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아스테라
- 감독
- 이진아, 이애리
- 제작년도
- 2021
이와사키 아키라 환영회 중 문예봉(좌)과 한은진(우)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영화의 발흥 이래 재현의 사실성에 대한 추구는 극장가의 화두로 떠올랐다. 카메라가 구현해 낸 재현의 정밀성은 실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영화에 익숙해진 관객들이 늘어나면서 선행매체인 연극 역시 사실적 환영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연극과 영화가 하나의 공간을 함께 점유하며 관객을 나눠 가졌던 식민지 조선의 극장 속에서 그 영향관계는 훨씬 긴밀했을 것이다. 대체 불가능한 지위를 획득한 ‘여배우’는 재현의 사실성에 대한 식민지 조선 극장문화의 지향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존재였다. 재래의 관습이었던 여형배우는 여배우의 등장과 함께 전근대적 유습으로 낙인찍혔다. 이것은 배우와 배역의 생물학적 동일성이 여성성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있어 근원적인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생겨난 변화였다. 무대와 스크린의 주역으로 급부상한 여배우의 일거수일투족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공공의 시선 속에 노출된 육체의 감각적 즉물성이야말로 여배우의 지위를 굳건한 지반 위에 올려놓은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든 시각적 쾌락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었으며, 여배우들의 육체는 관객의 관음증적 욕망 앞에서 품평의 대상으로 격하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더욱이 여배우들을 향한 응시는 극장 속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모든 이들은 직업적 영역에서의 공공적 삶뿐 아니라 일상을 영위하는 개인으로서 사적인 삶 또한 살아간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라는 표현이 함의하듯 두 영역의 분계선을 명확히 하는 일은 누구라도 품을 법한 보편적 욕망이겠지만, 유독 여배우에게만큼은 직업과 일상의 분리가 허용되지 않았다. 우수진이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이것은 여배우가 문화적으로 ‘ 구성 ’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주1 육체를 통해 현시된 여배우의 존재감은 재현의 사실성을 담보했지만, 그로 인해 생겨난 강력한 동일시의 기제와 이에 기반한 극장 체험의 여파는 관객들로 하여금 허구적 배역과 실제 배우의 삶을 혼동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배우의 사생활은 ‘스캔들’의 형식으로 소비되는 일이 잦았다. 특히 여성의 사회활동을 억압했던 전통적 관념이 맞물린 결과, 여배우의 ‘사생활’은 단순한 관심거리의 수준을 넘어 도덕적 단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 사회에 여배우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던 이월화 또한 이러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는데, 배우 활동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기 어려웠던 그는 기생과 여급 일을 병행한 바 있다. 이월화에게 사치와 허영심이 강한 여성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워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편 토월회가 해산한 후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던 복혜숙 은 ‘비너스’라는 카페를 직접 운영하면서 마찬가지로 비난의 시선을 견뎌내야 했다. (좌) 이월화 (사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우) 복혜숙 특히 성욕이 강한 여성이나 신여성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의 경우, 사생활 또한 문란할 것이라는 의혹의 시선에 둘러싸였다. 이러한 시선은 비단 식민지 조선의 배우들뿐 아니라 할리우드의 영화 스타들에게도 투사되었는데, 그들의 사생활을 다룬 가십성 기사들이 신문 연예란의 단골 메뉴였던 것은 대중적 관심의 향배를 잘 보여준다. 여배우들은 수없이 애인을 갈아치우는 왕성한 남성 편력을 지닌 이들로 지목되었으며, 사소한 이유로 이혼을 일삼는 부도덕한 존재라 낙인찍혔다. 물론, 스타의 화려한 삶과 막대한 재력에 대해 찬탄하는 시선도 엿볼 수 있다. 전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던 그들의 천문학적 주급이나 으리으리한 대저택은 물론이고 사치스러운 취미활동 등이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열악한 조선의 연예계에서 여배우는 헐리우드 스타와 같은 동경의 대상으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즉, 여배우는 자신의 힘으로 직업적 성취를 이뤄낸 당당한 여성이 아닌, 생활난에 시달리는 가련한 존재이거나 끝내 ‘첩살이’ 신세를 피할 수 없는 비참한 운명을 지닌 이들로 인식될 따름이었다. 여배우의 전도, 남배우의 전도- 이것이야말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할 문제이다. 오늘날 만사가 초창 혁신기에 잇는 조선에 잇서서 더 크게 더 탐탁하게 바랄 수는 업다고 치드라도 인생의 흥망을 기약하는 청춘기에 잇서서 다시 돌이키기 쉽지 않은 직업에 몸을 붙이게 되는 때 장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없을 수는 없다. 우선 여배우 여류 무용가가 되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 대답은 극히 간단하다. 『아무래도 시집을 가야지』 여자로서는- 더욱히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자립하기가 어려운 조선의 여성에게는 마지막 닥치는 문제는 반드시 이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에게로 가게 될까. 『첩!』 그것이야 참으로 참으로 예술가를 극도로 모욕하는 말이다. 『재산가의 부인!』 그것은 좋기는 하나 졸연히 얻어 걸리기가 어려운 사정이 있으니 재산가치고 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여배우니 무엇이니 하는 동안에 어느덧 이십이 넘고 나서 사면을 둘러보아야 모두가 기혼 남자들뿐이다. 『그러면 착실한 신사』 아직도 조선서는 소위 착실하다는 청년 쳐 놓고는 사리 잡힌 가정 쳐 놓고는 배우 안해이나 여배우 며느리 얻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머리 길게 기르고 누더기 가튼 양복을 입고 다니는 같은 경우 같은 식경에 도취되어 있는 예술가이나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는 펄펄 뛰다가도 나중에는 하는 수 업시 『하는 수 있나. 사랑만 해 주면 그만이지. 첩 노릇이라도 해야지!』 눈물겨운 탄식이나 나아올 것이다. 이미 여배우 노릇을 하든 사람이 그러하였으며 장차 나아올 여배우의 운명이 그러하다. 이것은 여배우 자신의 잘못도 아니요 그 단체 그 사회의 죄도 아니다. 오직 조선의 민도가 일반의 머리가 아즉도 예술- 더욱히 무대예술에 존경을 갖지 못한 탓이다. 그러함으로 적어도 배우 노릇을 하고자 나서는 분은 우선 이담에 크게 고려를 하야 사랑에서 사랑으로 자유스럽게 날아다니랴는 무거운 결심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더라도 상당한 배우자가 나기까지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기막힌 결심을 갖든지. 『잘 놀면 그만이지』 여배우 노릇을 부자의 눈을 호리는 수단으로 알고 무대를 매음부의 전람회 같이 알든지 이 세 가지 길의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다. -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9 』, 1035쪽 이춘풍, “ 생활로 본 그들의 내막 - 배우, 레뷰껄, 딴써 등등 ”(5), 《중외일보》, 1929. 11. 12. 이춘풍이 연재한 글은 사뭇 직설적이면서도 신랄하다(‘이춘풍’은 이서구 의 필명으로 추정된다). 그는 여배우를 비롯하여 여류 무용가나 레뷰걸과 같은 여성 연예인들의 생활상을 자조섞인 어조로 소개했다. 그의 글 속에서 여성 연예인의 생활상은 사실상 성노동자의 삶과 유비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자립하기 어려운” 조선 여성의 처지에서 결혼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재산가의 부인”이 되자니 그들은 대부분 조혼을 해서 본부인이 있는 상태이고, “착실한 신사”에게 시집가자니 집안의 반대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나마 여배우들의 사정을 이해해 줄 법한 이들은 “가난한 예술가”들뿐이겠지만, 그게 싫다면 누군가의 “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여배우들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서구는 예술가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한 식민지 조선 사회 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던 여배우의 처지를 동정한다. 그가 보기에 결국 여배우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뿐이었다. 방종한 여성이 되어 자유를 구가하거나, 결혼 자체를 포기하거나, 아예 대놓고 “부자의 눈”을 홀리기 위해 극장을 “매음부의 전람회”처럼 만드는 일이 그것이다. 영화 < 아리랑 >(나운규, 1926)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신일선 은 배우 활동을 오래 이어나가지 못하고 능주(전남 화순군) 지역 부호의 자제인 양승환과 결혼하게 된다. 이른바 ‘신일선당’이라고 불렸던 열성팬들은 그의 결혼 소식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정성껏 행복을 빌어 주었다. 이는 신일선이 <아리랑>에서 쌓아올린 이미지와도 관련된 반응일 것이다. 신일선은 주인공 영진( 나운규 )의 여동생 영희 역을 맡았는데, 호색한의 위협을 받는 순진무구하고 어린 여동생의 모습이 관객들의 동정심을 유발했기에 그러한 이미지가 배우 신일선에게도 겹쳐졌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다만, 양승환에게는 본처가 있었기에 결국 신일선도 ‘첩살이’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게다가 신일선이 가난한 집안살림을 돕기 위해 친오빠의 강권으로 양승환과 결혼하게 된 것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정 여론이 빠르게 확산되기도 했다. 결혼과 함께 영화계를 떠났지만 신일선의 근황, 특히 그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견뎌내고 있다는 소식이 지속적으로 전해졌던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신일선 이야기는 여배우의 박복한 운명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 사례로 거론되었던 것이다. 신일선 반대로 사랑을 쟁취하려 하는 여배우의 적극성은 어디까지나 남성 편력에 불과하다고 치부되는 데 그쳤다. 잔인하게도 여배우의 사랑이 진실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정사 사건’과 연관되었을 때, 즉 죽음을 담보로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했다. 조선의 유명 성악가이자, 토월회에서 배우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던 윤심덕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는 다수의 연애 스캔들에 휩싸여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지나, 극작가이자 연극운동가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실종된 이후 ‘낭만적 사랑’의 화신으로 재규정되기에 이른다. 영화 < 아리랑 후편 >(이구영, 1930)에서 신일선의 뒤를 이어 ‘영희’ 역으로 출연했던 임송서 역시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음독자살을 택한 바 있다. 미수 사건에 그치진 했지만 이애리수 의 ‘정사 사건’도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유행가 가수이자 배우로 인기가 높았던 이애리수는 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배동필과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약속했으나, 배동필의 부모는 여배우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며 극력 반대했고, 결국 그들은 다음 생에서라도 못 다한 사랑을 이루고자 동반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그들의 소식은 신문 지상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결국 배동필의 부모가 이애리수의 연예계 은퇴를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된다. 그러나 훗날 배동필의 본처가 찾아오게 되자 위협을 느낀 이애리수는 재차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으며, 작고할 때까지 자신의 연예계 활동 이력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다고 전해진다. (좌) 윤심덕 (우) 이애리수 이처럼 여배우를 둘러싼 시각은 냉랭했으며, 때로는 음험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배우들은 대상화된 육체의 지위에 머물기보다 예술의 주체 로 거듭나기 원했으며, 서서히 자신의 목소리를 담론장에 기입하기 시작한다. 변화의 전조는 1930년대에 접어들며 점차 가시화되었다. 1931년에는 ‘Y.Y생’이라는 필명을 내세운 필자가 《동아일보》를 통해 “여배우 언 파레이드”라는 제목으로 식민지 조선의 여배우들을 소개하는 장문의 글을 연재한 바 있다. *주2 비슷한 시기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무대 스타- 순방기”는 매 회차마다 남성 배우와 여성 배우를 한 쌍으로 묶어 주요 활동이력과 연기의 고유한 스타일에 대해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1934년에 서광제 는 《조선중앙일보》 지면을 빌려 헐리우드의 여배우들을 다룬 “세계영화계 행각”을 연재했는데, 이 글들은 여배우를 가십의 대상으로 다루기보다 예술의 완성을 위해 정진하는 직업적 전문인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시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춘풍이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여배우는 이제 공공적 담론장에서 ‘예술가’로 조명받게 된 것이다. 특히 ‘여배우’가 타고난 외형이나 신체적 조건을 전시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기예’를 연마하기 위해 기울여 온 노력을 전경화 한다는 점에서 시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여배우들의 목소리가 인터뷰나 대담을 통해 노출되는 사례도 빈번해졌다. 신카나리아 는 유명 여성인사들의 새해 포부를 밝히는 지면을 통해 장차 연극을 연구하며 일생을 배우로 살아가리라 다짐했으며, 새해에는 연극 이론서를 집중적으로 독파할 것이라 밝혔다. *주3 1933년에 《매일신보》가 개최한 신년 좌담회에 참석했던 이경설과 이애리수는 여배우의 사생활이 난잡할 것이란 세간의 추측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여배우가 오히려 남배우들보다 “책임 있게 일을 잘 한다”고 주장했다. *주4 최초의 조선어 발성영화 < 춘향전 >(이명우, 1935)의 주역이었던 문예봉 은 발성영화에 좀 더 “적합한 억양”을 연구하겠다고 밝혔으며, 극예술연구회의 대표적 여배우인 김복진 또한 “어린애 역부터 늙은이 역까지” 어떠한 역할이 주어지더라도 철저히 연구하여 제몫을 해낼 것이라 다짐했다. *주5 1937년에 《동아일보》를 통해 장기간 연재된 “스타의 기염” 시리즈에서도 여배우들의 포부를 엿볼 수 있다. 차홍녀 , 한은진 , 남궁선과 같은 연극배우는 물론이고, 문예봉, 김소영 을 비롯한 영화배우들까지 총망라된 이 시리즈에서 여배우들은 자신이 곧 예술의 주체라는 자의식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좌) “여배우 언 파레이드”에서 다뤄진 복혜숙 (사진: “ 여우언파레이드 영화편 (9) 인기도 한떄런가 복혜숙양 ”, 《동아일보》, 1931. 8. 9.) (우) "스타의 기염"에서 다뤄진 남궁선 (사진: “ 스타의 기염 (2) 그 보푸계획자랑야심 극은 일생사업연극인 남궁선 ”, 《동아일보》, 1937. 11. 25.) 같은 맥락에서 < 미몽(죽음의 자장가) >(양주남, 1936)의 한 장면에 주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발성영화로 알려진 이 작품의 주연배우는 당대의 최고 인기스타였던 문예봉이었다. <미몽>의 주인공 애순(문예봉)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나머지 가정까지 버렸던 인물로, 그의 일탈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어찌보면 이른바 ‘신여성’에 대한 처벌 서사처럼 보이는 작품이지만, 실제로 <미몽(죽음의 자장가)>을 둘러싼 해석의 결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아래의 쇼트들은 내연남인 창건과 함께 무용 공연에 참석했던 애순이 박경림( 조택원 )의 독무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구성한다. 흥미롭게도 이 장면은 <미몽(죽음의 자장가)>에서 온전한 형태의 시선 편집(eyeline match)이 거의 유일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시선의 주체와 시선의 대상을 연속적으로 배치하게 될 경우, 시각 주체의 욕망과 그것이 투사된 대상의 정체를 가리키게 된다. 그렇다면 <미몽(죽음의 자장가)>에서 이 장면만큼 주인공 애순의 욕망이 직설적으로 노출된 순간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몽(죽음의 자장가)> 중 이 장면이 문제적인 것은 시선의 엇갈림을 통해 식민지기의 극장 속에 착종된 욕망 들을 압축적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즉, 객석에 앉은 애순의 모습은 시선의 주체인 동시에 시선의 대상으로서 포착된다. 시선의 주체로서 애순은 무용가의 춤에 대한 애호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주변 남성들의 시선 속에서 대상화된 존재로 재현되고 있다. 더욱이 그들의 응시는 창건이 자리를 비운 직후부터 보다 노골적으로 이어진다. 더욱이 객석에 앉은 애순을 향한 남성들의 응시는 부재하는 창건의 자리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이 남성의 울타리를 벗어날 경우, 무제한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남성들의 왜곡된 시선은 애순의 주체성을 훼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순은 시각적 주체로서의 지위를 끝내 포기하지 않으며, 잡담을 주고받는 산만한 남성들과 달리 무용가의 춤에 집중하면서 극장의 본래 취지에 걸맞는 ‘이상적 관객’의 형상을 드러낸다. 이 장면이야말로 <미몽(죽음의 자장가)>이 지닌 미묘한 해석의 결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데, <미몽>은 ‘신여성’을 부정적 표상으로 낙인찍고 대상화하려는 사회적 시각을 보여주면서도, 이러한 시각으로 결코 포합될 수 없는 여성의 주체성 또한 재현해 내기 때문이다. ‘애순’의 모습처럼 식민지 조선의 여배우들은 그들을 둘러싼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폭압적인 시선을 예술적 주체를 향한 주목으로 바꿔놓기 원했던 이들이었다. 사회의 무지함에 대해 항변하는 대신 그들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겸허히 채우고자 했으며, 극장문화의 공진화적 발전을 목표로 삼았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영화가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논한 바 있다. 기계장치의 냉혹한 메커니즘 속에 짓눌린 현대인들은 스스로의 인간성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지만 영화를 통해 해방의 서사를 발견한다. 즉, 배우는 카메라라는 기계장치 앞에서 끊임없이 시험받게 되지만, 그 가혹한 테스트를 의연하게 버텨낼 뿐 아니라 적극적 상호침투를 통해 가장 인간다운 형상을 제시하는 데 성공한다는 것이다. 대상화된 육체의 지위를 넘어 예술적 주체로 발돋움하기 원했던 식민지 조선 여배우들의 인정투쟁이야말로, 영화를 현대사회의 냉혹한 논리에 ‘복수’를 가하는 장치라고 보았던 발터 벤야민의 생각과 상통하는 대목이 아닐까? *** 주1. 우수진, 「여배우의 사회문화적 구성과 이월화」, 『현대문학의 연구』 82, 한국문학연구학회, 2024. 주2. ‘Y.Y생’은 김유영의 필명으로 추정된다. 주3. 기사, “직업여성의 가두에서 맛는 1931년 - 신산한 그들의 생활에서 새해의 출발을 보자!”, 《조선일보》, 1932. 1. 2. 주4. 기사, “직업여성의 좌담회”, 《매일신보》, 1933. 1. 3. 주5. 기사, “백화요란한 음악, 미술, 극, 영화, 무용 각계의 성관 - 예원에 활약하는 여성들”, 《동아일보》, 1936. 1. 1.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1930년 1월 조선극장과 단성사가 토키를 상영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의 활동사진 변사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조선의 영화 문화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변사들의 연행이 ‘화예(話藝)’라는 말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원숙한 경지에 이른 때였다.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변사의 한 사람, 김영환은 곱상한 외모와 단정한 매너로 흥행계에서 인기를 얻어왔을 뿐 아니라, <장화홍련전>(1924), <세 동무(삼걸인)>(1928), <약혼>(1929), <젊은이의 노래>(1930), <연애광상곡>(1931) 등을 연출한 영화감독이기도 했으며, “낙화유수”, “세 동무” 등의 영화 주제가와 “강남제비”, “추월색” 등의 유행가를 작곡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1928년에 단성사에서 조선극장 해설부 주임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앞으로 수년 내에 변사라는 직업이 사라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에서의 영화해설 역사를 설명한 음반 《역려》(1932)에서, 그는 자신이 서있는 격변의 시간을 “활동사진이란 그 이름이, 영화라는 이름으로 바꾸이는 동시에 변사라고 하든 것도, 해설자라는 것으로 고치어진 오늘” 1 이라는 정도로 인식했다. 그가 보기에 토키 이후의 변사는 ‘활동사진 변사’에서 ‘영화의 해설자’로, 그러니까 극장의 엔터테이너에서 필름 텍스트에 한걸음 더 다가가 영화의 번역자로서 자기 인식을 가져야 하는 존재였다. 김영환에게는 더 나은 해설자가 되는 것이 중요할 뿐 굳이 다른 분야를 곁눈질할 필요가 전혀 없어 보였다. 김영환은 ‘조선인 변사 1세대’ 서상호와 김덕경의 견습으로 흥행계에 입문했다. 경상도 출신으로 사투리 탓에 견습 시절에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꽤 오래 생활고에도 시달렸지만, 이제 영화해설계의 중진이 되자 변사의 화예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는 외국영화뿐 아니라 국산영화를 상영할 때도 변사의 해설이 붙는 일본이나 조선에서 “해설은 외국인들도 일찍 발견치 못한 영화감상의 효과를 한층 더 힘 있게 하는 일종 특수적 색채”이며 “영화를 일반적으로 감상시키는 동시에 영화의 색채와 더 예민한 감각과 인상을 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작품을 해부하여 일반적 감상에 바치는 일종 수단”인 영화해설에는 그야말로 ‘연구’가 필요하다. “지껄이되 잘 지껄이자는 것이며 어떻게 해야 조리 있게 잘 지껄일까를 힘써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연구 끝에 김영환은 영화의 주제와 플롯, 분위기를 이해하고, 작자의 주안(主眼)과 세선(細線)을 분별하는 안목을 보유하며, 영화 번역에 창의성을 발휘하되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는 것이 해설자의 자질이라고 풀어 설명했다. 2 1931년 조선극장에서 <럭비시대>(The Forward Pass, 1929)와 <크랙 장군>(General Crack, 1929)을 상영하던 때, 김영환이 기록한 일기에는 이제 막 토키 시대로 진입한 조선 변사의 일상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하루하루가 바쁜 변사였다. 조선극장에서는 이미 외국의 토키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는데, 김영환은 그 외국어 자막을 번역해 설명하는 연행을 했다. 그런 한편 개인적으로 유성기 극음반을 취입해 상당한 재미를 보기도 했다. 유성기와 라디오 보급률이 서서히 증가하면서 극장에서 ‘오리지널’한 변사의 목소리는 레코드를 통해 ‘복제’되고 방송을 통해 ‘전파’되었다. 변사가 자신의 다른 목소리들과 공존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930년대의 김영환은 라디오에 출연해 영화를 해설하고 극음반 취입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새로운 ‘재생 예술’들과 상보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어떤 면에서 그는 ‘소리 복제 시대’를 반기고 있었다. 1931년 봄 김영환이 콜롬비아레코드에서 취입한 《춘향전》은 윤혁과 이애리수의 실연(實演)과 박록주의 창, 그리고 그 자신의 설명이 어우러진, 다시 말해 연극과 판소리, 영화해설이 뒤섞인 음반으로서 구매자들에게 풍성한 즐거움을 제공했다. 극음반이 잘 팔린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던 김영환은 극음반 취입의 소감을 이렇게 기록했다. “영화는 형태의 촬영이라면 레코드는 음성의 촬영이다.” 3 기술적 격변의 시기에 그는 쏟아지는 신작 영화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세계 영화계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자, 일본의 영화 잡지 『키네마순보(キネマ旬報)』와 『키네마주보(キネマ週報)』를 구독하며 동시대적인 감각을 익히려 노력했다. 어느 날은 자신이 취입한 음반이 많이 판매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솔직하게 적었지만, 또 어느 날은 일본의 명변사 도쿠가와 무세이(德川夢聲)가 ‘토키영화 설명 반대론’에 대해 반론을 펼친 데 깊이 동조했다. 김영환은 여기서 언어와 계급의 불평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토키영화를 해설하지 않는 것은 민중 오락인 영화를 “일부 유식급(有識級)만이 즐길 수 있는 일종 독락적(獨樂的) 기호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새로운 기술 도입으로 인해 일본영화 산업계의 구조 조정이 시작된 것을 영화 노동자의 입장에서 아프게 바라보기도 하는데, 체계를 갖춘 스튜디오 하나 없이 산업적으로 허약한 조선영화의 현실에서는 그것조차도 남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4 기술과 산업의 후진성이 어떤 경험을 ‘결핍’시키거나 ‘지연’시키는 조선의 현실에서, 1930년대 초반의 변사들은 기존의 상영 관습을 이어가는 차원에서, 또 외국어 토키에 대한 관객들의 언어적 소외를 최소화하는 차원에서 발성영화의 음향을 줄이고 영화해설을 곁들이는 ‘토키 연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관객의 항의에 부딪치지는 않았다. 비단 외국어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조선에서는 여전히 무성영화가 제작되고 있었고 아직 토키 상영 설비를 갖추지 못한 극장들도 많았다. 무성영화 프린트는 계속 유통되었고, 변사는 여전히 중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이 시기를 지나며 관객들이 영화 사운드와 영상 동조 시스템을 이해하고 자연스레 토키 감상에 익숙해지자 변사는 점차 불필요한 존재로 그의 연행은 ‘낡은 문화’로 인식되어갔다. 김영환의 일기로부터 몇 년이 지난 1930년대 후반, 경성의 이른바 ‘일류관’에서 변사의 해설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근대 문화의 첨단에 서 있었던 변사들은 불과 몇 년 사이에 활동사진 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1938년 가을, 조선일보영화제에 자극을 받은 ‘재경해설유지연맹(在京解說有志聯盟)’이 동양극장 영화부의 후원을 얻어 11월 16일부터 3일간 ‘무성영화 감상제’를 개최했다. 그해 여름 우미관 화장실에서 변사한 왕년의 인기 변사 서상호를 추모하듯, 무성영화 감상제에서는 과거의 동료들인 ‘무성영화 해설계의 권위’ 변사 이십여 명이 해설을 하고 그들과 함께 이름을 날리던 악사들이 영화음악을 연주했다. 5 <선라이즈>(Sunrise: A Song of Two Humans, 1927), <부활>(Resurrection, 1927), <거리의 천사>(Street Angel, 1928), 그리고 조선영화 <철인도>(1930), <아리랑 전·후편>(1926, 1930) 등 ‘추억의 명화들’이 이병조, 최병룡, 서상필 등의 해설로 다시 상영되었다. 그때가 아마도 ‘잊혀졌던 암실의 웅변가’들이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조명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진 2. ‘무성영화감상제’ 광고 출처: 『동아일보』 1938년 11월 16일자, 3면. 1) 배연형·구인모,「역려」『유성기 시대, 변사의 화예』, 한국문화사, 2018, 321쪽. 2) 김영환,「영화해설의 소고(小考)」『대중영화』 제4호(1930년 7월), 8~13쪽. 3) 김영환,「영화생활」『영화시대』 1권 3호(1931년 5월), 32쪽. 4) 김영환, 위의 글, 30~31쪽. 5) 「해설유지 주최 무성영화감상제」『동아일보』 1938년 11월 17일자, 4면. 상단사진 1. 변사 김영환의 영화일기 출처: 「영화생활」, 『영화시대』(1931년 5월) (아단문고 미공개 자료 총서 2013, 7권, 104쪽)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김영환, 「영화생활」 『영화시대』 1권 3호(1931년 5월), 30~32쪽. (부분 발췌) 3월 7일 (토) 10시 기상— 근래 처음으로 충분히 잠을 잔 모양이다. 어린애가 몸성히 잘 있다는 편지가 왔으므로 오늘은 마음이 좀 편해진다. 오늘은 토요일, 주야(晝夜) 곱빼기를 또 마시는 날이다. 『영화시대』에 보낼 원고 몇 장을 쓰고 나니 벌써 무대 교대 시간이 되었다. 마음에 없는 작품을 지껄이는 것이야말로 울면서 겨자 먹기, 이를테면 ‘빵’ 구실에 지나지 못하니 ‘밥’이 시키는 것이라 어쩔 수 없다는 그것뿐. 밤에 김연실, 강석연, 강석제, 유영광 이 네 분의 양(孃)들이 놀러 왔었다. 편지 쓰고 있던 때라 고급적 인사를 못하였더니 “방해가 너무 많아 미안합니다”라고 석제 씨의 꼬는 말씀 한마디에 낭자군은 일제 행동! 네 분의 양군(孃群)은 객석으로 달아났다. 저녁 일을 마치고 『키네마순보(キネマ旬報)』(3월 1일 제393호)를 통독함. 유니버설 춘계 작품 에드윈 커리우 (Edwin Carewe) 감독, 루프 벨레즈 (Lupe Velez) , 존 볼스 (John Boles) 주연으로 톨스토이의 『부활』이 재차 영화화가 된 모양. 반가운 소식이다. 돌로레스 델 리오 (Dolores del Rio) 가 지긋지긋하게 싫으니만큼 전(前) 영화 <부활> (Resurrection, 1927) 에서도 나는 호감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라 재차 영화화인 루프 벨레즈와 존 볼스의 이 신(新) <부활> (Resurrection, 1931) 에 나는 기대를 가져본다. 메트로골드윈메이어 영화로 세실 B. 드밀 (Cecil B. DeMille) 감독 <마담 사탄> (Madam Satan, 1930) 의 발표는 그리 반갑지가 않다. 또 어느 구석에서든지 기필코 하나님이니 무엇이니 하고 씨부렁대놓은 구절이 있을 것 같아서 평(評)이나 시사를 대하기 전까지는 믿고 싶지가 않다. 동 회사 클래런스 브라운 (Clarence Brown) 감독 <불사조> (Wonder of Women, 1929) , 문호 주더만 (Hermann Sudermann) 의 원작인 만치 스토리의 통속적이 아니요, 비상업적인 그 점에서 어서 좀 보고 싶다. 일활(日活) 촬영소에서는 소원(所員)의 감봉 정리를 단행하였다고? 해고당한 50명 중에는 기술자나 배우로서 제일선에 나선 사람은 하나도 끼이지 않은 모양. 그러고 본즉 결국 수하 자(手下者) 참수 단행이나 아닌지 원! 먹을 것이 제법 생긴다는 저 땅에서도 영화 노동자의 수난이 생길 데에야 백사지(白沙地) 이 땅 위에서 갈팡질팡 헤매는 우리 영화 노동자들이야 말해서 무엇 하리. 아직도 참수 단행은 당하지 않았으니 그것으로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도쿠가와 무세이(德川夢聲) 씨의 「영화연첨일기(映畫軟尖日記)」, 『키네마주보(キネマ週報)』소재, 토키영화 설명 반대론에 대한 대항전은 흥미 있게 읽었다기보다도 장차 우리에게도 전환되어올 수난일 듯한 거기에서 같은 감정에 가슴이 흔들린다. 토키영화 설명 반대론에 대해서는 나 역시 거기에는 수긍하지 않는다. 당사자의 직업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제3자의 견지로도 물론 그러하다. 만일 세계 공통어가 세계적 보급과 발달을 얻고, 그리하여 그 세계 공통어로 취입(吹込)하여 토키영화를 제작한다면 모르되, 그것을 얻지 못하는 금일에 있어서 토키영화 설명 반대를 고창(高唱)하는 것은 민중 오락에 본위를 가진 영화 그 물건으로 하여금 일부 유식급(有識級)만이 즐길 수 있는 일종 독락적(獨樂的) 기호물을 만들어 버리겠다는 전횡적 야심인 동시에 가공적 잠꼬대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아! 과학문명의 발달은 노동자의 생명을 뺏는 독와사(毒瓦斯)! 축음기의 권위로 말미암아 음악사(音樂士)의 희생을 본 오늘에 있어 토키영화의 출현으로 해서는 또다시 해설의 존재까지 그러하지 않은가! “아- 쿠오바디스 (Quo Vadis) 변사여!” 무세이 씨의 차탄사(嗟歎詞)이다. 참 아닌 게 아니라 어디로 갈꼬! 3월 8일(일) 9시 기상- <럭비시대> (The Forward Pass, 1929) 를 오늘도 주야로 두 번씩이나 씨부렁댈 일을 생각하니 졸음이 온다. 존 배리모어 (John Barrymore) 주연 <크랙 장군> (General Crack, 1929) 은 내가 보지는 않았으나 생각건대 <럭비시대>보담은 지껄일 재미가 좀 있으리라 했더니 후반을 담임한 성동호 군, 지긋지긋해 죽겠다는 말. 그러나 <럭비시대>나 <크랙 장군>이 태작이라고 할 지경이면 배급소의 시비를 받을 말인 고로 이를테면 어디까지든지 태작이 아니요, 걸작이란 말이다. 요컨대 이 두 개의 걸작이 유감천만히도 우리들의 입에는 맞지 않는 음식과 같아 씨부렁대기에 매우 부아통이 터질 뻔 했다는 그것뿐이니 당해 배급소여! 달은 잡지 마실지어다. 적선동 강대원 씨에게 조극(朝劇) 초대권으로 미성(微誠)을 표하였다. 콜롬비아축음기회사 문예부 강윤석 씨 방문, 나의 취입한 레코드 초회 발매, 레코드 대회, 2회 발매, 《춘향전》은 상당히 잘 팔린다는 말 듣기에 기쁘다. 영화는 형태의 촬영이라면 레코드는 음성의 촬영이다. 촬영을 마친 영화배우나 취입을 마친 취입자의 궁금증은 피차가 일반이니 시사나 시험반(試驗盤)을 대하기까지에 일력장(日曆帳)이 곤죽이 되어버리는 것도 똑같은 일이다. 3회 발매품은 무엇인지 어떻게 되었을까. 잘 되었으면 좋고, 못 되었으면 낙망! 낙망! 단성사 해설부 견습이던 편순만 군. 조극 무대로 오겠다는 것을 단성사 해설 주임 김덕경 씨의 승낙을 맡아오라 했더니 저녁에 씨(氏)의 쾌락을 맡아왔음으로 즉시 출연을 허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