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역
- 감독
- 주연평
- 제작년도
- 1990
- 출연
- 유덕화, 가준웅, 왕정형
경성고등연예관은 태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흥행사 가네하라 긴조(金原金藏)가 황금정 제63통 7호에 세운 조선 최초의 활동사진전용관으로 1910년 2월 18일 개관했다. 《국민신보》에 게재된 광고를 보면 경성고등연예관은 1909년 10월 영업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하면서 다음해인 1910년 2월까지 개관이 연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성고등연예관이 처음 자리한 ‘황금정 제63통 7호’는 원래 남부(南部) 조동(棗洞), 즉 대추나무골이라 불리던 곳이다. 경성고등연예관은 여기 농상공부(農商工部) 건너편, 지금의 기업은행 본점 자리에 세워졌다가 1911년 9월, 맞은편인 황금정 3번지로 신축 이전했다. 현재 모 증권회사빌딩이 자리한 곳이다. 그러나 1912년 6월 황금정 도로 확장으로 건물의 일부가 헐리게 되자 영업을 중단, 개축하여 1912년 9월 16일 영업을 재개한다. 경성고등연예관의 설립자 가네하라 긴조는 태국에서 와타나베 토모요리(渡邊智賴)라는 사람 밑에서 활동사진업을 했는데, 조선에 건너와 경성고등연예관을 세우고 와타나베가 운영하던 ‘K다이아몬드’ 회사 배급작을 들여와 상영했다. 와타나베는 태국의 초기 영화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로 태국에 일본식 흥행 문화가 정착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와타나베나 가네하라처럼 태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눈을 돌린 배경에는, 태국에서의 흥행 경험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던 조선의 활동사진 흥행업 진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다. 개관 직후 경성고등연예관의 프로그램은 다양한 장르의 단편영화들이 주를 이루었으며 그 사이사이 간단한 무용 등의 여흥이 곁들여졌다. 이 프로그램은 영화의 길이가 길어지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프로그램의 교체 주기는 시기마다 차이가 있는데, 개관 이후 1910년 5월까지는 월 2회(매월 1일, 15일) 교체되었고 6월부터는 월 3회(매월 1일, 11일, 21일) 교체됐다. 1912년 3월 1일부터 1913년 3월 말까지는 다시 월 2회(매월 1일, 15일)가 되었으나, 경쟁 영화관들이 1주일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체하기 시작하자 1913년 4월부터 폐관되는 9월까지는 일주일마다 프로그램을 바꿨다. [자료] 경성고등연예관 개관 광고(《황성신문》, 1910.02.18) 앞서 언급했듯이 경성고등연예관에서 상영한 필름은 태국의 영화회사 K다이아몬드가 배급한 것이었다. K다이아몬드는 1910년 쭐랄롱꼰 국왕의 장례식을 기록하는 등 태국의 왕실 행사를 담은 실사영화를 여러 편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를 따라 경성고등연예관 또한 조직을 정비하고 환등 및 활동사진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11년 8월 경성고등연예관의 신축 이전을 앞두고 조선에 건너온 가네하라는 활동사진 제작과 상영을 위해 가네하라상회를 신설, 산하에 연예부, 사진부, 판매부를 두었다. 연예부에서는 경성고등연예관과 활동사진순업대를 운영하고 사진부에서는 환등과 활동사진을 제작하며 판매부에서는 활동사진 필름이나 환등 기계 등 다양한 물품들을 판매하겠다는 것이었다. 이후 경성고등연예관에서는 1912년 9월 16일 재개관을 맞아 촬영부를 개설하고 본격적으로 환등과 활동사진 제작에 나선다. 더 나아가 1913년 2월에는 여흥을 강화하기 위해 기존의 전기응용 방식을 대신할 키네오라마(キネオラマ)를 설치했다. 키네오라마는 일출(日出), 석립(夕立, 소나기), 석효(夕燒, 저녁노을), 명월(明月) 등의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치였다. 1913년 전후로 대정관을 위시하여 우미관, 황금관 등 세 곳의 활동사진 상설관이 등장하자 경성고등연예관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이에 1913년 4월 1일을 기해 경성고등연예관은 대대적인 혁신을 선언한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구(新舊) 일본극을 더하여 매주 프로그램을 바꾼다. 둘째, 입장료를 저렴하게 개정한다. 셋째, 도쿄에서 변사 후지모토 류코(藤本龍光)를 초빙하여 다나카 아사히유(田中旭湯)와 함께 활동사진 설명을 맡겨 변사 진용을 강화한다. 다섯째, 관객의 대우를 한층 새롭게 한다. 이러한 조치는 조선인과 일본인 관객을 모두 유인하려던 기존의 전략을 포기, 일본인 전용관으로 바꾸겠다는 뜻을 공표하는 것이었다. 일본인 전용관으로 전환하며 대대적인 혁신을 시도했음에도 경성고등연예관은 치열한 상설관 사이의 경쟁에서 도태되었고, 결국 1913년 9월 1일 경영난을 이유로 폐업을 선언한다. 경성고등연예관의 건물과 흥행권은 대정관을 운영하던 닛타 고이치(新田耕市)에게 매각되었으며, 이후 경성고등연예관은 제2대정관이라 이름이 바뀌어 1913년 10월 31일부터 운영을 재개했다. 제2대정관 개관 광고에는 주임 변사 이마이 요시카(今井芳香), 차석 변사 와타나베 마쓰카제(渡邊松風)라 기록되었다. [자료] 제2대정관 개관 광고(≪조선신문≫, 1913.10.30) 제2대정관이 개관하면서 경성의 일본인 상설관은 제1대정관(대정관), 제2대정관, 황금관 세 곳이 된 반면 아직 조선인 상설관은 우미관 한 곳뿐이었다. 닛타 고이치는 대정관, 제2대정관, 황금관 3개관이 6~7만 명에 불과한 경성의 일본인 관객들을 나누는 것보다는, 하야가와연예부의 필름을 제공받아 20만 명의 조선인 관객을 독점하던 우미관을 견제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제2대정관을 조선인상설관으로 전환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1914년 6월, 제2대정관의 유일한 조선인 변사였던 김덕경(金悳經)을 변사장에 임명하고, 설명 주임 이병조(李丙祚), 차석 최병룡(崔炳龍) 등의 변사진을 꾸려 조선인 활동사진관으로 전환한다. 당시 제2대정관에서는 일본인 상설관에서 상영하던 방식대로 여러 명의 변사들이 출연하여 마치 오늘날의 성우와 같이 각자 주어진 배역을 맡아 스크린 속 배우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그뿐 아니라 여변사 강경옥(康鏡玉)과 소년변사 이병호(李丙浩)를 두어 여자 배역과 아이역의 연기를 담당하게 했다. 이처럼 영화 속 어떤 배역의 목소리를 도맡아 연기하는 변사를 연극변사 혹은 성색(聲色)변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하던 조선인 상설관은 활동사진의 배경을 설명해주거나 타이틀을 읽어주는 역할의 소위 설명변사가 독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제2대정관의 연극변사 제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 듯 보인다. 제2대정관을 조선인 상설관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려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닛타연예부는 대정관의 경쟁 상대인 황금관을 견제하기로 전략을 바꾼다. 황금관을 운영하던 하야가와연예부로부터 필름을 제공받던 우미관을 공략하여 하야가와연예부 대신 제2대정관의 필름을 함께 사용하는 동시에 제2대정관을 일본인 전용관으로 되돌리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1915년 4월 제2대정관은 조선인 상설관에서 다시 일본인 상설관으로 전환되어 세계관(世界館)이라고 이름까지 바꾼다. 특약에 따라 제2대정관을 운영하던 닛다연예부는 우미관으로부터 매달 2백원의 보상금을 받기로 했으며, 우미관은 세계관과 같은 필름을 매월 5백 원의 싼 가격으로 공급받아 사용하기로 했다. 이로써 닛다연예부에서 운영하던 세계관은 경성 서쪽의 일본인들을 주요한 관객으로 삼을 수 있었고, 닛다연예부의 필름을 공급받는 우미관은 경성의 20만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유일한 조선인 상설관이라는 지위를 다시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인 전용관으로 바뀐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관은 폐관한다. 1915년 9월 20일 본정 한복판에 유락관(有樂館)이 들어서면서 활동사진 흥행 권리를 유락관에 넘기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경성고등연예관을 시작으로 제2대정관, 세계관으로 이어진 영화관의 역사가 사라지고 그 권리만 유락관으로 옮겨갔다. 경성 최초의 활동사진 상설관은 훗날 영화관과 상관없는 건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더 이상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참고문헌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99~134쪽. [사진](상단). 경성고등연예관 외관(《국민신보(國民新報)》, 1909년 10월 5일자.) [자료] 《황성신문》, 1910.02.20. 世界 苐一 活動冩真 開館 ● 本舘新築落成 에 就 야 二月 十八日(陰曆 正月 九日) 로 開館 ● 二月 二十日(陰曆 正月 十一日 午后 六時 브터 年中無休 로 一般 顧客 의 觀覽 에 供 ● 本館 의 寫眞 은 佛國 파데 會社 의 最新 器機 를 使用 고 每週 輸入 世界 各國 의 最 히 壯觀 에 極 山水 의 風景、人事 의 現象 은 勿論、滑稽、奇術 及 世界 有名 의 諸般 珍事 를 映寫 야 一般 活動寫眞界 에셔 斷 히 企及 키 能 치 못 것을 明言 ● 本館 은 寫眞 의 外 에 日本 美人 의 花 와 如 電氣踊 을 間間 히 行 고 且 韓國 妓生 의 舞踏 를 加 야 錦上添花 의 觀覽 이 有 ● 本舘 의 建築 宏壯 은 內部 의 完全、 장 篩 의 美麗、待遇 의 懇篤、衛生 設備 의 整然 이 模範的 演藝舘 이 될 것을 一般 에게 誇張 ● 本館 의 擔任 技師 靑森縣人 中村初太郞 이니 活動寫眞業 의 本邦 創業 以來 로 吉澤商店 及 파데 會社 에 技師 兼 敎授 의 任 에 在 야 精巧 老鍊 의 技術 이 有 야 斯界 의 錚錚 의 評 이 有 바 其 映寫 의 巧妙 本館 의 壯談 바요 ● 高尙 고 優美 活動寫眞 은 敎育 又 家庭 의 一時 娛樂 이 此 에 優 것이 無 니 開舘 後 陸續 御來覽 심을 深 히 希望 入場料 四等 金拾錢 三等 金貳拾錢 二等 金參拾錢 一等 金伍拾錢 特等 金一圓 每日 午後 六時 開舘 但 五人 以上 組合 觀覽者 에게 一割引 十人 은 二割引 京城黃金町(農商工部通) (南部東洞) 京城高等演藝舘 [자료] 《황성신문》, 1910.04.10. ● 銀甁 下賜 大皇帝 陛下 게 셔 去七日 에 高等演藝館 에 活動寫眞 을 招入 御覽 심은 已報 어니와 該 館主 日本人 宮田伊助 에게 銀製 花甁 一個 를 下賜 셧다더라 [자료] 《매일신보》, 1911.08.11. ● 金原商會 의 新設 目下 黃金町 三番地 에 新築 落成 은 九月頃 인 故 로 卽時 開業 다 向者 에 館主 金原 氏 가 來鮮 야 營業 의 方針 을 變更 고 京城高等演藝館 은 仝會 의 演藝部 가 되야 今後 에 大改良 을 加 고 昔年 東京 에셔 郵便局長 으로 勤務 던 成淸 氏 를 招 야 演藝部 로 敎育的 活動寫眞 으로써 全道 에 巡業 케 며 又 寫眞部長 에 工山 氏 招聘 며 又 東京 三越吳服店 의 寫眞部 에 在 야 技術 이 卓越 大庭 氏 超 야 一般 寫眞 의 撮形 은 勿論 고 活動畵 及 幻灯 도 製作 케 며 販賣部 活動寫眞畵 及 幻燈器械 外 에 日鮮人 의 實用品 도 薄利 로써 販賣 다더라 [자료] 《매일신보》, 1914.06.03. ● 第二大正館 新面目 ▲ 구리 뎨이대졍관에셔 ▲ ▲ 슌젼 죠션인을 위 활동 ▲ 이왕 , 구리개 고등연예관을 , 뎨일대졍관에셔 사드린 후 , 일홈을 뎨이대졍관 ( 第二大正館 ) 으로 곳치고 , 활동사진을 영샤 즁이더니 , 시셰의 요구를 응 여 , 오 날 지 , 디인의 경영으로 , 디인 변 ( 辯士 ) 지 두고 , 뎐업 던 것을 , 일톄 페지 고 , 죠션사 으로 야곰 , 사진 셜명을 계 야 , 죠션인 젼문 ( 專門 ) 으로 뎡 고 , 참신 긔발 , 셰게 인졍 풍속 등 , 여러 가지 사진을 가져다가 , 오 밤부터 , 시작 다 오 밤부터 흘 동안은 , 입장료 ( 入場料 ) 를 특별히 감 야 , 웃층은 평균 십젼으로 , 아 층은 , 평균 오젼으로 다 며 , 젼덕경 ( 全德經 ) 최병룡 ( 崔炳龍 ) 두 변 의 류챵 쾌활 설명이 , 잇슬 터이라더라 .
한국영화사상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배우를 꼽는다면 단연 < 월하의 맹세 >(1923)의 이월화 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출생지는 물론 부모가 누군지, 성조차 모른 채 젖어머니 손에서 자라나 배우가 됐으나 기생 노릇을 하다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댄서생활을 하던 끝에 심장마비로 죽은 그 일생 자체가 꾸며낸 한 편의 비극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석금성 (石金星)도 이에 못지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출생 신분이 분명하고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다고는 하나 성인이 된 후 겪은 세상살이는 참으로 모진 것이었다. 일찍이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피붙이와 헤어지고, 가까이 있는 자식과도 거리를 두고 살아야 했던 그녀의 삶은 이월화보다 더 비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인이 되기 40일 전의 얘기 내가 석금성 여사를 마지막으로 뵌 것은 작고하기 40일 전이었다. MBC가 제작하는 TV다큐멘터리 촬영을 끝내고 그가 묵던 남영동 한 여관 부근에 있는 다방에서였다. 많은 얘기 끝에 여사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신상에 대해 털어놓았다. “해방 후 생활이 어려워 옷가지 등을 동두천에 나가 쌀과 바꿔다 끼니를 잇곤 했지. 하루는 황철 (黃徹, 월북배우)에게 자식들을 먹이고 공부시킬 자신이 없으니 남편이 있는 북으로 데려가달라고 부탁했어. 그래서 4남매 모두 월북하게 된 거야.” 그런데 1991년부터 북으로 간 자녀와 연락이 닿았다고 한다. 일본을 통한 간접적인 소식이었다. 18세 때 ‘샘물터에서’라는 노랫말로 재능을 인정받은 막내딸 최로사(崔露砂, 당시 65세가 량)는 손꼽히는 시인으로 성장했고, 막내아들 호섭(57세 가량)은 고모 최승희의 영향을 받아 안무가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동안 ‘말 못할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들고 있던 북한 화보잡지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막내딸의 근황을 알리는 글과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의 처지를 이해한 국가안전기획부의 묵인 아래 일본을 통해 전달받은 것이라고 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한숨을 길게 내쉬던 그녀는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죽기 전에 자식들의 모습을 보는 일이라고 했다. 순간 여사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녀는 얼른 손에 든 담배 연기가 매워서 그렇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녀는 하루 세 갑의 담배를 피우는 애연가였다. 1991년 북으로 간 자녀로부터 연락이 닿기 전까지만 해도 여사에게는 아들 이택균 (李澤均)과 며느리 강숙희 (姜淑姬)가 있었다. 그들은 1950년대부터 활약한 부부배우였다. 이택균은 원래 화가 지망생이었으나 1949년 안진상 감독의 <육탄 십이용사>의 단역인 성사 역으로 캐스팅되면서 영화계에 나왔다. 이후 < 낙동강 >(1952), < 최후의 유혹 >(1953), < 미망인 >(1955), < 교차로 >(1956) 등 주로 멜로드라마에서 주연 및 조연을 했고, < 처와 애인 >(1957) 때는 아내와 주연을 나눠 맡았다. 여사는 그들에 대해 묻자 뜻밖에도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 지 소식이 없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며느리에 대해서는 남 얘기하듯이 “1950년대 중반에 할리우드에서 왔다는 배우가 있었다.”고 전제하고 “ 윤인자 를 만났더니 그애는 택시를 타도 건방지게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하더군. 하루는 나일구다방(명동)에서 약속하고 이병일 감독하고 기다리는데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났어요. 하도 고까와서 ‘선배 앞에서 웬 검은 안경이냐’고 야단을 쳤지. 그때는 택균이와 연애하는 줄도 몰랐거든.” 이렇게 들려주었다. 그의 직선적인 성품이 잘 드러난 자리였다. 두 번의 혼인과 남북으로 갈린 혈육 1907년 12월 3일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석금성 의 본명은 정의(丁義)였다. 일찍이 서울의 진명여학교를 다니다가 극단 토월회와 인연이 닿으면서 1925년 연극계에 투신했다. 이 무렵 충청도 갑부 이충직과 결혼, 1926년 장남 이택균 (李澤畇)을 얻게 된다. 그러나 3년 만에 남편과 헤어지고 1929년 김영환 감독의 < 약혼 >으로 영화에 첫발을 디디게 된다. 잇따라 김상진 감독의 < 종소리 >(1929)에 출연했으나 기대만큼 빛을 보지 못했다. 그 뒤 프로문학운동에 가담한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崔承一)과 가정을 이루고 슬하에 2남2녀를 둔다. 그녀는 연극 무대에 서다가 잊을 만하면 영화에 얼굴을 내미는 식으로 193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심청>(안석영, 1937)의 단역 장승상 부인과 내선일체를 강조한 친일 어용영화 < 너와 나 >( 허영 , 1941)에 주인공 나카다 겐지로(永田絃次郞, 한국명 김영길)의 어머니역을 맡는다. 이때 처음 창씨 개명한 이름 가야마 사다코(桂山貞子)를 사용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를 보낸 마감한 석금성 은 광복 후 < 마음의 고향 >(1949)을 비롯해 < 춘향전 >(1955), < 장화홍련전 >(1956), < 그 여자의 일생 >(1957), < 마도의 향불 > < 자유결혼 >(1958), < 청춘극장 >(1959), < 장희빈 >(1961), < 성난 코스모스 >(1963), < 치마바위 >(1964) 등 150여 편을 통해 퇴기나 악독한 계모, 독부, 작부, 주모 등 주로 성격이 강한 캐릭터를 소화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더욱이 < 화촉신방 >(1966) 이후 스크린과 멀어진 상태에서 거의 16년 만인 76세의 나이에 정진우 감독의 <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1982)로 컴백, 흑산도의 악덕 주모역할을 맡아 제3회 영화평론가협회상 특별상을 받는 관록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뒤 8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분례기>(1992, SBS),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1993, SBS) 등 TV 드라마에 출연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신극의 모태인 토월회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말년에도 늘 짙은 마스카라, 매니큐어와 루즈가 선명한 화장을 즐겼던 석금성 여사는 화려했던 한때의 각광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아흔 살을 눈앞에 둔 1995년 9월 3일 오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 홀로’ 남영동 여관과 광명시에서 홀로 어렵게 살다가 눈이 펑펑 내리는 산골 간이역 대합실에서 교도소에 간 아들을 기다리는 자신의 출연 TV드라마 <사평역(沙平驛)>(1981)의 노모처럼 북에 있는 혈육을 보지 못한 채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영화를 만들고 있지 않은 시간이 꽤 되었고, 요즘 뭐하고 사냐는 질문을 받는 빈도도 그만큼 늘어가던 차에, 그럴 때마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 조금씩 준비하고 있다’는 뭔가 숨기고 있는 듯 애매한 대답을 하기에도 지겹고 한심스러워서, 친구들 몇 명과 일주일 정도 매일 만나 한 시간 조금 넘는 분량의 영화를 한 편 만들었다. 편집은 벌써 끝났지만, 전부터 이런저런 부침을 겪으며 느릿느릿 진행되던 두 번째 장편영화의 준비에 들어가느라 후반 작업에 손도 대지 못한지 어느덧 반년. 그렇지만 조만간 어떻게든 마무리될 거라고 본다. 주연을 맡았던 남자배우가 하반기에 입대할 예정이라 그 전에 후시녹음 분량을 끝내야 하고, 무엇보다 이번 영화엔 그의 대사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보다 진짜 문제라면, 또 다른 주인공인 미국 아틀란타 조지아 출신의 여자배우가 내게 전화 한 통 없이, ‘아빠가 화를 내며 빨리 집에 돌아오라고 소리쳤다’는 페이스북 메시지 한 줄 달랑 남기고 이역만리 고향 아틀란타 조지아로 떠나버렸다는 사실이겠지만, 이것 역시 며칠 책상에 엎드려서 고민하다 보면 해결방안이 떠오를 것이다. 떠오르겠지? 떠올라야 한다. 꼭. 그러니까 당시엔 통장에 잔고도 좀 있겠다, 맘 잡고 새 프로젝트에 들어가기 전에 가벼운 단편영화 하나 찍어볼 생각으로 촬영감독 친구에게 카메라 들고 일주일쯤 지방에 놀러 갔다 오자고 꾀었던 것이다. 몇 년 전 영화학교 입학할 때 심사받으려고 만들었던, 귀엽지만 저질스러운 만듦새의 포트폴리오를 다시 만들어볼 작정이었고, 그즈음 지역 영상미디어센터에서 제작지원도 알차게 받아서 결국 6회차에 모든 촬영을 마무리했다. 이제껏 어둡고 기이하면서, 소수의 관객들에게 변태적으로 아부하는 영화만 주로 찍어오다가 이처럼 가볍고 발랄한 필-굿-로맨틱코미디를 만들고 있자니, 아침에 촬영현장에 가는 일도 예전만큼 괴롭거나 죽을 맛이 들지 않아서 좋았고, 게다가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비교적 수월하고 별다른 스트레스 없이 진행되는 과정을 거의 최초로 경험하다 보니, 앞으로 영화 작업을 계속할지 말지 진지하게 재고해봐야겠다는 지난 과거의 결심이 충동적이었을 거라는 의심도 해보게 되었다. 후반 작업을 제대로 끝내놓고 할 소리겠지만, 앞에서 언급한 이유들만으로도 이번 영화는 무척이나 좋은 경험이었고 만족스런 작업이었다고 자평해본다. 영화의 재미가 이와 비례할지는 모르겠지만... 아이 돈 케어. 사실상 이렇게 좋은 기분의 영화 만들기 놀이를 내게 선사해준 사람들은, 다름 아닌 지난 2년간 지역 영상미디어센터에서 나와 영화제작 워크숍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다. 새 영화작업이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아서 의기소침했던 지난 시간 동안, 하루 평균 너 댓 시간씩 산책이나 하고 자전거만 타고 다녔던 나에게, 그들은 거의 유일하게 뭔가 유의미한 재미를 주고 있다고 느끼게 해준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 나로 하여금 이번 영화 작업을 충동적으로나마 하게 만든 자극을 주어서 결국엔 만족스러운 자평의 시간을 가지게 한, 직접적인 동기를 준 한 친구와 그(여자감독이지만 편의상 ‘그’로 호칭한다)의 영화를 소개하려 한다. 워크숍 당시에는 그의 시나리오가 수강생들의 투표로 결정되는 수료작으로 선정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시나리오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 얼마 후에 있을 다양성영화제작지원 공모를 통해서 꼭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입에 발린 소리를 진심으로 떠들어댔다. 감독은 미대를 갓 졸업하고 개인작업실에서 디자인 작업을 하던 예쁘장하고 털털한 성격의 친구였는데, 영화연출도 그 작업의 맥락으로 조금씩 소박하게 해보던 차였다. 물론 그에게도 이번 영화는 지역 영화제작 워크숍 대부분의 수강생들처럼 거의 처음 써보는 시나리오였고, 연출도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예술적인 호기심이 남다른 친구였기에 이후 제작지원 공모에 선정이 된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고, 결국 한여름 땡볕에 미친 듯이 땀 흘리고 변덕스런 장맛비를 한숨과 함께 통과하면서 마침내 한 편의 영화를 무사히 찍어냈다. 그 과정에 나의 시어머니스러운 잔소리가 끼친, 좋거나 나쁜 영향도 분명히 있었겠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막 남자친구와 헤어진 듯한 여자가 있다. 매일 아침, 소주병과 라면 냄비가 머리맡에 굴러다니는 걸 보면 후유증이 좀 심각한 것 같고. 그날 아침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술 냄새 푹푹 풍기면서 현관 마당 앞 고추 모종에 비몽사몽 물을 주고 있는데, 아, 글쎄, 간밤에 누가 고추 모종을 후벼 파서 훔쳐갔지 뭔가. 어머! 충격을 받은 여자는 책상 앞에 앉아서 그 볼품없는 고추 모종을 굳이 훔쳐갔을 만한 사람들의 리스트를 기필코 짜기 시작한다. 그 중엔 옆집에 살면서 시도 때도 없이 자기를 귀찮게 하는 복학생 선배도 있고, 파지 주워가면서 이것저것 참견하는 재미로 사시는 듯한 할머니도 있고, 길고양이에 집착하며 돌아다니는 꼬마도 있고... 마치 소녀 탐정 낸시 드류처럼 사라진 고추 모종을 찾기 위해 용의자들을 추적하면서 하루 내내 동네를 샅샅이 뒤지고 다닌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그래서 결국 고추를 찾는지 못 찾는지는 스포일러라 말 못하겠지만, 도난당한 고추 모종을 찾으러 다닌다는 이 귀엽고 소박한 추리극의 플롯 뒤에는 이 영화의 고통스런 진짜 이야기가 숨어있다. 내가 짐작하는 이 영화의 진짜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고추 모종을 버리려고 애쓰는 여자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은 ‘도대체 고추 모종 따위가 뭔데?’라고 묻겠지? 여기서 힌트는, 그것이 열심히 잘 키워보자고 옛 남자친구와 같이 손 붙잡고 사러 갔던 고추 모종이었다는 거다. 근래 이 친구 또래의 연출자들이 만들어 영화제에 주로 내놓는 단편영화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렇게 소박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는 깜짝 놀랄 만큼 밋밋하거나 아니면 아예 독창적일 정도로 느껴진다. 어떤 놀라운 테크닉이나 도발적인 테마, 자신감 넘치는 연출로 주목받으려는 시도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여서 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데, 여기에서 내 의견 따위를 말하자면, 차라리 그런 시크한 태도야말로 진짜로 주목받아야 마땅한 자세라고 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렇게 소박하고 사소해 보이는 소재에 그윽하게 심어놓는 인간적인 감정들이야말로 제대로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으며, 그래서 나는 그 영화에 ‘유기농 청춘 로맨스’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었다. 요즘의 내겐 이런 태도의 영화야말로 감독이 누군지 궁금하게 만들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을 느끼게 만들며 그래서 결국 영화 또한 뭔가 고유한 말을 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난 아직 그 영화의 완성본을 못 본 상황이라서 그의 영화가 ‘고유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뚜렷한 영화적 장점이 있다고 당장 말할 순 없다. 들리는 이야기론, 생각했던 것보다 영화제 초청실적이 저조하다고 하니 시나리오의 좋은 부분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잘 옮겨지진 않았거나, 그저 밋밋하고 사소하기만 할 뿐인 이야기로 보였을 수도 있겠지. 그래,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친구가 실망하지 않았으면 한다. 트릭이나 가식 없이 사람과 세상을 보는 그만의 소박하고 털털한 자세는 어디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다. 다만, 거기서 좀 더 그윽해지길, 그래서 그 사소해 보이는 세계 속에 진짜 이야기를 지금보다 좀 더 그윽하게 숨겨놓을 수 있게 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질 기회도 그만큼 다양하게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물론, 이건 내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거울 들여다보면서 ‘나는 네가 누구 충고 부터하기 전에 자기 앞가림이나 잘했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이면서 할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자전거 타는 시간 좀 줄이고 자주 영화 만들려고 한다.