냈다. 그러던 중 같은 해에,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의 영화학과 교수 리차드 맥캔(Richard Dyer McCann)이 국립영화제작소에 기술고문직을 수행하기 위해 방한했다. 그리고 그가 <오발탄>이 베니스영화제에까지 출품될 만한 수작이라고 평가하자, 영화계에는 작품 상영중지 해제를 요구하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좌) <오발탄> 제작자 김성춘이 중앙정보부장에게 보낸 진정서 (우) 리차드 맥캔 교수가 당시 공보부 공보국장 이성철에게 보낸 서신 이에 공보부는 대사와 화면 일부를 수정하는 조건으로 한 차례 상영보류 해제를 통고했지만 얼마 안가 시기상 상영이 적절치 못하다는 이유로 금세 결정을 번복했다. 그러자 김성춘은 본 작품이 제7회 샌프란시스코영화제로부터 출품 제의를 받았고 미국 엠지엠스튜디오도 수입 의사를 밝혀왔다며 재상영 허가를 다시 한 번 요청했고, 공보부는 다시 정식으로 상영보류 해제를 결정한다. 당시 공보부가 김성춘의 진정서 내용을 바탕으로 작품에 대한 리차드 맥캔의 평가와 해외 수출의 필요성을 적시해 중앙정보부와 내무부 모두에 공문을 배포한 것으로 보아, 검열 당국인 공보부가 작품의 수출과 홍보를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제작자의 협력자로도 기능했던 것으로 추측한다. 더군다나 외환위기가 심각했던 이 시기에 <오발탄>의 해외 수출 제의는 외화 보유액을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서 정부 차원에서도 반갑게 다가왔을 것이다.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1963. 8. 23. / 발신: 공보부, 수신: 중앙정보부 제5국장) 샛길 위에서 찾는 또 다른 목적지: 검열과 영화연구 한국영화 검열의 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미국에서는 국가나 민간 소유 아카이브에 대량으로 소장되어있는 각종 자료를 참고하곤 했지만, 내가 검열사 연구를 시작한 당시 아쉽게도 영자원을 제외한 국내 유관기관에 관련 1차 자료가 보존된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신문기사, 구술사, 시나리오 등 주제와 직결되지 않은 자료들을 참고하면서 연구의 근거를 색다른 결의 자료들로 보충하기도 했다. 제약으로 여겼던 환경에서, 조금 다른 경로이더라도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최선을 다함으로써 의외의 창작성을 발견한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연구 과정에서 얻게 된 이 깨달음이 검열의 일면과도 맞닿아있음을 느낀다. 여러분 역시 ‘제한’된 환경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면, 주변에 숨겨진 다른 선택지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또 다른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는 효능감을 느껴보길 바란다. * 질문과 답변 * (질문1) 서두에서 말씀하셨듯이 할리우드 키드이셨던 어린 시절을 지나 지금은 해외 영화학자의 길을 걷고 계신다. 영화팬이자 연구자로서 현 시점에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셨을 때 소회 가 어떠실지 궁금하다. (답변1) 최근 ‘한국문학과 영화 속의 여성’이라는 주제로 열린 학회에 갔다가 임순례 감독님께서 전해주신 말씀을 들었다. 본인도 OTT와 드라마 콘텐츠 진출을 앞둔 상황에서, 한국‘영화’의 위기는 어느 때보다 심각함을 강조하셨다. 임 감독님께서도 프랑스에서 영화를 공부하셨고 국내 영화문화의 발흥기에 시네필의 일원으로 활동하신 바 있다. 영화에 각별한 애정이 있으신 그 역시,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는 영화라는 매체의 위기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전해주신 것이다. 나 또한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했지만 지금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테두리에서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고, 동시대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연구한다면 OTT 등의 뉴미디어는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주제이다. 현재 미국 콘텐츠 산업 내 주요 기업들도, 영화와 드라마, 기타 뉴미디어 콘텐츠들을 수평적으로 통합해 기획 및 제작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영화를 별도로 분리해 고유한 예술성을 되새기려는 움직임이 유용할지에 대해서는 사실 조금 회의적이다. 넷플릭스가 IP를 보유하고 있는 국내 오리지널 시리즈 영화 제작이 좌절된 <오징어 게임>은 오히려 넷플릭스에서 시리즈로 공개되면서 큰 성공을 거뒀다. 이제는 영화도 동시대 뉴미디어 매체를 이용해 전 세계에서 감상할 수 있는 콘텐츠 중 하나로서, 특정 작품만의 브랜드를 확립하고 지속적으로 부가 가치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한국의 경우 이러한 변화가 넷플릭스를 중심으로 발생하면서 콘텐츠 제작을 위해 미국 자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보이는 것이 우려되기는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20세기 국내 관객에게는 할리우드가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발전을 거듭한 우리나라 콘텐츠가 이제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 여기에 계신 분들을 포함해, 앞으로 더 많은 젊은 세대가 이 기세를 이어받아 한국영화와 콘텐츠가 지닌 역량을 널리 알렸으면 한다. (질문2) 선생님께서 추구하시는 1차 자료 기반의 실증적 연구는 아카이브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인지, 아니면 실증적 연구가 먼저 이뤄졌기에 아카이브가 비로소 유지되고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것인지가 궁금하다. 선생님의 개인적인 의견을 듣고 싶다. (한국영상자료원 원장 김홍준) (답변2) 실험영화 위주의 영상자료를 보존하는 뉴욕의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Anthology Film Archive)에 가보면, 말씀하신 일기나 편지 등의 사소한 기록들이 무척이나 많이 소장되어있다. 국내에서도 영자원 외에, 이렇게 넓은 스펙트럼으로 방대한 자료를 관리하는 사설 아카이브가 더 많이 설립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규모로 축적된 서류들을 분류하고 보존할 수 있는 인력 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아직 여기에 대한 투자가 부족하다는 점이 안타깝다. 최근 문화예술 정책의 예산과 역량은 거의 한류 콘텐츠의 해외 홍보에만 집중되어있는데, 이중의 일부만이라도 문헌 보존에 투자되어 한국영화사 연구의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질문2에 대한 코멘트) 40년 전 미국에서 유학했던 경험을 돌이켜보면, 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영화 관련 도서들의 주제가 아주 실증적이었다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같은 시기에 이론 위주의 영화 도서가 많이 읽혔던 국내와 달리, 미국에서는 무성영화 시대의 배우나 시나리오 작가의 회고록 등 어떻게 보면 매우 사소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소재를 바탕으로 영화에 대한 논의를 이어간 것 같다. 오늘 전해주신 말씀을 참고하면, 이런 소재들이 연구되고 세상 밖으로 나와 이야기될 수 있었던 데는 아카이브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아카이브가 소장하고 있는 다채로운 1차 자료들을 토대로 작지만 새로운 영화학적 주제를 발굴 하고, 이와 연관된 다른 자료들도 살펴보면서 경험적인 연구를 진척한 후에야 이론이 성립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자원도 각기 다른 잠재력을 지닌 영상자료들의 소재를 빠르게 파악하고 수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자료의 원 소장자들(기증자 등)이 본인이 보유한 자료의 가치를 정확히 평가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다소 안타깝다. 예를 들어, 필름이나 동영상, 포스터 등은 영화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면서 ‘수집될 만한’ 가치를 지닌 자료로 인식되지만, 영화연구 세미나 도중 작성된 발제 자료, 영화인들이 주고받은 편지들의 중요성은 그에 비해 평가 절하되기 쉽다. 당장 눈에 띄지는 않더라도 영화사의 어느 한 순간을 간직한 채 향후 영화 연구자들의 자양분이 되어줄 1차 자료들은 형태와 관계없이 모두 소중하다 는 인식이 보다 많이 공유되었으면 좋겠다. (한국영상자료원 원장 김홍준) 김신재 배우가 박남옥 감독에게 보낸 성탄 카드(1989. 12. 6.)_이경주 기증 (편집자 삽입) *** 주1. 미셸 푸코(Michel Paul Foucault), The History of Sexuality: An Introduction , Vintage, 1990. 주2.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Language and Symbolic Power , Blackwell Publishers, 1992.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조금 식상한 표현이지만 영화제, 그리고 영화 시상식을 우리는 ‘영화인들의 축제’라고 부른다. 한 해 동안 좋은 작품을 만들어낸 감독, 스태프와 배우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영화팬들 또한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과 그에 참여한 배우, 스태프들이 상을 받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뻐하고, 영화에 깃든 자신만의 추억들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영화인 중 누군가가 “그저 상(賞)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라고 말한다면, 관객의 입장에서는 다소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상이라는 것은 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거나 예술성을 인정받은 작품에 대해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명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한때, 정말 ‘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심지어 이 상에 어마어마한 보상이 붙어있어서 영화사에는 회사의 존폐가, 감독에게는 차기작의 유무가 걸려있었고, 이로 인해 매년 이 상을 둘러싸고 갖은 암투와 비리들이 횡행하며 영화계에 온갖 잡음을 만들어냈다. 대종상 타면, 그 상 타는 데서 심사위원들한테 로비를 해서 해마다, 지금까지도, 문제가 있었지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영화계에 스캔들이 생기고 그렇지요. 또 유명한 사람들이 거의 심사위원 안 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뭐 예술회원, 유명한 작가, 다 거의 심사시켜야 된다 그래 갖고. 또 (로비 받은 게) 걸려서 망신을 당하기도 하고. 그런 추악한 일이 오랫동안 계속 돼…. - 호현찬 , 2004 영화평론가인 호현찬이 말하는 것처럼 최근에도 대종상에서는 수상작 선정 과정과 영화인들의 시상식 불참 등 해마다 논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지만, 1990년대 이전과 이후의 논란들은 성격이 많이 다르다. 여기서는 1980년대까지, 대종상 하나가 정말 중요했던 이유 와 그것이 불러일으킨 다양한 스캔들 에 집중할 것이다. 사실 1990년대와 그 이후 시기 대종상과 관련된 논란들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아주 쉽게, 그리고 정말 훌륭하게 정리된 글들이 많아서 굳이 영화인들의 입을 빌릴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에 비해, 궁금하고 흥미롭지 않은가? 기록도 많이 남아있지 않은 옛날 옛날에 대종상을 놓고 영화인들 간에 온갖 정치와 거래가 오갔다는데, 당사자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지만 이를 알아보려면 우선 우리가 당시 대종상과 영화산업의 성격에 대해 이해해야 하는 지점들이 있다. 조금 지루하겠지만, 이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간결하게 하고 넘어가겠다. 나라에서 주는 상 대종상은 공보부 주최로 1962년 3월 30일 국립극장에서 처음 개최되었다. 이날 행사에서는 작품상, 감독상, 남녀 주⋅조연상을 포함해 총 16개 부문에 대한 시상이 이루어졌다. 당시 대부분의 상을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에서 가져가면서, 신필름은 훌륭한 스태프들을 데리고 좋은 영화를 만드는 영화사로 명성을 굳혀갔다. 각종 신문과 잡지 기사에서도 이러한 신필름의 약진에 주목하는 한편, 처음으로 제정된 영화 시상식이 성공적으로 개최된 데에 대해 고무적인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62년 3월 30일에 열린 제1회 대종상 시상식 사진 하지만 이러한 찬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대종상 시상식에 대한 불만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 제2회 대종상부터였다. 영화평론가 이영일 은 대종상 심사위원 명단이 발표된 직후 신문 지면을 통해 대종상 심사위원들의 전문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버려야 할 전문가 기피증, 대종상 심사위 구성에 일언”, 《동아일보》, 1963. 2. 28. 6면 기사 *주1 ). 그렇지만 심사위원들의 교체 없이 제2회 대종상 시상식은 예정대로 3월 8일에 진행되었다. 그런데 대종상에 대한 논란은 시상식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 당시만 해도 대종상 시상과 더불어 해외영화제에 출품할 작품도 함께 선정했는데, 이게 영화제작자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제작가협회에서는 며칠 후 아시아영화제 출품작 선정에 대한 건의서를 공보부에 진정했다. 11일 저녁 6시에 모인 제작가협회 이사회에서는 공보부 당국에 대하여 아시아영화제 및 백림영화제 출품작품 선정을 재심해줄 것을 건의하기로 결의하였다.… 근본적인 저의는 이번 대종상심사와 영화제 출품선정의 결과에 대한 영화가의 비등한 반발 여론에 비추어 심사결과에 대한 불만불신의 표기로 짐작된다. 영화계 일부에서는 이번 심사를 ‘보이코트’하자는 여론도 높았으나, 재심으로 출품작품을 엄선하자는 결정에 이르렀다. - “아주영화제 출품작 재심 건의키로”, 《동아일보》, 1963. 3. 12. 6면 기사 이전 해 대종상 시상식에서 제기된 불만을 의식한 것인지, 공보부는 제3회 대종상 시상식을 앞두고 영화평론가와 연극영화과 교수 등을 심사위원단에 포함시켰고, *주2 해외영화제 출품작의 경우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추후에 별도 선정하는 것으로 방식을 변경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1964년 제3회 대종상부터 “우수영화를 장려하는 보상책”으로 대종상 수상작에 대해 ‘외화쿼터’를 지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외화쿼터 주어, 대종상시상식”, 《경향신문》, 1964. 3. 5. 8면 기사). 대종상은 (공보부) 영화과에서 맹글었어요, 우리가. … ‘우리나라 대표적인 영화제를 하나 맹글자, 영화상을’ 그래서 ‘상의 이름을 뭘루 허느냐?’ 게 생각허다가 ‘대종상으로 허자’ 이렇게 된 거예요. (우수영화) 장려를 말로만 허믄 또 시비가 되니까, 실제적인 실리를 주는 방향으로 허자. 그게 뭐냐? 쿼터. 우수헌 영화 장려하는 방법으로 쿼터를… 뭐 이렇게 된 거죠. - 이성철, 2009, 309~310쪽 1961년부터 공보부 공보국 영화과장으로 일했던 이성철은 대종상을 만들게 된 배경에 덧붙여, 우수영화 제작 장려 및 그 보상의 일환으로 ‘쿼터’가 주어지게 된 과정에 대해 언급했다. 아무래도 ‘상(賞)’이니까, 무언가 그에 맞는 적절한 혜택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일종의 보상으로서 주어진 것이 다른 것도 아니고 ‘쿼터’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쿼터란 국가에서 배정해주는 외국영화 수입 권한을 뜻한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갈등의 씨앗은 바로 이 ‘외화쿼터’로부터 나온다. 외화쿼터라는 것은 왜 그렇게 영화인들에게 중요한 것이었을까? ‘억’ 소리 나는 쿼터의 가치 1963년 1차 영화법 개정 이후 영화제작사와 외화수입업을 일원화시키는 동시에 이들 영화사의 수는 국가에서 등록제를 통해 조절하고 있었다(영화업 등록제는 1973년 제4차 영화법 개정으로 허가제로 바뀌며, 기존 20개사에서 거의 절반 수준인 12개로 줄어든다). 매 시기 영화법 시행령에 따라 허가된 영화사의 수나 외화수입쿼터의 수가 늘었다 줄었다 하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영화산업은 소수의 영화사들이 제한된 ‘쿼터’ 숫자를 놓고 경쟁하는 독과점 체제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외국영화 수입편수 및 상영편수(1964~1985) 위의 표를 보면, 그래도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까지는 1년에 50~70편 정도의 외국영화가 배정⋅수입되었다(쿼터 수와 실제 검열을 받은 영화의 수가 다른 이유는 이전 해의 쿼터의 ‘이월’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표]에서 상영편수가 실제 수입편수보다 많은데, 이는 전 해에 수입되었지만 상영되지 못한 영화가 개봉하거나, 인기 있는 영화를 재상영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 이후 수입추천(외화쿼터) 수가 줄면서, 외국영화의 수입이나 상영이 급격히 감소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외화쿼터를 둘러싼 각종 문제 역시 197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 더 심각해진다. 그때는 외화를 들여오면 1년에 20~25편이야. 그러니까 외국영화를 보려고 하면 하여튼 1년에 고것밖에 못 봐. 다른 작품은 들여오지를 못하니까. 그러니까 아주 그건 정말 커다란 특혜지, 그냥. 그 대신에 쿼터를 어떻게 해서 얻느냐. 1년에 4작품을 해야 돼. 그래야 인정을 받아, 영화사 영업하는 걸. 그러고 저 우수작품 뭐, 대종상 에서 상을 탔다든지, 뭐 아세아영화제 이런 외국 가서 (상을) 탔다든지 그러면 쿼터 하나씩 나왔다고. … 또 뭐 반공영화를 만들면은 좀 점수를 줬고. … 그렇게 하고 인제 수출을 많이 해서 실적을 올려서 (쿼터를) 타는 수가 있고. 여러 가지 정책이 그렇게 돼 있었지. - 강범구 , 2011 , 268쪽 외국영화도 상을 타면 쿼터 하나. 근데 쿼터 값이 얼마냐면, 국산영화 한 편 제작하는데 700만 원 내지 800만 원인데, 쿼터 하나 값이 1,500만 원이었어 , 외화 들여오는 거. - 최경옥 , 2008, 143쪽 그게 내가 파라마운트(극장)에 있을 당시니까, 66년도부터 72년도까지 있었거든요? 나도 거기서 외화를 우리 사장님이 쿼타를 사오고 팔고 해가지고, 나도 그때 쿼타를 사가지고 네 편을 수입해 봤거든요. 쿼타를 사고 팔고 했지, 그때는. (쿼터 하나에) 천만 원 했나? 그거 하나 있음으로 해서 내가 수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거니까. {그때 개봉관이 60원 정도할 때} 맞어, 60원. {그럼 억 단위네요, 지금은?} 크지. 그 당시에 60원 하면 요즘은 (입장료가) 6천 원이니까, 100배인가? 10억인가, 지금 돈으로? - 김성근 , 2010, 122~123쪽 그 대종상에서 작품상 타면 외화수입쿼터 하나 준 거야, 그냥. 그 외화쿼터 하나, 수입권을 얻으면 요새 가치로 봐서 약 한 50억 돼, 50억. 가서 외국영화 하나 괜찮은 거, 외국영화 수입을 무제한 개방해 놓은 게 아니고 1년에 20편, 24편 내외 수입쿼터로 맨들어 놨기 때문에, 우리나라 들어오면 그냥 어떤 거든지 그건 (관객이) 30~40만 들어간다니까? 음, 그러니깐 외국 나가서 한 10억 주고, 판권 10억 주고 외국영화 하나 사왔다 이거야. 근데 이게 여기서 100억이 되니 이게 얼마나 되냐, 돈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라, 황금알 채 생긴 거위야. 그래서 그냥 서로가 별짓을 다하고, 인제 사회상은 그랬어요. - 김영효 , 2013, 430~431쪽 위의 구술도 대체로 이 시기의 상황들을 설명하고 있다. 김영효 감독의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외화는 일단 상영을 하면 그게 어떤 영화든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30~40만의 관객들을 끌어올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영화사들은 위험성이 큰 한국영화 제작보다 외국영화 수입⋅상영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최소의 비용만을 가지고 한국영화를 제작하고, 이를 통해 획득한 외화쿼터를 가지고 외국영화를 수입해서 상영하거나, 아니면 그 쿼터 자체를 팔아서 이득을 챙기자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강범구 감독의 구술에서 이 외화쿼터 획득 방법이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각 회사들은 할당된 한국영화 제작 편수를 채우거나, 우수영화로 선정되거나, 대종상을 수상하거나(시기에 따라 걸린 상의 개수가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최우수작품상, 우수반공영화상을 수상하면 1편씩 쿼터가 지급됨), 해외 수출 실적이 있거나, 해외영화제에서 상을 받거나 하는 방법으로 외화쿼터를 하나씩 얻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1년 동안 영화사들은 최소한의 예산을 가지고 4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한다(제작권도 쿼터가 있어서, 이 숫자도 매해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 4편의 영화에는 우수(반공)영화 또는 대종상용 영화 1편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외화쿼터 외에도 추가로 1편의 외화쿼터를 더 얻을 수 있다. 1960년대부터 신필름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구술자 최경옥의 말에 따르면, 한국영화 1편 제작에 7~800만 원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4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하고도 이익을 남기려면 외화쿼터 2개는 필수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김영효 감독이나 외화수입사와 극장에서 일했던 김성근의 구술을 보면 그냥 외화쿼터를 팔았을 때는 오늘날 물가로 약 10억 원의 가치가, 직접 외화를 수입해서 상영했을 때는 적어도 50억 원의 이익이 보장되었다(심지어 이 역시 10년 전 물가를 기준한 것으로, 2024년의 물가를 반영하면 더 큰 금액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은 최소 10~50억의 가치를 갖고 있었고, 수입해온 외화가 흥행에 성공하게 되면 김영효 감독의 말처럼 100억 이상의 가치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니 ‘대종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는 말이 나올만 했다. 대종상을 잡아라!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대종상을 둘러싸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영화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먼저 로비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대종상이 문제가 된 것은, 70년대 중반 이후부터예요. 형식은 이런 겁니다. 심사위원을 누가 맡았다 하면은, 그 심사위원 중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을 로비대상으로 정해 만나는 거예요 . 가령 당시 심사위원 가운데 소설가가 있다면 ‘작가의 원작을 영화화 하겠다’ 이런 식으로 접근합니다. 그래서 영화화하기 어려운 소재라도 원작료를 주고 입수하는 거예요. 그거 안 받을 수 있어요? 명분이 있는데. 그게 시가(市價)보다 많아요. 그런 식으로 로비를 합니다. 그 당시 Y 모라는 유명한 심사위원이 있었습니다. 각계에 문어발식으로 관계했던 문화계의 마당발이었죠. 이런 사람들은 A영화상, B영화상 다 해요. 그럼 A영화상에서 로비 받아가지고 안 된 경우가 있어요. 로빈 받았지만 작품이 밀리니까. 그러면 B영화상 시상식 때 그것을 갚아요. 그럼 이쪽에선 불만이죠. 저쪽은 쿼터가 걸려 있고, 이쪽은 상금이 없다 보니까. 이런 식이에요. - 김종원 , 2008, 355쪽 누구한테 욕먹을 소리겠지만은, 대한민국 영화 대종상은 절대 정상으로 한 영화가 없어. 보믄 뒷거래가 다 있어. …내 누구라고 얘긴 하지 않지만은 대종상 시상날이야. 근데 인제 그날 6시부터, 6시 반부터 시상식을 하는데, 그날 최우수작품을 갖다 결정하는 날이 그때가 5시 반쯤 될 때, 막 거기서 회의를 하는데, 그 안에서 인제 투표를 허는 거야. 하기 직전에 누가 문을 탁 여는 거야. 문을 탁 열어가지고 “어이구, 죄송합니다. 이거 미안합니다.” 문을 닫은 거야, 그 사람이, 응? 그 사람은 왜 그거 문을 열었겠느냐? 자기가 만난 사람들 있잖아. 자기가 만난 사람들이 자길 잊을 수도 있잖어? 그니까 도장 찍을라고 문을 연 거야, 일부러. 그러구선 모르는 척하고 “어구, 이거 잘못 찾았습니다.” 문을 탁 닫은 거야. 그러니 그 만났던 사람들은 소름이 끼칠 거 아니야. 잘못했다간 나중에 탈이 날 거 아니야. 그 < 경찰관 >(이두용, 1978)이라는 영화가 있었어, 합동영화사. 그러구 우성영화사에서 < 세종대왕 >(최인현, 1978)이란 영화를 맨들었어. 막말로 대한민국 사람들 다 갖다 보여줘서, “이 영화가 좋으냐, 저 영화가 좋으냐?” 할 때 영화적으로 좋은 건<세종대왕>이 좋대는 건 다 인정될 거야. 돈도 많이 들었고. 그런 영화가 결과적으로 6:5로 졌어. … 쿼터가 걸린 데는 쫙 시커먼 게 쫓아댕겼으니까, 그때. - 양춘 , 2009, 210~211쪽 (상) 제17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경찰관> (하) 남녀조연상⋅미술상을 받은 <세종대왕> 위 구술에 등장하는 <세종대왕>은 우성영화사에서 말 그대로 ‘대종상을 노리고 만든’ 제작비 2억 5천여만 원에, 등장 인원만 16,000명이 동원된 대작 사극이다. 거기에다 교육성을 강조하기 위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로부터 자료제공과 협찬을 받는 한편, 역사학자 10명의 고증⋅감수를 받았다. 그러나 흥행업자들로부터 영화적 재미가 없는 ‘교과서영화’라는 평가를 받고 외면당해, 완성한 지 4년이나 지난 1982년 3월 5일 대한극장 에서 개봉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열심히 구애를 했으나 대종상에 외면당하고, 심지어 극장과 관객에게까지 버림받은 비운의 대작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영화제작자 양춘의 구술에서 언급된 합동영화사는 대종상 스캔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 중 하나이다. 특히 우성사와 합동영화사의 대종상 경쟁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더 앞서 이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에 대해 들어보자. 최훈 감독이 감독한 그걸 골랐는데, 얘길 들어보니깐 얘기가 쪼금 낯익은 것 같기고 해서 시나리오를 봤더니 시나리오가 표절이라. 그래서 이걸 좋은 영화로 만들 순 있지만 소위 대종상이나 우수영화로 내놓기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세 번인가를 뜯어 고쳤어, 시나리오를. 그걸 뜯어 고쳐가지고 < 수선화 >(최훈, 1973)로 결정을 졌어. 그 최훈 감독이 대종상을 한 번도 못했잖아요. 그래서 후보작을 고르자 그래서 최훈 감독을 줬고,또 출연자들도 좀 그렇게 대종상의 혜택을 볼 수 있는 사람을 고르자 그래서 장동휘 씨 뭐 이래 가지고 배역진을 골라가지고 시작을 했고. … {그런데 이게 감독상하고 몇 가지 상을 받기는 했는데, 작품상은 못 받았더라고요} 작품상은 아마 < 비련의 벙어리 삼용 >(변장호, 1973)이 받았나? - 박행철 , 2014 , 295~297쪽 그다음에 <비련의 벙어리 삼용>을 우성영화사에서 했더니… 아침에 사장한테 대종상에서 11개 부문이 상이라고 연락을 받았어요. 근데 그때 대종상에는 쿼터가 붙어 있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나오니까 김용덕 씨가 나한테 뭐라고 그러냐면 “밤에 대가릴 짤라 갔어요.” “그게 무신 소리요?” 그랬더니, 최우수작품상에만 쿼터가 붙어 있는데 나머진 다 놔두고 최우수작품상만 딴 데로 돌렸다 이거야. “그럼 어떻게 된 거요?” 그랬더니, 합동영화사에서 만든 < 홍의장군 >(이두용, 1973)이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태권도영홥니다. 그게 대종상 작품상 탈 영화가 못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엊그저께 새로 들어온 제작자가 11개 부문에 대종상을 휩쓸어 버리면 우린 뭐냐! 이거 우리를 아주 그냥 밟어 버리는 거 아니냐!” 굵직굵직한 회사 다섯 사람이 안기부국장을 만나자고 그래서, “이건 말이 안된다. <벙어리 삼룡> *주3 은 포르노영화다” (웃음) 그때 국시가 ‘자국안보’ 이런 거였어요. 그럼 “대통령의 뜻을 따르려면 <홍의장군>이 상을 타야지, 어떻게 포르노영화 상을 주느냐.” 국장이 어떨결에 “<홍의장군>이 타야지.” 그래서, 그때 문공부에서 주관을 했으니까, 상당한 돈도 오고 갔대요. 그러니까 밤에 소집을 했어, 심사위원들. “다시 심사해라. 국책영화에다 상을 줘야지 말이 되냐?” 그래서 심사위원들이 다시 투표를 해서 작품상을 <홍의장군>으로 바꿔쳤어요. 그러니깐 영화계가 “말이 되냐, 어떻게 <홍의장군>이 작품상이냐?” 그리고 심사위원들이 “우리는 <홍의장군>을 뽑은 일이 없다. 안기부가 동원을 했다” 막 시끄러워지니까 문공부도 골 아파지고. 이걸 수습할라고 그러는데 여론이 워낙 나빠지니까. 그래서 그러면 <벙어리 삼룡>도 쿼터를 하나 더 주자. 그래서 우수작품상까지 쿼터를 타 먹었어요. - 변장호 , 2016, 122~123쪽 <수선화>(좌)와 <비련의 벙어리 삼용>(우)은 모두 우성영화사 작품으로 제12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수선화>는 감독상⋅각본상⋅편집상⋅녹음상을, <비련의 벙어리 삼용>은 우수작품상⋅촬영상⋅여우주연상⋅여우조연상⋅음악상⋅미술상⋅조명상을 수상해, 총 11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영화제작자 박행철은 1970년대 우성사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하며 <수선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대종상을 노리고 기획된 것으로, 사실 일본영화 < 24개의 눈동자 >(기노시타 게이스케, 1954) 시나리오를 각색한 것이었다. 그러나 표절작은 대종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원작과 차이를 만들기 위해 세 번의 시나리오 수정을 거쳤다. 그리고 아직까지 대종상을 받지 못한 뉴 페이스 최훈 감독에게 기회를 주고, 캐스팅은 ‘대종상이 사랑하는’ 배우들로 뽑았다. 그 결과 <수선화>는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녹음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작품상은 받지 못했다. 박행철은 자신이 작품상을 <비련의 벙어리 삼용>에게 빼앗겼다고 기억했다(<비련의 벙어리 삼용>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같은 우성사 작품이다). 하지만 박행철의 기억과는 다르게 <비련의 벙어리 삼용> 역시 작품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최우수작품상은 합동영화사에서 제작한 <홍의장군>에게 돌아갔다(변장호 감독은 <홍의장군>을 태권도영화라고 표현했지만, 이 영화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활약상을 다룬 대작 사극영화이다). 변장호 감독의 구술은 한 줄 한 줄이 정말 흥미로운데, 무엇보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합동영화사 곽정환 사장을 비롯한 ‘친구들’이 달려가서 “엊그제 새로 들어온 제작자가 11개 부문의 상을 휩쓸어” 버리는 것에 대해 항의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1973년 제4차 영화법 개정 후, 한국영화제작업은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변경되면서 기존 영화사의 몇몇이 정리되고, 소수의 신생 회사들이 새롭게 인정받았다. 이중에서도 우성사는 가장 그 설립 시기가 늦었는데, 이를 가지고 기존 영화사 대표들이 몰려가서 텃새를 부렸다는 것이다. 이 ‘텃새’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구술자가 들려준 다른 내용의 구술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것이라 변장호 감독의 기억이 완전 거짓이나 과장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아무튼 변장호 감독 구술에 따르면 이 이야기의 결말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홍의장군>이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데 대해 온 영화계가 반발하였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우수작품상인 <비련의 벙어리 삼용>에게도 쿼터 하나가 주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대종상에는 최우수작품상 외에도 쿼터가 주어지는 부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우수반공영화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워낙 이 부문도 경쟁이 심했기 때문에 영화제작자들은 머리를 잘 써야 했다. 각 영화사의 라인업을 들여다보면 일반적으로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을 만한 작품으로 문예영화(문학작품을 각색한 영화), 예산이 많이 들어간 대작 역사영화, 새마을운동을 강조한 휴먼 드라마류의 영화들을 한두 편 제작하고, 우수반공영화상을 노린 전쟁액션영화나 첩보영화(이는 007 유행의 영향도 있었다)를 한 편 정도 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앙정보부가 아주 막강한, 영화계에 못된 행세를 한 거지. 대종상에도 관여를 해가지고 뭐 뒤에서 압력해서 “이것 줘라” 이런 정도까지. 중앙정보부에서 파견 나온 사람이 영화계를 좌지우지 했다고 해도 맞는 정도로. … {그 압박 수단은 주로 검열…} 그렇죠. 검열 가지고 하는 거죠. 그때는 검열해서 우수영화, 좋은 영화, 또 외국 나가서 상을 타고 그러면 외국영화 쿼터를 하나씩 주고 그러니깐 그 사람들이 입김이 굉장히 셌다고 봐야죠. … < 지옥의 49일 >(이두용, 1979)이라는 이두용 감독의 울릉도 가서 찍은 영화가 있어요. 근데 그게 사실은 우수영화가 될 정도가 아닌데, 그게 반공영화라는 걸로 해가지고 그걸 압력을 좀 넣었다든지 뭐 어떻게 해가지고, 심사위원들한테 금일봉식으로 이렇게 나눠주고 어떻게 해가지고 그게 상을 탄 적도 있고 뭐 그런 예가 있어요. … 그렇게 하는 이유가 그 상을 타기 위해서 반공영화를 한 거죠, 그 당시에는. 그러고 이제 암암리에 “반공영화 좀 하나 해” {우수영화 타기 위해서?} 어어.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게 사실이에요. - 주종호 , 2017, 156~157쪽 < 땅울림 >(설태호, 1980)은, 대종상에서 다 휩쓸 줄 알았어요. 어떻게 됐어? 심사하는데 대종상에서, 박암 만 조연상 탁 타버렸어. 그리고 또 뭐 하나 타고 그랬어. 그러구 이 양반이 화가 났어요. 중앙극장 사장이거든? 그래서 중앙극장에서 약간 (상영)한 것 같아요. 근데 손님들이 잘 안 들지만, 군에서는 괜찮았어요. … 우리 대종상 못 탔잖아요? 다 되는 걸로 알았거든요? 근데 안됐어요. 근데 누가 됐는가 하면, 임권택 이 한 < 짝코 >(임권택, 1980) 있지요? <짝코>가 당선된 작품이에요. 그래가지고 거기서 이제 작품상 탔어요. … {결국에 제작자는 쿼터 받아서 외화 수입하고자 하는 마음이 좀} 음, 그게 앞서는 거예요. 다! 그땐 다 그랬어요. 경제적으로 {수지를 맞추려면} 그렇죠,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데요. - 설태호 , 2010, 251~260쪽 <땅울림>은 제19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우수반공영화상을 노리고 있었지만, 남우조연상 하나를 받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설태호 감독의 <땅울림>은 대영영화사(영화사 대표 김인동 은 중앙극장을 운영했다)에서 국방부의 후원을 받아 제작된 군민 합작영화로, 제작 기간만 1년이 걸린 대작영화였다. 국방부로부터 제작비 일부와 각종 무기, 탱크, 전차, 화약 등을 지원받아 영화의 스케일도 크고, 총격⋅폭파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비슷한 시기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 < 인천(오! 인천) >보다 볼 만하다!). 그러나 그 경쟁 상대가 <짝코>라니. 그저 운이 없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지만, 엄청난 제작비와 시간을 들인 대영영화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아쉬운 결과였을 것이다. 이렇듯 모두가 당시 상황 속에서 자신은 억울하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본인이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서는 ‘나의 상’을 빼앗는 가해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내가 대종상을 받을 때는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이지만, 상을 겨냥해 만든 작품이 막상 그 상을 받지 못했을 때는 빼앗긴 것으로 표현되는 이들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흥미진진하다. 그래서 사실 누가 상을 빼앗았고, 어떻게 상을 빼앗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오늘날의 시점에서 당시 대종상을 둘러싼 구술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던 이들이 느꼈던 자괴감과 그 자괴감을 뚫고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그것을 모종의 암투로 인해 타인에게 빼앗겼을 때 느꼈을 좌절감 또는 그래도 ‘상을 받을 만큼의 작품을 만들었다’라는 자부심 사이에서 요동치는 이들의 양가적인 감정과 그 기억 속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우리가 이 시기 한국영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의 문제로 연결될 것이라 생각한다. *** 주1. 이영일의 해당 기사가 게재되기 전에 공개된 제2회 대종상 심사위원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강영수(대한일보 주필), 유건호(조선일보 편집국장), 이진섭(시나리오작가), 유석진(의사), 최정희(작가), 김대현(작곡가), 남홍우(교수), 심태진(명성여중고 교장), 김정환(미술가), 신용성(경향신문 사회부장), 이용상(공보부 공보국장). 주2. 제3회 대종상 심사위원은 다음과 같다. 정충량(평론가), 유건호(언론인), 여석기(고려대 교수), 이청기(영화평론가), 김붕구(서울 문리대 교수), 양광남(중앙대 영화연극과 주임), 박권상(언론인), 이진섭(시나리오작가), 이순근(교육평론가), 김진환(공보부 공보국장 서리), 강영수(언론인). 심사방식도 완전합의제로 변경되었으며, 기준 또한 이전보다 분명해졌는데 "①자기 목소리로 녹음하지 않은 연기 ②‘오리지널’이 아닌 음악 ③표절작품"은 수상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했다. ("6일에 대종상시상식", 《조선일보》, 1964. 3. 5. 5면 기사; "제3회 대종상 수상자 결정", 《동아일보》, 1964. 3. 7. 5면 기사 참조.) 주3. <비련의 벙어리 삼용>(변장호, 1973)을 의미한다. ※ 인용 구술 목록 한국영상자료원, 「호현찬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이채, 2005. 신필름채록연구팀, 『2008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신필름1: 최경옥⋅박행철⋅최승민⋅김갑의』, 한국영상자료원, 2008. 신필름채록연구팀, 『2008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신필름2: 임원식⋅이형표⋅이상현⋅김종원』, 한국영상자료원, 2008. 공영민, 『2009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4권: 양춘』, 한국영상자료원, 2009. 공영민, 『2009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5권: 이성철』, 한국영상자료원, 2009. 권용숙, 『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김성근』, 한국영상자료원, 2010. 김승경, 『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5권: 설태호』, 한국영상자료원, 2010. 권용숙, 『2011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강범구』, 한국영상자료원, 2011. 김승경, 『2013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김영효』, 한국영상자료원, 2013. 김승경, 『2014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2권: 박행철』, 한국영상자료원, 2014. 이정아, 『2016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5권: 변장호』, 한국영상자료원, 2016. 공영민⋅송영애, 『2017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70년대 한국영화계의 변동: 조관희⋅주종호』, 한국영상자료원, 2017.
최근 뉴스영화와 문화영화를 중심으로 비극영화(非劇映畫) 연구가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데에는 해방 후의 문화공보선전에 관한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역시 구술사 프로젝트와 수집⋅발굴 활동을 통해 꾸준히 비극영화(非劇映畫)에 관한 연구 결과물을 내놓고 있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발간된 구술 편집본 『한국영화사 구술총서』 시리즈를 비롯해 2008년부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와 『한국영화사 구출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그리고 험프리 렌지(Humphrey W. Leynse)의 문화영화 컬렉션과 시어도어 R. 코넌트(Theodore Richards Conant)의 문화영화 컬렉션과 수집자료 해제 『이방인이 기록한 전후 한국, 영화: 시어도어 코넌트 컬렉션』 등이 소위 비극영화에 해당하는 다양한 영화인들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 그 중 2006년 구술을 진행한 양종해(梁宗海, 1929~2009)는 문화영화 감독으로는 첫 번째 구술자로 선정되어 이후 문화영화 구술을 설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60년 <발전은 협력으로>로 아시아영화제 비극영화 부문에서 한국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수상하며 1950~1960년대 국립영화제작소의 대표적인 문화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1971년 국립영화제작소를 퇴사한 후에는 서울문화프로모션을 설립해 다수의 문화영화와 광고영화를 제작했다. 양종해 감독의 구술이 문화영화 조사⋅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 데에는 그가 국립영화제작소를 대표하는 감독이기도 했지만 국립영화제작소의 설립과 문화영화의 제작 배경을 보다 면밀히 살펴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사례들을 제시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그의 구술을 바탕으로 국립영화제작소와 대한원조의 상관관계를 살펴 볼 것이다. [사진 1] 국립영화제작소 건물 공보실 영화과와 대한영화사 1955년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신태양사(新太陽社)에서 기자로 취직한 양종해는 대학 시절부터 관심 있던 영화 일을 하고 싶어 안양촬영소 설립을 기획 중이던 수도영화주식회사 사장 홍찬을 찾아간다. 당시 안양촬영소 설립을 통해 한국의 할리우드를 꿈꾸던 홍찬은 양종해에게 영어를 공부해서 다시 찾아올 것을 조언한다. 안양촬영소의 개소를 기다리며 서울대학교 어학원에서 영어를 공부하던 양종해는 1956년 우연히 공보실 공무원 채용 소식을 듣고 응시하여 합격한다. 공보실 영화과에 입사한 그에게 주어진 첫 업무는 영화과 업무의 통과의례나 마찬가지인 <대한뉴스>의 기획이었다. “테레비(television)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때”여서 “노상 청탁이 올” 정도로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대한뉴스>를 담당하게 된 그는 공보실 영화과 대한영화사에서 녹음과 현상, 편집 등의 후반작업을 “곁눈질로 배우며” 습득했다. "그 당시는 나이 들은 오래된 사람들이 있었지. 그 사람들한테 배운 거지, 곁눈질로. 기술진은, 그때 영화관데 영화과의 방계(傍系)회사가 대한영화사라는 방계회사가 있었어. 기술진 다 거기 속해 있는 거야. 왜 그러냐 하면 영화과의 공무원 직급 가지고는 이 사람들 월급을 줄 수 없어. 그리고 직급이 없잖아. 녹음 기사라는 직급이 없으니까 그렇게 대한영화사라는 방계회사를 만들어가지고 거기 다 있어가지고. …… 영화제작소 생기기 전에는 대한영화사에 다 있었어. 그 안에 있었어. 그 후에 영화제작소가 생겨나서 이건 없어진 거지." 1 양종해의 구술은 1950년대 중반 당시 공보실 영화과와 대한영화사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공보실 영화과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11월 설치되었는데 미군정청 공보국 영화과가 담당했던 행정업무를 이어받았다. 전쟁 전까지 공보실 영화과의 주요업무는 검열과 극장에 관한 정책수립과 이행이었다. 공보실 영화과는 한국전쟁 시기까지 부족한 기재와 인력으로 인해 사실상 영화제작을 통한 교육⋅선전을 수행했다기보다는 외국영화의 극장 상영을 중심으로 하는 행정 업무를 진행했다고 볼 수 있다. 공보실 영화과가 영화제작을 중심에 둘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당시 한정된 영화 인력들이 공보실뿐만 아니라 미공보원, 미502부대, 육군, 해군, 공군 등에 설치된 영화과 또는 영화촬영대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중복⋅관련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때문에 1949년 영화과 산하에 영화제작 업무를 담당하는 대한영화사가 설치되었지만 이곳에서 실질적인 제작 업무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휴전 후인 1953년 이후로 볼 수 있다. 공보실 영화과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인 부산에서 월 2~3회 <대한뉴스>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환도 후에는 미공보원과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 이하 UNKRA) 영화과에 재직했던 이형표를 사무장으로 촉탁하고, 박희영, 유장산(촬영), 김흥만(편집), 이경순(녹음) 등의 영화 인력들을 영입해 대한영화사를 재정비했다. [사진 2] 이형표 감독 1950년대 중반 <춘향전>(이규환, 1955)과 <자유부인>(한형모, 1956)의 흥행 성공으로 한국영화 제작 열기가 일어나기 전까지 공보실 영화과는 극영화의 인력을 활용하여 문화영화를 기획⋅제작했다. 이 시기 극영화 인력과 결합해 제작한 대표적인 영화로는, 한형모⋅이성휘 촬영의 한국 홍보 기록영화 <한국의 시각(Korean Perspective)>(이형표, 1953~1954)과 전창근 감독, 한형모 촬영, 나애심 주연의 극영화 <불사조의 언덕>(1955) 등을 들 수 있다.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 제작이 보다 더 활발해진 이후에도 대한영화사는 반관반민의 성격을 유지하며 공보실 영화과의 뉴스⋅문화영화 제작소의 역할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한국 극영화 후반 작업을 수행하는 포스트프로덕션의 역할을 했다. [사진 3] 영화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 촬영 현장 대한원조로 이루어진 국립영화제작소 설치 1958년 공보실 영화과에 미국의 원조가 이루어지며 양종해는 본격적인 문화영화 감독으로서 활동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때는 영화과고. 나중에 어떻게 됐냐면 이 영화과가 그때 미국이 전쟁복구 원조를 많이 했다고. 미국 원조기관이 크게 있었어. 운크라(UNKRA, 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국제연합한국재건단)도 있고, 거기에서 우리나라 영상 관계의 진흥을 위해서 120만 불이면 큰 돈이야.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도 그래 이제 문교부하고 우리 공보처하고 서로 가져갈라고 싸움이 붙은 거야. 결국 공보처가 이겨가지고 우리한테 온 거야. 그래 오니까 엄청난 큰 돈이거든. 그때 영화제작소를 짓고 거기서 뭣이 왔는고 하면 우리 교육 시켜주는 미국 시라큐스대학에서 왔어. 거기서 뭐 하여간 일곱 명이 왔어. 제일 책임자가 매카론(James W. McCaron). 그리고 또 연출하는 사람이 있었어, 메이브리(Mably)라고." 2 [사진 4] 국립영화제작소의 전경(출처: e영상역사관) 양종해의 이 간략한 설명에는 1950년대 후반 공보실 영화과에 이루어진 대한원조의 세부 내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대한원조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국립영화제작소의 설립과 전문 인력을 투입한 교육이 그것이다. 공보실 영화과는 대한원조의 카운터파트로서 원조정책 홍보와 교육계몽을 위해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상영했다. "변화가 많았지. 우선 시설이 동시녹음 스튜디오가 생기고, 칼라 현상을 하고, 기자재가 많이 들어오고 사람들도 뭐 한 열댓 명이 더 늘어서 120명 정도 늘어나고 공채를 하고 그런 식으로 외적으로 변화가 많았고, 내적으론 영화는 우리나라 별로 예산이 많지 않아 가지고 많이 못 만드는데, 미 원조기관에서 몇 십 편 만들었잖아. 그래서 바빴고, 농촌 순회하는 것도 그때 생긴 거고." 3 양종해가 설명하는 것처럼 <대한뉴스> 제작을 제외하면 극영화의 포스트프로덕션 역할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던 공보실 영화과는 원조를 통해 큰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원조는 공보실 영화과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산업이 변화하는 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대외원조의 결과로 영화 인력의 이동이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영화에 대한 미국과 UN의 대한원조는 직접적인 재원 원조(UNKRA, ICA), 전문 인력의 파견과 연수(ICA, OEC), 시설과 기재 원조(UNKRA, 아시아재단) 등 여러 기관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원조의 직접적인 수혜대상이 공적기관인 공보실 영화과가 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경우에 따라서 공보실 영화과는 이러한 원조를 연결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1958년 “현대식 영화제작 시설이자 시청각에 의한 매스컴의 총아로써 영화가 지닌 사명을 다하는” 4 영화제작소의 완성을 앞두고 공보실과 OEC는 이 시설의 향후 운영과 활용을 위해 시라큐스 계약 교육진을 투입하고, 연출, 촬영, 미술 등 영화제작 각 분야의 신진인력을 공채 모집했다.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해 USIS 출신의 인력을 일부 흡수했다. 이러한 과정은 1958년부터 급증한 한국영화 제작 편수로 알 수 있는 한국영화의 성장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 부분으로서, 이 과정 자체가 기존의 반관반민의 성격을 갖고 있던 한국영화가 상업 극영화와 비극영화로 분명하게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 기존의 영화 인력들인 이형표(신필름), 이경순, 손인호(안양촬영소→한양녹음실)를 비롯한 상당수의 인력이 극영화로 이동하고, 그 자리에 신진 인력이 충원됨에 따라 공보실 영화과의 세대교체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1958년을 전후로 충원된 영화과의 인력은 USIS에서 이동한 배석인(연출), 정윤주, 백명제(이상 음악), 김형중(기술, 녹음‧현상), 김영권(아나운서, 행정), 정도빈(작화), 공채로 입사한 양종해, 김행오, 임학송, 한호기, 나한태, 강대철, 황왕수(이상 연출), 한규설(촬영), 박영일, 김인태, 봉상균(미술), 이은덕, 강신규, 이재웅(이상 녹음), 배동순(연출/행정) 등이다. [사진 5] 국립영화제작소의 인력들 시라큐스 계약의 영화교육 영화과의 기존 인력들은 교육영화보다는 뉴스영화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고, 문화영화 연출 경험이 있는 감독도 양종해, 배석인 등 소수에 불과했다. 이들이 제작한 문화영화도 실상은 <대한뉴스>의 특별판인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시라큐스 계약의 영화교육이 시작되자 제작 경험이 있는 양종해와 배석인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후일 연출력을 인정받아 국내 교육용 영화뿐만 아시아영화제를 비롯한 해외 영화제 출품용 비극영화와 해외 배포용 한국 홍보영화를 도맡으며 국립영화제작소를 대표하는 감독이 되었다. 어찌되었든 경력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역시 신규 인력들과 함께 영화제작의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시라큐스 계약의 개요는 “시라큐스 인력들을 최대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규 교육에 주안점을 두고 글쓰기, 연출, 촬영, 편집 및 사운드 녹음 분야에 대해 매주 교육을 실시하고, 프로그램 목표에 부합한다면 영화 관련 행정 업무, 프로그래밍 등의 관련 업무에 관해서도 기술 지원을 제공하는 것” 5 이었다. 이를 위해 이들은 2년에 걸친 교육과정을 ‘정규 교육’과 ‘현장 실무(on the job training) 교육’, 2단계로 나눠 계획을 세웠다. 작업보고서에는 “시나리오 작가-감독은 50%의 시간을 정규 교육에, 50%의 시간을 ‘현장 실무’ 교육에 할애” 6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실제로 감독 양종해는 오전에는 콘티 작성법을 비롯해 실무에 필요한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작업을 했다고 증언했다. 7 학교 수업처럼 진행된 이와 같은 정규 교육은 대략 1년 6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사진 6] 시라큐스의 인력들(출처: 이성철 기증 자료) [사진 7] 시라큐스와의 계약 서류 (콘티 작성법을) 교육받으면서 배운 거야, 이건. 이게 아주 좋아. 그러니까 첫째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거지. 이걸 벽에 탁 붙여 놓거든 매일 본다고. 봐야 돼. 누구 불러다 “너 이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이야. 이런 식으로 시나리오 하기 전에 이 기본 골격을 한눈에 볼 수 있어야 돼. 그래 안하면 그림 생각해야지, 효과 음악 생각해야지, 복잡하다고. 이건 예를 들어서 효과 무슨 효과다. 음악이 뭐다. 문화영화엔 하나 또 있어, 해설. 그러니까 해설이 있어야 되거든, 문화영화는. 이게 제일 좋은 것이 해설 있고, 음악 있고, 또 해설 있고, 효과 있고, 이런 식의, 이게 바란스(balance)가 잘 맞아야 돼. 너무 음악만 있으면 그렇고 너무 해설만 있으면 그렇고. 이것도 종이로다 해보면 여긴 해설 두고, 여긴 음악 두고, 이런 식으로 해두면 녹음해두면 비슷하게 바란스가 맞는 거지. 8 [사진 8] 양종해 감독과 연출 교육을 담당했던 메이블리 위의 구술에서 알 수 있듯이 시라큐스 교육진이 지속적으로 강조한 것은 명확한 주제 전달을 위한 연출 기법이었다. 말하자면 정해진 시스템 안에서 각 부처 정책에 따른 주제를 변주해야 하는 영화제작소 교육영화의 특성에 맞춰 기본적인 틀을 반복해서 제시하고 강조하는 것이다. 게다가 적은 자본과 인력으로 진행해야 하는 제작 여건상 연출자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교재로 삼을 풍부한 견본들이 필요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견본을 밑그림으로 영화제작소의 감독들은 소위 1인 제작 시스템이라 불린 환경을 조성하고 영화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사진 9] 문화영화 촬영 현장 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의 역할 모델이 된 <발전은 협력에서> 시라큐스 계약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농촌 지도’를 주제로 하는 다수의 교육영화들이 만들어졌는데 <발전은 협력에서(둑)>(1959)는 이러한 원조정책의 대표적인 영화였다. 양종해 감독의 대표작이기도 한 <발전은 협력에서>는 강원도 명주군 모전리 주민들의 협력으로 제방이 건설된 것이 화제가 되며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완성 후 대대적인 상영회를 통해 농촌 각 지역에 ‘협력과 자립’이라는 교훈을 주었고 모전리는 성공한 시범부락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또한 영화가 1960년 도쿄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아영화제 비극영화 부문에서 기획상을 수상하며 원조 당국과 공보실 그리고 한국영화계 모두에 서로 다른 의미의 성공을 안겼다. 그리고 이 수상 경력은 이후 <발전은 협력에서>가 공보실 영화제작소와 국립영화제작소의 대표적인 문화영화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아시아영화제 수상으로 <발전은 협력에서>는 원조 당국으로부터 대한 경제 기술 원조의 성공사례로 활용되는 동시에 이승만 정권의 선전물로 활용되는 모순을 보여주는 아이로니컬한 상황에 직면했다. [사진 10, 11] <발전은 협력에서(둑)>(양종해, 1959) 속 장면들(출처: e영상역사관) 실제 현장에서 주민들이 참여하는 이러한 방식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 영화의 특징을 강조하는 동시에 실제 지역사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사업이 아닌 특정 마을의 사업을 원조기관과 정부 부처의 신(新)사업의 성과로 포장하여 시범마을과 농촌교육영화의 역할모델로 활용해 선전에 활용하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 기획은 매우 성공적인 전략이 되어 향후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 사업의 보급⋅육성에서 핵심적인 선전영화의 역할모델로 이용되었다. 1970년대 초반 새마을운동의 대대적인 선전에서도 사업 시행에 앞서 완성형의 마을 혹은 마을 지도자의 성공사례를 ‘실화’라는 특징을 앞세워 마치 새마을운동의 성과물처럼 제작한 경우가 다수 있는데 이 영화들의 형식과 구성은 명백하게 <발전은 협력에서>를 모델로 하고 있다. [사진 12] 1960년 제7회 아시아영화제에 참가한 한국 대표단의 모습(출처: 이성철 기증 자료) [사진 13] 제7회 아시아영화제에서 <발전은 협력에서>는 비극영화 부문 기획상을 수상했다. 사진 왼쪽부터 남우주연상을 받은 김승호, 당시 영화과 과장으로 있었던 이성철, 감독상을 받은 성동호(출처: 이성철 기증 자료) 덧붙여 정치적 격변 속에서 공보실 영화제작소가 오히려 그 위세를 확장해 독립된 국립영화제작소로 재탄생하게 된 배경에 선진화된 시설과 영화제작 교육을 받은 전문 인력을 갖춘 영화제작소의 시스템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자금투자가 필요 없는 최적화된 공보선전 기관으로 활용 가능한 영화제작소의 존재를 매력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 출범 후 공보국이 공보부로, 영화제작소가 ‘국립’영화제작소로 격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전은 협력에서>를 비롯한 한미협조 교육영화들은 문화영화로 재구획 되고 국립영화제작소 농촌계몽 문화영화의 역할 모델이 되었다. 주) 1. 공영민, 「양종해 편」,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한국영화사구술총서03 :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이채, 2006, 253쪽. 2. 공영민, 「양종해 편」,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한국영화사구술총서03 :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이채, 2006, 256~257쪽. 3. 공영민, 「2006년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자료집 <양종해 편>」,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52쪽. 4. <Welcome to Motion Picture>(1959). 5. "Work Plan-Contract No. ICA/W-644 between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Syracuse University",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앞의 책, 171~178쪽. 6. Ibid. 7. 앞의 책, 「양종해 편」, 256~258쪽. 8. 앞의 책, 「양종해 편」, 2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